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줍기는 귀하다
최송연의 신앙칼럼 2016. 3. 10. 03:25
얼마 전, 우리가 개척하였고, 20여 년간 열과 성을 다하여 분신처럼 아끼면서 섬기던 교회를 젊고 유능한 후임 목사님께 물려준 후, 후임 목사님이 편하게 목회사역을 펼칠 수 있도록 정든 곳을 등지고 머나먼 곳, 낯설고 물 설은 이곳으로 떠나왔다. 이제는 쉬겠다 말하여도 누구 한 사람 나무라지 않을 나이지만 젊어서부터 개척교회에 대한 애착과 특별한 사명이 있는 남편의 뜻에 따라 새로운 지역에 둥지를 트는 즉시 다시 개척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우리가 개척교회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종철 대표님께서 “마음에 감동이 오시면 칼럼 글로써 한번 쓰셨으면 합니다. 저도 개척교회에 대한 애정이 유달라서...” 하신다. “개척교회에 대한 애정이 유다르다.”라고 말씀하신 이종철 대표님의 말씀, 다른 이는 몰라도 나는 인정한다. 그랬다. 내가 아멘넷에 몸담기 시작한 때, 가장 내 마음을 뜨겁게 한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10여 년 전, 그러니까 아멘넷이 창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연히 들른 아멘넷, 마침, 인기절정에 있던 한 분, 칼럼니스트 목사님의 글 아래는 매일같이 열띤 논쟁이 벌어졌고, 나도 관심을 두고 읽다 보니까,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기에 약간 반하는 의견을 남겼다가 의외의 강한 반응을 받았고,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 어차피 미련 둘 이유도 없는 곳, 이참에 아멘넷을 아예 등지면 되는것이다. 떠나기 전, 잠시 눈팅이나 해볼 요량으로 혼자 이리저리 클릭하고 다니던 중, 광고 배너 난에서 나의 시선이 얼어붙는 듯했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물론, 아멘넷이 다른 사이트와 달리 짜임새가 알찬 것도 좋았지만, 그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유료 광고 배너 숫자보다 개척교회의 무료 광고 배너 수가 더 많은 아이러니(?) 한 진풍경이었다. 그랬다. 그때 나는 가슴이 뭉클, 어떤 뜨거운 감동이 몰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아멘넷이 이제 첫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것 같았으니, 경제적인 부분 역시 쉽지 않을 것 같았고, 대표님이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여러 가지로 열악한 조건일 것이 자명한데 의외의 편집방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개척교회를 배려하는 마음” 이런 정신으로 일하는 아멘넷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여 아멘넷 발전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싶다고 하는 뜨거운 사명감 같은 것을 강하게 느꼈고 (그 사명감 때문에 때로는 지나치게 깊게 관여를 하려는 통에 어쩌면 아멘넷 대표님을 피곤하게 한 적도 많겠지만…ㅎ) 두리번거리다가, 뒤 꼍 구석진 곳에 보니까 혼자서라도 쉽게 글을 올릴 수 있는 독자공간 게시판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혼자서 부지런히 글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이단이 들어오면 이단의 베일을 벗기느라 애쓰며 논쟁도 불사하였고…이런 별이의 열정에 점점 더 많은 독자님들이 관심을 가져주셨고 한 분 두 분 뜻을 모아 함께 해주시는 분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많은 분이 떠나고 누지문서 장로님과 짐보 형제님 외 몇 분이 남아 계시지만…)
아무튼, 지금까지 내 마음에 큰 감동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 바로 아멘넷의 개척교회에 대한 배려와 따스한 마음이다. 개척교회 담임목사님들의 고충과 어려움이 얼마나 크겠는가? 이번 기회에 개척교회의 어려움은 무엇이며, 그 대안은 무엇인가? 우리 모두 함께 기도하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바라는 마음으로 이글을 정리하게 되었다.
개인적인 견해이기에 모두의 생각이 똑같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더욱 더 나은 견해들을 내려놓고 허심탄회하게 서로 나누는 시간, 이 장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모든 개척교회 목사님과 사모님들께 바치고 싶다.
개척교회의 현주소:
개척교회의 실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없고, 없고, 없다.”이다. 재정이 없고, 건물이 없고, 성도가 없고, 함께 일할 일꾼이 없다. 대형 할인점 때문에 중소상인들이 모두 죽는다고 세상이 아우성치듯, 부끄럽지만, 교계 내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대형교회가 이미도 부른 배를 더 불리기 위해 각종 프로그램으로 성도들을 손짓한다. 우리 교회는 수평이동의 결과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대형교회가 과연 있을까? 이런 기현상을 두고 “양 도둑질”이란 듣기 거북한 소리가 한 때 유행처럼 번져나가던 적도 있었다.
이 싯점에서,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돌아보아야 할 것이 있다. “내 교회 소속된 성도 중 과연 내가 전도해서 키운 성도가 몇 명이나 되는가?” 하는 것, 내 교회 울타리 안의 모든 성도가 진정 내가 전도하여 키운 양 떼들이라고 주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 개척교회 목사님들이 곳곳에서 전도하여 눈물로 기르던 양들, 몇 명 안 되는 양 떼나마 주께로부터 맡았기에 애지중지, 감사하며 기르던 양들인데 좋은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재정적 능력 덕분에, 뛰어난 화술을 달란트로 받은 덕분에, 내 교회로 몰아들여 온 양들이라고 한다면? 그들이 내가 전도하여 키운 양보다 더 많다면?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내 교회의 몸집이 큰 것은 나의 능력이요, 주님이 내게 베푸신 복이라고 자랑하는 것도 좋지만, 그 보다 더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마음을 여는 것이다. 이웃의 약한 개척교회를 돌아보고, 위해서 기도해 주며, 비록 단기별로라도 일꾼을 파송하고, 물질을 풀어 지원해 주기도 하며 ”힘내라.” 토닥여주는 참된 목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진실한 목사님은 진정 찾아볼 수 없는가? 한 세대는 가고 다른 세대가 오기 전, 주 앞에서 생각하며 한 번쯤 반성하며 자성의 목소리를 내어보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분 앞에 서는 날, 후회함이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15 : 20)했다. 물론 이때 말하는 “남의 터”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가 먼저 들어가 복음의 씨앗을 뿌린 곳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말이다. 우리의 본이 되는 바울 사도처럼 목숨 걸고 전도하지는 못한다 하여도 적어도 남이 전도하여 가르친 양들을 몰아올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하겠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개척교회” 는 초대교회와 가장 가까운 교회이며, 우리 주님이 보시기에 가장 이상적인 목회방법이 아닐까 싶다.
개척교회 목회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무엇보다 먼저 마음을 비워야 한다.
무슨 말인가? 비본질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본질에 마음을 다하라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것은 잃은 영혼을 찾아 주님께 인도하는 일이다. 비본질이라 함은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세상 방법을 배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멀어지고 기도하는 시간보다 크게 부흥했다는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프로그램을 줏어오려고 이곳저곳 쫓아다니게 된다. 기도하며 말씀 전하는 일에 주력하기보다 대형교회의 성공방식을 배워 자신의 교회에 접목하려 애쓰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런 것이 과연 옳은 자세일까?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당신의 일꾼을 부르실 때 각 사람의 재능에 따라 부르셨고 사용하기 원하신다. 모두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긴 것이 아니고 모두에게 두 달란트, 혹은 한 달란트를 맡기신 것이 아니란 것이다. 자신이 어떤 달란트로 주님의 양 떼를 섬겨야 할지는 자신도 모른다. 기도로 주님께 아뢰어 보고 주님과의 관계를 먼저 돈독히 하게 되면 다른 것은 부차적이다.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데 주력했다면 실패도 없고 성공도 없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교인 숫자가 많으면 성공했다고 하고 교인 수가 적은 교회의 목회자는 실패한 목사로 볼 수 있지만 과연 우리 주님께서도 그렇게 보실 것인가? 하는 것이다.
대개, 처음 신학교를 졸업하고 개척교회를 시작할 때는 꿈도 많고 비전도 크다. 믿음이란 명분 아래 자신감도 넘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교회가 성장하는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알게 되고 좌절의 벽에 부딪힐 수가 있다. 대체로 개척을 시작한 지 1년에서 2년까지는 그래도 마음에 꿈도 있고 비전도 있고 도와주는 손길도 있어 그렇게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는 통계가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성도 수가 늘어나지 않게 되면 마음이 초조해지고 이때부터 주님을 바라보던 눈을 그치고 대형교회들의 프로그램 위주로 눈을 돌리게 될 수도 있다. 모든 개척교회 사역자분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은 누구를 만나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에 따라 그 삶의 질과 품격이 결정되어 진다고 한다. 삶의 품격이 있는 성도들이 모이는 곳에 가면 자신의 품격도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없지 않아 있다. 개척교회를 나가면 시설면도 그렇고 뭔가 품격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가난하고 찌든 사람들이 모이는 개척교회 목회자와 사모의 옷차림 역시 품격으로 보면 형편없다. 제대로 꾸밀 수도 치장할 수도 없는 현실이니까 그렇다는 말이다. 인간 영혼의 귀중성과는 관계없이 상류층은 상류층의 문화와 경제와 옷차림과 음식과 말투가 있고, 하류층은 하류층의 문화와 경제와 옷차림과 음식과 말투가 따로 있다. 요즘은 ‘금수저 은수저, 심지어 흙수저”라고 비교하던가…
내가 철거민 촌에서 개척교회를 하면 나도 철거민 촌의 주민들과 같이 절로 저질스러워지고, 상스러워지고, 그저 그렇게까지 변해갈 필요야 없겠지만 그 상황을 견뎌내려면 같은 수준이 못되드라도 적어도 비슷한 수준으로라도 내려가야 한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결코 살아 남지 못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낮아지셨음을 배워야 한다. 실천해야 한다. 논리적이고 세련된 설교 스타일, 찬란한 비전과 고급스러웠던 신앙관은 막노동판의 노동꾼 같은 사고와 신앙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필사 각오로 개척에 임해야 한다.
젊은 날, 우리는 철거민 촌에서 개척하였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정말이지 밥을 굶기를 부자가 떡을 먹듯 했고, 일을 하려고 하여도 함께할 일꾼이 없다는 생각에 가슴 아팠던 적도 많았다. 작은 건물이라도 지어야 예배를 드리겠는데, 돈이 없으니 일꾼을 살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이 남편과 내가 한 번도 해보지 않던 막노동을 직접 하기로 했다. 나는 조그만 그릇에 돌과 자갈을 담아 머리에 이고, 남편은 어깨에 메고 우리는 매일같이 작은 언덕길을 오르내리면서 선교부에서 사준 작으마한 밭떼기를 고르고 벽돌을 찧고 했다. 그렇게 몇 개월 노동을 했더니 나중에는 목이 뻣뻣하고 굳어서 움직이기조차 힘들고 아려 밤잠을 설치며 눈물로 기도하였던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원망과 불평 없이 맡은 일에 감사를 느꼈던 것은 나를 위해 죽어주시고 나에게 주님의 일꾼이란 칭호를 붙여주신 우리 주님의 마음이 너무도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많은 유혹이 있었으나 단 한 번도 더 큰 교회나 교단으로 옮겨가려는 마음이 없었던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함께 해주시고 잡아주신 주님의 은혜였다.
아무런 욕심도 없이 주어진 시간에 충성을 다할 때 주님은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어느 순간에 번쩍 들어서 철거민촌을 떠나 외국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내가 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잃어진 한 영혼을 바라보고 험한 길도 마다치 않고 작은 일에 충성을 다 할 때, 주님께서는 그 충성을 바라보고 계시다가 어느날 큰 것으로 맡겨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면서 최선을 다하고 본질에 충실하려면 먼저 세상 비전(욕심?)으로 가득찬 마음을 비우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좁은 길을 따를 일사 각오(주기철 목사님의 말씀)의 마음으로 바꾸어야 한다.
개척교회를 섬기는 일이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고 오직 주께서 이끌어주신 은혜를 따르는 것이라면 한 영혼도 귀한 것이다. 자칫 세상적인 방법이나 그들의 방법을 도입하려다가 주님께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된다면, 일생을 바쳐 일한다 하여도 그것이 나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기라성 같은 별들,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말로가 어찌 되고 있는가?주님의 부르신 뜻 안에서 충성을 다한다면 교회가 부흥이 안 되어도 좋고 부흥이 크게 된다면 더욱 좋은 것이다. 주 안에서는 실패도 성공도 없는 것이다.
이삭을 줍는 일에 목숨을 걸자.
만물이 소생하는 봄, 아지랑이가 산천을 하얗게 휘감아도는 아직은 이른 봄날, 희망을 노래해야 할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들의 별님, 생뚱맞게도 왠 이삭? 제목을 보며 의아해하셨을 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자연원리나 물리적 현상으로 보면 “이삭”, 그러면 당연히 가을, 그것도 늦가을의 대명사다.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청년의 때나, 장년의 때나 노년기, 어느 때든지 상관없이 주인이 불러들이는 그날이 곧 알곡을 거두어들일 추수기가 되는 셈이다. 꼭 인생 가을추수기에 가서만 거둘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영혼이 아니란 것이다.
이삭줍기의 사전적 의미는 “농작물을 거두고 난 뒤, 논밭에 떨어져 있는 이삭을 줍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농사를 짓거나 농사를 짓지 않아도 시골에서 자란 사람은 안다. 가을이 되어 곡식이 무르익게 되면 농부들이 익은 곡식을 알뜰하게 거두어 들이나. 거두어들이는 과정 속에 수많은 곡식알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데 그것을 주워가는 농부들이 있다. 구약 성경에 나오미의 자부, 룻이 이삭줍기를 하여 그 시모를 공경하다가 주께로부터 큰 복을 받게된 것을 우리는 모두 다 잘 안다. 다시 말해서 땅에 떨어진 곡식이라고 해서 쓸모 없는 허접쓰레기가 아니란 것이다.
대형교회의 지도자들이 뛰어난 두뇌(?)를 활용하여 각종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알차게 정리된 여러 프로그램과 인재들을 잘 활용하여 주님나라에 들어갈 곡식을 열심히 추수해 들이고 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아무리 훌륭한 교회, 잘 갖추어진 교회라고 하여도 그곳에서도 못다 거두어들이는 알곡들이 땅에 떨어져 죽어가고 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이 도태되어 있디면 누구 책임일까?
“밭에 추수할 곡식은 휘어졌는데 일꾼이 적다.”고 탄식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 다 함께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렸으면 좋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알곡”이라고 하시고 믿지 않는 자들, 혹은 외형적인 크리스천을 가리켜 ‘가라지’ 라고도 하고 “쭉정이”라고도 하신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 날, 알곡이면 주인의 창고에 들어가겠지만, 만약 쭉정이었다면? 그 영혼이 가야할 곳은 분명히 정해져 있다.
개척교회 사역을 작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다. 땅에 떨어진 이삭, 큰 교회에서 못다 거두어 들여 도태되고 병든 영혼을 전도하고 주님 섬기듯이 섬기면 그 상 또한 기억해 주실 주님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기왕에 개척 교회를 맡았으니 힘을 다하여 이삭줍기에 전력하려 한다. 적은 일에 충성한 착한 종이라며 위로해주실 그분 앞에 서게 되는 그날까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글: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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