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우리 교회의 여자 성도님들은 중년의 위기를 극복하고 대장의 연동운동을 활성화 시켜서 변비를 막아보려는 목적으로 훌라후프 돌리기가 한창이랍니다. 그리고 훌라후프를 많이 돌리면 허리둘레도 날씬해진다고 하네요….^^

얼마 전, 교회 대청소가 끝난 후 식당에 모여 앉아 Coffee를 마시며 쉬고 있던 여자 집사님들이 너도나도 훌라후프 예찬론과…하루에 45분 혹은 1시간씩 훌라후프를 돌렸더니 허리 둘레가 몇 인치 줄었다는 등…, 여기저기서 열변들을 토했습니다.

“사모님! 사모님도 훌라후프 좀 해보세요! 매일 아프다고만 하시니 어디 덕이 됩니까?” 그중에서 입이 잽싸기로 유명한 멋쟁이 H. 집사님의 일침이었습니다. 이크, 그렇지 않아도 자신이 없어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내게 그만… 불똥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렇구나…내가 약하면 남에게 덕이 되지를 않겠구나…, 나도 훌라후프라도 좀 배워야 하는가…?” 어릴 적부터 저는 유난히도 유약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내 어머니의 근심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자랄 때 별로 심한 운동을 해 본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젊을 때야 운동을 많이 하는 사람이건 운동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건 겉으로 봐서 별반 차이가 나지를 않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유약해 보이는 내 모습이 더 여성(?)스럽다며 조금은 우악스럽고 건장하게 생긴 내 친구 애들은 골골이 나를 부러워하며 생짜로 몇 끼씩 굶기도 했다는군여…. 그런데 그것이 중년을 넘기면서 이렇게까지 나를 괴롭힐 줄이야… “으잉…나도 운동을 해야지…”

나는 돌아오는 길에 당장 근처 슈퍼에 들러서 건강에 그만이라는 굵직한 자석이 잔뜩 달린 예쁜 훌라후프를 40불이라는 거금(?)을 주고 하나 샀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누가 볼세라 방에 숨어서 문을 걸어 잠그고 그 예쁜 훌라후프를 몸에 걸었습니다. 그리고 멋지게(?) 폼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보지만… 아뿔싸…평소에 운동을 제대로 해 두지 못한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돌리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놈의 훌라후프가 자꾸만 내 몸에서 튕겨져 나가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튕겨져 나가 떨어지면서 그 훌라후프에 달린 자석들이 나를 여기저기 사정 없이 때리는 통에 순식간에 내 몸은 시퍼렇게 피멍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엉…엉…

운동이란 평소에 늘 연습을 해야만 하고 어느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배운 셈이지요.

영적인 일도 그러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흘리신 피를 믿고 구원(Salvation) 받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는 것은 그리 만만치가 않습니다. 성화(sanctification)되는 것은 부단한 노력과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막의 교부나 수도사들은 물통 하나, 식기 몇 개 달랑 들고 광야생활을 합니다. 낮이면 내리쬐는 햇볕 아래서 광야를 헤매기도 하고, 밤이면 딱딱한 암석바닥에 마른 풀을 깔고 누워서 잠을 잡니다. 고행과 절제의 생활로 자신을 쳐 복종시키자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런 강한 훈련을 함으로써 자신을 세속으로부터 지키려 하는 것은 자기 속에 잠복해 있는 동물적 본능, 나태함과 온갖 육신적인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물리치고 오직 주님만을 그리워하는 자신임을 증명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물론, 우리 성도들은 사막의 수도사나 교부들 같은 그런 맹훈련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속에 숨겨져 있는 세상에 속한 정욕의 찌꺼기들이 여전히 남아 있어 자신을 괴롭힌다면, 그것까지라도 주님께 기도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침을 받는 것이 자기 자신의 땡볕 고행, 금욕, 금기의 고행보다 몇 배나 더 능률적이고 더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여도 성도가 자신들의 속에 있는 세상 정욕을 물리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 역시 성도의 길을 제대로 걸어갈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많은 사역자님이 자기 자신을 쳐서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시키는 일, 매일의 삶 속에서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을 가르치려는 생각보다는 다른 사람 정죄하기에 바쁜 것 같고, 또 어떤 사람은 솔직한 것이 좋다고 하여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무절제한 지도자들의 어그러진 사생활 때문에, 이것을 바라보는 보다 연약한 영혼에 큰 상처를 입히고, 자기 자신은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유혹이란 무서운 덫에 걸려 넘어지게 된다고 봅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절제 하나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케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 25상, 27절)”하고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진실한 성도라면, 머리와 언어, 그리고 가슴이 일치하지 않는 행위, 외식하는 행위도 배제해야겠지만, 절제하지 못하고 쏟아 놓는 무절제한 언어생활이나 행동은 더욱 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절제되지 못한 언행 심사는 결국 방탕함으로 치닫고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파괴하는 무서운 요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삶의 절제가 없이 무절제한 사람은 , 설사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죄를 자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외식이란, 속과 겉이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절제는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매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절제되며 정제된 아름다운 언어와 선한 생각들을 연습(Practice)할 때 주님께로부터 칭찬받고, 세상으로부터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인정받는 멋진 삶을 남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망의 1월도 다 지나고 벌써 2월로 접어들었습니다. 나의 살아온 날이 얼마가 되었던, 오늘 이 시간까지 훈련되지 못한 삶, 후회스러운 세월들로 얼룩졌다고 해도, 아직 늦지 않습니다. 지금부터라도 가정에서는 어버이들이, 교회에서는 영적 지도자들이, 직장에서는 상사들이, 정치계에서는 정치 지도자들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실천 실행하여 우리들의 사랑스런 자녀들과 후대에 좋은 본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훈련된 건강한 개인, 건강한 사회, 건강한 교회, 건강한 국가를 세워나갈 수만 있다면 이에서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을까? 매일의 삶에서 허리둘레를 줄여나가듯, 나쁜 습성들을 줄여나가는 훈련을 나부터 실행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전 4: 7-8절 말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로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약1:27절 말씀)"

 

 
출처: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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