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권능은 복음의 능력이고  
[이는 우리의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데살로니가전서 1:5]
복음의 능력이 권능이라
복음은 그리스도의 고난뿐 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 삯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이 세상에서 말씀하시고 본을 보여주신 삶이
우리를 위한 거룩한 사랑 ‘charity’ 이며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의인 공의가
이 땅에 이룬 성취이며
이를 우리와 함께 계시며 증거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라
성령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이라 사랑이시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베푸시는 전능자시라.

성경을 읽으면서 왜 말씀이 운동력을 잃어 영혼의 은총이 못되어
육체를 움직이는 힘이 못되어 무기력한 삶이 되었고
남을 탓하고 세상을 탓하는 구구한 변명이 일상화 되어 복음의 능력을 감하고
이도 모자라 어그러진 길로 향해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는가.
이는 그리스도의 고귀하고 순결하고 위대한 사랑을
가슴의 중심, 영혼의 한 가운데 온전히 간직하지 못한 순수함을 잃었기 때문이라
성령님의 권능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고,
받았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멀어진 까닭일진데
조금이라도 신앙의 양심이 남아 있다면 자신에게 물어보라.
거짓을 일삼고 거짓 증언하고 비방과 욕설이 마음에 가득한 사람의 믿음을
믿음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런 사람을 방관하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성령님께 사로잡힌 사람이라 착각한다면
당신은 맹신자 거나 광신자 아니면 사이비 다.
어찌 진리가 거짓과 함께 하고
그리스도와 바알이 함께 할 수 있단 말인가?
믿는 자 라면서, 지도자라면서 자신의 의로 보여주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을 보고 들어야 하는 일상의 이 시대
눈과 귀를 막고 싶다.
단언하건데 그런 그리스도교는 없다!
설령 실수가 있고 잠시 눈이 욕심에 가리고 귀가 얇아졌던들
다시 그리스도의 자리로 오면 될 것을 무수한 말은 변명거리 일 뿐이다.
돌아가자.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으로.

다시 권능을 되새겨 보면
하나님은
창조주(Creator)이시며
제한이 없으신 전능하신 하나님(Almighty God)이시며
하나님은 권능 자(權能 者, Mighty One)이시다.
그분은 이제 성령님으로 오셔서
매일 매일, 순간마다 우리의 영혼을 노크하시고 우리가 진실로 진리의 길에서
다시 순수한 믿음을 잊지 않게 잃지 않게 말씀 하신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 이다.
God hath spoken once; twice have I heard this;
that power belongeth unto God.
Also unto thee, O Lord, belongeth mercy;
for thou renderest to every man according to his work  시편 62:11-12]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전능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리스도는 부활의 권능이시라 우리의 부활이신 권능 자 시라
권능을 주시려고 성령님을 보내셨고 이제 우리와 함께 영원히 거 하신다.
이제 우리의 죄를 돌이키고 죄악에 젖었던 흔적을 지우게
정직한 성령님을 따라서 구원의 즐거움에 동참하고 죄에서 자유를 갖자.

권능은 그리스도의 고귀하고 깨끗한 사랑, 복음에 동참한 우리에게
성령님께서 주시는 능력이고 구약으로 돌아가서 권능에 대하여 알아보면
구약에서 성령의 표현은 ‘하나님의 영’ ‘거룩한 영’ 등 수없이 많으나
성령 ‘holy Spirit’의 표현은
시편 51:11 과 이사야 63:10-11 뿐이다.
이 두 군데에서 성령의 뜻하심을 살펴보면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좇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 이다.
Create in me a clean heart, O God; and renew a right spirit within me.
Cast me not away from thy presence;
and take not thy holy spirit from me.
Restore unto me the joy of thy salvation;
and uphold me with thy free spirit.
Then will I teach transgressors thy ways;
and sinners shall be converted unto thee  시편 51:9-13]

우리가 온전하지 못하여 일상의 생활에서 죄를 지어 죄의 흔적이
남아있더라도 회개하고 다시 주의 길로 돌아온다면,
우리의 죄를 흰 눈처럼 흰 양털처럼 깨 끗게 하시는 죄 사함을 받으려면,
정직한 진실한 진리의 성령님의 인도함으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리고 죄를 지은 당사자에게 잘못을 용서하기를 구하고
다시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지의 결정이,
Create in me a clean heart,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그러한 굳은 의지의 결정으로 회개를,
O God; and renew a right spirit within me,
성령님은 우리를 정직한 진실한 진리의 길로 안내하시고
Restore unto me the joy of thy salvation;
구원의 즐거움으로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
이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이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죄를 짓고 죄를 죄로 시인하지 못한 회개 없는 버릇과 일상의 습관은
이미 성령님의 능력이 떠나간 상태라
take not thy holy spirit from me,
그 길은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했고
종당에는 어둠의 길이라 이미 심판이 임했다.
그래서 다시 복음의 길, 주의 길로 돌아온 사람은 자신의 죄를 이미 알고
있기에 죄 사함의 경험으로 단련된 시험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믿음이 굳어져서 주의 도,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를 가르치고
복음을 알지 못하는, 알아도 잘못된 어그러진 길로 간 사람들을 주께 돌아오게 하는
일에 쓰임을 받는 이 능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이
권능(power of charity)이다.

이사야 63:10-11를 보면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백성이 옛적 모세의 때를 기억하여
이르되 백성과 양떼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그들 가운데에 성령을 두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But they rebelled, and vexed his holy Spirit;
therefore he was turned to be their enemy and he fought against them.
Then he remembered the days of old, Moses, and his people, saying,
Where is he that brought them up out of the sea with the shepherd of his flock?
where is he that put his holy Spirit within him?]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역(rebelled)하여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고
그가, 하나님이 돌이켜 그들의 대적으로 그들을 치셨더니
이스라엘 백성이 옛적 모세의 때를 기억하며 말하길
백성과 목자의 양을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이가 어디계시냐?
하나님이 어디계시냐?
백성 가운데 거룩한 하나님의 영을 넣어주신 하나님이 어디계시냐?
이를 이 시대로 바꾸면,
너희가 복음의 어그러진 길(against light)로 가서
너희가 반역(against God)하여 성령님을 염려하게 하였으므로
너희의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못하고
너희가 예전에 받은 구원을 기쁨을 잊었고
너희에게 성령님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을 잃고
너희가 하나님이 어디계시냐 하는 도다.    

무엇이 성령님의 권능을 제한하는가?
이 시대, 우리가 왜 이렇게 무력할까?

성령 ‘holy Spirit’의 표현을
시편 51:11 과 이사야 63:10-11에서 성령의 뜻하심을 살펴보았다.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한마디로 성령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거짓과 불법에 거하시지
아니하시고 그 길에서 돌아오길 바라시기에 반 복음적인 어그러진 복음의 길에서
역사하지 않으시는데 어느 이들은 이 간단한 사실도 모르고
자신의 능력을 얄팍한 성경의 지식으로 포장하여
무지한 선동을 하는 자 들이 많다.
자신의 허탈한 신학을 진리인양 무장하고 도취하여 허풍을 친다.
어느 이는 성령의 불을 받으라 한다.
어느 이는 성령을 받으라 하고,
도대체 성령님을 명령하는 부흥사와 목사들은 누구인가?
그런 자들에게 믿음마저 세뇌되어 혼미한 정신에 무엇을 구한단 말인가?
그러니 세상의 음모론이 사실인양 이리 저리 흔들리고
극단적인 종말론과 신비론과 음모론에 영혼을 빼앗겨 버리고
조급한 믿음에 평안까지 빼앗겨 버리면
자신이 만든 자신의 허황된 믿음의 벽에 갇혀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신비주의, 세대주의 등에 멍들은 사이비들과 휩싸이거나 동조하고
예루살렘까지 전도가 되어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기자는,
무리들이나 그런 주장에 동조하는 자들은  
늘 666, 베리 칩, 가톨릭의 종교통합, 음녀론, 후리 메이슨 등 음모론과
극단적인 종말론을 겸하여 천국 간증,
바울도 꺼리였던 천국의 간증까지 곁들여 증명하려 하고
혼미한 흑암의 길이 진리의 길로 둔갑하여
자신들의 믿음의 무지를 이단과 사이비등 배교를 핑계로
툭하면 신천지 탓이고 이단 탓이고 온갖 마귀, 귀신 탓으로
이제는 정치 사회의 사상적인 이데오르기 탓으로
자신들의 몽롱한 믿음을 드러내고 자신들의 거짓과 탐욕을 진리로 빙자하여
스스로 사이비임을 증명한다.
왜 그럴까?
두려워 말고 염려 말고 조급해 하지 말자.
하나님은 전능자 시고 우리는 그 분의 자녀이고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였고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위대한 사랑 ‘charity’ 을 주셨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요
성령님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예수님의 사랑을 증명하시는 권능 자 이시며
권능을 우리에게 주시고, 주시길 간절히 바라시고 학수고대(鶴首苦待)하시며
진리로 인도하신다.
이제 무엇을 걱정하는가?
귀신인가 사탄인가?
믿음은 분별력이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분별력은 믿음에서 역사하시기에
혼미한 사이비들의 주장에 물든 영혼의 소유자들이 무슨 분별력이 있겠는가.
그 때는, 재림의 때는 만들어진 때, 시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때다.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이다.
그 때는 하나님 이외는 아무도 모른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신들의 무지함을 주장하여 자신들의 혼미한 영혼을 자랑하는 자들
그런 자들은 뭔 신기한 진리의 길을 발견한 듯하나 그런 자들의 이면에는
자기 자랑의 진리의 독점, 욕심이 둔갑한 진리를 사실인양 퍼트리고 주장하고
강요하여 겁을 주는 일은 복음의 능력을 감소시키는 사이비들이기에
사악한 마음에 구하여도 악한 마음에 함께 하실 성령님이 아니시거늘
성령님을 명령하는 패악하고 사악한 자들은
자기의 악에 걸리어 그 죄의 줄에 매여서
미련해져서 성경의 훈계를 혼미하게 주장하여 사이비가 되었다.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어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그는 훈계를 받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죽겠고
심히 미련함으로 말미암아 혼미하게 되느니라  잠언 5:22-23]

하나님이시면서 낮고 낮아지셔서 인간으로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고귀하고 순결한 사랑 ‘charity’를 간직한 믿음으로,
감사와 찬양으로,
인도 하시는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심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우고 본이 되었듯,
이 시대 이 곳에서도 성령님은 똑같이 원하셔서
우리의 영혼을 흔드신다.

너희 가운데에 성령을 두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시냐?
where is he that put his holy Spirit within him?
하나님이 이제 어디계시냐?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데살로니가 후서 2:13]




괜시리 벚꽃에게 말을 걸었어.

"어머나! 너 처럼 이쁘고 멋진 존재가 이런 공사장이 웬 말이라니?"

"너, 정말 여기 있는 것 싫겠다 그치?"

"너, 여기 있기 정말 아깝다. 어쩌지?"

"이런 이런;;"

나 혼자 괜시리 안스럽다 말한다. 


벚꽃은 말하지 않는다. 

그거, 너 잖아. 왜 너의 생각과 감정과 기분을 내 것인 냥 말하니?

너 웃긴다! 하지 않는다. 



이상하네. 이렇게 거친, 시멘트 바닥에 풀이 자라네.

밟힐지도 모르는데, 밟힐 지도 모르니, 피지 말자 하지 않네



나같으면 도로 한 복판에, 

동네 신작로에

그리 혼자 피어 있으라면 싫타 하겠네

쪽팔린다 하겠네

도시락 반찬 창피해서 학교 가기 싫타 했던 나하고는 너무 다르네 



괜시리 민들레에게 말을 걸었지!

"너, 그런 곳에 피어있기 쪽팔리지 않아?"

"너, 나 이런 곳에나 피어있을 내가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지 않아?"

"너, 나 이런 곳에 있다고 나를 무시하면 안된다."




소리 없는 민들레로 부터 내가 깨달은 것은

환경이 내가 아니다. 

그것이 내가 아니다.

그냥 나는 나다! 였다.

나의 의식이 가장 늦게 개화되는 것 같다.

 

출처: 사모님사모님/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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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시험과 사탄의 시험은 서로 전혀 다르다
 



 
사탄은 무너뜨리고 정죄를 받고 내어쫓김을 당하게 하기 위해서 시험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연단하심으로써 그들의 신실함을 시험하시며, 시험을 통해서 그들을 강건하게 하시며, 그들의 육체를 죽이고 정결하게 하고자 하신다. 이처럼 절제시키지 않으면 육체는 스스로 교만과 방종에 빠져서 걷잡을 수 없이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사탄은 무장을 갖추지도 않고 공격을 받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자들을 공격하여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완전히 무너지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험을 주시는 가운데서도 피할 길을 주셔서 그의 백성들이 그 닥치는 모든 것들을 인내로 견딜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고전10:13,벧후2:9).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6:13). ‘악’은 마귀로 이해하든 죄로 이해하든 별 차이가 없다. 사탄은 우리의 생명을 찾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철천지 원수이며(벧전5:8), 더욱이 그는 죄로 무장하고서 우리를 멸망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떠한 시험이 오더라도 거기에 압도되어 무너지지 않고,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적대 세력들을 주의 권능으로 대적하며 굳게 서게 해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하여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보살피심과 보호하심을 받아 죄와 사망과 지옥의 문들과 마귀의 권세 전체를 견디며 승리하도록 해주시기를 위하여 다시 말해서 악에서 구해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조심스럽게 주목해야 할 것은, 그 큰 용사 마귀와 싸우며 그의 힘과 공격을 견디는 일이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기들 스스로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는 자들은 그들의 대적하고 있는 그 원수가 얼마나 사납고 얼마나 무장이 잘되어 있는지를 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마귀는 미친 듯이 울부짖는 사자와도 같기 때문에, 만일 주께서 그 죽음의 상태에서 우리를 건져내지 않으시면, 우리로서는 즉시 그 마귀의 날카로운 이와 발톱에 갈가리 찢기고 그에게 삼키운 바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위해서 싸우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얼마든지 잠잠히 있을 수 있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하게 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시60:2).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그 안에서 강하게 서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야고보의 증언처럼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시험하지 않으시니(약1:13) 하나님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라고 구한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부분적으로 이미 해결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욕이 우리를 무너뜨리는 모든 시험의 원인이며(약1:14) 따라서 시험의 책임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고보의 의도는 다만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 스스로 범하게 되는 그런 악행들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는 것이 헛되며 부당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신 뜻을 따라, 정의롭고 은밀하신 그의 판단에 의하여, 우리를 사탄에게 넘기기도 하시며, 우리를 불신앙의 마음과 헛된 정욕 속에 던져넣기도 하시며, 우리를 시험으로 인도하기도 하시는 것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500-502

 

출처: 개혁주의 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남태평양 넓고 광활한 대양을 4대 지역으로 구분한다.

1. 오스트랄리아 지역,

2. 멜라네시아 지역,

3. 폴리네시아 지역,

4. 미크로네시아 지역 등

4대 지역에 15개의 크고 작은 섬나라들이 있다.

 

미크로네시아 지역에는 마샬군도, 나우루, 미크로네시아 연방, 팔라우, 키리바시 공화국 등 5개의 섬나라들이 있다.

 

이 글 에서는 키리바시의 비극적 역사를 고찰해 본다.
 

키리바시 공화국은 하와이 남서쪽 2,500 mile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국토의 전체 면적은 32개의 섬들을 모두 합해 약 313sq miles이다. 32개의 섬들 중에서 21개 섬이 무인도이다.

 

키리바시 공화국의 수도는 Gilbert 섬에 있는 Tarawa시이며 이곳에 전체 인구 10만 명 중에서 27만 명이 수도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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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아지는 해수면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키리바시 주민들

 

키리바시 (Kiribati) 공화국의 간추린 역사
 

키리바시에 3000년 전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고고학자들은 주장한다. 마샬군도와 피지 섬 등 여러 섬들과 왕래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섬마다 추장들이 통치를 했으며 bangota라고 부르는 제단이 섬들에서 발견되었는데 원시종교 생활의 흔적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상어 뼈로 무기를 만든 것으로 보아 부족들 간에 싸움도 있었다고 고고학자들은 말 한다.


고대로부터 14세기에 이르기까지 키리바시의 역사와 문화는 폴리네시아 인들과 미크로네시아 인들이 서로 왕래하고 혼혈하면서 독자적 삶의 세계를 형성하면서 그들의 역사는 계속되어 왔다.


그런데 1606년에 키리바시에 스페인의 해양 탐험가 Quiros가 제일 처음으로 상륙했다. 1788년에 영국인 Thomas Gilbert가 상륙하여 섬 이름을 자기의 이름으로 Gilbert섬이라고 명명했다. 오늘 키리바시의 수도가 있는 Gilbert 섬은 그때 시작된 섬의 명칭이다.

 

1799-1826년 사이에 영국인들이 선봉대가 되어 많은 유럽인들이 키리바시에 왕래했으며 백인 부랑자들의 무역의 중심지가 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Coconut Oil이 주요 무역의 상품이었으며 후에는 Copura 등 다양한 산물들이 영국인들의 주요 무역 상품들이 되었다.


1857-1875년에 영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줄을 이어 키리바시 여러 섬에서 선교를 시작했는데 이 선교사들은 주로 London Mission Society에 속한 선교사들이었으며 Catholic도 별도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1877-1892년에 영국은 키리바시 제도에 대한 통치권의 뿌리를 견고히 내리기 시작하였으며 1892년에 영국은 드디어 키리바시에 대한 보호령을 선포했다. 대영제국의 국기가 키리바시 Gilbert섬에 우뚝 서서 바람에 휘날리기 시작했다. 


키리바시의 32개 섬들이 차례로 영국의 보호령에서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이 1939년까지 줄곧 계속되었는데 1939년에는 섬들의 일부를 미국과 공동으로 활용할 태평양 상의 항공비행장 건설에 두 나라가 합의를 했다.


1941년에 세계 2차 대전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진주만을 폭격하고 2일 후에는 키리바시를 폭격하여 영국인들이 모두 떠나갔다. 일본군은 키리바시를 1945년까지 완전히 점령하고 있었다. 


1950년에 영국은 또 다시 키리바시에 돌아와 7년 동안 치안정국의 명목으로 식민통치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 7년 동안에 영국은 키리바시에서 그 악명 높은 핵실험을 감행했다.


영국은 키리바시를 핵 실험장으로 완전히 망가트려 놓은 후에 1963년에 이른바 <키리바시 행정위원회>와 <자문위원회>를 창설하여 키리바시의 독립을 위한 준비단계의 공작을 시작했다. 영국은 1970년대에 들어서서 키리바시를 영국의 태평양지역 지방행정관 산하에 속하도록 하고 영국인 행정관 John Field의 통치를 받도록 했다.


영국은 1973년에 미국의 평화봉사단(Peace Corp)을 키리바시에 끌어들였다.영국의 의도는 이를 활용하여 키리바시 민중들이 미국식 민주주의 선거제도에 세뇌 되어 선거를 통하여 친 서방 정권을 창출해 내자는 것이었다.


영국은 1977년에 키리바시 자치정권을 승인하고 1978년에 이른바 자유선거를 통하여 키리바시 독립 정권을 수립하게 했다. 1979년 7월 12일에 독립국을 선포하여 영국연방의 제 41번째 국가로 등록하도록 했다.


독립된 키리바시 공화국은 Gilbert에 속하는 16개 섬들, Phoenix에 속하는 8개 섬들 그리고 Line Island에 속하는 8개 섬들, 모두 32개의 섬들이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었다. 영국이 키리바시 공화국을 독립국가로 승인한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1900년대 초에 키리바시에서 발견된 인산 광산이 60-70년 후에 바닥이 났기 때문이다.


영국은 거의 1세기 동안 키리바시에서 막대한 인산을 착취하여 막대한 경제적 부를 약탈해갔다. 하지만 이제는 인산 광산은 바닥이 났고, 또 핵 실험으로 완전히 망가진 키리바시를 더 이상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1979년에 독립국으로 승인하고 영국의 연방국으로 묶어 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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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바시에는 이미 바다가 주민지대보다 높아진 곳도 있다.

 

크리스마스 섬 (Christmas Island) 에서 영국의 핵 실험 
 

왜 크리스마스 섬 이라 부르는가? 영국의 유명한 태평양 탐험가인 Captain James Cook이 1777년 12월 24일 Christmas Eve에 이 섬을 처음 발견하고 상륙을 했다는 전설적 이야기에 근거하여 크리스마스 섬 이라고 부르게 됐다. 그럼으로 크리스마스 섬의 명칭은 종교적 의미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영국인들의 끝없는 대양 탐험과 침략 야욕의 전통에 근거하여 붙인 명칭일 뿐이다.


영국의 핵 실험은 전적으로 미국의 설계에 의존하여 성공을 했다. 영국과 미국은 냉전시대에 소련을 견제하기 위하여 상호 협력했다. 영국 크리스마스 섬과 말덴 섬 외에 또 다른 섬들에서도 수 없이 많은 각종 핵 실험을 미국과 합동으로 또는 미국이 단독으로 계속하고 있었다.


1953-1962년 적어도 50차 이상 감행한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크리스마스 섬과 섬의 주변에서 그리고 또 말덴 섬에서 영국이 단독으로 실시한 두 핵 실험에 대하여서만 간략하게 살펴본 것이다. 


영국의 핵 실험 진행과 사후처리와 피해 보상문제
 

영국이 단독으로 크리스마스 섬과 말덴 섬에서 핵 실험을 엄청나게 진행한 과정이었으며 핵 실험 후에 사후처리 및 보상문제 등도 너무나도 비도덕적, 비현실적인 야만적 처사로 일관하였다.


특히 보상문제에 대하여 너무나도 방대한 문제를 영국은 시종 묵살했다. 이에 대해 국제사회는 문제를 계속하여 제기하고 있으며 명백한 역사적 자료가 태산처럼 넘쳐 나오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그 빙산의 일각만 기술한다.


영국이 크리스마스 섬과 말덴 섬에서 위험한 핵 실험을 감행하기 사전에 당연히 주민들을 안전지역으로 대피시켜야 했다. 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계획이 전무한 상태에서 핵 실험을 감행한 사실이 밝혀졌다.


핵 실험을 감행한 영국 군부의 비망록에 의하면 영국정부로 부터 아무런 확실한 지침이 없었으며 다만 구두로 민중에게 핵 폭파 광선을 피하여 눈을 감고 얼굴을 돌리라고 경고를 내렸다는 것이다. 


영국군 당국은 부녀자들과 아이들은 건물 안 에 모여 있으라고 경고를 했다. 그러면서도 영국군 당국은 핵 실험 폭파로 인하여 창문이 부수어질 것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악랄한 영국인들의 기만적인 두 얼굴의 모습인가?


핵 실험을 감행한 영국의 군부는 해상의 선박들에게 또 섬의 주민들에게 하등의 선전문이나 확성기를 사용하여 대피를 통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만일 그러한 통고를 시도했다면 도대체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 논의가 있어야 하는 점은 당연한데 지금까지 그런 것은 전혀 제시된 것이 없다.


핵 실험 후에 방사선 낙진이 섬 전역에 떨어져 쌓였는데도 불구하고 영국군 당국의 비망록에 의하면 핵 시험 후에 그러한 핵 낙진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섬과 말덴 섬에서 감행한 핵 실험에 동원된 인원은 총 2,500명으로 추산한다. 뉴질랜드인 500명과 오스트레일리아인 그리고 피지 정부가 제공한 대다수의 인원 등 총 2,500명이 영국의 핵 실험을 위하여 종사했다. 그런데 1999년에 발표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영국의 핵 실험에 동원된 2,500명 중에서 30%가 이미 사망했으며 이들은 하등의 보상을 받지 못하였다.


2,500명 중에서 100여 명의 자녀들이 불임증 환자들이 됐으며, 또 핵 실험에 종사한 2,500명의 후손들이 척추병 등 불치의 환자로 출생하는 확률이 일반인에 비해 5배 이상 높다 높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그 외에도 백혈병과 암환자들이 본인들과 후손들 사이에서 속출하고 있으며 또 염색체 이상형 환자들이 계속 발생했다.


핵 실험이 1950년대에 있었는데 40년-50년 후에야 보상 문제의 공방이 영국의 법정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또 놀라운 사실은 피해자들이 법정 소송을 진행하는 도중에 아무 결과를 보고 받지 못하고 사망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뒤늦은 법정 투쟁도 뉴질랜드 인들과 오스트레일리아인 그리고 피지 정부가 적극적으로 투쟁을 시도함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크리스마스 섬과 멘델 섬의 피해자들은 감히 영국정부에게 핵 실험 피해보상 같은 것을 요구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 어제와 오늘의 현실이다.


크리스마스 섬에는 2007년 현재 5,200 명이 생존해 살고 있다. 이들은 핵 실험 낙진과 오염된 핵폐기물 대한 제거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매우 위험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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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소금물의 침수로 죽어가는 키리바시 야자수, 지하수에도 염분이 침투하고 있어 큰 우려를 낳고 있다 


수몰의 운명을 기다리고 있는 키리바시 공화국
 

남태평양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섬나라 키리바시는 1900년대에는 서방의 침략과 식민통치에 시달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0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핵 실험장으로까지 사용되는 비운에 처했다.


그런데 영국과 미국의 방대하고 잔인한 핵 실험의 참화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오늘의 키리바시 민중들에게 2000년대에 들어 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2000년대에 들어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북국의 빙하가 녹아 내려 남태평양의 작은 섬 나라들은 수몰될 비극의 운명에 처해있다. 키리바시도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로서 예외로 될 수 없다.


지구온난화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구의 문명국들의 경쟁적인 산업화로 인하여 무진장 방출하는 이산화탄소가 지구의 열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는 이불효과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태평양의 작은 나라들이 수몰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것도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행한 영국과 미국의 책임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미국 펜타곤의 비밀 보고서에 의하면 향후 50년 내에 지구의 기후변화로 인하여 난민의 발생이 증가하고 더욱이 핵무기 경쟁으로 인하여 세계는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이와 같은 보고서를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키리바시는 인구 10만의 작은 나라인데 수몰의 위기가 나타나고 있지만 이렇다 할 대책은 속수무책이다. 하루 두 번 썰물과 밀물이 엇갈리는 시간에 해안 주택들은 수상 가옥으로 변하고 아이들은 허리까지 차오르는 물길을 헤쳐 왕래한다.


코코넛 나무가 무성했던 마을들은 침수되고 있으며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지하수가 바닷물에 오염되는 것이다. 30년 안에 이곳 섬이 바다 물에 잠길 것을 생각하면서 떠날 곳을 찾고 있지만 고향을 버려야 하는 슬픔 때문에 쉽게 떠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키리바시 섬 사람들의 실질적인 문제는 이렇다 할 기술도 학력도 없기 때문에 그들을 받아주는 나라는 어디든 없다는 점이 문제이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노동능력이 있는 젊은 이민자들만 키리바시 난민으로 받아들인다는 엄격한 제한을 제시하고 있다. 


키리바시 공화국의 제 5대 대통령으로 현재 집권하고 있는 Annuo Tang대통령의 말은 매우 심각하다. Tang대통령은 영국과 미국을 향하여 쓴 소리를 했다. 


"당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 싶으세요?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답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 하고 싶어요."


키리바시가 처해 있는 수몰의 운명에 대한 영미의 태도를 세계는 주시하고 있다.




 

 

 

‘따르릉! 따르릉!’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화들짝 눈이 떠졌습니다. 얼떨결에 불을 켜고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아직도 바깥은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렸고, 모든 만물이 고요 속으로 헤엄치듯 하느적 거리는데…간밤에 늦게 잠자리에 든 탓인지…온몸이 천근같이 무겁고 머리가 지근덕거렸습니다.

“누가 이런 새벽에 전화를 걸었을까?”
웬만히 급한 일이 아니면 이 시간에 전화를 걸 사람이 없을 텐데… 혹시, 한국에 계신 어머님께 무슨 문제라도…? 갑자기 불안한 생각에 쿵덕거리는 가슴,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집어 들었습니다. “여보세요!” 들려오는 낯선 음성은 구슬같이 밝고 명랑한 것을 보니 별로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담 도대체 누가 이 밤중에 사람을 깨운담…, “여보세요? 누구시지요…?” “사모님! 저예요, 저… 김 선화(가명)말이에요. 절 모르시겠어요?” “김…누구 시라구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려고 해도 잠결이라 그런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 왜 있잖아요? 한국에 계실 때, 교회마당 아래 살던 사람…김 선화 말이에요.” “아, 그때 그 지독한 사람…” 그제야 철거민 촌에서 개척할 때, 어려웠던 젊은 시절의 기억과 함께 우리를 많이도 괴롭혔던 그녀의 누렇고 둥그런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신학대학을 갓 졸업하고 나서, 우리가 개척을 시작한 곳은 부산 지역의 어느 철거민 촌이었습니다. 단칸방에서 개척을 시작해서 고생하기를 몇 년…, 이제 겨우 언덕 위의 조그마한 밭떼기를 교회터로 장만하고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말은 성전부지였지만…실은 손바닥만 한 언덕 위의 밭떼기였지요. 그 땅을 파고 반듯이 고르게 다듬어야만 교회로서의 허가가 나온다는데 …맨손으로 땅을 고르자니 막막했습니다. 근로자를 사서 하려니 돈도 없고 도와줄 만한 성도도 없어서 남편 전도사님이 혼자 삽과 괭이를 가지고 올라가서 열심히 그 땅을 고르느라 손바닥엔 피가 다 맺혔습니다.

 

그렇게 혹독한 고생 끝에, 겨우 손바닥만 하게 반반한 터를 만들고 그곳에다 가마때기를 깔아 놓고 나니 우리의 눈엔 더없이 훌륭한 성전 터가 된 것입니다. 그 가마때기가 우리들이 하나님께 눈물로 봉헌한 최초의 성전이었지요. 그곳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우리 전도사님은 매일 낮에는 그곳에 올라가서 일했고… 새벽 미명이면 일어나 그곳에 올라가 깔아놓은 가마때기 위에 엎드려서 혼자 눈물의 새벽 재단을 쌓고는 했습니다.

그때 저는 해산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새벽기도는 따라가지 못하고 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벽기도를 갔다가 들어 오는 남편에게서 심한 악취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 이게 무슨 냄새예요…?” 놀라서 묻는 내게 “글쎄, 지난밤에 누군가가 우리 성전터에 오물을 쏟아붓는 모양이요. 나도 역겨워서 기도가 다 헷갈리더니만…이런, 이런…바짓가랑이가 홀랑 다 젖어버렸군그래….” “어떻게 하죠? 우리 집에는 물도 귀한데….” 사실, 그 당시만 하여도 철거민 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수돗물이란 사치의 대명사였었지요. 집집이 수도를 놓아준 것이 아니라 한 동리에 하나씩 공동 수도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생각다 못한 저는 오물이 잔뜩 묻은 그 바지를 싸서 멀리 동구 밖 개천까지 나가서 빨아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밀가루 수제빗국으로 대충 때운 전도사님은 삽을 들고 교회 부지로 올라가서 그 오물들을 깨끗이 치우고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깨끗이 치웠으니 괜찮겠지…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다음 날도…또 그 다음 날도…누군지는 모르지만, 오물을 쏟아붓는 일을 그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습니다.…남편 전도사님의 단벌 바지는 물이 마를 사이가 없이 빨아서 말리느라 또 진땀을 빼고는 했지요.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누가 그런 몰상식한 짓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를 않았습니다.

 

사실, 교회부지 아랫동네 삼십 대 초반의 한 아주머니가 좀 수상쩍긴 했지만…, 그렇다고해도 그들은 모두 우리의 전도 대상자들이니…따져서 물어볼 수도 없고… , 그렇게 오물과의 쓰라린 전쟁을 묵묵히 참아내기를 몇 년…, 이제 자그마하게나마 아름다운 성전도 지었고 성전 뒤에 칸을 막아서 그곳을 사택으로 사용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도 나날이 부흥되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처음 보는 듯한 아주머니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다름 아닌 교회 언덕 아래에 사는 그 아주머니였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교인들이 다 돌아가고 나서도 혼자 남아서 한참을 오열하고 있던 그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면서 사택 문을 두드렸습니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다짜고짜 “전도사님, 저같이 나쁜 년도 교회에 나올 수가 있습니까?” 하면서 대성통곡을 하며 목놓아 우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남편이,
“그럼요. 아주머니 정말 잘 오셨습니다. 교회는 모든 분에게 열려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아주머니는 꺼이꺼이 목을 놓고 한참을 통곡하고 나서,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이 년이 천벌을 받아도 싸지요, 싸…흑, 흑, 제가 천벌을 받은 거예요…천벌을…”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하면서 우느라 말을 채 잇지 못합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내가 “아주머니, 천벌은 무슨…울지만 마시고요,무슨 일인지 차근차근 이야기를 좀 해 보세요. 그래야, 우리가 기도라도 해 드리지요.” 하면서 달랬습니다.

 

그제야 하시는 말인즉, 그 아주머니는 불교를 믿는 사람인데, 이곳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화가 나서 매일같이 밤만 되면 온갖 더러운 배설물이 든 요강이며…멸치젓 찌꺼기며…할 수 있는 대로 더러운 것이란 더러운 것은 다 동원을 해서 성전 터에 들고 와 쏟아 부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젊은 전도사님 내외분이 한 말씀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오히려 더 얄미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쓰레기가 모자라면 동네에 있는 것까지 모두 거두어 밤이면 교회 터에 가져와 쏟아붓는 것을 즐겼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생리기간도 아닌데 갑자기 하혈이 비치면서 심한 악취마저 났다고 합니다. 그래도 뭐 괜찮겠지…하면서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도 못하는 것은 남편이 양복점 기술자였지만, 계속되는 불경기에 아이들은 올망졸망 5명씩이나 되니 그 어린 것들의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워서였답니다. 하기야, 그때 우리 동네 사람들은 모두 철거민들이었고 보니… 대부분 모든 사람이 다 어려웠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곳에서 개척하는 우리도 예외는 아니어서 끼니를 거르는 날이 밥을 먹는 날보다 더 많았으니까요…

 

그래도 건강만 있으면 그런대로 버텨나갈 수가 있었는데 건강을 잃고 병원까지 들락거리기 시작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견디기 어려울 것이 뻔했습니다. 여유가 없는 그녀는 병원에도 한번 가 보지 못하고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지겠지…하고 차일피일 미루어 왔다는 것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몸이 점점 더 이상해 오고 기운이 빠지면서 밥맛도 없고 하여, 하는 수 없이 산부인과를 찾아가 진찰을 받은 결과 자궁암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전혀 손을 쓸 수가 없는 암 말기에 3개월의 사형선고가 내려진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들 부부는 좋다는 약은 다 써보고 용하다는 무당은 다 불러서 굿도 해 보고 효험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는 절간에 올라가서 삼천 배도 드려보고…세상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다 동원해 보았지만…병은 전혀 차도가 없었고…남편마저 일감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데 아내가 아프니 정신이 다 나가서 그런지 일은 점점 더 어렵게만 꼬여갔습니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빚을 얻어서 메꾸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그들에게 더 이상은 돈을 꾸어주지를 않더라고 합니다. 3개월 시한부 생에 돈을 더 꾸어주었다가 언제 받겠느냐는 것이겠지요. 하는 수없이 낙심한 상태에서 포기한 그 아주머니는 집에 누워서 죽을 날만 기다리면서 울고 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갑자기 자기가 지난날, 교회터에 온갖 더러운 오물을 다 쏟아붓던 악행이 영화 필름이 돌아가듯이 떠오르면서 속에서부터 벌벌 떨려오기 시작을 하는데 나중에는 이빨이 딱딱 부딪힐 정도로 심한 두려움이 몰려왔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밤새도록 두려워 떨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제 내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죽기 전에 지난 날 내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나 빌고 죽어도 죽어야겠다."라고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새벽종이 울리기가 무섭게 이렇게 교회로 올라온 것이라고 합니다.“ 아, 그랬었구나…그때 그 지독한 사람이 바로 이 아주머니가 틀림없었구나….” 생각해 보면 그때 일이 괘씸하기는 하지만…지금 와서 뭘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보아하니 이제 30대 초반, 나보다 겨우 네댓 살이 더 많을 것 같은데, 아이들은 올망졸망 다섯 명이나 되니 이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서야 하겠는가… 하는 불쌍한 마음이 더 앞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아주머니를 부둥켜안고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 용서를 하셨으니 마음 편하게 가지시고 이제 예수님이나 잘 믿어 보자고…교회에 찾아오셔서 너무나 고맙다고 위로하고 기도해 주면서 같이 울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 아주머니는 저녁만 되면 이불을 싸들고 교회로 올라와서는 밤새도록 혼자 울면서 기도하다가 새벽기도를 마치면 집으로 내려가곤 했습니다. 그때가 10월 중순쯤 된 것 같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혹독한 한파가 몰아닥쳤습니다. 그런 모진 추위에도 그 아주머니의 애절한 철야기도는 끊어지지를 않았습니다. 때로는 저도 방에만 누워서 잠을 청하기가 너무 미안해서 아기 둘을 재워 놓고 나면 살며시 빠져나와 교회에 나가서 울면서 같이 기도하다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방으로 뛰어들어 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1개월이 지나고 2개월이 지나고 의사가 선고한 3개월이 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몸서리치게 추운 가난한 철거민 촌의 기나긴 겨울도 다 지나가고 이제는 3월… 아름다운 개나리꽃이 여기저기 다투듯이, 노랗게 떼를 지어 피어나는 따뜻한 봄이 찾아왔습니다. 3개월이면 죽어야 할 아주머니가 6개월이 넘어도 죽지를 않고 오히려 몸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고…누렇고 핏기없던 얼굴에 점점 화색이 돌아오기 시작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 하나님께서 나의 병을 깨끗이 낫게 해 주었다.”하고 여기저기 간증을 하고 다녔고… 남편을 비롯한 온 가족을 전도하여 교회에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것을 본 빚쟁이들이 괜한 헛소리 하지 말라면서 정말 그런지 어디 같이 한 번 처음 암이라고 진단을 내렸던 그 병원에 가서 확실한 진찰을 받아 보자고 하며 그 아주머니를 억지로 끌다시피 하여, 그때 그 산부인과를 데리고 갔었습니다. 다시 자세히 검진해 본 담당의사가 나오더니, “당신이 정말 그때 그 김 선화 씨가 확실하냐? 암이 있었던 흔적마저 사라졌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좋으신 우리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은 죄를 죄대로 갚지 않으시고 회개한 자를 용서해 주시고 치료까지 해 주심을 보면서 얼마나 감사하든지요...

그 후로 우리는 곧 외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나왔고…우리가 떠난 다음에도 그 교회에 남아서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녀에게 물질로도 크게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남미에 있는 어느 큰 회사에서 양복 기술자 중 최고 책임자로 뽑혔고… 지금은 온 가족이 남미에 이민을 하여 그곳에서 신앙 생활을 아주 잘하고 있다고요 …헤어진지 20년이 더 넘은 지금도 그녀는 건강하게 잘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갈수록, 목사님 내외분이 너무 보고 싶어서 전화를 한다는 것이…그만 이곳 남미와 그곳 미국의 시차를 잘 몰라서 실수했노라고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용서라니요…집사님은 우리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실체를 몸으로 보여주신 산 증인이신데요…”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라기 4:2절 말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자신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세 번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이 대목에서 사랑하다는 두 가지 헬라동사, 아가파오와 필레오가 사용되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처음 두 번은 아가파오라는 동사를 사용하셨다. 그에 대해 베드로는 세 번 다 필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자신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했다.

어떤 이는 두 단어의 의미가 다르다고 본다. 아가파오는 무조건적, 신적인 사랑을 뜻하는 반면에 필레오는 인간적인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해석하면 주님이 아가파오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신적인 고차원적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베드로에게 물으신 셈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런 신적인 사랑으로는 사랑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사랑으로 사랑했다는 뜻으로 필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해서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세 번째 주님께서 물으실 때는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가서 그러면 인간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느냐는 의미로 필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했다고 한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기발한 해석인 것 같지만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해석이다.

성경은 헬라 문헌처럼 아가파오와 필레오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엄밀히 구분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의 헬라역본인 70인 역(LXX)에서 아가파오와 필레오는 상호교체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도 아가파오가 숭고한 신적 사랑만 의미하지 않는다. 한 예로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났다고 했을 때도 아가파오라는 동사가 사용되었다(딤후4:10). 요한도 두 단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에서도 두 단어가 등장한다(요3;35, 5:20). 특별히 요한은 같은 단어의 반복을 피하고 동의어를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하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주님과 베드로가 실제로는 아람어로 대화했을 것이다.

그러면 왜 주님이 이런 식으로 질문하셨을까? 이 질문에 실패한 자를 일으키는 섬세한 사랑의 배려가 담겨있음을 보게 된다. 실패로 인해 깊은 죄책감과 좌절감에 빠져 괴로워하는 이에게 죄와 실패를 잘못 지적하면 그를 더 고통스럽게 할 수 있다. 그를 회복하기보다 그를 더 망가트릴 수 있다. 베드로의 마음과 그의 상실감을 가장 잘 아는 주님이 그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질문을 하신 것이다. 밤새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그물을 오른 쪽에 던지라고 하셨다. 그러자 그물 가득히 물고기가 잡혔는데 그 수가 153마리였다. 바다 속 어느 곳에 물고기가 몇 마리 있는지를 다 아시는 주님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우리 마음을 얼마나 잘 아시겠는가. 우리 마음에 센서라도 달아놓으신 듯 우리 마음의 작은 움직임에 대해서도 민감하시다. 우리 마음의 동기와 욕망과 추구와 끌림을 잘 아신다. 베드로가 비록 자신이 장담한 대로 주님에 대한 충성과 사랑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그의 마음에 주님을 그 누구보다 더 사랑하고자 하는 진심과 열정이 있음을 아셨다.

주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읽으시고 그 진심을 알아주신 것이다. 그래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내가 그 진심을 안다.” 베드로 역시 주님이 자신의 마음을 아심을 직관적으로 안 것이다.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읽은 것이다. 마음이 서로 통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실패로 인해 죄책감 때문에 주님을 사랑한다고 감히 고백할 수 없었던 베드로도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나이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주님이 아시나이다는 말에서 주님이 자신의 진심을 아심을 그가 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주님이 세 번이나 이렇게 물으시니 베드로가 근심했다. 자신이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것이 생각나 괴로웠을 것입니다. 왜 주님은 세 번 씩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심으로 그의 과오를 상기시키시는가. 그것은 그의 실패를 온전히 만회해주시기 위해서였다.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한 것을 이제 세 번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상쇄해버리신 것이다. 주님은 베드로를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변절자가 아니라 세 번이나 최고의 사랑을 고백한 위대한 신앙인으로 인정해주신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책감과 패배의식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자로서의 자신감과 권위와 명예를 회복해주셨다.

 

출처: 개혁주의 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뒤돌아보고 들어가면서.
어릴 적부터 성경을 배워가면서
부모님 특히 아버지께 성경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교회에서 설교와 수많은 사람들의 성경 풀이와 간증을 들으면서
자라 청년이 되면서 고민한 주제가 ‘성령’ 이다.
그 당시 은사를 받아야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특히 방언을 못하면 버림받은 신자로 취급하는 어색한 분위기는
기복신앙을 향한 어그러진 길로 대형교회를 꿈꾸는  
그 유행의 시작은 미국의 대형교회(메가 처치)의 영향을 받았고
그 밑바닥에는 미국의 유명한 목사, 부흥사들의 복음주의를 앞세운
보여 주기 식 사람모우기가 자신의 영향력 과시와 은사로
잘못된 은사 주의와 이렇든 저렇든 복음이 전해진다는  
세 과시는 이미 순수한 복음을 떠나 어그러진 길을 향하였고
그 이전에 이미 잘못된 청교도 운동의 원인은 아직도 잘 아려져 있지 않다.
나의 청년시절의 대부분의 목사들은 은사제일 주의에 무너지기 시작했으면서
미국의 것은 모두가 좋다는 맹목적인 숭미 주의와 와전(訛傳)된
청교도의 덫에 걸려 무분별한 온갖 잡동사니 프로그램과 신학, 책 등이 한국교회의
부흥이란 이름으로, 선교란 명목으로 부패를 부추겼음을
미국에 와서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 부패해가는 교회의 변절을 바라보며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많은 시간 성경을 읽고 성경 학습 책을 구입하여 공부를 하고
수많은 유명한 목사의 설교 집과 간증과 성경강해와 주석서를 읽고
또 유명한 부흥사의 부흥집회에도 참석했고
더 성경을 읽기 위하여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 첫 번째로 깔아놓은 프로그램이
성경이었고 그 후 인터넷이 연결되었을 때, 또 수많은 설교자의 설교와 강해서,
유명한 신학자와 신학 책, 교리 등 온갖 책을 다운 받아 읽었고
강연 등 동영상을 보고서도 ‘성령’을 알고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성령’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다시 아침마다 성경읽기를 시작하여
속독을 하면 약6개월에 한번, 늦어지면 1년에 한번
더 정독하면 대략 1년 반, 이렇게 오랜 시간을 읽었을 때
구약과 신약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고 ‘성령’의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나름 지론(至論)이 생겼을 때
청년시절 거부하였던 거대한 부흥으로 둔갑한 은사주의의 물결을
보고 겪었던 부흥을 빙자한 잘못된 ‘성령 론’ 이라는 부패의 거대한 물결에서
반항하였던 시절은 외롭고 고독한 시간에 함께 하셨던 성령님이심을
알게 되었고 그 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확신한 신앙의 실체를 보고 느끼고
체감하여 가슴에 간직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도장을 새기듯
가슴에 각인(刻印, carving a seal)된 사랑 'charity' 으로
인치시고 (sealed)보호하시고
성령님이 주시는 힘(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이,
나를 인침(sealed me)이고
우리를 인침(sealed us)이고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의 끈으로 하나를 묶는,
그 끈이 순결한 사랑이며
바라는 것들의 실상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인 믿음으로
소망의 끈이 되어
하나님의 창조하신 본 모습의 손과 발과 온몸과 영혼이 되어
소망의 도구로 쓰임 받아
모두가 하나님의 경륜으로 하나가 되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크고 깊고 위대한 사랑, 그 사랑,
그 사랑으로 눈이 밝아지듯이
이는 엠마오로 가는 슬픈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으로
눈이 밝아진 두 제자처럼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누가복음 24:31]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립보서 1:19-21]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According to my earnest expectation and my hope,
진실한 믿음의 기대와 소망을 따라
이제 같이 인침(sealed us)을 받고 그 사랑 'charity' 의 눈으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능력,
그 실마리가 권능(power of charity)이다.
이 ‘권능’ 은 지금까지 알아왔던 의미의 일반적이고 통속(通俗)적인
개념(槪念 fundamental concept)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특별하고 별난 주장이 아닌,
성경으로 성경을 풀어본 나름의 풀이를, 나누고 싶어 글을 쓰고 있고
아주 커다란 은사를 생각하고 은사주의에 치우쳐 기대하는 분들에게는
생소하고 낯선 성경풀이가 될지 모르겠다.
본인부터 이런 성경의 풀이를 들어보지 못했고 이런 글을 처음 쓰니까
그냥 한 신앙인의 격고 배운 고백으로 참고 하였으면 한다.
그러나 ‘권능’을 이해하면 사도들의 사도행전을 이해하기 쉽고
복음의 능력을 알게 되어 그리스도를 본받는 능력이 되어 간다는
본인의 고백이고, 그러나 조금이라도 자랑이나 혼자 진리를 독점했다는 우월의식은
조금도 없음을 밝히며, 이로 인해 성경을 읽으면서 참 많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진리, 특히 ‘권능’을 간증하며 설명하려고
지금까지 쓰고 있고 쓴 세 가지의 글은 다시 소개하면

* ‘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주제는 ‘하나님’
부제는 ‘공의’ 로 하나님의 의(義)

* ‘사랑, 사랑, 그리고 사랑’
주제는 ‘주 예수’
부제는 ‘그리스도’ 로 그리스도의 사랑(charity)

*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주제는 ‘성령’
부제는 ‘권능, 으로 진리의 권능

이 세 가지 주제의 글로 하나님 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성품과 진리를
쓸려 했는데 ‘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는 처한 환경 상 더 깊게 쓰질 못했고
‘사랑, 사랑, 그리고 사랑’ 은 20편 정도를 쓸려고 했는데 일상의 사정으로 6편으로
줄려 쓰다 보니 아쉬움도 많다.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은 두 편에서 못다 쓴 글을 보안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맡기려 하며
우리의 능력,
하나님 자녀로서의 권세와 능력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공급받는 힘
성령의 전으로서 권능으로
자신의 비굴한 신앙이 더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님을 닮아 가고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힘이 되여
진리를 이해하고 진리가 일상의 속박에서 자유로, 은혜로,
더하여 평강을, 능력을, 권능을 받기를,
진리의 영, 성령님이 늘 함께 하길, 간절함으로 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요한일서 5:5-8]
세상을 이기는 믿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즉 성령이 임한 힘,
능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을 받는다는 의미로
권능은
그리스도의 고귀한 사랑인 복음의 증인이 되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제자 된 삶,
하나님의 높고 깊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 인 하나님의 의 인 공의로
살며 행하길, 인도하시고 증명하시는 능력의 은사를 주시는
성령님의 권능은,
하나님의 진리의 인치 심이라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라, 이를 알지 못하면 성경을 이해할 수도 없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진리를 배우는 방법은
지금까지의 모든 지식과 경험을 내려놓고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 할 수 있도록 꾸준히 읽고
성경을 읽을 때에도 주석과 신학 책, 강해서는 참고서 일 뿐,
성경의 같은 장, 구절이라도 우리의 이해와 인도하시는 성령님께서는
각자의 처지와 환경이 다르듯 다른 의미의 뜻으로 진리를 인도하시만
성경의 범위에 벗어나지 않으신다.
그리고 왜 우리에게는 권능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아
세상을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으로 변화시키지 못하고
변화 당하여 세속적인 유행과 사상을 쫓고
복음을 얘기하면서도 복음의 능력을 잃어서
어그러진 길로 향하고 있는지,
시간상 이곳의 지면상 길게 쓰지 못하여 짧은 글들이 되겠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기도하며 쓴다.

* ‘권능’ 은
권력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권능으로 ‘권능 자’ 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우리가 권능을 받는다면 하나님과 같은 권력이 생기는가?
아니면 예수님 같은 능력이 생기는 건가?
아니다.
그렇게 권능(power)이라고 착각한 숫한 유명한 목사, 부흥사들이
어둠의 길로 갔고 하나님의 권한을 부여 받았다는(authorized)는
기도원 원장, 목사, 부흥사 들이 이단이 되었고
더 하여 하나님의 대리인, 대언 자, 선지자, 예언자등과
예수님의 직통 제자, 계시자, 대리 자 등이 된 자 들이 진정한 능력자임을 과시하다
사탄의 앞잡이가 되었는데
사실 권능을 정확히 표현한 단어가 없다.
어느 신학자는 권(power) 능(authorized)이라 하고
많은 성경은 권능=power 로 사용하지만
권능(authorized)을 부여 받은 대행의 능력과 힘이라 하면 옳지 않다.
또 그것은(authorized) 어떤 권력기관이나 당국자, 국가의 권력으로 표현하였지
하나님을 어떻게 그런 권력과 비교 할 수 있는가.
권능은 성령님과 함께 함으로 얻어지는 능력이기에
권능 =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이라 할 수 있고
본인은 본인의 좀 더 세밀하고 자세한 의미로,
권능=power of charity 라 한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power of charit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성경에 없지만
틀린 표현은 아니다.
구약에도 ‘Holy Spirit’ 는 표현이 있고
권능은 확실히 성령님으로 받는 힘과 능력이고(the power of the Holy Spirit)
누구나 받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간직한 사람만 받기에
(power of charity),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가장 가까운 표현이다 는
본인의 주장이다.
왜냐 하면 구약 성경의 하나님은
선지자와 예언자를 통하여 예수님과 성령님을 증언하였고,
예수님은 오셔서 하나님과 오실 성령님을 증언하신 분이시고
성령님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증언하셨지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이심이 중심이다.
그래서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시고
예수님은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하시며
사랑한 ‘charity’ 의 순결한 사랑의 증인이 되었고
증인이 됨이 고귀한 사랑의 증명하시는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
권능=power of charity 이다.
이는 권능 자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받는 권세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신 그리스도가 구세주가 되시기에
우리의 일상에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증인으로 복음의 생활은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듯이 공의의 생활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고
진리의 성령이 함께 하기에 권능을 받는 과정(過程)이 있다.
순서(順序)가 있기에
‘권능’ 의 더 자세한 뜻의
우리의 믿음의 시인은, 고백이
'acknowledge' 로
인정받고 허락받은 감사의 능력, 힘(power)이다.
그래서 지난 글에 바울과 그의 동역 자들이 권능을 받았다했고
권능은 믿음으로 얻어 지기에
믿음의 분별력처럼 권능도 분별력 있는 힘(power)이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나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2-23]


 켄터키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이 하신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오병이어 말씀을 전하는데 “여자와 어린아이를 제하고 오천이었더라.” 하는 대목에서 한 여자성도가 발딱 일어나더니 “아니, 성경에서 왜 여자는 빼요? 여자는 사람 아닙니까?” 하고는 휑 나가 버리더랍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참 여자들의 한이 서린 것 같습니다. 우선 여자들은 이름도 없었습니다. 그저 누구 엄마, 무슨 댁으로 불렸습니다. 저의 조모님도 이름이 없었습니다. 백부님 이름으로 누구 엄마, 친정인 하회의 지명으로 화회댁으로 불리웠을 것입니다. 지금도 족보와 호적, 그리고 묘비에 조부님 이름 옆에 “하회 유씨”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 칠거지악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아내를 쫓아내는 일곱 가지 악행이라는 겁니다. 시부모를 공경하지 않거나, 아들이 없거나, 음탕하거나, 질투를 하거나, 나쁜 병이 있거나, 말이 많거나, 도둑질을 하는 일곱 가지 중 하나라도 범했을 경우 여자를 좇아내는 겁니다. 그러나 칠거지악에 해당되더라도 삼불출이라 하여 내쫓아도 갈 곳이 없거나, 함께 부모의 삼년상을 치렀거나, 전에는 가난했다가 살림을 일으킨 경우는 쫓아낼 수 없도록 하였답니다.

 세종실록을 보면 칠거지악과 삼불거의 사례가 기록되어 있는데 좌찬성(左贊成) 이맹균(李孟畇)의 처 이씨(李氏)가 (이 분도 이름이 없군요.) 아들도 낳지 못 하고 나이가 거의 일흔이 되었는데 남편이 계집종을 총애하자 이를 질투하여 계집종을 움 속에 가두고 학대하여 굶겨 죽였답니다. 세종임금은 사간원에서 이맹균을 탄핵하는 상소를 받고 그를 귀양 보냈으나 그의 부인은 벌하지 않았습니다. 사헌부에서는 부인 이씨가 자식도 없고 질투가 심하여 계집종을 잔인하게 죽여 칠거(七去) 중 이거(二去)를 범했으니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세종은 삼불거를 인용하여 '전에는 빈천하다가 나중에 부귀해지면 버리지 못하는 것이고, 함께 삼년상(三年喪)을 입었으면 버리지 못한다.'면서 부인을 이혼시킬 수 없다고 하였답니다. 역시 세종임금은 착하고 어질고 총명한 명군(名君)이요 특히 여자에게 너그러웠던 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래라는 여자도 자식 못 낳은 채 늙었고, 몸종 하갈이 잉태하자 하갈과 싸우고 남편에게 바락바락 대들면서 “이 욕은 당신이 먹어야 옳도다.” 하고 따졌으니 칠거지악 중 이거(二去) 내지 삼거(三去)를 범한 셈입니다. 그러나 드센 사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당신 눈에 좋은 대로 하시오.”라는 항복선언을 받아내고 배가 불렀을 하갈을 쫓아냅니다. 그야말로 남편을 공처가로 만든 순악질 여사요 당찬 여장부요 여권운동의 선구자인 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갈을 다시 주인에게 돌려 보내고 사래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광야에서 돌아온 하갈을 맞아들이고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을 키우며 13년을 지났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99세 때, 사래가 89세, 때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이 오셔서 아브람에게 “너는 내 앞에서 걸어 흠이 없으라,” 하시고 “너는 아브라함이다. 열국의 아비다. 내가 대대로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할례를 받으라....”고 다시금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성경에는 이 때 사래가 곁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일 사래가 이를 보고 들었다면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남편을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거칠고 메마른 가나안 땅에 와서 하마터면 바로왕의 왕비, 아비멜렉의 아내가 될 뻔도 했던 위기(기회?)를 넘기며 고생했는데, 남편의 뒷바라지를 한 것으로 만족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가, 결국 자신의 자리에는 몸종 하갈이 들어와 앉고 자신의 자식 대신 하갈의 자식 이스마엘이 뻐꾸기 새끼처럼 자신의 안방에 들어앉아 자라나고 후사가 되는 것인가, 자식을 낳지 못 하는 것 때문에 결국 이대로 구세주의 계보에 이름도 올리지 못 하고 죽어 사라져야 하는가, 그런 생각이 안 들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계보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가야 했습니다. 구원의 줄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래는 이미 늙었고 아무런 힘도, 희망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름을 사라라 하라. 열국의 어미가 되리라.” 아브라함이 기가 막혀 웃었습니다. “이스마엘이나 살게 하시지요. 하나님도 주책이시군요.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십시오, 사람 웃기지 마시고.”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너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이삭, “웃긴다”고 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만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여자의 후손의 계보로 삼으시려고 그 아내 사래도 부르신 것입니다. 사래를 부르신 것은 사래가 가진 생식능력을 쓰시려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사래를 통하여 행하시려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되는 그 역사를 이루실 것을, 할망구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말도 안 되는 웃기는 일"을 사라를 통하여 보이시려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 시대의 사래들이여. 그 하나님께서 그대들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을 불러내시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그대를 통하여 많은 영적자녀들이 나고 열국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그대들을 일으켜 새 이름을 주시고 힘 주시고 낳게 하실 것입니다. 그대들의 가진 능력을 쓰시려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일어나 웃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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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사람이란...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셨다 고백하는 사람이 많고, 성령의 사람이라고 큰소리 치는 사람은 많으나 실제 삶의 영역 속에서 그리스도와 거리가 너무도 먼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이 글을 정리하는 나 자신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신앙 따로 생활 따로인가? 그러하기에,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자기 자신을 가리켜 가장 강력한 성령의 사람인 듯, 다른 목회자들을 형편없는 사기꾼 정도로 몰아가면서 뛰어난 화술로 말씀을 강론하던 한 유능한 목사가 자살이라고 하는 어이없는 선택을 하였던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우리들 때문에 흑암의 세계 속에 강력한 빛으로 나타나야 할 교회는 오히려 점점 더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느낌이고, 서로 잘믿는다고 내세우는 말의 홍수 속에서 정신세계는 대 혼란 속에 빠져들어가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우리는 한 번쯤, 올바른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성경을 되새김질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 다닌다고 모두 성도가 아닌 것이다. 요란하게 떠들고 소리 지른다고 성령의 사람이 아니다. 삶 속에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1. 누가 과연 성도(saints)인가?:

성도(saints)란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을 총칭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saints)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고 마음에 받아들이는 사람을 지칭하며, 물(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곧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과 같고 다시 태어난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백성이 된다는 원리다. 사람의 영(spirit)이 다시 태어나는 현상을 가리켜 신학상 술어로는 ‘거듭남( born again)’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가 다 한 번 육신 적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한 번만 태어나면 되는 것으로 알기에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자식 낳아 열심히 기르다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고, 죽으면 끝이라고 하는 허무한 생을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은 분명히 다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 6-7절 말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무슨 뜻인가? 육으로 난 것은 죽고 망하나 영으로 난 사람만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spirit)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 그만큼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a.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내 의지나 내 노력, 내 열심, 다시 말해서 많은 성도들의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기도를 많이 하고, 부흥회를 열심히 쫓아다닌다고 해서 거듭나는 것이 결코 아니란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물과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따라서 우리가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성령을 받는다는 뜻이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곧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과 동일한 뜻이다. 성령은 어떤 특별한 은사 자들이나 신령한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란 것이다.

b. 내가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먼저,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생각해 보아야 한다. 조건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는 것뿐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 12절 말씀)” 여기서 “영접”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내 마음에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계 3: 20절 참조)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 9-10절 말씀).”

c.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세주로 믿는데, 나는 왜 성령의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내게는 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이 의문으로 남게 된다.

그 대답은 의외로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내가 무언가 의롭고 착한 일을 많이 해야만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성령 받은 상태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다.(엡 2: 10절 참조) 그럼에도, 우리가 행하는 선을 기준으로 성령 받은 사람의 기준척도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님(Holy Spirit)은 누구신가? 하는 것부터 정립되어야 한다. 성령님은 곧 성부, 성자의 영이시다. 때문에 내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나는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이다 (고전 3:16절 참조). 그러면, 나는 왜 느끼지 못하고 성령의 역사 하심이 내 속에서 나타나지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나의 자아, 고집, 아집, 이런 육신의 생각이 너무 강해서 내 속에 계신 성령을 거스리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는 성령님께서는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나를 버리고 멀리 달아나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항상 함께 계시면서 내가 죄 앞에 무릎을 꿇고 쓰러질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한없는 사랑으로 탄식하시며 간구 해 주고 계신 것이다. (롬8: 26-27절 참조)

2.  거듭난 사람에게 나타나는 실재성(증거):

내가 내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고 부르게 되는 것, 그 사실이 곧 성령 받은 증거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 3절).”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곧 성령 받은 사람이며,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란 것이고, 따라서 성령님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며 따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다. 이 상태를 신학상 술어로 "견인"이라고 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 44절 말씀).”

3. 성령의 충만을 내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방법:

a. 그리스도의 말씀을 많이 읽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요1: 1절 참조)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는 사람은 그 사람 속에 그만큼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은 능력이시다. 하나님의 말씀 또한 능력이다. 이 능력의 말씀을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이 더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다. 더 많은 능력이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사람은 더 큰 일을 해 낼 수 있다….이것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비결이라고 하면 믿어지겠는가? 그러나 사실이 그러하다. 말씀이 없는 곳에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질 않는다. 성령으로 가장한 사단, 광명의 천사들의 활동 영역을 넓혀줄 것뿐이다!

b. 그리스도의 말씀에 전적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이 바로 바리세파적인 사람이다. 바리세파처럼 머리만 굵어진다. 사람들은 성경을 많이 알면 무조건 바리새파적이라고 몰아세운다. 그러나 바리세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알기 때문에? 천만에,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는 많이 알았지만, 그 알고 있는 만큼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면 무조건 바리세파로 몰아가는 것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은 사람이 그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기만 하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큰 믿음을 소유한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말씀을 많이 읽고 그 말씀의 잣대(Canon)로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고집과 아집, 이런 죄성을 측정하고 자를 것은 자르고 버릴 것은 버리고, 내 속에 좌정하고 계신 성령님께 굴종하며 복종하는 순종이 우선되어야 한다.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비례해 성령의 열매가 내 삶 속에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우리는 모두 동일한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보다 큰 능력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하고 늘 죄의 마력 앞에 무릎을 꿇어버리고 마는 연약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는 성령을 받고 받지 못하고의 차이가 아니라, 자기의 아집과 고집이 얼마나 더 강하게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에 달렸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자신을 쳐서 더 많이 복종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치 않으면 그런 사람은 그만큼 자신의 아집, 고집 이런 죄의 속성들이 더 크게 드러나게 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굴종할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구원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변화 되는 능력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새로워지는 길이 있다. 내 힘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다.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된다. 부흥회 백날 쫓아다녀봐야 성령받는 것 더더욱 아니다. 오직 말씀을 통해 주시는 그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런고로 성령 충만한 성도는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로, 성령의 사람은 곧 말씀의 사람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8- 9절 말씀).”

출처: 목양연가: 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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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기 바쁜 걸음 하는 세상 사람들 보시오!
      잠시 잠시 쉬어도 가면서 가시구랴.

      당신네가
      숨 가쁘게 찾고 있는 목적지, 그 어딘진 몰라도,
      또 간절히 찾는 곳이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할지라도,

      잠간 잠간 쉬어가며,
      지나온 날들도 되돌아보고 다가올 날들도 생각해가며
      지금의 자신을 살펴보자구요.

      그렇게 급하게 가다가는 많은 것을 놓치게 될 것이외다.
      그 중에 중요한 것은 마음의 여유라는 것일 것이오.

      지금 당신네에겐 그것이 하찮은 걸로 치부될지 모르겠으나
      이 세상을 떠날 때엔 너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오.

      쉬며 머물며 가다보면 마음의 여유를 찾을 것이외다.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면 무엇이 중요한지 알게 될 것이고
      어떤 것이 진실로 값진 것인지도 깨달을 것이외다.

      잘하면, 지금 찾고 있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고
      무엇이 행복이며 어떤 게 보람 있는 삶인지도 깨달을 것이외다.
      그 목적지 바로 다음의 마지막 결승점은 아시는지.....

      늙음과 병과 죽음이 있는 곳.
      설마 그 곳에 빨리 가고자 지금 그렇게 헐떡이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그 결승점 전에 들러야 할 곳이 또 한 군데 있으니
      그 곳은 자신을 심판하는.....셀프 심판 정.
      피고는 나요, 원고도 나이며 심판장도 나라오.

      자기가 일생 동안 잘한 일, 잘못한 일을 스스로 가리는 곳.
      자성(自省)의 결과가 한숨이라면 한 평생 헛 살은 것이외다.

      인생의 마지막 골인 점에 이런 곳들이 있다는 걸 명심하시면
      지금의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점검해 볼 필요를 느낄 것이외다.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후회 해본들 무슨 소용이겠소?
      떠나갈 때 마음 가볍게 눈 감을 수 있어야 할 것이고
      한 평생 잘 살았노라 웃으며 떠날 수 있어야 할 것이거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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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그 불편한 진실!

의학적, 법률적, 사회적 관점으로 바라본 동성애


아래 영상들을 통해 동성애와 차별금지법의

경악할만한 실체를 알 수 있습니다.

좌파성향 국회의원들이 통과시키려 애쓰는 차별금지법을

왜 교회가 나서서 막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꼭 보시기 바랍니다.

동성애, 그 불편한 진실 (1)

동성애, 그 불편한 진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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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잘못과 약점을 시인한다.
      2. 종교적이기보다는 영적이다.
      3. 다른 사람의 권면에 방어적이기보다 수용적이다.
      4. 의로운 체하기보다 겸손하다.
      5. 용서를 구할 뿐만 아니라 변한다.

      6. 자신의 문제를 고치려고 한다.
      7. 신뢰하라고 욕국하기 보다는 신뢰를 쌓는다.
      8. 책임을 전가하기보다는 책임을 진다.
      9. 거짓말하기보다는 진실을 말한다.
      10. 정체하기보다는 성장한다.

      11. 가까이 있기보다는 친밀감을 추구한다.
      12. '나' 보다는 '우리' 를 추구한다.
      13. 다른 사람에게 험담하기보다는 직접 본인에게 말한다.
      14. 정죄하기보다는 용서한다.
      15. 수직적인 관계보다는 대등한 관계를 선호한다.

      16. 변덕스럽기보다는 일관성이 있다.
      17. 부정적인 영향보다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18. 소문을 내기보다는 비밀을 지킨다.
      19. 상대방의 자유로운 선택을 좋아한다.
      20. 친밀하게 마음을 나누고 행동으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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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해문제 이대로 좋은가?

오는 4월 19일에는 뉴욕 타임 스퀘어와 런던 트라팔가 스퀘어에 바알 신전이 세워진다. 흥미로운 것은 바알의 신전이 세워지는 4월 19일은 이 날로부터 5월 1일까지 13일 동안 지속되는 벨테인 축제의 첫 날이기도 하다. 

 


뉴욕과 런던에 바알의 신전이 세워지는 4월 19일은 사탄 숭배자들이 인신제사를 드리는 날로 알려진 벨테인 축제의 첫날이기도 하다.


관련글>> 뉴욕과 전세계 주요 도시마다 바알의 사당이 세워질 예정이다.

벨테인 축제는 사탄숭배자들에게 매우 신성시 여겨지는 축제로 이 기간 동안 암암리에 “인신제사”가 드려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벨테인 축제의 마지막 날인 5월 1일은 May Day라고 해서 일루미나티의 창건일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벨테인 축제를 전후로 한 4월 중순부터 ‘인신제가’가 의심되는 굵직한 사건들이 발생해왔다. 아래는 Vigilant Citizen이 4월 19일을 전후로 해서 발생한 의심스런 사건들을 소개한 것이다.

•April 19, 1993 – Waco Massacre(와코 대학살) : FBI가 다비드 종파의 시설물들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불이나 76명의 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들의 죽었다.


•April 19, 1995 – Oklahoma City bombing(오클라호마 폭발) – 168명이 죽었다.


•April 20, 1999 – Columbine High School Massacre(콜롬바인 고등학교 학살) – 13명이 죽고 21명이 부상했다.


•April 16, 2007 – Virginia Tech Massacre(버지니아 공과대학 학살) – 32명이 죽고 17명이 부상했다.


•April 16, 2013 – Boston Marathon Explosions(보스톤 마라톤 폭발) – 3명이 죽고 107명이 부상하였다.


이 외에도 한국에서는 한국판 911이라고 하는 세월호 사건이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하여 295명이 죽고 9명이 실종되는 참극이 벌어졌다.


관련글>> 세월호는 한국판 911 사건이다.


 

한국판 911로 알려진 세월호 사건도 세미라미스의 생일인 2014년 4월 16일에 발생하였다.


 


일루미나티(프리메이슨)의 Dualism을 상징하는 회색과 노란색이 대비된 전시안으로 만들어진 세월호 청문회 포스터


 

 

 의식이 치뤄지는 프리메이슨의 체크무늬 바닥처럼 회색과 노란색의 체크무늬로 장식된 세월호 청문회 현장 - 2014년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사건이 일루미나티가 기획한 의식(ritual,인신제사)임을 인증하고 있다.


사탄숭배자들이 인신제사를 드리는 벨테인 축제 기간에 맞춰 뉴욕과 런던 한복판에 바알의 신전이 세워지는 2016년 4월엔 과연 어떤 일들이 발생할 지 우려스럽다.


참고기사>> April 19: Temple Of Baal In New York Is Going Up Same Day The Blood Sacrifice To The Beast Begins


- 예레미야 -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질문]

그 동안 고민하면서도 누구와 상의하기 어려운 문제를 질문하겠습니다. 헌데 너무 원초적인 질문이라 답변이 곤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고픈 질문은 "천국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답변이 가능할지요?  

 

[답변]박신목사

너무 원초적인 질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갖고 있는 의문입니다. 답변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만약 답변이 불가능하면 천국의 실재성(實在性)이 의심 받게 되는 결과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또 기독교 신자가 다른 종교의 신자와 확실히 다른 점 하나는 언제 죽어도 천국 갈 자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갈 자신이 있다고 하면 벌써 그 구원의 확신에 대한 신빙성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교회에서 예수를 믿으면 천국을 간다고만 했지 그 천국이 어떠한 곳인지 어디에 있는지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아 천국에 관해 체계적인 정리가 되어 있지 않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천국이 어디 있는지 알려면 천국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정의부터 분명해져야 합니다.

특별히 질문자께서 궁금하신 내용 중의 하나가 틀림 없이 신자가 죽은 후에 가는 천국이 이 우주 가운데 공간적으로 어떤 물리적 장소를 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리라 믿기에 더더욱 천국에 관한 정의를 확실히 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1.천국의 정의(定意)

1.1. 두 가지 천국

천국에 관해 적용된 용어와 그 의미는 교회사적으로 시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변천해 와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듭니다. 지금 여기서 그것을 일일이 알아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시간과 지면 상의 제약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 복음서에 천국에 관해 비유(마13장 참조)와 설교로 다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모든 가르침의 주제는 천국이었습니다. 흔히 성도들의 실천적인 윤리에 관한 교훈이라고 알고 있는 산상수훈의 주제도 천국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에 우리말로는 천국이라는 한가지 표현뿐이지만 사실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흔히 말하는 천국(Heaven) 즉 구원을 얻은 영혼이 죽은 후에 가서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과 경배로 섬길 곳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요14:1,2) 간다고 하신 바로 그 곳입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천당이나 극락과 같은 의미입니다만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죽은 후에 가 봐야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 된다고 가르칩니다. 살아서는 어떻게 하든 최선을 다해 자기들 신의 노여움을 풀고 그 마음에 들도록 해야 하는 것이 신앙 생활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정성, 치성, 헌금, 희생 등을 가능한 많이 갖다 바쳐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땅에서의 삶의 목적은 남이야 어떻게 되었든 오직 자기 자신의 성적표만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선행과 구제는 진정한 선이라기보다 죽은 후 평가를 잘 받기 위해 이 땅에서 자기 공적을 쌓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습니다.

둘째는 주님의 거룩한 통치가 실현되는 영역으로서의 “하나님의 왕국 혹은 주님의 나라 (the Kingdom of Heaven, 혹은 the Kingdom of the Lord)”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전하신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4:17)였습니다. 주님은 곧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심으로 이 땅에 편만해 있던 사단의 왕국을 친히 물리치시고 죄악과 사망의 사슬에 묶여 있는 죄인들을 구원 하심으로써 인간의 삶 속에 천국을 실제적, 현재적으로 도래시키겠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만이 갖는 천국에 관한 특유의 의미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얻은 신자가 이미 이 땅에서 주님의 통치를 받는 삶 전체를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의에 미치지 못하는 죄인으로 죄의 삯인 사망의 형벌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통해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고 당신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베풀었습니다. 신자는 중생 이후 그 분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받아 자기 모든 삶을 바쳐 오직 그분의 뜻대로 살게 됩니다.

신자에게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기에 자신의 성적표만 관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대신에 주님의 거룩한 통치가 이 땅에 더욱 많이 펼쳐지도록 헌신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로 바뀌게 됩니다. 따라서 신자의 모든 선행은 주님 대신 이 땅에 천국을 실현시키는 것이자 다른 이들을 더욱 주님께로 인도해 자기가 받은 은혜를 동일하게 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1.2. 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

신자가 죽은 후에 가는 천국도 당연히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전적으로 이뤄지는 곳입니다. 그래서 천국이 장소적으로 어디 있는가를 따지기 위해선 신자가 죽기 전에 이 땅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죽은 후에 가는 ‘천국’을 각각 구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신자가 누리는 ‘하나님의 왕국’에는 현재 임재한 나라와 미래에 도래할 나라라는 이중적 성격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장래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했습니다.(마6:10) 나아가 당신께서 재림하셔서 새롭게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해 계시하시고 신자더러 영육간의 완전한 부활을 소망하라고 하셨습니다.(마16:28, 계19-22장, 계22:12,20) 종말론적인 의미로 예수님 재림 시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또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해 있는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느냐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해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뿌리 내렸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씨 뿌리는 비유(마13:3-23)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좋은 땅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씨앗을 이미 뿌려 놓으셨습니다.(마13:11, 23) 구원 받아 천국의 비밀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들끼리 사랑하고 섬기는 공동체 안에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1.3. 천국의 구성 요소  

 

하나님 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디 있는지 알려면 천국이 무엇으로 구성되는지도 살펴 보아야 합니다. 한 나라를 구성하려면 주권, 국민, 영토 반드시 이 세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천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먼저 주권이란 그 나라를 통치하는 권력이 누구에게서 나오며 누구에 의해 집행되는지를 의미합니다. 국민들의 정치참여로 권력구조가 결정되는 나라는 민주 국가이고, 일인 독재자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으면 전제 국가이며, 세습왕조에 의하면 왕정국가가 됩니다. 따라서 통치권의 원천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그 분이 집행하며 궁극적인 결과도 그 분이 책임져야만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또 나라가 성립되기 위해선 그 나라의 주권에 순종하여 국민으로서 모든 의무를 다하고 그 나라가 부여하는 특권을 제대로 누리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왕만 있고 국민이 없으면 나라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공산전제 국가의 체제를 도저히 인정 못해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는 자는 이미 그 나라의 국민이라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삶과 인생의 안전과 결과를 궁극적으로 책임지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인정하여 그 분의 뜻대로 살며 그 분이 베푸시는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 이 땅에서부터 주님의 통치에 자신의 삶을 내어 맡긴 주의 자녀가 반드시 한 명 이상 있어야만 하나님 나라가 구성됩니다. 

 

마지막으로 반드시 공간적인 위치를 점하는 영토가 있어야 합니다. 국경으로 경계선을 지을 수 있는 영토, 영해, 영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물리적 지리적으로는 세상의 나라들과 그 영토가 겹칩니다. 또 죽어서 가는 천국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2. 천국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2.1.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the Lord) – 이 땅에서의 천국

 

2.1.1. 교회가 하나님 나라인가?

먼저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영토는 세상 나라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곳이면 바로 그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꼭 어떤 입법, 행정, 사법적 기관을 구비해 제도적인 조직의 모습으로 드러나야만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 모두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또 그 분의 통치는 성령을 통해 신자의 영혼과 교통하는 불가시적인 것이므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가시적인 조직체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혹자는 이 세상에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라고 추정하거나 주장합니다. 물론 교회 안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의 통치를 받습니다만 교회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는 아닙니다. 중생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진 참된 성도만이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 되며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데 조직체로서의 교회 안에는 가라지와 같은 교인도 있기 때문입니다.(마13:24-30) 따라서 교회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2.1.2. 각 자의 마음 속에 천국이 존재하는가?

 

또 어떤 종교에선 천국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고 각자가 생각하기에 달린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천국이란 여러 가지 죄를 스스로 반성하고 염려와 불안을 정신 수양을 통해 없애고 도덕적 훈련을 통해 인격의 도야를 얻어 평강을 찾는다는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의 걱정이 더 이상 자신의 자아를 흔들지 못한다는 뜻에서만 천국입니다.

그러나 이는 천국이 아닙니다.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주권자의 통치를 받은 적이 없고 그 분의 인도와 보호 아래 자신을 내어 맡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기의 의지적 결단과 반복되는 수련으로 얻은 일시적인 정서적 안정을 천국이라고 오해한 것입니다. 주권자도 자기요, 백성도 자기요, 영토도 자기의 지정의적 능력이 미치는 부분 안에서만 그친 것입니다. 말 그대로 자기 혼자서 왕과 백성을 겸하는 일인(一人)  왕국이자 왕 마음대로 하는 독재 국가입니다.

그 왕국은 자신의 생각과 기분대로 천국을 하루에도 몇 번씩 지었다 허무는 자기 구원입니다. 아무리 오랜 수련을 거쳐도 그 결과는 허무로 끝나고 실제 천국의 문턱에도 못 가 봅니다. 자연인의 지정의 능력은 너무나 제한되고 무능하며 그 영혼은 부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간섭이 없는 상태로는 살아 계신 주님을 대면할 수도 없어 그 분의 의로운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지 않고는 아무리 염려 불안이 없고 세상적으로 형통하고 도덕적으로 고상해 보여도 여전히 그것은 인간의 왕국, 세상의 왕국에 불과합니다.

 

대신에 기독교의 경우는 다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성령 세례를 받은 참 신자 안에는 분명히 성삼위 하나님의 한 분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고 성도가 천국 갈 때까지 떠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성도에게 와 계시고 성도는 백성으로 그 분의 인도를 받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자의 경우는 혼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조건을 완전히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 본 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성도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구원 받은 신자라도 자기의 정욕과 남아 있는 죄의 본성에 이끌리거나 심지어 사탄의 시험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신자가 자신의 의지만으로 정서적, 인격적, 도덕적, 종교적 훈련을 통해 얻은 평강은 절대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기도하여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을 분명히 듣고 그대로 순종하고 주님의 뜻을 삶에서 실천할 때 만이 혼자라도 천국이 되며 하나님 나라가 자신에게 도래하는 것입니다. 

 

2.1.3 천국을 실현시켜야 할 성도의 삶

다른 말로 해서 성도의 이 땅에서의 삶은 천국을 간헐적으로 맛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의 신앙생활의 목표는 이 땅에서 얼마나 천국을 지속적으로 오래 풍부하게 나아가 더 많은 다른 성도와 함께 맛볼 수 있는가의 싸움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며 바로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되는 까닭입니다.(살전5:17.18) 

반면에 성도가 죽은 후 천국에 들어가고 나아가 부활하여 주님의 새 하늘과 새 땅의 통치에 참여할 때는 더 이상 죄와 사탄의 방해가 없습니다. 항상 삼위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와 인도와 통치가 가능해집니다.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천국의 현재성은 가변적이지만 미래성은 불변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내포하게 됩니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는 참다운 성도가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고 그분의 뜻이 드러나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있습니다. 특별한 공간적 경계선이 따로 없습니다. 성도라면 누구라도 자기가 속한 가정, 직장, 사회, 민족, 국가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고 확장하는 일에 삶의 모든 것을 다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건대 하나님 나라는 반드시 주권자, 백성, 영토 셋이 다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대 잊어선 안 됩니다. 예를 들자면 교회가 성전을 짓고 어떤 자선 행사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가 꼭 실현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전 가족이 교회를 나가고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며 형제 간에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여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해서 그 가정에 천국이 이뤄졌다고 무조건 단정 지어서도 안 됩니다. 

 

어떤 일을 할 때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인도하심이 먼저 있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그 일에 참여하는 모든 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있어야만 비로소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전을 짓는 일이 담임 목사의 욕심과 고집으로 진행되고 교인들도 불평 불만을 갖거나 의무감으로 참여한다면 아무리 종교적으로 거룩하고 위대한 일을 한 것처럼 보여도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실현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에서 아이들이 부모의 강요로 교회에 억지로 나가거나 단순히 윤리 도덕적으로 서로 화목하고 섬겨선 하나님의 통치가 없다는 점에서 천국이 아닌 것입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안에 완전히 들어 온 사람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지 하는 일의 선한 동기나 종교적 취지와 관계 없습니다. 가정과 직장과 교회 어디에서든 각 개인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어서 성령님을 통해 서로 교통하고 주님을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될 때에 비로소 천국이 실현됩니다. 가정에서도 자녀에게 종교적인 의무를 강요하기 앞서 각 자녀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일 대 일로 만나 거듭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발적으로 서로 사랑하고 섬기게 되며 주님의 뜻이 가장 우선되는 가정으로 변화되며 그 안에 천국이 실현됩니다. 

천국은 항상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의 사람으로 먼저 변화되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그 분께 자신을 바쳐야만 시작됩니다. 기독교적 조직체를 만들어 그 조직 전체가 선하고 거창한 기독교적 일을 한다고 실현되지 않습니다. 조직체의 구성원 각자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되어 자기가 소속한 세상 조직으로 돌아가 그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때만이 하나님 나라가 실현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성도들에게 마지막 지상명령(the Great Commision)으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2.2. 천국(Heaven) – 죽어서 가는 천국

2.2.1. 어느 별에 천국이 있을까?

이제 마지막으로 성도가 죽은 이후에 가는 천국이 어디에 있는가를 따질 차레입니다. 스스로 천국을 갔다 왔다고 주장하며 시한부 종말론을 믿는 한 미국의 이단 목사가 지은 책에서 천국이 오리온 성좌 곁에 있는 어떤 별이었다고 기록해 놓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과연 천국이 우주 천체들의 좌표 상에 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을까요?

천국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곳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먼저 아셔야 합니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딤전1:17)이라고 했습니다.

화학적 분자 구조를 가진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반드시 썩게 마련입니다. 썩지 아니한다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는 것이며 썩지 않기에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아니한다는 것은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물질은 반드시 보입니다. 아무리 미세한 것도 현미경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영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홀로 하나라는 것은 그 존재의 생성 근원과 그 존재가 계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이 스스로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만물의 창조주이자 운행자로서 영원히 계신 분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영으로써 물질계가 아닌 영계에 세세토록 계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육안으로 보이는 오리온좌 같은 별은 벌써 물질계입니다. 천국이 그런 곳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곳은 여전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로 화성이나 태양 같은 하나의 별일 뿐입니다.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 성신 하늘 위의 군중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길까 하노라.”(신4:19)

 

영계는 지구상에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섭니다. 가로 세로 높이의 입체적인 3 D(Dimension)에다 시간을 합한 4 D와도 다른 차원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육안과 지정의로 측량하여 분석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쉽게 말해 인간으로선 천국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절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삼층천까지 직접 갔다 온 영적 체험을 한 바울 사도가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12:3,4)

 

인간의 죽음이란 영혼이 생물학적 육체를 벗는 것을 말합니다. 썩어 없어질 육체는 이 땅에 남겨두고 썩지 않는 영만 영계로 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는 나쁘고 영혼은 선한 것이라 영만 천국에 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또 신자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소멸되어 멸절(滅切)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는 계속해서 존재하지만 존재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물질로 이뤄진 지구상의 분자구조와는 다른 구조의 존재가 되어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 체험을 한 바울 사도가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0-49참조) 이 구절은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있을 성도들의 완전한 영육간의 부활을 묘사하고 있지만 천국에서의 우리의 존재 형태가 이 땅에서의 것과는 전혀 다른 신령한 형체가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천국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곳이라면 영계에서 존재할 수 있는 형체가 되어야만 가능합니다. 물질로는 영계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본체를 본 자는 바로 죽는다고 합니다.(삿 13:22) 이는 죄악으로 부패한 인간이 너무나 거룩하고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과는 공존할 수가 없으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본체를 직접 대면하는 순간 소멸하신 불 앞에 바로 타 없어져 버린다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본질적으로 물질로 이뤄진 존재와 영으로 된 존재가 동일한 공간 안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생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위해선 인간의 모습을 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빌2:6-8) 역으로 생각하면 인간이 천국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육신을 벗고 영혼만 더 정확하게는 천국에 합당한 형체가 가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2.2.2. 천국의 실체

그렇다면 영들만 있는 천국에서 어떻게 24장로들과 천사들과 구원 받은 성도들이 찬양할 수 있습니까?(계시록 4장) 장로들이 흰 옷을 입었고 보좌가 있고 그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가 있으며 밤낮 쉬지 않고 찬양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물질계와 동일한 모습인 것 같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성도가 천국 갈 때에는 그 존재가 멸절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체의 존재로 바뀌어 계속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 존재 가능한 신령한 형체로 바뀌어진 것이지 영만 천국 간다고 해서 아무 의식도 없는 단순히 안개 같은 존재들이 구름처럼 떼로 몰려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천국에도 분명히 성도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으며 감정적 의식과 그 존재가 스스로 움직임이 가능한 3D 적인 차원의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지구상에 지금 우리가 측정하고 분석 가능한 물질의 형태와 시공간의 차원과는 다른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하고도 새로운 형태와 시공간의 차원이 분명히 천국에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표현이 이상하지만 천국 특유의 썩지 않는 신령한 물질계(보고 듣고 감각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가 그곳에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인간의 말로는 절대 표현하지 못합니다. 환상으로 자세하게 천국을 본 요한 사도마저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등으로 이 땅의 비슷한 형체에 갖다 대어 비유만 했지 딱 집어서 이렇다 저렇다라고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천국의 구조와 모습은 지상의 것과는 도저히 비교조차 못합니다. 사람이 죽어 봐야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천국의 실체에 관해 관심을 갖고 소망으로 기대해야 할 부분은 천국의 물리적, 공간적, 형체적 모습과 위치가 아닙니다. 천국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더 이상 죄가 존재하지 않는 곳(free from the presence of sin)’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이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계22:3,4)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은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21:3,4)

하나님과 함께 거할지라도 더 이상 인간이 불에 타 소멸되지 않는 곳이 천국입니다. 성도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필터를 통과했기 때문에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하나님 앞에 영원히 용서 받은 죄인으로서 의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 땅에서 갖고 있던 죄의 본성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미쳐 이르지 못했던 부분들도 어린 양이 다 대속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가 천국에 들어 오는 순간 이땅에서의 더러운 것은 다 벗어버리게 하고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요한이 계시 받은  그대로 세세토록 주님을 친히 바라보며 그 분의 영광을 찬양하면서 나아가 주님을 섬기는(성도가 천국에서도 따로 할 일이 있음)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시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7,18)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사실이며 크나큰 은혜입니까?  

3. 결론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주님의 영광을 증거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존재합니다. 심지어 신자 혼자서라도 천국을 맛볼 수 있습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은 분명히 실재하지만 인간이 측정하고 이해하는 시공간의 범위상으로는 어디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물질은 영계에 들어갈 수 없지만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듯이 영은 물질계에 들어 올 수 있습니다. 천국은 비록 그 차원과 형체는 다르지만 인간이 알 수 있는 물질계 영역 안 어디엔가 소재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구원 받은 신자는 이미 우리 눈에 안 보이지만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영계로 들어가는 천국행 기차를 탔습니다. 더 이상 그 기차에서 내려지지 않으며 방향도 바뀌지 않습니다. 신자가 오직 할 일은 이 땅에서 자기의 삶과 인생과 존재를 통해서 소속한 세상 조직에서 더 많이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실현하고 확장하는 길 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http://whyjesusonly.com/

개혁주의 마을/Grace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적인 경험 속에서 맛이 나는 교리다. 오웬은 내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는 것을 논할 수 있지만 거기서 내 마음속에 어떤 맛이나 달콤함이 없다면, 그분이 내 영혼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라는 것이 내게 더 좋은 것이 무엇이겠는가?”라고 말했다.

패커의 요약이다. “오웬에 따르면, 우리가 묵상, 기도, 적절히 규제된 생활 속에서 신격의 세 인격과 규칙적인 교제를 갖는 패턴이 되어야 한다. 우리를 향하신 각 인격의 특별한 자비와 사역을 유념하고, 특별히 각 인격과의 사랑 및 교제에 대해 적절한 반응을 보여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과의 충분한 교제를 유지해야 한다.”

 

나아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 믿음을 확증하고 강화시킨다. 오웬의 말이다. “이것이 모든 복음 진리의 본질이고, 그것들은 믿는 영혼이 경험하는 데 적합하고 합당하다. 은혜로운 영혼이 그 모든 것 속에서 탁월함, 실재, 능력, 효능을 경험하는 것만큼 --- 장엄하고 웅대한 것은 없다. 항상 은혜로운 삼위일체 교리만큼 고귀하고 영광스럽고 신비로운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 묵상할 때 성부의 영원한 사랑 안에서, 중보와 구속 사역에 있어서 성자의 크신 역사 속에서, 영혼 속에 은혜와 위로를 창조하시는 성령의 전능하신 사역을 통해 주님이 얼마나 은혜로우신 분인지를 맛본 신자가 되고, 그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하심과 능력을 경험해 보라. 그러면 그는 일천 명의 논쟁가가 단지 마음속에 그 관념만 갖고 있는 것보다 이 신비로운 진리를 더 견고한 확신을 갖고 붙들고, 몇 마디 평범한 증언의 말씀만으로도 그 진리 속에 들어가, 그 진리를 확증하게 될 것이다.”

 

한편 오웬은 그리스도인의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하나님의 삼위일체 자기 계시에 따라 형성된다고 하였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교리가 왜 그토록 기독교적 경험에 중요할까?

첫째,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예배를 규제하기 때문이다.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 이것이 우리의 영적 예배다. “이는 그(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2:18) 오웬은 경고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배에 나아오지 않거나 예배가 성령의 힘으로 진행되지 않거나 예배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배의 모든 규칙을 위반하게 될 것이다.”

 

둘째, 삼위일체적인 영성이 유일하게 참된 복음적 영성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경륜은 성자가 유일하게 성육신하신 중보자로 오셨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상호 작용을 직접 드러낸다. 오웬의 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들은 창조와 섭리 사역에서 반드시 협력하시지만, 삼위일체적인 관계들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원의 복음의 경우, 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의 직분은 삼위일체를 계시하고, 삼위일체에 따라 복음에 반응하도록 우리를 규제한다. 우리는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의 능력을 통하지 않으면 성부께 나아갈 수 없다.” 삼위일체가 없는 영성은 복음이 없는 영성으로, 단순한 자연 종교에 불과하다.

 

셋째, 삼위일체 교리는 영성을 심원하게 관계적인 것으로 만들고, 영성이 비인격적 신격, 아니 심지어는 범신론적 신격에 대한 신비적 경험이 되지 않도록 방비하기 때문이다. 이 세 인격 안의 한 하나님 교리는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원하게 인격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참된 교제에 본질적이다. 왜냐하면 오웬은 교제를 서로 연합하는 인격들 간에 선하고 즐거운 것을 공유하는 것으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오웬의 신적 교제 교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상호 관계를 강조한다. 이 상호 관계 속에서 주권적인 주님이 이끌면 신자들은 이에 반응한다. 하지만 하나님과 사람들이 인격적 조우 속에 함께 들어간다. 웬의 삼위일체적인 교제 교리는 우리에게 풍요롭고 따스하게 성경적이고, 교리적이고, 경험적이고, 실천적인 개혁파 기독교의 훌륭한 모델을 제공한다.

 

오웬의 언약 신학은 하나님과의 정서적 상호 관계로 충만하다. 오웬의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계시된 것 가운데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신비나 동일한 신적 본성의 단일성 속에 존재하는 세 인격의 위격에 대한 신비보다 더 영광스러운 신비는 없었다. 그리고 이 계시는 우리의 지성이 이에 대한 관념을 소유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향유하도록 하나님 안에 신뢰를 두는 법,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법, 하나님과의 교제를 얻고 행하는 법을 올바로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 조엘 비키, 마크 존스, 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 pp 141-143

 

출처: 청교도 아카데미/강대식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Red-lipped Batfish 빨간입술의 박쥐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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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nd on the Galapagos Islands, this fish is actually a pretty bad swimmer, and uses its pectoral fins to walk on the bottom of the ocean. 갈라파고 섬에서 발견된  이물고기는 사실 수영을 모르는 고기인데 대양바닥을 가슴지느러미를 써서 걸어 다닌다. (Image credits: imgur 저작권: 임거르)

 

 

Goblin Shark 도깨비 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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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rare shark is sometimes even called a “living fossil”, “is the only extant representative of the family Mitsukurinidae, a lineage some 125 million years old.”  희기한 상어는 가끔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불리워 지는

 

 

거의 125백만년된 미추큐리니대 가족의  유일한 현존하는 물고기다.

 

 

Goblin sharks inhabit around the world at depths greater than 100 m (330 ft), with adults found deeper than juveniles. Given the depths at which it lives, the goblin shark poses no danger to humans.  도깨비상어들은 세계각지에서

 

 

100미터 깊이에 살고있으며 성년의 상어들은 어린 상어들 보더 깊은 곳에서 발견된다

 

 

그들이 사는 깊이를 고려할 도깨비 상어들은 인간들에게 위험을 주지 않는 .(Image credits: imgur)

 

 

The Panda Ant 판다 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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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utillidae are a family of more than 3,000 species of wasps (despite the names) whose wingless females resemble large, hairy ants. 

 

 

개미벌과는 날개 없는 암놈들은 커다란 머리털난 개미와 흡사한 3000 종이나 넘는 말벌(이름이 그렇지만) 일종이다.

 

 

Found in Chile, they are known for their extremely painful stings, hence the common name cow killer or cow ant. 

 

 

칠레에서 발견된 이놈들은 아주 아픈 침으로 알려졌기에 보통 암소죽이는 놈이나 암소개미 /SPAN> 불려진다.

 

 

Black and white specimens are sometimes known as panda ants due to their hair coloration resembling that of the Chinese giant panda.

 

 

흑백종류는 종종 중국의 거대한 판다와 털색갈이 비슷하여 판다개미로 알려졌다.  (Image credits: Chris Lukhaup)

 

 

Penis Snake 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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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uhm… peculiar eyeless animal is actually called Atretochoana eiselti. It is a large,

 

 

presumably aquatic, caecilian amphibian with a broad, flat head and a fleshy dorsal fin on the body. 

 

 

특이한 놈은.... 특히 눈이 없는 이짐승은 매레토초아나 다이실티 불리운다.

 

 

이놈은 필시 물에서 사는 놈으로  다리가 없으며 양서류족으로 넙죽하고 평편한 머리에다

 

 

몸에 살같은 등지러미가 있는 놈이다.  (Image credits: fotos.noticias.bol.uol.com.br)

 

 

Umbonia Spinosa 움보니아 스피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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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se thorn bugs are related to cicadas, and use their beaks to pierce plant stems to feed upon their sap.

 

 

Their strange appearance still poses many questions to scientists. 

 

 

가시달린 곤충은 매미 종류로서 주둥이를 써서 나무 가지을 뚫어파고들어 나무의  수액을 빨아 먹고 산다.

 

 

이들의 기묘한 모양은 과학자들에게 많은 의문을 남겨주고 있다.  (Image credits: Colin Hutton)

 

 

Lowland Streaked Tenr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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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nd in Madagascar, Africa, this small tenrec is the only mammal known to use stridulation for generating sound

 

 

something that’s usually associated with snakes and insects. (Image credits: hakoar | telegraph.co.uk)

 

 

Hummingbird Hawk-Mo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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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this hawk-moth feeds on flowers and makes a similar humming sound, it looks a lot like a hummingbird.

 

 

What’s interesting is that it is surprisingly good at learning colors. (Image credits: Jerzy Strzelecki | unknown)

 

 

Glaucus Atlanti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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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so known as the blue dragon, this creature is a is a species of blue sea slug.

 

 

You could find it in warm waters of the oceans, as it floats on the surface because of a gas-filled sac in its stomach.

 

 

(Image credits: unknown | unknown | paulhypnos)

 

 

Mantis Shri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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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so called the “sea locusts“, “prawn killers” and even “thumb splitters”,

 

 

this is one of the most common predators in tropical and sub-tropical waters; little is known about them, however,

 

 

because of how much time they spend hiding in their burrows. (Image credits:Alexander Safonov)

 

 

Venezuelan Poodle Mo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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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overed in Venezuela in 2009, this new species of alien-looking moth is still poorly explored.

 

 

Waiting for more info about them! (Image credits: Arthur Anker | imgur)

 

 

The Pacu F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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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probably don’t need much explanation as to why the residents of Papua New Guinea call this fish a “ball cutter.”

 

 

The local fishermen were really worried about the safety of their testicles when they had to get in the water!

 

 

(Image credits: imgur |evolvingcomplexityii)

 

 

Giant Isop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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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one is the largest of the existing isopods.

 

 

“The enormous size of the giant isopod is a result of a phenomenon known as deep sea gigantism.

 

 

This is the tendency of deep sea crustaceans and other animals to grow to a much larger size than similar species

 

 

in shallower waters.” (Image credits: Littoraria)

 

 

The Saiga Antel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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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saiga, spread around the Eurasian steppe, is known for its an extremely unusual,

 

 

over-sized, flexible nose structure, the proboscis. (Image credits:enews.fergananews.com)

 

 

The Blue Parrotf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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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bright blue fish can be found in the waters of the Atlantic Ocean,

 

 

and spends 80% of its time searching for food. (Image credits: imgur | depalmadise)

 

 

Indian Purple Fr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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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nd in India, this species of frog have bloated body and an unusually pointy snout;

 

 

it only spends two weeks a year on the surface of earth, leaving the underground for mating. (Image credits: wikipedia.org)

 

 

Shoeb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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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large stork-like bird gets its name because of the shape of its beak.

 

 

Even though it was already known to ancient Egyptians and Arabs, the bird was only classified in 19th century.

 

 

(Image credits: David Li | shoebill.info)

 

 

Oka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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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mammal is native to the 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in Central Africa. Despite the zebra-like stripes,

 

 

it is actually more closely related to giraffes. (Image credits:marylandzoo.org | baynews9.com)

 

 

Narwh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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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toothed whale, found in the arctic, has been valued for over 1000 years by the Inuit people for its meat and ivory.

 

 

The narwhal, however, is especially sensitive to the climate change. (Image credits:

 

 

 gowild.wwf.org.uk | Richard Thomas)

 

 

Thorny Dra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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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ured in camouflaging shades of desert browns, this lizard has a “false” head,

 

 

which he presents to his predators by dipping the real one. (Image credits: imgur | Christopher Watson)

 

 

Sea P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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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를 다시 공부하면서 생각도 많아
끝없이 늘어나는 영혼의 울림을 글로 써야 할 과제가 많아
때로는 누가 내 생각을 정리해주었으면 하는 심정도 됨은
일을 하면서 써야 하기에 집중하기도 쉽지 않아
왜 이런 일을 시작하였는지 작은 후회감도 들고
무엇보다 자신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고 있냐는 물음,
이것이 제일 감당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자신을 성경의 거울로 바라보는 시간이 되어
어리석고 부족한 사람임을 시인하며 자신에게 자문하면서
어리석은 사람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어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는
시간이라 우선 자신에게 유익하여 계속 쓰고 있지만,
생각을 신앙의 내면의 사상을 글로 표출하기란, 더욱이 분명한 신앙의 글로
명백히 표현하고 쓰기란, 때로는 표현의 한계로 잠시 중단하기도 하고
가능한 신학적인 용어를 피하고, 단순한 낱말의 수효의 한계로 인한 전달의 한계
그리고 빈약한 성경의 풀이로, 누군가 내 선생이 되었으면
이 글을 쓰면서도 바울과 같은 선생이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바울의 반만이라도 닮은 선생이 있다면
내 스승으로 모시고 즐거워하겠다.
현실은 스승을 찾기가 힘들다.
한 때 스승으로 존경하였던 분들이 실망을 넘어 배신감마저 들었던 분들도 있다.
돌아보면 그런 분들의 어그러진 모습이 내 모습인 것을,
또 내게 실망한 사람들은 얼마나 많겠나.
현실은, 믿음의 현실인 신앙은
허공을 치는 사상이 아니며 헛것을 잡으려는 공허가 아니기에
구체적인 현실의 현상과 문제를 나름 성경으로 바라본 자신의 고백을
하면서 누군가 나를 넘어선 믿음의 사람이 나를 밟고 넘어서더라도
더 온전한 성경을 풀이한, 이 시대를 향한 외침의 글을 보고 싶다.
그래서 이글은 나의 고백이지 이 글이 완벽한 글이 아니며
신앙인의 길을 제시하는 것뿐이라 진정한 신앙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읽혀서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로 만족하기에
이 글이 누구를 빗대어 비난하고 비판하는 글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신앙 이야기 일 뿐이고
오늘날 복음의 적용과 어르러진 복음의 길에서
이를 알지 못하는, 잘못됨을 알면서도 자기 의로 변절된 복음의 의(義)로
배교의 길로 들어섰고
이를 정확히 알리는 자가 드물 으니
나름 성경을 읽으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하며
오늘날의 현실의 현상을 바라보며
복음의 길, 복음을 받은 자의 길을 제시하며 자신을 반성하고
데살로니가 교회와 바울과 동역 자들의 영혼의 심정을 그려보면서
바울이 진실한 권면이 오늘날 진리가 되어 올바른 복음이 전해지고,
바울 같은 지도자가
그리운 시대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바울의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권면은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For our exhortation was not of deceit,
nor of uncleanness, nor in guile:
But as we were allowed of God to be put in trust with the gospel,
even so we speak; not as pleasing men,
but God, which trieth our hearts
데살로니가 전서 2:3-4]

바울은 얼마나 순수하고 순전한 마음이 되었는지
간사함이나 부정이나 속임수로 권면하지 아니하고
사사로운 이익이나 자신의 명성으로 세상의 사리의 변명으로
권면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라
바울의 마음을 감찰 하시는,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마음의 중심에 계셔서 마음을 음직이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감찰로서
하나님께 옳게 여김을 받아
복음을 받은 자로, 하나님의 복음을 알리기에 허락받은 자로
복음을 위탁받은 자로,
사람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기 위하여(성령으로)
데살로니가 그리스도인 인 교회에 이해할 수 있도록 권하고(성령으로)
격려하며(성령으로)
힘을 얻고(성령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인 복음의 능력으로 수고와 애를 쓰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사례비를 생활비를 받지 않고
밤낮으로 일하며
복음을 위탁받은 자로
복음을 전하였기에 이는 성령의 인도함으로 온전한 복음을 전하였기에
바울의 복음은 ‘권능’ 으로 되었다.
이 권능이 짧은 3주의 방문 기간에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웠다.
이 권능은, 복음의 능력이라
복음의 진리와 복음을 전하는 은사와 같이 함께 하기에
이는 성령님의 임재로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Who hath also sealed us,
and given the earnest of the Spirit in our hearts.  고린도 후서 1:22]
인치시고, sealed us
인치시고, 무엇으로?
그리스도의 고귀한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으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하시며
사랑한 ‘charity’ 의 순결한 사랑으로, 인침을 받고,
보증으로, 증거로,
우리의 마음에
진심의 성령을 주셨으며
진실의 성령을 주셨으며
정직의 성령을 주셨으며
우리의 영혼에 진리의 성령을 주셨음은
하나님의 임재( God's presence)로 성령의 임재를 의미하기에
성령의 내주(來住)없는,
진리의 앎이나 깨달음, 은사는 모두 거짓이고
성령 충만, 성령의 열매는 거짓이기에
그리스도 사랑의 흔적,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인격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사람의 모든 은사와 은사라는 방언을 다 가짜이다.
그 흔적이 성령의 인치심이기에, 성령은 진리의 영 이시기에
성령님이 임하시고 그리고 권능을 받고, 그래서 권능을 받으면
모든 거짓 은사와 은사 자, 거짓과 거짓 선생을 분별하고
분별력이 생기여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현상이, 능력이,
권능이다.
그래서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권능을 받고
데살로니가로 가서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가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이심을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전하며
아울러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돌아가심과 부활을,
그리스도의 고귀한 사랑을,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하시며
사랑한 ‘charity’ 의 순결한 사랑의 증인이 되었다.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권능으로.

다시 위의 구절을 보자.
-권능의 인정과 허락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받았으니
But as we were allowed of God tod be put in trust with the gospel,
-권능의 감사와 능력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함이라
not as pleasing men, but God, which trieth our hearts,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라,
신학의 학식과 자기 자랑의 사사로운 이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기와 명성으로 사람의 박수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높은 강대상만큼 높아짐이 아니라
화려한 강대상만큼 화려한 말의 현혹(眩惑)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함이, 참 기쁨이 되고
하나님을 높이려 함이, 바울과 동역 자들의 마음의 중심(our hearts)에
우러나는 기쁨이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했다.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바울과 동역 자들이 전한 복음은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even so we speak,
위탁받은, 그 말을 함으로, speak, 어떻게 our hearts 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은 심장으로, 가슴에 박힌 복음을.
요즘 같이 사이비들의
위탁받은 위탁자가 아니라, 대언 자가 아니라, 대리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귀한 사랑,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랑,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하시며 사랑한 ‘charity’ 의 사랑을
가슴에 간직한 말이,
심장에 박힌 사랑의 말이,
권능이 되었다.
성령님이 주시는 힘으로(the power of the Holy Spirit)받은
고귀하고 순결하고 위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로
권능(power of charity)을 받았다.
바울의 고백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립소서 3:10-12]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다?

 

- 이스라엘 프론트라인 (Brad TV) -

 


 

이슬람교의 다양한 측면을 심도있게 탐구하며,
그들이 공공연히 선언한 목표에 초점을 맞추어
무슬림 형제단이 미국에서 어떤 전략을

 

펼치고 있는지에 대해 알려드릴 것입니다.

 


 

 

 

출처: 주님오시는 발자국 소리/엘사다이

46강 막1422-24절 세례와 성찬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성례는 그 자체가 구원의 방편은 아니지만 믿는 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은혜의 방편이다. 우리는 성례를 행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확인하고 그분의 백성 됨과 우리가 그에게 속한 자임을 확인한다. 교회는 성례와 이 예식의 내용을 충실히 가르쳐야 한다.

 

 

 

Q 시각교정을 위한 화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최후의 만찬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신 궁극적인 의도는 종말에 하나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죄로 말미암아 고난과 형벌의 상태에 있습니다. 이 형벌의 자리로부터 그들을 구해내는 것, 즉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일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죄 문제가 해결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님의 대속 죽음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곧 피흘리신 죄 씻음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귀에 들리며 그의 요구가 우리 영혼을 뒤흔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요구와 명령에 반대되는 길을 가면 마음이 거북해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원을 얻은 표요 성경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있는 백성이기 때문에 얻게 된 감각인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실제적으로 실현 가능하게 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특별히 십자가와 부활로 요약되는 대속적 죽음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에서 돌이켜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8:12) 하나님나라에 관한 일은 늘 예수를 믿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음으로써 죄 씻음을 통과해야만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담대히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28:31) 또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간의 밀접한 관계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 선포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죄사함을 위한 대속적 죽음으로서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창조라는 공통분모로, 하나님나라의 선포와 예수님의 죽음은 직결되며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예수님의 죽음에 의하여 실제로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 즉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하신다는 이 구원의 약속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실제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사도들의 선포는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선포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공관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중심 메시지가 하나님나라인데,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의 설교를 보면 하나님나라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대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중심 메시지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설교의 주제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점으로 하여 하나님나라의 선포에서 예수님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으로 달라지고 있는 사실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16:21, 참조:8:31, 9:31, 10:33). ,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던 그 예수님이 이제는 사도들에 의하여 하나님나라 선포의 대상과 내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유익을 위한 성례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구체적인 열매로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으며, 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선포와 죽음을 신앙고백하는 것으로 그 존재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고백의 표현으로 교회는 규칙적으로 세례와 성찬 예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와 성찬 예식이 없는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가 아니며, 비록 성례 의식이 행해지고 있더라도 참여하는 자들이 그 예식의 내용과 의미를 모른 채 형식적으로만 참여한다면 바른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례는 그 자체가 구원의 방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신앙의 유익을 주기 위하여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하나의 도구입니다. 로마 교회는 일곱 가지 성례를 갖고 있었으나 개혁주의 교회는 세례와 성찬, 이 두 가지만을 가리켜 성례라고 합니다.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교회에서 지키라고 명하신 항구적인 제도입니다. 신자들은 성례를 시행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확인하고 성례를 통하여 그의 백성됨과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성례는 교회의 공적 모임에서 시행되며 그 의식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결속되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죽음과 부활에의 동참, 세례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죄를 씻는 의식이며, 실제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의미하는 의식입니다. 세례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베풀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복종하겠다는 진실한 고백을 하는 자들에 한해서 비로소 베풀게 되며 신자의 어린 자녀들에게도 베풀게 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2:12을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함으로써 세례를 함께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물세례 아래로 들어가심으로 죄인인 우리와 동일시된 것 같이,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과 우리가 동질화됨으로써, 이제 우리 역시 죽음을 이기고, 사망이 우리를 붙잡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동일시되고 동질화되면 그와 함께 죽음에도 가지만 그의 죽음은 곧 부활로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세례를 받아 그와 함께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는 자리에 동참하고 그와 함께세례를 받아 그와 함께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는 자리에 동참하고 그와 함께하나님 안에서 새로 부활하는 자리에까지 동참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골로새서 2:12“‘함께장사한 바 되고 함께일으키심을 받았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일시되어 물 세례를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그와 동일시되어 그 안에 들어감으로써, 그가 사망을 통과한 일에 내가 동참한 자가 되고 싶다는 신앙고백의 행위가 바로 세례입니다. 연합되기 위해서는 동질화되고 동일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를 연합이라는 말로 많이 일컫기도 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6:3-8).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죽는 자리에 동참하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 부활하는 자리에까지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자로 다시 살기 위해,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죽음의 자리로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내 이름만으로의 죽음이라면 죄값으로 죽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끝이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이 아니며, 사망이 그를 붙들 수 없는 분이며,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분이므로 이제 내가 그분의 죽음에 동참하면 그 죽음이 끝이 아니고 부활로까지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가 갖는 뜻입니다. 이 세례의 효능은 시행하는 순간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은혜의 내적 역사는 세례집행 전이나, 그 순간이나, 그 후에도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에 상관없이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또한 이 세례는 오직 한 번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의식이 집행될 때마다 그 의미를 우리 마음에 다시금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 죽음의 의미, 성찬

 

그러면 성찬은 무엇입니까? 주의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대로 그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나누는 예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잘 설명하신 부분은 최후의 성만찬 석상에서였습니다. 이 성만찬에서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떡을 떼는 일과 포도주를 붓는 행위이며, 둘째는 그 행위에 이어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22:19)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 (14:24)라는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특별히 잔의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구약에서 가르치고 기다려왔던 구원의 내용이 이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성취되고 있음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이라는 표현은 이사야 53:10-12을 인용한 것으로, 예수님께서 자기의 죽음을 백성들을 위해서 고난받는 종의 역할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난받는 주의 종이란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신 매를 맞고 자기 목숨을 대속의 제물로 주어서 많은 죄인들을 의롭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잔의 말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언약의 피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드린 언약의 제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는 장면이 묘사된 출애굽기 24:8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24:8).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가 했던 것처럼 이제 그 다음날 이뤄질 자신의 피흘림으로써 제자들을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레미야 31:33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의 언약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하고 남은 자들과 새로운 언약을 세울 것임을 예언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바로 이 새 언약의 제사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언약을 세우리라“ (31:31).

 

이상에서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보았고 자신의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창조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것이 성찬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이 행해질 때는 반드시 그 행위와 함께 그 행위를 설명하는 말씀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성찬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추억하는 기념행사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이 예식이 행해지는 곳에서 그리스도 죽음심의 공효(功效)가 실제로 적용되도록 성령님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성령의 역사를 기대함이 없이 아무렇게나 참여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본문 되짚어보기

 

 

 

1. 하나님나라 백성의 창조는 어떻게 성취됩니까?

 

2. 신자들이 성례를 시행함으로 확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성찬을 이루는 두 가지 요소인 행위와 말씀은 각각 무엇인지 본문에서 찾아 적어 보십시오.

 

행위:

 

말씀:

 

 

 

 

 

깨달음에 깊이 더하기

 

 

 

세례받았던 때의 감격과 느낌을 서로 이야기 해봅시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전세계 유명지 경이로운 사진

  

 

 

  



할례를 하고서도


     (창세기 17장)

창세기의 장(章)이 거듭할수록 우리는 하나님께서 믿음 없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조금씩 조금씩 계시하시며 아브람에게 믿음을 넣어주시고 그 믿음을 이끌어 키워나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5장에서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아브람에게 하늘의 별을 보여 주시며 “후손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브람이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다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었는데도 아브람이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면서 증표를 요구하자 삼년 된 암소, 암염소, 수양, 그리고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준비하여 쪼개놓게 하시고 그 쪼갠 고기 사이를 횃불로 지나시며 또 약속을 하셨습니다. 만일 삼년 된 암소, 암염소, 수양이 삼년 공생애의 주님을 예표하고 비둘기가 성령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면 아들의 목숨을 내어주고 그 사이를 지나시면서 하나님의 목숨을 거는 약속을 하신 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작 아브라함은 솔개를 쫓다가 지쳐 자빠져(? 실례^^) 깊이 잠들고 하나님 혼자서 목숨을 건 약속을 하신 셈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는데도 아브람과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 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지 못 하고 몸종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못 믿고 자기 생각대로 행하고 제 갈 길로 간 것입니다.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그리고 뻐꾸기 새끼 이스마엘을 기르며 13년을 보냈습니다.  

그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오셨습니다. 오셔서 아브람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너는 내 앞에서 걸으라.”고 명하셨습니다. 믿음을 버리고 제 갈 길로 가지 말고 하나님 앞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리고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고 이미 하셨던 약속을 또다시 하셨습니다.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 ‘열국의 아비’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손이 번성하고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약속을 거듭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으며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 원하나이다.” 하고 불신을 버리지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고 재차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고 사라가 전혀 믿지 못 하는데도 하나님은 또다시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도록 명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만큼 인간이 잊어버리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쉽게 약속을 깨고 버리는 악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 인간이란 약속과 믿음의 상대가 애당초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동일하신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고 잊어버리시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쉽게 잊어버리고 금방 변하고 다시금 하나님을 떠나갑니다. 그래서 잊지 않게 몸에다 표시를 하라는 것인가 봅니다. 하나님은 왜 남자의 양피를 베는 할례를 명하셨을까요? 인간의 신체는 하나님의 너무나 신비롭고 완벽한 작품이어서 무엇을 베어내거나 떼어낼 수가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몸에서 쓸데없는 한 부분을 잘라 버리라고 한다면 어디를 잘라내시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라낼 곳이 없습니다. 우리 몸 어느 한 부분도 불필요한 것이 없고 어느 한 곳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걸작품인 인간의 몸을 훼손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을 상하는 것 뿐 아니라 무엇을 그리는 것(문신)도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할례는 신체에서 일부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잘라내어 ‘브릿트“, 곧 언약의 표시를 해야 한다면 어디가 좋을까요? 어디를 잘라내는 것이 신체의 훼손이나 변형도 없고 부작용도 없고 외부로 흔적도 안 남을까요? 그래서 남자의 성기의 껍질을 자르라 하신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화장실 갈 때마다 보고 기억하라는 것일까요?

그런데 왜 남자에게만 할례를 하라 하셨는가? 이것은 성차별이 아닌가, 할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아프리카 북부지역의 이슬람 교도들은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할례를 행한다고 합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자에게는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배반한 다음 주신 잉태의 고통입니다.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시며 주신 것입니다. 언젠가 먼 훗날 오셔서 뱀의 머리를 밟고 우리를 구원하실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며 여자가 아들을 낳을 때마다, 잉태의 고통을 당하며 자식을 낳을 때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의 약속을 기억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이러한 약속의 표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더 귀하게 여기셨는지 여자에게 약속의 표를 먼저 주신 셈입니다. 하긴 여자가 생명의 은혜를 함께 받을 귀하고 연약한 그릇(벧전 3:7)이니까요. 그래서 이제 아브라함을 통하여 남자들에게도 약속의 표, 곧 양피를 베는 할례를 명하셨을지도 모릅니다. 할례를 받으면 나을 때까지 걸음도 걷기 어려울 정도로 아프긴 하지만(세겜의 학살사건에서 보듯이) 잉태의 고통에는 비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할례, 역시 인간이 하는 약속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약속, 아들을 내어주실 약속이었습니다. 한 쪽은 기껏 양피를 베는 것이었지만 한 쪽은 아들을 내어주어 쪼개는 불평등 약속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집의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남자들의 할례는 시작되었습니다. 억지로 몸에다 약속을 표시하는 할례를 한 셈입니다. 그러나 할례를 했다고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든든히 붙잡았을까요?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를 받고서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겨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였습니다. 결국은 앗수르에, 바벨론에 멸망 당하였습니다. 참 할 수 없는 인간인가 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기나긴 암흑의 세월이 지난 다음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은 오셨습니다. 하나님 혼자서 '아들의 약속'을 지키시었고 마침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이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언약, 마음(심비)에 새기는 언약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지키신 약속, 그 아들의 피의 약속을 말입니다. 십자가, 그 참혹한 광경, 그 피로 마음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언약을 말입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 3:3)
여러분은 육의 심비에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아로새겨진 언약의 할례를 갖고 계십니까?
이 약속마저 버리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그런데 오늘날에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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