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지는 지금 누군가를 집중 포섭중입니다.
체크해 보세요!

3개 이상이면 신.천.지 나뭇잎이 포교 접근.
5개 이상이면 신.천.지 복음방 교육 입문.
7개 이상이면 신.천.지 교육 마무리 단계.

<체크 목록>
1. 성경공부 중 새로 교육 받을 사람을 찾아 오라고 함
2. 누군가 나에게 대한 꿈을 꾸었다며 접근
3. 성령을 비둘기, 악령을 까마귀라고 함.
4. 교회 밖 성경공부, 큐티모임, 영성훈련 모임에 권유 받음
5. 교회 밖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교사가 목사, 전도사, 사모, 신대원생, 간사, 선교사 등이라고 함.

6. 교회 밖 성경공부하는 것을 비밀로 하라고 함.
7. 성경을 역사, 교훈, 예언, 성취로 구분 함.
8. 성경이 '계시록 시대'등 8시대로 나누어 가르침.
9. "죄 사함이 비유를 깨달으며 새 언약을 지킬 때 가능하다고 함.
10. 사단이 성전에 앉아 하나님으로 가장해 신앙인들을 미혹한다고 함.

11. 천국 비밀이 감춰져 있으며 비유로 된 계시를 깨달으라고 함.
12. 시대별 예언과 성취가 있으며, 일반 교회에는 봉함된 말씀이라고 함.
13. 육적 이스라엘, 영적 이스라엘, "영적 새 이스라엘"(영적 새 선민) 가르침.
14. 재림 때 출현하는 약속의 목자, 이긴자가 있다고 강조함.
15. 성경공부를 시작한 뒤 주일 설교가 잘 들리지 않음.

16. 교회가 바벨론 교회라고 함.
17. 성경공부하는 것을 비밀로 하라고 함.
18. 기존 교회 목사를 개라고 함.
19. 신앙상담, 신유, 영적능력 탁월한 사람이 있다 제안 받음.
20. 한자 스터디, 신내림, 유대인 학습법, 군인챙겨주기, 영재아동 학부모 모임, 봉사포교, 일일찻집, 성격 테스트, 행동 유형검사, 미술침리치료, 도형그리기, 우울증, 스테레스 테스트, 애니어그램, MBTI 무료검사, 힐링스쿨, 각종 설문, 5분 스피치 혹 설교 평가 등에 참여


출처: 청년사역연구소 페이스북

 

아래는, 워싱턴포스트 기사다.
한국이 미국의 선제공격을 지지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In a surprise,

Yun appeared to suggest that South Korea would support military options.


https://www.washingtonpost.com/world/tillerson-says-all-options-are-on-the-table-when-it-comes-to-north-korea/2017/03/17/e6b3e64e-0a83-11e7-bd19-fd3afa0f7e2a_story.html?tid=ss_fb-amp&utm_term=.d086b78cfbaa




미국의 뉴욕타임즈도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국민 수천만명의 목숨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https://www.nytimes.com/2017/03/18/world/asia/us-north-korea-weapons.html?mwrsm=Facebook&_r=0


미국이 북한의 지도부만 깔끔하게 제거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실패할 경우, 남한 국민 수백만이 목숨을 잃을 수 있

최악의 재앙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미국의 북폭이 100% 일어난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드러나는 여러 면에 있어서,

그 가능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만약 이게 현실이 된다면,

최상의 시나리오는,

깔끔하게, 또는 약간의 피해만 보고,

북한 정권을 단번에 제거해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70년간의 북한 우상체제는 무너지고

북한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허나, 이것이(북 지도부 단번에 제거) 실패한다면,

이 전쟁은 최악의 재앙이 될 수 있다!

물론 그렇더라도 결국 북한 체제는 무너지겠지만,

엄청난 인명피해는 피할 수 없게 된다.


미국의 선제타격이 일어날지 여부도,

그 이후 결과도...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뜻하신대로 되어질 것이다.


이래도 한국교회는 가만히 있을 것인가?

이런 일촉즉발의 한반도 상황이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건가?


당장 하나님 앞에 엎드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부르짖으며 가슴을 찢고 회개하며 기도해야 하지 않는가?


우리 안위만 지키기 위해,

전쟁 안 일어나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죄악을 부르짖으며 절실히 회개하고,

만약 북한에 선제타격이 이뤄진다,

최소한의 피흘림으로 북한 체제가 무너지고

북한 동포들이 자유케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옮긴글: 주님오시는 발자국 소리

이정근 목사 신학논평 “영혼 취침설, 그리고 궁극적 구원론”

 

 

29e0b870de1de55181141bc9cc55b535_1489891146_49.jpg최근 미주한인교계에서는 두 가지 신학적 논쟁이 있어왔다. 하나는 ‘천국환송예배’라는 용어가 정당한 것이냐 아니냐와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 번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느냐 아니냐’이다.

 

모두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구원론이 이슈가 되고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는 교리논쟁 때문에 수많은 인명이 처형되는 비극도 여러 번 있었다. 특히 금년이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의 해인데 종교개혁 역시 중심 이슈가 바로 구원론이고 구원교리 논쟁이었다. 

 

‘천국환송예배’라는 말을 쓰지 말자는 주장은 그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국에 입성했는지 못했는지를 알지 못하니까 그런 용어를 쓰면 안 된다는 주장이다. 필자와도 친분이 있는 장로 한 분이 일간신문 광고를 통하여 그런 주장을 강력하게 제시했다. 

 

이 문제는 결론부터 말한다면 ‘장례예식, 입관예식, 하관예식’을 사용할 것을 추천한다. 세례예식, 성찬예식, 목사 안수예식, 임직예식, 결혼예식 등 교회의 예전용어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천국환송예배라고 해서 죄를 짓는 일은 아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보내는 유가족들에게는 위로가 되고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전도의 효과가 있지 않은가. 언어는 논리성을 뛰어 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천국환송예배 용어를 반대하는 이론적 근거로, ‘죽으면 영혼이 바로 천국에 가는 것이 결코 아니라 마지막 부활 때까지 잠을 잔다’는 ‘영혼 취침설’(soul sleeping theory)을 제시한 것은 매우 큰 잘못이다. 그것은 전혀 건전한 기독교교리가 아니다. 주요 개신교단들은 신자가 죽으면 바로 낙원(paradise)에 가게 된다는 말씀을 그대로 믿는다. 

 

예수님도 십자가 동창생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명확하게 선언하셨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요11:11)고 하신 말씀 등에 근거하여 영혼 취침설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사실적 표현이 아니고 은유적 표현일 뿐이다. 그 바로 다음에 나오는 성경말씀이 이를 명확하게 풀어주고 있다. 

 

□ 구원론의 다양한 주장들 

 

두 번째 논쟁은, ‘한 번 받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이다. 한국의 총신대학교가 목회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이 중도에 취소될 수 있는가”라는 설문조사를 했더니 47.5%가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것과 관련된 논쟁이다. 설문에 참여한 목사들의 81%가 장로교회 소속이었다. 성결교회, 감리교회, 순복음 교회 목회자들은 당연히 ‘취소될 수 있다’는 답변을 했을 것이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장로교회 목사들 가운데 33.5%가 ‘한 번 받은 구원도 취소될 수있다’는 주장에 찬성한 것은 확실히 상당히 큰 교리적 지진에 해당된다.

 

장로교회는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곧 한 번 받은 구원은 궁극구원이요 결코 빼앗기지 않게 된다는 것을 확고한 교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칼뱅의 <기독교 강요>와 이를 근거로 교리체계를 만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강조된 오대교리 곧 ‘TULIP’의 마지막 조항에 해당된다. 근년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도 그 선주가 바로 이 궁극구원론 곧 구원취소불가론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구원파’ 교회 교주였다.

 

그런 부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정통장로교회는 여전히 한 번 받은 구원은 궁극구원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성경말씀들이 적지 않게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영혼구원론에 대하여는 타종교와 무신론을 포함하여 다양한 견해들이 있어 왔다. 인간은 누구이건 어떤 종교를 믿건 죽으면 그 영혼이 궁극적으로는 구원받게 된다는 보편적 구원론, 기독교가 구원의 확실한 길이지만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로마 가톨릭교회, 양심과 율법에 따른 선행으로 구원받게 된다는 주장,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는다는 견해,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시고 선택하여 부르신 사람들만 구원받는다는 교리, 자기네 교회나 교파에만 구원이 있다는 14만 4천론자들....아니, 아예 인간은 죽으면 영혼도 없고 부활도 없고 따라서 하나님 나라가 전혀 없다는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의 선언도 있어왔다. 이 가운데 어떤 ‘구원론’을 믿느냐는 물론 각 종교, 각 교단, 각 이데올로기, 그리고 개인들에 따라 다르다.

 

□ 구원계획 변경은 절대주권자의 권한 

 

한 가지 더 말해야 한다. 구원은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돈’ 비유처럼 하나님의 일방적 예정과 은혜로 받기도 하고, 탕자의 비유처럼 타락한 자의 결단으로 받기도 한다. 그리고 잃은 양의 비유처럼 하나님의 부르심과 잃은 양의 응답으로 받게도 된다. 구원과정을 획일적 원리로만 설명하던 것을 넘어 인간 하나 하나가 절대적 생명이라는 점에서 전개한 ‘개별성중심의 구원 패러다임’이다.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은 목적지는 같으나 그 도달과정은 개인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이라는 뜻이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한번 받은 구원은 궁극적 구원’이라는 논리에 대하여 그 허점을 보완해야 한다. 구원사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역할 축소, 인간의 자유 의지적 참여가 전적으로 부인된 것, 도덕폐기론(antinomianism)의 폐해 등을 극복해야 한다. 그런 신학자들이 바로 아르미니우스이고 요한 웨슬리이고 칼 바르트이다. 

 

특히 이민교회는 목회자들이 어떤 한 가지 구원론만 주장하여 설교하기가 어렵다. 어느 교회에나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오순절교 등의 출신들이 모두 모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 목회현장적 고민을 거쳐 생성된 것이 바로 ‘개인마다 구원과정 곧 은혜의 작용 방식이 다르다’는 원리이다. 

 

지금까지의 구원론은 획일적 원리만으로 설명하려는 데서 무리가 있어 왔다. 구원은 절대주권자 하나님의 전적인 권한이시라는 단일원리가 대전제이지만 구원받는 도정(ordo salutis)도 기계적으로 결정하신 것은 아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실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 하나 하나의 구원체험과정은 천차만별적이라는 설명이다. 거듭 말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영원한 구원은 절대 주권자이신 성삼위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 그런데 그분은 큰 틀에서는 하나의 원리 혹은 경륜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하셨다. 그러나 그 구원과정은 개인 개인에 따라 다르다. 특히 은혜와 믿음의 작용방식이 천차만별로 다르도록 경륜하셨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양처럼, 어떤 사람은 돈처럼, 어떤 사람은 아들처럼....다양한 방식으로 구원받게 된다. 

 

따라서 절대 주권자이신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궁극구원의 계약을 파기하실 수 있는 권한도 있으신 분이시다. 궁극구원을 취소하시는 것 역시 성삼위 하나님의 절대주권행사의 한 부분으로 이해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정근(성결교회 목사)

대표저서 <목회자의 최고 표준 예수 그리스도>

ⓒ 크리스천위클리

 

가져온 곳: USA아멘넷

THAAD(사드) 전문가들이 판치는 세상!


나는 미사일 분야에서 20여년을 일해 왔지만 내가 전문가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해당 무기체계를 운용하고 유지관리를 해보았지만 무기체계에 대한 제대로 된 공부는 엄청난 시간을 투입해야만 가능했는데, TCO(Tactical Control Officer-전술통제장교) 1년을 제외하면 사실 미사일을 직접 만지거나 관리를 해오지는 않았다.


물론 사령부에서 미사일 통제 장교도 하고, 한미 연합작전 담당을 맡기도 하고, 대대 작전통제소에서도 근무를 했지만 실제로 미사일과 직접 접해서 일을 한 것은 1년여 조금 넘는 기간이다.


그러나 그 전체의 과정에서 엄청난 비밀들과 관련 자료들 그리고 메뉴얼 등을 공부하고 숱한 전문가들(한국국방연구원 박사님들)의 강의와 마지막 국방부 군비검증단에서의 감시 및 검증을 위한 무기체계무력화 등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면서 군생활을 마무리하였다.


연합작전을 담당할 때는 패트리어트 도입과 관련한 사전 연구보고를 진행했었고, 무엇보다도 오늘날 KAMD(Korea Air & Missile Defense)의 모태가 되는 연합합동전구탄도탄작전통제소에서 제대로된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특히 무기체계와 체계연동이라는 개념을 통해 sensing에서부터 shooting까지의 맥락적 개념을 배웠을 때의(Kill Chain 개념) 전율과 종심타격을 수행하는 실 전투상황에서도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 하는 미군의 인본주의적 작전실태를 목도하면서 경외심을 느낄 정도였다.


실무장한 미사일 사격을 위한 훈련도 진행했었고, 분기마다 SIM훈련을 통해 작전가능평가를 보아왔고 97년도에는 최우수 작전장교 표창도 받았었다. (조종사의 TOP GUN과 같은 상)


주야로 작전비상대기 근무를 서며 장비를 운용하고 적 지역을 레이다로 탐지하며 실 항적을 추적하고 포착훈련을 수시로 진행했었다.


그런데...

기껏 구글로 자료들을 번역하고 어설프게 유리한 항목만 뽑아내어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 근거로 사용하면서 자신을 THAAD(사드) 전문가라고 뻔뻔하게 표현하는 사람을 보면서 그저 허탈한 웃음만 나온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THAAD는 현존하는 가장 정밀한 무기체계이다. 더욱이 지구상 가장 불량국가인 북한이 핵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 이상, 이를 방어할 최소한의 수단이 THAAD인 것이다.


40~150km 높이에서 직접 맞춰 파괴하는 탄도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아무런 효과가 없다느니 수도권은 방어를 못하느니 하면서 호도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마인드로 글을 쓰는지 의심스럽다.


모든 무기체계는 그 목표와 함께 한계점 또한 갖고 있다. 제한된 자원으로 제한된 방어를 해야 하는데, 최소한의 방어자산을 우리가 확보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반대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어설프게 중국 눈치를 보면서? 같은 동포인 북한은 절대 핵을 쏘지 않을거라서? 핵은 미국을 향한거지 남한을 향한게 아니라서?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칼을 든 자가 그 칼을 어디에 휘두를지는 칼을 쥔 자만의 의지이지 옆에 있는 사람들의 바램으로 휘두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칼을 나에게 휘둘렀을 때 그걸 방어할 수 있는 방패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중국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패권을 쥐고 싶어하는 국가로써 그 영향력을 쉽게 행사하지 못하는게 싫은 것이다.


그런데 그걸 우리가 배려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만의 생존방식이 있어야 한다. 함부로 우리를 쉽게 봤다가는 큰 코 다친다는 메시지를 늘 주어야 한다.


2차세계 대전, 독일이 영국을 침공하기 전에 프랑스를 항복시키고 상당한 시간을 주었다. 어차피 침공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원이 투입되어야 했고 영국은 힘을 읽었으니 화평을 맺고 독일은 소련으로 화살을 돌리려 했었다.


이때, 기라성처럼 나타난 리더가 바로 윈스턴 처칠 수상이다. 그는 끝까지 항전하겠다는 의지로 영국 의회를 설득하고 국민들을 독려했다.


독일이 영국 본토를 침공하기 위해 수천대의 전투기와 폭격기들을 출격시키자 영국 조종사들은 사력을 다해 싸웠고 레이다기술 덕분에 독일군의 침공을 사전에 대비할 수 있어서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영국공군전투기 조종사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본토 공습을 막아낼 수 있었다.


(훗날 처칠은 “인류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소수의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할 때는 없었다“고 당시 헌신했던 조종사들을 칭찬했다)


THAAD(사드)가 그렇다. 이 무기체계로 북한의 핵미사일을 막아낸다면 인류역사상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무기체계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런 무기체계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작금의 현실이 그저 슬플 뿐이다.


국가의 리더십이 부재하고 정치인들이 썩었으며 재벌들이 모든 것을 독차지하는 것과 국가 안보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들이 밉다고 해서 국가안보를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밉다고 해서 무조건 반대를 해서는 안 된다. 국가는 지켜져야 하며 유지되어져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있는 것이다.




출처: 정창욱님 페이스북


(창 49) 복 된 인생

 

 

만일 이 세상 삶이 전부라면, 인생의 부귀영화가 복이라면, 일평생을 나그네로 고생하며 살아온 야곱의 삶은 결코 복 된 삶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길은 130세 될 때까지 험난한 고난길의 연속이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그토록 붙잡았지만,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태어났고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의 축복을 가로채고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복 주신다 약속하셨지만, 130세가 되도록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고 생전에 이루어지고 누린 것은 없었습니다. 외삼촌 라반을 섬기며 고생하여 얻은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어버리고 라헬이 낳은 요셉마져 악한 짐승에게 먹혀서 죽고 눈물로 보내는 세월 끝에 극심한 기근까지 닥쳐 생명의 위협을 당할 때 아들들을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보냈더니 애굽 총리가 아들들을 염탐 간첩으로 몰아 시므온을 볼모로 잡고 라헬이 낳다가 죽은 베냐민까지 내어놓으라 하니 어쩌면 야곱은 무슨 운명이 이다지도 가혹한가고 한탄하지 않았겠습니까?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놓고 나서 야곱은 또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밤을 지새웠겠습니까? 여기까지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야곱의 인생은 복된 인생도 형통한 인생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복된 사람이었고 야곱의 인생길은 복된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셨고 야곱의 그 험한 인생길, 나그네길을 통하여 일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일평생을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셨고 일평생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쓰임 받았으니 이 보다 복된 사람, 이 보다 복된 삶이 없을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가장 복 된 자요 자신의 삶이 가장 복 된 인생이라는 이 사실을 130세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잃어버렸던 아들 요셉을 다시 만나고 애굽이라는 생각지도 못 했던 곳에서 자손들의 번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이를 확인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147세가 된 이제 복 된 야곱은 복 된 삶을 마치고 하나님의 복 된 약속 안에서 잠들게 될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라면 죽음도 복 된 죽음일 것입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야곱은 이제 빈손으로 죽지만 가장 큰 복을 안고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그 복 된 믿음을 품고 잠들 것입니다. 야곱은 자녀들에게 분부합니다.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나의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 야곱은 이제 거기 에브론의 밭 굴에 부여조와 함께 누워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이 들릴 그 날까지 잠들어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죽는 것이 복 된 죽음이요 그렇게 죽을 수 있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캄캄한 가운데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 그 약속을 가지고 담대하게 죽음 너머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품에 뛰어들어 안기는 것일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후반은 그러한 믿음의 선진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으면서도 믿음을 버리지 아니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복된 것은 그들이 고난당하고 죽임 당할지라도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말씀)를 붙잡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캄캄한 가운데서도 버리지 않고 믿음만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안 보여도 믿음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 그것이 복 된 삶의 마침일 것입니다. 

.

 


이번 박근혜 대통령 파면 사건을 보고 많이 힘드실거라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저 또한 3월 10일 11시 탄핵 파면 통보를 직장안에서 스마트폰으로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만장일치로 탄핵파면결정이라.... 정말 충격이였습니다.


10월 26일부터 페이스북을 통해 카카오톡, 카카오 스토리와 단톡방 지인들에게 종북좌파세력의 음모를 전하고 다녔기에, 친구들과 주변 직장동료의 조롱섞인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저에 대한 인신공격은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심각하게 좌경화된 언론과 앞으로 남은 대선 결과 적화의 위기가 제 마음을 무너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공의를 깨닫게 하여주셔서 위로를 다시 찾게 되었고, 글을 올려서 나의 백성을 위로하라는 마음을 주셔서 순종하고 올립니다.


작년 10월 26일 이 카페에 최순실 사태를 이용하는 종북세력의 음모라는 글을 적었습니다. (참고 링크 클릭)


그리고 이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과장되고 부풀려진 것이니 좀 더 지켜보고 박근혜 대통령을 판단하자고 글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의 자리로 들어가 나라와 민족과 이사태를 두고 기도하며 이 사태에 대해서 유심히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언론에서 터트렸던 모든 보도들이 거짓과 날조 조작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최태민 영생교 교주는 근거없는 얘기였고, 오히려 기독교 목사였다는 증거들이 나왔고, 박근혜 대통령 청와대 무당 굿판사진은 2008년도 한나라당 대표였을 때, 불교계측의 행사 사진이였고, 그 사진은 2012년도 대선 전, 야당에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기독교 표를 뺏기 위해 ?던 사진이였는데, 2016년 최순실 사건 터지자마자 또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당으로 묘사되었던 최순실씨는 대형교회를 다닌 증거가 감사헌금 등을 통해 나오게 되었습니다. 국정농단이라고 했던 JTBC의 테블릿 사건은 JTBC의 조작의혹이 더 분명하게 드러났고, 헌법재판소에 증거물로 채택되어지지도 않고 어디론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외에 고영태 일당의 녹취록 사건으로 오히려 최순실씨와 박근혜 대통령이 피해자임이 드러났고, 7시간 세월호 의혹 사건은 청문회와 야당라인으로 구성된 특검팀의 3개월의 집요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물적 증거나 단서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K스포츠재단 미르 재단 설립 금액에 대한 재벌에게 기부 강요와 뇌물죄는 재벌총수 청문회를 통해 지켜본결과 절대 강요 가 아니였고 이재용 특검수사 결과를 통해 뇌물죄는 미성립되었습니다.


당연히 탄핵당할 사유와 증거가 전혀 나오지 않았기에 저는 당연히 각하 또는 기각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법치주의에 의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달라고....


그러나 결과는 반대로 탄핵은 만장일치로 인용되어 대통령은 파면을 당하였습니다. 헌법에 위배된 정당한 탄핵사유와 증거와 자료가 있었으면 인정할 수 있었을텐데, 그런 증거와 자료는 전혀 없었습니다.


이 부분은 상당히 많은 분들이 동의 하실거라 생각합니다. 치우친 저만의 생각일 수도 있을거라는 판단에 페이스북을 통해 카카오톡 단톡방을 통해 직장 동료와 지인들 중 진보와 좌파성향을 가진 분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아무도 탄핵사유의 정당성을 제시하는 분들이 없었습니다. 그냥 언론에서 내보내는 검증되지 않은 찌라시 의혹 정보들이 다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 대해 사실들을 객관적 근거로 반박해 드렸습니다.


그래서 인정하는 분들도 계셨고, 기분이 상해서 "너 일베냐? 박사모냐? 등 인신공격성 말투로 화답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저는 이 사태에 대해 종북세력과 단일세계정부를 위한 글로벌리스트들의 음모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헌법에 위배된 탄핵사유가 정당하다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지만 인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을 듣는데 탄핵소추안에 제시한 위반사항의 결정적 증거는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충격이였지만 다음 날 원수 마귀사단은 막장의 길앞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위배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롭고 정의롭고 의로운 재판장이시며 인류의 창조자이시며 통치자이십니다. 그 분께서 이땅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데는 질서가 있고 법칙이 있습니다. 당연히 전지 전능하신 분이지만, 그 능력을 스스로에게 맹세하신 자신의 말씀 성경 66권에 두시고, 이 땅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아무리 선을 베풀고 싶으셔도 말씀하신 성경에 법칙안에서 행하실 수 있으며, 원수 마귀사단이 아무리 악을 발하고 싶어도 말씀의 질서를 벗어나 마음대로 악을 발할수 없습니다.


이게 영계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맹세하신 말씀을 단 한번도 벗어나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끊임없이 하나님에게 낚여서 질서를 어겼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원죄도 없고 자범죄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사건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천국갈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는 공의의 말씀을 실현하기 위해 로마 병사의 창으로 피한방울 남김 없이 다 쏟으셨습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이 죄사함의 영적 권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무턱대고 죄를 사해주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의 완전한 공의입니다.


로마서 13장 1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불변하는 진리의 하나님 말씀입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세우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또한 내리실 분도 하나님입니다. 이 사태를 보고 누군가는 하나님께서 박근혜 대통령 개인의 죄때문에 내리셨다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3절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헌법에 의해 탄핵당할 정당한 사유에 의해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당했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내리신게 맞습니다. 그러나 헌법에 의한 정당한 사유와 증거는 전혀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울왕이 하나님을 버리므로 하나님도 사울을 버리사 함께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악신이 사울왕을 사주할 권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치광이처럼 살다 무당에게 사주를 받고 거짓 사무엘의 영에 패배의 거짓 메세지를 받고 스스로 전의를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사기를 잃어버린 전장의 장수가 어찌 전쟁에서 승리할수 있겠습니까? 결국 전쟁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심판은 이렇게 정당성을 가지고 집행되어집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고 섬겼던 사울왕과 비교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이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시키려면 악한 영으로 강하게 역사하여 탄핵할 죄를 범하게 만들어 그 죄를 가지고 참소하여 정당하게 탄핵을 집행하여야 공의에 합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7만여 교회와 700만 성도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나라와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였기에 성령님께서 보호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대통령에 대한 기도는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공의를 무시하고 말도 안되는 음모로 탄핵판결을 만장일치로 이루었기에, 이건 하나님의 공의에도 어긋납니다. 현실은 정의가 무너진 것으로 보이지만, 영적 세계에서는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더욱 강하게 세울 명분의 공의가 만장일치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지만 실상이요 근거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공의의 명분을 대한민국에 어떻게 세우실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전세계 200여개 나라를 통치하시고 75억 인구 한명한명을 다 계획하시는 그 주님앞에 방법을 맡겨드려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좁은 생각 안에서의 좋다고 하는 방법일 수도 있고, 나쁜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멀리 보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기도하셔야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에게 맹세하신 말씀을 벗어나 통치할 수 없는 공의로운 하나님입니다.


1938년부터 1945년동안 한국교회는 교단 차원, 민족적 차원으로 일본천왕 태양신에게 경배하였습니다. 그래서 원수마귀 사단은 신명기 28장인 불순종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가지고 이 나라가 이렇게 우상숭배를 하였으니 불순종에 대한 심판의 결과를 집행해달라고 하나님께 참소하는 것입니다.


이때 민족적 차원의 회개가 없으면 공의 가운데 그렇게 집행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심판을 집행할 어리석고 악한 왕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PS. 이번사태로 낙심한 형제 자매님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사태에 대한 긍정적 공의의 측면만을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민족적 교회의 교단적 차원으로 지은 죄에 대한 명확한 합당한 회개의 열매(합당한 열매이여야 합니다)가 없으면 그 죄에 대한 심판의 댓가는 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이 나라 교회에 저를 포함 수많은 죄악들이 넘쳐 흐릅니다. 그러나 민족적, 교단적 차원의 죄악은 바로 WCC입니다. 우리는 잊었지만 영계에서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없다면 그 댓로 죄가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번 사태로 무려 4개월이 넘게 그것도 매주 토요일 생업도 내려놓고, 사업도 내려놓고, 직장도 내려놓고, 가족도 소홀해지고, 이동 경비 시간 등 소모된 이 모든 것들도 심판에 대한 공의를 치루는 일부입니다.


만약 60일 뒤 대선에 우리가 원치 않은 사람이 뽑히면, 무려 5년이라는 시간동안 이 일이 계속 지속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60일이란 시간을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 동안 기도할 수 있으니까요... 정말 최선을 다해 나라와 민족의 죄악을 위해 자신의 죄악을 위해 철저히 회개하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탄핵사건은 만장일치로 하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이 나라를 어떠한 방법이 될지 전혀 모르겠지만 크게 사용할 공의를 얻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좀 더 힘내시고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합시다. 샬롬 마라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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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험한 이단”


복음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대한민국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시기한 사단도 우리나라를 집중공략하여 우리나라는 이단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들을 경계하기 위해 정통 이단사역자들이 때로는 모함과 핍박을 받고 때로는 신변의 위험을 무릅써가며 힘쓰고 애쓰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목사님들이라면 이단사역을 외면하거나 방관하지 마시고 사역자들과 협력하여 잡풀처럼 번성하며 번져나가는 이단들을 뿌리 뽑을 수 있도록 이단사역에 나서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나라 이단사역자들이 싸우고 있는 공식적 이단들 외에 우리가 경계해야 할 위험한 이단은 어디일까요?


복음이 없는 정통교회가 가장 위험한 이단입니다. 어쩌면 이런 이단이 공식적 이단보다 훨씬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양들을 복음으로 인도하지 않으면서도 성경을 벗어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순종과 경건과 열심을 요구하고 목사 자신의 정직성과 겸손을 내세우고 논리가 명쾌하여 말솜씨까지 좋으면 이런 교회는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지며 교인들이 몰려들어 인기있는 교회가 되고 큰 교회가 됩니다.


그러나 복음만 전하는 진짜 교회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습니다. 이게 복음의 원리입니다. 복음은 인기가 없습니다. 복음만 전하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이것저것 섞지 않으면 맛이 없기 때문에 복음만 전하면 당연히 인기가 없고 무능해 보입니다.


무교병은 맛이 없습니다. 율법을 가르치지 않고 복음만 전하는 사도바울도 오히려 사도의 자격을 의심받고 말솜씨가 없다고 배척당하고 인기가 없었습니다.


유명 목사님들은 자기 사욕을 좇는 양들에게 이것저것 누룩을 섞어 유교병을 맛있게 만들어서 양들에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양들은 맛있는 유교병을 좇아 큰 교회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바른 교훈을 받지 않는 시대입니다.


오늘의 현상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미리 예언하고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딤후 4:3)


자기 사욕이 무엇일까요? 자신의 이성과 지성과 감성을 기준으로 옳다고 믿는 것을 좇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먹던 기름진 음식을 좇았던 것과 같습니다.


유명 목사님들은 비논리적인 십자가 복음은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에, 가급적 언급을 삼가고 성경구절에 애굽의 교훈이며 양념인 파와 마늘과 부추 등을 잘 섞습니다. 즉 양들이 옳게 여기는 겸손과 착하고 선한 행위와 세뇌된 믿음을 강조하며 아직 복음도 깨닫지 못한 교인에게 헌신봉사를 요구하고 이를 중점적으로 설교합니다.


누가 들어도 지당하신 말씀이니 책잡는 사람도 없습니다. 또 유식한 양들의 사욕을 만족시키려 돈을 주든지, 표절을 해서라도 박사학위를 따면 목사님을 유식하게 봅니다.


그러나 이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십자가복음은 섞이면 안 됩니다. 애굽을 떠날 때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었습니다. 섞지 않은 무교병이 맛은 없지만 생명을 얻게 합니다.


쓴 나물은 입에서는 쓰나 뱃속에서는 달게 됩니다. 즉 복음이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나 심령에서는 구원의 감격이 생수처럼 솟아납니다.


하나님께서 포도원에 종자를 뿌리지 말고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며 또 누룩을 넣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복음에 다른 것을 섞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기름진 음식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고 있었습니다. 잘 이시겠지만 하늘에서 내린 만나는 생명의 떡으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만나보다 애굽의 기름진 음식을 더 좋아했습니다. 즉 애굽에서 섬긴 여러 신들이 좋았던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애굽신들에게 무병장수, 만사형통, 부귀영화를 구했습니다. 생명의 말씀보다 이것을 그리워하고 육신의 것을 원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원한 메추라기가 잇 사이에서 씹히기도 전에 재앙이 임했습니다.


오늘날 유명목사들은 복음에 여러가지를 섞습니다. 기복신앙이며 축복신앙인 부귀영화와 율법적 선한 행위에 여러 이적이 나타나는 표적들을 섞어 양들에게 먹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저것을 덕지덕지 매달고는 천국 문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국 문은 오직 십자가복음으로만 통과할 수 있는 좁은 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참 목사일까요? 참 목사는 두 가지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첫째, 양들에게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기름진 꼴인 예수의 살과 피를 먹이는 목사가 참 목사입니다.


양들은 죄인이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죄인이 아니면 십자가는 필요 없습니다. 죄인임을 크게 깨달을수록 십자가도 크게 다가옵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인범이나 강도들에게만 죄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은 환경과 조건과 사고를 갖추면 그들과 같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십자가의 우편강도입니다.기름진 꼴이란 생명의 떡인 예수의 살과 피 입니다. 성경은 모두 예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로 해석되지 않는 꼴은 헛된 꼴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참 목사는 양들을 십자가 밑으로 인도하여 기름진 꼴을 먹게 하며 은혜의 생수를 마시게 합니다.


둘째, 참 목사는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예배드리고 나올 때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함이 심령에 차면 참 목사입니다. 목사든 평신도든 죄 씻음을 받아야 할 추악한 죄인에 불과함을 알아야 참 목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는 마귀의 속성을 잘 아는 사도들은 자신들을 우러러보는 사람들을 오히려 꾸짖었습니다. 사도들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사도들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오늘의 양들은 유명목사들을 칭찬하는 글들로 인터넷을 도배하고 또 행여 그들을 비판이라도 하면 벌떼같이 덤벼듭니다. 정통으로 포장하고 현란한 말솜씨로 인기를 얻으며 화려하게 각광을 받고 평탄한 길을 가면서 십자가를 살짝 비켜가는 목사는 거짓목사입니다. 이들이 실은 가장 위험한 이단입니다.


십자가복음을 축소, 왜곡시키고 예수를 성경의 한 귀퉁이로 몰아내며 영광을 가로채는 거짓 목사들이 가장 위험한 이단들인 것입니다.



[출처] 가장 위험한 이단

주기철 목사 마지막 설교

나의 5종목의 기원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지난 7개월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특별히 다섯가지 종목을 들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 시간 그 기도내용을 중심으로 사랑하는 성도들 앞에 "5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잠시 기도) "오, 하늘에 계신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번에야말로 순교의 영광을 허락하시는가 싶더니 또 풀어주시어 이렇게 강단에 다시 서게 되었나이다. 아직까지 제가 받은 핍박과 고난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분량에 이르지 못한 걸 알고 있사오나, 할 수만 있다면 이 고통스런 육신을 떠나 하루라도 빨리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옵나이다. 사랑하옵는 주님이시여!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 간악한 마귀의 흑암권세로부터 지켜주시옵소서! 우리의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주님의 강하신 손으로 붙잡아 주시옵소서! 빛 되신 주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저 어두움의 사망권세를 물리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저 불쌍한 어린양들을 천국가는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인도하시옵소서! 이제 이 종이 선포하는 주님의 말씀에 은혜 받고 힘을 얻어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믿음이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5종목의 나의 기원!

첫 번째 저의 기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내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내 가까이에 뻗어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만물이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숨쉬는 인생은 모두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사망의 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 것입니다. 죽기가 무서워 의를 버리고 죽음을 피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도의 우두머리 베드로도 죽음이 두려워서 가야바의 법정 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계집종 앞에서도 세 번이나 맹세하였으니 누가 감히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제왕(帝王), 장상(將相), 재사(才士), 가인(佳人)도 다 죽었고 성현(聖賢), 군 자(君子), 위인(偉人), 걸사(傑士)도 다 북망산(北邙山)에 가 묻혔습니다. 죄 없이 억울하게 죽는 약자도 불쌍하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죽는 사람, 가엾은 아이를 두고 가는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도 허다합니다.

폐결핵 환자로 요양원에 눕지 아니하고 예수의 종으로 감옥에 갇히우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동차에 치여 죽는 사람도 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영광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수백번의 죽음을 당한들 무슨 후회가 있으리오만은, 주님을 버리고 천년 살고 만년 산다한들 그 무슨 저주스런 삶이리오!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을 욕되게 마옵소서! 주님은 영원토록 찬양 받으실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두 손과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하겠습니까? 다만 일사각오(一死覺悟)가 있을 뿐이올시다.

(설교 중간에 잠시 기도)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3일만에 부활하신 주 님!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여! 이 부족하고 연약한 종에게 부활의 믿음을 굳게 하사 나도 부활을 믿고 사망의 권세를 내 발 아래 밟게 하소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나도 부활하리로다!
(아멘! 할렐루야!!!)

(발을 쾅 구르며)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 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 버리지 마십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이보다 두려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번 죽어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얻는다면 이보다 즐거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주 목사가 죽는다고 결코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주님 밖의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 수는 없습니다. 더럽게 사느니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을 따라 나의 주님을 따라서 가는 죽음은 나의 소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 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푸르르고 백합도 시들기 전 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요한은 33세, 스데반도 청장년에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의 제물이 되겠습니다. 나에게는 오로 지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나의 두 번째 기원은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저는 이 제목을 가지고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고문이 끈질긴 만큼 나는 더욱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웬만한 믿음 가지고는 오래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을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단 번에 죽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1년, 10년 계속하는 고난은 참으로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고통을 면하고 도리어 상 준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말 한 마디만 타협하면 살려 주는 데는 용감한 신자들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같이 연 약한 약졸(弱卒)이 어떻게 장기간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예수께서는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4)고 신신 부탁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도 십자가를 직면하자 그 받으실 고 난을 인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고 십자가상에서 그 혹독한 고통을 이기셨습니다.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질 때, 그 고통이 어떠하였으 리요! 나와 여러분의 피, 억만! 죄인의 죄 짐을 대신 지실 때 그 고통이 너무나 심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고통의 소리를 우주 도 감당하지 못하여 태양도 빛을 잃고 그 고통의 핏방울은 땅도 감당할 수 없 어, 지축이 흔들리어 지진이 터졌던 것입니다. 내 주 예수 날 위하여 이렇게 고 난을 참으셨는데 내 당하는 고난이야 그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그러므로 처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만 나중에는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지어줍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 주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아갑시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이제 받는 고난, 길어야 70 년이요, 장차 받을 영광은 천 년 만 년 영원무궁합니 다. 지금 받는 고난은 어차피 한 번 죽어 썩을 몸이 죽는 것 뿐이요, 장차 받을 영광은 예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생불사의 몸이며 영원 영화의 몸입니다. 야고보서 5장 7절에도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재림하시는 그 날 우리 모두는 부활할 것이며, 우리 앞에는 천 국 가는 밝은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 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겠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 하는 수욕(羞辱)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나의 세 번째 기원은 "노모(老母)와 처자(妻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입니다. 저는…… 80이 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남의 아들로의 의무도 지중하고 남의 가장, 아비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부모를 생각하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어머님이 나를 낳아 애지중지 키우고 가르치신 은혜가 태산같이 높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잡혀 다니는 불효자의 신세, 어머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내 어머님은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키우신 이 몸이 남의 발 길에 채이고 매맞아 상할 때 그 가슴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춘풍추우(春風 秋雨) 비바람이 옥문에 뿌릴 때에, 고요한 밤 달빛이 철창에 새어들 때에 어머니 생각 간절하여 눈물 뿌리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님을 봉양한다고 하나님 의 계명을 범할 수는 더욱 없습니다. 주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당신의 아픔도 잊으시고 십자가 밑에서 애통하는 어머님을 재차 요한에게 부탁하실 때의 심정 어떠하셨을까요? 십자가 밑에서 가슴 치며 애통하시는 마리아의 아프신 가슴 어 떠하셨을까요? 오! 당신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도 부탁 합니다. 불효한 이 자식의 봉양보다 무소불능 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을 부탁하고 나는 주님 자취를 따라 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사랑하는 어머님을 80넘어 늙으신 내 어머님을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연모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 다. 내 아내는 병약한 사람으로 인생을 내게 바치었거늘 나는 남편된 의무를 못 합니다. 병약한 아내를 버려 두고 잡혀 다니는 내 마음 또한 애처롭습니다. 오! 주님께서 당신의 신부 되는 어린 교회를 뒤에 두고 골고다로 나가시는 심경이 어떠하셨습니까? 병든 내 아내도 주님께 부탁하고 불초(不肖) 이내 몸은 주님의 자취, 주님의 눈물의 자취를 따라 가렵니다. 연약한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세상에 제 자식 돌보지 않는 자 어디 있으며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지 않는 자식 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도 4명의 아들이 있어 어린것도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키우고 가르칠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우는 어린것을 뒤에 두고 잡혀 다니는 마음 또한 애처롭기 한정 없습니다. 아버지가 나라의 역적으로 잡혀 죽으면 그 자식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짐승도 제 새끼를 사랑하거든 어린 자식을 두고 죽음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는 내 마음 끝없이 처절합니 다. 주님,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당신의 자식 같은 제자들을 앞에 모으시고 하시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눈물어린 말씀이었고 교훈하시는 말씀 말씀이 피끓는 소리였습니다. 어린 자식과 같이 연약한 제자들을 뒤에 두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주님의 마음 어떠하셨으리이까? 연약한 제자들을 뒤에 두시고 골고다로 향하신 주님께 저의 자식도 부탁합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저의 자식들도 주 님 품에 부탁합니다.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아버지시여! 저에게는 주님께서 맡기신 양떼, 사랑하는 교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저들 내 양떼를 뒤에 두고 다 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험한 세대, 악한 세상의 이리 떼 중에 내 양들을 두고 떠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맡기나이다. 대목자장이신 예 수님 손에 이들을 맡기옵니다.

저의 어머님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저의 병든 아내도 주님 손에 부탁하는 것이 이 못난 사람의 도움보다 좋은 줄 압니다. 저의 어린 자식들도 자비하신 주 님 품에 두는 것이 변변치 못한 아비의 손으로 기르는 것보다 복될 줄 믿습니다. 나의 양떼도 선한 목자 주님께 부탁합니다. 병들고 상한 자를 주님이 싸매어 주시고 낙심하고 범죄한 자를 주님 보혈로 사유하여 주옵소서. 악하고 험한 세 상에 양떼를 두고 가는 이 마음 차마 못할 일이올시다. 저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주님 지켜 주옵소서.

나는 마지막으로 이 산정재의 강단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 주 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렵니다. (떨리는 목소리, 깊은 흐느낌, 흐르는 눈물, 흐느끼는 회중. 감시하던 일본 형사들도 슬금슬금 교회당 밖으로 나가버림)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내 어머니, 내 아내, 내 자식들을 여러분께 짐 지울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신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여러 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은 견딜 수 있으나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고 철석 같은 마음도 변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자식이 목메어 우는 소리에 순교의 길에서 돌아선 신자도 허다합니다. 인간의 얽히고 얽힌 인정의 줄이여, 나를 얽어 매지 말라! 부모나 처자를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우리 주님께 합당치 아니 합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여러분의 믿음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네 번째 기원은 "의에 살고 의에 죽도록 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신민(臣民)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의 정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갈공명은 무너지는 한(漢)나라를 붙잡고 오장원(五丈原)에서 죽기까지 국궁진쇄 (鞠躬盡鎖) 사이후이(死而後而), 즉 죽기까지 충성했습니다. 인간끼리의 의도 이럴 진대, 하물며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야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오직 주를 위하고 또 그 교회와 그 의를 붙들고 "국궁진쇄 사이후이", 죽도록 충성하여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백이(伯夷) 숙제(叔齊) 두 형제는 은(殷)나라의 신민으로서 주(周)나라에서 살 수가 없어 수양산에 숨어 서산(西山)의 고사리를 뜯어먹다가 굶어 죽으니 백세청풍(百世淸風) 모두 그 고상한 인격에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정몽주는 망하는 고려나라를 위해서 선죽교에다 피를 뿌리니 대(竹)야 났으랴마는 그 절개 대보다 청청창창 시푸르도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건 없건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이와 같은 시를 읊은 그의 충절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귀한 것입니다. 자기가 속한 이 땅, 이 나라에 대한 의가 이러하거늘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 변할 수가 있으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의 대의를 지키느라 풀무불에도 뛰어들었고,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사자굴 속에도 들어갔습니다. 이 모두가 오직 예수를 사랑하는 까닭에 믿음으로 행한 일들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니 용광로 같은 풀무불이 두려우랴! 예수를 사랑 하니 굶주린 사자굴도 두렵지 않도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렸습니다.

백제나라의 도미(都彌) 부인은 개루왕의 협박과 부귀의 유혹도 물리치고 두눈 뽑힌 남편 도미를 찾아 일엽편주 조각배로 만경창파 서해(西海) 바다에 떠서 황주(黃州) 마을 뫼 아래서 한 평생 그 남편을 섬겼습니다. 이는 우리 한국의 딸들 이 정절을 지키던 피눈물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 되어 주 님 향한 정절을 변할 수 있겠습니까?

주후 2백년 카르타고의 벨빼추어는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에 젖먹이와 늙은 아 버지의 우는 소리를 뒤에 두고 형장에 나가서 사나운 소뿔에 찔려 죽었습니다. 천고(千古)의 열녀(烈女) 벨빼추어는 지금 주님의 나라에서 승리의 찬송을 부르고 있을 것입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진정한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그리 스도의 신부는 신사(우상)에 절하지 못합니다. 이 몸이 어려서부터 예수 안에서 자라났고 예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 번 맹세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 오늘, 이 몸 구구도생이 어찌 말이 됩니까?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 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이몸 죽고 죽어 열백번 다시 죽어도 주님 향한 대의정절 변치 아니하겠습니 다. 십자가, 십자가, 주님 지신 십자가 앞에 이몸 드립니다. 우리 초로 인생 살면 며칠입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살으십시다! 의를 버리고 더구나 예수께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 는 것은 개짐승의 삶만 같지 못합니다.

여러분! 예수는 살아 계십니다. 부디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으십시다. (흐느끼는 교우들을 바라보다가 찬송가 196장을 소리 높여 부르기 시작)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주의 은혜로 대속하여서/피와 같이 붉은 죄/눈같이 희겠네……/(3절까지 부른 다음, 숨을 돌려 다시 설교)

나의 다섯 번째 기원은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입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혹여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아 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가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황금길을 걷게 하시옵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 하나이다.

받아주소서! 받아주소서! 아멘!!! 할렐루야!!! 할렐루야!!! 오 주여, 영광 받으옵소서!!!

이 터질 것 같은 벅찬 기쁨을 주신 주님께 모두 감사의 박수로 영광 돌립시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찬송가 384 장을 함께 부름) "내 주는 강한 성이요/방패와 병기 되시니

성령의 사역[1] (2부)

 

 

성령의 사역에 대한 개혁주의적 이해를 위한 5인의 미국 칼빈 신학교 교수들(캘덜먼, 볼트, 쿠퍼, 훌스터, 스미스)의 대담[2]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캘덜먼: 좀더 세계적인 관점에서 성령의 권능에 대해 얘기해 보자. 우리 선교사들은 우리가 북미권에서 겪는 것보다 더 극적인 힘 - 그들 자신이 빛과 어두움 사이에서 겪는 - 에 관해 증거하는 것 같다. 적군은 다른 문화에서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하나님도 다른 문화에서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하시는 걸까?

훌스터: 나는 당신의 가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적의 힘은 세계 모든 곳에서처럼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정말 실제적일 뿐만 아니라 참으로 가시적이다. 나는 상당 기간동안 북미개혁교단(CRC)의 한 교회를 섬겼고, 비록 적군들이 다른 방법으로 자신들을 드러냈었지만 그곳에서 적들의 힘과 어둠의 권세를 잘 인식할 수 있었다. 가정폭력, 강간,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중독 문제들을 취급하게 될 경우, 당신은 실제로 당신에게 소리치는 귀신을 상대하진 않겠지만 적군은 그처럼 현실적이고, 그러한 상황들 가운데서 당신은 인도네시아에서 만큼이나 성령의 권능이 필요하다. 대적들의 힘이 실제적이고 교활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루이스(C. S. Lewis)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The Screwtape Letters)』를 읽는 것이다. 설교를 하는 가운데 내가 깨달은 점들 중 하나는 우리가 지속적으로 청중들에게 대적이 그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는 바로 그 지점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쿠퍼: 훌스터의 주장에 동의한다. 나 또한 북미의 기독교가 [1692년에 있었던] 역사적 살렘 마녀재판 이후엔 천사나 귀신에 관한 부분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매우 경건한 자세로, “나는 천사를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천사들이 뭔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샤머니즘이나 원시 종교의 강신술적 배경에서 자란 제 3세계의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일들에 정말 관심이 많다.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공언하는 거의 모든 카리스마적 은사들은 샤머니즘이나 강신술에서, 그리고 (그것들이 성령에 관한 어떠한 성경적 표현일 수 있는 이상으로) 샤머니즘적일 수 있는 징후들 가운데서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매우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당신이 그것을 쫓아내기 위하여 이름을 부르고 쫓겨가야 할 곳을 정해줘야 하는 지역적인 귀신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성경에는 그것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샤머니즘에서 그것은 일반적인 풍습이다. 샤먼(Shaman)은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영적인 세계의 달인이다. 동물소리, 웃음(소리), 영적 권위자가 손을 댓을 때 정신을 잃는 것, 방언, 병고침, 사람을 저주함 ? 이런 종류의 일들은 다른 많은 종교에서도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우리는 매우 분별력 있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오순절운동과 [오순절운동과 은사주의운동(Charismatic Movement)에 이어 새롭게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는 운동인] 제3의 물결 운동(Third Wave Movement)에 관련된 사람들은 이런 모든 위조품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영들을 정확히 분별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우리가 이러한 일들에 대해 얼마나 정통한지 궁금하다. 나는 이 점이 우리 동료 교수들인 룻 터크(Ruth Tucker)와 마리아노 아빌라(Mariano Avila)가 그들의 소수파-보고서에서 교단총회에 주의를 주고자 애썼던 것들 중 일부라고 생각한다.

캘덜먼: 이제 성령이 어떻게 예배와 설교에 관련되는 지에 대해 얘기해 보자.

훌스터: 오늘날 예배에 대한 많은 경험적 이해가 있다. 만일 음악이 좋고 설교가 좋다면, 성령은 그날 그곳에 있었다. 우리는 때로는 예배가 그리 좋지 못할 지라도 좋았을 경우처럼 성령이 그곳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성령이 예배당에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 아니다. 그것이 예배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성령은 예배당에 있다. 인간의 경험은 하나님의 임재 (the presence of God) 의 척도가 아니다.

볼트: 계획된 즉흥성은 주의 깊게 준비된 기도나 설교보다 성령의 임재에 관한 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훌스터: 모든 설교자는 최선이 아닌 설교를 한 경험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방의 햄버거 헬퍼(Hamburger Helper: 제너럴 밀스라는 미국 식품그룹에서 생산하는 인스턴트 파스타)이다. 그것은 그 역할을 할 것이지만, 필레미뇽(filet mignon: 값 비싼 뼈가 없는 소고기 부위로 안심이나 등심부위를 나타내는 프랑스 조리용어)은 아니다. 당신은 설교단에 서서 그것으로 전력을 다한다. 끝에 당신은 부끄러워서 강대상 뒤쪽에서 조금 고개를 숙일 것이고, 설교 후엔 변함없이 누군가 다가와서 “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설교를 통해 오늘 정말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라고 말한다. 당신은 자신의 겸손이 잘 자리 잡혔는지 확인해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설교자로서의 당신에 관한 일이 아니고 다른 무엇인가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설교자로서의 그런 경험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캘덜먼: 나는 잔디밭 축제에 나타난 스컹크가 되는 것이 정말 싫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얘기된 어떠한 것도 틀렸다 생각하지 않지만, 북미개혁교단(CRC)을 떠나는 상당 수의 사람들이 있다는 현실을 우리는 직면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책임을 져야 할] 희생양으로 삼아 그들이 스스로의 신앙유산의 부유함을 모르고 있다고 성급하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적절한 대응이 아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왜 당신은 떠났나요?” 라고 물을 때, 그들의 대답을 관통하는 주제는 종종 이렇다: “있잖아요, 저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 싶어 정말 견딜 수 없었어요. 하지만 제가 매 주일마다 다녔던 교회에서는 그걸 볼 수 없었어요. 목회자와 찬양인도자와 전체 회중들 중 그 누구도 참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깊이 믿는 것 같지 않았어요. 시늉만 많았지요.” 사람들은, 특히 젊은이들은 북미개혁교단(CRC)을 떠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보길 갈망하고 있다.

 

훌스터: 나는 우리가 증거하는 일에 취약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 가운데 행하시는 일을 분명히 말할 줄 모른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서로 이야기해야 할 지 모른다. 증거(testimony)는 당신 삶에서의 하나님의 권능을 증언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 우리가 예배와 회중들의 삶을 소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증거의 능력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스미스: 아마 그것은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청하는 일에 있어 더 많이 개방되도록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이라고 부르게 될 수도 있는 바를 향해 나아가는 다른 전통에서의 관행이다. 봉헌 증거에서부터 “누가 오늘 아침에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는가?”로 이동하는 것은 그리 큰 발전은 아니고 발전을 위한 좋은 예가 될 순 있겠다.

 

쿠퍼: 분명히 우리는 북미개혁교단(CRC)을 떠나는 이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삼을 순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오랫동안 열심히 지켜봐야 한다.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육체적 건강과 영적인 건강 사이의 비교가 알려 주는 바가 있다. 나는 스스로의 건강을 당연하게 여기고 내가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있다. 아니면 나는 스스로에게 주어진 건강이란 선물을 강화하기 위해 먹는 것을 조절하고 운동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 표지들 중 하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에서 자라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중 많은 이들은 그 선물을 받고도 그것을 양성하고 있지 않는 현상황의 기독교에 만족하고 있다. 내 생각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 때 그들이 찾기 원하는 바는 생명력과 성숙이다. 그들이 갈구하는 것은 성령의 특별한 카리스마적 증거라기 보다는 중생의 일반적 열매들이다. 내 생각엔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아마 어떤 교회에서는 대다수가, 영적 게으름뱅이 구경꾼이다.

 

훌스터: 많은 사람들이 영적 게으름뱅이 구경꾼으로서 예배에 참석한다. “제가 불이 붙고 변화되는 건 예배 인도자인 당신에게 달렸어요.” 하지만 예배는 이런 생각이나 말을 하는 사람들의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건강한 예배가 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뭔가 해야한다는 각오를 하고 예배에 참석할 필요가 있다. 당신의 교회가 매주 크게 한 건 하지 못하는 설교자를 두고 있을 때, 어떻게 당신은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며 적극적으로 설교를 들을 수 있을까? 예배 음악이 당신의 기호에 맞지 않을 경우, 당신은 어떻게 능동적으로 예배드릴 수 있을까? 그것은 “당신이 예배로부터 무엇을 얻었는가”의 문제일까 아니면 “당신이 예배 속으로 무엇을 가지고 왔는가”의 문제일까? 우리는 예배를 통한 스스로의 영적 성장에 대해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볼트: 우리는 또한 겸손히 성령을 의지하는 데 있어 분명하지 못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 듯 하다. 우리는 칼빈주의자들이지만 미국의 “할 수 있다-주의 (can do-ism)”의 배경에서 우리는 “할 수 있다 (can do)”의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가운데 역사함이 없이는 죽은 교회이다 라는 인상을 우리가 늘 주고 있는 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캘덜먼: 이제 성령과 기도에 관해 잠시 얘기해 보자.

 

훌스터: 나는 최근 그들의 당회장이 당회에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자신들을 이끄는 가에 대해 얘기하는 어떤 장로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그들이 당회 때 얼마나 많은 시간 기도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는 “시작할 때와 마칠 때” 라고 대답했다. 나는 다시 “그러면 당신들은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힘든 일에 대해 얼마나 오래 얘기하는가?” 라고 물었다. 그는 “글쎄, 우린 정말 그런 얘기는 하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나는 “아마 당신들의 효율성이 당신들의 영적 리더십을 이기고 있는 것 같다” 라고 대답했다. 만일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고 교인들의 영적 지도자로서 그들의 필요를 직면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제대로 인도할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기도와 열정의 사람인 영적 지도자들을 길러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요구되는 만큼 성령에 민감해 질 수 없을 것이다.

 

캘덜먼: 우리는 기도를 교회 내에서의 또 다른 프로그램으로 한정시키지 않으면서 더 깊고 더 충만한 기도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서로에게 도전을 줄 필요가 있다. 이 일은 (생명력 있는 기도생활을 위한 조직신학적 가르침과 실천과 책무 등의) 기도를 위한 프로그램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어렵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교인들 가운데 매우 깊은 기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대개 오래 전부터 그런 기도의 삶을 살아왔고 교인들을 보다 잘 기도하도록 돕기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런 기도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주의 깊게 인정해야 한다. 나는 기도 갱신을 위한 프로그램을 평가절하 하길 원치 않는다. 나는 또한 참으로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면서도 그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각 교회마다 있는 수십 여명의 성도들을 간과하기도 원치 않는다.

 

스미스: 다시금 그 주제가 떠오른다: ‘일상적인 일이 얼마나 특별한가, 또는 우리의 삶 전체에 걸친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얼마나 일상적인가!’

 

 

http://reformedjr.com/board05_02/4876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나는 둘째 부인과의 결혼도 실패로 돌아가면서 마음 가운데 미국에 모든 것을 걸어보기로 했다. 한국에서의 결혼 실패 그리고 삼청교육대의 악몽 등으로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인생이지만 새로운 땅, 기회의 나라인 미국에서 과거의 모든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새롭게 살기를 원했다. 미국으로 이민가는 공상과 망상 속에 있다가 미국에 있는 둘째 형에게 전화를 해서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떼를 썼다. 그런데 둘째 형은 전화를 받을 때마다 온갖 싫은 소리를 하며 나의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않은 채 전화를 끊곤 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에 국제전화를 한 번 하려면 큰 마음을 먹고 해야 할 만큼 적지 않은 돈이 들었다. 우체국에서 국제 전화를 신청해 놓고 한참을 기다려야 어렵게 전화가 연결되곤 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힘들게 전화가 연결되면 고작 실컷 욕이나 먹고 일방적으로 전화통화가 끊어지는 것이었다. 낙심이 되면 될수록 마음 가운데는 더욱 강한 오기가 생겼다. 
  
"그래도 나는 꼭 미국에 갈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미국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그 길을 반드시 열어 주실 줄로 믿는다." 
  
나는 미국 이민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야말로 올인이었다. 형님이 나에게 안 좋은 소리를 하든 말든 나는 계속해서 돈 이 좀 모아지고 시간이 될 때마다 전화해서 꼭 나를 미국으로 초청해 달라고 애원했다. 형님의 반응은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 다. 그래도 나는 계속 편지도 보내고 안부 전화도 정기적으로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렇게 찰거머리처럼 형님에게 초청장을 보내달라고 애걸복걸한 끝에 드디어 초청장과 재정보증서를 받게 되었다. 실제로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기까지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었지만 나는 초청장을 받는 순간 이미 미국 땅에 도착한 사람처럼 흥분하고 가슴이 뛰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여권을 만들고 신체검사를 받은 후 드디어 미국 대사관에서 인터뷰 통지서를 받았다. 운명의 날이 다가온 것이었다. 나는 아들 성민이에게 옷을 깨끗이 입히고 인터뷰 시간보다 2시간 일찍 미국 대사관에 도착했다. 혹시라도 중간에 길이 막혀 인터뷰 시간에 늦을까봐 하루 전부터 노심초사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인터뷰를 한 미국 영사는 영화배우처럼 잘 생긴 백인이었다. 
  
"미국에는 왜 가려고 합니까?" 
  
"나는 미국에서 근면, 성실하게 새로운 이민자의 삶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부인과는 왜 이혼했습니까?" 
  
나는 솔직한 대답이 가장 효과적인 대답이라고 믿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상세히 이야기했다. 
  
"사실은 이혼한 아내가 두 번째 부인이고 성민이는 그 전 아내 사이에서 낳은 아이입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난 후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아내가 아이를 가끔씩 손찌검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아이의 얼굴에 퍼런 멍이 들 정도로 구타한 것을 보고 아내와 싸움을 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면서 결국은 이혼하게 됐습니다. 저는 아들을 위해서라도 꼭 미국에 가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싶습니다." 
  
영사는 아들 성민이의 얼굴과 내 얼굴을 몇 번씩 번갈아 가면서 슬쩍 슬쩍 보더니 미국에 가서 잘 살라고 말하며 여권에 도장을 꽝 찍어 주었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영사는 나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슬그머니 미소를 지어 보여 주었다. 함께 앉아 있던 성민이의 손을 꼭 잡고 미국 대사관을 걸어 나왔다. 이제 나는 다른 세상 으로 가는 것이었다. 
  
'이제 다 잊어버리자. 빨간 모자의 악몽도, 나를 버리고 도망 간 성민 엄마에 대한 분노도, 그리고 멀쩡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개패듯이 무차별 구타하며 반병신을 만들어 놓기를 즐겼던 전두환 군사 정권에 대한 원한도…. 이제 미국행 비행기를 타는 순간 태평양 한가운데 더러운 배설물처럼 다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출발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을 돌이켜 볼 때나는 그 모든 과거를 미국으로 건너오는 비행기 안에서 결코 버리지 못했다. 삼청 교육대의 악몽조차도 나는 지워 버렸다기보다는 마음 속 깊은 곳에 꼭꼭 덮어 두고 살아 왔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 난 후에 나는 알게 되었다. 완전히 치유되지 않고 덮어 두고 감춰 둔 마음의 상처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다시 악령처럼 마음 한 가운데서 들고 일어나 의식과 무의식중에 나의 생각을 크게 좌우한다는 것을…. 
  
나는 드디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거대한 비행기 동체가 몸을 부비는 듯한 둔탁한 소리를 내더니 어느 사이엔가 마법에 걸린 물건처럼 사뿐하게 땅을 떠난다. 비행기가 대기 위로 떠오르는 모습은 아직까지도 신비스럽기만 하다. 그 거대한 쇳덩어리가 많은 사람을 태우고 육중한 몸으로 사뿐하게 이륙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놀라운 느낌을 받게 된다. 비행기 창 밖으로 내가 살던 땅, 서울의 모습을 아련하게 내다 보았다. 자동차의 모습, 커다란 건물들 그리고 높은 산 등 모든 것이 콩알만큼 작게 보일 때쯤 내가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이 꿈이 아닌 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는 정말 새출발이다. 미국 땅에서 새롭게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 보자.' 
  
미국에 도착해서 둘째 형님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나는 거의 한 달 동안 밥을 먹으러 일어나기 힘들 정도로 몸이 아팠다. 미국에 오기 위해서 오랫동안 긴장했던 것이 한순간에 풀리면서 심한 열병을 앓았던 것이다. 몸에 열이 40도 이상으로 펄펄 끓었고 나는 그 아픈 가운데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여러 가지 신비로운 환상들을 보았다. 미국에 도착한 후 줄곧 40일 정도를 그렇게 끙끙 앓면서 지냈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 40일 동안의 아픔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한 출산의 진통과 같은 것이었다. 아픈 몸을 떨쳐버리고 겨우 음식을 조금씩 먹기 시작하면서 내 마음속에는 이상한 욕구가 생겼다. 교회에 출석해서 찬송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었다. 몸도 가누기 힘들고 살고 있던 곳의 인근 지리도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이리저리 수소문 끝에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한인교회를 찾아갈 수 있었다. 그 교회는 순복음교회였는데, 처음 교회 예배실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나는 마치 전기에 감전되는 듯한 짜릿한 감동을 느꼈다. 목사님의 말씀은 귀에 쏙쏙 잘 들어왔고, 전에는 잘 이해가 안 되던 성경 말씀도 한눈에 들어오며 뜻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놀라운 변화였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미 항공모함 칼빈슨호가 오늘 부산에 입항했습니다. 그와 함께 미국의 살인병기 부대인 SEAL Team6도 오늘 상륙했습니다. (오사마 빈라덴을 참수한 ㄷㄷㄷ한 부대)






이 시국에 북한 정권을 향해 던지는 경고 메시지일 것입니다.


작년에 김정은 참수작전인 작계 5015 훈련을 시작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미국은 적의 수뇌부만을 제거하는 작계 5015로 가장 작은 희생으로 적을 제압하는데, 이 작전으로 사담 후세인과 오사마 빈 라덴을 참수했습니다. 전면전인 제압 작계 5027 상황은 한반도내에서 절대 피했으면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배후세력으로 추측하는 글로벌리스트들과 이에 맞서는 트럼프 미 대통령의 거침없는 실행력…


한반도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위급하고 긴장이 고조된 상태입니다. 도무지 무슨 일이 터질지 알 수 없는 폭풍전야의 위중한 때입니다.


시국이 이렇게 급박한데도, 그져 아무 생각도 없이 선동 당한 줄도 모른 채, 대통령이 파면됐다고 깨춤 추고 밤낮으로 흥청망청대는 사람들.


★ F-22 띄우고, 미 항공모함 들어오고, 전술핵 B61이 거론되는 이 상황이 아직도 미국이 대한민국에 무기 팔아먹으려고 그러는 것처럼 보입니까? 정신 차리세요.


★ 대선 당시 연일 한국을 향해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하고 방위 분담금 독설을 날리던 트럼프가, 방위 분담금은 커녕, 요즘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를 공부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거나 존경 안 해도 됩니다. 자연히 진실을 알게 될 때가 분명히 있을 테니까요. 어쩔 수 없는 이번 조기 대선, 잘 판단하십시오. 아니 어쩌면 대선 자체가 연기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드반대" 어쩌고 "사회주의" 어쩌고 "재벌해체" 어쩌고, 이런 근시안적 사고에서 조금만 눈을 돌려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도 발전했으니 옛날과 달라서 절대 안 망하고 전쟁도 절대 안 나니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는 분들 제발!



- 글쓴이: 헤일리님




미 항공모함 칼빈슨호가 오늘 부산에 입항했습니다. 그와 함께 미국의 살인병기 부대인 SEAL Team6도 오늘 상륙했습니다. (오사마 빈라덴을 참수한 ㄷㄷㄷ한 부대)






이 시국에 북한 정권을 향해 던지는 경고 메시지일 것입니다.


작년에 김정은 참수작전인 작계 5015 훈련을 시작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미국은 적의 수뇌부만을 제거하는 작계 5015로 가장 작은 희생으로 적을 제압하는데, 이 작전으로 사담 후세인과 오사마 빈 라덴을 참수했습니다. 전면전인 제압 작계 5027 상황은 한반도내에서 절대 피했으면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배후세력으로 추측하는 글로벌리스트들과 이에 맞서는 트럼프 미 대통령의 거침없는 실행력…


한반도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더 위급하고 긴장이 고조된 상태입니다. 도무지 무슨 일이 터질지 알 수 없는 폭풍전야의 위중한 때입니다.


시국이 이렇게 급박한데도, 그져 아무 생각도 없이 선동 당한 줄도 모른 채, 대통령이 파면됐다고 깨춤 추고 밤낮으로 흥청망청대는 사람들.


★ F-22 띄우고, 미 항공모함 들어오고, 전술핵 B61이 거론되는 이 상황이 아직도 미국이 대한민국에 무기 팔아먹으려고 그러는 것처럼 보입니까? 정신 차리세요.


★ 대선 당시 연일 한국을 향해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하고 방위 분담금 독설을 날리던 트럼프가, 방위 분담금은 커녕, 요즘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를 공부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거나 존경 안 해도 됩니다. 자연히 진실을 알게 될 때가 분명히 있을 테니까요. 어쩔 수 없는 이번 조기 대선, 잘 판단하십시오. 아니 어쩌면 대선 자체가 연기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드반대" 어쩌고 "사회주의" 어쩌고 "재벌해체" 어쩌고, 이런 근시안적 사고에서 조금만 눈을 돌려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도 발전했으니 옛날과 달라서 절대 안 망하고 전쟁도 절대 안 나니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는 분들 제발!



- 글쓴이: 헤일리님




황교안 권한대행이 대선 불출마 선언, 그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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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온 곳: 주님오시는 발자국 소리/엘샤다이

하나님 '여성'으로 묘사…영화 <오두막> 흥행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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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기독영화 <오두막>이 흥행 반열에 오른 가운데, 하나님을 여성으로 표현해 논란이 되고 있다.ⓒ데일리굿뉴스 

 

미국에서 최근 개봉한 <오두막>이 주말 박스오피스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며 기독 영화로는 드물게 흥행 반열에 올랐지만, 영화상에서 하나님을 '여성'으로 표현해 논란이 되고 있다.

 

<오두막>은 전세계 46개국에 출간돼 2천만부 이상 판매고를 올린 2008년 미국 최고의 베스트셀러 윌리엄 폴 영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했다. <오두막>은 어린 딸을 잃고 절망 속에 살던 남자가 의문의 편지 한 통을 받으며 겪게 되는 이야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파파'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은 주인공은 막내딸을 잃은 오두막으로 향한다. 여기서 주인공은 자신을 '파파'라고 소개하는 여자와 함께 오두막에 머물며 믿을 수 없는 수많은 순간들을 경험하고, 상처를 치유해간다.

 

여기서 ''파파'라는 이름의 여성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일부 크리스천 관객들은 "하나님을 언급할 때 포괄적으로 묘사하거나 혼성으로 묘사하는 등 좀더 분명히 표현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이에 의 작가 토니 레인케는 "성경은 하나님을 어머니로 묘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성적 혹은 생물학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며 "하나님이 어머니로 언급돼선 안된다. 예수님이 생물학적 남자로 지상에 내려오셨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하나님의 행위나 성품을 설명하기 위해 잉태나 양육 등과 같이 여성적인 이미지의 단어가 사용된 예들이 많지만 여왕, 숙녀, 어머니, 딸 등 여성적인 호칭이 사용된 적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성경 전반에 걸쳐 사용된 여성적 이미지의 단어는 사도 바울을 포함해 하나님뿐 아니라 여러 남성에게도 적용 됐다"면서 "이같은 여성적 수사법 때문에 바울의 남성성에 의문이 제기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제언했다.

 

한편 영화의 원작인 소설 <오두막>은 뉴욕타임즈 49주 연속 1위, 워싱턴포스트 55주 연속 베스트셀러, 아마존 종합 베스트셀러 1위, 2008년 미국 최고의 베스트셀러,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Top 100으로 선정되며 지금까지도 전세계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또한 미국에서 2,888개 영화관에서 상영돼 총 1610 달러를 벌어들이기도 했다. 

 

김주련 ⓒ 데일리굿뉴스

가져온 곳: USA 아멘넷

 

 

때로는.../최송연



때로는,
우리의 기도가 외면당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나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주여....
우리의 기도는 결코 외면당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앞의 이 흑암은,
더욱 아름다운 길로 이끌어주시는 은총이며
당신만이 참 목자 되심을 나타내는
거역할 수 없는 진실이요, 확실한 응답입니다

 

 

2017/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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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과 사순절 소고(小考)

"언니, 우리 교회 주보에 'Ash Wednesday'라며 모두 엄숙하게 지키라는 예전에 볼 수 없던 문구가 있던데 그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중요한 의미가 있나요?" "글쎄, 우리 개신교에서는 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요즘은 다종교 문화가 대세인지라 아마 개신교에서도 천주교의 형식을 이전보다 더 많이 따르려는 것이겠지." 장로교회를 다니는 여동생과의 전화 내용이다. 그렇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나 사순절, 그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그 고통의 순간을 잊지 말자고 다짐하는 뜻의 기념일을 나무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480e23836a3b5bc79a720057cd8f90a1_1488812569_28.jpg다만, 천주교회에서 하는 모든 절기를 무조건 따라하는 개신교회가 늘어나고 다른 교회가 다 하니까 우리 교회도 해야 한다고 하는....내면을 가다듬기보다는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일, 사순절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김질하기보다는 거의 우상숭배에 가까운 행태를 성도님들이 알게모르게 도입하고 점차 물들어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과 십자가를 이마에 긋기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순절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  지금부터라도 잘못된 형식과 외적 지향적인 신앙생활의 결과물에서 벗어나 사순절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과 그 의미 

"'재의 수요일'은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날이다.  교회가 이날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여 신자들의 머리에 얹는 예식을 거행하는 데에서 '재의 수요일' 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이 재의 예식에서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복한 나뭇가지를 태워 만든 재를 신자들의 이마나 머리에 얹음으로써, '사람은 흙에서 왔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창세 3 : 19참조)는 가르침을 깨닫게 해준다. -'매일의 미사' 중에서. 

 성경에서 인간은 흙(dust)으로 창조되었다고 말씀한다. 흙에서 나왔기에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맞다. 그런데 재(Ash)와 흙(dust)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억지해석일 뿐이다. 재를 태워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 것으로 회개의 상징이 된다고 하니, 개신교에서 자란 나의 눈에는 어이없는 우상숭배로밖에 보이질 않는데, 문제는 그런 형식을 따라 한 줌의 재를 가지고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 개신교회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사는 지역에도 얼마전에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재는 아니라지만, 기름을 가지고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 예식을 자신도 하고 다른 이에게도 강조하여 물의를 빚은 것을 안다. 이렇게 절기에 치우치고 형식에 치우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탓에 결국은 이단에게 핍박할 빌미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십자가를 마음속에 새긴다면 또 모르겠지만...유행을 따라 행하는 것이 과연 우리(성도)가 행할 일인지.... 

 금식(禁食)과 금육(禁肉 ) 

‘재의 수요일’에 모든 신자들은 금식재와 금육재를 의무로 지킨다. 금식재[禁食齎]란 아침식사를 하지 않고 점심식사는 평소대로 하되 저녁식사는 요기 정도만 하는 것을 말한다. 금육재[禁肉齋]란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하며, 재의 수요일과 모든 금요일에 지켜야 한다. 금식재는 만 18세 이상 60세까지, 금육재는 만 14세부터 죽을 때까지 지킨다. ​ 

 가톨릭 신자가 금식재와 금육재를 동시에 지켜야 하는 날은 ‘재의 수요일’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둔 ‘주님 수난 성금요일’, 이틀이다. 십자가의 길: 천주교 성당이나 성지에 가면 예수의 수난을 소재로 한 14개의 조각을 볼 수 있다. ‘14처(處)’라 불리는 이 미술품은 가톨릭 신자들이 가장 많이 바치는 기도 중 하나인 ‘십자가의 길’을 위해 설치된 것이다.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무덤에 묻히기까지의 14개 사건을 묵상하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1-2세기 신자들이 빌라도 관저에서 골고타 언덕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지나간 길을 따라 걸으며 기도한 데서 비롯되었다. 십자가의 길 기도는 아무 때나 할 수 있지만, 특별히 사순시기 매주 금요일과 성 금요일에 하도록 권고된다.  - [사순절, 사순시기 의미] 중에서 

 이마나 머리에 재를 뿌리는 형식, 그리고 자원하는 마음으로가 아닌, 교회의 법으로 제정하고 의무로 금식을 해야하는 것이 과연 주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일까? 안타깝게도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질 않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요 2: 12-13)  

 그렇다. 우리는 이 사순절의 참된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한다. 사순절이 되면 그리스도의 그 모진 고난을 기억하면서 내가 지은 죄를 회개하고(진심으로, 마음을 찢는 듯) 이웃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형식과 절기에 얽매이고 마음은 따로라면....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실까? 

 

나는 아주 오래 전,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 보고 싶은 곳, 예루살렘 성지를 둘러 볼 아주 좋은 기회를 얻게 된 적이 있었다. 모든 순례객이 다 그러하겠지만, 예루살렘의 수많은 성지중에서도 특별히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셨다는 전설이 담겨 있는 숭고한 길,“비아 돌로로사”를 따라 걸으며 올라 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곳에 직접 가 본 결과, 안타깝게도 “비아 돌로로사”는 더는 그 고귀한 십자가의 길, 순결한 "눈물의 길"이 아니었음을 보고 참으로 유감스러운 맘 금할 길 없었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란: 

 “비아 돌로로사” 란, 원래 라틴 어로 “슬픔의 길”, “눈물의 길”이란 뜻이 담겨 있다. 이 길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m의 길, 그리고 골고다에서의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말하고 있다.이 길은 복음서에 근거한 역사적인 길이라기보다는 순례자들의 신앙적인 길로써 14세기 “프란체스카” 수도사들에 의해 비로소 확정된 길이며 18세기와 19세기 이후, 고고학 발굴을 통하여 일부는 확증된 장소이기도 하다. 오늘날, 순례자들이 걷는 이 길을 따라 ‘프랜체스카’ 수도원 측에서는 14개의 처소를 세워 놓고 예수님의 행적을 기념하고 있었다. 

 순결한 눈물의 길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벌거벗기운 채, 

갈기갈기 찢기셔야만 하는 고난의 길, 

갈보리 산을 향해 끌려가는 눈물의 길, 

 

언약의 살을 찢는 대못은 뼛속 깊이 파고들어, 

상처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핏덩이 위에는 

 사막의 파리떼가윙윙대며 들러붙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여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너도 구하고 우리도 구하라!’(눅23: 39) 

같이 달린 비루한 행악자의 조롱과 야유, 

유대인들의 침 뱉음과 멸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볕 태양 아래 

 사정없이 몰아치는 사막의 모래 바람은 

 갈증을 더욱 부채질하고, 

‘목마르다!’ 

절규하시는 성자 하나님의 메마른 입술엔 

 물 대신 쓰디쓴 신 포도주가 주어졌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그리스도의 그 

 화해의 눈빛, 

사랑의 눈빛, 

용서의 눈빛은 외면되어지고 

 가시로 엮은 면류관에 찔려 흐르는 선혈 

피눈물 되어 두 뺨을 적시고 있습니다. 

 

많은 황소들과 바산의 힘센 소들과(시편22: 12) 

개들이 (시편22: 16) 둘러 진쳤으며, 

악한 무리가 수족을 찌르고 

 그분의 겉옷과 속옷마저 찢어 나누며 

(시편22:18)낄낄거리는 데, 

 

그리스도께서 

“포기하겠노라.” 한마디만 하시면… 

그 치욕의 십자가를 당장 박살 내어 버리려고 

 하늘에는 12 영이나 더 되는 천군 천사들이 

 항오를 펼치고 기다려 섰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세상의 모든 죄악을 한몸에 걸머지신 그분은 

 영과 육이 분리되는 고통보다, 십자가에서 찢기는 고통보다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는 그 순간이… 

가장 큰 고통의 순간이요, 모진 형벌의 순간이었습니다. 

 

캄캄한 하늘을 찢어 놓을 듯 흑암을 가르고 번득이며 

 달리는 번갯불과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소리는 

 사랑하는 아들을 외면해야만 하고, 

희생제물로 내어 준 어린양으로부터 고개를 돌려야만 하는 

 성부 하나님의 신음 소리요, 피맺힌 절규임을 

 아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사탄에게 속박되어 끌려가는 너와 나의 죄, 

억겁의 쇠사슬을 끊어내고 

죽음의 형벌에서 해방 시켜주기 위해 

 피눈물 흘리며 걸어 가셨던 길, 

순결한 길 “비아 돌로로사”입니다. 

 변질된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좁은 시장골목인 예루살렘의 올드시티에서 벽에 숫자로 표시되어 있는 14개의 장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다 쓰러지셨다고 표기된 곳, 여인들이 땀을 닦아 주었다고 표기된 곳, 예수님의 발자국이 닿았다고 하여 발자국이 파여져 있는 바위를 가져다 놓은 곳도 있었다. 좁은 길 양편에는 각종 싸구려 품목들이 즐비하게 쌓여져 있었고, 순례객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장사꾼들의 눈은 탐욕으로 번득거렸다. 이것을 바라보며 필자는 이 거룩한 길, “비아 돌로로사"의 진정한 의미, 예수님의 숭고한 고통이 느껴져 울기보다는 장사꾼들의 찌든 상혼에 가슴이 찢어져 마음속으로 울고 또 울었다. 

 예수님 당시, 성전에서 매매하던 자들을 향해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도적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책망 하시며 장사꾼들을 향해 채찍을 휘두르신 주님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랬다. 이 길은 더 이상 순결한 하나님의 어린양, 그리스도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숭고한 그 “비아 돌로로사”가 아니었다. 

 거룩하고 순결해야만 하는 그 길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이제 각종 이권에 얼룩지고 타락하고 변질해 버린 길, 도적과 강도의 굴혈같이 더러운 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 우리 주님이 오셔서 이런 상태를 바라보신다면,주님은 과연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실 것인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예루살렘의 “비아 돌로로사” 뿐이 아닐 것이다. 변질한 현대 교회들과 변질한 성도들의 영적 상태로 비교해 볼 수도 있다. 그리스도를 향한 순결한 믿음을 저버리고, 각종 이권과 육신의 안목과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 등, 온갖 죄악의 잡동사니들로 가득 채우고 타락하고 변질해 버린 교회들, 이름뿐인 목회자들, 이름뿐인 신자들의 마음속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이 범주를 벗어 난 사람, 거룩한 성도이기에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저라는 사람 역시 알게 모르게 변질되어가고 있으며, 같은 병을 앓고 있기에, 한없는 사랑과 연민의 정으로 가슴앓이를 하는 것이라 고백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회복하려면 쇄신이 필요하고, 쇄신하기 위해서는 파괴가 필요하다. 먼저, 현지에 세워진 그 웅장한 ‘프란체스카’성당부터 파괴되어야 한다. 예수님과 마리아를 대명 한다는 각종 현란한 주상들이 모두 홰파되어야 하며, 길 주변에 산더미처럼 쌓아둔 모든 잡동사니를 깨끗이 치워 버려야 한다. 인간의 꾸밈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을 묘사할 수 없다. 성령님께서 친히 일하시도록 길을 내어 드려야만 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화려함도 아니고 웅장함도 아니며, 신부로서의 순결함일 것이다. 하물며 한줌의 재로 이마에 십자가를 긋는 우상숭배적 행위로 변질된 교회이겠는가? 

 주님께서 두 번 오셔서 찾으시는 교회는, 웅장하고 큰 대형교회도 아니며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 작은 교회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며, 작건 크건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진 신부로서 정절을 지키는 순결한 교회일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찾으시는 성도는, 순결한 믿음을 소유한 영혼, 모든 죄악의 길에서 떠나 돌이키고 눈물로 애통하며 회개하는 영혼일 것이다. 그것 때문에 “비아 돌로로사”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보다 그리스도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차라리 그곳이 황량한 빈들이었드라면 더욱 은혜가 되었을 것이다. 이 사순절 기간에 진정한 의미의 “비아 돌로로사”가 이스라엘 성지에도, 내 마음속에도, 다시금 회복되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드려 본다. 그렇다. 우리는 이제라도 형식에 치우친 모든 것을 버리고 마음을 찢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가 아니겠는가?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마음을 찢고 주께 돌아오라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해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5-6)

 

출처: 목양연가/글: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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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천성적으로 참 좋은 사람이었지만 두 사람이 근근이 어렵게 사는 환경은 우리 결혼 생활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내의 잘못은 없었다. 다만 나의 부족함과 주변 환경들이 우리를 서로 의지하며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내는 어느 날 짐을 챙겨서 나간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를 가장 박대했던 둘째 형님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 것은 1975년의 일이었다. 둘째 형님은 경찰 공무원으로 일을 했었고 형수는 독일 간호사로 지원해서 한국에서 처음으로 독일 간호 근로자 테이프를 끊은 분이었다. 1960년대 초 박정희 군사 정권은 서독 정부와 계약을 맺고 한국 간호사와 탄광 일꾼을 서독으로 인력 수출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간호사 인력 수출은 현지에서 아주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린 경우가 되었다. 당시 한국의 경제 상황과 서독 간호사 수출 관계를 잘 설명한 감동적인 글이 있어서 옮겨 본다. 
  
"아우토반에 뿌린 눈물" 
  
1960년대의 경제 사정을 보면 1인당 GNP 87달러,한국은행의 외화 보유잔고 2,300만 달러, 연간 물가상승률 4.2%, 실업률 23%, 민간저축률 3% 등으로 빈곤 국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처참했다. 그런 가운데 5.16이 일어났다. 5 .16을 일으킨 박정희 소장은 이듬해인 1961년 가을 최초의 해외 방문으로 미국을 찾았다. 그러나 미국을 방문한 박 전대통령은 케네디를 위시해서 미국 의회 지도자들로부터 차디찬 냉대를 받고 돌아왔다. 당시 4.19혁명 이후 군인들에 의한 쿠데타 정권을 도와서는 안 된다는 미국 여론의 빗발친 냉소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풍전등화의 어려운 역경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뜻밖에도 서독의 뤄프케 대통령으로부터 공 식 초대를 받는다. "2차 대전 후 폐허가 된 땅에서, 더구나 공산주의 세력과 대치하면서 오늘의 위대한 경제 건설과 번영을 이룩한 서독의 부흥상을 살살이 보고 오겠다"라고 하면서 그는 1964년 12월 6일 독일로 떠났다. 12월 7일 아침 9시 40분 뤄프케 대통령과 에르하르트 수상 등의 영접을 받으며 일행은 독일에 도착했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박 대통령의 손을 꽉 잡았다. 그는 통일의 그날까지 경제 발전을 위해 힘쓸 것을 간곡히 충고했다. 그리고 전폭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박 대통령이 서독 국민들로부터 이처럼 기대 이상으로 크게 환대를 받게 된 것은 이미 1963년부터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들이 현지에서 성실하게 일해 준 덕분이었다. 당시 서독 언론들은 우리나라 간호사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거의 매일같이 대서특필로 소개하였고, 이국만리 타향에 와서 그토록 열심히 일하고 있는 젊은 여성들의 헌신적인 근무태도를 격찬하고 있었다. 이국 땅 낯선 곳에서 환자들의 아픈 몸을 자기 몸처럼 아끼고 가족처럼 정성껏 간호하는 젊은 여성들의 헌신적인 간호활동은 모든 독일 국민의 가슴 속에 따스한 정을 주었고 '동양의 프로세안'으로 끝없는 칭찬을 받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이미 1960년대 초에 가톨릭 계통의 민간협력 차원에서 취업 알선으로 30명 내외의 간호사가 서독의 병원에 파견되어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 한국 간호사들이 서독에서 성실하게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이 독일 정부에까지 알려진 것이었다. 이들 덕분에 한국을 바라보는 서독 국민의 열기는 대단하였고 그 후에는 2억 마르크에 달하는 제2차 경제 원조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만일 그 당시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의 근면하고 성실한 모습이 없었던들 우리는 서독 정부로부터 재정 원조를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박 대통령의 방독이 그토록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1964년 12월 8일 아침 10시 55분, 방독 중이던 박 대통령은 뤄프케 서독 대통령의 안내로 루르 지방 광산 도시에 도착해서 수많 은 한국 간호사들과 광부들 앞에 섰다. 고생하는 젊은이들을 위문하고 격려하기 위해 찾아간 박 대통령을 맞아 국민의례가 행해졌다. 애국가를 한 소절 한 소절 부르다가 '대한사람 대한으로' 하는 대목에 이르자 어느덧 목멘 소리로 변했다. 간호사들은 손수건을 꺼내기 시작했고, 대통령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이역만리 먼 곳에서 고생하는 간호사들과 광부들은 자기 나라 대통령을 보자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고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간호사 여러분, 광원 여러분,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 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그러나 대통령의 연설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장내 여기저기서 흐느끼기 시작했고, 끝내는 자신도 울고 말았다. 장내는 눈물 바다로 변했다. 곁에 있던 육영수 여사도, 뤄프케 서독 대통령도, 그리고 수행원들도 모두 울었다. 끝내 연설은 중단되었고 박 대통령은 밖으로 나오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간호사들이 줄지어 손을 내밀고 "각하, 손 한 번만 쥐게 해주세요. 우리를 두고 어떻게 떠나십니까?" 하고 목메인 소리로 대통령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일행은 간신히 아우토반에 올랐다. 고속도로의 차 안에서 눈물을 멈추려고 애쓰는 모습을 본 옆자리의 뤄프케 대통령은 "각하, 울지 마십시오. 잘 사는 나라를 만드십시오. 우리가 돕겠습니다. 분단된 두 나라가 합심하여 경제 부흥을 이룩합시다"라고 위로하며 자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박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는 앞자리에 앉아 칠순의 노(老) 대통령이 40대의 가난한 대통령에게 격려하는 우정어린 대화를 통역하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창밖에 비치는 석양의 황혼길에 철광 산업으로 보이는 한 공장굴뚝에서는 하얀 연기만이 하늘 높이 내뿜고 있었다.> 

아직도 우리 기억에 생생한 간호사 파독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극동에 위치한 조그마한 나라의 몸부림이었다. 그것은 I96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둘째 형수님이 바로 그 시대에 한국 경제 발전의 밑바탕이 된 독일 간호사로 자원해서 현지에서 또순이 같이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일했던 장본인이었다. 둘째 형수님은 서독에서 간호사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로 결정했다. 본인이 먼저 미국으로 입국한 후 영주권을 받아 둘째 형님과 조카 등 가족 모두를 미국으로 초청했다. 그래서 둘째 형님은 1975년, 그러니까 한국에서 본격적인 미국 이민의 바람이 불기 전에 이미 미국으로 이민 가서 정착 한 초기 이민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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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무조건 나쁘고 평화는 무조건 좋은가?


항상 이런 식입니다.

언론은 북한정권의 전쟁 협박에 맞장구치고

우리들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니

전쟁은 절대 안된다고 합니다.



전쟁은 정말로 여호와께 달려 있습니다.

한번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북한이 항상 전쟁으로 협박해왔죠.

주로 언제 협박해왔냐면,

우리가 북한정권에 대해 올바른 소리, 정의로운 소리,

북한동포들의 인권에 대한 소리를 낼 때,

그리고 자신들의 악한 요구에 따라주지 않을 때마다

전쟁하고 싶냐며 협박해 왔죠.


이처럼 만약 북한과 우리가 전쟁이 난다면

그것은 우리가 불의에 복종해서가 아니라

불의를 거부하고 더 이상 북한정권의

동포 학살, 불의, 부정, 불법에 발 맞춰주지 않을때 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한 적용을

참 편파적이고 이기적으로 합니다.


우리는 여지껏 북녘에서 죽어가는

동포들의 소식에 대해서는

당장 내 생명 아니니까 못들은 척 무시하고 있다가

누군가 동포들에 대해서 북한정권에게

올바른 목소리를 내면 북한정권의 전쟁 협박에

맞장구 쳐주며 괜히 쓸데없는 소리해서

전쟁을 불러 일으키지 말라고..

평화를 해치는 전쟁광이냐고...

전쟁나면 얼마나 많은 생명이 죽는데

그런 소릴하냐고 다그치며 조용하라고 해왔었죠...


우리가 생각하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의 적용은 등따숩고 배부름에 겨워

감사는 커녕 원망에 원망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격동하고 있는

남한 사람들에만 해당된다고만 생각하는 것을 봅니다.


이미 사악한 독재자에게

계속해서 노예된 상태로 학살 당해오고 있는

북한동포들에게는 적용시키지 않습니다.


적용은 둘째치고

사실 우리는 아예 북한동포들의 노예된 상황은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 올 수 있는 거죠.


만약 내가

가족들과 정치범수용소에 있는 상황이었다면

제발 나와 가족들을 여기서 어떻게 해서든

거내주길 바랄 겁니다.


게다가 나와 가족들은 정치범 수용소에서

촌각을 다투며 생지옥을 겨우겨우 생존해 나가고 있는데

지금처럼 남한의 기독교인들이

“전쟁은 우리들의 목숨이 천하보다 귀하니 절대 안된다.

북녘에 동포들이 죽던 말던 지금 이 상태의

평화를 유지해야만 한다"라는 말을 하고

나와 가족들을 못본척하는 것을 본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죽어가는 동포들의 절규를

못들은척 하는 조건으로,

적그리스도 독재자의 비위를 맞춰주는 조건으로

겨우겨우 지켜왔던 평화(?)를 지켜오고 있고

그것이 깨질까봐 두려워하고 있죠...


과연 이 평화는 하나님 보시기에

흡족하고 기쁨이 되는 평화일까요?


양심이 있다면 대답할 수 있으실 겁니다.

역겹고 가증한 평화이죠.


우리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을

남한 사람들에게만 적용하는 경향이 큽니다.


돌이키지 않는다면 이러한 우리의

극단적 이기주의와 악독함으로 인해

한반도에 재앙이 쏟아질 것입니다.


그 말씀을 자기에게만 해당시키는 교회에서

먼저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겠죠.


왜 전세계 가장 큰 교회 부흥을 체험한 우리가

신사참배를 하였고 그 전 교회가 신사참배 할때

목사들과 사역자들은 뭐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때 과연 골방에서 정말 하나님께

올바로 서서 기도하는 사람이 정말 10명도 없었던 것인지...


왜 6.25가 공식적으로 신사참배 거부 성명을 낸

경상남도 지역만 피해가 없고

나머지 한반도는 반복해서 초토화가 되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면 현재 우리는

그때의 신사참배에 비하면 훨씬 더

사악하고 악독한 죄의 한 가운데 거하고 있으면서도

'나에게만은 화가 없을 것이다.'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25보다 더 큰 재앙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또한 기독교 국가인 미국이 왜 남북전쟁이라는

처절한 내전을 치뤄야 했는지....

왜 그 전쟁의 중심에 노예제도 폐지가 있었는지....

왜 그 당시 미국 북부에서 난 교회 부흥의 사회적 결과가

노예제도 폐지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었는지...


과연 부흥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 북부가

왜 전쟁을 피하기 위해

노예제도를 용인하는 타협을 하지 않았던 것인지...

하나님 앞에서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왜 겁쟁이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같이 포로로 끌려가다가

도망친 사람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주변 동맹 족속과 자기 집의 318인을 이끌고

롯을 데려오기 위한 '전쟁'을 주저하지 않았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탈북자들을 통해 알려지고 있는

북한 동포들의 노예 됨을 듣고

우리는 전쟁을 피하는게 우선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전쟁'이라는 댓가가 지불되더라도

포로된 동포들을 풀어주는 것이 우선이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땅위에 우리를 위해 예비된

하나님의 재앙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이 재앙이

우리에게 국가적 부흥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과연 불의와 타협하며

가증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분쟁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옳은지...

성령의 조명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달려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쟁이 우리에게 재앙이 될지

부흥의 계기가 될지는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알량히 내 목숨 유지 위해

살고자 하면 죽고

남을 위해 기꺼이 죽고자 하면 삽니다.


부디 우리도 과거 미국처럼

우리 위에 예비된 재앙의 심판이

진정 멸망의 재앙으로 결론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를 복음으로 섬기는

본래의 국가적 부르심에 합당케 되는

풀무가 되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 박성업 선교사님

 

 

 

여러분은 “신성모독 법”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여러분이 만일 캐나다에 살고 있다면 곧 이 법이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보도에 의하면 “이슬람포비아”를 처벌하기 위한 M-103이라고 불리는 법이 발의되었다고 한다. 이 법안은 캐나다 자유당 당수인 Iqra Khalid씨가 몇 주전 하원에서 발의한 것으로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와 유사한 M-37이라 불리는 결의안이 지난 2월 23일 온타리오 지방 의회에서 Nathalie Des Rosiers 의원에 의해 발의되고 통과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법안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논란이 되고 있는가? 보도에 의하면 M-37 결의안은 의원들에게 “모든 종류의 이슬람포비아”를 비난해야 할 의무를 규정하고 있으며, “정부로 하여금 인종차별을 비판하고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과 프로그램과 공공서비스를 통해 이를 체계적으로 방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극단주의자들은 벌써부터 이런 법안들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이 법안에 상응하는 “유대교 포비아”, “기독교 포비아”를 금하는 법안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캐나다의 트뤼도 총리는 트랜스젠더를 반대하는 언급을 하면 2년 이하의 징역에 취하는 법안을 만든 바 있기에 이 법안도 결코 놀라운 것은 아니다. 이 법은 호모포비아, 트랜스포비아 그리고 바이포비아(동성애혐오자)들을 반대하는 국제 지정일인 작년 5월 17일에 소개되었다.

 

기사원문>> It has Begun! Canada Rolls Out New Blasphemy Laws

 

* 동성애를 죄라 언급하거나, 이슬람에 대해 비판적인 언급을 하면 감옥에 가는 일명 ‘동성애 포비아’, ‘이슬람 포비아’를 처벌하는 법안이 캐나다에서 실시되거나 실시 될 예정이라 한다.

 

대한민국도 차기 정부에서 차별금지법이 통과될 경우 이런 기가막힌 일들이 현실이 될 것이다.

현재 여야의 유력 대선후보들의 차별금지법에 대한 생각을 살펴보면 이재명 시장은 가장 적극적인 추진의사를 밝히고 있고, 여시재(일루미나티)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안희정 지사는 동성애자인 홍석천을 대선 캠프에 영입할만큼 차별금지법 추진에 대한 의지를 보이고 있고, 문재인 후보도 겉으로는 차별금지법에 대한 무리한 추진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지만 여건이 바뀌면 태도도 바뀔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야권 주자들의 이런 입장 때문에 많은 분들이 황교안 국무총리(전도사)가 대통령이 되어야 차별금지법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현재 국회에서 차별금지법을 막기 위해 애쓰고 있는 이혜훈 집사(의원)는 황교안 총리의 경우는 법무장관 시절, “(그에게) 기독 의원들이 법무장관에게 법안 철회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차별금지법 추진) 정보를 알고, 법무장관에게 많은 압력을 행사했지만, 이분은 '추진할 수밖에 없다'는 답변을 줬다. 결국 기독 의원들이 다른 경로를 통해 이 법이 국회로 넘어오는 것을 막았다."라고 이혜훈 집사가 한 강연에서 밝히고 있다.




 

관련기사>> 새누리당 이혜훈 의원이 반기문과 황교안을 비판했다

 

결국 여야를 막론하고 그 누가 대통령이 되던 한국교회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차별금지법의 통과를 막아낼 수 없고, 이를 통한 기독교의 차별이 공식화 될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문제로 분열된 마음들을 하나로 모아 두 달후면 출범하게 될 차기 정부에서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뜻이다.

  


 

- 예레미야 -

헌재판결 억지탄핵

    민초  허보영




국민들이 투표하여 대통령을 뽑았는데

헌재판결 정치탄핵 억지탄핵 웬말인고

헌재법관 역사앞에 진실앞에 떳떳하며

진정으로 법과양심 정의앞에 떳떳하나

 

천신고아 박대통령 마음둘곳 없는신세

친구하나 두었기로 그게탄핵 죄이던가

구중궁궐 높은담에 말벗하나 두었기로

피눈물도 없는자여 너희한번 당해보라


고영태와 그일당의 사기사건 본질인데

순실이와 박대통령 공범엮어 탄핵하나

재임중에 형사소추 면제특권 있을진대

의혹뿐인 공소장에 대통령을 탄핵하나


무소불위 특별검찰 고영태를 수사하고

손석희도 수사하고 김성현이 수사하라

이기자도 수사하고 사건전모 파헤쳐서

모든진실 확인되면 그때가서 판결하라


좌파국회 정치검찰 선동언론 쓰나미로

온국민을 현혹하여 탄핵으로 몰고갔네

민주국가 모든백성 묵비권의 권리있고

재판없이 유죄없다 헌법권리 못누리나


헌법수호 책임지라 국민들이 맡긴권력

국회권력 시녀되니 안타깝고 한심하다

헌법아래 국회있고 삼권분립 있을진대

헌법정신 앞세워서 대통령을 탄핵하나


죄없는자 돌로치라 성경말씀 못들었나

세상사람 죄없는자 찾을수가 없을진대

대통령을 죄뮫는자 너희들은 죄가없나

너희배후 좌파권력 세상사람 알고있다


온세계가 부러하는 대한민국 왜이러나

무너졌다 대한민국 법치국가 무너졌다

삼권위에 국회권력 헌재까지 농락하니

무소불위 죄파권력 온나라를 휩쓸구나

 

대한민국 주변에는 오대강국 있을진대

북한핵이 머리위에 중국협박 도를넘고

러샤푸틴 스토롱맨 일본아베 기를꺽고

우방미국 트럼프도 국수주의 스토롱맨

 

대한민국 온국민이 똘똘뭉쳐 모자란데

여당없는 다섯야당 나랏일이 걱정이라

조선시대 당파싸움 날이새고 지던때에

임진왜란 병자호란 역사에서 못배웠나


소돔땅과 고모라땅 의인열명 못찾아서

유항불로 심판받은 성경말씀 못읽었나

헌재판관 의인일까 국회의원 의인일까

각료중에 의인있나 혹시찾다 못찾았네

 

오늘날에 대한민국 의인열명 못찾아서

좌파정권 들어서면 나라장래 위태롭다

남북간에 평화협정 미군철수 주장하고

남북정당 정치협상 주체사상 세상된다

 

백성들아 정신차려 나라위해 기도하자 

후회해도 소용없다 땅을쳐도 소용없다

월남패망 반면교사 세계역사 바로보고

자랑스런 나의조국 자손만대 물려주세


 

주후 2017년 3월 10일 무명민초 분개하여 불면중에 시를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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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가 있다. (1)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육체적 감각으로 경험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육체적 오감으로는 경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비주의자들이 경험한 그러한 체험들은 모두 범신론에 속한 거짓된 것들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육신의 정욕으로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경험할 수 없다.

어떠한 종교적 열광주의로서도 하나님 나라는 경험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 나라는 믿음으로 알아간다.

하나님 나라는 중생한 신자들이 믿음으로 인식한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믿음으로 경험한다..

그것은 인간의 어떠한 노력과 공로와 자기 의와 자기 업적과 자기 재능으로도 인식할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 경험되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가지시고 이 세상에 강림하셨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계속 하나님 나라는 지상에 도래하며 확대되고 있다.

다만 믿음이 없는 자들이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는 그래서 중요하다.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 나라에 간다.

그 나라는 지금 우리 가운데 와 있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믿음으로 만 알 수 있기에 세상의 관점에서 볼때에 하나님 나라는 초라하고 없는 듯하게 보인다.

그래서 많은 자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맛보고자 탐심으로 재물을 모으고 불법적 권력에 집착하고 세상에서 출세하려고 목을 맨다.

오히려 그들은 멸망을 향하여서 곤두박칠하는 어리석은 영혼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이 탐욕을 가지고 추구하는 세상적 가치에 하나님 나라는 없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오직 하나님 나라는 중생한 신자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하게 강림한다.

성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머리로 하여서 성취하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하였다.

다만 어두운 인생들의 무지함이 죄악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그러한 인생들의 어두움에 대하여서 잘 증거하였다.

하나님께서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심이 아니라 너희와 죄가 여호와와 너희 사이를 갈라서 하나님께서 너희를 구원하시지 않으신다. (사 59:1-2)

결국 죄악이 인생들로 하나님의 나라를 알 수 없게 하였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외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참된 신자란 믿음으로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WlQp/251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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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함께 일하던 공장 동료를 통해 아내가 강원도 어디론가 갔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니, 아이조차 버려두고 그렇게 떠나버렸다는 것이 말이 되나.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어떻게 해서라도 성민이 엄마를 찾아서 직접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누구의 말도 믿지 않겠다." 
  
삼청교육대에서의 지옥훈련 후유증으로 그렇지 않아도 몸이 말이 아니었는데 나는 집을 나간 아내에 대한 소문으로 심신이 완전히 지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주위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 내가 이제는 더 이상 삼청교육대 훈련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고 나면 이번에는 아내에 대한 악몽이 다시 나를 괴롭혔다. 그때 나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최악의 상황에 있었다. 

그렇게 몇 주간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지내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편지 한 장이 날아 들었다. 무조건 자기를 잊어달라고, 그리고 이혼증명서에 도장을 찍고 아이는 당신이 알아서 잘 키워달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나는그 편지의 내용을 믿을 수 없었다. 첫 아들 성민이를 그렇게 예뻐했던 아내였는데 뭔가 이상한 것에 홀리기 전에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내가 자의에 의해서 사 라졌던 것도 아니었다. 삼청교육대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간신히 목숨 부지하고 이렇게 돌아오게 된 것인데,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이란 말인가. 
  
며칠 밤낮을 술독에 빠져서 완전히 정신을 잃고 살았다. 또 다시 자살을 생각했다. 그리고 약국 여러 곳을 돌면서 수면제 50알을 구입해서 밤늦게 소주 한병을 사 들고 집 앞 공터로 나갔다. 죽기로 마음을 독하게 먹고 성민이는 셋째 형님 집에 다시 맡기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래, 죽어버리는 거야. 집 나간 아내나 죽이고 싶도록 증오하는 전두환 같은 놈들도 내가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 아닌가. 더 이상 증오도 없고 사랑도 싫고 그저 모든 것을 죽음이라는 구덩이 속에 던져 버리자. 죽음의 위력은 내 삶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산산조각 내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니까." 
  
혀를 지그시 깨물며 소주를 반 병 정도 들이켰다. 식도를 따라 흘러 들어가는 알콜의 자극이 마치 칼로 살을 후비는 것처 럼 짜릿짜릿하게 전해졌다. 며칠 동안 밥이라고는 먹어 본 기억이 없는데 오늘도 빈속에 깡소주 반 병을 들이부었으니 오장 육부가 뒤틀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수면제를 입 안으로 털어 넣으려는 순간, 성민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들의 재롱떠는 모습이 가을바람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성민아 나는 정말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이냐. 너무도 고통스 럽다. 이렇게 사느니 정말죽고 싶단 말이다. 그런데 너를 생각하면…" 
  
통곡이 터져 나왔다. 부모 없이 버려진 자식이 되어서 평생을 고생하며 살게 될 아들 때문에 나는 내 마음대로 목숨을 끊 을 용기도 없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내 자식을 나처럼 구차스럽게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떠한 고통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끝까지 내가 낳은 자식은 책임을 져야 할 것이 아닌가. 양심의 소리가 나를 향해 질책하고 있었다. 손아귀 안에 쥐고 있던 수면제 50알을 허공으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죽음보다 더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갔다. 
  
그래도 사람은 다 살기 마련이다. 
  
삼청교육대의 지옥훈련 가운데서 목숨을 연명했고, 자식과 남편을 버리고 떠난 아내 때문에 울화병으로 자살을 여러 차례 생각했던 고통의 시간들도 시간이 지나가면서 기억 속에서 서서히 희미해졌다. 그리고 다시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마음 속에서 꿈틀거리고 시작했다. 시간이 가장 좋은 약이었다. 삼청교육대에서 4개월, 집을 나간 아내 때문에 또다시 몇 개 월을 그렇게 폐인처럼 보낸 후에 나는 아들 성민이를 먹여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일터를 찾았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하게 다가왔지만 그런대로 다시 직장 생활을 시작하며 아들을 데리고 사는 홀아버지 생활을 간신히 끌고 나갈 수 있었다. 
  
두 번째 결혼도 일종의 대형 사고였다. 두 번째 아내는 다방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던 아가씨였다. 외모도 좋고 성격도 활달해서 많은 남자들이 그녀 주변에서 추파를 던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주 야무지게 남자들의 콧대를 밟아버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또 재미있었다. 물론 나도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던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 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나의 농담과 장난들을 잘 받아 주었다. 또 내가 아들까지 있는 홀아버지 신세라는 것을 알고 난 후에도 오히려 친절을 베풀었다. 얼마 동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연애를 하다가 어느새 우리는 살림을 차 렸다. 내게는 두 번째 결혼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아무 하객도 없이 두 사람만이 서로의 마음에 맹세하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 후 나는 곧바로 그녀의 이름을 내 호적에 올렸다. 다른 것은 못해 주어도 법적인 부부 생활은 확실하게 보장해 주어야겠다는 마음이 있어서였던지 나는 호적에 이름을 올리는 일만큼은 부지런히 했다. 그러나 둘째 부인과의 결혼은 6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내가 임신을 했는데 나에게 물어 보지도 않고 혼자의 결정으로 아기를 지우고 왔다. 나는 그런 그녀의 행동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지금 우리가 아이를 가질 형편이 아니잖아. 그래서 낙태했으니까 그런 줄 알아. 나중에 형편이 나아질 때 그때 아이를 가져도 되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당신이 내게 애를 지울 건지 아닌지 물어는 봐야 했잖아. 어떻게 그런 일을 너 혼자 결정하고, 너 혼자 치를 수 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낙태로 인해 생긴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좀처럼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아내가 조그만 일에도 아들 성민이를 심하게 야단치고 손찌검을 자주 하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성민이에게 절대로 손찌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는데 하루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아이의 눈두덩이가 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아니,이 여편네가 정말 미쳤나." 
  
우리 둘 사이의 관계는 이미 벼랑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한 치도 서로 양보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루 빨리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고 그러다 집에 돌아오면 아내의 바가지가 그칠 날이 없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 용의 눈물 🌀 
 
용상에서
   내려오라는
       하야 의 목소리 
 
턱밑까지 다가와
   귀청이 떠나갈듯
       겁박하며
           아우성치는데 
 
신하들 잘못둔 죄로
   모든 덤터기
       뒤집어 쓰고 
 
올무에 걸려버린
   처참한 여왕
       박  근  혜 
 
어머니도
   나라에 바치더니
       아버지도
           나라에 바치고 
 
자신도
   나라밖에 모른다며
       온몸 불사르며  
 
쓰러져가는 나라
   구해보겠다는
       일념으로 그리도
           동분서주하더니만 
 
이제는 믿었던 신하들도
   하나 둘 등돌리고
       백성마져  등돌리며 
 
물러나라 소리치니
   참단한 이 일을
       어이 할꼬 
 
할수만 있다면
   차라리 목숨던져
       속죄양 되고도
           싶으련만 
 
나라 뜯어먹을
   승냥이떼만 우글거려
       조바심만 깊어가니
           기가 막힐
               노릇이로다 
 
용은 울고 싶어도
   소리쳐 울수도 없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만 
 
청계천을 흐르고
   한강이 되어
       흘러가고 있구나... 
 
  🌸 어느시인의 글 🌸


(4) 죽어가는 사람처럼 설교한 백스터
영국교회 부흥의 주역과 현장의 역사

백스터의 성경 사랑과 회심 체험

17세기 리처드 백스터 (Richard Baxter, 1615-1691)는 청교도 운동의 영향을 거의 받지 못한 영국의 슈롭셔 주 로우톤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청년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아버지가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였고 어머니의 건강 악화 때문에 그는 10년을 외조부모의 슬하에서 지내야 했다. 나중에 아버지가 스스로 성경을 읽다가 회심하게 되자 백스터는 부모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청교도’라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단지 경멸의 용어로 배웠을 뿐이었고, 그의 고향 교회에는 예배를 인도하는 낭독자가 있었으나 성경을 알지 못하는 설교자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스터의 회심에 제일 먼저 영적으로 감명을 준 사람은 바로 아버지였다. 그의 아버지는 원래 도박꾼이었으나 혼자 성경을 읽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삶이 변화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백스터가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의 역사 부분을 읽게 하고 성경을 깊이 연구할 수 있도록 해 주었고, 하나님과 미래의 삶에 대하여 말해 주어 그것으로 인해 죄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다. 비록 교리적인 부분과 구속의 신비에 대해서는 잘 이해하지 못했으나 성경에 깊이 몰두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백스터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성경을 읽고 회심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때가 15살이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셨던 놀라우신 사랑을 경험한 백스터는 자신의 영혼에 대한 관심과 실상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 후 그의 마음은 영적인 것에 더욱 더 절실하게 되었고 그가 죄를 범할 때면 그의 양심은 몹시 괴로워했다.

백스터는 대학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지만 존 번연처럼 독학하였다. 그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라틴어를 공부하였으며, 신학적 지식을 이해하기 위해 논리학과 형이상학과 물리학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또한 그는 신학과 중세 신학자들, 철학, 의학, 약학 등을 공부했다. 그리고 그는 대륙의 종교 개혁자들이 쓴 책을 읽음으로써 종교 개혁 사상을 배웠고, 영국 청교도들의 서적을 통해 구속의 신비를 생생하게 느끼며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게 되었다. 이러한 회심 체험이 그의 사역에 열정을 쏟게 만들었다.

점점 세속화 되어 영적 능력을 상실해가는 성직자들 


사회적으로 방탕과 유혹의 시기였던 그 당시에 목사들은 무지하고 나태하여 교인들의 생활에 무관심하였다. 백스터의 고향인 로우톤에는 예배를 인도하는 4명의 낭독자가 있었는데 한 사람도 성경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가운데 2명은 부도덕하여 성도들의 지탄을 받고 있었다. 또한 3개월에 한 번씩 설교를 전하고, 자주 술집을 드나들며 때로는 술에 취하기도 하였다. 어떤 성직자는 설교 준비보다 술집에 앉아 있기를 즐기다가 교회에서 추방되기도 하였다. 또한 목회자의 재정적인 타락도 극에 달하였다.

교회의 부패는 평신도들에게서도 극심하게 드러났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할 예배는 운동회나 무희들의 패션쇼와 같게 되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대신 운동하거나 춤을 추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배 후에 밤이 지새도록 춤을 추며 쾌락에 빠져 흥청거리곤 했다. 영국 교회의 예배가 의식주의로 만연되었다.

키더민스터 교회에서 백스터의 목회사역

1638년 백스터는 잉글랜드 국교회에서 안수를 받은 후 더들리에 있는 교구교회와 주변 마을 교회에서 종종 설교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가 설교할 때 마다 예배당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그후 그는 브리지노쓰로 옮겨 2년 동안 열정적인 설교 사역을 하다가 1641년에 작은 도시 키더민스터 (Kidderminster) 교회로부터 칭빙을 받았다. 영적으로 황무지 같은 교회에 부임한 백스터는 키더민스터 교회를 청교도 신앙으로 개혁하기 위해서 전력을 기울였다.

* 열정적인 설교 사역 

백스터는 목회 사역에서 최우선적으로 설교 준비와 연구에 전념하였다. 백스터에게 설교가 항상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가장 중요한 사역이었다. 그는 최고로 부지런하게 설교를 준비했고, 또한 설교하기 위해 자신을 준비했다. 그는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하려는 열렬한 소원을 갖고서 항상 회심을 이끌어 내는 복음 설교에 초점을 맞추었다. 강단에서의 그의 설교는 청중들의 양심과 심령에 죄를 자각케 하고 모든 위선을 들추어 내게 하였다. 그는 죄 회개를 강력히 촉구하였고 죄인들에게 살아있는 진리를 선포하면서 천국과 지옥을 눈에 보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설교하였다. 그의 설교 스타일은 아주 힘 있고 꾸밈이 없었고 불꽃처럼 타 올랐으며 항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일생동안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사람처럼 살아있는 진리를 선포하였다. 그래서 그의 메시지를 들은 자들은 분명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설교사역에 많은 회심과 부흥이 일어났다. 하나님은 키더민스터 교회에서의 그의 열정적으로 선포하는 설교사역을 축복하셨다.

* 개인별 교리문답 교육

백스터는 설교만으로는 회심을 통한 개혁을 적절히 이끌어 낼 수 없다고 생각하여 보조 사역자들과 함께 매주 2일에 걸쳐 교구민들의 각 가정을 방문하여 개인별 교리문답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는 각 가정을 방문하여 한 가정당, 한 시간 정도를 교리 교육을 하였는데 특별히 회심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신앙을 양육하였다. 사역자들은 성도 개개인의 성향과 수준에 맞는 교육을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여 복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방식으로 심방을 하였다. 그리고 설교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했던 회중들이 요리문답 교육을 통해 많은 영적 지식을 얻도록 하였다. 백스터는 개인들에 대한 수준 높은 목회 (pastoral care) 를 실천했다. 리차드 그린햄은 “교리문답 교육이 개혁주의 교회를 세우고 로마 카톨릭 교회를 심각하게 도전하고 무너뜨렸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백스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품고서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복음을 집으로 가져와 가정이 복음으로 물들게 하였다. 이처럼 열정적인 심방 사역은 가족과 교회의 지체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 영혼들의 회심에 목회 초첨을 둠 

백스터가 목회사역에 있어서 설교와 교리문답 교육을 필수적인 목회 요소로 보았던 이유는 영혼들의 회심을 위한 가장 유익한 수단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또한 회심한 사람들의 올바른 성장을 촉진시키며 성도로 하여금 영원한 안식을 준비하도록 하는 최상의 길은 회심이었기 때문이다. 백스터는 회심이 개혁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아마 백스터의 전후의 어떤 저술가나 목사도 회심의 중요성과 회심이 교구 개혁과 맺고 있는 연관성에 대해 이처럼 확고한 신념을 표현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 기도생활, 공 예배 출석, 신앙 실천 강조

백스터의 기도는 매우 강력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도는 설교와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한 업무가 되었다. 그는 그의 무릎에서 그의 설교들을 얻어냈으며 특별히 기도의 능력을 신뢰하였다. 그래서 그는 회중을 위해 늘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쉬지 않는 기도 생활을 가르쳤다. 그는 성도들에게 “기도로 인하여 하나님이 변하시지는 않지만 우리가 변화된다”고 말하면서 영적개혁을 위해 기도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더 나아가 백스터는 철저한 공적인 예배 출석을 강조하였다. 성도들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신약적인 예배 즉 초대 교회 성도들이 단순하고 소박하게 드리던 예배를 회복할 것을 가르쳤다. 이처럼 예배의 개혁을 촉구함으로써 키더민스터를 성경중심적인 마을로 만들어 갔다. 그리고 백스터는 가정 예배를 권장하면서 신자 교육을 위해 자신이 쓴 책 한 두 권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또한 백스터는 경건한 신앙 생활의 실천을 강조하였고 성도들의 생활이 개혁되기를 원했다. 특별히 거룩을 많이 강조하였는데 그는 ‘거룩이란 가장 많이 유익을 얻고 안전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요, 가장 영예스럽고 즐거운 길’이라고 말하였다. 백스터의 경건과 영성 그리고 열정적인 목회사역은 키더민스터 교회 부흥의 기초를 세우게 되었다.

마을 전체가 회심했던 키더민스터 교회 부흥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사람처럼 진리를 선포함”

리처드 백스터의 열정적인 설교와 교리 교육, 그리고 심방과 복음 전도로 인하여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특별히 그의 강력한 설교에 성령의 부으심으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왔고 분명한 결단을 내렸고 하나님을 믿었다. 그들의 심령에 불을 지펴 오순절 불길처럼 키더민스터 성도들의 영혼 속에서 타올랐다. 그의 사역은 키더민스터 마을을 변화시켰다. 작은 촌락 키더민스터에서 살고 있는 성인 2천명이 대부분 무지하고 교양 없고 술 마시고 떠드는 사람이었고 겸손하고 경건한 자들은 아주 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었고 몇몇 술집 주인들의 가족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다. 회중의 규모는 점점 늘어나게 되었는데 키더민스터 교회는 매주 600여명의 신자가 회집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교회가 비좁아 몰려드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다섯 개의 발코니를 더 확장해야 했다.

그리고 많은 가정들이 양심의 회개를 경험하고 눈물을 흘리며 경건한 삶을 살게 되는 열매를 맺었다. 부흥으로 인해 아침과 저녁의 가정 예배 시간이 되면 모든 가정에서 시편을 읽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모든 골목이 찬송과 기도 소리로 메아리 쳤다. 한 가정에서 찬송이 끝나면 다른 가정에서 찬송이 연이어졌고, 한 가정에서 설교 소리가 끝나면 다른 가정에는 기도가 시작되었다. 이처럼 사람들의 모습 속에 신앙적 생명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특별히 주일이면 거리에서 단 한 건의 무질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모두가 평화롭고 고요하였다. 많은 가정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시편을 찬양하였다. 또한 그들은 설교문을 읽고 설교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수 많은 회심자들 가운데 세속의 길로 빠져 실족한 자는 하나도 없었다고 말한다. 백스터가 영국 우스터셔 (Worcestershire)에 위치한 키더민스터 교회의 목사가 되었을 때, 처음에는 한 거리에 한 가정 정도만이 집에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섬겼지만 사역 후기에는 그 마음에 있는 모든 가정이 진지하게 신앙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게 되었다. 이와같은 키더민스터 부흥으로 인하여 교회는 소문나게 되었다. 그의 목회사역에 성령의 부으심과 역사하심으로 인해 키더민스터 마을 전체가 회심했던 부흥 이야기는 놀랍고 감동적인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모든 목회자들을 깨우치는 백스터의 ‘참된 목자’ (The Reformed Pastor) 

백스터는 목회자 개혁 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교회의 온갖 부패가 목회자에게서 시작된다고 보고, 먼저 목회자의 개혁을 시도하기 위해 주변 교회의 목사들에게 매월 한 번씩 모임을 갖고 성경 말씀에 대하여 연구할 것을 제안하였다. 제안을 받은 목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참석하여 기도와 성경 연구 모임이 활성화 되었다. 교회의 성장이 외적인 조건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 자신에게 있다고 보았던 백스터는 교회의 문제를 보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함으로써 교회를 부흥시켜야 하다고 권하였다.

백스터의 감동 저서인 “참된 목자 (The Reformed Pastor)”에서 그는 목회자의 말씀과 기도에 전념한 생활과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함과 성경과 신학에 대한 지식, 목회적 열정, 목회자의 언행일치, 지도력과 행정 능력 등이 교회 부흥과 침체를 결정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백스터는 참된 목자가 되려면 부단한 자기 개발이 필요하며, 죄의 유혹을 멀리하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것을 권면하였다.

리처드 백스터는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였다. “자신이 은혜 가운데 있다고 만족하지 말라. 당신의 은혜가 적극적이고 생동적인 실천 속에서 지켜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전에 자신이 공부하고 준비한 설교들을 스스로에게 먼저 설교하라.” 백스터는 목회자에게 먼저 믿음과 사랑과 열성이 넘치면 이와 동일한 은혜들이 회중들에게 신선한 은혜로 흘러 들어간다는 것임을 강조했다.

또한 백스터는 목회자들이 참으로 훌륭한 교리를 설교하면서 반드시 생명력 있는 적용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메시지를 통하여 청중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에 대해 경외심을 갖기를 갈망하였으며, 반면에 그들의 마음을 경박하고도 웃기게 하고 즐겁게 하는 설교를 가장 혐오하였다. 그리고 그는 영적 의사인 설교자가 성도들에게 잘못된 치료제를 처방하는 것은 그들을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하는 영혼 살인자가 되게 한다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백스터는 “내 설교를 통해서 영혼들이 구원을 받거나, 아니면 나의 나태함으로 멸망하여 지옥에 간다는 무섭고 중대한 생각을 해보라”고 말하면서 이처럼 무섭고 엄청난 생각이 항상 설교자들의 심령 속에 머물러 있기를 권면하였다. 또한 설교자들은 청중들의 마음을 각성시키기 위해 강단에 올라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마음을 살펴 깨우고 각성시키며, 세상적인 경향들을 제거하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열정의 삶을 지속해야 한다. 그리고 생기가 없는 게으른 설교자는 졸고 있는 죄인들을 결코 각성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 책은 필립 도드리지, 존 웨슬리, 찰스 웨슬리, 찰스 스펄전 등을 비롯하여 수 많은 저명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백스터의 많은 저서와 신학 사상 문제 

백스터는 설교사역의 침묵을 강요당한 기간 동안에 집필에 열중하였다. 1691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150편의 논문을 썼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특별히 그의 감동적인 저서 “성도의 영원한 안식”과 “회개치 않는 자들에의 부르심”, 그리고 목회자들을 위한 필독서 “참 목자상”은 수 많은 사람들이 읽고 회심하였다. 그리고 그의 베스트셀러 중에 “크리스천 핸드북, 거룩, 천국을 준비했는가, 백스터의 자취 혹은 회고록” 등이 있다. 그는 기독교의 저자로 명망이 높았지만 그의 책들은 주로 신학적인 주제들에 대한 글 보다는 헌신적이고 목회적인 강해서들이 많았다. 청교도 목사인 존 제인웨이는 자신의 회심에 있어서 백스터의 책을 읽은 것이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백스터의 신학적 오류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책들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한다. 그의 작품들은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특이한 혼합을 이루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작정, 속죄, 칭의 교리에 있어서 결코 개혁주의적 견해를 가졌다고 볼 수 없다. 리처드 백스터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제임스 패커 (Packer)는 백스터는 이것 저것을 마구 섞어 놓았는데 그의 신학 때문에 다음 세대가 교리적 혼란을 겪는다고 말했다. 백스터는 개혁주의 신학 라인을 따라 형성해 가면서도 때로는 알미니안주의적 사고에 기울였다. 예를들면 백스터의 칭의론과 속죄론 그리고 하나님의 작정 교리에 있어서 결코 개혁주의적 견해를 가졌다고 볼 수 없다.

비국교도 운동의 지도자 백스터 

백스터는 1638년에 영국 국교회에서 안수를 받았으나 실은 비국교도 목사였다. 그는 영국 국교회의 예배 의식과 규율에 얽매이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교회 안에서 비국교도들을 보호하는데 관심을 쏟았다. 정부 당국과 청교도들과의 대립은 백스터의 설교사역을 순탄케 하지 못하였다. 1662년 5월, 찰스 2세는 통일령을 발포하였는데 백스터는 발포된 통일령의 정책에 항의를 표하면서 궁정 목사직을 사임하고 비국교도 목사들 편에 서게 된다. 찰스 2세의 박해로 비국교도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수 많은 목사들이 교회에서 추방을 당하였다. 이 통일령은 수 많은 청교도 목사들을 거리로 내 몰았으며, 백스터도 다른 목사들과 함께 그토록 사랑하던 목회지를 떠나야 했다. 이때에 백스터는 통한의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백스터는 1662년 대추방 이후로 비국교도들 가운데 보수적인 집단의 지도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1664년 비밀 집회령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어 정부 당국이 설교를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스터는 설교를 들을려고 몰려든 성도들에게 설교하였다. 결국 이 일로 그는 체포되어 18개월의 옥살이를 해야 했다. 1675년 모든 비국교도 설교권이 다시 상실되었지만 한 예배당에서 위험을 무릎쓰고 말씀을 전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심한 박해를 받았다.

세상 떠나기 전 런던시를 위한 기도 - “하나님, 무지한 이 도시를 긍휼히 여기소서!”

백스터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육체적인 질병이었다. 많은 의사들로부터 치료를 받았지만 건강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그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었던 몸이었다. 그는 매주 설교하러 강단에 올라가지만 혹시 내려오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백스터는 자신이 질병을 늘 하나님의 고귀한 은혜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그 육체적인 고통이 그로 하여금 세상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지 않도록 해 주었으며, 그리고 매 순간이 중요함을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매일을 그의 생애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았다. 백스터는 그의 병이 여러 번 재발한데다 핍박까지 받아 몸이 몹시 지쳤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런던시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하나님, 이 불쌍하고 무지한 이 도시를 긍휼히, 긍휼히, 긍휼히 여기소서.” 1691년 12월 8일, 비국교도의 아름다운 말씀 사역자 백스터는 76세의 나이로 주님의 평안 가운데 눈을 감았다.

백스터는 영국교회 부흥의 주역이요, 교회를 개혁시킨 강력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신실하고 긴박한 설교자요, 청교도 설교자요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였다. 그는 해외 선교사역에도 동일한 열정적 관심이 있었다. 그는 복음 전파 선교회를 설립하는데 주역을 맡았다. 그에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이 있었다. 백스터는 죽음의 병상에서 엘리옷 선교사의 생애를 읽고서 감동받기도 하였다. 불같은 열정으로 사역했던 백스터의 생애가 끝났다.

리처드 백스터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사람처럼 진리를 선포함”

1. 백스터는 복음으로 영혼을 일깨워 준 신실한 말씀 사역자였다. 
그는 일생동안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죽을 힘을 다해 설교했던 위대한 설교자였다. 개혁과 부흥의 시기에는 항상 위대한 설교자가 있었다. 백스터에게 설교가 항상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된다. 설교는 모든 목회자들의 복음 사역에 속한 가장 위대하고 탁월한 일임을 깨우쳐 주고 있다. 그는 항상 회심을 목표로 하였다.

2. 백스터는 기본적인 교리문답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그는 설교만으로는 회심을 통한 개혁을 적절히 이끌어 낼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교리문답 교육에 힘썼다. 그는 성도들에게 기본적인 교리 문답 교육을 통해 회심할 자를 찾아 내고 그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신앙을 양육하였다. 이처럼 백스터의 목회 사역의 핵심은 말씀선포와 교리 문답 교육 이었는데 백스터의 이러한 열정적인 사역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부흥을 허락하셨다. 그가 목회하였던 키더민스터 마을 전체가 회심하였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부흥이다.

또 다른 부흥을 갈망하면서

부흥이란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가고 나타나는 것인데 지금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부흥이 필요하다. 개혁과 부흥의 시기에는 항상 위대한 설교자가 있었다. 복음이 점점 쇠퇴하고 있는 이 시대에 리처드 백스터와 같은 설교자가 필요하다. 설교할 때 마다 지금 이 시간이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이라는 엄연한 사실 앞에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사람처럼 죽을 힘을 다해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가 나와야 한다. 말씀과 교리를 붙잡는 균형잡힌 설교자가 진리위에 든든히 서 가는 교회를 세워갈 것이다. 누가 점점 침체해져가는 교회를 살릴 것인가? 누가 회심을 목표로 한 강력한 말씀선포와 교리문답 교육을 할 것인가? 누가 이 시대에 부흥의 주역이 될 것인가? 강단에서 하늘의 진리를 불처럼 토해내는 열정적인 설교자들을 통하여 이 땅에 참된 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약 300년 전 키더민스터 교회 부흥이 우리의 설교 사역 가운데 다시 리바이벌 되기를 갈망한다.

*김현배 목사/독일 함부르크 한인선교교회 담임목사. 유럽성시화운동본부 상임회장 겸 독일 성시화운동본부 대표회장, 뉴스파워 유럽 본부장

김현배 ⓒ 뉴스파워
출처: USA아멘넷



 


♡김평우 변호사님의 탄핵결정 후
   쓰신 글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제2건국의 행군을 시작합시다!

1.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8인 재판관 전원이 국회의 탄핵소추를 인용하여 박근혜 대통령님을 파면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너무나 쇼킹한 판결입니다. 저들은 우리 법치 애국시민들의 마지막 기대를 완전히 저버렸습니다.


2. 여러분, 이번 탄핵은 단순히 박근혜 대통령 개인에 대한 탄핵이 아닙니다. 이번 탄핵은 대한민국의 국시 자유주의, 법치주의, 개인주의, 민주주의를 완전히 짓밟고, 민주, 민족, 민중의 삼민주의 즉 김일성의 주체사상으로 대한민국의 국시를 바꾸려는 반역세력들의 대한민국 국시에 대한 도전입니다.

또한, 여성 대통령의 자유와 인격, 프라이버시를 완전히 무시하고 인격살인을 서슴지 않는 인간성에 대한 도전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은 직권남용, 강요, 뇌물의 더러운 범죄를 잔뜩 저지른 그 더러운 손으로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하게 아무런 스캔들 없이 가장 깨끗한 대통령 박근혜 님을 이 세상의 가장 더러운 인간으로 만들어 발가벗기고 돌을 던지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사건 2016. 12. 9. 국회가 저지른  탄핵소추입니다. 이는 “너희들 중에 죄없는 자만이 돌을 던져라”는 역사상 가장 신성한 명령에 대한 도전입니다.

아무 고의(故意)없는 인간의 개인적 실수, 허물을 처벌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神)만이 할 수 있는 신의 영역입니다. 우리 인간은 다 신 앞에 죄 많은 피조물입니다. 저들은 마치 지신들이 신이라도 되는 양 인간 박근혜, 여성 박근혜를 발가 벗기고, 단두대에 올려 목을 치고, 공을 만들어 순진한 어린 아이들에게 공놀이를 시켰습니다. 이것은 북한에서 하는 짓입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여러분, 박근혜 대통령님은 우리 국민들이 2012년 직접, 평등, 비밀, 보통 선거에 의하여 적법하게 선출한 완벽한 민선 대통령입니다. 이 완벽하고 깨끗한 대통령을 대통령직에서 쫓아내고, 생명까지 빼앗으려는 사람들 저들이 과연 대한민국 국민입니까?

3. 여러분, 저는 지난 며칠간, 기자회견과 광고문을 통하여 헌재가 정원 9인이 아닌 8인으로 탄핵소추를 심판하여 결정을 내리는 것은 헌법 제 111조 규정으로 보나, 이정미, 김이수, 이진성 재판관들의 종전 판결례를 보나, 여러 원로법조인들의 일치된 의견으로 보나 명백한 위헌이라 원천무효임을 만천하에 알렸습니다. 지금까지 이점에 대해 “아니다. 합헌이다. 유효하다” 라고 말한 법률가는 단 한사람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은 8인 재판도 합헌이고 자신들의 말을 뒤집으면서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이유를 댔습니다. 그동안 검찰과 특검이 조사하였다는 “최순실”의 비리와 부정 소위 언론이 말하는 “국정농단”이 아무런 실체가 없는 그야말로 촛불 기자님들의 “소설”이라는 것이 점차로 드러나고 있는 시점입니다. 따라서 최순실의 비리, 부정에 대한 판단이 내려지지 않고는 박 대통령에 대한 이건 탄핵소추는 올바른 결정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최순실의 비리가 고영태 일당의 조작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 일당이 달아나 잠적을 하였습니다.

필시 특검이나 검찰 또는 촛불이 이들을 숨기고 보호해 주고 있을 것입니다. 진실이 고개를 들고 드러나려는 바로 이 시점에서 박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을 내리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입니까?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재판을 하려는 재판관들일까요? 저는 의문입니다. 최순실 비리, 부정을 직접 재판하는 형사법원조차 사실을 가리지 못해 재판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데 소위 그 공범자라고 하는 박근혜 대통령부터 그것도 형사법원도 아닌 헌법재판소에서 형사법원보다 앞질러 판결을 내리는 재판은 도저히 양심있는 법관의 재판이 아닙니다.

4. 지금 이 나라 언론, 국회, 지도층은 우리 국민들에게 무조건 헌재 판결에 승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리 판별도 못하는 애들입니까? 승복하고 안하고는 각자가 판단하여 결정할 일이지 언론이, 국회가, 원로가 국민들에게 명령할 일입니까? 여러분, 이 사건 탄핵심판은 국회가 대통령 박근혜를 소추한 것입니다. 따라서 재판 당사자는 국회와 대통령 박근혜입니다. 따라서 두 사건 당사자는 국가의 헌법절차에 따른 판결에 대해 승복할 법적의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주권자로서 그동안 이 나라 언론, 국회, 검찰, 법원에 대해 각자가 헌법과 법률에 따라 주어진 책무, 심부름을 제대로 했는지 심판하여 잘못한 사람들은 처벌, 탄핵의 심판을 내릴 권리, 즉 주권이 있습니다. 주권자의 심판을 받아야 할 종들이 주인인 우리에게 무조건 승복을 하라니 이야말로 적반하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 


5. 사랑하는 법치와 애국시민 여러분, 지금 우리는 나라 잃은 백성입니다. 우리의 의사와 말을 대변해줄 언론이 없고, 우리의 재산을 지켜줄 국회가 없고, 우리의 자유와 신체, 생명을 보호해줄 검찰이 없고, 우리의 주장과 증거를 들어줄 법원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같이 손을 잡고 일어나야 합니다. 3월 11일 저와 함께 태극기 애국집회에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힘차게 선언합시다.

1. 우리는 더 이상 촛불언론, 촛불국회, 촛불검찰, 촛불법원의 지배를 받는 2등 국민이 아니다.

2. 우리는 1948년 우리 민족의 위대한 선각자인 개혁가 이승만 박사께서 세우신 자유, 민주, 법치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애국시민임을 세계만방에 고한다.

6. 헌법과 국민상식에 전혀 맞지 않는 헌법재판소의 탄핵인용은 헌법에 위배된 8인 재판일 뿐만 아니라, 헌법의 적법절차의 조항을 대통령과 국민들에게는 적용하면서 국회에 대하여는 “의회 자율권”이라는 터무니 없는 이유로 적용하지 않고 면죄부를 주는 反헌법적인 판결로서 원천 무효임을 선언하고 제2의 건국을 향한 행군을 시작합시다.
아! 나의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 영원하리라 !!


                            2017. 3. 10. 
                             김평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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