자격조차 없는 믿음의 계보

 

 2년이 지나도 세월호 사고의 여파는 아직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300명 넘는 생명들을 바다에 수장시키고 그들의 교주 유병언을 피신시키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구원파의 교리는 “죄사함의 비밀”과 “의인됨”입니다. 구원파 박옥수 목사가 즐겨 하는 단골메뉴 설교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예수님께 세상죄를 지우는 안수를 하였고 그 죄를 지시고 주님은 3년 동안 돌아다니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누구든지 이것을 깨달으면 의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오른손의 죄가 왼손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면 오른손에는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 보세요. 여러분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는 죄가 남아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렇지요. 죄가 넘어갔다면 죄가 없지요. 이것을 믿으면 죄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 없는 사람은 무엇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믿음의 코드만 꽂으면 자신의 모든 죄가 예수님에게 넘어가고 자신은 의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설교는 특히 구원의 확신이 없는 연약한 기성교회 교인들에게 잘 먹혀 들어갑니다. 이 비밀을 깨닫기만 하면 의인이 된다니, 그것이 죄사함의 비밀이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충격이며 감격이겠습니까? 구원파들이 기성교인들을 공략할 때 잘 써먹는 말이 있습니다. “구원 받으셨습니까?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는 질문들입니다. 그 질문들 앞에 믿음이 연약하고 구원의 확신이 없는 기성교회 교인들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요한의 세례가 인류의 죄를 예수님께 떠넘긴 안수식이었을까요? 그들의 “죄사함의 비밀이니 거듭남의 비밀”이란 요한의 세례를 "죄 넘기기 안수"로 바꾼 교묘한 말장난으로 만들어내는 착각과 모순의 교리입니다.

 그들은 “죄사함의 비밀”을 깨달아 “의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의인이 구원을 의미하는 동의어는 아닙니다. ‘죄사함의 비밀“을 깨달았다고 스스로 의인이 되고 스스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깨달았으니 나는 의인이 되었고 무조건 구원 받았다.“니, 자기가 무슨 심판자입니까? 그들이 말하는 ”깨달았으니 죄사함 받은 의인 되었고, 의인 되었으니 구원 받았다."는 것은 제멋대로 생각, “아전인수(我田引水)”입니다. 제맘대로 죄를 씻고 의인이 되면 무조건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야 한다면 하나님이 의인에게 복종이라도 하셔야 한다는 말인가요? 성경이 그렇게 말씀합디까? 설사 당신이 의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구원하고 말고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일입니다. 제가 뭘 깨달았다면서 하나님께 구원을 요구하다니,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무서운 죄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죄인이었던 자가 박옥수, 유병언이 설교 한 번 듣고 “죄사함의 비밀”을 깨달았다고 의인이라면서 하나님 앞에 나서서 얼굴을 쳐들고 구원을 마음대로 결정하다니, 구원파란 실로 뻔뻔스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 "죄사함의 비밀"을 모르고 의인이 되지 못 한 기성교회 교인들이 금수, 곧 짐승들입니다. 유병언이 죽었지만 지금도 구원파 교인들은 그들만의 이 믿음과 비밀을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구원파 교리가 어떻게 소위 똑똑한 사람들에게까지 먹혀드는지 어이가 없습니다.

 구원파 이야기가 좀 길었군요. 아무튼 구원,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 받는 자의 뜻과는 아무 상관없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창세 전에 택하시고 택하신 자를 부르시고 아들을 내어주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인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후손의 약속, 즉 그리스도의 약속을 하신 것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쪼갠 고기 사이를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로 지나신 것은 하나님이셨지 아브라함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뭔지도 모르고 그저 순종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영원히 변함없고 변개함 없는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람의 뜻이나 행위로 변경되거나 달라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자,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약속하셨으니 아브람과 사라가 할 수 있는 일은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고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전망이나 예상이 아닙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느껴지는 것, 예감조차 없는 깜깜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에게나 사래에게는 그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란땅을 떠날 때 65세였던 사래는 그 사이에 76세나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후손이 하늘의 별 같아지리라 하셨건만 할머니에게 후손이라니, 다 늙어빠진 두 사람에게 후손이란 그야말로 아무런 전망도 없고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 그런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지 못 한 사래는 자신의 몸종 애굽여자 하갈을 남편에게 주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자기가 나서서 무엇인가를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아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감히 전능하신 하나님을 돕기로 한 것입니다.

 당시 풍습으로 자신의 몸종을 남편에게 주어 후사를 잇도록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종은 주인의 소유이며 주인이 뜻대로 사용할 수 있고 종을 남편에게 주어서 낳는 자녀도 자신의 자녀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래는 '이것이 아무래도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하여 그렇게 한 것일 것입니다.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기로 한 사래의 아이디어, 그리고 이를 수락하는 아브람. 그들의 이러한 생각과 행동은 그러나 씻을 수 없는 아픔과 후환을 남기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루실 일을 자신들의 일로 끌어내리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갈이 잉태하면서 바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잉태함을 알자 주인인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자신의 조그만 공로나 우월함으로도 즉각 교만함이 드러나는 죄악 된 존재입니다. 화가 난 사래는 남편 아브람에게 따집니다.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사래의 말이 맞습니다. 사래의 잘못이 아닙니다. 잘못이라면 하나님과 아브람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자신의 여종을 남편에게 준 것뿐입니다. 아브람은 대답합니다.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여종과 짝지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부부는 한 몸입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한 몸이며 이들의 잘못 된 결정과 행동은 그들의 공동책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지 못 한 행동의 결과, 곧 죄의 열매인 것입니다. 아니, 결정적인 잘못은 한 몸 아닌 몸종을 통하여 하나님이 약속하신 후사를 얻겠다고 합방한 아브라함에게 있다 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믿음조차 없었고 계보로의 자격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계보를 통하여 마침내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믿기만 하면 의인이 되고 구원을 받는다고요?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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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성수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니 인터콥의 최바울씨처럼

아는 것이 병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 설교는 이미 성경을 뛰어넘는 자기설교일 뿐이라고 밖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웬만한 사람들이 들을 땐 신선하기도 하고

아. 그거였구나 무릎을 탁! 치는 성경풀이들이

주류를 이루는 설교들이다 ㆍㆍㆍ

마치 신천지를 처음 만났을 때 가르치는 비유풀이들이

사람들의 귀를 ㆍㆍㆍ놀랄만하게 만드는 것처럼ㆍㆍ^^ . .


평소 우리는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고만 읽어 왔는데

김목사는 아버지가 가방에 들어가셔서 쉬기도 하고

숨기도 하고 계속 기도도 하신다고

속시원하게 읽어주니 이 얼마나 신선한가!! ㆍㆍ^^ . ....ㆍ

참 어이없는 설교다ㆍㆍㆍ


김목사가 죽기 전엔 500명이던 교인 수가

고인예배가 있고부터는 700명으로 더 늘었다고 한다 ㆍㆍㆍㆍ참 어이없다.

앞으로 김목사는 서머나교의 교주로 승격될 가능성이 많다 ......^^


김목사는 서울대를 나왔다고 한다 머리가 좋을 것이다

그 머리좋다는 사람들이 주로 하는 것은

예수를 전혀 못믿거나 성경을 뛰어넘는 해석들을 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아는 게 병이다


내 경우 그의 설교는 마치 외국어를 듣는 기분이고

짜증이나서 도저히 들을 수가 없던데

그리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에 열광하고

인터넷을 통해 듣는 사람들이 그리 많다고 하니

어쩌면 기존의 교회들을 때리고 까부수는 것에 대한 희열 때문은 아닌지ㆍㆍ

참 암담하다 ㆍㆍㆍ^^
개혁한다고 앞으로 목사님들은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설교를 할 날도 머잖았다ㆍㆍ^^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글/ 채 님

진화론이 과학에 위배되는 이유들

진화론이 과학에 위배되는 이유들 (The Scientific Case Against Evolution)
By Henry M. Morris, Ph.D.

진화론에 대한 믿음은 놀라운 현상이다. 그것은 박테리아와 같은 단세포동물이 서서히 변하여 인간과 같은 고등동물이 된다고 가르치는 대진화에 대한 그 어떤 관찰가능한 과학적 증거도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에게 의하여 열열히 옹호되고 있는 믿음이다. 진화에 대한  증거가 없다고 고백한 가장 앞서가는 진화론자들의 최근의 언급을 인용함으로써 이러한 이상한 상황을 설명해 보려고 한다. 그들의 이러한 의도치 않은 언급들을 통하여 우리는 현재 그 어떤 진화가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과거에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진화는 현재 발생하고 있지 않다.

먼저, 그 누구도 진화가 일어나는 것을 관찰한 적이 없기 때문에, 진화의 사례는 단 한건도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만약 실제로 일어나는 과정이라면, 진화는 아직도 일어나고 있어야만 하며,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수많은 “전이적”형태가 존재해야만 한다. 물론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종류 내부에 많은 다양성을 가지고 있지만 명백하고 뚜렷이 건널 수 없는 장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서로 구별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동식물들 뿐이다. 예를 들면, 개 종류 안에 많은 다양성이 존재하고, 고양이 종류 안에 많은 다양성이 존재하지만, “개냥이” 혹은 “고양개”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다양성은 종종 소진화라고 불리며, 이러한 수평적인 (혹은 정보가 감소하는) 미세한 변화는 상당히 자주 일어나고 있지만, 이러한 변화는 단세포동물을 인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수직적” 진화를 일으킬 수 있지 않다.

진화론적 유전학자들은 종종 초파리 등을 대상으로 연구를 해 왔고, 새롭고 더 나은 종류를 만들기 위한 돌연변이를 일으키려 시도해 왔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해 왔다. 새로운 “기본적 종류”는 커녕 진정 새로운 종도 만들어진 적이 없다.

현대의 가장 앞서가는 진화론자인, 피츠버그 대학의 인류학 교수인 제프리 슈와츠는 최근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새로운 초파리 종에 관한 도브잔스키의 주장을 제외하면, 그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서도 새로운 종들이 형성되었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었고 아직도 그러하다.”
전통적으로 과학적 방법은 실험적 관찰과 반복을 요구해 왔다. (소진화와는 명백히 구분되는 (실제로는 정 반대의 메커니즘인)) 대진화가 단 한번도 관찰되지도 않았다고 하는 사실은 그것이 진정한 과학의 영역에 포함될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생존한 진화론자들의 학장이며 진화론이 “간단한 사실”이라고 주장해 온, 하버드대학의 생물학과 교수 어네스트 메이어조차 진화론은 “법칙과 실험”이 그것을 설명하는 데 적절하지 않은 “역사과학”이라고 하는 데 동의한다. 그 누구도 진화가 일어나는 것을 실제로 관찰할 수 없다.

진화는 과거에도 결코 일어난 적이 없다.

진화론자들은 종종 오늘날 우리가 그것을 관찰하기에는 진화가 너무나도 느리게 일어난다고 주장함으로써 위의 주장을 반박한다.  그들은 진화의 진짜 증거는 과거의 화석 기록에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수십억 점의 알려진 화석 기록 중에는 진화의 과정에 있는 전이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단 한점의 논란의 여지가 없는 중간단계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다윈의 말대로 진화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상태라면… 논리적으로 화석 기록에는 덜 진화된 것으로부터 더 진화된 것으로 변하고 있는 중간적 형태를 보여 주는 예들로 가득차 있어야 한다.

진화가 빠르게 일어난다고 믿는 사람들조차 하나의 뚜렷한 “종류”가 다른 복잡한 종류로 진화하는 것은 수많은 세대에 걸쳐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따라서 진정한 중간 단계적 구조들이 화석 기록에 남아 있어야 한다. 결국 수십억 점의 중간단계적이지 않은 구조들이 존재하지 않은가! 그러나 (깃털달린 공룡이라고 하는 것들, 혹은 걸어다니는 고래라고 하는 것들과 같은 몇몇 매우 의심스러운 생명체들을 제외하면)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위 잃어버린 고리로 화석 기록의 많은 간극들을 메우는 대신, 대부분의 고생물학자들은 화석 기록에 화석 종들 사이에 변화하고 있는 중간단계에 대한 그 어떤 증거도 없고 간극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생명이 암석과 같은 무생물로부터 진화하여 무척추동물이 척추동물로 진화했고 원숭이와 같은 생명으로부터 인간이 진화했다고 하는 진화의 전체 역사 가운데 중간단계는 놀랄 정도로 전무하다: 현재 중간단계적 생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화석 기록의 연결고리 역시 아직도 잃어버린 상태이다.

생명의 기원에 관하여는, 이 분야를 선도하는 과학자인 레슬리 오르겔은, 단백질이나 핵산이 상대가 이미 존재하지 않고 혼자 스스로 생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후, 다음과 같이 결론내렸다:
“얼핏 보면, 우리는 생명은 사실 화학적 방법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헌신된 진화론자로서, 그러한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 따라서 그는 RNA가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고 추측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인정해야만 했다:
“RNA 세상을 시작하게한 정확한 사건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연구자들은 많은 가설들을 제공해 왔지만, 각 가설들을 지지하는 증거들은 기껏해야 파편적일 뿐이다.”

이를 쉬운 말로 번역하자면: “생명이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알려진 방법은 없다.” 라고 하는 것이다. 불행히도, 두 세대에 걸쳐, 학생들은 혼합 가스에 관한 스탠리 밀러의 유명한 실험이 실질적으로 생명이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배워 왔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밀러는 모든 것을 유리관 안에 집어 넣었고, 전기 충격을 가한 후, 기다렸다. 그는 아미노산들과 다른 생명체에 필요한 복잡한 고분자화합물들이 그 장치 바닥에 축적되고 있는 것을 알아 냈다. 그의 발견은 생명의 기원에 관한 과학적 연구에 엄청난 진보를 가져 왔다. 실제로, 처음 얼마 동안은 시험관 안에서 생명체를 창조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불행히도, 이러한 실험들은 밀러의 원형 실험보다 그리 많이 발전되지는 못했고, 우리는 원시 국물의 쓴 맛을 보았을 뿐이다.

또한 원시 국물로부터 단세포 생물이 만들어 졌다 치더라도, 어떻게 그 단세포 생물이 캄브리아기라고 하는 시기의 복잡하고 다양한 다세포 무척추동물로 진화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그 어떤 단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진화론을 교리적으로 신봉하는 굴드마저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캄브리아기 대폭발은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놀랍고 수수께기와 같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수께끼는 어떻게 원시의 바다에서 “단단한 부분”이 몸 바깥쪽에 있는 무척추동물들이, 단단한 부분이 몸 안쪽에 있는 최초의 척추동물이라고 하는 물고기로 진화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비록 많은 이론들은 존재하지만, 무척추동물로부터 첫번째 척추동물로 진화하는 전이단계가 무엇이었는지는 미궁에 빠져있다.

다른 종류들 사이 역시 그 어떤 진정한 전이단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과학을 열렬히 비판하는 고생물학자인 나일스 엘드리지는 화석 기록에서 진화론적 전이단계에 대한 증거는가 거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생물들은 동일한 기본형태를 유지한다!
“실질적으로 모든 생명체들이 그 생존 기간 중, 작은 다양성은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안정된 형태를 유지한다고 하는 것은 단순하고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렇다면 진화론자들은 어떻게 그것들의 생존 기간중 변하지 않은 생명체들의 화석으로부터 진화론적 계통수를 만들 수 있었을까?

화석 발견들은 단순한 진화론적 계통수를 만들려고 하는 시도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 – 중요한 기간의 화석은 종종 중간단계가 아닌, 많은 다른 집단의 정의적 특징들이 뒤죽박죽 섞여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주요 집단들은 단순한 일직선, 혹은 점진적인 진화의 방식으로 조합되어 있지 않는 듯하다— 서로 다른 시간대의 서로 다른 집단들의 새로운 특징들은 종종 “잘라서 붙여 넣어진 (cut and pasted)”것처럼 발견된다.  

인류학자들이 수년간 그 중간단계를 찾으려 시도해 왔지만, 원숭이와 인간 사이의 중간단계에 관하여서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중간단계들이 제시되었지만, 그 각각은 순서대로 거부당해왔다.  고인류학자들이 지난 100년 이상동안 발굴한 우리 조상의 수는 2000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이 턱뼈와 이빨, 그리고 다른 뼛조각들과 현존하는 동물들로부터 나온 분자생물학적 증거들을 사용하여, 인간과 침팬지가 공통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다고 하는 약 5백만년에서 8백만년 정도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를 만들었다.

인류학자들은 매우 파편적인 화석적 증거들을 보충하기 위하여 현존하는 동물들로부터 나온 DNA와 다른 분자 유전학적 증거를 사용하여 그들의 진화론적 시나리오에 맞추려고 했다. 그러나 이 유전적 증거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화석적 증거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르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전체적 효과는 분자생물학적 계통학은 그것의 창시자들이 믿었던 것처럼 간단한 것이 전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유전체의 복잡한 역학은, 유전체의 각기 다른 부분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고 하는 것을 포함한, 분자생물학적 계통학에 대한 많은 다른 결과들을 바꾼다.”

다른 저자는 인간으로부터 나온 유전적 자료를 요약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관적으로 결론지었다:
“DNA 염기서열 자료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진화의 과정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은 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사라진 과거에 대한 객관적인 재구성은 단지 창조적 상상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을 뿐이다.”

진화가 현재 일어나고 있거나 과거에 일어난 적이 있다고 하는 진정한 과학적 증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진화는 많은 사람이 주장하는 것처럼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고 결론짓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실, 그것은 전혀 과학이 아니며, 우주적 자연주의를 믿는 믿음에 근거한 임의적 믿음체계이다.

실제로, 이러한 진화에 반대되는 부정적 증거들은, 동시에, 특별한 창조에 대한 강력한 증거들이다. 그러한 것들은 기원에 관한 창조모델을 받아들인다면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이다.

창조론자들은 창조된 종류 내에 멸종을 막고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많은 다양성은 존재하지만, 그 종류들 사이에 명백한 간극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창조론자들은 또한, 창조주가 최초에 만물을 온전히 창조하셨으므로, 그 어떠한 “수직적” 변화는 위쪽이 아닌 아랫쪽 (퇴화)을 향할 것을 기대한다. 따라서 진화에 반대되는 논리와 증거들은, 동시에 창조에 관한 긍정적인 증거들이 되는 것이다.

유전학에서 나온 애매한 증거

진화에 관한 직접적 증거의 부재로 말미암아, 진화론자들은 점점 더 생명체의 DNA와 다른 생화학적 요소들의 유사성과 같은 불확실한 정황적 증거들을 진화가 과학적 사실이라는 것의 “증명” 으로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많은 진화론자들은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DNA 그 자체가 진화의 증거라고 주장해 왔다. 더 자주 사용되는 논쟁은 서로 다른 두 생명체의 비슷한 DNA구조는 그것들이 공통 조상을 공유한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하는 것이다.

위의 논쟁들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창조주가 그의 모든 창조물들을 위하여 DNA에 기반한 같은 형태의 유전적 코드를 사용하실 수 없거나 그러지 않으실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진화의 증거가 아닌 지적인 디자인의 증거일 수 있는 것이다.

DNA유사성의 예로 가장 빈번히 사용되는 것은 인간과 침팬지의 DNA가 90퍼센트 이상 일치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침팬지의 많은 생화학적 유사성을 고려한다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인간과 거미 사이의 DNA차이에 비하여 더 유사한 DNA구조를 갖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DNA건, 해부학적 구조이건, 배아적 발달이건간에 유사성이라는 것은 진화론적 관계성 보다는 공통된 디자이너에 의한 창조라는 측면에서 더 잘 설명될 수 있다. 생명체 간의 더 커다란 차이점은 유사성보다 더 중대하며, 공통조상으로부터 서서히 진화했음을 가정하는 진화론은 이에 대한 설명을 전혀 할 수 없다. 서로 다른 종류 사이의 이러한 엄청난 간극이 어떻게 자연적 과정에 의해 생길 수 있었겠는가?

인간과 침팬지 DNA사이의 적은 차이점들은 명백히 그 해부학적 구조와 지성에 있어서 매우 커다란 차이를 만든다. 모든 원숭이들과 인간 사이의 표면적 유사성은 그 어떤 실재적 혹은 관찰적 차이점과 비교했을 때 매우 미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간단계가 존재해야 하는 곳은 어디에나 빈 공간만이 존재했기 때문에 진화론자들은 진화에 대한 증인으로서 화석 기록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환멸을 느꼈고, 최근에는 DNA와 다른 유전적 증거를 진화의 증거로서 홍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저 르윈이 위에서 언급했듯, 유전적 증거는 화석 기록과 불일치할 뿐 아니라 생명체 간의 비교형태학적인 면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르윈은 또한 보다 더 전통적인 다윈주의적 “증거들”과 비교했을 때, 이런 형태의 증거에 의해 도출되는 몇가지 전형적 모순에 대하여 언급한다.

전통적인 방식에 의하여 칙충동물로 분류된 코끼리 땃쥐는… 사실… 진짜 코끼리와 더 가까운 친척이다.  소는 소보다 돌고래에 더 가까운 친척이다. 오리너구리는…캥거루와 코알라와 동등한 진화론적 위치에 놓여 있다.

이러한 방식에 의하여 도출된 더 많은 이상한 비교들이 존재한다.
유전 암호에 “정크 DNA”라고 하는 것이 많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 역시 특별한 형태의 진화에 대한 증거로서 제시되었다. 특별히 그들이 돌연변이를 경험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종종 “유사유전자”라고 불려졌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불필요한 유전자라고 여겨지던 것들이 실재로는 유용한 기능을 수행한다고 한다고 하는 증거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과거에 쓰레기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명백하게 과학적 암호를 송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유전자들이 이미 유적자 더미에서 발견되었다.
따라서 “유사유전자”라고 불리기까지 한, 정크 DNA가 아무런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결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단지 무지에 대한 인정이며 생산적인 연구의 대상이다. 한때 진화의 증거로 여겨졌지만 모두 특정 기능을 하는 것을 알려진 소위 인간의 “흔적기관들”처럼 정크 DNA와 유사유전자 역시 그 사용처가 아직 과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그 생명체에게 필수적인 것이라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이러한 증거들은 기껏해야 정황적 증거일 뿐이고, 창조 모델에서 기대할 수 있는 대로, 최초의 완벽한 창조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악화된 것으로 동일하게 설명될 수 있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전에도 언급했지만, 진화가 현재 일어나고 있거나 과거에 일어났다고 하는 관찰 가능한 증거가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진화론자들조차 진화에 대한 이러한 형태의 진정한 과학적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인정한다.

좋은 질문은 이것이다: 왜 모든 관찰 가능한 진화론적 변화는 수평적이거나 사소한 종류 내의 다양성, 혹은 퇴화하거나 멸종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가? 그 대답은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열역학 제2법칙에서 발견할 수 있는 듯하다.

진화는 결코 발생할 수 없다.

현재 혹은 과거에 진화가 일어났다고 하는 그 어떤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 주요한 과학적 이유는 가장 근본적인 자연의 법칙들 중 하나가 그것을 불가능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열역학 제 2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증가하는 엔트로피에 관한 그 법칙은 실제 세상의 모든 계는 “비탈 아래로”, 말하자면, 해체 및 분열, 그리고 복잡성이 감소하는 쪽으로 향한다고 규정한다.

이 엔트로피의 법칙은, 아무리 따져 보아도, 자연에서 가장 잘 증명되었고 가장 보편적인 법칙들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물리학적 계와 화학적 계 뿐 아니라, 생물학적, 그리고 지질학적 계에도 – 사실 모든 계에게 예외없이 적용된다.

“열역학 제 2법칙의 예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단 한번도 발견된 적이 없다. 열역학 제 1법칙인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같이, 이렇게 정확하고 독립적인 모델의 세부사항의 존재는, 물질이 상호 작용하는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과 독립적인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위의 인용을 기록한 저자는 주로 물리학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는 열역학 제 2법칙이 “모델의 세부사항과 독립적”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한다. 게다가, 실질적으로 모든 진화론적 생물학자들은 환원론자들이다 – 그것은, 그들이 생물계에 “활력적”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고 하는 것이며, 모든 생물학적 과정들은 물리학과 화학적 용어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생물학적 과정들 역시 열역학 법칙들과 조화되게 작동해야만 하며, 실질적으로 모든 생물학자들은 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은 일반적으로 진화는 어쨋든 일어난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비록 모든 계의 자연적 경향은 해체되는 쪽으로 분해되는 것이지만,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오는 에너지가 지질학적 시대들을 통하여 진화를 지탱할 수 있는 “열린계”라는 것을 이해할 때 그 논쟁은 해결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한 진화론적 곤충학자가 W.A. 뎀스키의 훌륭한 새 책인 지적 설계를 비판할 때 사용한 논쟁이다. 이 과학자는, 그가 “열역학 제 2법칙에 근거한, 진화론에 대한 반박”의 “결점”이라고 부르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그가 “복잡성을 증가시키기 위한 자연과정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변호한다. 그렇다면 그 “결점”은 무엇일까?

“닫힌계의 전체 무질서도는 감소할 수 없지만, 더 큰 계 안에 있는 지역적인 질서도는 지적인 존재의 작용이 없더라도 증가할 수 있다.”    

이러한 엔트로피 법칙에 대한 순진한 답변은 진화론을 변명할 때 일반적이다. 만약 특정 조건이 갖추어 진다면, 열린 계에서 지역적 질서도가 증가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진실은 진화가 그러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오는 에너지에 열려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원래의 태양열이 열려 있건, 닫혀 있건, 특정 시스템에서 복잡성을 증가시킬 수 있도록 전환되는지에 대하여 그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열린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감소되는 엔트로피 (혹은 복잡성의 증가)는 어떤 가이드 프로그램 같은 것과,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에너지 전환 메커니즘을 필요로 한다.

진화는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돌연변이는 어떤 것을 “조직하는” 메커니즘이 아닌, (열역학 제 2법칙을 따르는) 붕괴시키는 것이다.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해롭고, 때때로 중립적이지만, (관찰된 돌연변이에 한해서는) 결코 이롭지 않다. (겸상 적혈구 빈혈 등과 같이 특수한 상황에서 이로울 수 있다고 주장되는 돌연변이들도 실제로는 존재하는 정보의 손실로 인한 것이다 (역자 주)). 자연선택은 결코 질서를 만들어 낼 수 없고, 단지 붕괴하는 돌연변이들을 “걸러낼 수” 있을 뿐이고, 따라서 이미 존재하는 질서를 보전할 뿐, 결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원칙적으로, 모든 계에서 사물이 곧 붕괴되는 성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화가 열린 계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 누구도 진화가 이러한 보편적인 성향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없었고, 이것이 기본적으로 왜 과거 혹은 현재에 진화가 일어났다고 하는 진정한 증거가 아직도 존재하지 않는가에 관한 이유이다.

따라서 진화론자들 자신의 언급으로부터, 우리는 진화에 관한 실질적인 과학적 증거가 존재하지 않음을 배웠다. 관찰 가능한 증거는 엄격한 경계 내에서의 매우 제한적인 수평적 (혹은 퇴보적) 변화일 뿐이다.

진화는 과학이 아닌 종교이다.

입자가 인간으로 진화했다는 생각은 과학 이론의 기준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과거의 화석 기록에서 이러한 진화론적 중간단계는 관찰된 적이 없다; 그리고 엔트로피의 보편적인 법칙은 진화를 불가능하게 한다.

진화론자들은 진화가 과학적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창조론적 과학자들과의 과학적 토론에서 거의 언제나 패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은 현재 과학적 논쟁의 기회를 거부하는 대신, 창조론자들에게 대한 일방적인 공격을 하기를 선호한다.

“공개 토론은 득보다 실이 많으므로, 과학자들은 그것을 거부해야만 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창조론자들의 메세지를 논박할 필요가 있다.”

질문은, 왜 그들이 창조론자들의 메세지를 논박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왜 그토록 단호하게 반-창조론에 헌신되어 있는가?

사실은 진화론자들은 진화를 믿기 원하기 때문에 진화를 믿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창조주 없이 만물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한 그들의 희망사항이다. 진화론은 따라서 본질적으로 무신론적 종교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인본주의라 부르기를 더 좋아하고, “뉴 에이지” 진화론자들은 그것을 범신론의 범주에 놓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다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무신론이건 인본주의이건 (혹은 범신론이건), 목적은 우주와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구성요소의 기원에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제거하는 것이다.

인본주의적 철학의 중심은 자연주의이다 – 자연적 세상이 신적인 혹은 초자연적인 조절이나 안내 없이 그 내부적 원동력에 의하여 나아가며, 우리 인간도 그 과정의 부산물이라는 제안. 인본주의적 운동 초기의 철학자들이 인본주의와 자연주의 중 어느 것이 그들의 입장을 더 잘 기술하는지에 대하여 논쟁했던 것을 기억하면 도움이 된다. 그 두개의 개념들은 상보적이며 서로 뗄 수 없다.

자연주의와 인본주의 모두 하나님을 과학이나 자연에서의 어떤 적극적인 기능, 혹은 생명과 우주의 유지 전반으로부터 하나님을 배제하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이 무신론이라는 것이 매우 명백하다. 그리고 무신론은, 유신론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종교이다! 심지어 교조적인 무신론자이자 진화론자인 리처드 도킨스 역시 무신론이 진실이라는 것은 증명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그것을 믿어야만 하고, 그것은 그 믿음을 종교가 되도록 한다.

진화론의 그러한 무신론적 본성은 진화론적 사고를 이끄는 사람 대부분이 인정할 뿐 아니라, 주장된다. 예를 들면, 언스트 마이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윈주의는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과 원인들을 거부한다.”

캔자스 주립대학의 한 생물학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자료들이 지적인 설계자가 존재해야 함을 가리킬지라도, 이러한 가설은 과학으로부터 배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주의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버드의 스티븐 제이 굴드와 에드워드 윌슨, 영국의 리처드 도킨스, 코넬의 윌리암 프로바인과 같은 영향력 있는 진화론자들, 그리고 다른 진화론의 대변인들이 독단적인 무신론자라고 하는 사실은 오늘날 과학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저명한 과학 철학자이자 열정적인 진화론적 무신론자인 마이클 루즈 역시 진화가 그들의 종교라고 하는 것을 인정했다!

“진화는 그 신봉자들에의해 진정한 과학 이상으로 격상되었다. 진화는 이데올로기, 의미와 도덕성을 지니고 있으며, 완전히 성장한, 기독교를 대체하는 세속적 종교로서 전파되었다… 진화는 종교이다. 이는 진화의 처음부터 사실이었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를 표현하는 또다른 단어는 “세계관”, 현실의 전반이다. 진화론적 세계관은 생명의 진화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전 우주에 적용된다. 우주적 진화의 영역에서, 자연주의적 과학자들은 소수만 이해하는 수학과 형이상학적 가정으로부터 다양한 진화론적 우주론을 생성해 냄으로써, 생명과학자들보다 훨씬 더 실험 과학과 멀어진다. 사회주의자인 제레미 리프킨은 이러한 놀라운 게임에 헌신되어 있다.

“우주론들은 사회에 의해 거대한 우주적 눈속임으로 리모델링 된 작은 물리적 현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증거에 부합하기 때문이 아닌, 모든 증거들과 배치됨에도 진화를 믿어야만 한다. 그리고, 눈속임에 관한 다음의 놀라운 언급을 보라.
“우리는 그 구성물 중 몇몇의 명백한 모순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편에 선다… 물질주의에 대한 입증되지 않은 헌신에 대한 과학계의 관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구를 하는 조직체와 물질적 설명을 생산하는 개념들을 만들기 위한 물질적 근원에 대한 선험적 지지에 이끌린다. 그것이 얼마나 비이성적이던, 일반인들에게 혼란스럽게 보이던 말이다. 무엇보다도 물질주의는 절대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의 발을 문 안에 들여 놓는 것을 허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솔직한 문장의 저자는 하버드 대학의 리차드 르완틴이다. 진화는 실험적 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의 타당성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따라서 온갖 가상의 이야기들이 부자연스럽게 교과서들을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진화를 진실로 만들 수는 없다! 최근 한 진화론자의 책을 검토한 다른 진화론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공통조상 혹은 “잃어버린 고리들”을 알아낼 수 없고 특정 진화이론을 설명할 수 있는 검증가능한 이론을 만들어낼 수 없다. 기는 어떻게 첫번째 양서류가 육지를 정복했는지, 어떻게 조류가 날기 위한 날개와 깃털을 만들었는지, 어떻게 공룡이 멸종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선입관과 편견에 의한 상상의 산물일 뿐이라고 단호히 주장한다.”

한 물리학자의 매력적이게 솔직한 고백은 기득권 과학자들의 자연주의에 대한 열정적 헌신을 잘 보여준다. 학생들이 높은 학식을 가진 교수들에게 보이는 신뢰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학생들의 신뢰를 그들을 세뇌시키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한다…우리의 교육 방식은 주로 그러한 선전이다. 우리는 무엇을 입증하는 대신, 우리의 입장을 지지하는 증거에 호소한다. 우리는 현재 받아들여진 이론들을 지지하는 증거와 논쟁만을 소개하고 반대적인 증거들은 생략하거나 얼버무리고 넘어간다.”

창조론을 믿는 학생들은 진화론자 교수가 가르치는 과학 강의에서 위의 언급의 안타까운 현실을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진화는 루즈가 지적하듯, 종교적 무신론에 기반한 유사과학이다. 코넬 대학의 윌 프로바인은 이것을 정직하게 인정한 또 다른 과학자이다.
“창조론자들이 주장하듯, 현대적 진화론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을 무신론자들로 만든다. 사람들이 가진 종교적 견해가 무신론과 동일한 것일 때에만, 그들의 믿음은 진화론과 일치할 수 있다.”

다시금, 우리는 진화론자들의 장황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진화가 과학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것은 철학적 세계관 이상일 뿐이다.
“그들은 진화가 모든것을 설명해야 한다고 느낀다…모든것을 설명하는 이론은 폐기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정한 설명적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진화에 관한 다른 것은 그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정할 수 있는 것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실험적 증거는 극히 드물다.”

위의 언급은 너무나도 너그럽다. 진정한 진화 (대진화)를 보여줄 수 있는 실제 실험적 증거는 “드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적 형태로서의 진화의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나의 책, 하나님과의 오래된 전쟁에서, 나는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진화라는 개념이 어떤 형태로던 모든 반-창조 종교의 배후에 존재해 온 거짓 논리라고 하는 것을 기록했다. 여기에는 모든 고대 민족의 종교들과, 불교, 힌두교 뿐 아니라, 창조론적 종교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 내의 “자유주의적” 운동들도 포함된다.

20세기의 앞서가는 진화론자는 일반적으로 근대적 신-다윈주의를 설계한 줄리안 헉슬리경이라 할 수 있다. 헉슬리는 진화를 “계시가 없는 종교”라고 불렀거, 그 제목의 책을 썼다. 그가 나중에 기록한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화는… 지구상에서 나온 생각들 중 가장 강력하고 포괄적인 것이다.”

그 책에서 그는 “하나님 중심에서 진화 중심의 종교적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고 열정적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 가설은…우리의 사고에 있어서 지적이고 도덕적인 부담이 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우리는 그것의 자리를 차지할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물론 그가 말하고 있는 무언가는 진화론적 인본주의라고 하는 종교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진화론적 인보주의 지도자들이 시도하는 것이다.

진화론이 과학에 위배되는 이유들에 대한 연구를 맺으며, 독자들은 다시금 교조적 진화론자들의 언급을 기억하기 바란다. 성경이나 창조론자들의 언급은 전혀 포함하지 않았다. 진화론자 자신들이 모든 면에서 진화론은 과학이 아닌 무신론에 대한 종교적 믿음이라는 것을 보인 것이다.

출처: USA 아멘넷 독자공간게시판/제자

[한국교회의 문제점 2 - 세속화 ]

성공과 번영이라는 현대판 ‘맘모니즘’에 종속된 값싼 복음을 양산하는 한국교회, 윤리적 부패와 퇴행이라는 부메랑을 맞아 바닥에서 허덕이고 있는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과연 무엇일까? 다음의 세 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첫째 성속(聖俗) 이원론, 둘째 세속화, 셋째 자아중심의 기독교 등이다. (지난 글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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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오늘날의 한국교회, 다시 말해서 현대 복음주의 교회의 문제점은 더 이상 성(聖)과 속(俗)을 구분하는 이원론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여전히 그러한 신앙의 경향을 한국교회의 일부분에서 발견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이제 현대 복음주의교회가 보여주는 세속화의 패러다임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이제는 더 이상 세상문화의 세속적인 삶을 멀리하려는 분리적이거나 현실도피적인 세계관이 작동하지 않는다. 물질적인 번영보다는 개인의 경건에 대한 강조, 이로 인한 현세에서의 고난과 결핍에 대한 보상을 내세의 천국에서 상급으로 보상받는다는 신앙은 사라진지 오래다.

성공과 번영을 강조하며 자아중심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현대 복음주의의 가치 전환은 이제 기독교 신앙을 저 천국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에서 누려야할 물질적인 형통과 행복으로 변모시켰다. 이원론적 신앙에서는 그나마 개인윤리적 모습이라도 찾아볼 수 있었지만 세속화된 신앙에서는 더 이상의 성경적인 윤리적 가치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세속화란 인간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이라는 초월적인 존재를 제거하고 인간 스스로 절대적 자율성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세속화는 하나님을 인간의 삶의 바깥 주변부로 내몰아서 매일의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개입하지 못하도록 밀어내는 성향이다.

<데이빗 웰스>는 하나님보다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고 자아도취와 효용성만을 추구하는 이러한 세속주의적 경향이 세상이란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교회와 그리스도인 역시 심각한 세속화의 과정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부정에서 비롯된 계몽주의는 계몽주의적 인간 이성에 대한 회의와 불신으로 이어지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어지고 현대 사회는 하나님의 부재, 다시 말해 철저하게 하나님과 무관한 방식으로 재구성되고 있다.”

현대 복음주의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마이클 호튼>의 평가는 더 심각하다. 그는 자아 중심적인 성향에서 현대 복음주의 교회는 세상보다 더 세속화되어 있다고 평가한다. 바야흐로 현대 복음주의 교회의 문제는 바로 세속주의, 초월적인 하나님을 제거한 세속화에 직면해 있는 상황이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교황은 무지한 것인가? 거짓말 하는 것인가?


2013년 프란시스 교황은 미사 중

2000년간의 기독교 교리에 반대되는 충격적인 얘기를 한다.


그것은 바로

"무신론자도 착한 삶을 살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신문에 따르면 카톨릭 신자들도

교리에 반하는 그 주장에 혼란을 느꼈다고 한다.


이는 분명히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성경에 반대되는 주장이다.
교황은 다시 한번 충격적인 발표를 하는데,

이는 빅뱅과 진화론이 성경과 상충되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신학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말이 안되는 어리석은 발언이

기독교와 전혀 다른 이슬람

 

 

성경과 전혀 다른 인물, 이슬람의 예수!

- 이만석 목사님 (Brad TV) -


20년간 아랍 현지에서 이슬람과 코란에 대해

깊이 있게 접하고 파악해 온 이만석 목사.

그가 돌아온 한국에 널리 퍼져있는 이슬람에 대한 인식들은

무관심 또는 그 실체와 거리가 멀기만 하다.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일 수 없는 이유와

코란에서 서로 상충하는 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취소교리'란 무엇인지,

그리고 이슬람에서 말하는 예수가

얼마나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지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여 봅니다.


이 모든 사실들로

무슬림들을 배척하거나 공격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깨어 영을 분별하며

그리스도의 빛을 온전히 비출 수 있도록...

펌글






 

 

 

 

오늘날 휴거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믿느냐 믿지 않느냐가 다를 뿐이다. 여기서 내가 휴거의 어원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모두 다 아는 사실이고 그것이 포인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꼭 하고 싶은 말은 그 속에 “황홀경”, “이동”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 중에 이 “끌어올림” “낚아채어감 (rapture)”을 믿는 자도 있고 믿지 않는 자도 있다. 그리고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휴거는 황홀경 속에 몸이 예수님 부활후의 몸과 같이 변화되어 구름속으로 끌려 올라가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믿는 사람인가? 신앙 생활한지 몇 년 이상 되었으면 휴거에 대해 들어 보았을 것으로 간주하고 싶다.

 

“나는 그 생각 안하고도 예수 잘 믿고 있는데...” 옳은 말씀이다. 3개의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휴거에 관해 공부해본 적이 거의 없다. 왜 그랬을까? 바로 같은 이유이다. 교수님이든 목사님이든 다들 관심이 없다. 모두 “우리 생전에 그런 일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휴거 얘기를 잘 안하는데, 어떻게 우리는 휴거에 관해 알고 있을까? 그것은 바로 1992년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던 00 선교회 덕분이다.

 

당시 한국 사회를 아주 시끄럽게 만든 사건을 모두 기억할 것이다. 사탄은 대한민국 성도들의 뜨거운 하늘 신앙을 깨뜨리고 성도들 마음속에서 휴거를 지우기 위해 이들을 사용 했다.

 

과연 그 계획은 성공했고 우리들의 하늘신앙은 땅의 신앙으로 바뀌었고 휴거는 아득한 미래에 혹 있을지도 모르는 전설적인 얘기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어떤 싸움에서든지 어느 정도 포인트를 상대방에 주지 않을 수는 없는 법. 우리는 하늘 신앙과 휴거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린 대신 휴거라는 것이 성경에 나오는 말씀(단어는 없더라도 의미의 말씀은)이라는 것을 모두 다 알게 되었다.

 

휴거에 관해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 17:34)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그대로 이루어질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좀 살펴야 할 것이 있다.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복음) 중에서도 누가복음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닌 이방인을 주 대상으로 써진 책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둘 다 예수님의 족보가 나온다. 마태복음은 제1장 1절에 족보가 나오는데 그 시작이 아브라함이다. 그리고 16절에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로 족보가 끝난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같은 내용의 족보(3장 23-38절까지)가 예수님과 요셉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담과 하나님까지 올라간다.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마태복음에서는 아브라함까지만 나오는 족보가 누가복음에서는 왜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가?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아브라함이 노아의 후손이고 아담의 후손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았다는 것을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나,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까지 알려주지 않으면 복음이 자기들과는 상관없는 유대인에게만 해당된다고 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마태복음 25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의 비유가 있다. 그런데 누가복음 19장에서 므나의 비유가 나온다. 실제 거의 동일한 내용이다. 그런데 화폐단위가 다르다. 당시 달란트는 이스라엘의 화폐이고 므나는 이방인의 화폐였다.

 

왜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대로인데 이방인의 화폐로 표현하셨을까? 이러한 두 가지 사실로 미루어 보아 마태복음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누가복음은 주로 이방인에게 주신 말씀임을 우리 모두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이스라엘과 이방인으로 나누고 가르자는 말은 아니다. 휴거에 관해 말하려다 보니 휴거는 예수님이 왕으로 오시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고 이방인을 대상으로 말씀하신 누가복음의 므나 비유가 우리의 휴거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의 므나 비유에는 그 끝에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에 없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평범한 말씀이 아니다.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 말씀이기에 하는 말이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 하나이다 하였더라.” (눅 19:12-14)

 

그 후 세월이 흘러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온 왕이 종들을 불러 결산하는 장면을 설명한다.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나이다” (눅 19:20) 그러자 예수님이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하니” (눅 19:24)

 

이것으로 결산은 끝났는데, 왕이신 예수님은 갑자기 무서운 명령을 내리신다. (즉, 이 부분이 마태복음과 다르다.)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눅 19:27)

 

왜 누가복음의 므나 비유 끝에는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에 없는 이 무서운 말씀이 있는가? 예수님이 왕이 되는 것을 싫어하는 자들을 끌어내어 죽이라는 말씀이 어째서 누가복음에만 나오는가? 왜 이 말씀이 이방인을 대상으로 쓰여진 누가복음에서만 특별히 나오는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들은 예수님이 왕으로 다시 오시는 것을 진정 소망하고 있을까?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가? 아마 그렇지 않다고 하는 말이 진실한 대답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 왕으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일단 어떤 사람을 그들의 메시야로 받아들이면 바로 그 사람을 그들의 왕으로 삼을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란 현 세상에서 그들을 통치하는 실제적인 왕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 5:43)

 

마태복음(이스라엘 민족에 해당되는 복음)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들은 왕(메시야)이 빨리 오시기를 학수고대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왕됨을 원치 않는다"라는 말씀이 유대인들에게는 필요없지만, 우리 이방인들에게는 꼭 하셔야만 하는 말씀인 것이다.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은 다시 오실 실제 우리의 왕이시다. 우리들 중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다시 오시는우리의 왕을 거절하다가 죽임을 당할 것이다.

 

이 민주주의 시대에, 이 문명 시대에, 이 과학 시대에 무슨 왕이 필요한가? 그렇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 특별한 몇몇을 제외한 대다수는 예수님이 지금 이 세상에서 우리의 가시적 현실적인 왕이 되는 것에는 개념도 없고 바라지도 않는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큰 욕심은 없다 라고 말들은 하면서 아이들을 좀 더 나은 대학에 보내고 싶고, 좀 더 나은 곳에 출가시키고 싶고, 그리고 노후자금이 조금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만나면 된다고 생각한다.

 

“천국 가기 전까지만 나와 우리 가족 불의의 사고에서 보호하시고 건강 주시고 아이들 나쁜 곳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직장과 사업에서 잘 되게 해 주시면 할렐루야 감사합니다.”로 끝난다.

 

이렇게 이방인 성도들인 우리들은 예수님이 실제로 우리의 왕이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 누가복음을 통해서 현재의 우리들에게 강력하고도 무서운 경고를 주신 것이다. “내가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눅 19:27)

 

생각해보라. 자신이 애써 만든 것들이 자기를 등지고 원수에 팔려 갔던 것을 자신의 목숨을 내주고 도로 찾았는데 자기를 진심으로 따르지는 않고 마음은 항상 원수에게 주고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야고보서 4:4) “당신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나와 가족의 신변 경호를 해주시고 내가 죽은 후에는 내 영혼을 천국이 있다면 그곳에 받아주시오”라는 모습에 주님은 분노하실 것이다.

 

신비로운 것은 유대인들은 초림예수를 거부했는데 이방인 교회는 재림예수를 거부할 것이라는 것이다. 벌써 거부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WCC가 바로 재림예수를 전 세계적으로 거부하게 만드는 집단이다. 666 짐승의 표가 상징이라고 하는 것이 또한 재림예수를 거부하려는 전조인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재림예수를 부인하고 거부하는 WCC 세력과 세상염려 혹은 재미에 빠져 예수님 재림에 무관심한 성도들은 함께 예수님의 원수로 분류되어 예수님의 명에 의해 죽임을 당케 될 것이다.

 

지금 예수 믿고 있는 내가 혹시 주님의 원수는 아닐까 ? 자신을 살펴 생각해 보는 사람은 복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계 11:15) 이 말씀에 우리는 얼마나 공감하는가? 이 말씀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가? 이 말씀이 이 땅에 실현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하는가? 우리는 정말 예수님의 백성인가? 아니면 이 세상 임금(사탄)의 백성인가?

 

우리가 머뭇거리는 동안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 문은 닫히고 휴거는 일어난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휴거시키는 것일까? 예수님은 왕이시다. 왕은 주권, 영토, 백성이 있어야 한다. 주권은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셨다. 영토는 하늘과 땅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 (마 28:18)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0)

 

백성은 우리 그리스도인이다. 왕은 왕비를 어디서 뽑는가? 자기 백성 가운데서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신부라는 말씀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아 4:9)

 

세례요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신부로 보았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요 3:29)

 

그런데 신부는 신랑과 같은 신체적 구조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몸은 예수님의 몸과 다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는 문이 닫혔는데 홀연히 나타나셨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26)

 

“그 후에 저희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막 16:12)

 

부활 후의 예수님은 신비의 몸을 가지게 되셨다. 그렇다고 영체도 아니셨다. “내 손과 발을 만져보고 나 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 24:39)

 

이렇게 부활 후의 예수님은 부활전과 다르시고 우리 몸과도 다르다. 좀 더 살펴보면 우리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이른 아침, 무덤 밖에서 마리아를 만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은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예수님이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요 20:17)

 

그 후 26절에 “여드레를 지나서 문들이 닫혔는데”, 27절에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부활 후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몸을 가지셨다. 우리도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같은 신비한 몸, 시공을 가로지르는 몸을 가져야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휴거가 필요한 것이다.

 

정말 예수님과 똑 같은 몸이 되는가? 성경에 있는가?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빌 3:21)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요일 3:2)

 

이렇게 우리 몸이 부활 후의 예수님의 영광의 몸과 같은 몸을 입게된다 이 죄 투성이 고집과 교만과 위선과 더러운 걸레에 불과한 내가 주님과 똑같은 신비의 몸이 된다니...

 

이제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 은혜와 사랑을 뼈에 새기며 다시 본 주제로 들어가자. 우선 휴거 관련 구절부터 살펴보면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1,52)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좆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7)

 

우리는 그야말로 눈 깜박(in the twinkling of an eye)할 사이에 몸이 변화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과 같이 변화되는 것이다. 우리는 찬란한 빛의 몸이 되는 것이다.

 

다니엘이 기도하여 말할 때에 “그 전 이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단 9:21)

 

휴거된 우리들은 적어도 가브리엘 천사 이상의 속력으로 우주를 가로질러 다닐 것이다. 이상과 같이 신부로서 신랑과 같은 몸을 입기 위하여 휴거되는 것이다.

 

휴거가 꼭 일어나야 할 다른 이유는 이 지구의 형편이 대환란 때에는 인간이 도저히 살 수 없는 그야말로 생지옥이 되기 때문이다.

 

미국 눈 빙하자료센터(NSIDC)에서 최근 발표한 것을 보면 서기 2013-2018년 사이에 북극의 얼음 덩어리가 다 녹는다지 않는가?

 

“일월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를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눅 21:25)

 

동남아 쓰나미, 미국 카트리나, 허리케인, 미얀마 태풍, 중국 쓰촨성 지진, 쌀, 밀가루 등의 곡물가 , 철광석을 비롯한 원 자재 가격 , 석유 가격, 그리고 핵전쟁이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에스겔 38, 39장에서는 러시아와 이스라엘 간 전쟁을 말씀하셨다. 지구가 정말 아수라장이 되기 때문에 우리를 대기권이 아닌 우주에서도 살 수 있는 몸으로 변화시키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주님의 신부들을 생지옥에서 미리 구해 내시는 것이 휴거이다.

 

수 년전 일이다. 큰 애가 중학교 여름방학 숙제로 도마뱀을 만들었었는데, 그게 못마땅해서 집에 들여놓지 못하게 했었다. 그런데 아이는 그것을 요리조리 숨겨서 어떻게든 없애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쓰는 것을 보았었다.

 

직접 자기 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애착이 가서 그랬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 2:7)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은 말씀으로 지으셨으나 유독 사람만은 직접 만드셨다. 그것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으셨다. 그러니 얼마나 우리 사람이 귀엽게 생각되시겠는가?

 

더군다나 우리 인생이 죄를 짓고 사단의 권세에 속하므로(행 26:18),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의 죽음에 내주심으로 우리를 다시 구해내셨으니 그 인생에 대한 긍휼히 여기심과 애틋하신 마음을 무엇에 비하겠는가?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계 5:9)

 

하나님은 우리를 직접 만드시고 아들의 피 값으로 다시 사셨기 때문에 아들을 진정으로 믿는 자는 환란에 내버리지 않으시고 휴거 시키신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과 머리가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고전 12:27) “교회는 그의 몸이니”(엡 1:23) 이러한 여러 이유로 인하여 진정한 교회 (진정한 그리스도인들)는 그야말로 눈 깜박할 순간에 예수님에게로 들려 올라가는 것이다.

 

이제는 세상 잠에서 깨어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되어야 할 때이다. 마태복음 25장의 10처녀는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잠을 잤다. 이제 세상 잠을 깨어 주님 만날 준비를 해야 할 때이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은 징조(sign)가 보일 때 깨어 기도하며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여 휴거에 반드시 들어가라 하는 의도이시다.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9)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는데, 이 휴거에 관한 말씀은 베드로나 요한, 야고보 사도들에게 주시지 않고, 바울에게 주신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였고, 이 휴거는 거의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방인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이방)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롬 9:26) “저희(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롬 11:11)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롬 11:25)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찬 후, 하나님의 긍휼의 손길이 다시 이스라엘에게 돌아가게 된다.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 나의 성실함도 폐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파하지 아니하며 내 입술에서 낸 것도 변치 아니 하리로다” (시 89:30-34)

 

슬프다 그날이여 비할 데 없이 크니 이는 야곱의 환란의 때가 됨이로다마는 그가 이에서 구하여 냄을 얻으리로다.” (렘 30: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이라. 내가 너를 흩었던 그 열방은 진멸한다 할지라도 너는 진멸하지 아니 하리라 그러나 내가 공도로 너를 징책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 여기지 아니하리라” (렘 30:11)

 

휴거의 말씀은 고린도 교회와 데살로니가 교회에 바울이 전한 주님의 말씀인데 한쪽은 말썽이 많은 교회였다. 교인 중 육신적이고 세상 물이 빠지지 않은 미숙한 신앙인들이 많은 교회, 그런데 바울은 “홀연히 다(all) 변화한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마 24:40에서 그리고 눅 17:34에서 분명히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데려감을 당한다고 하셨는데, 바울은 모두 다 변화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어찌된 일이가? 외견상 그리스도인 중에서는 두 사람 중 한 사람 즉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모두 다 휴거된다는 정도로 이해된다. 여기서 누가 휴거되고 안 되고를 따질 필요는 없다.

 

지금 이 시간부터 무조건 지난 동안의 허물과 죄를 통회 자복하고 용서 받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사 1:18)

 

흔히들 하나님께서 우리 미래의 죄까지도 용서하셨다고 하는데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좋은 말씀이긴 하지만 성경에 없는 말씀이고 자칫 죄를 가볍게 생각하게 만드는 위험한 생각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돌보심)하려니와” (사 66:2)

 

이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돌보신다고 하시니 바로 환난에서 우리를 건지시지 않겠는가?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기의 악한 마음의 꾀와 강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을 향치 아니한 그들”(렘 7:24)에게는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주며 그 무서워 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치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사 66:4)

 

당신은 그리스도인인가?

“나는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 다 드리고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십일조 드리고 열심히 봉사하고 기쁨과 감사로 살고 있다”고 대답할지 모른다.

 

훌륭하다... 그러나 당신이 예수의 재림을 사모하며 기다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바리새인만도 못한 사람이다. 내 주장이 너무 지나치고 무례한 억지라고 생각하는가?

 

서기 2008년 6월 현재 세계 인구는 약 67억이다. 가톨릭, 그리스정교회, 성공회 등 다 포함해서 기독교인은 22억이다. 그러면 나머지 45억의 인구는 어찌되고 있는 줄 생각해보았나?

 

매년마다 5천 6백만 명씩 죽는데 기독교인은 다 구원 받았다고 하더라도 1천9백만 명이 천국에 갔고 나머지 3천7백만 명은 어디로 갔는가? 지옥으로 갔다.

 

예수님이 속히 오셔서 그 모든 지옥으로 가는 행렬을 그만 정지시키셔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그리스도인 전체가 아무리 선행과 봉사를 한다 해도 예수님께서 하루 더 일찍 오시는 것만 못하다.

 

그 하루 동안에 약 십만 4천명, 그 중 어린이를 제외하면 5, 6만 명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기 때문이다. 1개월에 150만명-180만명이나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진심으로 영혼을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1분 1초라도 더 빨리 오셔야 한다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라이(가) 임하옵시며”(주기도문 제발 건성으로 하지말자)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 9:28)

 

그렇다. 바라는 자들에게 나타나신다. 신랑을 기다리며 바라는 자들에게 말이다. 심령에 통회하며 주의 말씀에 떨고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리어 휴거에 꼭 참여하자. 이 글을 읽는 분 모두 다 그렇게 되기를 기도한다.

 

이제부터 민감한 얘기로 넘어간다.

바로 그 시기 말이다. 이쯤해서 우리나라 사람들 입에 재갈 물리기에 성공한 고위급 마귀는 얼굴에 친절하고도 상냥스런 미소를 지으면서 “언제인지 그 날짜를 좀 정확히 말씀해 주십시오” 하지 않겠는가?

 

마귀들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그 날짜는 솔직히 잘 모른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말는 것이 죄송하고 좀 면구스럽지만 성경은 66권의 합본이다. 그 한권 한권이 독립적이면서도 한 주제로 통일성을 가진다.

 

거기에 더하여 성경은 역사의 시간적 순차를 갖는다. 즉 창세기는 출애굽기보다 앞에 있고 마태복음은 사도행전보다 앞에 있다. 그리고 대략 사건의 전개 방식이 전체 66권으로도 그렇거니와 각 권으로도 시간적 순차를 갖는다.

 

아담과 이브 그리고 노아 그 후 아브라함 그리고 그 후 모세, 인물과 사건이 시간적 순서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전체적으로도 그렇지만 각각의 책에서도 대부분 그렇다.

 

동의하시는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모두 예수님 탄생으로부터 부활, 승천까지 시차적 순서를 따라 기술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누가복음이 주로 이방인을 대상으로 주신 말씀임을 말했거니와 우리는 이방인 그리스도인이므로 휴거와 종말의 순서를 여기서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눅 12:35, 36)

 

“너희도 아는 바니 집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을 알았다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눅 12:39, 40)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눅 12:42, 43)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눅 12:45-46)

 

위 말씀의 요지는 예수님 재림을 예비하고 있을 것과 청지기(교직자)들은 종(성도님)들에게 재림의 때에는 재림의 성경말씀을 강론 하라는 것이다.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신다는 말씀은 예수님 공중재림이 갑작스러운 일임을 말하는 것이다. 신부를 데려가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다. 이삭이 리브가를 맞이할 때 벌판에 나온 것 같이(창24:63) 공중에 오신다.

 

요셉이 이방인 아내 아스낫을 얻은 것 같이(창41:45) 예수님은 동족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 신부를 맞는 것이다. 휴거 때까지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몰라보고 그 후에야 깨닫게 된다.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시 113:1)

 

이와 같이 누가복음 12장에서는 재림설교의 필요성과 중요함을 말씀하시고 17장에서 휴거가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눅 17:34)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눅 17:35)

 

이 휴거 후에 실로 엄청난 멸망의 재앙들이 일어날 것을 주님은 말씀하셨는데,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7일 후에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다.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 17:30)

 

여기서 우리가 짚어야 할 것은 이때가 환란 후인가 아니면 환란이 막 일어나는 시점인가 하는 것인데, 이때는 환란이 막 일어나는 시점이다. 왜냐하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갔다. (눅 17:27)고 말씀하시며, 실제로는 그 후 7일 후에 홍수가 났다. (창7:10)

 

롯의 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눅17:28)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이렇게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고 하는 평화로운 때에 갑자기 휴거가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환란 후에 휴거가 있다고 하는데 아마 마태복음 24장 31절 말씀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휴거가 아니고 환란에 살아남은 성도(주로 이스라엘 민족)들을 천사를 시켜 예루살렘으로 이동시키는 장면이다.

 

마태복음 24장 29-31절에 “그날 환란 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 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 택하신 백성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주님은 환란 후에 천사들을 보내신다. 666 짐승의 표(베리칩)를 받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을 천사들을 보내어 이스라엘로 순간 이동시키는 것이다. 이때 지구는 초토화된 이후이며 아무런 이동 수단이 없는 때이다.

 

적어도 3년 6개월 이상 굶주린 몸으로 예루살렘까지 걸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 10:22)

 

휴거는 전혀 다르다. 휴거는 우리 몸이 변화하여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인데 천사의 데려감이 아닌 것이다. 휴거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시다.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 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 까지 하리라” (살후 2:7)

 

성령께서 적그리스도의 일을 교회를 통해 막고 계시다가 교회를 옮기시는 게 휴거다. 마치 아브라함의 청지기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데리고 이삭에게로 가듯이 말이다.

 

다시 하던 얘기로 돌아가서 누가복음 17장에 휴거가 있고 다음 누가복음 19장으로 가면 므나 비유의 말씀인데 왕위를 받아 가지고 와서 상급의 심판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휴거 후에 우리에게 상주시는 것을 보여주시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것은 그 백성 중에 그가 왕됨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인데 그들은 누구인가? 바로 예수 믿는 우리들 중 누군가이다. 그들은 비참한 죽음을 당할 것이다.

 

예수님이 실제 이 세상에서 왕이 되는 것을 싫어하면 우리들이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들은 휴거되지 못하고 환란에 남겨지게 되고 대재앙 속에서 육신의 죽음을 맞거나 죽음보다 더한 고난을 당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계시록 7장 9절 이하 말씀으로 인하여 이 사람들이 환란 중간에 휴거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들이 죽어서 올라왔거나 죽음 이상의 고난을 통과한 그리스도인들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전 6장 12절 이하에 큰 지진과 해가 검어짐과 달이 피같이 됨과 별들이 떨어지고 하늘이 종이 축 말림같이 떠나감과 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기우는 일이 일어난 후이기 때문에 이들은 죽은 사람들이거나 거의 죽어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주께서 목자가 되신다. 주님이 그들의 신랑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항상 성전에서 봉사하게 된다. 휴거자는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이다.

 

“이 일 후에 내가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계 7:9)

 

이번 미얀마 태풍에도 기독교인 1만 명이 소천하였다. 그리고 그 바로 앞 장인 계시록 6장 10,11절에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원수 갚음)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아직 잠시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원수 갚아 달라는 영혼들의 청원에 더 많은 성도들이 죽어야 한다는 대답이시다. 이런 일들 후에 셀 수 없이 많은 무리가 하늘에 올라왔기 때문에 이들은 믿음을 지키고 세상을 떠난(적어도 정신적으로는) 성도들로 보아야 한다.

 

어쨌든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계시록을 풀었는데 거의 다 꼭 몇 군데씩 서로 다르다. 이제 초등학생도 계시록을 하나도 틀리지 않고 다 해석할 때가 되고 있다.

 

지성이나 도덕성이나 신앙의 결단이나 말씀에 따르는 실행력, 그리고 능력 행함과는 달리 예언의 해석에서는 예언이 응해지는 시점에 가까울수록 더 정확하게 풀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옛날의 어거스틴이나 칼빈보다 오늘날의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훨씬 더 정확하게 예언들을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정보가 쌓이고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어야만 알려주시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환란 전 휴거를 얘기하면 화를 내면서 거짓선지자, 이단이라고 한다. 나는 그 사람들한테 참 감사한다. 왜냐하면 세상살이도 나에게는 만만한 것이 아니었고 뒤늦게 나이 50에 목사가 되어 예수님께로부터 상 받을만한게 통 없던 차에 견딜만하고 나름대로 행복한(?) 핍박이기에 말이다.

 

그런데 그 어떤 사람들도 다 천국에서 만나게 될 귀한 형제, 자매들인데 혹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말씀을 올린다.

 

“환란 중간 혹은 환란 후에 휴거가 있다”고 성도들을 가르쳐서 가뜩이나 세상으로부터 떨어지고 싶지 않은 차에 “그러면 환란이 오는 것을 보고 환란이 시작되면 그때부터 예수님 만날 준비하면 되지”라고 유도한다면(고의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는 성경에 맞지 않는 것이며 예수님 말씀에도 정면 도전하는 것임을 말씀 올리고 싶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눅 21:36)

 

항상 깨어 기도하면 환란을 피하고 예수님 앞에 서게 된다는 말씀이다. 환란을 피하는 길은 이 지구를 벗어나는 방법 외에는 없다. 그래서 휴거시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셨겠는가? 자신이 직접 만드시고 더군다나 자신의 희생으로 도로 찾은 자신의 신부를 장차 올 이 모든 일 (창세 이래 없었던 그리고 미래에도 없을 최고의 환란)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으셔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이 지구에 계실 때 왜 그렇게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나?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다 죽게 될텐데 말이다. 하나님 아들이시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해서라면 대표적인 몇 사람만 고치시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불쌍해서 이 대환란의 지구로부터 탈출시키시는 것이다. 바로 휴거라는 방법으로 말이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아들들인 성도들을 불과 유황불,그리고 홍수를 통과시키시겠는가? 예수님이 그렇지 않다는데, 굳이 환란을 통과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마도 마귀의 계략에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성도들로 하여금 휴거를 놓치게 하고 환란에 빠뜨려서 종당에는 666짐승의 표(칩)를 다 받게 만들어서 불과 유황 불못에까지 끌고 가려는 계략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적같이 오신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는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한다”는 말씀들을 안다면 어떻게 환란 중간이나 환란 후에 휴거가 있다고 말 할 수가 있는가 말이다.

 

멸망의 아들인 적그리스도는 7년전에 이스라엘과 관련된 7년 시효의 언약을 여러 사람과 맺는데(단 9:27), 바울은 바로 이 적그리스도와 휴거시기를 관련짓고 있기에 휴거는 7년 전인 것이다.

 

사 26:20-21에서도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 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것이라" 이렇게 하나님의 분노가 폭발하기 이전에 밀실(휴거)에 들어가는 것이다.

 

앞서 얘기한 성경 인물 사건의 시차적 배열로 생각해보면 더욱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휴거는 환란 이전 즉, 아무도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에 임할 것이다. 창세기는 지구 창조, 계시록은 지구 및 인간의 심판, 그리고 천년왕국을 설명한다.

 

이 성경에서 휴거는 어디에 나오는가? 고린도전서 15장 51절,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 이다. 왜 신명기나 열왕기가 아닌 계시록 앞에 있는 교회 시대의 서신서에 나오는가 말이다.

 

그것은 심판에 들기 전 교회 시대에 휴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마귀는 성도들이 휴거에 관하여 확실한 지식을 갖는 것이 가장 싫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외국에도 여러 번 거짓 휴거날짜를 퍼뜨리고 우리 성도들에게 백신 주사를 맞힌 것이다.

 

여러 번 속은 성도들은 휴거 얘기는 모두 엉터리라고 생각하게 되고 진짜가 올 때에는 아무 관심도 없이 다 놓치게 만들어 표 받게 하려는 의도로 말이다.

 

계시록 7장 9절-17절까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에 서있다” (계 7:9) “이는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이다” (계 7:14)

 

그들은 이미 굶주렸고 목말랐고, 태양이나 핵폭발로 몸을 상한 사람들이다. (16절 참조) 예수께서 생명수 샘으로 인도 하시고 눈물을 씻어주신다(17절).

 

영혼이 아닌 육신으로 천국에 들어온 것 같은데 이들은 실로 엄청난 대재앙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게 된다(계 7:15).

 

이들도 휴거된 것으로 보아도 되겠지만 휴거라 하더라도 의미없는 휴거이다. 대재앙에 엄청난 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들도 다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먼저 휴거된 성도들과 다른 직임이 주어진다. 휴거된 성도들은 어디든지 예수님과 함께 다닌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창세 이래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환란에서 건져내시는 것이 바로 휴거이고, 그 의미가 있는 것이지 차라리 죽는 것보다도 더 험악한 상황과 몰골로 그 대 재앙을 통과하다니...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살전 5:9)

 

여기서 구원은 하나님의 진노(대환란)에서의 구원이다. 그 이유는 4장 16절부터 5장 9절 바로 여기까지 전체가 휴거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계시록 3장 7절 이하의 말씀이 바로 휴거되는 교회인데 빌라델비아 교회이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계 3:8)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계 3:10)

 

주님의 말씀은 간단명료하시다.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주신 다는데 어떻게 되는 것이 시험의 때를 면하는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지구를 떠나거나 죽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몸이 변화되어 지구를 떠나는 것이다.

 

예수 믿는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식사하면서 기도 중에 형제라고 칭했더니, 그 친구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았는데 신앙인의 세계도 참 씁쓸하다. 정말 순수하게 형제라고 스스럼없이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세상이 빨리 와야 하지 않겠는가?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아 이제 그만 세상 미련 버리고 생각나는 죄는 몽땅 회개하고 휴거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자.

 

베드로후서 3장 12절에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말씀 하셨는데 그때가 우리에게는 휴거의 때이고 세상은 멸망의 대심판임을 알라. 그때에 우리가 멸망의 대재앙에 빠질 것이라면 세상에 어떤 바보 성도가 그날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할 것인가?

 

다시 성경 인물 사건의 시차적 배열론(?)에 의거하여 휴거되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성경의 어디에 있는가? 계시록 초반 3장 아닌가? 아직 재앙이 발생하기 이전이다.

 

계시록은 6장부터가 재앙의 시작이다. 우리는 이방인에 대한 복음인 누가복음 12장에서 종말의 때에 재림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과, 17장에서 휴거의 말씀, 그리고 19장에서 시상식인 므나 비유를 살폈고, 그 다음 21장으로 넘어가서 본격적인 환란의 상황을 보게 된다.

 

21장의 내용은 계시록에서 상세히 말씀하시고 계신바 우리는 그 환란을 피하는 방법에 모든 관심과 힘을 쏟아야 한다.

 

바로 누가복음 21장 36절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지금 현재 일어나는 재앙들은 아직은 징조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이제 곧 일어나는 휴거에 대비하고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신호인 것이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막 13:33)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는 말씀에 대한 해석에서 예수 재림을 모호하게 하고 희미하게 보려고 하는 그 어떤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연유로 야고보서 3장 1절에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셨다.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주의하고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강조하고 하시라도 재림(휴거)이 있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눅 12:32)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눅 12:36)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막 13:35)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막 13:36)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막 13:37)

 

휴거의 필요충분조건은 사모하고 기다리며 깨어있어(세속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그 자리에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이웃블로거 / 기쁨향기

He is-(창세기부터 계시록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창세기에서 그는... 생명의 호흡이시고
출애굽기에서 그는... 유월절 어린양이라
레위기에서 그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며
민수기에서 그는... 밤중의 불기둥
신명기의 그는... 모세의 목소리이고
여호수아에서 그는... 구원의 선택이라
사사기에서 그는... 율법을 내린 자
룻기에서 그는... 구원하는 친척이고
사무엘 상하에서 그는... 우리의 의지할 예언자시라
역대상하에서 그는...통치하시는 주시며
에스라의 그는... 참되고 신실하신 학자이고
느헤미야의 그는... 깨진 벽과 삶의 재건자 되시네
에스더에서 그는... 모르드개의 용기
욥기에서 그는...영원하신 구원자시고
시편에서 그는... 우리의 아침 노래이시네


잠언에서 그는... 지혜의 외침이며
전도서의 그는... 때와 계절
아가서의 그는... 연인의 꿈이시라
그는... 그는... 그는 !
이사야에서 그는... 평강의 왕
예레미야서의 그는... 눈물의 예언자이시며
예레미야 애가에서 그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라
에스겔서의 그는... 죄로부터의 부르심
다니엘서의 그는... 불 속의 손님
호세아서의 그는... 영원히 신실하신 분이시네
요엘서의 그는... 성령의 능력이시며
아모스서의 그는... 우릴 인도하시는 팔
오바댜서의 그는... 우리의 구원자 주님
요나서의 그는... 위대한 선교사이시며
미가서의 그는... 평화의 약속
나훔서의 그는... 우리의 능력 우리의 방패시라


하박국과 스바댜서의 그는... 부흥을 위한 간구이시며
학개서의 그는... 잃어버린 유산을 복원하시네
스가랴서의 그는... 우리의 샘물
말라기서의 그는...그 날개로 치유하며 일으키시는 의로움의 아들이시라


그는... 그는... 그는 !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서의 그는... 하나님, 사람, 메시아시며
사도행전의 그는... 하늘에서 내린 불
로마서의 그는...하나님의 은혜
고린도서의 그는... 사랑의 능력
갈라디아서의 그는... 죄의 저주로부터 자유가 되시네
에베소서의 그는... 우리 영광의 보배
빌립보서의 그는... 종의 마음
골로새서의 그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데살로니가서의 그는... 다시 오실 왕


디모 디도 빌레몬서의 그는... 우리의 중재자요 신실하신 목자
히브리서의 그는... 영원하신 계명
야고보서의 그는... 병든 자를 고치는 분이시며
베드로전후서의 그는... 우리의 참된 목자
요한123서 유다서의 그는... 신부를 위해 오실 연인이시며
계시록의 그는... 왕의 왕. 주의 주가 되시네
그는... 그는... 그는 !
평화의 왕, 사람의 아들, 하나님의 어린 양, 위대하신 여호와
그는 알파와 오메가, 우리 하나님, 우리 구원자, 그는 예수 그리스도 주시며
시간은 사라진다 해도 그는 계시네..


펌글/영심이

중국 윈난성 샹그릴라 고원을 가다


중국 윈난성 샹그릴라 고원 ( The Shangri-La, West China )

중국 서부 티베트 고원에 속하는 샹그릴라는 평균 해발 3,500미터의 고산지대이다. 티베트어로 '마음속의 해와 달'을 뜻하는 샹그릴라는 중국 장족 자치구에 속하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다.

계단식 다락논

천주교 신자들


계림

중국의 유명 관광도시 계림은 '계수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곳'이란 의미로, 역사적으로 그 아름다움을 칭송 받아온 곳이다. 계림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남북으로 시원하게 뻗어있는 요산은 해발 903m, 높이 760m의 위용을 자랑한다. 요산의 케이블카에 올라 천하절경을 내려다보는 코스는 계림 여행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다. 또 다른 계림여행의 즐거움은 '현세 속의 선경'이라 불리는 이강 유람이다. 산속 깊숙한 곳에 자리한 진귀한 모양새의 봉우리와 계곡들을 유유자적 뱃놀이를 하며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구체구

소수민족 장족들이 모여사는 9개의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엇다는 구체구 장족들은 대부분 야크와 염소등을 방목하며 산다. 황산을 가보지않고 산을 말하지 말고 구체구를 가보지 않고 물을 말하지 말라는 때묻지 않은 원시비경의 아름다움...1992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 되었다.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곳곳에서 교회를 지탄하는 소리 드높아만 가고, 세상의 빛으로 밝게 빛나야 할 등불로서의 교회가 점점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성도들을 주님 앞으로 이끌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청결하고 정직한 삶으로 본을 보여주어야 할 영적 지도자들 중, 모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이, 기준도, 잣대도, text도 주어지지 않았던 암흑기, AD 시대, 예수님 오시기 전 약 400여 년 전 그때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혼돈하고 공허한 길, 넓은 길, 어그러진 길로 달려가고 있음을 보면서 안타깝다.(나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기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임을 고백한다.)

무엇 때문일까? 지금은 그때 그 시대와 분명 다르지 않은가? 무엇보다 신구약 66권으로 잘 엮어진 정경, 하나님의 말씀이 손에 들려져 있는 축복의 시대에서 사는 우리다. 그럼에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성도라고 자처하는 사람 중, 많은 사람이 '시날의 아름다운 외투'에 눈이 먼 탓이며, 주님 다시 오심을 보는 그날이 가까워 올수록 주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려는 사람들보다 ‘시날의 아름다운 외투’에 마음을 빼앗기는 목회자들, 성도들이 더 많아질 것이니 너희는 그 길에서 속히 돌이켜 떠나야 한다.”라는 성령님의 음성이 이 아침에 큰 울림으로 내 영혼을 때리며 들려온다.. 그렇다면, 시날의 아름다운 외투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1. 시날(r[;n]vi )의 역사적 배경:

시날(r[;n]vi ), (신아르), 시날(shinar)은 강 두 사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시날을 둘러 있는 두 강은 티그리스 강과 유브라데 강으로 고대 문명의 발상지의 유명한 지역을 의미한다. 이 지역은 수메르인들에 의하여 수메르와 아카드로 알려졌으며 후에는 바벨로니아로 알려지게 되었다. 창10:10에서 위대한 전제 군주이자 제국 창설자인 니므롯이 시날 땅의 바벨, 에렉(수메르 어로는 우룩), 악갓(아가데), 갈레에 그의 왕국을 건설했다고 한다. 니므롯은 여기서부터 북쪽으로 앗수르까지 밀고 나아갔으며(창10:10), 패역한 인간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반항하여 그 유명한 바벨탑을 세운 곳이 바로 이곳 시날이었다(창11:2).

주후 1세기에 이르러서도 요한은 이 종교 제도를 언급하여 바벨론을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칭하였다(계17:5). 탐사자들은 바벨론의 위치는 힐라옵 동북방 9.6km 지점과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 남쪽 80km 지점이며,지금도 그곳에는 예루살렘의 왕을 잡아다가 유폐시켰던 현장을 비롯하여 53개의 신전(神殿)과1,300개의 제단이 더러는 부서진 채 남아 있다고 한다. 아간이 훔친 외투는 시날의제품이었으며(수7:21), 정확히 설명할 수 없으나 전부 금실로 짠 매우 값진 수놓은 옷인 것 같다.(참조: H. J. Austel; Wycliffe BE). 잠시 살펴본 대로, 시날은 음란의 도시, 교만의 도시, 맘몬(Mammon, 재물의 신)이 장악한 곳,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악의 도시를 상징함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 바쳐진 물건, 하나님께 드려진 그 구별된 물건에 욕심을 부렸던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과 그 가족이 망하고, 아무 죄없던 그 이웃마저 큰 고난을 당한 이유가 바로 그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때문이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아이성과의 전투에서 참패했고, 결국 아간은 그 범죄로 인해 자신이 사랑하던 아들들, 딸들, 소들, 나귀들, 양들과 장막 그리고 그가 흠모하여 훔친 시날의 아름다운 외투, 금과 은과 함께 돌무더기에 깔리고 불살라져서 아골 골짜기에 묻혀버렸다.

여호수아서의 기자는 그때 여호와께서 극렬히 분노하셨다고 표현했다(수 6:21~26). 이것은 하나님께 드려진 구별된 물건에 대한 욕심을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미워하시는 일인가 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사건이다. 이렇게 나 한 사람이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에 미혹되어 눈이 멀게 되면, 나도 망하고 내가 속한 공동체 전부가 망하거나 아니면 큰 해를 당하게 된다.

2.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

앞에서 잠시 살펴본 대로, 시날산의 외투는 아름답기 그지없고 엄청나게 값진, 금실로 짠 옷으로서, 그 외투를 한 번 보게 되면 누구나 탐낼만한 매력적인 물건인 것과 동시에, 내 것이 아닌, 하나님께 드려진 것으로써 인간이 가로채서는 안될 그 무엇,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과의 언약 파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것은 ‘금지된 실과,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에도 비유될 수 있다. 영적으로,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이지만 따먹어서는 안 될 선악과, 취해서는 안 될 그 모든 것을 총칭한다고 보아도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런 것을 전제로,

a) 성도는 금지된 물욕(物慾)을 제어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날산의 외투는 영적으로 물질이다. 현대는 맘몬(mammon), 재물의 신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말세지말이다. 성도는 내게 허락되지 않은 물질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 물욕, 곧 금지된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를 탐내는 마음을 제어하지 못해서 직장에서 신임을 잃고 해고를 당하기도 하고 더 심하면 그 물질 때문에 자살까지도 하게 된다. 목회자들이라하여 이에서 제외된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목회자들, 특히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헌금을 자신의 임의대로 유용하는 것이나, 정한 사례비 외에 판공비를 받아 개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이와 같다고 본다. 물론 목회자가 정해진 사례비 외에 목회 활동비가 있어야 구제도 하고 선교도 하고 주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목회 활동비를 100% 그 용도 그대로 정직하게 사용하지 않는 데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약 1:15)는 말씀은 가롯 유다에게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물질을 탐하던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기에 이르렀다.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다.” (마 26:24)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는 결국 예수님을 팔고 받은 돈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가룟 유다의 사건은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물질을 탐하다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 좋은 예가 된다. 오늘날 주의 종으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예임에 틀림없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 그 어떤 직위를 받았다고 하여 그 직위 자체가 구원을 줄 것이란 생각을 버려야 한다. 가롯 유다도 사도로 택함을 입었지만, 그 직위가 그를 구원시키지 못했다.

b) 성도는 금지된 정욕(情慾)을 제어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최대의 선물이 性인 동시에 잘못 사용하면 최대의 죄악도 바로 性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스러운 곳이다. 침소를 더럽히지(히 13:4절 참조) 말아야 한다. 성경에 별처럼 빛나던 인물들이 이 부분에서 실패했다. 모세도 이방인이었던 구스여인을 취하여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므로 그의 권위가 많이 실추되었다.(민 12:1). 다윗이 위대한 왕이었지만 남의 아내 밧세바, 금지된 성(性)을 취하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그녀의 남편이자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 장수, 우리아를 전쟁터로 내보내 죽이는 비행을 저지른다. 삼손은 나실인이었으나, 이방 여인이요, 기생이었던 ‘들리라’를 탐했다가 두 눈 모두 빼이고 결국 목숨마저 잃게 되었다.

c) 성도는 금지된 명예욕을 제어해야 한다.

명예욕은 정말 무섭다. 이 명예욕은 사단의 속성이다. 그는 하나님처럼 높아지려 하다 쫓겨난 천사라는 기록이 있다. (겔 28장 참조) 명예욕이 무서운 것은 그 속성 때문이다. 올라가려고 하는 자는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며 시기와 질투하는 마음은 자신의 뼈를 썩게 한다.(잠 14:30절 참조) 동생을 시기한 가인은 최초의 살인자란 오명을 영원히 남길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요셉의 열한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그를 애굽의 종으로 팔았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시기해서 십자가에 넘겼다.(마 27:18, 막 15:10 참조)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는가.

성경에 이런 일들을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거울로 주신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전 10:6, 11절 참조)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라. 문제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이런 경고의 말씀에는 아예 귀를 막아 버린다는데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선한 말씀을 오용 내지, 악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구원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그리고 한 번 구원은 영원 구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업신여기는 행위를 믿음의 행위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중략-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17, 26절 말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情과 慾心)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절 말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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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ng Jee Sook's photo.
Yong Jee Sook's photo.

죽음만 기다리던 무슬림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나시르 시디키가 34살이 되었을 때 그는 이미 성공한 비즈니스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음을 앞두게 되었을 때 수백만 달러의 돈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토론토 종합병원에 입원한 어떤 환자보다도 끔찍한 대상포진으로 인해 그의 면역체계가 무너졌고 죽음만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나는 8층에 있는 작은 방에서 깨어났습니다. 내 피부는 누군가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인 것처럼 타들어갔습니다. 내 몸은 안팍으로 너무나 뜨거웠습니다. 
의사가 도착해서 나를 보고는 눈에 보일 정도로 매우 빠르게 자라고 있는 물집을 보고 의아해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몸이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대상포진 외에도 온 몸에 수두가 나타났습니다. 나는 격리병동에 수용되었습니다. 그날 저녁 체온이 42도까지 치솟았습니다. 이는 뇌를 영구히 손상시킬 정도의 고온입니다. 
며칠 동안 상태는 더욱 심각해 졌습니다. 말초신경까지 열이 높아서 피부에 닿는 머리카락 하나가 몸 전체에 충격파를 전달할 정도였습니다. 주말이 되었을 때 위독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나의 마지막 희망

사는 동안 나는 담대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으며 위기를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나는 공포에 떨었습니다. 사후에 어떤 일이 있을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영국 런던의 무슬림 가정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알라가 치유의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의지한 것은 약 
드디어 거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의사들은 내가 진단하는 말들을 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의사 중 한 사람이 나의 면역체계가 완전히 정지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의사가 곧 죽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에이즈로 인한 합병증으로 면역체계가 정지했을 것이라고도 말했습니다.



나는 에이즈 환자가 아니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죽을 것이라는 말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의사들이 내 동료(아내)에게 내가 수 시간 내에 죽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기적이 일어나서 살아난다고 해도 오른쪽 눈과 귀가 보고 듣지 못하고 오른쪽 몸이 마비될 것이며 고열로 인해 심각한 뇌손상을 입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의사들이 방을 나갔습니다. 

의사들은 제가 죽게 둔 것입니다. 마치 익사하는 사람이 세 번째로 물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온 힘을 다해 "하나님, 당신이 진짜라면 날 죽게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라고 속삭였습니다.

주님의 임재 속에서


깊은 밤 중에 나는 침대 발치에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나 강렬한 빛을 내뿜고 있어서 그 분의 실루엣만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의 얼굴이 너무나 밝게 빛나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 말해주시 않았지만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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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란에도 예수님이 나오지만 무슬림들은 그가 선한 선지자라고 생각할 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내 앞에 서 계신 분이 모하메드나 알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내 방에 계신 것입니다. 두려움은 없고 단지 평안만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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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나를 죽게 내버려 두었는데 왜 예수님께서 무슬림에게 오셨을까?"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그 분이 음성이 아니 마음으로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크리스찬들의 하나님이니라.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전부였습니다. 그 분은 제 병에 대하여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또 곧 다가올 죽음에 대해서도 말씀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갑자기 나타나신 것처럼 갑자기 사라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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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같은 의사들이 들어와서 진찰하더니 물집의 성장이 정지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된 영문인 지 모르지만 대상포진 바이러스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물집에 덥혀 고통스러운 가운데 퇴원을 했습니다. 가방에는 많은 처방약이 들어 있었습니다. 의사들은 외출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의사들은 물집이 완전히 사라지려면 수개월이 걸릴 수 있고 그 후에 흰 반점들이 남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통증은 수년 동안 지속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

아침 햇살을 받으며 병원을 나설 때 나는 마치 문둥병자와 코끼리 사이의 십자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내 모습을 보자 나를 피해 길 건너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내 외모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었습니다. 내 마음은 온통 예수님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이 내 병실에 찾아오셨을 때 대상포진 바이러스가 자라는 것을 멈췄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든 간에 그 분의 임재 속에서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생각은 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크리스찬이 주장하는 대로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니면 내가 배운대로 선지자에 불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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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집에서 진통제에도 불구하고 통증과 가려움이 너무나 심해서 내 손을 묶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는 나는 잠을 설치면서 예수님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살아가는 법을 배우다

..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TV를 켰습니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던 중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가?'라는 자막을 보고 얼어붙어 버렸습니다. 나는 두 사람이 이 주제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이들은 내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주었습니다. 방송이 끝나기 전에 한 사람이 방청객의 기도를 인도했습니다. 내 몸은 고통으로 불붙는 듯 했지만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그 기도를 따라하면서 예수님을 내 마음 속에 영접했습니다.



나시르 시디키 박사와 아내 아니타

그 즉시 엄청난 영적 배고품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더 알아야 했습니다.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음 날 서점에 가서 성경을 샀습니다. 우선 4복음서를 읽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배가 고파서 며칠 동안 잠을 새워가며 창세기부터 읽어나갔습니다. 그러는 동안 아내 아니타가 복음에 관한 서적과 테이브를 더 사왔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함께 복음을 쉬지 않고 흡수했습니다. 믿음에 대한 이해가 성장하면서 대상포진이 생기기 전의 사진을 찾아서 나의 모습을 전처럼 되돌려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
.

나의 의사이신 예수님

병원에서 퇴원한 지 일주일이 되던 아침에 일어났을 때 베개가 물집으로 뒤덮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잠자는 동안 내가 그것들을 손을 뜯어냈는 줄 알았습니다. 침대에서 기어나와 샤워실로 갔습니다. 베개에서 떨어지기 시작한 물집이 샤워실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갔습니다. 모든 물집이 완전히 없어진 것입니다. 
흰 반점 대신 내 피부는 붉고 연약했습니다. 서서히 피부가 치유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대상포진 이전의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사람처럼 보일 뿐만 아니라 가슴에 남은 약간의 상처자국 외에는 앓기 전의 상태로 완전히 돌아왔습니다.

.
의사가 예상한 무서운 결과는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시력은 20/20이었습니다. 청력과 말하는 것도 정상이었습니다. 또한 뇌손상도 없었습니다. 
치유는 기적적이었으며 신속하고 완벽했습니다. 통증이나 후유증도 없습니다. 토론토 종합병원에서 가장 끔찍한 대상포진 환자였지만 가장 기적적으로 치유된 케이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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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의 하나님인 예수님은 죽어가던 무슬림인 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치유가 가장 큰 기적은 아니었습니다. 내 마음 속에 일어난 변화는 내 몸에 일어난 것보다 훨씬 더 극적이었습니다.


.

여호와 라파!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사랑을 베푸시는 우리 주님, 사랑합니다.지인 멜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이어서
‘세대주의’ 의 시조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로 널리 알려졌고
그는 자신 스스로 성경의 깨달음으로 기존의 전통적인 교리를 부정하고
성경을 재해석하여 그가 찾은 진리의 주장이기에 그의 교리와 서신 등
오컬트 언어를 사용하였고, 런던에서 아일랜드계로 태어나 더블린 트리니티 대학을 졸업, 22세에 변호사가 되었으나 회심한 후 1년 만에 그 직을 사임하고
영국 성공회 성직자가 되었으나 무력한 신앙과 형식에 매인 예배와 성직제에 회의를 갖고 규례 없는 교회생활 등을 강조한 플리머드 형제단(Plymouth Brethren)을 결성하고  특히 성직 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형식에 억매이지 않는 예배와 모임을 갖고 이것이 신약교회를 회복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미국의 무디 부흥운동과 근본주의 운동인 예언 연구 부흥집회를 수십 차례 인도하여
세대주의적 강론으로 부흥회를 이끌었기에 그 영향으로
텍사스 달라스 신학교와 LA 탈봇 신학교 등이 있다.
그는 성경 전체를 나눈
(1) 홍수 이전까지의 족장 세대
(2) 노아 세대
(3) 아브라함 세대
(4) 이스라엘 세대
(5) 이방인 세대
(6) 성령세대
(7) 천년왕국세대 등의 7 세대로 구분 한다.

지난날을 뒤돌아보면
수많은 우리 아버지 연세의 목회자들은 세대주의에 물들어 있었고
그 이유는 와전(訛傳)된 청교도 영향으로 문자적인 해석의 왜곡(歪曲)된
근본주의적 신학의 사조인 청교도 신학 선교사들의 영향이었다.
그래서 ‘천년을 하루 같이’ 해석하여 인류의 역사를 5천년으로 보았고
과학의 발달로 인류학자들인 과학자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는 대세 때문인지, 7세대로 구분한 세대주의의 영향인지 언제부터인가 6천년으로 본다.
이런 영향으로 목사는 구약의 제사장이라는, 계급적인 유교와
신의 중재자라는 토속적인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신분의 분리를 당연시 하는 풍조가 있어서 강대상 주위에 줄을 묶어놓아 그 지역은 신성한 금지 구역이 되었고 목사는 성별(聖別)된 성인이 되어 있었고, 그 후 하나님의 종은 목사만을 호칭하는 신분이 되어 평신도라 불리는 일반 신자와 신분으로 가르는 반 복음적인 분리가 일반화 되었다.

세대주의는
세대마다 구원의 방식이 다르기에 문자적인 단순하고
비 성경적인 종말론은 그릇된 종말론의 온상이 된 것은
근세의 터툴리안(Tertulianus)으로 한국에서 널리 불리는 존 넬슨 다비의
종말론에 대한 현대적인 형태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재림에 정점에
있게 만들어 전 천년설의 입장을 취하기에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천년왕국이 세워지기 전에 그리스도가 재림할 것이라는
신앙이 한국교회와 해외 한국교회에 널리 퍼졌고
이런 세대주의적 신앙을 갖게 되었다.
한국교회에 (70년대 말로 기억하는) 널리 퍼진  
U.N 그리고 EU 유럽연합의 적그리스도 설 및 세계 종교 통폐합
가톨릭의 종교 통폐합 과 교황의 사탄설과 세계 식민지 화 설.
적그리스도 시리아 탄생 설.
그리고 666을 받으면 지옥 간다는 바코드, 컴퓨터, 신용카드, 베리칩 등
666 설 등의 종말론은 세대주의에 영향을 받았고
이와 달리 세대주의자가 아니면서 극단적인 성경해석으로
이런 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말이 임박하였다는
조급한 신앙이 이런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또 다른 음모론으로 정치 사회 경제적인 현상을 음모로 단정하여
음모론이 뿌리 깊어 음모론과 음녀론에 이리 저리 흔들리는
한국교계는 얼마나 성경의 깊이가 얇은지,
넉넉한 신앙생활을 잃어버린 반증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세대주의가 다 악은 아니나 성경을 구분하여 이해하기 쉽고
도움이 되는 신학적인 주장도 많으나 세대주의가 대체신학이 되면
복음으로 대책이 없는 사람들이 된다.

세대주의자로 스코필드(C. I. Scofield, 1843-1921),워치만 니(Watchman Nee, 1903- 1972), 조직신학 책을 낸 D. S. Chafer, 무디 성경학교의 교장이었던 James M. Gray, J. Dwight Pentcost, John F. Walvoord 등이 세대주의 체계를 이어나갔고
세대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신학교는
무디 성경학교, 그레이스 신학교, 탈봇 신학교, 웨스턴보수침례신학교,
필라델피아 성경대학, 달라스 신학교 등이 있고
우리나라는
인터콥의 ‘백투 예루살렘’(BTJ)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
한국 이스라엘성서연구소’(KIBI, 대표 온누리 교회 송만석 장로)
온누리 교회 이재훈 목사
온누리 교회 치유 사역자 김성진 장로
온누리 교회 손기철 장로 등이 있다.
온누리 교회는 분별없는 신유 및 회복 사역, 경배와 찬양 등은
이미 오래전에 경건의 모습을 잃었고 온누리 교회가 유별난 이유와 원인은
극단적인 복음의 치우친 세대주의와 세속화된 사역과 감성적인 예배는
감성적인 믿음의 자기 도취(陶醉)로 영혼의 부패를 불러들이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는 이익은 방도가 되었기에 유별난
지도자자들을 배양했고 이는 어그러진 길로 간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지도자들을
닮아 간다고 생각하다 어느 날 중요한 사실을 알았다.

김기동 목사 인터뷰
"장경동 목사, '김기동 이단 아니다' 말하고 다닌다"
김기홍, 김지철, 하용조, 최이식 목사 등도 베뢰아교육 받아...베뢰아 출신 총신 교수는
73년 당시 학생인 듯...
“장경동, 하용조, 김지철, 김기홍 목사도 베뢰아 교육에 참여했다”
김기동 목사(성락침례교회, 베뢰아측)가 2일 한기협 주최 간담회에서
나겸일, 김삼환, 윤석전 목사를 자신의 제자라고 밝힌 것과 총신대 교수 중에도
베뢰아 출신이 있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밝혀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김기동 목사로부터 베뢰아 교육을 받았던 인사들이 추가로 확인돼 파문은
쉽게 가라않지 않을 전망이다.
뉴스파워 기사입력: 2006/10/04 기사 중에서
관련 사이트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6955

이 기사를 읽고 여기 저기 찾아보면서 많은 기사를 읽고
해당되는 사람들의 설교도 들어보고 이해 할 수 있었다.
김기동 출신이라니,
신학 노선(?)을 바꾸기는 인간적으로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고
소위 성령님께서 속과 안을 뒤집어 놓아서 삶과 죽음의 선을 넘나들어야
바뀔 수 있을 만큼 힘들음을 알기에
오래 전부터 이들에 갖는 반감과 의문의 정체를 알수있었다.

이리 저리 세속적인 부흥의 물결에 흔들리다 성장의 늪에 빠져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한 불쌍한 대한민국과 미주 교회여,
하나님, 긍휼을 내려주소서.

아멘넷의 기사
유대인을 위한 '샬롬 예루살렘, 브루클린 페스티벌'
http://www.usaamen.net/news/board.php?board=news&command=body&no=7590

이들의 특징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문자적인 것은 문자적, 상징적인 것은 상징적, 비유적인 것은 비유적,
계시적인 것은 계시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몽땅 다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땅과 국가,
성전 회복 등이 이루어져 성경의 약속들이 문자적으로
무조건 이루어진다고 본다.
세대주의 문제점은 성경을 비틀어서
예수님의 복음을 유대인이 거부함으로
(이곳 데살로니가 교회도 바울일행이 유대인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고
예수님의 제자와 바울 그리고 그의 동역 자들, 또 예수님이 인도한 수많은 무리들은
모두 이방인들 인가?)
이방교회가 생겨났다는 대체신학이
첫 번째 위험한 것은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의에,
공의에 벗어나는 주장이라
부인이고 복음의 어그러진 길이며
예수님이 말씀인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에 나로 말미암고는’ 는
누구든지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는,
예수님 말씀을 시인 하는 듯 하면서 부인하기에
복음을, 전 인류를 위한 능력됨을 부인하고 비틀어
복음의 능력을 감소시킴은 물론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면 오신다는 성경 구절을 이스라엘에 국한(局限)
시켜 종당에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킨다는
제한된 교회관은 두 번째 위험한 사이비의 주장일 뿐이다.
또 아브라함을 통한 유대적인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은
요한 계시록을 교회가 아닌 유대인을 위한 계시록이라 이방인 교회는
곁들어 구원 받는 존재일 뿐이라 하나님은 아직도 이스라엘만 사랑하시는
하나님인가?
그토록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선택한
이스라엘만을 단념할 수 없으신 애착을 가지신 편협하신 하나님이신가?
그렇다면 구약의 이스라엘인들은 풍요와 평화만을 누렸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스라엘의 패악으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였는데
이를 부정할 수 있는가?
일부만 선택된, 일부의 사람들을 위한 비틀린 복음,
그건 복음이 아니다.

"메시아(그리스도)의 과업은 두 개의 집을 짓는 것이다.
하나는 하나님의 집(성전)이요, 또 하나는 다윗의 집(유다 왕국)이다.
유대교인은 그 집을 지을 자인 메시아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여긴다.
집이 지어져야 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인데,
그 터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 잡고 있다.
결국 그 이슬람 사원이 먼저 무너지고, 그곳에 메시아의 집이 지어진다는 것이다.
"정형남 선교사
출처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1757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으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함이라
빌립보서 2:15-16]

중국 광둥성의 단샤산은,
2010년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자연이 이렇게 아름답게나타날 수 있을까요?
세계적으로 이러한 곳이 몇 군데 있다고 하는데,
미국 California 주 Death Valley 에도 비슷한 곳이 있지만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이 생겨나는 이유는 사암(sandstone)과 미네랄이 2천4백만년 이상 함께 지나오다가,
지질구조판이 힘에 밀려서 저렇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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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같은 기나긴 기다림

 

하나님은 아브람만을 구원하려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죄인,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이 구원을 이루시려고, 그 혈통을 그리스도의 계보로 만드시고 마침내 때가 차매 그리스도를 그 후손으로 보내시려고, 그리하여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시려고 아브람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없는 아브람에게 믿음을 심고 믿음을 기르시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아브람의 후손들”의 믿음이 아니라 “한 후손, 곧 그리스도”의 믿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밤하늘의 별을 보이시며 “너의 한 후손이 저같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너의 후손들이”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한 후손,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십자가에서 찢어지고 흘러내려 온 세상을 뒤덮고 그 살과 피를 먹고 생명을 얻은 자들이 하늘의 무수한 별처럼 될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아마 아브람은 하나님이 왜 ‘너의 후손들’이라고 하시지 않고 ‘너의 한 후손’이라고 하셨는지 이해하지 못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그냥 믿었습니다. “아니, 후손들이라고 하지 않고 왜 한 후손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문법도 모르십니까?” 하고 따져 묻지 않고 그냥 그대로 믿은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셈이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너를 이끌어낸 여호와로라.” 하고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증표를 요구하는 아브람에게 삼년 된 암소, 암염소, 수양과 비둘기를 준비하게 하시고 그 쪼갠 사이로 지나시는 확실한 맹세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음 그러나 하나님은 부르신 아브람과 그 후손들에게 즉각적인 복과 영광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왜 하나님은 택하시고 부르신 자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기나긴 400년 세월의 고난을 받게 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그 이유를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지 못 합니다. 아픔과 슬픔을 당해보지 않고 어찌 짐작만으로 알 수 있으며,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고서 어찌 배고픔과 삶의 무게를 알며, 죄악과 병과 죽음과 사랑과 이별의 고통을 당해보지 않고서야 어찌 인생의 의미와 아픔과 슬픔과 죽음의 무서움을 알겠습니까? 인생에 고통이 없다면 즐거움과 기쁨 또한 없을 것입니다. 고통과 죽음과 멸망의 무서움을 모른다면 생명의 감격과 구원의 감사도 모를 것입니다. 애굽의 고통 없이 그대로 가나안 땅을 얻어서 행복하게 살았더라면, 하나님 없는 무서움, 죄악과 죽음, 원수의 핍박과 저주가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서운 것인지를 그들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애굽에서의 죽음과도 같았던 사백년의 기나긴 압제가 없었더라면, 혹은 그 압제가 그저 몇 년이나 몇 십 년 잠시 지나가는 맛보기였다면, 열 가지 재앙으로 원수들을 징치하고 그들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유월절의 감격과 홍해의 기적도 그들에게 큰 감사가 되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사백년이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요? 애굽의 종이 되어 채찍질당하며 할아버지가 죽고, 아버지가 죽고, 아들이 죽고, 또 손자가 죽고.... 아무 소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세월,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신 것만 같은, 떠나버리시고 영영 다시는 오시지 않을 것 같은, 하나님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계시지도 않는 것 같은 고통과 침묵 속에서, 오직 믿음만을 붙잡고 대대로 죽어가고 묻혀지고 썩어지고 사라져가야 하는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백성들은 얼마나 지치고, 얼마나 절망하고, 얼마나 의심하였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고통의 사백년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기나긴 기다림은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나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약속”이었습니다. 절대로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 말입니다. “사백 년 동안”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자라면 누구에게나 있어야 하는 기다림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다만 '젖과 꿀이 흐른 가나안 땅'의 복이었다면 그렇게 기다리게 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의 복이었기 때문에 사백년을 기다리게 하신 것일 것입니다. 고통을 아는 자만이, 슬픔을 아는 자만이, 생명을 갈구하는 자만이 죽음과 같은 기다림을 그리스도의 소망으로 이겨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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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리가 개척하였고, 20여 년간 열과 성을 다하여 분신처럼 아끼면서 섬기던 교회를 젊고 유능한 후임 목사님께 물려준 후, 후임 목사님이 편하게 목회사역을 펼칠 수 있도록 정든 곳을 등지고 머나먼 곳, 낯설고 물 설은 이곳으로 떠나왔다. 이제는 쉬겠다 말하여도 누구 한 사람 나무라지 않을 나이지만 젊어서부터 개척교회에 대한 애착과 특별한 사명이 있는 남편의 뜻에 따라 새로운 지역에 둥지를 트는 즉시 다시 개척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우리가 개척교회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종철 대표님께서 “마음에 감동이 오시면 칼럼 글로써 한번 쓰셨으면 합니다. 저도 개척교회에 대한 애정이 유달라서...” 하신다. “개척교회에 대한 애정이 유다르다.”라고 말씀하신 이종철 대표님의 말씀, 다른 이는 몰라도 나는 인정한다. 그랬다. 내가 아멘넷에 몸담기 시작한 때, 가장 내 마음을 뜨겁게 한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10여 년 전, 그러니까 아멘넷이 창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연히 들른 아멘넷, 마침, 인기절정에 있던 한 분, 칼럼니스트 목사님의 글 아래는 매일같이 열띤 논쟁이 벌어졌고, 나도 관심을 두고 읽다 보니까,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기에 약간 반하는 의견을 남겼다가 의외의 강한 반응을 받았고,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 어차피 미련 둘 이유도 없는 곳, 이참에 아멘넷을 아예 등지면 되는것이다. 떠나기 전, 잠시 눈팅이나 해볼 요량으로 혼자 이리저리 클릭하고 다니던 중, 광고 배너 난에서 나의 시선이 얼어붙는 듯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물론, 아멘넷이 다른 사이트와 달리 짜임새가 알찬 것도 좋았지만, 그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유료 광고 배너 숫자보다 개척교회의 무료 광고 배너 수가 더 많은 아이러니(?) 한 진풍경이었다. 그랬다. 그때 나는 가슴이 뭉클, 어떤 뜨거운 감동이 몰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아멘넷이 이제 첫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것 같았으니, 경제적인 부분 역시 쉽지 않을 것 같았고, 대표님이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여러 가지로 열악한 조건일 것이 자명한데 의외의 편집방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개척교회를 배려하는 마음” 이런 정신으로 일하는 아멘넷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여 아멘넷 발전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싶다고 하는 뜨거운 사명감 같은 것을 강하게 느꼈고 (그 사명감 때문에 때로는 지나치게 깊게 관여를 하려는 통에 어쩌면 아멘넷 대표님을 피곤하게 한 적도 많겠지만…ㅎ) 두리번거리다가, 뒤 꼍 구석진 곳에 보니까 혼자서라도 쉽게 글을 올릴 수 있는 독자공간 게시판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혼자서 부지런히 글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이단이 들어오면 이단의 베일을 벗기느라 애쓰며 논쟁도 불사하였고…이런 별이의 열정에 점점 더 많은 독자님들이 관심을 가져주셨고 한 분 두 분 뜻을 모아 함께 해주시는 분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많은 분이 떠나고 누지문서 장로님과 짐보 형제님 외 몇 분이 남아 계시지만…)

아무튼, 지금까지 내 마음에 큰 감동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 바로 아멘넷의 개척교회에 대한 배려와 따스한 마음이다. 개척교회 담임목사님들의 고충과 어려움이 얼마나 크겠는가? 이번 기회에 개척교회의 어려움은 무엇이며, 그 대안은 무엇인가? 우리 모두 함께 기도하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바라는 마음으로 이글을 정리하게 되었다.

개인적인 견해이기에 모두의 생각이 똑같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더욱 더 나은 견해들을 내려놓고 허심탄회하게 서로 나누는 시간, 이 장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모든 개척교회 목사님과 사모님들께 바치고 싶다.

개척교회의 현주소:

개척교회의 실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없고, 없고, 없다.”이다. 재정이 없고, 건물이 없고, 성도가 없고, 함께 일할 일꾼이 없다. 대형 할인점 때문에 중소상인들이 모두 죽는다고 세상이 아우성치듯, 부끄럽지만, 교계 내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대형교회가 이미도 부른 배를 더 불리기 위해 각종 프로그램으로 성도들을 손짓한다. 우리 교회는 수평이동의 결과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대형교회가 과연 있을까? 이런 기현상을 두고 “양 도둑질”이란 듣기 거북한 소리가 한 때 유행처럼 번져나가던 적도 있었다.

이 싯점에서,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돌아보아야 할 것이 있다. “내 교회 소속된 성도 중 과연 내가 전도해서 키운 성도가 몇 명이나 되는가?” 하는 것, 내 교회 울타리 안의 모든 성도가 진정 내가 전도하여 키운 양 떼들이라고 주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 개척교회 목사님들이 곳곳에서 전도하여 눈물로 기르던 양들, 몇 명 안 되는 양 떼나마 주께로부터 맡았기에 애지중지, 감사하며 기르던 양들인데 좋은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재정적 능력 덕분에, 뛰어난 화술을 달란트로 받은 덕분에, 내 교회로 몰아들여 온 양들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내가 전도하여 키운 양보다 더 많다면?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내 교회의 몸집이 큰 것은 나의 능력이요, 주님이 내게 베푸신 복이라고 자랑하는 것도 좋지만, 그 보다 더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마음을 여는 것이다. 이웃의 약한 개척교회를 돌아보고, 위해서 기도해 주며, 비록 단기별로라도 일꾼을 파송하고, 물질을 풀어 지원해 주기도 하며 ”힘내라.” 토닥여주는 참된 목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진실한 목사님은 진정 찾아볼 수 없는가? 한 세대는 가고 다른 세대가 오기 전, 주 앞에서 생각하며 한 번쯤 반성하며 자성의 목소리를 내어보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분 앞에 서는 날, 후회함이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15 : 20)했다. 물론 이때 말하는 “남의 터”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가 먼저 들어가 복음의 씨앗을 뿌린 곳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말이다. 우리의 본이 되는 바울 사도처럼 목숨 걸고 전도하지는 못한다 하여도 적어도 남이 전도하여 가르친 양들을 몰아올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하겠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개척교회” 는 초대교회와 가장 가까운 교회이며, 우리 주님이 보시기에 가장 이상적인 목회방법이 아닐까 싶다.

개척교회 목회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무엇보다 먼저 마음을 비워야 한다.

무슨 말인가? 비본질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본질에 마음을 다하라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것은 잃은 영혼을 찾아 주님께 인도하는 일이다. 비본질이라 함은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세상 방법을 배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멀어지고 기도하는 시간보다 크게 부흥했다는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프로그램을 줏어오려고 이곳저곳 쫓아다니게 된다. 기도하며 말씀 전하는 일에 주력하기보다 대형교회의 성공방식을 배워 자신의 교회에 접목하려 애쓰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런 것이 과연 옳은 자세일까?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당신의 일꾼을 부르실 때 각 사람의 재능에 따라 부르셨고 사용하기 원하신다. 모두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긴 것이 아니고 모두에게 두 달란트, 혹은 한 달란트를 맡기신 것이 아니란 것이다. 자신이 어떤 달란트로 주님의 양 떼를 섬겨야 할지는 자신도 모른다. 기도로 주님께 아뢰어 보고 주님과의 관계를 먼저 돈독히 하게 되면 다른 것은 부차적이다.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데 주력했다면 실패도 없고 성공도 없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교인 숫자가 많으면 성공했다고 하고 교인 수가 적은 교회의 목회자는 실패한 목사로 볼 수 있지만 과연 우리 주님께서도 그렇게 보실 것인가? 하는 것이다.

대개, 처음 신학교를 졸업하고 개척교회를 시작할 때는 꿈도 많고 비전도 크다. 믿음이란 명분 아래 자신감도 넘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교회가 성장하는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알게 되고 좌절의 벽에 부딪힐 수가 있다. 대체로 개척을 시작한 지 1년에서 2년까지는 그래도 마음에 꿈도 있고 비전도 있고 도와주는 손길도 있어 그렇게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는 통계가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성도 수가 늘어나지 않게 되면 마음이 초조해지고 이때부터 주님을 바라보던 눈을 그치고 대형교회들의 프로그램 위주로 눈을 돌리게 될 수도 있다. 모든 개척교회 사역자분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은 누구를 만나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에 따라 그 삶의 질과 품격이 결정되어 진다고 한다. 삶의 품격이 있는 성도들이 모이는 곳에 가면 자신의 품격도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없지 않아 있다. 개척교회를 나가면 시설면도 그렇고 뭔가 품격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가난하고 찌든 사람들이 모이는 개척교회 목회자와 사모의 옷차림 역시 품격으로 보면 형편없다. 제대로 꾸밀 수도 치장할 수도 없는 현실이니까 그렇다는 말이다. 인간 영혼의 귀중성과는 관계없이 상류층은 상류층의 문화와 경제와 옷차림과 음식과 말투가 있고, 하류층은 하류층의 문화와 경제와 옷차림과 음식과 말투가 따로 있다. 요즘은 ‘금수저 은수저, 심지어 흙수저”라고 비교하던가…

내가 철거민 촌에서 개척교회를 하면 나도 철거민 촌의 주민들과 같이 절로 저질스러워지고, 상스러워지고, 그저 그렇게까지 변해갈 필요야 없겠지만 그 상황을 견뎌내려면 같은 수준이 못되드라도 적어도 비슷한 수준으로라도 내려가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결코 살아 남지 못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낮아지셨음을 배워야 한다. 실천해야 한다. 논리적이고 세련된 설교 스타일, 찬란한 비전과 고급스러웠던 신앙관은 막노동판의 노동꾼 같은 사고와 신앙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필사 각오로 개척에 임해야 한다.

젊은 날, 우리는 철거민 촌에서 개척하였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정말이지 밥을 굶기를 부자가 떡을 먹듯 했고, 일을 하려고 하여도 함께할 일꾼이 없다는 생각에 가슴 아팠던 적도 많았다. 작은 건물이라도 지어야 예배를 드리겠는데, 돈이 없으니 일꾼을 살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이 남편과 내가 한 번도 해보지 않던 막노동을 직접 하기로 했다. 나는 조그만 그릇에 돌과 자갈을 담아 머리에 이고, 남편은 어깨에 메고 우리는 매일같이 작은 언덕길을 오르내리면서 선교부에서 사준 작으마한 밭떼기를 고르고 벽돌을 찧고 했다. 그렇게 몇 개월 노동을 했더니 나중에는 목이 뻣뻣하고 굳어서 움직이기조차 힘들고 아려 밤잠을 설치며 눈물로 기도하였던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원망과 불평 없이 맡은 일에 감사를 느꼈던 것은 나를 위해 죽어주시고 나에게 주님의 일꾼이란 칭호를 붙여주신 우리 주님의 마음이 너무도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많은 유혹이 있었으나 단 한 번도 더 큰 교회나 교단으로 옮겨가려는 마음이 없었던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함께 해주시고 잡아주신 주님의 은혜였다.

아무런 욕심도 없이 주어진 시간에 충성을 다할 때 주님은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어느 순간에 번쩍 들어서 철거민촌을 떠나 외국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내가 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잃어진 한 영혼을 바라보고 험한 길도 마다치 않고 작은 일에 충성을 다 할 때, 주님께서는 그 충성을 바라보고 계시다가 어느날 큰 것으로 맡겨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하고 본질에 충실하려면 먼저 세상 비전(욕심?)으로 가득찬 마음을 비우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좁은 길을 따를 일사 각오(주기철 목사님의 말씀)의 마음으로 바꾸어야 한다.

개척교회를 섬기는 일이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고 오직 주께서 이끌어주신 은혜를 따르는 것이라면 한 영혼도 귀한 것이다. 자칫 세상적인 방법이나 그들의 방법을 도입하려다가 주님께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된다면, 일생을 바쳐 일한다 하여도 그것이 나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기라성 같은 별들,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말로가 어찌 되고 있는가?주님의 부르신 뜻 안에서 충성을 다한다면 교회가 부흥이 안 되어도 좋고 부흥이 크게 된다면 더욱 좋은 것이다. 주 안에서는 실패도 성공도 없는 것이다.

이삭을 줍는 일에 목숨을 걸자.

만물이 소생하는 봄, 아지랑이가 산천을 하얗게 휘감아도는 아직은 이른 봄날, 희망을 노래해야 할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들의 별님, 생뚱맞게도 왠 이삭? 제목을 보며 의아해하셨을 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자연원리나 물리적 현상으로 보면 “이삭”, 그러면 당연히 가을, 그것도 늦가을의 대명사다.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청년의 때나, 장년의 때나 노년기, 어느 때든지 상관없이 주인이 불러들이는 그날이 곧 알곡을 거두어들일 추수기가 되는 셈이다. 꼭 인생 가을추수기에 가서만 거둘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영혼이 아니란 것이다.

이삭줍기의 사전적 의미는 “농작물을 거두고 난 뒤, 논밭에 떨어져 있는 이삭을 줍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농사를 짓거나 농사를 짓지 않아도 시골에서 자란 사람은 안다. 가을이 되어 곡식이 무르익게 되면 농부들이 익은 곡식을 알뜰하게 거두어 들이나. 거두어들이는 과정 속에 수많은 곡식알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데 그것을 주워가는 농부들이 있다. 구약 성경에 나오미의 자부, 룻이 이삭줍기를 하여 그 시모를 공경하다가 주께로부터 큰 복을 받게된 것을 우리는 모두 다 잘 안다. 다시 말해서 땅에 떨어진 곡식이라고 해서 쓸모 없는 허접쓰레기가 아니란 것이다.

대형교회의 지도자들이 뛰어난 두뇌(?)를 활용하여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알차게 정리된 여러 프로그램과 인재들을 잘 활용하여 주님나라에 들어갈 곡식을 열심히 추수해 들이고 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아무리 훌륭한 교회, 잘 갖추어진 교회라고 하여도 그곳에서도 못다 거두어들이는 알곡들이 땅에 떨어져 죽어가고 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 도태되어 있디면 누구 책임일까?

“밭에 추수할 곡식은 휘어졌는데 일꾼이 적다.”고 탄식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 다 함께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렸으면 좋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알곡”이라고 하시고 믿지 않는 자들, 혹은 외형적인 크리스천을 가리켜 ‘가라지’ 라고도 하고 “쭉정이”라고도 하신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 날, 알곡이면 주인의 창고에 들어가겠지만, 만약 쭉정이었다면? 그 영혼이 가야할 곳은 분명히 정해져 있다.

개척교회 사역을 작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다. 땅에 떨어진 이삭, 큰 교회에서 못다 거두어 들여 도태되고 병든 영혼을 전도하고 주님 섬기듯이 섬기면 그 상 또한 기억해 주실 주님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기왕에 개척 교회를 맡았으니 힘을 다하여 이삭줍기에 전력하려 한다. 적은 일에 충성한 착한 종이라며 위로해주실 그분 앞에 서게 되는 그날까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글: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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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 





  구약성경을 읽어나가면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고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구약성경 속에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 곧 예표(豫表), 그리고 하나님의 한결같은 구속사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여자의 후손,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하셨고 이를 위하여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람에게는 아무 공로도 없고 게다가 늙어서 쓸 만한 구석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부르심, 그리고 도우심과 쓰심이 있었을 뿐입니다. 또 아브람이 복을 받은, 또 반드시 복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불러내실 때에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의미하신 복은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부귀영화나, 장수나, 후손이 아닙니다. 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브람은 복의 근원, 곧 예수 그리스도의 통로, 곧 구세주의 계보로 쓰임 받으려고 불러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에게는 복을 받을 자격, 복의 근원이 될 자격,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믿기는커녕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도 못 했고 예수님의 이름도 몰랐습니다. 코앞의 후사 걱정, 아들 없이 죽는 걱정으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하늘의 무수한 별을 보이시면서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후손은 ‘후손들’이 아닌 ‘후손’, 단수명사였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후손을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의미하신 '후손'은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은 이를 정확히 지적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후손’이라고 말씀하신 그 ‘후손’은 복수명사 ‘후손들’이 아닌 단수명사 ‘한 후손’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브람은 “아니, 하나님, 왜 ‘후손들’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후손’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기초문법도 모르십니까?”라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기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셈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를 “아브람의 의”로 여기실(인정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만일 아브람이 굳이 따져서 ‘후손’이 아닌 ‘후손들’의 약속을 받아내고 믿었더라면 의로 여기심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브람이 ‘후손’, 곧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자 그제야 하나님께서는 “나는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로라.” 하심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신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었다면 더 할 게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고 증거를 요구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도 믿지 못 하는 악하고 약한 존재인가 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증거, 예언, 계시 같은 것을 요구하는가 봅니다. ‘나는 여호와로라.’ 하시면서 자신의 이름을 거신 하나님으로서는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믿음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화도 안 내시고 아브람에서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아브람은 이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히브리어로 ‘브릿트’하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습니다. 아브람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솔개가 내려앉을 때 쫓았습니다. 그러다가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났습니다. 히브리어 “브릿트”는 같은 발음이지만 ‘쪼개다’라는 단어도 되고 ‘약속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도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중요한 약속을 할 때 짐승을 쪼개어놓고 그 사이를 함께 지나면서 약속을 합니다. 그 약속을 어길 경우에는 그 짐승처럼 쪼개어져 죽임당하겠다는 뜻이 됩니다. 목숨을 거는 약속인 셈입니다. 거기를 하나님이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로 지나신 것입니다. 아브람은 그리로 함께 지나지 않았습니다. 정작 그 복을 받을 당사자인 아브람은 자빠져(?) 잠자고 하나님 혼자서 ‘하나님의 목숨을 건’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왜 삼년 된 희생물들일까요? 그것들은 삼년 공생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새는 왜 쪼개지 아니하였을까요? 비둘기는 성령을 뜻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솔개는 왜 덤벼들었을까요? 솔개는 훼방하고 의심케 하는 사단의 무리였을 것입니다. 그것을 쫓는 것은 아브람의 몫이었습니다. 그리고 타는 횃불, 한없이 뜨거운 사랑과 ‘열심’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 그 사이를 지나셨습니다. 그것은 그 아들을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실 약속이었습니다. 아들을 쪼개어 지성소의 장막을 가르고 부르신 자들이 그리로 지나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실 것을, 죄인들이 피 흘려 죽으신 그 아들의 몸을 지나면서 그 피로 모든 죄를 씻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복되게 하실 것을 아브람에게 보여주시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그걸 이해했을까요? 못 했겠지요. 그러나 그 광경은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뇌리에 깊이 박혀 일평생 한시도 잊지 못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광경은 피가 흐르는 참혹한 십자가의 광경의 예표였기 때문입니다. 구속함을 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일평생 결코 잊혀질 수 없는 그 참혹한 십자가의 광경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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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이어서
‘세대주의’ 의 시조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로 널리 알려졌고
그는 자신 스스로 성경의 깨달음으로 기존의 전통적인 교리를 부정하고
성경을 재해석하여 그가 찾은 진리의 주장이기에 그의 교리와 서신 등
오컬트 언어를 사용하였고, 런던에서 아일랜드계로 태어나 더블린 트리니티 대학을 졸업, 22세에 변호사가 되었으나 회심한 후 1년 만에 그 직을 사임하고
영국 성공회 성직자가 되었으나 무력한 신앙과 형식에 매인 예배와 성직제에 회의를 갖고 규례 없는 교회생활 등을 강조한 플리머드 형제단(Plymouth Brethren)을 결성하고  특히 성직 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형식에 억매이지 않는 예배와 모임을 갖고 이것이 신약교회를 회복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미국의 무디 부흥운동과 근본주의 운동인 예언 연구 부흥집회를 수십 차례 인도하여
세대주의적 강론으로 부흥회를 이끌었기에 그 영향으로
텍사스 달라스 신학교와 LA 탈봇 신학교 등이 있다.
그는 성경 전체를 나눈
(1) 홍수 이전까지의 족장 세대
(2) 노아 세대
(3) 아브라함 세대
(4) 이스라엘 세대
(5) 이방인 세대
(6) 성령세대
(7) 천년왕국세대 등의 7 세대로 구분 한다.

지난날을 뒤돌아보면
수많은 우리 아버지 연세의 목회자들은 세대주의에 물들어 있었고
그 이유는 와전(訛傳)된 청교도 영향으로 문자적인 해석의 왜곡(歪曲)된
근본주의적 신학의 사조인 청교도 신학 선교사들의 영향이었다.
그래서 ‘천년을 하루 같이’ 해석하여 인류의 역사를 5천년으로 보았고
과학의 발달로 인류학자들인 과학자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는 대세 때문인지, 7세대로 구분한 세대주의의 영향인지 언제부터인가 6천년으로 본다.
이런 영향으로 목사는 구약의 제사장이라는, 계급적인 유교와
신의 중재자라는 토속적인 샤머니즘의 영향으로 신분의 분리를 당연시 하는 풍조가 있어서 강대상 주위에 줄을 묶어놓아 그 지역은 신성한 금지 구역이 되었고 목사는 성별(聖別)된 성인이 되어 있었고, 그 후 하나님의 종은 목사만을 호칭하는 신분이 되어 평신도라 불리는 일반 신자와 신분으로 가르는 반 복음적인 분리가 일반화 되었다.

세대주의는
세대마다 구원의 방식이 다르기에 문자적인 단순하고
비 성경적인 종말론은 그릇된 종말론의 온상이 된 것은
근세의 터툴리안(Tertulianus)으로 한국에서 널리 불리는 존 넬슨 다비의
종말론에 대한 현대적인 형태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재림에 정점에
있게 만들어 전 천년설의 입장을 취하기에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천년왕국이 세워지기 전에 그리스도가 재림할 것이라는
신앙이 한국교회와 해외 한국교회에 널리 퍼졌고
이런 세대주의적 신앙을 갖게 되었다.
한국교회에 (70년대 말로 기억하는) 널리 퍼진  
U.N 그리고 EU 유럽연합의 적그리스도 설 및 세계 종교 통폐합
가톨릭의 종교 통폐합 과 교황의 사탄설과 세계 식민지 화 설.
적그리스도 시리아 탄생 설.
그리고 666을 받으면 지옥 간다는 바코드, 컴퓨터, 신용카드, 베리칩 등
666 설 등의 종말론은 세대주의에 영향을 받았고
이와 달리 세대주의자가 아니면서 극단적인 성경해석으로
이런 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종말이 임박하였다는
조급한 신앙이 이런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또 다른 음모론으로 정치 사회 경제적인 현상을 음모로 단정하여
음모론이 뿌리 깊어 음모론과 음녀론에 이리 저리 흔들리는
한국교계는 얼마나 성경의 깊이가 얇은지,
넉넉한 신앙생활을 잃어버린 반증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세대주의가 다 악은 아니나 성경을 구분하여 이해하기 쉽고
도움이 되는 신학적인 주장도 많으나 세대주의가 대체신학이 되면
복음으로 대책이 없는 사람들이 된다.

세대주의자로 스코필드(C. I. Scofield, 1843-1921),워치만 니(Watchman Nee, 1903- 1972), 조직신학 책을 낸 D. S. Chafer, 무디 성경학교의 교장이었던 James M. Gray, J. Dwight Pentcost, John F. Walvoord 등이 세대주의 체계를 이어나갔고
세대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신학교는
무디 성경학교, 그레이스 신학교, 탈봇 신학교, 웨스턴보수침례신학교,
필라델피아 성경대학, 달라스 신학교 등이 있고
우리나라는
인터콥의 ‘백투 예루살렘’(BTJ)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
한국 이스라엘성서연구소’(KIBI, 대표 온누리 교회 송만석 장로)
온누리 교회 이재훈 목사
온누리 교회 치유 사역자 김성진 장로
온누리 교회 손기철 장로 등이 있다.
온누리 교회는 분별없는 신유 및 회복 사역, 경배와 찬양 등은
이미 오래전에 경건의 모습을 잃었고 온누리 교회가 유별난 이유와 원인은
극단적인 복음의 치우친 세대주의와 세속화된 사역과 감성적인 예배는
감성적인 믿음의 자기 도취(陶醉)로 영혼의 부패를 불러들이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는 이익은 방도가 되었기에 유별난
지도자자들을 배양했고 이는 어그러진 길로 간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지도자들을
닮아 간다고 생각하다 어느 날 중요한 사실을 알았다.

김기동 목사 인터뷰
"장경동 목사, '김기동 이단 아니다' 말하고 다닌다"
김기홍, 김지철, 하용조, 최이식 목사 등도 베뢰아교육 받아...베뢰아 출신 총신 교수는
73년 당시 학생인 듯...
“장경동, 하용조, 김지철, 김기홍 목사도 베뢰아 교육에 참여했다”
김기동 목사(성락침례교회, 베뢰아측)가 2일 한기협 주최 간담회에서
나겸일, 김삼환, 윤석전 목사를 자신의 제자라고 밝힌 것과 총신대 교수 중에도
베뢰아 출신이 있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밝혀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김기동 목사로부터 베뢰아 교육을 받았던 인사들이 추가로 확인돼 파문은
쉽게 가라않지 않을 전망이다.
뉴스파워 기사입력: 2006/10/04 기사 중에서
관련 사이트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6955

이 기사를 읽고 여기 저기 찾아보면서 많은 기사를 읽고
해당되는 사람들의 설교도 들어보고 이해 할 수 있었다.
김기동 출신이라니,
신학 노선(?)을 바꾸기는 인간적으로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고
소위 성령님께서 속과 안을 뒤집어 놓아서 삶과 죽음의 선을 넘나들어야
바뀔 수 있을 만큼 힘들음을 알기에
오래 전부터 이들에 갖는 반감과 의문의 정체를 알수있었다.

이리 저리 세속적인 부흥의 물결에 흔들리다 성장의 늪에 빠져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한 불쌍한 대한민국과 미주 교회여,
하나님, 긍휼을 내려주소서.

아멘넷의 기사
유대인을 위한 '샬롬 예루살렘, 브루클린 페스티벌'
http://www.usaamen.net/news/board.php?board=news&command=body&no=7590

이들의 특징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문자적인 것은 문자적, 상징적인 것은 상징적, 비유적인 것은 비유적,
계시적인 것은 계시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몽땅 다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땅과 국가,
성전 회복 등이 이루어져 성경의 약속들이 문자적으로
무조건 이루어진다고 본다.
세대주의 문제점은 성경을 비틀어서
예수님의 복음을 유대인이 거부함으로
(이곳 데살로니가 교회도 바울일행이 유대인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고
예수님의 제자와 바울 그리고 그의 동역 자들, 또 예수님이 인도한 수많은 무리들은
모두 이방인들 인가?)
이방교회가 생겨났다는 대체신학이
첫 번째 위험한 것은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의에,
공의에 벗어나는 주장이라
부인이고 복음의 어그러진 길이며
예수님이 말씀인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에 나로 말미암고는’ 는
누구든지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는,
예수님 말씀을 시인 하는 듯 하면서 부인하기에
복음을, 전 인류를 위한 능력됨을 부인하고 비틀어
복음의 능력을 감소시킴은 물론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면 오신다는 성경 구절을 이스라엘에 국한(局限)
시켜 종당에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킨다는
제한된 교회관은 두 번째 위험한 사이비의 주장일 뿐이다.
또 아브라함을 통한 유대적인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은
요한 계시록을 교회가 아닌 유대인을 위한 계시록이라 이방인 교회는
곁들어 구원 받는 존재일 뿐이라 하나님은 아직도 이스라엘만 사랑하시는
하나님인가?
그토록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선택한
이스라엘만을 단념할 수 없으신 애착을 가지신 편협하신 하나님이신가?
그렇다면 구약의 이스라엘인들은 풍요와 평화만을 누렸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스라엘의 패악으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였는데
이를 부정할 수 있는가?
일부만 선택된, 일부의 사람들을 위한 비틀린 복음,
그건 복음이 아니다.

"메시아(그리스도)의 과업은 두 개의 집을 짓는 것이다.
하나는 하나님의 집(성전)이요, 또 하나는 다윗의 집(유다 왕국)이다.
유대교인은 그 집을 지을 자인 메시아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여긴다.
집이 지어져야 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인데,
그 터에는 이슬람 사원이 자리 잡고 있다.
결국 그 이슬람 사원이 먼저 무너지고, 그곳에 메시아의 집이 지어진다는 것이다.
"정형남 선교사
출처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1757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으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함이라
빌립보서 2:15-16]





 

 

내 기억 속에 그대

                            최송연

 

내 기억 속에 늘 아름다운 그대,

따뜻한 배려가 있는 마음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늘 감사한 그대,

   힘들 때 따스하게 손잡아  준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늘 불쌍한 그대,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모습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늘 부러운 그대,

      역경을 딛고 일어선 용기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영원히 간직하고픈 그대,

      한없이 쏟아부어준 그 사랑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영원히 지우고 싶은 그대,

   내게 아픔을 준 모진 말들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늘 안타까운 그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매일 매 순간, 그대 하는 말이, 그대 행동이
      너와 나, 우리에게 기억되는 것임을...

     사랑으로 수놓으며 예쁘게 살아요,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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