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들에게 무슨일이 일어났는가? (1)

 

공룡은 어른들과 아이들에게 오래된 지구의 연대에 대한 생각을 세뇌하기 위하여 그 다른 어떤 것보다도 많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들이 언제 살았고 그것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미스테리를 포함하여, 공룡에 관해 설명할 몇 천년의 역사의 틀을 제공해 줍니다. 두 중요 구절은 창세기 1:24-25과 욥기 40:15-24 입니다.

공룡들은 미스테리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공룡들의 존재와 그것들의 멸종이, 우리가 그것들이 어디에서 왔고, 언제 살았으며 어떤 일이 그것들에게 벌어졌는지에 대한 진실을 결코 알 수 없는 미스테리에 둘러 싸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공룡들은 여러분이 진화론적 믿음을 받아들일 때만이 미스테리입니다.

진화론자들에 따르면: 공룡은 인간이 진화하기 오래 전인, 약  2억 3천 5백만년 전에 처음 진화되었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공룡과 함께 살지 않았습니다. 공룡들의 역사는 수백만년의 세월 동안 퇴적된 지구상의 화석 층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이 땅에서 매우 성공적으로 진화하여 결국 지구를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약 6천 5백만년 전, 이것을 변화시킬 무언가가 일어났고 – 공룡들은 멸종했습니다.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은 소행성 충돌과 같은 격변적인 사건이 그것들을 멸종시켰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진화론자들은 어떤 공룡들은 새들로 진화했고, 따라서 그것들은 멸종한 것이 아니며 오늘날 우리 주위를 날아다니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성경이 말씀하는 공룡의 역사에 관한 전혀 다른 기록을 받아들인다면, 미스테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공룡들은 약 6,000년 전에 처음 존재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 주간의 6일째 되는 날, 공룡들을 다른 육지에 사는 동물들과 함께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20-25,31). 아담과 이브도 또한 6일째 되던 날 창조되었고 – 따라서 공룡들은 사람과 오랜 시간동안 격리되어 존재한 것이 아니라, 같은 시각에 함께 살았습니다.

공룡들은 사람이 나타나기 전에 멸종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룡들은 그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죽음과 피흘림, 질병, 그리고 고통은 아담의 범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9-30; 로마서 5:12, 14; 고린도전서 15:21-22).

공룡 종류들을 포함한, 모든 공기로 숨을 쉬는 육지의 동물들의 대표는 노아의 방주에 탔습니다. 방주 바깥에 있었던 모든 공룡들은 노아의 대홍수에 죽었고, 이들 중 다수는 화석이 되었습니다.
홍수 이후인 약 4,300년 전, 공룡을 비롯한 살아남은 육지 동물들은 방주에서 나왔고 사람과 함께 지금의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죄와, 그로인한 심판의 저주, 그리고 홍수로 인해서 지구는 매우 다르게 변했습니다. 홍수 이후의 기후는 변했고, 먹이의 부족, 질병, 그리고 인간의 활동은 많은 동물들이 멸종되게끔 했습니다. 다른 많은 생물들처럼 공룡들도 멸종했습니다. 공룡에 대한 커다란 미스테리가 있습니까?

왜 이토록 다른 견해가 존재하나요?

어떻게 이토록 공룡에 관한 완전히 다른 설명이 있을 수 있습니까? 진화론자이든, 아니면 역사에 관한 성경의 기록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든 공룡에 관한 증거는 동일합니다. 모든 과학자들은 같은 사실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들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으며, 같은 화석, 같은 생명체, 같은 우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사실”들이 동일하다면, 어떻게 설명이 서로 그토록 다를 수 있을까요? 그 이유는 과학자들은 단지 현재의 증거들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 공룡 화석은 단지 현재에만 존재합니다 – 그러나 과학자들은 현재에 존재하는 화석을 과거와 연결시키려고 합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공룡이 존재하고, 멸종하며, 화석으로 되게 하기 위하여 역사적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났나요?”

이러한 주제를 다루는 과학은 역사과학 (historical science) 혹은 기원과학 (origin science) 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컴퓨터나, 비싸지 않은 음식, 우주 탐험, 전기와 같은 것들을 제공해 주는 현상과학 (operational science)과 구분됩니다. 기원과학은 직접적인 관찰을 할 수 없는 과거를 다루는 반면 현상과학은 반복적인 실험이 가능한 지금 현재 이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다룹니다.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화석을 연구하는 사람들 (고생물학자)은 공룡에 관한 매우 다양한 견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고생물학은 정치와 매우 비슷합니다: 열정은 매우 높고, 같은 사실들로부터 매우 다른 결론들이 내려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성경의 기록을 믿는 고생물학자들은 성경을 거부하는 무신론자들과 다른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지적 거부 (베드로후서 3:3-7)가 역사과학에 관한 많은 논란의 뿌리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단지 종교적이거나 구원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이보다 훨씬 더 큰 책입니다. 성경은 우주의 역사에 관한 책이며 우주의 미래 운명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것은 시간이 언제 시작했는지,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등장한 일, 전 지구가 물에 의해 파괴된 일, 바벨탑에서 다른 언어가 생긴 일,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일,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오게될 것 등과 같은 역사의 주요 사건들에 관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세상에는 기본적으로 단지 두 개의 다른 사고 방식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모든 사고 (생물학, 역사, 그리고 지질학을 포함한)의 기반으로 놓은 기독교적 세계관; 혹은 인간의 믿음 (예를 들면, 진화론적 이야기)를 모든 사고의 기반으로 놓은 세속적 세계관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미디어와 교육 시스템을 통해 세속적인 방식으로 사고하도록 세뇌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사고를 위하여 성경을 사용하는 (로마서 12:1-2; 에베소서 4:20-24)대신, 세속적 사고를 성경에 적용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잠언 1:7)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잠언 9:10).

만약 누군가가 역사에 관한 진화론적 견해로 출발한다면 (그 어떤 증인이나 기록된 문서도 없는), 이러한 사고 방식은 현재 존재하는 증거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공룡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역사의 모든 사건의 증인 (하나님)의 기록된 문서로부터 나온 역사의 관점으로 시작한다면, 이것에 근거한 전혀 다른 사고방식이 동일한 증거를 설명하는 데 사용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공룡에 대한 성경적 설명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공룡의 역사

공룡의 화석화된 뼈들은 세계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대부분의 이러한 화석들은 단지 몇몇 뼛조각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거의 완벽한 골격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과학자들은 두개골과 사지의 구조 등과 같은 독특한 특징에 기반하여 많은 다른 공룡 형태를 묘사할 수 있었습니다.

공룡은 어디에서 왔는가?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 주간의 6일째 되던 날, 하나님이 다른 종류의 육상 동물들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24-25). 공룡은육상 동물이기 때문에 물론 여기에 포함됩니다.
진화론자들은 공룡은 원래 양서류로부터 진화한 어떤 파충류로부터 진화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그 어떤 명확한 중간단계 형태도 제시할 수 없습니다. 진화론 교과서의 공룡 가계도는 많은 독특한 공룡들의 형태를 보여 주지만, 그들을 공통조상으로 연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가상의 선 뿐입니다. 이 선들은 점선으로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화석 증거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자들은 단순히 공룡으로 진화한 공룡이 아닌 어떤 짐승을 믿는 믿음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공룡은 어떻게 생겼는가?

일반적으로 과학자들은 공룡을 그 살이 모두 붙은 채로 발굴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모든 뼈들을 찾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 원래의 모습을 복원하기 위하여, 그 전체 중의 40 퍼센트도 안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피부의 감촉을 보여줄 수 있는 인상 (impressions)이 몇몇 화석들에서 발견되기는 했지만, 뼈들은 그 동물의 피부색을 말해 줄 수 없습니다. 현존하는 파충류들 가운데 색깔의 다양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공룡들도 피부 색깔과 감촉 등에서 매우 다양했을 것입니다.    

뼛조각들로부터 공룡을 재구성할 때, 과학자들은 많은 추측을 하고, 많은 경우 서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공룡이 변온동물이었는지 아니면 항온동물이었는지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습니다. 뼈로부터 공룡이 암컷이었는지 수컷이었는지조차 가늠하기 힘듭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많은 추측이 존재합니다.

어떤 경우 과학자들은 공룡을 재구성 할 때, 실수를 저지르며, 이는 더 많은 뼈들이 발견될 때 고쳐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유명한 브론토사우루스는 새로운 공룡 사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최초 발견자는 이미 아파토사우루스라고 알려진 공룡의 몸체 골격에 다른 머리를 맞췄던 것입니다.

누가 공룡을 발견했나요?

세속적 책들은 1677년 거대 코끼리, 혹은 거인의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큰 뼈를 발견한 로버트 플랏 박사가 최초에 후대에 공룡이라고 불리는 것을 발견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1822년, 메리 앤 맨텔은 영국의 서섹스 지방의 시골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녀는 햇빛에 빛나던 돌을 찾았고, 화석을 모으던 그녀의 남편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의사였던 맨텔 박사는 그 돌이 현대의 파충류의 이빨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큰 이빨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그것이 이구아나와 비슷한, 식물을 먹는 멸종된 커다란 파충류의 것이라고 결론내렸습니다. 1825년 그는 그 이빨을 가진 동물을 이구아노돈 (Iguanodon)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맨텔 박사는 “파충류의 시대”라는 생각을 대중화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으로 보면, 위의 발견은 사실 공룡이 재발견된 것일 뿐입니다. 아담이 공룡을 처음 보았을 때 이미 발견했습니다.

공룡은 언제 살았나요?

진화론자들은 공룡이 수백만년 전에 살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공룡 뼈를 발굴할 때, 그것은 날짜를 보여주는 표를 달고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화론자들은 그 뼈들의 연대를, 다른 과학자들은 의문을 가지고 있는 간접적인 연대 측정법에 의해 얻을 뿐 아니라, 몇백만년이라는 연대에 반하는 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티라노 사우루스를 만드셨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나요?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만물을 일반적인 6일 동안 지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공륭을 포함한 육지에 사는 동물들을 6일째 되던 날 만드셨기 때문에 (창세기 1:24-25), 그 연대는 약 6,000년 전입니다 – 창조의 날들은 성경의 연대를 더함으로써 얻어집니다. 따라서 티라노 사우루스는 육지에 사는 동물이고, 하나님은 모든 육지의 동물들을 6일째 되던 날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티라노 사우루스를 6일째 되던 날 만드셨습니다.

더우기, 성경으로부터 우리는 인간의 죄 이전에 죽음과 피흘림, 질병 혹은 고통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일관적으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를 접근하고,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면, 인간과 동물의 죽음과 피흘림은 아담이 죄를 지은 이후에야 이 세상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물의 처음 죽음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동물의 피를 흘리시고 아담과 이브에게 옷을 입히셨을 때 일어났습니다 (창세기 3:21). 이것은 또한 대속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죄 이전에 죽은 동물들의 뼈가 있었을 수 없습니다 – 이것은 복음을 폄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룡들이 죄가 이세상에 들어오기 이전이 아닌 이후에 죽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단지 몇천년 전에 살았기 때문에 공룡의 뼈들은 몇백만년이 되었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공룡이 언급되나요?

만약 사람들이 공룡을 보았다면, 우리는 성경과 같은 고대의 역사 기록에서 그것들을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킹 제임스 바이블은 1611년에 최초로 번역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공룡”이라는 단어가 이 성경이나 다른 번역본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에, 성경이 공룡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공룡(dinosaur)” 이라는 단어가 발명된 것은 1841년입니다. 유명한 영국의 해부학자이자 대영 박물관의 첫번째 관장이었던 리처드 오웬 경은 이구아노돈과 메가로사우루스의 뼈를 보다가, 이것들은 아직 분류되지 않은 특이한 파충류들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공룡(dinosaur)”이라는 단어를 “끔찍한 도마뱀 (terrible lizard)”라는 뜻의 그리스 단어로부터 만들어 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킹 제임스 성경에서 “공룡 (dinosaur)”이라는 단어를 찾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이 번역이 되었을 때 그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공룡 (dinosaur)”을 지칭하는 또다른 단어는 없나요? 전 세계 곳곳에는 용 (dragon)에 대한 전설이 존재합니다. 많은 용에 대한 묘사는 특정 공룡의 특징과 부합합니다. 이러한 용들이 실재로 우리가 현재 공룡이라고 부르는 것이었을까요?

전 세계의 대 홍수에 관한 설화가 실재로 일어난 전 지구적 홍수 (노아의 홍수)에 기반한 것처럼, 용에 대한 전설도 오늘날 우리가 공룡이라고 부르는 실재 동물을 본 것을 바탕으로 만들어 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땅에 사는 용에 대한 묘사는 우리가 공룡으로 알고 있는 것과 일치합니다.

창세기 1:21에서, 성경은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큰 바다 짐승 (sea monster)”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 (tannin)는 다른 곳에서 “용(dragon)”으로 번역됩니다. 따라서, 성경의 가장 첫 장에서,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하신 큰 바다의 용, 즉 바다에 사는 공룡과 같은 동물을 묘사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도 바다에 살았던 용과 같은 동물들에 관한 구절들이 존재합니다: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시편 74:13),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이사야 27:1). “공룡”이라는 단어는 엄밀히 말해 육지에 사는 동물들만 가리키지만, 거대 해양 파충류와 날 수 있는 파충류들도  자주 공룡과 같이 분류됩니다. 성경에서 묘사된 바다의 용들은 모사사우루스와 같은 공룡과 같은 동물들을 포함했을 수 있습니다.

욥기 41장은 바다에 살았던 커다란 동물이며 불을 내뿜기조차 했던 리워야단을 묘사합니다. 이 “용”은 40피트나 되었던 살코수쿠스나, 82피트나 되었던 리오플레오로돈과 같은 동물이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늘을 나는 뱀에 대한 묘사도 있습니다: “날아다니는 불뱀” (이사야 30:6)입니다. 이것은 대중들이 날아다니는 공룡으로 알고 있는, 테라노돈, 람포린쿠스, 혹은 오린토체이루스와 같은 테로닥틸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습니다.

홍수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나님은 욥에게 자신이 창조하신 커다란 육상 동물에 대해서 일깨워 주심으로써 그분이 얼마나 위대하신 창조주이신지를 보이셨습니다:
“이제 소 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을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 그것의 힘은 허리에 있고 그 뚝심은 배의 힘줄에 있고 그것이 꼬리 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 같고 그 넓적다리 힘줄은 서로 얽혀 있으며 그 뼈는 놋관 같고 그 뼈대는 쇠 막대기 같으니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으뜸이라 그것을 지으신 이가 자기의 칼을 가져 오기를 바라노라” (욥기 40:15-19).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으뜸”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만드신 동물들 중 가장 큰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베헤못”은 어떤 종류의 동물일까요?

성경 번역가들은 이 짐승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아서, 히브리어인 베헤못을 그대로 옮기곤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경의 주석 및 각주에서, “베헤못”은 “아마도 하마나 코끼리”일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성경 번역은 “베헤못”을 이렇게 번역해 놓기도 했습니다. 코끼리나 하마가 하나님이 만드신 가장 큰 육상 동물이 아니라는 것 이외에도, 베헤못의 꼬리가 커다란 백향목에 비유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묘사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코끼리의 작은 꼬리나 하마의 접힌 가죽과 같은 꼬리는 전혀 백향목과 같지 않습니다. 명백히 코끼리나 하마는 “베헤못”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생존하는 동물들도 이러한 묘사에 근접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헤못은 커다란 공룡들 중 하나인 브라키오 사우루스와 매우 흡사합니다.

공룡에 관한 다른 고대의 기록들이 존재하나요?

The Great Dinosaur Mystery 라는 영화에서, 많은 공룡에 관한 기록들이 제시되었습니다.
•    기원전 2000년 혹은 그 이전의 수메르 신화에는 길가메쉬라고 부르는 영웅이 한적한 숲으로 백향목을 베러 갔을 때, 거대한 용을 만나 그것을 죽이고 기념으로 머리를 잘라 온 이야기가 나옵니다.
•    알렉산더 대왕 (기원전 330년)이 병사들과 인도로 출정갔을 때, 그들은 인도 사람들이 거대한 쉭쉭 소리를 내는 파충류를 경배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    중국에는 많은 용에 관한 전설이 있습니다. 용은 중국의 도자기, 자수, 그리고 조각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    영국과 다른 문화권에는 성 조지가 동굴에 살던 용을 죽은 이야기가 보전되어 있습니다.
•    10세기 경에는 아일랜드 사람이 스테고사우루스로 보이는 동물과 마주친 이야기가 있습니다.
•    1500년, 유럽의 과학책, Historia Animalium 에는 우리가 공룡으로 부를 수 있을 몇몇 동물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의 유명한 자연주의자였던 율리시스 알드로반더스는 밥티스타라는 농부와 Tanystropheus 같은 작은 공룡과 같은 용이 마주친 것을 기록했습니다. 그 일은 1572년 5월 13일, 이탈리아의 볼로냐 근처에서 일어 났고, 그 농부는 용을 죽였습니다.
세계 곳곳의 벽화에서도 공룡과 같은 동물들이 발견됩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동물들에 대한 묘사는 우리가 공룡으로 알고 있는 것과 일치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동물들을 언급하며, 심지어 바다에 살았던 것들과 하늘을 날았던 것들도 묘사합니다. 이러한 짐승들이 사람과 함께 살았다고 하는 수많은 다른 역사적인 증거들이 존재합니다.

뼈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또한 공룡들의 뼈가 몇백만년 되지 않았다고 하는 물리적 증거들이 존재합니다. 몬태나 대학의 과학자들은 완전히 화석화하지 않은 티라노 사우루스의 뼈를 발견했습니다. 뼈들의 절단면은 신선한 뼈처럼 보였고, 혈액 세포와 헤머글로빈처럼 보이는 것들을 함유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 뼈들이 정말로 몇천만년 되었다면, 혈액 세포들과 헤모글로빈은 완전히 분해되었을 것입니다. 실재 연구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티라노 사우루스의 얇은 조각은 제 현미경 아래에서 황색으로 빛났습니다…제가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혈관 내부에 있는 무언가에 촛점을 맞췄을 때, 실험실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움에 중얼거렸습니다: 작고 둥근 물체, 어두운 중심부를 가진 투명한 붉은 색… 적혈구? 그 모양과 발견된 장소는 그렇다고 이야기하지만, 혈액 세포들은 대부분 물로 구성되어 있고 6천 5백만년이나 된 티라노 사우루스 내부에서 보존되었을 수 없습니다….우리를 흥분시킨 그 뼈의 표본은 1990년 발굴된 아름답고 거의 완벽한 티라노 사우루스에서 나왔습니다…우리가 그 공룡의 뼈를 실험실로 가져왔을 때, 우리는 다리의 긴 뼈 깊숙한 곳은 아직 완전히 화석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모든 증거들이 티라노 사우루스의 뼈 안에서 보존된 헤모글로빈 조각이 발견되었다는 개념을 지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우리가 “그렇습니다. 이 티라노 사우루스는 그 안에 혈액 조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고 자신있게 말하기 전에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입니다.”

화석화하지 않은 오리 주둥이 공룡의 뼈가 북부 알라스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 뼈들은 광물화되지 않고 몇백만년동안 생존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몇백만년 전 “공룡의 시대”를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풀 수 없는 퍼즐이지만, 성경으로부터 사고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스테리가 아닙니다.

공룡들은 무엇을 먹었고 어떻게 행동했는가?

Jurassic Park 와 The Lost World 같은 영화들은 대부분의 공룡들을 공격적인 육식 동물들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단지 날카로운 이빨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 동물이 어떻게 행동했으며 무엇을 먹었는지를 말해주지는 않습니다 – 그것은 단지 그 동물이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만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공룡의 화석화된 똥을 연구함으로써 과학자들은 어떤 공룡들이 무엇을 먹었는지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아담이 죄를 짓기 전에는, 공룡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이 초식을 했습니다. 창세기 1:30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이 말씀은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는 티라노 사우루스마저도 오직 식물만을 먹었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대한 티라노 사우루스가 가지고 있었던 큰 이빨을 가리키며 그것들은 다른 동물들을 공격하는 데 사용되었음이 틀림없다고 주장하며 이 말씀을 거부합니다. 그러나 어떤 동물이 단지 크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 고기를 먹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그 동물이 크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기본적으로 초식을 하는 동물들 중,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많은 동물들이 있습니다. 자이언트 팬다는 육식 동물들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지만, 대나무를 먹습니다. 팬다의 이빨은 대나무를 먹을 수 있도록 아름답게 디자인된 것처럼 보입니다. 자이언트 팬다가 육식 동물들과 같은 이빨을 가진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진화론자들은 자이언트 팬다가 먼저 육식동물로 진화한 후, 대나무를 먹게 되었다고 이야기 해야만 합니다.

여러 종의 박쥐들은 다양한 과일이나, 과즙, 곤충, 작은 동물들, 피 등을 먹지만, 그것들이 가진 이빨은 그것들이 무엇을 먹는지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곰들은 육식 동물과 같은 이빨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곰들은 초식만을 하며, 많은 곰들은 대체로 초식을 합니다.

죄악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매우 좋다”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31).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오늘날 관찰하는 먹이사슬로 인해 이러한 완벽한 조화라는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의 죄악으로 인해 저주받은 세상과 그로 인한 죽음과 고통을 바라보며, 이것을 역사에 관한 창세기의 기록을 거부하는 것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해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이것이 왜 바울이 현재의 창조물이 “신음하고 있다”라고 묘사한 이유입니다 (로마서 8:22). 우리가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눈”을 통해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상적인 세상에서조차 사람이나 동물들이 다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죄악 이전에도 아담이나 동물들이 작은 동물들을 밟거나 나뭇가지 등에 긁혔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타락한 세상에서 실재로 발생합니다 – 현재의 세상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주의 영향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22). 우리는 성경을 세상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죄악 이전의 세상이 우리가 오늘날 보는 세상과 동일했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끊임없이 복원되고 유지되는 완벽한 세상 (골로새서 1:17; 히브리서 1:3)이 어떠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 우리는 완벽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타락 이전의 아담과 이브만 경험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것을 약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8:4, 29:5, 그리고 느헤미아 9:21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광야를 헤매었을 때, 그들의 의복과 신발이 닳지 않았으며, 그들의 발이 붓지 않았다고 듣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완벽하게 유지시키실 때, 닳거나 상하는 것은 옵션이 아닙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다니엘 3:26-27)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불에서 나왔을 때, 그을음의 냄새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다시금, 하나님이 완벽하게 유지시키셨을 때, 다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완벽한 세상에서, 죄와 저주 이전에, 하나님은 만물을 완벽하게 유지시키셨지만,  이 죄로 인해 저주받은 세상에서, 만물은 쇠퇴합니다. 많은 성경 주석가들은 이사야서 11:6-9의 늑대와 양, 그리고 사자가 소와 같이 풀을 먹는 것에 대한 묘사가 더이상 저주나 죽음이 존재하지 않을 (요한계시록 21:1, 22:3), 미래에 회복될 새 땅에 대한 그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3:21). 동물들은 초식을 하며 평하롭게 산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세기 1:30절의 죄악 이전의 동물들의 모습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죄와 그로 인한 저주로 인해 극적으로 변했습니다. 현재의 먹이 사슬과 동물들의 행동 (창세기 9:2-3의 기록대로 홍수 이후 또다시 변한)은 성경을 해석하는 기반으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 오히려 그 반대로 성경이 오늘날 세상이 왜 그러한가를 설명하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에게 동물들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8). 오늘날의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는 히브리서 2:8이 생각납니다: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사람과 만물과의 관계는 죄로 인해서 변했습니다 – 그것들은 원래 그러했던 것과는 달리 “그에게 복종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과 고통이 가득한 현존하는 세상을 관찰한 후, 그 관찰 사실을 성경으로 가져가서 그것의 조명 하에 성경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이며, 죄악으로 인해 저주받은 세상을 관찰하고 있는 실수하기 쉬운 인간입니다 (로마서 8:22); 그리고 따라서 우리는 그 무엇을 이해하기 시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으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생겨나게 되었나요? 현대 창조 운동의 선구자이신 헨리 모리스 박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과 같은 구조들이 최초의 구조의 일부분이었는지, 혹은 나중에 선택과정으로 인해 우성으로 변한 열성 특징이었는지, 혹은 저주 이후의 돌연변이적 특징이었는지 무었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더 연구가 필요합니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이후, 모든것은 변했습니다. 아마도 어떤 동물들은 이때부터 다른 동물들을 먹기 시작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때까지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창세기 6:12).

또한 대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동물들의 행동을 변화시키셨습니다.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창세기 9:2). 따라서, 사람들은 창세기 1:28에서 주어진 다스림의 의무를 수행하기가 더욱 어려워 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출처: USA 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제자

12.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신약 권능의 대표적인 권능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But ye shall receive power.
after that the Holy Ghost is come upon you:
and ye shall be witnesses unto me both in Jerusalem,
and in all Judaea, ane in Samaria,
and unto the uttermost part of the earth.  사도행전 1:8]
이 구절은 누구나 잘 알고 있으면서
잘못 해석한 사이비 목사들과 부흥사들이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고
호도 된 해석으로 이 구절을 주문처럼 외우고 가르쳐 올바른 복음적인 개념을,
하나님의 공의의 개념을 저해(沮害)하여, 세상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가치관보다 못한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그릇된 전도, 선교라는 개념을 가르친 자들이 대부분이며
그런 자들이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이란 주장에
대다수가 맹종하여 반사회적인 정서를 만들게 자초한 일들은
복음의 정의에 대한 무지였고 아직도 이런 개념과 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한국교회와 해외 교회는 병들어 신음하고 있다.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곡해하여
복음을 전하는 전도, 선교만이 증인이 되는 길 인양 가르치고 배웠기에
하나님의 의(義)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의 정체성을 확립하지도 못하였으면서,
근본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인식하지 못하면서
신학을 가르치고 배운 자들의 가르침이 온전하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정의(正意)에 대한 정의(精義) 조차 판단하지 못하여 분별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무지하여
‘공의’를 제대로 설명할 사람이 제대로 없으니 통탄할 일이다.
그러니 아무 때나 하나님의 뜻이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주장하고
선교제일주의에 빠져서 선교에 모든 역량을 써야 한다면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계획과 간절한 기도도 없이 선교사를 파송하고 지원하면서
끝없이 여러 선교지의 자랑으로 이를 교인들에게 자부심으로 심어주었고
언제부터인지 단기선교의 유행의 열풍이 불어
단기선교가 현지 선교사와 교제와 교통 속에 이루어지지도 못하면서
단기선교라는 선교의 거창한 명칭으로 적선과 봉사가 믿음의 척도가 되어
교회의 구걸걸이가 되었고 어느 목사는 선교를 자신을 위한 욕심의 유익으로
비자금을 만들고 선교는 자신의 사적인 여행이 되었으면서
선교 비를 강요하는 수단으로 지원자나 후원자 명단까지 발표하며 독촉한다.
선교는 선교지의 장기적인 계획으로 언어와 문화 등을 미리 습득하여
지혜롭고 효율적인, 조직의 역량을 판단하여 조직적으로 중단 없는
넉넉한 인적 물적 지원을 미리 기획하고
단기선교는 현지 선교사의 지원 역할을 해야 하는데,
어느 목사들과 장로들은 은퇴 후 선교사가 되거나 선교지로 간된다.
미리 장기간 계획을 하고 준비를 하여도 미흡한 환경에 육체도 거둥하기 힘들 때까지
기다려서 은퇴하고선 가서 무엇을 한다는 건가.
그리니 교회에 손을 내밀어 생활비로 사용하고 명분은 선교이니 거룩한
변명거리가 될지 모르나 은퇴목사라는 명예의 타이틀도 버리지 못하면서
자신의 그릇된 명분에 뭔 효율적인 선교가 되겠는가.
선교지 는 늙은 몸이 쉼을 얻는 휴양지인가 도피처 인가.
하기야 어느 사람들은 짧은 기간 선교지에 다녀와서 선교사, 목사, 뭔 모임의 장 등
마치 자신의 경력에 이력 거리를 만드는 이력서를 자랑하니,
현실을 바라보자.
교회는 내부적으로 잘못된 신앙관으로 세상의 질타의 대상이 된지 오래라
전도는 진전이 없고 남은 교인들마저 순수함을 잃은 교회를 떠나 교인은 줄었고,
세상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화하겠다는 전도는
교회가 걸림돌이 된 암담한 현실을 직시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주체인 교회가 세상의 변화에 압박을 당하고
이제 교회는 세상과 등진,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었고 더 고립되어간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마치 현대교회는 근본의 바탕이 잘못 지어진 집 같다.
견고한 지반(地盤)에 터를 잡지 못하고 기초마저 튼튼하지 못한 집이  
얼마나 유지 되겠는가.
그러니 조그만 일에도 교회가 흔들리고 작은 사건에 교회가 날아갈 듯 하고
목사의 말 한마디에 교회가 이편저편으로 나누어져 모두 하나님 편이라
고함과 폭력이 난무하니 싸움이 소문이나 으레 교회는 싸우는 장소로
오래전에 세상에 인식되었고
목사의 부정으로 교회가 갈라지고 사라지는 일들이 일상이 되었으니
허약하다 못해 유지에 안간힘을 쓰는, 이제 병들어 신음하는 교회가 되었고
교회가 복음의 걸림돌이 된 이 기이한 상황을,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가 믿음의 단절된 이 현상을,
믿음을, 다음세대에 유산으로 남겨야 하는데
세대와 세대가 단절된 이 현실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당신의 믿음은 눈뜬 맹인이고
세상의 비난이 들리지 않는 다면
당신은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난청자 이고
그리고도 지도자라면, 당신은 믿는 자를 가장한 종교인이고
분별력이 애초에 없는 삯꾼일 뿐이다.
보라,
총체적으로 부패한 한국과 해외 교회와 단체의 모습을.
조금의 믿음이 있다면 조금의 신앙의 양심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믿음의 작은 눈이 라도 바라보라.
이제 근본으로 돌아갈 때다.
이제 늦으면 유럽교회처럼 교회가 사라지고 미국교회처럼 노인만 남고
교회 건물은 세상 사람들의 조롱의 대상이 되다 이 마저 사라진다.
화려한 대형교회의 건물?
화려하고 거대한 만큼 교제를 막는 큰 콘크리트 덩어리 일 뿐이며
그 안에서 군중 속에 안정(安定)을 찾다 믿음을 잃어버리고
길을 잃어버리고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갔으며 가고 있다.
그리고도 대형교회라 선교를 위하여 거금의 선교비를 만든다는 말은
맘몬 니즘에 절은 자의 변명이고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교통을 막고
교회와 교회가 서로 교통하는 교통을 막은 대형교회의 모순을
외면한 자의 변명이다.
근본으로 돌아가자.
근본의 하나님의 의,
의를 알려면 공의(righteousness)를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는, 공의는, 복음에 나타나서,
복음은 하나님의 의로 이루어졌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7]
하나님의 의, 공의를 알고 깨닫는 믿음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로 믿음이 되며
오르지 의인,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는 의인은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 사람이 의인이며,
오르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마땅히 하나님의 공의를 지켜야 할,
정의롭고 진실하고 공평하고 평등한 삶으로
세상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규범과 상식을 초월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을 간직한 그리스도인의 문화,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관의 문화를 세우는 일,
정직하고 정의로운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문화는
한국교회에서 이제 거의 다 사라졌기에
믿음, 믿음, 믿음하면서 믿음이 변절하여 종교 의식화 하였고
종교적인 자기 위안(慰安)도 못되면서 버릇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한다.
대체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란 말인가.
전도가, 선교만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이었나?

또한 이 구절은
사이비 세대주의자들, 대체신학을 주장하는 자들이 인용하는 근거의 구절로
잘못된 예수님의 재림과 선교관을 퍼트린 구절로
이들의 특징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문자적인 것은 문자적, 상징적인 것은 상징적, 비유적인 것은 비유적,
계시적인 것은 계시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몽땅 다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기간 동안 이스라엘의 땅과 국가,
성전 회복 등이 이루어져 성경의 약속들이 문자적으로
무조건 이루어진다고 본다.
세대주의 문제점은 성경을 비틀어서
예수님의 복음을 유대인이 거부함으로
이방교회가 생겨났다는 대체신학이
첫 번째 위험한 것은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부인이라 복음의 어그러진 길이며
예수님이 말씀인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에 나로 말미암고는’ 는
누구든지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는,
예수님 말씀을 시인 하는 듯 하면서 복음 이전의 구약으로 돌아가 부인하기에 복음을,
전 인류를 위한 권능을 부인하고 비틀어
복음의 능력을 감소시킴은 물론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면 오신다는 성경 구절을 이스라엘에 국한(局限) 시켜
종당에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킨다는
제한된 교회관은 두 번째 위험한 사이비의 주장일 뿐이다.
또 아브라함을 통한 유대적인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은
요한 계시록을 전 세계의 교회가 아닌 유대인을 만을 위한 계시록이라
이방인 교회는 곁들어 구원 받는 존재일 뿐이라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된다.
그토록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선택한
이스라엘만은 단념할 수 없으신 편애를 가지신 편협하신 하나님이신가?
그렇다면 구약의 이스라엘인들은 풍요와 평화만을 누렸어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이스라엘의 패악으로 나라가 없어지고 민족이 흩어지는 고통을 당하였는데
이를 부정할 수 있는가.
이스라엘만 선택된, 일부의 국가와 민족을 위한 비틀린 복음,
그건 복음이 아니다.
다시 보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이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말씀도 아니고
‘uttermost part of the earth’ 최대한 넓게 복음이 세상에 알려진다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한 말씀이고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는 다는 말씀은
이 권능 ‘power’ 는 누구나 받지만 모두 같은 ‘power’ 가 아니라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약하고 강한 능력이고
power 의 분량이, 믿음의 분량이 되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고 가르치는’ 양과 비례한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었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태복음 28:18-2]
분부한 모든 걸 가르치고 행하라 시는 말씀은 명령이다.
Teaching them to observe all things whatsoever
I have commanded you.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구약의 대표적인 권능인 이사야 33:13-16절 과 같이
아버지, 아들, 성령이 포함된 말씀이고
예수님께서 받은, 세상의 창조자 이신 하나님으로 부터의 권세,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었으니’
이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권세
그 권세로 모든 민족을 제자를 삼으시라는 말씀은,
그 권세로, 성령님께 받은 권세로 세례를 베푸는,
성령님이 세례를 베푸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이름은 히브리어 ‘쉠 shem’ 으로 사람이나 사물 등 다른 것과 구별하는
표시로 세상과 구별된, 모든 우상과 구별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신 이름과
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거룩하신 성령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합당한 ‘이름’ 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죄로 죽고 다시 새 명명을 얻은 자가
부르심에 합당히 응한 자가
부르심에 합당한 자가
거룩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옛사람을 죄를 죽이는 회개의 상징임으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그 죄를,
성령님이 임하시면 불같이 태워버리는 권능을 받기에,
성령님의 권능을 받기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음은,
권능은 증인이 되기 위한 능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의 시작이라
거룩하신 이름을 부르기에 합당한 부르심을 받은 자의 능력이다.
그럼 이제 권능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향해 한 말을 보자.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사도행전 3:7]
베드로는 은과 금이 없지만
내게 있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I have give I thee: In the name of Jesus Christ of Nazareth.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천한 나사렛에서
낮아지고 낮아지셔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진리를 전하여 주시고 삶의 길을
보여주신 구세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모진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고귀하고 숭고한 사랑 ‘charity’ 의 이름,
그리고 부활하신 권능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베드로에게 은과 금은 없지만 베드로의 가슴에 간직한 사랑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며 주시는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증인으로 가슴에 새겨진 사랑의
힘(power of charity)으로 베드로의 생명과 같은 이름,
그 이름을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디모데후서 2:19]


경이롭고 놀라운 현대 건축물들!


Wonders of Modern Architecture

Cybertecture Egg - Mumbai, India

modern architecture


Grand Lisboa - Macao, China

modern architecture


Bullring - Birmingham, England

modern architecture


BMW Welt - Munich, Germany

modern architecture


Experience Music Project - Seattle, USA

modern architecture


Mumbai University ASK Foundation Convention Center

modern architecture


The Sage - Gateshead, England

modern architecture


Air Force Academy - Chapel, Colorado

modern architecture


The Universum Science Museum - Bremen, Germany

modern architecture


The Fuji Television Building - Tokyo, Japan

modern architecture


The Gherkin Building - London, England

modern architecture


Lotus Temple - Delhi, India

modern architecture


National Theatre - Beijing, China

modern architecture


Banknote Building - Kaunas, Lithunania

modern architecture


Le Palais Bulles - Cannes, France

modern architecture


Tenerife Concert Hall - Canary Islands, Spain

modern architecture


The Conch Shell House - Isla Mujeres, Mexico

modern architecture


The Torre Galatea - Figueres, Spain

modern architecture


The Crooked House - Sopot, Poland

modern architecture


Ceramic House - Columbia

modern architecture


Cathedral of Brasilia - Brazil

modern architecture


Dome House - Florida, USA

modern architecture


Earth House - Lostorf Switzerland

modern architecture


Eden Project - Cornwall, England

modern architecture


Chapel In The Rock - Arizona, USA

modern architecture


Druzhba Holiday Center - Yalta, Ukraine

modern architecture


Ferdinand Cheval‍ Palace - France

modern architecture

Olympic Stadium - Montreal, Canada

modern architecture


The National Library - Minsk, Belarus

modern architecture


Wonderworks - Pigeon Forge, Tennessee, USA

modern architecture


Steam World Museum - Gramado, Brazil

modern architecture


Piano and Violin-Shaped Building - Huainan, China

modern architecture


Great Mosque of Djenne - Mali

modern architecture


Elephant Building - Bangkok, Thailand

modern architecture


Dancing Building - Prague, Czech Republic

modern architecture


Kunzthaus - Graz, Austria

modern architecture


La Tete au Carre - Nice, France

modern architecture


Porto Stone House - Fafe Mountains, Portugal

modern architecture


Ripley's Believe It Or Not - Ontario, Canada

modern architecture


Snail House - Sofia, Bulgaria

modern architecture

 


House Attack - Vienna, Austria

modern architecture


Hang Nga Guesthouse - Vietnam

modern architecture


Habitat 67 - Montreal, Canada

modern architecture


Wooden Gagster House - Anchangelsk, Russia

modern architecture

Cubic Houses - Rotterdam, Netherlands

modern architecture


Solar Furnace - Odeillo, France

modern architecture


The Flintstone House - Hillsborough, California

modern architecture


Wilkinson Residence - Portland, Oregon

modern architecture


Bunker House - Chicago, Illinois

modern architecture

 

▼Saddle the Wind



'마음을 열어주는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름다운 해변 남태평양. .  (0) 2016.04.28
水中 호텔  (0) 2016.04.26
○존재하는 줄 몰랐던 이상한 동물들○  (0) 2016.04.04
전세계 경이로운 사진  (0) 2016.04.03
지상 최고의 멋진풍경!  (0) 2016.03.24

아멘의 뜻

Rev. Dr. R. Dean Anderson (Brief Biography)
trans. by Seok-Jun Yun



아주 짧은 단어인 ‘아멘’이라는 말의 성경 속에서의 용례에 관한 내 짧은 연구의 동기는 우리 교회들의 예전(liturgy) 변화에 관한 진행되고 있는 토론 때문이다. 최근 베르켈 총회(Synod at Berkel)에서 있었던 토론의 결과로 이 문제는 또한 카트윅(Katwijk) 지역과 발켄부르그(Valkenburg) 지역 회중들에게 논의의 필요성이 있게 되었다. 나는 이 연구에 앞서서 여기 소개된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었다는 점을 고백해야겠다. 또한 나는 이 짧은 글이 반드시 이 문제에 대한 마지막 논의가 아닐 것이라는 사실을 덧붙여야겠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내가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을 불러 일으켰다고 믿는다.






‘아멘’의 의미


‘아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부터 왔는데, 다양한 동사형을 가지고 있다: 지지하다(to support), 충성하다(to be loyal), 확신하다(to be certain), 믿음을 나타내다(to place faith in). 같은 의미로 ‘아멘’은 보통 ‘진실로’(truly)로 번역된다.1)


이 단어가 (헬라어) 신약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번역되지 않은 채로 나타난다는 것은 주목해 볼 일이다. 헬라어를 말하던 그리스도 이후의 첫 세기의 교회들은 그들이 쉽게 번역할 수 없었던 히브리어 단어들과 맞닥뜨리곤 했다. 물론 ‘아멘’이라는 단어는 분명 새 교회가 단어의 원래 모양을 그대로 사용했던 유일한 히브리어 단어는 아니었다. ‘아바’(=father)라는 단어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비록 이 단어는 언제나 번역이 곧 뒤따르는 방식으로 사용되었지만(막14:36;롬8:15;갈4:6). ‘아멘’이란 단어에 있어서는 이것이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가는 종종 이 짧은 단어가 주 예수님께 사용될 때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이를 번역한다; 말하자면, 문장의 첫 부분에서 그의 말씀들을 강조하기 위해서 등이다. 그리고 누가는 때때로 그 번역을 사용한다. ‘진실로(truly)’ 혹은 ‘참으로(verily)’ 등(눅4:25;9:27;12:44;21:3). 더 나아가 계시록 1:7과 고후1:20, 그리고 아마도 눅12:5에서 ‘아멘’은 ‘예스(yes)’(=even so : 정확히 그러하다)로 번역되었다. 셉투아진트(주 예수님의 시대에 통용되던 구약의 헬라어 번역본)에서는 외경을 제외하고는 ‘아멘’이라는 단어가 번역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곳은 단지 세 곳 뿐이다(대하16:36;느5:13;8:6)2)


이 단어는 한번 ‘진실로(truly)’로 번역되었고 다른 모든 곳에서는 ‘그렇게 되기를(may it be so)’로 번역되었다.3) 헬라어의 매우 문자적인 번역인 아퀼라본(주후 2세기)은 언제나 ‘아멘’을 ‘진실로(truly)’로 번역한다.4)






‘그렇게 되기를(may it be so)’이라는 번역은 구약성경 자체에서 지지를 얻고 있다. ‘아멘’이 사용된 곳에는 ‘주께서 이같이 하옵소서(may the Lord do so)’ 라는 말이 뒤따르고 있기 때문이다(왕상1:36;렘28:6)


‘아멘’의 의미에 대한 이러한 지시들 뿐 아니라 또한 우리는 이 단어의 용례도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단어가 사용된 본문은 그 의미를 결정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서의 사용


구약성경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첫 번째 사실은 “아멘”이라는 말의 제한된 사용이다. 이 말은 단지 30회만 사용되었는데, 다섯 번은 복수 단어로(double word) 사용되었기 때문에 실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스물 다섯번 뿐이다. 이 단어의 사용은 네 표제로 묶을 수 있는데 앞의 두 표제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1. 저주 표현에 대한 수납으로서(16회)


제사장들(또는 다른 공식적인 사자)이 하나님의 편에서 저주문구(curse-formula)를 발할 시에 수신자(들)이 그에 대한 결과를 승복할 때 “아멘”이라는 말이 동반된다. 민5:22;신27:15-26;느5:13;렘11:5를 보라




2. 하나님께 대한 찬양의 표현에 대한 동의로서(10회)


“아멘”은 또한 ‘바룩(찬양하다)’이라는 문구 다음에 그 문구를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에 의해서 사용되기도 하였다(시106:48;대상16:36;느8:6). 이 찬양문구의 형태는 표준 구조를 가지고 있고, 언제나 바룩이라는 단어와 함께 시작된다: “축복하라/찬양하라”로 번역된다.




3. 예언이나, 다른 사람에 의해 공표된 내용에 대한 동의로서(2회)


렘28:6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냐의 (거짓)예언에 대해 (빈정거리는 투로) 동의를 표할 때 그 단어를 사용한다: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 왕상1:36에서 브나야는 솔로몬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을 것이라는 다윗의 공표에 대해 동의를 표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멘! 내 주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오며.” 이 두 본문 모두에서 아멘이라는 단어의 해석은 우리가 예외적인 상황을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4. 하나님의 독특성으로서


사65:16에서 히브리어 본문은 “아멘의 하나님(the God of (the) Amen)”이라는 말을 두 번 사용한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이 해석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 본문을 “진리의 하나님(the God of turth)”으로 고쳐서 사용한다.5)






동일하게 중요한 것으로서 우리가 “아멘”이라는 단어를 찾는 본문에서는 그 단어가 오히려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 가지 점이 주목할 만하다. 첫째, 비록 “아멘”이라는 말이 자주 저주문구를 수납하는 데에 중요하게 사용되었지만, 이 말은 결코 축복을 수납하는 데는 사용되지 않았다! 둘째 “아멘”은 결코 기도를 맺기 위해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신약성경에서의 사용


전술했던 번역된 경우를 별개로 하고 “아멘”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131회 사용되었다(네슬/알란트 27판에 대한 통계: 신약성경의 여러 헬라어본 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 중 하나-역자주). 그러나 이 숫자는 신뢰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103번이라는 횟수는 대개 우리 주 예수님께서 스스로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사용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주 이 단어로 문장을 시작하시거나 자신이 말씀하신 것에 대한 강조를 둘 때 이 말을 사용하신다(예를 들면 마7:28-29).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아멘”이라는 단어의 구문적인 사용법에 대한 연구에서는 예수님의 화법에 대한 부분까지 다 다룰 수는 없다.6)


앞에서 이 단어가 28번 사용되었다고 한 내용을 따라서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사용했던 것과 같은 카테고리를 적용해 볼 수 있다. 이는 다음과 같다.








1. 저주 표현에 대한 수납으로서


신약성경에는 저주 문구에 대한 수납의 예가 없다. 이 항목은 따라서 적절하지 않다.




2. 하나님께 대한 찬양의 표현에 대한 동의로서(22회)


찬양의 진술은(때때로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닌 것으로서, 구약 성경에서 사용한 것과 동일한 어형으로) 자주 그것을 듣는 사람들(고전14:16;고후1:20;계5:14;7:12;19:4) 뿐 아니라 표현하는 사람에 의해 “아멘”으로 끝난다(롬1:25;9:5;11:36;벧전4:11;5:11;벧후3:18;유1:25;계1:6;7:12). 이미 인용된 본문들에 더해서 마6:13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본들에 따르면 찬양의 표현(“아멘”이 따르는)들이 주님의 기도를 끝맺는다.




3. 예언이나, 다른 사람에 의해 공표된 내용에 대한 동의로서(2회)


계1:7과 22:20에서 우리는 예언/공표(announcement)가 아멘으로 끝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본문에서 아멘은 공포자 자신인 요한에 의해 표현되고 있다. 두 번째 본문에서 요한은 아멘을 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사용한다. 계1:7에서 “아멘”이란느 단어는 “예스(yes)”라는 번역이 부가되어 사용되었다. 계22:20에서 요한은 그가 동의하는 내용에 대해 말씀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역시 이는 “아멘”이라는 단어의 일상용례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4. 하나님의 독특성으로서


위에서 논의했던 이사야 본문에서는 “아멘(the Amen)”이 예수 그리스도의 표제로 사용된(아멘이신 그리스도-역자주) 곳인 계3:14와 같은 방식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부가하여 본 항목에서는 두 가지를 더 더할 수 있다.




5. 축복문구에 대한 확증으로서


축복문구(인사말)는 종종 축복을 전하는 사람에 의해 “아멘”으로 끝나는 것으로 확립되었다(cf. 롬15:33;갈6:18). 많은 사본들 역시 다음의 본문들에 “아멘”을 더하고 있다: 롬16:24;고전16:24;고후13:14;빌4:23;골4:18;살전5:28;살후3:18;딤후4:22;딛3:15;몬1:25;히13:25;벧전5:14;계22:21).


이들 본문들이 모두 편지의 말미에(혹은 끝이 다되어서) 있다는 사실로 인해 그것들이 전술했던 카테고리와 별개의 것이냐는 것을 결정하기는 어려움이 있다. 그런 어려움은 편지의 서두에서 축복(예를 들면 롬1:7;고전1:3 등)이 결코 “아멘”으로 끝나는 적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 심각해진다!




6. 결론으로서


이전 항목에서 본 바와 같이 “아멘”이라는 말은 결론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요한의 첫 두 편지의 많은 사본들에서도 역시 그렇게 사용되었다(전술한 찬양과 축복의 말들 없이). 이런 예는 막16:9와 같이 짧게 끝나는 복음서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아멘이라는 단어의 이러한 사용은 초대기독교회에서 빈번한 것이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아멘”은 이야기나 편지의 끝을 알리는 역할을 한 것이다.








결 론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아멘”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듣는 이에게 그러할 뿐 아니라 말하는 이에게서도 그러한 것이다.




“아멘”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결코 스스로에게 축복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사용된 적이 없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7) 모든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신약성경 시대에 축복문구 뒤에 공식적인 표현으로서 “아멘”이 있었다는 증거는 불충분하다. 따라서 바울의 서신들에서의 “아멘”과 관련된 이론은 적합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주장이 불손하며 온당치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만약 어떤 사람이 너무 친절해서 나에 대해 좋은 어떤 이야기를 했을 때, “아멘, 그것은 진실이며 확실합니다!”라고 반응을 보였다면 그것은 매우 건방진 태도인 것이다. 이는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데에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실례로 점점 더 대중화 되어가고 있는 것으로서, 예배시간의 끝에 축복(blessing: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축도’이다-역자주) 후에 전 회중이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은 거절되어야만 한다. 만약 “아멘”이 축복 이후에 말해져야 한다면 그것은 목사/장로에 의해서 위의 카테고리 5에서의 예에서 본 것처럼 일종의 결론으로서 행해져야 한다.




동일하게 주목할만한 사실은 “아멘”이 성경에서는 어떠한 기도의 결론으로서도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기도에서 “아멘”은 기도를 결론짓는 찬양의 표현임에 틀림없다. 나는 기도의 결론으로서 “아멘”을 사용하는 것이 보편화된 것이 어느 세기부터인지 알지 못한다.8) 우리에게 있어 그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 눈을 감는 것과 같은 실제적인 유익이 있다. 성경 시대의 사람들은 기도할 때 팔을 뻗은 채로 하늘을 향해 그들의 눈을 들고 기도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기도가 끝났을 때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람들이 기도할 때 언제부터 눈을 감기 시작했는지 알아내기는 힘들다.




초대 기독교회때는 대부분의 기도가 “아멘”을 동반한 찬양의 표현으로 마쳐졌다(주님의 기도가 그 예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도 가능한 좋은 아이디어이다. 필수적인 것은 아니지만, 찬양의 표현으로서 우리의 기도를 끝맺는 것은 적절할 것이다. “아멘”으로서 맺는 것은 동일하게 부요한 의미를 받게 한다.




또한 나는 우리 예전에 관하여 몇 가지 주목할 점을 말하고자 한다. 만약에 우리를 향한 축복 이후에 “아멘”을 말한다면 그것은 부적절한 것이다. 또한 예배의 부름(votum) 이후에 “아멘”이라고 하는 것 역시 그러하다. 예배의 부름(‘우리의 도움은 야웨의 이름에 있도다....’)은 목사나 장로가 회중의 편에서 표현하는 것이다. 회중은 그의 선하심과 은혜가 우리의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 회중이 예배부름을 소리내어 말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예배의 초반에 인사(greeting) 이후에 나타나는 “아멘”의 표현 역시 지지하는 성경적 예는 없다. 그것이 나타날 때는 5번 항목에서 말한 내용의 결론으로서이다. 확실히, 회중에 의해 표현되는 것은 안된다. 그 인사는 회중 자신을 위해 의도된 축복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예전에서는 주님을 찬양하는 표현을 위한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예배 속에서 주님을 찬양하는 표현을 발견하지 못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시편찬송이나 기도등을 생각해 보라). 단지 예전에서 할당된 부분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예수님 시대 어귀의 회당예배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그러한 찬양의 표현으로 시작했다. 이러한 기독교적 형식으로서의 찬양문구의 사용은 그들의 편지에서 이런 식으로 종종 시작했던 사도들에게서 가져온 것이다(cf. 고후1:3-5;엡1:3-14;벧전1:3-5). 가장 잘 알려진 신약성경의 바룩(찬양하다) 문구는 아마도 소위 스가랴의 노래(눅1:68-75)의 첫 절반부일 것이다.9)



나는 예전 담당자들에게 찬양 문구(가능하다면 전술한 본문들로부터)가 인사 이후에 따라 나오도록 제안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사도들에 의해 사용되었고, 시편에 자주 언급된 유대 회당 예전의 한 부분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예를 들면 시72:18-18; 144:1-2 등). 만약에 이 요소가 예전 속에서 빠진 채로 유지된다면, 찬양의 표현과 함께 설교를 마치게 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전 회중이 그와 같은 찬양의 표현으로서 자신들의 “아멘”으로 예배를 마치는 것은 매우 적절할 것이다. 위에 나열된 본문들은 신약에서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도 전 회중이 공적으로 그들의 “아멘”을 표현하는 데에 보편적인 것들이었다.






각 주




1) 나는 같은 어근으로부터 파생된 다른 단어들의 용례가 단어의 의미를 밝혀주는데 필수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는 점을 주목해주기 바란다. 이러한 관점에 관하여는 J. Barr, Semantics of Biblical Language [OUP, 1961] 100-106. 를 보라




2) 정확히 하자면 “아멘”이라는 단어가 외경들에서는 번역되지 않은 채 6회 사용되었다.




3) 각각 ‘알레뚜스’(렘35:6, MT 28:6)와 ‘게노이토’




4) ‘페피스투메누스’




5) 제시된 교정은 단지 오리지널 본문에는 없었던 모음(원 히브리어 본문에는 모음이 없음-역자주)을 설정할 때만 가능하다. “ameen” 대신 “omen”으로 읽는 것이 주장되었다. 사25:1에서 그 단어 omen(“truth”)이 사용되었지만 그것은 하팍스(이는 성경에서 딱 한번만 사용된 단어를 말함)이다. 게다가 셉투아진트와 아퀼라 모두 사25장에서 omen 대신에 ameen으로 읽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만 한다.




6) 불행히도 이 “아멘”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대부분의 성경번역에서 위장되어 있다. 심지어 우리에게는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여기 아멘은 한글성경에서는 ‘진실로 진실로’ 로 번역되어 있다-역자주) 라는 말은 이상하게 들린다. 우리는 복음서의 헬라 독자들에게조차 낯설게 들렸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비록 이 비일상적인 표현이 오직 주 예수님에게서만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예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는 중에 다른 이들의 입에도 그 말을 넣으려 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예를 들어 마25:12를 보라).




7) “아멘”이 사용된 본문들(롬15:33;16:24;갈6:18등)에서 바울은 이 “아멘”을 말한 회중들을 생각하고 있다는 주장들이 때때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어떠한 방법으로도 결코 이를 가리키고 있지 않다. 이것은 가설일 뿐이다. 이 가설을 가능하게 만들려면 먼저, 축복이 주어진 후에 “아멘”이 공동적으로 말해졌어야만 한다는 확립된 실례의 존재를 설명해야만 한다. 그것은 쉽지 않다. 우리가 첫 세기에 관하여 가지고 있는 유일한 정보는 고린도전서뿐이다. 14:16은 찬양문구(주를 축복하다/찬양하다...) 이후에 공동적 “아멘”이 말해진 예로서 우리가 알고 있는 본문이다. AD2세기로부터(적어도 로마시대에는 그러했다. 하지만 또한 Dionys.Alex. in Eus. HE. 7.9.4도 보라) 우리는 주의 만찬예식(Just. 1 Apol. 65.3)에서 감사 기도의 끝에 찬양문구 후에 공동적 “아멘”이 말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예배 중의 “아멘”과 관련된 이 세기로부터의 아무런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 축복문구 뒤에 공동적 “아멘”을 말하는 실례는 AD2세기 중엽 경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큰 회당의 예배에서 나타난다(Tosefta, Sukka 4.6). 훨씬 뒤의 자료인 바빌로니안 탈무드(AD8세기)로부터 우리는 “아멘”이 아론적 축복의 세 부분들의 각각 이후에 공동적으로 말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Sota 39b - AD3세기 경의 유대인들은 미쉬나로부터 추론된 것으로 보이는 축복문구 뒤에 “아멘”을 말하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어떠한 반대도 느끼지 않았다, Sota 7.5). BC 3세기 경에 설립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사해 근처의 쿰란 지역에 있었던 작은 금욕적 유대 공동체에서는 또한 공동적 “아멘”을 말한 예가 존재했다. “아멘”과 같은 말은 그들의 언약 의식에서 축복과 저주 후에 말해졌다. 그것은 신명기 27장의 모델에서 따온 것이다(1QS 1.16ff). 이 “아멘”이 단지 예식의 끝에만 말해진 것인지(축복 뒤에 나오는 저주의 이후에) 혹은 축복의 선언 후에도 곧바로 말해진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8)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최초의 예는 사도적 책인 토빗8:8에서이다.




9) 유대적 실제를 위해서는 미쉬나에 관한 Berakoth의 논문을 보라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하나님이 욥을 시험한 목적이 무엇인가요?
(성경의문2)

[질문]


보통 목사님들은 욥기를 얘기할 때 고난을 견디면 하나님이 더 큰 복을 주신다. 혹은 고난을 통해 더욱 성숙하게 하신다. 라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은 데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단을 통해 *욥을 시험하는 가장 큰 목적* 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욥이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하나님께서 욥기서의 후반부에 직접 나타나셔서 욥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는데 그런 말씀들을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 말씀들을 하시는 중에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40:8)는 말씀을 하셨는데 욥이 스스로 의롭다 하여 하나님을 불의하게 하려 했는지, 그렇다면 욥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결국 그런 사실들을 인정하고 변화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답변]박신목사

질문자님의 지적대로 목사님들이 욥기를 단순히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그를 더 성숙시키려 했다고만 해석하고 치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과연 어떤 성격의 고난을 통해서 성숙시키는 것인지, 또 그에 대한 욥의 반응과 성숙되어 가는 과정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성숙해진 후의 결과는 과연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잘 분석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인생을 살면서 겪어야 할 고난에도 많은 종류가 있으며 그 고통의 세기도 다 다릅니다. 또 신자마다 믿음의 수준도 각기 다릅니다. 고난을 통해 믿음을 성숙시킨다는 언급도 구체적인 설명을 요합니다. 고난에서 영적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인지, 또 그 깨달음은 어떤 내용인지, 아니면 믿음으로 기도하면서 고난을 참아 내기만 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자동으로 믿음도 성숙된다는 것인지 등등 따져 보아야 할 요소가 많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책, 욥기

욥기의 가치는 아주 무궁무진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욥기가 포함되어 있기에 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에 틀림없다고 더욱 확신합니다. 욥기의 주제가 어떤 것입니까? 아무 이유 없이 도무지 감당치 못할 정도의 엄청난 고난을 졸지에 당한 욥이 그 원인을 알고자 씨름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구체적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채로 끝나버립니다. 이런 전제를 가져야만 욥기에 대한 피상적 해석과 적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욥기가 언제 기록되었습니까? 성경학자들은 욥을 아브라함, 이삭, 야곱 같은 족장들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봅니다. 지금부터 약 4천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때 벌써 아주 신실한 신자도 아무 이유 없는 극심한 고통을 당할 수 있다고 했으며 또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이유마저 끝내 모를 수 있다고 진술한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세상의 어떤 종교 경전이 수천 년 전에 이런 기술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야말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욥과 세 친구의 지루할 정도로 이어지는 논쟁의 초점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친구들은 죄를 지었으니 환난을 당했다는 것인 반면에 욥은 자기는 그런 정도의 환난을 당할 만큼 잘못한 것이 없으니 하나님만의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반발했습니다. 그런데 토론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 엘리후와 욥에게 직접 나타나신 하나님도 세 친구의 주장이 잘못이라고 신랄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 형편은 어떠합니까? 잘 믿으면 복 받고 죄 지으면 벌 받는다는 식의 기복주의 신앙이 얼마나 성행합니까? 최근에는 아예 기독교의 주된 흐름이다시피 되었지 않습니까? 그런 기복주의가 틀렸다고 욥기에 명시적으로, 그것도 지금부터 4천 년 전에 이미 선포 해놓았는데도 목사님들이 욥의 세 친구 같은 설교와 가르침을 줄기차게 되풀이하고 있으니 대체 어떻게 된 연유입니까?  

이 책의 오묘한 내용은 그 첫 부분에서부터 드러납니다. 욥이 이유 없는 고난을 당하게 되는 발단이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하늘에서 사단과 하나님이 욥을 두고서 두 번의 내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놀랍다 못해 신비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분노를 불러일으킬만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먼저 신비로운 까닭은 지상의 모든 일이 천상에 동시에 생중계 되고, 아니 천상의 계획과 조종대로 지상에서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분노가 치미는 것은 마치 하나님과 사단이 서로 장난치듯이 행한 두 번의 내기에 당시로선, 아니 지금도 도저히 찾기 힘든 신실한 믿음의 종이 엄청난 재앙을 겪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단은 몰라도 도대체 하나님이 그럴 수가, 그것도 사단과 힘을 합해서, 있는 것입니까?  

이제 욥기에서 파내어야 할 신앙상의 과제가 많고 심오하다고 제가 서두에서 말한 까닭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단순히 고난을 통해서 믿음이 성숙된다고 믿으면 하나님은 신자를 변화시키기 위해 채찍만 사용하시는 분이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성경을 해석할 때에 가장 먼저 따져야 할 것은 전체 줄거리입니다. 문맥 전체에서 밝히고자 하는 주제와 신학을 알지 못하고는 단편적이고도 문자적인 해석으로 그칩니다. 욥기는 특별히 더 그렇습니다. 욥의 세 친구의 말에도 부분적으로 옳은 내용이 곳곳에 많이 숨겨져 있으며 또 계속 논쟁만 이어지기에 구체적인 맥을 잡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심지어 어느 부분에서 누가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조차 구별하기 힘듭니다.      

그러다 보니 웃지 못 할 사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는 따지고 보면 신학적으로 틀린 말이며, 수아 사람 발닷이 욥을 조롱하면서 말한 일종의 욕설에 해당됩니다. 그런데도 단순히 그 문자적 의미가 너무 좋아 신자들이 금과옥조처럼 기도나 권면에 사용하고 집집마다 액자로 만들어 걸어놓고 있습니다.(잘못 가르쳐진 성경 사이트 # 9번 글, “욥은 처음부터 창대했다.” 참조 바람)

또 앞에서 언급한 대로 고난 후에 믿음이 자란다는 말씀에만 모든 초점을 모읍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하니까 고난 중에 신자 스스로 묵상하고 깨닫고 배우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간만 흐르면 자신이 정금같이 변화되어 있으리라는 손쉬운, 아니 헛바람이 잔뜩 들어간 기대만 키웁니다.  

욥기의 전제

욥기는 천상에서 사단이 하나님께 욥의 믿음에 대해 내기를 거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먼저 욥의 믿음을 칭찬하자(1:8) 즉, 도전을 유발하자, 사단은 당장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반발했습니다. 복을 많이 받아 믿음이 좋은 것이지 모든 소유물이 없어지면 하나님을 경외치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그런지 보게 욥의 몸에만 손대지 말고 자녀들과 소유물 송두리째 없애는 환난을 사단이 일으키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찌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1:21,22) 했습니다. 첫 번 내기는 사단이 보기 좋게 하나님께, 사실은 욥에게 완패했습니다. 욥은 자기가 받은 행복 아니 불행의 양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순전하게 경외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시 사단에게 욥을 칭찬해 더 격한 반발을 촉발시켰습니다.(2:3) 또 다시 사단은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큰 질병에 들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2:4)고 큰소리 쳤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치 아니”(2:10) 했습니다. 자신이 원인 모를 고질병에 걸려 고통이 극심했어도 하나님께 말로도 불만 내지 원망을 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단의 두 번째 시도 또한 무참한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이만한 믿음의 사람이 고래로 있습니까? 아마 성경 전체에 인간으로는 가장 믿음이 좋은 자일 것입니다. 욥은 아들들이 잔치를 벌인 다음 날에는 그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염려하여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한 후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아들들이 잔치하며 즐긴 것까지 번제로 성결을 시킬 정도였으니 본인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1:5)고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욥은 어떤 환난에도, 자식들과 소유가 하루아침에 다 사라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나서 한 순간도 편안치 않고 고통이 겹치는 그런 상황에도,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로선 스스로 노력하여 어떤 고난에도 흔들림 없는 믿음 상태에 도달한다는 면에선 따로 더 성숙시킬만한 부분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그를 연단하여 정금 같이 변호시키려는 내용도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것과는 훨씬 다르다는 뜻입니다.

사단과 하나님의 내기가 뜻하는 바는?

하나님과 사단의 내기로 욥기가 시작하는 것은 그 시사(示唆) 하는 바가 많습니다. 우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영역에서 이뤄지는 일이 인간이 몸담아 살고 있는 가시적인 물질계에 큰 영향을, 아니 사실은 그 전부를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욥의 경우처럼 사단이 인간에게 환난과 질병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반드시 하나님의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주권 하에서만 이뤄집니다. 사단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마음대로, 특별히 신자에게, 행세할 권세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과 허락 하에서만 움직이도록 그 활동 범위와 시기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우주가 선한 신(세력)과 악한 신(세력)의 싸움터이며 번갈아서 승패를 나눠가진다는 동양적 이원론과는 그 내용을 달리 합니다. 또 각기 통치 관할이 다른 신들끼리 그것도 순전히 인간식의 감정과 세력 다툼으로 인해 인간에게 행복과 불행을 가져다준다는 그리스 신화도 부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된 인간이 신들의 노리개 감이나 정체모를 영적 세력에 의해 그 일생이 좌지우지 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우주의 가시적 물질계든 비가시적인 영적영역이든 그 주인은 오직 한 분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신자를 돕는 영적 존재인 선한 천사들을 직접 주관하십니다. 또 악한 천사와 그 수괴 사단이 있지만, 하나님이 일부러 악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원래 선하게 창조됐던 천사가 하나님을 배반한 것임, 그분의 대적 내지 상대가 전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따라 오직 신자의 유익을 위해 한시적으로 불신 세상에서 왕 노릇 하도록 허락 받았을 뿐입니다. 또 아무리 사단이 불행을 인간에게 끼쳐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과 영광은 그 안에서도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물질계 안에 제한된 존재인 인간, 욥으로선 하나님과 사단이 자기의 믿음을 걸고 내기를 했고 또 그 결과 자신이 환난을 겪고 있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요컨대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환난이었습니다. 욥의 두 번에 걸친 고백을 보면 하나님께 전혀 불평하지 않는 대신에 범사가 오직 절대적인 그분의 주권에 따라 일어난다는 사실만은 그도 분명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로선 왜 그런 환난이 자기 같은 자에게 일어나야만 했는지 그 원인은 오리무중이었던 것입니다.  

욥기의 진행 과정

욥에게 큰 불행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세 친구가 위로하러 나타납니다. 반면에 욥은  너무나 고통이 심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한탄과 함께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하나님에게 원망을 쏟아 붓지는 않았습니다.  

세 친구는 환난의 원인을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워 하는 욥에게 정말로 판에 박힌 권면만 합니다. 하나님에게 죄를 지었고 불경하게 한 일이 있으니까 마땅히 벌을 받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유 없는 고난이 없다는 것입니다. 착하면 상주고 악하면 벌을 주는 하나님일 뿐입니다.

반면에 욥은 시종일관 그들의 말에 흔쾌히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까지 큰 환난을 받을만한 죄나 허물을 범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를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10:2)라고, 고난의 원인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따졌습니다.

욥과 세 친구들의 논쟁이 결론을 내리지 못하며 진행되자 제 삼의 인물이자 연소했던 엘리후가 등장하여 그들 모두를 야단치면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해 변론을 시작합니다. 그 후에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욥에게 여러 질문들을 던집니다.

주로 자연의 이치에 관해서 물었습니다. 자연의 이치란 눈에 보이는 물질계의 운행질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수많은 질문에 욥은 단 하나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눈에 보이는 것도 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인생의 영적인 문제에 관해 하나님과 변론해 이유를 알고자 덤비는 것 자체가 인간이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찌니라.”(40:2)고 물었더니 그가 무슨 대답, 아니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40:4,5) 욥도 하나님의 질문에 숨은 뜻을 눈치 채고는 동식물이 생장하는 이치조차 전혀 알지 못하는 주제에 지금 당장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따지고 든 것은 잘못이라고 시인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시 물었습니다.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하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40:8) 여기서 하나님이 말한 “내 심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당신께서 세상을 주관 운행하는 일반적 통치와 지금 욥 개인에게 내린 환난, 두 가지입니다. 물론 욥기 전체의 주제에 비추어 보면 욥에게 죄가 많아서 그에 상응하는 큰 환난을 주었다는 문자적 의미의 심판은 아닙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욥더러 당신을 대신하여 직접 세상의 통치자가 되어보라고 제안했듯이 먼저 당신의 공의로운 통치에 대해 불만과 의혹을 드러내는 욥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또 욥이 친구들과 토론 중에 자신의 의를 고집하는 태도를(6:24-30, 10:7, 13:13-24, 16:17, 21:4-7, 23:1-9, 27:5-6, 29:11-25 31장 등등) 끝까지 버리지 않은 잘못도 지적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악인이 형통하는 대신에 자기 같이 의로운 자가 환난을 당한다고 의혹을 드러낸 뜻은 역으로 말해 하나님을 불의한 분이라고 매도하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욥의 그런 속내를 예리하게 지적해내신 후에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네가 하나님처럼 팔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를 내겠느냐 너는 위엄과 존귀로 스스로 꾸미며 영광과 화미를 스스로 입을찌니라 너의 넘치는 노를 쏟아서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낱낱이 낮추되 곧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추며 악인을 그 처소에서 밟아서 그들을 함께 진토에 묻고 그 얼굴을 싸서 어둑한 곳에 둘찌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 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40:9-14)

참으로 의미심장하면서도 반어적(反語的)인 꾸중입니다. 욥이 지금 의로운 자기는 환난을 당하는 반면에 악인들이 형통한다는 의혹을 가졌었는데, 만약 그가 하나님 자리에 오른다면 불평했던 그 악인들을 정말로 공평하게 치리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그저 악인을 벌주고 의인에게 상을 달라고 아우성치지만, 하나님으로선 일일이 그렇게 할 수 없으며 당신만의 온전한 긍휼과 인내로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치리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던진 말씀에 더욱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네 오른 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만약 인간끼리 정말로 선과 악을 엄밀히 구분해서 공정하게 처리할 수 있다면, 그래서 욥이 스스로 의인이라고 주장해도 될 만큼 선하다면, 인간 자력(自力)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반어적으로 전혀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기에 흔히들 착한 자가 구원받고 악한 자가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일반 종교의 구원관이 틀렸다는 뜻입니다. 또 욥 같이 성경 전체에 최고 믿음이 좋은 의인도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는 합격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욥기에도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보석 같이 숨겨져 있다니 말입니다.

욥기의 결론

하나님은 또 다시 욥에게 세상의 통치와 자연의 이치에 관한 많은 질문들을(40,41장) 던집니다. 여전히 그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욥이 마침내 가까스로 입을 뗀 내용은 이러합니다.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 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이니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42:2-6)

그럼 욥이 자기가 당한 환난의 원인을 알았습니까? 또 하나님이 그 이유를 밝혀 주었습니까? 둘 다 답은 ‘No'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환난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욥도 하나님의 수많은 질문 공세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게 되자, 도무지 인간이 알 수 없는 하나님 고유의 문제까지 알려고 든 자신이 잘못이라고 깨달았습니다.

다른 말로 욥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옳고 선하다고 겸비하게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하나님께 변박하거나 의혹을 갖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 대신에 오직 자신의 사정과 생각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겸손하게 아뢰어서 그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금껏 하나님께 따지다시피 환난의 이유를 알려고 덤벼든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이후에 욥이 환난 전보다 더한 복을 받는 내용이 따라 나옵니다만, 욥이 친구들을 위해 빌어준 선행을 보상하거나 환난을 잘 참아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욥은 이제 어떤 일에든, 심지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극심한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은 선하시고 의롭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시인했기에 복을 받은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이 말년에 설령 복을 주지 않았더라도 욥은 더 이상 원망은커녕 그 이유조차 묻지 않는 자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으로선 욥기 서두에 사단과 내기를 한 잘못(?)이 있는지라 욥에게 복을 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욥이 벗들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그들의 잘못을 야단을 치고 욥을 찾아가 사과를 하라고 명했다는(42:7,8)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이 책의 주제는 잘 믿으면 복주고 악하면 벌을 주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자 욥의 고난과 그 의미를 다각도로 논쟁하는 가운데 밝히려는 데 있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에도 하나님은 절대로 선하다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욥기의 결론이 너무 어이없게 끝난 것 같지 않습니까? 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진리인 하나님은 절대로 옳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한 것뿐이지 않습니까? 또 정작 그렇게도 극심한 고생을 겪은 욥의 믿음도 크게 자란 것 같지 않을뿐더러 환난의 이유마저 여전히 오리무중인 채로 끝났지 않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욥기는 사실은 그 본인보다 성경을 읽는 후대 독자를 위해 기록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시작하는 콜롬보 형사 시리즈처럼 사실은 처음부터 환난의 원인은 밝히고 들어갔습니다. 영적 차원에서의 하나님과 사단의 내기가 그 원인이었지 않습니까? 문제는 당사자와 주변 친구들, 즉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들마저 몰랐던 것입니다. 문학적 구성으로 보면 구태여 다시 원인을 설명해줄 이유가 없습니다. 끝까지 환난의 원인을 몰랐던 욥에게는 싱거운 결론일지 몰라도 그 전후사정 전부를 아는 오늘날의 독자에겐 이만큼 귀한 책이 없는 것입니다.

세 질문에 대한 답변

질문자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다음 세 가지를 물어왔습니다; 1) 하나님께서 사단을 통해 욥을 시험하는 가장 큰 목적이 무엇인지?, 2) 후반부에 직접 나타나신 하나님이 욥에게 하신 말씀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3) 욥이 스스로 의롭다 하여 하나님을 불의하게 하려 했는지? 그렇다면 욥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그런 사실들을 인정하고 변화되었는지? 이에 대한 답변은 상기 설명에서 이미 다 드린 것과 다름없지만 다시 간단히 정리해보기로, 욥 개인의 입장뿐 아니라 모든 신자가 알아야할 내용으로, 합시다.

우선 시험의 목적은 즉, 신실한 신자마저 겪는 환난의 이유는 가장 먼저 신자더러 하나님이 이 땅을 운행하시는 원리를 제대로 알라는 것입니다. 환난과 질병이 하나님이 신자가 지은 죄에 대한 벌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간혹 그럴 때도 있지만 당신의 인내의 한도가 차거나 또 신자를 강권적으로라도 고쳐야 할 때만 하나님이 직접 손을 들어서 치십니다. 그 외의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은 인간 스스로의 잘못과 사단에게 기인합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5:7)라고 말했듯이 삶에서 환난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상적인 일입니다. (세 친구의 변론에도 전체 맥락에선 틀렸어도 부분적으로는 신앙적으로 합당한 진리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욥기는 그래서 이해하기도 힘들지만 잘 따져서 읽으면 너무나 풍성한 책이기도 합니다.)

아담의 원죄로 인하여 피조세계가 함께 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인간끼리 부딪히며 사는 세상에서 실패와 잘못은 당연히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자기에게 닥친 환난을 두고서 잘 믿는데도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고 의심과 불만부터 가지기보다는 그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물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아무리 이해가 되지 않는 환난이라도 하나님의 공의에는 부족함이 없으며 그분만의 뜻과 계획은 있는 것입니다. 욥의 믿음을 훈련시키려는 목적도 바로 그런 진리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재삼재사 말하지만 그더러 거푸 겪은 환난 각각에 대한 구체적 이유를 알게 한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환난에도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숨겨져 있다는 영적 진리만 깨닫게 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서 하신 말씀의 거의 전부가 욥에게 던진 질문이었는데도 그가 단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럼 그 목적은 당연히 대답조차 못하게 만드는 것 즉, 욥이 하나님의 세상 운행 이치를 알려고 했지만 인간으로선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미처 이해되지 못하는 고통이 있으며 또 그런 고통이 절대로 하나님의 공의가 굽어진 표시가 아님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욥이 스스로 의롭다한 예들은 위에서 구체적으로 열거했습니다. 또 욥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선 분명히 자기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하시는 일에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릴 수는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자기가 의롭다고 한 말이 잘못이라고 시인했으므로 하나님은 절대 불의한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정한 것입니다.  

욥기에 숨겨진 복음

좀 더 첨언하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욥의 세 친구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하나님에게 공의만 있지 사랑은 전혀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은 인간의 의와 죄에 대해 일일이 그에 상응하는 상과 벌을 준다고 주장했지 않습니까?

참으로 놀라운 영적인 진리가 바로 이 부분에서 도출됩니다. 인간의 이해 수준으로 알 수 없는 환난이야말로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가 작동될 수 있는 계기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빤히 알 수 있도록 상벌이 분명하다면 기계적이고도 율법적인 하나님일 뿐이지 그분의 인자와 긍휼이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또 만약 인간이 범사의, 특별히 환난의 원인을 다 알 수 있다면 스스로 그에 대한 대응책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구태여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아가 상과 벌을 자기 행한 대로 이미 정확하게 받았으니까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회개할 이유도 따로 없습니다. 이유 없는 어려움이야말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지름길이자 그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통로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일부러 인간을 괴롭게 만들어서 다시 행복을 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소위 병 주고 약 주는 식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욥의 경우도 사단에게 불행을 일으키도록 허락만 했지 당신께서 직접 손을 들어 욥을 치시지는 않았습니다.(1:12, 2:6) 그리고 끝까지 그의 생명에는 절대 손을 대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구원을 미리부터 예비해 놓았던 것입니다. 생명이 살아 있는 한에는 하나님의 더 크고 놀라운 계획과 영광이 신자를 통해 얼마든지 이뤄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사단더러 환난을 허락한 후에 나중에 하나님이 복을 주셨으니까 결국은 병 주고 약 주는 하나님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결과적 모습에 불과합니다. 그런 진술이 옳으려면 하나님이 환난을 허락하신 목적 자체가 나중에는 반드시 복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욥과 달리 순교로 그 믿음의 여정을 끝나게 만드는 경우도 얼마든지 많지 않습니까? 또 욥의 경우도 고난을 주고 견뎌내게 한 후에 복을 주신 것이라기보다는, 환난에 대한 소중한 영적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욥기처럼 나중에는 복을 받았다고 결론내리는 것과 또 사단과 하나님이 천상에서 내기했다는 것 같은 성경상의 진술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설명하되 영적 진리를 더 확실하게 밝히기 위한 목적입니다. 알기 쉽게 말해 환난과 질병이 사단을 통해서도 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단과 내기를 하면서 하나님이 허락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으면 또 끝에 가서 복을 다시 주어 욥을 회복시켜 놓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사단 단독으로 신자를 마음 놓고 주무를 수 있다는 뜻이 되어버리지 않습니까?

외형적으로는 그렇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병 주고 약 주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단과 스스로의 잘못으로 인간이 병을 겪더라도 하나님은 절대 방치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과 권능으로 인도하십니다. 욥의 경우 그 기간이 길었고 환난 정도가 심했을 뿐입니다. 사실 그마저도 그렇게 심한 환난 중에도 욥은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서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진리를 증명케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엘리후의 변증 가운데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하나님)는 왕에게라도 비루하다 하시며 귀인들에게라도 악하다 하시며 왕족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며 부자를 가난한 자보다 더 생각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니라.”(34:19)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35:6-8)

바로 십자가 복음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악인이나 의인이나 당신이 지은 백성으로 동일하게 긍휼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또 인간의 의와 악은 인간 세상에서나 통할 뿐이지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는 합당치 않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욥이 아무리 스스로 의인이라고 해도 그 또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그런 극심한 환난 가운데도 당신께 입술로도 범죄하지 않는 믿음은 가졌을지라도 말입니다.

바꿔 말해 모든 인간이 하나님에게 취할 태도는 오직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하시는 것을 스스로 진술치 아니하시는 분”(33:13)이기에 인간이 그분과 변쟁할 수는 결코 없으며, 대신에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는”(34:10) 분임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말로 바꾸면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욥이 환난을 통해 변화되고 믿음이 성숙된 모습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의로운 행위만 했지 악행은 안 했으니까 자기는 의인이라고 자부하며 하나님께 이유 없는 환난을 당할 수 없다고 쟁변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하나님만이 옳다는 사실을 온전히 인정했습니다. 즉 진짜 의인은 오직 그분만이 의롭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는 자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의인은 이해할 수 없는 환난 중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아니라 오직 그분 당신을 믿는 믿음으로만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화난을 허락하고 친구들과 엘리후를 통해 논쟁을 거치게 했고 마지막에는 당신께서 직접 나타나신 모든 과정이 욥을 믿음으로만 사는 의인으로 바꾸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또 그런 하나님의 영원하신 인류 구속의 진리는, 비록 욥에게는 수건으로 가린 것처럼 어렴풋한 소망만 가지게 했지만, 당신께서 직접 오셔서 골고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완전히 밝혀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신자들이 욥기를 보는 시각이, 아니 강대상에서 욥기를 강해하는 내용의 폭이 넓고 깊어져야 하겠습니다. 이 외에도 구체적으로 살펴볼 내용들이 욥기에는 무궁무진하지만 지면 관계상 간략하게만 살펴보았습니다. 질문자님께서도 욥기 전체를 일관하는 주제에 비추어서 세밀하게 읽고 또 읽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풍성하게 깨달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http://whyjesusonly.com/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ISIS의 브뤼셀 테러, 다음은 어디가 될 것인가?

- 예루살렘 데이트 라인 (Brad TV) -


- ISIS의 브뤼셀 테러, 다음은 어디가 될것인가?
- 에스더서의 교훈, '정의를 위해 희생하는 용기'
- 가든 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현장
- 벤허 작가 '루 윌리스'를 통해 다시 보는 하나님

 

11.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전했다.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When he shall come to be glorified in his saints,
and to be admired in all them that believe
(because our testimony among you was believed) in that day.
Wherefore also we pray always for you,
that our God would count you worthy of this calling,
and fulfil all the good pleasure of his goodness,
and the work of faith with power:
That the name of our Lord Jesus Christ may be glorified in you,
and ye in him, according to the grace of our God
and the Lord Jesus Christ.  데살로니가 후서 1:10-12]
그 날에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면
성도들에게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 존귀한 분으로 여김을 받으리니,
이는 이미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복음의 증인으로
가슴에 간직한 복음의 증거가,
데살로니가 교회의 그들이 믿는 믿음으로 믿어졌음은
모든 선을 기뻐함은
fulfil all the good pleasure of his goodness,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선하심으로 기쁨이 됨은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our God would count you worthy of this calling
성도로 합당한 자로 여기심은,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심은
the work of faith with power,
성령님의 권능으로 믿음의 역사가 이루어 졌기에
바울과 그의 동역 자들이 늘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함은
주 예수님의 영광이 너희가운데 은혜가 되고
너희 안에 주가 계셔서 너희에게 영광이 되고
주께서 너희에게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바울과 그의 동역 자들과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교제가
성령님의 진실과 진리의 권능으로, 권능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거룩하신 이름으로
은혜로, 평강으로, 영광으로
성령님이 주시는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이 되어
권능을 받고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power of charity)으로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와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리스도 주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믿음의 역사가 이루어졌기에
성령님의 진실하신 진리의 권능으로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한 몸이 되는,
바울 파도, 실루아노 파도, 디모데 파도 없는
교회가 위치한 데살로니가 지역에 하나의 믿음의 공동체,
데살로니가 성도의 모임, 연합된 한 몸을 이룬 지역 교회가 세워졌다.
성령님의 권능으로.

이 권능을
구약의 대표적인 권능을
이사야는 이사야 33:13-16에 이렇게 증언하였고
이 시대의 우리에게 남기었다.

[너희 먼 데 있는 자들아 내가 행한 것을 들으라
너희 가까이에 있는 자들아 나의 권능을 알라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Hear, ye that are far off, what I have done;
and, ye that are near,
acknowledge my might.
The sinners in Zion are afraid; fearfulness hath surprised the hypocrites.
Who among us shall dwell with the devouring fire?
who among us shall dwell with everlasting burnings?
He that walketh righteously, and speaketh uprightly;
he that despiseth the gain of oppressions,
that shaketh his hans from holding of bribes,
that stoppeth his ears from hearing of blood,
and shutteth his eyes from seeing evil;
he shall dwell on high: his place of defence shall be the munitions of rocks:
bread shall be given him; his waters shall be sure.]
너희 먼 데 있는 자들아
너희 가까이 있는 자들아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였는지 들으라,
acknowledge my might.
시온의 백성이라는 선민들이 경건(godless)하지 아니하여 죄인이 되어
두렵고 떨며 하나님을 멀리한 거짓을 행하는 위선자가 되어
우리 중에 누가 영원히 맹렬히 타는 불에 영원히 거하겠는가.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He that walketh righteously.
공의의 하나님의 공의로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이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래서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따라서 빛같이 사는 자.
그런 자는 견고한 바위가 요새가 되며,
his place of defence shall be the munitions of rocks,
(하나님은 나의 요새시라)
양식을 공급하고,
bread shall be given him
(주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물을 주시리니,
his waters shall be sure
(성령님께서 성령을 부으리니)
성령의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을 주시리니
너 그리스도의 안(power of charity)에 거하는 자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였는지 들으라,
acknowledge my might.
하나님께 인정받고 허락받은 그리스도의 감사의 능력을 간직한
성령의 힘(power)을 받은 자여,
acknowledge my might.
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여
너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여
너는 높은 곳에 거하리라.
너 하나님의 권능이 미치는 곳에 있는 자여
너 하나님의 부르심에 가까이 있는 자여,
ye that are near.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에서 멀어진 자여,
ye that are far off.
하나님의 공의로 도무지 행하지 않는 자여,
마음이 굳어져 종교인이 되어
이제 마음이 화석(化石)같이 굳어진 죄인들아,
영원이 타오르는 불에 거하리라.
너희는 거짓말을 일삼는 자이며
억압하여 얻은 제물을 경멸하지 않은 자이며
손을 내밀어 뇌물을 움켜진 자이며
귀를 막고 고통의 소리를 듣지 않는 자이며
눈을 뜨고 악을 보는 자이라
낮은 곳에 비천하게 처하리니
견고한 바위도 요새가 되지 못하고,
(하나님과 멀어져 하나님은 그의 요새가 되지 못하며)
양식은 끊어지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도 읽어도 그는 깨닫지 못하며)
물을 마셔도 마셔도 끝없이 갈증을 내리니
(성령님은 진리를 거슬리는 그에게 떠나서)
성령의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을 훼방하는 자이며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를 도대체 알지 못하는 자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였는지, 자기 의의 자랑과 욕심에 하나님의 권능까지
삯으로 팔아먹은 자여,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자여,
들을 귀가 없어 성령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여,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너희 먼 데 있는 자들아
돌아오라
어찌 공의(righteousness)와 불의(unrighteousness)가 함께 할 수 있으며
거짓과 진실이 함께한 진리가 있을 수 있을 소냐.

만일 죄를 자백하면
스스로 회개하고 죄를 뉘우치면,
성령님은 미쁘시고 의로 우시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  -요한일서 1:9-

너희 먼 데 있는 자들아 내가 행한 것을 들으라.
Hear, ye that are far off, what I have done.
데살로니가 교회에 행한 것을 들으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 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데살로니가 전서 1:8-10]



 

아름다운 나이아가라 폭포

12060802_1.jpg
 
 
12060802_2.jpg
 
 
12060802_6.jpg
 
유명한 레인보우 브리지 ,,
미국과 카나다가 갈라지는 국경선에 있는 다리,,
 
저 다리에 서서 내려다보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저려옵니다.
 
12060802_7.jpg
 
위에서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볼때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작게 보였습니다.
사람들 조차 풍경이 되는 곳입니다.


 

12060802_8.jpg

 
12060802_9.jpg


 

12060802_10.jpg

 

저 보이는 탑 위에 올라가서 보면

카나다령과 미국령의  모두를 볼수있습니다.

대단한 장관을 이룹니다.

헬리곱터 투어도 있습니다.

배를 타고 폭포로 접근하면

 

 

12060802_13.jpg

 

눈앞에 정말 신비로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12060802_14.jpg


동양화 같은 풍경이 나타납니다.


 

12060802_15.jpg

 

대단한 사람들은 배에서 내려서 폭포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12060802_16.jpg
 
배를 타고 봐도
물 폭탄이 퍼붓습니다.
유리창이 없습니다.
그대로 물이 들어오더군요.
 

12060802_12.jpg


 

12060802_17.jpg
 

12060802_18.jpg
 
세계에서 찾아온 방문객이 한 목소리로
와~~  탄성을 지릅니다..

 

폭포가 무너질 것처럼 함성이 울립니다.
 

12060802_19.jpg
 
다시 돌아올때는 모두들 젊어져서 옵니다.
 
왜냐하면
 나이야,,, 가라!!를 외쳤기 때문입니다.


 

12060802_21.jpg
 
나이아가라 공원에 들어서면
카나다와 미국 국기가 사이좋게 바람에 날리며
 서 있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12060802_22.jpg

 자동차의 물결들...!

12060802_23.jpg

 

널직한 초록 잔디에서 많은 관광객들은 담소를 하거나

집에서 가져온 홈메이드 식사를 하기도 합니다.

 

12060802_24.jpg

 
12060802_25.jpg
 
 
12064648_5.jpg
  
Niagara 폭포의 그 "폭" 과 그곳에서
떨어지는 "수량" 은 세계 어느 폭포와도 "비교를 거부" 할 정도로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밤에는 발전을 위하여 물길을 돌려 "50%" 만 방류하고 낮에는 관광객들을 위하여
100% 방류합니다.  

 
12060802_26.jpg
(사진설명: 절벽에 붙어있는 하얀 점점으로 나타난는 것들은 물새들 입니다.
폭포를 넘어 날아가려고 노력했지만, 힘에 부치어 쉬고있는 새들이 장관을 이룹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절벽 위로 올라가서 내려다 보이는 절경을 즐기는 여행객들이 점점으로 보입니다.)
...................................
 
 세계의 가장 아름다운 폭포 는
1, 나이아가라 폭포 ,
2, 남미의 이과수 폭포,
3,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폭포'라고 합니다.

그중에  나이아가라 폭포가 가장 아름다운 폭포로 뽑혔다고 하더군요.

남미의 이과수 폭포는 나이아가라 보다 더 크고 웅장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면이
나이가라 폭포 보다는 못하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의 빅토리아 폭포는 웅장하고 아름답고 신비스럽지만
강물이 깨끗하지 못하고 흙탕물이라고합니다.

나이아기라 폭포물은
 참으로  푸르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물이 싱그러웠습니다..
그래서
카리스마가 있는 폭포입니다.
 
나이아가라,, 이 뜻은 천둥, 우뢰,라는
인디언 말에서 유래 되었다 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갈때마다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는 독특한 매력이 있습니다. 
 



'Amazing Na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캘리 최고의 힐링 트레일  (0) 2016.06.05
진귀한 동물들  (0) 2016.05.07
요세미티 불의 폭포  (0) 2016.03.17
2천4백만년 걸린 황홀한 작품  (1) 2016.03.10
The Wave 에 가기 힘들어진 이유  (0) 2016.01.28


TEL AVIV ? 이스라엘의 관광부 장관은 앞으로 이스라엘에 LGBT 관광을 홍보하기 위해 천백만 NIS(약 2백 90만 달러)를 사용할 예정이다.


이 캠페인은 이스라엘을 전세계 동성애자들을 포용하는 자유로운 나라로 선전하며, 동성애자들의 퍼레이드가 벌어지는 6월 뿐 아니라 1년 내내 동성애 관광을 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우리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잠재적인 성장 가능성이 매우 큰 동성애자들을 대상으로 한 사업(관광)을 증진하기 위해 여러 기관들이 일하고 있으며, 나는 지금 보다 훨씬 많은 동성애자들이 찾아오길 기대하고 있습니다.”라고 관광부 장관인 Yariv Levin이 말하고 있다.


10년 전부터 이스라엘 관광부에서 텔아비브를 자유의 도시(동성애자들의 도시)로 선전한 이후, 동성애자들의 관광이 100배로 늘어났으며 동성애 관광객들은 다른 관광객들에 비해 안전과 경제문제에도 별 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사원문 >> Israel Investing Nearly $3 Million in LGBT Tourism



* 1948년 5월 14일 로마에 의해 멸망 받은 이스라엘이 1900년 만에 나라를 재건하게 된다. 전 세계에 흩어져 핍박을 받던 유대인들이 고토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한 것이다.


이렇듯 시작된 유대인들의 귀환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데, 이들 가운데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모든 것들을 버리고 약속의 땅을 찾아온 이들도 있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세상적인 유익을 얻기 위해 이스라엘을 찾고 있다.


그 옛날 모세를 따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잡족(출 12:38)이 섞여 있었던 것처럼, 지금의 이스라엘도 믿음보다는 세상에 더 관심이 많은 ‘신앙적 잡족’들이 섞여있다는 것이다.


출애굽의 과정에서 바로 이 잡족(섞여 사는 무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타락시키는데 앞장을 선 것처럼(민 11:4), 지금의 이스라엘도 세속적인 유대인들이 거룩한 가나안 땅을 더럽히는데 앞장을 서고 있다.


종말에 관한 성경의 예언처럼 앞으로 이스라엘은 장차 하나님이 언약하신 마지막 한 이레(7년 대환난, 단 9:27)의 기간 동안 민족적으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제사장의(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 것이지만, 세상적인 유익을 얻고자 동성애를 통해 약속의 땅을 더럽히고 있는 망령된 (신앙적인) 잡족들에겐 준엄한 심판이 내려질 것이다.


소돔성으로 변하고 있는 텔아비브에 유황불의 심판이 내려질 수 있다는 뜻이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이미지 전체보기

 

                                                들풀(野草)

                                                               최송연

 

들에 뿌리내려 자랐으니
강인한 듯하건마는
줄기가 탄탄치 못하니
의기(意氣) 또한 약하구나

발밑에 밟혀 신음하는
동초(同草)를 외면하니
네가 푸르다 하여
어찌 대나무의 꿋꿋함에
견줄 수 있으리오

한 세월 가는 들판에 누워
이리저리 밟힐 뿐이라

그렇다 하여도 슬퍼 말지니,

너의 그 질기디질긴 뿌리까지야

뉘라서 감히 짓밟을 수 있으리

 

 

 



 

 
 

 






    어느 부활절 무렵,
    영국의 한 마을에 목사가 새로 부임을 해 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새로온 목사의 설교에 관심을 기울이며 하나 둘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드디어 목사의 설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바닷가 마을에 어머니를 여윈 소년과 그 소년을 목숨보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었지요.
    어느날, 소년은 소년의 친구와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높은 파도와 강한 바람에 둘이 타고 있던 배에 금세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등대지기 였습니다.
    등대에서 바라보다가 아들이 탄 배를 발견하고는감짝 놀라 가까운 곳에 대어둔 보트에 몸을 싣고
    아들이 있는 쪽으로 힘껏 노를 저었습니다.
    아들에게로 갔지만 아버지는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그사이 아들이 탓던 배는 뒤집혀 파도에 휩쓸려 가버렸고 자기가 탄 보트에는 한 명밖에 더 태울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둘을 모두 태운다면 배가 뒤집어 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미 아들의 친구는 포기한 얼굴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가 이내 손을 거두웠습니다.
    아들은 놀란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았습니다.
    "미안하다... 너는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지만 ... 네 친구는 아직 주님을 안 믿잖니..."
    아들은 아버지를 한참 바라보더니 이내 미소를 띄웠습니다.
    "그래요, 아빠... 천국에서 만나요..."

    아버지는 배에 아들의 친구를 태우고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지 못한채
    있는 힘껏 육지까지 노를 저었습니다.

    목사의 설교는 끝이 났고, 그의 눈은 촉촉히 젖어 있었습니다.
    찬송가가 시작되는데 교회 뒤쪽에 앉은 동네 불량배 몇 명이 자기들끼리 소곤거렸습니다.
    "뭐야, 저런 이야기 다 지어낸 거잖아!"" 누가 믿어"

    그때 그들의 뒤에 앉아서 그윽한 눈으로
    설교를 듣던 머리가 센 노인이 나직이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네. 젊은이들, 내가 그아버지고, 저기 서있는 목사가
    바로 내가 구한 아들의 친구라네...."

'짧은 글 긴 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비로운 영국여성  (2) 2016.05.23
한손으로 치는 박수  (1) 2016.05.08
마음에 담고 싶은 "명언"  (0) 2016.02.15
내 미소는 나의 명함  (0) 2016.02.11
종업원이 건넨 작은 쪽지 하나의 기적!  (0) 2015.10.24


하나님을 향해 순결한 사랑의 마음이 일어나면

그분께 순종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가 100%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신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 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완전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다.

비록 행위는 완전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완전해 질 수 있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완전한 마음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온전한 행위가 아니라 완전한 마음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완전한 자로 간주하신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예수님이 거하시기 때문이다.


- 담아온 글 -




 

경상도 말은 특유의 함축(含蓄)법이 있다.

타 지방인이 들으면 이해가 어렵지만

조금 익숙해지면 그 의미의 함축이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素月이나 木月이 울고 갈 그런 詩語이기도 하다.


가 : 그 아이

가-가 : 그 애가

가-가가 : 그 애가 가서

가-가, 가가? : 그 애가 그 애인가?

가-가, 가가가 : 그 애가 가져가서

가-가, 가가? 가가? : 그 애가 그 애인가? 저 애인가?

가-가, 가가, 가가가 : 그 애가 거기 가서 가져간다.

*더 있지만 머리가 아파서 이것으로 마친다.


*해설: 1. 가(3인칭 主語)

         2. 가(主格 助詞)

         3. 가(動詞 : 간다)

         4. 가(動詞 : 가지다)

         5. 가(指示代名詞 : 거기)

         6. 가?(疑問형 終結어미) 



'웃으며 삽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제 상황 같은 인형극  (0) 2016.06.21
행복한 교감  (0) 2016.05.31
누가 구구단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지?  (0) 2016.02.20
반송하고픈 택배!  (0) 2016.01.03
웃어야 하나, 눈을 감아야 하나?ㅎㅎ  (0) 2015.12.05

 

출처: 바른교회 바른신학 바른믿음/ 푸르름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출처: 바른교회 바른신학 바른믿음/푸르름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그리스도인들이 오래된 연대를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이유들


지구의 나이에 관한 논쟁은 오늘날 전 세계의 교회에서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다. 교회 역사의 첫 18세기동안, 그리스도인들의 보편적 믿음은 주전 약 4,000년 전 하나님이 일반적인 6일동안 세상을 창조하셨고 노아의 때에 그 세상이 전 지구적 홍수에 의해 파괴되었다고하는 것이었다.
약 200년 전, 어떤 과학자들이 지구와 우주의 나이가 수백만년 되었다고 하는 새로운 이론을 개발했다. 지난 200년 동안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은 그 수백만년이라는 연대를 성경과 조화시키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해 왔다. 그것들 중에는 날-시대 이론, 간극 이론, 지역적 홍수 이론, 구조가설, 유신진화론, 점진적 창조론 등이 있다.

많은 과학자들을 포함한 점점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전통적인 견해로 돌아오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성경 말씀에 충실한 유일한 견해이며, 다른 오래된 지구와 진화론적 이론보다 실제 과학적 증거와 훨씬 더 잘 부합된다고 믿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지구의 나이에 관한 주제는 중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분쟁을 일으키고 복음을 선포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정말 그러할까? AiG 를 비롯한 많은 다른 창조론 단체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짧은 논문에서, 우리는 왜 그리스도인들이 수백만년이라는 연대를 받아들여서는 안되며, 그럴 경우 교회 및 세상에 대한 복음 전도에 큰 방해가 되는지에 관한 몇몇 이유들을 제시하기 원한다. 우리는 이 논문이 독자로 하여금 이 주제에 관해 보다 주의깊게 생각하고, 여기서 제시되는 이유들을 효과적으로 설명할, 마지막에 제시될 좋은 자료들을 더 연구하게끔 돕길 바란다.

1.    성경은 하나님이 단지 수천년전 문자적 24시간의 하루의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치신다.

창세기 1장의 하루에 대한 히브리 단어는 yom 이다. 구약에서 그 단어가 쓰인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문자적 하루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렇지 않을 경우 문맥은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게 해 준다.

마찬가지로, 창세기 1장의 문맥은 창조의 날들이 문자적 하루였음을 보여 준다. 첫째, yom이 두개의 의미로서 성경에서 최초로 정의된다: 어두움과 밝음의 순환 중 밝을 때, 그리고 어두움과 밟음의 순환 전체. 둘째, yom이 “저녁”과 “아침”과 함께 사용된다. 구약의 다른 부분에서 이들 두 단어가 함께, 혹은 두 단어 중 하나가 yom 과 함께 그리고 독립적으로 사용되었을 때, 그것들은 언제나 문자적 하루의 아침이나 저녁을 의미한다. 셋째,구약의 다른 부분에서yom 이 숫자와 함께 첫째날, 둘째날… 과 같이 사용되었을 때, 언제나 그것은 문자적 하루를 의미한다. 넷째, yom 은 창세기 1장 14절에서 천체들과 연관되어 정의된다.

이러한 창조가 단지 약 6,000년 전에 발생했다고 하는 것은 마태복음 1장의 요약된 족보나 성경의 다른 족보와는 다르게 매우 구체적인 연대기적 정보를 담고 있는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로부터 명백히 알 수 있다.

2.    출애굽기 20장 11절은 수백만년이라는 연대를 창세기 1장에 끼워 넣으려는 모든 시도들을 막는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이 6일간 일하고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에 대한 이유를 제시한다. Yom이라는 단어는 그 계명의 양쪽 모두에서 사용된다. 만약 하나님이 6개의 오랜 기간동안 일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6일간 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셨다면, 그분은 기간이 정의되지 않은 시간을 의미하는, 다른 세 개의 히브리어 단어들 중 하나를 사용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분은 문자적 하루를 의미하는 유일한 단어를 선택하셨고, 유대인들은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했다 (19세기 초 수백만년이라는 사고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이러한 이유로 인해, 날-시대 이론과 구조가설은 거부되어야만 한다. 창조의 6일 전에 수백만년을 집어 넣으려는 간극 이론을 비롯한 다른 시도들 또한 거짓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6일동안 천지와 바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만물을 6일동안 만드셨고, 창조의 첫날 이전에 그 어떤 것도 만들지 않으셨다.

3.    노아의 홍수는 수백만년을 씻겨 보낸다.

창세기 6장에서 8장 사이에 기록된 전 지구적 대홍수에 관한 증거는 압도적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 대홍수는 모든 죄인들 뿐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육지 동물들과 새들을 파괴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이는 오직 전 지구적 대홍수만이 달성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방주의 목적은 홍수 이후에 지구를 다시 채울 한 쌍의 동물들과 새들을 보전키 위함이었다. 대홍수가 지역적이었다면, 방주는 필요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과 동물과 새들은 홍수가 발생하기 전에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만 하면 되었을 것이다. 대홍수의 재난적 성질은 40일 동안 쉬지않고 내린 비를 통해 나타나며, 이는 엄청난 침식작용, 진흙사태, 허리케인 등을 발생케 했을 것이다. “깊음의 샘이 터지고” (창세기 7장 11절)라고 번역된 히브리 단어들은 150일 동안 많은 곳에서 지각의 파괴가 일어났음을 명백히 가리키며, 이는 화산, 지진, 쓰나미 등을 야기했을 것이다. 노아의 홍수는 오늘날 우리가 전 세계적으로 관찰하는, 전 대륙에 걸쳐 존재하는 수십억 점의 화석을 포함한 수천 피트 두께의 퇴적층과 같은 복잡한 지질학적 기록과 같은 것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이러한 1년에 걸친 대홍수가 대부분의 퇴적층과 화석을 만들었다면, 이러한 암석과 화석들은 진화론자의 주장대로 수백만년에 걸친 지구의 역사를 대변하는 것이 될 수 없다.

4.    예수님은 지구가 젊다는 것을 암시하셨다.

예수님은 일관적으로 구약의 기적에 관한 기록들을 실제 역사적 기록으로서 다루셨다 (아담의 창조, 노아와 홍수, 소돔의 롯과 그의 아내, 모세와 만나, 요나와 물고기 등). 그분은 지속적으로 인간의 사고와 전통 위에 성경의 권위가 있음을 확증하셨다 (마태복음 15장 1 – 9). 마가복음 10장 6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명백히 지구의 역사가 길지 않다고 하는 것을 암시하시는 것을 명확히 볼 수 있다. 그분은 아담과 이브가 창조의 시작 때 존재했음을 말씀하시지, 창조 후 수십억 년 이후에 존재했다고 말슴하지 않으신다. 만약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충성스러운 제자들이 다른 견해를 갖을 수 있을까?

5.    수백만년에 관한 믿음은 죽음과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폄훼한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창조물을 보시고 “좋았다”고 하셨다고 7번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6일째 되던 날 창조를 마치시고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인간과 동물과 새들은 최초에 식물만을 먹었다 (창세기 1장 29 – 30, 성경에 따르면 식물들은 인간과 동물들과 같은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가 범죄했고, 하나님의 심판이 전 창조물에 임했다. 아담과 이브는 즉각 영적으로 죽었고, 하나님의 저주로 인해 육체적으로 죽기 시작했다. 뱀과 이브는 육체적으로 변했고, 땅 자체도 저주를 받았다 (창세기 3:14-19). 모든 피조세계는 죄의 사슬 아래 신음하고 있으며, 육식이 없고 (이사야 11:6-9), 저주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음으로 인해 (계시록 22:3) 질병과 고통, 그리고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계시록 21:3-5) 범죄 이전의 세상으로 만물이 회복될 (사도행전 3:21, 골로새서 1:20), 그리스도인들의 구속 (로마서 8:19-25)을 기다리고 있다. 창조와 인간의 타락 이전에 수십만년 동안의 동물의 죽음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죽음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위배된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을 그 어떤 도덕적 이유도 없이 질병과, 자연재해, 그리고 멸종과 같은 것을 그분의 창조 사역을 고치기 위하여 사용하시면서, 그것을 “매우 좋다”라고 부르시는,  변덕스럽고 갈팡질팡하며 잔인한 창조주로 만든다.        

6.    수백만년이라는 생각은 과학적 사실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자연신적, 그리고 무신론적 지질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들은 지질학적 관찰들을 성경적 창조기사와, 홍수 그리고 지구의 나이들을 성경과 모순되게 해석하기 위하여 반 성경적, 철학적, 그리고 종교적 선입관들을 사용했다.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은 오래된 연대를 성경에 끼워 맞추기 위하여 간극 이론, 날- 시대 이론, 지역적 홍수 견해 등을 사용하여 재빠르게 타협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질학적 논쟁을 이해하지 못했고, 주의 깊은 성경 연구를 통하여 그들의 견해를 방어하지도 않았다. “오래된 연대”에 관한 생각은 과학적 관찰이 아닌 자연주의적 선입관들로부터 나왔다.

7.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 측정법은 수백만년의 연대를 증명하지 않는다.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 측정법은 모든 세상이 이미 수백만년의 연대를 받아 들인, 20세기 초에 고안되었다. 수년간 창조과학자들은 이러한 연대 측정법이 명백히 잘못된 연대를 나타낸다고 하는 많은 예들을 이미 출판된 과학 논문들 중에서 인용해 왔다 (예를 들면, 지난 몇백년 혹은 몇십년 전에 발생한 화산암의 연대 측정이 몇 백만년으로 나오는 것들). 최근 “RATE 프로젝트”에 참여한 창조과학자들은 훨씬 더 많은 증거들을 알아내기 위한 실험적, 이론적, 그리고 현장 연구를 수행했고, 과거의 한 때 방사성 붕괴 속도가 10의 몇승배나 더 빨랐다는 것을 보였고 (예를 들면, 진화론자들이 수백만년 이상 되었다고 말하는 다이아몬드와 석탄 등이 탄소 – 14 연대 측정법에 의하여 단지 수천년밖에 되지 않았음을 보인 것 등), 이는 수백만 년으로 측정된 연대를 수천년으로 줄어들도록 함으로써 성경의 기록과 실제로는 일치함을 보였다.

결론

이러한 것들은 왜 우리가 성경이 우리에게 창조에 대한 진실된 역사를 제공한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 이유들 중 일부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들에 대한 최종 권위여야만 한다: 도덕적이고 영적인 문제들 뿐 아니라, 역사와 고고학 그리고 과학적인 것에 관한 가르침을 포함한다.

지금 이 주제에서 위태로운 것은 성경말씀의 권위와,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죽음에 대한 교리, 그리고 복음의 기반 그자체이다. 창세기의 앞 장들이 문자적으로 진실된 역사가 아니라면, 성경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믿음도 훼손되며, 여기에는 구원과 도덕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도 포함된다. 당신이 이 글 아래 있는 자료들을 스스로 주의깊게 살필 것을 권고한다. 교회의 건강과 잃어버린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명의 효율성,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달려 있다.          

By Dr. Terry Mortenson

출처: USA 아멘넷/제자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창세기 1:16)

우리의 태양계 중심에는 있는 태양은  10억개의 세계 주요 도시가 일년간 사용할 수 있는 양의 에너지보다 더 큰 에너지를 매 초마다 내보내는 안정적인 “수소폭탄”이다. 태양은 그 복잡성과 힘에 있어서 매우 놀랍다. 태양에 관해 연구할 때, 우리는 그것이 성경적 창조를 확증하는 것을 발견한다.

태양의 창조와 목적

태양과 다른 하늘의 광명체들은 창조 주간의 넷째날 만들어 졌다. 창세기는 우리에게 하늘의 광명체들이 (1) 낮과 밤을 구분하기 위하여, (2) 우리로 하여금 시간의 경과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3) 지구에 빛을 비추게 하시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 준다 (창세기 1:14-15). 네번째 목적은 성경의 다른 곳에 드러나 있다 –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함이다 (시편 19:1-6).

이 네 가지의 목적은 광명체들에게 일반적으로 부여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 두개의 목적은 거의 대부분 태양에 의해 수행된다. 오직 태양만이 낮과 밤을 구분한다. 모든 광명체들이 지구에 빛을 비추긴 하지만, 태양의 밝기에 비하면 그 밝기는 매우 적다. 창세기에는 태양과 달 모두 “큰” 광명체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아마도 태양과 달은 다른 광명체보다 훨씬 더 밝고, 큰 디스크처럼 보이는 반면, 다른 광명체들은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점으로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태양이 달보다 더 크고 밝으며,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근원을 가지고 있다. 달은 더 적고 흐릿하며 빛을 내기 위하여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는다. 달은 태양빛을 반사함으로써만 빛난다.

이들 두 개의 광명체의 다섯번째 목적은 창세기 1장 16절에 나온다 – 바로 낮과 밤을 “주관하게”하기 위함이다. “주관하다” 혹은 “다스리다”라는 히브리 단어는 권세 혹은 통치를 의미한다. 태양은 낮을 정의하고 낮 동안 다른 모든 광명체들을 보이지 않게 할 정도로 밝기 때문에 낮에 대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언급될 수 있다. 달은 다른 모든 광명체들보다 더 밝음으로써 밤을 “다스린다”. 달은 밤에 항상 보이는 것은 아니며, 달이 없을 때 별들이 밤을 “다스릴” 수 있다 (시편 136:9). 광명체들이 밤 낮으로 “다스리기” 때문에, 그것들은 곧 정부의 상징이 되었다. 얼마나 많은 나라에서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을 국기에 사용하는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가족을 해와 달, 그리고 별들로 묘사하며 (창세기 37:9), 이는 성경을 통해 계속 나타난다 (요한계시록 12:1).

흥미롭게도, 하나님은 창조의 첫 3일 동안 낮과 밤을 구분하시기 위하여 임시적인 빛을 제공하셨다. 왜 태양이 넷째날이 되어서야 창조되었을까? 또한, 창세기는 왜 태양과 달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을까? 그것들은 단지 낯을 다스리는 “큰 광명체”와 밤을 다스리는 “작은 광명체”로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시편 136:7-9와 같은 다른 성경말씀을 통해 그것이 해와 달을 가리킨다는 것을 안다.) 위의 두 질문에 대한 답변은해와 달을 “신으로” 경배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는 것일지 모른다. 태양은 생명의 1차적인 근원이 아니다. 하나님이시다. 태초라는 것은 첫째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태양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태양은 인격적인 이름을 가진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창조의 일부분이며, 하나님이 만드신 큰 광명체이다.

태양의 특징

태양은 9천 3백만 마일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하늘에서 작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지구의 지름보다 109배 더 크며, 지구의 부피보다 백만배 이상 크다. 태양은 태양계에서 가장 큰 물체이며, 전체 태양계 질량의 99.86 퍼센트를 차지한다.  만약 10파운드의 볼링공이 태양의 질량이라면, 모든 행성과 위성, 혜성 및 태양계의 다른 모든 것들을 합친 것은 1센트와 5센트짜리 동전의 질량에 불과하다. 그리고 목성이 5센트짜리 동전일 것이다.

태양은 거의 대부분 수소와 헬륨가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우리는 태양빛을 무지개색의 “빛의 띠 (spectrum)”로 나누는 분광기를 사용하여 태양빛을 분석함으로써 그것을 측정한다. 태양의 스펙트럼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특정 빛의 파장을 가리키는 좁고 검은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밝혀졌다. 이 영역의 위치는 그 빛을 생산하는 물질과 일치한다. 그것은 마치 원자의 지문과 같다. 사실, 헬륨은 지구에서 발견되기 전, 분광기를 통해 태양에서 발견되었다. 이것이 “헬륨”이라는 이름도 태양신을 가리키는 고대 그리스 신의 이름인 “헬리오스(Helios)”에서 오게 된 이유이다. 비슷한 분석을 통하여 별들 또한 훨씬 더 멀리 있긴 하지만, 태양과 같이 수소와 헬륨 가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태양은 너무 뜨겁기 때문에, 내부의 원자들은 완전히 이온화되어 있다 – 전자들이 핵으로부터 완전히 제거되어 있는 것이다.

태양의 구조

이온화된 가스로된 공이라고 하기에는, 태양은 놀랍도록 복잡하다. 그것은 온도와 움직임이 서로 다른 몇몇 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태양의 핵은 가장 드거운 곳이며, 온도는 섭씨 천 5백만도 (화씨 2천 7백만도)가 넘는다. 이토록 높은 온도에서, 수소 원자의 양성자는 매우 빠르게 이동하여 서로 부딪쳐서 – 여러 단계를 통해 – 헬륨을 형성한다. 이과정은 “핵융합”이라고 불리며, 엄청난 에너지를 밖으로 내보냄으로써, 태양 표면에서 끊임없이 우주 공간으로 방출되는 에너지를 공급한다.        

핵융합의 과정은 또한 “뉴트리노”라고 불리는 작은 입자를 만든다. 이 입자들은 일반적인 물질을 그대로 통과하는 유령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태양의 중심부에서 한번 만들어지면, 뉴트리노는 거의 빛의 속도로 밖으로 이동한다. 사실, 몇백조의 뉴트리노가 지금도 매초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은 채 당신의 몸을 통과하고 있다. 놀랍게도, 이 일은 뉴트리노가 지구 반대편에 먼저 도달하고 지구를 통과한 후 당신의 몸을 통과하기 때문에 밤에도 진행된다. 과학자들은 뉴트리노가 실재로 태양으로부터 나오는지를 확증하는 탐지기를 만들었고, 이는 태양의 중심부에서 실재로 핵융합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태양의 방사성 지대는 태양의 중심부 바깥에 있는 태양 반지름의 약 3분의 2정도 되는 층이다. 이 지역의 온도 역시 수백만도이지만, 핵융합이 일어나기에 충분히 뜨겁지 않다. 대류 지대는 태양의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다. 이 지역에서, 이온화된 기체는 뒤집히는 단위 안에서 상당히 복잡하게 움직인다. 대류 지대는 적도 지역에서는 빠르게, 극 지역에서는 느리게 회전한다. 따라서 태양의 바깥쪽 3분의 1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이러한 순환이 태양의 자기장이 11년마다 한번씩 역전되는 부분적 이유라고 생각된다.

대류 지대는 태양의 가시적인 표면인 광구 (photosphere)로 둘러싸여 있다. 광구의 온도는 섭씨 약 6,000도 이다. “과립세포 (granule)” 라고 불리는 대류 지대의 가장 작은 단위는 태양의 광구의 고해상도 이미지에서 볼 수 있다. 광구에는 또한 “흑점 (sunspot)”이라고 불리는 작고 검은 지역이 있다. 흑점은 밑에서 올라우는 에너지의 이동을 막음으로써 대류를 방해하는 자기장에 의해 생긴다. 따라서 흑점은 주변부보다 온도가 더 낮으며, 더 어둡다. 흑점은 흑점을 태양과 분리시킨다면 매우 밝게 보일 것이지만, 훨씬 더 밝은 주변부로 인해 대조적으로 어두워 보이는 것이다. 흑점은 11년을 주기로 커졌다 작아지며, 태양의 자기장의 역전과 관련되어 있다.

광구 바깥에는 거의 투명한 채층이 존재한다. 채층의 기체 밀도는 매우 낮으며, 따라서 일반적인 경우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채층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개기일식 때 태양이 완전히 가려졌을 때이다. 일식이 일어나면, 달은 밝은 광구를 가리고 채층을 볼 수 있게 한다. 채층은 복잡하고 매우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채층 (chromosphere)이라고 불리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chromo” 가 “color” 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채층 바깥에는 매우 얇고 조직되었으며 이온화된 기체로 이루어진 광환이 존재한다. 광환(corona)는 왕관(crown)을 의미하며, 태양을 둘러싸는 가시적인 디스크이기 때문에 적절한 이름이다. 역설적으로, 태양의 광환은 섭씨 약 백만도 이상으로 아래층보다 훨씬 더 뜨겁다. 왜 코로나가 이토록 뜨거운지에 대한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생명을 위해 디자인됨

천문학자들은 태양을 주계열성 (main-sequence star)으로 분류한다. 태양은 다른 별들과 구성성분이 거의 비슷하고, 온도와 밝기 또한 다른 별들의 평균정도 된다. 여러 모로 보아, 태양은 단지 일상적인 별에 불과하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태양은 지구에서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하여 디자인된 것이 명백하다. 어떤 별들은 엄청난 양의 치명적인 방사선을 내뿜는 초화염 (superflare)를 가지고 있다. 태양은 다행이도 초화염을 가지고 있지 않다. 태양의 화염은 약하다. 태양의 온도와 지구로부터의 거리는 생명을 위하여 최적화되어 있다. 대조적으로, 더 밝은 별들은 생명체에 치명적인 자외선을 훨씬 더 많이 생산한다. 더 차가운 별들은 가시광선에 비해서 훨씬 더 많은 적외선 (열선)을 방출한다.

은하계 안의 태양의 위치또한 생명과 과학을 위하여 최적화된 듯 보인다. 만약 태양이 은하의 중심에 좀 더 가까웠다면, 해로운 방사선으로 인해 큰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만약 태양이 조금 더 은하의 바깥쪽에 놓였다면, 하늘의 절반에서 별을 볼 수 없을 것이며, 계절을 측정하거나 우주를 연구하는 일이 더 어려워 졌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태양은 다른 비슷한 별들과 비교했을 때, 리튬이 약 100배정도나 부족하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아직 알아내지 못했지만, 아마도 또다른 디자인적 특징으로 드러날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흥미로운 연구주제이다.

태양은 창조를 확증한다

태양은 창세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오랫동안 문젯거리였다. 세속주의자들은 약 50억년간 수소의 핵융합이 태양에서 일어났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핵융합은 중심부의 밀도를 서서히 변화시키며, 별이 서서히 밝아지게 한다. 물론 6,000년이라는 시간 동안에는 그 영향이 미미하다. 그러나 만약 태양이 수십억 년 되었다면, 과거에는 현재보다 30퍼센트 정도 더 어두웠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보다 태양이 그렇게 어두웠다면, 지구는 꽁꽁 얼어붙은 땅이었을 것이며, 이는 생명이 스스로 진화되는 것을 더욱 불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생존을 불가능하게 한다.

태양은 저절로 형성되었다는 시나리오를 거부한다. 세속적 천문학자들은 현재 태양 (및 다른 별들)이 우주에 존재하는 거대한 수소와 헬륨 기체인 성운(nebula)이 뭉쳐서 형성되었다고 믿고 있다. 천문학자들은 수천 개의 성운을 발견했지만, 그 누구도 성운이 뭉쳐서 별이 생기는 것을 관찰한 적이 없다. 단 한번도. 성운의 기체가 바깥쪽으로 퍼져 나가려는 압력은 기체가 서로 당기는 미약한 중력보다 훨씬 더 크다. 중력이 어떻게든 기체 압력을 극복했다 치더라도, 자기장과 각 운동량으로 인해서 더이상 기체가 뭉치지 못하게 될 것이며, 태양은 전혀 저절로 형성될 수 없다. 과학은 성경말씀의 가르침을 확증하는 듯 보인다: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By Jason Lisle, Ph.D.
출처: USA 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제자

영접(迎接)

대장쟁이 ㆍ 2016-04-09 (토) 11:09 IP: 100.xxx.137    

(창세기 18장 1-4절)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앞에서 살펴본 바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금 확인하고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아브라함과 사라, 열국의 아비, 열국의 어미로 고쳐 주신 다음 올라가셨고 아브라함은 자신을 비롯하여 이스마엘과 집안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18장에서는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오정, 낮 열두시 한낮에 장막문에 앉았다가 맞은편에 선 세 사람을 보고 달려가 영접합니다.

  아브라함은 왜 한낮에 장막문에 앉아 있었으며, 왜 세 사람을 보자 달려가서 영접하였을까요? 히브리서 13장 2절은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가나안 땅 남부지역, 나그네로 뜨거운 한낮에 여행을 한다는 것은 위험하고 곤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도 나그네의 삶을 살았었기 때문에 그 고통과 어려움을 아는 아브라함은 그래서 그들을 보자 달려 나가서 영접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부지중에 대접한 나그네가 알고 보니 하나님과 천사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편 99세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다시금 후손을 약속하시고 이름을 고쳐 주시고 할례를 받게 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 약속의 표징인 할례를 한 다음 하나님이 다시 오셔서 역사하시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맞은편에 나타난 세 사람이 하나님의 사자이거나 혹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라나타” 주님이 오시기를 슬기로운 처녀들과 같이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장막문에 앉지도 않았을 것이고 앉아서 바라보았어도 알아보지 못 하고 지나쳐 보내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세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 세 사람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입니다. 우선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뵙기 원한 모세에게도 하나님은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이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소돔을 멸하기 위하여 가는 천사인 것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남은 한 분 여호와(YHWH, 야훼) 앞에 아브라함은 “의인 오십만 있으면 사해 주시겠습니까?” 하고 간구합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세 사람 중 둘은 천사이고 한 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 곧 예수님이셨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삼위일체의 비밀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다렸을 것입니다. 할례를 행하고 나서 간절히 하나님을 기다렸기에 아브라함은 장막문에 앉았다가 한 눈에 알아보고 이들 앞에 달려 나가 땅에 몸을 굽혀(엎드려) 경배하며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가지 마옵소서.” 하고 간청하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세 사람을 극진히 영접합니다. 사라에게는 떡을 굽게 하고 자신은 짐승 떼에 달려가서 살찐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요리하게 하고 집에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상을 차리고 그들을 나무 아래 모셔서 수종 듭니다. “전심을 다 한 극진한 대접” 이것이 바로 영접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보면서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요1;12)”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정성을 다 하여 극진히 영접하였는데 우리는 그저 “그 이름을 믿는 것”으로 영접을 대신하니 너무나도 홀대하는 것 같다 싶습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그 영접으로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하면,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굉장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접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장막문에서 그 말씀을 들은 사라는 속으로 웃습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나이 89세 늙은 사라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무 희망도 없이 하나님 앞에서 불신의 웃음을 웃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돌아볼 때 하나님의 약속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라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라가 웃눈구나. 여호와께 능치 못 할 일이 있겠느냐. 내년에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 승인치 않고 안 웃었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들에게 오신 여호와 하나님을 극진히 영접하였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진정 극진히 영접하였습니까? 그 이름을 믿는다 하면서 아직 문밖에 세워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혹시 아닐까요?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을 좇아간 결과  (0) 2016.04.28
단 한 사람도 없었다.  (0) 2016.04.23
이름을 사라라 하라  (0) 2016.04.08
할례를 하고서도  (1) 2016.04.01
자격조차 없는 믿음의 계보  (2) 2016.03.17

 


- 한 남자가 30년 전 헤어졌던 생모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를 버렸다.


30년 전 입양을 보내기 위해 양육권을 포기했던 엄마가 아들과 결합하여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앞으로 결혼을 하여) 아기를 가질 예정이다.


51세인 Kim West는 그녀가 입양을 보내기 위해 일주일만에 양육권을 포기해야 했던 아들 Ben Ford(32)와 만나 2년 째 사랑에 빠져있다.


이 커플은 자신들의 성관계가 ‘근친상간’이 아니라 강변하며 자신들은 앞으로 결혼할 계획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들의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는 어릴 적에 헤어져야 했던 친족들이 어른이 되어 만났을 때 성적으로 끌리게 되는 ‘Genetic Sexual Attraction(유전적인 성적 유인)’이라고 학자들을 말하고 있다.



30년 전에 헤어졌던 아들과 연인이 되었다는 기사 내용


기사원문 >> Mother says sex with her son is 'incredible' as she reveals they're planning marriage and trying for baby



* 마지막 때를 향해 치닫고 있는 이 세대의 타락상이 동성애, 수간, 소아성애에 이어 이제는 천륜을 부정하는 ‘근친상간’을 사랑으로 소개하는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


노아의 때, 롯의 때와 같이 인간의 타락상이 정도를 넘어 도저히 회복될 가능성이 없을 때,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여 타락한 문명을 심판하시고 새롭게 하신다. 지금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적 개입(심판)이 임박한 말세지말인 것이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동성애, 차별금지법, 소아성애, 수간!

- 김지연 약사 (순복음교회 철야예배) -


바쁘신 분들은 31분 20초부터 보십시오.

동성애 문제를 알려주시면서

소아성애, 수간에 대한 이야기도 하십니다.


소아성애, 수간..

지금은 사람들이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합니다.


동성애도 옛날에는 사람들이 다 반대하며 욕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언론에서 쉽고 긍정적으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걱정이 됩니다.

얼마 전에 한 가수가 소아성애라는 논란도 있었습니다.
어릴 때는 연예인 중에서 특히 가수들을 좋아하는데,

이 시대의 아이들을 생각하니 더 심각성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당연히 이 모든 것들을 반대하지만,

우리가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하기 때문에

분별력을 갖길 바라는 의미에서 동영상을 올립니다. 

 

 

동성애 차별금지법-김지연 약사

 

옮긴 글/이웃 블로그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다시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자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았으나 우리 주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그것이라
For our rejoicing is this, the testimony of our conscience,
that in simplicity and godly sincerity, not with fleshly wisdom,
but by the grace of God, we have had our conversation in the world,
and more abundantly to you-ward.
For we write none other things unto you, than what ye read
or acknowledge; and I trust ye shall acknowledge even to the end;
As also ye have acknowledged us in part, that we are your rejoicing,
even as ye also are our's in the day of the Lord Jesus.
고린도후서  1:12-14]
이를 상고하는 마음으로 해석하면,
간단히 단순히 있는 그대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사로이 육체의 세상적인 학문과 지식과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을 본받은 자녀로
(하나님께 인정받아)
믿음의 양심으로 증언하는 일은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고 자랑이다.
(믿음의 양심, 성령님의 증언을, 바울을 통하여 증언하는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의 도인 복음이 기쁜 소식이기에
그 기쁜 소식을 전하는 바울에게도 기쁨이고 자랑이 된 것은
성령님과 함께한 증언이라, 권능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말은 분명하게 너희가 읽고 알고 있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니(성령의 인도로)
주 예수의 날(세상 심판의 날)까지 네가 너희를 인정하고
너희가 나를 인정하는 것은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기쁨이고 자랑이며
우리가 너희의 기쁨이고 자랑이 되리라.
(복음이 기쁨이 되고 자랑이 되는 감사의 능력, 권능)
이 권능은 주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성령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하나님의 같은 자녀로서의 성령의 감동감화
(感動感化)라 감격된 말이, 마음속의 영혼을 움직이는 운동력 있는
권능(power of charity)의 말이 되었다.
나의 형제여!
my brethren!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지고
Finally, my brethren, be strong in the Lord, and in the power of his might.  에베소서 6:10]
강하여 지고 그의 힘을 얻는,
be strong in the Lord, and in the power of his might.
성령의 권능으로
in the power of his might.
그것이 권능이다.
그 권능은 어디에서 왔을까?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과
이를 증명 증표하시는 성령님으로부터,
그래서
너를 위해서 나를 내어주는 사랑
너는 나의 기쁨이고 나의 자랑이 되며
나는 너의 기쁨이 되고 자랑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my brethren!
나의 형제자매여!
power of charity!

수직적인 계급의식이나 조직적인 상하 복명의 세상의 전통과 체제와
사회의 관습과 관행과 문화를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띠로 하나 되는
‘사랑의 띠’ 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진정한 교제를 맺어주신 성령님의 역사가 권능이기에
권능을 받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의 사랑 'charity' 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페하리라.
Reioiceth not in iniquity, but rejoiceth in the truth;
Beareth all things, believeth all things, hopeth all things, endureth all things.
Charity never faileth: but whether there be prophecies, they shall fail;
whether there be tongues, they shall cease; whether there be knowledge,
it shall vanish away.  고린도전서 13:6-8]
그리스도의 사랑,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시어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랑 ‘charity’을
그 거룩한 사랑을 간직한 사람은
불의, 불법. 죄악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터, 이 땅의 하나님의 의(공의)는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디모데후서 2:19]
이미 성령님의 인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불의한 터에서,
불법의 자리에서, 죄악 된 마음에 떠나
그리스도 십자가의 길, 그 거룩한 사랑 ‘charity’ 의 길, 진리의 길
생명의 여정은 예수님의 사랑을 떠나서는 하나님께로 갈수가 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그 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And they that are Christ's have crucified the flesh with the affections
and lusts.  갈라디아서 5:24]
육체의 정욕과 욕심을
육체의 탐심을 따르는 비방과 거짓을 십자가에 못 박은 길이라,
이를 십자가에 못 박지 못한 길로 간 사람들의 화려한 말이나 글이나
어떠한 주장도 진실이 될 수 없고 더욱이 진리가 아니기에
그러한 자들의 능력은, 어둠의 세력과 결탁한 권세의 어그러진 길이다.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Charity never faileth.
그리스도의 고귀하고 거룩한 사랑 ‘Charity’는 언제까지 항상 함께 한다.
세상 끝날 까지,
the day of the Lord Jesus,
그래서 사랑의 예수님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Teaching them to observe all thing whatsoever I have commanded you:
and, lo, I am with you always, even unto the end of the world. Amen. 마태복음 28:20]
보라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
lo, I am with you always,
세상 끝 날 까지
even unto the end of the world.
이제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재림하셨고 다시 오실 때까지 성령님이
세상 끝 날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나 어느 이들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한 구절을 떼어놓고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반하는 주장을 하고
성령은 소멸하지 말라 하여 성경을 곡해하고
더 하여 자기 의로 가장한 탐욕을 드러낸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Quench not the Spirit  데살로니가 전서 5:19]
정확히 이 구절은 성령의 소멸이 아니라
성령의 억제적인 제한을 의미한다.
‘Quench’ 는 사무엘하 21:17절을 보면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들을 쳐죽이니
그때에 다윗의 추종자들이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쟁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라]
여기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quench not the light of Israel'
'quench' 는 등불을 끄거나 억제하는 의미로 쓰였지
사라지고 없어지는 ‘소멸’ 아니다.
이사야 42:1-3를 보면 더 확실하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Behold my servant, whom I uphold; mine elect.
in whom my soul delighteth; I have put my spirit upon him:
he shall bring forth judgment to Gentiles.
He shall not cry, nor lift up, nor cause his voice to be heard in the street.
A bruised reed shall he not break, and the smoking flax shall he not quench;
he shall bring forth judgment unto truth. ]
이사야가 예수님을 예언한 장이다.
하나님은 예수님께 영(성령)을 주었은즉,
I have put my spirit upon him,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때에 성령이 임하였고
그 후 성령에 이끌리어 시험을 받은 후에 공생애 사역이 시작되었고
이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은 우리도 성령을 받고
우리의 육적인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권능이 임한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상한 우리의 몸과 영혼을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생명의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성령의 능력을 소멸하지 않으시고
진실로 정의와 심판을 시행하시기에,
우리가 상한 갈대처럼, 꺼져가는 등불처럼
우리에게 계신 성령님의 능력을 억제하고 제한하지 않게 하시려고,
진실로, 진리를 알고 정의롭게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기에 진실을 감추거나 거짓을 일삼으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지 못하시기에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구절의 해석은 잘못되었고 이는 성경의 앞과 뒤 문장으로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데 이는 성경을 잘못 이해한 무지이고
이 구절로 사이비들과 부흥사들은 교인을 겁주고 호통 치는 구절로 인용하여
무조건 적인 교회의 충성으로 광신자를 양성하고
그리고 무조건 적인 담임 목사의 순종을 강요하여 맹신자를 만들어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삼았고 이런 무지와 선동에 속거나 믿음의 분별력을 잃어서
자기 위안을 방도(方道)로 삼으면,
감성적 분위기의 예배로 좌지우지된 감성을 따라 자기도취에 취하면,
수치심을 잃어버려서 도무지 자기 잘못을 시인하지 않으면,
성경은 자기주장을 위한 도구가 된다.
이 어그러진 길로 간 지도자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은
결국, 자기들 자신이 세상적인 윤리와 도의의 수준에도 못 미침을
세상의 탓으로 돌리고
자기 합리화 하여 자신의 의의 올무에 걸려 남을 탓한다.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디모데후서 2:24-24]


Renaissance Pleasure Farie는

지난 4월 6일에 개막하여 5월 19일까지

주말에만 개최되는 LA 최고의 축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르네상스 축제는

Renaissance Faire,

혹은 Renaissance Fair, 또는

Renaissance Festival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합니다.

 

르네상스 축제(이하 RPF)는

미국의 몇 개 지역에서 순차적으로 개최되는데

캘리포니아에서는 위에서 말한대로 4월부터 5월에 걸쳐서,

 

일리노이와

위스칸신에서는

7월 6일부터 9월 2일까지,

 

그리고 뉴욕에서는

8월 3일부터 9월 22일까지 개최됩니다.

 

RPF는

한마디로 중세시대,

특히 엘리자베스 여왕과

셰익스피어 시대를 중심으로한

의상과 볼거리들로 이루어진 축제입니다.

 

더불어,

헨리 8세, 바이킹 시대,

17-18세기의 해적시대의 모습도 볼 수 있으며

 

당시의 각종 의상 뿐만 아니라

다양한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

음악과 각종 쇼들로 흥겨운 축제의 장을 이룹니다.

 

입장료가

다소 비싸기는 하지만

주말 나들이로 최고일 뿐만 아니라

 

평상시에 보기 힘든 의상과 장면과

음악과, 각종 쇼, 그리고 다양한 볼거리는

RPF만의 자랑거리입니다.

 

특히,

카메라를 들이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아서

스스로 포즈를 취해주기 때문에

 

초보든, 프로든 간에

사진사들에게는 인물 촬영에 더없이 좋은 기회입니다.



06091222_1.jpg

LA 지역의 RPF는

Santa Fe Dam Recreation Area에서 열리고 있는데

행사지역이 워낙 넓어서 찬찬히 훑어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특히,

사진을 찍느라고 한 곳에서 오래 지체하면

하루 종일 있어도 전체 행사장을 다 돌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뭐, 물론

대충 돌아보면

몇 시간 만에 돌아볼 수도 있습니다.


06091222_2.jpg

행사장 입구의 모습입니다.


06091222_3.jpg

행사장 초입부터 쇼가 펼쳐지는데

비록 아마추어 수준이지만 볼만한 쇼들이 제법 있습니다.


06091222_4.jpg

쇼를 구경하는 관람객들의 모습입니다.

한 여자의 시선은 사진사를 향해 있군요.


06091222_5.jpg

RPF는 볼거리와 먹거리,

살거리가 즐비한 곳이기도 합니다.

왼쪽 꼬마 여자의 뒷모습이 사랑스럽습니다.


06091222_6.jpg

 

서정적인 음악을 연주하는 무대와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곳에 앉아서 20-30분 음악을 듣다 보면 시간이 저절로 흐르는 듯 합니다.



06091222_7.jpg

이곳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과 무대를 자세히 보면,

같은 사람이 각각 다른 장소에서 노래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여러 무대를 돌아다니면서 각기 다른 장르의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06091222_8.jpg

이들이 서정적인 Wild Mountain Thyme을 부르는 동안 한컷 찍었습니다.


06091816_9.jpg

서커스 무대도 있군요.

이들이 비록 전문가들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많은 연습을 한 흔적이 보입니다.


06091816_10.jpg

중세시대의

여염(閭閻, 서민의 살림집) 집앞의 모습입니다.


06091816_11.jpg


06091816_12.jpg

동네 우물가, 혹은 빨래터의 모습입니다.

중세의 유럽도 우리네처럼 우물가가 동네의 소식을 주고받는 중심가 였을테죠.


06091816_13.jpg

중세의 기사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구애, 혹은 청혼을 하고 있군요


06091816_14.jpg


06091816_15.jpg

땡볕을 한 참 걸어다니다 보면 상당히 더운데

이런 알록달록한 양산을 쓰고 다니면 시원하겠죠?


06091816_16.jpg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저 여인들이 들고 먹는 고기의 크기로 보아서

닭다리는 아닌 것 같고, 칠면조다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06092521_17.jpg

행사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곳곳에 쉬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처럼 많은 것을 보면

인파가 얼마나 많고 붐비는지 대충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06092521_18.jpg

여긴 중세시대의 미용실입니다.


06092522_19.jpg

 

이들은 미뉴엣과 17세기 궁중 음악같은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06092522_20.jpg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귀족들의 모습입니다.


06092522_21.jpg

춤을 추는 귀족들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또다른 귀족?

옷차림을 보니 왕족같기도 하고.... 복식문화에 조예가 없어서 잘 모르겠군요.


06092522_22.jpg

우와!!!

이런데서 너를 만나게 되다니 무지 무지 반갑다...

 


06092522_23.jpg

캐리비안의 해적의 잭 스패로우로 분장한 사람의 모습... 진짜 잭 스패로우 처럼 생겼군요.


06092522_24.jpg

꽃을 든 여자가 나에게 미소를...


06092922_25.jpg

 

사진과 글 : 주안(power21)

 



 

 

 

 

 

 



 



       아직은 부활의 때가 아니다

       

      오늘은 괜스레 아침부터 마음이 울적하다.

      이런 때면, 나는 오래된 글을 찾아 읽어본다.

      좋은 글, 은혜의 글이란 읽을수록

      마음에 얼마나 위로가 되고 큰 힘을 주는지...

       

      우리가 잘 아는 한국 초대교회의 대부흥사였던
      김익두 목사는 본래 유명한 깡패였다고 한다.
      이런 그가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된 후 부고장을 돌렸다.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모두 기뻐했다.

      “그놈 정말 잘 죽었다!”하는 심정으로
      장례를 구경하려고  모여들었다. 
      장례식을 치른다는 장소로 찾아가 의자에 앉아

      장례 집행식을 기다리는, 모두의 마음엔 슬픔이 아니라

      김익두가 죽었다는 사실이 참기름처럼 고소하여

      춤이라도 출 것같이 화기애애한 기쁨이 넘친다.

      그런데 잠시 후 죽었다던 김익두가 걸어 나오며

      ‘여러분 제 장례식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게 아닌가?
      참석한 사람들 혼비백산해 하며 난리가 났다.

      이젠 정말 어떤 해코지를 당할지 알 수가 없다.
      모두가 사색이 되어 앉아 있는데

      김익두가 입을 열어 말했다.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과거의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이제 저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 태어난 김익두입니다.
      그동안 저의 잘못을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사색이 되어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고 한다.

      그 뒤 그는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한 후

      목사가 되었고, 이따금씩 옛 기질이

      불쑥불쑥 되살아나려 할 때가 있었지마는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야, 이 죽은 김익두야!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아직

      울려 퍼지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 되살아나려고 하느냐.
      아직은 때가 아니다.
      더 죽어 있어라!”
      그러면서 끓어오르는 혈기를 삭혔다고 한다.

       

      예수님 믿는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성령 충만의 생활이란 어떤 모습인지,

      의구심이 들고 환멸이 올 때가 가끔씩 생긴다.

       

      아,

      다른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에게가 먼저라고 말해야 하겠지...

      다행히 나는 타고나기를 내성적인 성격이며

      다혈질이 아닌 탓에,

      혈기가 끌어오르는 것 때문에 고통받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내성적인 타잎은 또 다른 것들,

      죽여야할 부분들이 많이 있는 것을 알 수있다.

      그러기에, 주께서는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말씀하신 것일까?

       

      현대 신앙인들을 살펴보면 지도자가 없던

      고대 이스라엘 땅 '사사시대'를 연상하게 된다.

      각자가 자기 마음대로 행하고, 마음내키는 대로

      내뱉고, 무법천지, 상식부재, 질서부재 시대가 

      현실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각자가 나름대로, 모두가 다 의인이다.

      자신의 생각이 가장 옳고,

      자신의 체험이 최상이고,

      조용한 사람은 불같은 사람을

      불같은 사람은 조용한 사람을 비방한다.

      다른 이는 성령도 받지 못한 이들로 매도하는 태도,

      자신만이 가장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인 것 같다.

       

      우리 모두 죽어야할 것들은 무엇일까?

      주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신의 실세를 넓히려는 욕심,

      자신의 사상을 밀어주지 않는다 하여

      섭한 감정을 넘어 상대를 원수시 하고

      더 심하면, 온갖 악한 말로 모함하기도 하는

      이런 유아적 표현의 악플들이 난무함을 보게된다.

      무엇이 문제일까?

      이 모두가 다 본성을 죽이지 못한데서

      오는 것은 아닐까...

       

      죽자, 죽어야 열매가 맺히던지 말던지 할 것 아닌가.

      아직은 주께서 일어나라 말씀하지 않으시는데,

       

      김익두 목사님처럼, 

      우리 모두 부활 때까지 죽어지날 수 없는 것일까....

       

       

       

      별똥별/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기 인식에의 길  (0) 2016.08.22
    무화과야, 무화과야~  (4) 2016.08.20
    받은바 은혜를 감사하자!  (3) 2016.02.05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0) 2016.01.02
    난 정말 주님을 닮고 싶은데...  (4) 2015.12.12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름

    로이드 존스

     

    (마 16: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여러분은 자아(自我)가 여러분의 삶을 어느 정도 지배하는지 그 "범위"를 알고자 시도해 본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의 일상의 일, 여러분이 행하는 것과 필히 접하게 되는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들을 살펴보십시오. 잠시 동안 이러한 모든 것 안에 침투해 들어온 자아의 범위를 숙고해 보십시오. 심지어 복음 선포에 까지 자기 이익과 이기적 관심이 영향을 끼친 것을 볼 때 놀랍고 두렵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끔찍한 발견입니다. 우리는 일이 잘되어 가는지에 관심을 갖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까? 우리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과 우연히 사람들을 만날 때 주는 인상 등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무엇입니까?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행동과 행위 뿐 아니라 복장, 외모, 모든 것에서 여러분의 삶 전체를 분석해 본다면, 자아에 대한 이 불건전한 태도가 차지한 범위를 발견하고 몹시 놀랄 것입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갑시다. 과연 우리는 삶 가운데서 단 한 가지, 자아로 말미암는 비참과 불행과 실패와 괴로움의 범위를 깨달은 적이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지난 주(週)로 돌이켜서, 불행과 긴장과 성급함과 언짢음, 말하고 행동한 것들 가운데 지금 진정으로 부끄러워하는 것들, 여러분을 혼란케 하고 균형을 잃게 한 순간들을 마음으로 상고하며 회상해 보십시오. 하나씩 하나씩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 모든 것이 거의 이 자아의 문제, 이 자아의 민감성, 이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귀착되는 것을 발견하고 놀랄 것입니다. 이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자아는 삶 가운데 있는 모든 불행의 주된 원인입니다. 여러분은 "아, 그것은 나의 허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저지른 일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좋습니다. 여러분 자신과 다른 사람을 분석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도 자아 때문에 그렇게 행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여러분도 동일한 이유로 그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음 구절에서 가르치시는 바와 같이, 만일 여러분만이 다른 사람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갖고 있다면,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비난을 받아야만 할 사람은 여러분 자신인 것입니다. 자아를 정직하게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실제적인 수준에서 매우 바람직합니다. 대부분의 불행과 슬픔, 삶과 체험에서의 대부분의 고통들은 그들의 궁극적인 근원이자 출처인 이 자아에서 비롯됩니다.

     

    이제 보다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서 자아를 교리적으로 바라봅시다. 자아를 교리적인 방법과 신학적 방법으로 바라보는 것이 매우 바람직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타락의 원인은 자아였습니다. 자아가 없었더라면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귀는 매우 교활해서 죄의 권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아의 관점에서 죄의 권능을 발휘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은 너에게 공평하지 않아. 너는 당연한 원한과 불평을 갖고 있는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이 말에 동의했습니다. 이것이 타락의 전(全) 원인이었습니다. 타락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세계 각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국제 회의가 열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본질은 바로 자아이며, 자기 과시입니다. 이것이 교리적으로 본 자아입니다. 자아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도전을 의미합니다. 자아는 내가 항상 하나님 대신에 자신을 왕좌에 앉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자아는 항상 나를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삶 가운데 모든 불행한 순간들은 궁극적으로 이 분리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과 및 주 예수 그리스도와 참된 교제를 가지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가 지하 감옥에 있든지, 발이 차꼬에 매여 있든지, 또는 화형을 당하고 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다면,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합니다. 이것이 수세기에 걸친 성도들의 체험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어떤 비참이나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과의 분리이며, 하나님과의 분리의 유일한 원인은 자아입니다. 우리가 불행할 때는 언제나 우리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대신 자신을 보고 자신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 때를 의미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의도되었습니다. 사람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의도되었습니다. 사람의 온 존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의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아를 영화롭게 하거나 자아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어떠한 욕망도 필연코 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영예와 영광을 구하는 대신에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정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바로는, 거룩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자아 중심의 생활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거룩을 반드시 행동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자아에 대한 태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거룩은 본질적으로 내가 어떤 일들은 행하고 어떤 일들은 시도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죄로 여겨지는 것들은 일절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아의 교만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자아의 관점에서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하며, 거룩의 본질은 우리의 삶과 체험에서 수많은 파멸을 일으켜 온 이 자아에 대하여 죠지 뮬러와 같이 우리가 죽었으되 완전히 죽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임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수준으로 자아의 문제를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보기로 합시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세상에 오셨습니까? 그분은 궁극적으로 인류를 자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자아를 돌아보지 않는 이러한 삶을 그분 안에서 완전하게 봅니다. 주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베들레헴의 말구유로 오셨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왜 오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오직 한 가지 답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중히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빌립보 2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의 본질입니다. 주님은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원부터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중히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신분과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실 권리를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아를 부인하지 않으셨다면, 결코 성육신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사신 그분의 자아를 부인한 삶을 바라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자주 자기가 한 말은 자기 스스로 한 말이 아니며, 자기가 행한 일은 "내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해하는 십자가의 자기 비하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시고, 자신을 전혀 중히 여기지 않으셨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 하나님, 보시옵소서,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오나이다." 주님은 모든 일에서, 곧 그분이 하신 모든 말씀과 그분이 행하신 모든 것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같이 친히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주님은 조금도 자기를 위하여, 자기 스스로 사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우리에게 그 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마음이니".

     

    우리는 당연히 이러한 삶의 극치를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보게 됩니다 그분은 순결하고 결백하며, 결코 죄를 범하시거나 누구에게 해를 입히신 적이 없었지만, 오히려 "욕을 받으시되 되받아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자신을 맡기셨습니다"(벧전2:23).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최고의 예입니다. 신약성경이 주장하는 바는, 만일 우리가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음을 믿는다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최대의 갈망이 자아에 대하여 죽어야 하는 것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의 최종 목적은 단지 우리가 용서를 받거나 지옥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새 백성, 새 인류, 새 창조를 이루고, 그분을 닮은 백성들로 구성된 새 왕국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많은 형제 중에서 처음 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본(本)이십니다. 바울은 에베소인들에게 보낸 서신서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으며,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피조된 그분의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여러분과 제가 구원을 받고 자아의 삶에서 분리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후서 5장에서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며,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을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그 이유에 대하여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이제 후로는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신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삶입니다. 이 삶은 자아 방어나 자아 민감성의 삶이 아니라, 모욕을 당하더라도 복수하지 아니하고,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쪽도 돌려대며, 또 누가 너를 법에 고소하여 네 덧옷을 뺏으려 하면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하여금 억지로 일 마일을 가게 하거든 그와 이 마일을 동행하고,"어떤 사람이 와서 나의 것을 요구하더라도 "이것은 내 것이요"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이 사람이 어렵다면, 내가 도울 수 있으며, 기꺼이 돕겠노라"라고 말하는 삶입니다. 나는 이미 자아를 처리했고, 자아에 대하여 죽었으며, 이제 나의 유일한 관심사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영예입니다.

     

    이것이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신 삶이며, 그분께서 죽으심으로 여러분과 저로 하여금 살도록 하신 삶입니다. 감사하옵게도 복음서는 계속해서 그분께서 다시 사셨으며 성령님의 새롭게 하며 강건케 하는 권능과 함께 성령님을 교회에게 그리고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셨다고 증거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힘으로 이러한 삶을 살려고 애쓴다면 반드시 실패할 것입니다. 우리는 시작도 하기 전에 반드시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보내주실 것이며,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복된 약속과 선물이 있기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삶이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죠지 뮬러가 죠지 뮬러에 대하여 죽을 수 있었다면, 어째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심히 악하고, 엄청난 비참과 불행에 이르게 하며, 최종적으로는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아들의 복된 사역을 부인하게 하는 자아에 대해 죽을 수 없단 말입니까.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
    글쓴이 : Jennifer| 원글보기
     

        나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최송연                   

      당신을 따라나선 이 길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쳥명한 날이거나 먹구름 휘몰아치는 어두운 날이어도 나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잔잔한 生이거나 시커멓게 뒤집힌 바다처럼 거친 生이거나 나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따스한 햇살로 행복한 때나 칼날처럼 매서운 바람, 서러운 눈물 삼켜야 하는 때에도 나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새벽 이슬같은 당신의 사랑 바싹 메마른 광야에서도 내 영혼을 呼� 열매 맺게 하시며 칠흑으로 새까만 밤하늘 아래서도 가슴에 피어나는 소망은 별빛으로 반짝입니다
      내 주여, 당신의 고귀한 생명 나를 위해 내어주셨으니 나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영원토록...






                나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최송연                   

        당신을 따라나선 이 길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쳥명한 날이거나 먹구름 휘몰아치는 어두운 날이어도 나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잔잔한 生이거나 시커멓게 뒤집힌 바다처럼 거친 生이거나 나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따스한 햇살로 행복한 때나 칼날처럼 매서운 바람, 서러운 눈물 삼켜야 하는 때에도 나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새벽 이슬같은 당신의 사랑 바싹 메마른 광야에서도 내 영혼을 적셔 열매 맺게 하시며 칠흑으로 새까만 밤하늘 아래서도 가슴에 피어나는 소망은 별빛으로 반짝입니다

        내 주여, 당신의 고귀한 생명 나를 위해 내어주셨으니 나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영원토록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가슴속에 영원히 계신 당신  (2) 2016.04.22
      들풀(野草)  (0) 2016.04.16
      내 기억 속에 그대...  (0) 2016.03.08
      나 오직 당신만을...  (0) 2016.02.14
      사랑의 배달부  (0) 2016.02.0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