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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번째 말씀:   “내가 목 마르다” (Jesus said I am thirsty) (요19:28)

오후 2시가 넘어서 다섯번째 하신 말씀은 “내가 목마르다”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피와 물을 쏟으셨기에 예수님은 목이 말랐습니다. 보통 목마름이 아닌 고통스런 목마름 이었습니다. 장장 5시간이나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고 몸안에 있는 피와 물을 쏟으셨기에 갈증이 심한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로마군병들은 Ozaca 생수가 아닌 신포도주를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신포도주를 마시면 기갈이 심해서 더 빨리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목말라 하시자 그들은 신포도주를 해융에 적셔 주었습니다.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은 다 겪으셨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형수들이 죽음의 문턱에서 겪는 육신의 목마름, 정신적 목마름, 영적 목마름의 고통까지 다 겪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목마름의 고통 뿐만 아니라 채찍과 조롱과 멸시와 천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수모와 아픔 고통까지 다 겪으셨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예수님의 목마름과 고통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선지자 이사야는 우리와 관련 있음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사53:3)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도다.”(사53:4)  또한 사도 베드로는 “저가 체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 고통을 대신 감당해 주셨기에 우리가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구세주로 영접하면 이상하게도 마음의 상처와 슬픔과 괴로움과 고통이 나음을 얻습니다. 운명적인 생각, 비관적인 생각, 염세적인 생각이 다 사라집니다. 그것은 신비입니다.

그래서 “멜깁슨“은 그 영화(Passionof Crist)를 만들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1979년 영화 ‘매드맥스’가 대박이 터지면서 할리우드로 뛰어들었다. 그 시리즈와 또한 ‘리설 웨펀’마저 돈벼락을 쏟아놓던 80년대 말 나의 삶은 안으로 곪아갔다. 술, 마약, 포르노, 노름, 도박  등등 중독 가능한 모든 것에 탐닉했기에 정신적 파산을 맞았다.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내 마음의 아픔과 슬픔과 상처와 죄의식과 고통을 어느 누구도 해결해주지 못했다. 91년 나는 구원의 길을 찿기로 결심했다. 부시 대통령이 성경공부를 통해 변화된 것을 보고 나도 성경공부를 통해 근본으로 돌아가자고 결심했다. 성경을 배우면서 십자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나의 모든 마음의 상처와 아픔과 고통과 슬픔과 죄의식이 다 사라지고 치유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 좋은 예수님을 세상에 소개하기 위해 예수 수난이라는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그러므로 멜깁슨처럼 곪아가는 분이 계십니까? 정신적인 파신을 당한 분이 계십니까?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분이 계십니까? 십자가에 여러분을 대신하여 고통 받으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십시오. 멜깁슨처럼 새로운 삶이 전개될 것입니다.  

둘째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면 한없는 생수를 공급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죽어가는 순간에 사람들은 갈증을 더 하게 하는 신포도주를 주었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갈증도 해결해주고 마음에 기쁨을 영원히 누리는 생수를 공급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생살이에 시달려 살맛을 잃고 살아가던 수가성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요7:37,38)

이 말씀에 대한 증인은 수가성 여인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을 구세주  영접하고 자신의 살아오면서 지었던 죄를 다 고백하고, 죄사함을 받고 나니까, 예수님께서 한량없는 기쁨인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동네사람들을 피해 살다가, 예수님을 만난 후 기뻐하면서. 사람들을 찿아가 예수를 믿으라는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여러분이 잘 아는 000자매입니다. 000자매님은 수가성 여인처럼 인생 살 맛을 잃었고, 내면엔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이곳 오스틴에서 00자매의  전도를 받아 성경공부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선 그의 내면에 한없는 생수가 흐르고 있습니다. 믿어지지 않으면 매주 목마름 없는 샘터에 실리는 “하나님께 띄우는 나의 편지”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000자매님이 자신의 간증인 제1권의 책을 펴내면서 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 예수 믿었더니 상상해 보지도 못했던 이런 기쁨도 주시는구나!”

그리고 여러분이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대학부 수련회에서 어떤 기쁨을 얻으셨나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그런 기쁨이 바로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인 것입니다. 그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저의 경우에는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이 날마다 충만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피곤하게 보일지라도 저의 내면엔 항상 기쁨이 넘칩니다. 사업을 하며 젊은 재벌이라는 말을 들으며 살았을 때보다도 훨씬 더 많은 기쁨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기쁨이 아닌, 그때 누려보지 못했던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 기쁨, 주께서 주시는 생수의 기쁨을 누려보시기를  바랍니다.

그것도 모르고 친구들을 찿아가 기쁨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찿아가도 그들이 주는 것은 신포도주인 Wine이나 맥주, 위스키, 쏘주입니다. 부어라 마셔라 밤새도록 마시면서 목마름을 해결해도 그 다음날에 뒷골만 아프고 갈증만 더하고 빨리 죽게 되어있습니다. 간장이 나빠지고 황달이 생겨 온 집안에 기쁨이 아닌 슬픔만 주게 되어있습니다. 세상 친구 찿아가 빨리 죽는 신포도주로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래 살고, 기쁨도 누리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주님이 주시는 생수, 영생수를 마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깨달아야 될 것은 요한복음19:2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예수님이 그 정신없는 경황 중에도 시편에 기록된 메시야에 관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려고 어떻게 “내가 목마르다”고 하실 수가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완전히 미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무리 심한 고통과 아픔 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는 자세를 갖는 것이 아주 중요함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신 나간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역설의 말이 진리입니다. 그렇게 할 때 오히려 인생을 좀 더 의미있고, 보람 차고, 활력있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임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엊그제 신문에 보니까 한국 농촌교회를 시무하던 아주 젊은 정00 목사님이 불의의 사고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38세된 이00 사모는 그렇치 않아도 생활이 어려웠는데 그 어려움 속에서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남편의 장기를 받은 분들이 건강하게 살아주는 게 남편의 뜻을 이어주는 것이며, 당장 교회는 정리해야겠지만 끝까지 남편의 뜻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일을 계속해 나갈 계획이다.”

아픔이 있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꿋꿋이 일어서는 그 사모님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일어선다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전력투구 한다면, 하나님께선 여러분에게 놀라운 영적 힘과 육적 힘을 공급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한 치도 틀림없이 이루시는 하나님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아브라함의 충성된 늙은 종은 아브라함의 명을 받고 약대 열 마리에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아들 이삭의 배필을 구하러 메소보다미아로 떠납니다. 늙은 종이 낙타 열 마리에다가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도적이 출몰할 수도 있는 그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들의 아내를 데려오는 일에 자신의 전부를 겁니다. 믿는 것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자를 그 앞에 보내어 지키시며 인도하심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주시고 인도하시고 이루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이는 자신의 전부를 거는 이러한 모험은 감히 엄두도 못 낼 것입니다. 늙은 종은 순적하게 만나게 하실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길을 떠납니다.

 늙은 종은 긴 여정 끝에 드디어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렀습니다. 성 밖 우물 곁에 낙타들을 끓렸습니다. 저녁때입니다. 여자들이 물 길러 나올 시간입니다. 그 곳에서 늙은 종은 기도합니다. “이제 이 성읍 처녀들이 물 길러 나오겠네요. 하나님, 그 중 누가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될 사람인지 제게 알려 주십시오. 제가 그 중 한 처녀에게 네가 길어온 그 물을 내게 좀 주라.‘고 청하겠습니다. 그러면 그 처녀가 ’아, 그러세요. 이 물을 드세요. 그리고 저 목마른 낙타들이 마실 물도 제가 떠올께요.‘ 하면 그 처녀가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처녀인 것으로 알겠습니다.”

 종이 기도를 채 마치기도 전에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손녀, 심히 아름답고 순전한 처녀 리브가가 물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우물가로 나옵니다. 우물로 내려가서 물을 길어 물항아리를 채워 메고 올라옵니다. 중동지방의 우물들은 대개 깊은 곳으로 계단을 따라 내려가서 또 깊은 곳에다 줄에 매단 두레박이나 항아리를 넣어서 길어 올려야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한 번 내려가서 물항아리를 채워 올라오는 일은 상당히 힘이 드는 일입니다. 늙은 종이 리브가에게 달려가서 물을 좀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세요. 이 물을 드세요.” 리브가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급히 항아리를 내려 그 종에게 물을 마시게 합니다. 그리고 그 종이 물을 마시고 나자 ‘약대들도 목이 마르겠군요. 제가 약대들에게도 물을 떠와서 마시게 할께요.’ 하고서는 항아리의 물을 구유에 붓고 몇 차례나 깊은 우물을 오르내리며 물을 길어 약대들에게 물을 마시게 합니다. 먼 길을 온 열 마리나 되는 낙타들이 마시는 물의 양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늙은 종은 바로 이 처녀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삭의 배필인 것을 확신합니다. 종은 약대들이 물을 다 마시고 난 다음 반 세겔중(약 두 돈쭝) 금고리 한 개와 열 세겔중(약 40돈쭝) 금팔찌 두 개(총 82돈쭝, 약 320 그램, 약, 11 온스, 요즈음 금 한 돈이 18만원 정도니까 천 오백만원은 되겠군요.)를 그 처녀에게 주며 “누구의 딸이냐? 네 아버지의 집에 내가 묵을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그 처녀는 대답합니다. “저는 저의 할아버지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딸 리브가입니다. 저희 집에는 낙타에게 먹일 짚과 보리도 많고 묵으실 곳도 있습니다.”

 참으로 한 치도 틀림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먼 길을 온 늙은 종이 우물에 이르렀을 때에 딱 맞춰 수많은 성읍의 여자들 가운데 다른 사람도 아닌 정확히 이삭의 아내가 될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손녀딸 리브가를 우물가에 나오게 하여 딱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늙은 종은 그 자리에서 머리를 숙여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인자와 성실을 끊이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예비하심은 한 치도 틀림 없으며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하심과 계획하심은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자신의 모든 좋은 것을 낙타 열 마리에 실어 늙은 종에게 맡겨 보냄으로써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의 약속에 맡긴 아브라함과 주인의 그 믿음을 따라 순종한 늙은 종에게 하나님의 기이한 역사는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 합니다. 자신의 모든 좋은 것을 낙타에 실어 보내지 못 합니다. "밭 판 돈"을 빼돌려 챙겨놓고 없어도 괜찮을 좋지 못 한 것만 실어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먼저 역사해 주시면 낙타에 실어 보내겠노라고 하나님께 거꾸로 약속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스스로가 좋은 것을 잔뜩 짊어진 낙타가 되는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

남녀노소 모두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다시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이네요
충격적이라 실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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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에 들어있는 증점제의 충격적인 비밀


세계 굴지의 아이스크림 브랜드 배스킨 라빈스의 후계자가 아이스크림의

 유해성을 알리는 환경운동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1945년 버튼 배스킨과 어니 라빈스는 자신들의 이름을 딴

 아이스크림회사를설립했다.

하지만1967년 배스킨은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당시 배스킨은 아이스크림으로 인해 심각한 비만 등 질병을 갖고 있었다.

동업자인 라빈스 또한 콜레스테롤 수치
300에 당뇨 증세로 실명과 괴저병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그 원인 또한 아이스크림으로의심됐다.

이들을 가까이서 지켜 본 존 라빈스는 유일한 후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산 상속권을 포기하고 환경운동에 나섰다.
그 스스로가 아이스크림이 가진 유해성의 산 증인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그는 아이스크림의 유해성을 알리는 데 매진하고 있다.

(1) 존 라빈스의 일화가 경고하는 것은 간단하다.

아이스크림은 ‘내 아들마저 먹이지 못할 음식’이라는 점이다.
아이스크림의 유해성을 논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합성착색료다.

각종 맛과 향, 색을 내기 위한 착색료 등첨가제는 빈번히 등장하는 유해물질이다.
하지만 아이스크림에는 이들 말고도 무시 못할 유해물질이 있다.

바로 증점제와 유화제다.


증점(增粘)제는 말 그대로 끈끈한 성질인 점성을 늘리기 위한 첨가제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지만, 아이스크림이 녹으면
쫀득한 식감을 내는 액체가 된다.

이런 효과를 내기 위해 첨가하는 게 바로 증점제다. 문제는 증점제가
아이스크림의 점도만 높이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증점제는 몸 안의 혈액 또한 끈적끈적하게 해 ‘어혈(瘀血)을 쉽게 만들 수 있다.
어혈은 아토피의 대표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2) 아토피를 가진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은 독 과 마찬가지다.
증점제의 유해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대표적인 것이 아이스크림에

 주로 쓰이는 증점제인 ‘카라기난’에 대한 논란이다. 입법에는 실패했지만, 미국
식품의약국(FDA)는 1972년 카라기난을 식품첨가물로 이용하는 데 제한을 두어야 한
다고 주장한 바 있다.

(3) 1982년 미국 국제 암연구소 또한 카라기난을 ‘동물에게 암을 일으킬 수 있는 물질’로 규정했다.

(4) 미국 아이오와 대학의 조안 코바크만 박사가 내놓은 보고서도

카라기난의 유해성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카라기난을 대상으로 하는 동물실험결과 45편을 분석한 코바크만 박사는

 ‘식품에 들어있는 변질된 카라기난이 위와 장에 궤양을 유발할 수 있으며,
폐암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카라기난이 식품첨가물로 도입된
이후 북아메리카의 폐암 환자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5)이런 물질이 국내에선 합법이다. 카라기난은 식약청이 공시한

 ‘식품첨가물공전’에 공식 등록돼있다.

자칫 잘못하면암까지 유발할 수 있는 물질이 버젓이 유통되고 있는 셈이다.

(6) 가까운 일본에서는 식품첨가물 평가일람을 통해
카라기난을 발암성이나 급․만성 독성 물질로 분류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조치다.

(7)유화제는 증점제 못지않게 주의해야 할 아이스크림 첨가물이다.

 아이스크림을 만들기 위해서는 당류와 각종 첨가물, 지방과 물을 섞어야 한다.

 이때 자연 상태에서는 섞일 수 없는 기름(지방)과 물을 균일하게 혼합하기

위해 유화제를 사용한다.

 몸 속으로 들어간 유화제는 물과 기름을 섞는 바로

그 힘으로 나쁜 물질들이 몸에 흡수되는 일을 돕는다.
유화제의 성분 자체도 문제다. 아이스크림에 첨가되는 유화제 중 하나인

 글리세린지방산에스테르는 동물실험을 통해 간이나 신장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사실이 밝혀졌으며,

발암물질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다른 유화제 성분인 자당지방산에스테르 또한 유해성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자당과 유지를 원료로 하는 탓에 비교적 안정성이 높다고는 하지만,

임신 중에 다량으로 섭취하면 태아에게 선천성 이상이 일어날 위험이 있다.

 천연유화제로 분류되는 레시틴이나 사포닌 성분도 체질에 따라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식품첨가물로서는 안심할 수 없다.

(8) 어떤 성분이든 유화제가 들어있단 사실만으로 아이스크림은 유해성

논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얘기다.

유화제를 다른 말로 ‘계면활성제’라고 한다.

 화장품을 살 때도 가급적이면 계면활성제가 들어간 제품은 피하는 게일반적이다.

 바르는 화장품에서마저 두려운 존재인 계면활성제가 먹는 아이스크림에 들어가 있으니

 그 유해성을 짐작할만하다.

(9)<스펀지>, <환경스페셜>, <소비자고발>, <불만제로>. 지난 여러 해 동안

아이스크림에 함유된 식품첨가물의유해성을 다룬 TV프로그램들이다.

특히 KBS <스펀지>에서의 실험은 눈여겨볼만하다.

 

<스펀지>는 천연 아이스크
림과 슈퍼마켓에서 파는 일반 가공 아이스크림을 태우는 실험을 했다.

 천연 아이스크림은 타면서 노르스름해지며누룽지 타는 구수한 냄새가

 난 반면 일반 가공 아이스크림은 새까맣게 타들어가 타이어 태우는 냄새가 났다.
발암물질이라는 지적이 떠나질 않는 증점제와 유화제, 그 유해성을 방증하는 실험이다.
아이스크림, 그 달콤한 유혹 뒤에 숨겨진 타들어간 암흑을 외면해선 안 된다.




교황 선출 이후 동성애, 낙태, 타종교, 구원의 문제에 관해 2,000년 동안 지켜온 카톨릭의 전통 가치관을 무너뜨리는데 앞장을 서온 프란치스코 교황이 또 다시 “교회가 성소수자에 사과해야” 한다는 발언을 통해 ‘카톨릭 동성결혼 합법화’를 위한 간보기를 시작했다.


관련기사 >> 교황 "교회가 소외시킨 성소수자에 사과해야"




그 동안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을 한 뒤, 여론의 공격을 받으면 곧 바로 교황청 대변인을 통해 “본뜻은 그것이 아니었다”는 식으로 변명을 해 온 교황이 이번에는 어떤 모습을 보일 지 궁금하다.


카톨릭에서는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진리의 수호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를 안 믿어도 구원받는다.”는 발언을 통해 예수의 유일성을 부인하고, “교회가 성소수자에 사과해야”는 발언을 통해 동성애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할 죄라 명시한 성경 말씀(고전 6:9,10)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프란치스코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대리인’이요, ‘진리의 수호자’라는 명칭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라는 명칭 보다는 ‘적그리스도의 대리인’이라는 명칭이, ‘진리의 수호자’라는 명칭보다는 ‘진리의 파괴자’라는 명칭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가장 어울리는 호칭일 것이다.



"주님은 우리 모두를 그의 피로 구속하셨습니다. 우리 카톨릭 신자 뿐 아니라

무신론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구속하셨습니다."



"누군가가 동성애자이고 그가 선한 의지를 가지고 주님을 찾고 있다면,

내가 어떻게 그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은 대중들에게 '진리의 수호자'라기보다는

'동성애의 수호자'로 비춰지고 있다.


*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보여준 파격적인 언행은 성경을 유일한 진리의 기준으로 보는 개신교인의 관점에서 뿐 아니라, 그 동안 보수적인 가치관을 지켜왔던 카톨릭의 입장에서도 이미 용납할 범주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는 보수적인 카톨릭 사제와 신자들 사이에서도 이를 우려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마지막 때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예수회 출신으로 최초의 교황이 된 프란치스코가 결국 카톨릭 교회와 온 세상을 배도와 멸망으로 이끌 ‘거짓 선지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부디 이제라도 이런 교황과 카톨릭 교회의 현실을 깨닫고 성경에 근거한 바른 믿음을 갖기 위해 음녀 바벨론의 길을 가고 있는 카톨릭 교회에서 빠져 나와 진리가 바르게 선포되는 교회를 찾아보시길 권면합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요한계시록 8장 4절).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눈물보다 귀한 사랑 
                 최송연    

당신을 사랑하는
그 마음 하나로
오늘까지 버틸 수 있었노라
당당히 말하지 말게 하소서

당신께 받은 사랑 너무 커
모진 세월마저도
진정 행복했었노라
눈물로 고백할 수 있게 하소서
당신 오시는 날 내어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눈물보다 귀한 사랑, 당신의 그 선홍빛 사랑 하나뿐이오니...
 
 
                                                  
눈물보다 귀한 사랑  
                최송연   

당신을 사랑하는
그 마음 하나로
오늘까지 버틸 수 있었노라
당당히 말하지 말게 하소서

당신께 받은 사랑 너무 커
모진 세월마저도
진정 행복했었노라
눈물로 고백할 수 있게 하소서

당신 오시는 날
내어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눈물보다 귀한 당신의 사랑,
그 선홍빛 사랑 하나뿐이오니...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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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행복입니다...    최송연 

햇살 고운 아침이나 바람 거센 밤이나 당신의 그 사랑, 나 느낄 수 있으니 행복입니다 비록 당신을 따르는 이 길 험하나 당신의 그 사랑, 별빛 되어 날 인도하시니 행복입니다 사랑 때문에 거룩한 몸 갈기갈기 찢기신 당신의 그 사랑, 내게 영원한 생명 되시니 행복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영롱한 새벽이슬 날이면 날마다, 내 영혼 소생시키시니 행복입니다

 

     사랑은 행복입니다...    최송연

    햇살 고운 아침이나 

    바람 거센 밤이나
    당신의 그 사랑, 나
    느낄 수 있으니 행복입니다

    비록 
    당신을 따르는 이 길 험하나
    당신의 그 사랑, 별빛 되어
    날 인도하시니 행복입니다

    사랑 때문에
    거룩한 몸 갈기갈기 찢기신
    당신의 그 사랑, 내게
    영원한 생명 되시니 행복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영롱한 새벽이슬
    날이면 날마다, 내 영혼
    소생시키시니 행복입니다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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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러내심, 그것이 복입니다.

    리브가가 집으로 달려가서 이야기를 하자 오라비 라반이 달려 나와 아브라함의 종에게 이릅니다. 라반이 누이 리브가가 찬 고리와 팔찌를 보고 리브가로부터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에게 한 말을 듣고 달려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라반이 아브라함의 종을 집으로 영접해 들이고 약대의 짐을 부리고 짚과 보리를 약대에게 주고 아브라함의 종과 그 종자에게 발 씻을 물을 주고 음식을 차려 대접합니다. 라반은 굉장한 부자가 왔다고, 횡재가 굴러들었다고, 대박을 맞았다고 신이 나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때 아브라함의 종은 말씀드리기 전에는 먹지 않겠다 하면서 자신은 아브라함의 종이라는 것과 아브라함이 어떻게 자기를 보내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말합니다. 또 우물가에 이르러 물 길러 나오는 처녀에게 물을 좀 달라고 청하면 그 처녀가 자기에게 물을 줄 뿐 아니라 낙타에게도 물을 길어준다면 그 처녀는 여호와께서 정하신 이삭의 배필이라고 기도하였더니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나왔고 리브가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였더니 리브가가 기도한 그대로 자기에게 물을 줄 뿐 아니라 낙타에게도 물을 길어 주었으며, 더구나 뉘집 딸이냐 물었더니 바로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딸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한 치의 틀림도 없이 인도하신 것이라 이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였노라고 진술합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들이 리브가를 나를 따라 이삭의 아내로 보내실 것인지 아니 보내실 것인지 대답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라반과 브두엘은 이 일이 여호와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자기들은 뭐라고 할 수 없다면서 리브가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뜻대로 이삭의 아내가 되게 하라고 대답합니다. 그제야 아브라함의 종은 땅에 엎드려 여호와께 절하고 낙타에 싣고 온 은금 패물과 의복을 꺼내어 리브가와 리브가의 오라비와 어머니에게도 줍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아브라함의 종은 자기의 주인에게 빨리 가야겠다고 바로 떠나겠다고 하고, 리브가의 가족들은 리브가를 열흘만이라도 머물며 이별하도록 하게 해 달라고 하는 작은 승강이가 벌어지고, 리브가가 바로 따라 나서겠다고 하는 작은 소동이 있은 다음 리브가는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 하는 가족의 축복 속에 아브라함의 종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이르러 이삭을 만나 이삭의 아내가 됩니다. 그리고 이삭이 모친의 상사후에 위로를 얻었더라고 맺음으로써 이삭이 어머니 사라가 죽은 다음 3년 동안 슬픔에 잠겨 있다가 아내를 얻은 기쁨을 얻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4장은 무려 67절에 이르는 긴 이야기를 여기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나이 든 아들을 장가도 못 보내고 사라가 죽은 다음 아들 이삭의 혼처를 놓고 하는 아브라함의 맹세, 한 번 하나님을 따라 나선 자는 절대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단호한 결단이 들어있고, 주인을 목숨을 걸고 섬기는 종의 충성이 들어있고,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한 치도 틀림없는 인도하심, 그리고 불러내심을 받은 자의 결단들이 들어 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삶은 우리 인간적인 육신의 눈으로 볼 때는 결코 복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러내신 또 한 사람, 아브라함의 종을 따라가서 이삭의 아내가 된 리브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이삭이나 리브가나 그들 모두는 광야에서 떠돌다 광야에서 죽었으며, 나이 늙도록 아들을 낳지 못 했으며, 늦게 낳은 아들의 혼사도 보지 못 하고 죽었으며, 때로는 고통스러웠고, 위험했고, 외로웠고, 슬펐으며, 많은 사람들이 세상살이 속에서 즐기는 소위 인생의 재미나 낙도 누리지 못 했습니다.

    그들은 거의 아무것도 이룬 것 없고 아무것도 해놓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이끌려 나와 일평생 광야에서 살다가 아들 하나 남겨놓고 죽은 것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을 복된 자, 복의 근원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산 것이 복입니다. 그리스도의 계보에 속한 것이 복입니다. 그리스도에 속한 것이 복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아무 공로, 아무 이루어 놓은 것, 아무 열매 없어도 그것이 복입니다.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So being affectionately desirous of you,
    we were willing to have imparted unto you,
    not the gospel of God only, but also our own souls,
    because ye were dear unto us.  데살로니가 전서 2:8]
    우리가 간절히 너희를 사모함은
    간절한 원하여 복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들이 됨이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이는 바울과 실라 디모데가 복음을 전하며 그들의 영혼과 육체의 목숨까지도
    너희를 사랑하여 내 놓을 만큼 사랑하였고
    그 사랑은, 바울과 실라 디모데가 서로 사랑함으로 얻는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으로 말미암은 사랑,
    그 사랑의 능력을 주시는 성령님의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으로
    서로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데살로니가 성도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사랑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었기에
    ‘affectionately’ 로 표현했고
    KJV 에는 이곳에 단 한번만 나오는 특이한 단어로
    개정개혁은 ‘사모’ 라 표현하였지만 의미는 ‘깊고 깊은 사랑’을 뜻한다.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그 대답은 11절에 찾을 수 있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As ye know how we exhorted and comforted and charged every one of you,
    as a father doth his children,]
    너희가 아는 것처럼 마치 아버지가 자녀에게 대하듯이
    어떻게 너희를 위로 하고 용기를 북돋고 힘을 주고 평안을 주기위하여
    너희 모두에게 그리 하니.

    ‘affectionately’ 는
    바울과 실라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믿음의 아버지가 되었던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사랑과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영생을 있게 하신, 영생을 보여주신 소망의 사랑과
    이 같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이를 증명하실 뿐 만 아니라 이제부터 영원에 이르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사랑,
    그 사랑으로 목숨까지 주기를 기뻐함이 되었고
    그 사랑으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사랑하는 자 들이 되었고
    이를 받아드린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서로 사랑함으로 바울과 그의 동역 자 들과
    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늘나라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다가올 하늘나라의 모형인 교회가 세워졌다.

    그래서 교회란
    천국, 하늘나라의 모형이고
    사랑이란
    그리스도 시며 주 이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Jesus said unto him,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nd.
    This is 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
    And the second is like unto it, Thou shalt love thy neighbour as thyself.
    On these two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
    마태복음 22:37-40]
    마음을 다하고 영혼의 힘을 다하여
    목숨 같이
    끝임 없이 고동(鼓動)치는 심장과 같이,
    심장에 성령님께서 인치 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한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그 사랑을 본받아, 그 사랑을 닮아서
    그 사랑을 가슴에 인 침 받은,
    도장을 새기듯 가슴에 각인(刻印)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둘째도 그와 같으니
    And the second is like unto it,
    둘째도 같은 계명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똑 같은 계명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이 사랑을 증명하시며 힘주시며 인도하시는 성령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똑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며
    똑 같이 형제자매를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하나님의 법을
    현대의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가?
    이 계명을 지키지 못한 다면 이것이 배도의 길이고
    지키려는 노력이 신앙생활이고
    지키려는 모양을 경건이라 한다.
    그러나 지키려는 노력과 모양도 없으면
    그런 종교인들에게 돌아서라는 말씀이라
    계명이며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한다.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Who by him do believe in God, that raised him up from the dead,
    and gave him glory; that your faith and hope might be in God.
    Seeing ye have purified your souls in obeying the truth through the Spirit unto unfeigned love of the brethren, see that ye love one another with a pure heart fervently:
    베드로 전서 1:21-22]


    시청자여러분 안녕하세요. 알약톡톡2의 가애란입니다. 요즘 날이 부쩍 더워지면서 야외에서 시원한 맥주와 함께 치킨을 즐기시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환상의 짝꿍으로 불리는 치맥! 하지만 통풍을 앓고 있는 분이라면 가장 멀리해야 할 악마의 음식으로 악명 높은데요. 오늘은 우리 식습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 통풍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봅니다.
    통풍에 대한 궁금증을 함께 풀어주실 한양대학교 류마티스병원 최찬범 교수님 모셨습니다.

    Q) 통풍, 이름 그대로 ‘바람만 불어도 통증이 생긴다’ 이런 질환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실제로는 어떤 질병인가요?
    A) 몸 안에 관절 액이 있는데 관절액이 결정체가 생기면서 결정체가 염증과 통증을 일으키는 질환입니다.





    Q)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최근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요. 우리나라 통풍 환자가 연 평균 8.5% 씩 증가하고 있는 추세라고 합니다. 이렇게 꾸준히 증가하는 이유는 뭘까요?
    A)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는데 통풍은 사실 음식과 연관이 많이 있는 병이고 그 외에도 고혈압이나 고지혈증, 비만 같은 병들이 연관이 있는 병이기 때문에 조금 더 서구화된 식생활로 식생활이 바뀌고 있고 특히 최근에 비만이 증가하고 있으면서 통풍도 같이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Q) 그런데 이 통풍하면은 원래는 중년의 남성에게 찾아오는 병이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통계 조사 결과를 보니까 요즘 젊은 층에서도 많이 나타나더라고요.

    A) 조금 더 젊은 나이에 발병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시 식생활이 문제가 되고 과거에 전통적으로 술이나 고기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는데 최근 연구 결과에서 탄산음료에 들어있는 최근에 당을 좀 싸게 대체하기 위해서 ‘프룩토오스’라고 하는 당류를 첨가하게 됐는데 그런 것들이 통풍하고 연관이 있다고 확인되었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 그런 탄산음료들을 많이 복용하시게 되면 통풍이 발병할 수 있는 위험성이 좀 더 증가할 수 있겠습니다.


    Q) 잠시 후에 통풍에 관한 식품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볼 테니까요. 좀 더 집중해서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 통풍의 경우에는 여성보다는 남성 환자가 극명하게 많이 발병 하더라고요. 10배정 정도 차이가 나던데 이렇게 남성에게 더 많이 나타나는 이유는 뭔가요?
    A) 통풍은 결국 몸 안에 관절액 내 결정체가 만들어지게 되는 건데 결정체는 요산이라는 물질이 만들게 됩니다. 그런데 여성 호르몬이 강력한 요산 배출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폐경 전의 여성분들한테는 요산이 잘 배출되면서 결정체가 생기지 않고 따라서 통풍도 잘 생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폐경이 된 이후에는 해가 갈수록 조금씩 더 높아지면서 나이가 드실수록 위험도 높아지게 됩니다.




    Q) 통풍의 경우에는 너무 잘 먹어서 생긴 병이다 그래서 뭐 ‘황제병’, ‘귀족병’이라고도 부르는데요. 이 식습관과 그 만큼 밀접한 관련이 있잖아요. 음식들이 우리 몸 안에서 어떤 영향을 미쳐서 이렇게 질병으로 나타나는 건가요?

    A) 음식 중에는 퓨린이라는 물질이 들어있는 음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음식들을 섭취하게 되면 요산으로 대사가 몸 안에서 되면서 결정체를 이룰 수 있는 위험도가 증가하게 되는데요. 그런 퓨린이라는 물질들이 많이 들어있는 음식들은 흔히 기름진 음식들, 내장이나 기름기가 많은 고기 들이나 그런 것들이 연관이 되어 있고 과거에 역사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들을 보면 실제로 앓으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Q) 비만은 어떤 원리로 통풍에 악영향을 미치는 건가요?

    A) 비만 세포들이 늘어나게 되면 거기에 따라서 염증도 늘어날 수 있고 그런 것들로 인해서 결정체가 좀 더 잘 생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Q) 그런데 이 퓨린, 이렇게 얘기를 들으면 ‘무조건 피해야겠다’, ‘우리 몸에 악영향을 미치네’ 라고 생각하기 쉬운데요. 다 이렇게 악영향만 미치는 건가요?
    A)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과하만 좋지 않듯이 퓨린도 우리 몸에 꼭 필요한 물질입니다. 우리 몸에 중요한 구성성분인 DNA, RNA같은 물질들에도 퓨린이 중요한 구성 성분이고 우리가 이제 활동을 하고 에너지를 얻는 ATP라는 물질을 구성하는 것도 퓨린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물질입니다. 하지만 너무 과하게 되면 통풍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인자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Q) 그런데 주위에 보니까요. 나는 술도 마시지 않는다, 고기도 좋아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비만과는 거리가 먼 마른 체형인데도 통풍 때문에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이건 왜 그런 건가요?
    A) 사람은 불행이도 요산을 분해하는 물질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한테는 그걸 분해할 수 있는 효소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몸에 축적이 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는 것이고 물론 외부에서 많이 들어오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 몸 안에서 많이 만들어지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고 그 다음에 배출이 안 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활습관으로 개선할 수 있는 좋은 조건들이 술이나 음식이기 때문에 강조가 되고 있지만은 그런 것 없이도 얼마든지 발병할 수 있습니다.




    Q) 통풍의 경우에는 서양에서는 악마가 내린 최악의 병이라고 불릴 정도로 극심한 통증 때문에 힘든 병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왜 이렇게 까지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게 되는 건가요?

    A) 결정체가 관절액에 생기면서 염증과 통증 을 일으키게 되는데 눈으로 현미경으로 보게 되면 결정체가 바늘 모양으로 뾰족하게 생겨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실제 자극을 주어서 통증도 심하게 일으키게 되고 그런 걸로 인해 생기는 염증이 통증을 유발하기 때문에 국소적인 자극이 통풍의 통증을 일으킨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Q) 통풍 환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밤에 유독 더 아프다 이야기를 하는데 실제로 그런가요?
    A) 일반적으로 밤에 갑자기 생기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요산이라는 물질이 결국 결정체를 이루는데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지만 우리 몸의 체온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밤에 주무실 때는 활동할 때보다는 체온이 좀 떨어지기 때문에 결정체가 좀 더 잘 만들어질 수 있는 환경으로 변하게 되고 그때 많이 발병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Q) 그런데 이게 통풍이 있다고 모두가 통증이 동반되는 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왜 그런 건가요, 그건?

    A) 통풍의 증상 중에 또 특징적인 것 하나가 서서히 아프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갑자기 확 아프기 시작해서 (벼락이 치듯이 아프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습니다. 보통 24시간 내에 최대 통증에 도달할 정도로 갑자기 진행하는 병인데요. 중간에 증상이 전혀 없는 시기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아무런 치료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게 염증이 급하게 생기면 보통 2주정도 내외에는 사라진다고 알려져 있고요. 그리고 다음 통증이 생길 때까지는 중간 기간에는 증상은 전혀 없는 사이 기간을 지내게 됩니다. 우리 몸은 방어할 수 있는 기전들도 항상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결정체가 문제를 일으키면 여러 면역세포들이 작용을 해서 결정체를 없애버리고 녹여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 시기가 지나게 되면 관절액 내 결정체는 사라지는 것이고 일부는 연부조직에 남아서 나중에 결정조직을 이루기도 하지만 급성기가 지나게 되면 결정 자체는 없어진다고 보시면 됩니다.


    Q) 초반에는 이렇게 생겼다가 사라지고 생겼다 사라지고를 반복을 하는데 이게 계속해서 지속되는 경우에는 뼈의 변형도 온다고 하더라고요?
    A) 그렇습니다. 결국 염증이 지속되면 좀 파먹어 들어간 것 같은 변화들이 뼈에서 보이는 경우들이 나타나게 되고 병이 오래 지속이 됐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변화 중에 하나겠습니다.


    Q) 그렇다면 통풍에 걸린 환자의 경우에는 모두에게 요산 결정체가 나타나는 건가요?

    A) 모두가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검사를 할 때는 바늘로 관절액을 뽑아서 현미경으로 직접 눈으로 보게 되는데요. 말씀드렸던 결정체들은 급성기 때 나타났다가 우리 몸에서 없애주는 작용을 하면서 사라지는 경우들이 있고 또 관절액을 뺀 다음에 실온에서 오래 두게 되면 결정체가 녹아버리게 됩니다. 실제 봤을 때는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원칙적으로 통풍이 급성으로 생겼을 때는 관절 액 내에는 결정체가 존재하게 됩니다.


    Q) 통풍의 증상으로 통증과 요산결정체, 이 두 가지를 살펴봤는데요. 이 외에 다른 증상도 있을까요?
    A) 쉽게 생각했을 때 통풍이라고 하면은 관절 아픈 것만 생각하기가 쉬운데요. 사실 요산이라는 물질이 여러 가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관절의 염증을 일으키고 지나게 되면 손상을 일으킬뿐더러 여러 가지 콩팥질환들이나 심장질환들을 일으킬 수 있고요. 또 여러 가지 대사성 질환, 성인병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요산이 높고 통풍이 생겼을 때 단순히 관절의 염증을 줄이기 위해 치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장기적으로 생길 수 있는 콩팥 쪽이나 신장 쪽에 중요한 질환들을 예방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잘 치료를 하시는 것이 항상 필요합니다.





    Q) 요즘에는 건강검진을 통해서도 요산수치 변화를 살펴볼 수가 있더라고요. 이 수치를 봤을 때 어느 정도까지가 정상이고 어느 정도 일 때는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건가요?

    A) 일반적으로 검사를 했을 때 8.0정도까지는 정상 범위 안에 있다고 보시면 되고요. 하지만 그게 10, 12까지 올라갔을 때 과연 치료를 해야 할 것인가, 거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모두 동의하는 기준은 없는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높게 유지가 된다고 하더라도 통풍을 일으키지 않고 다른 신장이나 심장 쪽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꼭 언제가 수치가 높아지면 치료해야 한다는 그런 건 없고요. 하지만 반복적으로 통풍이 생긴다거나 신장 기능이 조금 나빠진다거나 아니면 요로 쪽 결석 같은 게 생긴다거나 할 때는 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있고요. 하지만 그 수치만 가지고 언제 되면 꼭 치료해야한다 그런 근거는 부족합니다.


    Q) 8이하까지는 다 정상 수치로 본다고 이야기하셨는데요. 그러면 수치가 무조건 낮을수록 좋은 건가요?
    A) 통풍이 있으신 분들하고 통풍이 없으신 분들과의 기준이 조금은 다릅니다. 통풍이 없으신 분들은 8이하면 정상으로 보지만 통풍이 있을 경우에는 우리가 6이하로 유지하는 게 권장이 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요산수치가 낮다고 하더라도 조직에 조금씩 침착되어있는 결정체들이 있을 거고 그런 것들을 없애기 위해서는 혈액에서 아주 낮게 유지가 되어야지 그런 연부조직에 있는 결정체들이 혈액 안으로 녹아나오면서 제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통풍이 있으신 분들은 6이하로 유지할 것이 권장되고 있습니다.


    Q) 통풍이 의심돼서 병원을 찾았을 때 진행되는 검사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A) 일단 가장 좋은 것은 급성기 때 관절액을 뽑아봐서 결정체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가장 좋겠고요. 손상정도를 확인하기 위해서 X선 검사를 하게 되고요. 최근에 이제 요산 자체를 단순히 혈액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초음파를 보게 되면 요산 침착이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더 확실한 것은 이 중에는 CT라고 하는 CT검사를 하게 되면 실제 눈으로 요산이 침착되어 있는 부위 그리고 얼마나 많이 침착되어 있는 지를 시각화해서 볼 수 있기 때문에 통풍을 확인하는 좋은 검사로 활용이 되고 있습니다.




    Q) 통풍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확실히 맥주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맥주 말고 다른 술을 먹으며 괜찮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맞는 이야기인가요?
    A) 아주 틀린 얘기입니다. 물론 맥주가 가장 연관성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알콜뿐만 아니라 맥주에 들어가는 효모나 호프 같은 것들이 퓨린이 많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대표적으로 통풍을 유발할 수 있는 위험인자이기는 하지만 알콜 자체가 요산을 증가시키기 때문에 단순히 맥주가 아니다 하더라도 다른 술들 모두가 통풍의 위험인자로 작용하고 있고요. 실제 같은 양으로 본다 그러면 오히려 맥주보다 더 독한 술인 소주 같은 것이 대표적인 것이겠는데 더 안 좋을 수도 있어서 나는 통풍이 있으니까 맥주 안마시고 소주 드신다, 그것은 아주 안 좋은 행동입니다.


    Q) 술은 다 피해야하는 거네요?
    A) 다 피하는 게 좋고 드셔야 된다 그러면 약한 술로 적은 양을 최소한으로 드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Q) 통풍하면 맥주와 함께 나오는 치킨을 비롯해서 고단백 식품에 퓨린이 많이 들어있어서 피해야한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가요?
    A) 네. 그렇습니다. 특히 기름기 많은 부위들이 안 좋아서 닭 같은 경우에는 껍질이 가장 기름기가 많으니까 꼭 드셔야 된다 그러면 그 부위를 피해서 살코기를 드시는 게 제일 중요하고요. 쉽게 생각 안하는 부위가 내장류입니다. 곱창이나 순대 그 런 것도 상당히 안 좋아서


    Q) 순대도요?

    A) 마찬가지, 내장이 안 좋으니까요. 또 이제 생선 그러면 일반적으로 건강에 좋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사실 정어리 같은 여러 가지 등 푸른 생선들에도 요산이 많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생선들을 피하는 게 필요합니다.


    Q) 이미 통풍이 있는 경우라면 퓨린 함량이 높은 치킨이나 맥주, 그리고 고기 같은 고단백 식품, 절대적으로 다 피해야 하는 건가요?

    A) 사실 무조건 다 피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아까 말씀 드렸던 기름기 많은 부위들 피하고 내장 같은 걸 피하고 나서 남은 살코기들은 그걸 주식으로 드시지 않는다고 그러면 드셔도 큰 문제는 없으시고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요산을 떨어뜨리는 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훨씬 중요합니다.


    Q) 지방이 많은 단백질의 경우에는 악영향을 미친다고 하셨지만 우유는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도 있더라고요.

    A) 네, 실제 유제품이 통풍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당이 들어있는 것은 좋지 않아서 무과당 요구르트나 우유 같은 것들은 통풍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충분히 섭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Q) 우유랑 함께 물을 많이 마셔라, 이 이야기도 하더라고요?

    탈수가 대표적으로 통풍을 유발할 수 있는 요인이 되겠습니다. 탈수가 되게 되면 요산 농도가 높아지면서 결정체를 만들 수 있는 위험인자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충분히 수분을 섭취하시고 물을 많이 드셔서 우리 몸 에 수분을 충분하게 유지하시는 것이 통풍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Q) 우리가 관절이 아프고 마디가 쑤시면 병원에 가기 보다는 찜질을 많이 하잖아요.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A) 찜질은 도움이 될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염증이 동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차갑게 냉찜질을 하시게 되면 염증을 좀 가라앉힐 수 있어서 증상 완화에는 조금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뜨겁게 하는 것은 사실 염증이 있는 경우 좋지는 않습니다. 좀 뜨겁게 하면은 결정체를 녹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 쉬운데요. 사실 그것은 내부 온도기 때문에 외부 온도를 뜨겁게 한다고 해서 좋아질 건 아니어서 일반적으로 염증이 있는 경우에는 차갑게 하시는 것이 좋고 딛지 않고 쉬시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Q) 요즘 건강관리를 위해서 과일 주스 많이 드시잖아요? 통풍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건가요?

    A) 시중에서 팔고 있는 여러 가지 과일 주스에는 아까 말씀 드렸던 단당류, ‘프룩토오스’가 같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오히려 안 좋을 수도 있어서 사실 많이 드시는 건 좋지 않을 것 같고 주스보다는 과일 자체를 드시는 것이 좀 더 좋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Q) 통풍은 ‘생활습관병’이라고 해서 식습관 개선도 중요하겠지만 치료가 가장 중요하잖아요. 어떤 치료가 진행되나요?

    A) 요산을 떨어뜨리는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치료제를 유지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급성기에 염증이 있고 통증이 있을 때는 우선적으로 염증과 통증을 가라앉히는 치료가 이뤄지게 되고요. 그런 것들 이 가라앉고 나서 증상이 없는 시기에는 요산을 떨어뜨려서 그걸로 인한 합병증을 예방하고 사실 통풍도 치료에 기약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요산을 분해할 수 있는 효소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고혈압과 마찬가지로 약을 드시면서 혈압을 조절하듯이 지속적으로 증상이 없을 때에도 치료를 유지하시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Q) 그런데 이런 것이 가장 어려운 게 증상이 나타날 때는 아프니까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게 되지만 증상이 사라지고 나면은 좀 소홀하게 되잖아요 이때 좀 방치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A) 지속이 되면 관절 쪽에 손상이 생기는 게 나타날 수 있겠고요. 그 다음에 요산이 문제를 일으키는 신장 질환들, 콩팥 질환들이나 아니면 심장 쪽에 질환들이 나중에 가서 생길 수가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느끼기 어렵지만은 향후에 건강을 위해서라면 치료를 잘 유지하시는 것이 상당이 중요합니다. <o:p></o:p>


    Q) 꾸준히 계속해서 해줘야하는 것이 통풍 치료인데요. 아무래도 예방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죠? 통풍을 예방하고 또 질병이 있다면 잘 관리할 수 있는 방법, 어떤 것이 있을까요?

    A) 통풍은 무엇보다 식생활에 연관이 많이 있는 질환이기 때문에 일단 술을 많이 안 드시는 게 제일 중요하겠고요. 그 다음에 기름기 많은 음식들, 여러 가지 연관되어 있는 음식들을 드시는 걸 피하는 게 좋으시겠고 만약 통풍으로 진단이 됐다고 그렇다면 아플 때만 치료 받으실 게 아니라 계속해서 요산을 낮게 유지하는 치료를 유지하시는 것이 향후에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예방하는데 상당히 중요하겠습니다.

     

    출처: http://media.daum.net/culture/others/newsview?newsid=20160627200836836

    "축도는 담임목사가 하는 게 정상이다"

    축도, 하나님의 복 선포에 관하여

     

    오늘날 개신교의 교회에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예배에는 순서와 그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내용과 순서에 따라 하나님께 경건한 예배를 올려 드립니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예배의 내용과 순서를 표기한 “주보”가 필요한 데, 이 주보의 순서와 내용은 일개 개인이 만든 것도 아니고, 어느 교회가 그냥 만든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인 예배학자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예배를 잘 올려 드릴 수 있는가?”를 고심하며, 성경에 근거하여, 여러모로 심사숙고 하여 만든 것”입니다.

    즉 예배학 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보를 사용함은 오늘날 모든 교회의 예배 예전에 하나의 지침과  표준(standard)이 되어온 것으로서, 모든 교회의 하나의 전통이 되어온 것입니다. 이런 전통을 따라 올려 드리는 예배를 가리켜 소위 “Traditional  Worship 혹은 Classic Worship” 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배의 순서를 기재한 주보에는 언제나 1) 오르간 전주 2) 예배의 부름 3) 기원(Invocation) 4) 찬양과 경배의 찬송 5) 고백의 기도 6)영광송 7) 목회기도(pastoral prayer, or prayer of intercession) 8) 말씀 봉독 9) 성가대의 찬양 10) 설교 전 기도 11) 설교(preaching), 12) 감사와 응답의 찬송 12) 봉헌 13) 봉헌 기도 14) Benediction (축도, 하나님의 복의 선언 혹은 선포) … 등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배학 개론)

    여기서 위에 열거한 예배의 내용인 1) 부터 14) 까지의 모든 것을 다(all) 다룰 수는 없습니다. “Benediction, 축도”에 대해서만 다룬다면 이에 대한 저의 견해는 이렇습니다. 참고로 혹시 저의 부족함이 있다면 양해와 지적을 바랍니다.

    축도(Benediction)란 무엇인가?

    주보 마지막 순서인 축도(Benediction)는 예배를 집례한 목회자가 예배에 참석한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성도들을 향한 담임목사의 염원과 바램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선포”가 담임목사의 바램 보다도 더 우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에배에 초청하였기에, 이제 마치고 돌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차츰 다루겠지만 하나님의 복의 선포의 주체는 언제나 하나님이십니다. 목회자가 아닙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복을 선포하는 것 뿐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종(일군, 심부름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Benediction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복의 선포” 혹은 “복의 선언”이지, 축복을 비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 원합니다”가 아닌 “... 있을 지어다” 입니다. 

    “… 있을 지어다”가 맞습니다.

    주보에 Benediction을 “축도(祝禱)”라고 표기하였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축도(祝禱)”를 한자어 뜻대로 보면 “복을 빌어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로 볼 수 있지만, 그러나 Benediction이란 순서를 넣은 예배학자들의 정신과 그 의도를 볼 때, 축도가 아닌 복이 있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복의 선포” 혹은  “하나님의 복의 선언”이 맞습니다. 따라서 “축도”란 단어를 쓰지 말고 “하나님의 복의 선언, 혹은 하나님의 복의 선포”등으로 바꾸어야만 할 것입니다. 혹은 여기에 맞는 적합한 용어로 대체해야만 할 것입니다.

     

    축도의 유래

    이러한 “하나님의 복의 선포, 하나님의 복의 선언”인 Benediction은 성경에 기인합니다.

    주보를 만든 예배신학자들은 Benediction의 그 기원을 민수기 6:22-27와 고린도후서 13:13절에서 찾았습니다. 또한 사도들의 다른 서신에서도 찾았습니다.

    (참고: 롬 15:13절. 히13:20,21,25절. 유다서 24절. 벧전 5:14절. 요한삼서15절)

    구약 성경 민수기 6:22-27절에, 하나님께선 모세를 통해 아론 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에게 명령하시기를 기도가 아닌 “복을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복을 주는 주체가 아론이 아닌 하나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7절에 하나님께서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6:22-27절에는 아론 제사장이 복의 선포를 하게 된 경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민수기 6:22-27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복의 선포를 정확히 이해한 사도 바울은 성 삼위 하나님의 기능을 구약시대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였기에, 성 삼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선포를 고후13:13절에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참고 문헌: 예배학 개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이처럼 아론 제사장과 사도 바울은 “원하노라” 혹은 “있을지어다”는 말로서 “복의 선포(Benediction)”를 했던 것입니다.

    축도는 담임목사가 맡는 것이 정상이며, 담임목사의 위임/허락을 받은 부교역자, 전도사 혹은 장로 집사 평신도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 조건은 1) 믿음이 좋고 2) 성령이 충만하고 3) 주의 일에 헌신된 자라야 할 것입니다. 담임목사는 당당히 두 손을 높이 들고 축도를 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성도들 가정마다 넘치도록 정중히 해야 할 것입니다.

    축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선포

    민수기 6:22-27절을 볼 때, Benediction(하나님의 복의 선포, 복의 선언)의 창시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셨기에 아론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명령한 그대로 순종하여 “원하노라”는 하나님의 복을 선포한 것입니다. 

    아론 제사장의 복의 선포의 개념을 잘 이해한 사도 바울이었기에, 사도 바울 역시 “있을지어다”고 선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Benediction 이란 “축원 드리옵나이다” 가 아닌 “있을지어다” 혹은 “원하노라”가 맞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가 아닌 “있을 지어다”인 복의 선포/선언이 맞습니다.

    Benediction을 할 때, 목사님들이 사도 바울의 선포인 고후13:13절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고후13:13절의 말씀 보다 더 좋은 “복의 선포의 말씀”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고후13:13절 말씀 보다 더 좋은 표현이 있다면 능히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선포한 고후 13:13절에는 복을 주시는 주체인 성 삼위 하나님이 들어있고 (성부,성자,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있을 것을 선포하는 강력한 Powerful 메시지  이기 때문입니다.

    예배학 시간에 어느 교수께선 아론 제사장의 선포인 민수기 말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는 표현을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Benediction(축도)가 담임목사의 마지막 폐회인사이기도 하고, 성도들 가정에 복이 있기를 바라는 담임목사의 축도(빌어주는 기도) 같기도 하지만, 그러나 Benediction에는 목회자가 아닌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예배에 참여한 모든 성도에게 복을 주신다는 더 놀라운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근거는 민수기 6:22-27절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6:27절)  

    주보에는 하나님과 성도의 반응이 계속 교차된다

    사실, 예배(Worship)는 우리가 올려 드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예배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부르신 하나님의 초청에 응답하는 성도들의 자세가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다면 예배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그래서 주보를 만든 신학자들은 주보를 만들 때, 그냥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작하여 여기에 대한 성도의 응답과 반응, 하나님의 말씀하심 여기에 대한 성도의 응답과 반응, 하나님의 말씀 하심 여기에 대한 성도의 응답… 바로 이러한 하나님과 성도가 교차되어 계속 반복되는 모습으로 주보를 구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인 시편 낭독, 여기에 대한 성도의 찬양이나 회개기도 등으로 주보를 구성한 것입니다.  

    축도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주의 종이 대신하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에 우리가 응답하여 예배를 올려 드렸다면,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선 무엇인가를 주셔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선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즉, 부르심에 응답한 당신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선 Benediction을 통해, Benediction을 감당하는 당신의 일꾼(종)인 목회자를 통해, 당신의 복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뜻이 바로 Benediction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Benediction(하나님의 복의 선언)을 하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전달하는 하나의 도구요, 매개체이며, 하나님의 복을 그대로 전달하는 하나님의 종(심부름군)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축도하는 자의 구비 조건

    Benediction을 하는 목회자는 겸손해야 합니다. “~ 있을지어다” 함으로서 하나님의 복을 목회자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축도하는 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종의 자세를 취해야 하며, 겸손해야 합니다. “있을지어다” 함으로서 마치 자기가 복을 주는 것처럼 하면, Benediction의 정신에 어긋나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리에 목사가 들어 앉는 교만과 우를 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배학 책은 이런 점을 경계하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목회 현장을 보면 많은 목사들이 복을 선언하고 빌어주는 행위를 상품화 하여 평신도들의 신앙을 오도하고, 자신의 위치에서 마저 탈선하는 사례를 본다. 그러나 곧 초라한 인간의 정체는 밝혀지게 되며,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부끄러움을 갖게 되고마는 것을 우리는 엄숙히 기억해야 한다.”(예배학 개론)

    또 이렇게도 지적합니다. “목사는 여기 저기에서 축도를 남발하는 습관적 태도를 삼가하고, 정중한 Benediction으로서 그 진지성을 지속해야 한다.”(예배학개론)

    축도는 예배를 인도한 목회자와 위임 받은 다른 사역자도 가능하다   

    칼빈은 이에 대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위탁 받은 사람들, 그것도 모든 시간과 정신을 온전히 바쳐 주어진 사명에 전념하는 종들에 의해서만 선포 되어져야 한다.” 또한 “Benediction 을 선언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제적 임무를 수행하도록 명령 받고, 그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며 살아가는 목사들”이라고 규정합니다.(예배학개론)

    물론 장로님이나 안수집사님도 Benediction을 할 수 있지만. 이런 경우는 반드시 담임목사의 허락과 승락, 그리고 위임이 있을 때에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담임목사님이 출장으로 교회를 비울 때, 장로님이나 안수 집사님이 담임목사를 대신하여 예배를 인도하였을 경우입니다. 이 때 담임목사의 승락/위임이 있다면 가능하다고 봅니다.  만약 담임목사님의 승락이 없었다면 주기도문이나 기도로 대체해도 될 것입니다.

    축도는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는 것

    아마도 예배학자들은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는 그 근거를 레위기 9:22절에서 찾았을 것입니다.(성경대백과사전)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마치고 내려오니라."(레위기 9:22)  

    그러므로 축도를 행하는 목회자는 아론 처럼 두 손을 높이 들고 당당히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어떤 분은 축도를 겸손히 한다고 기도의 형식을 취하여 “원하옵나이다 혹은 축원합니다”로 마치는 분이 있는 데, 축도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따르기에 오히려 아론처럼 당당히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배학개론은 축도(Benediction) 할 때 조심할 2가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이여 축복하소서”…. 등의 표현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더 높은 신에게 우리를 위하여 복을 빌어달라는 뜻이 되므로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신다는 인식을 계속하면서 거기에 맞는 어휘를 활용해야 할 것이다.”

    둘째, Benediction의 끝맺음을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나이다”’고 함은 “하나님이 주실 복을 선언하지 않은 기도이기 때문에 목사는 여기에 유의해야 한다”

    또한 “복을 달라고 호소하는 일반적 기도와 복을 선언하는 목사의 benediction과는 혼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예배학 개론)

    구약의 제사장들과 신약의 사도들이 사용했던 Benediction은 단순한 기도라기 보다 하나님이 내려주실 것을 선언하는 Pronounce 행위라는 것이다. (예배학개론)

    “축도 (Benediction)의 근본 취지는 결코 오늘의 육적인 삶에 풍요한 물질적 만족을 누리도록 하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Benediction 의 참 목적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세상에 나아가는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한 생활을 강조하고, 하나님을 위한 사명적 존재로서의 삶을 위한 복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요즈음의 많은 교회들은 “오늘의 위탁(charge)”이라는 순서를 마련하여 새로운 사명의 부여를 강조한 후에 Benediction을 하는 예가 많이 있다”(예배학개론)  

    마치면서

    따라서 “축도권”이란 없습니다. 성경에 없는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축도권”이란 말은 사이비 혹은 무지한 사람이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이나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만든 잘못된 용어입니다. 축복권도 마찬가지 입니다. 

    축도는 담임목사가 맡는 것이 정상이며, 담임목사의 위임/허락을 받은 부교역자, 전도사 혹은 장로 집사 평신도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 조건은 1) 믿음이 좋고 2) 성령이 충만하고 3) 주의 일에 헌신된 자라야 할 것입니다. 

    또한 “축도”란 용어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선포에 적합한 용어를 찾아야만 할 것으로 사료 됩니다. “축도 즉 빌어주는 기도””라고 하였기에 오해와 착각이 많습니다.

    예배에 부른 이는 하나님이시고,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성도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이시기에, 더불어 돌아가는 성도들을 향한 간절한 바램이 담임목사에게 있기에, 담임목사가 축도(Benediction)를 하는 것이 타당하며, 담임목사의 허락이나 위임을 받은 다른 사역자도 능히 축도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사료 됩니다.

    담임목사는 당당히 두 손을 높이 들고 축도를 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성도들 가정마다 넘치도록 정중히 해야 할 것입니다.

    *참고서적: 예배학개론(정장복 저. Page 150-152, 1997), 성경대백과사전(정인찬 편)  

    김한길 목사 / 미 남침례 한인 총회, 세계 한인 기독교 이단대책 연합회 위원

    김한길  josephk999@gmail.com

    신자의 보장 

    하나님의 성회는 신자의 보장에 관하여 하나님의 성회 조례에 선언하였다(제 8조 1항)

    신자의 보장은 그리스도와의 생생한 관계에 좌우한다는 성서적인 가르침의 견지에서(요15:6),
    거룩한 삶으로의 성경의 부르심의 견지에서(히12:14, 벧전1:6),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책임이 사람에게 일부 있다고 하는 분명한 가르침의 견지에서(계22:19),
    잠시 믿던 사람이 타락할 수 있다는 사실의 견지에서(눅8:13),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한번 구원받은 사람이 그 구원을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고 하는 무조건적인 보장의 입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왜 이러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지 더욱 설명하고자 한다.

    신자의 보장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의 극단적인 입장의 중간에 서있다. 우리는 양쪽의 가르침에서 성서적인 요소를 받아들인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특권을 올바르게강조하는 반면 알미니안주의자는 사람의 자유의지와 책임 또한 올바르게 강조한다. 그러나 이 두 입장을 적절하게 이해하려면 그것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임의에 의해서 때묻지 않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특권을 믿으며 또한 사람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믿는다.

    하나님의 성회에 의해서 취해진 신자의 보장에 관한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4가지가 강조되어야 한다.

    1.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요3:16, 롬10:11-13, 벧후3:9)
    2. 구원은 믿음으로 받으며 유지된다.(롬3:28, 갈2:20-21, 엡2:8, 빌3:9, 히10:38, 벧전1:5)
    3. 계속적인 죄는 신자의 믿음에 해롭게 영향을 준다. (롬3:5-8, 고전3:1-3, 히3:12-14, 12:1, 요일1:8, 3:8)
    4. 신자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면 상실된다.(요17:12, 딤전4:1, 5:12,15, 히6:4-6, 10:26,27,38, 벧후2:20, 요일5:16)

    1.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구원 받기로 예정되었으며, 또 다른 사람은 멸망 받도록 예정되었는가?” 그리고 “누가 택함을 받은 자인가?” 이 두가지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답변은 복음의 메시지가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을 향하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명확해진다. 신약성경을 읽는 사람은 이 위대한 진리를 놓칠 수 없다.

    그러나 로마서 9-11장에서 신자의 구원에 있어서 사람의 자유의지가 배제되며 택함을 받은 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떠나서 완전히 그의 주권으로 행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 있다. 예를 들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내가 긍휼히 여길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9:11,13,15,16,18)

    그러나 이 구절을 선택에 관하여 가르치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볼때 사람의 의지가 선택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야곱은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선택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이 무엇을 할 것인지
    하나님이 미리 알고 계시다는 것에 근거한다. 이 진리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쓴 베드로의 편지에 나타나있다. 이 신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었다.(벧전1:1,2)

    이 진리를 또한 롬8:29에도 나타나 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기록했다. 하나님은 미리 자비를 보일 조건을 정하셨다. 그리고 그의 미리 아시는 지식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를 선택하신다.(엡1:4). 이와같이 하나님은 그의 주권 안에서 구원의 계획을 제공하셨으며 이에 따라서 모든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있다. 이 계획안에서 사람의 의지가 고려된다. 구원은 누구든지 원하는 자에게 열려 있다.

    2.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 받으며 유지된다.

    성경은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명백히 말씀한다.(엡2:8)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한다. (합10:38, 롬1:17, 갈3:11, 히2:4) 신자의 구원은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의 행위로 말미암아 받
    아들여짐과 같이 신자의 구원은 의로운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의 생활로 인하여 유지된다.
    크리스찬이 되는 것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 이것은 강조되어야 한다. 죄인이 자기가 행한 어떤 선한 일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경우는 없다. 그는 전적으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는다.

    믿음으로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대신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믿음으로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 앞에 맡기며, 그리스도를 본다. 자신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을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신분을 깨닫는다.(빌3:9) 그는 믿음을 통해서 자신이 받아들여진 것을 알고, 이러한 지식은 그에게 기쁨과 평안을 준다. 그러나 신자의 상태는 그의 신분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그는 믿음 때문에 안전하게 서있다.
    그의 신분은 그가 믿음으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그는 의로운 위치에 서 있으며 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었다.

    신자의 상태 혹은 신자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로 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성령과 협력하여 순종함으로써 얻어지는 점진적인 성화인 영적 성장과 관계가 있다.(롬6:12,13, 8:13, 골3:1-5, 벧후1:5-7) 성숙해 가는 과정 속에서 신자는 그의 승리 뿐만 아니라 실수를 통해서도 배워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보장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견고할 동안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믿음으로 지키심을 받기 때문이다.

    그의 영적 성장은 그의 안에 역사하고 계시는 성령께 대한 순종과 주의에 따라 달라진다. 완전을 향하여 성장하는 동안에 그는 여전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완전한 자로 간주된다. 자신을 적응시키는 과정 속에서도 그는 안전하며 그의 구원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신자의 보장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나 구원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 보증된다. 이 보장은 신자가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을 유지하는 한, 타락할 수도 있고 결점도 있는 신자에게 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3. 계속되는 죄는 신자의 믿음에 악영향을 준다.

    성경은 신자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를 지으며, 그가 죄를 지었을 때 그가 의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요일1:8,9, 2:1) 이와는 달리 크리스찬이 죄악의 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즉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한 그는 습관적으로 죄를 범할 수가 없다. (요일3;8,9 여기서 헬라어 시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죄를 짓는 것은 마귀의 일이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누구든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며 습관적으로 죄 짓기를 계속하지 아니한다. 그는 마귀의 자녀가 하는 식으로 죄짓는 것을 계속할 수 없다. 그 대신에 크리스찬은 계속적인 자기의 믿음에 악영향을 주는 것을 인정하고, 죄를 내려놓고 영적으로 자라야 한다.

    이것은 크리스찬이 죄를 범할 수 있고 여전히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많은 사람의 첫 번째 반응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염려, 교만, 시기, 쓴뿌리 등은 공통적으로 범하는 과오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죄를 범하는 신자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더욱이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죄 없는 완전을 요구하신다고 주장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신분이 그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면 믿음에 의해서 그에게 씌워진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것인가? 만일에 사람이 흠 없는 생활을 유지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면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얻은 것이 된다!
    그리고 또한 사람이 흠 없어야만 하나님이 받으신다면 크리스찬의 삶은 바울이 롬8:1에서 주장한 것처럼 정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계속적으로 철저한 자기 분석과 참회를 행하며, 두려움과 정죄로 가득 차 있으며 구원 받을 수 있다는 확신과 기쁨이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롬5:9-11을 보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비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우리는 위하여 영광에 이르는 모든 길을 제공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 이러한 확신은 그 안에서 우리로 기뻐하게 한다.)

    관련된 질문으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순간에 죄를 범한 신자에게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할 수 없으며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신자는 구원을 잃게 될 것이며 영원한 파멸에 이를 것이라고 가르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낙심되는 일인가!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안과 밖을 들락날락하면서 회전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안전하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그러나 크리스찬이 범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강조되어 말해져야 한다. 옛날의 죄를 계속해서 범할 수는 없다.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신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며, 그에게는 이전 것은 지나갔으며 새것이 되었다.(고후5:17)

    이와같이 이제 죄를 범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전의 삶은 과거의 것이며, 안에 잠재된 힘이며 다스려져야 하며, 새로운 신분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롬6:11) 이전의 삶은 과거의 것이며, 안에 잠재된 힘이며 다스려져야 하며, 새로운 신분에 의해서 죽은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롬6:11) 이전의 습관과 행실이었던 것은 이제 부자연스러우며 우리의 새로운 마음에 반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죄짓기를 계속하지 아니한다)”고 사도 요한은 말했다. 즉, 죄는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낯선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된 새로운 피조물은 죄를 짓지 아니한다. 그러나 옛것이 잠시 우발적으로 우세하게 될 때 새 피조물은 이 부자연스러운 침입에 대항하여 싸우게 되는데 즉시 의지할 것은 그리스도이시다.

    죄를 범한 신자가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면 그는 자신의 영혼이 멸망하게 되었다는 실망을 안고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미쁘시고,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보혜사를 모시고 있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확신을 가지고 돌아온다. 이와같이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특권을 사용하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자신의 신분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신자의 자유의지와 책임을 강조하는 것도 필연적이다. 신자는 자유의지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계속해서 자유의지를 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 믿음을 계속 유지 하는 것은 신자의 책임이다.

    또한 신자는 죄에 대하여 가벼운 자세를 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가로 사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롬6:1)하며 바울은 묻는다. 그 대답은 단호하게 부정적이다. 바울은 지속적인 죄가 신자의 믿음에 악한 영향을 준다는 것과 믿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알았으며 또한 가르쳤다.

    지속적인 죄는 주제넘게 하며, 고자세가 되게 하며 또한 반역의 증거이다.(민15:30,31) 번역은 의지나 믿음의 순종에 반대되는 것이다. 신자는 반드시 “돌아보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히12:15) 항상 주의해야 한다. 성경의 권면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고후13:5)는 것이다.
    왜 이러한 경고와 우려를 하고 있는가? 이렇게 반복되는 경고들은 믿음을 잃게 되면 영원한 영혼의 파멸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신자의 구원은 그의 의로운 행동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그의 의로운 행동으로 유지되는 것도 아닌 것이 사실인 반면 신자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처럼 또한 믿지 않음으로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것도 똑같이 사실이다.
    죄와 불신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죄는 믿음을 위태롭게 하며, 믿음을 잃는 것은 자신의 신분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히3:12-14 은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형제들에게 불신에 대하여 경고하였는데 이 불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는 불신의 원인으로서 죄의 유혹을 언급하였으며,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만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할 자가 될 것이라고 상기시켰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믿음에 의해서이다. 믿음을 제거하면 거기에는 더 이상 서 있을 곳이 없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신자들에게 “삼가 혹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지 않도록”(히3:12) 훈계하는 이유이다.

    4. 구원은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상실될 수 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쉽게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롬10:21을 보라. 여기서 바울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나 적용할 수 있는 원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신자가 성령의 계속적인 점검을 무시하고 예수를 그의 구세주로 모시기를 거부하는 곳에까지 이르면 그는 구원을 상실하게 된다.

    잠시동안 믿다가 유혹이 올 때 배반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눅8:13)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약한 형제가 실족하는 것은 가능하다. (고전8:11) 생명책에 기록되었던 이름이 그 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것은 가능하다.(계22:19)
    한 사람이 그의 구세주이신 예수를 이미 배반하였는지 판단하는 것은 항상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에 관한 판단은 전지하신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좋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사실은 확실할 수 있다. 즉 만일 하나님이 탕자를 돌아오게 하시는 그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직도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아니하셨는데도 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그 사람을 삭제해 버린다.

    성경은 구원을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성령의 탄식에 응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소망을 끊임없이 제의하고 있다. 예수의 초청은 자격을 따지지 않는다.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말씀하실 때 이것은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이다.

    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10:13)고 성경이 말씀하실 때도 모든 사람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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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부터 유튜브가 회사의 검색 로고 옆에 무지개 하트 모양의 로고를 함께 올려놓아 이를 클릭하면 #Proud to be 라고 하는 동성애 홍보 채널로 연결되게 해 놓았다.


    “동성애자가 된 것에 긍지를 느낀다 (Proud to be a LGBT)”라는 의미를 가진 이 채널에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여러 나라의 동성애자들이 동성애자로서 자신이 느끼는 ‘자부심’에 대해 설명하는 영상들이 올라오고 있다.


    세계 최대의 동영상 서비스 업체인 유튜브가 본격적으로 동성애를 홍보하고 나선 것이다.



    어제부터 유튜브 로고 옆에 동성애를 홍보하는 무지개 하트 로고를 함께 올려놓았다.


    무지개 빛깔의 로고를 클릭하면 Proud to be라고 하는 동성애 홍보 채널로 연결된다.




     이 채널엔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동성애자들이 동성애자로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자부심(?)'을 설명하는 동영상들이 올라와 있다.



    세계 최대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 업체인 유튜브가 동성애 홍보에 나선 것이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영적 분별력의 중요성!

     

     

     

    얼마전부터 소위 ‘부흥의 물결’ 이라는 명제 하에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치유사역’, ‘입신’, ‘금가루현상’, 죽은 사람 수십 명을 살렸다’ ‘하늘에서 금발의 미녀 천사가 (싸구려)보석을 떨어트렸다’ ‘초자연적 능력’, 등등…인간이 상상할 없는 이적과 기사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사실을 바라보는 이방인들이야 성경을 모르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성경을 신앙 생활의(Cannon)잣대로 알고 믿는 성도 중에서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단이다, 아니다’로 의견이 분분함도 있다.

     

    필자 역시 처음에 인터넷에 올려진 이런 말들과 자료들을 접했을 , 혹시, 19세기에 일어났던 뜨거운 부흥의 불길이런가?…사실, 기대하는 마음과 긍정적 시각으로 사실을 바라보려고 했다. 왜냐하면, 성경에도 초자연적인 이적과 기사의 사례는 얼마든지 있고, 19세기 초에 일어났던 아주사 거리의 부흥이 우리 세대에도 일어나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아주사 거리의 부흥 자체를 이단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현대, 세계를 휩쓸고 있는 부흥의 불길이란 것에 무언가 예감이 석연치가 않은 느낌이 있다.  이상한 것은 그들대로 뭉쳐서 예언이란 이름으로 서로서로 올려주기도 하고 세워주는가 하면 성경에도 없는 ‘입신’이란 이름 아래 천국과 지옥, 예수님의 심장을 제집 안방 드나들 듯이…드나들고, 각종 보석(싸구려)들을 천사가 떨어트렸다고도 하고… 심히 수상쩍은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음을 본다. 글쎄다, 그런 조잡한 일들이 과연 성서적이며 창조주 하나님이신 성령님의 은사(선물)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보고 느낀 것을 토대로 잠시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내가 지금까지 접한 동영상, 예언 , 입신상태의 , 치유사역, 금가루현상, 그리고 초자연적현상이라고 주장하는 것들, 등등…,이런 현상이 모두 성령님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사람들의 상태도 모두가 같다고 수는 없는 것같고, 다음 몇가지의 다른 부류로 분류해 수가 있다.

     

    1.       부와 명예를 갈구하는 마음이 앞서 신앙양심을 팔아먹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희대의 종교사깃꾼들(이런 류는 과거 박태선씨, 현대 전주의 윤율리아, 그리고 벤틀리나 외에 두드러진 다수의 지도자 )

     

    2. 다른 성도들보다는 자신이 뭔가 조금 하나님과 가깝고 신령하며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는 착각 내지, 신앙 교만이 들어있는 일반 성도 직분 자들

     

    3. ‘샤머니즘’적 신앙, (무당 종교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월등히 많음.) 이런 사람들이 몸에 병이 들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강한 육신의 소원이 있어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갈구하는 마음에 교회를 찾기는 했으나 당장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일반 목회자들은 무능해 보여서 그런 같고, 눈을 두리번 거리다가 신령하다고 자처하는 강사나 집회자들의 사단의 하수인에게 꼬드김을 당해 이리저리 따라다니는 어리석은 성도들

     

    4.자기 자신이 지식인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목사님들 중에도 말씀만 해석하고 말씀을 많이 아는 사람들은 어딘가 딱딱해 보이고 고리타분하다고 여기든 ,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현대판 바리새파라고 꼬드기는 말이 논리적으로 들리고 이에 더욱 높은 차원의 세계를 접하고 싶다고 느끼는 지식인들, 이런 사람들로 나눌 수가 있는 같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모두 그러하다고 수는 없겠지만, 지금까지 접하고 자료들에 의하면 이런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 것같고 이런 사람들의 배후에는 미혹의 영인 사탄이 실제로 신비주의 자들의 요구를 조금씩 충족시켜 주는 방식, 영계가 보이는 , 음성이 들리기도 하고, 금가루가 흩날리는 보이게도 하고 하여 그들의 영혼을 사냥질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성도들의 대처 방법

     

    1.하나님의 말씀은 가감하거나 사사로이 풀지 말아야한다는 성경 말씀의 원칙을 무시하지 (22:18_19, 벧후1:20 참조)

     

    2.이적과 기사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님을 성경이 말씀했으니 말씀에 따라서 반드시 영을 믿지 말고 말씀을 토대로 검증할 (14:1 참조)

     

    3.천국과 지옥도 성경에 있는 만큼만 믿고 이상 다른 이들의 입신체험을 성경권위 위에다 두지

     

    4.성령님의 사역을 제대로 이해 (14:26, 15:26, 고전12:3 ) 성령님의 사역에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이며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시요,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도와주시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각나게 하시고, 예수님의 길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며,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증거해 주시며, 예수 믿는 자들이 하나님 아들이 됨을 확신시켜 주시고 자녀 됨을 쳐주시는 사역, 마디로 성도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것이라고 수가 있다.

     

    적어도 이것이, 다른 모든 이적과 기사보다 우선순위라고 보아야 한다. 성령님께서 누군가에게 하늘의 비밀을 알려주시고 싶으시면 성경을 읽을 , 성경을 풀이할 , 뜨거운 감동으로 깨닫게 주신다. (2432 참조)

     

    사이비지도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은 ‘입신’이란 단어를 좋아하기도 하고 하늘과 지옥, 예수님의 심장, 그리고 땅을 제집 안방을 드나들 듯… 쉽게 왕래한다고 한다. 그들이 보았다고 하고 들었다고 하는 말들을 간증의 형태로 올려진 것을 읽어 , 예수님의 마음보다는 어떤 특정인의 모습과 어떤 특정 교회를 올려주고 키워 주고 세워주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체를 검증없이 모두 성령님의 역사로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울 사도가 안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해서 상태가 ‘입신’이다 라고 수도 없다.’입신’이란 단어 자체는 이방 잡종교에서도 사용해 내려오는 단어로서 구태여 성도들이 도입해서 상용해야 필요가 없다고 본다.

     

    우리가 모든 것보다 먼저 알아야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여기실 것마저 포기하셨고 인간의 모습을 입으시고 모진 십자가를 참아 내셨다. 장사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셨다. 후에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을 우리 성도들에게 보내어 주신 목적도 모두 인간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수님께서 만약 우리들의 꿈에나 혹은 비몽사몽 간에라도 나타나셔서 통곡하셨다면, 이유가 오직 사람들의 잃어진 영혼을 위해서요, 사람의 영혼을 전도하지 않는 게으름과 주의 종들의 시기질투로 말미암아 전도문이 가로막히는 것에 대한 탄식이어야만 한다. 천하보다 귀한 사람의 영혼구원보다 중요한 것은 없고, 이외에 어느 것도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의 눈에 눈물을 흘리시게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리고 설사 통곡하시는 주님을 환상에서나 비몽사몽 ( 역시 그런 체험이 있다!) 뵈었다고 하여도 이유로 인해서 자기 자신을 들어내는 선전도구로 활용하거나 다른 성도들보다 신령하다고 착각을 하거나, 그것으로 인하여 어떤 유익을 챙기려고 한다면 사람은 이미 주님께로부터 떨어진 자요 그런 영혼은 이미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전락된 상태일 뿐이라고 저는 믿는다!

     

    그런고로 우리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혹은 자기의 사욕을 위해서 신앙 양심을 팔아먹어서도 것이며, 무조건 모든 기적과 이사는 폐지되었다 주장을 해서도 안된다. 모든 이적과 기사가 검증없이 성령님의 역사라고 주장을 해서도 안된다고 저는 확신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고, 우리가 서로 힘을 합치되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합치고,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 자들을 바로 세워주는 일에 힘을 모두어야 하며 위에 세워진 교회, 하나님의 피로 주고 사신 하나님의 교회는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며 주인이 되심을 믿고, 주님의 청지기로서 서로 섬기며 봉사해야 함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성도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필요에 따라 어떤 이는 교사로, 어떤 이는 목사로, 어떤 이는 가르치는 자로, 어떤 이들은 사랑으로 섬기는 자로, 어떤 이는 봉사자로, 세우신 분이 성령님이시다. 모든 은사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분리되고 파괴되고 우위를 가리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과 서로 섬기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허락하셨음을 믿어야 한다.

     

    내가 신령하고, 내가 다니는 교회, 내가 섬기는 목사님만이 하나님의 특별한 자요, 신령한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이미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요, 사탄이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영혼들임을 명심해야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면, 하나님의 뜻대로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 인위적인 방법이나 어떤 특정인에게 국한되고, 어떤 특정교회에 국한된다고 하는 생각으로 신령한 사람을 따라 다니는 습관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대할 , 이런 사기극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승리할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딤전 4: 1)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 2: 15)

     

     

        : 별똥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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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행복의 기회를 발견할 줄 아는
        긍정적 발상의 주인공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말이 많고
        성미가 고약했다.

        사람들은 묻기를 "왜 그런 악처와 같이 사느냐"
        고 하니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마(馬)술에 뛰어나고자 하는 사람은 난폭한 말만 골라서 타지.
        난폭한 말을 익숙히 다루면 딴 말을 탈 때
        매우 수월하니까말이야.

        내가 그 여자의 성격을 참고 견디어 낸다면
        천하에 다루기 어려운 사람은 없겠지."

        또 한번은 부인의 끊임없는 잔소리를 어떻게
        견디느냐고 사람들이 물었다.

        그랬더니 소크라테스는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도 귀에 익으면
        괴로울 거야 없지"
        라고 대답하며 웃더란다

        어느 날은 부인이 소크라테스에게 잔소리를 퍼붓다가
        머리 위에 물 한 바가지까지 휙 끼얹었다.
        그래도 소크라테스는 태연히 말했다고한다.

        "천둥이 친 다음에는 큰비가 내리는 법이지."

        이것이 생각의 힘이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 이면에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생각을 긍정적으로 다스리면
        감정은 그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

      잡고 있는것이 많으면 손이 아프고 들고 있는것이 많으면 팔이 아픕니다.... 이고 있는것이 많으면 목이 아프고 지고 있는것이 많으면 어깨가 아픕니다..... 보고 있는것이 많으면 눈이 아프고 생각하는 것이 많으면 머리가 아픕니다... 품고 있는것이 많으면 가슴이 아픕니다.~~~ 내려 놓으세요. 놓아 버리세요 우리가 아픈것은 저러한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펌글입니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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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장 십자가의 승리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철학과 역사 등 학문들은 어떻게 하면 세상을 바르게 할까에 대하여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수세기에 걸친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상은 이 모양인가? 오늘의 고통은 전적으로 인간들의 조건과 세상의 조건이 안고 있는 난제를 심오한 방식으로 대면해 본적이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근본적인 문제를 성경만이 제기하고 그 해답을 줄 수 있는 질문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이 세상의 삶은 마치 어떤 무장한 강한 자가 죄인을 지배하는 큰 궁정과 같다. 주님께서는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11:22). 바로 그것이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에 대한 주님 자신의 묘사이다. 주님은 자신의 포악한 권세로 사람들을 꼼작 못하게 지키고 있는 강하게 무장한마귀를 대적하러 오셨다.

     

    - 오늘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온 세상을 진실로 고통케 한 자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이 세상의 신이 사람들을 어두움에 묶어 두고 있다(고후4:3-4) (2:1, 6:12) (요일5:18-19). 우리는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어야 했다. 카이제르나 무솔리니나 히틀러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만들었나? 세상이 무섭고 처참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의 원인은 사람이 아니라 마귀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6:12). 정치가나 철학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인간 본성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들을 조사하고 인간 본성을 이해하려 한다.

     

    - 영적 세계는 두 부류로 나뉜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계시고 또 한편에는 마귀와 그 세력들이 있다. 마귀는 천사적인 존재로서 하나님께 창조 받아 사람보다 먼저 존재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완전하게 만드셨으나 자기의 교만과 무례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여 배역하여 하나님과 동등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모반하였고 여러 천사들을 설득하여 자기와 같은 보조를 취하게 했다. 이렇게 하여 마귀와 타락한 천사들이 생겼고 그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넘어 뜨릴까 하는 생각으로 사로 잡혀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마귀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그 이름과 그 영광을 손상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시키는 것임을 알았고 그래서 사람에게 다가와 시험을 했다. 사람은 타락하여 죄의 상태로 빠지게 되고 온 우주를 끌고 죄 가운데로 들어간 것이다.

     

    - 마귀의 시험과 유혹에 청종한 인간은 마귀의 노예가 되었다. 그 때문에 마귀를 공중 권세 잡은 자”,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부른다. 인류 전체는 마귀의 노예가 되었다. 성경은 마귀의 권능이 엄청나다고 말한다. 구약의 아브라함과 족장들, 선지자들과 경건한 사람들이 다 마귀 앞에 거꾸러졌다. 아담은 완전한 사람이었음에도 마귀에게 졌고 마귀는 너무나 교활하고 강하다.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3:10)라고 했다.

     

    - 마귀는 우선적으로 이지를 통해 하나님을 미워하도록 설득하고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한다. 불신앙이라 해서 손해될 것 하나도 없다. 복음은 언제나 그렇게 반대를 받아 왔다. 마귀는 대부분의 인류의 삶을 지배한다(7:13-14).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도 믿지 않았고 아들의 속죄의 죽음도 믿지 않았으며 그들은 그것을 조롱했으며 미련한 것이라고 말했다. 마귀는 그런 사람의 눈에 가리개를 하고 마귀가 원하는 것만 보도록 한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은 진리를 보는 것이다. 마귀는 사람의 생각을 통제할 뿐만 아니라 소원도 통제한다.

    그리고 의지까지 지배하여 삶 전체를 지배하고 두려움을 조성한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음에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라”(2:14-15).

     

    - 왜 인류는 죽음을 두려워 하는가? 그들은 죽은 다음에는 심판이 있고 율법이 우리 모두를 저주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자기들은 이 모든 것들을 믿지 않는 것처럼 점잖을 빼지만 할 수만 있으면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한다. 이교도들은 태양과 달과 별들을 무서워하고 자기들이 만든 신상을 두려워한다. 마귀가 그러한 삶을 산출해 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과 낙원을 산출하신다. 마귀는 혼란을 산출하고 하나님의 질서를 혼돈으로 바꾼다. 인간의 생각과 마음과 의지를 장악하여 우리가 친숙해 있는 혼돈으로 끌고 간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 성, 마귀가 지키는 궁성에서 빠져 나갈 수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강한 자가 필요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를 멸하러 오셨다.

     

    - 우리 주님께서 사람들 뒤에 있는 이 권세와 사력을 다해 싸우시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서사시이며 얼마나 훌륭한 싸움이며 얼마나 대단한 용전인가? 예수께서 태어나기 전부터 마귀는 그를 없애 버리려고 했으며 그리고 그 싸움은 계속되었다. 헤롯의 칙령, 광야에서 사십 주야를 시험 받으시고 귀신들려 고생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어떠한 싸움을 했는지 살펴보라.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처럼 땅에 떨어지던 그 모습, 주님은 원수를 진정으로 싸워 이길 수 있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순간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아셨던 것이다. 십자가는 끝까지 저항하고 덤벼드는 마귀를 대항한 종결된 싸움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일어난 일은 이 세상이 심판 받는 것이었다(12:31-33).

     

    -여러분은 사람들 뒤에 마귀가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 나사렛 예수의 범죄가 무엇이었는가? 그가 누구에게 해를 끼쳤는가? 그의 가르침과 이적에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는 선을 행하러 오셨고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다. 그는 어떤 대접을 받으셨는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혐오와 조롱과 모독적인 행동을 보라. 그들의 신성모독과 조롱을 보면 그것은 사람 속에 역사하는 마귀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 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끓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27:29-31)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27:39-44). 예수님은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셨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였다(13:53).

     

    - 여러분도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고 언제나 선을 행하며 다니던 이러한 사람을 미워하며 조롱하며 야유하며 침을 뱉겠는가? 아니면 이와 같은 분을 대접하겠는가?

    주님의 죽음은 죽음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사람들 속에서 이렇게 끝이 났다. 마귀는 그를 죽일 수만 있다면 그것은 끝장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야말로 마귀의 무서운 오산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스스로 파멸시키고 자신의 궁극적인 운명을 가져온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사도는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참으로 약해 보였지만 마귀와 그 권세를 없이하시고 부끄럽게 하셨으며 그것들을 이기셨다고 말한다. 마귀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하나님의 능력과 더 이상 접촉하지 아니하는 사람 외에는 어떠한 권세도 부릴 수가 없다. 마귀를 제어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하나님과 접촉에서 벗어나는 순간 마귀에게 사로잡히게 되며 우리는 마귀의 무능한 도구가 되며 그의 집에 잇는 소유물처럼 그의 나라 안에서 희생물이 된다.

     

    - 사람을 지옥과 마귀의 손아귀에서 건져낼 수 있는 오직 유일한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뿐이다. 그러나 어떻게 내가 그 능력을 가질 수 있는가?

    먼저 하나님과 화해해야 한다. 골로새서에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의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다음에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두 가지 일이 함께 한다. 주님은 바로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계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에 대한 벌책으로 형벌을 담당하셨으므로 우리가 그를 믿으면 우리는 형벌로부터 벗어나고 정죄에서 자유로워진다. 우리는 하나님께 화해하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마귀와 그의 군대로부터 우리를 건져내고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긴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이 바로 그 일이다. 마귀는 자기가 그리스도를 멸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계셨던 것이다.

     

    -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속에 들어오고 우리는 거듭나서 새 본성을 받고 새 사람들이 되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고 그리스도의 임재가 우리를 돕기 위해 항상 우리 앞에 가까이 있다. 아마도 마귀가 우리를 두렵게 만들 수는 있을 것이나 그러나 마귀는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 이제 강한 자보다 더 강한 자가 온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마귀를 이기셨다.

    십자가가 있기까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제외하고 온 세상나라를 마귀가 통제했었다. 십자가의 순간부터 이방인들이 믿기 시작하였고 하나님의 나라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늘로 올라가셔서 성령을 내려 보내신 순간 복음은 모든 곳에서 전파되었다. 이방인들이요 이교도들이었고 무지했으며 죄 가운데서 살았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이끌려져 왔고 마귀의 권세에서 풀려났다.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16) 그 능력은 십자가에서 발휘되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본래 사람과 우주를 타락시켰던 궁극적인 원수인 마귀를 파하셨고 마귀는 사슬에 묶였다. 마귀는 짐승들과 그 모든 거짓선지자들과 함께 불못에 던지움을 당할 것이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저 유명한 정복자를를 보는가?

     

    모든 것을 이긴 예수

    위를 향하여 진군하네

    능력의 불에 휩싸여

    죄악의 땅은 더 이상 주를 반대할 수 없고

    지옥은 당신의 말씀에 기가 꺾이네

    주의 큰 이름이 너무 높아

    모든 여우들 두려움에 움츠리네

    주께서 가까이 오심을 알고 모든

    피조물들이 공포에 떠네 - 월리암 월리암스 -

     

    출처: 정교도아카데미/김영희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동영상

    M.Minutes 

     

      

     

      M. BIG BIG WORLD 

     

     

       

     

     천문산 천문동

     

    여령.여해  이정혜 

     

     

    산이 좋아

    산으로 시집가서

    산을 낳아

    산을 키우며

    산에 살다

    산에 잠든 산  

     

     

    전령 같은  

    구백구십아홉

    계단 이르면

     하늘오르고

    지상 내리는 플랫 홈

    천문동이

    가슴으로 안기고

     

    장엄한 산길을  열다가

    깊은 자연속에

    묻힌 영혼과

     

    풍진 세월 속을 견디어 온

    영원한 대자연 

    대(代)물림 위한

     사대봉제사 

     제막 울리는

    천문산사 심오한 북소리에

     

    온가득 에워 쌓이는

    안개 향 사이로 넘나드는

    온갖 미물들이

     

     문산 깊은 골짜기

    푸른 심연을 흔든다

     

         -이정혜의 지구촌 대자연서사시-중에서   

     

     

     

     

    천문산 천문동

    귀곡잔도

     

     

     

     

     유리잔도

     

     천문산 천문동을 중심한 12개의 에스카레이트

    대협곡 

     

     

     

     

    천자산 풍경구

    천하 제일교

    아바타 촬영지

     

     

     

     

     

    어필봉

     

    백룡 엘리베이터

    황룡동굴

     

     

    한화180억에 보험 든 종류석 정해신침

    보봉호수

    두꺼비 바위

     

    십리계곡 꼬마 열차

    심마니 바위

    세자매봉오리

    금편계곡

     

    황석채

     

     

     

    천문호선쑈(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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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는 4월 시리아 Palmyra 지역에 있던 바알의 사당이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과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세워질 예정이다. 정확히 말하면 바알 사당의 정문인 48피트 높이의 아치가 세워진다.


    The Institute of Digital Archaeology가 이를 주도하고 있으며 이 두 개의 아치 건물들은 내달 열리게 되는 유네스코의 세계 유산 주간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할 예정이다.


    이 아치 건물들은 그야말로 바알사당의 출입구(portal)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출입하는 문인 것인가?


    바알은 Bel이라고도 알려진 고대 바벨론 종교의 주신이다. 브리트니카 백과 사전에 의하면 말둑(Marduk)이 바벨론의 “최고(대장) 신”인데, 이 말둑이 바로 “Bel” 혹은 “주(Lord)”로 불렸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바알을 주신으로 모시는 바벨론이 아카디아어로 “신의 문” 또는 “신에게 다가가는 입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고대 바벨론의 주신인 바알에게로 나아가는 “출입문(gateway or portal)”이 다음 달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한 가운데 세워진다는 것이다. 조금 소름끼치는 상황이 아닌가?




    5층 규모의 바알 사단의 아치(출입구)가 오는 4월 타임스퀘어 광장에 세워진다는 사실이 초현실적 상황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실제로 일어날 일이다. 그리고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일을 추진하고 있는 Digital Archaeology 재단이 전 세계 주요 도시 수 백 곳에 바로 이 바알의 사당(아치)을 짓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 “스타케이트”에 등장할 만한 일이 현실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기사원문 >> Will A Gateway Be Opened When The Arch From The Temple Of Baal Is Reconstructed In Times Square?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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