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곳곳에서 교회를 지탄하는 소리 드높아만 가고, 세상의 빛으로 밝게 빛나야 할 등불로서의 교회가 점점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성도들을 주님 앞으로 이끌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청결하고 정직한 삶으로 본을 보여주어야 할 영적 지도자들 중, 모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이, 기준도, 잣대도, text도 주어지지 않았던 암흑기, AD 시대, 예수님 오시기 전 약 400여 년 전 그때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혼돈하고 공허한 길, 넓은 길, 어그러진 길로 달려가고 있음을 보면서 안타깝다.(나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기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임을 고백한다.)

무엇 때문일까? 지금은 그때 그 시대와 분명 다르지 않은가? 무엇보다 신구약 66권으로 잘 엮어진 정경, 하나님의 말씀이 손에 들려져 있는 축복의 시대에서 사는 우리다. 그럼에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성도라고 자처하는 사람 중, 많은 사람이 '시날의 아름다운 외투'에 눈이 먼 탓이며, 주님 다시 오심을 보는 그날이 가까워 올수록 주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려는 사람들보다 ‘시날의 아름다운 외투’에 마음을 빼앗기는 목회자들, 성도들이 더 많아질 것이니 너희는 그 길에서 속히 돌이켜 떠나야 한다.”라는 성령님의 음성이 이 아침에 큰 울림으로 내 영혼을 때리며 들려온다.. 그렇다면, 시날의 아름다운 외투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1. 시날(r[;n]vi )의 역사적 배경:

시날(r[;n]vi ), (신아르), 시날(shinar)은 강 두 사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시날을 둘러 있는 두 강은 티그리스 강과 유브라데 강으로 고대 문명의 발상지의 유명한 지역을 의미한다. 이 지역은 수메르인들에 의하여 수메르와 아카드로 알려졌으며 후에는 바벨로니아로 알려지게 되었다. 창10:10에서 위대한 전제 군주이자 제국 창설자인 니므롯이 시날 땅의 바벨, 에렉(수메르 어로는 우룩), 악갓(아가데), 갈레에 그의 왕국을 건설했다고 한다. 니므롯은 여기서부터 북쪽으로 앗수르까지 밀고 나아갔으며(창10:10), 패역한 인간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반항하여 그 유명한 바벨탑을 세운 곳이 바로 이곳 시날이었다(창11:2).

주후 1세기에 이르러서도 요한은 이 종교 제도를 언급하여 바벨론을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칭하였다(계17:5). 탐사자들은 바벨론의 위치는 힐라옵 동북방 9.6km 지점과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 남쪽 80km 지점이며,지금도 그곳에는 예루살렘의 왕을 잡아다가 유폐시켰던 현장을 비롯하여 53개의 신전(神殿)과1,300개의 제단이 더러는 부서진 채 남아 있다고 한다. 아간이 훔친 외투는 시날의제품이었으며(수7:21), 정확히 설명할 수 없으나 전부 금실로 짠 매우 값진 수놓은 옷인 것 같다.(참조: H. J. Austel; Wycliffe BE). 잠시 살펴본 대로, 시날은 음란의 도시, 교만의 도시, 맘몬(Mammon, 재물의 신)이 장악한 곳,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악의 도시를 상징함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 바쳐진 물건, 하나님께 드려진 그 구별된 물건에 욕심을 부렸던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과 그 가족이 망하고, 아무 죄없던 그 이웃마저 큰 고난을 당한 이유가 바로 그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때문이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아이성과의 전투에서 참패했고, 결국 아간은 그 범죄로 인해 자신이 사랑하던 아들들, 딸들, 소들, 나귀들, 양들과 장막 그리고 그가 흠모하여 훔친 시날의 아름다운 외투, 금과 은과 함께 돌무더기에 깔리고 불살라져서 아골 골짜기에 묻혀버렸다.

여호수아서의 기자는 그때 여호와께서 극렬히 분노하셨다고 표현했다(수 6:21~26). 이것은 하나님께 드려진 구별된 물건에 대한 욕심을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미워하시는 일인가 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사건이다. 이렇게 나 한 사람이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에 미혹되어 눈이 멀게 되면, 나도 망하고 내가 속한 공동체 전부가 망하거나 아니면 큰 해를 당하게 된다.

2.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

앞에서 잠시 살펴본 대로, 시날산의 외투는 아름답기 그지없고 엄청나게 값진, 금실로 짠 옷으로서, 그 외투를 한 번 보게 되면 누구나 탐낼만한 매력적인 물건인 것과 동시에, 내 것이 아닌, 하나님께 드려진 것으로써 인간이 가로채서는 안될 그 무엇,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과의 언약 파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것은 ‘금지된 실과,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에도 비유될 수 있다. 영적으로,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이지만 따먹어서는 안 될 선악과, 취해서는 안 될 그 모든 것을 총칭한다고 보아도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런 것을 전제로,

a) 성도는 금지된 물욕(物慾)을 제어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날산의 외투는 영적으로 물질이다. 현대는 맘몬(mammon), 재물의 신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말세지말이다. 성도는 내게 허락되지 않은 물질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 물욕, 곧 금지된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를 탐내는 마음을 제어하지 못해서 직장에서 신임을 잃고 해고를 당하기도 하고 더 심하면 그 물질 때문에 자살까지도 하게 된다. 목회자들이라하여 이에서 제외된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목회자들, 특히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헌금을 자신의 임의대로 유용하는 것이나, 정한 사례비 외에 판공비를 받아 개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이와 같다고 본다. 물론 목회자가 정해진 사례비 외에 목회 활동비가 있어야 구제도 하고 선교도 하고 주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목회 활동비를 100% 그 용도 그대로 정직하게 사용하지 않는 데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약 1:15)는 말씀은 가롯 유다에게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물질을 탐하던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기에 이르렀다.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다.” (마 26:24)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는 결국 예수님을 팔고 받은 돈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가룟 유다의 사건은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물질을 탐하다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 좋은 예가 된다. 오늘날 주의 종으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예임에 틀림없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 그 어떤 직위를 받았다고 하여 그 직위 자체가 구원을 줄 것이란 생각을 버려야 한다. 가롯 유다도 사도로 택함을 입었지만, 그 직위가 그를 구원시키지 못했다.

b) 성도는 금지된 정욕(情慾)을 제어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최대의 선물이 性인 동시에 잘못 사용하면 최대의 죄악도 바로 性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스러운 곳이다. 침소를 더럽히지(히 13:4절 참조) 말아야 한다. 성경에 별처럼 빛나던 인물들이 이 부분에서 실패했다. 모세도 이방인이었던 구스여인을 취하여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므로 그의 권위가 많이 실추되었다.(민 12:1). 다윗이 위대한 왕이었지만 남의 아내 밧세바, 금지된 성(性)을 취하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그녀의 남편이자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 장수, 우리아를 전쟁터로 내보내 죽이는 비행을 저지른다. 삼손은 나실인이었으나, 이방 여인이요, 기생이었던 ‘들리라’를 탐했다가 두 눈 모두 빼이고 결국 목숨마저 잃게 되었다.

c) 성도는 금지된 명예욕을 제어해야 한다.

명예욕은 정말 무섭다. 이 명예욕은 사단의 속성이다. 그는 하나님처럼 높아지려 하다 쫓겨난 천사라는 기록이 있다. (겔 28장 참조) 명예욕이 무서운 것은 그 속성 때문이다. 올라가려고 하는 자는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며 시기와 질투하는 마음은 자신의 뼈를 썩게 한다.(잠 14:30절 참조) 동생을 시기한 가인은 최초의 살인자란 오명을 영원히 남길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요셉의 열한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그를 애굽의 종으로 팔았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시기해서 십자가에 넘겼다.(마 27:18, 막 15:10 참조)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는가.

성경에 이런 일들을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거울로 주신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전 10:6, 11절 참조)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라. 문제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이런 경고의 말씀에는 아예 귀를 막아 버린다는데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선한 말씀을 오용 내지, 악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구원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그리고 한 번 구원은 영원 구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업신여기는 행위를 믿음의 행위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중략-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17, 26절 말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情과 慾心)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절 말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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