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의 쌓은 단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흔히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신 아브람이 위대한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봅시다. 아버지 데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 땅에 살고 있던 아브람과 사래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그들의 나이는 이미 75세, 65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세상기준으로 볼 때 그들은 결코 복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만일 자녀가 여럿 있고 유복하고 풍족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아무리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하게 하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어도 그 말씀을 믿고 따라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부요한 자에게 하나님이나 천국은 별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이 애통한 자에게야 하나님과 천국은 절실한 것입니다. 가난한 심령과 애통함이 복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찾아오시려고 주시는 고난이요 가난과 애통이라면 그것이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브람과 사래가 하나님을 따라 나선 것은 그들의 삶이 너무나 고달프고 세상에 아무 소망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그들이 가나안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도착해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곳 땅은 헷 족속 가나안 족속이 차지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 ‘내가 이 땅을 너희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이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습니다. 그리고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갑니다.

하나님은 왜 아브람 당대에 가나안 땅을 아니 주시고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아브람은 왜 하나님의 이 말씀에 아무 불만을 나타내지 않았을까요? 보통 사람 같으면 “아니, 하나님, 약속이 틀리잖아요. 하나님 믿으면 복 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자손에게 주시려면 왜 벌써 저를 불러내어 이 고생 시키십니까?” 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자손’이지만 히브리 원문은 ‘아들’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진리와 구원의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상입니다. 아브람의 아들에게 주시겠다는 말씀은 아브람 자신에게 주시겠다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아들을 내어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내어주시겠다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같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아들이 사는 한 아브라함 자신도 살아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믿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내게 살아계시면 하나님이 내게 살아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못 들어보았느냐?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눈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안 보이니 죽었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 노릇을 하시는 하나님이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변화산 사건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단을 쌓고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동편으로 옮기고 다시 남방으로 옮겨 가면서도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시날 평지에서 사람들이 쌓았던 것은 자신들을 위하여 자기들의 이름을 내려는 탑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쌓은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단이었습니다. 높이 쌓지도 않았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높이 쌓아봐야 하늘에 닿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오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궁핍하고 형통하지 못 한 아브람과 사래를 가나안으로 이끌어내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 뜻이, 그들의 가나안의 삶, 그 여정과 고통과 외로움과 기다림의 세월을 창세기에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 이끌려 나온 자들에게 무엇을 위하여 살며 어떻게 살아가라는 것을 말씀하려 하심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도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작은 단을 쌓기 원합니다. 이 광야같은 인생길, 어디에 가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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