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기 전날, 미군이 비행기를 통해서 공중에 경고의 쪽지를 뿌렸습니다. ‘내일 오전 10시까지 이 도시를 벗어나 할 수만 있으면 멀리 떠나시오.’


이 경고의 쪽지를 본 사람들 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마 무슨 일이 있을라고?’ 하고는 그냥 자기 집에 안주하거나 직장에 나가서 전날과 똑같이 일을 했습니다.


반면에 한 무리의 사람들은 혹시나 해서 경고의 쪽지대로 새벽 일찍 일어나 짐을 꾸려서 히로시마를 벗어나 수십 리 먼 곳까지 떠나갔습니다.


해가 뜨고 사람들은 일터로 나가고 오전 10시경이 되었을 때, 먼 곳 하늘에서부터 미군 비행기가 날아오더니 무엇인가 공중에 떨어뜨리고는 사라졌습니다.


잠시 후에 히로시마 상공에 폭발음과 함께 초대형 구름기둥이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그 도시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숨 한번 제대로 못 쉬어 보고 순식간에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경고의 메시지를 듣지 않고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33장 1-6절까지 보면

"하나님이 선지자 에스겔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칼이 땅에 임할 때 파수꾼으로 세움 받은 자는 나팔을 불어 백성에게 경고하라 만약에 경고의 나팔소리를 듣고도 경비하지 않으면 칼이 임할 때 그 피가 자기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재림을 앞두고 경고의 나팔을 부십니다. 먼저는 자연재해를 통해서 경고의 나팔을 부시고 그 다음은 성경 말씀을 가지고 외치는 주의 종들을 통해서 경고의 나팔을 불고 계십니다.


오늘 이 말세지말에 지구촌에 사는 온 인류에게 외치는 경고의 음성, 경고의 나팔소리를 같이 듣는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징조를 봐야 합니다.


본문말씀 3절에 보면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자연적인 재앙은 폭우와 홍수의 재난, 지진과 해일의 재난, 가뭄과 굶주림의 재난, 질병과 죽음의 재난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천명, 수만명, 수십만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때 주님이 경고하는 경고의 나팔은 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종말의 징조를 보라, 재난을 보라는 것이다.


둘째,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줄 알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절에 보면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밤에 찾아오는 도둑처럼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고 들려지는 재앙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다가 어느 날 순식간에 예수님의 재림이 닥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나의 재림이 가까운 줄 알라.”


셋째, 믿음으로 무장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6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고 말씀합니다. 또 8절에 보면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는 성도들은 믿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시간마다 분초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장 40절에 보면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두 사람이 같이 밭에 있다는 말씀과 두 여자가 똑같이 한자리에 앉아서 맷돌질을 하다가 한 사람은 휴거되어서 올라가고 한사람은 땅에 남는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같은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 중에 믿음을 준비하고 깨어있는 사람은 들림을 받고, 영적으로 잠자는 사람들과 예수님이 구주임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들림 받지 못하고 땅에 남아서 무서운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는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상징이 아니라, 곧 현실로 나타날 사건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고 깨어서 전도하고 봉사하면서 주의 재림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 동아교회 강창훈 목사님 말씀

       


 


 

[맥아더 장군의 자녀를 위한 기도문]

 

 

내게 이런 자녀를 주옵소서

 

약할 때에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여유와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담대성을 가지고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자녀를 내게 주옵소서.

 

 

 

생각해야 할 때에 고집하지 말게 하시고

 

주를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이

 

지식의 기초임을 아는 자녀를 주옵소서.

 

 

 

원하옵나니 그를

 

평탄하고 안이한 길로 인도하지 마옵시고

 

고난과 도전에 직면하여

 

분투 항거할 줄 알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폭풍우 속에서 용감히 싸울 줄 알고

 

패자를 관용할 줄 알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그 마음이 깨끗하고

 

그 목표가 높은 자녀를

 

남을 정복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자녀를

 

장래를 바라봄과 동시에 지난날을 잊지 않는 자녀를

 

내게 주옵소서.

 

 

이런 것들을 허락하신 다음 이에 더하여

 

내 자녀에게 유우머를 알게 하시고

 

생을 엄숙하게 살아감과 동시에

 

즐길 줄 알게 하옵소서.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게 하시고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시사

 

참된 위대성은 소박함에 있음을 알게 하시고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으며

 

참된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명심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어느날 나 아버지는

 

내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아멘!

 

   글쓴이 : 東素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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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현재인구는 852만명.

1948년 이스라엘 독립 당시 81만명에 불과하였으나,

2016년에는 852만명으로 10배 증가하였다.

세계에서 99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가 되었다.


이스라엘에 갔었을 때 네탄야후 총리가

인구 800만이 넘은 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모습을

TV에서 본적이 있다.


인구는 유대인이 638만명(75%),

팔레스타인이 177만명(21%),

기타 37만명(4.4%)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 세계에는 1400만명의 유대인이 있는데

그중 43%가 현재 이스라엘에 살고 있다?.

 


<2016년 5월 기준 이스라엘 인구 현황>

1948년부터 2016년까지 23년씩 3줄이다.


Year
Population
Year
Population
Year
Population
1948

806,000

1971

3,121,000

1994

5,472,000

1949

1,174,000

1972

3,225,000

1995

5,619,000

1950

1,370,000

1973

3,338,000

1996

5,689,000

1951

1,578,000

1974

3,422,000

1997

5,987,000

1952

1,630,000

1975

3,493,000

1998

6,038,000

1953

1,669,000

1976

3,575,000

1999

6,200,000

1954

1,718,000

1977

3,653,000

2000

6,289,000

1955

1,789,000

1978

3,738,000

2001

6,460,000

1956

1,872,000

1979

3,836,000

2002

6,600,000

1957

1,976,000

1980

3,922,000

2003

6,600,000

1958

2,032,000

1981

3,978,000

2004

6,780,000

1959

2,089,000

1982

4,064,000

2005

6,930,000

1960

2,150,000

1983

4,119,000

2006

7,116,000

1961

2,234,000

1984

4,200,000

2007

7,244,000

1962

2,332,000

1985

4,266,000

2008

7,337,000

1963

2,430,000

1986

4,331,000

2009

7,552,000

1964

2,526,000

1987

4,407,000

2010

7,695,000

1965

2,598,000

1988

4,477,000

2011

7,746,000

1966

2,657,000

1989

4,560,000

2012

7,836,000

1967

2,776,000

1990

4,822,000

2013

8,081,000

1968

2,841,000

1991

5,059,000

2014

8,345,000

1969

2,930,000

1992

5,196,000

2015

8,462,000

1970

3,022,000

1993

5,328,000

2016

8,522,000

 

<10년 주기 이민현황>                        <종교 현황>

1948-1959

960,000

1960-1969

374,000

1970-1979

346,000

1980-1989

154,000

1990-1999

956,300

2000-2009

268,300

2010-2013

66,900
 

유대인

75%

무슬림

17.5%

기독교

2.0%

드르즈

1.6%

기타

3.9%

 


1910년부터 2005년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의 종교분포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이전에도

많은 유대교인과 기독교인이 살았다.

무슬림은 오히려 가장 소수 종교였다.


독립 이후 일자리를 찾아 온 무슬림의 증가율도 높으나

기독교인의 비율은 2% 수준으로 1910년경과 비슷하다?.


거의 100년간 변화가 없는데

유대인은 이방인의 시대가 끝나야 돌아온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마 24:32~34)?

 

인구 중 73.6%가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세대다.

그런데 몇 %가 돌아가셔야

'이 세대가 지나가는' 조건이 만족될 수 있을까?

80%?  90%? 100%

 

그런데 본문에 조건이 기록되었다.

이? 세대가 다 지나간 후(100% 돌아가심)가 아니라

지나가기 전에(일부 살아 계신 상태) 

이 일이 다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가기 전에 이루어지므로 100%는 아니다.

그런데 지금 90% 이상이 돌아가신 상태다.


이스라엘 인구에서 70세 이상은 7.6%

1948년 이전(69세)에 태어난 사람은 10%가 안된다.


이미 90%이상이 돌아가셔서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일어나리라

예언이 성취될 조건이 만족되었다.


 

남은 분들이 다 돌아가시기 전에

이 일이(휴거와 대환란) 완료되어야 하기에

이 시점에서 일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때가 문 앞에 와 있다.

https://populationpyramid.net/israel/2016/

 

출처: 카이로스 / ars

슬픈 여인 라헬

 

 낙엽은 떨어지고 나무는 죽어서 썩어지고 모든 생물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도 누가 죽으면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어디로 돌아갔단 말입니까?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입니까? 우리에게 영혼이 없다면 흙으로 돌아가겠지만 인생은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그 불어넣으신 숨결로 살게 하셨으니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인생의 해답이요, 목적이요, 길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 하게 붙잡습니다. 돌아가는 길을 알지 못 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징조를 보이셨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마 24:32, 막 13:28).” 지혜로운 자는 징조로 깨달을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뿐이겠습니까? 날마다 저녁이 되면 핏빛 같은 저녁노을, 해마다 가을이 되면 타오르는 붉은 단풍이 마지막 심판의 날을 말해 주는 징조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야곱은 돌아가야 합니다. 외삼촌 라반의 아들들의 불평의 소리와 라반의 안색이 야곱이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한 징조입니다. 그런 징조가 없었다면 야곱은 평생 라반의 집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라반의 집에 먹혀 이름조차 없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약대들에게 태우고 그 얻은바 모든 짐승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얻은 짐승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 아비 이삭에게로 가려할쌔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 아비의 드라빔을 도적질하고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고하지 않고 가만히 떠났더라.(창31:18-21)”

  그런데 그들은 몰래 떠났습니다. 라헬은 아비 라반의 우상 드라빔을 훔치고 야곱은 라반에게 알리지 않고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사흘 뒤에야 이를 알게 된 라반은 그 형제를 거느리고 칠일을 뒤쫓아 마침내 요단강 동편 길르앗 산에서 야곱일행에게 이르렀습니다. 마치 바로 왕이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마치 세상이, 마귀가 성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 하게 붙잡고자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밤에 라반의 꿈에 현몽하셔서 라반으로 하여금 야곱에게 손을 대지 못 하게 금하셨습니다. 홍해 바다에 애굽군대를 수장하신 하나님께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 하게 하시는(요일 5:18)’ 하나님께서 보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받은 라반은 야곱에게 ‘네가 너의 아비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좋은데 어찌하여 내 드라빔을 훔쳐갔느냐’고 말합니다. 라헬이 드라빔을 훔친 것을 까맣게 모르는 야곱은 누구든지 드라빔을 훔친 자는 죽임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라반은 야곱 가족의 장막을 뒤졌으나 라헬이 약대안장 밑에 깔고 앉은 드라빔은 끝내 찾아내지 못 합니다. 야곱은 드라빔을 찾아내지 못 한 라반을 거꾸로 질책합니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 사년,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육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 번이나 변역하셨으니,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 하셨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창31:41-42)” 두 사람은 돌을 세우고 불가침(不可侵) 맹약을 합니다. 그리고 라반은 딸들과 외손주들에게 입 맞추고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야곱과 야곱의 가족을 지키셨습니다. 그러나 라헬이 아비의 우상 드라빔을 훔쳐서 가지고 간 것도 지키신 것일까요? 드라빔을 숨긴 채, 우상을 품은 채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셨을까요?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는 자는 이 세상의 아무리 아까운 것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야곱의 입으로 ‘누구든지 드라빔을 훔친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한 대로 라헬은 아버지 이삭의 집으로 가는 도중 베들레헴 길에서 베냐민을 낳고 죽게 됩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혹시 나에게도 버리지 못 한 드라빔이 있을까 돌아 보아집니다.

담배를 즐기는 여학생들(어느 목사님의 간증)

 

 

어느 가난한 목사님이 학교에
가까운 지하실에 월세를 내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지하 예배당 입구 계단에
아침, 저녁으로 침이 하얗게 깔려있고,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이상하다 싶어 몰래 숨어서 지켜보았습니다.
이웃에 있는 여자 중, 고등학교의 이탈학생인
어린 담배꾼들의 소행이었습니다.
교회 계단 밑 후미진 곳에서 등교 전후, 점심 때,
하교 때 아주 조용하고 신속하게 떼거리로 몰려와서
담배를 피우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야단 칠 생각을 하다가
여학생들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찾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 저것 궁리하다가
기도하는 중에 햇볕정책으로 접근하기로 했습니다.

그날부터 목사님은 아무 말 없이
여학생들 몰래 담배꽁초를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려운 일은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면서
뱉어놓은 침을 닦는 일이었습니다.
“뱉어도 이렇게 많은 침을 뱉을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바닥이 하얗게 침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그래! 이 애들을 교회에 보내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모님에게 귤 한 박스를 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음 날 담임목사는 귤을 예쁜 접시에 담아 내놓고
옆에다 재떨이 대용품으로 커다란 스텐리스
그릇에 물을 잔잔하게 부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침 뱉을 두루마리 휴지와
큰 쓰레기통을 가져다 놓고 이런 글을 써 붙였습니다.
“여러분, 환영합니다.
이 계단에 온 분들은 이미 우리교회 식구들입니다.
편히 쉬었다 가십시오,
이 귤도 여러분 것입니다.
먹고 남는 것은 가져가셔서 친구들과 나눠드세요.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목사가,,,”

목사님은 사모님에게 계속 먹을 것을 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사모님은 가난한 지하 교회가 무슨 돈이 있느냐고,
그리고 그것을 어디다 쓰려고 하느냐고
불평했지만, 워낙 목사님이 간곡히 부탁하니
거절 할 수가 없어 계속 공급해 주셨습니다.
목사님은 매일 매일 과일이나 사탕 등을 계단에
놓아두고 정성스럽게 글도 바꾸어 써서 붙였습니다.

“공부하느라 고생이 많죠? 시험 잘 보세요!
‘고생 끝에 낙!’”
“오늘은 무척 춥죠?
교회 문 열어놓았으니 커피나 컵 라면은
가스렌지를 사용해서 마음껏,,,
”“부활절 선물로 계란”
“<크리스마스> 때는 카드와 선물”
“친구에게도 전달, 같이 먹기,,” 등등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목사님은
“담배 끊어라.”
“침 뱉지 마라.”
“교회 나와라”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짧은 메시지와 끝말에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들!”
“기말 시험에 좋은 성적 내시기를,,,” 식의 격려
메모만 적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해 겨울까지 1년 동안,
특히 졸업 때에는 예쁜 꽃다발을 선물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여학생들도 그 때마다
“목사님 감사”,
“목사님 짱~!”,
“열심히 공부할게요.” 등을 써 놓고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학생들이 담배를 재떨이에,
침은 휴지에 싸서 휴지통에 넣고,
계단도 담임목사가
치우는 것보다 더 깨끗이 치우고 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여학생들은
목사님과 가까운 친구사이가 되었습니다.

졸업 직전에 여학생들이 교회에 18억 원의
큰돈을 헌금했습니다.
여학생들이 목사님이 너무 고마워서
이가난한 교회 건축을 위해,
기도하며 한 날을 정해 모두 복권을 사고 복권에
당첨되면 하나도 쓰지 않고 모두 교회에
헌금하겠다고 다짐 했습니다.
봉투에 여덟 명의 이름을 써서 당첨된 줄로 믿고
약정헌금을 했습니다.
마음으로는 이미 교회에 헌금을 한 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도우셨는지 복권이 당첨되어
18억 원을 탔기 때문입니다.

졸업하기 전에 여학생들이 고맙다고 인사를
왔는데,항공사, 백화점 등의 취업과 진학 등
자기 신상을 일일이
다 알려주고 인사하고 갔습니다.
목사님이 여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몇년 후에
알아보니 모두 가까운 교회를 나가
주님의 일꾼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법이나 원칙보다
은혜에 감동될 때 변화됩니다.
소리친다고 담배를 끊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끊게 했을지는 모르지만,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은혜의 힘이 훨씬 더 큽니다.




.퍼온곳:예수님을따르는아가페목장/돌쇠

인간의 관점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은
그 불가능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일 수 있다.
하나님은 선택 범위를 좁히셔서 결국 온전한
믿음 외에는 아무 것도 쓸수 없게 만드신다.

주님은 자비 가운데 계속해서 줄여가시되,
당신이 더 작아지고 주님이 더 위대해지실
때까지 하신다.

당신이 주님을 경외함으로
"저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때
주님은 위엄 가운데 이렇게 말씀 하실 것이다.
"그래,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다."

하나님을 크게 볼것인가,문제를 크게 볼것인가?
#하나님의 관점 #토미 테니 #토기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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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주일

1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살아서나 죽어서나1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2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3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고4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셨습니다.5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6
                나를 보호하시며,7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8
        그러하므로 그분은 그의 성신으로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9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10

2문: 이러한 위로 가운데
        복된 인생으로 살고 죽기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답: 다음의 세 부분을 알아야 합니다.11
        첫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12
        둘째,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13
        셋째, 그러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14


1) 롬 14:8; 살전 5:9-10
2) 고전 6:19-20
3) 고전 3:23; 딛 2:14
4) 벧전 1:18-19; 요일 1:7; 2:2,12
5) 요 8:34-36; 히 2:14-15; 요일 3:8
6) 마 10:29-30; 눅 21:18
7) 요 6:39; 10:27-30; 살후 3:3; 벧전 1:5
8) 롬 8:28
9) 롬 8:16; 고후 1:22; 5:5; 엡 1:13-14
10) 겔 36:26-27; 롬 8:14; 고후 3:6,18; 요일 3:3
11) 마 11:28-30; 엡 5:8
12) 마 9:12; 요 9:41; 롬 3:9-10; 요일 1:9-10
13) 눅 24:46-47; 요 17:3; 행 4:12; 10:43; 고전 6:11; 딛 3:3-7
14) 시 50:14-15; 116:12-13; 마 5:16; 롬 6:12-13; 엡 5:10; 딤후 2:15; 벧전 2:9,12


제1부 우리의 죄와 비참함에 관하여

제2주일

3문: 당신의 죄와 비참함을 어디에서 압니까?
답: 하나님의 율법에서
                나의 죄와 비참함을 압니다.1

4문: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그리스도는 마태복음 22장에서
                이렇게 요약하여 가르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2

5문: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답: 아닙니다.3
        나에게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습니다.4


1) 롬 3:20; 7:7,23-24
2) 레 19:18; 신 6:5; 막 12:30-31; 눅 10:27
3) 롬 3:10,20,23; 요일 1:8,10
4) 창 6:5; 8:21; 렘 17:9; 롬 7:23-24; 8:7; 엡 2:3; 딛 3:3


제3주일

6문: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렇게 악하고 패역한 상태로 창조하셨습니까?
답: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선하게,1
                또한 자신의 형상,2
                곧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하셨습니다.3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창조주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마음으로 사랑하며,
                영원한 복락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살고,
        그리하여 그분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4

7문: 그렇다면 이렇게 타락한 사람의 본성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답: 우리의 시조(始祖) 아담과 하와가
                낙원(樂園)에서 타락하고 불순종한 데서 왔습니다.5
        그때 사람의 본성이 심히 부패하여
                우리는 모두 죄악 중에 잉태되고 출생합니다.6

8문: 그렇다면 우리는 그토록 부패하여,
        선은 조금도 행할 수 없으며
        온갖 악만 행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까?
답: 그렇습니다.7
        우리가 하나님의 성신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참으로 그렇습니다.8


1) 창 1:31        
2) 창 1:26-27
3) 엡 4:24; 골 3:10        
4) 시 8:4-9; 계 4:11
5) 창 3장; 롬 5:12,18-19
6) 시 51:5; 요 3:6        
7) 창 6:5; 8:21; 욥 14:4; 사 53:6; 딛 3:3        
8) 요 3:3,5; 고전 12:3; 고후 3:5


제4주일

9문: 하나님께서 사람이 행할 수 없는 것을
        그의 율법에서 요구하신다면
        이것은 부당한 일이 아닙니까?
답: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행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으나,1
        사람은 마귀의 꾐에 빠져
                고의(故意)로 불순종하였고,2
                그 결과 자기 자신뿐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도
                하나님의 그러한 선물들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3

10문: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불순종과 반역을
        형벌하지 않고 지나치시겠습니까?
  답: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죄(原罪)와 자범죄(自犯罪) 모두에 대해
                심히 진노하셔서
                그 죄들을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의로운 심판으로 형벌하실 것입니다.4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0)고 선언하셨습니다.5

11문: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자비하신 분이 아닙니까?
  답: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하신 분이나6
                동시에 의로우신 분입니다.7
        죄는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엄위를
                거슬러 짓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공의는
                이 죄에 대해 최고의 형벌,
                곧 몸과 영혼에
                영원한 형벌을 내릴 것을 요구합니다.8



1) 창 1:27; 2:16-17
2) 창 3:4-6,13; 요 8:44; 딤전 2:13-14
3) 롬 5:12
4) 창 2:17; 출 20:5; 34:7; 시 5:4-5; 7:11-13; 나 1:2; 롬 1:18; 5:12; 엡 5:6; 히 9:27
5) 신 27:26
6) 출 20:6; 34:6-7
7) 출 20:5; 23:7; 신 7:9-11; 히 10:30-31
8) 나 1:2-3; 마 25:45-46; 살후 1:8-9        


제2부 우리의 구속(救贖)에 관하여

제5주일

12문: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의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형벌을 받아 마땅한데,
        어떻게 이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답: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義)가 만족되기를 원하십니다.1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든
                아니면 다른 이에 의해서든
                죗값을 완전히 치러야 합니다.2

13문: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
  답: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죄책(罪責)을 증가시킬 뿐입니다.3

14문: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단지 피조물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자가 있습니까?
  답: 하나도 없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책 때문에
                다른 피조물을 형벌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4
        둘째,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단지 피조물로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짐을
                감당할 수도 없고,
                다른 피조물을
                거기에서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5

15문: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야 합니까?
  답: 참인간이고6
                의로운 분이시나7
        동시에 참하나님이고
                모든 피조물보다 능력이 뛰어나신 분입니다.8


1) 창 2:17; 출 20:5; 23:7; 겔 18:4; 히 10:30
2) 사 53:11; 마 5:26; 롬 8:3-4
3) 욥 9:2-3; 시 130:3; 마 6:12; 롬 2:4-5
4) 겔 18:4; 히 2:14-17
5) 시 49:7-8; 130:3; 나 1:6; 히 10:4                
6) 고전 15:21; 히 2:17                            
7) 고후 5:21; 히 7:26        
8) 사 7:14; 9:6; 렘 23:6; 요 1:1; 롬 8:3-4


제6주일

16문: 중보자는 왜
        참인간이고 의로운 분이셔야 합니까?
  답: 하나님의 의는
                죄지은 인간이 죗값 치르기를 요구하나,1
        누구든지 죄인인 사람으로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값을 치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2

17문: 중보자는 왜
        동시에 참하나님이셔야 합니까?
  답: 그의 신성(神性)의 능력으로,3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4
                그의 인성(人性)에 짊어지시며,5
        또한 의와 생명을 획득하여
                우리에게 돌려주시기 위함입니다.6

18문: 그러나 누가 참하나님이시며7
        동시에 참인간이고8 의로우신 그 중보자입니까?9
  답: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10
                즉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신 분입니다.11

19문: 당신은 이것을 어디에서 압니까?
  답: 거룩한 복음에서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처음에 낙원에서
                친히 계시하셨고,12
        후에는 족장들과13 선지자들을14 통해
                선포하셨으며,                         
                또한 율법의 제사들과 다른 의식(儀式)들로써
                예표하셨고,15                         
        마지막에는 그의 독생자를 통해
                완성하셨습니다.16


1) 사 53:3-5; 렘 33:15; 겔 18:4,20; 롬 5:12,15; 고전 15:21; 히 2:14-16
2) 시 49:7-8; 히 7:26-27; 벧전 3:18
3) 사 9:6; 롬 1:4; 히 1:3
4) 신 4:24; 시 130:3; 나 1:6
5) 사 53:4,11; 요 10:17-18
6) 사 53:5,11; 54:8; 요 3:16; 행 20:28; 고후 5:21; 벧전 3:18
7) 렘 23:6; 말 3:1; 롬 8:3; 갈 4:4; 요일 5:20
8) 눅 1:42; 2:6-7; 롬 1:3; 빌 2:7; 히 2:14,17; 4:15        
9) 사 53:9,11; 렘 23:5; 눅 1:35; 요 8:46; 히 4:15; 7:26; 벧전 1:19; 2:22; 3:18; 요일 3:5
10) 마 1:23; 눅 2:11; 요 1:1,14; 14:6; 롬 9:5; 딤전 2:5; 3:16; 히 2:9        
11) 고전 1:30; 고후 5:21
12) 창 3:15
13) 창 12:3; 22:18; 26:4; 28:14; 49:10
14) 사 42:1-4; 43:25; 49:6; 52:13-53:12; 렘 23:5-6; 31:32-33; 미 7:18-20; 요 5:46; 행 3:22-24; 10:43; 롬 1:2; 히 1:1                
15) 레 1-7장; 골 2:17; 히 10:1,7
16) 롬 10:4; 갈 3:24; 4:4-5; 골 2:17; 히 1:1-2


제7주일

20문: 그러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멸망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까?
  답: 아닙니다.1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그의 모든 은덕(恩德)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만
                구원을 받습니다.2

21문: 참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답: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이
                진리라고 여기는 확실한 지식이며,3
        동시에 성신께서4
                복음으로써5 내 마음속에 일으키신
                굳은 신뢰입니다.6
        곧 순전히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 사함과 영원한 의로움과 구원을7
                다른 사람뿐 아니라 나에게도 주심을8
                믿는 것입니다.9

22문: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답: 복음에 약속된 모든 것을 믿어야 합니다.10
        이 복음은
                보편적이고
                의심할 여지없는
                우리의 기독교 신앙의 조항들인
                사도신경이
                요약하여 가르쳐 줍니다.


사도신경에 관하여
23문: 사도신경의 조항들은 무엇입니까?
  답: I.  1.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나는 믿사오며,
     II.  2. 그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또한 믿사오니,
                3. 그분은 성신으로 잉태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며,
                4.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장사되셨고,
                         음부에 내려가셨으며,
                5. 사흗날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고,
                6. 하늘에 오르셨고,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7.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III.  8. 성신을 나는 믿사오며,
                9. 거룩한 보편적 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10. 죄 사함과
                11. 육신의 부활과
                12. 영원한 생명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1) 마 7:14; 22:14        
2) 시 2:12; 막 16:16; 요 1:12-13; 3:16,18,36; 롬 3:22; 11:20; 히 4:2-3; 5:9; 10:39; 11:6
3) 요 17:3; 롬 4:20-21; 히 11:1,3; 약 1:6        
4) 마 16:17; 요 3:5; 행 16:14; 고후 4:13; 빌 1:19         
5) 막 16:15; 행 10:44; 16:14; 롬 1:16; 10:17; 고전 1:21
6) 시 9:10; 롬 4:16-21; 5:1; 10:10; 엡 3:12; 히 4:16        
7) 눅 1:77-78; 요 20:31; 행 10:43; 롬 3:24; 5:19; 갈 2:16; 엡 2:8; 히 10:10
8) 딤후 4:8
9) 합 2:4; 롬 1:17; 갈 3:11; 히 10:38
10) 마 28:19-20; 막 1:15; 요 20:31


제8주일

24문: 이 조항들은 어떻게 나누어집니까?
  답: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성부 하나님과 우리의 창조,                                 
        둘째, 성자 하나님과 우리의 구속(救贖),                         
        셋째, 성신 하나님과 우리의 성화(聖化)에 관한
                것입니다.        

25문: 오직 한 분 하나님만 계시는데,1
        당신은 왜 삼위,
        곧 성부․성자․성신을 말합니까?
  답: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의 말씀에서 그렇게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곧 이 구별된 삼위는
                한 분이시요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2


1) 신 6:4; 사 44:6; 45:5; 고전 8:4,6; 엡 4:5-6
2) 창 1:2-3; 사 61:1; 63:8-10; 마 3:16-17; 28:19; 눅 1:35; 4:18; 요 14:26; 15:26; 행 2:32-33; 고후 13:13; 갈 4:6; 엡 2:18; 딛 3:4-6


성부 하나님과 우리의 창조에 관하여
제9주일

26문: “전능하신 성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나는 믿사오며”라고 고백할 때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아무것도 없는 중에서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1
        또한 그의 영원한 작정과 섭리로써
                이 모든 것을
                여전히 보존하고 다스리심을 믿으며,2
        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그리스도 때문에
                나의 하나님과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나는 믿습니다.3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그가 나의 몸과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시며,4         
                이 눈물 골짜기 같은 세상에서 당하게 하시는
                어떠한 악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을
                나는 조금도 의심치 않습니다.5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기에 그리하실 수 있고,6
                신실하신 아버지이기에 그리하기를 원하십니다.7


1) 창 1:1; 2:3; 출 20:11; 욥 38:4-11; 시 33:6; 사 40:26; 44:24; 행 4:24; 14:15
2) 시 104:2-5,27-30; 115:3; 마 10:29-30; 롬 11:36; 엡 1:11        
3) 요 1:12; 20:17; 롬 8:15; 갈 4:5-7; 엡 1:5        
4) 시 55:22; 마 6:25-26; 눅 12:22-24
5) 시 84:5-6; 롬 8:28        
6) 창 17:1; 18:14; 롬 8:37-39; 10:12; 계 1:8
7) 마 6:32-33; 7:9-11


제10주일

27문: 하나님의 섭리란 무엇입니까?
  답: 섭리란 하나님의 전능하고
                언제 어디나 미치는 능력으로,1
        하나님께서
                마치 자신의 손으로 하듯이,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을
                여전히 보존하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2
        그리하여 잎새와 풀, 비와 가뭄,3 풍년과 흉년,
                먹을 것과 마실 것, 건강과 질병, 부와 가난,
        참으로 이 모든 것이4
                우연이 아니라
                아버지와 같은 그의 손길로
                우리에게 임합니다.5

28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섭리로써 여전히 보존하심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우리는 어떠한 역경에서도 인내하고,6
                형통할 때에 감사하며,7
        또한 장래 일에 대해서도
                우리의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굳게 신뢰하여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확신합니다.8
        모든 피조물이 완전히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므로
                그의 뜻을 거슬러 일어나거나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9


1) 시 94:9-10; 사 29:15-16; 렘 23:23-24; 겔 8:12; 마 17:27; 행 17:25-28
2) 히 1:3        
3) 렘 5:24; 행 14:17
4) 잠 22:2; 요 9:3        
5) 잠 16:33; 마 10:29-30
6) 욥 1:21-22; 시 39:9; 롬 5:3-4; 약 1:3        
7) 신 8:10; 살전 5:18
8) 시 55:22; 롬 5:4-5; 롬 8:38-39
9) 욥 1:12; 2:6; 잠 21:1; 행 17:25-28


성자 하나님과 우리의 구속(救贖)에 관하여
제11주일

29문: 왜 하나님의 아들을 예수,
        곧 구주(救主)라 부릅니까?
  답: 그가 우리를
                우리 죄에서 구원하시기 때문이고,1
        또 그분 외에는 어디에서도
                구원을 찾아서도 안 되며
                발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2

30문: 그렇다면 자신의 구원과 복을
        소위 성인(聖人)에게서,
        혹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데서 찾는 사람들도
        유일한 구주이신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답: 아닙니다.
        그들은 유일한 구주이신 예수를
                말로는 자랑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합니다.3
        예수가 완전한 구주가 아니든지,
        아니면 참된 믿음으로 이 구주를 영접한 자들이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에게서 찾든지,
        둘 중의 하나만 사실입니다.4


1) 마 1:21; 히 7:25
2) 사 43:11; 행 4:11-12; 딤전 2:5; 요일 5:11-12
3) 고전 1:13,30-31; 갈 5:4        
4) 사 9:7; 요 1:16; 골 1:19-20; 골 2:10; 히 12:2; 요일 1:7


제12주일

31문: 그분을 왜 그리스도,
        곧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부릅니까?
  답: 왜냐하면 그분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임명을 받고
                성신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1
        그분은 우리의 큰 선지자와 선생으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감추인 경영과 뜻을
                온전히 계시하시고,2
        우리의 유일한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려
                우리를 구속(救贖)하셨고,3
                성부 앞에서 우리를 위해 항상 간구하시며,4
        또한 우리의 영원한 왕으로서
                그의 말씀과 성신으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를 위해 획득하신 구원을 누리도록
                우리를 보호하고 보존하십니다.5

32문: 그런데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이라 불립니까?6
  답: 왜냐하면 내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지체(肢體)가 되어
                그의 기름 부음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7
        나는 선지자로서
                그의 이름의 증인이 되며,8
        제사장으로서
                나 자신을 감사의 산 제물로 그에게 드리고,9
        또한 왕으로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자유롭고 선한 양심으로
                죄와 마귀에 대항하여 싸우고,10
                이후로는 영원히
                그와 함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것입니다.11


1) 시 45:7; 사 61:1; 눅 3:21-22; 4:18; 행 10:38; 히 1:9                
2) 신 18:15; 사 55:4; 마 11:27; 요 1:18; 15:15; 행 3:22; 엡 1:9-10; 골 1:26-27                
3) 시 110:4; 히 7:21; 9:12,14,28; 10:12,14         
4) 롬 8:34; 히 7:25; 9:24; 요일 2:1        
5) 시 2:6; 슥 9:9; 마 21:5; 28:18; 눅 1:33; 요 10:28; 계 12:10-11
6) 행 11:26
7) 사 59:21; 욜 2:28; 행 2:17; 고전 6:15; 12:13; 요일 2:27        
8) 마 10:32-33; 롬 10:10; 히 13:15        
9) 출 19:6; 롬 12:1; 벧전 2:5; 계 1:6; 5:8,10;
10) 롬 6:12-13; 갈 5:16-17; 엡 6:11; 딤전 1:18-19; 벧전 2:9,11
11) 딤후 2:12; 계 22:5


제13주일

33문: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인데,
        그분을 왜 “하나님의 독생자”라 부릅니까?
  답: 왜냐하면 오직 그리스도만
                본질로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1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로 입양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2

34문: 당신은 왜 그분을
        “우리 주”라 부릅니까?
  답: 왜냐하면 그분이
                금이나 은이 아니라 그의 보혈로써
                우리의 몸과 영혼을
                우리의 모든 죄로부터 구속(救贖)하셨고,3
        우리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하여4
                주의 것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5


1) 요 1:1,14,18; 3:16; 롬 8:32; 히 1:1-2; 요일 4:9
2) 요 1:12; 요 20:17; 롬 8:15-17; 갈 4:6; 엡 1:5-6        
3) 고전 6:19-20; 7:23; 엡 1:7; 딤전 2:6; 벧전 1:18-19        
4) 골 1:13-14; 히 2:14-15
5) 요 10:28; 벧전 2:9        


제14주일

35문: “그분은 성신으로 잉태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며”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하나님의 영원한 아드님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여전히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으로서,1
        성신의 사역(使役)으로2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로부터
                참된 인성(人性)을 취하셨습니다.3
        그리하여 또한 다윗의 참된 자손이 되고4
                모든 일에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5

36문: 그리스도의 거룩한 잉태와 탄생은
        당신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이시므로6
                잉태되고 출생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나의 죄를
                그의 순결함과 온전한 거룩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려 줍니다.7


1) 마 1:23; 3:17; 16:16; 17:5; 요 1:1; 10:30; 17:3,5; 20:28; 롬 1:3-4; 9:5; 빌 2:6; 골 1:15-16; 딛 2:13; 히 1:3; 요일 5:20
2) 마 1:18,20; 눅 1:35                
3) 눅 1:31,42-43; 요 1:14; 갈 4:4                
4) 삼하 7:12; 시 132:11; 마 1:1; 눅 1:32; 행 2:30-31; 롬 1:3                
5) 빌 2:7; 히 2:14,17; 4:15; 7:26-27
6) 딤전 2:5-6; 히 9:13-15
7) 시 32:1; 사 53:11; 롬 8:3-4; 고전 1:30-31; 갈 4:4-5; 벧전 1:18-19; 3:18        


제15주일

37문: “고난을 받으사”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사셨던 모든 기간에,
                특히 생의 마지막 시기에
                모든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의 몸과 영혼에 짊어지셨습니다.1
        그분은 유일한 화목제물로 고난을 당함으로써2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저주로부터 구원하셨고,3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4

38문: 그분은 왜
        재판장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답: 그리스도는 죄가 없지만
                세상의 재판장에게 정죄(定罪)를 받으셨으며,5
        이로써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6

39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달리 돌아가신 것보다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답: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이므로7
        그가 십자가에 달리심은
                내게 임한 저주를 대신 받은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게 됩니다.8


1) 사 53:4,12; 딤전 2:6; 벧전 2:24; 3:18        
2) 사 53:10; 롬 3:25; 고전 5:7; 엡 5:2; 히 9:28; 10:14; 요일 2:2; 4:10        
3) 롬 8:1-4; 갈 3:13; 골 1:13; 히 9:12; 벧전 1:18-19        
4) 요 3:16; 6:51; 롬 3:24-26; 고후 5:21; 히 9:15; 10:19        
5) 마 27:24; 눅 23:13-15; 요 18:38; 19:4,11
6) 사 53:4-5; 고후 5:21; 갈 3:13                
7) 신 21:23
8) 갈 3:13        


제16주일

40문: 그리스도는 왜
        “죽으시기”까지 낮아져야 했습니까?
  답: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 때문에1
        우리의 죗값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 이외에는
                달리 치를 길이 없습니다.2

41문: 그리스도는 왜 “장사”되셨습니까?
  답: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그가 진정으로 죽으셨음을 확증합니다.3

42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는데
        우리도 왜 여전히 죽어야 합니까?
  답: 우리의 죽음은
                자기 죗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며,4
                단지 죄짓는 것을 그치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5

43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와 죽으심에서
        우리가 받는 또 다른 유익은 무엇입니까?  
  답: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공효(功效)로
                우리의 옛사람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고 죽고 장사되며,6
        그럼으로써 육신의 악한 소욕(所欲)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고,7
        오히려 우리 자신을
                그분께 감사의 제물로 드리게 됩니다.8

44문: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이
        왜 덧붙여져 있습니까?
  답: 내가 큰 고통과 중대한 시험을 당할 때에도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옥의 두려움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셨음을 확신하고
                거기에서 풍성한 위로를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9
        그분은 그의 모든 고난을 통하여
                특히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아픔과 공포와
                지옥의 고통을 친히 당하심으로써
                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10


1) 창 2:17                
2) 롬 8:3-4; 빌 2:8; 히 2:9,14-15
3) 사 53:9; 마 27:59-60; 눅 23:53; 요 19:40-42; 행 13:29; 고전 15:3-4
4) 시 49:7-8        
5) 요 5:24; 롬 7:24-25; 빌 1:23; 살전 5:10
6) 롬 6:6; 갈 2:20; 골 2:11-12
7) 롬 6:8,11-12
8) 롬 12:1        
9) 사 53:5
10) 시 18:5-6; 116:3; 마 26:38; 27:46; 히 5:7        


제17주일

45문: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첫째, 그리스도는
                부활로써 죽음을 이기셨으며,
                죽으심으로써 얻으신 의에
                우리로 참여하게 하십니다.1
        둘째,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이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2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광스런 부활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3


1) 롬 4:25; 고전 15:16-18        
2) 롬 6:4; 엡 2:4-6; 골 3:1-3; 벧전 1:3
3) 롬 8:11; 고전 15:20-22; 빌 3:20-21


제18주일

46문: “하늘에 오르셨고”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땅에서 하늘로 오르셨고,1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거기에 계시며,2
        장차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입니다.3

47문: 그렇다면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는
        그리스도의 약속은 어떻게 됩니까?4
  답: 그리스도는 참인간이고
                참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인성(人性)으로는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으나,5
        그의 신성(神性)과 위엄과 은혜와 성신으로는
                잠시도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6

48문: 그런데 그리스도의 신성이 있는 곳마다
        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서로 나뉜다는 것입니까?
  답: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성은 아무 곳에도 갇히지 않고
                어디나 계십니다.7
        그러므로 신성은
                그가 취하신 인성을 초월함이 분명하며,
                그러나 동시에 인성 안에 거하고
                인격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8

49문: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심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첫째,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언자(代言者)로서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그의 아버지 앞에서 간구하십니다.9
        둘째,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으며,10
                  이것은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체(肢體)인 우리를
                그에게로 이끌어 올리실 것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11
        셋째, 그리스도는 그 보증으로
                그의 성신을 우리에게 보내시며,12
                우리는 성신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위의 것을 구하고
                땅의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13


1) 막 16:19; 눅 24:51; 행 1:9                
2) 롬 8:34; 엡 4:10; 골 3:1; 히 4:14; 7:24-25; 9:24        
3) 마 24:30; 행 1:11        
4) 마 28:20
5) 마 26:11; 요 16:28; 17:11; 행 3:21; 히 8:4        
6) 마 28:20; 요 14:16-18; 16:13; 엡 4:8,11
7) 사 66:1; 렘 23:23-24; 행 7:49; 17:27-28
8) 마 28:6; 요 3:13; 11:15; 골 2:9                
9) 롬 8:34; 요일 2:1
10) 엡 2:6
11) 요 14:2-3; 17:24
12) 요 14:16; 16:7; 행 2:33; 고후 1:22; 5:5        
13) 빌 3:20; 골 3:1        


제19주일

50문: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라는 말이
        왜 덧붙여졌습니까?
  답: 그리스도는
                거기에서 자신을
                그의 교회의 머리로 나타내기 위해서
                하늘에 오르셨으며,1
        성부께서는
                그를 통하여 만물을 다스리십니다.2

51문: 우리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이 영광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첫째, 그리스도는 성신으로
                그의 지체(肢體)인 우리에게
                하늘의 은사들을 부어 주십니다.3
        둘째, 그는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모든 원수들로부터
                보호하고 보존하십니다.4

52문: 그리스도께서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은
        당신에게 어떠한 위로를 줍니까?
  답: 내가 어떠한 슬픔과 핍박을 당하더라도,
                전에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시사
                내게 임한 모든 저주를 제거하신 바로 그분이
                심판자로서 하늘로부터 오시기를
                머리 들어 기다립니다.5
        그가 그의 모든 원수들, 곧 나의 원수들은
                영원한 멸망으로 형벌하실 것이며,6
        나는 그의 택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늘의 기쁨과 영광 가운데
                그에게로 이끌어 들이실 것입니다.7


1) 엡 1:20-23; 골 1:18                
2) 마 28:18; 요 5:22                
3) 행 2:33; 엡 4:8,10-12        
4) 시 2:9; 110:1-2; 요 10:28; 계 12:5                
5) 눅 21:28; 롬 8:23-24; 빌 3:20; 딛 2:13                
6) 마 25:41-43; 살후 1:6,8-9        
7) 마 25:34-36; 살전 4:16-17; 살후 1:7,10        


성신 하나님과 우리의 성화(聖化)에 관하여
제20주일

53문: 성신께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첫째, 성신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1
        둘째, 그분은 또한 나에게도 주어져서2
                나로 하여금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게 하며3
                나를 위로하고4
                영원히 나와 함께하십니다.5


1) 창 1:2; 마 28:19; 행 5:3-4; 고전 2:10; 3:16; 6:19
2) 고후 1:21-22; 갈 4:6; 엡 1:13
3) 요 16:14; 고전 2:12; 갈 3:14; 벧전 1:2
4) 요 15:26; 행 9:31        
5) 요 14:16-17; 벧전 4:14


제21주일

54문: “거룩한 보편적 교회”에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1
                세상의 처음부터 마지막 날까지2
                모든 인류 가운데서3
                영생을 위하여 선택하신4 교회를5
                참된 믿음으로 하나가 되도록6
                그의 말씀과 성신으로7
                자신을 위하여
                불러 모으고 보호하고 보존하심을8 믿습니다.
        나도 지금 이 교회의 살아 있는 지체(肢體)이며9
                영원히 그러할 것을 믿습니다.10

55문: “성도의 교제”를 당신은 어떻게 이해합니까?
  답: 첫째, 신자는 모두 또한 각각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주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그의 모든 부요와 은사에 참여합니다.11
        둘째, 각 신자는 자기의 은사를
                다른 지체의 유익과 복을 위하여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사용할 의무가 있습니다.12

56문: “죄 사함”에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죄와13
                내가 일평생 싸워야 할 나의 죄악된 본성을14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그리스도의 의를 나에게 선물로 주셔서15
                결코 정죄함에 이르지 않게 하십니다.16


1) 요 10:11; 엡 4:11-12; 5:25-26                
2) 시 71:17-18; 사 59:21; 고전 11:26                    
3) 창 26:4; 사 49:6; 롬 10:12-13; 계 5:9                       
4) 롬 8:29-30; 엡 1:3-5,10-14; 벧전 2:9                  
5) 시 111:1; 행 20:28; 딤전 3:15; 히 12:22-23              
6) 요 17:21; 행 2:42; 고전 3:16; 엡 4:3-6,13        
7) 사 59:21; 롬 1:16; 10:14-17; 엡 5:26                       
8) 시 129:4

 

 

- 세계최초로 트랜스젠더 커플 남편이 임신을 하여 자신의(그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

 

한 때 여자였던 Fernando Machado는 한 때 남자였던 Diane Rodriguez를 2년 전 SNS에서 만나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Ms Rodriguez는 2013년 대선에서 트랜스젠더 여성으로선 최초로 정부 기관장 선거에 출마해 언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 커플은 자신들의 관계를 공개하기로 결정하고, 페이스북을 통해 사진들을 공유하고 있다.

 

아이를 갖기 원했던 이들은 곧 이를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 커플은 아직 ‘교정수술(성전환수술)’을 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남편인 Mr Machado를 통해 아이를 가질 수 있었다.

 

이 커플은 새로 태어난 아이의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며 “우리의 아이는 축복일 뿐 아니라, 사랑을 프로모트(증진)하는 존재입니다."라는 글을 올려놓았다.







남편(?)이 아이를 임신하고 낳는 과정을 자랑스럽게 페이스북에 올려놓았다. 

 

기사원문>> Transgender man gives birth to his OWN BABY in world first

 

 

* 성전환 수술을(거세를) 하지 않아도 자신이 남자라고 생각하기만 하면 여자를 남자로, 또 남자를 여자로 인정해주는 법으로 인해 남자 성기가 달린 아내가 여성의 성기관을 가진 남편을 통해 아이를 낳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남자가 싫어서 여자로, 여자가 싫어서 남자로 살겠다고 트랜스젠더를 자처하던 자들이 자신들의 성적 정체성을 부정하고 본래의 성으로 돌아가 아이를 낳은 것이다. “창조 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막 10:6)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면 될 것을 참 어렵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일루미나티가 숭배하는 바포멧은 염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지고, 여자의 가슴과 남자의 성기를 지닌 반인반수, 자웅동체의 모습이다. 인간과 동물,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여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부정하고, 인간과 동물이 다르지 않으며 남자와 여자가 다르지 않다는 사악한 마귀의 사상이 담겨진 상징물인 것이다.


염소와 사람, 여성과 남성을 뒤 섞어 놓은 바포멧은 하나님이 짐승과 인간,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여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일루미나티의 수간과 동성애 어젠더가 바로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과 동물, 남자와 여자의 구분과 경계를 허물어 세상을 혼란케 만들기 위해 만들어낸 사탄 마귀의 작품인 것이다. 이 사악한 일을 멈추게 하시기 위해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다.

 

 

- 예레미야 - 

성령의 은사 -방언 이해


아래 글은 꽤 오래 전에 인터넷에 올렷던 글입니다.
저는 제가 쓴 글을 보존하지 않는 편입니다.
(누가 퍼가는 것을 말리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끊임없이 솟아나는 생명수 샘물이 제게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성경과 함께 성 삼위 하나님이 늘 저와 함게 하시기에요.^^
옮겨와 봅니다.

"저는 은사운동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은사를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각자에게 나눠주신
성령의 은사를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저는 초신자 시절에 방언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30년 가까이 방언으로 기도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계에서 방언논쟁이 한창이던 시절
제가 하는 방언이 혹 가짜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해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방언기도를 계속 했습니다

일부 개혁주의에서는 은사는 성경시대로 끝났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방언을 의미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심한 분들은 개구리 소리라 합니다
이단이나 타종교 무당도 한다면서 방언하는 사람들을
이상한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저도 중간에 회의도 느끼고 하지말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습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전혀 안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는 확신 가운데 더욱 열심히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방언이 헛소리이거나 의미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은사에 대한 이해가 은사를 받은 자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른 그리스도인을 인정하고 존중한다면 자신과 의견이 다를지라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방언에 대한 저의 생각은 한마디로 매우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은사 중에서 제일 흔히 볼 수 있는 게 방언의 은사라고 합니다(표면적으로는)

흔하다고 해서 가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공기가 얼마나 흔합니까. 그런데 공기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귀한 줄 모르는 자들은 은사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 각 지체에게 나눠주십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은사도 있고 자신의 영의 유익을 위해 주어지는 은사도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개인의 영의 유익을 위해 주어지는 대표적인 은사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영의 비밀을 하나님께 아뢰기에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개인기도 시간에 하나님께 은밀히 기도하기에는 참 좋은 은사입니다
공중 예배나 여럿이 기도하는 자리에서는 삼가야 합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내 자신도 내가 잘 모릅니다
하나님은 나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나는 내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 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도록
방언으로 기도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쉬지않고 매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영이 맑아집니다
평안한 심령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깊은 기도의 자리로 나갈 수 있습니다
하루에 두세 시간씩 집중적으로 방언으로 기도하면
제가 알지 못 하는 부분들이 마음에 떠올라
그것을 놓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냥 마음으로 기도할 때는 생각지 못 했던 것들이
깨달아지고 그것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또 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영으로(방언으로)만 기도하면 그 기도의 내용을 모르기에 마음이
열매를 맺지 못 합니다

방언의 은사가 없어도 말씀만으로 충분한 자들이 있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 열매를 맺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방언기도가 정말 유익한 은사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더 많이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방언은 성령세례의 표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성령으로 세례받아 거듭난 자들입니다
방언은 교회의 지체들에게 주신 은사일 뿐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말하고 있는 방언은 요엘서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된 구속사의 유일한 사건으로서의 표적입니다
유일한 사건이기에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령을 위로부터 믿는 자들에게 계속 부어주십니다

능력을 받아 복음의 증인되라고 성령을 주셔서
주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성화를 위해서도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으로 열매맺는 삶은 인간의 힘으로 안 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도 계속해서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에 힘쓰면서 성령충만 하기를 구하면 응답하십니다
생활 가운데서 성령의 능력으로 열매를 맺고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적으로 성령세례는 개인에게 있어서
단회적이지만(거듭남의 사건) 성령충만은 믿는 자들이 계속해서 구해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그렇게 구하고 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을 때 무슨 표적이나 은사가 나타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시는 일입니다

거듭났음에도 확신이 없거나 미지근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들에게 성령이 충만히 임하심으로 확신을 갖게 되고 은사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성령세례라 함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마가 다락방에 임하신 역사적으로 유일한 성령 임함의 사건을
모방하여 지금도 간절히 기도하면 그런 역사가 일어난다고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바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미 믿고 거듭나 예수님을 주로 모신 자들이
능력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은사를 잘 활용하면 교회를 더욱 잘 섬길 수 있고
복음도 힘있게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은사를 받은 자들은 우월의식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부족하니 잘 믿어라고 주신 것인 줄 알고 겸손히
은사를 활용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고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은사를 받지 못 한 자들도 은사를 받은 자들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가지고 인간적으로 판단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초신자 시절에 방언을 개구리 소리라고
(속으로는 귀신소리라 생각했는지도)
폄훼하던 어떤 목사님을 그동안 눈여겨 보아왔는데
하나님이 제대로 쓰시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사역에 열매도 없고 그냥 남들에게 민폐나 끼치는 수준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은사를 받은 자들을 인정할 수 없다면 입이라도 다물어야 합니다
함부로 입을 벌려 은사받은 자들을 무시하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섭섭하게 슬프게 노하게 하는 일을 예수 믿는다 하면서
자행하는 일부 교계의 잘 못 된 분들이 있기로 이 글을 올립니다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제한하는 일이 없으시길 당부드립니다"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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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협의회(WCC)가 또 다시 반이스라엘 노선을 분명히 하고 있다. 350개의 정교회와 개신교회들을 대표하며 한 때 KGB의 영향으로 서방세계를 반대하는 일을 해왔던 WCC가 전 세계 그리스도인을 대표해서 유대 국가의 법적인 권리를 훼손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매년 9월이 오면 WCC는 “평화의 주간, World Week for Peace,”행사 기간 동안 WCC와 친밀한 the Ecumenical Accompaniment Program in Palestine Israel (EAPPI)와 the Palestine Israel Ecumenical Forum (PIEF) 두 단체를 초빙하고 있다.


첫 번째 단체인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에큐메니칼 세계교회 프로그램 (EAPPI)”은 웨스트 뱅크 지역에서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는 사진과 이야기들을 수집하는 활동가들이 만든 단체이고, 두 번째 단체인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포럼(PIEF)”은 신학과 전승이라는 이름으로 반 이스라엘 보도를 일삼는 종교지도자들이 모여 만든 단체이다.


WCC가 이런 단체들과 함께 “평화의 주간, World Week for Peace,”행사를 개최하며 일방적으로 팔레스타인의 주장을 전달하며 이스라엘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기사원문 >> The World Council of Churches’ ongoing Anti-Israel Obsession



* 성경은 우리에게 마지막 때가 되면 예루살렘이 “혼취케 하는 잔”(슥 12:2)과 “무거운 돌”(슥 12:3)이 될 것이며 천하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일 것이라 하셨다.


마지막 때가 될수록 전 세계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이 커질 것이고, 결국엔 천하만국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치기 위해 모일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렇듯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천하만국’ 가운데는 위의 기사의 내용처럼 WCC와 함께 배도의 길을 가고 있는 많은 교회들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013년 WCC 부산총회를 통해 이 땅의 교회들을 ‘종교통합’과 ‘동성애 허용’이라는 배도의 길로 이끌고 있는 WCC가 이제 언약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일에 앞장을 서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이들의 행위는 결국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가져올 것이다.

 

“그날에는 내가 예루살렘으로 모든 국민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리니 무릇 그것을 드는 자는 크게 상할 것이라 천하만국이 그것을 치려고 모이리라.” (스가랴 12장 3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세기 12장 1,3절)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자식농사 / 백일홍 자식 키우는 것도 농사짓는 것과 같아서 이 땅에서 사는 동안은 남에게 자랑할 만한 게 못된다고 여겨져요. 잘 되고 형통해도 주께서 인도하시는 거고 잘 안된다고 낙심할 것도 못되고... 대추나무에 대추가 안달려서 '에이~남의 집 대추나무엔 대추가 많이 열리고 굵어지는 데 우리 나무들은 자고있나~올해도 안달리네~'라고 생각했는 데 갑자기 열매가 달리기 시작하고 굵어지는 거예요~ 좋게 생각하고 대추나무에 물을 주고 아꼈는데 얼마간 있다가 대추가 익지도 않은 파랗고 굵은게 한 두개 서너개씩 나무 밑에 떨어져 있어요. 대추가 빨갛게 다 익어서 내 손으로 수확하기 전까지는 온전한 게 아니듯이 자식도 남에게 장담할 수 없고 그저 부모된 사람은 자녀를 위해 기도 할 뿐이지요~ 옆동네 마을회관에서 노인들이 자식자랑을 하는데 한 노인이 슬그머니 나가서 농약을 먹었어요. 남의 자식은 결혼해서 자식낳고 직장도 잘다니는데 내 자식은 늦도록 혼자살고 직장도 변변찮으니 살 소망이 사라진 거지요~ 충주에서는 그 부모가 자식자랑을 늘 했는 데 그 사람이 풍에 걸려 쓰러졌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 자랑하던 자녀가 쓰러졌다고 그러더군요. 제가 늘 친정엄마께 마을회관에 가시면 자식자랑 조심하라고 그러지요~ 자랑은 남의 심령을 상하게 하고 듣는 사람이 시험에 들게 하거든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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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8장 18 - 22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산자여 따르라-

마치 '임을 향한 행진곡'에 나오는 가사같습니다만, 저와 여러분은 산자이기에 생명주시는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로 제목을  그렇게 븥여봤을 뿐입니다. 

필자는 세상적 이데올로기나 그 어떤  '이즘'에도 물든 사람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성경주의자입니다. 신학적으로도 보수 진보를 초월하고자 애쓰는 사람입니다. 신학적 도그마에 갇히는 것을 싫어하는, 영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삶으로나 가난한 목사일 뿐입니다.

한 때, 현대철학의 사조에 관심이 있어서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자, 질 딀레즈나 미쉘 푸코의 철학적 사변에 잠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지만 이내 식상해서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오직 성경말씀에 천착하는 세월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신학이야말로 모든 학문을 시녀로 거느린다고들 말을 하지만(일부 신학자들의 말일 뿐입니다) 필자는 모든 학문적 영역의 고유한 입장을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신학우월주의에 물든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럴지라도 성경만이 유일한 진리라는 입장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사수하는 사람입니다.

여담입니다. 밥만 먹고도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하등의 지장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맨날 밥만 먹고 살 수 있습니까. 가끔 짬뽕이나 짜장면도 먹어야지요. 그런 의미에서 중간 중간에 자전적 에세이를 칼럼형식을 빌어 올리고자 합니다. 식상함을 염두에 두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번 글 다음에 올릴 생각입니다.

각설하고,

세상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입니다. 죽어가는 자도 없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하는 말인 지를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숨쉰다고 다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그 속에 참된 생명, 하나님이 부여한 새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가 산자와 죽은자를 가르는 유일한 기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님과 하나님 나라, 그리고 주님의 사역에 대해 자신들 나름대로 알고 있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서기관과 제자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겉으로는 달라보이지만 실상은 똑 같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주와 복음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먼저 서기관을 살펴봅니다.

예수님은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보셨습니다.(단순히 예수님 주변에 있는 무리가 아닙니다. about him-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분 주위에 둘러 서 있는 무리를 보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역성경의 역동적 대응번역은 좋은 번역입니다) 왜 에워쌌을까요. 쉽게 말해서 어디로 가시지 못 하도록 둘러 진쳤다는 말입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스크럼을 짜고) 우리들 만을 위한 분으로 모시고자 했던 것이지요. 물론 예수님이 만민의 구주이신 줄 몰랐기에 그랬겠지만요.

 '우리가 당신을 따를 터이니 당신은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주소서. 우리가 당신을 추종하면서 세력을 모으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의도를 아시기에 제자들에게 건너편으로 가자고 명하신 것이지요.

유대인들이 별로 살지 않는 호수 건너편 데가볼리(데카 폴리스-열 도시로 구성된 도시국가) 지역으로 배타고 가시면 무리들은 자연스럽게 흩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대교회의 맹점과 병폐는 사람 모으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인적 물적 자원을 불려서 선교와 구제를 하겠다는 명분을 앞세우면서요.

하나님 나라는 수와 부와 물리적 힘에 있지 않습니다. 영적인 나라입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 왕국관과 별 다를 바 없는 교회관을 가진 일부 교회들이 있습니다. 특히 대형교회가 그러합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고 괜히 큰 교회 기웃거리다가 배곯는 수가 있으니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그들의 심리를 잘 압니다. 로마의 수탈로 인해 삶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그들은 주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무리 모두가 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주님을 바르게 안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종종 메시야 운동을 했습니다. 로마를 깨부술 정치적 메시야를 군중들 스스로 만들어 옹립하고 메시야 운동을 확산시켜 나가고자 했던 것이지요.

이런 상황 가운데서 서기관이 나선 겁니다. 대중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건너편으로 가고자 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지금이야말로 선생님을 따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본 것이지요. 

"선생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선생으로 모시고 한 수 배우다가  때가 되어 세력이 커지면 한 자리 할 모양새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선생으로서 좋은 자리만 찾다가 이제 나를 보고 더 좋은 것을 기대한다마는 나는 네가 바라는 그런 선생이 아니니라'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습니다. 청빈한 삶을 사심을 강조코자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동가식 서가숙' 하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복음전파를 위해 한 곳에 정착하는 삶을 살 수 없으십니다. 잃은 양을 찾으러 나서는 나그네같은 목자의 삶입니다. 

모든 자가 복음을 들어야 하기에 쉴 겨를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안식처를 마련할 수가 없습니다. 길을 잃은 목자 없는 양떼가 온 사방에 있는데, 어디다 거처를 마련하고 정주한단 말입니까.

사람은 안주하고자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정처없는 나그네 삶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다 하늘 본향을 향해서 가는 나그네 인생들입니다. 이 땅에서는 정처없는 삶이기에 고난이 있을지라도 영원한 안식처를 바라보면서 천국순례의 길을 가는 것이지요.

비록 집이 있고 좋은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때가 되면 훌훌털고 떠나야 하는 나그네 인생들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사셨고 제자들도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서기관처럼 자신의 안일을 위해서 "선생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겠나이다"고 하는 자는 제자로서 합당치 않습니다. 

제자 훈련이 지식적 교육을 받는 것으로 가능하다면 주님은 그렇게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지 않았을.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제자라고 하는 자가 예수님께 요구하는 질문의 내용입니다. 먼저 아버지를 장사지내게 해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 따라다니는 것을 잠시 뒤로 하고 집에 가겠다는 말입니다. 지금 그 제자의 아버지가 죽은 게 아닙니다. 아버지가 연로하기에 집에서 기다리다가 죽으면 장사지내고 다시.오겠다는 말입니다.

효자소리 듣고 싶다는 말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은 아버지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다, 산 사람을 의식해서 그렇게 하겠다는 말이지요.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하는 자들이 지금도 많습니다. 체면차리고 인정사정 다 봐주고 언제 주의 일을 합니까. 그러다가는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못합니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도록
버려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죽은 자들이 자기들의 죽은 자들을'-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 제자에게만 국한된 말씀이 아닙입니다. 무릇 예수님의 제자된 자들마다 자기 삶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복음전파는 화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 어떤 일보다도요. 

세상사는 이치나 사람사는 도리에만 매이는 자들은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 것을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순응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거스리기에 핍박을 받고 욕을 먹는 것입니다.

세상을 한 번 둘러보십시오. 다들 나름대로 잘 살아보겠다고 얼마나 아우성을 치며 난리입니까.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를 막론하고. 그러나 자세히 보십시오. 산자로서 그렇게 하는 지 아니면 죽은 자로서 그렇게 하는 지를...

주님 없는 삶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살리기 위해서 지금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데 어디 육신적으로 죽은(죽을) 자들를 위해서 그 귀중한 세월을 허비한단 말입니까. 효도는 살아 있을 때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그만큼 주의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세상의 이목에 매여 집에 가겠다는 그 제자에게 하신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새겨들으시기 바랍니다. 

제자교육은 바로 이런 겁니다. 주님이 하시는 대로 따라 하십시오. 명목상의 제자만 잔뜩 양산하지 마시고!

결론은 이 것입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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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비주의

http://www.ligonier.org/learn/articles/mystic/
by 피터 릴백(Peter Lillback)


14세기는 신비주의가 만개한 시대였다. 당시의 신비주의는 오늘날까지도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운동이다. 신비주의는 이 지상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개인적이고 즉각적으로 연합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특별한 정신적 체험과 상태를 통해 하나님에 관한 직접적인 지식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신비주의는 기독교에서만 찾아볼 수 있지는 않다. 전세계 철학과 종교들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그 뿌리를 성경에 두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저술가인 위디오니우스(Pseudo-Dionysius) 등의 신플라톤 철학과 8세기 위디오니우스의 저술들을 번역한 스콜라 철학자 존 스코투스(John Scotus)에게 영향을 받았다.

14세기에는 신비주의 도미니크파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hart), 요한 타울러(Johann Tauler), 하인리히 수소(Heinrich Suso) 등이 활약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신비주의 저서인 [독일신학_Theologica Germanica]이 어느 정도 마르틴 루터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화란의 신비주의자인 게르하르트 그루테(Gerhart Groote)는 공동생활형제단(Brothers of the Common Life)를 세웠는데, 그 단체가 종교개혁의 선구자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영국의 신비주의자 중에는 여성인 노위치의 줄리언(Julian of Norwich)이 있으며, 동시대 여성 신비주의자는 시에나의 캐더린(Catherline of Siena),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등이 있다.

기독교 신비주의 출현의 원인
교회사의 다른 이면에는 “마술적”이고 비현실적인 특징들이 존재하는데, 이런 이유로 그것은 매우 의심쩍고 비정통적인 전통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기독교 신비주의는 출현했다. 금욕주의, 성례적 미신주의, 성경의 알레고리적 해석 등도 이에 포함된다.
금욕주의는 급진적으로 물리세계를 거부하는 사상으로서, 기독교 신비주의의 조상이라 할 만하다. 기독교 신비주의와 마찬가지로 금욕주의는 신플라톤주의에 연원을 두고 있다.

성례적 미신주의는 그레코-로만 신비종교들의 영향 속에서 발전하였으며, 미트라와 이시스를 섬기는 사교가 이에 해당한다. 교회는 이 미신주의가 특별한 의식이 발휘하는 능력에 대한 신비적이고 마술적인 믿음을 특징으로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특징이 교회에 영향을 미쳤다. 즉, 이 미신주의의 특징은 성례, 순교자의 성물, 교회의 영웅들 등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에 영향을 줬다는 것이다.

성경의 알레고리적 해석은 성경을 4중으로 주해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시작되었다. 즉, 그리스도 중심적인 역사적 시각 대신, 성경은 비밀스럽고 형이상학적이며, 종말론적인 지식을 전달해 주는 지식이 숨겨져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특별한 체험을 하여 의식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이러한 욕망은 무엇을 결과했는가? 첫째, 성경을 잘못 해석했다. 예를 들어, 베드로후서 1:4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로 만들었다고 말씀한다. 이 구절을 맥락에서 벗어난 상태로 읽으면, 지나친 영적 해석으로 나아갈 수 있다. 또한, 변화산상의 변형사건(마 17:1-13), 바울의 삼층천 경험에 대한 묘사(고전 12:2), 계시록의 요한의 환상 등을 잘못 해석하게 되면 부지불식간 성경적 기독교신앙을 비기독교신앙, 이교의 신비적 체험과 철학 등에 혼합시키게 된다.

기독교 신비주의 출현의 또다른 원인을 언급할 때, 우리는 중세적 맥락도 생각해야 한다. 당시의 시대상을 살펴보면, 페스트의 유행과 높은 사망률, 이단의 박혜, 십자군전쟁, 부유한 교회의 상태 등도 원인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기독교 신비주의는 위협적이고 혼란스러우며 만만치 않은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를 제공해 주었다. 신비주의자들은 주관적이고 내적인 체험을 강조하며 외부세계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무시하게 만들었다.

기독교 신비주의의 전통과 기술
수도원운동을 통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을 떠나 수도원생활을 했는데, 14세기까지도 여전히 그 영향력은 줄지 않았다. 수도원운동이 확산되자, 수도원에서는 수행자들에게 신비체험을 증진시키는 명상과 관련한 경건 계획표를 제공해 주었다. 예를 들어, 신비주의자들은 종종 금식과 순례를 훈련으로 삼았으며, 좀더 급진적인 금욕주의 형태로는 극단적 금식, 수면금지, 자기 태형 등이 있다. 종교적 황홀경에 대한 신비주의자들의 탐구는 정신의 수위성(秀偉性)을 거부하고, 끊임없는 반복 기도를 통해 정신을 비우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구하려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체험을 활용하였다. 첫 번째 방식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부정하여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시도였고, 두 번째 방식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역설(力說)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두 방식 모두 본질적으로 사색적이었다. 어떤 방식도 성경적 계시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오히려, 인간 자신의 내적이고도 비이성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찾으려 했다. 그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찾으려는 행위는 종종 가설적이었고, 성경적 기반이 없기 때문에 문제를 야기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기독교 신비주의 신학자들
14세기 신비주의자들은 신비주의에 대하여 각자 자신들만의 접근법을 갖고 있었다. 동방의 그레고리 팔라마스(Gregory Palamas)는 하나님을 찾으려는 시도로 기도를 통한 내적 침잠을 지지했다. 그는 아타나시우스의 금언(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다, 그러므로 인간도 하나님이 될 수 있다)을 활용하였다. 그는 이 금언 속에는 범신론과는 다르지만 인간 신성화의 형태가 담겨있다고 주장했다. 팔라마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계신 반면, 인간은 신적 에너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특별한 자세로 신성한 문장을 암송하는 등의 여러 신비주의적 의식을 발전시켰다.

반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가지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즉시적 지식관에는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영혼의 불꽃_spark of the soul” 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믿었다. 그 불꽃은 영원한 진리를 명상하게 하여 “영혼 속에 하나님을 출생”할 수 있도록 만든다. 에크하르트에 따르면, 이것은 오직 자아와 이 세상을 포기할 때만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하나님과 연합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생명과 그 신적 본성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연합으로 영혼은 신적 본성에 참여하여 신이 될 수 있다. 에크하르트는 이 지식은 말로는 형언할 수 없기 때문에 오직 순전한 신적 연합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축복의 이상_beatific vision”은 그리 오래가지 않으며, 영원 속에서만이 영구한 상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교황은 나중에 에크하르트의 범신론적 주장을 비판하였다.

중세신비주의의 유산
신비주의 신학은 중세기를 끝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이후 교회에서도 꾸준히 재등장하였다.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Loyola), 오시그의 카스파르 슈벵크펠트(Caspar Schwenkfeld von Ossig), 일부 영국 청교도들이 신비주의적 주장을 했다.

또한, 다양한 개신교 전통 속에도 신비주의가 들어있거나, 신비체험에 대해 개방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경건주의, 퀘이커, 오순절운동, 은사주의운동 등이 이에 포함된다. “개신교 자유주의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슐라이마허는 종교적 체험은 기독교신앙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20세기의 신비주의는 종교적, 철학적 경계를 뛰어넘어가는 양상을 보였다. 그같은 양상을 주도한 이들로는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유대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등이 있다. 이들 모두 14세기 기독교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다.

기독교 신비주의의 극복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신비체험 등에 자리를 내주어서는 안된다. 말씀은 우리에게 정당한 계시 진리이며, 누군가가 어떤 개인적인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의심해 봐야 한다. 마음을 비우고 무아지경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마음과 뜻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난 행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인격을 통해 당신을 예배하라고 요구하신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친 성령과 말씀 간의 철저한 연결성, 말씀과 성례의 성경적 결합, 겸손한 순종과 믿음 안에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원리는 범신론이나 인신공양적 미신주의 등등의 여러 신비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에서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방법들이다.

성경은 거짓 가르침이 우리 인간의 타락한 품성에서 나타나기 태문에 영을 시험하라고 가르친다. 구원은 인간 중심적인 것이 아니다. 감정, 선택, 사상, 이상 등등이 구원으로 이어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진리와 지혜는 하나님의 은혜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을 좇는다고 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하고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그 기초를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적 기독교, 특별히 종교개혁적 의미의 신앙의 회복은 무절제한 신비체험을 거부하고, 성령님을 통한 그리스도의 정경적 계시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인간은 타락한 본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우리는 내적 충동성을 우선적인 영적 안내자로 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말씀과 성령님을 겸손히 의지하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묵상은 성경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어떤 특별한 체험을 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해 행하시고 말씀으로 기록하신 특별한 이적들을 상고해야 한다. 하나님을 알고자 할 때, 그분을 말해주는 성경을 알아야 하고(요 5:46), 사랑하는 아버지께 기도해야 하며, 예배와 성례에 참여해야 한다.

우리는 지상명령을 기억하며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눅 10:27). 또한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에 뿌리를 두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은혜를 내적으로 체험한 마음과 감정만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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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가끔 주변의 사람들이 목사 임직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특별한 선물 같은 것은 해주지 못하지만 카드 장이라도 하나님 말씀과 함께 격려와 축하의 말을 담아 기도하는 마음으로 건네준다.

목사가 되지 말고 목자가 되어 달라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다들 의미를 알아서 그런지, 아직 뜻이 무엇이냐고 물어온 사람은 없다.

알고 있는 것과 아는 바를 삶에 적용하며 산다는 것은, 더구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삶일진대, 너무나 거리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얼마전 필라목회연구원에서 교회의 목사의 강의를 들으며, 그래도 아직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목회자가 있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며 내심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부끄럽기도 했다.


목사가 되면 많은 성도들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시키고픈 마음은  누구나 동일할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대형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를 본받아 목소리와 행동거지를 비슷하게 했던 그러던 적이 십년 전에 있었다.


목사 자신도 교회 성장이라는 목적을 두고 나름 대형교회를 찾아다니며 배우곤 했다면서 방향이 조금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한다.

나름 목회에 성공했다는 교회와 목사를 찾아 다녔지만, 그보다 진실하고 신실되이 살아갔던 목회자들을 찾아다녔어야 했다.” 현재 어떤 위치, 어느 자리에 있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그의 마음을 읽으며, 하나님께서 얼마나 마음을 기뻐하실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위하여 통장을 가지지 않고, 또한 교회 부흥을 위하여 교회 버스도 운행하지 않겠다는 신선한 고백을 들려준다. 멀리 있는 성도를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 가까운 교회를 찾아 섬기라고 권면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보내실 때에 “너희 전대에 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10:9-10)고 하셨다.

하지만, 지금 세대는 어떠한가?


호화로운 집에서 풍족한 사례를 받으며 살고 있는 목회자들이 많다. 그들의 그러한 삶(능력?), 그리고 그러지 못한 사람들의 못남(?)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더 우리들 삶에 적용시켜 보면서 정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까?”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주기도문에 예수님 말씀하신 것처럼 일용할 양식 주심을 구하는 우리들의 삶은 실제 생활 속에서는 없다.  모두가 다 한결같이 1년 후를 걱정하고 자녀들 장래까지도 염려하며 아름 아름 다 챙겨놓는다. 몇 십년 후 내가 죽은 뒤 까지도….


그래도 내가 받는 사례가 적으니 더 받아야겠다고 하는 목회자도 있다. 분명한 것은 교회의 진정한 목적까지도 잊어버리고 있는 지 모르겠다. 성경 수많은 곳에서 말씀하는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이웃은 넘쳐나지만, 사마리안 손길은 없다.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대형교회를 이루고자 하는 것도, 이 모양 저 모양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가진 것이 조금 더 많고, 내가 배운 것이 조금 더 낫고, 내가 하는 일이 조금 더 많고 하는 문제도 아니다.  주어진 삶에서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고 있고, 그 분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더 중요할 것이다.


목사가 되지 말고 목자가 되어 달라라는 말은 목사는 직업이요, 목자는 사명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 목회를 하는 것이 삶을 위한 것인지, 사명으로 감당하고 있는 것인지 돌아보자. 지금 내가 무엇을 가지고 살아가고,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 하는 것보다 어떠한 자세로 나에게 주어진 삶을 말씀안에서 살고 있는가에 더 관심을 갖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글: 차문환 목사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 24:36)

 

'휴거가 언제 있습니까?'

이것은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이라면 몇 번씩은 반드시 했을 질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도 모른다고 한 그 날을 누가 안다고 한다면 그 분은 정말 큰 일 날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휴거에 대해 유독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은 1992년 다미선교회 사건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도 심심치 않게 다미선교회가 했던 것과 비슷한 유의 주장과 행동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휴거가 오늘 내일 있다느니 10월에 있다느니, 3년 후로 미루어졌다느니 하는 주장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했던 그 날이 지나면 또 '언제 그랬느냐!' 는 듯 버젓이 또 다시 활동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셔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신부들을 위해 휴거 시기를 늦추셨다!'는 뻔한 거짓말까지 꼭 붙입니다.

 

늑대가 나타났다! 라고 거짓말을 하던 양치기 소년이 하도 많이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치는 바람에 이제는 사람들이 아예 듣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 양치기 소년만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말 정직한 양치기 소년들의 경고 소리도 듣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제는 늑대(거짓 선지자들, 적그리스도)들이 때거지로 나타나서 닥치는대로 잡아먹게 생겼습니다.

 

휴거가 언제 있을런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누가 '휴거의 날을 안다!' 하시거든 그 분을 멀리하십시오. 반드시 나중에 문제가 생기리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휴거의 시기를 못박으시지 않고 '곧 오시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마다 '마라나타!' 라고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언제라도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날 소망으로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 거의 2000년이라는 우리 입장에서는 무지하게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곧 오시라!' 하신 예수님은 아직도 오지 않고 계십니다. 그러나 휴거의 시기를 언급하지 않으심으로 초대교회 이후 지금까지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긴장하게 하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휴거가 없었으니 앞으로 그게 있겠는가?'라고 생각각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벧후 3:3-4)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벧후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그러나 성경은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이루어집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 5:18)

 

그러므로 언제가 되었건 휴거는 반드시 일어납니다.

 

우리는 모든 크리스챤들이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휴거를 코 앞에 두고 있는 전무후무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시대가 믿음 지키기는 정말 어렵지만 죽지않고 몸이 변화되는 엄청난 특권을 누리는 영광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휴거의 날은 오늘과 같은 지극히 평범한 날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엊그제 있던 지진이나, 핵이 터지거나, 경제 대공황이 일어나는 그런 날이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 날의 모습을 미리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 16:15)

 

도둑이 집에 들어갈 때는 집에 있는 사람들이 아주 깊은 잠에 빠진 때에 쥐도 새도 모르게 들어갑니다. 집에 들어갈 때 까치발을 하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게 합니다. 그런데 지진이나 핵이나 경제 대공항 같은 것은 너무 소리가 큽니다.


그리고 휴거의 때에 두 사람이 맷돌을 갈고, 밭에 있고, 잠을 자다가 휴거됩니다.

 

어떤 분들은 환란 중, 환란 후 휴거를 믿으시는데(그 분들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환란 중에는 적그리스도 세력이 짐승의 표를 받도록 강요하기 때문에 매매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도시에서는 삶이 불가능하고,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 계속 거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태연하게 밭에서 일하거나 맷돌을 갈 만한 상황이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휴거 직후 아주 짧은 시간 그런 것이 가능하겠지만 점점 힘들어질 것입니다.


환난 중 휴거나 환란 후 휴거를 믿는 분들 중에는 아주 비장한 각오로 피난처를 만들고 비상식량을 준비하고 순교할 각오를 합니다.

 

신랑이 데리러 오신다는데 이사갈 준비를 하지 않고 적그리스도가 오니 끝까지 방어를 하자고 요새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 성경 구절에 언급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예수님이 오시는 그 날은 오늘과 전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정말 휴거의 날에 제 글을 보실 수도 있습니다.

 

'오늘 오실 수 있다! 하더니 정말 오늘 휴거가 이루어졌구나!'

 

그 휴거의 날에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를 갈 것입니다.

이 말은 먹지도 마시지도 말고 시집도 장가도 가지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건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것만을 목적 삼고 그것에 올인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에 올인하느라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는 약속을 잊어버리고 살아갔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날마다 하늘만 쳐다보고, 직장도 때려 치우고, 학교도 때려 치우고, 환난 때에 아이 키우기도 힘드니 아예 처녀 총각으로 살자! 이것도 아닙니다.

 

피난처를 만들고 거기서 주님 오심을 기다리자! 하시는 분들은 그 분들의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남겨질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의 마음과 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신랑으로서 신부가 자기를 사모하고 자신의 마음에 합한 신부가 되는 그것을 원하시지 결혼식이 언제인가, 결혼식 날 입을 드레스나 묵상하고 있고, 최고로 잘 차려입고 사람들 앞에 잘 보여야는데 하고 온갖 관심을 결혼식에만 두는 그런 신부를 제대로 된 신부라고 보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쪽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은 늘 위험합니다. 우리는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고, 시집도 가고, 장가도 가야 합니다. 그러나 언제라도 주님이 오신다는 그 것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에녹도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동안 주님과 동행하였지만 그 후에 아들들과 딸들을 낳고 키웠습니다. 가장으로서 열심히 일도 했을 것입니다. 아이들을 말씀에 기초하여 열심히 가르쳤을 것입니다.

 

'성도님. 오늘 휴거가 있을 수도 있어요!'

 

'아이! 짜증나! 집사님은 맨날 그 이야이기에요. 발 좀 그만하세요!'

 

우리는 그 날에도 이런 대화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에도 수많은 분들이 그 말에 대해 무시하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만 몰두할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그 날 휴거의 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런데 그 날만 바라보고 아무것도 안하고 앉아서 연지 꼰지나 찍고 있는 신부들은 오히려 탈락하기 쉽습니다.

 

신랑이 기다리는 신부는 열심히 밭에서 일하는 신부, 맷돌을 부지런히 가는 신부, 신랑이 무엇을 기뻐할까? 늘 고민하고 그 것을 이루고자 하는 신부임을 잊지마시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은 빠짐없이 오늘이라고 부르는 그 날 휴거되길 바랍니다



펌글 / 고다니엘

-예수님의 섬김-

지난 번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귀신들린 자들을 많이 데리고 예수님께 오거늘-

귀신들린 현상이 뚜렷한 경우에만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모든 병이, 심지어 감기조차 귀신들려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단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조차도 귀신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당신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야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거짓 사설을 펴는 사역자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가계의 저주 운운하면서 '그것을 끊어야 당신의 인생이 풀린다'고 겁(?)을 줍니다. 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신자들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는 사역자가 참된 종입니다. 자신을 추종케 하거나 자신에게 와야만 진리를 알게 되고 구원을 받을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다 엉터리라고 보면 틀림없습나다.

모든 질병의 원인은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는 정신적 육체적 연약에 있습니다. 근원적으로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인류가 죄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끊어진, 환언해서 생명과 복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분리에서 오는 특징이 가시와 엉겅퀴의 삶이요, 육신의 질고입니다. 귀신들리는 것도 이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여 멸망으로 이끌고자하는 마귀의 악한 궤계입니다. 그렇지만 마귀는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마귀와 그를 따르는 자들의 종국이 어떠한 지를 요한계시록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닮은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 자체가 이미 대적자 마귀(사탄)체계의 붕괴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나라(왕국)'란 표현을 마귀체계에 같다붙이는 것 조차도 아깝습니다.

귀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는 맥을 못춥니다. 예수님이 이미 귀신의 대장 마귀(사탄)를 결박하셨기 때문입니다. 혹 귀신 노이로제에 걸린 분이 있다면 이제 안심하십시오. 왜냐하면 복음의 능력이 여러분을 자유케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물매-
해질무렵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다는 소문이 온 사방에 퍼졌습니다. 못 고치는 병도 없다고 합니다. 이미 날이 저물어 갑니다. 그런데도 몰려옵니다. 이는 먼 지역에서 소문을 듣고 고침받고자 하는 열망으로 아침일찍 나섰지만 걸어오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집이 있는 지역에만 유독 귀신들리고 병든 자들이 많았을 리 만무합니다.

생명의 향기는 퍼져나가기 마련입니다. 사람이 바람을 그물(net)로 잡을 수 있습니까. 물고기나 잡으면 잘하는 것이지요. 마귀가 제 아무리 주와 복음을 훼방한다 할지라도 생명의 향기는 제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복음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사람을 살리는 복음의 능력은 그 누구도 막지 못합니다.

현대에는 바람보다 더 빠르게 아니 빛의 속도로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번개가 동에서 서로 번쩍이는 것처럼요. 극동의 한반도 오지에서 인터넷(net)에 글을 써도 눈 깜짝할 사이에 전 세계로 퍼져나갑니다.

sns(터위터, 페이스북 등)뿐만 아니라 모든 인터넷 매체가 실시간으로 소식을 실어 나릅니다. 부족한 필자의 글도 온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입니다. 이는 말세지말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옵니다. 자신의 의지로는 올 수가 없습니다. 더러운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일일이 다 고치십니다. 한 사람도 내치거나 외면치 않으십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무론하고 일 대 일, 인격적으로 대하시면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십니다. 실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는 말씀이 실감이 갑니다.

장풍 비슷한 폼으로 집단적으로 쓰러뜨리는 현대의 엉터리 사역자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전혀 다른 우리 주님의 사역의 현장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를 저자 마태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함으로써 마무리 짓습니다.

이사야서 52장 13-15부터 ~53장까지 입니다.

다 아는 말씀이라고 치부하지 마시고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본 인용구 한 절이 이것의 전체를 대표합니다.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은 질고를 짊어지심은 메시야의 본분입니다. 표면적으로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신 것은 이면적으로는 죄 없으신 그 분이 죄인을 대신하여 속죄양이 되어주셨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고난받는 종(The suffering servant of Jehovah)의 사상을 가장 선명하게 많이 예언한 이사야를 외면하고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고 쓸데 없는 선민사상에 젖어서 정치적 메시야를 기다렸던 이스라엘의 실패의 원인을 부연설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자 마태는 바로 앞 단락, 백부장에 대한 기록에 이어지는 짧은 본문에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함으로써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어가는 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마가복음 10:45)

주님이 우리를 먼저 섬겨주셨습니다. 죄인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로 옷입음으로서, 다시 말해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음으로서, 새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섬김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샌들을 신으므로 해서 발에 땀이 나고 먼지로 인해 때가 끼어 아주 더러웠습니다. 그 발로는 식탁에 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종들이 주인의 발을 씻기고 손님들에게도 발 씻을 물을 대령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종들이 하는 일상의 섬김을 제자들에게 친히 하셨습니다.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먼저 섬기십시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섬기고 계십니다. 어린양의 자리에서 말입니다. 하늘 보좌에 승귀하신 모습으로 계심과 함께, 여전히 어린양으로서 속죄사역을 감당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은 최후의 일인이 구원받을 그 날까지,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려 단번에 이루신 대속이지만, 적용으로서의 속죄의 효력은 항상 '현재'로서 세상 끝날까지 이어지는 것이지요. (요한계시록이 이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황공한 마음과 종의 자세로 끝까지 주님을 잘 섬겨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복음과 함께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찾아가서 섬겨야겠습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그런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소원하며 간구합니다.아멘!

글: 구 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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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tican Radio) 이 세상에서 우리가 “고아가 된 것 같은 어려움”을 느낄 때가 많지만, 우리에게는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변호해주시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Our Lady of Sorrows 축제를 기념하기 위해 Casa Santa Marta에서 열린 미사 중에 언급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갈보리 언덕에 계시던 당시, 성 요한과 몇 몇 여자들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십자가 밑에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리아를 바라보며 외쳤습니다. 


 “이 여자가 바로 이 범죄자의 엄마야! 이 여자가 바로 이 반역자의 엄마야!(성경에는 없는 내용이다. 카톨릭에서 이런 식으로 가르치고 있다니 마리아를 우상화하기 위해 성경까지도 왜곡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역자주)”


“마리아는 이 이야기들을 들었고 끔찍한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또 그녀가 존경하는(?) 고위 관료와 성직자들이 그녀를 배려해서 "그 수치스런 자리(십자가 밑)에서 내려오라"는 권면을 들었지만, 벌거벗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아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큰 고통을 겪었지만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녀가 낳은 아들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교황님은 또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을 것”(요 14:18)이라 약속하셨는데, 십자가에서 그의 어머니를 우리의 어머니로 주셨습니다.”라고 말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예수의 어머니(마리아)가 곧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우리에겐 ‘아버지’가 계십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곧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그녀(마리아)는 우리가 고통 받는 순간 어머니가 되어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변호해주십니다.” 

 

기사원문 >> Pope Francis: Mary is our Mother, who defends us

 

 

* 마리아를 숭배하는 예수회 출신의 첫 번째 교황 프란치스코의 마리아에 대한 언급이 소름끼칠 정도로 신성모독적임을 알 수 있다.



바벨론 종교의 여신 세미라미스와 그 아들 담무스의 이야기가  이집트로 넘어가선 이시스와 호루스의 이야기로  로마 카톨릭으로 넘어가선 마리아와 예수의 이야기로 그 형태만 바뀌어 전해지고 있다. 예수회가 전파한 마리아 숭배의 뿌리가 바로 바벨론의 여신 세미라미스(이쉬타르) 숭배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리아를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위치에 있는 ‘어머니 하나님’으로 언급할 뿐 아니라,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주신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리라”(요 14:18)는 말씀을 마리아에게 적용시킴으로 마리아를 성령 하나님과 동일한 중보자의 위치에 올려놓고 있다.

 

성경 왜곡의 백미는 마리아가 십자가 밑에서 들었다는 말들에 관한 프란치스코의 언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어느 성경에 사람들이 마리아를 향해 “이 여자가 바로 이 범죄자의 엄마야! 이 여자가 바로 이 반역자의 엄마야!”라고 외치는 장면이 나오며, 이 모습을 측은히 여긴 관료들이 마리아에게 “그 수치스런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권면하는 장면이 나온단 말인가?

 

마리아 숭배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진리의 기준인 성경 자체도 왜곡하는 로마 카톨릭은 그리스도의 신부(교회)라는 모습은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여신 마리아(세미라미스)를 숭배하는 이교 집단이요,  요한계시록 17장이 경고하고 있는 음녀 바벨론인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이 음녀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하였다”(계 17:6)고 기록하고 있다.   장차 음녀 바벨론인 로마 카톨릭이 종교통합과 마리아 숭배를 거부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잔혹히 핍박하여 그 피에 취하게 될 것임을 경고한 말씀인 것이다.

 

마리아 숭배를 통해 음녀 바벨론을 일깨우고 있는 예수회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에 유념해야 한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10

여기는 우리 머물 곳 아니네.

(창 31:13)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만일 이 세상의 삶이 에덴동산처럼 풍요롭고 평안하고 걱정도 아픔도 슬픔도 없다면 누가 하늘에다 소망을 두겠습니까? 만일 야곱에게 외삼촌 라반이 끝까지 잘 해주고 보살펴주었더라면 야곱과 아내들이 그곳을 떠나려 했겠습니까? 아마 평생 떠나지 못 하고 눌러앉아 살았을 것입니다. 야곱이 벧엘에 돌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붓고 서원한 것조차 아무 효력을 발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만일 야곱이 하나님께 서원을 갚으려고 떠나고자 했다면 십중팔구 아내들과 아이들이 가려면 당신 혼자 가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핍박이 시작됩니다. 라반의 아들들의 말이 야곱이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아 거부가 되었다고 눈을 흘기기 시작합니다. 외삼촌의 안색이 전과 같지 않습니다. 라반과 라반의 아들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 생명의 위협까지 느낄 정도로 불안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은 레아와 라헬을 들로 불러내어 의논합니다.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 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으나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으나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셨노라. 그가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는 것이 점 있는 것이요,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는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라. 이같이 하나님께서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들을 빼앗아 내게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해하지 못 하게 금하시고 편을 드사 양떼를 빼앗아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제 자기에게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다고 고합니다. 이에 아내들도 아버지가 딸들인 자기들을 팔고 자기들의 돈을 다 먹었으니 아버지가 딸들을 외인으로 여기는 게 아닌가고 불만을 털어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아버지로부터 빼앗아서 야곱에게 주신 것은 자기들과 자식들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핍박은 떠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인지도 모릅니다. 핍박은 하나님께서 능력이 없어 우리를 지켜주지 못 하시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양떼를 빼앗아 주신 능력의 하나님이 라반과 라반의 아들들의 핍박쯤이야 왜 막지 못 하시겠습니까?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뻐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주님께 속한 자요 하늘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나를 미워하므로 너희도 미워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핍박을 당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핍박이 없는 것을 이상히 여기라 하셨습니다. 아버지 라반에게서 난 혈육일지라도 레아와 라헬은 더 이상 그 아버지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요 야곱과 함께 야곱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된, 떠나야 할 백성인 것입니다. 핍박은 구별된 자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증거인 것입니다.

  세상은 아무리 섬겨도 죽음으로 보답합니다. 율법은 아무리 순종하고 지켜도 정죄로 되돌려 줍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하늘의 참 아버지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 “이 땅은 우리 머물 곳 아니네. 하나님 약속하신 땅으로, 아버지 집으로 가야 한다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인식,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깨달음,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골1: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빌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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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뱅주의”가 가능한가?

―구원에 대한 성경의 일관성 있는 가르침―

 

 

우병훈.jpg

 

우병훈 교수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의학)

 

 

아르뱅주의?

 

칼뱅주의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은 반드시 구원 받기 때문에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라고 가르친다. 반대로 아르미니우스주의는 “한번 구원에 참여한 자라도 성령의 인도를 받는 거룩한 삶이 없고 타락한 자는 최종적인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아르뱅주의(Ar[minian+Cal]vinism)”는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뱅주의를 결합시켜, 성경이 그 두 가지 견해를 모두 가르친다면서, 우리는 두 견해 모두를 붙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어떻게 그 두 가지 모두가 사실일 수 있는가?

모순되는 두 가지를 함께 붙잡으면 된다는 말이 과연 납득할 수 있는 것인가?

 

 

계시를 모순으로 만드는 무책임한 신학

 

인간의 정신은 그렇게 모순에 만족하고 넘어가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이번 미국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 우리는 둘 모두를 다 믿고 붙잡아야 한다.”는 식의 궤변과도 진배없는 것이다.

 

신학은 그렇게 무책임해서는 안 된다.

 

아르뱅주의자들은 성령의 영감 받은 책에 모순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것이 과연 성경에 대한 올바른 고백인가?

 

성경은 모순적인 책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모순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겠는가? 성경이 만일 이 중차대한 구원 문제에 있어서 모순적인 책이라면, 과연 다른 문제에 있어서 또한 모순과 오류가 없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아르뱅주의자들의 주장은 성경 계시에 대한 신뢰성을 무참히 떨어뜨리는 무책임한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성경에서 얼핏 보기에 모순 같은 상황을 만나면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진리의 하나님은 원만한 이해의 모든 풍요를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시다.

 

 

참된 신자는 영원히 구원 받는다는 말씀들

 

우선 우리는 믿는 자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지키신다는 말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 말씀들은 너무나 많고 또한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대속물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다(갈 1:4; 벧전 1:18; 마 20:28; 딤전 2:6). 그런 분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난 다음에는 그리스도가 우리 구원의 방관자요, 구경꾼으로 남아계시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새 언약의 보증이 되신다(히 7:22). 우리를 구원에서 끝까지 지키신다.

 

둘째, 그리스도는 신자들이 결코 멸망당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반드시 지키신다.

예수님은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요 6:37-40). 또한,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요 10:28-30). 너무나 유명한 로마서 말씀에서,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가르친다(롬 8:28-39). 우리 안에서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신다(빌 1:6; 살전 5:24).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값으로 사셨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사셨다고 한다(행 20:28, 고전 6:19-20, 고전 7:23, 벧후 2:1, 계 5:9).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신 것은 단지 구원을 위한 가능성만을 제공할 뿐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최종 심판대까지 통과하게 하는 완벽한 구원이다.

 

넷째, 하나님은 우리를 양자양녀 삼으셨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하나님의 양자양녀가 된다고 가르친다(롬 8:15, 갈 4:6, 엡 1:5). 세상 사람들도 양자로 삼은 이를 중간에 버린다는 것에 대해 옳지 않게 여긴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양자양녀로 삼은 우리를 최후 심판대에서 버리시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을 하나님은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다섯째,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

로마서 6:1-14에서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6-7절), 최후 심판 때까지 확실하게 보호 받을 것을 가르친다(8-9절).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가 과연 그 연합 관계가 깨어질 수가 있는가?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다시 그것에서부터 분리된다는 것에 대해서 성경은 가르치는 바가 전혀 없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왜 성경은 연합 교리를 가지고 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힘주어 말하겠는가? 인간의 죄가 그리스도와 연합을 파괴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과연 “연합”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겠는가?

 

여섯째, 신자가 가진 “영생”은 “영원한 생명”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요 3:16). 예수님은 너무나 분명하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라고 말씀하신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가 다시 생명에서 사망으로 옮겨지는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요 6:47, 요일 2:25, 요일 5:11-13). 주님과 믿음의 성례 통해 결합한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반드시 주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신다(요 6:53-55). 주님께서 주신 영생은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하는 생명이며, 그것은 절대 빼앗기지 않는다(요 10:28).

 

일곱째, 그리스도를 믿어서 칭의 받은 사람은 반드시 최종 심판에서 구원 받는다.

로마서 5장 9절에서 사도는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은 곧 최후심판에서 구원을 받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고 칭의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최후심판 때에 구원을 받는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칭의는 최후심판의 판결에 대한 현재적 선언으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구원에서 탈락 가능한 것처럼 말하는 듯한 구절들에 대한 설명

 

우리가 구원에 대해 이해할 때 이런 분명한 가르침들이 성경 해석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얼핏 보기에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 같은 구절들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최종 심판에서 행위에 따라 심판하기 때문에 그때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구절들(마 25:31-46; 롬 2:6-11)은 참된 신자의 경우에는 최종 심판에서 결코 정죄 당하지 않으며 반대로 참된 신자가 아닌 경우에 반드시 정죄 당함을 가르치는 구절로 해석해야 한다.

 

최종 심판은 행위에 대한 물음이 반드시 있다. 하지만 최종 심판에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행위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은 자가 성령 안에서 행한 행위들”이다(갈 5:5 참조). 그렇기에 그 행위들은 믿음의 표징으로서의 행위이지, 믿음에 뭔가를 더하는 그런 행위가 아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행위에 근거해서 받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최후 심판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최종 심판에서 정죄 당하지 않는 근거를 “행위”에 잡는다면 “어떤 행위를 얼마나 해야 구원 받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불거지게 되어 있다. 그럴 경우, 구원 받는 자가 생기기 위해서는 둘 중에 하나를 택하게 된다. 첫째 경로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최대한 낮추는 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의 기준이 최종 심판대에서 결코 낮아질 수 없다. 하나님은 불변하시기 때문이다. 둘째 경로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어떻게든 만족시키기 위해서 부족한 공로적 선행을 위해 별별 짓을 다 하는 것이다. 중세 로마 가톨릭이 그런 신학에 빠져서 면죄부 장사나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은 자들을 의롭다 여기신다고 단순하게 가르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고서 쌓아간 “행위에 근거하여” 판단하시는 분은 아니다. 하나님의 엄위로운 의의 기준은 신자라 할지라도 결코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사 64:6, 슥 3:3-4 참조).

 

최종 심판 때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행위”의 분량이나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그렇다면 신자의 “행위”는 무엇인가? 신자의 행위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참됨을 보여주는 “징표요 보증이요 열매”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행위의 양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한 행위가 공로가 될 수도 없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된 자들은 최종 심판대에 섰을 때에 비록 행위에 있어서 부족해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다고 해 주실 것이다.

 

이와 더불어서 최종 심판대에서의 차등적인 판결이 있음을 가르치는 구절들(고전 3:10-15)은 구원이 아니라 상급과 관련해서 그렇다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상급의 형태가 어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따로 토의할 문제이다. 차등상급이 계급적 위계질서를 낳는 형태여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상급이 물질적인 것으로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일단 알아야 한다. 영원한 천국은 완성이요 충만이기 때문에 위계질서를 생각할 수는 없다. 그래서 아마도 상급은 서로를 더 섬길 기회를 주시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둘째, 신자가 이 땅에서 살면서 구원의 길에서 도중에 탈락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 같은 구절들(갈 3:3, 딤전 1:19)은 참된 믿음이 있는 자에 대해 말하는 구절이 아니다. 이들 본문이 말하는 “구원의 길에서 탈락하는 자들”은 처음부터 참된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마 25:31-46에서도 마찬가지).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께서 지키시기 때문이다.

 

산상수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라는 경고의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최후 심판 때에 행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자들은 이미 예수님 믿고 구원 받았으나, 신앙생활에서 행위가 부족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라고 하셨다. 여기서 “도무지(헬라어, 우데포테)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전혀 알지 못한다, 한 번도 안 적이 없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최후 심판 때에 행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한 번도 믿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히브리서 6장에서, 구원의 길에서 탈락할 가능성에 대한 언급들은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고성”으로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히 6:4-9). 히브리서 기자가 그런 경고 뒤에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히 6:9)”라고 덧붙이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갈라디아서의 경우,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라고 질문한 것은, 아직까지 그들이 믿음에서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므로 아직은 기회가 있는 상태에서 경고를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을 가진 자가 그 구원의 길에서 결코 탈락할 수 없다는 입장은 위와 같은 설명으로 여전히 견지될 수 있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그 길에서 멀어져 버린 사람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만일 그들이 그 상태로 세상을 떠난다면, 처음부터 바른 믿음을 안 가졌다고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이 살아있다면 그리고 그들이 정말 참된 믿음을 가졌다면, 지금은 그렇게 하나님과 멀어져 있어도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종종 죽음의 자리(death bed)에서도 역사하사 구원을 이루신다.

 

셋째, 신자가 구원을 열심히 이뤄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구절은 구원의 획득을 위해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라, 성화의 삶을 권면하는 구절로 이해해야 한다.

 

특별히 그런 구절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도우심을 함께 강조한다. 대표적으로 빌립보서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라는 말씀은 곧 이어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2:13)”라는 말씀이 덧붙여져 있다. 신앙의 길은 인간의 책임성 있는 반응이 요청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주도적인 은혜주심 속에서 이뤄지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보다 확실한 구절에서 시작하는 성경해석

 

이처럼,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영원히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구절들(“A그룹 구절”이라 부름)에서부터 출발하면, 구원의 길에서 현재든 최종심판대에서든 탈락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은 구절들(“B그룹 구절”이라 부름)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성경에서 보다 명확한 구절들을 중심으로 보다 불명확한 구절들로 접근하는 성경 해석의 원칙을 지키면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만일 B그룹 구절들에서부터 시작하면 A그룹 구절들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구원에서부터 탈락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참된 신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요 5:24, 6:40),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자가 되었고(고전 6:20), 그리스도와 죽음과 부활에서 연합했으며(롬 6:5), 하나님의 양자양녀가 되었고(롬 8:14-15), 성령께서 구원의 보증이 되시며(고후 1:22, 5:5),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으며(롬 8:1), 장차 진노에서 구원 받는다(롬 5:9)는 구절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모순이 없다는 것을 믿고, 일견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도 최대한 원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인간의 이해력이 가진 한계 상 성경이 가르치는 모든 가르침을 다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이해력의 한계이지 성경이 모순을 가진 책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결론: 가망성 없는 아르뱅주의

 

나는 A그룹에서 출발하여 B그룹을 이해하려는 입장이 정통 기독교를 따르며 종교개혁의 신학에 부합하는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B그룹에서 출발하여 A그룹을 무시하거나 약화시키는 입장은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이며 반펠라기우스주의적인 입장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성경의 일관성은 믿고 있다.

 

하지만 A그룹과 B그룹을 동시에 인정하려고 하는 입장은 겉으로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상 모순을 그냥 품고 가자는 입장으로서, 건전한 인간의 지성이 받아들일 수 없고 계시의 온전성을 믿는 신자로서는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으며 교회사를 통해서도 가망성 없는 입장으로 판명이 난 견해라 생각한다. 아르뱅주의자들의 입장이 지금 이 마지막 입장이다.

 

 

< 저작권자 ⓒ 개혁정론

개혁주의마을

고린도전서 14장 번역과 주석

노우호 목사는 바울이 본래 방언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성령의 은사의 하나로 보는 것은 고린도전서 14장의 몇몇 구절들을 잘못 번역했거나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례들을 든다.

1. 고린도전서 14장 2절을 흔히 방언 기도에 대한 바울의 정의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바울이 잘못된 방언을 꾸짖는 것이다.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인데 하나님께 한다고 하는 것을 바울이 교정하는 것이다(115).
2. 고린도전서 14장 4절에서 방언하는 자가 자기를 세운다는 말은 부정적인 말로 교회를 세우는 것에 반대된 것이다. 곧 자기를 세운다는 말은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는 말이다.
3. 고린도전서 14장 14절에서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에서 동사는 가정법인데 이것은 현실과 반대되는 상상의 말이다. 그래서 그가 제시하는 올바른 번역은 “내가 만일(ean=if)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한다고 하지만(de=but) 나의 마음에는 아무런 열매가 없다”이다(118).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서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 한 말도 영과 이성으로 모두 기도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만약 방언 기도가 있다면 미래에 영과 마음으로 번갈아 기도해야 하는데 그러면 얼마나 번거롭겠는가.”라는 말이다.
4. 고린도전서 14장 18절과 39절에서 바울이 방언을 했다고 하고 또 방언을 하라고 할 때, 그 방언은 외국어를 의미한다. 바울은 외국어를 잘했고, 또 사람들에게 외국어를 하도록 권고했다. 바울은 단수형 명사를 사용해서는 고린도교회의 가짜 방언을, 외국어를 나타낼 때는 복수형 명사를 사용했다.
5. 고린도전서 14장 40절의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는 개역개정의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로 고쳐야 한다. 현대 교회에서 하는 방언 행습은 ‘품위 없게 하는 것’이다.

책에서, 또한 유투브에서 노우호 목사는 이 부분을 주장할 때 매우 교조적으로, 확신 있게 말한다. 사실 여기에서 주장하는 내용에는 상당한 정도의 헬라어 실력과 성서학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필자는 그가 신약학에 대해서 어느 정도 훈련을 받은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쓴 내용으로 볼 때 다음에서 밝혀질 것이지만 그의 성서 번역과 주석에는 억지와 무지가 난무한다.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고?(14:2)

헬라어:? γ?ρ λαλ?ν γλ?σσ? ο?κ ?νθρ?ποις λαλε? ?λλ? θε?· ο?δε?ς γ?ρ ?κο?ει, πνε?ματι δ? λαλε? μυστ?ρια·
개역개정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노우호역: 왜냐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말을 사람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말하기 때문에 아무도 알아듣는 자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de=but) 그의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114).

여기서 노우호 목사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번역한 단어는 접속사 γ?ρ와 불변화사 δ?다. 그는 문장 첫 마디에 있는 γ?ρ는 번역하고 뒤에 나오는 γ?ρ는 번역하지 않는다. 이 접속사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로 “왜냐하면” 혹은 “그 이유는”이라는 뜻으로 가장 많이 쓰인다(요 2:25). 그런데 또 많은 경우에 “확실히”라는 뜻으로 문장과 문장을 연결하면서 쓰이기도 한다(롬 2:25). 그러면 그 의미는 문장과 문맥에서 결정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에서 바울은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을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문장과 14장 2절의 문장과는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다. 바울은 예언을 하라고 해놓고 방언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γ?ρ는 별 뜻 없이 사용된 것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이 γ?ρ가 번역되면 여기서 이 접속사는 14장 2-4절 전체에 걸려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14:1). 그 이유는 방언은 그렇지 않는데 비해 예언은 교회를 세우기 때문이다(14:2-3).” 그런데 14장 2절의 중간에 있는 γ?ρ는 본 절 안에서 두 문장의 관계를 명확히 말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인간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혹은 즉] 영에 의해 신비를 말하여 아무도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우호 역은 매우 엉뚱하다. 첫 번째 γ?ρ가 14장 2-4절 전체에 걸려 있는 것이고, 두 번째 γ?ρ는 14장 2절 내의 두 문장에 관련된 것인데, 14장 2절 내에서 앞 문장을 이유의 근거로, 뒤 문장을 그 결과로 번역하고 있다. 이런 번역은 헬라어 문법상 가능하지 않다. 본문 내에서는 그가 말한 것과는 오히려 반대로 뒤 문장이 이유의 근거이다. 올바른 번역은 이렇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인간들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γ?ρ) 그것은 그는 영으로(혹은 성령으로) 신비를 말하여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불변화사 δ?에 대한 번역이다. 이 단어는 문장의 계속을 나타내는데 주로 쓰여 “이제, 그리고, 그런데”라는 뜻이다. 문장에서 비교되는 것이 상반될 때 이 단어는 “그러나” 혹은 “이와 대조적으로”라는 뜻으로 쓰인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4장 4절에서 바울은 “세우다”라는 동사로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는데 여기에서 δ?가 쓰였다. 여기서 이 단어의 뜻은 “이에 반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14장 1절의 문맥에서 δ?는 어떤 의미로 쓰인 것인가? 여기서는 δ?가 어떤 두 개념을 대조시키는 것과 연관되어 사용되지 않았다. 단지 문장의 계속을 의미할 뿐이다. 특별히 번역할 아무 뜻도 없는 것이다. 현대의 대부분의 번역본에서도 본 절의 δ?는 번역되지 않았다.

설혹 δ?가 본 문맥에서 “그러나”를 의미한다고 해도 노우호 목사의 번역은 말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δ?가 “하지만”을 의미하려면 이 문장은 이렇게 번역되어야 한다. “방언은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는 영으로 신비를 말한다.” 여기서 뒤 문장은 부정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14장 14-15절에서 영으로 말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여기서도 바울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지만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신비를 말하는 것으로 보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위에서 말한 것을 종합해 보면 노우호 목사의 번역은 완벽한 오역이다. 그는 자신이 모델로 삼은 KJV조차도 올바로 번역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14장 2-4절의 KJV을 보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한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즉[혹은 왜냐하면] 아무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영으로 신비를 말한다.”(For he that speaketh in an unknown tongue speaketh not unto men, but unto God: for no man understandeth him; howbeit in the spirit he speaketh mysteries.)
KJV은 전반적으로 방언을 부정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지만, 본 절에서는 방언이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노우호 목사는 왜 이런 오류를 범하게 되었을까? 그는 바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방언은 외국어라는 것을 기정사실화하여 방언을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이 본문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도행전이 말하는 방언을 외국어를 말하는 표적이라고 보고, 이 정의를 바울 본문에 대입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글에서 방언을 정의하는데, 노우호 목사는 다른 곳에서 가져온 정의를 여기에 심고 있는 것이다.
본 문맥에서 바울은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면서 예언은 그 방향이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고(14:3), 방언은 하나님께 말한다고 하는데(14:2), 노 목사 주장대로 방언이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면 문맥상 방언과 예언의 대조가 성립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노우호 목사의 고린도전서 14장 2절 번역은 헬라어 문법과 문맥, 바울 전체 신학으로 볼 때 완전히 틀린 것이다. 
  
방언이 자기를 세운다는 말은 방언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하는 말이라고?(14:4)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4절에서 방언과 예언을 “세우다”라는 단어로 비교한다. 방언은 자신을 세우는 데 반해, 예언은 교회를 세운다. 노우호 목사는 본 문맥을 교회를 세우는 긍정적인 면과 자신을 세우는 부정적인 면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교회를 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만방언은 자신을 세우기 때문에 나쁘다는 것이다. 학자들 중에도 이렇게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기는 하다. 또 중도적 입장을 취하려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문맥에서 볼 때 이러한 해석은 바울의 생각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 그 다음 절(5절)에서 바울은 “나는 너희 모두가 다 방언으로 말하기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문맥상 바울이 방언을 부정하고 예언을 인정한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은사라는 면에서 이 두 은사는 모두가 사모해야 할 은사인데(고전 12:31; 14:1), 공동체 예배 가운데 사용될 때 소통이 일어나지 않으면 교회, 즉 타인에게 아무런 “세움”(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언은 그 자체로 소통이 일어나는 은사이기 때문에 교회 예배 가운데서 더 권장된다. 반면, 방언은 개인 스스로를 세우기에 개인 기도에서 귀중하다. 다만, 예배 가운데 사용할 때는 공동체를 위해서 반드시 통역을 동반해야 한다(고전 14:5). 그러므로 바울이 방언을 개인의 영성을 함양한다는 의미로 “방언이 자신을 세운다”고 한 것은 방언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한 적이 없다고?(14:14)

노우호 목사는 바울이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말을 쓰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14장 14절에서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ν [γ?ρ] προσε?χωμαι γλ?σσ?)에 사용된 동사가 가정법 현재형인데, 헬라어에서 가정법은 현실을 반대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바울은 방언기도가 없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노 목사는 영어의 가정법과 헬라어 가정법을 헷갈린 것 같다. 헬라어 사전에서 ??ν을 찾아보면 이런 용법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상상의 조건을 인도하는 영어의 if와 같은 용법이 있다(막 3:24). 하지만 ??ν은 많은 경우에 미래에 나타날 조건을 말하는 영어의 if와 whenever, 혹은 when을 의미한다(요 14:3). 또한 단순히 시간을 나타내는 when의 의미로도 쓰인다(살전 3:8). 물론, 그 용례는 문맥에서 결정된다. 본 문맥에서 ??ν은 when의 의미다. 방언이 사람이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라면(고전 14:2) 이것은 당연히 기도 혹은 찬양일 수 있다. 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방언으로 기도하면 자신의 영이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 다음 구절에서 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영으로도 기도하고(방언으로 기도하고), 또 이성으로 기도할 것이라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노우호 목사는 사용된 동사가 미래형이기 때문에 바울이 그렇게 기도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기도하는 자가 얼마나 법거롭겠는가?” 하고 바울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역시 말이 되지 않는 해석이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주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자 자신 스스로가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은 방언으로 기도하지만 이성으로도 기도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방언은 외국어를 많이 말하는 것을 감사했다고?(14:18)

노우호 목사는 바울이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는 말은 바울이 여러 외국어를 말하는 것을 감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해야 한다. 첫째, 이것이 옳다면 영적 은사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왜 바울이 갑자기 자신이 외국어를 잘한다는 말을 했는가? 둘째, 이어지는 구절에서 바울은 깨달은 이성으로 다섯 마디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고 했는데(고전 14:19), 만약 방언이 외국어라면 선교를 위한 일만 마디 외국어가 어떤 이유로 이성에 기인한 다섯 마디 말보다 못한 것인가? 한 마디로, 이렇게 해석하면 뒷말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통성으로 방언기도 하는 것은 품위 없는 행위라고?(14:40)

노우호 목사는 고린도전서 14장 40절의 “적당하게 하고”(개역한글)를 개역개정성경이 “품위 있게 하고”로 번역한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방언과 연관하여 “품위 있게” 행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가 설정한 품위와 질서는 조용하게 질서를 지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현대 교회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도 그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26-40절에서 말하는 품위와 질서는 예배 시 방언을 비롯한 여러 은사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차례를 지키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에서 방언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하지 않게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바울의 입장은 노 목사의 입장과는 상당히 다르다.

이상을 통해서 고린도전서 14장의 번역 문제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노우호 목사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새로운 성서 번역을 시도했지만, 그의 헬라어 실력과 신약학에 대한 지식으로 볼 때 새로운 번역 제시는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는 이러한 번역을 확인하기 위해 이 분야의 전문가에게 좀 더 물어보았어야 했다. 필자가 보기에 노 목사의 헬라어 실력, 주석 실력, 바울 신학에 대한 이해는 초보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전제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매우 억지스런 문법과 번역을 들이댄 것이다.

방언부정론 평가

노우호 목사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현대 교회의 방언을 검증하지 않은 것은 직무유기였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방언부정론을 설파했다. 그러나 그의 방언부정론은 신학적 고찰과 성경의 내용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성서적 근거가 미약한 주장
노우호 목사의 주장은 은사중지론과 공통점과 상이점이 있다. 성령의 은사에 관한 그의 사상 기저에는 은사중지론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방언론은 은사중지론의 한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주장은 은사중지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은사부정론까지 간다. 그는 바울에게 있어 방언 기도의 은사는 있었다가 중지된 것이 아니라 아예 그런 것은 없었다고 한 것이다. 한 때 바울이 잠시 오해해서 고린도교인들의 방언을 성령의 은사로 착각한 적은 있었으나 후속 서신에서 그것을 바로 잡아 방언의 은사라고 하는 고린도교인들의 헛소리를 부정했다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이러한 주장은 바울 방언론을 완전히 곡해한 것이다. 바울은 방언이 성령이 은사라는 것을 부정한 적이 없다. 또 방언이 영으로 기도하는 은사라는 것을 부정한 적도 물론 없다.

어설픈 역사비평적 성서 이해에 의한 주장
방언 반대자 중 특이하게 노우호 목사는 성서해석을 하는데 있어 역사비평적 방법을 일부 도입한다. 그는 대담하게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방언에 대해서 고린도전서에서는 잘못 판단하고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중에 사실을 알고, 고린도후서에서(특히 11장에서) 이 오류를 교정했다는 것이다. 또 고린도전서보다 후에 쓰여진 로마서에도 은사 목록이 나오는데(12:6-8), 여기에 방언이 나오지 않는 것은 그 사이에 바울의 방언 은사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한다(30-31). 그러나 기본적으로 신약성서 서신은 상황에 따라 그에 필요한 메시지를 전한 것이지, 계속해서 어떤 주장을 업데이트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 다 은사이지만, 그 성격상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바울이 말한 은사는 영적인 은사이고, 로마서 12장에서 말한 것은 교회 봉사를 위한 재능과 같은 것이다. 비록 그가 신약학자들이 사용하는 역사비평적 방법을 도입하여 성서를 해석하기는 했으나, 그 방법을 제대로 익히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 결과 그는 매우 엉뚱한 해석을 내놓고 말았다.

편견에 의해 균형을 잃은 주장
본서에서 그가 얼마나 편견에 사로잡혀 본서를 쓴 것인가는 다음 인용구를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다.

“작금 한국 교회에 번지고 있는 방언을 두고 지난 37년 동안 검증해 본 결과는 100% 거짓 방언이었다.”(5)
“필자가 알기에는 정상적이고 아름답게 사역을 하고 주님께로 가신 분들 중에 방언기도를 했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229)
“방언하는 사람들은 남의 말을 잘 수용하지 않는 편협한 사람들이 많았다.”(201)
“..지난 200년 동안 여성들 중에서는 탁월한 신학자나 철학자가 없었다.”(110)

이 인용구들 속에 그가 하고자 하는 말, 그의 편견, 그의 철학이 그대로 배어 있다. 첫째, 방언과 방언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생각은 그야 말대로 편견에 사로잡힌 것이다. 둘째, 남성우월 사상에 의한 그의 여성에 대한 편견은 상식적인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위험 수위에 올라있다. 셋째, 성서학 전문가도 아니요 영적 은사에 대한 체험도 별로 없는 개인이 자신의 권위로 방언을 혼자 검증하고 확신에 찬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들께

우리는 어떤 사람이 말하는 내용보다도 확신 있게 말하는 태도에 의해 그에게 설득당할 수 있다. 또 그러한 주장을 듣고 자신의 믿음이 흔들릴 수도 있다. 노우호 목사의 방언부정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의 확신에 찬 태도와 달리 그의 주장은 성서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확신의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바울과 누가 모두에게 방언은 성령의 충만으로 나타나는 한 결과 혹은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다. 이것을 성경이 말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바울과 누가가 기록한 성경말씀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필자는 신약학자로서 방언에 대해서 십 수 년 간 집중적으로 이를 연구한 사람으로서 방언중지론, 방언부정론은 성서가 말하는 중요한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독자 중 아무도 이러한 이론에 현혹되지 말고 계속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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