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나무의 길을 막으신 하나님-

창세기 3장 22절~ 24절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22절에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과연 아담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었을까요?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이는 실로 비꼬는 말씀이 아닙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는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지도 않았음과 될 수도 없었음을 반어법으로 강하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선악과를 따먹었지만 그 결과는 죄를 범한 것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담의 죄를 더욱 드러내고자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이 말씀도 역시 비꼬는 말씀입니다.
죄인이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는다고 영생할 수 없음을 강조키 위함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담과 그 아내가 죄의 결과인 죽음에 대한 인식은 분명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영생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컸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추방하지 않으셨다면 아담은 죽지 않고 영생하려고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자 했을 것입니다.

죄지은 채로 에덴동산에 머물게 하는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해서 죽게 된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께로 눈을 들게 하심이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추방하고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게 하신 것은, 영생을 얻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인 구원자-여인의 후손을 바라보고 믿는 길 외는 다른 길이 없음을 알게 하시고자 함에 있습니다.

생명나무에로 가는 길을 철저히 차단하신 하나님의 본심을 헤아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붙들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정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인생들은 지금도 영생을 얻고자 길을 찾아 나섭니다. 구도자들의 행렬이 줄을 잇습니다. 인류 역사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구하였습니까. 그렇지만 한결같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미리 아시고 영생에 이르는 다른 길이 없음을 알게 하시고자 철저히 차단하셨건만 죄인들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로 눈을 들지 않고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아담과 그 아내에게 약속하신 그 은혜로운 약속의 말씀(창 3:15)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받지 않은 것은 죄들인의 탓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과 자비하심을 믿지 못하고 그 말씀을 저버린 자들은 모두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그 생명나무로 가는 길은 오직 여인의 후손 안에서만 회복되어 집니다. 아담은 여인의 후손인 메시야(구원자)가 오셔서 대신 피흘려주심으로써 죽음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계시로 알았습니다.

그것을 아담이 믿었기에 그 아들 아벨이 어린 양의 피를 흘리는 제사를 드릴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아담이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벨의 제사를 통해 이것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는 구원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구원에 이르는 길은 십자가의 복음밖에는 없습니다.

요즘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이 괴악한 누룩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하고 부패시키고자 합니다.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자도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구원받은 자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전파되지 않은 시대나 지역에서 혹 구원받은 자가 있다면 그 또한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은 자들일 것입니다.

모든 종교행위 선행 의로운 행실....
그 어떤 행위나 공로도 생명나무에의 길로 가게 할 수 없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행위구원을 강조하는 율법주의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성화를 강조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마치 우리의 성화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또 다른 율법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구원을 받지 못 했습니까. 그들의 의가 우리보다 못해가 아닙니다. 힘써 자기 의로 구원을 받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창세기 서두만 바르게 알았더라도 생명주시는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구했을 것입니다.

이 시대에도 복음 아닌 다른 복음이 택한 자까지도 미혹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길 외는 달리 생명얻를 길이 없음을 성경은 밝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계22;1-2

생명수(생명의 물-의역하자면 생명을 위한 물 곧, 생명 그 자체를 말합니다. 그 생명수 강이 길 가운데로 흐르고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습니다)는 하나님과 및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성령께서 수면 위에 운행하셨듯이 성령은 생명수 강물과 함께 하십니다. 성령은 말씀을 떠나서는 일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생명의 물도 단수요, 생명의 나무도 단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원문에는). 이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상징적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셨기에 피를 흘릴 수 있는, 피를 흘리신 어린 양으로서 제물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생명수 강이 하나님(구약)과 '어린 양'(신약)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는 이유는, 어린 양인 그 분자신이, 죄인들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서, 생명수 강과 그리고 길과 생명나무에 어린 양 자신을 투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을 선명한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평면적인 글이나 그림을 통해서 3차원적인 입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상징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가지고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기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값없이 생명수를(생명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계22:17)

오늘 본문에 나오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철저히 차단하신 이유를, 성경의 맨 마지막 부분인 계시록에서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도록 해 주시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처음과 나중이시요, 시작과 끝이시요,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역사의 주인이심을 나타내고자 함에 있습니다. 세속역사 속에서 구원역사를 이루어가시는 역사의 주인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란 말씀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신 그 약속의 완전한 성취를
계시록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시는 이유는, 오고 오는 세대가 기록한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을 따라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고 바라보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룹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 길을 차단하신 것은 죄있는 채로 영생하는 것을 막고자 함이 아닙니다. 죄를 가지고 영생한다는 말은 성경적으로 성립이 안 되는 말입니다. 영생은 오직 여인의 후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걸 강조코자 함에 있습니다.

아담에게 이미 주어진 그 약속만을 붙들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심정을 아담과 그 후손인 우리들이 헤아리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여인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값없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성호를 송축할지라~ 아멘!

글: 구자준 목사

'구자준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이찌 방언을 아시나요?-  (0) 2017.11.06
-일하시는 하나님-  (0) 2017.02.17
-평안을 빌라-  (0) 2017.02.07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0) 2017.02.06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2)-  (0) 2017.01.31

You Raise Me Up은 성가?

뢰블란과 쉐리 


You Raise Me Up은 성가?



김삼




You Raise Me Up(이하 YRMU)은 세상은 물론 교계에서도 폭넓게 불려온 노래의 하나다. 여기저기 교회에서 끈끈하게 계속 불리고 있다. 놀랍지 않게도, 많은 사람들이 본디 기독교 곡인 줄로 안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가락이나 가사나 풍부한 감정을 자아내는 노래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 이 곡을 곧 기독교 노래로 만들어 주진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YRMU는 일부 크리스천이 생각하듯 복음적이고 성경적인 그런 노래가 아니다. 원칙적으로 그런 노래일 수 없다. 이유는 작시자, 작곡자가 크리스천이 아니라 외려 모두 뉴에이저이기 때문. 여기서 말하는 크리스천이란 성경 말씀대로 거듭난 사람을 가리킨다.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이 지은 노래가 기독교 노래가 될 수 있는가? 그래선 안 된다. 이렇기에 현재까지 우리가 불러온 수많은 찬송가와 복음송, 경배찬양, 그밖에 많은 기독교 노래들도 정직하고 진솔하게 검증돼야 옳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You Raise..가 창작된 과정과 배경을 살펴 보기로 하자. 

아일런드 여성 바이올리니스트/가수 피눌라 쉐리와 둘이서 뉴에이지 두오 '비밀정원'을 구성해 활동해온 노르웨이 피아니스트/작곡가, 롤프 뢰블란(Rolf Løvland)이 써서 지난 2002년 처음 소개한 이 노래는, 본래는 '침묵의 이야기'라는 기악곡이었다. 침묵의 이야기? 뭔가 관상적(觀想的)인 냄새가 물씬 풍기지 않는가? 타이틀 자체가 뉴에이지적이라는 인상을 버리기 힘들다. 

그렇다면 '비밀정원'의 성격은 어떤 것일까?[각주:1] C. 오스턴 마일즈가 '저 장미꽃 위에 이슬'에서 "우리 서로 나눈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고 노래한, 예수님과 성도-단 둘의 친교 장소인 기도의 정원을 가리키는 것일까?

다음 링크(>)를 보면, '비밀정원'이나 YRMU가 모두 뉴에이지 음악으로 분류된 것을 볼 수 있다. 


위키피디어에 따르면 '침묵의 이야기'는 뢰블란이 아일런드 소설가 겸 가사 작가인 브렌던 그래엄(Brendan Graham) 첫 소설인 '제일 까만 고추'(the Blackest Pepper)를 읽고 감동을 받아 작곡했다. 

그랬던 차,  '비밀정원'은 아일런드의 대 기근 중 아름다운 여인 엘런 루아 오말리의 삶을 그린 그래엄의 서사시적 소설, '가장 하얀 꽃'과 '불의 원소'를 읽고 나서 그래엄에게 침묵의 이야기에다 가사를 붙여달라고 의뢰하기에 이르럿다. 그래엄의 이 작품들은 하나님의 아닌 자신의 힘으로 역경과 싸워 이겨 나간다는 인간 승리를 말하고 있다. 당연히 기독교소설이 아니다.  


뢰블란 자신이 작곡자 겸 작시자인데도 노르웨이어가 아닌 영어 가사를 바란 것은 켈트적 정서를 그린 데다 영문 오리지널이 좀 더 포퓰러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된다. 그래엄 자신 작곡가이기도 해서 둘의 정서와 기대는 잘 맞아떨어졌다. 



가락 


뢰블란 자신이 밝힌 대로, You Raise..의 가락은 본래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온 아일런드 민요, '런던데리'(Londonderry Air, 일명 '오 대니 보이'(O Danny Boy) 상당량을 딴 것이다[각주:2]. 뢰블란은 아일런드 가락의 편린을 엮어넣어 느린 가락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역사가 오랜 민요이기 때문에 그 유사성 내지 표절성(?)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아닌 게 아니라 수많은 명곡들이 기존 노래를 활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바로 이 점이 아일런드 유수 작가에게 접근한 이유의 하나는 아닐까? 


한 가지 내적으로 분명해 뵈는 점은 잉글런드와 웨일즈, 스코틀런드 등 브리튼 인접국가가 서로 나눠온 고대 켈트 족의 민속적 정서라는 공통점을 이 노래도 지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노래도 뉴에이지송에 더 가깝지, 원칙적으로 기독교 노래일 수 없다. 아무리 연주자들이 뭐라고 해석하더라도 말이다. 때로는 처량하게 느껴지는 고대 켈틱 관행들과 가락 등은 기독교보다는 뉴에이지에 다분히 더 근린적(近隣的)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각주:3].  


작곡가인 뢰블란이 애당초 기독교인이 아니므로, 기독교성을 지니려거나 드러내려고 이 곡을 쓴 것은 전혀 아니었다! 뢰블란 자신이 이 곡을 처음으로 녹음할 때 '비밀정원'이라는 자신의 '뉴에이지' 앙상블을 통해서 했다. 

그런데도 그의 수많은 노래 중 이 곡이 기독교 정서를 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둘의 다양한 앨범에 담긴 노래들을 들어보기 바란다. 

https://youtu.be/8A-EarF2OZg 

https://youtu.be/PaoPzDW2m2A (실연광경) 

https://youtu.be/XB97k312nDw 오리지널은 아니겠지만, 이 동영상에 곁들인 그림까지도 너무나 뉴에이지적이다! 응당 뉴에이지 곡인 줄 알기에 이런 그림을 담았을 터이다). 짚시 음악 또는 중국 민속음악 냄새가 나는 것도 있다. 


저기 과연 무슨 성곡이나 찬송가 또는 기독교음악이라고 할 것들이 있는지? 그냥 클래시컬하거나 세미 클래싴 같은 뉴에이지 곡들이다. 상당수는 영화 배경음악 같이 통속적인 감각도 지니고 있다. 



뢰블란이 이 노래에서 일부 본떴다고 밝힌 '대니 보이'는 기독교 노래인가? 아니다. 혹 그 노래를 갖고 누가 적당히 복음성가 비슷한 것을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그랬다고 해서 기독교 노래가 되는 게 아니다. 


따라서 YRMU 역시 전혀 기독교적 생각이나 감각 내지 정서, 또는 기독교적 배경으로 쓴 것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참고로, YRMU는 가장 먼저 뢰블란의 어머니 장례식에서 연주됐다. 뢰블란과 쉐리, 둘은 앨범에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헌정한 노래들도 담고 있다. 




가사 


더 큰 문제는 가사다. 그래엄의 이 시는 기독교적이라는 오해를 자주 낳곤 한다. 그러나 그래엄 역시 뉴에이저에 가까운 사람이지, 크리스천은 아니다. 그는 곡에 계속 반복되는 'You'의 정체성이 뭔지 말하지 않는다. "부르는 사람 마음대로 정의해라"가 답일 것이다. 엿장수 멋대로 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역시 뉴에이지의 특성이다. 



YRMU가 기독교 곡으로 둔갑한 데는 크리스천 앙상블 '셀라'의 영향도 있다. '셀라'는 대명사 "you"가 곧 성경의 하나님이라고 나름 정의한 나머지 이 곡을 기독교성가로 녹음했는데, 놀랍게도 곧장 크리스천 뮤짘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했다. 그렇다고 이것이 '성령의 역사'이겠는가? 나는 그렇다고 전혀 생각지 않는다. 이 점에서 크리스천들은 정말 조심해야 한다. 분별을 잘 해야 한다. 


동일한 노래가 뉴에이지 앙상블로도 녹음되고, 크리스천 앙상블로도 녹음되어 각각 빜 히트를 친, 이 현상을 뭐라고 해야 하는가? 그밖에도 수 백 명의 서로 다른 아티스트들이 이 노래를 녹음할 정도로 대중성과 인기도가 높다. 물론 그들 다수가 무슨 무슨 '차트'의 상위를 장식했다. 하지만 이 아티스트들 대다수는 거듭난 크리스천이 아니다.  

크리스천이 볼 때, 이런 것이 바람직한 현상인가?



크리스천 비평가인 S. C. 무니는 다음과 같이 비평한다[각주:4].

 

  "이 노래의 그 어디에서도 'you'의 정체성은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You'에 관한 언질들은 그야말로 그 누구든, 자신이 바라는 그 무엇으로든 만들어내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하리망당하다. 사실 많이들 그렇게 해 왔다..바로 이 노래의 존재는 '뉴에이지'(송)로서 출발했고 그래서 그들(뉴에이지) 서클을 매료시키는 힘을 확산해 왔다.


예컨대 (어느 뉴에이저의) 다음 소감을 살펴보자.


초점으로 이끌어주는 안내자의 얼러주는 목소리, 그 음악의 부드러움과 가사의 미묘한 의미에 귀기울이자, 나의 몸은 내가 오래 경험하지 못했던 관조와 희열의 세계로 이끌렸다. 그 경험의 첫 머리에서 정말 노래에서 비친 그대로 나는 실제로 '다운'되고, 폭풍이 이는 바다 위를 걸으면서 내 혼은 너무나 지쳤다. 설명 못할 정체상태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는 듯 느껴졌다. 내가 내 몸의 침묵 속으로 들어가자, 풍부한 깨달음이 내게 다가왔다. 그 진리를 내 속에 '잠시 앉아 머물게' 놓아두자, 굉장한 안도와 격려의 감정을 내게 안겨주었다. 음악 중심의 이 집중이 완성되자 나는 두뇌의 엄청난 뒤범벅을 겪지 않고 내적인 평화와 만족의 감정을 느꼈다."



무니가 인용한 내용은 한 마디로 YRMU에 대한 뉴에이지성 연구 감상문이다. 사회복지사들의 개인정체성과 전문성 전환을 증진하기 위해 바이오영성 음악을 에너지론에 집중시켜 활용하기, 즉 내성적 감정이입의 파워를 연구한 내용이며, YRMU는 그 대상곡의 하나이다. 


여기 나타나는 '진리' 어쩌고 하는 말에 속으면 안 된다. 뉴에이지가 말하는 진리가 결코 성경 진리와 같을 수 없다! 


독자도 이내 느끼겠지만, 이 사람이 겪은 것은 뉴에이지적 감흥 현상이지 성령의 감동이 아니다. 만약 YRMU가 진정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노래라면, 뉴에이저가 이 노래를 태연히 부르거나 듣긴커녕 겁을 먹고 달아나거나 충격을 받든지, 거듭나기까지 변화되든지 해야 한다.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저 감상자는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서 저런 '감동'을 먹을 수가 없다. 신자가 아닌 세속인이고 뉴에이저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작가 자신들은 이 노래가 기독교계에서 불려져도 괜찮다는 입장이다. 또 뉴에이저인데도 일부 크리스천 연주가들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런 점들이 자못 트리키하다.



가사 분석


다음은 필자가 음율에 맞춰 한글로 옮겨 본 것이다. Raise는 올리다, 들어올리다, 일으켜 세우다, 높이다, 기르다 등 다양한 뜻이 있다. 필자는 원문 단어의 음절(syllable)에다 한글 글자 수를 맞춰 '높이다'로 옮긴다. 


 

  When I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

  오 나의 혼 낙심하고 지칠 때

  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

  괴로움 속에 내 맘 눌릴 때

  Then, I am still and wait here in the silence,

  나 여기 침묵 속에 기다리네

  Until you come and sit awhile with me.

  내 곁에 님이 와 앉기까지


  There is no life - no life without its hunger; 

  그 누구나 굶주릴 때가 있네

  Each restless heart beats so imperfectly; 

  불안 속에 가슴 뛸 때 있네

  But when you come and I am filled with wonder, 

  님이 오고 놀라움 그득할 때

  Sometimes, I think I glimpse eternity.

  나 때때로 영원을 엿보네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님은 날 높여 산에 서게 하며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날 높여 폭풍 속 걷게 하네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님의 어깨 위에서 난 강해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날 높여 더 큰 나 되게 하네


  -필자 사역



어떤가? 이만하면 딱 크리스천 노래 같지 않은가? 그러나 실은 그렇지가 않다. 여기서 님/You는 그 어떤 누구일 수도 있다는 게 다름 아닌 작가들의 입장이다. 그 누구일 수도 있고, 누구라도 괜찮다는 거다. 이게 바로 뉴에이지의 특성임을 우린 잊지 말아야 한다! "아무나 괜찮다"는 게 뉴에이지 세계의 '와일드카드(*.*)'라는 말이다. 


흥미롭게도 이건 비밀집단에서도 거의 마찬가지다. 비밀집단에서는 가입자들에게 누구라도 지존자(Supreme Being)를 믿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문제는 그 지존자가 도대체 누구냐는 건데, "아무 종교의 신이라도 좋다"는 게 비집의 입장이다. 딱히 누구랄 게 없다는 식이다. 



위 가사를 좀 더 면밀히 살펴보도록 하자.


  When I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

  오 나의 혼 낙심하여 지칠 때

  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

  괴로움 속에 내 맘 눌릴 때

  Then, I am still and wait here in the silence,

  나 여기 침묵 속에 기다리네

  Until you come and sit awhile with me.

  내 곁에 님이 와 앉기까지


낙심하고 지칠 때, 괴로움으로 짓눌릴 때, 우린 누구에게 나아가는가?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여, 다 내게 나아오라, 내가 그대들을 쉬게 해 주리"라고 하신다. 그런데 같은 상황에서, 뉴에이저/관상가 브렌던 그래엄은 뭐라고 하는가? "나 여기 침묵 속에 기다릴 테니, 님이 와서 내 곁에 잠깐만이라도 앉아 주오." 하지 않는가? 


방향도, 과정도 서로 다르다. 주님은 그 분께 나아가면 쉬게 해 주리라는 약속을 해 준다. 이 약속과 쉼은 항구적이다. 주님의 참 평화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반면 뉴에이저는 예수님께 나아가겠다는 게 아니라 "침묵 속에"(!) '님'을 기다린단다. 그 누군지 알지도 못할 님을 말이다.  

이 침묵이 뭔가? 이런 세속적/종교적 명상에 있어, 침묵이란 신비적 체험의 딱지 같은 것이다. 중세 관상가들도 맛보던 것이다. 

이를 테면 오늘날 기독교계까지 침투한 관상(contemplation)이며, 뉴에이지에서는 초월명상(TM)이나 요가, 미로명상(labyrinth)같은 체험이다. 침묵 속에 기다리노라면 '님'이 온다는 것이다. 그 '님'이 뭘까..누굴까? 해석에 따라 다를 터이다. 


님이 내 곁에 와 앉기까지..? 일종의 '경지'이고 신비체험이다. 뉴에이지 전문가들은 명상 수련자들의 경우 약 20~30분만에 그런 경지에 도달한다고 한다. 그런데..누군가 내 곁에 앉은 느낌? 섬뜩해진다. 



  다음을 보자.


  There is no life - no life without its hunger; 

  그 누구나 굶주릴 때가 있네

  Each restless heart beats so imperfectly; 

  불안 속에 가슴 뛸 때 있네


위에서 굶주림이 뭘까?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파 우는 어린이들이 있는가 하면, 금식도 있고 단식이란 것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도'를 닦기 위해 일부러 굶기도 한다. 심지어 오늘날 비록 상상 속에서라도 헝어 게임, 헝어 서바이벌 게임 따위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것과 함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복되어 배부름과 해갈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해 준다. 또한 기독교가 말하는 금식은 묶인 것을 풀어 주는 등 선을 행하기 위해 필요하며, 바로 크리스토님이 그 본을 보이셨다. 


그런데..세상종교에는 단식도 있고, 명상 후 시장끼 같은 것이 찾아온단다( 예: > ). 어떤 뉴에이지 명상가들은 특정 '세션'의 명상 후 꼭 배고픔을 느낀다고 한다. 명상이 '배고픔 호르몬'인 그렐린(ghrelin)을 자극하는 모양이다. 일부 명상가들은 심한 주림을 느낄 정도란다. 이 때 먹는 것 대신 마리화나를 피우는 사람들도 있단다. 

말하자면 세상이 말하는 배고픔의 의미성과 해결은 성경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Each restless heart beats so imperfectly; 


직역하면, "불안한 심장마다 너무나 불완전하게 박동하네" 정도다. 심장은 단순한 심장 이상의 것이다. 죄된 인간의 마음은 다 이렇다. 성경은 애당초 인류의 죄로 인해 질병과 저주도 왔다고 설명해 준다. 다른 대다수의 병들처럼 심장병도 궁극적으로 죄로 인해 왔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But when you come and I am filled with wonder, 

  님이 오고 놀라움 그득할 때 

  Sometimes, I think I glimpse eternity.   

  나 때때로 영원을 엿보네


그 누군지도 모를 님이 찾아와 내 맘이 경이로움에 찰 때, 때때로 영원을 엿보는 것처럼 생각된단다. 

이것에 대해 한 비평가(정말 이름을 몰라서이다)는 이렇게 말한다: 

"그럴 때 당신은 '신적인' 황홀경에 들어가 시공간도 초월하는(=감지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이런 경지는 약물 사용으로도 가능해진다."

'비틀즈' 등 많은 명사들의 약물 사용 체험기를 보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황홀경과 시공간을 초월해 둥 떠 있는 듯한 행복감이 느껴진단다. 그래서 그 상태가 영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바로 그 맛 때문에 철모르는 인간들이 문제의 약물을 사용하곤 한다. 



필자가 너무 단면적으로 표현했다고 보는가? 그렇다면 주님의 도움 밖에서, 그 외에 어떤 고상함이 있다고 생각되나? 기독교 밖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공통된 모종의 저런 '경지'가 있다면, 그건 악령이 갖다주는 것일 터이다. 신이나 천사를 가장한 '친숙령'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신화적인 어떤 존재에게서? 그것도 아니라면 단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저런 경지를 느낄 수 있을까? 그렇다면 굉장한 상상이고 공상이다. 그렇지 않은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고 막연한 신적 존재라면, 일시적인 단물효과, 대안효과, 위약적(僞藥的=placebo적) 위로는 갖다줄지언정 영구적이고 진정한 위안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시적이나마 그런 '위로'를 맛보고 나면 더욱 더 명상에 매진하려 들 것이다. 



그런데도 지은이는 다음과 같이 절창한다: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님은 날 높여 산에 서게 하며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날 높여 폭풍 속 걷게 하네



나를 일으키고 높여 산들 위에 서게 하고, 폭풍 이는 바다 위를 걷게 하고.. 마치 성경 속 사건들을 연상시키는 듯 한가? 님의 어깨 위에 있을 때 강해진다고? 목동의 어깨 위에 걸친 양을 상상케 된다고? 그래서 그 양이 강해진다고? 내가 나 될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게 되도록 일으켜 준다고? 이건 성경 속의 이야기보다 신화를 연상시킨다. 그렇지 않은가? 

 

물론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필요에 따라 아브라함이나 모쉐 같은 사람들을 산 위에 세우시기도 했다. 주님 자신도 높은 산에 오르신 바 있다. 더욱이 하나님은 나의 머리를 높여주시는 분이다(시 3'3)! 선지자 에제키엘 같은 사람을 산들 정도가 아니라 공중에 높이 들어올려 낮은 데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영안으로 보여주시기도 했다.[각주:5] 그러나 그건 기록 계시를 위해서였다. 기록계시가 이미 오래 전 마감된 상황에서 그런 체험들이 과연 수시로 필요할지?  


오히려 저 가사는 대신에 신화 속 신들이 마치 체스를 두듯 거대한 손가락으로 작은 사람을 집어 올려 산들 위에 놓는 상상이 가지 않는가? 또는 '걸리버 여행기' 속에서 대인국 사람이 러뮤얼 걸리버를, 또는 걸리버가 소인국 사람을 집어 올리기나 하듯. 참, 사족이지만, '걸리버 여행기'를 쓴 조너턴 스위프트는 성공회 사제이자 프리메이슨이었음을 아는가? 


오늘날 세상이 얼마나 신화를 강조하는가! 새삼 놀라지 않는가? 문학 작품도, 영화도 신화적 소재를 다루지 않는가? 초월적, 초능력적 존재를 다룬 볼 거리와 전자게임이 얼마나 많은가. 이게 다 뉴에이지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겠는가. 세상이 온통 뉴에이지 천지인 것이 사실이잖은가.

 

그게 아니고 정신적/심리적 세계에서 그러하다고? 산 위에 오르고 싶으면, '사운드 오브 뮤짘' 속의 수녀원장이 '산마다 오르라'고 노래했듯 그냥 애써 오르면 되지 않겠는가? 왜 '산들' 위에 오를 필요가 있는가? 남보다 더 높아지려고? 그래서 자아성취감을 맛보려고? 

여기서 산이란 것은 뉴에이저들이 추구하는 hight state 또는 무아경 같은 최고의 몰아 경지를 암시하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뉴에이저들 상당수는 약물 사용으로 그것을 성취하기도 한다.   



'님'이 '나'를 폭풍 이는 바다 위로 걷게 한다고? 페트로(베드로)도 물론 주님의 명령과 믿음으로 잠시 물 위를 걷기도 했지만, 이내 실패해 주님이 건져주셨다.[각주:6] 그러나 폭풍 이는 바다 위를 걸으라 명하셨거나 걷게 하시진 않았다. 


왜 '님'이 '나'를 들어올려 하필 위험하고 거친 폭풍 이는 바다 위를 걷게 하는가?! 항해 도중 폭풍을 만나 파선해서 헤엄치는 대신에 바다 위로 걷게 하는 건가? 그렇다면 그 님은 누군가? 하나님은 그러신 예도 없고, 그러실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폭풍의 위험을 알면 피하면 되는 것이고, 피치 못할 폭풍을 만났다면 구조를 요청하거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도할 터이다. 


그게 아니라 그냥 시적인 표현이라고? 시 세계나 정신 세계 속에서 폭풍 이는 바다 위를 걷는 기분은 어떨까? 남이 못하는 것을 하니 으쓱거림과 교만이 아닐까? '님'에 대한 '폭풍' 경탄이 일까? 이래서 더더구나 '님'은 신비주의 속의 신비한 도움 또는 신화적 존재 같이 느껴진다. 


상징주의 또는 심리적 세계에서 폭풍은 감정과 생각을 가리킨다고 한다. 풀기 어려운, 풀지 못하는 문제나 갈등, 또는 역경과 시련을 암시하기도 한단다. 의사전달 상의 어려움과 당혹감/곤혹 따위를 뜻하기도 한단다. 그래서 폭풍 속을 뚫고 바다 위를 걸어 전진한다는 것은 모종의 통쾌한 해결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감정이나 흥분의 포화 상태, 또는 그런 감정과 흥분의 강하고 급박한 표출을 비유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그래서 요새 한국사회 신유행어로, 뭔가 굉장한 속도나 수위로 불거지는 일 앞에 '폭풍'이라는 낱말을 무슨 접두어처럼 붙여쓰기도 한다. '폭풍수면'이라는 합성 단어가 그 한 예이다.  



성경에도 폭풍 얘기가 잦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겁 주는 갈릴리 호수의 폭풍을 말씀 한 마디로 잠재우셨다. 한때나마 어리석었던 의인 요브(욥)는 폭풍 속에 나타나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듣자 비로소 깨달아 변화됐다[각주:7]. 그런가 하면 아하브와 예제벨의 박해로 쫓겨 다니며 두려움과 낙심 가운데 지내던 엘리야가 만난 하나님은 폭풍이 아닌 세미한 바람 속에서 그를 불러 주셨다[각주:8]


그런데 이 노래의 주인공은 폭풍 이는 바다 위를 님이 걷게 해 주신다고 노래한다. 거센 폭풍이 이는 바다 위를 거뜬히 걸어간다는 것은 상황을 이기거나 초극한 상태를 가리킨다. 문제를 해결했거나 큰 두려움을 극복한 상태다. 


이건 성경과는 다른 양태다. 성경은 폭풍 같은 역경을 믿음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거하게 하신다. 그러나 구태여 폭풍이 일고 있는 바다 위를 걸을 필요는 없다! 왜 폼 잡고 거길 걷는가?  

그래서 이 부분 역시 뉴에이지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님의 어깨 위에서 난 강해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날 높여 더 큰 나 되게 하네



성경에 이런 표현은 없다. 다만 주님이 말씀하신 바 양 100 마리를 가진 목자의 비유(루카복음서=눅 15'5)에서, 그 목자가 한 마리 잃은 양을 기어이 찾아 즐겁게 어깨에 메고 온다는 대목은 있다. 목자의 어깨 위에 놓여도 그 양은 여전히 약하고 여린 양이다. 어깨 위에 올려진 순간 강한 양이 됐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지은이는 님의 어깨 위에 있을 때 강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여기 님은 연인 같은 대상으로는 그다지 걸맞지가 않다. 


"더 큰 나 되게"한다는 부분에 대해, 위에서 언급한 비평가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작품 속의 '자라투스트라' 같은 초인 또는 (앨리스 A. 베일리, 피에르 테이야르 드 샤르댕 등이 강조한) 초(超)진화적 고등인간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고 한다. 

명백히 이것은 성경이 말한 바 거듭나거나 성화된 인간은 아니다. 대신 드높은 의식 상태의 달성 내지 소위 '득도의 경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상을 볼 때, 노래 YRMU는 분명 성경적인 노래가 아니며, 뉴에이지에 훨씬 더 가깝다. 



참조: 가사가 비슷한 딴 곡


이것을 계기로 뢰블란과 그래엄은 '비밀정원'을 위한 여러 노래를 합작했다. 그중 The Things You Are to Me란 노래에서 반복되는 'You' 역시 막연한 대상이어서 가사 분위기가 YRMU와 흡사하다. 

다만 뢰블란의 가락이 YRMU와 달리 우수 또는 애수에 차 있는데, 실은 후기 낭만기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의 작품인 파반(Pavane, Op. 50)[각주:9]의 가락을 상당량 딴 듯 한 느낌이다. 아마도 그래서 우선적으로 프랑스어로 옮겨져 불린 게 아닌가 싶다. 


참고로, The Things You Are to Me를 번역해 본다.[각주:10] 이유가 있어서다.  

원문 가사는 다음을 참조하라: >

 



  나를 위한 님의 것들



  나의 시간이 시작될 때부터 

  모래 알갱이마다 

  내 손에 쥔다 해도


  여태도 결코 셀 수 없었으리 

  날 위한 님의 

  모든 것들의 양을 잴 수 없네

  내가 하늘을 그려 

  그림을 매달아 말린대도 

  그 하늘이 곧 

  날 위한 님의 모든 것들의 

  장려한 디자인과 

  하나의 영원한 사인이 되길


  후렴

  님은 여름바람에 얹혀오는 태양

  가을이 가져오는 저무는 해

  온갖 것 속에 보이는 기적과 신비

  그것이 곧 나를 위한 님의 것


  때로는 밤에 깨어나 

  갑자기 두려워할 때

  님은 나의 가장 흐릿한 환상

  그러나 님이 손을 뻗쳐올 때

  나는 다시 보네

  날 위한 님의 모든 것을


  -필자 사역



어떤가? 위 가사의 'You' 또한 언뜻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가락을 듣고 있노라면, 그런 신앙적 감흥/감정과 이 가락은 그다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성가 같지가 않다는 말이다.  


가락의 분위기만 따진다면, 이 노래는 성가이기보다 오히려 미국 노래, 'All the Things You Are'를 연상시킨다. 제롬 컨이 작곡하고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가 작시한 이 곡(ATYA)은 제목도 거의 똑 같지만(!), 주 가락(코러스 부분)이 하향적 동형반복으로 돼 있어, 뢰블란(포레)의 것과 유사하다. 나는 작곡가이기도 한 그래엄이 이 노래를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공통된 성격의 대상인 'You'와 함께 서로 가사 분위기가 비슷한데도, YRMU은 기분이 '엎'되는 '오 대니 보이'와 비슷한 가락이어서 성가 같고 이 곡은 가락 때문에 성가 같지 않다는 생각은 뉴에이지 노래를 모르는 데서 온 착각 탓으로 보인다. 



가사를 보면 웬지 창조주를 노래한 성가 같기도 한데, 곡은 아니라는 것이다.[각주:11] 따라서 그래엄은 처음부터 성가를 쓸 생각으로 이 가사를 쓴 게 아니라는 말이다. 이해가 가는가?

그렇다면 이 노래(The Things)의 'You'는 누군가? 하나님이든 신이든 그 누구든-아무라도 상관 없다는 게 그래엄의 입장일 것이다. 

그렇다면 YRMU의 'You'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그래엄은 거듭난 신자?


뢰블란은 뉴에이저이지 신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래엄에 대해 아직도 긴가민가 헷갈리는 사람들을 위해 다음 스토리를 소개한다. 그래엄이 저 노래 You Raise를 갖고 2015년 11월 26일 이벤트를 가졌는데, 로마 천주교의 도미니크 수사회에 속한 뉴브리지 대학의 채플('성 유스타스 성당')에서 그 대학 합창단과 앙상블도 초청하여 가진 행사로, 아일런드 암협회와 성 브리지드 호스피스를 돕기 위한 자선 목적도 있었다. 


  

그래엄은 구교와의 교류에도 아무 부담을 갖지 않는 사람이다. 즉 거듭난 크리스천이 아니라는 뜻이다. 


출처: 진리와사랑/김삼 목사

당시 교회들의 영적 상황 

종교개혁 이전부터 교회의 영적 상태는 개탄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 교황의 독재가 폐지되고 각자 자기의 생각대로 행하는 자유스러운 분위기로 인해 교회는 더욱 침체하게 되었다. 1525년 농민전쟁이후 교회는 죄를 자백하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았다. 헌금도 하지 않았고 성찬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태도와 권징이 사라져버렸다. 교회는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성직자들의 교육 수준과 자질은 매우 낮은 편이었다. 그들은 일정한 수입도 없고 영적으로 무지하고 무관심했으며, 일부 성직자들은 술집을 운영하면서 수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목회자들은 기독교 교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루터의 복음주의 개혁이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다. 루터는 무지한 성직자들로 인해 교인들이 겪을 고통을 알게 되었다. 
 
일반 평신도들의 신앙 역시 형편없었다. 그들은 과거에는 교황을 업신여겼으나 지금은 성직자들을 업신여기며 존경하지 않았다. 이처럼 목회자들이나 평신도들의 영적인 비참함과 무지로 인해 루터의 마음은 매우 아팠다. 이러한 사실에 충격을 받은 루터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목회자들에게 가르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루터는 교회의 주된 임무는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목회자들의 교육과 그들의 무지와 불신앙으로 인한 폐습들을 치유하고 또한 평신도들이 체계적으로 공부하도록 하기 위해 집필에 착수하였다. 
 
루터가 집필한 대교리문답과 소교리문답
 
▲ 루터의 소교리문답 ©뉴스파워 김현배


결국 루터는 1529년 4월과 5월에 독일어로 된 두 권의 교리 문답을 완성하여 출판했다. 교육의 주춧돌이 될 교리문답서는 ‘대교리문답(Greater Catechism)’과 ‘소교리문답(Lesser Catechism)’이다. 이 두 권의 책은 모든 교리 중의 교리인 십계명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인 사도신경과 기도 중의 기도인 주기도문과 지극히 숭고한 의식들인 복된 성례 등 4가지의 주요 내용이 들어있다. 
 
루터의 교리문답은 기독교 신앙의 도리를 가장 정확하고 직설적이고 간추려서 진술하고 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얻으려면 알아야 하는 모든 교리가 집약되어 있다. 목회자와 교사들은 그 뜻을 상세히 풀어 설명할 수 있도록 돼 있으며, 성도들이 십계명과 사도신경, 주기도문을 외우게 돼 있다. 자세하게 분석한 모든 내용들은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교리 문답’은 성인들을 위한 책으로서 그들을 가르칠 교사나 목회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목회자들이 교리 문답 설교를 하는데 안내 역할을 해 주고 있다. 
 
그리고 ‘소교리문답’은 보다 단순하고 어린이들에게 접근하기 쉬운 언어로 쓰여 졌으며 전반적인 단순한 표현 기법으로 널리 사용되고 이해될 수 있게 만들어졌다. 또한 어린이들이 설교를 잘 알아듣지 못하여 배우는 것이 많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천국의 비밀들을 어린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말로 쉽게 잘 풀어내 놓은 책이다. 암기하기에도 쉬운 교리문답서이다. 
 
루터는 교리 교육의 책임을 교회가 아닌 부모에게 지게 했다. 소교리 문답은 아침, 저녁, 그리고 식탁의 기도와 가정예배를 인도하기 위한 책으로서 온 가족이 날마다 그 내용을 배우도록 했다. 또한 신앙생활 하는 신자들이 구체적인 삶을 생활 속에 적용하도록 했으며, 나중에 암기할 수 있도록 꼭 요구되는 성경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루터는 자신이 어렸을 때 교황의 교회에 다니면서 십계명이나 주기도문에 관해서 배워본 적이 없었으며, 또한 교황주의자들은 어린이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그러한 수고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들이 무지한 상태로 방치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소교리문답은 어린이들을 교육시키고 예배에 쓰기 위한 매우 소중한 책으로서 교회에서도 사용하도록 의도했다. 
 
루터교 신앙고백을 받아들이는 교회들 마다 교리문답반을 만들었으며, 주일학교 어린들에게 주일 아침 마다 교리문답을 가르쳤다. 또한 문답식 구성은 기계적인 암기 교육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여 어린이들이 날마다 암송하도록 했다. 작지만 위대한 교리문답은 장년에게는 단단한 음식이요 아기들에게는 젖이다. 이 책의 내용 하나 하나를 하나님 앞에 아뢰면 곧 기도가 된다. 
 
대. 소요리문답의 중요성 
 
1529년에 작성한 두 교리문답은 매우 중요하며, 루터가 남긴 걸작 중 하나이다. 특히 루터는 자신의 모든 책이 다 불타 없어진다 해도 ‘의지의 속박’(1525년)이란 책과 ‘소교리문답’(1529년) 책만 남아 있다면 괜찮다고 할 정도로 어린이를 위한 소교리문답을 중요시 여겼다. 
 
루터는 그의 저서 “탁상담화”에서 요리문답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교리문답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 안에는 기독교 교회의 유서 깊고 순결하고 신적인 교리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교리문답에 위배되는 것은 겉으로 아무리 위대하게 보일지라도 거짓 교훈이므로 항상 주의하고 배척해야 한다. 이 책은 가장 온전하고 훌륭한 교리이므로 설교를 통해 지속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모든 공적 설교는 교리문답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이것을 날마다 설교하고 날마다 낭독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시교회에서 목회할 때 매일 설교했다. 특히 그는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교리문답의 설교를 했는데, 그의 대.소교리문답이 설교의 기초가 되었다. 루터는 요리문답 공부를 통해서 개혁의 추종자들이 복음의 진리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소유하도록 독려하였다. 그는 어른과 아이들 모두 교리 문답서의 내용을 암기하도록 시켰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는 식사를 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교리문답서는 기독교 신앙 입문의 기초과정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복음주의 교리의 주춧돌이 되었다. 또한 종교개혁 사상을 배울 수 있게 해주었고, 교회의 표준으로 남아 교회를 다스리는 준칙이 되고 있다. 가정과 교회들과 그 지역의 공립학교들에서 널리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루터파 기관들에게서 널리 채택되어 사용되었다. 
 
루터는 탁상담화에서 “교부들의 저서들을 다 모아 놓고 정리한다 해도 오늘날 우리가 이 얇은 교리문답을 통해 배우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교훈을 얻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두 교리문답은 오늘날까지 모든 루터파 교회의 기본교리가 되고 있으며, 독일어 번역 성경 다음으로 유익하고 큰 영향을 미쳤다. 
 
1529년 루터가 대.소교리문답을 출판한 이후에 그 이후에 수 백 개의 교리문답이 쏟아져 나왔다. 칼빈의 어린이용 제네바 교리문답(1542),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1563),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1647) 등 개혁파의 교리문답과 여러 신앙고백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루터의 교리문답이 오늘날 교회에 주는 교훈
 
종교개혁 시대는 교리문답의 황금기이다. 성경적 교리는 종교개혁의 심장이 되었다. 교회로 하여금 다시 교리들을 만들어 완벽하게 명확한 방식으로 진술하게 했다. 종교개혁자들의 특징은 교리문답 교육을 가장 중요시했으며 교리문답은 종교개혁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17세기 청교도들과 언약도 들 역시 교리 교육을 그토록 강조했다. 청교도 리처드 백스터는 교리문답 교육을 통해 회심케 하고 신앙이 더욱 더 성숙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특히 설교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 회중들이 교리문답 교육을 통해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교리를 공부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면 위험하다. 성경의 교리는 연구 주제가 아니다. 교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과거에 알았던 것 보다 더 온전하게 알게 해 준다”고 말한다. 또한 청교도 리처드 그린햄(Richard Greenham)은 “교리문답이 교육이 개혁주의 교회를 세우고 로마가톨릭교회를 심각하게 도전하고 무너뜨렸다”고 주장했다. 
 
교리는 참 교회와 이단을 구별해 준다. 교리문답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 실천, 사랑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며, 그 신앙고백의 믿음이 그리스도인들의 실제 삶으로 들어오게 하는 도구이다. 기독교는 배워야 하며 따라서 체계적인 가르침이 필요하다. 특별히 교회는 성도들이 신앙을 고백하고 믿도록 하기 위해 교리를 잘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목회자들은 교리문답에 많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성도들 역시 시시하게 여긴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말한다. 설교자나 성도들 모두 좀 더 깊고 수준 높은 어떤 새로운 것을 찾는다. 이것은 오해요 착각이다. 정말 깊고 수준 높은 것은 교리문답 뿐이다. 어둠의 악한 영들은 교리문답의 빛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 속으면 안 된다. 오늘날 어린이들과 젊은 청년들과 장년들에게 체계적인 문답식 교리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 
 
유럽교회사에 나타난 부흥을 연구해 보면 부흥 시기 마다 항상 성경적인 교리가 있었다. 설교자들은 성경의 핵심적인 주요 교리들을 설교하고 가르쳤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원죄, 회개, 칭의, 중생,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피, 하나님의 진노, 구원의 은혜, 대속의 교리 등을 선포함으로서 부흥의 불을 지피게 되었다. 예를 들면 18세기 영국의 조지휫필드가 중생을 설교할 때 부흥이 일어났다. 설교를 들은 청중들의 뺨에는 회개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처럼 성경적인 바른 교리 설교위에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부어졌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성경적인 교리를 붙잡을 때 다시 부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김현배 목사는 현재 베를린 비전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총신대학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영국 런던신학교와 웨일스 복음주의 신학대학교에서 청교도와 부흥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는 총회세계선교회(GMS) 파송 독일 선교사이며, 유럽성시화운동본부 상임회장으로 사역하고 있다. 저서로는 “영국 부흥의 주역들”(CLC)이 있다. 


ⓒ 크리스찬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창 44) 아버지의 슬픔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고 열 한 형제는 도로 요셉의 앞에 끌려옵니다. 요셉은 그렇게 형제들을 끌어다 놓고 베냐민을 놔두고 다른 형제들만 가나안으로 올라가라고 요구합니다. 그토록 베냐민을 보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들이 베냐민을 함께 데리고 돌아가지 못 한다면 아버지 야곱이 어떻게 될까요? 유다가 요셉에게 다가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합니다. 아버지 야곱의 애달픈 아들 사랑 이야기를 말입니다. “우리에게 아비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 노년에 얻은 아들 소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 어미의 끼친 것은 그 뿐이므로 그 아비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말하자면 그 형이 없어진 다음 베냐민이 아버지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유다는 요셉에게 그 간의 이야기를 합니다.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우리가 아비에게 돌아갈 때 아이가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면 아비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우리가 아비를 죽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율법은 한 아내만을 인정합니다. 특히 그 아내의 형제를 취하는 것을 금합니다. (레18:18) 너는 아내가 생존할 동안에 그 형제를 취하여 하체를 범하여 그로 투기케 하지 말지니라. 그런데 레아와 라헬은 형제였습니다. 그렇다면, 좀 잔인한 이야기 같습니다만, 두 사람 중 누가 야곱의 진정한 아내였을까요? 그렇습니다. 야곱은 오직 라헬을 아내로 사랑하였습니다. 라헬을 연애하여 외삼촌 라반에게 봉사하면서 7년을 수일같이 여겼습니다. 그러나 외삼촌 라반이 첫날밤에 야곱에게 들여보낸 것은 레아였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결국 형제인 두 아내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두 아내의 투기와 아들낳기 경쟁으로 인하여 그들의 몸종인 빌하와 실바까지 모두 네 명의 아내를 두게 됩니다.

그러나 야곱은 오직 라헬만을 사랑하고 라헬만을 아내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레아는 총이 없으므로(사랑 받지 못 하므로) 이를 보시고 하나님은 레아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얻으려고 아들을 많이 낳습니다. 무려 여섯 명이나 낳습니다. 그리고 라헬은 뒤늦게 요셉을 낳았고, 브엘세바 아버지 이삭의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베들레헴 길가에서 베냐민을 낳고 죽습니다. 슬픈 여인입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아내는 오직 라헬이었습니다. 라헬이 낳은 아들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힙니다. ‘이 아이가 진정한 내 아들이다, 내 장자다, 내 상속자다.’라는 무언의 선포나 같습니다. 그 일로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또 요셉의 꿈 이야기를 인하여 더욱 미워하게 되며 결국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리는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자 아버지 야곱의 사랑은 고스란히 그 동생 베냐민으로 향하게 됩니다.

유다가 뭐라고 말합니까? “주의 종 우리 아비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27절)” 아버지 야곱은 다른 아들들에게도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다.’고 말했다면 다른 아내는 아내가 아니요 다른 아들들은 아들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야곱에게는 라헬만이 아내요 요셉과 베냐민만이 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 일을 허락하셨을까요? 왜 레아에게 야곱의 아들을 무려 여섯 명이나 낳게 하셨을까요? 그렇습니다. 레아는 “남편 없는 자”의 예표였던 것입니다. 남편 없는 자가 더 많은 자녀를 낳습니다. 또 그 남편 없는 자를 통하여 여자의 후손, 메시아가 오는 것입니다.

좌우간 야곱이 일편단심 라헬만을 아내로 사랑한 것을 누가 탓하겠습니까? 그리고 야곱으로 볼 때 지금 자기 아내가 낳은 아들은 베냐민이 유일하게 남았습니다. 야곱의 독자인 것입니다. 그 베냐민에 대한 아버지 야곱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그 아들이 없어지면 아비도 죽을 것입니다. 흰 머리로 슬피 음부에 내려갈 것입니다. 아비와 아이의 생명이 결탁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과 생명이 결탁된 아버지의 고통, 그것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고통의 예표일 것입니다. 아, 그러나 어찌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고통에 비하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였습니다.

.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 46) 형통만이 축복일까요?  (0) 2017.02.22
(창 45) 해후  (0) 2017.02.14
(창 44) 요셉의 은잔  (0) 2017.01.30
(창세기 43장) 누구인지 모른다면  (0) 2017.01.24
(창세기 43장) 잃게 되면 잃으리라.  (0) 2017.01.16

사진설명보기



숱하게 학대를 당하며 기구한 삶을 사는 여성들이 있다. 세계 곳곳에서 사회적 차별이 완화되고 여성 관련 범죄의 심각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이 곳’의 시간은 과거 어느 때에 멈춰 있다.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다.



지난 1일(현지시간) 영국 BBC는 어린 나이에 신부가 된 아프가니스탄 소녀들이 남편에게 온갖 구타와 학대를 당하는 현실을 고발했다.

아프가니스탄 발흐(Balkh)출신의 자리나는 열세 살이 되던 해에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자리나의 남편은 그녀가 부모님을 만나러 가지 못하게 막았고, 그녀는 남편에게 이혼을 원한 상태였다. 사건 당일 부부는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남편이 갑자기 일어나서 자리나를 깨웠다. 그리고 그녀를 꽁꽁 묶은 후 불구로 만들었다. 현재 남편은 아내를 부상입힌 후 도주중이다.

사진설명보기



자리나는 "나는 어떤 중죄도 저지르지 않았다"며 "남편이 나에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이어 "그는 매우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종종 부모님댁에 가서 다른 남자와 이야기한다는 이유로 나를 나무랐다"고 설명했다.

슬프게도 그녀의 사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보기 드문 사례가 아니다.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일회성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지난해 1월 레자 굴(20)은 남편의 폭력으로 코가 잘렸고, 그 일이 있은 지 몇 달 후 한 여성은 죽을 때까지 두들겨 맞은 후 생명이 위독해졌다. 2015년에는 돌에 맞아 사망한 여성, 군중에게 화형당한 여성도 있었다.

사진설명보기



현지 언론에 따르면, 6살 정도의 아프가니스탄 여자 아이들은 할아버지 뻘의 남자와 강제로 결혼하게 된다. 그들은 행복한 결혼 생활이 아닌 성노예, 구타, 임신, 출산중 사망 등의 불운한 삶을 겪어야 한다.

영국의 자선단체 세이브더칠드런은 올해 전 세계적으로 15세 이하 1만 2000명 이상의 소녀들이 매 7초마다 아동신부가 된다고 한다. 단체의 철저한 조사와 분석에 의하면, 2017년 15세 이하 여학생 1500만명이 결혼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 국제구호단체 관계자는 어린 신부들이 겪는 가정폭력, 학대, 강간의 심각성을 강조했다. 그는 "6세의 한 소녀는 염소와 맞바꿔져 40세 이상의 남성에게 팔려 결혼하는 일조차 있었다"고 전했다.



한때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인들은 가정학대로부터 여성을 보호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법안의 범위와 위상이 축소되고 지연되며 여전히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 상태다.

사진=BBC, 데일리메일(ⓒStephanie Ssinclair VII/tooyoungtowed.org)

안정은 기자 netineri@seoul.co.kr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m.seoul.co.kr//news/newsView.php?id=20170202601014&cp=nownews&wlog_tag3=kakao_share#csidx72404d2414ba448adc08a8028334967

-평안을 빌라-

마태복음 10장

9.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10.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11.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가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12.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13.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14.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고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참조구절;사도행전 20:17-38 중,

17 -32절은 생략...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의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여러분도)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먼저 사도행전 20장 위 참조구절을 살펴봅니다.

바울 일행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고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가기 위하여 밀레도 항구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합니다.

이들은 에베소에 있는 각 지역의 여러 가정교회를 맡아서 양떼를 돌보는 감독자로서 장로들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보자면 각 지역교회 담임목사들이지요.

위 사도행전 20장 본문(17-38절)은 바울의 실천신학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지식냄새 풍기는 현학적인 설교가 아닌, 삶이 녹아 있는 체화된 말씀입니다.

이 것은 장로들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로서, 단순히 지적 동의를 구하는 설교가 아니라, 다시 한 번 바울 자신의 모본(모범적 본보기)을 따라 바르게 목회할 것을 권면하는 고별 설교입니다.

요즘 목회자들도 자주 읽고 묵상하면 어그러진 길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32절에는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사역을 하면서 그 누구의 금품을 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장로들이 아는 바와 같이 손수 일해서 자신과 동행들의 경비를 충당했다고 말합니다.

35절에서는, 모든 일에 모범을 보여준대로 (여러분도) 수고하여-손수 일해서 물질을 얻어-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 하심을 기억하라고 당부합니다.

(바울은 주로 고린도, 에베소 등지에서 사역하는 동안에 천막 만드는 일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에베소 지역교회의 장로들한테 그들도 바울 자신처럼 직접 일하면서 목회할 것을 당부합니다. 사례비를 받을 권리가 있지만 민폐를 끼치지 않고 가난한 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약한 자들을 도우면서 목회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필자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자비량 목회에 대한 논쟁을 보니까, 바울은 특별한 케이스(경우)로서 일반화할 수 없다고 말하더군요. 그러나 그렇게 단정짓는다면 이는 또 다른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먹고 사는 일에 있어서 어떤 정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례비를 받을 수도 있고 자비량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비량 목회를 비성경적이라고 폄훼하는 분들이 있기로 필자 나름의 성경적인 근거를 대보는 것입니다.


위 마태복음 본문에서는
- 전대에 돈을 가지지 말라, 전도여행을 위해서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돈이 있어야 복음을 전하고 주의 일을 하고 목회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그런 생각을 한다면 목회나 전도나 선교가 사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투자의 개념이 개입할 소지가 있습니다. 급부에 대한 반대급부의 여지는 첨부터 싹을 잘라야 합니다. 주님이 맡기신 일을 돈벌이 수단으로(생계의 수단) 삼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복음(말씀)전하러 갈 때는 빈 지갑으로 갔다가 올 때는 지갑을 채워서 오는 것은 삯꾼(?)들이나 하는 짓이지요. 올 때도 빈 지갑으로 와야 합니다.

'전송'이란 한자를 살펴보면 '전'이란 글자는, 먹을 '식' 변에 돈 '전'자가 두 개 붙어있습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올 차비 갈 차비 주어서 보내면(전송하면) 족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스타(?) 강사들이 하는 모습을 보면 부흥회를 무슨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3일 부흥회 인도하고 2-3백만원 받는 것은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칩니다.(이것도 20년 전 기준입니다.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

목사나 선교사는 자나깨나 돈조심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배낭, 두 벌 옷, 신,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배낭에 무엇을 담습니까? 여행에 필요한 비상 물품들이지요. 그리고 여벌의 옷과 여벌의 신(당시는 샌들), 그리고 여벌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시 여행객들이 일반적으로 구비하는 것들을, 보내심을 받은 사도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군사로 부름받은 자는 지가 벌어서 먹고 살면서 군대생활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초대교회나 사도후 교부시대(속사도시대)에는 자비량 사역자가 많았습니다. 혹 사례비를 받아도 최소한으로만 받았습니다. 사역을 축재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걸림돌이 되지 않코자 했기 때문입니다.

말세에 기독교회(특히 한국교회)가 욕을 먹는 것은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세상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돈을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게 되면 온갖 악하고 추한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신자들, 특히 목사들은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고 주님을 섬기는 것으로 특권을 삼아야지,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세상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잘 산다고해서, 그것이 부러워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부족할지라도 예수님의 참 제자 된 모습을 드러낼 때, 세인들도 인정하며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복음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요.

이 것은 초기 기독교 역사가 증명하는 실체적 진실입니다.

다음으로는,
11절로 14절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합당하다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평안이란 단어도 세 번 나오고요. 그런데 본문 12절에 나오는 평안(한글성경)은 그냥, '인사하라'는 단어입니다. 원문에는 평안이란 단어가 안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유대인의 인사는, 상대를 만나면 '샬롬!' 합니다.
평안, 평강을 비는 말이지요.

그런데 제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은 평안을 빌기 전에 머물기에 합당한 자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합당한 자를 찾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머물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태복음 7장 6절

사도들은 복음을 담지한 그룻이요 사신입니다. 질그릇에 거룩한 보배를 담고 있습니다. 아무 곳에나 머물 수 없습니다. 합당한 자를 찾아내야 합니다. 머물기에 합당하다는 말은 '제자들을 받아들일만한 그릇(인품)이 되는가, 물질적으로도 감당할만한 능력이 있는가'를 알아보고 그 집에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무턱대고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유대인들이 손님 대접을 지상의 미덕으로 여겼다 할지라도, 그런 일반적인 관습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합당한 자를 찾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복음은 싸구려 상품이 아닙니다.
잡상인이 아무렇게나 취급하는 그런 유의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가치를 모르는 자의 집에 머물게 되면 나중에 분란이 일어나고 화를 당하게 됩니다. 합당한 자를 찾아내는 일은 이성적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분별을 요하는 일입니다.

'믿습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이란,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과 의지적인 행동을 통해서 드러나는 영성을 일컫는말입니다. 물론, 말씀(복음)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믿음이지요.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러야 합니다. 밥이 어떠니 반찬이 어떠니 잠자리가 어떠니...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 집의 형편과 상관없이 말입니다. 대접받기 위해서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며 옮기지 말아야 합니다.

13절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안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샬롬입니다. '평안'이란 얼마나 귀하고 중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일일이 다 설명할 수는 없고 몇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평강이 당신과(가정에) 함께 하기를!'. 그리고, '하나님과 화해했느냐? 그렇지 않다면 화해하라!'는 뜻을 담고 있는 인사말 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빈 평안이 그 집에 합당하면 거기 임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품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절대로 땅에 떨어져서 밟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너무나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 평안(평화 혹은 화평, 평강)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주어지기에 갈 곳을 찾지 못하면 평안을 빈 자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모든 이를 위해서, 만민을 위해서 평안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평안이 함께 할 것입니다.

14-15절은,
복음을 거부한 자들의 결국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나태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호의를 끝내 거절한 유대인들은 그들이 행했던 대로 (발의 먼지를 떨어버린 대로) 그들도 이방인처럼 버려질 것입니다.

선택받았다고 생각했던 자기 확신(선민사상)은 물거품처럼 될 것입니다. 수포로 돌아갈 것입니다. 땅에 떨어져서 밣힐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죄악 가운데 살다가 멸망받은 소돔과 고모라가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운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거부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한 자들이었기에 그렇습니다.

날마다 주의 말씀(복음)에 거하여 참된 평안(샬롬-에이레네)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글: 구자준 목사

싱클레어 퍼거슨의 [성령] 中에서 '성령과 그리스도의 몸'  

 


어떤 면에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높은 산을 오르는 것과 흡사하다. 등산가에게 낮은 봉우리들은 단지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최정상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점에 불과하다. 이로 유추해 볼 때, 개인의 중생이 비록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과격한 변화를 포함하기는 하지만, 이것만 알고 있으면 성령의 사역의 충만한 분량을 놓치게 되며 낮은 등성이에서의 조망으로 만족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개인적인 거듭남이란 장차 완성을 기다리는 새로운 창조의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목한 바와 같이,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전체 역사에 관여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영의 사역, 곧 그분의 광범위하고도 공동체적인 사역에 비추어 살펴보아야 하고, 이와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계획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요약되어 있다.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 종말론적 갈등의 한복판에서, 그리스도는 단지 개인들을 자신에게로 불러내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 즉 모든 회중을 불러내신다.

그리스도 사역의 공동체적인 성격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묘사한 신약 성경의 많은 비유에서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들은 떼를 이룬 양들이요, 한 포도나무의 가지들이요, 신랑의 친구들이요, 성전의 돌들이요, 새 이스라엘이다. 따라서 신약 성경의 권면들은 개인적으로 심령에 적용되도록 의도된 것이면서도, 일반적으로 전체 교회를 대상으로 하는 복수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성령은 개개인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한다.

바울의 신학 가운데, 그가 유일하게 사용한 다음의 비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즉 교회란 우리가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 들어가게 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2-13).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많은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성령 세례로 말미암아 가능케 된다. 곧바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1) 바울이 교회를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는 사회적.문화적 장벽이 무너진 그리스도의 '몸'(body)이라고 말할 때 그가 의미한 바는 무엇인가?

(2) 성령은 어떻게 세례를 통해 이런 몸으로 들어가도록 관여하는가?

 

 

그리스도의 몸

 

첫 번째 질문은, 바울이 사용한 몸의 비유의 기원을 추적함으로써 바울이 의도한 의미를 규명하려는 노력과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 노력은 헛수고가 될 가능성이 많다. 본문의 의미는 단순하게 어떤 용어의 어감이나 기원으로부터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바울이 가진 사고의 세계에서 몸이라는 개념이 나올 만한 배경을 다양하게 분석해 보면 여러 가지 가능성이 도출될 뿐이다.

 

로마 제국의 문학이 제시하는 바에 따르면 인간의 몸이란 개념은, 사람들이 중요한 측면에서 함께 결속된 집단에 대한 비유로 사용되었다. 이들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메네니우스 아그립바(주전 약 494)의 우화인데, 이것은 리비의 '로마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메네니우스 아그립바는 한 우화를 통해서 민중에게 폭동을 자제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는데, 그 우화는 몸의 다양한 부분들이 위장을 질투해서 먹을 것을 주지 않은 결과 몸 전체가 망쳐진 내용을 담고 있다.

 

다른 학자들은 바울의 성례전적 신학에서 그 근거를 찾으며,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몸 및 그분의 백성의 하나됨을 동시에 상징하는 빵을 떼는데 참여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좀더 최근에는 이것을 고린도 지방의 한 현상으로 설명하려는 연구도 나왔다. 고린도의 아스클레피온에 대한 고고학적인 탐사에서 인체의 여러 부분을 조각한 테라코타 작품들이 출토되었는데, 이것들은 그리스 신화에서 치료의 신(神)인, 아폴로의 아들 아스클레피우스에 의해 치료된 신체의 각 부분을 묘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바울이 이 비유를 사용한 것을 볼 때, 이러한 접근은 거의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이 은유의 기원에 대한 설명 중 가장 단순하지만 최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공동체를 하나의 '몸'으로 보는 개념이 '공중에' 있었다고 보는 견해다. 바울은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리고 자신만의 목적을 위해서 이 용어를 채택한다. 특별히 그가 묘사하고 있는 '몸'은 매우 독특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분은 몸의 머리요 지배자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섭리 목적에 따라서 우주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머리이시듯이(엡1:22), 자신의 나라의 원리에 따라서 교회를 지배하며 지도하는 머리가 되신다(골1:18). 여기서 '머리'(kepbale)는 신체의 일부라는 의미를 함축하는 해부학적 단어가 아니라, 관계성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리스도는 주님이시요, 우주(kosmos)와 교회(ekklesia)를 동시에 지배하시는 분이다. 개인들은 그리스도의 몸, 즉 은혜와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의 생명덩어리로 분리 불가능하게 묶인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주님이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기 때문에 또한 서로에게 속해 있다.

 

 

성령 세례

 

다음으로, 이러한 몸으로 들어가게 하는 세례에서 성령의 활동의 본질은 무엇인가?

 

세례와 성령은 신약 성경에서 일곱 번 서로 연관되어 나타난다. 이 가운데 여섯 번은 명백하게 오순절을 지칭하는데, 성령의 역할과 관련하여 똑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마태복음 3:11, 마가복음 1:8, 누가복음 3:16, 요한복음 1:33, 사도행전 1:5, 사도행전 11:16  -->

성령으로(en pneumati bagio)

 

위의 각 구절에서 세례를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며, 성령은 그 매개체이다. 일곱 번째 경우는 다음과 같다.

 

고린도전서 12:13  --> 영으로(en pneumati)

 

위의 진술들 가운데 '으로'(en)라는 전치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세례에서 성령이 집행자('by the Spirit')임을 지적하는 것인가, 아니면 매개체('with/in the Spirit')임을 암시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혹은 '이 세례에는 무엇이 내포되어 있는가?'라는 좀더 깊은 질문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쓰인 '으로'(en)라는 전치사는, '의하여'(by), '함께'(with), '안에'(in)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이 성령을 매개체(with/in the Spirit)로 보고 있지 집행자('by the Spirit')로 보지는 않는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주제를 만나는 곳마다 본질적으로 변함없는 한 가지 용어, 즉 성령-세례(Spirit-Baptism)라는 언어 표현을 마주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약 성경은 일관되게 세례를 주시는 분은 성령이 아니라 그리스도임을 보여 준다. 즉 "그분이 세례를 주실 것이요..."

고린도전서 12:13에서 바울은, 몸이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이는 몸의 모든 구성 요소가 한 성령을 공유하기 때문이며,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합병될 때 동시에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일한 실재의 양면에 해당된다. 결과적으로 바울은, 성령이 창시자인 어떤 사역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아니요, 회심 이후의 성령 체험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아니며, 신자들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의 물을 마시게 된, 즉 성령을 처음으로 받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참고. 요4:13-14; 7:37-39).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한 몸으로 세례를 받으며 성령은 그 세례의 매개체이다. 그러나 이 몸 안에서 삶은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의 성장과 발전을 위하여 정해 놓으신 수단들, 특별히 세례 의식, 주의 만찬과 사역 등에 의해서 지배받는다.

 

 

세례

 

물 세례의 시행은 시작을 알리는 상징이다. 그것은 유대교로 개종하는 자에 대한 세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복음서들이 기록된 시기 이전에도 그런 세례가 있었느냐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요한의 세례의 경우에는 확실히 해당되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반응으로 참된 회개가 시작된 표식이었다. 한편 요한에게 받으신 예수님의 세례는 메시아 시대와, 십자가의 세례에서 그 정점에 이르게 될 사역으로 진입하는 공적인 시작을 알리는 표식이었다(참고. 눅12:50).

 

성령 세례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시작하도록 한다. 물로 받는 세례는 이것이 외적으로 드러난 상징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여기서 회개, 물 세례, 죄의 용서, 그리고 성령의 선물은 그리스도에게로 들어가는,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 속으로의 교제로 진입하는 하나의 실재의 연결된 측면들로 보인다(마28:19).

 

교회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이 영적이며 내적인 특성을 가진다면, 그러한 외적인 의식들이 과연 그에 상응하는 내적인 새로움과 일치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곤 했다. 외적인 의식이 성령 사역의 충만함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닌가? '내적인 빛'(inner light)에 대한 가르침이 지배적이던 17세기에 로버트 바클레이(Robert Barclay)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이 세례는 순수하게 영적인 것이다....요한의 세례는 그에 대한 비유였고 한시적으로 명령된 것이며, 영원히 존속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초대교회는 마태복음 28:18-20의 정신에 따라서 물 세례를 지속적으로 시행하였으며, 조심스럽게 물 세레와 성령 세례의 차이점을 구별하였다(행10:47; 참고.11:16). 여기서 바클레이와 그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외적이며 물리적인 세례 의식에 내포된 신학적인 구조를 인식하는 데 실패하였다. 세례와 성만찬 모두 복음의 언어적인 표현에서 사용된 상징들(the signs; 단어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기능을 하고 있다. 그 말씀들을 통해서 그리고 그 안에서 예수님이 알려지신 바 된다. 세례와 성찬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지배되는 시대가 오면서 쓸모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은 복음이 우리 인간의 조건과 우리의 죄악된 상태에 더 잘 들어맞음을 가시적으로 예증해 주는 방법이다. 따라서 지상명령에는, 세례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생길 때마다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과, 주님이 교회 안에 지속적으로 임재하시리라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마28:18-20).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언약 관계에서 내적인 끈으로 역사한다. 그분이 그들과 맺으신 각각의 언약은 말씀 가운데 포함된 약속을 보증하는 특별한 증표(sign)에 의해 확정되었었다. 노아와의 언약에서는 무지개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는 할례가 명백한 증거가 된다(창9:8-17; 17:1-4). 이것들은 언약의 약속을 상징하며, 믿음을 갖도록 그 언약을 확정시키는 물리적인 증표로 작용하는 것이다. '증표와 인침'이라는 용어는 할례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고(롬4:11), 이것은 모든 언약의 증표들이 작동하는 방법(modus operandi)을 잘 설명해 준다. 예를 들어, 노아는 폭풍우 뒤에 언약의 상징을 볼 수 있었고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의 약속을 기억하고 계심을 확신하게 되었다(창9:12-17). 약속에 덧붙여서 증표가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확증(도장)으로 작용하였다.

 

요한의 증거에 의하면, 그가 베푼 세례의 주된 역할은, 세례 받은 사람들에 대한 실존적이며 개인적인 중요성과는 별도로, 메시아가 계시되게끔 역사적 상황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요1:31). 자주 간과되는 이 선언은, 예수님의 세례 시에 그분에게 주어진 증거와(막1:11), 그의 세례가 의미하는 모든 것의 성취로서의 십자가에 대한 그의 견해와 함께(눅12:50; 막10:38-39), 물 세례가 예수님의 경우에도 그 내적 의미(증표)를 지적하고 인치심을 받은 그에게 이를 확증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주님의 세례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성부의 말씀이 첨가되었으며, 성부의 성령이 그에게 강림하여 지금 상징된 그것이 십자가 상에서 참되고 최종적인 세례 가운데 충만하게 실현될 수 있도록 예수님을 구비시킨 것이다. 곧 그분의 피에 담긴 새 언약을 향한 발걸음이요 그 중심에는 새 언약적 성령의 선물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겔36:26-27).

 

신약 성경에 의해 '세례'로 간주되거나 적어도 세례에 유비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구약 성경의 두 사건은 한결같이 호된 물 시련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그 일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저주받는 동안 선택받은 자들은 구원으로 인도되었다. 이것은 노아와 그의 가족(벧전3:18-21), 그리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고전10:2) 모두에게 해당된다.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진정한 세례도 물로 말미암은 호된 시련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시편 69편은 호된 물 시련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시69:1-2).

 

이 시편은 성격상 신약 성경에서 메시아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며, 구절들은 예수님의 입술을 통해서 언급되었다(시69:9은 요2:17과 롬15:3에서; 시69:4은 요15:25에서; 시69:25은 행1:20에서; 시69:22-23은 롬11:9-10에서). 물 세례로 상징된 극도의 시련이 십자가 상에서 실재로서 나타난 것이다. 요단 강에서 행해진 상징이 십자가 상에서 그분의 머리 위에 퍼부어지는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폭풍의 압도적인 힘 속에서 성취된다. 그분은 자신을 죽이다시피 한 비애와 쓸쓸함을 경험하였다(막14:33-34). 여기서 그분의 할례(눅2:21)가 상징하는 바와 그분의 세례가 상징하는 바가 하나로 결합된다(참고. 골2:11-15). 그리스도는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지셨다'(사53:8). 그는 자신의 양 어깨에 멘 '우리의 모든 죄악'(사53:5-6, 8, 10)으로 인해서 압제 당하신다(사53:7-8).

 

바로 이런 수단들에 의해서, 용서와 구원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리스도가 언약적인 저주를 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복이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선물로 성취된 것이다(갈3:13-14).

 

새 언약의 세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이다. 이는 믿음으로 인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하는 실체를 상징하며 인치는 것이다. 바로 그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킨다. 따라서 믿음은 물 세례를 통해 상징되고 인쳐진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이끌어 낸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성령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세례가 지닌 내적인 의미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한다.

 

따라서 거듭나게 하고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역사는 상징과 실재 사이의 제삼의 조건(tertium quid)이다. 이것은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 함축되어 있다. 또한 세례에 대한 신약 성경의 모든 공식적인 진술 속에 전제되어 있다.

 

로마서 6장에 있는 바울의 가르침은 이런 원리를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표본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그분의 죽으심에 연합하여 세례 받았으며, 그분과 함께 장사되었으며, 그분의 부활의 권능 가운데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게 된 것이라고 여기도록 격려받는다.

 

자연스럽게도 해석자들은 이것을 실제적인(혹은 유사) 성례주의라고 추론하거나 그와는 정반대로 여기서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물 세례가 아니라 성령 세례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교단적 입장을 대변한다. 제삼의 대안이란 허용될 수 없다(Tertium non datur). 그러나 믿음을 떠나 의식 자체만으로 그 상징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신약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이다. 제삼의 가능성이 있다. 즉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연합시키는 성령의 사역이다. 그 결과로 세례를 통하여, 성령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의미와 그것이 우리에게 지니는 중요성을 믿도록 조명한다("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14:20). 따라서 말씀과 관련된 그분의 사역과 성례와 관련된 그분의 사역에는 직접적인 병행 관계가 존재한다. 둘 다 객관적인 증표이다. 두 경우 모두 성령이 의미를 깨우쳐 주고 적용시키며, 그것들이 지시하는 실재가 믿는 자들 속에서 효력을 발휘하게끔 한다.

 

세례는 일차적으로 회심이라는 영적인 체험에 대한 거울로 생각되며, 그 핵심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증거로 종종 간주되곤 한다. 따라서 회심 시 복음에 대한 우리의 반응의 한 증표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약 성경의 관점이 아니며, 세례의 축복을 과소평가함은 물론 세례와 관계된 성령의 조명의 역사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견해에 따를 때, 모든 사람은 세례를 자신의 믿음의 결단을 반영하는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의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은혜의 상징이요 인치심이며, 우리를 위해 그분이 예비하신 부요함의 상징이다. 상징되고 인침을 받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이다. 물 세례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은혜이다. 따라서 믿음은 세례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인침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표에 의해서 인쳐지며, 말씀 가운데 있는 약속에 대해서처럼 믿음이 그것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은 말씀으로 해석되는 상징과 함께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우리에게 확증되며, 그 확증에 의해 믿음이 강화되고 확실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은, 성경 안에서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행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세례에서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되, 그분의 메시아적 사역에 포장된 바 그분께 속한 것들을 취하여 백성에게 그분을 밝히 드러낸다. 말씀은 결코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다. 말씀은 변화를 시키든지, 강퍅하게 하든지 그 기능을 수행한다(사55:11; 막4:10-12). 이와 유사하게 복음의 성례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드러내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은혜 안에서 변화를 초래하거나 심판 아래 강퍅하게 만들어 버린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경고할 때 무분별한 정신으로 성만찬에 참여할 때 그들은 아무 변화 없이 떠나가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면서 이 점을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실상 그들은 심판을 먹고 마신 것이다(고전11:27-30). 복음의 상징에 대한 거부는 복음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을 거스르고 반항하는 것이다.

 

마틴 루터는 이런 원리를 인식하면서, 미혹으로 곤궁에 처했을 때에 스스로를 향해서 '나는 세례 받은 자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세례를 통해 성령이 밝혀 주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복을 기억하면서, 믿음의 고백으로 대처한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을 보내신 분의 목적을 반드시 이루듯이, 세례는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성취하게 된다.

 

성령이 세례를(성찬도 마찬가지다)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이해하게 되면, 성례 신학에서 흔히 범하는 두 가지 잘못을 피할 수 있다.

(1) 한 가지 오류는, 의식의 상징적인 성격을 매우 주관화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행동, 결단, 경험에 의존하게 만들어 믿음의 기능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즉, 믿는 자 스스로의 자원이나 행동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은혜로 돌이키게 하는 믿음의 기능을 망각하는 것이다.

(2) 두 번째 오류는, 상징이 축복의 효력을 지나치게 객관화함으로써, 상징의 수납을 그것이 상징하는 것의 수납과 동일시하고, 그 상징에 감추어진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는 믿음의 여지나,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에 대한 여지를 전혀 남겨 놓지 않는 것이다. 세례와 성만찬의 유효성은 성경을 읽는 것과 듣는 것의 효력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듯이 성령의 사역으로부터도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주의 만찬

 

세례와 성찬은 중요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둘 다 언약의 상징이자 인을 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가리켜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성례는 독특한 기능과 독특한 목적을 갖고 있다. 세례는 시작이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상징으로서 단 한 번 받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교제의 상징이요 자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주의 만찬에서 성령은 어떤 것을 특별히 증거하는가?

 

성찬의 핵심은 빵을 떼고 포도주를 나누는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찢겨진 몸과 흘리신 피를 상징한다. 그것을 받아 먹는 것은 우리를 위해 몸을 찢으시고 보혈을 흘리신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수단이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고전10:16).

 

이것 역시 세례처럼 언약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유월절의 어린 양을 먹는 것은(그것의 성취가 성만찬이다, 고전5:7-8), 하나님의 심판 곧 죽이는 사명을 수행하는 천사들의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그 저주로부터 보호를 받고 어린양의 죽음으로부터 오는 축복에 참여함을 의미했다(출12장). 그것은 언약에 의해 구속되고 축복 받은 하나님의 백성과 한데 묶여 있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성만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새로운 언약을 인치는 것이다. 유월절 어린양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임재의 복을 우리와 나누기 위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저주를 담당하셨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도모할 새로운 언약의 잔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언약의 저주와 심판의 잔을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받으셨다.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자나가게 하옵소서"라는 그분의 간청은(마26:39), 구약 성경의 선지자들이 언급한 하나님의 심판의 잔을 암시한다(시75:8; 사51:17,22; 렘25:15,17; 겔23:31-33; 합2:16; 이 구절들을 읽으면서우리는 애통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잔을 마심으로, 예수님은 헐벗음과 가난함과 목마름과 굶주림 가운데서(참고. 신28:45-48), 그리고 어둠 속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언약의 저주(마27:45; 참고. 창15:12) 아래로 들어가셨다. 그분은 나무에 매달려 죽음을 당하는 저주 받은 사람의 경험을 모두 겪으셨다(갈3:13). 그분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시고 치시며 괴롭히신다고 느끼셨다(사53:4-6,10; 마27:46).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두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눅24:39).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눈 것이다. 그분이 떡을 떼실 때 제자들이 그를 알아보았다.

 

하나님의 언약의 근본적인 역동성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가슴에 심판의 저주를 퍼부으시는 대신, 신자들은 믿음을 통해 언약의 복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본질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와의 교제이다.

 

이제 성만찬에서 성령의 역할이 그처럼 중요한 이유는 분명해졌다. 오직 성령의 사역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성찬에 대한 가톨릭(ex opere operato: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주장하는 소위 예전적 성례론으로서, 성만찬을 신부로부터 받아 먹으면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는 주장-역주)과 복음주의(기념설 주장자들: 루터에 반대하여 츠빙글리가 내세운 견해-역주)의 오류를 피할 수 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셨다가 이제는 승귀하신 그리스도와 교제를 누리는 것은 교회의 제도나 우리의 기억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장소적으로 빵과 포도주 안에 제한되어 존재할 수 없으며(로마 가톨릭의 견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 단지 그분을 기억하는 일뿐인 것처럼 성만찬에서 떠나 계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기념설의 견해). 오히려 성령으로 말미암아(by the Spirit) 그 물질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알려지시는 이다. 성만찬에는 그리스도와의 참된 교통(communion)이 있다. 말씀이 선포될 때, 주님이 성경 안에(장소적으로), 혹은 믿음에 의해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에 의해 임재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은 성찬 시에 빵과 포도주 안에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통해 임재하신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어떤 물질적인 요소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아버지의 우편에 계시기 때문이다(행3:21). 그러나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분의 임재 가운데로 인도되며 그분은 우리 가운데 서 계신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요한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할 때 성만찬에서의 성령의 사역을 기리켜 언급했다는 생각을 피할 수 없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이것은 요한이, 교회가 '주님의 날에 성령 안에서'(계1:10) 그분과 함께 즐거워할 것에 대해 믿은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역사상 줄곧 교회의 신학자들은 이런 견해를 고수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예를 들면, 세빌의 이시돌은 성령이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임재하게 만든다고 강조하였으며, 그리스도의 몸에 자신을 묶음으로써, 믿음으로 성만찬을 받는 성도들에게 성찬의 권능 혹은 힘을 전달한다고 주장하였다. 코르비에의 라트람누스는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화체설에서 최고의 신학자로 자주 거론됨)와 맞서서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에 대한 뛰어난 논쟁을 벌였는데,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실제 임재를 성령에 의한 임재로 간주하는 입장을 견지하고자 노렸했다.

 

이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 칼빈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인 신학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만찬의 의미에 대한 그의 강력한 설명에도 여전히 신비의 여지가 남아 있다.

 

비록 우리로부터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육체가 우리에게 침투하여, 그로 인해서 우리의 음식이 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하더라도, 어떻게 성령의 비밀스러운 능력이 우리의 모든 감각을 초월하여 우뚝 솟아 있는지, 그리고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분량을 우리가 측량하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기억하자. 우리의 마음이 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믿음으로 품어 안게 하자. 즉, 성령은 장소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것들을 연합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의 몸과 피를 거룩하게 나눌 때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부어 주심으로써, 우리의 뼈와 골수에 파고들게 되고, 그분은 또한 성만찬에서, 증거하실 뿐만 아니라 인을 치신다. 이것은 단순히 공허하며 헛된 상징을 보여 줌으로써가 아니라, 성령이 그분께서 약속하신 바를 성취함을 밝히 드러내심으로써이다. 그리고 진실로 그분은 거기에서 상징되는 실재를 영적인 잔치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시고 보여 주신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믿는 자들, 즉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과 참된 믿음으로 그처럼 위대한 자애로우심을 받아들이는 자들만 받을 수 있다.(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V.17.10.)

 

이러한 사상[그가 그리스도의 승천하신 인성의 실재에 대해 강조한다는 이유로 실제주의라고 불리는]은 칼빈의 성만찬 교리 전체에 깊이 배어 있다.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셨고 죽으셨고 장사지낸 바 되셨으며,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으며 영광스럽게 되신, 바로 그 인간의 몸 안에서 그의 백성에게 찾아오신다. 그렇게 해서 생명이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로부터 우리에게 주입된다."(Institutes, IV.17.4.)

 

성만찬에 대한 일반적인 복음주의 교리보다 오히려 칼빈의 용어가 훨씬 더 실재적임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결과로 그의 강해는 지나치게 물질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용어는 요한복음 6:51-58과 고린도전서 10:16에도 확실히 나타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칼빈의 말에 대해 느끼는 불편함 때문에 성경 자체에 대한 불편함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신중해야만 한다. 칼빈은, 그리스도를 실제로(real) 먹고 마신다는 견해를 가진 모든 사람이 문자 그대로(carnal, 식인종처럼) 그 몸과 피를 마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문맥에서 종종 간과되는 것은 칼빈이 주장하는 바 성령의 권능과 역할이다. 성만찬에 관한 그의 사상에서 근본적인 것은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강림하시는 성령 사이의 연결성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로 우리를 이끌어 올리고자 강림하신다(참고. 골3:1-4). 이와 유사하게, 성만찬에서 성령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땅에 있는 성도 사이의 '떨어진 간격을 메꾸려고', 그리고 승귀하신 구주와 교통하게 하려고 찾아온다.

 

그러나 칼빈의 질문은 좀더 나아간다. 성찬의 식탁에서 신자는 과연 어떤 그리스도와 교통하는가? 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고난 당하고, 죽으시고, 장사지내고, 살아나실 때에, 또한 지금 영광 가운데 승천하실 때 인성으로 옷 입으신 그 그리스도다. 육신을 입으신 말씀(Logos ensarkos) 외에 다른 그리스도란 없다.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통을 통하지 않는 다른 은혜의 방법은 없다. 성만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합체라는 신비 속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교통한다. 우리는 성령으로/영적으로, 즉 성령의 권능을 통해서 교통한다.

 

칼빈이 이보다 더한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해석될 필요는 없다. 이보다 덜 말해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고전10:16) 교통(koinonia)의 실재를 부인하거나 혹은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에게 있는 인성의 지속적인 실재를 부인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어려움은 칼빈이 성만찬에 대한 가르침에서 말한 것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기독론적 사상이 '다른 그리스도란 없다'라는 사실에 대해 충분히 제대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과 승천의 진리를 충분히 심사숙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단 이것을 파악하기만 하면, 칼빈의 성만찬 신학은, 물론(이 종교개혁가 자신이 인정한 바와 같이) 그것이 나타내는 진리는 여전히 신비 속에 감춰져 있지만, 덜 난감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면 성만찬에서 성령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6:14에 잘 설명되어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것을 취하여 그것을 제자들에게 알린다. 그는 근본적으로 사도적 계시를 통해서 이 일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만찬에서는 성경에 이미 알려지지 않은 다른 것이 새롭게 계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만찬에는,

(1) 눈에 보이는 상징물이 있으며

(2) 그리스도의 찢기신 몸과 흘리신 보혈에 대해 단순하고도 특별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문제의 본질로 인도하며, 성령 사역의 핵심으로 이끌어 간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밝혀 주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 새로운 계시란 없다. 다른 그리스도가 알려지는 것도 아니다. 로버트 브로스(Robert Bruce, 1554-1631)가 잘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가 성만찬 때에 말씀에서 얻는 그리스도와 다르거나 혹은 더 나은 그리스도를 얻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령이 말씀과 결합된 물질적 상징의 증거를 통해 역사하실 때, 동일한 그리스도를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Robert Bruce, pp. 64, 85.)

 

과거에 기독교 저자들이 솔로몬의 아가서에 대한 풍유적인 해석의 영향을 받아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 사이의 관계성을 설명하고자 구애, 사랑 그리고 결혼 등의 용어를 사용해 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입맞춤'이란 말을 했는데, 이것은 성령의 비밀스러운 사역을 의미한다. 입맞춤이라는 육체적인 표시 혹은 행위가 사랑을 전하는 것처럼(또는 상징하는 것처럼),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주를 가리키는 물질적인 표시들이, 그들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에 의해 사용되어 그리스도가 그분의 백성을 향해 품으시는 사랑이 전달되는 것이다. 믿음에 대한 은혜의 확정인 성만찬은, 성령에 의해서 평화와 사랑과 기쁨과 확신을 불러 일으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벧전1:8)이 있다. 즉 신자들이 '그가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의 충만한 임재를 성령에 의해 미리 맛보는 것이다. 그 때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사역은 완성될 것이다(고전11:26). 또한 성령께서 '오시옵소서'라고 말할 때(계22:17), 상징물에 의해서 표시되던 것의 충만한 실재가 임할 것이며, 그러한 상징물은 성전 건물처럼 쓸데없는 것이 될 것이다(계21:22).

 

 

싱클레어 퍼거슨의 '성령' 中에서 발췌 / (219-235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10장

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17.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18.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혀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21.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재자들을 둘씩 짝을지어서 보냅니다. 여섯 팀이 구성된 셈이지요. 10장의 첫 단락이 이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13장) 성령께서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워셔서, 금식하며 기도하고 안수하여 둘을 보내게 하십니다.

율법에서 두 사람의 증거는 법적인 효력을 지닙니다. 그리고 둘은 협력을 극대화 할 수 있습니다. 셋은 의견일치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면서 몇 가지를 당부하십니다.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는 비사(비유적 언설)를 드신 이유는 '지혜와 순결'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권능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지혜롭게 잘 처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순결을 유지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냐면, 전도현장은 평소와 같은
세상이나 사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뱀과 비둘기는 지혜와 순결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것들입니다. 땅에 기어다니는 뱀이 사람처럼 지혜롭다는 뜻이 아니라 뱀의 용의주도한 공격의 자세나 은신, 그리고 발도 없이 배로 밀고다니는 것 등을 보면서, 전도자도 자신만의 대처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무턱대고 나대지말고 신중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능력만 믿고 겁도 없이 설치다가는 사역을 망치게 됩니다.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비둘기는 순결하면서도 정결한 새로서 가난한 자들이 드렸던 제물이었습니다.

산을 좋아하는 필자는 이번 겨울에도 산행을 댓 번 했습니다. 산비둘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참 순결해보이더군요. 비둘기소리를 들어보면
조용합니다. 구,구,구... 나직한 소리로 주변에 자신을 알립니다. 밭에서 모이활동을 하다가 가끔 맹금류에게 잡혀먹히기도 하지요.

전도자의 순결이란 오늘 본문 앞 단락에서 말씀하신바 대로 돈 조심하고 대접받으려들지 말고 평안을 비는 것으로 기본을 삼고 복음외적인 일로 빌미를 제공하여 공격을 받지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17절, 그런 가운데서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서 공회란 유대인들의 지방의회를 말합니다. 예루살렘의 공회(산헤드린)가 아닙니다. 공회에서 정죄를 받고 회당에서 채찍질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들로부터 박해가 있을 것을 알고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여러 당파에 속한 자들이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 말로 시험하는 기록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누명을 씌워서 십자가에 못 박지요.

스데반이나 야고보 사도는 알찍 순교했습니다만, 전도자는 이리떼가 있는 사역의 현장에서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순교는 피할 수 없는 최후의 경우로서 전도나 선교에 있어서 최선의 수단은 아닙니다. 기독교 순교는 무슬림들처럼 거짓에 세뇌되어 경우와는 다릅니다.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간계와 포악함을 간파할 줄 아는 눈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생활도 단정하고 순결해야 합니다.

18절로 20절 입니다.
앞서 말한 종교적 박해뿐만 아니라 정치적 박해도 받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세상 통치자들을 피해서 복음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를 당하면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인 줄 알고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란 믿음과 각오로 담대히 서야 합니다.

성령께서 친히 역사하셔서 할 말을 주십니다.
아버지의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든든한지요. 하나님을 아는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만큼 든든할 것입니다. 그러니 전도자가 두려워한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의 피를 흘릴 수 있었겠습니까.

현대의 환난전 휴거론자들을 보면 대개 환난을 두려워합니다. 그 이면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육신적인 죽음은 그리 무서운 게 아닙니다. 온 세상이 가는 길로 '나'도 가기에 담담히 받아들이면 그만이지요. 그러나 영혼이 육신을 벗어나서 하나님 앞에서 선악간에 심판을 받는 것이 진정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늘 말씀과 기도로 성령안에서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적 종말과 함께 개인적 종말의 때를 항상 준비하는 신자의 자세가 요구됩니다.

21절, 장차 국가와 사회 구성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가정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이 정도되면 볼짱 다 본 셈이지요. 그런 시대가 올 것이란 말입니다. 언제? 말세지말에!
가족해체를 넘어서 골육상쟁의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이런 비극을 피하려면 가정구원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비근한 예로 북한이 그렇지요. 그 정도는 맛뵈기 수준입니다. 큰 환난과 함께 무서운 때가 올 것입니다.

22절, 주님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참된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끝까지 견딜 것입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남은 자 사상은 신약에서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요한계시록까지 관통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남은 자란 '이기는 자'로 나타납니다.

보이는 교회에 속했다고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믿음이 아닌 종교적 신념으로도 얼마든지 교회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말세에 배교의 대열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택은 결과적 선택입니다. 그리스도(구원자-하나님이 보내신 자) 안에 있는 자를 택하여 구원하시기로 창세전에 예정(계획)하셨습니다. 마지막 추수 때에 알곡은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나 가라지는 버려집니다.

농사를 지어본 분들은 다 압니다.

하나님이 햇빛과 비를 주시고 심을 땅도 주시고 씨도 주셨습니다. 농부가 땀흘려 일한다 할지라도 내가 하니요 하나님이 결실케 하십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구원얻는 믿음입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은 믿음과 순종이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입술의 고백이란 행위를 담보(보증)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신행일치, 언행일치가 성경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끝으로 박해를 받으면 피해야 합니다. 바울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순교가 좋사오니!,
한다면 누가 말리지는 않겠지만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복음의 그릇이 쉽사리 빨리 순교당하는 것을 허락치 않으십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고 하십니다.

그만큼 복음전파는 화급한 일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모든 사람에게, 만민에게 속히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이 지구촌에는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이 여전히 아직도 많습니다.

재림 후에는 전도의 기회도 구원의 기회도 없습니다. 오직 두려운 심판만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을 읽기만 해도 충분히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본문연속강해를 이어가는 것은 다시 한 번 말씀을 상고하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여 주의 뜻을 받들고자 함에 있습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예화나 긴 적용을 되도록이면 삼가고 있습니다.

아무튼 전도자의 직임을 잘 감당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글: 구자준 목사

언어(言語)의 위력

우리나라 속담에 “말 한마디에 천 냥 빛을 갚는다.”라는 말이 있다. 말로 사랑을 표현하고 말로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는 인생살이를 한마디로 축약한 우리 조상님들의 지혜로운 표현이다. 사실, 말을 많이 한다고 말 잘하는 것 아니고, 무엇을 말할 것인가? 정확히 그 뜻을 알고 사용하는 것과 무조건 말을 많이 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비록 매끄럽지 못하고 조금은 거칠게 보여도, 화자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한 상태에서 진솔하게 하는 한 마디 말이라면 그것은 곧 금은과 같으리라.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트럼프 씨가 바로 그 한 예다.

그를 보면, 알고(knowing) 사용하는 언어, 그 위력이란 어떤 것인가? 가르쳐준다. 모든 언론, 대다수의 미국민, 그리고 모든 국가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크게 지적 당한 것이 그의 말이었다. “막말 가, 인신공격 자, 인종차별 자,”등으로 불리우며 그는 많은 지성인들로부터 배척당했고, 심하게는 그를 가리켜  ‘미친(Insane)자”라고까지 비웃었다. 그러나...트럼프는 끝까지 자신의 태도를 버리지 않았고 그의 막말은 더욱더 강도를 높여가는 것같아서 보는 이들의 눈에 아슬아슬하기까지 했다. 저런 사람이 과연 미합중국을 이끌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개표결과는 완전 충격 그 자체였다. 글자 그대로 세계를 경악게 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상상을 초월하게 높은 지지표를 얻은 후보는, 모두가 기대했던,  세련되고 知적인 힐러리 후보가 아니라 ‘막말 가’로 언론의 비웃음을 샀던 바로 그 ‘트럼프’였다. 놀랍지 않은가? 무엇 때문일까? 나는 그의 언어 능력이 일구어낸 결과라고 본다.  그랬다. 민심을 파고드는 그의 언어능력은 탁월했고 많은 사람들의 조롱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끝까지 철저하게 계산된 언어, 자기만의 독특한 언어를 구사했던 것이다.

그렇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미국 내에서도 기득권자들에 의해 버림받았다며 울분을 토하는 노동자들이 수 없이 많다는 것을, 동성애 천국으로 변해가는 미국을 보면서 개탄하는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많다는 것을, 그리고 무차별적 완화정책(똘레랑스 정책)으로 망가져 가는  국제정세까지… 이런 사회적 그늘을 그는 한 눈에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 정부를 향해서 울분을 토하고 막말을 쏟아붓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들의 아픈 부분을 정확히 찌르면서 그들의 감성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내가 보는 ‘트럼프’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탁월한  언어 능력의 소유자라 말하고 싶다. 물론, 끝까지 자신의 공약을 지켜나가는 참된 지도자일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이렇듯, 정치계나 사회생활에서만 언어가 위력을 발하는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말씀이(logos)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분,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구속주가 되심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을 입을 수 있다니?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 육신을 입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음은 더욱 놀라운 힘이요, 위력이다.  뿐만 아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사탄이 최초의 인간, 하와를 미혹할 때 쓴 무기도 다름 아닌 바로  ‘현란한 말의 위력’이 그 기초였다는 것을 아는가?  잘못된 언어 사용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말(언어)이란 위선의 방패로서 한 방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자기 정당화를 위한 수단으로 거짓 사용될 때가 종종 있음을 성경은 지적하고 있다. 이런 인간의 죄된 본성을 잘 알고 계시기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은 듣되 그들이 행하는 행동은 따르지 말라.”고 경고하셨던 것일까? 이렇듯, 언어란 사용하기에 따라  생명을 구할 수도 있고, 잘못 사용하면 그 말 때문에 영벌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니,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언어 능력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이런 사실을 매순간 인식하고 내 입에서 나가는 모든 말이 정제되고 절제될 수 있다면 후회가 없는 생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저주의 말을 쉽게 내뱉지 말아야

어느 책에선가 읽은 이야기다. 한 기독교 병원에 만삭이 된 젊은 임산부가 해산하러 왔다. 그 병원은 기독교 병원이기에 벽마다 예수의 성화 액자를 걸어두었다. 그것을 본 젊은 임산부가 짜증을 내면서 “저 액자 좀 떼세요, 보기 싫어요.”  "저희들 맘대로 떼어낼 수 없습니다". 간호사들의 말에 여인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내 남편은 매우 높은 사람입니다. 남편의 권한으로 저 액자를 내리고야 말겠어요. 태어날 내 아이에게는 절대로 저 예수라는 사람을 보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너무 화를 내는 임산부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병원 측에서는 하는 수 없이 원장과 상의하여 예수님 액자를 모두 떼어 낼 수 밖에 없었다.

곧이어 그 여인은 아주 건강해 보이고 잘생긴 아들을 출산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여인의 말대로 이 아이는 영원히 예수님의 액자를 볼 수 없는 소경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생각해볼 만한 예가 아닐까 싶다. 말이란 이렇게 위력이 있다. 어디 그뿐이랴, 성경에는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민수기 14 : 28)"라고 심판의 기준을 우리 입에서 나온 말대로 하겠다고 하나님께서 경고하고 계심을 본다.

역사적으로도 증명되는 사건이 바로 저 끔찍한 ‘홀로코스트’ 사건이다.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의 나치 정권과 협렵자들이 12년(1933~45)동안 유대인을 대상으로 자행된 국가 차원의 체계적이고 관료적인 탄압과 대량 학살, '홀로코스트'는 '불에 의하여 희생된 제물(번제)' 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holókauston'에서 유래된 용어이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에 대한 박해라는 뜻에서 히브리어로 재앙을 뜻하는 '쇼아(Shoah)'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홀로코스트의 결과 사망한 유대인은 575만여 명으로 확인되고 있다.”- 백과사전

이것이 우리가 배워 알고 있는  ‘홀로코스트’의 아픈 역사이건만, 무엇 때문에 유독 유대인들이 그토록 끔찍한 고통을 당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시기 질투에 눈이 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선동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죄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외친 유대민족들, 그 포학한 입술의 열매란 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마땅할 죄인이라며 끌고 온 예수, 하지만 그에게서 아무런 죄를 찾을 수 없었던 빌라도는 대야에 물을 떠다가 군중들 앞에서 자기의 손을 씻는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이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들에게 선동을 당한 어리석고 무지한 군중들은 외쳤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돌릴지어다! (마 27장 24-25절 참조)” 얼마나 무서운 저주의 말인가? 그들이 무심코 뱉어낸 그 저주의 말이 훗날에 그대로 그들과 그 자손들이 ‘홀로코스트’의 고통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했음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다음, 어려운 때일수록 믿음의 말(언어)로 승리해야.

믿음의 선진들은 신앙생활 그 자체가 목숨과 맞바꾸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결단 없이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들은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살 소망마저 끊어졌으나 그럴수록 더욱 그들의 소망은 예수님 한 분 뿐이었고 그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으며 그분 안에서만 내세의 소망이 있음을 매순간마다 고백하며 증거하기를 쉬지 않았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건강한 몸으로 이렇게 좋은 환경에 살면서도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실제 어려움의 무게일 수 있고 어쩌면 신앙의 성숙도까지 갈 것도 없이 정서적, 인격적 소양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사람이 나이가 한 살씩 더 먹어갈수록 느끼는 것은 세상만사 별것 아닌데 작은 이권에 “아웅다웅” 잡아 죽일 듯 목숨 걸고, 입으로 상대를 저주하기도 하며 “죽겠다, 죽겠다”. 부정의 소리로 자신을 옭아매기도 한다. 더 심하면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생명마저 던져버리기도 한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내가 하는 모든 언어들을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다는 생각을 한다면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고 (벧후 3 : 10절 참조)". 했다.

마음 설레며 새해를 맞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3주가  훌쩍 지나가 버렸다. 새해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이 한해의 삶을 계획하기도 하고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꿈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해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악한 세상에서, 새해라고 해서 늘 행복한 일만 일어날 수 있겠는가?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앞에 언제나 평탄한 대로(大路)만 펼쳐져 있겠는가? 우리가 지나는 길에 예기치 못한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에 차이는 돌멩이처럼 수두룩 널려 있을 것이고 때로는 우리가 감당하기조차 버거운, 마치 거대한 바위 같고 태산 같은 시련이 앞을 가로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차피 걸어야 할 길(路),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이라면,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승리의 방법을 배우는 것이, 가만히 앉아서 오지도 않을 ‘유토피아’를 바라다가 안 된다 절망하고 주어진 삶을 내 입술로 저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닐까? 하늘이 어둡고 캄캄한 때일수록 밝은 등불이 필요하듯, 다가올 캄캄한 세상을 이기고 믿음의 길에서 승리의 개가를 부르려면 “새해는 생명을 살리는 언어”로 내 가슴 한가득 채우고 날마다 내 입술로 믿음의 언어를 선포해야 할 것 같다. 마지막 날, 그분의 심판 기준이 되는 언어의 위력을 항상 기억하면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는 성숙함이 내게 더할 수 있기를….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롬 14 : 12)”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더디하라( 약 1: 19).”

 

출처: 목양연가/ 글: 최송연 

'최송연의 신앙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靈)으로 살아라  (2) 2017.02.28
핏자국 선명한 그 길로만....  (2) 2017.02.11
종교 개혁(改革), 그 시금석(試金石)  (0) 2017.01.24
길을 보여주어라  (7) 2017.01.18
빗나간 달리기  (2) 2017.01.05

4장 성령님의 내주하심 /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

 

기독교는 참으로 경배받기에 합당하신 임마누엘 예수님을 섬기는 실재적인 종교이다. 이슬람교와 같이 허황되거나 거짓된 종교가 아니다. 또 로마 신화와 같이 인간이 치밀하게 궁리하여 꾸며 낸 이야기도 결코 아니다. 기독교의 사실성을 증명하는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증거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 특히 참된 신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한 증거가 있다. 그것은 다른 증거들과는 구별되며서도 훨씬 더 탁월하여 기독교가 참된 종교라는 사실을 확증해 준다. 그것은 바로 신자들의 마음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심어 주시는 진리에 대한 확신이다.

 

이 위대한 진리는 너무나 분명하여 의심할 수 없이 자명하다. 그래서 그 어떤 인간의 궤변이나 사탄의 술책으로도, 그리고 타락한 인간의 본성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뿌리 깊은 악이 아무리 강력하다 하더라도 이 진리를 약화시키거나 제거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증거들을 뒤로하고 친히 증인석에 앉아서 사역을 부정하는 모든 것들을 대적하여 "누가 정죄하리요?"(롬8:34)라고 외치시는 것이다.

 

이 증언의 갑옷을 입은 예수님의 제자라면, 가장 연약한 제자라 할지라도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서는 '매우 이성적이며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는 있지만 내주하시는 성령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확신을 우리의 마음에 심어 주는 것은 없다. 그 확신으로 말미암아 신자의 신앙이 정직하고도 담대하게 선포되고, 또 이 정직하고도 담대한 모습을 통해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마음에 강력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회의론자들이 그에게 도전할 수도 있다. 감당할 수 없는 반대에 부딪칠 수도 있고, 여러분이 대답할 수 없는 주장을 내세우며 공격할 수도 있다. 설명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던지거나,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궤변을 늘어놓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증인이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의 지적 추룬의 능력이 힘을 얻고, 그의 영혼이 더욱 온유해질 것이다. 또 그 증인으로 말미암아 그 신자의 모든 행동이 진실해지며, 결국 그 모습에 감동을 받은 대적자들이 지난날 주님께서 받으신 찬사를 고스란히 그에게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마7:29).

 

그는 자신이 선포하는 바를 믿을 뿐만 아니라 직접 경험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어떤 대적도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눅21:15)를 그에게 주셨다.

 

성령님께서 신자 안에 거하시는 주된 이유에 대해 단순히 복음의 진리를 증언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것은 분명히 특별하고도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복된 이 교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관해 더욱 큰 그림을 보아야 한다. 곧 자신이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신자들이 경험하는 위로와 거룩하고도 자녀다운 그들의 삶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

 

이 주제는 그 무엇보다 위대하고 소중하다. 특히 이 주제의 광대함은 가히 압도적이라고도 할 만하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사57:15)가 사람과 함께, 아니 그 사람 안에 거하신다고 생각해 보라. 그분이 자신의 피조물인 타락한 인류 가운데서 한 민족을 불러내어 그들을 성령님께서 거하실 장소가 될 만큼 새롭고도 거룩하게 만들었다고 상상해 보라. 또 이 천상의 방문자께서 그들 중에 거하시면서 자신의모든 능력, 곧 거듭나게 하고 거룩하게 하며 인 치고 위로하는 능력을 발휘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이 사실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광대하고 영광스러운지, 이 유한하고도 보잘것없는 마음으로는 절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이 주제에서 흘러넘치는 위로가 참으로 크고, 이로써 우리가 거룩함을 추구하는 데 너무나 큰 동기를 얻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이 주제를 통하여 큰 영광을 거두신다. 그래서 이번 장의 가장 첫머리에서 이 주제를 다룰 수밖에 없다. 부디 성령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우리의 마음에 자신의 진리를 펼치시며, 그 거룩한 영향력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를 기대한다.

 

 

1. 하나님의 성전으로 창조된 신자, 그리고 타락

~생략

 

2. 성전의 회복

~생략

1)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순종

2)그리스도의 죽으심

3) 그리스도의 부활

~생략

 

 

 

3. 성령의 내주하심

 

이제 성령님의 내주하심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성경의 증언

 

먼저, 이 교리에 대해 성령님이 어떻게 증언하시는지를 보자. 이 진리가 잘 나타나는 성경 구절을 읽어 보자. 특히 신약성경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 구약성경을 보면, 그 시대에도 이 교리가 암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에스겔서를 보라.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겔36:27).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겔37:14).

 

신약성경에는 이 교리가 더욱 확실하고 분명하게 펼쳐져 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롬8:9).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롬8:11).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고후6:16).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2).

 

더 많은 구절을 찾지는 않겠다. 이 정도로도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성경이 증언하는 교리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교리를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 중생의 역사

 

성령님께서는 언제 영혼 가운데 들어가시는가? 이에 대해서 우리는 '중생의 순간'이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혼에 행하시는 첫 번째 은혜로운 역사이다. 중생의 순간 이전에는 모든 것이 어둡고 황량하며 죽어 있었다. 이미 우리는 이 사실을 앞에서 다룬 바 있다. 성령님께서 자신의 교훈과 생명과 빛과 질서를 가지고 영혼에 들어오시기 전에 그 사람이 겪던 도덕적인 몰락에 대한 두려움과 영혼의 황폐함에 대한 공포를 어느 누가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복잡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간단한 문장으로 정리해 주시는 것이 더 정확하고 생생한 묘사일 것이다.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유1:19).

 

그런데 성령님께서 들어오셨다. 자신의 영원한 목적에 따라 은혜 언약에 합당한 방식으로 성령님께서 들어오셨다. 그분은 이 언약을 자신의 사랑의 날개 위에 올려놓고, 그 위대한 힘과 능력으로 우리에게 오셨다. 구세주께서 피 값을 지불하고 산 성전을 성령님께서 들어오셔서 소유하시는 모습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성령님께서 들어오실 때, 어둠과 적의와 더러움과 죽음은 물러가고, 빛과 사랑과 거룩과 생명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성령님께서 들어오실 때에는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는 것이 당연하다(눅11:21 참고). 그러므로 우리는 더 강한 자가 와서 그 모든 저항에 맞서 싸워 결국 그 의지를 굽히고 적대감을 없애며 그 마음을 풀어서 우호적으로 대하도록 해야 한다.

 

'여호와께 복 받을 자여. 들어오소서. 어찌 밖에 서 있나이까'(창24:31). 들어 오셔서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취하소서. 제가 오랫동안 주님께 마음을 닫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주님께서 저에게 요구하신 모든 것들에 대해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저를 정복하고 지배하셨으니, 복되신 성령님이시여, 저에게 들어오셔서 저를 주님의 것으로 인 치소서.

 

성령님께서 들어오셔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거룩한 슬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무너뜨리시며, 우리의 영혼을 낮추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재 가운데 스스로 낮아지게 하시고, 그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인도하시고 우리의 양심에 용서와 평화를 선언하시니, 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가!

 

3) 하나님의 영광의 발현

 

신자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솔로문이 건축했던 성전의 웅장함과 장엄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이 땅에서의 영광일 뿐이다.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는'(행7:48 참고) 성령님께서 설령 그 성전 가운데 강림하셔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하더라도, 성령님께서 세우시고 거하시는 새로운 영적 성전과 비교해 볼 때 솔로몬의 성전의 영광이란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러하기에 사도는 다윗이 준비하고 솔로몬이 건축한 그 성전이 하나님께서 율법시대에 명령하신 기준을 충실히 따랐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복음의 경륜과 비교해 보면 그 성전이 가진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인가? 오늘의 복음시대와 비교해 보면, 그 당시에는 성령님의 임재가 적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시대를 그 어떤 시대보다 특별하고 영광스럽게 만드는 것은 바로 성령님의 임재가 더욱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성도들 가운데 계시는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고후3:8-10).

 

 이 새로운 시대에 나타난 영광이 탁월한 것은 그 영광이 더욱 영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리시는 역사가 전보다 더 자주, 풍성하게 일어난다.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시고 인 치시는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더욱 그리스도와 닮아 가고, 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거룩한 역사가 더 자유롭게 일어난다.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더 단순하고 영적인 모습이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령님께서 신자 안에 거주하시는 역사야말로 이 새로운 시대를 특징짓는 요소이다. 그리고 성령님의 내주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의 특별한 현현(顯現)이 있다.

 

성령님께서는 임마누엘께서 성취하신 광범위한 속죄 사역의 기초 위에서 은혜 가운데 불쌍한 죄인을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거룩하게 만드시고 영원토록 그들을 자신의 소유로 삼으신다. 그리고 그 사람 안에 거하시면서 증언하고 역사하시사 그들을 빛 가운데 거하는 성도들이 물려받게 될 기업에 합당하게 만드신다. 이런 사실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엡2:22)가 된 영혼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우리를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무한한 지혜와 전능한 능력이 영화롭게 되고, 예수님의 속죄 사역과 충족한 은혜와 죄인들을 향한 그분의 말할 수 없는 연민이 영화롭게 되며, 저항할 수 없는 성령님의 능력과 무한한 인내와 효과적인 사역이 영화롭게 된다. 영혼을 회심시키고 그 영혼에게서 일어난 회심이 지속되도록 돌보며, 그가 거룩하고도 정직한 걸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그 긴 인생길을 걸어가는 동안 그를 보살피고 마침내 그를 영원한 행복으로 안전하게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천 개나 더 만드는 것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더 위대하고 영광스럽게 보여 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4)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성령님께서는 신자 안에 거하시되 영원토록 거하시며, 모든 은혜와 평안의 영으로 거하신다. 하나님의 자녀가 가질 수 있는 진정으로 거룩하고도 은혜로운 모든 것이 바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에서 비롯된다. 또 영혼이 거룩한 호흡을 하고 거룩한 것을 열망하며, 하나님을 갈망하고 그분의 뜻과 형상을 닮고자 소망하는 것도 성령님의 사역이다. 더 나아가 성도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사랑스러운 모든 것과 그리스도를 닮은 모든 것들도 전적으로 영원하신 성령님께서 행하신 은혜로운 사역의 결과이다.

 

주 예수님은 우리를 진리로 이끄신다. 요한복음 4장 14절을 보라.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런데 10절 말씀을 보면, 이 샘물이 곧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을)....알았더라면."

 

이 '하나님의 선물'이 성령님을 의미한다는 점은 요한복음 7장 38,39절에서 더욱 강조되어 제시된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것이야말로 은혜로운 진리이다. 모든 영적인 복이 깊고도 생명력 넘치는 샘물이신 성령님에게서 솟아난다. 성령님께서는 고여 있는 물처럼 영혼 속에 거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날씨가 궂을 때나 좋을 때나 습할 때나 건조할 때나, 그 어떤 외부 환경에도 상관없이 사시사철 항상 흘러 넘치는 샘물이시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맺게 되는 열매들은 절대 저절로 맺힐 수 없는 것들이다. 의에 주리고 그것을 갈망하는 것이나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기쁨으로 순종하려는 것이나 그리스도에 대해 더 많이 알고자 소망하는 것, 죄의 법과 더불어 끊임없이 싸우는 것이나 신자에게 남아 있는 죄의 원리에 대해 슬퍼하는 것 등은 모두 자연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는 바로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맺게 하시는 귀중한 열매이다.

 

아마도 여러분은 자연적인 것과 은혜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매우 궁금해했던 적이 많을 것이다. 또 율법적인 것과 영적인 것, 인간의 사역과 하나님의 사역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비결을 알고 싶었을 것이다. 이 엄청난 차이를 밝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마련이므로, 그것이 처음 시작된 근원으로 다시 올라가는지를 확인하면 된다. 죄인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솟아나는 샘물, 곧 '그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4:14)이다.

 

자신의 마음에 임한 재앙을 저절로 알게 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과연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재 가운데 엎드려 자신의 죄악을 슬퍼하며 애통할 수 있을까?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과연 사람이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갈망하고 거룩하게 되기를 열망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럴 수 없다. 또 자연적으로 은혜의 보좌를 사랑하게 되고, 속죄의 보혈과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예수님의 의로우심을 귀하게 여길 수 있을까? 그것은 절대로, 잘대로 불가능하다. 세상이 저절로 존재할 수 없듯이, 이 모든 일들은 자연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들이다. 여러분이 방금 말한 상태에 있는가? 위를 바라보라. '혈육'은 여러분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지 못한다(마16:17 참고). 이것을 여러분에게 알려 주신 분은 바로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내주하시는 복된 성령님을 통해 그것을 알려 주신 것이다.

 

5) 거룩의 영

 

성령님께서 신자에게 내주하시되, '거룩의 영'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성령님께서 신자 안에서 행하시는 가장 위대한 사역이다.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을 가볍게 여기면, 그분을 증인이나 위로하시는 분으로 찾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도 다 헛수고가 되어 버린다. 다음 장에서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성화의 사역을 다루겠지만, 여기서 신자에게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관련하여 성화의 사역을 잠깐 살펴보자.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은 자신의 백성들 가운데 내주하시는 분으로서 감당하시는 사역 가운데 특히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한 부분이다. 성령님께서는 단지 신자 곧 성전의 질서만 회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성전의 순결도 회복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분은 영혼이 다시금 거룩한 통치를 받도록 만드시고, 그 영혼 속에 하나님의 율법을 확립시키고 율법의 교훈을 드러내시며, 그 교훈들을 마음에 새기신다. 또한 그분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널리 전파되어 그 율법이 가진 온유하고도 강력한 구속력 아래서 신자들이 '주의 계명들의 길로'(시119:32) 달려가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신자들 안에서 성령님은 '거룩의 영'이 되신다. 성령님께서 인간의 영혼을 거룩하게 하는 사역을 어떻게 진행하시는지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다음 장(5장)을 참고하라.

 

6) 영원토록 내주하심

 

우리는 성령님께서 신자들 안에 영원히 거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령님의 내주하심은 영원하다. 사랑하는 우리 주님은 이 사실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신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 자신의 보좌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다른 보혜사'(요14:16)를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분의 영적 임재는 예수님의 육신적인 임재를 보상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님은 성령님께서 그들과 영원히 함께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안심시키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14:16).

 

이 진리를 간과하지 말라. 영적 어둠과 불신앙의 역사가 일어나 자신에게 내재하는 죄에 대한 감각이 사라지게 되더라도, 그로 인해 영원히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평안과 위로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느끼지 못할 때도 있다. 구름과 어둠이 일어나 이 진리를 둘러싸 가릴 수도 있다. 혹독한 시련이 있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섭리가 비관적으로 보일 때도 있다. 불길한 예감 때문에 두려워 떨 수도 있고, 험하고 꼬불꼬불한 길을 만나기도 하며, 어둡고 차가운 하늘을 바라보아야 할 때도 있다. 믿음이 약해져 불신앙에 뒤덮일 때도 있고, 여러분의 영혼이 저 아래 깊은 곳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탄식할 수도 있다.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창42:36).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셀라)"(시77:7-9).

 

그러나 이 사실을 잊지 말라. 하나님의 백성이 기운을 잃어버렸을 때에도, 안팎으로 모든 것이 어둡고 절망스러운 그때에도, 거룩하게 하시며 위로자 되시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성령님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 그 성령님께서 여러분과 영원토록 함께하신다. 여러분이 강력한 부패성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위로가 너무 부족하다고 느껴져 다윗처럼 기도하게 될 수도 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1).

 

그러나 여전히 복되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분의 작고 고요한 위로의 음성이 그 모든 요란한 폭풍우 소리를 잠재우고서 들려올 것이다. 성령님께서 여러분과 영원토록 동행하신다. 여러분이 아무리 방황하고 게으르며 불친절하고 무가치하며 신실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그 무엇도 성령님을 여러분 안에서 떠나시게 할 수는 없다.

 

비록 우리가 성령님의 임재를 피부로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우리를 향한 위로를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또 성령님께서 우리의 경망스러운 모습을 슬퍼하신 나머지 잠시 우리 안에 있는 부패성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뇌두시고, 우리를 위해 증언하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을 잠깐 동안 중단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실 것이다. 우리의 모습을 다시 본래대로 돌려놓으실 것이다. 마음을 깨뜨리셨다면 그 마음을 다시 싸매실 것이다. 상처를 내시고는 치료하실 것이다. 마음을 거룩한 슬픔으로 가득 채우시고는 그 마음을 변화시켜 감사의 노래를 부르게 하실 것이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사54:7).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시23:3).

 

성도들에게 내주하시는 분으로서 행하시는 성령님의 사역 가운데 남은 내용들에 대해서는 간단히 요점만 다루겠다. 이 사역 가운데 어떤 부분들은 다른 장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성령님은 양자의 영으로서 신자 안에 거하신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

 

성령님은 증인으로서 신자 안에 거하신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8:16). 
 

성령님은 미래의 영광을 보증하는 증표요 약속으로서 신자 안에 거하신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엡1:13,14).

 

성령님은 가르치고 기억나게 하시는 분으로서 신자 안에 거하신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

 

이 모든 영광스러운 역사는 모든 신자들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동일하신 한 분 성령님의 역사이다.

 

 4. 적용과 권면

~생략

 

 

 

옥타비우스 윈슬로우의 '성령님의 구원사역' 中에서 발췌(143-170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신론자들의 최후 고백에서 익히 알 수 있다. 많은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나님을 한껏 조롱했지만 죽는 순간, 육신의 눈이 못보게 되고 영의 눈으로 지옥을 바라보게 되면서 공포 속에 지옥의 실존을 생생히 목도하게 된다.

다음은 죽기 직전 불신자들의 임종 고백들이다. 무슨 말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나갔을까. 불신자의 죽음은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는 순간이므로 큰 공포와 절망으로 몸부림치는 것이 섬뜩하게 감지된다.

 

그리스의 대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죽으면서 잃어버린 고리를 찾고자 손을 더듬거렸다. “더러움으로 나는 이 세상에 들어왔다. 슬프게도 나는 그 가운데서 살아왔다. 불행하게도 나는 이곳을 떠난다. 오! 원인 중의 원인이여,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


 

▲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P.Sartre)! 죽음에 공포에 떨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P.Sartre)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인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뛰어난 문필가로서 ‘자유의 길’ ‘파리’ 등 많은 문학 작품을 남겼다.

사르트르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의 거두답게 특히 기독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인간은 종교적 가르침이 없이도 충분히 선할 수 있다면서, 천국과 지옥에 관한 기독교의 교리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의 주장에 영향을 받아 많은 젊은이가 교회를 떠났다.

사르트르는 노년에 ‘폐수종’이라는 병에 걸렸다. 의사는 프랑스의 자부심인 대철학자에게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렸다. 그러자 사르트르는 의사에게 욕을 하면서 물건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발악은 임종을 맞이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병원 측은 인생의 철학을 정립한 노학자이기에 담담하고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줄 알았는데, 보통 사람보다 더 크게 반항하고 행패를 부리는 모습에 몹시 당황했다. 그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면회를 제한하기까지 했다.

사르트르는 결국 죽었고 죽음 앞에서 보인 그의 반응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매우 실망하고 의아해했다. 인간의 선한 의지와 자긍심을 주창한 대철학자가 죽음 앞에서 그토록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한 지방 신문기자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심판의 하나님을 만날 사실이 샤르트르를 공포로 몰아넣어 그로 죽음을 그토록 거부하게 했다.”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무신론 철학자자 볼테르! 생명을 6개월간 연장시켜 주면 재산의 반을 주겠다고 의사한테 하소연했다.    

프랑스의 무신론 철학자이자 계몽주의 철학자인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기독교가 생겨나기까지 수백 년이 걸렸지만 이제 프랑스의 한 사람이 50년 안에 기독교를 다 파괴해 없애버리는 것을 보여주겠다. 1백년 안에 성경은 다 없어지고 만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볼테르에게도 예외 없이 죽음의 날이 다가왔다. 볼테르가 죽음을 맞이할 때 그를 돌보고 있던 의사 트로킴(Trochim)은 볼테르가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고 한다.

그의 생명을 6개월간 연장시켜 주면 재산의 반을 주겠다고 의사한테 하소연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불안과 공포와 절망에 떨면서 6주밖에 못살고 죽었는데 그를 지켜본 의사조차 공포증에 걸렸다고 한다.

볼테르는 죽기 직전에 “나는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좋았을걸”하고 후회했으며 천국도 지옥도 없다던 그가 “나는 멸망으로 들어간다. 나는 지옥에 간다.” 하면서 비참한 모습으로 죽었다.

 

그가 죽은 지 20년 만에 제네바 성서공회에서는 그의 집을 사서 성서공회 출판소로 삼았고 후에 외국어 성경을 출판하는 파리의 본부가 되었다.

 

프랜시스 뉴턴’(Francis Newton)이라는 무신론자는 임종 시에 “나는 영원히 정죄 받았구나!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되었으니 누가 나를 구원하리요? 지옥과 저주와 고통이 없는 줄 알았는데 지옥도 천국도 있구나. 전능자 하나님께 심판 받아, 아! 지옥과 저주의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내가 받았노라”고 말하며 절명했다.

 

▲ 영국의 저명한 정치 철학자인 '토마스 홉스'  "나의 생명을 단 하루만이라도 더 연장시켜 주는 자에게 전재산을 주겠다."

영국의 저명한 정치 철학자인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4)가 남긴 작품은 리바이어선(Leviathan)이다. 토마스 홉스는 임종 시에 이렇게 말했다. “나의 생명을 단 하루만이라도 더 연장시켜 주는 자에게 전 재산을 주겠다. 나는 무서운 어둠 속으로 떨어지고 있도다!”

 

1797년에 사망한 영국의 ‘윌리엄 포프’(William Pope)는 모든 종교적인 것들을 비웃은 사람이었다. 그들이 했던 일은 성경을 마룻바닥에서 이리저리 차고 다니거나 찢는 것이었다. 그의 임종의 자리에 있었던 친구들은 그가 죽으면서 부르짖는 모습은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고 전한다.

 

“나는 회개하지 않네. 아니 회개할 수 없다네. 하나님은 나를 저주할 것일세. 나는 은혜의 날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안다네. 자네들은 영원히 저주 받을 사람을 보고 있네. 오 영원! 영원! 내게는 지옥밖에 없다네. 오라 영원한 고통이여!”

 

“나는 하나님이 만든 모든 것을 증오했네. 내가 증오하지 않은 것은 마귀뿐이라네. 자네들은 보지 못하는가? 그를 보지 못하는가? 나를 위해 그(마귀)가 오고 있는 것을.”

 

‘캠베타’(Gambetta)라는 불신자는 죽으면서 “나는 잃어버린 자이다. 이제 내가 그것을 부인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했으며, ‘케사르 보르지어’는 “나는 살아서 모든 것을 예비하였으나 죽음에 대비하지 않았다. 이제 나는 죽게 되었는데 나는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라고 후회하며 생을 마감했다.

 

▲ 미국의 작가이자 비기독교인 이었던 토마스 페인은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믿음을 거스르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저명한 미국의 작가이자 비기독교인 이었던 토마스 페인(Thomas Paine, 1737~1809)은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믿음을 거스르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이성의 시대’(The Age of Reason)라는 나쁜 책을 쓴 ‘토마스 페인’은 죽어 가는 자리에서 “내가 쓴 ‘이성의 시대’가 출판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책을 모두 거두어들일 수 있다면 내 모든 것을 다 바치겠습니다. 오 주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그리스도시여, 나를 구원하시옵소서! 마귀에게 대리인이 있다면 내가 바로 그였을 것이오.”라고 했다.

 

영국의 대법관이었던 ‘토마스 스코트 경’(Sir Thomas Scott 1535-1594)은 죽을 때에 말하기를, “나는 이때까지 하나님도 없고 지옥도 없는 줄 알았노라! 나는 전능자(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하여 멸망으로 들어가는구나!”라고 절규했다.

 

무신론자 리치(M.F.Rich)는 영원히 끔찍한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난로 위에서 백만 년 동안 고통 받는 것이 더 낫다고 지옥의 무서움을 토로했다.

 

잔인한 독재자였던 찰스 9세는 임종할 때 “내가 어디 있는가? 나는 영원히 길을 잃었도다!”라며 탄식하였다.

 

▲ 프랑스 혁명기의 여걸 롤랑드(Madame Rolland)는 "오 자유여! 너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죄들이 범해졌는지"라며 절규했다.      

 

프랑스 혁명기의 여걸 ‘롤랑드’(Madame Rolland, 1754~1793는 “오 자유여! 너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죄들이 범해졌는지”라며 절규했다.

 

 

[펌글]

美, '종교자유'에 관한 행정명령 초안 유출

 

8df79cf505a767bb7c856872c6149e42_1486136625_39.jpg미국에서 유출된 '종교의 자유에 관한 행정명령' 초안에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렌스젠더) 단체가 술렁이고 있다. 

 

美 ABC 뉴스는 “언론에 유출된 ‘종교의 자유’에 관한 행정명령 초안은 LGBT의 권리를 약화시키려는 트럼프 정부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고 전했다.

 

행정명령 초안은 “2014년 오바마 전 대통령이 발효한 법안을 약화 내지 무마시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법안의 내용은 ‘종교와 성 정체성에 관계없이 모든 미국 국민은 직장에서 평등한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유출된 초안에 대해 백악관 측은 “유출된 초안은 백악관에서 고려하는 수많은 정책안의 일부에 불과하다. 이는 정부의 정책과 사안에 대한 입장을 대변하진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사라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현재 정부는 어떠한 행정명령을 발표할 계획이 없다. 이에 관해 새로운 정보가 입수되는 대로 언론에 밝히겠다”고 말했다.

 

초안 작성자에 대한 정보를 끝까지 지켜낸 백악관이 초안의 진위 여부를 반박하지 않아 논란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실정에 동성애 권익 옹호 단체는 “초안이 연방정부 법으로 발효되면 정부는 LGBT와 가족을 차별할 수 있는 국가자격증을 획득하는 셈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트럼프 정부가 이런 정책을 도입하려는 이유에 대해 “오바마 정부가 주창한 동성애 권리 옹호 정책으로 인해, 자신들의 종교 자유를 ‘침해’받았다고 느끼는 복음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의 지지”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초안에 따르면, 동성결혼과 낙태, 성전환 등에 반대하는 개인과 단체도 정부 지원으로 공익사업 등 영리 목적의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 이는 오바마 정부가 계약 대상에서 제외한 '종교를 바탕으로 한 개인 및 단체'도 포함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현 정책에 의하면 종교인이나 단체가 종교를 이유로 정부의 정책에 반해 동성애에 대한 반감을 공공연히 표명하는 등의 행위를 하면 정부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밖에도 초안은 동성결혼과 낙태, 트랜스젠더에 관한 반감을 드러내는 종교집단도 비과세 자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이는 1954년 존슨 전 대통령이 비과세 단체들이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비방하는 것을 금지한 법과는 상반된다.  

 

백유현 ⓒ 데일리굿뉴스

 가져온 곳: USA 아멘넷

트럼프, 조찬기도회 연설서 ‘존슨법 폐지’ 시동

 

“미국은 종교의 자유 보호하고, 안전한 곳 되어야”

“교회 내 정치적 발언 허용과 한계 없앨 것” 

 

8df79cf505a767bb7c856872c6149e42_1486136779_46.jpg
▲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2일 워싱턴DC에서 열린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Screenshot theatlantic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국가조찬기도회 연설에서 “미국에서 종교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며, "미국에 입국하는 사람들이 종교 및 개인의 자유라는 우리의 가치들을 완전히 받아들인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을 조만간 개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같은 발언은 미국의 신념과 가치를 믿고, 충실히 따를 수 있는 외국인에 한해서 미국 입국을 허용하겠다는 트럼프의 의지를 재차 강조한 것으로 그가 말한 ‘종교의 자유’는 기독교의 자유를 뜻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관대한 이민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관대함을 역이용하는 사람들과 폭력을 목적으로 미국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다”며, “우리는 편협성이 미국에 확대되어지는 교두보를 허용해선 안 된다. 따라서 미국은 종교의 자유를 보호하고, 동시에 안전한 곳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앞으로 목사가 교회에서 특정 후보자에 대한 지지발언 하는 것을 허용할 방침”이며, “교회 내 정치적 표현의 한계도 없앨 것”이라고 표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해 선거유세 기간에도 “크리스천들은 미국 건국 당시 너무나 큰 희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핍박과 차별대우를 받아왔다”며, “이제 무고한 희생을 치른 크리스천들의 사생활과 종교자유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선언한바 있다. 이는 존슨법을 폐지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로, 그가 임기 초에 가장 먼저 해결할 것으로 예상했던 일이다. 

 

존슨법이란 교회의 자율성을 박탈시킨 법으로 교회 안에서 어떤 정치적인 발언이나 영향, 특히 선거기간 동안에 정치적 발언을 못하게 하고, 동성애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못하도록 족쇄를 채운법안이다. 1968년에 통과된 존슨법은 그동안 민주당이나 공화당 출신의 그 어느 대통령도 이법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송금관 기자  ⓒ 크리스찬투데이

가져온 곳:USA 아멘넷

"여기 제가 서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길을 따라(6)

 

외로운 투쟁에 선 루터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비텐베르크성교회에 붙여진 95개 논제는 약 몇 주일만에 독일 전체 퍼졌다. 이 논제를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루터의 용기에 갈채를 보냈다. 루터의 사상은 더욱 확산되어 갔다. 어두운 시대에 한 줄기 빛을 보게 되었던 사람들 속에서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대자들의 공격도 거세게 일어났다. 로마 교황청에 완전 비상이 걸렸다. 

 

우선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설교자들은 공개적으로 루터를 이단시 하면서 추적하기 시작했다. 또한 위대한 신학자인 요한 에크(Johann Eck)의 공격과 선동으로 인해 결국 루터는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로 소환되었다. 

 

그곳에서 루터는 독일의 추기경 카예탄(Thomas Cajetan, 1496-1534년)의 심문을 받았다. 추기경은 오직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교황이 성경보다 높은 곳에 서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루터는 성경에 근거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루터와 추기경이 서로 치열한 논쟁을 하면서 싸웠다. 이때 추기경은 로마로부터 루터를 체포하라는 비밀 지령을 받게 되며, 이 정보를 입수한 루터는 친구들의 충고에 따라 한 밤중에 아우크스부르크 도시를 빠져 나온다. 

 

당시 황제 선출권을 가지고 있던 비텐베르크의 선제후 프레더릭(Frederick)은 루터가 로마에 있는 이단 재판소에서 심문을 받아야 하는 명령서를 철회하고 독일 땅에서 심문을 받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하여 루터를 도왔다. 그 선제후는 잠정적이지만 루터를 계속 보호해 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막강한 영주들이 로마의 위협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제 루터는 홀로 외로운 투쟁의 길을 걸어가는데 험난하기만 했다. 왜냐하면 안타깝게도 가까이 있는 수도회 형제들이나 비텐베르크 대학 동료들이 루터의 편에 서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희미하지만 마지막에는 화형을 위해 쌓아놓은 장작더미 위에 자신이 서 있지 않을까하는 두려움도 스쳐 갔을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논쟁 -“십자가 신학” 

 

루터가 교황의 권위에 도전함으로써 로마교회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고, 루터 자신은 면죄부와 신학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루터의 면죄부 비판과 관련하여 벌어진 첫 번째 논쟁이 1518년 4월 26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부 건물에서 열렸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와 논쟁을 하게 되는데 자신의 신학을 ‘40개 조항’으로 만들어 정리했다. 루터 당시 신학의 주류는 ‘영광의 신학’이었다. 이 논쟁에서 루터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영광의 신학을 비판하고 십자가의 신학을 지지하였다. 그는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에 대해 입장을 밝히게 된다. 결과는 아주 좋았다. 루터가 승리함으로 인해 루터를 지지하는 세력이 늘었다. 마르틴 부처(Martin Butzer)를 비롯하여 앞에 나서기를 주저했던 비텐베르크에 있는 동료들, 그리고 많은 친구들 등 여러 사람의 동조자를 얻었다. 

 

라이프치히 논쟁 - “교회 최고의 권위는 오직 성경” 

 

논쟁으로 유명해진 루터는 자연이 계속적인 논쟁에 연루되었다. 개혁을 위한 치열한 한판 싸움인 중요한 논쟁이 1519년 6월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발생하였다.

 

그때 루터는 로마교회의 위대한 신학자인 요한네스 에크(Johann Eck, 1486-1543)와 논쟁했다. 핵심은 권위에 대한 논쟁이었다. 에크는 교황과 주교들, 공의회, 종교회의들, 교회 전통의 권위만을 내세웠다. 베드로 후계자인 로마 감독들이 곧 교회의 머리라고 하면서, 로마 교황의 신적 권위를 주장했다. 

 

반면에 루터는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교황의 통치권이 성경에는 전혀 없는 개념이며, 공의회 결정도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교황과 공의회는 성경의 권위 아래에 있다고 말했다. 또한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 교황의 최고(지상)권을 믿는 것은 불필요한 일임을 강력히 반박하였다.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루터는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가 된다는 것을 확실히 했다. 그곳에서 루터는 변할 수 없는 진리는 교황이나 공회가 아니라 성경만이며, 성경만이 교회의 최고 권위가 될 수 있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또한 루터는 신구약성경 66권 이외의 외경과 가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마가톨릭교회는 외경까지를 성경에 포함시킨다. 결국 에크는 루터에게 존 후스(Hohn Huss)와 같은 이단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교황교서와 교회법전을 불태워버린 루터 - “거룩한 불”

 

추기경 카예탄(Cajetan)과 엑크가 루터 파면에 앞장섰다. 교황은 루터의 반박문 중에서 41개 항목들이 이단적이라고 정죄하면서 1520년 6월 15일, 교황의 교서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를 발표하였다. 

 

이 칙서가 발표된 후 60일 이내에 루터는 교황청으로부터 자신의 주장을 취소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만약에 취소하지 않을 경우에는 이단으로 선포하겠고 곧 파문에 처해질 것이라고 위협받았다. 

 

이 교황의 교서는 10월 10일 루터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루터는 교황의 기소장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교황청의 권력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명령받은 60일이 지났지만 물러서지 않은 루터는 이 교서를 “저주받은, 뻔뻔스럽고 악마적인 교서”라고 불렀다. 

 

12월 10일, 오히려 루터는 교황이 내린 교서와 모든 교회법전을 불 속으로 던져 버렸다. 루터는 거짓 사상을 불살라버렸다. 교황교서와 교회법전을 불태워버린 루터는 강의하기 위해 다시 비텐베르크로 왔다. 

 

수 많은 학생들 앞에 선 루터는 지옥과 순교의 길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사실 하나님을 위하여 개혁의 선봉에 선 루터에게는 순교조차도 공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루터는 점점 더 담대해지고 거세지며 확고해져갔다. 루터는 천 년이 넘도록 든든히 버텨오던 가톨릭교회의 절대교리들을 향하여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서슬 퍼런 황제의 권력 앞에서 위대한 종교개혁자 루터가 보여준 영적 파워의 힘은 엄청났다. 루터는 진리에 관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를 분명하게 붙잡고 있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했기 때문에 흑과 백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진리와 비진리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었다. 이러한 루터의 영적 파워는 결국 성경의 힘이었다. 루터는 영적전쟁터에서 움츠러들거나 물러서기를 거부했다. 오늘날 약해진 우리들의 신앙에 필요한 것은 루터와 같은 영적파워이다. 

 

보름스 의회 -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결국 루터는 교황으로부터 1521년 1월 3일에 파문을 당했다. 로마 교황청은 독일 의회에 압력을 넣어 루터를 정죄하여 처형하도록 독촉하였다. 

 

이에 대해 루터의 보호자였던 프리데릭 현제는 루터의 공개적인 심문이 독일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그래서 신성로마황제 찰스 5세는 루터에게 보름스 의회에 출석하라고 통보하였다. 

 

1521년 4월 17일-18, 독일 보름스 대성당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루터는 심문을 받게 된다. 루터의 친구들은 그에게 가지 말라고 애걸했다. 이때 루터는 두려워하는 친구들에게 “후스는 화형 되었지만 진실은 타버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루터는 친구 슈팔라틴에게 “지붕위에 기왓장들만큼이나 많은 악마들이 기다리고 있다 하여도, 나는 보름스에 가겠다”라고 전했다. 

 

4월 16일 아침 10시, 루터와 비텐베르크 동료들은 덮개 없는 마차를 타고 보름스에 도착하였다. 루터는 수도사의 옷을 입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면서 루터는 그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라는 찬송을 불렀고,“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다”고 말했다. 

 

그때 회의장 주변은 루터를 격려하기 위해 모여든 5천여 명의 독일 시민들로 붐볐다. 시민들은 외쳤다. “남자답게 싸워라. 죽음을 무서워 말라. 저들이 죽일 수 있는 것은 몸뿐이다. 영생이 있음을 잊지 말라“고 했다. 

 

루터가 하루 밤을 머문 보름스는 흥분과 기대로 열광의 분위기였다. 첫째날 4월 17일 수요일 오후 4시, 루터는 젊은 황제와 선제후들, 교황의 특사들, 대주교, 주교, 백작, 영주들, 여러 자문들, 제국 각 도시의 대리인, 외국 법정의 대사, 각 계층의 고관 등, 즉 교회와 국가의 최고 권력을 잘 대표하는 사람들 앞에 섰다. 

 

트리어 대주교의 법률고문인 요한 폰 에크(Johann von Eck)는 황제를 대신해 라틴어와 독일어로 질문을 하였다. 제국의회 앞에 불려 나온 루터는 긴 책상 위에 자신의 책 25권 정도 가득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에크는 두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 책들은 당신이 쓴 책인가?”, 또 “그 책에서 쓴 내용의 사상을 그대로 견지할 것인가? 아니면 철회할 것인가?.” 즉 그 저술들을 다 취소하라는 요구를 하였다. 

 

이때 루터는 그 책들의 저자가 자신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취소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한 것은 매우 중대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대충 처리할 수 없어서 답변할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고 요청하였다. 황제는 루터에게 하루라는 시간을 더 주었다. 

 

다음날 4월 18일 목요일, 루터는 전날보다 더 자신 있어 보였다. 기도와 묵상으로 자신을 강하게 세웠다.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횃불이 켜지고 루터는 보름스 의회 법정에 들어섰다. 에크는 전날 던졌던 질문을 약간 수정하여 그 책들을 철회하겠느냐고 물었다. 

 

마침내 루터는 입을 열어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큰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신기원을 이루는 위대한 선언을 하였다. 

 

“저는 복음의 진리를 단순히 전달하는 이 책들은 철회할 수 없습니다. 저는 교황권의 부패와 잘못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에 폭정과 사악함을 멈추지 않는다면 이 책들은 철회할 수 없습니다. 저는 성경의 증언을 통하여, 또는 분명한 이유로 논박하지 않는다면 철회할 수 없습니다. 교황이나 공의회는 여러 번 오류를 범했고, 자체로 모순되는 말을 한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저는 제가 인용한 성경 말씀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저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복당해 있어서 저는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철회하고 싶지 않고 또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여기 제가 서 있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a6845fdd31430612a8455598427dcada_1484581811_89.jpg
▲ 루터가 출두한 지점에 세워진 기념 표지석     ©뉴스파워 김현배 

 

루터가 출두한 지점에 새겨진 기념 표지석

 

 1521년 마르틴 루터의 재판이 열렸던 건물의 터, 바로 그 현장에 세워진 하일스호프공원(Heylshofgarten)이 있다. 이 공원 내에는 루터가 소환되어 출두한 지점의 바닥에 기념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HIER STAND 

VOR KAISER UND REICH

 MARTIN LUTHER 

1521 

(1521년, 마르틴 루터가 여기 황제와 제국 앞에 서 있다)

 

보름스 칙령 

 

로마 교황청은 할 수만 있었다면 존 후스처럼 루터도 화형에 처하고 싶었을 것이다. 황제는 열렬한 교황주의자인 제롬 알렉안더(Jerome Aleander, 1480-1542)에게 이단자 루터를 정죄하는 포고령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5월 8일에 완성된 포고령에 황제는 5월 26일에 서명했다. 이어 독일 제국의회는 1521년 5월 26일 보름스 칙령을 공포하였다. 

 

마침내 루터는 국가와 교회로부터 위법자로 정죄되면서 파문을 당했다. 그에 대한 모든 법적인 보호를 박탈하였다. 그의 모든 책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불로 태우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며 그의 책을 인쇄하거나 판매하거나 읽는 일체의 행위가 금지 되었다. 

 

또한 루터를 지지하는 모든 사람을 불법자로 규정했다. 루터를 돕거나 소식을 주고받는 일도 금지되었고 루터와 관계 맺는 모든 사람들은 구속되거나 소유를 몰수하는 처벌을 받게 되었다. 루터는 교황과 황제, 대학들로부터 사회의 이단자로 찍혀 비참한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루터는 정말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1천년 동안 유럽을 지배해 오던 황제의 권위와 교리 그리고 교권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죽음을 무릎 쓰고 개혁에 헌신하였으며, 사람을 믿지 않았고 사람의 힘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세기 로마 가톨릭교회의 총체적인 부패와 타락으로부터 기독교의 근본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운동이며, 사도적 신앙과 예배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운동이다. 즉 성경으로 되돌아가며, 십자가로 다시 돌아가며, 신약 성경에 나타난 표준으로 돌아가는 운동이다.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이 구호는 종교개혁자들이 부르짖는 중요한 영적 모토들이었다.

 

김현배 ⓒ 뉴스파워

출처: USA아멘넷

[국민만평-서민호 화백] 반기문과 고사성어~ 기사의 사진

퍼온 글

 

                                                   
눈물보다 귀한 사랑  
                최송연   

당신을 사랑하는
그 마음 하나로
오늘까지 버틸 수 있었노라
당당히 말하지 말게 하소서

당신께 받은 사랑 너무 커
모진 세월마저도
진정 행복했었노라
눈물로 고백할 수 있게 하소서

당신 오시는 날
내어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눈물보다 귀한 당신의 사랑,
그 선홍빛 사랑 하나뿐이오니...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님과 함께라면...  (0) 2017.02.15
내 가슴에 영원히 계신 당신  (5) 2017.02.11
도심의 이웃  (0) 2017.02.01
외롭고 힘들 때 드리는 기도  (0) 2017.01.30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0) 2017.01.28

루터란 청년들의 외침 "교회가 세상의 대안 되자"

루터가 로마가톨릭의 부패상을 고발하는 95개 반박문을 내걸고 신앙인의 갱신을 촉구한 지 올해로 500년이다. 그런 루터의 정신을 이어 가는 루터교회가 전세계에 퍼져 있다. 한국에도 기독교한국루터회란 이름으로 교단이 존재하고 50여개의 교회가 소속돼 있다. 

 

작지만 '오직 믿음으로' 복음의 한 획을 담당하고 있는 이곳에 루터처럼 한국교회 갱신을 열망하는 열정의 청년들이 있다. 이런 열망은 그들을 종교개혁의 발상지 독일 비텐베르크로 이끌었고, 한국교회 개혁과제 10가지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동행한 청년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봤다.

 

8df79cf505a767bb7c856872c6149e42_1485775853_8.jpg
▲루터의 정신을 잇는 루터교인을 '루터란'이라 부른다. 루터란 청년 후예들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어떤 마음으로 보내고 있는지 지난 25일 만나 들어봤다. (왼쪽 박영국, 오른쪽 이수산나 청년)ⓒ데일리굿뉴스 

 

10박 11일 일정 속에서 느낀 루터의 마음

 

31명의 청년들이 11일 일정으로 루터의 흔적을 더듬으며 숙고해낸 한국교회 개혁과제는 △십자가 부활 경험 △하나님 뜻 분별 △바른 교육 △물질 숭배 배척 등이었다. 

 

이수산나(26·여·예수사랑교회)청년은 “1년간 준비하면서 루터의 생애를 밀접하게 느끼고 배웠다. 루터가 어떤 마음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했는지 그리고 할 수밖에 없었던 절심함을 알게됐다”면서 “예수님과 하나님, 성도들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이수산나 청년은 “그 사랑으로 독일어 성경을 번역했고, 영적으로 잠자던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며 깨어나는 귀한 경험을 했다”면서 “한국교회도 초심을 잃지 말고 성경을 가까이 하고 개인 신앙생활을 깊이 있게 했으면 한다”고 전했다.

 

박영국(25·남·평택제자들교회)청년에게는 일방적 회개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뻔뻔한 일인지 느낀 시간이었다.

 

그는 “루터가 면죄부의 허상을 꼬집은 것은 철저한 회개를 위한 역설이었다. 말로만 ‘나는 구원 받았다’, ‘나는 죄씻음 받았다’ 하고는 말아버린다 "면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통렬히 부르짖으며 자신을 내려놔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헌금 강요 문화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비판을 가했다. 박영국 청년은 “지금은 중세 가톨릭이 판매했던 것처럼 눈에 보이는 면죄부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자기만의 면죄부가 있는 것 같다"며 "고액의 헌금을 하면 그만큼 뭔가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한데, 적은 돈이어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다는 점도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피력했다.

 

또한 헌금 문제를 지적하며 독일교회를 방문했을 때 겪은 일화를 들려줬다. 청년들이 현지 교회에서 헌금시간에 늘 했던 것처럼 지폐를 꺼내고 있었다. 그런데 교회 목회자가 다가와 ‘하나님은 동전 소리를 더 좋아하신다’며 부담감을 내려놓게 했다는 것.

 

박영국 청년은 “사실 충격이었다"며 "교회가 하나님은 돈의 크기보다 동전일지라도 기쁘고 신실하게 내는 헌금을 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고 말했다.

 

8df79cf505a767bb7c856872c6149e42_1485775864_02.jpg
▲독일 비텐베르크 교회 앞에서 한국교회 10가지 과제를 발표하고 있다. (루터교청년연합회 제공) 

 

루터란 청년의 입장에서 본 한국교회 과제

 

루터교는 한국에서는 작은 교단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세계 개신교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전세계 98개국 145개 교단이 존재하며, 약 8천만명의 교인이 있다. 국내에는 1958년 세워졌고 전국에 50여개 교회를 두고 있다. 청년들이 교단에 바라는 점은 뭘까 궁금했다.

 

이수산나 청년은 “한국 루터교단이 다른 나라보다 역사가 짧고 교회와 교인수가 적은 게 사실지만 너무 위축되지 않았으면 한다”면서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루터의 후예(루터란)로서 자부심을 갖고 조금더 적극적인 목소리를 냈으면 한다”고 전했다.

 

박영국 청년은 “교육에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면서 “루터교회에서 모태신앙으로 자랐는데 루터의 만인제사장설은 많이 들어 알고 있지만, 종교개혁을 외쳐야 했던 심정, 발걸음 등 그의 정신에 대해서는 접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유럽의 루터교회를 방문했을 때 루터교회만의 아름답고 경건한 예배의식이 있음을 보고 감동했다"며 "한국교회에 우리만의 소중한 예식을 널리 널리 전파하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루터교단에서 기획한 이번 독일 방문은 각 교회를 통해 청년들을 모집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처음엔 20명을 예상했지만 31명이 지원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교단에서 경비 50%를 지원했고, 오직 독일만 돌아보는 일정이었다. 

 

청년들은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함께 기도하고 묵상하고 서로 삶을 나누면서 달라졌다고 고백했다. 개혁과 갱신을 향한 루터의 뜨거운 심장소리를 들은 것이다. 청년들은 한국교회 개혁과제를 논의했고 10가지로 추려 500년전 루터가 대자보를 붙였던 비텐베르크 교회 앞에서 발표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한국교회가 듣고 행하는 일이다.

 

한연희 ⓒ 데일리굿뉴스

가져온 곳: USA 아멘넷

인류는 이전보다 전멸에 더 가까이 근접하고 있다!

(By Sarah Karacs, for CNN, Updated 5:18 AM ET, Thu January 26, 2017)

 


얼마나 세계의 종말에 근접했는지에 대한 과제를 부여받은 시카고 과학자 집단은 2016년의 사건들로 하여금 “지구종말시계” 침이 얼마나 움직이기 시작했는지에 관해 목요일에 발표할 예정이다.


상징적인 시계는 현재, 자정이 인류의 종말을 상징한다고 볼 때, 3분전에 서 있다. 분침은 핵무기 경쟁의 출발년도인 1949년도에 3분전 자정에 서 있었다.


시계의 분침은 미국과 소련에서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이 실시된 이후 자정에 1분 더 가까이 근접했다고 - 2016년이 1953년과 동등하게 된 - 예상하고 있다.


이번 주 초에 발표된 진술에서, 원자과학자회보(Bulletin of Atomic Scientists)는 어느 정도 최근의 발전이 고려되었다고 말했다.


“핵무기와 기후협정에 대한 대통령 트럼프의 논평, 음울하게 하는 전세계 안보 전망이 세련된 기술에 의해 증가되는 추세, 그리고 과학적인 전문지식에 대한 점진적인 무시가 불쾌한 국가주의의 세계적인 상승세“라고 말한다.


원자과학자회보의 노벨 수상자들 팀은 1945년부터 “지구종말시계”를 세우고 조사와 분석을 편집하여 자료를 만들어 왔다. 이 독립적인 비영리단체는 기술세계의 조약 협정, 지정학적 긴장과 발전에 연계된 세계적인 위협에 대한 자료를 사용한다. 


1963년 미국과 소련 지도자들이 모든 대기권 핵실험을 끝내자는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Partial Test Ban Treaty)에 서명한 이후 분침은 12분 전으로 내려 왔다.


프랑스와 중국이 핵무기 경쟁에 뛰어들고, 미국이 월남전에 적극 가담한 1968년, 분침은 자정 7분전으로 되돌아 갔다. 그러나 1970년 핵확산금지조약(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이 체결됨으로써 긴장이 완화 - 분침이 뒤로 움직였다 - 되었다.


냉전 종식 이후 1991년 분침이 자정 17분 전으로 후퇴하기 전까지, 그 후 몇 년 간 분침은 왔다 갔다했다. -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극에 달했던1984년의 분침은 자정 3분전에 도달해 경고음을 울렸다.

  

지정학적 요인들이 올해의 평가에 상당한 특징을 띄게 한다. 그것은 새로운 과학기술이 잘못된 사람들의 손에 빠짐으로 생성될 수 있는 어떤 대미지의 신호가 보이고, 그로 인해 제기되는 위험들이 포착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은 잠재적인 생물공학의 오용을 포함하여 인공 지능과 안전 위협의 상승을 포함한다.


이러한 산업의 발전 - 인간들의 상처에 유기적 조직체의 합성을 가능케 하는 - 은 생테러주의자들(bio-terrorists)이 인조 바이러스로부터 무기를 제조하는 위험을 초래 할 수 있다.


이 세상은 이미 세상의 종말을 위협하는 다양한 축적된 무기류를 확장한 상태이다.



http://www.cnn.com/2017/01/26/world/doomsday-clock-2017/index.html

31.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왜 서로 사랑하였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예수님께서 완벽하셨듯이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은 온전한데
복음 자체는 순전(純全)한데
복음이 전파되기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혼잡하게(corrupt)하여
변경시켰고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For we are not as many, which corrupt the word of God:
but as of sincerity, but as of God, in the sight of God speak
we in Christ. 고린도 후서 2:17]
그가 전한 복음은 불순물이 없는 순전함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이, in the sight of God speak
we in Christ,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였다.

우리가 믿음이라 믿는 고정관념과 전통에는
우리를 성장케 하여 순종하고 우리의 힘이 되었던 헌신의 실체인 ‘믿음’은
믿음이라 믿고 우기던 믿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혼잡케 한
불순물이 있었다.
시대마다 굴절된 신학으로 사상으로 포장된 믿음이 있었고
시대마다 변절된 신앙의 공동체라는 교권을 추구하는 교회가 있었으며
시대마다 신앙을 의식(儀式)화 한 종교가 된 의식이 있었기에
이를 보지 못하면 영적인 장님이 되어 분별력을 잃어버리기에
흔히 말하는 영안의 눈을 뜨려면
성경을 읽으며 묵상하고 성령님께서 인도하기를 간청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슴에 도장을 새기듯이 그 사랑으로 인치고
하나님 앞에서 서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하고 실천하는 믿음의 눈을 떠야 한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Open thou mine eyes, that I may behold wondrous things out of
thy law  시편 119:18]

누구든 복음을 소식을 듣기 전 까지 맹인이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더 듣고 더 묵상할수록 눈이 밝아지기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눈을 고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씻으라” 
씻고 밝은 눈이 된 맹인처럼 
불안과 어려움 더하여 절망하는 어두운 시간에 머물더라도 잠시인 것을,
그로 인하여 연단되어 소망을 알게 되고 현실의 소망이 됨을
눈이 밝아지면 보인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기전 하신 말씀처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As long as I am in the world, I am the light of the world.
요한복음 9:5]
빛으로 오셔서 빛을 보여 주시고 빛이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다면
빛이 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Ye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that is set on an hill cannot be hid. 마태복음 5:14]
빛의 자녀가 되면
자기 자신의 교만과 자랑의 수치가 밝게 보여서
자신의 믿음의 불순물을 떨쳐버리고
더하여 세상을 분별하여 바라볼 수 있어
세상이 보이는 만큼 분별력이 생기면
세상의 음모론에 빠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더하여 고국의 교회와 이민 교회를 바라보면
믿음으로 성(城)을 쌓았던 성은, 굳고 단단하여 견고(堅固)하게 보이였던
성은 무너지고 황폐하여진 모습이 보이면
예레미야의 심정이 될 수밖에 없다.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급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예레미야 애가 2:11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3:49]
예레미야의 눈물
그 같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다면 당신은 아직 눈을 덜 씻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그 물음에 오늘도 여전 하시며
그 대답을 오늘도 요구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말씀의 시작은 ‘청함’ 이었고 청함의 선포는 ‘천국’의 선포로 비롯되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천국’을
종말에 이룰 ‘종말론’ 만으로
해석하는 신학자와 선생들이 교회사의 시대마다 수 없이 많았고
지금도 셀 수 없이 수없이 많지만 옳게 보이는가.
이 세상은 단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대 인가?
이 세상과 천국은 인간의 시간의 개념으로는 분명히 분리되었지만
믿음으로 바라보면 분리가 아닌 사건일 뿐이며
영원하시고 영원하실 하나님은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하시길 위하여 태초에 계획하셨다.
그러기에 창세기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모세에게 이스라엘에게 전하게 하신 하나님은
“거룩한 백성이 되게, a kingdom of priests
거룩한 나라가 되게, an holy nation”
거룩한 백성이 되어 거룩한 나라를 이루는
그래서 “주께서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는 거룩한 뜻이
땅위에 이루어지고 이루려는 공동체가 천국의 모형이라서
순전하고 온전한 나라가 올 때 까지
거룩한 백성이 되게
거룩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시기에,
구원을 받은 자들은 이미 거룩한 나라의 백성이며
하나님 나라의 자녀이며
이 세상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대가 아니며
죽음마저도 이 세상 생과 분리가 아니라서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이사 가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연속적인 우리의 사건이며 연속된 영원의 개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Our friend Lazarus sleepeth; but I go,
that I may awake him out of sleep.  요한복음 11:11]
같이 영원히 함께 할  ‘우리 친구’ 라 하셨으며
죽음을 ‘잠들었도다.’ 하셨다.

그래서 시편저자는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라 했다.
복음은 놀라운 것을 보게 하는 힘이며 능력이라서
성령님과 함께 하는
능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이며
권능(power of charity)이라서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가 얼마나 마음의 중심에 간직하였는지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가 얼마나 가슴에 박혔는지
그 분량만큼, 그리스도의 사랑의 분량만큼이, 믿음의 분량이고
그 분량만큼, 상대를 사랑할 수밖에 없고
그 분량만큼, 보이고, 분별할 수밖에 없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서로 사랑하는 만큼
그 만큼,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줄 알기에
그 분량만큼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그리스도인들의 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And from the days of John the Baptist until now the kingdom of heaven suffereth violence, and the violent take it by force.  마태복음 11:12]
침노(侵擄)는 개인과 개인의 침노를 의미하지 아니하며
다른 나라를 불법적인 힘을 사용하여 쳐들어간다는 뜻으로
전쟁이라 할 수 있으며 세상을 향한 놀라운 의미로 혁명(revolution)이라 할 수 있고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이고 권능이며
성령님께서 주시는 공동체의 동력(動力)이기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렇게 놀라운 소식인 복음을 전해주었고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 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For if we believe that Jesus died and rose again,
even so them also which sleep in Jesus will God bring with him.
데살로니가 전서 4:14]
이 복음의 놀라운 소식을 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리스도 주 예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성령님께서 주시는
권능(power of charity)을 받고 하나님 나라를 보았으며
하나님 나라, 천국의 모형을 데살로니가에 세웠으며
성령의 능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으로 서로 사랑하여
주위에 소문이 나서 데살로니가와 주위까지 천국의 침노를 당하게 하였기에
세상을 바꾸는 힘과 능력의 복음을 간직한 성도들 이었기에
데살로니가 교회는
데살로니가에서 이룬 천국의 모형이었다.

'은혜의 단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싸우는 이유  (0) 2017.02.27
“진리의 길 vs 죽음의 길”  (0) 2017.02.17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  (0) 2017.01.23
휴거후 남겨진 사람들(3)  (0) 2017.01.14
휴거후 남은 사람들(2)  (0) 2017.01.1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