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목윤,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바람직한 관계' 세미나

"원로와 후임자의 관계, 역지사지로!"

 

한국교회 130년의 전통을 이어오면서 담임목사 세대교체는 목회현장의 피할 수 없는 당면과제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원로목사와 후임목사간의 갈등 문제 역시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

 

원로목사와 후임목사, 교우들 전체가 공동으로 노력하며 갈등의 공동체가 화합과 평화의 공동체로 변할 수 있도록 하는 ‘원로목사와 후임목사의 바람직한 관계’와 관련된 다양한 이슈가 논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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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목회자윤리위원(위원장 전병금 목사)에서는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바람직한 관계’라는 주제로 16일 오후 2시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세미나를 가졌다. © 뉴스파워 윤지숙 기자 

 

한국교회목회자윤리위원(위원장 전병금 목사)에서는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바람직한 관계’라는 주제로 16일 오후 2시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세미나를 가졌다.

 

이날 김승호 교수, 백장흠·손인웅 목사, 강준모·최성은 목사가 ‘원로(은퇴)목사가 은퇴 이후에 어떻게 보다 의미 있는 생을 살 수 있을 것인가?’, ‘후임목사가 새로운 교회에서 어떻게 리더십을 공고히 세워나갈 수 있을 것인가’, ‘교우들이 원로목사와 후임목사가 처해 있는 환경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등에 대해 발제와 발표를 맡았다

 

주제발제에서 김승호 교수(영남신대, 기독교윤리학)는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 교회는 원로목사와 후임목사 사이의 갈등이 보다 첨예한 이슈로 부각되어 왔다. 이러한 갈등은 심리적·문화적·역사적·신학적 원인들과 교회 내외의 다양한 원인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서두를 열었다.

 

이어 “전국적으로 이러한 갈등이 현재 진행형인 교회들이 많다. 평생 목회에 헌신했던 원로의 명예를 실추시켜 본인과 가족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정신적 고통을 겪게 하거나 후임목사의 목회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어 목회본질에 열정을 쏟지 못하고 사임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갈등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가족들과 교회 교인들 전체가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다.”고 문제의 심각성을 언급했다.

 

사례로는 △목회철학(교회성장중심vs사회적책임중심)의 차이, △목회방식(심방중심vs설교중심, 선교중심vs지역사회봉사중심, 예배형식, 교회조직 운영, 회의진행, 시간사용 등)에 대한 이해의 차이, △심리적(허탈감과 공허감v열정과 목회능력 증명) 차이, △교인들 시각(친분과 새로운 기대, 과도한 칭찬)의 차이 등을 갈등의 원인으로 분석했다.

 

바람직한 관계를 위해 원로목사가 숙고해야 할 사항으로 △리더십을 이양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 △은퇴한 교회를 떠나 가급적 새로운 교회에 출석, △은퇴이후 직면할 복잡한 심리적 감정에 대해 예상하고 미리 대비할 것, △교회도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 준비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줄 것 등.

 

후임목사가 숙고해야할 사항으로, △원로목사에 대한 교우들의 향수 인식, △원로목사의 목회에 대한 계승과 새로운 목회에 대한 기대에 대한 진지한 고민, △목회에 대한 급격한 변화가 나타날 경우, 원로목사가 평생토록 가꾸어 온 터 위에 자신의 목회가 열매를 거두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것, △일반교우들과 중직들의 요구, 원로목사와 함께 해 온 교회의 역사와 문화적 맥락 잘 고려한 변화와 속도 조절, △특별행사나 명절에 원로 목사 초청 설교나 축도의 기회 제공 등은 원로와 후임 뿐 아니라 교회 전체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된다고 강조했다.

 

원로목사의 입장에서 발언한 백장흠 원로목사(한우리교회)는 “‘세습의 문제에 대해 각 교단이 법으로 제재하는 이유는 아버지 덕으로 편하게 큰 교회에서 사역하게 하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이라며, “원로목사도 후임목사도 ‘주님의 교회지, 내 교회가 아니다.’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원로는 “은퇴가 무언지 깨닫고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라. 섭섭한 마음이 들지라도 ‘은퇴했으니 그게 정상이다.’라고 받아들이라. 후임이 오면 잘하는 것도 보이지만 잘 못하는 것도 보인다. 그럴 때 기도하라. 교인들이 후임목사에 대해 안 좋게 말하더라도 ‘더 기다려 보세요. 잘하겠다는 의지가 보이지 않습니까?’라며 후임 편에 서서 항상 관용을 베풀라!”고 전했다.

 

후임에 대해서는 “자신이 대단한 능력이 있어 교회에 부임했다고 착각하지 말라. 또한 급하게 당장 교회를 바꾸려 하지 말라. 원로도 ‘잘하겠다.’고 몸부림치다 은퇴했다. 더 공부하고 분석하며 천천히 바꿔가라.”며, “특히 원로를 부담으로 여길게 아니라 협력자로 삼으라. 원로의 필요와 요구를 들어주며 사랑으로 배려해 드리라. 자신도 언젠가는 원로가 된다.”고 조언했다.

 

손인웅 원로목사(덕수교회)는 교인들의 역할에 대해 “전임목사에 대한 정과 친분을 소중히 간직하면서 항상 존경심과 감사한 마음을 품고 가르쳐주신 신앙을 잘 지켜서 교회를 잘 섬기는 성도가 되는 것이 원로목사에 대한 최고의 보답이다. 후임목사를 사랑하고 위하면서 목회를 잘 돕는 것도 성도들의 도리다.

 

이어 “원로목사들이여! 노욕을 부리지 말고 후배들과 한국교회 미래를 위해서 남은 여력으로 연합과 일치, 갱신과 섬김의 사역에 매진하자. 교인들이여! 원로와 담임을 절대 비교하지 말고 한결 같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노력만 해야 할 것이다. 이간질 하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큰 죄악이다.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고 교회를 생명처럼 사랑하자!”고 권면했다.

 

후임목사의 입장에서 발언한 강준모 목사(남성교회)는 “전임자는 어려운 목회를 이어갈 후임자를 보면 짠한 마음을 갖게 되고, 후임자는 전임자가 남기고 간 흔적을 따라가며 그 수고에 경의를 표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아름다운 관계였다.”고 세대교체에 대한 정황을 이야기했다.

 

이어 “역지사지(易地思之)! 이 시대, 전임자와 후임자의 바람직한 관계를 위해 이 정신을 먼저 회복해야 한다. 영원한 전임자도 없고, 영원한 후임자도 없다. 무엇보다 공동체의 화평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전임자이건 후임자이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며 교인들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성은 목사(남서울교회)는 ‘바람직한 은퇴문화 정립’을 위해 “느보산에서 모세가 40년간의 여정을 끝내고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리더십을 전수하는 장면은 목회의 은퇴와 지도력이 어떻게 연속적으로 계승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전통”이라고 전했다.

 

이어 “마치 가족이 서로 헤어질 수 없는 것처럼 원로목사와 담임목사 사이도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줄 믿고, 서로 돕고 의지하며 한 길을 가야한다.”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나라를 위해 세우신 주님의 교회 속에서 십자가의 사랑을 교인들에게 강론하기 전에 교인들이 제일 잘 보이는 위치에 있는 담임과 원로 목사가 서로 주님의 은혜 안에서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 여기서부터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가 세워질 것”이라고 피력했다.

 

*‘원로목사’는 한 교회에서 20년 이상을 계속 시무하던 목사가 시무를 사면할 때 교회가 그 명예를 보존하기 위해 원로목사로 추대된 목사를 말한다. 원로목사는 공동의회에서 투표하여 노회의 허락을 받아야하고 그 예우는 교회의 형편에 따른다.(예장통합 헌법 제2편 정치 제27조 7항 참조)

 

윤지숙  ⓒ 뉴스파워

가져온 곳: USA 아멘넷

-일하시는 하나님-

본문: 창세기 1장1절-2장3절

창세기 처음 부분은 창조기사입니다.

1장 1절의 말씀은 서술적 도입부로서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밝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1장 2절은 창조 이전 상태를 말합니다.

1장 3절로 31절까지는 창조기사입니다.

2장 1절은 결론적인 요약입니다.

그리고 2장 2-3절은 맺는 말로서 안식일의 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1장 2절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말씀은 틀도 없고 틀 안에 담을 내용물도 없다는 표현입니다. 거기다가 어두움이 온통 뒤덮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빛이 없는 연고입니다. 그래서 첫째 날 자연스레 빛을 먼저 창조하신 것이지요.

다만 하나님의 신(성령 혹은 성신님)은 수면 위에서 본격적인 창조를 위해 계실 뿐입니다.

첫 사흘은 혼돈(틀이 없음)에서 질서(틀을 만듬)를 만드시고, 뒷 사흘은 공허(속이 빈 상태)를 없애고 내용물을 채워넣는 창조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 날 빛의 창조-네째 날 해 달 별 창조

둘째 날 아랫 물과 위의 물 분리함으로 궁창(하늘) 창조- 다섯째 날 하늘의 궁창에 새 창조, 아랫 물에 물고기 창조

세째 날 바다와 땅을 창조-땅에 풀 채소와 과목 창조-여섯째 날 풀을 먹을 육축 짐승 기는 것들
그리고 씨맺는 채소와 과목을 먹을 사람(남여)을 창조 이렇게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를 끝내시고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사 복 주시며 쉬셨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만물의 주인이신 절대주권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일하심이 잘 드러나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또한 열심히 일하신(창조하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얼마나 온 힘을 기울여 일하셨으면 쉬셨다는 표현을 쓰셨겠습니까.

심혈을 기울여서 그 분의 뜻대로 만물을 창조하시되, 창조하신 바가 창조 목적에 부합했기에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대충이란 말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맡기신 모든 일들을 심혈을 기울여서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합니다. 그래야 안식의 참 된 의미를 온 마음과 몸으로 알게 되고 누릴 것입니다.

게으름과 나태, 무사안일은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 우리의 소임은 끝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씀을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합니다.

지금도 성 삼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첫 창조가 인간의 시조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저주와 사망 아래 놓이게 되자 하나님은 처음 창조를 바탕으로 재창조에 들어가게 되셨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일하신다'-이것을 단순히 우리의 이해의 수준으로 끌어내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창조의 완성을 내다보고 일하시는 창조역사(役事)입니다.

창조의 완성 때까지 열심히 일하실 하나님이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재창조의 결국을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재창조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우리 구원의 완성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도성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할 하늘의 새 예루살렘을 밝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할까요?

첫 창조의 산물인 하늘과 땅과 만물을 붙드시고 섭리하시고 운행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토대일 뿐입니다. 그것을 고쳐서 새롭게 하시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끝나고 나면 베드로후서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0-13)는 말씀이 이루어질 때가지만 붙드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의미는 하나님을 닮은 사람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럼과 함께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경영하시는 그 큰 경륜을 알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일은 '복음 전파를 통한 죄인 구원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아감'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일하시는 것을 알았다면 그분의 자녀 된 우리도 일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홀로 외로이 일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삼위 하나님이 동일한 보조로 일하십니다.
그리고 그 분의 자녀들과 함께 일하시되 주권적으로 일하십니다. 천군과 천사를 부리십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엎드리면서 그 분의 뜻대로 일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의 뜻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일에 동참함에 대한 인식의 결여는 나태와 게으름, 안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내다보고 기뻐하는 자마다 열심을 품고 날마다 주의 일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창세기의 첫 부분인 창조기사를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알고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지금도 일하실 수밖에 없으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그 일하심에 동참하는 복된 여러분이 다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하며 자원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드려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 자신이 하셔야 할 일을 하나님 자신 스스로에게 부여하여 그 직임을 이루어 가심을 뜻한다.

인간의 예로는, 각자에게 주어진 직분을 청지기의 자세로 잘 감당할 때 각자의 경륜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글: 구자준 목사

제 5장 성신과 종말론 / 리처드 개핀

 

 

3. 하지만 성신의 사역의 종말론적 양상을 가장 현저하고 분명하게 선포하는 분은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는 성신을 '보증'과 '첫 열매'로 표현하는데, 그가 이러한 용어들을 써서 성신에 관해 가르친 데에는 교회가 현재 성신을 받아 가지고 있는 상태가 잠정적이면서도 진정으로 종말론적임을 알리려는 구체적인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아라본'(보증)과 '아파르케'(첫 열매)라는 이 단어들은 성신의 역사를 바울 종말론의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의 구조 안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에베소서 1:14은 성신께서 "우리(곧 교회)의 기업에 보증"이 되셨다고 말하는데, 이는 명백히 종말론적 범주에 해당합니다(참조. 특히 1:13과 4:30; 5:5). 그리고 로마서 8:23과 고린도후서 5:5은 성신께서 신자가 장차 입게 될 부활의 몸, 즉 육체의 종말론적 존재에 대한 '첫 열매'와 '보증'이시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성신에 대하여 이러한 단어들을 사용한 목적은 교회에 임재해 계시는 성신, 곧 모든 신자 안에 내주하시면서 풍성하고 다양하게 역사하시는 성신께서 마지막 날에 치를 금액의 첫 지불금이심을 알리려는 데 있습니다. 이 첫 지불금은 그 자체가 종말의 실현입니다. 성신께서는 종말론적 존재의 첫 지불금이십니다. 그러한 구체적인 의미에서, 성신께서는 신자들이 이미 처음에 받은 것을 그리스도의 재림 때 온전히 받게 될 것에 대한 보증이십니다. 성신의 역사는 육체의 부활로써 온전히 성취될 종말론적 변화를 미리 잠정적으로 경험하게 합니다.

 

더 나아가, 이 두 단어는 바울이 성신께 관해 생각할 때 그 방향이 현재로부터 미래로 움직이지 않고, 미래로부터 현재로 움직였음을 보여 줍니다. 즉 미래가 현재의 연장이라기보다(그렇다고도 말할 수 있긴 하지만) 현재가 (종말론적) 미래를 미리 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히브리서 기자와 온전히 일치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신구약 중간기의 유대주의에서 취한 역사적-종말론적 구도를 근거로 성신과 연관된 권능을 "내세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6:4-5).

 

사도 바울이 성신의 역사를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해했다는 것은 위대한 부활을 언급한 고린도전서 15장에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사도는 42-49절의 단락에서 신자가 장차 입을 부활의 (종말론적) 몸을 묘사하기 위해서 '신령한'(spiritual, 프뉴마티콘. 44절)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형용사가 가리키는 것은 인간적인 것, 곧 정신에 적응되거나 정신의 지배를 받는 몸도 아니고, 본질적인 것, 곧 부활의 몸이 지닐 것으로 추정되는 비물질적인 영적 실체도 아니며, 다만 성신의 활동입니다. 사도의 논지는 종말론적 특성들을 지닌 부활의 몸이 신령하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몸이 성신에 의해 철저히 변화하고 새로워질 것이므로,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할 만한 한 단어가 구체적으로 '신령한'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이 단락은 종말에 성신께서 행하시는 사역이 우주적인 차원의 것임을 생각하게도 합니다. 사도는 단지 관념적으로 부활의 몸에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신자가 부활의 몸을 입게 되는 맥락이나 상황도 함께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도가 부활 전의 몸과 부활의 몸을 대조할 때(42-44절), 그 근거를 각각 대표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자 둘째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총체적이고도 포괄적으로 대조하는 데 두는 사실에서 잘 나타납니다(45, 47-49절). 따라서 마지막 아담과 관련되시는 성신께서는 다름 아닌 새롭고 종말론적인 창조 질서의 모든 양상에 영향을 끼치면서 우주적인 규모로 수행됩니다(참조. 롬8:19-23).

 

여기서 주의할 점은, 사도 바울의 이러한 교훈은 추상적이고 독립된 종말론적 원리들로, 즉 다소 고립된 영적인 교훈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교훈을 사도의 교훈 전체를 관통하는 구속적-역사적 관점과 관련지어 다루어야 합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고린도전서 15:45 하반절을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15:45 하반절)

 

내 판단으로는, 이 절을 주의 깊게 해석해 보면 다음 두 가지를 알게 됩니다. 첫째, '영'(프뉴마)은 성신의 위격을 가리킵니다. 둘째, '되었나니'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부활 시에, 혹은 좀 더 광범위하게 그리스도께서 높아지셨을 때 된 일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사도는 부활을 기점으로 높이 되신 그리스도와 성신 사이에 이루어진 어떤 동일시, 혹은 연합이나 일치를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기독론과 성신론은 물론, 신약 성경의 나머지 상당 부분의 교훈도 주관하는 대단히 중요한 고려 사항입니다. 성신과 성신의 종말론적 사역에 관한 모든 사유는 이 동일화에 매여 있어야 합니다.

 

기우이지만, 나의 이 말을 곡해하여 삼위일체를 혼동했다거나 그리스도와 성신 사이의 위격 구분을 부정하거나 모호하게 했다고 받아들이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바울 사도가 삼위일체 사이의 내적 관계를 모를 리 없지만(참조. 예. 롬1:3, 8:3,32; 9:5; 빌2:6), 여기서 그것은 그의 시야 범위를 벗어나 있습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본질적 신성을 근거로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 안에서, 즉 '마지막 아담' 혹은 '둘째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경험하는 바에 관하여 말합니다(47절). 그의 관점은 그리스도께서 무엇이 '되셨는가'에 눈길을 두는 역사적인 관점입니다. 그가 바라보는 그리스도와 성신의 하나 됨 곧 동일화는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경륜적이고 기능적이고 '종말론적'인 동일화입니다.

 

바울의 논지는 활(영화)에 의하여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께서는 성신에 의해 완전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변화되셨을 뿐 아니라, 성신에 의해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사로잡힌바 되신 까닭에, 두 분이 각자의 사역에서 하나가 되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두 분이 구체적으로 '생명을 주는', 즉 종말론적인 부활의 생명을 주시는 일에서 하나가 되셨기에 두 분을 한 분으로 보아야 합니다.

 

15장의 문맥에서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시는 이러한 활동(20절)은 여전히 미래에 이루어질 추수, 곧 몸의 부활을 지향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지금 누구시고 어떤 분이 되셨는가('살려 주는 영') 하는 점 때문에, 종말론적 생명을 주시는 일을 지금 하시는 것이 적어도 암시는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부인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신약 신학의 포괄적인 프로그램의 관점에서 볼 때, 고린도전서 15:45 하반절은 사실상 오순절에 관한 사도 바울의 한 문장짜리 주석이라고 하겠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사도행전 2:32-33에서 선포하듯이 오순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와 연결된 일이고 단회적이고 영구한 의의를 가졌습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오순절의 성신 강림은 단지 그리스도의 사역에 무엇을 덧붙인 것도 아니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넘어서거나 보완하는 다소 독립된 활동 영역도 아닙니다.

 

오히려 오순절은 그릿도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어떤 일을 행하셨다는 것뿐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시면서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행하고 계신다는 것까지도 밝히 말해 줍니다. 오순절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성신을 선물로 주신 날이기도 했지만, 더 나아가 주님께서 친히 '살려 주는 영'으로서 주님의 교회에 오신 날이기도 합니다. 오순절에 예수님께서 성신으로 세례를 베푸실 때 친히 그 자리에 임재하시어서 자기 자신으로 세례를 베푸셨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성신을 선물로 주신 것은 곧 그리스도 자신 곧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비슷한 사고 유형이 요한복음 14-16장에도 나타납니다. 특히 14:12 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심'을 전제로 성신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그것은 동시에 예수님 자신의 '오심'에 대한 약속입니다(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참조. 16:16 이하). 예수님께서 영화롭게 되신 뒤에 성신께서 오심(참조. 7:39)은 곧 예수님의 오심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마지막 부분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고 약속하실 때(마28:20), 그 약속은 그리스도의 신적 편재(遍在)로만 해석해서는 안 되고, 그보다는 성신의 임재와 권능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4. 신약 성경의 이러한 조망을 정리하여 그 주된 논지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종말론적 성신은 높이 되신 그리스도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납득할 만한 일반화인지를 신약 성경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 자체로는 오해의 소지가 큽니다. 이것은 매우 함축적이어서 설명이 필요합니다. 좀 더 설명하자면, 성신 안에 있는 종말론적 생명은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께서 성신과 공유하시는 생명입니다. 신약 성경이 성신께서 교회 안에서 이루시는 일에 관해서 말할 때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종말론적 생명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신약 성경이 현재의 관점이든 미래의 관점이든 부활에 관해서 말할 때는 반드시 성신의 종말론적 사역을 염두에 둡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9-11에서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는 사람들(9절 중)에 관해 말하는 대목에서 이 원리를 끄집어내는데, 여기서 그는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9절 상)이라고 말하며, 만일 그러하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즉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9절 하),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신다'고 함축적으로 말합나다(10절 상). 짧은 세 문장 안에 가능한 모든 조합이 나옵니다. '너희가 성신 안에', '성신께서 너희 안에',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라는 표현을 사실상 동의어로 번갈아 사용함으로써 교회의 삶을 묘사합니다. 이러한 사용 유형이 가능한 이유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선행(先行)하고 근거가 되는 사실, 곧 그리스도께서 '살리시는 영'이시고 성신께서 '그리스도의 영'이라는사실 때문입니다(9절 하). 그리고 11절은 신자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결국 그들의 죽을 몸도 일으키실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성신께서 이미 그리스도를 위해 행하셨듯이 신자도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성신은 종말론적인 부활의 권능이십니다. 성신의 권능은 부활의 권능이기 때문에 성신은 종말론적 영입니다.

 

 

리처드 개핀의 [이 모든 날 마지막에]의 '제5장 성신과 종말론'에서 발췌(73-79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 신소걸 목사가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태극기 집회에서 단에 올라 "나라가 망하면 하나님도 섬길 수 없다"며 목사로서의 소신을 단호하게 외치고 있다.     ©Screenshot 유튜브

코미디언 출신의 신소걸 목사가 2월 11일 서울 시청광장과 대한문 앞에서 열린 태극기 집회에서 대한민국이 공산화 되면 교회도 목사도 성도도 다 없어진다. 내 나라가 망하면 하나님도 섬기지 못한다. 태극기 집회를 비난하거나 침묵하는 대한민국 목회자들은 깨어나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한국 시간으로 정월대보름이었던 11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에서 탄기국(대통령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운동본부) 주최 ‘제12차 탄핵반대 태극기 집회’가 열렸다.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50여개 보수단체로 구성된 이날 집회는 주최 측 추산 역대 최다 참여인원 210만명이 참여했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된 집회는 1부 집회를 마치고 3시30분부터 가두 행진을 진행했다. 대한문에서 출발해 한국은행, 남대문, 중앙일보사를 거쳐 다시 돌아와, 오후 4시 52분부터는 2부 집회를 시작했다.

▲ 2부 태극기 집회에 모인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탄핵기각, 탄핵반대를 외치고 있다.   © Screenshot 유튜브
 
집회 참가자들은 태극기와 미국 성조기를 흔들며 ‘탄핵기각’, ‘국회해산’, ‘특검해체’ 구호를 외치며 “애국시민들이 일어나 조국을 지키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집회 연사로는 탄기국 정광용 대변인, 국회의원 김진태, 청년 이장우, 국군간호사관학교 애국장교단 박숙자 대령, 해국사관학교 국국동지회 백동일, 정미홍 아나운서, 미디어워치 대표 변희재 , 재미교포 박용락 회장, 탈북자 김재승, 박철 천주교 신부, 서석구 변호사, 도태우 변호사, 미국 변호사 인지인 씨 등이 나와 탄핵반대 태극기 집회를 이끌었다.

특히 이날 처음 태극기 집회 연사로 나온 신소걸 목사(서울 순복음우리교회)는 단에 올라 먼저 “할렐루야”라고 집회 참가자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사랑하는 애국국민 여러분, 저는 너무 화가 나서 오늘 이 자리에 나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나라가 망해도 교회가 있을 것 같은가? 나라가 망해도 목회할 것 같은가?”라며 목회자들이 조국의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호소했다.

신소걸 목사는 “조국의 현실을 보고 이 땅의 존경하는 기독교계 어르신이신 지도자 목사님들과 중대형교회 목사님들께 감히 호소합니다. … 목사님들은 언제까지 침묵만 하고 계실 겁니까? 나라가 망해 가는데도 두 손 들고 기도만 하며, 나라 앞날의 존폐위기 속에서 한 치 앞도 분간 못 하는데도―종북 좌파가 ‘피라니아’와 같이, ‘하이에나’와 같이 민주주의를 물어뜯는데도 전도만 외치며 오직 기도에 힘쓰시겠다며 시국을 외면하시겠다면―언제까지 이런 위선으로만 일관하실 겁니까? 혹시 성도들이 흩어질 까봐 종북 좌파들 눈치만 보고 계신 겁니까? … 아니면 교회에서 쫓겨날까 봐 옳은 말씀도 못 하시고 침묵하고 계십니까? 그러시다면 목사님들은 하나님 앞에 정말 비겁하신 분들입니다”라며 약 6분가량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 태극기 집회에서 연사들이 단에 올라서 있는 가운데 신소걸 목사가 스피치를 전하고 있다.   © Screenshot 뉴스타운 TV  
 
이날 집회의 영상을 유튜브 방송을 통해 접한 네티즌들은 “목사님의 피 끓는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조그만 손바닥 만한 태극 물결이 지금은 거대한 구름같은 태극물결을 이루었다” “저들이 침묵하면 하나님께서는 길가의 돌들로도 소리치게 하실 것이다(눅19:40)”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에4:14)” “목사님, 추운 날씨에 수고 많으셨구요. 건강에 유의 하세요” “애국충절의 호소를 듣는 내내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등 응원의 댓글들이 쏫아졌다.

한편 신 목사는 지난 9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후배 개그맨 김제동의 시국 발언에 대해 “탄핵은 기각되어야 하며, 국민 오도 선동의 스피커에서 이제는 국가 발전을 위해 일익을 담당하는 큰 스피커로 변화되길 바란다”며 조목조목 반박하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진리의 길 vs 죽음의 길”

(영적세계의 실상)




성령님의 인도를 받지 않고,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 크리스찬들에게는

세상과 염려와 유혹의 영들이

끊임없이 죄 가운데 빠지게 하려고

독화살을 쏘아대고 있습니다.


또한 사탄은 대다수의 크리스찬들이

성령의 인도와 순종의 도를 따르기보다는

성경책과 교리 자체를 우상시하게 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크리스찬들을

이단으로 몰아 등을 돌리게 만들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분열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영의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주는 아주 유익한 영상입니다!


깨어있는 크리스찬들은

영적 전쟁에 대하여 바로 알아야 하고,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주 예수 안에서 천국본향을 향한

여정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번역: 지저스파워 / 하나님의 음성을 사모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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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로 부터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 까지, 성경은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신정국가(말 그대로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기사다.

에덴 동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는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로 상징되었다. 모든 창조물을 다스릴 대리자의 지위를 부여받은 아담은 모든 지상활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이바지하도록 해야만 했다. 구약학자인 Meredith Kline은 이와 같은 신정국가들을 시종일관 종교(예배)와 문화(세속적 활동)의 결합으로 구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적인 활동들이 '예배'라는 보편적 방향에 기여할 수 있도록 아담의 왕적 신분을 통해 에덴동산을 통치하셨다. 바꿔 말하자면, 에덴 동산은 말 그대로 '지상천국'이었다. 모든 것이 이적에 의해 다스려졌다. 그것은 천국의 축소판이었다. 그렇지만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예배와 문화의 통일성이 와해되었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장래를 위한 상징과 그림자와 약속을 통해 구원을 소망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 나라가 다시 회복되고, 하나님 나라의 왕이 죄를 용서하고, 믿는 자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모든 것을 바르게 회복하실 때가 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구원을 받았다.

세계 역사가 진행된 훨씬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반역과 죄악으로 가득 차 버린 세상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라는 한 사람을 택하시고 방주를 만들게 하셨으며, 장차 그 방주를 통해 '새 창조'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하셨다. 각각의 종류에서 보존된 생명체들은 이 작은 신정국가, 곧 노아의 방주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로 범람하는 바다를 견뎌 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한 왕을 통해 기적으로 자기백성을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악인들은 멸망당하고 의인들은 구원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될 것임을 약속하셨을 때, 하나의 새로운 국가가 탄생되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 신정국가가 되었다. 성막이 세워졌으며 이후에는 성전이 건축되었다. 그 성전은 에덴 동산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불쾌한 냄세로 가득 찬 방주도 아니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업적이었다. 다시 한번 종교(예배)와 문화(인간의 활동)가 융화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이적으로 직접다스리셨다. 홍해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길을 열기 위해 갈라지고 그들의 대적을 집어삼키키 위해 덮쳤을 때, 하나님의 백성은 다시 한번 물로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광야에서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양육되었으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다. 그 나라는 그들 가운데 있었다. 그들은 대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갔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우셨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국사의 중심이요, 장차 오실 왕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가 되었으며, 자신이 가진 제사장과 왕의 직무를 행함으로 종교와 문화를 하나로 융합시켰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구원, 기도, 예전 그리고 '영적'인 일에 관한 문제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셨을 뿐 아니라, 문화, 사회, 정치, 경제 생활의 모든 양식을 지시하셨다.

그와 같은 각각의 신정국가에는 성전,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 있었으며, 희생 제사도 있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첫 신정국가의 성전이었고, 노아의 방주는 두 번째 성전이 되었지만, 솔로몬의 성전이 구약 전체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것이었다.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무의  경우, 신정국가에서는 대개 한 사람의 대리자가 그 세가지 직무를 모두 겸임했다. 희생 제물의 경우,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덮을 수 있는 가죽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동물을 희생 제물로 삼으셨으며(창 3:21), 죄를 위한 궁극적 희생을 약속하셨는데, 단지 이 동물 희생은 장차 있을 궁극적 희생에 대한 하나의 모형에 불과한 것이었다(창 3:15). 홍수 이후에 노아는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다"(창 8:20). 희생제사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신정 국가에서 중심을 이루었다. 그리고 모든 신정 국가들은 이적으로 통치 받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시하시고, 구원하시고, 보여주고 계셨던 것이다.

하지만 나사렛의 어느 고요한 밤, 한 유대인 처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잉태했을 그때에 어떤 변화가 발생하였다. 과거에 예언자들과 제사장들과 왕들이 예표했던 바로 그분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이르자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 그분의 신정국가는 이적과 계시와 구속 행위가 다시 한번 새로운 국면으로 국면으로 펼쳐질 것을 예고했다.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나라의 실제 속에서 천국을 지상으로 이끄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성전이셨으며, 그것은 솔로몬이 최고 전성기 때 누렸던 명성과 영예의 찬란함을 능가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라고 선언하셨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그때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적보다는 섭리가 특정적이었던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승천을 기점으로 지상이 아닌 하늘의 신정국가로 나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천국에 계시기 때문에 천국이 이 땅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복음이 전 세계를 통해 신앙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적으로 현존한다. 우리는 말 그대로 홍해를 통해, 혹은 방주 안에서 홍수를 통해 인도함을 받는다기 보다는 심판의 바다를 통해 인도함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 통치하고 있는 나라가 점진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는 사실과,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시는 일이 원수를 친구로 변화시키는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진 그분의 희생으로 성취된다는 것에 주목하자. 대중들이 믿고 있는 바가 다양하지만, 그것은 정치적 강령이나 사회적 행동지침이 아니다. 결국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희생 제물이다. 그리스도는 성전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시며,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우리의 죄악을 위해 희생 제물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정결한' 짐승 제사로 예표되었던 온전하고 흠이 없는 한 번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화목을 위한 최고의 방식을 충족시키셨다.

은혜의 복음이란/ Michael S. Horton

[딸이 부모님께 듣고 싶은 말들]

1. 쿨한 사과
부모님들도 사실 인간인지라 틀린말 하실때도 있고, 실수하실 때도 있는 거잖아? 그럴 때에는 너무 자존심 세우지 마시고 쿨하게 사과해주셨음 좋겠어.. 나는 많은 걸 바라지 않고 그냥 '엄마가 미안해' 라는 한마디 말이면 되는데, 아직 한번도 못들어봤다.

2. 비교 없는 충고
부모님은 경험도 많으시고, 걱정과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인거 아니까 충고해주시고 조언해주시고 이런 거 감사한데 '누구 자식은 이런데 너도 이렇게 해라~'던지 '요즘 20대들 컴퓨터 자격증 다 있던데 너도 하나 따야지..' '스펙이 중요하다던데 너도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지'같은 비교?경쟁?이 담긴 그런 충고는 압박이 돼..ㅜ 물론 적당한 건 괜찮지만 자존심을 지켜줄 수 있는 충고를 해주셨음 좋겠어

3. 외적 칭찬
사실 이건 주관적일 수도 있는데 .. 자존감이 외적으로도 많이 연관돼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집에서 이쁘다 소리 별로 못 듣고 자라서 부모님이 우쭈쭈해주고
내 새끼 최고! 이쁘다 이런거 해주는 거 너무 부럽거든 ㅜ '우리 딸정도면 최고지'같은 말 들으면 없던 자신감도 생길 것 같아ㅋㅋㅋㅋㅋ

4. 비난, 막말이 아닌 비판
내가 잘못해서 혼나야 할 상황일 때 잘못했으니까 혼나는 건 당연하지만 이성을 잃고 아무 상처주는 말 막하면 가슴에 다 남더라구..ㅠ 나는 엄마 상처받을까봐 말 가려서 하는데.. 내가 잘못한 거랑 별 상관도 없는 말들도 막 하고..ㅜ 화내지 말구 조근조근 대화로 풀어갔음 좋겠는데 그게 쉽지 않지ㅜ

5. 온전한 믿음,지지
사실 인생사가 항상 잘 풀릴리 없잖아? 돌아갈 때도 있고 실수할 때도 있는데 그런 과정 속에서 조급해하시지 않고 나를 지지하고 믿어주시면 정말 좋을 것 같아 '니가 잘돼야지 우리가 살지 너만 믿는다' 같은 압박주는 믿음? 말고 '니가 어떤 선택을 하든 엄마는 너를 지지해 파이팅' 과 같은 말을 듣는다면 정말 무슨일이든 열심히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6. 무조건적인 위로
밖에서 너무 지치고 힘들었어서 집에 들어와서 위로받고자 하는 맘에 하소연 좀 했는데 위로해주기보다는 잘잘못 따지거나 그러면 너무 힘빠져ㅠ 물론 나중에 충고해줄 수 있어도 일단은 나를 다정하게 위로해주셨으면 좋겠어 '우리딸 많이 힘들었지?' 이렇게..

7 .애정 어린 관심
'너 공부 했니?' '이번 학기 성적은 얼마나 나왔어?' 같은 관심 말고 나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관심어린 말들을 받고 싶어.. '그때 그 친구랑 잘 풀었어?' '오늘 하루는 어땟어?' 같은 맘 편한 대화

8.칭찬
이건 너무 뻔하지만 .. 부모님은 거는 기대치가 높으시니까 아직 어린 우리가 부족해보일 수도 있고 더 잘했음 싶고 해서 칭찬에 박할 수도 있어 부모님 세대가
그랬던 것도 있고..ㅜ 잘못한 것만 찾아내시지 말고 소소하게 잘한 일들도 기분좋게 칭찬해주셨으면 좋겠어 칭찬은 언제 들어도 기분 좋잖아?

9. 사랑해
'니가 내 딸이어서 엄청 행복해' '우리딸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가슴이 따뜻해지고 누구보다 행복해지는 주문..

--BAND 글 옮김-

 

출처: 사모님사모님/주님사랑해요



 

 

대졸자 46만 명 이상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취업난 속에서 신천지 교인이 일자리를 빌미로 접근합니다. 취업에 목마른 구직자에게 다가가 ‘좋은 일자리가 있다’며 알선을 해주는 겁니다. 소개해 준 직장은 술자리도 없고, 주일 성수도 할 수 있고, 심지어 아침 큐티 모임도 갖는 곳이라는데... 과연 일자리 소개가 전부일까요, 그 속내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신천지 교인은 잎사귀로 표시했습니다.


   
 
   
 
   
 
   
 
   
 
   
 
   
 
   

 

펌: 기독교포털뉴스

 

처음에는 구타를 당하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해 보기도 했다. 때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리저리 피해 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몇 번씩 그런 구타가 반복되고 나면 체념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래,너희들이 죽이려면 죽여 봐라. 너희가 죽이기 밖에는 더 하겠냐?' 하고 고양이에게 몰린 쥐의 심정으로 독한 앙심이 피어오를 때가 많았다. 
  
구보를 마치면 곧바로 피티체조 유격훈련 등 그야말로 '혼 빼기 훈련'이 계속된다. 자신의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생각하기도 전에 우선 매를 맞는 것이 무서워서 생각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몸부터 움직였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본능이었다. 그저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루는 유격훈련을 받다가 조원 한 명이 낙오되었다. 감시하고 있던 조교가 무차별 구타를 가하자 얼떨결에 대응 방어를 한다는 것이 조교의 가슴팍을 쳤다. 조원으로부터 졸지에 가슴 가격(?)을 당한 조교는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것처럼 흥분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쇠파이프를 집어 들더니 머리, 허리 가릴 것 없이 개 패듯이 조원을 때리기 시작했다. 피가 사방으로 튀고 머리통, 입,다리 등 온몸에서 붉은 피가 배어나왔다. 다른 조교들 이 달라붙어 열받은 조교를 떼어 놓는 틈에 그 사람은 간신히 그 자리에서 개죽음 당하는 것을 모면했다. 그렇지만 그날 이후로 혼수상태에 빠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더니 병원으로 후송되었는데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소식을 듣지 못했다. 물론 그의 생사여부를 확인할 길도 없었다. 
  
미친 듯이 하루 종일 훈련을 받은 후 내무반으로 돌아와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하려면 '취침 전 내무반 점호'라는 것이 시작된다. 점호 시간은 조원들에게는 가장 끔찍한 시간이었고, 조교들은 어쩌면 이 시간을 가장 즐겼는지도 모르겠다. 
  
빨간 모자의 조교 중에 유난히 악랄하고 신경질적인 조교가 한 명 있었다. 그 조교가 점호를 하는 날이면 대개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새도록 기묘한 형태의 기합과 구타를 당하는 악몽을 겪었다. 
  
그런데 하루는 이 악랄한 조교가 자신의 더러운 정체를 밝혔다. 기합 도중에 난데없이 모두 옷을 벗으라고 명령하더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황에서 몇 사람을 불러 거꾸로 물구 나무서기를 시켰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의 물건에 이상한 것이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서는 순진한 여자들을 몇 명이나 울렸냐면서 다짜고짜 몽둥이 구타를 시작했다. 그는 성도착증 환자였다. 우리 소대에는 고등학교에서 불량학생으로 찍혀서 교실에서 수업을 받다가 끌려 온 제일 막내가 있었는데, 한번은 그 학생의 바지 뒤에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저녁에 약을 좀 발라 주기 위해 바지를 벗겨 보니 항문 주위가 완전히 걸레조각처럼 헤어져 있었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모습 이었다. 
  
ㅡ이런 지옥 불에 떨어질 더러운 놈들 같으니라고…… 
  
가슴 속에서 뜨거운 분노와 서러움이 솟아 올라오는데 그럴 때는 정말 주위에 있는 모든 군인들을 다 총으로 쏴 죽이고 나도 죽어버리자는 독한 마음이 굴뚝같이 일어났다. 삼청교육대는 현실 세계 속에 엄연하게 존재하는 생지옥이었다. 
  
지옥훈련을 받는 동안 우리는 옆에 있는 조원의 이름이 뭔지, 뭐하다 잡혀 온 사람인지 서로 알지 못했다.  
  
삼청교육대에 끌려 오던 날부터 우리는 별도의 명령이 있기 전에는 절대로 말을 할 수 없도록 함구령이 내려져 있어서 그 흔한 통성명도 할 수 없 었다. 
  
또한 훈련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육신적으로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서로에게 관심을 둘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저 훈련을 마치고 내무반으로 들어오면 단 1분이라도 더 자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생각도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조원들 사이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동료애라는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어 옆에 누워 있는 조원에게 슬쩍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러면 그 사람도 웃음으로 답해 주곤 했는데 그런 짧은 미소가 서로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그 당시 빨간 모자를 쓰고 조교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오늘날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물론 그동안 거리를 지나가다가 스치며 지나간 조교들도 있었으리라. 단지 그들이 과거 삼청 교육대 조교로서 여러 사람들을 가해했던 자신의 과거를 철저 히 감추며 살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애통하게 여겨질 뿐이다. 
  
그들 중에 자신은 단지 상부의 명령에 충실했을 뿐이지 개인적인 의사는 전혀 없었다고 말하는 조교 출신들도 있는 줄로 안다.  
  
그렇지만 스스로 양심의 목소리를 들어보기 바란다.  
  
자신들이 행했던 일들이 과연 단지 상부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는지, 아니면 본인들의 집단 가학적 악의 본성을 드러낸 채 철저하게 인권을 묵살하며 행한 가학적인 행동들이었는지 누구보다도 당시 빨간 모자를 썼던 본인 스스로 잘 판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삼청교육대 조교로 일했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양심 선언을 하고 나왔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삼청교육대 훈련이 진행되는 동안 휴전선 인근 한탄강변에 임시로 시체 소각장이 세워졌었다고 한다. 거기서 삼청교육대 훈련 중 사망한 사람들의 시체를 화장했는데 그 숫자가 얼마나 많았던지 그 일대에서 화 전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던 주민들이 시체 태우는 냄새 때문에 숨쉬기가 곤란했을 정도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삼청교육대 사망자 수는 57명에 불과하다.  
  
과연 언제까지 삼청교육대의 만행이 제도와 권력의 이권 때문에 안개 속에 가려져 있을 지 미지수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는 것은 그냥 지울 수 없는 삼청교육대 인권 유린의 역사가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또한 관련자들이 공개 사과함으로써 피해자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상처가 치유되는 그런 날이 오게 되길 간절히 소망할 뿐이다.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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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과 함께라면
      최송연
      주님과 함께라면,
      저는 새하얀 달빛이 되겠어요. 달은 혼자 두면 죽은 위성일 뿐이지만… 찬란한 태양 빛을 받아 반사할 때에는… 캄캄한 이 세상을 환하게
      밝혀줄 수 있으니까요.
      주님과 함께라면, 저는 반짝이는 별빛이 되겠어요. 별은 혼자 두면 죽은 위성일 뿐이지만… 찬란한 태양 빛을 받아 반사할 때에는… 낙심하여 우는 자들에게
      소망을 줄 수 있으니까요.
      주님과 함께라면, 저는 산속에 옹달샘이 되겠어요. 옹달샘은 혼자 두면 외로운 곳이지만… 목마른 사슴들이 찾아올 때에는
      항상 시원한 생수를 줄 수 있으니까요.
      주님과 함께라면, 저는 구석에 세워둔 빗자루가 되겠어요. 빗자루는 혼자 두면 죽은 나무토막일 뿐이지만… 주인의 손에 들려지면… 구석구석 쌓아둔 죄악의 먼지를
      깨끗이 털어낼 수 있으니까요.
      "내게 능력 주시는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 14절 말씀 )
                     
                     
                     
                   







                ------------------------------------------------------------------------------------------------

                김연규 
                2011-09-07 16:59
                 208.xxx.56
                 주님과 함께라면
                 저는 나무가 되겠어요.

                나무는 서있어도 지친 저들에게 쉼을 주니까요.
                나무는 열매맺고 가난한 저들에게 나누어 주니까요.
                나무는 썩어져도 추운 저들에게 땔감을 주니까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기위해
                 나를 찍어도 주님의 명령을 따르겠어요.
                 
                 
                 JuNick 
                2011-09-06 21:19
                 69.xxx.174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

                 봄이면 씨앗 뿌려 여름이면 꽃이 피네
                 가을이면 풍년되어 겨울이면 행복하네

                (주)님과 함께(라면).... 짠짜라 ~ 짜라라라~~

                별이 사모님에 비하면 저는 워낙 수준이 낮아서 주제 파악을 못합니다....ㅠㅠ  별이 사모님 은혜로운 시 감사합니다. ^^*

                주님과 함께라면
                 저는 사슴이 되기를 원합니다.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메이듯이
                 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주님만이 나의 힘 나의 방패 나의 참 소망
                 나의  맘 정성 다 바쳐서 주님 경배합니다.
                 
                  체르니 
                2011-09-06 07:38
                 183.xxx.195
                 안녕하세요. 별사모님
                 많은 사람들은 자신 위주의 삶에 떼었다 붙였다하는 부속과 같은 존재로 주님을 대하는데 반해 오늘도 별사모님의 주님 의존적인 깨끗하고 상쾌한 느낌의 신앙의 한 단면을 나누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오늘도 홀로 있는 듯한 달, 별, 빗자루같은 저를 주님이 사용하신다면 기꺼이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장달윤목사 
                2011-09-06 04:41
                 218.xxx.58
                 사모님 은혜로운 시 감사합니다.
                 "빗자루는 혼자 두면 죽은 나무토막일 뿐이지만 주인의 손에 들려지면" 아멘입니다.
                빗자루 같은 저를 한 평생 사용하여 주신 주님께 늘 감사하며 산답니다.
                 
                 대장쟁이 
                2011-09-06 02:40
                 68.xxx.254
                 주님과 함께라면 저는.......
                달빛도 되지 않고
                 별빛도 되지 않고
                 옹달샘도 되지 않고
                 못 생긴 몽당빗자루는 더욱 되지 않고
                 주님을 고운 식탁에 앉혀드리고
                 얼른 앞치마 두르고
                "주님과 함께라면"을 보글보글 끓여서
                 다정한 눈빛 마주 보며
                 함께 후루룩~ 먹을 거예요.
                그리고 커피 한 잔 함께 나누며
                 밤새도록 이야기 나눌 거예요.
                주님과 함께라면.... 
                 ............................마르다 동생..^_^*
                 
                 
                굳맨 
                2011-09-06 01:56
                 125.xxx.156
                 신비로운 색깔과 향기를 품고
                 포근한 모습으로
                 사랑의 느낌을 물씬 풍겨주는 주님

                 드넓은 하늘 속에 담긴
                 주님을 떠올릴 때면
                 내게서 주님의 향기가 가득 합니다.

                오늘도 가슴 깊이 다가오는 주님
                 진한 사랑 느끼며
                 나도 모르게 행복에 젖어지네요.

                언제나 또렸한 주님의 느낌
                 눈을 감아도 선명한 그 미소에
                 가만히 내 마음 걸어 둡니다
                 
                 
                 해처럼달처럼 
                2011-09-06 00:26
                 68.xxx.243
                 주님과 함께라면,
                저는 칼자루 안의 칼이 되겠어요.
                칼은 칼집 안에 있을 때는 하나의 소장품이지만....
                주님의 손에 들려지면.....
                심령과 골수 안에 사무친 죄악을
                 도려내는 날카로운 성령의 검이 될 수 있으니까요.....
                 ......

                멋쪄뿌려요
                 별싸모님!!!!
                 
                 초생달 
                2011-09-05 23:14
                 219.xxx.120
                 별똥별님께서 주님을 향하신 그 순고하신 마음에 초생달은 언제나 와 같이
                 머리숙여 존경할따름입니다,
                살아가는동안 깨달아야할 사명감은 오-직 하나님에대하여...
                아무리 아름답게 살아가는 현실이데도 하나님만큼 중요한사람은없지요,
                지친 내영촌 아플때에도 나는 강해요 주님과함께라면....
                나 외로워 눈물흘릴때도 나는 받아요 주님의사랑만을,,,,.

                구석구석 쌓아둔죄악의먼지를깨끗이털어낼수있는 빗자루가될깨요,
                 
                 
                공부합시다 
                2011-09-05 19:23
                 76.xxx.141
                 아니 이 라면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라면인데. . . 휘리릭~~~~~~ 도망 ^^;;
                 
                  해처럼달처럼 
                 이 라면은 벌써
                어디선가 끓여 먹은 듯 한데.... ㅎㅎㅎㅎ
                여전히 인기가 좋은 모양에요..... 9/6 00:28
                 68.xxx.243
                 
                 김오동  
                전에 어떤 교회에서 청년들이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유행가를 불렀더니 권사님 한분이 "요새는 '육지라면'이 나와요?" 했는데 오늘 저는 무슨 "라면"이야기인가 했더니 "주님과 함께라면"이 새로나왔군요.
                설교시간에 목사님 유머 듣고 일찍 알아듣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웃고 나중에야 깨닫는 사람은 집에가서 웃는다는데.....저는 오늘 집에 가서 웃는 쪽에 속했습니다(썰렁!). 9/6 03:55
                 218.xxx.91
                  

                은하수 
                2011-09-05 19:01
                 24.xxx.139
                 가장 별똥별, 은하수의 영원한 고향동무다운
                 한편의 詩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마음의 깊이를 느껍봅니다.
                이 가을에 주님을 앙망하는 간절한 마음이
                 풍성한 영적 열매로 결실 되시길 소망합니다.
                 
                 
                김오동 
                2011-09-05 19:00
                 218.xxx.17
                 <주님과 함께라면>

                요한 웨슬레가 임종시 했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니
                 다 좋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주님 함께 하시니
                 다 좋을 것을 믿습니다.
                 "내가...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28:20)
                 
                 
                 
                 김오동  
                누가 그랬던가요?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오늘)".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별똥별 최송연 선교사님.
                저는 아주 잘 지납니다.
                주의 은혜로....
                감사합니다. 9/5 20:36
                 218.xxx.5
                 
                 은하수  
                목사님께서 잘 지내신다고 하시니
                소자의 마음도 기쁩니다.
                주님의 은혜로 계속 강녕하시길 소망합니다. 9/5 20:56
                 24.xxx.139
                 
                 김오동  
                은하수님 감사합니다.
                "소자"라니요...
                어쨋거나 이 가을에
                성령의 열매가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자,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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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년 말 시리즈 ③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하지 말자

                지난 해 10월, 이철호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성회가 "입술의 열매로 복과 행복을 누리고 삽시다(잠언 18:20-21)"라는 주제로 뉴욕과 뉴저지에서 열렸다. 10월 2일부터 3일간은 뉴저지 필그림교회에서, 16일부터 3일간은 뉴욕만나교회에 열렸다. 강사 이철호 목사는 예장 합신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강성장로교회 담임목사로 33년동안 목회를 하고 있다.

                이철호 목사는 성회를 통해 저주 받는 말, 축복을 받는 말, 행복을 주는 말, 불행을 주는 말에 대해 설교하며, 신앙생활을 할때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선포해 나갔다. 이 목사는 성경적인 근거와 함께 자신의 경험을 숨김없이 나누어 큰 도전을 주었다. 이 목사는 우리들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하는데 ①판단하는 말 ②비방(비판)하는 말 ③대적하는(거스리는) 말 ④원망(불평)하는 말 등이 있다고 전했다. 신년에 사용하리라고 저장해 놓은 파일을 통해 4번에 걸쳐 신년 시리즈로 소개한다.

                16a.jpg
                ▲만나교회 성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이철호 목사

                교회 지도자를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
                교회는 다수결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신본주의


                민수기 16:1-3은 고라 이야기이다. 고라는 250명의 장로들을 규합해서 당을 지어 모세에 대적한다. 자신들도 같은 제사장 지파인데 왜 모세와 아론이 마음대로 하는가. 우리 의견도 반영하라는 이야기이다.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이만큼 많은 사람들이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위해 세력을 규합해서 모세앞에 나왔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사건을 놓고 "너와 너의 무리가 다 모여서 여호와를 거스르는도다(민수기 16:11)"라며 "거스르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신다. 그리고 이들을 멸하셨다.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이다. 소수보다는 다수, 다수보다는 진리이다. 교회는 100명 가운데 99명이 이렇게 하자고 해서 하면 안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다수결 원칙에 의한다. 그러나 교회는 99명이 이렇게 하자고 해도 한 명이라도 진리가 아니라면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러니 항상 성경 말씀에 맞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다수결로 하면 왜 문제인가. 다수가 진리편에 선 역사가 별로 없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이 쉬운가 아니면 불순종하기가 쉬운가. 불순종은 하지말래도 자연스럽게 한다. 그런데 순종하려면 기를 쓰고 해야 한 번 순종할까 말까 한다.

                그만큼 우리는 타락한 인간이기에 구조가 비뚤어져 있다. 우리는 이미 부패한 인생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진리의 길은 좁은 길이고 좁은 길은 찾는 자가 적다고 했다. 기독교 역사상 다수가 진리편에 서는 경우가 별로 없기에, 다수결로 하면 교회는 타락한다. 기독교 역사상 항상 소수가 진리를 선택했다. 고라의 사상은 다수결로 하자는 것이다. 자신들의 의견을 반영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셨고, 그것에 순종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고라는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의견이라며 이를 반영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타락이다. 이것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나온 것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너와 너의 무리가 다 모여서 여호와를 거스르는도다 아론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너희가 그를 원망하느냐(민수기 16:11)" 그러면서 결국 모세를 대적했는데, 여호와를 거스르다고 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신데, 우리 의견대로 하자고 나오는 것이 오늘날 고라이다. 오늘날도 당을 짓는다. 자신들의 의견대로 교회가 가도록 하자고 한다. 그것이 바른 길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를 거스리는 자들은 엎으신다.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르는 자를 엎으시니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지푸라기 같이 사르니이다(출애굽기 15:7)" 그리고 진노를 하신다고 했는데, 무서운 이야기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40-50년해도 하나님의 축복에서 벗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대적하면 하나님이 진노하신다.

                진정한 교회의 개혁은 무엇인가?
                어떤 개혁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가?


                교회에 문제가 있으면 비판하지 말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직접 나서지 말라는 것이다. 저는 4대째 믿으면서 문제있는 목사를 장로들이 쫓아내는 것을 보았고, 문제있는 장로를 젊은 집사들과 청년들이 쫓아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일에 앞장선 사람들이 잘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다 똑 같은 이야기를 했다. 교회를 위해서, 개혁을 위해서, 교회를 정화시키기 위해서 한다고 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가.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로마서2:8-9)" 그래서 신약에서도 당을 짓지 말라고 하신다. 지기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당을 짓지 말라고 하신다. 당을 짓는 사람에게 진노와 분노, 환난과 곤고가 있다고 했다. 장로교이면 목사와 장로가 당회를 구성한다. 당회는 어떤 주제를 놓고 당회원들의 생각을 묻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계속 묻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도록 노력해야 하고, 드러나면 모든 성도들에게 우리가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은 결과는 이것이라며 동조하며 같이 가자고 하는 것이 당회이다. 그래서 정말 당회는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 기도를 안하고 당회하면 꼭 시험에 들고 마귀에게 지게 되어 있다.

                기도를 안하고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자기 주관대로 주장하다 관철이 안되면 사람들을 규합해서 당을 짓는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진노하신다고 했다. 장로님들이 세워놓았다면 당회를 존중하라. 그리고 당회는 더욱 책임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도록 결정해야 하고 성도들은 그것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브리서 13:17)"

                특히 인도하는 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했다. 그리고 인도하는 자들이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고 한다. 목사와 장로가 여러분때문에 근심으로 목회를 하면 여러분에게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지도자를 위해 기도할때 함께해서 감사하다는 기도가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익이 없다. 하나님이 세우셨지만 여러분들이 장로를 세웠다. 인도자들이 즐거움으로 일하도록 여러분들이 도와주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대적하지 말라고 한다. 성경은 말다툼을 하지말라고 한다. 교회에서 분쟁이 생기면 유익이 하나도 없다. 좀 바보가 되더라도 말다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교회에서 자기주장을 관철하겠다고 말다툼이 일어나면 그것을 보고 초신자들은 시험들고 실족하고 교회밖에서 안온다. 전도문이 막힌다. 그런 자리에 가지 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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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나교회 성가대

                목사와 장로가 타락할 수 있다.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


                "왕이 좌우의 호위병에게 이르되 돌아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이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사무엘상 22:17)" 다윗을 도운 제사장들을 사울이 죽이려고 하자 신하들이 안나선다.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했다고 나온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왕의 명령을 어기는 것 보다 더 무서운 것이라는 것이다. 안나서니 이방인이 나서 다 죽인다.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삼상 24:5-6)" 동굴에서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으나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셨다고 말한다. 악령이 든 왕이라도 하나님이 세우셨다면 자신이 손을 댈 수 없다며 말씀을 붙잡는다. 신앙은 다른 것이 아니라 말씀을 붙잡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은 성경적인 신앙이 아니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삼상 26:9-10)" 이번에는 완전히 포위가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사울왕의 군대를 다 잠들게 하셨다. 다윗의 부하들은 하나님께서 죽이라는 뜻이라고 해석하나 다윗은 기름부음 받은 자는 타락한 왕이라도 내가 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했다. 죽여도 망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이 타락할 수 있다. 목사와 장로가 타락할 수 있다. 그래도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교회를 개혁한다고 나선다면 월권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정하는 것


                그러면 이것이 기름부은 왕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아니다. 성경은 악한 부자 나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나발은 심보가 비뚤어진 부자이다. 나발이 다윗 부하들을 짐승 취급을 하고 쫓아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이 그를 죽이려고 쫓아갔으나 나발의 부인이 음식을 준비하고 "왕이 될 사람이 악한 사람의 피를 뭍히면 되겠는가"라고 만류한다. 다윗은 그녀를 지혜롭다고 칭찬하며 직접 복수하는 것을 막았다고 말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삼상 25:33)" 결국 하나님이 치신다.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삼상 25:38)" 인생의 재판장은 하나님이시다. 여러분이 교회를 개혁한다고 나서면 그것은 이미 월권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정하는 것이고, 오늘도 심판자로 여러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성경은 그것을 기록하고 있다.

                "나발이 죽었다 함을 다윗이 듣고 이르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모욕을 갚아 주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의 머리에 돌리셨도다 하니라 다윗이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말하게 하매(삼상 25:39)" 다윗은 나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요한 고백을 한다.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했다. 다윗은 친히 복수하는 것을 '악한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자기에게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을 직접 복수하고 원수를 갚는 것이 악한 일이라고 한 것이다. 베드로전서 3:9에도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음을 기억하라.

                앞장서 문제있는 교회 지도자를 쫓아내고
                버려질 부지깽이로 사용되지 말라


                제가 이 부분을 교회에서 자라면서 많이 보았다. 어느 교회 장로의 처신에 대한 상담을 받았다. 교회 담임목사가 심각한 사고를 친 것을 장로들이 알고 당회 장로들이 회의를 해서 사건이 드러나면 전도의 문도 막히기에 조용히 사고친 목사님을 다른 목회지로 가게하고 새로운 분을 담임목사로 모시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장로에게 "똥친 막대기 노릇하지 말라"고 말해 주었다. 시골에서 해가 넘어가면 엄마가 먼저 들어와 마당에 아이들과 동물들이 싼 똥을 치우는데 사용하는 막대기는 다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똥을 버리면서 같이 버린다.

                구약에는 '부지깽이' 또는 '몽둥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스라엘이 타락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때리시는데 부지깽이로 이방나라를 들어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매를 들어 회개하게 하시고, 몽둥이와 부지깽이로 사용했던 이방민족을 멸망을 시키신다. 사용하고 벌하시는 것이다. 성경은 그들의 죄악이 차고 넘쳤다고 한다. 그 민족의 죄악이 차고 넘쳐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시킬 민족 하나를 들어 사용하시고는 버리시는 것이다. 부지깽이는 아궁이 불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것인데 사용하다 보면 점점 불이 붙어 짧아져 손이 뜨거우면 아궁이에 던져버린다. 쓰고 버려지는 것이 부지깽이이다. 그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분명히 잘못했지만 여러분들이 잘못한 것을 치우는 도구가 되면 안된다. 자기는 의롭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보실때는 버릴 사람을 한 번 들여 사용하시는 것이다. 가롯 유다는 제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마귀가 들어가니 안좋은 역할을 맡았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기를 축복한다. 오늘도 사탄은 교회와 가정을 불행하게 만들기 위해 역사하고 있다. 그때 사탄의 도구가 되면 안된다. 깨어서 기도하기를 축복한다.

                아버지의 간증이 주는 교훈
                내가 가장 많이 교회를 생각한다고?


                아버지는 어느 교회에서 초대 장로가 되고 같은 교회에서 장로로 은퇴하셨다. 어느 날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신다. 초대 장로가 되면서 앞으로 3년은 당회에 참여해서 듣고 배우겠다고 기도했다. 당시 담임목사는 아버지보다 10살이 젊었다. 당회에서 목사가 안건을 내놓고 두 장로의 생각을 물어보면, 아버지는 목사님 생각을 먼저 물어보고 목사님 생각대로 하면 좋겠다는 자세였기에 항상 목사님 생각대로 일이 진행됐다. 속으로는 저렇게 목사님 생각대로 하면 이런 문제가 생길텐데 걱정도 되었지만 3년간은 말하지 않기로 했으니 말을 안했다. 아버지가 예상했던 문제가 생길때도 있었다. 그런데 일이 진행될때 가만히 보니 아버지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되어가는 것을 체험했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아버지는 직장에서 일을 해야 하니 하루종일 얼마나 교회생각과 교인생각을 하겠는가. 사업과 직장은 주님이 맡긴 사명으로 그것에 신경이 많이 쓰는 것이 정상이다. 장로가 하루종일 자기의 직업에는 신경을 안쓰고 교회를 걱정하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한다면 그것은 안된다. 하루종일 교회와 말씀을 생각하는 사람은 빨리 신학교가서 목사하실 분이다. 장로는 하나님이 주신 직업에 충실해야 하고, 하루에 한두시간 교인과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반면 목사는 생활이 계속 교회를 생각하는 것이다. 하루종일 교회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목사와 두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장로중 누가 하나님의 뜻을 더깊이 깨닫겠는가. 아버지가 경험하신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보다 젊은 목사가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생각을 하고 그것이 되어지는 것이 반복되게 보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은 다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목사가 자신보다 더 훨씬 교회를 깊이 생각하고 자신이 못보는 하나님의 뜻을 보았다는 것을 획신하고, 3년이 아니라 은퇴까지 아니라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날 울었는데 그 다음 말 때문에 울었다. 평생 아니라고 하지 않은 이유가 또 있었다. 인생은 심은대로 거두는데, 내가 목사에게 아니요 하면 내 자녀들 인생에서 아니요가 나올까 싶어서 그렀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울었다. 우리 교회 당회에는 장로 21분이 있는데 당회에서 아니요가 없었다. 저는 제가 목회를 잘해서 그런줄 알았다. 아버지 말씀을 듣고 눈물이 흘렀다. 우리 아버지가 심었구나.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아니라고 할 것 없다. 내가 정말 담임목사보다 더 교회를 깊이 생각하고 있고 더 많은 시간을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있다면 아니라고 하라. 그러나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사람이라면 성령은 하나님과 통하게 되어 있다. 내 생각을 이야기하지 말라. 그것처럼 교회가 위험한 것이 없다. 묵상하고 기도한 다음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것을 서로 고민하고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당회이고 제직회이다. 그렇게 가기를 축복한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창 45) 해후

                 

                양식을 사러 온 형제들을 짐짓 모르는 체 하면서 아버지의 안부를 묻고,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게 하고, 은잔을 자루에 숨겨 넣었다 적발하는 방법으로 베냐민을 돌려보내려 하지 않은 요셉, 그 요셉의 속마음은 어땠을까요? 자기를 죽인 거나 마찬가지인 형제들을 용서할 수 없는 미움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동생 베냐민을 향한 사랑.... 그 가슴은 얼마나 격한 감정들로 소용돌이 쳤을까요? 그러나 요셉은 냉정하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드디어 요셉의 가슴은 더 이상 견뎌내지 못 하고 터져버리고 맙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격정을 억제하지 못 하여 물러가라고 소리치고 형제들 앞에서 방성대곡을 합니다.

                무엇이 그토록 억제하고 눌러왔던 요셉의 가슴을 터뜨렸습니까? 그것은 유다가 요셉에게 들려준 아버지 야곱의 이야기,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낳은 두 아들 중 형을 잃어버리고 남은 막내아들을 생명처럼 아끼는 아버지의 이야기였습니다. 아버지의 생명과 아들의 생명이 결탁되어 하나가 되었고 그 아들을 데리고 가지 못 하면 아버지는 죽을 것이라는 그 애절한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 앞에, 그 사랑 앞에 어찌 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요셉의 가슴은 아버지로 의하여 터져버린 것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이게 모든 것을 밝힙니다.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나이까?” 형들이 놀라서 뭐라고 대답을 못 합니다. “내게 가까이 오소서.” 형들이 가까이 가니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 그리고 요셉은 아직 흉년이 오년이나 더 남아 있으니 속히 가나안으로 올라가 아버지 야곱과 모든 식솔들을 모셔오라고 말합니다. 베냐민의 목을 끌어안고 웁니다. 또 형제들과 입 맞추며 안고 웁니다.

                이 소식이 바로와 바로의 신하들에게 전해지자 그들도 기뻐합니다. 바로는 수레와 노새들과 양식과 온갖 좋은 것으로 준비하여 아버지와 식솔들을 모셔오라고 명합니다. 그리하여 형제들은 가나안으로 올라가 아버지에게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있고 애굽 땅 총리가 되어 있더라고 말합니다. 아버지 야곱은 이 황당한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아버지 야곱을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합니다.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눈물을 금할 수 없는 감격적인 해후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아들 요셉이 죽은 줄로만 알고 얼마나 오랫동안 슬퍼하며 지냈습니까? 또 남은 베냐민마저 잃어버리는 줄 알고 얼마나 애를 태웠습니까? 형들은 요셉을 애굽으로 팔아버리고 나서 얼마나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아버지 야곱을 속이고 살며 또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렸겠습니까? 요셉은 또 미움과 그리움과 고통의 긴 세월을 살며 아버지 야곱이 살아계시리라고 꿈엔들 믿었겠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모든 고통과 슬픔이 한꺼번에 녹아내리고 사라지는 것 같은 감격적인 해후!
                아, 우리가 보혈의 공로로 모든 죄악과 고통을 벗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우리를 구하신 주님 앞에 나아갈 때도 이처럼, 아니 이보다 더욱 감격적일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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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反이민 행정명령에 중동권 美 선교사들 '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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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 퍼거슨 워싱턴 주 검찰총장이 시애틀 연방법원의 트럼프 대통령 행정명령 중단 결정에 환영하고 있다. 

                   

                  미국 反이민 행정명령이 기독교 선교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행정명령 대상국인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등 이슬람권 7개 국가가 속해 있는 중동 지역 민심이 악화되면서 현지에서 활동하는 미국 선교사들의 신변에 적색경보가 켜진 상태다. 

                   

                  중동 사람들은 이번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을 전체 무슬림 혐오로 받아들여 미국인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특히 백인 선교사들은 아이에스(IS) 등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들에게 직접적인 타깃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흘러나오고 있다. 미국 선교단체들은 소속 선교사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사람 많은 곳에 다니지 말 것‘과, ’눈에 띄는 행동을 자제할 것‘ 등 지침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전세계적으로 논란이 뜨거운 트럼프 대통령의 反이민 행정명령은 최근 시애틀 연방 지방법원이 잠정 중단 결정을 내려, 효력이 정지된 상태다.

                   

                  백악관은 대법원에 상고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새로운 명령 작성을 포함한 다른 옵션을 갖고 있다고 말한 만큼 우회적 방법으로라도 이민 규제를 지속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한연희 ⓒ 데일리굿뉴스

                   가져온 곳: USA 아멘넷

                  최홍준 목사 "구별되어야 하는 목사의 위치와 권위"

                   

                  17회 목양장로 사역 컨퍼런스가 10월 1일부터 2일간 뉴저지 한소망교회에서 열렸습니다. 목양장로란 무엇입니까? "목사와 장로의 행복한 동행"이라는 모토에서 보듯이 권위적인 장로의 형태가 아니라 장로가 목회자와 같이 목양사역을 나누어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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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장로 전도자 최홍준 목사

                  컨퍼런스의 마지막 강의는 목양장로를 전파하고 있는 최홍준 목사가 했는데 그 강의제목이 "구별되어야 하는 목사의 위치와 권위"이었습니다. 그 강의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목양장로의 특성상 마지막에 그 강의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컨퍼런스를 마치며 소감을 밝힌 한 장로의 발언에서 그것이 나타났습니다. 그 장로는 강의를 들으며 장로가 목양사역을 하니 장로와 목사가 같은 계급이구나 하고 상당히 고무가 되었는데, 마지막 강의에서 목사와 장로의 틀린 점에 대한 내용을 들으니 혼돈이 된다는 발언이었습니다. 물론 농담도 포함된 발언이었지만, 목양장로란 장로의 본질을 회복하자는 것이지 결코 또 다른 계급은 아닙니다.

                  강의는 흥미로웠습니다. 강의에 대한 시각을 바꾸어 보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분쟁의 이유중 특히 목사에게 분쟁의 책임이 클때 어떻게 장로와 평신도들이 성경적으로 대처해야 하는지 강의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최홍준 목사는 오늘날 교회분쟁의 90%는 목사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한 평생 목회를 하며 그동안의 경험한 바에 의하면 교회내 영적 질서만큼은 절대로 바로 세워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두 말씀은 상반된 내용입니다. 하지만 수없이 일어나는 교회분쟁속에서도 어떻게하든지 바른 방향으로 성경적으로 교회를 끌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목사가 잘못해서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최홍준 목사는 멘토인 고 옥한흠 목사가 평신도에 대한 책을 인용하여 "교역자가 문제를 일으킨다고 해서 평신도가 교역자의 이런 행동때문에 상처를 입었다고 해도 그것이 교직제도로 걸고 하는 것까지 발전한다면 그들의 행동 역시 교권주의와 다를바 없고 최고의 법전인 성경앞에서 절대로 성숙할수 없을 것"이라는 발언을 소개했습니다. 또 목사직은 엄연히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에 허락하신 직분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목사가 문제를 일으켰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장로들이 지나친 행동을 함으로 해서 교회에 혼란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 책임은 목사뿐만 아니라 장로들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홍준 목사는 한평생 목회하면서 훌륭한 목사를 많이 만났지만 한 분도 온전한 분을 만나지 못했으며, 하나님을 제외하고 '온전한 사람'이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교회 초기 부교역자로 사역하면서 한국교회의 투명성과 정직의 상징같은 옥한흠 목사와의 일화를 전했습니다.

                  옥한흠 목사 같은 분도 부부싸움을 하여 갑자기 수요예배에 오지 않아 최홍준 목사가 대신 설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최 목사는 옥한흠 목사는 참 훌륭한 분이었지만 예수님만이 온전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온전하지 못하다 해도 목사는 하나님이 세우셨기에 하나님을 보고 그 권위에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잘못을 한 목사는 누가 책벌하는가 하는 궁금증이 들 것입니다. 최홍준 목사는 그것은 장로가 해야 할 역할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최 목사는 하나님의 역할과 인간의 역할을 구분하여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즉 심판하고 복수하고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고, 사랑하고 기도하는 것만 우리의 영역임을 알아야 한다고 전했습니다.

                  최홍준 목사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많은 교회들의 분쟁은 교회 안에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치 하나님인듯이 인위적인 행동을 하는 목사, 그리고 자신이 재판관이 되어 목사의 잘못을 확대 생산하는 장로들을 일컫는 말일것입니다.

                  최홍준 목사는 현실적으로 물론 목사의 잘못을 있어도 그와 같은 문제는 노회 총회에서 제도적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에 대해 당신의 자녀에게 조언한 말씀을 소개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에서 목사의 불의한 것을 본다면 권위에 도전하기 보다는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도저히 교회가 시끄럽고 문제가 있어 은혜가 안되어서 견딜수 없다면 조용히 교회를 옮길지라도 다투고 싸우지말라고 했습니다.

                  최홍준 목사는 강의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최 목사가 청소년 때 부흥회에 참석하면 부흥사는 바뀌지만 공통점은 주님의 종을 섬기면 복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어서 늘상 담임목사님과 짜고치는 고스톱같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최 목사는 내가 주님을 만나고 난후 성경을 보면서 그러한 나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았다고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시니컬한 평신도는 최홍준 목사도 다른 목사들과 같이 짜고 고스톱을 친다고 생각할수 있을 것입니다. 최홍준 목사는 이 강의에서는 그렇게 접근할수 밖에 없었다고 믿습니다. 만약 목사를 대상으로 하는 목회자 세미나였다면 주님처럼 후배 목회자들을 강하게 탓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어려운 점이 있어서인지 최홍준 목사는 강의를 시작하며 이 강의는 조심스럽게 하는 강의이라고 했습니다.

                  다음은 목사의 독특한 위치에 대한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한 강의요약입니다.

                  목사와 장로의 관계정립

                  주님의 몸된 교회, 주님의 피값으로 산 교회가 영적질서가 흩어지면 사탄이 난장판을 만들어 버린다. 한 평생 목회를 하며 그동안의 경험한 바에 의하면 영적 질서만큼은 절대로 바로 세워져야 한다. 이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종교개혁자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에베소서 4:11-12)"

                  성경은 교직은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직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칼빈은 "성직의 중요성은 교인들을 하나로 규합시키는 중요한 열쇠로 교회를 보호하는 역할로 주님 자신이 현림하시는 제도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성직자체를 반대하는 행위는 용납할수 없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교역자에게 평신도와 다른 귄위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루터는 "목사와 다른 신자사이에 어떤 차이 특히 신분상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으로 목사의 직분은 다른 것과 확실히 구별된 직분이다"고 말했다, 칼빈도 "목사는 단순히 교회에 고용된 직원처럼 취급을 당해서는 안될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의 변덕에 이리 저리 끌려 다니지 않는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을 받아야 할것이다"라며 동일한 이야기를 했다.

                  하나님이 세운 종들을 존중하고 있는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로마서 13:1-2)"

                  목사가 문제를 일으켰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장로들이 지나친 반응을 벌임으로 해서 교회에 혼란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 책임은 목사뿐만 아니라 장로들도 져야 한다. 주님은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현재를 중요시 하신다. 바로 알고 바로 하겠다는 자세를 가지면 기뻐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세운 권위에 대해 도전하는 것을 조심하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한다. 이런 안목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함으로 하나님이 분노하심을 많이 볼 수 있다.

                  민수기 12장에는 모세가 이방 여자인 구스 여인을 취하자 이를 비방하는 미리암에게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은 모세를 지도자 세우시고 권위가 모세에 있다고 확실히 말씀하시고 진노하셨다. 왜 이런 사건이 기록되어서 오늘날 읽혀지는가. 하나님이 주신 권위에 대해 존중하라는 것이다. 그 권위를 존중하지 않고 도전하면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용납하지 않으신다.

                  사무엘상 2:30(...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하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여기에는 하나님이 세운 사람, 하나님이 세운 권위에 대해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을 하나님에 대해 경멸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히브리서 13:17(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인도하는 자에게 순종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손해본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운 주의 종들이 성도들을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가. 그러니 순종하고 복종하라는 것이다. 유익이 없다는 것은 손해본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특별히 관리하고 있는 대상, 그래서 영적인 질서를 잡기위함이 아닌가 생각한다.

                  목회자를 귀히 여겨라

                  목회자를 귀히 여기라고 하면 베드로전서 2: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을 들어 반박할수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을때 지성소에 휘장이 찢기면서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았던 사람들이 직접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를수 있는 특권을 가짐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런데 여기에 무슨 차별이 있는가 반문한다. 할아버지가 예수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아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손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한다면 이들은 다 같은가. 가정에는 질서가 있다. 우리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을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신다. 영적질서가 교회에 섰을때 그 교회에 어둠의 세력이 침범할수 없다.

                  나이가 어린 담임목사가 부임하는 경우도 있다. 40대 초반 부임했던 교회에서 13-15살 나이가 많은 장로님이 "목사님은 제 동생과 나이가 같습니다"라고 기를 죽였다. 그런데 그 연소함을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하라고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했듯이 하나님이 주신 권위가 그 교회 질서를 바로 세운다. 영적질서가 잡혀있지 못한 교회는 메말라간다. 성경에 그런 극단적인 이야기가 많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을 받고 처참하게 가난한 사르밧 과부의 집으로 가게 된다. 그 과부는 마지막 남은 음식을 엘리아에게 먼저 줌으로서 기적을 보게 된다. 정상적인 사람은 절대 할 수 없는 순종이다. 왜 이런 만화같은 기사가 성경에 적혀있는가. 만약 하나님의 사자에 대한 각별한 예우가 기적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이다. 나와 상관없다고 한다면 비성경적이다.

                  한평생 목회하면서 훌륭한 목사를 많이 만났지만 한 분도 온전한 분을 만나지 못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 '온전한 분'은 없다. 온전하지 못하다 해도 목사는 하나님이 세우셨다. 하나님을 보고 그 권위에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그것이 다윗과 사울의 관계이다.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은 사울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를 잡지만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 다윗이 귀를 기울인 것은 주위의 여론이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에 말씀이었다.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 부우심을 받는 자'라는게 이유였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오직 칭함을 하셨다.

                  하나님의 영역과 우리의 영역이 다르다. 하나님의 영역은 심판하고 복수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우리의 영역은 사랑하고 기도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그럴때 하나님이 대신해 주신다. 이와같은 영역을 잘지킨 사람이 요셉이다. 요셉은 애굽에 팔려가도 형이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형들은 요셉이 복수할까 두려워 요셉을 찾아가 엎드렸을때 요셉은 형들에게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라고 했다.

                  요셉은 하나님의 역할과 인간의 역할을 분명히 알았다. 심판하고 복수하고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고, 사랑하고 기도하는 것만 우리의 일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 나의 아버지요, 내 인생을 주관하시고 나와 함께 하셔서 축복을 하신다고 믿는다면 그분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을 사는데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 주님을 의지하면서 말씀에 순종하며 살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교회안에 영적 질서를 세우는데 장로와 목사가 중심을 잡고 교회를 건강하게 영적질서를 잡아갈때 성령님이 함께 하실 것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Clergy Tax

                    '주머니의 돈이 쌈지돈'이란 의미는 쌈지에 든 돈이나 주머니에 있는 돈이나 다 한가지란 뜻으로 그 돈이 그 돈이라서 구별할 필요가 없는 즉 공동의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머니의 돈이 쌈지돈'이라는 말을 개인의 비상금과 같은 뜻으로 알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큰 교회 목사님들은 교회의 헌금을 마치 하나님이 목사에게 비상금으로 주신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목사는 헌금으로 '황제 골프'를 쳤다고 자랑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오늘은 Clergy Tax 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국인들은 법 앞에 기본적으로 모두 평등합니다. 세금내는데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구별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똑 같이 IRS에서 개인 소득세에 대한 세금을 최소한 거두어 갑니다.

                    개인 소득세가 $118,000 미만이면 연방 세금 15% 정도, 주 정부 세금 5% 정도, 그리고 노후 보장제도로 Social Security and Medicare Tax 가 있습니다. Tax 법은 전문적인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가 좀 복잡합니다.

                    FICA는 고용주가 7.65% 를 부담하고, 고용인이 7.65%를 개인의 소득에서 공제하여 IRS에 15.3%를 세금으로 내는 것입니다. 고용주와 고용인이 반반으로 부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은 'dual status' 로 교회의 장이면서 고용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목사님들은 Self-employment Tax 를 내야합니다. 이것이 Clergy Tax 인데 FICA 와 비교하여 SECA 라 말합니다. 목사님들은 고용주이면서 고용인이기 때문에 15.3%를 IRS에서 세금으로 징수합니다.

                    기업체의 사장은 영업 수입에서 지불하면 되지만 , 교회는 사업체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교회가 헌금 수입에서 목사님들에게 15.3%를 Benefit 으로 지불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교회가 목사님들을 청빙할 때 목사님들의 Salary 와 Benefit 을 명확히 약정해 드려야 합니다.

                    많은 교회가 목사님들의 은사비, 활동비, 사택비를 책정하여 은사비만 소득으로 생각하여 연방세금, 주정부 세금, CECA 나 FICA 15.3% 를 세금으로 내고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목사님들의 SECA 는 '은사비 + 사택비' 의 15.3% 를 IRS 에 내야합니다.

                    또한 많은 교회가 목사님들에게 활동비 명목으로 지출내역도 없이 고정적인 지급을 하면서 세금을 안내는데 불법입니다. 더 전문적인 내용은 회계사와 꼭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나가면서 결론은 교회 Tax 나 한국정치 문제가 많습니다.  특히 한국 정치는 문재인이 문제입니다. 대선주자 문재인씨가 쓴 안경은 한국산이 아니라 덴마크 린드버그 사의 명품안경입니다. 최소 아주 제일 싼게 60만원 이상입니다. 그래봤자 정치인의 색안경일 뿐이지 말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 국가발전의 기회를 매처럼 민첩하게 낚아채는 안목과 분열된 사회를 하나로 봉합하는 혜안을 지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http://www.freechurchaccounting.com/clergytax.html

                    출처: USA 아멘넷/Clergy 

                    일장 훈시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순화교육?" 

                    군 장성의 연설은 참으로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막상 순화교육의 실상은 사람의 가치를 완전히 짓밟고 개보다 못한 대접을 받게 하는 인권유린 그 자체였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해 배가 고팠던 사람이 몰래 군용견 개밥을 홈쳐 먹다가 걸려서 창자가 튀어나오도록 구타를 당했으니 그곳은 분명히 개보다 사람의 가치가 훨씬 못한 곳이었다. 

                    삼청교육대가 뭐하는 곳이냐? 

                    "인간 재생" 
                    "땀으로 그늘진 과거를 씻는다" 
                    "땀의 진정한 의미를 배우는 인간교육장" 
                      
                    도대체 삼청교육대가 뭐하는 곳이냐고 묻는 일반 시민들에게 전두환 정권은 어용 언론들을 통해 깡패와 전과자, 인신매매범들과 같은 파렴치한 인간들을 순화 교육시키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그런 언론의 보도를 보고 들은 국민들은 그 모든 보도를 있는 그대로 믿어 버렸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삼청교육대가 사회의 악을 뿌리 뽑고, 사회 분위기를 건전하게 이끌기 위한 긍정적인 사회개혁 운동이었다고 잘못 알고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전두환이 잘한 일 중의 하나가 삼청교육대를 만들어서 깡패들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했던 일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그러나 조금만이라도 열린 눈과 의식을 가지고 실상을 바라보면 삼청교육대는 전두환 군사 정권이 정권 유지를 목적으로 가장 악랄한 방법을 동원해서 일반 시민들의 인권을 철저히 유린한 인권 유린의 치욕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4주 동안의 강제 순화교육을 통해 인간을 새롭게 만들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군인의 단순한 아이디어였다. 어떻게 사람을 4주 동안 새로운 인간으로 재생시킬 수 있단 말인가. 결국 4주 안에 사람을 한번 만들어 보겠다는 말도 안 되는 계획에 충실하기 위해 훈련 조교들은 '죽이기 아니면 사람 변화시키기'라는 각오로 표현조차 하기 힘든 구타와 지옥 훈련을 거듭했다. 또한 잡혀 온 사람들에 대한 획일적 매도는 어이 없이 끌려 왔던 사람들이 사회로 돌아갔을 때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두 번째 무차별 구타를 당한 것과 같았다. 군부는 삼청교육대에 잡혀 온 사람들이 모두 불량배, 깡패, 전과자들인 것으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사실상 삼청교육대에서 훈련을 받았던 사람들 가운데는 전두환 정권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정치적 반동분자들(?), 쓰라는 대로 기사를 쓰지 않았던 신문사 기자, 영문과 까닭도 모르고 그저 군경 합동 단속과 머리 숫자 채우기에 걸려든 무고한 시민들, 그리고 부녀자와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그 피해 자 대상은 무척 다양했다. 
                      
                    삼청교육대에서 보냈던 시간은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돌이켜 볼 때 그 기간 동안 내 머릿 속을 사로잡고 있던 생각은 단 한 가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서 나가자'는 것이었다. 매일 매일이 견디기 힘든 구타와 훈련의 연속이었다. 훈련이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어떤 이는 깨진 유리병 조각을 삼켜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고, 밤에 도주를 시도했다가 몇 시간 뒤 잡혀 와서 죽을 때까지 얻어맞는 사람도 있었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던 사람들은 누구라도 그때의 악몽을 잊어버릴 수 없을 만큼 그때의 아픔과 고통이 마음 가운데 문신처럼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서든지 당시의 기억을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그 모든 악몽을 묻어 두고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채 지난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상처는 드러나야 치유가 될 수 있는데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프고 치욕적인 상처를 그저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 두기만 한 사람들은 이미 상처의 포로가 된 사람들이다. 삼청교육대에 관한 한 나는 20년을 함께 살아 온 아내에게조차 단 한 번도 언급한 일이 없었다. 최근에 내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서 온갖 고난과 수모를 당했던 일을 고백했을 때 아내는 뒤로 나가 자빠질 정도로 놀랐다. 그때의 일들은 되새길수록 더욱 고통이 심해지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는 이렇게 그 당시의 모든 일을 아내와 나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내가 그 당시의 일들을 남김 없이 고백하는 동안 내 안에서 내 인생의 절반을 사로잡고 있던 삼청교육대의 악령이 드디어 떠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삼청교육대의 기억 은 지난 2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내 삶의 모든 것을 억누르고 있었던 악의 실체였다. 
                      
                    빨간 모자의 조교 

                    나는 아직까지도 빨간 모자를 쓴 사람들을 길에서 마주치게 되면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곤 한다. 빨간 색깔의 모자는 내게 있어서 가해와 폭력의 상징이다. 삼청교육대에서 빨간 모자를 썼던 조교들 가운데는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하면서 은연 중에 쾌감을 느끼는 그런 가학 적인 변태인간들이 많이 있었다. 저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재미삼아 사람들을 괴롭혔다. 상대방이 고통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면 보일수록 더욱 큰 쾌감과 자신의 힘을 느끼면서 내심 만족하는 것이었다. 시골 논밭에서 개구리를 잡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은 재미 있겠지만 잡혀서 놀림을 당하는 개구리는 정말 죽을 것처럼 힘들었을 것이다. 삼청교육대에서 우리는 시골 논밭의 개구리와 같은 심정을 느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부대 안에는 5개 소대가 있었는데 나는 제3소대에 속해 있었다. 매일 새벽 5시면 기상시켜서 밤 10시까지 잠시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았고, 계속 얼차려와 뼁뺑이 돌리는 것이 저들의 일과였다. 새벽에 일어나면 먼저 연병장을 도는 구보로 하루가 시작된다. 그냥 구보가 아니라 조교의 명령에 따라 100미터 달리기 하듯이 빠르게 달렸다가 속도를 늦추곤 했다. 좀 나이가 든 사람은 연병장을 한두 바퀴 돌고 나면 영락 없이 뒤로 처지게 된다. 이때부터는 몽둥이를 들고 뒤에서 쫓아오는 조교를 피해 달아나는 것이지 더 이상 달리는 것이 아니다. 달리다가 뒤로 처지는 사람들은 죽도록 얻어맞으면서 그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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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막은 은혜의 땅 1  (0) 2017.02.12

                    "너,조서 만들 때 누가 뭐라고 하든지 조서 내용을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 너 같은 녀석은 곧바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을 거니까 내 말을 꼭 명심해라." 
                      
                    구치소에서 재판을 대기하며 미결수로 기다리고 있던 시간은 참으로 무료하고 답답한 시간이었다. 감옥에는 외부로 향한 작은 창문 하나가 벽 높은 곳에 있었다. 가끔씩 그 창문가에 참새들이 날아와서 마음껏 지저귀다가 마음이 내키면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참새가 너무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롭게 행동하고, 가고 싶은 곳을 찾아가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자유가 그렇게 크고 고마운 것이라는 사실을 감옥 안에 있으면서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한 일 주일 정도가 지난 후 드디어 호출이 왔다. 

                    '내가 왜 여기를 들어왔나.' 

                    마음 속으로 다시 한 번 되새기면서 검사실로 들어갔다. 방에는 사복 차림의 형사 그리고 군인 분위기가 물신 풍기는 다른 2명의 건장한 사람이 역시 사복 차림으로 있었다. 

                    "이름이 김태훈 맞나?" 
                    "예." 
                    "얼마 동안이나 선량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공갈 협박하는 건달짓을 하면서 살았나?" 
                    "무슨 말씀이시죠?" 
                    "시치미 떼도 소용없다. 이미 너를 동네 깡패로 고소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아니, 누가 나를 동네 깡패라고 합니까?" 
                    "글쎄,고소한 사람이 있으니까 네가 구치소까지 들어온 것이 아니겠냐고. 긴 말할 시간 없으니까 조서에 지장이나 찍 어. 순순히 조서에 지장을 찍으면 좋은 일이 있을 테니까 알아서 하라고." 
                    "조서 내용을 한 번 읽어볼 수 있습니까? 그리고 난 후에 지장을 찍겠습니다. 그리고 정식 재판을 받게 해주십시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무조건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데서는 아무 것도 안 하겠습니다." 
                    "아니,이 새끼가 아직 주둥이만 살아가지고,정식 재판 같은 소리하고 자빠져 있네" 
                    조서 내용을 직접 보겠다는 말 한마디에 갑자기 욕설이 퍼부어지더니 방 안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이 새끼가 깡패 건달 주제에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무슨 이래라 저래라 말이 많아. 이 새끼, 정신이 바짝 나게 한 번 맛 좀 보여 줘라." 
                      
                    잽싸게 사복 차림의 형사와 군인이 동시에 팔을 뒤로 잡아채더니 구둣발로 정강이를 사정없이 걷어차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뼈가 쪼개지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에 자칫하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런 와중에 그들은 조서를 들고 팔을 잡아끌어 강제로 지장을 찍게 했다. 그 조서 안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도 모르는 채 나는 결국 강제로 그 조서 내용에 동의한다는 지장을 찍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 10여 대의 버스가 구치소에 도착했고 완전무장한 계엄군인들에 의해 공포 분위기를 느끼는 가운데 어디론가 강제 이송되고 있었다. 재판도 받지 못한 채 끌려가고 있던 것이었다. 지금은 세상 이 좋아졌지만 1980년대에는 군사 정권이 개인의 자유를 빼앗을 수 있었다. 6시간 정도는 족히 버스가 달려온 것 같다. 버스 안에서 여러 차례 내 손으로 여기저기를 심하게 꼬집어보기도 했다. 제발 현실이 아니라 꿈이기를 바랐다. 이런 악몽이라면 정말 빨리 깨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록 허벅지를 꼬집어보기도 했는데 현실은 현실이었다. 마음 속으로는 정말 간절하게 이 모든 일들이 꿈이기를 바랐는데... 아직 동이 트기도 전인 새벽 미명에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밤새도록 어디론가 달려온 버스는 구치소 수감자들을 군부대 연병장에 쏟아 놓고 마치 청소차가 할 일을 다하고 쓰레기 하차장을 빠져 나가는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버스에서 내릴 때부터 주위에 서 있던 군인들은 말끝마다 욕설이었다. 연병장 중앙에 고장난 로봇처럼 어정쩡하게 서 있던 사람들에게 군복이 한 벌씩 지급되었다. 옷의 크기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무조건 지급된 군복 안에 자신의 몸을 맞춰 집어넣어야 했다. 배가 남산만큼 나온 사람이 조그만 군복을 지급받아 배꼽이 볼썽 사납게 불거져 나왔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땅콩처럼 조그마한 사람이 큰 군복을 받아서 완전히 쌀푸대 속에 아이가 들어가 있는것과 같은 그런 웃지못할 모습을 하고 있기도 했다. 군복으로 갈아입힌 후에는 일제히 바리깡으로 머리를 삭발시켰다. 긴머리가 땅으로 뚝뚝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했다. 그 옆에서 함께 흐느끼던 사람은 남자녀석이 계집애처럼 질질 눈물을 흘린다고 붙잡혀가서 기절할 정도까지 구타를 당했다. 머리를 깎는 바리깡은 머리털을 자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털을 뽑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얼마나 난폭하게 바리깡을 밀어대는지 가끔씩 머리 살점이 머리털과 함께 떨어져 나오면서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 내리기도 했다. 그래도 어느 한 사람 말을 할 수 없었다. 버스에서 내린 순간부터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절대 함구령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함께 도착한 사람들은 모두 300-400명 정도는 족히 되어 보였다. 머리를 모두 삭발시킨 뒤에는 5개조로 사람들을 나눠서 합판 조각으로 엉성하게 야전 침대를 만들어 놓은 막사 안으로 각각 나눠서 배치를 시켰다. 그리고 아침 해가 제법 높이 올라 왔을 때 쯤 막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시 연병장으로 집합시키더니 소속군대 고위 장교 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일장 훈시를 시작했다. 
                      
                    "여러분들은 사회에 올바로 적응하지 못하고 많은 문제들을 일으킨 연유로 인해서 오늘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당신들은 이곳에서 정신과 육체를 말끔히 순화하고 사회에 온전히 적응할 수 있도록 집중훈련을 받은 후, 순화교육 평가에 따라 빠르면 4주 이내에 다시 사회로 복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한순간도 다른 생각하지 말과 이번 순화교육을 통해 새로운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되길 바란다. 국가는 여러분들이 사회를 혼란시키는 사회악이 아니라 앞으로는 사회의 발전과 건설에 앞장서는 건전한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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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마 25:5)


                    마태복음 15장의 열처녀 비유는

                    휴거를 기다렸던 신부들과

                    그 중의 일부가 혼인잔치에 성공적으로 들어간

                    신부들에 관한 대표적인 이야기다.


                    이 비유에서 드러난 핵심 사안은,

                    첫째, 신랑이 더디 왔다는 것이다.

                    둘째, 더디 오므로 열명의 처녀 모두가 잠이 들었고,

                    셋째, 그 와중에 슬기로운 처녀들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으며,

                    넷째, 마침내 신랑이 왔다는 것이다.




                    신랑은 왜 더디 왔을까?


                    준비하는 천사들이 농땡이를 부려서일까?

                    아니면 준비가 미처 덜된 예비신부가

                    더디 와달라고 센 기도를 한 이유때문일까?


                    말씀에는 짝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벧후 3장 9절에 이에 대한 답이 성경에 있다.


                    어떤 이들은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오래 참으사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단 더디 오시는 이유를

                    모두 회개하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에 두도록 하자.


                    지금 상황은 더디 오는 걸까? 속히 오는 걸까?


                    준비된 신부들에게는 더디 오는 것이겠지만

                    준비가 덜된 신부들은 속히 오는 상황일 것이다.



                    준비한 열 명의 처녀들이 모두 잠이 들었다.


                    어떻게 슬기로운 처녀들까지 잠을 잘 수 있을까?

                    그들은 잠을 자고도 어떻게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잠을 잤다는 것은 깨어 있다는 것과 반대상황이다.


                    아무리 건강체질이라 하더라도

                    1년 내내 24시간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깨어 있다는 것은

                    영적인 의미로 주님을 기다리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잠을 잤다는 것도 영적인 의미로

                    10처녀 모두 깨어 있지 못하고 영적으로 잠을 잤다는 의미라면,

                    10처녀 모두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잠을 잤다는 의미는

                    늦은 시간까지 신랑이 오지 않아서

                    육신적으로 잠을 잤다는 의미가 된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일상의 삶에서

                    주님만 기다리는 상황을 요청받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상의 삶을 소홀히하고

                    예상한 시간에 집중했고 예상한 시간에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육신적인 일상의 삶과

                    깨어 있는 영적인 삶의 균형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슬기로운 자들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등불을 들고 나간 처녀는 10명이었지만,

                    그 중 5명은 그 날이 지연되자 등불이 꺼져갔고,

                    5명의 등불은 신랑이 오는 시간까지 꺼지지 않았다.


                    미련한 자와 슬기로운 자의 차이점은

                    여기서 확연히 드러난다.


                    포기하는 미련한 자들과 일편단심 슬기로운 신부들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 마음이 변한다면 일편단심이 아니다.


                    한결같이 주를 신뢰하는 까닭에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켜주신다(사 26:3).

                    그들의 태도는 한결같고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하나님을 굳게 굳게 의지한다.

                    바르게 사는 이들의 길을 평탄하다.

                    하나님께서 그 길을 닦아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달하거나 조급하거나 서두르지 않는다.

                    주께서 결정하시는 길을 느긋하게 걸어 간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결정하시든지 그 분을 신뢰하며 걸어간다.



                    결말은 마침내 신랑이 왔다는 것이다.


                    신랑을 기다린 이 스토리에서

                    만약 신랑이 끝까지 오지 않았다면,

                    혼인잔치 이야기는 실패한 신부들의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딘 처녀들과

                    도중에 포기한 처녀들의 성공담과 실패담이 교훈을 주는 것이다.


                    비록 더디 올지라도 버텨라.

                    포기하지 말아라.

                    끝까지 신뢰하라.

                    신랑은 반드시 신부들이 기다리는 상황에서

                    약속대로 오신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소망이고 결말이다.



                    글쓴이: 카이로스 / ars

                    너는 특별하단다(You are special)


                    What they think doesn't matter.
                    All that matters is what I think
                    And I think you are pretty special.

                    Remember!
                    You are special because I made you.
                    And I don't make mistakes..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단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지.
                    그리고 난 네가 매우 특별하다고 생각한단다.


                     

                    기억하거라.
                    내가 너를 만들었기 때문에 넌 매우 특별하단다.
                    그리고 난 절대 실수는 하지 않는다.



                    옮긴 글

                    개처럼 끌려가던 날 

                    완전 무장한 군인들의 눈에는 살기가 등등했다. 

                    "그대로 엎드리고 있어." 
                    "고개 들면 그 자리에서 죽는다." 

                    조금이라도 몸의 움직임이 어눌해 보이면 가차 없이 개머리판이 날아왔다. 

                    여기저기서 수박 깨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져나왔다. 나이 스무 살이 되도록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잔뼈가 굵어온 나였지만 이때처럼 극심한 공포를 느껴 본 적은 없었다. 폭력의 연속이었다. 바닥이 없어 끝없이 추락 하는 무저갱의 깊고 어두운 구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공포와 절망의 순간들이었다. 

                    군인들은 팔을 뒤로 해서 북어포처럼 열 명의 사람들을 묶은 뒤 총부리로 사정없이 옆구리를 찌르며 우리를 버스 안으로 밀어 넣었다. 곁눈으로 언뜻 보기에 10대 정도의 버스가 구치소 운동장에 정렬해 있었다. 우리를 구치소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 같기는 한데 당시 나는 내가 어느 곳으로 이동해서 얼마동안 있게 되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단지 뭔가 심상치 않은 일들이 비밀스럽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불안한 느낌만을 받고 있었다. 
                      
                    버스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옆에 있는 사람의 머리에서는 조금 전에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은 곳에서 시뻘건 선지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땀방울과 섞여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무릎 사이에 그대로 고개 처박고 있어." 
                    "조금이라도 불필요한 동작을 하는 놈은 그 자리에서 죽는 줄 알아라." 

                    버스 안에는 3~4명의 군인들이 나눠 타서 계속 거칠게 사람들을 다루고 있었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를 운전하고 있는 운전수는 버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무심하게 버스를 운전하고만 있었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고 싶은 심정이 굴뚝 같았지만 군인들이 지금 버스 안의 어느 곳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버스는 거침없이 달렸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허리를 구부려 고개를 무릎 사이에 처박고 있자니 허리가 끊어지는 것처럼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 도대체 이렇게 얼마나 더 가야 되는 것일까?' 

                    허리의 통증과 함께 지난 며칠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이 슬라이드처럼 스쳐 지나갔다. 

                    영등포 단칸방에서 살고 있는 고향 친구의 집을 찾아간 것은 단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공장에서 해고된 뒤 소식도 전혀 없고 해서 정말 큰마음을 먹고 간 길이었다. 밥이나 제대로 먹으면서 지내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방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초췌한 얼굴의 친구가 누워 있었고 그 옆에 남동생 2명이 함께 있었다. 몸이 많이 아팠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을 걸려는 참에 동생들이 말을 막고 나섰다. 평소에 나에 대한 감정이 별로 좋지 않은 사이였는데, 마침 친구의 몸이 아픈 것이 내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삿대 질을 하면서 대드는 것이었다. 잠시 옥신각신하면서 말싸움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집 주변을 지나던 경찰 몇 명이 들이닥치면서 다짜고짜 수갑을 채웠다. 
                      
                    그날 저녁 나는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이면 당연히 훈방조치를 받을 줄 알았는데 난데 없이 구치소로 이감시켰다. 도대체 죄명이 뭔데 나를 구치소로 이감시키느냐 는 질문에 경사 한 명이 "지금이 때가 어느 때인데 폭력에 공갈 협박을 하면서 먹고 살고 있나"라며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공갈협박?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구치소로 이감되면서 나는 아내와 가족에게 전화 한 통이라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구치소 감방은 20명이 서로 어깨를 부딪쳐야 겨우 벽에 기대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비좁은 공간이었다. 그런데 그 좁은 공간 안에 확실한 서열이 있었다. 감방 한쪽 구석에는 냄새가 지독히 나는 변기통이 있었는데 그 변기통 옆자리는 전과도 없고 죄목도 변변치 않은 그런 시원치 않은(?) 사람이 앉게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당연히 오늘 새로 들어온 내 차지가 되었다. 가장 중앙에는 전과 19범이라는 고참이 앉아 있었다. 
                      
                    구치소 안에서는 매일 저녁마다 고참 죄수가 재판장이 되어서 모의재판이 열린다. 물론 심심풀이로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고참 죄수가 때린 형량이 실제 재판에서도 그대로 맞아 들어가는 일이 많았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형무소를 그렇게 자주 드나들고 재판도 여러 번 받다 보면 거의 판사 수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인가 생각하며 실소를 지었다. 

                    내게도 예외가 없었다. 그들은 나를 중앙에 앉혀 놓고 모의재판 심문을 시작했다. 

                    "전과가 있는가?" 
                    "없는데요." 
                    "무슨 죄로 들어왔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잡혀올 때 무슨 일이 있었을 것 아닌가?" 
                    "친구 집에서 말싸움이 벌어졌는데 지나가던 경찰이 들어와서 무조건 수갑을 채워 경찰서로 끌고 갔습니다." 
                    "너도 별볼일 없는 놈이구만." 
                    "여기 잡혀온 놈들 중에 너같이 어리숙한 녀석들이 수두룩하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같은 감방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술 먹고 고성방가 하다가 잡혀 온 사람, 길거리에서 소변보다가 잡혀 온 사람, 장발머리 단속에 걸린 사람, 구멍가게에 외상값이 밀려 주인의 신고로 잡혀 온 사람, 몸에 문신 새긴 사람 등등이 많았다.
                     
                    과거 같았으면 경범죄로 걸려서 각서 정도 쓰게 하고 훈방 조치되었을 사람들이 무슨 영문인지 모두 구치소로 후송되어 정식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전과 19범이 되는 사람은 눈을 부릅뜨면서 나에게 한마디 훈계를 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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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약과 선택 그리고 언약과 설교 예배

                     

                    고재수 교수

                      화란 개혁교회 안에서 언약은 중요한 연구대상의 하나였다. 이 언약에 대해서 여러 총회가 중요한 결정들을 하였다. 예를 들어 1905년의 총회는 언약의 자녀의 위치에 대해 결정하였는데, 그것은 “우리 교회의 고백에 따르면 하나님의 약속아래 있는 언약의 자녀는, 자라는 동안 그 행실이나 교리상 반대의 경우가 명백해지기까지는, 중생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 특별히 30년대에 언약이라는 주제는 많이 토의되었다. 언약의 기초가 다시 연구되었고 옛 신학자들, 특히 칼빈 견해가 전면에 부각되었다. 여러 가지 견해가 나타났다. 1936년 총회는 다른 주제들 중 특히 언약사상을 연구할 위원회를 임명하였다. 1942년에는 한가지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는데, 개혁교회 내의 여러 그룹들은 그 총회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으려 하는 많은 교수들과 목사들 및 장로들을 강압적으로 축출하였다. 이렇게하여 고신교단의 자매교회인 화란 개혁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들은 바로 언약에 대한, 특별히 언약의 자녀의 위치에 대한, 이 총회의 결정에 불볼했다는 이유 때문에 축출된 사람들인 것이다.

                     

                    화란 개력교회 안에서 언약이라는 주제가 예나 지금이나 많이 연구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드러난다. 80년대에 출판된 책 두가지를 언급하지면, 첫재로 캄펀(Kampen)신학교의 교의학 교수였던 깜파이스(,Kamphuis)교수(그는 1987년에 은퇴했다.)가 1984년 에 출판된「영원한 언약」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다분히 교의학적 성격을 갖는다. 다른 하나의 책은 은퇴 목사였던 프랑커(Joh. Francke)가 다음해에 「빛나는 계역들」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는 책인데 그 책은 성경에 나오는 언약의 과정들을 추적한 것이다.

                     

                    이런 사실은 개혁교회 안에서 언약이라는 주제가 주목을 받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인데, 다른 한편으로는 필자가 마주했던 난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언약에 대해 이런 두권의 책이 쓰여질 정도라면 이 제한된 글에서는 언약에 대해 얼마나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여기서는 세 가지 주제를 선정해서 그 분야에서 언약사상의 영향이 어떠한가를 살펴 보기로 했다. 충분히 다루지는 못하겠지만, 이글을 통해 적어도 언약사상에 대해 바른 견해를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 한다. 여기서 선택한 세 주제는 설교, 세례 및 축도이다.

                     

                    1. 언약과 설교

                     

                    일반적으로 설교를 이 언약사상에 연결시키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화란에서 언약사상은 바로 여기서 부활하기 시작했다. 많은 목사들은 언약에 대한 올바를 관점에서 시작하지 않고서는 설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의 많은 목사들은 언약이 선택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된 자는 언약에 속하고 선택되지 못한 자는 언약에 속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때로는 언약 안에 구분을 두기도 했다. 외적 언약, 즉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맺으시는 언약과 내적 언약, 즉 선택된 자들과만 맺으시는 언약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설교에 어떤 결과를 낳는가? 예를 들어 설교자가 성부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 하자. 설교자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기를 약속하십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누구에게 약속하셨는가? 만일 언약과 선택을 동일 한 것으로 본다면 하나님은 오직 선택받은 자에게만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기로 약속하신 것이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하나님은 선택자의 아버지가 되실 것을 여러분에게 약속하십니다”라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그밖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사람이므로 사람들 중 누가 선택되었으며 누가 유기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면 설교자가 말하는 것은 회중의 일부에게만 해당되고, 결국 그가 하는 말은 다음과 같이 될 수 밖에 없다. 즉 “저는 선택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이심을 말합니다”라는 것이다. 물론 설교자가 정말로 그런 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언약과 선택을 동일 시하게 됨으로써 생겨나는 논리적 결과이다.

                     

                    또는 목사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칭의에 대해 설교한다 하자. 설교자로서는 그는 청중들에게 믿음을 통한 칭의의 영광스러운 선물을 보여 줄 것이다. 즉 사람들이 죄인일지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영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놀라운 복음을 전달한 다음의 결론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칭의인데 선택된 여러분은 그것을 받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성령의 약속은 선택된 자들에게 주어질 뿐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다음 단계는 청중들이 선택 받았는지의 여부를 발견해야 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큰 약속을 듣고서도 자신들이 그 약속을 받을 자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선택된 자인지 알기만 하면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겠다는 이 약속이 바로 자기를 위한 것임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또 자기가 선택받은 줄 확신하기만 한다면 죄 용서의 약속도 자기를 위한 것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을 받았다고 쉽게 결론지으려 할 것이다. 삶이여 어떻게 살든 이제 선택 받았으니 그 약속은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항상 고뇌에 빠져 살게 될 것이다. “그 약속이 정말 나를 위한 것일까? 나는 죄인이고, 거듭 하나님께 죄를 짓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해 가끔 또 다른 단계가 따라온다. 그 추론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언약은 선택된 자들만 위한 것이다. 따라서 둘째, 하나님의 약속이 그의 것임을 확실히 알기 전에 먼저 자기가 선택받은 자에 속하는지 알아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고민을 많이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출구를 발견한다. 그것은 셋째, 체험이다. 그들은 특별한 체험을 찾는다. 마음의 감동이나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직접 말씀하시는 것 같은 느낌 등이다. 이것을 갖고 그들이 선택받은 자라고 확신하게 된다. 그때 하나님의 약속도 자기의 것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바로 이런 점에서 개혁교회 이 목사들은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선물에 대해 힘을 다해 설교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그들은 물어야만 했다. “이 모든 약속들이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까? 저는 하나님이 이 약속들을 여러분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셨으면 합니다.” 많은 청중들은 진열장에 있는 맛있는 빵을 보고 서 있는 배고픈 거지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빵을 보고서도 먹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선택받은 자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사야 55:1에 나오는 이사야의 위대한 말씀과 얼마나 다른 것인가?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런 문제의 원인은 언약과 선택을 동일시한데 있다. 그때 많은 목사들은 성경을 다시 연구하게 되었고, 칼빈에게 돌아가서, 성경과 성경의 교훈을 따라 칼빈도 다르게 말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좀 쉽게 하기 위해 여기서는 칼빈 대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7장 3항을 인용하겠다. “하나님은 이로써 죄인에게도 예수를 통한 생명과 구원을 값없이 주시되 그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에게 약속하셨는가? 하나님의 언약과 생명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선물을 누구에게 약속하셨는가? 선택된 자들에게인가? 아니다. 죄인들에게서이다. 하나님 말씀의 영향 아래로 나아오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은 그의 은혜의 선물을 약속하신다.

                    이것이 사실임을 보여주기 위해 성경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하나씩 두 개의 기본적인 본문을 간단히 제시하겠다.

                     

                    창 17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는 이야기를 보게 된다. 그 언약의 할례라는 표시로 확인 되었다. 그런데 이 약속에 속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할례의 표를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믿었던 아브라함인가? 성경에 따르면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의 종들까지도 포함되었다. 그들 모두가 언약의 약속을 받은 것이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 또 17:12 참고).

                     

                    그 두가 선택된 자들이었는가? 우리는 모른다. 이스마엘에 대해서는 큰 의심이 가는데 그는 후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14절에 보면 언약의 표시를 거절한 몇몇 사람의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언약의 벌을 받을 자들이었지만 그들 역시 언약에 속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다”고 하시기 때문이다. 언약은 선택된 자의 수 이상이다.

                     

                    혹자들은 이렇게 말할지라도 모르겠다. “그것은 신약 시대와는 다른 구약 시대가 아닌가? 언약이 처음에는 선택된 자의 수 이상으로 맺어졌지만 신약에서는 언약이 선택된 자들에게만 체결된 약속이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행전 2:39절을 살펴보자.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베드로는 이 말을 누구에게 했는가? 선택된 자들이 죄의 용서와 성령에 대한 약속(38절)을 받을 것이라는 말인가? 베드로는 일반적으로 “너희와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36절에 나온대로 “이스라엘의 온 집”이다. 즉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음으로써 무거운 죄를 지었다.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2:4)죄 용서와 성령에 대한 약속을 선택된 자들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그 당시 모든 청중들에게 확장시켰다. 그들은 죄를 회개해야만 했고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했다. 그때 그들은 죄 용서를 받고 성령까지라도 받을 것이다.

                     

                    이제 결론은 명백해졌다. 언약의 백성은 선택된 자와 수와 동일할 수 없다. 언약의 약속은 택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로 부르시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30년대의 화란 목사들은 어떻게 설교해야 할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사야 처럼 청중을 하나님의 선물에게로 초정하는 설교를 했다. 또 베드로처럼 백성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부르시는 설교를 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설교에 있어서의 언약사상의 의미를 발견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약속의 부요함을 보여주고는 그것을 믿으라고 한다. 또 설교자는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벌이 있음을 말해주고, 그때 다시 회개와 믿음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선택에 따라 제한된 것이 아니다. 반면에 백성의 믿음은 선택에 따라 제한된다. 하나님은 정말로 모든 청중들에게 언약의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지만 믿는 자들만이 그 복을 받는다. 왜냐하면 언약의 선물은 믿음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듣는 사람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다시 창 17장으로 돌아가자. 하나님은 거기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약속하시고 그 위대한 약속의 한 부분으로서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겠다고 하신다.(8절)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 땅을 받을 줄 알았는가? 실제로 그 일은 그의 생전에 이루어지지 않고 수백년 후에 아브라함의 후손이 그 약속의 땅을 그들의 나라로 받았다. 그럼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 약속을 확실히 알 수 있었는가? 오직 믿음으로였다. 이것은 이미 후손에 대한 약속에 표현되었던 것이고(창 15:6, 롬 4:9이하), 히 11:9, 13이하에도 나타난다.

                    설교할 때 설교자는 하나님에 대해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세상을 지으시며 그의 아들을 위하여 보내시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이야기 한다. 또 설교자는 모든 죄인들에게 용서의 복과 성령의 복을 받도록 권면 할 수 있다. 설교자는 백성들에게 믿음을 촉구한다.(고후 5:20) 누구든지 믿는 자는 영생을 가지지만 믿지 않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무르므로 생명을 보지 못할 것임을 청중들에게 선포한다(요 3:36)

                     

                    또 듣는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는 자기가 선택받은 사람인지 많이 고민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 전에 먼저 자기 선택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하는가?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번도 선택받았느냐에 대해 고민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내 약속을 믿으라. 내 벌을 두려워하고 피하라”고 말씀하신다. 청중들은 그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은 믿음과 순종을 통하여 그들이 선택받은 자임을 알게 된다.

                     

                    2. 언약과 세례

                     

                    우리는 세례를 가리켜 언약의 표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언약교리에 변화가 생기면 세례에 대한 관점에서도 직접적인 변화가 나온다. 이 경우는 언약과 선택을 동일시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앞에서 1905년 총회의 결정사항을 인용한 바 있는데, 그것은 ‘우리 교회의 고백에 따르면 하나님의 약속아래 있는 언약의 자녀는, 자라는 동안 그 행실이나 교리상 반대의 경우가 명백해지기까지는, 중생되고 그리스도의 안에서 성화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942-1944의 총회에서 일어난 일은, 언약과 선택을 동일시하는 관점에서 이 결정을 해석한 일이었다. 그 때 결과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인용에 언급된 중생된 아이들이 누구인가하면 그들은 선택된 자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약속하실 때 다만 선택된 자녀들에게만 약속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택받지 못한 자녀에게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약속해 주셨는가? 그것은 어려운 문제였고 명확한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명확한 것이었다. 즉 하나님은 그들에게 중생과 용서를 약속해 주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이로 인한 결과는 물론 세례가 두가지 다른 내용을 가진다는 것이다. 하나는 복음의 일반적 제시이며 다른 하나는 중생의 특별한 확신이다. 첫째의 것은 언약의 외적면에 속하고 둘째의 것은 내면적 언약의 진실한 부분에 속한다. 전자에 있어서 세례의 내용은 은혜의 말이며, 후자에 있어서는 은혜 그 자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차이를 하나님 편으로부터와 인간 편으로부터 제시할 수 있다. 먼저 하나님 편으로부터 살펴보자. 언약의 약속은, 가장 일반적인 표현을 사용한다면, 창 17:7,8절에 나오는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을 세례의 양식과 꼭 같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하나님 곧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든 의무 및 축복과 함께 그 자신을 우리에게 약속하신다. 그런데 언약과 선택을 동일시하게 되면 이 꼭 같은 세례의 표현의 경우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결과는 참담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두 말을 하시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같은 말을 가지고 때로는 이것을 의미하고 또 때로는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되는 식이다. 그래서 세례의 이 약속이 경우에 따라서 동일한 약속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과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이 일은 일간의 편으로부터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내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세례에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이 두가지 의미를 가지는 줄을 알기 때문이다. 난 하나님이 어떤 의미로 그 약속을 나에게 주셨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그 충분한 약속을 받았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 후의 내 생에 동안에 내가 무엇을 하든지 나는 용서와 영생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충분한 약속을 받지 않고 다만 일반적인 약속을 받았다면 내가 받은 세례는 다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아야 하게 된다. 거기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고 있는 표시를 찾아야 할 것이다. 만일 그것을 찾게 되면 충분한 약속을 받은 줄 알겠지만 그 은혜의 표시를 찾지 못하면 단지 하나님의 일반적인 약속밖에는 받은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절망할 수 밖에 없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40년대에 화란개혁교회에서는 교리논쟁이 불붙게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이것이 작은 문제인 것 같았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일의 중심이 다음과 같은 의심이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이 세례시에 의미하시는 바를 알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의심이었다.

                     

                    다시 창 17장으로 돌아가보자. 아브라함 집안에 속한 모든 사람과 그의 첫 아들 이스마엘까지도 할례를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언약의 표시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과 그들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후에 이삭이 태어나게 되고 아브라함이 특별히 받은 약속은 직접 이삭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면 이스마엘은 이삭과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한 것인가? 아니다. 그는 약속을 받았다. 땅의 약속까지도 그의 것이다. 그러나 그 약속은 먼저 이삭에게 돌아간 것이고 이스마엘은 이삭에게 순복할 때 그도 약 속의 가나안 땅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만일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머무름으로써 하나님께 구체적인 순종을 보이려고만 했다면 그도 몫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순복하기를 거절했고(창 21;9) 그래서 내어 쫓김을 당했다(창 11:10-12).

                     

                    에서와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에서는 언약에서 배제되지 않았으며 그는 언약에 속하여 모든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라’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명령에 순종해야만 했다. 만일 그가 하나님에게 순종하여 그렇게 하였다면 언약의 약속은 그에게도 성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히 10:29에 나오는 한가지 예만 들어보자.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형벌을 받을 이 사람이 약속을 받지 못했던 자이겠는가? 아니다. 그 표현에는 세례 양식에서와 꼭같이 성자 및 성령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고의적으로 거절했고 그 약속된 선물을 약용하여 언약을 깨뜨렸으며, 그럼으로써 그 언약의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언약의 중심이 구약과 신약의 여러 단계에서 확실히 동일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의 하나님이 되실 것과 용서로부터 영생에 이르는 축복을 그들에게 주시리라는 약속을 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이 모든 약속을 확실하게 하는 한 표시를 받는다. 또 우리는 그것에 포함되는 바를 확실히 안다. 성령에는 이중적 의미 같은 것이 없다. 세례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약속을 특별한 형식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머물고, 그의 앞에서 행하면 우리는 그 약속된 선물들을 다 받을 것이다. 믿지 않는 자는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거절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는 세례시에 그에게 약속된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이다.

                     

                    3. 언약과 축도

                     

                    예배 마지막에 하는 축도의 양식이 화란에서 언약 사상과 관련하여 쟁점이 된 적은 없다고 알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것이 좀 문제시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문제는 축도를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할 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예배시에, 특별히 예배가 아닌 다른 행사에서 이 축도를 들을 때 좀 이상한 것은 이를 확장해서 사용한다는 것이다. 목사들은 바울이 쓴 양식대로 하지 않고 여기에다 다른 것을 덧붙인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이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기로 결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와 하나님의 모든 백성 위에’ 영원히 함께 있을지어다 라고 축도를 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축복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지만 목사들의 생각에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신자인지를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그 모든 청중들의 다 축복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목사들은 이 축도문을 좀 더 자세히 제한하여, 그 복이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자들에게만 한정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이 말을 쓸때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다 선택받은 자들이라고 알고 있었는가? 고린도 교회에서는 교인들 가운데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들은 서로 다투고 싶어했고, 다른 교인보다 자신을 더 높이고자 하였다. 또 무서운 죄를 회중 가운데 방치해 두고 있었다. 심지어 바울이 그들을 꾸짖었을 때 그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그를 사도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는 신약의 바울서신서 중 가장 날카로운 글이다.

                     

                    바로 이런 교회를 향해 바울은 가장 고상한 마지막 말을 주고 있는 것이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다. 바울은 누구에게 이것을 말하고 있는가? 그의 말을 순종하는 사람들에게인가? 선택받은 자들에게인가? 아니다. ‘너희 모두’에게이다. 거스리고 죄인인 그 모든 사람들이 약속을 받는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여기서 언약의 축복을 주고 있음을 깨달아야만 한다. 먼저 구약의 축복인 민 6:22-27을 생각해 보자. 제사장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한다. 대상은 온 백성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복을 그 말에다 연결시키신다. ‘그들은 이같이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27절)

                     

                    그럼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에게나 그 복이 자동적으로 온다는 뜻인가? 율법에서도 명백히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그 복은 자동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예를 들어 레 26장)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언약을 거절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복 대신 벌을 주실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틀림없이 복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살고 그의 언약을 지키면 그들은 모든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구약의 축복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오는 것이지만 실제로 불신자는 그것을 거절하기 때문에 복을 받지 않는다.

                     

                    눅 10:5,6의 인사 방식의 경우도 이와 동일하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여기서의 인사말은 그저 ‘평안하십시오’라는 것이 아니다. 그 인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보내신 사도들의 인사이다. 이때 평화란 하나님과의 평화를 내포한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을 이 축복을 이스라엘 집들에 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복이 자동적으로 생겨나지는 않는다. 만일 그 평안의 말에 응답하는 자가 있으면 그 하나님의 평화는 그 집에 머무를 것이다. 만약 받지 않으면 그 평안의 약속은 그 집에 평안을 이루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룰 것없이 되돌아 올 것이다.

                     

                    이는 서신서에 나오는 바울의 모든 맺음말의 특성이다. 그것은 바울의 기도가 아니다. 또 그것은 불명확한 어떤 인간의 소원도 아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 중 일부만을 향한 것도 아니라 모두를 향한 것이다. 회중에 속한 모든 사람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이다. 고후 13:13의 말은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지 축도가 아니다.

                    그래서 예배의 마지막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믿고 기대하는 모든 것의 요약이다. 이 말에서 약속된 은혜와 사랑과 교통 이상의 것은 없다. 회중에 속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임을 알아야 한다. 목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그것을 말씀하신 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제 그 축복을 듣는 사람은 모두 한 가지 일만을 해야 한다. 감사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믿음으로 주님의 모든 축복을 받는 일이다. 그때 그들은 비록 세상에서는 고생을 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당신을 그의 모든 은사와 함께 약속해 주신 것을 알고 이 약속이 이루어질 하나님의 시간을 충실하게 기다리며 살아간다.

                     

                    아브라함이 그의 생애동안 하나님의 약속들이 다 실행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면서도 믿음으로 살았던 것과 같다. 이같이 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거절할 수도 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선물 중 그 어떤 것도 받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은 영원히 그의 원수가 되실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 즉 은혜와 사랑과 교통하심을 다 약속하셨지만 그 사람은 하나님이 가까이 살기를 거절했고 그 약 속의 성취를 기다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결론

                     

                    언약은 참된 종교의 본질이다. 그래서 언약은 하나님과 우리 관계의 어느 곳에서나 적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선택한 자들과 아닌 당신의 모든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음을 기억해야 하다. 우리는 설교의 약속과 경고를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때 우리는 설교에서 제시된 모든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세례의 약속과 경고를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때 우리는 성례에서 나타나는 모든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축복의 약속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때 우리는 축복에 담긴 모든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기쁘게 살아갈 것이다 .

                    출처: 언약과 개혁/ 주의 아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25년 동안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삼청교육대의 뼈아픈 과거 

                    마땅히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하소연을 하려고 이런 저런 말을 몇 마디 하다 보면 당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그런 일을 당했던 것이 아니겠냐고 하며 내심 당연하다는 반응마저 보이는 사람들 때문에 오히려 속만 더 뒤집어지곤 했다. 그래서 나는 지난 25년 동안 삼청교육대와 관련된 모든 기억은 내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묻어 뒀었다. 그 누구에게도 삼청교육대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20여 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에게조차 삼청교육대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까지 한 번도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말을 안한다고 그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나는 그저 의식세계에서 철저히 부정하며 살아왔다. 
                      
                    1980년 전두환 군사 정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인권 유린의 범죄 계획을 실행에 옮기면서 국민들에게는 '사회악 제거' '밝은 사회 만들기 운동' 등의 슬로건을 내세워 삼청교육대에 대한 이미지 홍보 작전을 거의 완벽하게 해냈다. 당시 어용 주요 일간지와 TV 보도 매체 등은 앞을 다투어 삼청교육대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이곳에 끌려간 사람들은 모두 폭력배, 인신매매범과 같은 파렴치한 인간들로 매도됐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 중 대다수는 경범죄에나 해당될 수 있는 그런 가벼운 죄목이었는데 시기를 잘못 만나 죽을 고생을 하고 간신히 살아나올 수 있었다. 
                      
                    천신 만고 끝에 지옥훈련을 마치고 사회로 돌아온 이들은 사람들의 편견이라는 의식적인 폭력에 또 한 번 희생자가 됐다. 
                      
                    군사 정권이 물러간 후 삼청교육대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이뤄지면서 밝혀진 실상은 아래와 같다. 
                      
                    삼청교육대는 대한민국의 전두환 군사 정권 하에서 행해진 조직적인 폭력 및 인권 유린 사건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8월 4일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 및 계엄포고령 제13호를 발표, 삼청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삼청교육대는 삼청계획 5단계, 민중에 대해 가해진 폭력 사건, 혹은 그 사건을 위해 설치된 기관을 가리킨다 
                      
                    이 작전은 대외비로 진행되어 구 전과자 및 우범불량배의 목록을 미리 조사한 뒤 진행되었다. 첫 목표는 20,022명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형사들, 경찰서들 사이에 경쟁이 붙어 후에는 머리 숫자 채우기 식으로 검거가 진행되었다. 군경 합동으로 영장 없이 무작위 검거된 시민들의 수는 6만 명을 넘었다. 
                      
                    이후 검거된 사람들은 A, B, C, D의 네 등급으로 나누는 심사 과정을 거쳤으나, 검거된 당사자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 A급 : 조직 폭력배/공갈치기배의 수괴 및 중간간부, 상습폭력, 실형 2범 이상, 흉기소지, 강도 절도 밀수, 마약현행범, 인신매매범一군사재판 
                      
                    * B급 : 조직 폭력배/ 공갈치기배의 행동대원, 기타 경제/정치 폭력배, 상습도박, 사기꾼, 폭력우범자, 강도, 절도, 밀수, 마약, 재범 위험이 있는 전과자-4주순화교육 후 근로봉사 
                      
                    * C급 : 폭력 사실이 경미하고 우발적인 범행자. B급 중 정상이 참작된 자-4주 순화교육 
                      
                    * D급 : 초범, 사안이 경미한 정상적인 학생 및 소년, 직업과 주소지가 일정해 개선 가능성이 뚜렷한 자-훈방 
                    삼청교육대의 주 대상은 B,C급에 해당되었다. 
                      
                    경찰에서 인계된 39,786명이 군에 인계될 무렵에는 39,742명으로 44명이 이미 명단에서 사라졌다. 이들은 이송단계, 또는 초기 기죽이기 단계에서 구타 또는 극심한 기합으로 인해 충격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청교육대는 본래 4주간의 순화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입소 초기에는 장교들과 사단장들이 "4주 후에 보내준다" "훈련 잘 받으면 일찍 간다" 등의 말로 안심시키며, 동시에 '시범케이스'로 무작위로 골라낸 훈련생들에게 가혹행위를 일삼았다. 약속한 4주가 지나도 훈련생들은 풀려나지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군부대 내 강제 노역에 다시 배치되었다. 
                    B급 10,016명은 이후 20여 개 부대에 분산 수용되어 '근로 봉사',즉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이 근로 봉사는 훈련생들이 지원한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군인들의 강압에 의해 자원서에 서명하게 된 것이었다. 
                    1981년 1월 24일 24시부로 비상계엄은 해제되었으나, 그들 중 8천여 명은 1~5년 사이의 '보호감호처분'을 받아 계속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대한민국 국방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삼청교육대 훈련 도중 총 사망자는 57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러나 1988년 피해 사례 접수를 시작했을 때 접수된 바에 따르면 군부대 내 사망 112 명, 구타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 397명, 부상, 상해 장애자 2,786명으로 나타났다. 
                      
                    아직까지 피해자들 중 상당수는 삼청 교육대에서 당한 피해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그냥 묻어두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므로 이 숫자도 정확한 피해 통계라고는 할 수 없다. 
                      
                    정부는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및 명예회복을 약속했으나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렇다 할 보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내건 단체 소송은 현재까지도 "공소 시효가 지났다"라는 이유로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또한 국회가 약속한 삼청교육대 특별법은 계속 결재가 미뤄지며 다음 회기까지 넘어가 자동 폐기되기만을 반복하고 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박대통령님 엄청난 청야 전술 중 입니다
                    1. 대통령이 잘못이 없기에 당당히 법과 맞서고 있다. 2.슬쩍 사과하므로 죄가있구나라는 연막작전을 구사했다. 3.법적인 하자가 있었으면 최순실씨를 독일에서 귀국시키지 않았다. 4.최순실께 태블릿을 물어보니 자기꺼가 아니라는 확답을받고 자신있게 청야전술을 쓰시는중이다
                    5.언론이 거짓보도 폭발이면성공이다. 6.옛날같이 이정도면 민노총 야당 국회가 촛불들고 나올것이다. 7.적당히 빅딜하는척하믄서 이빨갱이 저빨갱이 빨주노초파남보 빨갱이 모두다 튀어나올것이다. 8.하야를외치고 끝까지 지키면 탄핵의 악수를 쓸것이다
                    9.참다못한 국민은 의병의 이름으로 태극기 의병이 일어날것이다. 10.숱한 거짓말 날조보도로 극악무리한 좌익은 스스로 자기무덤을 팔것이다. 11.태극기물결이 대세를 이룰것이다. 12.결국 털어도 털어도 대통령죄가없으면 언론부터 슬슬 공정보도로 돌아설것이다.
                    13.태극기의병은 전국으로 확산될것이다. 14.국민여론과 민심도 다시 회복할것이다. 15.탄핵 기각하고 태극기물결 군대는 빨갱이와 국회 언론 검찰을 압박할것이다. 16.검찰은 백기투항 할것이다
                    17.검찰은 속죄의 맘으로 빨주노초파남보 빨갱이 색출작업에나선다. 18.국회는 스스로 반성하고 총사퇴를 한다. 19.전국공무원 교사 경찰 군대 노조등등등 모조리 사정작업을 실시한다
                    20.이러한배경에는 태극기물결의병이 위의 사정이 끝날때 까지 멈추지 않을것이기에 대통령은 자신감이 넘쳐날것이고 이렇게 이루어 질것이다.
                    21.안정되고 평화로운 대한민국을 새로이 건설하고 영예롭게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물러나실것이다. 22.국가안보가 투철한 공안검사출신 황교안께서 대통령이 될것이다.
                    슬픈노래부르면 슬픈인생을살아요 신나는 노래 부르면 인생이 신나거든요 대통령님께서 이렇게 되실려믄 퍼나르세요
                    10사람 에게 보네기운동도 애국입니다 그러면 꼭이루어 집니다 의병들이여 퍼 나르세요 꿈과 희망과 현실로 대통령님과 황교안 만세 [펌글] 가져온 곳 : 카페 > 대한민국 박사모 (박사모) 글쓴이 : 대한민국을 살리자 우리벗님들~! 항상健康하시고 家族과 함게 幸福하게 지내세요.


                    박성일 목사 “이 시대의 종교개혁 3가지 포커스”

                    한편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KAPC)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이 시대의 종교개혁"이라는 주제의 컨퍼런스를 4월 6일부터 2일간 필라 기쁨의교회(박성일 목사)에서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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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컨퍼런스 준비위원장 박성일 목사는 1.5세 목회자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박사과정(조직신학)을 마치고 1998년 기쁨의 교회를 개척했다. 또 2003년 필라에서 웨스터민스터 동문인 박성일 김한요 송영재 정대성 목사 등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근거하여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개혁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목사들이 주축이 된 신앙운동인 '열린 말씀 컨퍼런스'를 시작했다.

                     

                    아멘넷은 박성일 목사와 종교개혁 500주년을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Q.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여러가지 행사가 열리는 것을 보면서 10여년전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부흥을 기대하며 한국과 미주한인 교계에서 열렸던 여러 가지 행사가 떠올랐습니다. 전시성 행사는 피해야겠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한인교계와 교회의 자세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종교개혁은 목숨을 걸고 복음과 교회를 지켜낸 역사 입니다. 이미 루터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위클리프와 후스 같은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이 목숨을 바친 개혁의 첫 단추를 끼웠습니다. 우리가 종교개혁의 후예들이라면, 순수한 복음과 거룩하고 순전한 교회 공동체를 지키고 전파하기 위하여 대단한 각오가 필요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한민족 교회의 문제는 부흥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용주의, 물량주의, 성공주의, 인물중심주의로 인하여 계속 본질로 부터 이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중요한 것은 “근원으로 돌아가자”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도 “성경적 기독교”가 뭔지를 이해하고 그것으로 방향을 정하고 가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종교개혁 전야인 500년 전과 오늘날의 상황이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어떻게 이 시대를 보고 있습니까?

                     

                    종교개혁의 전야는 무엇보다도 교권이 타락하고 교황들이 정치적인 싸움에 이기고 업적을 세우기 위하여 자금이 필요했고 구원을 돈으로 바꿔먹는 시대였습니다. 교인들은 무지한 자리에서 스스로 나오지 못하는 정책 아래에 머물러 있어야 했고, 신학자들은 교권의 도움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양심선언을 할 수 없었던 시대입니다. 오늘 한민족 개신교회의 현주소가 어딘가 생각해 보면, 이제는 옛 모습을 벗고 새로운 길로 나가야 하겠다는 열망이 끓어 넘치려는 시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교인들은 다 아는데, 목회자들 만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제도적 교회를 위하여 존재하는 교인이나 교리가 아니고, 목사에게 충성하여 교회에서 보직을 얻고 자리매김을 하는 정도의 사고에 빠져 있는 교인들이 아니어야 할 텐데, 아직도 목회자들이 자기가 주도하는 제도적 교회가 견고해지고 확장하면 성공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강력한 복음의 회복과 교회의 갱신이 요구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Q. 주제가 “이 시대의 종교개혁”입니다. 이 시대에 종교개혁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면 어디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몇 가지 다시 정리하자면 첫째 신학적/교리적 정체성의 확립, 둘째 목회자 및 교회의 윤리성 회복, 특히 돈에 대한 투명성이 요구되지 않을까 하고, 셋째 제도적이고 인물 중심적인 권위주의에서 오직 성경의 권위 앞에 모두가 순복하는 정상적인 질서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Q.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아멘넷은 “한인교회는 개혁되어야 하지만 그 누구부터가 아니라 나부터 개혁되어야 한다”라는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책임을 돌릴 것이 아니라 오늘날 위상이 추락된 교회문제는 목회자와 성도가 같이 책임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목사님이 생각하시는 개혁의 방향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목회자가 교회에 대한 공공성을 회복하고, 오직 주인 되신 그리스도 앞에서 신앙양심이 비추임을 받고, 성경말씀을 잘 해석하고 본질대로 전달하여 성경적으로 건강하고 건전한 교회와 성도들이 세워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Q. 미주한인교회들은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오는 영적인 도전과 함께 이민유입 금지라는 물리적인 도전을 함께 받고 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미주한인교회들이 진정 변화되고 갱신되어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딴 것 보다는 트럼프 시대의 미국의 방향이 자기우선주의의 타당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낙태나 동성애 같은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도 민감해야 하겠지만, 동시에 배타성과 이기주의적 생각과 행동이 얼마나 죄악된 것인지 깊이 성찰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돈이 우선되는 생각도 심히 우려가 됩니다. “먹고사는 것이 문제다”라고 매번 외치던 한국의 대통령도 결국은 정신세계가 피폐해 있음을 여실 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시대의 교회가 한국이던 미국이던 하나님나라의 가치에 대해서 선포하고 모든 교우들이 그 정신으로 무장하고 나라와 세계를 위해서 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내 가슴에 영원히 계신 당신
                                                        최송연

                          자욱한 안개가 피어오르듯
                          내 마음속에 회의심 일어날 때면
                          당신은 찬란한 아침 빛 되시사
                          내 가슴속의 안개를 거두어 주소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물처럼
                          내 마음에 슬픔이 일어날 때면
                          당신은 하얀 손수건 되시사
                          내 가슴속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소서 
                           
                          시커먼 먹구름 몰아치듯
                          내 마음에 절망감 몰려들 때면
                          당신은 무지갯빛 고운 꿈 되시사
                          찬란한 소망으로 내 가슴을 채우소서
                             
                            망망한 바다 위를 떠도는 조각배처럼
                            내 갈 길 알지 못해 유리방황 할 때면
                            당신은 밝은 빛 등대 되시사
                            내 가슴에 구원의 항구를 밝히 보여주소서
                               
                              당신이 계심으로 내가 있고
                              당신 아니 계시면 나 또한 無存인 것을...
                              내 가슴에 영원히 계신 당신,
                              당신은 나의 생명, 나의 완전입니다.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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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구 아멘넷을 닫는 관계로 그곳에 남긴 제 글 아래

                            리플을 남긴 님들의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서 함께 퍼온 것입니다.^^





                            비둘기 

                            2011-02-07 16:55
                             66.xxx.79
                             사랑의 불로 인같이 새겨진
                             가슴에서 타오르는 이름
                             그 분을 향한 사무치는 마음이 전해집니다

                             안개 내려지고
                             슬픔이 드리워진 곳에
                             밝은 빛과 찬란한 소망이 선포되어집니다

                             주님을 어찌 그리
                             아름답게 표현하시는지요
                             우리의 심령속에  주의 깊으신 생각을
                             깨달아감으로 기뻐하게 하십니다

                            별똥별 사모님의 당신
                             또한 나의 마음에 계신
                             사랑하는 당신으로 고백합니다
                             
                                  

                            은하수 

                            2011-02-06 21:12
                             24.xxx.44
                             항상 최고의 언어로 주님께 아름다운 마음 드리시는
                             님과 함께 할 그 아련한 우리의 고향 마음에 그려 봅니다.

                             "내 가슴에 영원히 계신 당신,
                            당신은 나의 생명, 나의 완전입니다"
                            곧 은하수의 고백이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초생달 : 

                            별똥별님,
                            와-어쩌면우리마음을솓아놓으셧습니다,몇일간 몇몇 친구들과서울을 떠나
                            돌아오는 기차 옆자리에 청년한분을만났습니다, 중국 북경의 조선족가운데서 전도의의무를띄고 파송되어서 한국에부모님을뵙고 돌아가는참이었습니다,많은 어려움가운데 위험까지겹쳐서하나님의일을하는그분의이야기에 우리들은 눈시울을적시면서 반성과죄책감조차느끼면서 서울역광장에서 많은짐을소지하고 돌아서는 뒷모습이 너무슬펐습니다, 돌아와서 별똥별님의이 [시] 에서 또한번 그 청년의 뒷모습이 뜨올라 눈물이끝이없이흐르는데 어찌할길을잊었습니다,
                            그 청년은 2월7일 바로 오늘돌아가서 많은 시련을 헤치면서 이겨낼것이라는믿음으로기도를올리고있습니다,님의 이 [시]와함께말입니다, 2/7 01:07
                             123.xxx.206 
                             
                              
                             은하수  

                            별똥별, 초생달, 은하수 ,,,,
                            어쩜 이리도 정답게 느껴지는지요.
                            역시 동일한 곳을 고향으로 마음 깊이 품고 있기 때문일까요?
                            갑자기 동심이 된듯합니다.^^*
                            별하나 별둘,,,,
                            별나라 우리님들 늘 별빛 은은하소서. 2/7 18:29
                             24.xxx.44
                             
                             초생달   은하수님
                            감사합니다,멋 도 없이 가끔머리를내미는 초생달입니다,
                            올해도 은하수님의좋은 말씀 그리고 격려의글을 초생달은 학수고대할것입니다,건강하시고 주님안에서 행복하시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 2/7 22:14
                             123.xxx.206 
                             
                              성령의열매 

                            2011-02-06 20:55
                             66.xxx.92
                             아멘입니다!
                            사모님의 시를 읽으니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불가능이 없다는
                             확신을 다시 한번 제  마음에 각인 시키게 됩니다.

                            항상 좋은 글로 힘주시니 감사합니다!^^*
                             
                             진설병 

                            2011-02-06 20:27
                             173.xxx.127
                             아멘입니다.
                             
                            보요얀 안개낀 소원의 항구, 등대 밑 바위자락에서 하늘 향해
                             들어 올린, 여윈 손길을 연상 시키네요.

                            다들 잠이 든 수양관의 밤, 잔디 언덕위에서 파랗다 못해 까만 하늘 ,
                            수없이 물 먹은 별들만 밖혀 있는 그 하늘을 향해, 거기에만 들리게
                             외치는 고함 소리, 그 하늘 문을 손끝에 피멍이 엉기도록 두드려 보는 
                            몸부림을 떠 올려 봅니다.

                            너무 마음에 와 닿는 글, 참 좋습니다.
                            골로새서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 함으로 하나님을 찬양 하고(골 3:16)...

                            시령한 시, 은혜롭습니다.
                            감사 합니다. 또 기대해 봅니다.
                            건강 하십시요.
                             
                              나폴레옹 

                            2011-02-06 14:41
                             69.xxx.227
                             "포기란 말은 김장담글 때나 쓰는 말이다"

                            가끔씩은 흔들려보는거야
                             흐르는 눈물을 애써 막을 필요는 없어
                             그냥 내 슬픔을 보여주는 거야
                             자신에게 까지 숨길 필요는 없어

                             물이 고이면 썩어들어가는 것처럼
                             작은 상심이 절망이 될 때까지 쌓아둘 필요는 없어
                             상심이 커져 그것이 넘쳐날 땐
                             스스로 비울 수 있는 힘도 필요한 거야

                             삶이 흔들리는 건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았다는 건
                             내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증거니까
                             가끔씩은 흔들려보는 거야
                             하지만 허물어지면 안돼
                             지금 내게 기쁨이 없다고
                             모든 걸 포기할 필요는 없어
                             늦게 ㅤㅊㅏㅊ아온 기쁨은 그만큼 늦게 떠나가니까

                            -유정-의 블로그에서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다 보면 행복해진다.
                            진정한 고수가 되면 슬퍼도 웃는다. 최후에 웃는자가 승자라는 말이 있지않는가!"

                            별이 사모님, 눈물을 거두시고 주님의 사랑안에서 행복한 일주일이 되시길...^^*
                             
                              

                            김오동 

                            2011-02-06 02:52
                             218.xxx.197
                             "내 가슴속의 안개를 거두어 주소서...

                            내 가슴속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소서... 

                            찬란한 소망으로 내 가슴을 채우소서...

                            내 가슴속에 구원의 항구를 밝히 보여주소서...

                            내 가슴에 영원히 계신 당신,
                            당신은 나의 생명, 나의 완전입니다."

                            오늘도 우리 믿음을
                             한껏 고양(高揚)시켜주는
                             아름다운 시를 인하여
                             고마운 마음을 전할 수 있어
                             이것이 행복인가요?

                            별똥별님!
                             
                             체르니 

                            2011-02-06 02:35
                             118.xxx.76
                             별사모님 좋은 시 감사드립니다.
                             "당신이 계심으로 내가 있고
                             당신 아니계시면 나 또한 無存인 것을...
                            내 가슴에 영원히 계신 당신,
                            당신은 나의 생명, 나의 완전입니다."
                            이 부분을 읽으며 뭉클해지는군요. 우리의 존재 이유는 바로 그 분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주의 거룩하심 생각할 때" 라는 찬양이 생각나는군요. 그 곡의 영문 가사에 보면 별사모님의 고백에 맞는 가사가 나옵니다.
                             "I worship You. I worship You. The reason I live is to worship You."
                             
                              thomas 

                            2011-02-06 00:41
                             72.xxx.81
                             오후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니 눈덮인 동네가 눈비에 자욱하였습니다.
                            별똥별님 기도문을 읽으니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나서 시편을 펼쳐봅니다.
                            바깥을 보니 고요하고 적막하군요. 기도하고 성경말씀 읽기 좋은 시간입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일깨워주시는 별똥별님의 고백을 늘 귀하게 듣고있습니다.
                            은혜로운 주말을 보내시구요, 추운날씨에도 여러 논객님들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thomas  

                             g2u님은 유익한 말씀을 가지고 반드시 돌아오실거라 믿구요,
                            질문님도 "방"자 소리나면 다시 나타날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Thetrue님은 친구의 친구더라구요...좁은세상입니다.
                            짐보님도 바쁘시겠지만 잘 계실거 같고,
                            다들 각자의 처소에서 열심히 살고계실거라 주안에서 믿습니다! 2/6 14:38
                             72.xxx.81
                             
                             별똥별   그렇겠지요?
                            어디에 계시거나 모두들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2/6 21:36
                             66.xxx.164 
                              
                                   
                             
                             해처럼달처럼 

                            2011-02-06 00:22
                             69.xxx.69
                             그래요. 별사모님....
                            그 분 때문에 오늘을 살아가는 이유가 있겠지요.

                            그 분의 찬란한 소망이 저의 남은 생애 가운데
                             충만하실 것입니다.
                            별 사모님에게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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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反이민 행정명령 '제동'…연방법원 "효력 중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反이민 행정명령’ 시행이 당분간 어렵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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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고심을 맡은 클리프톤(좌), 캔비(중앙), 프리드랜드(우) (사진출처:로스앤젤레스 타임즈) 

                             

                            현지시간 9일 미국 제9연방항소법원은 “이슬람권 7개국 국민의 미국 입국과 비자발급을 일시적으로 금지한 행정명령의 효력을 미국 전역에서 잠정 중단하라”고 결정했다. 이번 항고심은 재판부 3명의 만장일치로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연방항소법원이 이번 결정을 하게 된 배경은 워싱턴주 시애틀 연방지방법원이 ‘행정명령을 일시 중단하라고 결정’하자 법무부가 불복해 항소를 하기로 결정한 데 있다.

                             

                            재판부는 결정문에 “국가안보라는 공익과 여행의 자유라는 기본권 사이에 충돌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연방정부가 행정명령을 제한적으로 이행할지 충분한 소명을 하지 못해 하급 법원의 결정을 유지하겠다”고 기술했다.

                             

                            이번 항고심의 요지는 행정명령이 ‘위헌 소지가 있는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명령’인가 아니면 ‘안보를 위한 대통령의 권한’인가 하는 것이었다.

                             

                            판결에 앞서 연방항소법원의 진보적 성향과 변론 분위기 등으로 미루어 연방정부가 패소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왔다.

                             

                            이번 판결에도 트럼프 정부는 ‘反이민 행정명령’을 시행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여 행정명령은 결국 연방대법원이 최종 결정할 것으로 전망된다.

                             

                            백유현 ⓒ 데일리굿뉴스

                            가져온 곳: USA 아멘넷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
                            (언약적 구속사로 본 성경 계시역사)

                            1. 들어가면서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부단히 성경을 공부하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갈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전해야 하는 일차적인 목적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 때문입니다(딤전2:4). 물론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인류 전체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선택하기로 예정하신 당신의 백성 모두의 구원을 제한적으로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결코 보편 구원론적 관점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에 근거한 제한구원(limited salvation)을 강조합니다. 예수라는 이름 속에서 이런 사실이 극명하게 확인됩니다. 마1:28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잃어버린 백성을 찾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요6:37, 눅19:10) 성육신의 방식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본체가 되시는 분입니다(빌2:6-8).

                            이런 이유로 합당한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은 바른 계시관의 정립에서 비롯됩니다. 곧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들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철저히 근거를 두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롬10:17). 때문에 청중 모두가 공감하는 수준 높고, 깊이 있는 설교를 제아무리 은혜롭게 선포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의 본문이 말하는바 하나님의 본의에 일치하지 않는다면 계시의존적 설교와는 무관한 자의적이고 자기기만적인 설교에 불과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청중을 즐겁게 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과는 관계도 분깃도 없게 된다고 성경은 엄히 경고합니다(마7:21-23, 롬10:2-3). 문제는 사람의 관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천상적 시각 말입니다. 따라서 본문이 말씀하는 천상적 의미를 세상적 관점과 질서 속에서 접근하게 될 때, 거기에는 자의적 해석과 편의적인 적용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그것은 넓은 길의 신앙관일 수는 있어도 결코 좁은 길의 신앙여정과는 무관합니다. 그 결국은 사망과 생명, 그리고 심판과 구원만큼의 양극화 현상을 초래할 뿐입니다.

                            이와 관련해 성경을 일컬어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啓示書)라고 말합니다. 이는 창세전 영원하신 목적과 작정으로서 세상만사와 만물을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오직 성경을 통해 계시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중 하나님의 계시의 핵심은 단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구속의 은혜에 집중됩니다. 이런 사실은 뱀의 미혹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죄의 문제(창2:17, 3:6)가 ‘여자의 후손언약’(창3:15)의 당사자인 예수 그리스도(갈4:4)의 대속적 사역을 통해 해결됨으로 당초 하나님의 창조언약으로서 문화명령(창1:28)은 지속적으로 성취를 향한 길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계시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속(救贖, redemption)사역에 집중될 때(요5:39, 딤후3:15-17), 계시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성경계시의 총화(總和)를 하나님 나라 사상에서 찾습니다.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말입니다. 이런 사상은 역사의 종국에 가서 마침내 실현될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도래에서 성취의 절정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계시에 무지하거나 왜곡 및 곡해현상은 사이비적 기독교 신앙과 교회 및 목회에로의 귀결이 불가피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나와지는 종교성이 이를 적극 부추기기 때문입니다(롬1:21-23). 결과는 우상 숭배적 신앙관의 형성입니다. 상황이 이럴 진대 열심을 내면 낼수록 사태는 더욱 악화일로를 치닫게 될 뿐입니다. 거기에 분명히 유사기독교의 모습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바 정당한 기독교 신앙관은 찾기 힘듭니다. 불법적(마7:21-23)이고 불복종적(롬10:2-3)인 자의적 숭배 신앙만이 난무하게 됩니다. 바른 성경공부의 당위성과 필요성이 이런 사실에 근거해 강력히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며, 성경계시의 총화가 무엇인 지를 바르게 아는 일은 바른 신앙관 형성의 척도가 될 만큼 중요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목적 곧 구원의 이유와 바로 직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위에서 하나님 나라 건설로서의 천국사상이 성경이 말씀하는 총체적 계시관의 궁극적 목표인 사실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시민으로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친 백성들은 범사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사역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아 살아가야 합니다(마6:33). 이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추구와 구현을 위한 삶의 자세를 가리킵니다. 성경은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요 제일 된 목적이라고 설파합니다(전12:13).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삶의 실상이 궁극적으로 선악 간에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에 의한 최종적 판정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전12:14, 고후5:10, 히9:27, 계20:11-15).

                            이제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바 하나님 나라 사상이 성경계시의 총화인 사실의 정당성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총체적인 계시의 절정인 하나님 나라 사상은 공교하게 지어낸 것이 아닌 성경 자체가 자증하는 객관적인 관점이요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신앙으로 수납하고 실제적인 삶의 가치관과 목표로 삼아 살아가는 것을 통해 여기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된 신분과 그 나라에 소속된 자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인식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여기서부터 맛보며 확신하면서 살아가는 실제적 삶의 경험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그래서 현세와는 단절된 사후세계에 속한 나라(that world)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여기서부터 예비적으로 맛보며 체험하며 이루어가는 현재 진행적(this world, 마12:28, 눅17:20-21, 마13:31-33)이며 동시에 미래지향적(눅17:22-24, 22:14-18, 마25:31-33)인 이중적 국면을 띠고 있는 나라입니다.

                            먼저, 다니엘서 2장에 소개된 느부갓네살 왕의 꿈 내용을 다니엘이 해석하는 내용 속에서 하나님 나라 주제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단2:31-46). 거기에서 각기 이질적이면서도 동시에 상호 깊이 연계돼 있는 두 종류의 꿈 내용을 접하게 됩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큰 신상’과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그래서 신적기원에 의한 ‘뜨인 돌’에 관한 꿈 내용입니다. 문맥을 통해 전자는 인간의 통치역사를 상징적으로 묘사합니다. 후자는 신적기원에 의한 하나님 나라를 표상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두 나라의 정체성은 각기 적대적인 성격을 띠면서 부단히 충돌합니다. 결국 뜨인 돌에 의해 큰 신상은 파괴됩니다. 최종적으로 멸망당합니다. 그리고 뜨인 돌로 말미암는 신정왕국 곧 하나님 나라가 마침내 인간통치의 세상나라를 대치합니다. 이는 세상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인 사실을 명백히 증거하는 것을 통해, 세상역사의 종식과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도래란 신학적 명제를 동시적으로 시사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성취되는 현장이며 무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역사를 방편삼아서 하나님의 창세전 영원하신 목적과 계획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 가십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국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에 모아집니다. 성도의 모든 삶이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적극 추구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성경의 편집방향성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도록 구성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66권의 처음 책인 구약의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고 선언합니다. 이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으로서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의 기원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듯이 천지 곧 우주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란 사실 말입니다(히3:4). 그런데 계21:1을 살펴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와 관련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다고 기술합니다. 이는 창1:1에서 언급하고 있는 태초의 천지창조사역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일컫는 종말론적 재창조사역으로 갱신, 확장되고 있음을 명백히 시사하는 내용입니다(벧후3:10-13, 마19:28, 사65:17, 66:22). 다시 말해 처음부터 이 세상(this world)의 창조사역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묘사되고 있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that world)의 건설을 향해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전(全) 우주적 경륜(universal economy)을 다니엘서 2장에 소개된 느부갓네살 왕의 꿈 해석 속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공생의 사역의 중심사상이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에 집중됩니다. 곧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사상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의 선언(宣言) 속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마4:17입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본문에서 ‘천국이 가까왔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본격적인 사역 속에서 이미(already) 이 세상에 도래해 역사하고 있는 현재완료진행형적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권세와 통치를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12:28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눅17:20-21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뿐만이 아닙니다. 막2:10에서는 한 중풍병자가 죄 사함 받는 사실을 소개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현재적으로 발휘되고 있음을 분명히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논지들이 종합적으로 시사하는 바는 한결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왕적 통치능력이 현재적으로 역사되고 있다는 사실에 모아집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각종 이적기사와 병자의 치유 및 축사(逐邪)사역, 그리고 천국복음의 증거와 죄사함의 권세 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도래해 역사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증거하는 명백한 표적들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중심주제는 단연 하나님 나라 사상에로 귀결됩니다.

                            넷째로, 소위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마6:33)을 천국백성들이 세상 속에서 추구하고 지향해야 할 신앙적 삶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총체적인 관점에서 설파합니다. 이는 앞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마4:17)고 선포하시는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해야 할 관점이기도 합니다. 곧 하나님 나라 사상이야말로 성도들의 존재이유와 추구할 삶의 궁극적인 목표요 가치관이란 사실을 강조함에 다름 아닙니다.

                            다섯째로, 동일한 산상수훈 속에서 특별히 기도문제와 관련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마6:9-10)에 대해 집중해 기도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십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도래한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맛보며 체험하는 삶을 통해 미래지향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적극 소망함으로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의 중심이 자신의 현세적인 목적달성을 위한 이기적인 기도에 치우치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 곧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실현이라는 공적이고 공동체적인 기도에 집중되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삶의 성격과 방향성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매사에 하나님의 영광구현’(고전10:31)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성경의 본의(本意) 또한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구현을 지향하는 삶이란 본질에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삶을 통해 가장 극명하게 표출될 것이 확실하기에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경륜을 바르게 인식하고 신앙하는 데서 나와지는 자율적 순종의 삶 곧 말씀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 누리는 계시(啓示)의존적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여섯째로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역 안에서 유대인과 더불어 새로운 피조물로서 한 새 사람, 곧 한 몸을 이룸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게 되었음을 논술합니다(고후5:17, 엡2:14-16). 뿐만 아니라 주님의 몸 된 교회공동체는 본질에 있어서 천상적 보편의 교회를 지향함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 곧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새로운 신분의 소유자들임을 강조합니다. 골1:13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렇습니다. 지상의 성도는 본질에서 이미 천상의 나라를 기업으로 소유한 천국백성들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빌3:20).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속사역 안에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돼 미래의 영광을 현재적으로 이미 소유한 자들로 성경은 설명합니다(엡2:6). 성도의 현재적 삶의 성격을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소속돼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천상적 삶으로 간주해 설명하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 근거합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성도들은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명령을 생명의 도리로 받드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선양과 확장과 종말론적 실현이라는 궁극적 명제를 가지고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친 백성들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의 진술들을 통해 성경이 제시하는 주제들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이들 세부적인 주제들을 총괄하는 단일한 주제는 단연 하나님 나라 사상에 집중된다는 사실에 달리 이견(異見)이 없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의 총체적인 주제는 하나님 나라 사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 사상이 성경 전체의 역사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지를 요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관을 전통적이 아닌 성경적으로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는 전통적이고 유전적인 신앙관은 그것이 제아무리 기독교적으로 치장되었다 할지라도 본질에서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헛된 경배로 판정되기에 결과적으로 불법적이고 불복종적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막7:6-8, 마7:21-23, 롬10:2-3, 딤후3:15-17, 딤전2:4, 요삼4절, 엡4:11-13).

                            2. 펼치면서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啓示書)로서 언약적 구속사의 성격을 띠고 진행됩니다. 여기서 계시라 함은 창세전 영원세계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수립된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우주 만물에 대한 작정과 계획을 성경저자들을 통해 포괄적으로 세상역사 속에 드러내신 사실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언약적이라 함은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사상인 구속의 도리가 세상역사를 무대로 섭리적으로 펼쳐질 때, '선(先) 언약-후(後) 성취'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언약(言約, covenant)을 구속사 진행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구속사(redemptive history)라 함은 아담의 범죄 안에서 죄인 된 인류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속사역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이들을 통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시는 가운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심으로 종말론적 영광을 받으시고자 세상역사를 섭리적으로 주관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활동사역을 가리킵니다(엡1:4-6).

                            이런 일련의 상호 불가분의 계시적 정황상, 계시사와 언약사 및 구속사란 표현은 본질에서 동질성을 띠면서 궁극적인 목적인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향해 서로 밀접하게 연계돼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이런 종말론적 구속사를 예시(豫示)적으로 진행해 나가기 위해 앞서 세상 가운데 드러내신 계시의 도구로서 모형적이며 예표적인 사건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 속에 기록된 하나님의 제반 언약들은 성격상 다양성을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원이 신적(神的, divine)인 것으로 인해 통일성을 지향하는 가운데 상호 밀접하게 연관된 상황에서 갱신, 확장, 발전을 거듭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창1-2-3장에 기록된 핵심 사건들이 신적 언약을 중보적 매체로 상호 깊이 연계돼 있음을 바르게 확인하게 될 때, 비로소 창세 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삼위일체적 구속계시의 본의(엡1:3-14)를 바르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나아가 나머지 성경의 계시역사 전체를 하나님의 심정으로 일관성 있게 해명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와 지침을 제공한다 하겠습니다.


                            ①문화명령으로서 창조언약(창1:2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에 따라서 세상을 지으시고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좇아서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친히 지으셔서 에덴에 거주케 하십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모든 창조물의 통치권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위임해 주십니다(창1:28). 이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그야말로 창조의 절정과 극치와 면류관으로서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representative ruler)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아담 부부가 타락하기 전, 에덴은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를 예표적이며 성례전적으로 계시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보다 온전하고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막중한 책임과 사명이 저들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창1:28의 창조언약을 통해 주신 소위 '하나님의 문화명령'(cultural mandate, creation mandate, christian stewardship) 속에 담긴 계시의 비밀의 본의(本意)가 그랬습니다. 이는 인간의 문화 활동으로서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생명적 활동의 궁극적 목표가 하나님 나라 사상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자손), 땅을 정복하라(땅),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통치권, 창1:28)고 하신 하나님의 문화명령으로서 창조언약의 중심사상은 본질에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지향하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시사합니다.

                            ②선악과 금령법(선악과 언약)으로서 아담언약(창2:17)

                            그렇다면 창1:28에 담긴 이런 원대한 하나님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이 어떤 방식을 통해 실현 가능할까요. 이는 창조의 원리상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가운데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통해 비로소 가능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통치적 성격은 하나님의 말씀이 권세 있게 시행될 뿐 아니라, 이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으로서 자원하는 순종의 삶을 특징으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전12:13, 요14:21). 바로 이런 사실의 당위성을 극명하게 계시하고 있는 표상(表象)적 사건이 다름 아닌 선악과 금령법(禁令法)에 담긴 선악과 언약(행위언약)의 비밀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이런 이유로 이후부터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 선악과 금령법(언약)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효력을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아담부부의 생명의 근원이 말씀에 기인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생명의 지속적인 존속여부 또한 철저하게 말씀의 순종에 의존돼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과 작정 속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이들에게 이후 문화명령을 적극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선악과 행위언약(창2:17)이란 자체 속에 조건부적인 단서조항을 포함함으로 일종의 선의(善意)적인 시험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창2:16을 통해 이미 저들에게 허락된 자유의지(self will)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율적이며 독립적인 성격의 자유의지가 아닙니다.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본질적 관계상, 하나님의 뜻을 적극 이루어 드리는 일에 의존적이며 종속적으로 선용되어야 하는 제한된 자유의지입니다. 17절의 선악과 금령법에 의해 아담의 행동이 철저히 통제되고 있음이 이를 반증합니다. 이런 사실은 아담이 각종 생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데서도 극명하게 확인됩니다(창2:19-20). 다시 말해 아담은 각양의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줄 때 임의대로 명명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부합되게 지어준 것입니다(의존적 자유의지). 이는 또 다른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이 보다 구체적으로 표출된 경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만일의 경우 아담부부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제한된 자유의지를 오남용함으로 월권을 하게 된다면, 선악과 금령법에 담긴 하나님의 요구는 경우에 따라서 무시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선악과 사건이 시험적 성격을 담고 있다는 관점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인간의 존재이유와 가치성과 본분은 철저히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그 분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복하는 데서 비로소 찾아짐을 확인하게 됩니다. 전12:13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따라서 아담부부는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16절의 범주 안에서 만끽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17절과의 관계 속에서는 철저히 제한적으로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야만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안에서 한정적으로 사용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 이 일을 기뻐하실까, 주님이시라면 이 일을 행하실까, 이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이 일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될까 등등의 질문을 던져보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상의 질문에 ’예와 아멘‘으로 답변할 수 있다면 이는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자유의지를 선용하는 셈이 될 줄 압니다.

                            ③원시복음으로서 여자의 후손언약(창3:15)

                            한편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다 실패한 사단과 그의 졸개들에게 세상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까지 한시적으로 저들에게 허락된 통치의 영역입니다(요12:31, 16:11, 마4:8, 엡6:12).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아담 부부와 그들의 후손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자 하는 계획을 감지한 사단은 천상의 영계(靈界)에서 이루지 못한 사욕(邪慾)을 채우고자(유6, 벧후2:4, 사14:12-15) 이번에는 뱀을 하수인으로 삼아 창조의 면류관인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합니다. 이번에는 직접 공세를 포기하고 우회전술을 시도합니다. 이 시험에 아담과 하와가 빠지고 맙니다(창3:1-6). 이로 인해 에덴에 죄가 유입됩니다. 이제 에덴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안식하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로서의 천상적 모습과 성격을 잃게 됩니다. 인류에게는 실낙원이 돼버린 셈입니다.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가 한 순간에 깨져버립니다. 비록 이들에게 선악과 행위언약 속에 조건부로 주어진 죽음이 즉각적으로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창3:8-10)은 본질에서 죽음과 방불한 형벌로 기능하기에 충분합니다. 사단이 승리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듯 보입니다. 따라서 창1:28에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로서 신정왕국의 건설을 위한 문화명령적 언약은 파기된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사단은 영계(靈界)에서 못 다한 한(恨)을 여기 지상에서 보상받는 듯 합니다.

                            이 과정에서 소위 ‘하나님의 딜레마’(God's dilemma)가 제기됩니다. 창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에 근거하면 이 언약이 성격상 은혜성을 띠고 있기에 어떤 경우라도 중도에서 파기될 수 가 없는 상황입니다(창조언약의 기원은 사실상 엡1:3-6에서 찾아집니다). 하나님은 기어코 아담과 하와 부부 및 그의 자손들을 통해 문화명령의 결국인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만 하십니다. 그러나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은 조건적인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있는 바, 이를 어기면 불순종의 대가로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부부(창3:6)는 죄인으로 정죄돼 죽음의 선고는 필연적입니다. 그렇게 되면 창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은 더 이상 진전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상기 두 언약 사이의 상호 반목과 대립 및 충돌과정에서 ‘하나님의 딜레마’란 문제가 제기됩니다(하나님의 의인화 곧 신인동성동형의 원리에 근거해서).

                            다시 말해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1:28)은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해 나갈 것을 촉구합니다. 그러나 선악과 금령법의 행위언약(창2:17)은 이를 어긴 아담 부부의 즉각적인 죽음을 요구하면서 더 이상의 진행을 불허(不許)합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입니다. ‘하나님의 딜레마’란 이런 양극단의 대립양상을 염두에 둔 데서 나온 수사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창조자의 절대 주권적인 특성상 어떤 이유로라도 파기되거나 변개 될 수 없습니다(민23:19). 더욱이 선악과 금령법은 비록 그것이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조건부적으로 주어졌다 할지라도 보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입장에서 창1:28의 은혜언약에 부속돼 있음으로 죽음의 형벌이 언약적 징계와 심판의 성격을 띠고 주어질망정, 영원한 형벌로서 아주 사망에 처해지게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된다면 이는 창1:28의 언약이 식언(食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식언치 않는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은 그 출처가 본질에서 신적 기원 곧 주권성과 은혜성에 근거하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성취돼야만 하는 당위성을 이미 자체 안에 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비록 아담부부가 선악과 금령법(창2:17)을 어김으로 사형선고가 불가피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언약(창1:28)과의 관계상 언약적 심판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형벌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죽을 수는 없는 상황에 처해지게 됩니다. 이런 진퇴양난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한편으로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을 어긴 이들의 죄책(창3:6)을 해결해 주시며, 다른 한편으로 창1:28의 문화명령적 언약의 궁극적인 목표인 하나님 나라를 지속적으로 성취해 나가시는 방식의 일환으로 창3:15의 여자의 후손 언약을 맺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언약은 이상의 양자 간의 불가피한 상호 충돌을 동시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해결책으로서 이중적 기능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자의 후손언약을 일컬어 복음의 원형(prototype), 곧 '원시복음' 또는 '어머니 약속'(mother promise)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안에 구속계시의 원리상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대속적 속죄사역의 의미가 암시적으로 내포돼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이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구속사역 안에서 절정을 이루는 가운데 마침내 성취되기에 이릅니다(갈4:4).

                            ④구속의 원리를 방편으로 선용하셔서 창조원리를 지속시켜 나감

                            이제 당초 창조원리(창1:28)에 근거해 타락 전 무죄자로서 아담과 하와와 이들의 후손으로 인해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건설 계획은 이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죄를 구속해 주시는 속죄의 원리와 방식(창3:15)을 통해 재정립되기에 이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하나님 나라 건설이 당초 창조원리에서 구속의 원리로 변경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갱신(更新)될 뿐입니다. 다시 말해 구속의 원리를 방편삼아 처음 창조원리에 입각한 하나님 나라 건설 계획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죄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찾으시려는 창세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이 이런 방식으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간파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엡1:4, 행2:23, 4:27-28).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런 식으로 세상역사(표면적 사건)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이면적 사건)인 사실을 통해 인류의 유일한 구속자로서 성육신의 길이 예비 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창4장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세상역사는 표면적으로 보편적 인류의 역사라는 성격을 띠고 피조세계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지만, 사실은 여자의 후손(창3:15)을 세상 가운데 보내시는 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문화명령의 결국이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려는 구속사의 현장이요 무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이런 관점에서 창1-2-3장에 각기 기록된 언약에 관한 상호 연계성과 의존성 및 이에 대한 정당한 해석여부는 이후 전개되는 성경의 계시역사 전반에 걸친 언약적 구속사의 내용을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 바르게 해명하는 일에 있어서 결정적인 근간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⑤여자의 후손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역사

                            이상 창 1-2-3장에 각각 언급된 언약간의 상호 필연적인 연계성은 창4장부터 시작되는 본격적인 인류의 역사 속에서 여자의 후손언약을 구체적으로 성취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출발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를 일컬어 언약적 구속사라 부릅니다. 여자의 후손을 세상에 출현시키려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언약을 수단과 방편삼아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서 미래의 메시아는 계보적으로 당연히 아담과 하와의 혈통적 후손을 통해 세상에 출현하게 될 것입니다. 세속사의 본질이 구속사인 사실이 이런 상호관계 속에서 도출(導出)됩니다.

                            이상의 사실들을 고려하건대, 창4장에 소개된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은 단순히 시기질투에서 빚어진 충동적인 살인행위가 아닙니다. 표면적(세속사적 관점)으로는 아벨의 제사만 열납 된 데 대한 가인의 감정적인 문제가 깊이 개입된 결과로 보여 집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담긴 보다 본질적인 의미는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이미 언급된 인류의 두 후손, 곧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끊임없는 적대적인 대립과 충돌에 관한 예언이 구체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가인은 뱀의 후손으로 아벨은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서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아벨의 제사가 상대적으로 열납 된 사실은 제물의 차별성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히11:4)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원시복음의 내용을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온 은혜로 말미암는 믿음의 당연한 결과일 뿐입니다(창6:8-9, 히11:8, 엡2:8-9, 고전15:10).

                            이후 성경의 계시역사는 철저히 여자의 후손언약을 성취시켜 나가는 언약적 구속사의 성격을 띠고 세상역사 속에서 진행돼 감을 봅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런 구속사의 진행을 특별히 족보의 기술을 통해 묵계(黙契)적으로 시사합니다. 창5장에서 소개되는 아담의 족보는 여자의 후손언약이 아담으로부터 시작해 죽은 아벨 대신 주신 셋을 통해 에녹과 노아에게로 연결되는 것을 봅니다.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족보의 의미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증거, 새로운 계시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 여자의 후손계보를 위한 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통로로서의 기능 등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⑥노아의 본존언약(창9:8-10, 1-2절)

                            노아 시대에 이르러 하나님은 인류를 물로 심판하십니다. 심판의 동기를 설명하면서 창세기 저자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창6:5)이라고 고발합니다. 이후 성경역사 속에서 ‘죄의 관영’은 하나님의 필연적인 심판을 자초하는 결과로 작용함을 도처에서 지적합니다(창15:16, 18:20-21, 눅17:26-30). 이런 원리에 근거해 신약의 기자는 죄의 값은 사망이요, 그 결국은 종말론적 심판임을 경고합니다. 노아를 포함해 8식구만 남고 당시 모든 인류가 물 심판을 당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들의 구원이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창6:8) 인류의 초기역사 때부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시행되는 주권적인 선택의 섭리역사가 적용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대표로 이들 식구들과 언약을 맺어 주십니다(창9:8-10). 이 언약을 일컬어 노아의 보존언약이라고 부릅니다. 노아의 남은 자녀들을 통해 아담부부와 맺었던 창조언약인 문화명령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노아의 보존언약 속에 담긴 내용이 본질에서 아담에게 주신 창조언약의 내용과 동질성을 띠고 있음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창9:1-2). 물론 노아의 보존언약의 궁극적 성취는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구속의 방식을 통해서 진행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후 노아의 보존언약을 통해 진행되는 여자의 후손언약은 노아의 세 아들 중 특별히 셈의 계보를 선택적으로 선용하셔서 그의 셋째 아들인 아르박삿을 통해 데라와 아브람에게까지 연결되기에 이릅니다(창11:10, 26절).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구속사를 집행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역사는 태초의 인류역사 때부터 철저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서 선택적이고 차별적으로 시행돼 왔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창11장에 소개된 바벨탑 사건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는 본질에서 선악과 시험 속에 담긴 사단적 미혹의 요소와 동질성을 띠고 있음으로 하나님과 동등 됨과 동일시하려는 인간의 지존사상(개인주의 및 이기주의) 곧 타락한 욕망의 극한 상황을 계시한다 하겠습니다(창11:4, 3:5). 이후 바벨탑 반역사건 속에 담긴 사단적 미혹과 배도사상은 역사적 바벨론 제국을 통해 다시 한번 가시화되었다가(창11:1-2, 단1:1-2), 계시록에 소개된 큰 성 바벨론의 멸망을 통해 최종적으로 종말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계18:2-3). 이런 식으로 바벨탑 사상은 창세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통전적인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사단적 시험과 반역사상을 총체적으로 계시한다 하겠습니다.

                            ⑦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대전환인 아브라함 언약(창12:1-3)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다시 시작된 인류의 생육과 번성의 역사는 특별히 여자의 후손언약을 지속적으로 성취시켜 나감에 있어서, 여자의 후손계보를 노아의 세 아들 중 맏이인 셈(창6:10)과, 셈의 셋째 아들인 아르박삿(창10:22, 11:10) 및 데라를 통해 아브라함에게까지 연결시키는 가운데(창11:24-26), 아브라함에게 이르러 구속사 전개에 있어서 대 전환의 국면을 맞게 됩니다. 즉 초기 인류역사(창4장-11장)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의 진행은 성격상 암묵(暗黙적이던 것이 구체적이고 명시(明示)적으로 바뀝니다. 은닉(隱匿)적이던 것이 공개적이고 개인적으로 지목해서 역사의 전면에 아브람을 불러내십니다. 그리고 직접 아브람과 언약을 맺어 주십니다(창12:1-3).

                            아브람 언약의 대전제는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창12:1). 이는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추구해 오던 일체의 자기중심적인 삶의 내용과 방향성을 180도 전환해 하나님 중심과 하나님 나라 중심으로 돌아서야 함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전인적(全人的)인 가치관과 인생관의 전환 곧 현세지향적이던 삶을 천상지향적인 삶으로 바꾸는 일 말입니다. 이를 신약적 관점으로 해석한다면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삶을 가리킨다 하겠습니다(마6:33). 예수님께서 제자도를 말씀하시면서 무엇보다 먼저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을 강조하심도 이런 맥락에서 그 본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마16:24). 이런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이 무엇인 지를 요약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는 신앙과 경배의 본질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과 영광을 구현하는 일이란 사실입니다(고전10:3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깊이 접촉된 데서 나와지는 무한 감사와 감격의 심정의 발로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내용은 크게 4가지 요소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자손언약, 땅 언약, 왕 언약(창17:6),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인해 열국이 받게 되는 복입니다. 결국 아브라함 언약 속에 나타난 4요소들이 총체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시켜 이들을 가나안 땅으로 이주시키는 가운데, 그곳에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을 건설함으로 열국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 나라의 직분을 수행케 할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은 결과적으로 문화명령(창1:28)의 본질 속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사상을 구체적으로 실현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구속사 전개에 있어서 계시의 도구로 삼아 당신의 뜻을 계시하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인 사실을 간파하게 됩니다. 이후 아브라함 언약은 언약적 구속사의 점진적인 진행과 관련해 각각의 요소들이 자손언약, 땅 언약, 왕 언약 및 열국의 복 언약의 순서를 밟아 차착 없이 전개됩니다. 이들 각각의 성취내용을 우선 요약적으로 살펴봅니다.


                            자손언약의 성취

                            먼저 자손언약의 구체적 성취는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거쳐 후에 야곱의 70인 식구가 애굽의 고센 땅에 정착하는 것을 시작으로 출애굽 사건과 시내산 언약식(출24:1-8)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돼 마침내 요단강 동편 모압 땅에 이르기까지의 모세 5경(창-신)의 내용을 통해 확인됩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아브라함 언약 속에서 자손언약의 성취는 아브라함 언약의 맹세적 보증으로 주신 횃불 언약식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성취된다는 사실 속에서 극명하게 확인됩니다. 곧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사대 만에 해방돼 나오게 된다는 예언적 약속말입니다(창15:12-17). 이 구원사건은 본질에서 가나안 정복 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이는 출애굽 사건과 아모리(가나안) 족속의 죄악이 관영함으로 저들을 심판하시는 문제가 상호 내용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가리킵니다.

                            땅 언약의 성취

                            땅 언약은 여호수아서를 통해 성취과정이 소개됩니다. 시내산 언약식을 통해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삼아 요단강을 믿음으로 도하(渡河)하는 한편, 여리고 성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함락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믿음의 성전(聖戰, holy war)을 통해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 지경을 정복하기에 이릅니다. 이 과정에서 가나안 지경 일부는 도면상으로 분할해 제비뽑는 방식으로 분배해 줍니다(수18:8-10). 그러나 이런 도면상의 분배마저도 여호수아서 기자는 실제적인 땅 분배 사건의 성취로 간주해 기술합니다(수21:43-45). 이는 신적 언약의 특성상(주권성과 은혜성 및 실현성) 필연적으로 성취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에 근거한 표현입니다. 후에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속에서 아브라함 언약 속에 약속된 땅의 전(全) 지경을 온전히 정복하게 됩니다(창15:18, 왕상4:21, 14, 25절).

                            왕 언약의 성취

                            왕 언약의 성취와 관련해서는 사사기서를 통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삿21:25)고 지적함으로 왕의 필요성이 우회적으로 암시되고(삿21:25), 룻기서에서는 유다의 계보를 다윗에게 연결시킴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 다윗임을 묵계적으로 지목합니다(룻4:18-22). 사무엘서를 통해서 마침내 다윗이 최종적으로 신정왕국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하게 됨으로 마침내 왕 언약이 성취됩니다(삼상16:12-13, 삼하2:4, 5:3).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다윗과 솔로몬에 의한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및 다윗언약이 구체적이고 총체적으로 성취되는 것으로 인해 비록 예비적이긴 하지만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현시하고 있음을 후에 열왕기서 기자는 대내외적으로 명백히 천명합니다(왕상4:20-25). 이런 사실의 확증은 미가와 스가랴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도래하게 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상태를 언급하면서 열왕기서 기자가 비유적으로 묘사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다”(왕상4:25)는 표현을 동일하게 차용해 설명하고 있는 데서 확연히 확인됩니다(미4:4, 슥3:10). 끝으로 아브라함의 씨로 인해 열국이 복을 받게 된다는 내용(창12:3, 22:18)은 솔로몬 통치 하에서 주변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며, 저들을 관할하게 됨으로 사방에 평화와 안녕이 도래하게 되었다는 설명을 통해 예비적인 성취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봅니다(왕상4:21, 24절). 이제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봅니다.

                            ⑧출애굽 사건으로 말미암는 시내산 언약(출24:1-8)

                            출애굽 구원사건은 아브라함 언약 중 자손언약 부분, 특별히 횃불언약식(창15:12-18)을 통해 맹세적 보증으로 확증해 주신 자손언약이 무려 430년 만에 정확히 성취되는 사건입니다(출12:40-41).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의 성취는 우리 편에서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의 때가 찰 때에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실현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림에 있어서 성도 편에서 믿음의 인내가 필요한 이유가 이런 원리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까지 인도하심에 있어서 굳이 우회(迂廻) 길을 택하게 하심으로 홍해 길로 인도하시고 광야여정 길로 몰아가십니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처사입니다. 430년간 애굽의 이방문화에 익숙해지고 체질화 돼 가히 노예집단과 방불한 저들을 명실공히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여호와 중심의 신본주의 신앙관을 재정립해 주시기 위한 계도(啓導)적이고 계몽(啓蒙)적인 교육적 차원에서 취해진 결과입니다.

                            마침내 모세는 이들을 시내산까지 인도합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피를 매개로 공식적인 언약식을 체결하십니다. 출애굽기 저자는 이를 일컬어 언약의 피라고 설명합니다(출24:1-8). 이 피의 언약식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구원에로 인(印)쳐 주시는 새 언약 속에서 실체화 됩니다. 누가는 이 사실을 성찬식의 제정과 그 의미를 설명하는 것을 통해 구체적으로 예시(例示)해 줍니다(히10:1, 눅22:19-20). 이런 의미에서 시내산에 집결한 총회로서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교회로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역과 대속사역을 함의하고 있는 새 언약의 구체적 성취로 출현하게 될 신약의 교회공동체와 천상의 보편의 교회를 예표적으로 표상한다 하겠습니다(히12:18-23)

                            이 언약식을 통해 하나님은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됩니다(출19:5-8). 이런 사실의 보증으로 율법을 하사(下賜)하십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정왕국으로서 율법에 적극 순종하는 것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자신의 신정(神政)적 정체성을 만천하에 현시해야 합니다. 제사장 나라의 신분으로 저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이 이런 사실을 구체화시킬 현장으로 기능하게 될 것입니다. 이로 인해 율법을 통해 계시되고 있는 순종을 담보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언약관계 속에서 적극 통치해 가실 것입니다.

                            울법하사와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성막(聖幕)에 대해 계시해 주십니다. 성막계시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함께 거하시며 당신의 정권(正權)으로 친히 통치하신다는 임마누엘 신학의 정수(精髓)를 예표적으로 보여줍니다(출25:8-9). 이런 사실의 구체적 성취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요1:14)과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셔서 내주하신다는 방식을 통해 실체화되기에 이릅니다(고전3:16, 6:19). 레위기서에서는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지속적으로 교제와 교통을 나눌 수 있는 거룩의 관계를 각종 제사의 방식, 특별히 속죄제사를 통해 계시해 주십니다. 이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실질이 어떤 것인 지를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표상적 사건의 의미를 갖습니다. 민수기서는 가나안 정복의 성취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광야여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다양한 사건의 경험을 통해 교훈해 줍니다. 동시에 불순종의 결과는 하나님의 준엄하신 언약적 심판에 처해질 수밖에 없음을 40년간에 걸친 광야의 유리방황을 통해 강력히 시사합니다. 가데스바네아 사건(민13-14장)과 불뱀사건(민21:4-9) 등은 이런 사실을 예시해 주시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신명기서에서는 출애굽 2세대를 향해 출애굽 사건의 역사적 사실과 구속사적 본의 및 율법의 재해석, 가나안 정복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믿음의 순종을 통해 반드시 성취해야 할 것을 다짐시키는 모세의 3편의 설교를 소개합니다.

                            그렇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오직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이 당신의 언약백성들을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시는 가운데 친히 전쟁을 수행하심으로 마침내 최후의 승리를 안겨 주십니다.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가 이런 사실에 근거해 확증됩니다.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 분의 손길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며 믿음의 인내로 대처해 나가야 하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서 나와집니다. 전3;5-6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⑨다윗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삼하7:11-17)

                            위에서 살펴 본 대로 아브라함 언약에 약속된 자손언약은 출애굽사건과 시내산 언약식을 통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가운데 다음 단계로 땅 언약의 성취를 향해 가나안 정복의 여정 길로 나아갑니다. 이는 출애굽 사건 속에 담긴 구원의 실질과 시내산 언약식을 통해 계시된 제사장 나라로서 신정왕국의 수립은 가나안 땅에 정착돼 평안과 안식의 삶이 보장되는 것을 통해 비로소 성취되기 때문입니다(수21:43-45). 다시 말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광야에서의 불안정한 삶을 영위하거나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 늘 불안한 가운데 살 수밖에 없다면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을 누리는 삶이라고 평가할 수 없기에 말입니다. 이로 인해 사실상 출애굽 사건으로 시작된 구원의 완성과 실제적 누림이라는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를 표상하는 가나안 땅의 정복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그것은 신약적 관점에서 성도가 소망하는 영적 본향인 천상의 도성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의 등장과 과도기적 통치를 통해 왕의 필요성을 시사합니다(삿21:25). 이는 곧바로 시내산 율법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신17:14-19)이 누구인 지를 룻기서를 통해 다윗을 지목하는 방식으로 보다 진전됩니다(룻4:18:22). 다윗의 공식적인 즉위에 앞서 사람의 마음에 합한 왕인 사울을 먼저 이스라엘의 왕으로 허락하십니다(삼상8:20). 이런 사실의 본의는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하나님의 생각에 반(反)하는지를 알게 하셔서 인간의 연약과 실패를 깨우쳐 주심으로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나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실패를 통해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적극 배울 수 있도록 해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무엘서 저자는 사울이 통치하는 동안 반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할 뿐 아니라(삼상13:8-15, 15:9, 12절), 그 때마다 변명 일변도로 처신하는 것(삼상13:11-12, 15:21)을 소상하게 기술함으로 사람의 마음에 합한 왕의 모습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자격미달인 사실을 우회적으로 증거합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새의 아들 다윗을 기름 부어 사울을 이어 명실공히 이스라엘의 왕을 삼을 것을 명령하십니다(삼상16:1, 11-13절). 이것이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기까지 세 번에 걸쳐 기름 부음을 받게 되는 첫 번째 경우입니다. 이때는 가족들만 모인 가운데 철저히 비공식적으로 예식이 치뤄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은밀한 중에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을 이내 블레셋과의 전쟁터로 내 보내 골리앗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하심으로(삼상17:45-49)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옮겨 놓으십니다. 다윗과 골리앗 싸움의 구속사적 의미가 이런 사실에 집중됩니다. 다윗을 공식적이고 공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세워주심으로 소위 상견례(相見禮)의 자리를 마련하시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에 오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주도면밀한 섭리역사 말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7)라고 이스라엘 여인들이 창화(唱和)하는 소리에 담긴 의미가 이런 하나님의 계획과 깊이 연관돼 있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사건은 세상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인 사실 곧 세상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진행되는 현장이요 무대인 사실로 인해 철저히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확실하게 제시해 줍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윗은 철저히 사울의 견제를 받으면서 집중적인 핍박과 고난의 기간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사울을 통해 받는 시련을 통해 다윗을 연단하심으로 더욱 여호와 중심의 신앙관에 깊이 접촉시켜 주십니다. 마침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이 죽자 다윗은 유다 땅 헤브론으로 귀향합니다. 유다사람들이 헤브론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저들의 왕을 삼게 됩니다(삼하2:4). 이것이 두 번째 기름 부음입니다. 보다 공개적이고 공식적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섭리의 작정기간이 차게 됩니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장로들이 헤브론에 모입니다. 저들이 한 마음으로 다윗을 기름 부어 명실 공히 이스라엘 12지파의 왕으로 옹립(擁立)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세 번째 기름을 부음을 받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마침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통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다윗은 왕위에 오르자 이내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언약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부터 운반해와 다윗성에 안치합니다(삼하6:12-15).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의 상징으로서 그것이 다윗성에 안치되었다는 사실은 다윗의 왕권이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재가와 인준을 받음으로 언약적 정통성을 보증 받는 동시에 다윗이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로서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했음을 확증한다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저 유명한 소위 다윗언약을 맺어 주십니다(삼하7:11-17). 다윗언약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셔서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약속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 언약의 자식을 주심으로 다윗의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 자식으로 하여금 여호와를 위해 거하실 집(성전)을 짓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넷째, 언약의 핵심관계인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확고부동하게 인(印)쳐 주시겠다는 내용입니다.

                            나단으로부터 이 언약의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은 감당키 어려운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삼하7:8).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들이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을 통해 차착 없이 성취되는 것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가 든든히 세워질 것을 간절히 열망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그의 심정을 담은 고백적 기도의 내용이 다름 아닌 삼하7:29의 내용입니다.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이 기도의 내용을 자의적(恣意的)으로 해석해서 편의적(便宜的)으로 적용시키게 되면 다윗의 기도 속에 담긴 하나님의 본의(本意)와는 전혀 무관한 사사로운 기도의 내용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소위 말씀을 사욕의 수단으로 삼는 불법적이고 불복종적인 배도(背道)의 신앙관이 성립되게 됩니다(마7:21-23, 롬10:2-3, 딤전6:3-5). 결국 말씀의 도구화는 하나님을 인간의 유익을 위한 한낱 수종자로 삼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우상으로 매도하는 크나큰 범죄행위를 유발시킵니다. 만의 하나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신앙관이 자칫 이런 식으로 변질된다면 신앙의 본질이 처음부터 왜곡(歪曲)된 것으로 인해 ‘예수님을 믿고도 지옥에 갈 수 있다’는 아이러니(irony)와 역설적 현상(paradoxical phenomenon)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준엄하게 경고합니다(마7:21-23).

                            이후 다윗언약은 그의 약속의 아들 솔로몬 왕의 초기 통치역사 속에서 아브라함 언약 및 시내산 언약과 더불어 성취의 절정을 맞게 됩니다(왕상4:20-25). 특별히 열왕기서 기자는 솔로몬 통치하에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음을 “솔로몬의 사는 날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와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왕상4:25)는 비유적 묘사를 통해 확고히 증거합니다. 이런 표현이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가리킨다는 사실에 대한 확증은 미가와 스가랴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도래하게 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상태를 예언적으로 선포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표현을 차용해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명백히 확인됩니다(미4:4, 슥3:10).

                            한 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통치 속에서 발견되는 하나님 나라의 실질이 성격상 예비적이며 예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은 다윗언약 속에 담긴 언약성취의 이중성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솔로몬 통치역사 속에서 실현된 다윗언약은 실질에 있어서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성취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자체 속에서 미래지향적인 약속의 성취를 전망케 하는 종말론적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솔로몬 통치 말기에 율법에 대한 그의 불순종과 이방의 처첩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된 각종 우상숭배에 동조하는 것으로 인해 사실상 남북이 분열됨으로 다윗왕조는 중도하차하는 데서 이런 이중적 전망을 더욱 사실화 시킵니다(왕상11:1-13). 상황이 이럼에도 다윗언약의 예비적 성취와 중단은 신적언약의 특성상 다윗왕조를 아주 패(敗)하지 않으시고 불가피하게 다윗언약의 궁극적 성취를 향한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에로 독자들의 관심을 유도합니다(렘31:31-34, 겔36:26-28, 37:24-28, 사9:6-7, 11:1-2, 52:13-15. 53:4-6).

                            이런 관점에서 비록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 건설의 당사자와 하나님 나라 몰락의 장본인이란 이중적 성격을 띤 불가사의한 인물로 평가될지라도 다윗언약 속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서의 집 곧 성전을 건축한 사실과 관련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예표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치세(治世)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임재의 표상인 성전을 짓는 일과 관련해,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진정한 아들의 신분으로 성육신하심으로 임마누엘 곧 성전의 실체가 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마1:1, 22-23절, 요2:19-22).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행하신 각종 이적기사를 보면서도 자신을 메시아로 믿지 못하는 가운데 또 다른 표적을 보여 달라는 유대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함과 강퍅함을 질책하시면서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을 솔로몬의 실체로 친히 증거 하십니다(마12:42, 눅11:31).

                            솔로몬의 불순종과 우상숭배는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르러 급기야 분열 이스라엘 왕국으로 전락돼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남유다는 르호보암이 통치하게 됩니다. 다윗언약에 명시된 대로입니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열된 이스라엘 왕국은 회개할 줄을 모릅니다. 이 과정에서 북 이스라엘 왕국의 여로보암은 철저히 여호와의 종교를 수단화시켜 권력유지를 위한 정치적인 목적에 사사로이 이용합니다(왕상12:25-33). 열왕기서 기자는 이를 ‘여로보암의 길’로 묘사함으로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는 악행의 표상으로 정죄합니다(왕상15:34. 여로보암의 죄는 이후 북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이 한결 같이 좇았던 패역한 범죄행위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켜 북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합니다(왕상14:16). 이런 사실은 BC722년 앗수르에 의해 북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는 것으로 현실화됩니다(왕하17:1-8).

                            일반적으로 ‘여로보암의 길’로 표현되는 여로보암의 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왕상12:25-33). 첫째, 하나님의 도구화 및 우상화 작업입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권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해진 절기에 남쪽에 위치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칫 북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는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과 벧엘에 각각 금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의 신앙을 우상으로 대체하고자 시도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편으로 전락될 때 거기에는 진정한 의미의 여호와의 신앙은 실종됩니다. 대신 여호와의 신앙을 가장한 우상 숭배적 사이비 신앙이 성립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유익을 도모하는 한 낮 수종자로 전락할 뿐입니다. 이러 상황에서 열심을 내면 낼수록 불법적이며 불복종적인 자의적 숭배신앙만이 난무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경고입니다(롬10:2-3, 마7:21-23). 둘째, 자의적 숭배신앙의 조장으로 인한 무자격 신자의 양산입니다. 특별히 제사장을 임명하는 데 있어서 모세 율법에 정한 대로 레위지파 사람이 아닌 보통의 사람들을 임의대로 제사장에 봉직시킵니다(대하11:13-16).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뜻이 철저히 무시되는 패역한 범죄행위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한 현대적 적용이란 측면에서 접근해 본다면, 소명이나 구원의 확신과는 무관한 교세확장을 위한 무자격 목회자의 마구잡이식의 배출과 목회성공을 위한 무자격 세례교인의 양산에 비교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이들이 유유상종해 교회공동체를 이룬다고 할 때, 그 곳에 참 된 성경적 신앙과 교회와 목회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입니다. 셋째, 유사성(類似性)과 편의성(便宜性)의 문제입니다. 이는 본질에서 이탈한 형식주의 및 외식주의 신앙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여로보암은 거국적으로 정해서 드리는 절기를 임의대로 변경해 적용시킵니다. 특별히 7월 15일로 정해져 있는 초막 절기를 8월 15일로 변경해 드리도록 유도합니다. 겉으로 보면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날짜가 다른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고의적으로 거역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유사성과 편의성을 앞세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겉이 제아무리 기독교적으로 비슷하게 치장되었다 할지라도 내용과 본질에 있어서 성경이 말씀하는바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게 되면 이미 기독교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를 불법적이고 불복종적인 신앙으로 간주합니다. 하나님과는 무관하게 됩니다. 모든 신앙적 열심이 허사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경종을 울립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대로’란 ‘지식을 좇는 신앙’(롬10:2-3)을 가리키는 것으로 곧 말씀의 본의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계시의존 사색신앙과 섭리의존 순종신앙 자세를 일컫습니다.

                            남왕국 유다 또한 본질에서 북왕국 이스라엘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왕의 경호원들로서 선지자들에 의해 부단히 불의와 불법과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회개를 촉구하는 경고의 메시지가 지속적으로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남유다 마저 바벨론의 3차(BC605년, 597년, 586년)에 걸친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패망하게 됩니다(렘25:1-9, 대하36:17-20). 그러나 남유다의 경우 북이스라엘과 다른 점이 있다면, 멸망과 포로의 기간을 70년으로 제한하심으로 70년이 마치는 날에 바벨론 포로로부터 다시 고토(古土) 가나안에로 귀향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렘25:8-13, 29:10-14, 30:1-3, 겔37:21-22, 사14:1-3). 이는 다윗언약을 통해 약속하신 다윗의 왕위와 왕권의 영속적인 보장이 바벨론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남유다왕국을 통해 중단 없이 지속되고 있음을 강력히 암시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동일한 연장선상에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49:10)라고 축복했던 야곱의 예언이 남유다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성취의 효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아울러 간파하게 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면 다윗언약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출처와 배경이 야곱의 예언적 축복에서부터 유래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⑩선지자들의 새 언약(렘31:31-34, 겔36:26-28, 37:24-28, 사40:1-2, 42:9, 61:1-3)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에 이어 남유다 왕국의 패망은 특별히 유대 백성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좌절 및 통한의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적어도 다윗언약에 근거하면 남유다 왕국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망정 어떤 경우라도 결코 멸망당할 수는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선지자 하박국마저도 유다의 패역과 간악함을 마땅히 징치해 주실 것을 간곡히 청원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없는 이방 갈대아 인(바벨론)을 채찍삼아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중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이런 기막힌 사실 앞에서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 하시나이까”라고 거침없이 항변했던 것입니다(합1:13).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박국의 이런 질문에 명확하게 답변해 줍니다. 렘25:12-13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 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내가 그 땅에 대하여 선고한바 곧 예레미야가 열방에 대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니.” 이런 예언의 말씀은 바사왕 고레스에 의해 바벨론 포로들이 고토로 귀향하는 것을 시작으로 마침내 성취되기에 이릅니다(스1:1-4).

                            그렇습니다. 다윗언약은 신적 언약의 특성상 어떤 경우라도 결코 무효화되거나 취소될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바벨론에 의한 남유다의 멸망과 관련해 다윗언약 속에 담긴 언약성취의 이중 구조적 성격에 대해 감지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다윗언약을 포함해서 제반 신적언약의 중심 사상들이 한편으로 이스라엘의 과거역사 속에서 예비적으로 성취되는 것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미래에 참 다윗 왕의 실체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이며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것에 대한 확실한 전망 말입니다.

                            이런 사실과 관련해 분열 이스라엘 왕국의 포로기 전후 선지자들이 예언한 약속들 중, 특별히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에 맞춰 선포한 예언들을 총체적으로 일컬어 ‘새 언약’이라 부릅니다. 따라서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은 이처럼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시내산 언약에 대한 불순종의 대가로 철저하게 멸망을 선고받을지라도 다윗언약에서 시사하고 있는 이중 구조적인 특성으로 인해 조만간 일차적으로 다시 구원해 주실 것과 아울러, 보다 미래적인 종말론적 회복을 예시(豫示)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는 신(新)다윗 왕조의 재건과 복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곧 신정왕국의 회복을 지향합니다. 이들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을 특별히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이사야 등 세 선지자들을 중심으로 살펴봅니다.

                            예레미야의 새 언약 사상

                            첫째, 예레미야의 예언 속에 계시된 새 언약 내용입니다(렘31:31-34). 예레미야 선지자는 저 유명한 하나님의 ‘새 언약’을 선포하기 전, 먼저 유다의 멸망과 회복을 예언합니다. 그리고 이런 남 유다의 회복을 북 이스라엘에게 확대 적용시키는 가운데 역사적 통일 이스라엘의 회복을 새 언약 안에서 재해석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결국 예레미야 선지자는 독자들에게 새 언약 안에서 회복되는 이스라엘이란 역사적 이스라엘을 뛰어 넘는 종말론적 새 이스라엘을 부각시킴으로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세상 가운데 출현하게 될 교회공동체를 지향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는 결국 또 다른 의미에서 진정한 의미의 신정왕국 곧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시내산 언약에 근거해 유다의 불순종을 책망하시는 가운데 바벨론을 채찍으로 삼아 언약적 심판을 내리실 것을 예언하십니다(렘25:7-10). 그러나 아주 멸하지는 않으시고 70년으로 제한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11절). 이는 유다의 회복을 보증하시는 말씀(렘29:10-14, 30:1-3)으로 다윗 언약을 통해 다윗 왕조를 영원히 지속시키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에 근거한 내용입니다. 70년이 찰 때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 중 일단의 무리를 포로로 잡혀갔던 이방으로부터 회복시키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예레미야는 이들을 ‘남은 자’(remnant)라고 명명합니다(렘23:3).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남은 자’ 사상은 하나님의 친 백성을 가리키는 언약적 용어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구원받을 ‘택자’ 사상과 동일한 의미를 간직합니다(엡1:4-6). 신구약 역사를 막론하고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성도들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성경은 자증합니다(롬11:4-6). 아울러 다윗에게서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켜 그로 하여금 회복된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을 삼아 공평과 정의를 행사하게 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 때 비로소 참 된 구원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왕을 통해 여호와의 의가 실질로 온 백성에게 전가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렘23:5-6, 롬3:21-22). 그리고 이들은 참 다윗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통해 창조자이시며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실제적인 관계를 맺게 될 것입니다(렘23:7-8).

                            이상의 관점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여전히 다윗 언약에 근거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로 인해 다윗 언약은 자체 속에 처음부터 이중적 성격을 띠고 주어졌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모든 언약은 구속사적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원리적 측면에서 접근할 때, 본질적으로 종말론적 성취를 지향하는 것으로 이중적 구조를 띠고 진행됨을 보게 됩니다.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이고 종말론적인 측면 말입니다.

                            이렇게 렘23-30장에 걸쳐 집중적으로 바벨론으로부터 유다와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에 대해 기술하던 예레미야는 31장에 이르러 회복된 유다와 이스라엘을 향해 ‘새 언약’을 선포합니다(렘31:31-34). 새 언약의 내용은 신적언약의 특성상 시내산 언약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으나 괄목할만한 갱신과 발전을 통해 심화돼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죄의 용서와 심비에 새겨진 율법으로 인해 율법의 자율적 순종이 보장되고 있음은 시내산 옛 언약에 비해 현격한 계시의 비약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새 언약의 구속사적 특징을 살펴봅니다.

                            새 언약의 발효 시기는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의 때가 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새 언약이 유효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표현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된 표현입니다(출6:2-9). 새 언약의 성격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옛 언약(시내산 언약)과 비교해서 내용적으로는 동일하게 순종을 요구합니다. 신구약 시대를 막론하고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은혜에 반응하는 순종을 관장하는 행동지침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옛 언약이나 새 언약이 내적 통일성과 연속성을 맺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본질상 동질성을 띠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럼에도 동시적으로 외적으로는 불연속성을 갖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옛 언약은 역사적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회복된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지켜질 것입니다. 순종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을 회복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새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령의 내주와 후원하시는 능력의 역사로 가능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하십니다(렘31:34상). 이로 인해 죄로부터 온전히 용서를 받습니다(34절하). 의롭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사실상 예레미야에 의해 선포된 새 언약에 있어서 종전의 언약과 비교해 괄목할만한 언약의 갱신과 발전을 가져 온 부분은 새 언약이 성취되는 시대가 다름 아닌 ‘죄용서의 시대’란 사실입니다. 단번에 그리고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지는 시대 말입니다(히10:17-18). 물론 옛 언약 하에서도 죄용서가 가능했습니다(히9:13). 그러나 그것은 실체를 향한 예표적 제도로서 한시적으로 효력을 발생했을 뿐입니다(히10:11). 그래서 해마다 거듭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 하에서는 실체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한 영원한 제사(once for all)를 드리심으로 그 보혈의 공로 안에서 모든 죄가 영원히 도말(塗抹) 된 것입니다(히9:12, 10:14, 17-18절). 이런 결과로 ‘하나님은 저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곧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성취됩니다. 마침내 임마누엘의 종말론적 성취가 실현됩니다. 여기서 ‘나는 저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저들은 내 백성이 된다’는 언약적 표현은 언약의 본질로서 곧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을 가리킵니다(계21:3, 창17:8, 출19:5, 레26:12). 성경에 약속된 신적 언약의 핵심사상은 한결 같이 위의 주제를 본질로 삼아 역사 속에서 진행돼 나왔습니다. 이런 사실은 언약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지향하고 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상의 새 언약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작정하신 섭리적 기간이 찰 때 회복될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 때 이 모든 일들이 다윗의 위를 좇아 세우신 한 의로운 가지에 의해 성취될 것이며(렘23:5-6), 그 나라와 그 백성들은 결코 다시 멸망하지 않으며 영속될 것입니다(렘33:14-18).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의 영속성과 불변성을 자연법칙을 담보로 보증하십니다(25-26절). 이는 온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은 필연적이고 영원할 것에 대한 확약입니다. 이는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이스라엘로 일컫는 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는 새로운 교회공동체를 통해 마침내 실현될 것입니다(엡2:14-15).

                            에스겔의 새 언약 사상

                            둘째, 에스겔의 예언 속에 계시된 새 언약 내용입니다(겔36:26-38, 37:24-28, 11:19-20). 에스겔서에서는 언약의 개념이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지 않은 듯이 보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포로귀환을 기술하고 있는 중요한 부분들에서 언약(베리트)이라는 용어가 자주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서의 전체 예언은 새 언약적 관점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당시로서는 아직은 미래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사건을 다양한 관점에서 예언의 중심내용으로 삼아 기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에스겔의 예언은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개념을 보다 발전, 확대시켜서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두 선지자의 목적하는 바는 동일하게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통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최종 완성에 모아집니다.

                            겔36:16절 이하에서 에스겔은 회복된 이스라엘 민족 앞에 설정된 미래적 이상들이 어떤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상실하게 된 요인들이 시내산 언약을 배경으로 회고됩니다(16-20절).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멸망과 가나안 땅의 상실은 철저히 율법에 대한 불순종과 특별히 우상숭배에 초점을 맞춰 설명됩니다. 여기서 우상숭배란 실제로 가나안 족속을 비롯한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겼을 뿐 아니라(호8:4-7, 12:11, 13:1-2),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정당한 지식이 결핍돼 사사로운 종교적 감정만을 부추겨 형식적이고 습관적이며 이기적인 목적 차원에서 자의적으로 섬긴 사실을 포함하기도 합니다(사1:11-14).

                            겔36:21-23절에 소개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동기는 그 강조점에 있어서 상당히 예레미야적입니다. 즉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의 회복 및 갱신은 이스라엘이 철저히 회개해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인 것으로 기술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열방 중에 회복시키기 위해 스스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결심하셨다는 지적입니다. W.J.Dumbrell은 그의 저서 Covenant and Creation(언약과 창조, 크리스챤 서적, 1999년)에서, 21-23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행동하시는 근거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맺은 신적 언약을 기필코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의 문제 때문입니다(21절). 신실성은 하나님의 불변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해 동시적으로 당신의 실추된 신실하심을 열방 중에서 영화롭게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스라엘 민족의 자랑이라기보다는 단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회복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22절). 셋째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해 열국으로 하여금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보게 하고, 이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열방에서도 인정함을 받도록 하시기 위함이란 사실입니다(23절).

                            겔36:24-25에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구체화될 수 있는 ‘외적’ 세부내용들이 열거됩니다. 곧 열국에서 먼저 취해 내십니다. 그리고 고토로 데리고 가십니다. 정결 의식을 통해 더러운 행동과 우상숭배로부터 이들을 깨끗케 합니다. 이로 인해 우선적으로 이스라엘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들이 공식적으로 분리돼야 합니다. 이는 본질에서 옛사람적 삶과의 관계단절을 의미합니다.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기 위해서 말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신 말씀 속에 담긴 계시의 본의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회복의 전제조건입니다. 옛 것과의 단절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새 것을 적극 추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가능케 하기 위해 26절 이후부터 본격적인 새 언약의 내용으로서 회복의 ‘내적’ 요소들이 제시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신을 내주케 하십니다(27절). 이로 인해 새 영과 새 마음, 곧 거듭난 새 성품을 소유하게 됩니다. 27절에서는 26절의 새 영을 주신 목적이 설명됩니다. 곧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육신이 연약해서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가능케 하시기 때문입니다(롬8:3-4). 옛 언약 하에서는 이 부분이 결핍돼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옛 언약을 가리켜 ‘낡아지게 하신 것’(히8:13)과 ‘개혁할 때까지 육체의 예법으로서의 기능을 수행케 하기 위함’(히9:10)이라고 설명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기인합니다. 실체를 위한 모형적 역할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에스겔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새로운 순종의 관계를 설정하신 이가 하나님 자신임을 언급하면서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개념을 확대하고 보다 구체화시켜 설명합니다. 그러나 모든 언약은 신적 기원(起源)상 동일한 목표를 지향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 말입니다.

                            35절에서는 회복된 가나안 고토가 마치 에덴동산을 방불케 하는 새로운 환경으로 회복될 것을 지적합니다. 이런 사실이야말로 이스라엘의 회복이 지향하는 바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목적 삼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고 있는 새 언약의 성격은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구속사 진행의 원리에 입각해 아담의 창조언약, 여자의 후손언약, 아브라함 언약 및 시내산 언약과 다윗 언약의 갱신 및 발전적 확장을 총체적으로 함의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8절에서 새 언약의 성취로 나타나는 결과가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는 선언적 말씀 속에서 언약의 내적 통일성과 연속성이 확인됩니다. 이 말씀은 언약의 핵심적 사상이 곧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인 사실과 임마누엘의 궁극적 완성인 사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29-38절에 기술된 ‘환경’의 회복기사 내용에 앞서서 26-28절에 소개된 하나님의 신(성령)의 내주로 말미암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듭남과 영적 회복 및 이로 인한 순종력의 발휘기사를 소개함은 ‘환경’의 회복에 앞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먼저 본질적으로 변화돼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시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의 면류관으로서 인간의 타락이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부정적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당초 에덴의 천상적 환경은 아담과 하와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범죄와 타락으로 하나님 나라로서의 본래적 성격을 상실합니다. 그러나 여자의 후손 언약의 궁극적 성취를 통해 죄의 문제가 해결 될 때 다시 회복될 것을 보장받습니다(창3:15, 롬8:19-21). 지금 에스겔의 새 언약의 일차적 강조점이 새 신의 내주와 후원의 역사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들의 영적 회복에 일차적 초점을 맞추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신’의 내주와 역사로 말미암아 소유하게 된 새 영과 새 마음을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고 있는 에스겔의 새 언약(겔36:26-28)의 내용은 에스겔서 37장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특별히 겔37:26에서 언급되고 있는 에스겔의 ‘화평의 언약’ 속에서 보다 확장되고 구체화됩니다. 이 화평의 언약 또한 내용적으로 아담의 창조언약, 시내산 언약 및 다윗 언약의 갱신과 확대를 지향합니다. 이런 사실은 예레미야의 새 언약(렘31:31-34)의 내용이 그랬듯이 동일하게 신적 언약의 내적 통일성과 연속성을 견지합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회복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게 될 새 신(겔36:27)으로서 성령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소개됩니다. 에스겔은 이를 소위 ‘마른 뼈의 소생’ 사건을 통해 설명합니다(겔37:1-14). 이는 ‘마른 뼈’를 통해 이스라엘의 소망 없는 영적 상태를 묵시적이며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것도 철저히 죽어버린 이스라엘의 현재적 영적 상태를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절대 타자로서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자력으로 소생 불가능한 절망의 상태를 극명히 기술함에 다름 아닙니다. 마치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생기가 불어넣어질 때 단지 사람의 모양으로 빚어진 진흙 덩어리가 생령(生靈)으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창2:7). 그렇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만 의존돼 있을 뿐입니다.

                            마른 뼈에 비유된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은 두 단계를 거쳐 진행됩니다. 먼저는 사람의 ‘외적 형태’를 갖춥니다. 골짜기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수많은 뼈 조각들이 상합하고 연락해 서로 맞춰집니다. 그 위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마지막으로 가죽이 덮입니다(겔37:7-8). 완연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습니다. 아직은 죽어있는 시체나 다름없습니다. 다음으로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즉시 죽은 상태에서 소생합니다. 에스겔은 살아난 사람들을 군대라 칭합니다. 수많은 사람들로 구성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해명해 주십니다(10-11절). 남북이 연합된 통일 이스라엘의 회복 말입니다. 이어서 보여주신 두 막대기의 상징적 비유(15-17절)를 통해 이런 사실을 확증해 주십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신 곧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고토(가나안)로 돌아오게 하실 것을 부연해 약속하십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구체화시켜 천명하십니다(12-14절).

                            다음으로 겔37:15-28까지의 내용을 통해서는 ‘두 막대기’(15-16절)의 묵시적 비유를 통해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정치적으로 통합돼 한 나라를 이룰 것(17절)과, 이들을 가나안 고토로 인도해서 한 왕에 의해 영속적으로 다스림 받게 될 것임을 약속하십니다. 보다 진전된 언약적 계시의 내용입니다. 이 약속을 소위 에스겔의 ‘화평의 언약’, 일명 ‘영원한 언약’(26절, 렘32:40)이라 부릅니다. 그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겔37:15-28)에서 회복된 이스라엘을 다스릴 한 임금이란 다름 아닌 참 다윗 왕을 가리킵니다. 곧 복권된 다윗 왕이 신(新) 다윗 왕조인 신정왕국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영원히 이스라엘을 다스립니다. 이는 다윗 언약의 회복과 다윗 왕조의 영속적인 보전(保全)을 가리킵니다. 온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영원히 거합니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의 성취로 말미암는 궁극적 구원의 안식에 참여하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궁극적 안식이란 또 다른 의미에서 회복된 에덴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에스겔과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주된 강조점은 이스라엘의 회복의 근간이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죄사함의 역사와 이로 인한 순종력의 발휘 및 다윗 왕조의 영속성에 계시의 초점이 모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죄 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는 다름 아닌 재창조로서 에덴의 회복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2:1-3, 2:17, 3:6, 3:15). 이런 식으로 가나안과 에덴은 구속사의 경륜 속에서 동질성을 함의(含意)하는 가운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인 천상의 도성을 동일하게 지향합니다. 이스라엘을 번성케 하고 성소를 저들 가운데 둠으로써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된다”는 언약의 본질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는 다름 아닌 임마누엘의 궁극적 성취를 의미합니다(계21:3). 그리고 이 사건은 성소의 실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예비적으로 성취됩니다(요2:19-21, 고전3:16, 6:19, 12:13). 따라서 에스겔의 ‘화평의 언약’은 예레미아의 ‘새 언약’(렘31:31-34)과 더불어 아브라함 언약, 시내산 언약 및 다윗 언약의 종말론적 완성을 지향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통해 온전한 성취가 보장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화평의 언약과 새 언약은 동일한 목적의 다른 표현으로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최종 목표로 삼아 진행됩니다.

                            이사야의 새 언약 사상

                            셋째, 이사야의 예언 속에 계시된 새 언약 내용입니다(사40-66장). 이사야는 예레미야(BC628-586)와 에스겔(BC595-572)이 포로시대 선지자로 활약한 것에 비해, 포로기전 선지자로서 유다의 웃시야 왕의 치세 말기에서 히스기야 왕에 이르기까지 약 60년간(BC740-680년경)에 걸쳐 예언 활동을 한 문서 선지자입니다. 남 왕국 유다 역사에서 이 기간은 평화와 전쟁이 교차하는 정치 군사적 격변기로 평가됩니다. 즉 웃시야와 요담 치하에서 남 왕국 유다는 번영의 세월을 누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와 번영은 필연적으로 종교적 외식과 도덕적 부패를 야기시키며 불가피하게 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이 이스라엘 전(全)역사의 진행구도입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서에 이어 가나안 실지 정복과정을 기술하고 있는 사사기서에서 구속사 진행상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이런 순환적 패턴(구원-타락- 심판-회개)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의 선지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유다의 언약파기와 배역의 죄악상과 관련해 원색적인 독설과 이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선지적 사역을 시작합니다(사1:24, 28-31). 그러나 본 장(사1장)에서 말하는 심판은 완전한 멸망을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화(淨化)적 차원에서 언약적 심판의 성격을 띱니다. 그러기에 심판의 예언 중에도 구원과 회복의 소망을 주는 메시지가 수반됩니다(25-27절).

                            이사야는 1장에서 먼저 과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회상과 현재 유다의 패역에 대한 책망을 기록합니다(2-9절). 유다는 그 죄악상의 격심함과 이에 따른 심판의 철저함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비견되기도 합니다. 이런 비교는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이며 수치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들 중 소수의 남은 자들을 보존해 주신다고 약속하심으로 아주 멸하시지는 않습니다(9절). 언약백성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일환입니다.

                            앞에서(2-9절) 유다의 총체적 타락과 부패에 대해 개괄적으로 고발하며 책망하던 이사야는 본 절(10-17절)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들의 죄악상을 지적합니다. 특별히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영역에 대해 언급하기 이전에 먼저 유다의 범죄가 제의(祭儀)적 영역에서부터 비롯됐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이는 당시 유다의 국가적 정체성이 내외적으로 심각히 도전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약에 근거해 여전히 신정왕국의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제사의식은 시내산 언약에 근거해 주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제의에 드려지는 제물로 인해 이스라엘의 죄악은 한시적으로나마 대속적 사죄를 받게 되며 이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는 회복됩니다. 당시 이런 방식의 이스라엘의 제사의식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로 성취될 구속사역의 예표적 성격을 내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령과 진정이 결여된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제사만을 습관적으로만 반복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이런 가식적인 제사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으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이에 상응하는 보상심리를 발동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제사의 본질을 망각한 파렴치한 행위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사건(BC722)과 남 왕국 유다에 대한 책망과 심판의 경고는 유다인들에는 경악할 일이었습니다. 이런 영적 관점과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이로 인해 때때로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적잖은 고난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어용(御用)선지자들에 의한 왕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적극 거절하셨을 뿐 아니라 혐오하신다고 까지 말씀하심으로 이들의 형식적인 예배행위를 신랄히 정죄하십니다.

                            이와 같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부패와 타락상을 고발하면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성애적 사랑과 자비에 호소하는 회개를 촉구합니다(18절). 참으로 언약백성의 특권이란 그들의 죄가 아무리 중(重)할지라도 충심(衷心)으로 드려지는 회개를 통해 온전히 용서를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다시는 기억됨이 없도록 영원히 도말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히10:14-18).

                            이제 이사야는 사39장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유다의 멸망을 예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역의 초기부터 유다의 범죄와 타락상을 책망하며 줄곧 심판을 경고해 오던 이사야는 마침내 유다의 멸망이 당시 대제국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는 바벨론에 의해 집행될 것임을 선포합니다. 사39장에서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침공과 멸망을 예언한 이사야는 사40-66장에 걸쳐서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 ‘새 언약’의 내용을 예언합니다. 이런 이사야의 새 언약 속에는 비단 이스라엘의 미래적 회복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회복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성취까지를 포함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먼저 사40:1-2에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예루살렘에게 위로의 메시지, 희망과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할 것을 명하십니다. 이는 다름 아닌 곧 다가 올 유다와 예루살렘의 미래적 회복에 대한 약속을 가리킵니다. 곧 이사야 선지자의 ‘새 언약’ 말입니다. 이사야의 ‘새 언약’의 내용인즉 “예루살렘의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다”는 것입니다(2절).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내용을 빌리자면 유다의 바벨론 포로기간 70년의 때가 거의 찼다는 것입니다(렘25:11, 29:10). 이제 가나안 고토로의 포로귀환과 이로 인한 회복의 때가 다가온다는 얘기입니다(사14:1, 겔37:21). 이는 제 2의 출애굽 사건에 비교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으로부터의 제 2의 출애굽 사건을 애굽으로부터의 제 1의 출애굽 사건의 실체로 암시하면서 포로귀환의 구속사적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동일한 계시적 관점에서 취급합니다(렘23:5-8).

                            이런 사실은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이 갖는 새 언약의 계시적 의미가 결국은 참 다윗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게 되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교회공동체와 불가분의 계시적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적으로 갖게 됨을 가리킵니다. 이때 두 공동체간 계시의 연속성이란 언약적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점진성의 원리와 관련해 두 집단 간에 존재하는 모형과 실체라는 관계성을 갖기 때문이며, 계시의 불연속성이란 구약교회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로 구성돼 있는 반면에 신약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갈3:7, 29, 롬9:6-8).

                            따라서 이사야의 새 언약은 단순한 역사적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만이 아닙니다. 사43:19에서는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광야생활과는 비교가 안 되는 보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구속사를 집행하시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회복 뿐 아니라, 회복 속에 담긴 보다 본질적인 구속사의 경륜을 실행하시겠다는 강력한 시사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십니다(사44:3). 다음으로 허물과 죄를 기억치 않으십니다(사43:25). 이미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사40:2, 44:22). 구약의 역사 속에서 이런 일은 예표적이고 제한적으로만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새 언약 안에서 보다 진전되고 확대된 구속사의 경륜이 집행될 것입니다(사48:6-7). 이 뿐만이 아닙니다. 파괴된 예루살렘과 솔로몬 성전(사44:28) 및 시온의 회복을 약속합니다(사46:13). 이는 다름 아닌 다윗 언약의 회복을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과 성전 및 시온의 회복은 다윗 왕조의 부활을 암시하는 것으로 곧 다윗 언약의 궁극적 성취를 가리킵니다.

                            더 나아가 새 언약의 내용은 보다 명시적으로 구체화됩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고레스 왕(메데-파샤)이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는 것을 계기로 이루어질 것입니다(사45:1-7). 당시의 열강들의 정치, 군사적 판도 속에서 대제국 바벨론의 멸망을 기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광활한 지역을 지배하는 막강한 세력이었기에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레스를 당신의 기름 부은 종으로 삼아 새 일을 시작하시겠다고 천명하십니다. 여기서 고레스란 이름을 구체적으로 지명해 부르심은 그만큼 새 언약의 집행이 확실하며 사실적임을 강조합니다. 나아가 역사의 주관자가 천지상간에 여호와 하나님이신 사실을 극명하게 현시하시는 대목입니다(5-7절). 이 예언적 약속의 말씀은 에스라1:1-4을 통해 성취됩니다.

                            새 언약의 내용은 보다 진전됩니다. 절정을 향해 달려갑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통치적 왕권을 가져올 구원자의 도래를 예언합니다(사52:7). 그는 처녀에게서 잉태될 것입니다.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일컫습니다(사7:14). 그의 본체와 속성은 하나님과 동일시 여김을 받습니다(사9:6). 그는 다윗 왕조를 회복하시며 친히 참 다윗 왕으로 통치하십니다. 그 나라는 공평과 정의로 다스려지는 진정한 메시아 왕국이 될 것입니다(사9:7, 32:1, 55:3). 더하여 다윗 왕으로 오실 구원자는 이새의 계보를 통해 오십니다. 그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게 될 것입니다(사11:1-2). 이런 사실은 야곱이 임종에 즈음해 열 두 아들들을 불러 놓고 예언적 축복을 하는 과정에서 유다에게 선언한 복의 내용 속에서 이미 확인됩니다(창49:10). 이런 식으로 유다는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메시아의 가문으로 택정을 입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새 언약이 성취될 때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되기 때문입니다. 메시아의 왕적 통치하에서 모든 피조물은 죄의 권세에서 풀려납니다. 허무한 데 더 이상 굴복치 않습니다(롬8:19-23). 본래의 창조적 질서를 회복하게 됩니다. 마치 회복된 에덴처럼 말입니다. 결국 평화와 공존의 새 질서와 새 창조의 시대가 도래하는 셈입니다(사11:6-9). 그러나 이런 새 시대는 사실상 구속사의 절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에 근거해 본격적으로 출현한 교회시대를 거쳐 주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 때 온전히 실현될 것입니다. 이런 식의 종말론적 메시아 왕국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고 선언하고 있는 사도 요한의 계시록에서 그 진정한 실상(實像)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구속사적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원리 하에서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 계시된 새 언약의 성격도 당시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 뿐 아니라, 보다 미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중심으로 한 초림의 사역 및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재림의 사역까지를 포괄적으로 망라해서 전망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지상적 생애가 이렇게 오묘하신 하나님의 전(全)구속사의 경륜 속에서 호리만큼의 차착(差錯)도 없이 시종일관하게 섭리적으로 통치와 인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일은 가장 큰 믿음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구원자의 도래는 왕적 메시아의 신분(사52:13, 15)으로 확인되기 이전에 ‘고난의 종’의 신분으로 제시되고 있음이 이사야의 새 언약이 간직한 구속사적 특징입니다(사52:14, 53:1-12). 동일한 메시아에 대한 이중적 예언 말입니다(사52:13, 15절과 14절의 비교). 당시 이스라엘로서는 메시아 도래의 예언이 먼 미래적 사건으로 남아 있었기에 마치 겹쳐진 두 산 봉우리를 멀리서 보면서 하나의 산인 양 착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당시 열강들의 정치, 군사적 각축장(角逐場)을 방불케 하는 가나안 지역의 지정학적 특성상, 이스라엘의 메시아 대망(待望) 사상은 자연히 정치적 메시아의 도래를 기대하는 쪽으로 기울어짐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이제 고난의 종으로서 메시아의 인격과 사역을 살펴봅니다.

                            구원자로서 종의 승귀(exaltation)와 함께 고난 받는 종의 처참한 비하(卑下, humiliation)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먼저 예고합니다(사52:13-15). 사53장에서는 종의 모습을 보다 세밀하게 언급합니다. 그는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어서 흠모할만한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끝내 싫어 버림을 받게 됩니다(1-3절). 그 종은 본격적으로 고난을 받습니다. 그는 찔림을 받습니다. 그는 심하게 상처를 받습니다. 그는 징계를 받습니다. 그는 채찍에 맞습니다. 심지어 죽기까지 합니다(8-9절). 그러나 이 모든 고난은 오직 우리를 죄와 허물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대속적 고난입니다.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주기 위해 애매히 당한 고난입니다. 헌신적인 희생의 고난입니다. 그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 분에게 대속적으로 짐지게 하심으로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신 영광스러운 고난입니다(사53:4-6). 성도의 구원뿐만 아니라 주님 자신의 부활과 하늘 보좌로의 승귀가 보장된 대속적 죽음이었기에 말입니다(히12:2, 롬8:34). 결국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종을 위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실 것이며, 만인의 무릎을 그 분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그 분을 주라 시인하게 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실 것입니다(사53:10-12, 52:13, 15, 빌2:9-11).

                            나아가 사61:1-3의 예언을 통해 이사야는 메시아 사역의 구속사적 성격을 이스라엘의 희년 절기(레25:10-11)의 종말론적 성취로 설명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의 성격이 사61:1-3을 구체적으로 성취하기 위한 것임을 우회적으로 시사하심으로 구약예언의 성취자로 오신 고난의 종 된 메시아이심을 공개적으로 그러나 암시적으로 증거하십니다(눅4:16-19).

                            이상의 내용을 통해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 담긴 새 언약의 내용들을 특별히 세 선지자들의 예언을 중심으로 살펴봤습니다. 이들이 예언하고 있는 새 언약의 공통점은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한 다윗왕조의 복권이 남유다의 바벨론 포로귀환 사건을 통해 일차적으로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회복과 다윗왕조의 복권은 미래에 참 다윗 왕으로 오시는 고난의 종 메시아를 통해 실현된다는 지적입니다. 이런 사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출현한 새 이스라엘로서 곧 교회공동체를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날 것이며,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통해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이 확실합니다.

                            따라서 선지자들의 새 언약은 자연히 아브라함언약, 시내산언약, 다윗언약을 총체적으로 포괄(包括)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의 절정을 함의하고 있는 새 언약을 통해 성취의 실상을 드러내게 됩니다(눅22:19-20), 히브리서 기자가 선지자들의 새 언약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해 성취의 절정에 이르고 있음을 밝히 진술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히10:12-18).

                            ⑪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과 하나님 나라 사상

                            예수님의 탄생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
                            첫째, 구약 언약의 총체적 성취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고 기술합니다(마1:1). 이는 이제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 언약에 의해 줄기차게 약속돼 나온 참 자손(창22:18, 행3:25-26, 갈3:16, 삼하7:11-16)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을 증거함으로써 혈통적으로나 법적 자격에 있어서 명실공히 다윗 왕가의 계승자이심을 밝히 지적합니다. 사실상 다윗 왕조가 BC586년 바벨론에 의해 몰락된 이후 거의 6세기가 흐르는 동안 다윗의 왕통(王統)은 표면상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로마의 정치적 지배하에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이 오매불망(寤寐不忘) 기다리던 다윗의 왕권을 이을 적법한 메시아가 되심을 밝히는 일은 다른 무엇에 앞서 사활이 걸린 중차대한 논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사실상 모세와 선지자들과 시편에 예언 된 구약 언약의 총체적 성취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증거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눅24:27, 44절). 그래서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의 씨’로 오신 예수님의 왕적 혈통을 객관적으로 확인시키기 위해 유대인들이 중시했던 족보의 기술을 통해 그 분의 법적 자격과 메시아적 정통성을 입증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족보에 의한 예수님의 탄생기록은 구약의 예표적이며 모형적인 계시시대를 마감하고 구속의 실체로서 구원의 새로운 계시시대를 여는 신기원(新紀元)적 의미가 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참 다윗 왕으로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통성을 밝히는 과정에서 족보의 시작을 아브라함으로부터 기술합니다(마1:2). 이는 유대인의 참 다윗 왕으로서 예수님의 왕적 정통성과 법적 합법성 및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마태의 의도적인 기술방식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누가는 동일하게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면서 아담을 거쳐 하나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눅3:23-38). 이는 누가복음의 저작 동기와 강조점이 상대적으로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기록했기 때문입니다(눅1:1-4). 그래서 예수님을 단순히 유대인의 메시아가 되실 뿐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전(全)인류의 구원자이시며, 나아가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명백히 증거하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족보의 기술을 통해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통성과 합법성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전(全) 족보의 내용을 크게 삼등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서 다윗까지(마1:2-6), 다윗에게서 여고냐(여호야긴)와 그의 형제들의 출생까지(7-11절), 그리고 여고냐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까지(12-16절)입니다. 이런 삼등분은 단순히 연대기적 편의성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보다 구속사적인 계시성이 깊이 개입돼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삼등분 한 족보의 내용을 반복적으로 집약해 구분하면서 각각에 구속사적 의미를 부여해서 설명합니다. 곧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다윗부터 바벨론 이주(移住)까지, 그리고 바벨론 이주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가 그것입니다(17절). 마태의 이런 구분과 표현방식은 다분히 다윗 왕조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접근해 분류한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 구약 이스라엘의 국가적 정체성을 신정왕국으로 이해한 데서 나와진 하나님 나라의 흥왕기, 쇠퇴기 및 회복기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속자의 출현을 위한 최적의 상황을 준비하기 위해 세상역사를 섭리적으로 주관해 오셨던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이 본격적으로 구속사를 역사의 전면에 부상시키시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설명하면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4:4)라고 기술합니다. 바야흐로 구속사의 핵심사상인 여자의 후손언약의 종말론적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절정을 보았다는 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거의 4세기 동안 세상역사 속에 깊이 침잠했던 하나님의 구속사가 마치 새 봄의 마른 가지에 새 싹이 움트듯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적 작정의 때가 이르매 새 언약의 남은 성취를 위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둘째, 자기 백성의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마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갖는 구속사적 성격을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1:21)라고 선포하므로 예수님의 메시아적 중보 사역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한 마리 어린 속죄양(scape goat)으로 오신 분입니다(요1:29). 이사야는 메시아를 참 다윗 왕에 앞서 고난의 종으로 묘사합니다. 메시아의 이중적 성격과 사역을 내다봅니다(사52:13-15, 53장). 하나님께서는 실로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대속적으로 담당시키십니다(사53:5-6). 그 분의 죽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근거가 됩니다.

                            예수님의 죄를 대속하시는 중보사역(마9:12-13, 막2:17, 10:45)은 선지자들의 새 언약이 보증하고 있는 죄책의 사면(렘31:34) 및 죄의 도말(사44:22)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습니다. 다시 말해 새 언약 안에서 약속된 회복된 이스라엘의 사죄의 문제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비로소 성취될 것임을 전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성취가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속에서 선취적으로 보증됩니다. 새 언약이 본질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말미암는 메시아 왕국의 종말론적 완성인 사실이 이에 있습니다. 그 나라는 죄의 권세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공법이 막힘없이 시행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는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충만한 곳입니다(렘31:34).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복음이 차별 없이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임마누엘의 성취자로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는 단지 중보적 사역뿐만이 아닙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명하면서 ‘임마누엘’의 성취로 선포합니다(마1:22-23).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언약적 구속사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곧 구약 성막계시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임재, 통치, 연합, 교통과 동행의 예표적 계시(출25:8)가 성막의 실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요한은 보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성막의 구속사적 계시와 동일시하므로 예수님을 성막의 실체로 오신 분임을 명백히 증거합니다(요1:14, 2:19-21). 오늘날 예수님은 성령님의 내주, 교통, 인도하시는 역사(고전3:16, 6:19, 갈2:20)를 통해 여전히 우리의 왕으로, 우리와 연합돼, 우리의 전 인격과 생애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섭리적으로 주관해 가십니다(욥23:10). 그렇습니다. 임마누엘 신학은 성령님의 신비하신 사역으로 인해 성도를 예수님의 생명 연합시켜 한 몸이 되게 할 뿐 아니라, 성도 간에도 지체로서 상호 유기적으로 연합되게 함으로 우주적 보편의 교회공동체를 이루게 하십니다.

                            임마누엘 사상은 또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증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상은 신학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처를 정하신다’(요1:14)는 사실과 동질성을 띠는 것으로,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왕적 통치권의 행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임마누엘 신학은 언약사상의 본질인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과도 동일시 간주됩니다. 그리고 이 핵심사상은 본질상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인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로 마침내 현실화된다는 것이 사도 요한의 지적입니다(계21:3, 7절). 이런 의미에서 임마누엘 사상은 곧 신정왕국사상과 신학적 상응(相應)성을 띠게 됩니다. 이런 상호 밀접한 신학적 관계성은 결국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 임마누엘의 실제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곧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이 땅에 도래했음을 명백히 시사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의 구체적 실례를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넷째, 새 이스라엘(교회)의 대표자로 오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동방 박사들에 의해 경배를 받습니다(마2:1-2, 11절). 이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실 뿐 아니라 이방인의 왕이신 사실을 암시적으로 증거합니다. 곧 인류의 왕이시며 메시아로서 구원자가 되신다는 증거입니다.

                            헤롯의 살해음모를 천사로부터 고지(告知)받고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대동해 애굽으로 피신합니다. 마태는 호세아의 예언(호11:1)을 구속사적 계시안목으로 재해석하면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사건을 예수님의 애굽 피신사건에 적용시킵니다. 다시 말해 마태는 과거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가 예수님의 애굽 피신사건 속에서 신학적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런 시각 속에는 마태가 아기 예수님의 불가피한 애굽으로의 여행사건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출애굽사건의 연장이 되는가를 보여주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아기 예수님의 애굽 피신 사건은 얼마 후 헤롯이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내 애굽에서 예수님을 다시 불러내셔서 나사렛에서 그 분의 유년시절을 보내게 하시는 것을 통해 출애굽사건의 재현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자 했음이 더욱 확증됩니다(마2:19-20). 이처럼 구속사 진행의 정점인 예수님의 개인적 생애는 신구약 시대를 총망라한 하나님의 백성들(교회 공동체)의 생애와 영적으로 연합돼 동일시됩니다. 교회의 통일성, 연합성, 그리고 보편성의 원리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 되듯이, 둘째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은 구속사의 경륜 속에서 구약 이스라엘의 원형(prototype) 내지는 실체(antitype)로서 새 이스라엘의 대표자의 자격을 담당하십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성공적으로 준비하시는 과정에서 40일 광야금식사건과 마귀로부터의 수시(受試)사건을 의도적으로 기록합니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생활과 첫째 아담의 수시(受試)사건을 의도적으로 재현해 보이심으로 자신을 모세의 실체인 새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그리고 둘째 아담의 자격으로 오신 새 인류의 머리이신 사실을 증거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시도는 예수님 자신의 메시아적 정통성을 정당화시키며 공생애 사역의 성공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선험(先驗)적 효과를 가져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 준비

                            헤롯의 죽음과 더불어 아기 예수께서 출애굽하셔서 가나안으로 돌아오십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인 의미를 위에서 살펴봤습니다. 향후 그 분의 사역을 통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될 새 이스라엘로서 교회를 대표하심으로 역사적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의도적으로 재현하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가나안으로 돌아오신 아기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공생애 사역을 담당하시기까지 북쪽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 지방에서 생활하셨습니다(마2:23).

                            한편 마태는 세례요한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앞서 등장시킴으로 왕이신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선구자로 그를 소개합니다(마3:1). 4복음서 기자들은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각기 다른 방향과 각도에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구속사적 의미를 기술합니다만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의 선구자적 사역을 소개하는 데는 하나같이 일치를 보입니다. (막1:1-8, 눅3:1-17, 요1:15-34). 이런 사실은 그의 출현으로 인한 사역의 성격과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를 공개적이고 직접적이며 객관적으로 이스라엘 앞에와 전 인류를 향해 유일한 메시아와 구세주로 증거하는 선구자로서의 구속사적 사명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세례요한의 출현입니다. 마태는 3장을 시작하면서 단도직입적으로 세례요한의 출현을 소개합니다. 이어서 마태는 그의 갑작스런 출현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미 예언된 사40:3의 말씀의 구체적 성취로 연결시킴으로 그의 출현과 사역이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마3:3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말씀은 원래 이사야40:3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시킨 말씀으로 유다 민족을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실 뿐 아니라, 더불어 귀환하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본 절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스룹바벨과 에스라 및 느혜미야가 이끈 포로귀환으로 인해 부분적이고 일차적으로만 성취됐습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구원과 안식은 당시 이스라엘의 포로귀환 역사 속에서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대부분의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이 종말론적 성격을 띠고 나타나는 것으로 인해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예표적인 모습으로 성취되지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실체화된다는 이중 구조적인 의미가 내포돼 있음을 시사합니다. 본문의 이사야의 예언도 이런 원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예언은 궁극적으로 보다 온전한 성취로서 하나님 나라인 메시아 왕국의 선포와 도래에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이런 맥락에서 마태는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유대인들의 포로귀환의 차원을 넘어 본질적으로 죄의 노예로 전락한 인류를 구원시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오실 그리스도 예수의 선구자로서 세례 요한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마태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즈음해 세례 요한의 출현을 소개함으로써 이사야의 예언이 종말론적으로 세례 요한에게서 구체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 시기가 언제인가 하면 바로 마3:1절에서 언급된 ‘그 때’란 말입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어린 시절 헤롯의 살해음모로 애굽으로 잠시 피했다가 북쪽 갈릴리 인근 지역인 나사렛으로 귀환해 줄곧 그곳에서 성장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른 이유가 이에 있다고 마태는 기록합니다(마2:23). 따라서 마태가 세례요한의 출현과 사역의 시기를 ‘그 때’라고 지칭하는 것은 다름 아닌 충분히 장성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즈음한 시기로서 세례요한과 더불어 30세쯤 되셨을 때를 가리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탄생보다 6개월 정도 앞서 출생했기 때문입니다(눅3:23, 1:24-26).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마2장과 3장 사이는 거의 30여 년의 시간적 간격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섭리적으로 주관하시는 가운데 때가 차매 이사야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을 이제 세례 요한을 출현시킴으로 성취하고 계십니다. 마태가 이사야의 예언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시키는 배경이 이렇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세례(침례) 받으심입니다. 마3:13-17은 ‘이때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이 단락과 바로 앞의 단락, 곧 세례요한의 출현과 사역이 불가불 연결돼 있음을 시사합니다. 다시 말해 세례요한의 사역의 결과로 말미암아 온 유다 지역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크나큰 도덕적 각성이 일어나 죄에 대한 자각이 널리 펴져 있었던 때에 13-17절의 사건이 일어났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지금까지 은거(隱居)해 계시던 참 다윗 왕께서 ‘이때에’ 비로소 사람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이제 주의 길이 예비되었고 그의 왕적 대로가 평탄케 된 것을 시사합니다. 메시아로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모든 준비가 끝난 때에 대중 앞에 공개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13절의 ‘이때에’라는 부사 시제 속에 담긴 상황적 분위기가 이렇습니다.

                            13-17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시는 사건과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증하는 것을 통해 그의 메시아 되심과 메시아적 사역을 공식적으로 윤허(允許)하는 사건이 소개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는 것은 그 자신이 이 물세례의 본질을 완성시키기 위해 오신 분으로서, 몸소 세례를 받으심으로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완전한 순종의 모범을 보이시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에 의해 받게 되신 예수님의 수세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왜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본체로서 죄인인 뭇 백성들이 받는 죄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셔야만 하셨을까요. 마3:15절 속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마태는 예수님의 수세사건 속에 담긴 구속사적인 의미를 설명합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이 말은 확실히 예수님께서 굳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다른 의미에서 되어진 사실임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뭇 백성들과 같이 세례요한의 물세례를 받으시는 것이 ‘모든 의’, 곧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전(全)요구를 성취하는 셈이 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세례요한의 사역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계획하신 것임을 명백히 확인해 주심으로써 예수님의 사역과 상호 밀접히 연결을 시키셨습니다. 다시 말해 세례요한에 의한 예수님의 수세를 통해 요한의 선구자로서의 사역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인정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죄인들과 동일시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수세사건이 이후 진행될 그분의 구속사역과 내용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심은 곧 그의 백성들과 연합해서 저들의 죄를 대표적이고 대속적으로 담당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고후5:14). 그래서 죄 없으신 분이 자기 백성들의 죄 책(責)을 담당하시기 위해 자원해 회개에 이르는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스스로를 죄인들과 동일시 여기셨다는 사실입니다. 자신 안에 죄인 된 그의 백성들을 대표적으로 품으시고 저들의 죄를 속량하고자 대신 죽기 위해서 말입니다. 즉 예수님은 그의 백성의 머리로서 세례 받으심을 통해 그들과 하나가 되셨고 나아가 그의 백성들이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속돼 새 생명을 얻을 것을 계시한 것입니다. 빌6-8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고후5:14입니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5:21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따라서 우리는 세례 받음의 의미를 진지하게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 받음은 우리의 머리요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속하는 새로운 신분의 백성이 된다는 외적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으며, 이런 사실의 터 위에서만 비로소 세례 받은 자로서의 거듭난 인격적 삶이 확인되며 보증됨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의식은 단순한 성례전적 형식 이상의 본질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곧 이미 천국백성 된 사실과 그 나라에 소속된 자로서의 뚜렷한 천상적 정체성의 확증 말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수세의 의미를 율법의 완성이란 측면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위에서 ‘모든 의’를 이룬다는 말의 의미가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총체적 요구에 대한 성취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물론 ‘모든 의’라는 표현 속에 율법이란 단어가 직접적으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란 문구는 확실히 구약에 요구된 하나님의 율법적 요구를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의 지적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등 그 분의 메시아적 사역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세례 받으심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수세사건은 이로 인해 본격적인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로 작용합니다. 물론 성경 기록상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출발은 마4:1-11사이에서 소개된 마귀로부터의 시험받으신 사건 이후인 마4:17부터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먼저 보냄을 받은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사건은 이로 인해 예수님의 사역이 실질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리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수세사건은 은밀한 중에 시행된 것이 아닌 공개적인 자리에서의 공식적인 의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수세사건은 이어 시행되는 성령의 기름부음의 상징을 통해 하나님의 최종적인 재가와 인준을 받는 것으로 메시아적 왕의 대관식이 성대히 거행되게 됩니다.

                            셋째, 하늘의 재가(裁可)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께 임한 사실을 4복음서 기자는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의 사실성과 메시아 사역의 본격적인 개시(開始)를 알리는 중요한 사건 기록입니다. 특별히 요1:31-34에서는 성령이 비둘기의 형체로 예수님께 임한 사건이 갖는 의미를 명시적으로 기록하는 가운데, 성령세례의 수여자로서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증거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성령이 임하신 사건이 갖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살펴봅니다. 첫째로 세례요한의 사역을 확증시키기 위함입니다. 요한의 사역은 죄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것을 통해 물세례의 실체인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인 메시아의 도래가 임박해 왔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령이 비둘기의 모양으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 임하신 사건은 예수께서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메시아가 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요1:33). 이런 의미에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그의 사역의 정당성과 합법성이 다시 한번 공인된 셈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메시아적 직무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인준의 표식입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사실상 예수님께서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로서 정당하게 지명을 받으셨지만, 단지 공식적인 인준을 확인하는 임명장을 받지 않음으로 인해 실제적으로 메시아적 권한행사가 잠정적으로 유보된 것과 방불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실제적으로는 요한의 세례에 이어 즉각적으로 성령의 임재하심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메시아적 직임은 하늘의 재가를 거쳐서 실제적 권한행사로 들어갑니다. 특히 하늘로서 임한 말씀인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고 하신 내용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소명과 임무를 ‘대중 앞’에서 공식적으로 확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3:22)고 ‘개인적 차원’에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역을 인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이든지 간에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과 그의 사역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재가와 인준이 떨어졌다는 사실에 모아집니다. 결과적으로 메시아로서 사역을 시작하시는 아들을 향하신 아버지의 만족하심이 충분히 계시된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일의 공증으로 성령께서 보내심을 받으신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님은 원래부터가 성령에 충만한 분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시게 되었기에 일종의 거룩한 성례전적 예식을 통해 새로운 능력을 부여받으신 것입니다. 아울러 성령의 임하심은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부여하신 메시아적 사명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가납(嘉納)하신 승인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당신의 인성적 측면에서 이 성령의 능력을 필요로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에 베푸셨던 각종 표적적 능력들과 복음적 사역을 자기 안에 계셨던 성령께 돌렸던 사실들을 생각할 때 확인할 수 있는 결론입니다(마12:28, 눅4:18, 행10:36-38). 셋째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처럼 중생케 하시는 성령께서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물로 세례를 받는 의미 속에는 수세자가 가진 죄가 그와 같이 씻김을 받게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니, 이는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사역에 의해서 그렇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행2:38).

                            넷째, 예수님께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십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이어서 광야로 나가셔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십니다. 이 일에 앞서 예수님의 수세사건 때 예수님 위에 충만하게 임재 하셨던 성령께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십니다(마4:1). 마가는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막1:12)‘고 기록함으로써 예수님의 시험받으시는 사건이 동일한 성령님에 의해 주도된 의도적인 사건이었음을 시사합니다. 결국 마태를 비롯한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신 사건을 기록하는 것을 통해, 메시아로서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와 능력을 힘 있게 발휘하심으로, 사단의 공격을 원천적으로 봉쇄시키고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본격적으로 도래시키는 데 유리한 고지를 선점(先占)하게 될 것임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후에 예수님께서 마12:28-29을 통해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고 말씀하신 배경이 이렇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가 능력있게 발휘되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왕성하게 펼쳐질 것을 염두에 두시고, 자칭 세상 임금으로 군림하고 있는 사단의 세력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먼저 제압하셨던 것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에 앞 서 마귀로부터 시험받으시는 사건을 기록한 배경이 이렇습니다. 성령께서 이 일을 의도적으로 주도하신 이유가 이런 사실에 기인합니다(마4:1, 막1:12-13, 눅4:1-2). 다시 말해 마귀의 세력을 먼저 제압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은혜의 왕적 권세가 힘있게 발휘되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직무와도 직결되는 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요일3:8).

                            마태는 이런 예수님의 시험받으시는 사건을 기록하면서 ‘그 때’에 라는 부사 시제를 사용합니다(마4:1). 여기서 ‘그 때’란 내용의 정황으로 보아 바로 3:13-17에서 소개된 예수님의 수세사건과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공식적인 재가사건을 가리킵니다. 바로 이 사건 직후에 지금 소개되는 예수님의 시험받으시는 사건이 일어나게 됐다는 지적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에는 어떤 구속사적 의미가 포함돼 있는 것일까요. 왜 굳이 이런 시험을 받으셔야만 하셨을까요. 먼저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의 성격에 대해 알아봅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을 이해하는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1)하나는 인류의 시조인 첫 사람 아담이 당시 하나님 앞에 어떤 자격과 신분으로 서 있었는가에 대한 것이고, (2)다음으로는 구약의 광야교회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이 받았던 40년간의 광야시험에 관한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 사실을 살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선악과 사건을 통해 시험 가운데 두셨습니다. 이 시험은 보상과 형벌이 대가와 조건으로 주어져 있는 일종의 율법적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창2:16-17). 본 선악과 금령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아담과 그의 후손으로 하여금 이 시험을 통하여 선과 악을 구별하게 하시려는 데 있었습니다. 즉 순종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의의 단계로 올라감으로 궁극적으로 영생하는 삶을 누리게 하셔서 악과는 영원히 상관없는 영광의 자리에 이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만이 창1:28에서 복으로 언약하신 문화명령 속에 담긴 궁극적 목표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아담의 후손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마침내 실현시킬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일에 아담은 불순종함으로 실패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허리에 속한 모든 인류 또한 아담과 더불어 실패에 동참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선악과 금령법을 어긴 형벌로서 죽음이 큰 권세로 온 인류 위에 역사하게 된 것입니다(롬5:12).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과 관련해서, 둘째 아담의 신분과 자격으로 첫 사람 아담의 실패를 회복시키는 구원자의 사명을 수행하고자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죄에 대한 대속물이 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롬5:14, 고전15:45, 막10:45).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기에 구원자로서 둘째 아담의 자격을 능히 취하실 수 있습니다. 이 자격을 취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심으로 세상 가운데로 들어오셨습니다. 따라서 무죄한 인성의 입장에서 첫 사람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기 위해 적법한 자격자로서의 시험을 성령의 인도 하에 자원해서 받으시게 된 것입니다. 이 일에 만일 예수님이 아담의 후손들과도 같이 동일하게 죄가 있는 분이셨다면, 이는 구속자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기에 결코 구세주로의 대속적 사역을 담당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본질에서 하나님이시기에 아담의 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분으로서 구원자가 되시기에 합당한 자격을 가지신 유일한 분이 되십니다(행4:12, 히4:14-16, 벧전2:22, 고후5:21).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받으신 본 시험은 구약교회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실패를 회복시키는 성격을 띠는 것이기도 합니다. 당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교회의 자격(행7:38)을 가지고 광야에서 40년간 시험을 받았던 것입니다. 신8:2의 말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 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본문의 말씀으로 미루어 보건대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가나안 정탐사건(민13:1-2, 25-26)은 가나안을 진격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진위를 가늠해 보는 하나님의 의도적인 시험의 성격을 띠고 주어진 사건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치 이삭을 아브라함의 나이 백세에 약속의 자녀로 주시고는 다시 그를 번제로 하나님 앞에 바치라고 명령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신실성을 시험하셨던 경우와 동일한 방식으로 말입니다(창22:1-2). 왜냐하면 가나안 정복은 오직 하나님과 그 분의 약속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방식을 통해서만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일면 표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외견상으로는 사 백 여년 이상 노예집단과 방불한 종살이로 일관해 살아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잘 훈련되고 정비된 가나안 족속들의 삶의 모습은 자신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유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열 정탐꾼은 모든 사실을 외적으로만 판단해서 부정적으로 보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가나안 정복사건을 구속사적 관점과 계시적 통찰력을 갖고 해석했습니다. 때문에 비록 현실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열세일지라도, 지금까지 불가능한 상황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과 인도하심으로 극복하게 하셔서 이곳 가데스까지 선히 인도해 주셨기에, 앞으로도 가나안 정복을 위한 성전(聖戰)에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적 손길로 친히 간섭해 주실 것임을 믿음으로 확신했던 것입니다. 오직 말씀을 의지하는 것으로 말미암는 승리에 대한 확신 말입니다. 이런 신앙적 확신은 열 정탐꾼이 이스라엘을 가나안 족속들과 비교해서 ‘메뚜기’ 같다는 표현으로 비하한 반면(민13:33), 여호수아와 갈렙은 “저들은 우리 밥이다‘라고 아예 무시한 지적 속에 잘 표현돼 있습니다(민14:9). 이렇게 현실적으로 열악한 상황을 믿음으로 극복하는 신앙자세는 시종일관하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생명의 도리와 신앙과 삶의 근간으로 붙잡고 살아가는 데서 나와지는 전인격적 신앙고백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 근거해서 결국 이스라엘은 열 정탐꾼의 보고에 동의한 나머지 가나안 정복의 직전에서 회귀해 급기야 광야에서의 40년 유랑의 생활에 접어들게 됩니다(민14:34).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대가로 주어지는 언약적 심판의 일환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출애굽 2세대에 의해 40년이 마치는 날 다시 가나안 정복의 길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신1:3). 지금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이 ‘광야’라고 하는 장소가 갖는 상징적 배경과 의미가 여기에 있으며, 동시에 ‘40’일이라고 하는 시험기간에 대한 상징적 의미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돼야 할 부분입니다. 이런 구속사적 계시사건의 연속선상에서 예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보냈던 40년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는 신명기 말씀에 의지하여 마귀의 시험에 대처하셨던 것입니다(신8:3, 16, 13).

                            이렇게 예수님은 구원자의 자격으로 자기 백성을 자신 안에 품으시고 저들을 대표해서 참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십니다. 구속 사역의 온전한 성취를 위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옛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실패했던 것을 다시금 이와 같은 방식을 재현하심으로 참 이스라엘인 신약의 성도들 안에 회복시키려고 스스로 대표적으로 시험에 참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로 인해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시는 한편, 사단을 이기는 권세를 동일한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를 통해 신약의 성도들에게 공급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미 마태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마2:15)라고 했던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을 아기 예수님의 출애굽사건에 적용시킴으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예표적 출애굽사건이 예수님 안에서 그와 생명적으로 연합될 참 이스라엘인 성도들에게 실체로 성취된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동일한 구속사적 원리 안에서 이제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죄로 인해 타락했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몸 된 교회에 연합하는 모든 성도가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새 이스라엘인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마귀로 말미암는 죄의 권세를 멸하시고(요일3:8) 친히 당신의 부활하신 생명을 그의 몸 된 교회공동체에게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해명해 본다면, 실패한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실패한 이스라엘을 거쳐서,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로소 하나님의 참 아들이시며 진정한 구원자로서 참 이스라엘을 위한 메시아의 모습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 된 ‘새 언약’의 본질적인 사상이 이런 사실에 모아집니다.

                            그렇습니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사단의 세 번에 걸친 시험(마4:3-11)을 오직 말씀으로 물리치심으로 메시아로서의 본격적인 사역을 위한 준비를 마치십니다. 실로 사단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는 성도의 신앙의 본질과 성격이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거기에 자신을 드리는 방식으로 비로소 성립된다는 사실을 친히 전인적으로 보여주신 모범적 사건이었습니다. 동시에 보다 본질적으로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왕권이 능력 있게 나타나는 것을 통해 마침내 사단의 권세를 패배시킴으로 이후 공생애 사역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날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와 종말론적 구속사역의 최종적 성취를 보증하고 담보하는 계시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새 언약과의 관계

                            세례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에 이끌리어 40일간 광야에서의 금식과 사단으로부터 시험받으심은 이제 예수님으로 하여금 명실공히 메시아로서 구원사역에 요구되는 일체의 필요충분조건이 온전히 충족됐음을 시사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신 사건은 첫째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전락된 인류를 이제 둘째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안에서 의인 삼으심으로 재창조의 사역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실현을 도모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향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속죄사역은 옛 언약에 실패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려는 과정에서 새 언약에 담긴 가장 중요한 중심주제입니다. 렘31:34입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본문은 크게 두 가지 주제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회복된 이스라엘(33절)이 한결 같이 여호와를 알게 된다는 지적이고, 다른 하나는 사죄의 은총과 죄의 영원한 도말입니다. 여기서 앎이란 단순히 지식의 습득만이 아닙니다.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관계의 회복과 이로 인한 관계의 정상화를 가리킵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깨져버린 에덴의 당초 교제와 화목이 새 언약 안에서 다시 회복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이제 새 언약 안에서 회복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가 영원히 지속될 것을 보증하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결국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및 다윗 언약에서 공히 약속하고 있었던 언약의 영원성은 새 언약 안에서 최종적으로 성취를 보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런 새 언약의 영원성과 보증의 확실성을 자연법칙의 불변성에 근거해서 재차 확약하십니다(렘31:35-37).

                            그런데 새 언약 안에서 이런 놀라운 축복이 보장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 하나님을 향해 오랜 세월 불화와 단절의 원인이었던 죄의 문제(사59:1-2)가 근본적으로 해결된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이런 사실은 이제 율법이 이스라엘의 마음 판에 새겨지는 것을 통해 온전한 순종이 보장되고, 이로 인해 33절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는” 언약의 중심사상, 곧 임마누엘 신학의 온전한 성취로 인해서입니다. 물론 이런 표현은 메시아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마침내 도래할 것을 강력히 암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 간에 연합된 일체감이 형성된다는 얘깁니다(계21:3, 엡2:14-16). 더 이상 구약 시대의 선지자나 제사장 등의 다른 중보자가 필요치 않게 된다는 지적입니다. 이미 메시아로 말미암은 화목이 회복됐기에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됐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예레미야 선지자의 새 언약 안에서는 문맥상 감추어진 메시아 사역으로 말미암는 성령의 사역, 즉 성령의 공작하시는 신비한 구원 적용의 사역이 에스겔의 새 언약인 ‘화평의 언약’(겔37:26) 안에서 보다 확장되고 구체화됩니다. 에스겔의 새 언약에서는 율법에 대한 이스라엘의 온전한 순종의 가능성과 확실성을 하나님의 신, 곧 성령으로 말미암는 새 영과 새 마음의 변화 곧 전인적인 거듭남에서 찾습니다(겔36:26-27).

                            그러나 사실상 새 언약에 근거한 회복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상의 새 언약의 계시적 특징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지적은 새 언약의 효력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의 약속을 신실히 이행하시기 위해 바벨론 포수(捕囚)로부터 3차에 걸쳐 포로귀환을 시도하셨습니다.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에 의한 성전재건도 시도됐습니다. 에스라에 의한 특단의 종교적 구조조정도 단행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고토로 귀환한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 새 언약에 약속된 여타의 언약적 특징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저들은 시내산 언약을 어기며 과거 다윗 왕조를 멸망케 했던 불법과 불의를 자행하는 일을 여전히 일삼았을 뿐입니다. 포로 후기 선지자들의 기록내용(학개, 스가랴, 말라기)이 이런 사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합니다. 결국 이런 사실들이 의미하는 바는 새 언약의 내용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가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새 언약 안에서 예표적 성취에 불과한 것이고, 이를 통해 보다 근원적으로 실현시켜야 할 다른 최종목표가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곧 참 다윗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안에서 ‘새 이스라엘’의 회복 곧, 신약교회공동체의 출현 말입니다(마16:16-21).

                            그렇다면 새 이스라엘로서 교회공동체는 어떤 방식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요. 누가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 예식을 잡수시는 것으로 이를 폐하시고, 새롭게 성찬식을 제정하시는 가운데 이를 새 언약으로 명명하시는 내용을 기술합니다(눅22:14-20). 본문에서 유월절 예식은 분명히 성찬식으로 대체됩니다. 이는 구약의 유월절 예식의 예표적 본의가 성찬식의 실체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적 사역을 통해 마침내 완성될 것을 시사합니다. 때문에 모형과 예표로서 유월절 예식은 예수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신 후에는 더 이상 문자적으로 지켜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예표가 실체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효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죄(赦罪)와 구원을 값없이 은혜의 선물로 받게 됩니다(엡2:8-9, 1:7, 롬3:22-24, 8:1-2).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을 일컬어 성경은 하나님의 친 백성, 하나님의 권속, 하나님의 자녀와 아들(양자), 그리고 후사 등으로 부릅니다. 이들을 집합적으로 부르게 될 경우 바로 교회라는 이름이 붙여집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는 한 새 사람 곧 천상공동체로서 주님의 몸 된 교회 말입니다(엡2:14-15, 1:23, 4:12, 골1:18). 이런 식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출현은 성찬식에 암시 되어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하심의 결과로 말미암아 그 천상적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마16:16-21)

                            상황이 이럴진대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이미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 나라와 사역의 결과로 출현하게 된 교회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첫째,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안에서 이미 도래한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입니다. 성경이 시사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일반적인 개념은 우리가 흔히 잘못 알고 있듯이 죽어서 가는 천당 내지는 천국의 장소적 개념이 아닙니다. 물론 원천적으로 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으로 신약의 복음서가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왕적 통치권의 행사가 현재적으로 능력 있게 발휘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으며, 귀로 들을 수 있는 실체가 되어서 이미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으로 실제화 되었다는 지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재적으로 도래한 이 하나님의 나라를 밭에 감춰진 보화와도 같이 찾을 수도 있고, 아주 값진 진주와도 같이 살 수도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마13:44-46). 그러나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특징은 천상적 통치권이 이 땅에 보편적으로 역사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으로 역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적극적으로 이 왕권을 수납해 순종함으로 영생에 이르는가 하면, 누구는 예수님을 거절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고 오히려 심판을 자초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현재적으로 도래한 사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축사(逐邪)사역에서 가장 극명하게 확인됩니다. 그것은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표지(標識)입니다(마12:28, 눅11:20). 예수님께서 이런 사실을 자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실 수 있음은 마귀보다 더 강한 자로 오셔서 귀신의 총수격인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심으로 저를 먼저 결박해 놓으신 사실에 근거합니다(마4:11, 12:29, 요일3:8). 물론 그 외에 다른 초자연적 치유사역 또한 구약에 예언 된 메시아적 사역을 보증하는 명백한 증거(사35:5-6)로서 메시아의 왕권이 현재적으로 발휘되고 있음을 분명히 증거합니다. 특별히 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마9:1-8, 막2:1-12)은 다른 치유사건과는 달리 그의 죄를 먼저 사해주시고, 후에 이를 확증케 하기 위한 방편으로 중풍병을 치유해 주심으로 자신을 구속주로 계시하신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한결 같이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그 분의 메시아성의 확증은 물론, 하나님 나라의 왕적 통치가 권세 있게 그 천상적 권능을 발휘하고 있음을 시사함으로 현재적 하나님 나라 도래의 확실성과 사실성을 증거해 줍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단순히 죄 용서함을 받았다는 차원을 넘어 이미 도래한 바로 이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속해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으로 그 분의 왕적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 누린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그러기에 성도의 삶의 현장 속에서 왕의 통치권을 받아 순종하는 천상적 모습이 구체적으로 확인되어야 합니다. 재창조된 새로운 피조물로서 거듭난 새 인격의 발휘로서 말입니다. 때문에 구원은 단순히 입술의 고백차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실천적 삶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의 은혜는 본질적으로 수혜자(受惠者)로 하여금 시혜자(施惠者)의 뜻에 따르려는 자율적 순종을 촉발시키기 마련입니다. “행함이 믿음을 온전케 한다”거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란 표현 속에 담긴 본의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약2:22, 17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잠시 지적한 대로 이런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사역과 이로 인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수납된 것이 아닙니다. 어느 경우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거부되고 배척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은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이런 식의 거부와 배척의 결과에 따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제약을 받습니다. 때론 부인되기도 합니다. 거절당하기도 합니다.

                            반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일부 따르는 무리들에게만은 사정이 다릅니다. 예외입니다. 이들에게는 그 나라가 절대적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을 통해 발휘되는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와 권능이 너무나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뒤로하고 예수님을 적극 좇습니다. 기꺼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편입됩니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권세 있게 실현되는 대상이고 통로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통해 현재적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가 능력있게 증거됩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증인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들 가운데 현존하는 실질로 기능합니다. 이들로 인해 하나님 나라(천국)는 작은 겨자씨에서 새 들이 깃들만큼의 큰 나무로 자랄 것이며, 세상을 그 나라의 천상적 능력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마13:31-33).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 백성을 모으시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메시아 왕국을 현재적으로 시작하신 것입니다. 제자들로 그 나라의 친 백성을 삼으시고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믿음으로 따르는 제자들에게 붙여진 교회의 정체성을 가시(可視)적 하나님 나라, 또는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설정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려는 시도는 아닙니다. 어쩌면 본질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으나, 현실적이고 현상적으로는 여전히 지상의 지역교회의 모습 속에 참 성도와 거짓 성도가 공존하며, 갖가지 죄의 권세와 역사가 활동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 사이에 불가분의 연속적 관계가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관계를 동일시 할 수 없음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둘 사이에 여전히 불연속성의 긴장과 갈등 및 대립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재림으로 성취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관해서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전부만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 국면만으로 기술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신정적 통치가 비록 예표적이기는 했지만 가시화 됐던 역사적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보다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측면에서 세상 역사의 끝에 비로소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국면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는 ‘이미’(already) 왔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아직'(not yet) 오지 않은 것으로 말하곤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중성이란 지적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국면을 말할 때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세상의 끝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친히 집행하실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심판을 포함합니다(마13:39-41, 49-50, 눅21;31). 모든 사람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의인은 복락의 세계로 들어가고 악인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날 것입니다. 영벌의 지옥과 영생의 천국의 삶으로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마25:31-46). 우리는 이런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측면을 예수님의 직접적인 언급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눅22:14-18입니다. 그 나라는 유월절의 본질이 온전히 성취되는 나라입니다. 본문의 요지는 땅에서의 유월절을 폐지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유월절 식사를 유보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의 절정인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앞에 놓고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 유월절 식사는 유월절 규례를 폐지하시는 자리입니다. 지금까지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예표적으로 계시돼 왔던 구속의 도리가 이제 유월절 양의 실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고전5:7)의 대속적 죽음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림자인 예표를 폐지하고 실체인 새 언약의 성찬식으로 대체하시는 것입니다. 성찬식의 제정경위가 이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찬식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는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사면해 주시기 위해 기꺼이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후부터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새 언약 안에서만 그 분과 연합돼 죄용서와 구원이 보장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의 폐지를 선포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않겠다’(18절)고 다짐하십니다. 16절에서는 같은 내용을 다른 표현을 빌려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본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접근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다시 유월절 식사를 할 것이며, 아울러 포도주도 마실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될 줄 압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비록 이제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으로 인해 유월절 규례는 폐지되고 새 언약이 발휘되겠지만 그것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즉각적인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세상 가운데서는 구원의 역사와 더불어 불의와 불법과 착취와 압제가 공존할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의 본질적인 의미가 온전히 실현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라는 촉구의 말씀입니다. 사실 유월절에 근거해 성사된 출애굽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애굽의 압제와 노역과 종살이로부터의 구원과 해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로서 죄로부터의 온전한 자유와 해방 및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은 사실상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때라야 비로소 성취를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 사건을 통해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새롭게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18절), 곧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확실성과 사실성에 대한 예수님의 선언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치유하시는 사건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축사의 능력이 하나님의 손, 즉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가능했던 사실을 선언하시면서 이를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 사건과 연결시키십니다(눅11:20, 마12:28). 그렇습니다. 귀신을 축사(逐邪)하신 사건은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언급 하셨듯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가장 확실하고 명백하게 증거하는 사례입니다. 이 외에도 죄를 사하시고(막2:1-12), 천국 복음이 전파되며, 기타 초자연적인 메시아적 치유(마11:5)의 능력을 행하심은 한결 같이 예수님의 메시아성의 확증과 이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역사 속에 침노해 들어와 천상적 권세를 발휘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시던 주님께서 이제 공생애 사역의 절정에 즈음해 다시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눅22:18). 사건의 전말을 살펴 보건대, 지금 유월절 식사의 자리에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벙어리 귀신을 내어 쫓음으로 이미 현재적 도래가 확인된 하나님 나라(통치권)와는 다른 차원, 다른 성격의 하나님 나라를 가리킴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국면인 미래성 말입니다. 역사의 종말에 ‘실현될 하나님 나라’ 말입니다. 현재적 하나님 나라는 구속사 진행의 점진적 성격상 구원사역의 절정에도 불구하고 예비적이고 임시적이며 제한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반면에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는 세상 역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성격을 띠고 도래함으로 최종적이고 완성적이며 최후적 심판의 성격을 띠고 출현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는 죄와 사망이 더 이상 왕노릇 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사도 요한은 자신의 계시록에서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다고 기술합니다. 체질이 근본적으로 갱신된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권세로 인해 본질이 왜곡된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가기 때문입니다(계21:4).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당신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심과 아울러 ‘아직’ 실현되지 않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동시에 증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눅17:22-25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인자(人子)의 날로 규정하십니다. 여기서 인자란 구약적 표현으로서(단7:13-14)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오시는 만왕의 왕 되신 영광의 주님을 가리킵니다. 사도 요한은 심판의 환상을 통해 인자를 세상 끝 날에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서 추수하는 심판주로 묘사합니다(계14:14-16, 마25:31-33). 따라서 인자의 날이란 그리스도의 날,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 또는 메시아 통치의 시대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심판의 날인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로 보건대 인자의 날의 성격은 성도들에게는 구속의 주님을 영광의 주요 만왕의 왕으로 만나는 희락의 날이 되겠지만(마24:30-31, 고전1:8), 불신자들에게는 죄를 판단해 영벌에 처하게 하시는 두려운 심판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마25:41-46).

                            누가는 인자의 날의 도래를 설명하면서 ‘번개의 비침’을 비유로 듭니다(눅17:24). 이는 비단 누가뿐만이 아닙니다. 마태의 소위 종말론장이라 일컫는 마24장에서도 인자의 임함을 설명하면서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27절)고 번개의 비침을 예로 듭니다. 여기서 번개의 비침을 통해 인자의 오심을 설명함은 예수님의 재림의 성격을 범우주적 가시성, 즉각성, 그리고 보편성의 원리에 근거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림의 경우와는 근본에서 차이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더 이상 은밀한 중에 오시지 않습니다. 제한된 사람에게만 영광을 받지 않으십니다. 전 우주적으로 오십니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해 애곡하게 될 것입니다(계1:7). 만왕의 왕으로, 영광의 주님으로, 그리고 심판주로 오셔서 세상을 마감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민족들을 그 앞에 모으시고 우편 양과 좌편 염소로 구분하실 것입니다. 우편 양들에게는 천국을 기업으로 상속해 주실 것입니다. 좌편 염소들은 지옥 형벌에 처해질 것입니다(마25:32-33, 41).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일컫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최종적으로 완성하시기 위함입니다(계21:1). 이런 식으로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뿐 아니라 동시에 그 나라의 미래적 국면을 동시에 증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교회시대는 ’이미‘ 실현된 현재적 하나님 나라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그래서 지금 오고 있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와 중첩되는 과도기적인 기간 속에 위치해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그 분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교회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능력을 일면 선취적으로 맛보아 체험하면서도 동시에 영적 긴장과 갈등과 대립의 구도 속에서 전투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엡6:12).

                            교회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어떤 관계성을 맺고 있을까요.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본대로 하나님 나라의 보편적인 개념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권의 시행이라는 측면에서 정의한다면 그 나라의 의미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왕으로 그 왕적 권능과 권세를 능력 있게 발휘하시는 것을 가리킴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은 다른 무엇에 앞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자들의 공동체적 삶 속에서 가장 현저하고 명백하게 확인 된 내용들입니다.

                            한편 교회란 예수님을 주와 하나님으로 믿고 신앙하는 신앙공동체로서(롬10:9), 성령의 신비한 공작과 연합사역으로 인해 예수님을 머리로 각인의 성도들이 지체로 더해진 신앙적 유기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합니다(고전12:13, 엡1:23, 5:30, 골1:24). 그래서 몸의 각 지체들이 머리의 통제 하에 다양성을 통해 통일된 행동을 나타내 보이듯이 교회공동체 또한 같은 원리 하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아 적극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그 분의 구속받은 백성들의 신앙적 집합체인 셈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 사이에는 동일한 왕과 동일한 백성의 관계 속에서 왕의 통치권이 가장 권세 있게 행사(行使)되는 현장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양자 간 상당한 동질성과 불가분의 관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질문하시는 과정에서 베드로가 대표적으로 고백한 이른바 ‘메시아의 비밀’, 또는 ‘메시아의 자기은닉 사상’(마16:16, 20)을 기초로 교회를 세우실 것을 선포하십니다(18절). 이어서 예수님은 천국열쇠를 교회에게 맡기심으로 천국을 매고 푸는 복음진리의 권한행사를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에게 맡기십니다(19절). 우리는 이상의 내용을 통해 예수님께서 논리적인 사고체계 안에서 교회와 천국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바로 그 사실은 교회와 천국의 두 개념이 매우 밀접하게 관련됐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본문에서 보면 천국열쇠의 효력은 교회설립에 대한 공표로부터 비로소 그 진가가 발휘될 것임을 간파하게 됩니다(18-19절). 다시 말해 바야흐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더불어 드러난 ‘메시아의 비밀’로 인해 그때부터 천국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통하여 전파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이 그 나라의 이르는 열쇠를 소유하고 그 일을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즉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하나님에 대한 증거자로서,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에 대한 중계자(agent)로서의 역할을 이어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세상(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축복으로 이끄는 문을 열거나 닫는 지식의 열쇠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예수님의 사도들에게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눅11:52). 우리는 이런 사실의 구체적인 실례를 오순절 성령강림 후 베드로의 복음설교를 듣고 하루에 삼천 명이 제자로 더해진 사실(행2:41)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식으로 복음은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합니다(롬1:16). 그리고 이렇게 세상 가운데서 믿음으로 불러 낸 구원받은 무리들의 집합체를 일컬어 한 새로운 사람들의 집합으로서 교회라고 부릅니다(엡2:14-15, 행5:11). 이들이 다름 아닌 천국백성들인 것입니다. 이런 상호관계와 원리 안에서 교회와 천국(하나님 나라)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성과 연속성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 할 수만은 없는 불연속성 내지는 이질성 또한 발견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훨씬 크고 포괄적인 용어일 뿐 아니라 교회에 포함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교회는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가는 과정에 놓여 있기에(엡2:22) 그 자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대변하거나 현시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요소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양자는 비록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고 있다할지라도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라고 한다든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는 곧 교회다’라고 단정하기에는 더 깊은 숙고가 필요할 줄 압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서 고백하고 성령님께서 공급하시는 생명과 능력을 힙 입어 신생(新生)한 교회공동체는 하나님 나라를 그것의 궁극적인 종착지로 삼고 현재 진행형으로 달려가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교회는 구속사 진행 선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장 가까운 ‘근사치’(approximation)로서 존재하며 가장 신뢰할 만한 하나님 나라의 ‘지방자치기관’(communal)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친 백성들로 구성된 교회공동체 - 그것이 비록 부족과 결핍과 불완전함이 여전하다 할지라도 - 속에서 가장 확실하고 현저하게 그 천상적 통치와 권세를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로 인해 혹자는 교회를 일종의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 곧 믿음 안에서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로 구성된 교회의 만수(滿數)가 찰 때에 교회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귀속될 것입니다(롬11:25-26). 그 때에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로, 하나님 나라가 교회로 양자가 통일될 것입니다. 동일시 될 것입니다. 오늘날 지역교회의 성도들이 고난과 긴장과 여러 가지 영적 역경 속에서도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음은 바로 이런 미래적 소망이 우리 앞에 확실히 보장돼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일컬어 종말론적 공동체(an eschatological community)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그 까닭은 교회가 기독론적인 바탕 위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천상적 나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서신서 기자들 또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신약의 교회공동체의 정체성을 또 다른 관점에서 ‘하늘의 시민권자’(빌3:20)와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골1:13)들로 설명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런 양자 간의 불가피한 상호 의존적인 관계상 지상의 교회는 부단히 천상의 우주적 보편의 교회를 지향하는 것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으로 도래하게 될 하나님 나라에 귀속될 것입니다.

                            3.마치면서

                            이제 본 강론을 맺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로서 자체 속에 다양한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주제들을 망라하는 포괄적인 주제는 하나님 나라 사상입니다. 이는 성경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자증하는 통전(通全)적 주제이기도합니다. 특별히 창세기로부터 시작해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66권의 편집구도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중심사상이 이런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거해 줍니다.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 나라 사상을 주제로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를 총체적인 시각으로 바르게 해석하려고 할 때, 언약적 구속사란 관점은 성경의 본의를 밝히는 최선의 해석의 틀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성경이 자증하는 해석적 관점이며 구조적인 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해석상의 객관적 증거를 특별히 창1-3장에서 발견되는 창조언약(문화명령)-선악과 언약(아담언약)-여자의 후손언약(원시복음) 속에서 발견되는 신적 언약간의 상호 불가피한 의존적인 관계성과 연계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전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의 전모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원리 안에서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찾으시는 가운데 저들로 하여금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게 함으로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지상의 성도들의 삶의 정체성과 방향성이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마6:33)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구속의 원리는 당신의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셔서 창세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결정적인 동인(動因)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이 신적 언약의 총화요 제반 언약의 결국인 새 언약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상의 사실들을 고려할 때, 우리가 바른신앙/바른교회/바른목회를 지향하는 일과 관련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정당한 해석을 통해 성경의 본의에 바르게 접촉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 사상이란 주제 안에서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총제적인 계시의 안목으로 접근하는 데서 비로소 그 가능성과 실현성이 일차적으로 보장된다 하겠습니다. 바라기는 본 강론을 통해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What the Bible Says)를 하나님의 심정으로 밝히 해명하는 것을 통해 성경적 바른 신앙관/바른 교회관/바른 목회관의 재정립이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기회가 되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4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롬10:2-3).

                            출처: 주님의 뜰 - 행원소구/김유미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핏자국 선명한 그 길로만....            


                            어느 날, 자칭 '선한 목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이곳저곳에서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내게 나아오는 자는 좋은 꼴을 먹으리라!” 라고 하는 아주 멋들어진 구호를 내어 걸고 나팔을 불어대며 대대적인 선전들을 하고 있었지요.

                            그들은 화려한 의상을 입고 매일, 매달, 매년 목자들의 모임이라는 모임도 가졌고, 어떻게 하면 양떼들에게 더 좋은 꼴을 먹일 수 있는가?어디에 가면 잃어진 양떼들이 더 많이 흩어져 울고 다니는가? 또는 어떻게 하면 병든 양떼들을 보다 잘 치료해 줄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을 주제로 가르치기도 하고 각종 미디어를 통해서 떠벌리기를 무척이나 좋아했답니다.

                            “내게로 나아오는 자는 좋은 꼴을 먹으리라!” 너무나 멋진 그들의 슬로건을 보고 솔깃해진 몇몇 흩어진 양떼들이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선한 목자의 우리’ 라고 대문짝만큼 크게 써 붙인 우리 안으로 찾아들어 갔습니다. 캄캄한 밤중이 되었습니다. 누군가 살금살금 기어오더니 양 우리의 문을 덜컹!하고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목초 위에 배를 깔고 누워 지금 막 잠이 들어 있는 양떼 중에서 몇 마리를 콱! 움켜쥐고는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가버렸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옆에서 자고 있던 양돌이와 양순이가없어졌다고 우리 안의 양떼들이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그중에 힘깨나 쓴다는 양이 목자에게 가서 따져서 묻자고 했습니다. 양떼들의 말을 듣고 있던 자칭 선한 목자들은 "별 일이 아니니 조용히 하라.”고 두 눈을 부라렸을 뿐, 시원한 대답조차 해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 우리에 들어간 양떼들은 병이 들어도 고침을 받지 못했고, 상한 양들은 싸매임을 받기는 커녕,오히려 발길질을 당하고 강포를 당했지요. (겔34장 참조)

                            이렇게 해서 매일 밤 양떼들은 한 마리씩 두 마리씩 사라져 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이 염려를 하던 중에 자국의 양떼들을 지키시려고 ‘선한 목자’선발 대회를 여시기로 했습니다. 선한 목자의 자격이 주어진 자에게만 자국의 모든 양떼들을 맡기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격을 따는 조건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죽음의 계곡’까지 단신으로 내려갔다가 돌아와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선한 목자의 자격을 따 내는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니… 흥, 어림도 없는 소리야... 라고 말하면서, 자칭 선한 목자들은 그 누구도 이 컨테스트에 응시하는 자가 없었지요. 이것을 본 하나밖에 없는 그 나라의 왕자님이 자원을 하셨습니다. 자국의 양떼들을 자신이 지키겠다는 결심이셨지요. 이 말을 들은 자칭 선한 목자들은 왕자님을 증오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왕자님을 편안하게 죽음의 계곡까지 들어갔다가 나오시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떼를 지어 왕자님이 지나가시는 길목에 숨어 있다가 마침, 그곳을 지나가시는 왕자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는 채찍으로 때리며 발로 차기도 했고, 얼굴에 침을 뱉기도 했지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그들은 큰 나무를 세워놓고 그곳에 왕자님의 양발과 양손에 대못을 박고머리에는 가시관을 엮어서 푹 씌운 후, 날카로운 창으로 옆구리를 사정없이찔렀습니다.

                            그리곤…고통 당하는 왕자님의 발밑에 둘러서서 낄낄거리다가 결국,… 죽음의 계곡으로 질질 끌고 가서는 발로 툭! 차서 언덕 아래로 밀어 버렸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임금님이 너무 화가 나서 군사들을 풀어서 죽음의 계곡 아래 떨어진 채 쓰러져 있던 왕자님을 궁전으로 모시고 오라고 했습니다. 군사들이 쓰러진 왕자님을 안고 가는데… 왕자님이 가시는 길에는 왕자님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뚝뚝 떨어졌습니다.

                            그 후로 임금님의 궁전은 양떼들을 보호하는 우리를 크게 짓고 그곳에 들어오는 모든 양은 누구든지 보호받고 좋은 꼴을 마음대로 먹으면서 안전하게 살 수가 있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왕자님이 친히 목숨으로 바꾸신 ‘선한 목자’ 타이틀 아래로 찾아오는 모든 양떼들에게는 선한 목자 되신 왕자님이 친히 아픈 상처는 싸매어 주시고...병든 자는 고쳐 주시며...배고픈 자에게는 좋은 꼴로 먹이시며...돌보아 주신다고 하네요.

                            그 길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느냐구요? 그것은 염려 마세요. 왕자님이 가신 그 길에는 샛빨간 핏자국이 선명하답니다! 피가 점점이 배어 있는 그 길로만 찾아오세요. 결코,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답니다!

                            그때 그 자칭 선한 목자의 후예들이 지금도 그때보다 더 많이 더 열심히 "내게로 오는 자는 좋은 꼴로 먹이리라!!" 고 하면서 대대적인 홍보 활동에 열을 올리고 있다네요. .....사랑하는 형제. 자매 양떼들이여, 속지
                            맙시다! 우리는 오직 핏자국 선명한 그 길로만 갑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절 말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영성훈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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