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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모님사모님/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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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연합 신문>의 부탁으로써서  10월 14일자로 나온 1175호 7면에 실린 원본 글을 올립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읽고 종교 개혁과 우리를 생각하며 10월 20일(토요일)과 21일(주일) 오후 6시에 열릴 종교개혁 495주년 기념  언약교회 신앙 강좌에 참여 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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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는가?” - 이 질문은 해마다 10월의 마지막 날 우리들이 기념하는 종교 개혁 기념일을 생각할 때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매우 크고 넓은 주장이다. 만일의 이 질문이 “어떻게 해서 종교 개혁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당대의 부패한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고 성경적으로 바른 교회와 사회와 그런 신학을 형성하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이라면 종국적으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해서” 라고 대답하면서 그 가까운 원인들을 다 찾아 대답해야 할 어렵고도 폭 넓은 질문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아니었다면 종교 개혁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그 이전에 비슷한 주장을 했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c. 1330-84)처럼 정죄되거나 그의 글을 따르다가 1415년 7월 6일에 화형 당한 존 후스(John Huss, c. 1372-1415)나 1536년 10월 6일에 목이 비틀리고 화형당한 윌리엄 틴델(William Tyndale, c. 1494-1536)과 같이 정죄되고 화형 당해 죽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루터가 종교 개혁적 주장을 하고서도 사형당하지 않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많은 이들이 생경서 종교 개혁이 이루어 진 일은 참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물론 역사가들은 왜 다른 이들은 사형 당해 죽었는데 루터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랐는가를 탐구하는 인간적 노력을 계속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우리의 질문은 종교 개혁에 성공했건, 아니면 후스와 같이 화형 당해 죽었건 당대에 종교 개혁적 주장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에 한정해 보려고 한다.

 

     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는가?(1) 외적인 이유: 당대 교회와 사회의 외적인 부패

 

흔히 종교 개혁 전야라고 불리던 중세 말기의 천주교회에는 여러 가지 도덕적 문제가 모든 사람들이 목도할 만하게 아주 분명히 나타났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 성적인 부패였다.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딤전 3:2, 12; 딛 1:6)에 반해서 성직자들의 독신제도를 고착화 시킨 당시 천주교회 내의 성적인 부패는 매우 심각한 일이었다. 고위 성직자들이 실질적인 아내를 두었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다른 직임과 함께 성직을 물려주는 (2) 세습의 문제가 당대의 외적인 부패의 또 다른 단면이었다. 그것 배후에는 (3) 모든 문제와 관련해서 돈 중심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물질 중심주의가 있었다. 당대에 문제가 되었던 면죄부를 파는 일도 결국은 누가 그 권한을 가지는가, 그리하여 누가 돈을 많아 벌 수 있느냐의 문제가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는 성직 매애 문제와 함께 당시의 모든 것이 돈을 버는 것과 관련 되어 있음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 준다. 예를 들어서, 당시 교황이던 레오 10세는 이미 2개의 주교직 가진 호헨졸레른의 알버트(Albert of Hohenzollern)에게 마인쯔(Mainz) 주교직을 제안하면서 교황은 1,200 두카트 요구했고, Albert는 700 두카트를 주장했으나 결국 1,000 두카트로 낙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대가의 하나로 그의 영토내에서 8년 동안 면죄부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수익금의 절반은 Albert가 가지고 절반은 베드로 성당 건축비로 내도록 했다고 한다. 물론 면제부 판매인들은 성당 건축을 위한 기부를 백성들에게 요청하여 실질적인 문제는 알 수 없게 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4) 명예와 힘을 휘두르는 것이 당시에 매우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끔 한다. 그리고 (5) 일반 민중들은 성경적인 형태의 경건 보다는 자신들에게 익숙한 형태의 경건 생활의 형태를 유지하여 수 없이 많은 미신을 양산해 갔다. 십자가 자체에 의존하고 손으로 그은 성호가 자신들을 악마로부터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성자들의 무덤에서 기도하면서 점차 성자숭배에로 나아가는 등 온갖 미신이 난무하게 되었다. 당시 부활절 어간에만 일반 민중들에게 공개되었던 수 없이 많은 성물들에 대한 숭배는 이런 미신을 조장하는 데 중요한 기연이 되었다.

(후에 살펴보겠지만 이는 오늘 날 한국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와 놀랍도록 흡사하다는 것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비록 시대적 차이와 상황의 차이 때문에 구체적으로는 다를 찌라도 성적인 문제, 세습 문제, 돈 문제, 명예와 힘의 문제,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비성경적인 종교적 행위를 하는 미신의 문제라는 본질은 뚜렷한 유사성을 나타내 보인다.)

 

어쩌면 이런 외적인 부패 때문에 종교 개혁적 주장이 널리 퍼져 나가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쉬웠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부패는 종교 개혁의 궁극적 원인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당대 교회의 이런 외적인 부패를 누구보다도 강하고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우신예찬>과 같은 풍자적인 글을 쓰기도 했던 에라스무스(Desderius Erasmus, 아마도 1469-1536) 같은 이는 결코 천주교회에서 벗어나기를 원치 않았고, 1524년에 있었던 의지의 자유에 대한 루터와의 논쟁을 통해 보면 그는 기본적으로 천주교적인 사상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대 사회와 교회의 타락과 부패는 종교 개혁의 근원적 원인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종교개혁은 왜 일어났는가?(2) 근본적 이유: 당대 교회의 교리의 문제

 

그렇다면 종교개혁의 근원적 이유는 무엇인가? 왜 자신들이 화형 당할 줄 알면서도 종교개혁의 선구자들과 개혁자들은 종교개혁적 주장을 했는가? 그것은 결국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자신들이 속해 있던 교회가 너무나도 심각하게 벗어나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위에서 살펴보았던 도덕적인 타락과 문제들 정도가 아니라 당대의 교회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종교개혁의 근본적 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인식을 가능하게 한 것은 역시 성경의 가르침이었다.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자신들이 속해 있던 교회의 가르침과 예배와 제도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점차 당대 교회를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정확한 이해를 가져 나간 루터는 후에 “다른 사람들은 생활을 공격했지만, 나는 교리를 공격한다.”고 말한 바 있다. 즉, 그는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병폐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회의 기독교 이해 자체를 공격한 것이다. 그는 “나는 기독교를 보존해야만 하는 사람들, 즉 주교들과 학자들 가운데에는 참된 기독교가 존재하기를 그만두었다고 말할 뿐이다.”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종교 개혁의 근본적 이유였다고 말해야 한다. 말하자면, 당대의 교회가 참된 교회가 아니기에 종교 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제 2의 종교 개혁을 운운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이와 같이 이 세상에 교회라고 이름 하는 긴관과 공동체 들이 있지만 그것들이 실질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아닌 상황에서만 언급될 수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부패가 있고 잘못이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성경에 비추어 고쳐 가고 갱신하는 일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 개혁이라는 말은 교회라고 이름 하는 것이 참 교회가 이난 상황에서라야 할 수 있는 말이다.

 

중세 말기의 교회, 루터 자신이 그 안에서 수도 생활을 하고, 수도사가 되고, 신부님이 되어 미사를 집례하고 하던 그 교회 공동체가인 로마 가톨릭 교회가 교회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교회가 아닌 공동체가 되어 버렸는가? 루터와 다른 개혁자들은 중세 말기의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선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참된 복음이 왜곡되어 잘못된 복음이 선포되어 많은 백성들을 오도(誤導) 하기 때문에 참된 교회가 아니라고 한 것이다. 오늘날도 성경이 말하는 복음 외에 다른 것이 선포되거나, 성경의 복음을 왜곡하는 소위 교회들은 모두 참된 교회가 아닌 것이 된다.

 

오늘날의 천주교회도 종교개혁 시대에 루터와 칼빈이 비판하였던 그 천주교적 교리인 (1) 성경과 전통을 다 강조하는 입장, (2) 은혜와 믿음으로만의 구원이 아닌 믿음에 더하여 은혜에 근거한 인간의 행위가 어느 정도 있어야 그것의 공로로 구원함을 얻는 다는 행위 구원론(공로 구원론), (3)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후에는 십자가의 속죄를 피 없는 형태로 다시 제시하는(represent) 피 없는 제사가 지속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천주교적 미사관, (4) 그 피 없는 제사를 집전하는 제사장(司祭, priest)이 있다는 견해, (5) 사제의 축성 이후에 성찬의 요소들인 떡과 포도주의 본질(substance)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본질로 변한다는(transubstaintion) 화체설(化體說) 등을 버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일탈적 가르침들도 나타나고 있으므로, 만일에 루터와 칼빈이 오늘날의 천주교회를 판단할 수 있다고 해도 그들은 이런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라고 하면서 종교 개혁이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천주교회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단들은 말할 것도 없고, 명확히 이단으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도 만일에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는 데서는 성경적인 복음이 선포 되고 있다고 하기 어려운 것이다: (1) 성경이 성문화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계시가 주어진다는 주장, (2)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없이도 구원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거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몰라도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안에 내포 되어 있다고 주장, (3)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믿음으로 만이 아니라 믿음과 행위가 함께 고려되어 칭의가 이루어지며 구원이 주어진다는 주장 등. 그러므로 어느 시대이든지 바른 복음이 선포 되지 않는 공동체는 진정한 의미의 교회가 아니고 종교개혁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한국 교회 중의 대부분은 여러 가지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진정한 교회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고 겸손히 회개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진정한 교회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자신을 회개하고 자신을 새롭게 하는 교회 공동체이다. 그 갱신의 힘과 능력을 성령님께서 공급해 주시기에 우리는 성령님에 의존해서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우리들의 문제를 찾아 가야 한다. 그리고 성경이 인도하는 대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특히 (1) 교회 세습 문제, (2) 목회자들의 재정적 투명성이 부족한 문제, (3)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성적인 타락 문제, (4) 우리 주변 사람들의 가난과 아픔과 동참하는 일에 게으른 문제, 그리고 (5)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효험만 있으면 어떤 형태의 종교적 행위도 다하는 문제 등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지적하는 우리들의 외적인 부패의 문제이다. 이 모든 일에 대해서 우리들은 진정한 회개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사람들에게 우선 드러나는 문제는 이런 문제들이기에 이런 문제들에 대한 회개가 선행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만을 생각하는 것은 종교 개혁을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된다. 종교 개혁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신경 써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믿고 있는 것 가운데서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틀린 것들, 우리의 예배 가운데서 성경에 비추어 잘못된 것들, 우리의 교회 제도 가운데서 성경에 비추어 틀린 것들을 고치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종교 개혁주일을 제대로 지키는 방식이 된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이승구 교수의 개혁신학과 우리사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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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승구|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

 

 

★제주 화산섬 및 용암동굴 ★

世界自然遺産   2007年 指定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지역은 한라산, 성산일출봉,

거문오름용암동굴계 등 3개이다.

한라산은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서 화산활동에 의해

생성된 순상(방패모양)화산체이다.

성산일출봉은 제주도에 분포하는 360개의 단성화산체중의 하나이며,

해안선 근처에 뛰어난 경관을 제공하는 수성화산체이다.

거문오름용암동굴계는 지금으로부터 약 10~30만년 전에 거문오름에서

분출된 용암으로부터 만들어진 여러 개의 용암동굴이며,

이 동굴계에서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동굴은

벵뒤굴,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굴, 그리고 당처물동굴이다

 

 

 

 

 

 

 

 

 

 

 

 

 

 

 

한라산과 백록담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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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훈아, 그렇게 먹다가 얹혀서 무슨 일 나겠다. 제발 천천 히 먹어라." 
  
밥그릇을 다 비우고 물을 부어서 설거지 한 국물까지 다 마신 후에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 
  
"엄니, 감사합니다." 
  
밥을 한 끼 건네주면서도 어머니는 내심 혹시라도 형이 돌아오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는 표정이 었다. 
  
"그래, 태훈아. 이제 나가서 일자리라도 한 번 알아봐라. 그리고 아침에 오면 밥상 준비해 놓고 기다리마." 
  
그렇게 해서 잠은 노숙을 하고 아침이면 어머니를 몰래 찾아가 간신히 허기진 배를 채우곤 하는 생활이 얼마 동안 계속 되었다. 어렵고 궁핍한 생활이었지만 나는 이때처럼 어머님의 사랑이 고맙게 느껴졌던 때가 없었다. 내장이라도 빼내서 자식을 위해 희생해 줄 수 있는 것이 조건 없이 사랑해 주시는 어머님의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완전한 사랑은 오직 어머니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뿐이라고 믿는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형님 집에 늦게까지 머무르며 조카들과 장난을 하고 있는 사이에 형님이 다른 날보다 일찍 집에 돌아왔다.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어머니는 아연실색을 하면서 나를 방 안 한쪽구석에 있는 벽장으로 떠밀어 넣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형님은 뭔가 분위기가 좀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혹시 누가 집에 다녀갔냐고 물었다. 그러자 철없는 조카들이 막내 삼촌이 다녀갔다고 말했다. 
  
"어머니, 태훈이 녀석은 절대로 집 안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나서 둘째 형님은 어디서 들고 왔는지 흰 횟가루 같은 소독약을 집 안팎에 돌아가며 뿌리고, 아이들의 손발을 비눗물로 열심히 씻겼다. 
  
"폐병 환자가 자꾸 집안에 드나들면 아이들에게 병균이 쉽게 옮겨질 수도 있고 여러 가지로 안좋습니다. 어머니, 앞으로 는 절대로 태훈이 집안에 들여놓지 마세요." 
  
나는 벽장 안에 숨어서 형님이 하는 말을 들으며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꼭꼭 씹어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아, 내가 폐병환자라서 그렇게 박대를 하는구나.' 
  
물론 그때는 이미 폐병에서 다 치유된 상황이었지만 그런 형님의 모습을 보고 난 후에 나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다시는 형님집을 찾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둘째 형님을 생각하면 그때 들었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가슴속에서 메아리치는 것을 느낀다. 아이들을 생각하는 형의 마음은 한편으로 이해가 되긴 했지만, 그런 냉대와 설움을 당한 기억은 평생 동안 나를 힘들게 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둘째 형님과는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서러움과 분노와 실망감과 배신감 등 온갖 느낌들이 혼합된 감정의 칵테일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마음도 하나님께서는 이제 모두 치유해 주셨다. 둘째 형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 가운데 깊이 새겨져 있던 상처를 완전히 치유해 주셨다. 미움이 깊었던 만큼 둘째 형님을 다른 형제들보다 더욱 깊이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신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마음의 변화였다.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가장 큰 기적이다. 
  
노숙자 생활을 하며 전전긍긍하다가 드디어 공장에 취직하게 되었다. 몇 년 전 처음으로 서울에 무작정 상경했을 때 양복 수선 기술을 좀 배워 두었던 것이 도움이 되어서 옷 만드는 공장에 취직하게 되었다. 우선은 먹고 살 걱정이 해결되었기 때문에 나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사에게 근면한 충청도 시골 총각이라는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직장 생활은 한층 재미있어지고 일이 손에 착착 달라붙었다.  
  
그때쯤 나는 처음으로 여자를 알게 되었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그녀는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고 얼마간 연애를 하다가 우리 둘은 곧바로 내 자취방에서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그 당시 내 나이 19세였다. 결혼할 수 있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얼마간 동거를 하다가 둘 사이에 아이까지 덜컥 생겼다. 임신했다는 소식에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걱정이 마음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녀의 오빠되는 사람이 자취방을 찾아왔다. 순진한 자기 여동생을 꼬셔서 임신까지 시켜놨다고 노발대발하면서 동생을 끝까지 책임지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돌아갔다.  
  
그날 저녁에 나는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했다. '결혼하면 되잖아. 못할 거 뭐가 있나. 그냥 우리끼리 둘이서 결혼식을 치르고 호적에 이름을 올려서 살면 그게 결혼한 거지, 뭐 별다른 것이 있나?' 며칠 후 우리는 물 한 잔 받아 놓고 조상님들에게 이 결혼을 축복해 달라며 세상에서 가장 조출한 결혼식을 치렀다. 주위에 아무런 하객도 친지도 없었지만 그날 나는 맹물 한 잔에 맹세한 결혼식을 통해 죽도록 가정을 소중히 지킬 것을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그 후 나는 그녀의 이름을 내 호적에 올렸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에게도 떳떳한 나의 법적인 아내가 된 것이었다. 
  
첫 아들 성민이를 낳은 후 얼마 동안은 정말 꿈같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공장 일을 마치고 고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귀여운 아들 성민이가 재롱을 어떻게나 예쁘게 부리던지…. 나는 그저 아이와 함께 그렇게 오래 있고만 싶었다. 아내도 첫 아이를 낳은 후 다소 몸이 허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이의 재롱과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 마냥 행복한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불행의 그림자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우리 가정을 덮어 버릴 줄은 누구도 몰랐다. 고향 친구의 집에 병문안 갔다가 동생들과 말다툼 끝에 경찰서까지 끌려갔던 나는 그날 이후 4개월 동안 아내를 위시한 모든 사람들에게 갑자기 실종된 사람이었다. 나를 강제로 잡아 가둔 경찰은 가족들에게 연락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서 지옥 훈련을 받고 있는 동안에는 가족과의 연락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삼청교육대에서 풀려나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는 아들 성민이를 셋째 형님 집에 맡겨 놓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여러 곳을 수소문해 보았으나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운 목사

사람이 미우면 단점만 보이고 사람이

사랑스러우면 장점만 보인다고 합니다.

매사 하는일이 꼴보기 싫으면
미운 감정이 내 속에 있는 것이요

하는 일이 모두 어여뻐 보이면
사랑의 감정이 내 맘에 있는 것이랍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못하기에
모두가 장단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장점만 지니는 완벽한 사람 없으며

단점만 지니고 있는 미숙한 사람은 없지요

우린 좋은 사람 나쁜 사람 평가하지만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으면 좋은 사람이요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봅니다.

이 세상 완전하고 완결하고 완벽한 사람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분이 있다면 오직 신 뿐이겠지요

그래서 인생은 미완성 이라고도 하는 것 같에요

나에게 단점이 있다면 개선 하고 나에게 장점이 있다면
부각시켜 개선해야 겠습니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를 때 모르고 행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알고도 잘못을 할 경우엔
용서받기 어려운 일입니다.

나에게 단점을 알고 그것을 성찰할 때

자아 발전이 될 수 있으며

장점이 많은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모든 사람이
나를 존경하며 존중할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이란 재앙을 만나느니라(약1:15)

                                       감사하는 마음에 행복이 깃들고

                 행복한 마음에 감사가 자라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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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8) "나도 안다, 내 아들아."

 

야곱이 애굽에 와서 17년이 지나 147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눈도 어두워 앞을 잘 보지 못 하게 되었습니다. 147년을 살았으니 오래 산 셈입니다. 그러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연수에는 미치지 못 합니다. 오래 사는 것이 좋은 일일까요? 당연히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도 “이 땅에서 너희 연수가 길리라.” 하시며 부모공경에 대한 복으로 장수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래 사는 것이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일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969세를 산 므두셀라의 인생이 성경에 오래 살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래 살면 어떻게 될까요? 오래 살면 결국은 육신이 허물어지고 기운이 쇠하여질 것입니다. 육신이 무너지고 기운이 쇠하여지면 이 땅에서의 삶의 미련도 없어지고 죽음의 두려움도 사그라지고 괴로운 인생길을 어서 마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가 쉬고 싶어지게 될 것 같다 싶습니다. 오래 사는 것은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만 그러나 그저 오래 사는 것은 축복이라고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 하고 죽음의 너머를 알지 못 한다면 이 땅의 삶은 여전히 미련으로 남고, 죽음, 곧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두려운 공포로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를 약속 받은 것, 그리하여 평안히 하나님의 품에 안길 소망을 가지고 이 땅을 떠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복 중에 복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과 또 죽음의 너머를 두려워합니다. 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통하여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쳤고 이 세상에 오래 남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자손대대로 자기를 기억하고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죽어서도 혼령이 제사상에 찾아올 수 있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바위에 이름을 새겼습니다. 그렇게 이름이라도 세상에 남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인들은 유럽의 유명관광지에다 자기 이름을 새기기도 한다지요. 북한의 독재자는 금강산, 묘향산의 거대한 바위들마다 자신의 이름을 깊이 파서 새겨놓았습니다. 심각한 자연훼손입니다. 그리고 죽어서도 떠나지 못 하고 금수산궁 유리관 속에 누워 있습니다. 그 지은 죄와 악행이 하늘에 사무치는 것을 알아서인지 죽음이 두렵고 이 세상 떠나기가 어려워서인지 썩어가는 육신에 방부제와 알콜을 쳐바르고 유리관 속에 누워서 버티는 가증하고 가련한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죽음과 심판을 피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은 다 불못에 던지우고 그들이 쌓아올린 것은 다 소멸되고 재와 같이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조상에게로, 또 하나님께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 옴을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타나 복을 허락하시고 약속하신 약속, 영원한 약속 말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후손과 약속의 땅,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 말입니다. 야곱은 그 약속을 붙잡고 그 조상이 장사된 곳, 막벨라굴에 레아도 장사하고 또 자신도 그곳에 장사하도록 부탁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회상합니다. 밧단아람을 떠나 남편을 따라 아버지가 계시는 브엘세바로 돌아가는 도중에 에브랏, 곧 하나님의 떡집 베들레헴 길에서 베냐민을 낳고 죽어 그곳 길가에 묻힌 라헬을 말입니다. 어쩌면 너무나도 가련한 라헬이지만 그 통곡과 절절한 사모가 묻힌 그곳 베들레헴에서는 먼 훗날 메시야가 탄생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그토록 사랑하는 라헬을 통하여 나타낸 그 아픔과 슬픔과 애통과 소망과 생명의 그 길 베들레헴의 그 길로 아들을 보내실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이 낳은 요셉, 그 요셉이 애굽에서 낳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품에 안고 입 맞추고 이들을 자신의 소유,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축복합니다. 그런데 손을 어긋맞겨 작은 아들 에브라임을 오른손으로 축복하고 장자 므낫세를 왼손으로 축복합니다. 요셉이 이를 지적하자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고 하면서 계속 에브라임을 앞세워 축복합니다. 야곱은 왜 그렇게 하였을까요? 그렇습니다. 야곱 자신이 에서의 동생으로 둘째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정해진 사실이었고 결코 바꿀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죽기 살기로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잡았습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을 붙잡았고 장자권을 붙좇았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받은 축복을 품어안고 천리길 외삼촌 집으로 도망하였습니다. 목숨을 걸고 이를 지켰습니다. 그 야곱이 지금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손을 어긋맞겨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둘째였기 때문에 둘째를 축복한 것이었을까요? 둘째를 장자로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기 때문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야곱은 그들에게 지레 안 된다고 포기하지 말고 목숨을 걸고 붙잡으라고 권면하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염소털에 속아 아버지가 축복한 것이 축복이 아니라 야곱이 목숨을 걸고 붙잡은 것이 바로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야곱의 일생의 회상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떠한 삶이기를 바라시나요? 무엇을 붙잡고 사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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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거룩한 삼위일체’와 우리의 삶

 

황원하 목사

(산성교회 담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성경을 읽는 근본적인 목적이며 신학 본연의 주제이다. 즉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며, 신학이라는 학문을 통하여 하나님에 관한 언설들을 체계화한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성경을 통해서 얻어지며, 인간의 경험과 이성에 의해서 규정되고 밝혀진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신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1.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말한다. 필시 오직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 한 분만이 계신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신들을 창조해 내었다. 사람들은 신들을 조작하여 만들어낸 후에 그들이 만든 신들을 섬기다가 그러한 신들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신들을 단지 자신들에게 복지와 행복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삼았으며, 신들과 어떠한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조작된 신들과 다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존재와 완전하심이 무한하시고, 지극히 순수한 영이시며, 보이지 않으시고, 몸이나 지체가 없으시며, 정욕도 없으시고, 불변하시며, 광대하시며, 영원하시고, 불가해하시며, 전능하시고, 지극히 지혜로우시며, 지극히 거룩하시고, 지극히 자유로우시며, 지극히 절대적이신 분이시다. 즉 하나님은 불변성과 영원성과 무한성을 가지고 계시며, 존재론적 한계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존재와 완전하심에 있어서 무한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 우리는 너무나 나약한 존재이다. 우리는 잠시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의 미래는 결코 창창하지 않으며 우리의 앞날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는 교만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우리의 육체는 신뢰할만하지 못하며, 우리는 질병에 노출되어 있고, 우리의 삶은 각종 사고에 취약하다. 필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와 달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존재, 지혜, 권능, 거룩하심, 공의, 인자, 진실하심에 있어서 완전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하며, 인간들과 인간적인 수단들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참고. 잠 3:5-6).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예배와 경배의 형태로 나타난다. 특히 기도로 구현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경배해야 하며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필요를 아뢰어야 한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스스로 가지신 불변하시고 지극히 의로우신 뜻의 협의들을 따라 모든 일을 행하신다. 따라서 의롭고 선하고 거룩하고 절대적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시는데,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가 이에 대해서 불평할 만한 아무런 이유와 근거가 없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어떻게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하실 수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면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순복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완전하고 절대적인 성품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며,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오래 참으시고, 선과 진리가 풍성하시고,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신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참고. 요일 4:8).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며, 인간의 말과 글로 도저히 형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어려움을 견디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어려움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신다(참고. 고전 10:13).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열심히 구하는 자들에게 상급을 주신다. 그러므로 마음의 허전함과 육신의 연약함과 삶의 공허함을 느끼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께 나아와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진다. 하나님은 원수 사이를 화목하게 하시며, 마음이 굳어진 자들을 풀어주시고, 물질과 건강을 부어주시며, 영적인 은혜를 허락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또한 알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심판에서 지극히 공의롭고 두려우신 분이시며, 모든 죄를 미워하고, 범죄자를 결코 간과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시지만 동시에 공의로우신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코 죄를 면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장이시기에 죄를 정확히 판단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간과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잘못을 짚고 넘어가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동시에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고 그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분이시다. 이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하심과 복을 자기 안에 가지고 계신다는 뜻이다. 또한 하나님은 홀로 자신에게 자족하시며, 자신이 만드신 어떤 피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저들로부터 어떤 영광도 얻어내지 않으시고, 자신의 영광을 피조물 안에서 피조물을 통하여 피조물에게 나타내신다. 즉 모든 피조물은 생명을 외부(하나님)로부터 가지고 오지만, 하나님은 유일하게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계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돌림이나 피조물의 협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영광을 취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으면 하나님이 답답하실 거야’라고 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손해를 보는 거지’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홀로 존재하시면서 홀로 만족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유일한 근원(원천)이시니,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 하나님은 만물 위에 주권적 지배권을 가지시고 자기가 기뻐하시는 바를 만물을 통하여 만물을 위하여 만물 위에 행하신다. 그분 앞에는 만물이 열려있고 명백하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이 만물 위에 드리워 있음을 깨닫고 그의 영광을 온전히 깨달아 그러한 영광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알게 한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완전한 주권과 지혜로 세상을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지식은 무한하고, 무오하며, 피조물에 의지하지 않으시니, 어떤 것도 우연적이거나 불확실한 것이 없다. 하나님은 모든 협의, 모든 행사와 모든 명령에서 지극히 거룩하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와 경배와 순종을 돌려드려야 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만물을 움직이시는 그분의 초월적인 지혜와 힘을 신뢰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피조세계에 내재하시는 그분의 위대한 영광을 깨닫는다면 겸손하게 되고 그분을 경배하게 된다.

4. 그리스도인들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말한다. 그런데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기란 쉽지가 않다. 이것은 인간이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 그래서 이 교리 때문에 역사적으로 많은 이단들이 생겨났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충분히 혹은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며 우리의 지식과 지혜는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 방도가 없다. 다만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의 이성과 지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섣불리 규정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세 분 하나님의 상호협력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완전한 조화와 협력을 이루시면서 일하셨고, 그분들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이나 갈등도 없었다. 삼위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계시기에 이러한 일치가 가능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삼위로 존재하시면서 동시에 일체이신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완전하고 절대적인 교제(관계)를 생각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21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이 기도가 가르쳐주는 진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 됨이 그리스도인들의 하나 됨의 모범이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를 접하면서 우리의 연합과 일체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나누어지고 그리스도인들은 분열하고 있다. 기독교 안에 교파가 많고, 교회 안에 분쟁이 있어서 서로 싸우는 현상은 심히 애석하고 통탄할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협력하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도 그러한 조화와 협력을 모색해야 함을 배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피를 나눈 한 형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어떠한 분열이나 갈등도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일치를 도모해야 하며 화합해야 한다.

 

http://reformedjr.com/xe/board05_03/5012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천주교에는 연옥이라는 교리가 있다. 연옥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 정도에 위치하고 있는 영혼의 중간 정거장과 같은 곳으로 예수를 영접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영혼들, 또는 일찍 죽은 아기의 영혼들이 천국에 올라가기를 기다리면서 대기하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은 죽은 자를 위한 중보기도도 하고 가끔씩은 특별 헌금도 한다.  
  
가톨릭교회의 연옥교리가 가장 활성화되고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시기는 중세시대였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중세 가톨릭교회에서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천국으로 보낼 수 있다면서면죄부를 대량 판매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사람 들은 연옥에 가 있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면죄부를 사들였는지 모른다. 저들의 마음 가운데는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해서든지 천국으로 들어가도록 하기 위한 열망이 가득했다. 그래서 중세 교황들은 이를 교활하게 이용해서 면죄 부 장사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던 것이다. 
  
둘째 누나를 위한 기도를 하다 보면 나도 어느 사이엔가 면죄부 같은 것이 있다면 얼마의 돈을 들여서라도 그것을 구입하고 싶다는 어리석은 충동에 사로잡힐 때가 있었다. 
  
"오,하나님! 저는 연옥의 교리나 면죄부를 통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는 사실 하나에 내 생명을 걸고 믿습니다. 하나님,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해서 우리 모든 인류의 죄값을 치르셨던 것처럼 자신의 꺼져가는 생명을 동생을 위해 아낌없이 희생했던 우리 둘째 누님의 불쌍한 영혼을 하나님께서 친히 거두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섭리를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감히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하나님의 가장 놀라운 사역, 즉 구원의 사역은 우리 인간들의 이해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신성 불가침의 영역이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믿는 교회의 교리와 신학적인 해석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구원 방법이 영혼의 세계에 반드시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할 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 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둘째 누님에 대한 풀 수 없는 회한이 조금이라도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사랑하는 둘째 누님,우리 이제 조만간 천국에서 꼭 다시 만납시다. 누님! 정말 사랑하고 많이 감사합니다." 
  
나는 야간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둘째 누님을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지난 2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투병생활을 했 던 고향집을 떠나 다시 서울로 무작정 상경을 했다. 당시 내 나이 19세였는데 고향에서는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폐병에서는 완전히 회복되어 이제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고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대도시로 나가서 인생을 새롭게 도전하고 싶었다. 서울까지 올라가는 완행열차가 왜 그렇게 느리게 움직이던지 마음만 바쁘게 움직였다. 서울에 도착하면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밤이 새는 줄 도 모르고 기차 구석에서 이런 저런 공상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서울에 도착해서 형님 집을 찾아갔다. 둘째 형님은 그 당시 경찰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과 형수님은 독일 간호사로 나가 일하고 있어서 그나마 생활이 좀 안정된 편이었지만 살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3명의 자녀와 살림을 거들고 있는 어머니가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런 살림에 나 같은 식솔이 한 명 더 추가된다는 것은 아무리 형제지간이라고 해도 힘든 일이 었다. 하지만 달리 갈 곳이 없는 상황이라 직장을 잡을 때까지 만이라도 형님 집에 얹혀 살아보자는 마음을 가지고 형님 집을 찾아갔던 것이다. 
  
어머니는 2년 전 폐병으로 피를 쏟으며 고향으로 쫓겨 내려갔던 내가 아직 좀 여위긴 했어도 건강을 회복한 모습으로 나 타나자 눈물부터 주르륵 흘리셨다. 
  
"그래,이제 다 나은 것이여?" 
  
"예." 
  
"밥은 잘 먹냐?" 
  
"예." 
  
"그런데 어쩌자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어. 형이 알면 불호령이 떨어질 터인데." 
  
"시골에서 뭐 할 것이 없어서요. 그냥 취직할 때까지만이라도 부탁 좀 해보렵니다." 
  
열일곱 살 나이 차이가 나는 둘째 형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내게 가장 두려운 존재였다. 물론 형님의 마음 가운데도 형제들을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워낙 사는 형편이 힘들 때라 8남매나 되는 형제들 사이에서 서로 배려해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둘째 형이 집으로 돌아와서 내가 다시 상경한 것을 알자 한 마디로 난리가 났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나는 당장 거리로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오랫동안 경찰 공직자 생활을 하면서 강직하게 훈련된 둘째 형님에게 며칠만이라도 집에서 신세를 좀 지자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노숙자가 되었다. 거리에서 하룻밤을 새우면서 온갖 생각이 들었다. 노점상이 버리고 간 불씨 옆에서 몸을 녹이면서 별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겨울 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이 나 혼자 버려진 느낌이었다. 그때 폐병이 치유되던 날 새벽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쳐갔다. 2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투병하던 폐병을 말끔하게 치유해 주셨던 성령의 뜨거운 손길이 다시 기억났던 것이다. 
  
'하나님,사는 것이 정말 힘듭니다. 당신이 나를 치유해 주셨을 때 이렇게 노숙자 신세나 되라고 병든 몸을 낫게 해주셨습니까. 차라리 누님과 함께 저승에 가게 두시지 치료는 무슨 치료입니까. 이제 나는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차라리 내 생명을 거둬 주시옵소서.'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향한 온갖 푸념을 하는 동안 어느덧 새벽 하늘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밤새 추위에 떨고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허기를 붙잡고 잠깐 잠에 빠져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형님이 출근하고 난 이후에 어머니를 찾아갔다. 
  
"그래, 지난 밤에는 어디서 지냈냐." 
  
자식을 눈앞에 빤히 두고 노숙을 시킬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으랴. 어머니가 부엌에 들어가 찬밥에 간장을 붓고 삶은계란을 하나 들고 들어오셨을 때 나는 그 밥을 불과 몇 초 사이에 다 먹어치웠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동성애 선전?…러시아서 영화 <미녀와 야수> 논란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미녀와 야수>가 동성애 캐릭터 때문에 러시아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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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BBC에 따르면, 러시아 정부는 美 디즈니사의 영화 <미녀와 야수> 개정판 상영을 금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2013년 ‘아동을 대상으로 한 동성애 선전 금지법’을 통과시켰다.

 

이 매체는 “러시아 국회는 문화부에 개봉 전 영화를 검토할 것을 의뢰했다”며 “주요 검토 사항은 ‘동성애 선정 요소’의 존재 여부”라고 전했다.

 

이번에 개정된 <미녀와 야수>에는 동성애자임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르푸’가 등장인물로 설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이 영화의 감독 빌 콘돈은 유럽판 동성대 잡지 <애티튜드>와의 인터뷰에서 “이번에 등장하는 ‘르푸’는 남성적인 캐릭터이면서 다른 남성과 연애를 하고 싶어하는 인물”라고 말했다.

 

콘돈 감독의 이런 발언에 러시아 내 많은 부모가 ‘자녀에게 영화를 보여주지 않겠다’는 입장을 내비친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의 한 유명 영화배우도 국영 뉴스에서 “아이에게 영화를 보여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러시아 문화부는 “당국이 영화를 입수하고 배급에 필요한 서류를 취합하는 대로, 영화 상영이 법적으로 가능한 검토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한편 <미녀와 야수>는 오는 3월 17일 러시아에서 개봉될 예정이다.  

 

백유현 ⓒ 데일리굿뉴스

가져온 곳: USA 아멘넷

삼위일체에 대한 구약성경의 증거

 

                                                                                                       김정우/총신대 교수

 

이 글에서 필자의 중심 관심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구약적 발판을 새롭게 형성해보는 데 있다. 이 새로운 발판을 세우기 위해 전통적으로 조직신학에서 사용된 논거들과 증빙자료 구절(proof text)들을 구약신학적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전통적인 교의신학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지지해준다고 주장하는 중요한 구약 성경 구절을 주석하여 이 구절들이 갖는 원래의 의미를 드러냄으로써 후대의 의미와 구별해보고 원래의 의미에 근거하여 후대의 의미와 새롭게 연결하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필자의 또 다른 관심은 신약시대에 몸으로 찾아오신 성자와 성자가 보낸 성령이 구약성경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찾아보는 데 있다. 즉 신약시대에 찾아오신 성자는 구약시대에는 어떻게 계시되었는가, 또한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은 구약시대에는 어떤 일을 하셨으며, 어떻게 계시되었는가 등의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필자는 계시의 유기성을 전제하므로 이미 구약 속에 성자와 성령의 사역과 인격이 그림자나 씨앗의 형태로 있었음을 가정하고 그들이 구약에서 어떻게 계시되었는지 살피고자 한다. 무엇보다 신약의 성자와 성령이 구약에서도 독자적인 인격성을 가지면서 신적인 통일성을 가진 존재로 나타나는지 살피고자 한다.

 

루이스 벌코프는 삼위일체 교리의 성경적 증거 가운데 구약의 증거를 크게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하나님은 자신을 복수형으로 말씀하셨다(창1:26; 11:7). 둘째, 여호와의 사자는 신적 인격(위)으로 묘사되었다(창16:7-13; 18:1-21; 19:1-22). 셋째, 영은 확실한 인격으로 불리워졌다(사48:16; 63:10).

 

그러나 찰스 핫지는 훨씬 더 조심스럽다(Ch. Hodge 446). "삼위일체와 같은 교리는 성경구절을 인용한다고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 구성요소들은 이곳저곳에서 드러날 뿐이다." 핫지는 이렇게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도 그가 제시하는 '구성요소'는 벌코프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따라서 필자는 벌코프가 제시하는 세 가지 논점을 살필 뿐 아니라 그가 빠뜨리고 있는 잠언 8장의 하나님의 지혜를 추가하여 다루고자 한다. 따라서 필자는 복수형 말씀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혜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자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과 삼위일체의 관점에서 구약이 열어주는 삼위일체 교리의 가능성 등을 생각하고자 한다.

 

I . 복수형 말씀과 삼위일체

 

거의 대부분의 전통적 조직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복수형으로 말씀하셨다"는 점을 구약의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일차적인 근거로 제시한다. 이와 연관된 가장 중요한 구절이 창세기 1장 26∼27절이다. 이와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가"라고 말씀하신 본문인 창세기 3장 22절과 11장 1절도 구약의 삼위일체를 지지하는 본문으로 함께 인용되고 있다. 이세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누구인가에 있다. 학자들은 다섯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1 , 신화의 파편

게블러(Gabler 1795, Hasel 59쪽에서 인용됨)로부터 시작하여 대부분의 현대 비평학자들은 이 창세기의 본문이 신화의 파편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고대 근동아시아의 창조신화에서 '신들' 이 서로 상의하여 인간을 창조하는 사상이 '우리' 라는 복수형으로 아직도 창세기의 본문 속에 남아 있다는 주장이다. 에누마 엘리쉬에는 마르둑이 에아와 상의하고. 아트라하시스 서사시에는 여러 신들이 상의한 뒤 인간을 만든다. 궁켈은 이 복수형이 P기자가 이전에 있었던 다신론적 기사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반영해준다고 한다(1901:101). 그러나 문서가설의 정당성을 제쳐놓고서라도 창세기 1장은 고대 근동아시아의 다신론을 비판하며 그 신화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철저하게 논쟁하고 있으므로 다신론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2. 위엄의 복수형(Plural of Maiesty)

카일(Keil)과 드라이버(Driver)는 '우리' 를 위엄(혹은 장엄)의 복수형으로 본다. 이것은 "신성 안에 있는 속성과 능력의 충만함"이다(Driver 1904:14). 히브리어와 셈어에서는 단수개념이 복수형으로 강화된다. 예로서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 엘로힘(Elohim)은 수적인 복수가 아니라 높고 강하고 존귀한 하나님을 뜻한다. 데라빔(teraphim)도 하나의 신상이지만 복수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위엄의 복수형은 명사에만 나타나고 대명사에는 그렇지 않으므로 이 입장은 문법적으로 정당하지 않다(P.Joueon 1923:309).더구나 "만들자(asa)"라는 동사는 한번도 위엄의 복수형으로 사용된 적이 없다.

 

3. 의사표현헝 복수형(Plural of Self-deliberation)

게세니우스-카우칠(#124f, n.3)와 쥬옹(Joueon #ll4e), 브로켈만(24,14a)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복수형으로 보며, 카수토(55)는 스스로 격려하는 형식(self-encouragement)으로 본다. 최근에는 베스터만과 몇몇 학자들이 지지한다

 

이 입장은 문법적으로 가능하다. 문법학자들은 이사야 6장 8절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와 사무엘하24장 14절의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이 두 본문에 따르면, '나'와 '우리'가 평행을 이룬다. 창세기 11장 7절도 중요한 근거로 사용된다. 사실 창세기 11장 7절은 의사표현형 복수형으로 보기에 아주 적절하다. 그러나 문법적으로 이런 용법은 지극히 희소하며 문맥을 볼 때 의사표현형 복수형은 창세기 3장22절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사야 6장 8절도 마찬가지다.

 

4. 신성의 복수형(Plural of Fullness)

(1) 바나바 서신과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는 여기의 복수형을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으로 보았으며 전통적 교회는 초대교회로부터 삼위일체를 예시하는 것으로 보아왔다. 이레니우스는 성자와 성령이 복수형 속에 있다고 보았고 터툴리안은 성육한 말씀, 즉 그리스도가 포함되었다고 보았다(Hasel 1975:58). 구약신학자 페인(1978: 167)은 여기에서 "삼위일체적 해석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설명도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만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본문 속에 "삼위일체가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2)클라인스는 하젤을 이어, '우리' 를 신성 안의 복수형(plurality within the Godhead)으로 해석한다. 창세기 1장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이미 창세기 1장 2절에 '하나님의 신' 에 대한 언급이 있기 때문에 이 해석은 가능하게 보인다. 구약성경에서 성령은 창조의 수단으로 나타난다(욥 33:4;시104:30;겔37).또한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명령("있으라")을 신적 인격으로 본다면 여기에서 삼위일체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나 신성의 복수형으로 보는 이 해석은 창세기의 자연스런 문맥에 적합하지 않다. 특히 왜 창세기 3장 22절과 11장 7절에 삼위일체가 나와야 하는가?

 

5. 천상의 총회

필로로부터 유대인 랍비들(Bereshith Rabba viii 3-7)과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복수형은 하나님께서 천상의 총회, 즉 '천사들' 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해 왔다. 즉 하나님은 천상의 총회에 있는 여러 천사들을 향하여 "우리가…"라고 말씀하셨다. 최근에도 이런 해석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폰 라드, 침멀리, 베스터만 144에서 인용됨).그러나 이 해석에 대해 카수토는 세 가지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다(1961: 55).즉 이 해석은 첫째로 창세기 1장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중심 사상과 상치되는 것으로 보이며, 둘째로 "우리가 만들자"는 표현은 천사들과 상의하는 말투가 아니다. 또한 셋째로 만약 하나님께서 상의하는 투로 말씀하셨다면 하나님께서 누구와 상의하셨는지 더 구체적으로 시사했을 것이다(왕상 22:19;사 6:1-8; 욥 1-2장). 카수토의 비판이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의 여러 해석 가운데 천상의 총회를 기리킨다고 보는 해석이 아래에 제시된 네 가지 논거에 근거하여 구약 자체의 맥락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본다.

 

첫째, 천상의 신의 총회 개념은 고대 근동아시아에 널리 나타나고 있다. 뮬렌(1980:113)은 이 개념이 "애굽, 메소포타미아, 가나안, 페니시아, 이스라엘 문화에서 아주 일반적인 종교적 모티프였다"고 말한다. 그는 신의 총회에 대한 개념뿐 아니라, 그 용어조차 서로 유사함을 발견하였다. 특히 바벨론의 창조신화에 따르면 인간창조에 대한 결정은 신들의 총회에서 질문과 응답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Enuma Elish 토판 VI, 5-8, ANET 68).

 

둘째, 구약성경 안에는 천상의 총회에 대한 언급이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다 (왕상22:19;욥1:6이하 2:1이하 38:7). 물론 구약의 천상총회 개념은 고대 근동아시아의 천상총회 개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스라엘에서의 천상총회 개념은 유일신앙의 틀 속에서 나온다. 여기에 등장하는 천상의 존재들은 결코 독립적으로 자존하는 신들이 아니며, 이들은 "야웨의 뜻에 복종하는 천상의 영물들에 불과하다"(Miller1973:70).구약에서는 '하늘과 구름'과 같은 비유법과 '거룩한 자들, 신의 아들들, 그(하나님)를 둘러싼 자들, 야웨의 군대'와 같은 용어로 천상의 총회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필자의 논문 1992:104를 보라).

 

셋째, 이사야 6장8절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는 창세기 1장26절과 상당히 유사하며, 주님은 그룹과 스랍들이 있는 천상의 총회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 있다.

 

넷째, 창세기 1장 26절에서 '우리' 가 천상의 총회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때, 어떻게 27절에서 오직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설명 할 수 있는가에 있다. 그렇다면 천사들도 인간창조에 개입하였는가? 나아가 인간은 하나님과 천사들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는가? 그러나 본문 창세기 1장26-27절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선언과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구별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천상의 총회에서 "우리가 만들자…"라고 말씀하셨지만,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창세기 11장 7절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천상의 총회에서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지만, 바로 이어 8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온 지면에 홑으셨다"고 말한다. 이사야 6장 8절과 9절에서도 같은 경우를 발견한다.

 

즉 창세기 1장 27절은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을 창조했음을 명백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상의 총회에 있는 천군천사들을 향하여 인간창조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선언한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천상의 총회를 향하여 이런 말씀을 하실 필요가 있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닮은 인간을 만드실 때 그들의 경배를 받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욥기 38장 4절과 7절이 이 사실을 지지해준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던 말할찌니라‥‥그 때에 새벽별(kokbey boqer)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beney 'elohim)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느니라". 여기서 천군천사들이 "노래하며(ranan)", "기쁜 소리를 낸(rua)" 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요 경배였다.

 

6. 정리

창세기 1장 26절의 '우리' 라는 복수형은 하나님과 천상의 총회를 포함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천사들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창세기 1장 27절은 명백하게 인간이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음을 한정해준다. 따라서 "우리가 만들자'는 천상의총회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천군천사들의 경배를 받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인간창조를 주목하게 하신다. 본문에서 '우리'라는 복수형이 천상의 총회를 향한 하나님의 선언을 가리킨다고 해서삼위의 제 2위시요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여기에서 배제되었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물론 그는 아직 명백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다. 그러나 신약의 저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천지 창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창세기의 본문이 가지고 있는 더 '충만한 뜻(Sensusplenior)'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본문은 구약의 저자들이 말하는 것보다 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창세기 1장에서 다 표현되지 않은 하나님의 계시는 구속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른 본문을 통해 더 온전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창조에 있어서 성자의 역할은 바로 다음에 다루는 하나님의 지혜와 삼위일체에서 보다 명백해진다.

 

II . 하나님의 지혜와 삼위일체(잠언 8:22-31)

 

전통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구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와 연관하여 잠언 8장 22-31절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 (박윤선 1972:13)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잠언 8장은 예언은 아니다. 이 본문은 우리가 선지서에서 보는 예언의 형식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잠언 8장에 소개된 지혜의 본질과 성격은 우리로 하여금 선재한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만든다. 바로 이 지혜의 성격 때문에 칼빈도 요한복음 5장 17절에 근거하여 여기의'지혜' 는 제 2위이신 성자라고 주장'한다(「기독교강요」,1960:129-130).

 

그러나 잠언 8장의 지혜와 그리스도를 동일시할 때 생기는 문제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사실 신약성경이 잠언 8장을 직접 인용하지는 않지만, 예수와 선재한 지혜를 일치시키고 있기 때문에 잠언 8장의 본문은 구약의 삼위일체와 연관하여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잡고 있다

이 본문을 구약의 맥락에서 자세히 살핀 뒤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보자.

 

문학적 형식면에서 볼 때 본문은 창세기 1장 1∼2장3절 그리고 2장4절 이하와 애굽의 아포피스 책(Book of the Apophis)과 에누마엘리쉬 토판 1,1-9줄까지와 유사성을 가지며, 시편의 여러 창조시편과 유사성을 가지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찬양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창세기 1장 같은 창조의 순서에 관심을 갖기보다 모든 창조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난 '선재한 지혜에 대한 찬양' 을 다루고 있다. 잠언 8장본문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주께서 지혜를 낳고 왕위에 않히심(22∼26절)

1) 요약적 진술: 주께서 창조 전에 지혜를 낳으심(22∼23절)

(1)주께서 지혜를 낳으심(22절)

(2)주께서 지혜를 세우심(23절)

2) 부정적 상황 (24∼26절)

(1)물이 있기 전(24절)

(2)산이 있기 전(25절)

(3)땅이 있기 전(26절)

 

2. 지혜는 어린아이로서 주의 창조를 보고 기뻐함(27∼31절)

1) 긍정적 진술: 하늘, 바다. 땅을 만드실 때 지혜가 거기 있었음(27∼29절)

(1)하늘과 궁창을 만드실 때(27절)

(2)궁창과 바다의 샘을 만드실 때(28절)

(3)물과 땅의 경계를 정하실 때(29절)

2) 주절 : 이 기간 동안 여인 지혜는 주 앞에서 놀고 인간을 기뻐함(30∼31절)

(1)지혜는 하나님 앞에 있는 어린아이(30상)

(2)지혜는 하나님 앞에서 그 창조를 보고 기뻐함(30하∼31절)

 

3. 결론: 지혜자는 아들에게 교훈을 받으라고 권면함(32∼36절)

 

위의 구조를 보면 전체적으로 세 개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첫 연과 둘째 연은 각각 두 개의 소절로 다시 나누어져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지혜는 창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며 왕으로 세우심을 입고 하나님의 창조를 보면서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이 본문에서 구약의 삼위일체와 연관된 중심 단어들과 그 논쟁점은 다음과 같다.

 

1. 주께서 지혜를 낳으심(22절)

"야웨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나를 가지셨으며"(22절)에서 "가졌다"(qana)는 동사가 논쟁의 핵을 이룬다. 1926년 버니(Bumey)는 히브리어 qana에 대한 연구에서 다섯가지 의미를 제시하였다(윤영탁 1991:100에서 인용됨). "사다"(buy, 잠20:14등), 구매한 권리에 의하여 "소유하다"(own,사 1:3, "그 임자"), 구매한 방법이 아니고 "획득하다"(acquire, 출15:16;시74:2; 78:54; 잠1:5등),"낳다 (beget;신32:6; 잠8:22) · 얻다"(get, 낳아서 얻음, 창4:1), "창조하다"(create, 창14:19,2; 시139:13)등이다. 이 다섯 가지 의미 가운데 버니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를 "이전에 소유하지 못했던 어떤 것을 얻는다"는 것으로 보았다. "이 얻음은 사거나, 만들거나, 낳거나(아기인 경우), 마음속에서 계속 생각함으로(지혜인 경우) 이루어진다는 것이다"(윤영탁,100). 이 동사가 기본적으로는 얻다는 의미를 가지나, 이렇게 다양한 어감으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에 잠언 8장 22절에서 어떻게 해석되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첫째로 아귈라, 시마크스, 데오도션(ekthsato)과 제롬(possedit), 루터, KJV, NASB, 한글개역성경은 "나를 가졌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가졌다"는 번역은 "획득했다"는 번역보다는 훨씬 자연스럽다. "태초 전에 나를 가졌다"는 "하나님 안에 나를 하나의 속성이나 기능으로 가졌다"는 뜻보다 지혜를 독자적 인격으로 가지신 것이다. 즉 지혜는 이미 창조질서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고 창조질서 밖에 있었다. 온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하나님은 지혜를 가지고 계셨다. 이 번역을 따르면 잠언 8장 22절의 지혜와 신약의 그리스도를 동일시하기 쉬워진다.

 

둘째로 70인역(ktizein), 시리아역(mtqnh), 탈굼(br'ny)은 "창조하다"로 번역하고, 현대에 와서는 RSV와 NEB(create)가 이 번역을 따르고 있다. 초대교회 당시(4세기) 아리우스가 이 번역에 근거하여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그를 피조물로 보게 되었다. 아리우스는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고 여기에서는 "창조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에게 종속된다고 주장했다(Scott 73). 최근에는 슈미트(Hans H. Schmidt 1966:150)와 올브라잇(Albright 1955:1∼12)이 이 번역을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번역은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창조하다"로 번역된 세 개의 번역된 본문(창 14:19,22;시 139:13)도 "얻다, 혹은 소유하다"로 보는 것이 더 어울린다(윤영탁106-108을 보라).

 

세번째 가능성은 "나를 낳다"(to beget)로 보는 것이다(Irwin 1961:133-42). 본문에서'낳다"는 상당한 신빙성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이 동사가 구약에서 출생의 맥락에서 여러번 나타나기 때문이다(창4:1;신42:6;시139:13).잠언 8장 역시 출생의 맥락이 두드러진다. 24절과 25절에서는 "내가 이미 났었다"(holalti)는 말로서 출생 이미지를 명백히 한다. 민수기 11장 12절에서도 잉태와 출생의 관점에서 나타난다.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hara)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나이까(yalad)." 또 신명기 32장 6절의 "우매 무지한 백성아 야웨께 이같이 보답하느랴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에서도 잉태와 출생을 통한 신인동형적 표현이 나타난다 또한 잠언 8장 30절에 있는 아몬(amon)을 유아로 본다면 8장 22절에 있는 카나(qana)를 낳다고 보는 것이 아주 적절해 보인다.

 

만약 이 번역이 옳다면 첫번째 가능성인 가졌다의 의미가 더 명료해진다. 하나님은 어떻게 지혜를 가지셨는가? 그는 잉태와 출산을 통하여 지혜를 소유하였다. 즉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나왔으며 하나님과 통일성을 갖고 있으며 그리하여 지혜는 창조 전에 이미 존재하게 되었다. 주님은 태초에 창조활동을 시작하시기 전에 지혜를 낳으셨다. 따라서 이지혜는 주님과 연대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창조 전에 계신 존재로서 창조에 필수적인 존재이며 주님에게 소유되고 있으나 또한 사람들에게도 소유될 수 있다.

 

2. 주께서 지혜를 왕으로 세우심(23절)

다음으로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다"에서 세웠다는 단어 나사크(nasak)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붓다, 쏟다"는 뜻으로 금속을 주형에 부어서 만들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또 하나는 "세우다, 앉히다"는 뜻으로 시편 2편 2절에서는 "왕을 세우다'는 뜻을 갖고 있다. 여기에는 대관식 배경이 깔려있다. 특히 시편 2편 7절에 있는 "내가 너를 낳았도다"와 평행을 이룬다. 원래는 기름붓는 환유법을 통하여 어떤 직분에 세우게 되는 뜻이 담겨있다. 그렇다면 창조에 있어서 지혜의 역할은 본문에서 능동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으나 암시되어 있다.

 

3. 지혜는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 어린아이였음(30절 상)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양육받는 아이('amon)가되어" 에서 히브리어 'amon은 크게 둘로 번역된다. 첫째로'amon은 '창조자' 혹은 '건축자', '명공(master craftsman)'으로 번역된다. 지혜를 창조자로 보면 지혜는 창조에 있어서 능동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대부분의 역본들과 학자들은 이 입장을 지지한다(Keonig, Gesenius, BDB, Albright).이 번역은 70인역과 시리아역과 벌게이트를 따르고 있다. 솔로몬의 지혜서 7장21절과 8장 6절도 "지혜는 만물을 만든자"라고 말하며 "그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조성자"라고 한다. 필로는 로고스와 소피아의 구별을 없애고 di' hou ho kosmos edmiourgeito(de Sacerdot. 5)를 언급하였다. 이것은 요한복음 1장 3절 이하와 골로새서 1장 16절의 근거가 되었을 수 있다. 그는 소피아-로고스가 "만물의 띠(bond of all things)"라고 말했다. 이것은 골로새서 1장 17절의 근거가 되었을 수 있다. 창조자로 읽는 것에 대한가장 강력한 근거는 예레미야 52장 15절에 근거한다. 한글 개역성경은 "무리의 남은 자"로 번역하고 있으나 NIV는 the rest of the craftsmen으로 번역한다. 이 본문은 '장인들' 에 대한 집합명사일 수 있다.

 

그러나 '창조자' 로 읽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도 예레미야 52장15절은 본문비평상 어려움을 갖고 있다. 70인역에서는 이 단어가 생략되었으며. 이 절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열왕기하 25장 11절은 "무리"(hehamon)로 읽고 있다. 만약 우리가"창조자"로 읽으려면 아가서 7장 2절처첨 "공교한 장색"들 뜻하는 'omman으로 되어야 한다(Akk., ummanu; 셈어의 장모음 아<a>는 히브리어데서 규칙적으로 장모음 오<o>로 바뀐다. 역본들은 ' amen으로 인는다. 70인역은 '치키는 자, 수탁자'를 탈굼은 "신실한, 믿을 만한"을 뜻할 수 있다).

 

둘째로 'amon을 "유아"로 인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상당히 많은 학자들(Gunkel, Fichtner, Kayatz, B.Lang 등)과 여러 역본들(KJV, JPS. Moffatt)이 이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애가 4장 5절에 있는 복수형태는 "길리운자"로 나온다.

 

문맥을 살펴보면 전체적인 요약을 제시한 22절의 "나를 낳았다"(qana)와 24절에 있는"내가 이미 낳았다"(holalti)에 아주 잘 일치하고 있다. 또한 유아로 읽는 것은 30절에서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고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다"와 잘 어울린다. 고대 애굽의 창조론에 나타난 마아트의 역할도 본문과 상당히 유사하다. "아툼은 그의 딸이요 수(Schu)의 여동생인 테프누트(Tefnut)가 마아트(Maat)임을 공식화했다. 그는 태초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에 오직 마아트와 슈와 그의 자녀들만이 그와 함께 있었다"(Kaystz 1966:93∼95).이 본문에서도 마아트의 실제적인 창조활동에 대한 언급은 없으며 단지 태초에 놀고 있는 유아로 그려지고 있다. 구약성경과 가장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 것은 마아트가 창조기사에 있어서 "전에 아직 멀었을 때"라는 표현과 연관되어 나온다는 사실이다. 마아트와 슈는 전재하고 있었다. 땅이 창조되기 전에 지혜는 존재하고 있었으며 신들과 같이 있었다.

 

킬(Keel)이 연구한 애굽의 벽화 그림들을 보면, 마아트는 왕의 아내로서 성적인 자극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왕도 의식적인 행동으로 신들을 기쁘게 하려고 장난을 치고 있다. "잠언 8장 22∼31절에 따르면 세상의 비밀은 신의 기쁨과 즐거움에 있다. 욥기28장은 세상의 비밀을 아는 것이 인간에겐 불가능한 것으로 그려진다. 잠언 8장에 따르면 우주의 기초는 슬픔과 혼란스러운 우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명랑하게 즐거워하며 인생의 즐거움으로 가득찬 것이다"(Keel 1947:72).

 

신약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the first born)라는 표현(골1:l5)은 유아로 번역하는 것과 아주 잘 어울린다(계 3:14 참조). 문맥으로 볼 때에도 22-23절에 있는 첫번째 요약적 진술에 있는 출생 영상과 잘 어울린다. 그러나 여기에도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유아로 보려면 먼저 발음을 수정하여 ' amon을 ' amun으로 읽어야 한다. 또한 유아로 볼 때는 전체적 인 문맥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즉 지혜를 하나님의 창조활동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자리에 둔 이후에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영상으로 소개한다는 것은 문맥에 잘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천지창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갑자기 여인 지혜가 천진난만하게 노는 모습은 잠언 1-9장에서 갖는 지혜의 권위에 일치하는 것 같지 않지만,그러나 이 즐거움과 기쁨과 웃음을 활력의 상징(삼상18:7; 렘30:19; 31:4; 시104:26)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이것은 아주 자연스런 반응이 된다. 특히 "… 앞에서 기뻐한다"는 의식적인 행동으로써 하나님의 창조활동을 보고 경배하는 기쁨을 드러내어 준다. 사울과 다윗이 블레셋 군대를 물리치고 돌아올 때 여인의 무리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기뻐하였다. 회복된 이스라엘은 새로운 하나님의 축복을 기뻐하며(렘 30:19) 춤출 것이다(렘 31:4). 웃음이란 하나님의 은총을 상징해주기 때문에 웃는 자는 특별한 위치를 부여받은 자이다(창 21:9 참조). 지혜가 하나님 앞에서 뛰노는 것이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유아'로 볼 수 있는 가능성도 높다.

 

4. 정리

잠언 8장에 나타난 지혜의 모습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하나님은 지혜를 창조전에 낳아서 가지셨다.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며 하나님의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 지혜를 왕자로 세우셨다. 셋째, 지혜는 하나님의 창조를 보고 기뻐하는 유아이다. 창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의 창조를 보며 천진난만하게 기뻐하는 지혜의 모습 속에서 신약의 저자들은 선재하신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태초에 계신 말씀이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으로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고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창조물 보다 먼저 나신이"(골1:15)라고 말하면서,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다"고 말한다(16-l7절). 요한계시록 3장 14절에서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이런 신약의 해석은 비록 잠언 8장 22-32절을 명백하게 인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본문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잠언의 본문은 모든 만물이 만들어지기 이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태어나고 세움받고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보며 기뻐한 선재한 지혜를 소개하고 있다. 니케아신조에서 성자를 "태어나되 창조되지 않았다"고 말한 것도 잠언 8장에 근거하고 있다.

 

III . 하나님의 사자와 삼위일체

 

벌코프는 "야웨의 사자가 신적 인격(위)으로 묘사되었다"(창16:7-13; 18:1-21; 19:1-22)는 사실에 근거하여 구약의 삼위일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으므로 구약에 나타난 주의 사자의 정체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비평학자들은 주의 사자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천사"로 보거나 혹은 "한 명의 하나님 사자"로 본다. "왕과 관리들처럼 하나님은 자기 사자를 갖고 있었다"(Gunkel, Westermann 243에서 재인용). 게스터(Castor)는 주의 천사가 나타나는 중요한 본문들을 대부분 '통속설화' (Maerchen)로 보고 하나님의 사신으로 다를 뿐이다(IDB 1:128-130). 베스터만은 하나님의 사자가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명의 사신"이라는 노트(R. Noth)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하나님은 사신에게 임재한 것이 아니라 그 메시지에 함께 하셨다"고 말한다(244).주의 사자의 신분을 좀더 높이 보는 학자들은 그를 "야웨의 가견적인 신현'(Davidson 299; O.Procksch, "the theophany of the person of God")으로 보기도 한다. 에드몽 쟈꼽은 하나님의 사자로 나타나는 인물이 여러 곳에서 "난해하고 혼란스럽다"고 말한다(Payne.167,n.5에서 인용됨).

 

또한 유대교에서도 "주의 사자"를 한 명의 독립된 인격으로 보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본다. "따라서 그들(초기 성경기록자들)은 그들(천사들)을 개인화하거나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따라서 사사기 13장 18절이나 창세기 32장 30절에서 천사들은 그들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대답을 거절하였다" (Jewish Encyclopaedia 1901:584)

 

구약성경에서 "야웨의 사자"(mal'ak yhwh)는 58회, "하나님의 사자"(mal' ak 'elohim)는 11회 나타나고 있으며 그는 일반적인 천사들(beney 'elohim, boney 'elim, qedoshim,그룹과 스랍들, 미가엘과 가브리엘 등)과 그 성격과 기능과 존재양식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구별되어 나타난다. 물론 이 표현은 아주 가끔 하나님께서 친히 보내신 천사를 가리킬 경우가 있다.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만난 존재는 하나님이 보내신 한 명의 천사이다(왕상 19:5). 이어서 주의 사자가 등장하는 이유는 바로 앞에 명시된 천사를 설명하기 위함이다(왕상 19:7).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 선 주의 천사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천사이다(삼하 24:16). 그러나 이런 천사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사자' 가 나타난다.

 

주의 사자는 족장시대와 초기 성경 기록들에 주로 나타나고 있다. 베스터만이 잘 관찰한 바와 같이(242)주의 사자는 주로 '아들의 탄생 소식' 과 '구원의 소식' 을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주의 사자가 등장하는 모든 본문에 나타난 하나의 공통점은 그가 하나님과 상호 교통적으로 나타나며 하나님과 거의 동격으로 나타나는 데 있다. 먼저 창세기 16장 7절에 따르면 하갈이 광야에서 방황할 때 야웨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난다. 여기에 나타난 야웨의 사자의 모습은 일반적인 천사나 선지자와는 아주 다른 독특한 모습이다. 그는 하갈로 하여금 집으로 돌아가 사라에게 복종할 것과 이스마엘을 낳을 것과 그의 운명에 대한 예언을 주신다. 그때 하갈은 야웨의 사자를 만났다고 말하지 않고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13절)라고 말한다.

 

창세기 22장 11절에서도 야웨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한다. 15절에서는 "야웨의 사자가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라고 말한 뒤 16절로 넘어가자마자 "야웨께서 이르시기를 ..." 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원래의 약속을 반복하고 있다. 야웨의 사자는 야웨와 다른 듯 하면서도 그 역할과 속성과 기능에 있어서 너무나 유사하다.

 

창세기 31장 11절에서 야곱은 라반과의 논쟁에서 자기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셨다"(31:11)고 말한 다음 바로 이어서 하나님의 사자가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13절). 우리는 야곱의 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와 그 다음에 자신을 스스로 소개하시는 "벧엘의 하나님"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야곱은 후에 요셉을 축복하면서 독특한 평행법을 쓰고 있다(창 48:15,16).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소서"

 

이 본문은 "조상의 하나님"과 "나를 지금까지 기르신 하나님"과 야곱의 모든 환난에서 그를 "건지신 사자"를 동일시하고 있다. 여기의 "사자"는 단순한 천사가 아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시다.

 

야곱 이야기와 연관하여 우리는 창세기에서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주의 사자와 씨름한 사건에 대해 재고하게 된다. 야곱은 한사람과 씨름하지만 그의 이름을 물어서는 안되었으며(28절) 그는 야곱을 축복하였고(29절) 야곱은 그가 씨름한 곳을 "브니엘"이라고 불렀다(30절).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기 때문이다." 후대에 호세아 선지자에 따르면 "야곱은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 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다"(호 12:3-6)고 재해석한다.

 

야웨의 사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 같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신적 존재라는 점은 오경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 가운데 하나인 출애굽기 3장에서도 나타난다. 본문 2절에서 "야웨의 사자가 가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한 뒤, 바로 이어 "야웨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다"고 말씀하신다(6절).하나님의 사자와 하나님 야웨의 사자와 야웨 사이에 구별이 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사자 흑은 천사의 모습으로 직접 나타나신 것과 같다.

 

출애굽기 23장 20-33절에 보면 주님은 자신의 사자를 모세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겠다"고 말한다(20절).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자는 각각 다른 인격으로 나타난다. 이 사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목소리를 청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 이름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22절).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하나님의 이름이 중첩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인격이다. 하나님의 사자는 백성들의 "허물을 사하는" 권세를 갖고 있다(21절). 나아가 주님은 "나의 사자가 네 앞서 가서" 가나안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23절).데이빗슨은 여기에서 "나의 사자"와 "내 얼굴의 사자"로 주님께서 소개하는 사실을 잘 주목하면서도 "구원하기 위해 드러난 야웨와 야웨 자신 사이에는 구별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298).

 

그러나 야웨의 사자는 단지 야웨의 가견적인 신현이라고만 볼 수 없다. 이 둘 사이에는 연대성과 이질성이 동시에 있다. 이것은 출애굽기 32-33장에 더욱 잘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도 주님은 모세에게 계속하여 "내 사자가 앞서 가리라"(32:34)고 말씀하시며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겠다"(33:2)고 하신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 왜냐하면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라"고 말씀하신다(3절). 그러나 모세의 간청으로 주님은 다시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로 말한다. 여기에 "나의 얼굴(나의 임재)"과 "내"가 평행을 이룬다. 여기의 나의 "얼굴"은 하나님의 사자를 가리킨다. 이사야 63장 9절에 따르면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셨다"고 한다. 이 구절에서는 "얼굴"과 "사자"가 연계형으로 이어졌다. 즉 주의 사자는 주님과 다르나 주의 얼굴을 드러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의 사자를 보면서 주님이 그 안에 계심을 알 수 있었다.

 

모세의 지도력을 이어받은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 "야웨의 군대장관"을 만난다(수5:14).그 군대장관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이스라엘 군과 마주섰다(13절). 여호수아는 그 앞에 나아가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하시나이까"라고 묻는다. 이 군대장관은 여호수아의 경배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한 명의 천사일 수 없다. 그는 오히려 여호수아에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고 말씀하신다(15절). 이것은 이전에 주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과 동일하다.

 

사사기에서 "야웨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신다(삿6:11). 기드온은 처음에는 그를 몰라보고 한 명의 사람으로 생각하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기드온에게 사사로서의 사명을 부여한다. 사명부여의 형식은 모세에게 주신 것과 동일하다(출3). 여기에서도 야웨의 사자와 주님 자신의 구별이 잘되지 않는다(16절, "야웨께서 이르시되"). 기드온은 손님 대접하듯이 그에게 양식을 준비해왔으나 그는 고기와 떡을 다 제물처럼 살라버렸다. 그때 기드온은 "슬프도소이다 주 야웨여 내가 야웨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고 말한다(22절). 그때 "야웨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고 위로하신다(23절).

 

말라기에 보면 다시 주님은 자신의 "사자"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신다(3:1). "그가 내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고 말한다. 주님은 엘리야를 미리 보내어 그의 길을 예비할 것이다(4:5).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자와 하나님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Vos, 88). "이 사자는 참으로 신적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확신시키는 성례적 기능을 행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우리 주께서 성육신 하심으로 이 사실이 가장 잘 드러나게 되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에 대한 우리의 연구를 정리해보면 하나님과 그의 사자 사이에는 본질적인 동질성과 구별된 인격성이 드러난다. 구약에 나타난 주의 사자는 주님의 얼굴이며 그의 계시요 그의 임재다. 그는 하나님처럼 말씀하셨고 하나님처럼 나타났으며 하나님처럼 경배 받으셨고 하나님처럼 일인칭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는 다른 인격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주님의 사자였다. 주님은 그에게 "내 사자"요 "내 얼굴의 사자"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구약에 나타난 "주의 사자"가 바로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였다고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의 속성과 기능과 사역을 볼 때 신약의 그리스도를 충분히 가리킬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IV. 하나님의 신과 삼위일체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지난수십년 사이에 출판된 대표적인 구약신학 책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 "성령"이 하나의 독자적인 신학적 주제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것은 19세기와 20세기 초에 나온 구약신학책들과 비교해볼 때 상당히 달라진 현상이다 예로서 욀러(G. F. Oehler,1883), 데이빗슨(A. B. Davidson,1926), 스네이스(N. H. Snaith, 1944)등이 쓴 구약신학 책들에서는 "하나님의 영" 혹은 "주의 영"이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등장하고 있다. 물론 아이크롯트(Eichrodt,1967:46-68)는 그의 구약신학에서 "우주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령을 어느 정도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구약신학을 다루는 학자들은 대부분 구약의 "성령론"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구약신학에 있어서 성령론이 방치되어 있는 현상의 근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비평학계의 성령론에 대한 신학적 전제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대부분의 비평학자들은 구약에 나타난 성령을 인격적인 존재로 보기보다 비인격적인 '힘(바람과 힘은 상통한다)'으로 보게 된다. 이들의 사상적 밑바닥 속에는 인격적인 하나님으로서의 성령의 존재가 구약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들은 삼위일체 개념이 후대 교회의 산물로서 구약 자체 속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는 기본적인 전제를 갖고 있다. 아이크롯트조차도 성령을 "힘과 능력" 정도의 차원으로 다를 뿐이다. 침멀리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은 "야웨로부터 나오는 동적인 힘의 현상"이다(1978:101;cited from Batteau:190). 람프(Lampe) 역시 성령은 "신비로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며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활동의 양상"이라고 말한다(1962:626). 볼프(H.Wolff,1977;66)는 영이 "일차적으로 인식(heart)이나 욕망이 아니라 행동하려는 강력한 힘과 의지"라고 본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 가장 핵심적인 논쟁은 과연 구약에서 나타난 성령이 단순한 신적 능력인지 아니면 인격적 존재인지를 결정하는데 있다.

 

1 . 창조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 : 창조의 영

1) 혼돈과 공허에서 질서를 짜시는 하나님의 신(창 1: 2)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는 선언은 천지창조를 요약하여 진술해준다. 이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땅이 수면 위로 나타나기 직전의 상황을 1장 2절은 삼중적으로 제시한다.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은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먼저 "하나님의 신"이란 구가 어떻게 번역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히브리어 루아흐는 기본적으로 "바람"과 "호흡"을 뜻하기 때문에 이 구는 "하나님의 바람"(Gottessturn, Westermann 1984:106; Eichrodt, II:47,n.5), 혹은 "하나님의 호흡"(Ridderbos, B,Jongeling, Dasberg; cited from Gispen 1974:44; 최근에는 Wehnam 1987:17)으로 직역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호흡"이 여기에 나오는 것이 어색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비평학자들은 "하나님의 바람이 수면에 운행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창세기 첫장 둘째 줄부터 삼위일체를 암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신, 혹은 영"의 개념을 허용하고 싶지 않거나 혹은 보다 자연스러운 해석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바람"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바람"이란 표현이 시사해주는 영상이 어색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형용사적 용법의 최상급으로 보고 "강한 바람", "폭풍"으로 번역하게 되었다.

 

비평학자들은 창세기 1장 2절이 하나님의 신(영)이 수면을 운행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사상은 P의 창조기사가 지닌 일반적 사상구조에 분명히 어울리지 않는다"(Eichrodt, II:47f., n.5). 이리하여 이 구는 일반적으로 "강한 바람", 혹은 "무서운 폭풍"(von Rad, 1965)으로 번역되고 있으며 이런 입장이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Albright, Peters, H.G.May, McClellan, Orlinsky, W.H.Schmidt, E.4.Speiser). 물론 문법적으로 볼 때 이런 번역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사실 하나님이 최상급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구약에 자주 나타난다(Waltke,1990:268).문맥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은 깊음 위에 있기 때문에 2절 하반절 역시 유사한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즉 태초의 바다수면에 "강한 바람"이 불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히브리어 엘로힘을 최상급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elohim)은 항상 모든 피조물을 초월한 인격적 존재로서 그의 이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된다. 게다가 웨남이 잘 본 바와 같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 혹은 야웨의 영은 단 한번도 '강한 바람'으로 사용된 적이 없고, 항상 하나님의 영, 혹은 하나님의 바람으로 나타난다"(Wehnam,17). 구약성경에서 ruah 'elohim은 대부분 "하나님의 신"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루아흐는 호흡으로 번역하기에는 너무나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호흡"으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단어 속에는 기본적으로 힘과 능력의 뉘앙스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의 첫 창조기사에서 하나님의 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창조역사를 했는지에 대해 명시되고 있지 않으나 이 절에 사용된 동사 히브리어 rahap가 실마리를 준다. 이 동사는 오경에서 단 두 번 나타나며(Piel형)특히 신명기 32장 11절에서는 독수리가 그 새끼위를 "너풀거린다"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우가릿어 rhp도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Gordn,1965:484). 신명기 32장에서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에 있는 새끼 위를 "너풀거리는" 모습은 기본적으로 자기 새끼를 보호하며 돌보는 영상을 준다. 이 영상을 창세기 1장 2절로 가져온다면 하나님의 신이 아직 혼돈과 공허로 가득찬 세상을 지키며 보호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여기의 동사가 피엘형 분사로 사용된 것은 지속적인 동작으로서 빈번성, 혹은 지속성을 가리키기 위함이다(Waltke,1990:414 참조).

 

신명기 32장의 문맥을 좀더 살펴보면, 독수리가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주님은 이스라엘을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시고"(신32:10)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고 한다. 출애굽기 19장4절에서도 "내가 어떻게 독수리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신명기 32장10-11절과 창세기 1장 2절 사이에는 명백한 유추가 있다. 즉 독수리가 광야에서 그 새끼위에 너풀거리며 그 새끼를 보호하고 인도하는 것 같이 하나님의 신(영)이 "혼돈과 공허로 덮인 땅과 흑암으로 덮인 깊음"을 감싸고 보호하고 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돈의 광야 길에서 보호받는 것과 창조시 혼돈의 물을 주의 영이 감싸고 보호하고 있는것 사이에는 부인할 수 없는 유사성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클라인의 해석은 아주 새롭다. 즉 창세기 1장2절에서 하나님의 신은 태초의 혼돈을 "창조적 능력으로서 뿐 아니라 창조의 파라다임으로" 감싸고 보호하고 있다(Kline,1980:17). 클라인이 말하는 "창조의 파라다임"이란 혼돈과 공허에서 질서를 만드는 파라다임을 의미하고 있는 것 같다. 만약 클라인의 해석이 옳다면, 창세기 저자는 창세기 첫 장에서 하나님의 신이 창조 사역에 밀접하게 관여하시며 온 우주에 질서와 아름다움을 만들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따라서 혼돈과 공허에서 질서를 이루며 현재 인간이 살 수 있는 땅을 만드신 것은 말씀의 사역뿐 아니라 성령의 사역이기도 하다. 주의 말씀과 주의 신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창조사역을 이루고 있다. 워필드(B.Warfield, 189i)가 이점에 대해 잘 말해준다. "따라서 하나님의 신은 구약의 최초부터 만물의 존재와 존속의 원리이시며 모든 움직임과 질서 그리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성의 원인으로 나타난다"(윤영탁 역1985:110).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신의 인격성은 창세기 1장 2절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2) 지성과 총명과 모략의 신(사 40: 12∼17)

이사야 선지자는 40장 12-17절에서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만드신 우주의 방대함과 위엄과 주님의 섬세한 솜씨를 노래하면서 주님의 위대함과 인간의 연약함을 수사의문으로 대조하고 있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릴 수 있는가, 즉 잴 수 있는가? 시인은 한번 더 묻는다. "누가 그 뼘으로 하늘을 잴 수 있는가" 그는 계속해서 "누가 땅의 티끌을 되에 담을 수 있겠는가, 누가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모았겠는가? 인간은 이 세상과 우주를 잴 수가 없다(욥 38:5).

 

나아가 선지자는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는가?"(13절)고 묻는다. 여기에서 "지도하다"(tikken)는 동사는 앞의 12절에서 "하늘을 재다'(tikken)와 같은 동사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물과 하늘을 그 손바닥과 뼘으로 재셨지만, 주님은 아무에게도 측량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무도 그를 지도할 수 없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주의 영"이 창조의 맥락에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기에 나타난 "주의 영"은 바로 창조 때에 물 위를 운행하신 지성과 총명의 영이시다(창 1:2; 사 34:16; 욥 33:4). 성령은 생명을 만드시고 살게 하시는 분이며 혼돈에서 질서를 만든 분이다. 그 어느 누구도 그를 지도한 적이 없다."누가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라는 후반부는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느냐, 그 어느 누구도 주님의 모사로 일할 수 없다'것이다 옛날에는 왕에게 많은 모사가 있었다. 그들은 왕이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가지고 진실을 말해 주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 그가 숙지해야 할 사항을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주의 신이 창조를 지도하셨기 때문이다. 즉 창조에 있어서 성령은 온 우주를 지혜로 만드신 건축자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건축의 맥락에서 지혜의 영으로 나타난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신이 창조사역에 동참하듯이 출애굽기에서 성막 건설에 하나님의 신이 역사하신다. "내가 브사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겨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리라"(출 31:2-5). 건축과 예술작품을 만드는 일에 있어서 "바람"으로 번역하는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출애굽기에서 성막건설에 브사렐이 나타나듯 후에 솔로몬 성전건축에서는 새로운 브사렐로 나타나며 성전건축을 위해 주님께서 특별한 지혜를 그에게 주신다(대하 2:12). 브사렐과 솔로몬의 성막과 성전건축 사역은 주의 영이 천지창조를 하는 것의 그림자이다.

 

2. 출애굽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 : 구원의 영

느헤미야 9장 19-20절에 따르면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등으로 밤에는 불기등으로" 인도하셨으며 "또 주의 선한 신을 주사 저희를 가르치셨다"고 말한다. 학개 선지자도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회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다"고 말한다(2:5).

 

1) 근심하시는 주의 영(이사야 63:7∼14)

이사야63장 7∼14절은 구원사에 나타난 성령 역사의 인격성을 찾는 데 좋은 출발점을 주고 있다. 본문에서 선지자는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여정에 나타난 주님의 사랑(hewed)과 긍훌(rehem)과 구원의 은총을 말하면서 백성들의 반역을 대조적으로 말한다. 여기에서 백성의 반역은 출애굽의 여정에 있었던 어떤 특정한 사건과 연결되지 않고,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다"로 설명된다(10절). 여기에서 "주의 성신이 근심하였다"는 표현은 성신의 인격성을 더욱 드러내준다. 성령은 단지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 근심하시는 인격이시다.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신 성령은 후일 백성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역경 속에 처한 백성들은 "옛적 모세의 날을 추억하며" 말하기를 "백성과 양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고 탄식한다. 여기의 바다는 홍해를 가리킨다. 후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옛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엔서 구원받은 사건을 성령과 연관하여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중요한 점은 홍해에서 올라오게 하신 다음부터 주님은 "그들 중에 성신을 두셨다"는 데 있다. 따라서 여기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은 다글라쉬(Daglash)가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선지자들에게 부어주셔서 가르치게 하신다"(느9:20; 9:30; 슥7:12)고 말한 것처럼 선지자에게 임한 영이 아니고 출애굽과 홍해를 건널 때 나타난 성령의 사역이다. 바로 다음 절이 이 사실을 뒷받침해준다(12-13).

 

선지자는 끝으로 "여호와의 신이 그들로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14절)고 한다. 이절은 주의 신이 친히 출애굽한 뒤 광야를 통과한 옛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비로소 안식을 주었음을 말하고 있다.

 

2)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이사야 4:2∼6)

이사야 선지자는 미래에 시온에 임할 심판을 통한 구원을 예언하면서 출애굽에 나타난 불과 구름 기둥의 영상을 명백하게 사용하고 있다. 선지자는 먼저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ruah mishpat)과 소멸하는 영(ruah ba'er)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4절)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라"고 말한다(5절).

 

4절에 있는 "심판하는 영"은 이사야 28장 6절에서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신(ruah mishpat)이 된다"는 표현으로 다시 나타난다. 따라서 "심판하는 영"은 엄격한 공평의 원리를 따라 선악을 구분하며 악을 징계하며 나아가서 악을 처단하는 "소멸하는" 영이다. 뒤에 있는 "소멸의 영"은 앞에 있는 "심판하는 영"을 꾸며주며 철저한 심판의 모습을 설명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의 심판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로서의 심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심판"을 뜻한다(Young1965:I:184).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혀가게 하심으로 시온의 더러움을 씻고 예루살렘의 피를 정결케 하실 것이다. 여기에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은 명백하게 심판의 맥락에서 나타나고 있다. 주께서 이들을 심판하신 후 다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시온산에 임하실 것이다.

 

3. 새 창조의 영

1) 내주 하시는 주의 영(시편 51 : 10∼12)

시편 51편 10-12절은 영적인 갱신을 위한 기도로서 새로운 사람의 창조와 성령의 사역을 이어주고 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10절)에서, "마음"과 "영"은 평행을 이룬다. 구약성경에서 마음과 영은 둘 다 지성, 감정, 의지를 다 포함하여 한 인격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세분하자면 마음은 감정적인 의식활동이나 의지적인 측면보다 지적인 활동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영"은 내적인 인격, 성격, 태도, 성품을 가리키며, 특히 의지적인 차원을 강조해준다. 죄는 의지력을 붕괴시키므로 시인은 "내 안에 정직한 사람의 영으로 새롭게 하소서"라고 구한다.

 

여기에서 시인은 "창조하다"(bara)라는 동사를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창조를 구한다. 그는 정결하고 변함없는 새 사람으로 만들어지기를 원한다. 앞의 5절에서 시인은 인간의 본성 속에 부정과 죄가 내재한다고 말했다. 이 부패는 생명이 시작하던 순간부터 있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새로운 창조를 구한다. 그의 마음은 출생 때부터 부패하였으므로 새 창조를 구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울도 새마음을 얻었다(삼상 10:6,9). 후기 선지서에서 주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새마음을 창조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겔 36:26; 11:10; 렘 32:39).

 

더 나아가서 시인은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구한다(11절). "주의 성신(ruah qodsheka)"이란 표현은 여기와 이사야 63장 10,11절에만 나온다.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다른 구약의 구절들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선지자들에게 부어주셔서 가르치게 하신다(느 9:20; 9:30; 슥 7:12).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영은 온 나라에 임한 것이 아리라 기름부음을 받은 선택된 사람들, 즉 초기 사사들이나 솜씨있는 장인이나 선지자나 왕에게 임하셨다. 시편 51편 11절에서 시인은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이 시인은 왕이었다. 그가 기름부음을 받을 때 성령이 임하셨다. 그러나 그가 범죄하면 성령이 떠나시는 것으로 믿어졌다. 사울이 범죄한 후 주의 영이 그를 떠났다. 그후부터 그는 암담한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며 고통 가운데 빠진다. 따라서 시인은 주의 영이 계속 그에게 임재해 계시기를 구한다. 이 본문을 볼 때 성령은 인격적인 영이시며 언약의 중보자들에게 내주하셨다. 다윗왕은 범죄한 후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떠나시지 않도록 간구하고 있다.

 

2) 새 언약의 영(에스겔 36:26.∼28)

본문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라보며 새 마음, 새 영, 새 언약과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것을 다 연결시키고 있다. 먼저 주님은 그들에게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에스겔서에서 "영"은 "감각" 혹은 "성향'과 같은 것으로서 영적 생활을 이끄는 기관이다. 이것은 윤리적인 방향성을 결정한다. 따라서 "새 마음'과 "새 영"은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자세를 뜻한다. 새 마음은 바로 26절 하반절에서 부드러운 마음(살의 마음)으로 설명된다. 이것은 돌같은 마음과 대조를 이룬다. 새 창조는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죄, 즉 이스라엘의 불감증과 연관된다.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반역의 집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새 사람을 만드시는 새로운 창조를 하셔야 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에스겔 36장 26절의 약속이 근본적으로 새 언약을 명시하고 있는 예레미야 31장 31-34절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즉 에스겔 선지자는 예레미야의 새 언약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용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에스겔 36장에 나타난 회복의 말씀은 예레미야의 새 언약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동안 이스라엘의 마음은 돌처럼 굳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소귀에 경읽기였다. 그들은 소경이요 귀머거리였다. 그러나 아제 마음이 새로 살아날 것이다. 예레미야 31장31절에 있는 핵심단어 "새로운" 언약이 여기에서는 마음과 연결된다. 주님의 새로운 활동의 결과가 마음에서 열매맺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주님은 자신의 신을 인간의 마음속에 두신다. 새 사람에게 주님 자신의 신("내 신")을 부어주신다(27절). 이리하여 그들은 새로운 동기와 하나님의 본성과 뜻에 일치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하나님과 인간이 비로소 같은 뜻을 갖게 된다. 이 에스겔의 신학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패역한 자식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였음이라"(30:1)고 꾸짖었다. 이제 주님께서 자신의 신을 자기 백성들의 마음속에 주어 범사에 그를 따르게 하실 것이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신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셔서 내적인 개혁이 일어나며 하나님의 순결과 거룩을 닮아갈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새시대, 새백성의 모습이다. 이제 옛 본성으로 되돌아 갈 수가 없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진다.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은 단지 외적인 행동 규범에 일치하는 삶을 배우고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 계명의 정신에 일치하는 삶을 추구하는 자이다. 이제 습관적으로 죄짓는 데서 벗어날 것이며 죄가 더이상 왕노릇 할 수 없다. 주의 신이 그들에게 임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질 것이며 하나님의 성품이 그들에게 부여된다. 인간의 모든 연약성에도 불구하고 새사람이 된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완악함 자체가 해결된다.

 

새 이스라엘에게 주실 "하나님의 신"은 단지 지혜나 총명의 신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새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시는 신이시며(삼상 10:6-7)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이시다(겔36:27). 그는 그들로 하여금 주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고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이시다. 이미 에스겔 11장 20절에서도 비슷한 약속이 주어졌지만 그곳에서는 "성령"에 대한 언급은 나타나지 않는다. 주님은 그동안 자기 백성에게 계속 순종을 요구하였다(레 26:3).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패로 점철되었다. 이제 주님은 자신의 신을 우리 속에 두어 순종할 수 있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다시 예레미야 31장 31절과 연결된다. 그곳에서 선지자는 주님께서 자신의 법을 우리 마음에 두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에스겔은 주님의 신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그렇지만 두 선지자가 바라본 것은 동일하다. 말씀을 우리 속에 두시는 것과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은 둘 다 새언약의 선물이다.

 

4. 정리

구약에 나타나는 성령의 다양한 사역을 정리해볼 때 주의 영은 명백한 인격성을 갖고있으며, 창조와 구속과 새창조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즉 주의 영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말씀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신격을 가지면서도 구별된 독자적 인격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V . 총정리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구약성경의 증거"를 살피면서 우리는 조직신학자들의 사용한 전통적인 논거들이 기본적인 정당성을 지니고 있으나, 이것들은 문법적이고 역사적이며 성경신학적인 해석의 견고한 발판 위에서 새롭게 제시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 전에 선재한 하나님의 지혜와 구속역사 속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자와 창조와 구속과 새창조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신의 인격과 사역을 볼 때 삼위일체 교리는 이미 구약 속에 확고한 발판을 갖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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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봄이 오려나 봐요/최송연 

봄이 오려나 봐요
버들개지 사이로 흐르는
새하얀 안개 이슬을 타고 

봄이 오면
내 사랑
그분도 오시려나
가슴이 마냥 콩닥이네요

하지만
기나긴 겨우살이
너무 찌들어버린 내 옷

행여,     
내 사랑 그분께서 
날 몰라보시면 나는 어찌할까

세마포 옷 빨리 꺼내
그 피로 씻고 닦아 정결케 하고
꽃단장 분단장도 곱게 해야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 20 )

 
 

                              

봄이 오려나 봐요/최송연

봄이 오려나 봐요
버들개지 사이로 흐르는
새하얀 안개 이슬을 타고

봄이 오면
내 사랑
그분도 오시려나
가슴이 마냥 콩닥이네요

하지만
기나긴 겨우살이
너무 찌들어버린 내 옷

행여,    
내 사랑 그분께서
날 몰라보시면 나는 어찌할까

세마포 옷 빨리 꺼내
그 피로 씻고 닦아 정결케 하고
꽃단장 분단장도 곱게 해야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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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그리스도인' / 재임스 패커

 

 

이미 말한 대로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야말로, 신약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성령의 사역 전반을 해석하는 실마리이다.

 

우리는 성령의 사역을 너무나 자주 우리의 결핍과 필요에만 결부시키고,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진리, 곧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려고 이곳에 와 계시며, 그분의 변함없는 주 임무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임재를 전달하는 일이며, 예수님을 온전히 알려 주어서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라는 신뢰를 가지게 만든는 진리의 관점에서 충분히 숙고하지 못했다. 그 결과 성령의 사역을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기독교 중심으로 보게 되었으니, 다시 말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견해가 되어 버린 셈이다.

 

이와 같이 성령의 사역을 인간 중심으로 보게 된 이유 중 한 가지는 분명하다. 개인에 대한 성령의 사역을 가장 많이 다룬 곳이 서신서이지만, 기기에는 주 예수님과의 사랑이나 예수님과 성도가 누리는 교제에 대해서는 거의 말이 없다. 반면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반응이 무엇인지 가장 많이 설명하고 예증한 곳이 복음서이지만, 거기에는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을 제외하고는 성령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우선 복음서는 이미 서신서의 교리들을 상당히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저술되었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서신서의 수신자들은 복음서의 이야기들에 이미 친숙한 사람들이었기에, 서신서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간략하게만 언급하더라도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 수 있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참으로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전달하는 일이야말로 성령께서 새 언약 아래 수행하시는 변함없는 주 임무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다음 몇 단락을 통해 보기로 하자.

 

새로운 출생

 

우선, 그리스도인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만드는 큰 변화, 즉 예수님이 '새로운 출생' 또는 '거듭남'(요3:3-8; 벧전1:23; 약1:18)이라고 비유하신 이 변화는 '성령으로 말미암았다'(요3:6). 요한복음 3장 5절의 "물"은 어떤 사람들의 생각처럼, 세례 요한의 세례나 기독교식 세례, 자연 출산 때의 양수처럼 성령의 내적 사역을 보완하는 외적인 다른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에스겔 36장 25절부터 27절 말씀에서 묘사했듯이, 내적인 갱생(更生) 자체가 갖는 깨끗하게 하는 측면을 가리킨다(5절의 물이 성령의 소생시키는 활동의 한 측면만을 보여 준다면 6절에 물에 대한 언급이 없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바울이 이 과정을 "중생"(딛3:5)과 '새 창조'(고후5:17; 갈6:17)라 부르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할 때, 중생한 자의 삶이 변화한다고 설명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입장이다(롬6:3-11; 골2:12-15).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믿음을 통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말한다. 또 그 믿음이란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의 흘린 피와 그 피가 보증하는 사죄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롬4:16-25, 10:8-13; 골2:12; 요3:15-21, 5:24, 6:47, 53-58). 덧붙여서 바울은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예수님에게 신뢰와 순종을 직접 표현하게 하시고(고전12:3), 우리를 당신의 몸인 교회의 지체(손발, 장기)로 삼으시는 이유는, 우리가 믿음으로 당신의 능력 안에서 초자연적인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해 준다. 이 모든 사실은 정확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상식에 가깝다.

 

하지만 새로운 출생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지나치게 주관적이다. 여기서 주관적이라는 뜻은 지나치게 인격적이라는 말이 아니라(그럴 수가 없다) 지나치게 안으로 굽어 있어, 우리의 모든 관심의 초점이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믿는 개인에게 쏠려 있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은 두 가지 유감스러운 결과를 낳는다.

 

첫째는, 회심할 때 특정한 감정체험(죄에 대한 엄청난 애통, 해답을 찾기 위한 엄청난 고뇌, 넘쳐나는 기쁨)을 해야 한다는 기대에 집착하게 만든다. 이런 기대는 바울, 어거스틴, 루터, 버니언, 웨슬리 같은 사람들의 잘 알려진 회심 이야기나 우리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이 기대를 잣대로 삼아 우리와 동시대의 사람들이 중생을 했는지 그 여부를 판단한다. 이것은 서글프고 어리석은 일이다.

 

체험이 어느 한순간에 일어나서(우리 가운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날짜를 기억할 수 있다 해도,  회심의 체험은 하도 가지각색이라 어떠한 표준기대치에도 끼워 맞출 수가 없다. ?문에 그런 기대를 잣대로 사용하면, 종종 결과적으로 지금 거듭난 상태라는 충분한 표시가 있는 많은 사람들은 회심하지 못했다고 제쳐 놓는 반면, 오히려 한때 간증하던 회심시의 체험이 이제는 완전히 닳아 없어진 사람들은 계속해서 중생한 사람으로 대접받게 된다. 청교도들과 청교도들과 조너선 에드워즈의 말처럼, 그 어떠한 감정 상태나 결과 혹은 개별 체험이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중생했음을 보여 주는 명백한 증거가 될 수 없다. 이런 입장과 다르게 생각하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실수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진실이다. 중생했음을 보여 주는 현재의 삶만이 그 사람이 과거 어떤 시점에 회심했다는 확신을 정당화할 수 있다.

 

두번째 유감스러운 결과는,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 그리스도께서 인생의 의미를 여는 열쇠가 되시는 분으로 집중적인 관심을 받지 못하고, 단순히 우리 자신이 현재 안고 있는 몇 가지 자기중심적인 질문(어떻게 하면 내가 양심의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 압박받을 때 마음과 정신의 평화는? 행복은? 기쁨은? 삶에 필요한 능력은?)에 답하기 위해 불러 들이는 인물 정도로 치부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충성스러운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그에 따르는 요구사항들을 강조하지 않기 때문에(심지어 원칙적으로 그것들을 강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드는 비용은 계산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서 수확한 작물은, 예수님께 우드하우스(P.G. Wodehouse)의 소설에 등장하는 만능 지브즈(Jeeves) 같은 역할을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필요할 때 호출해서 구세주와 보혜사로만 써먹고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 여전히 중생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반쪽짜리 메시지에 오도(誤導)되어, 그리스도를 의지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 사람들을 큰 어려움으로부터 막아 주신다고 지레짐작하여 모여들었다. 첫번째 집단은 완전히 믿음에서 떠나가지는 않지만,  교회 안에서 고목(枯木)이 되어 버린다. 두번째 집단은 큰 상처가 남는 좌절을 겪게 된다. 그들은 좋은 일만 생기기를 기대했기 때문에 불행이 닥칠 때 더욱 큰 상처를 받게 마련이다.

 

다음의 증언은 모 기독교 신문에서 임의로 인용한 내용이다. "남편과 저는 교회에서 주일학교 부장으로 섬기로 있었는데 2살 6개월 된 아들이 사고로 물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 부부는 주님을 위해 살아왔고, 한 영혼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저는 4년을 멍하게 지내며 제 속의 분노를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 계속 강해지려고 노렸했습니다. 저는 제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정말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여기서 고백한 것과 같은 헛된 기대를 품게 하고 어려움이 닥치면 이를 악무는 일 외에는 그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는 양육은, 결함이 있다기보다 잔인하다고 해야 옳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대들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그 기대들은 다만 희망적인 생각에 불과한가. 아니면 외부요인들로부터 생겨났는가? 어쨌든 반드시 지적해야 할 근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많은 경우 인간 중심이 되어 무슨 영업사원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이 갖는 혜택은 부풀리고 져야 할 부담은 최소화시켜서 결국 새신자들이 딴 생각을 할 수 없도록 사고 자체를 고정시켜 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가 복음을 증거할 때, 이처럼 지나친 나머지 해롭기 그지없는 주관적인 생각들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을까? 해답은 간단하다. 성령의 새 언약 사역과 보조를 맞추는 법을 배우고, 구원자 하나님이시며 인류의 모범이요 앞으로 오실 심판자이시고, 약하고 가난하며 사랑스럽지 못한 사람들의 연인이시며, 친히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인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더욱 직접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법을 배우면 된다. 그러면 본질적인 것은 감정이 아니라 한 분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헌신이라고 강조함으로, 중생 때에 전형적인 체험을 겪는다는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과거의 회심에 대한 유일한 증거가 현재의 회심한 상태 뿐이라고 강조함으로, 중생의 체험만을 따로 떼어서 진정한 기독교인의 표시라고 여기는 습관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육신한 하나님께서 찬양과 섬김을 통해 온전히 경배받으셔야 한다고 강조함으로, 주 예수를 언제든지 써먹을 수 있도록 대기시킨다 불경한 생각을 교정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리차드 백스터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안내하셔서 통과하게 하시는 어두운 방들은 그분께서 친히 통과하셨던 방들보다 결코 어둡지 않다"라고 말한 대로, 그리스도의 길은 죽음을 경험한 뒤에 부활을 체험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친히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따라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리라고 기대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징밋빛 환상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경 전체를 읽되, 특별히 사복음서를 끊임없이 묵상해야 한다. 이 일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안일한 견해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복음서를 연구하면서 우리 주님을 계속해서 선명하게 바라보고, 우리 머릿속에 '예수님에 대한 제자도'라는 관계의 틀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제자도에 대한 교리가 제일 잘 설명된 곳은 서신서이지만, 제자도의 본질이 가장 생생하게 그려진 곳은 복음서이다.

 

그런데 복음서보다 서신서를 더 좋아하고, 복음서를 졸업하고 서신서로 입문하는 것이 무슨 영적 성장의 표시라도 되는 양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듯한데, 이러한 행태는 우리가 주 예수님과 나누는 인격적인 교제보다 신학적인 개념에 더 관심이 많다는 뜻이 아닐까. 무엇보다 우리는 서신서의 신학이야말로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제자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준비시켜 준다고 생각해야 한다. 종종 지적했듯이, 복음서는 지상에서 가장 놀라운 책들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위에서 말한 잘못된 생각들을 모두 바로잡는다면 틀림없이 대단한 소득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어떤 진리들은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상식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믿는 자는 모두 성령을 '받는다'(행2:38; 갈3:2)는 진리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기본이다. 이렇게 받은 성령은 "보증" 즉, 신자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소유권을 나타내는 표시이다(고후1:22; 엡1:13). 그 이후로 성령은 신자 안에 '내주하신다'(롬8:11). 다시 말하면 성령은 유숙객과 같아서, 성령이 거하시는 신자의 마음속과 그의 삶에서 생기는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관심을 갖고 개입하신다. 성령께서는 '은혜롭고 주도적인 손님'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변화의 주도자로 활동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를 변화시켜 도덕적으로 예수님을 더욱 닮아 '점점 더 큰 영광에'(고후3:18) 이르게 하신다. 여기서 독창적인 주장은 하나도 없으며, 모두 통상적인 가르침일 뿐이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가리키는 데 일반적으로 쓰이는 단어가 바로 성화(聖化)이다. 성화의 길은,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성령을 좇아 행하"(갈5:16)는 길이다. 성화의 길을 간다는 것은 육체의 욕망(몸과 마음의 악한 욕심)을 거부하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본 받는 아홉 가지 목록인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허용해 드린다는 뜻이다(22,23). 성화의 삶을 또 다르게 표현하면 겸손, 사랑 그리고 죄를 피하고 의를 실천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본받는 것(요13:12-15,34,35, 15:12,13; 엡5:1,2; 빌2:5-8; 벧전2:21-25; 히12:1-4)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성화란 당신이 말씀한 대로 행하는 일이라고 계속 정의하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라고 요약하신다(막12:29-31; 눅10:25-37). 어쨌든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입장을 잘 정리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성령 안에서의 삶이 갖는 체험적 측면(지적.의지적.규율적 측면과 별개로)이 주제가 되면,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여기서 우리는 완전히 생소한 영역으로 옮겨 가게 되는데, 이곳에서 대부분의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어찌할 줄을 모르는 것 같다. 하나님에 대한 '직접 지각', 즉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 하나님의 영원성과 무한성,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영광 등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도 관련이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지각은, 오늘날보다 과거에 훨씬 더 잘 이해하던 영역이다. 이 분야에서 우리는 다시 배울 필요가 있다.

 

그러한 지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면 무방하리라. 성경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직접 지각'은 생겨날 수 없으며, 성경적 기준이 없으면 그러한 지각을 식별할 수가 없고, 성경적 신학이 없으면 그것을 해석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 지각 자체는 돌발적이고 주권적이다. 우리의 통제권 밖에 있어서 요구하거나 예측할 수도 없고, 하나님이 뜻하시는 대로 생겨난다. 통상(여기서는 모든 것이 개인별 맞춤이기 때문에, 이 단어가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이러한 지각을 주시며, 그것은 그러한 신자에게 성부와 성자가 찾아와 함께 거하고 자신들을 나타내 보이시리라는 그리스도의 약속(요14:18,20-23)이 성취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지각('체험'보다는 이렇게 부르는 편이 낫다. 물론 우리가 '체험'이라고 할 때 바로 이러한 직접 지각을 뜻하는 것은 사실이다)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전해 주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큰 기쁨이 된다.

 

 

제임스 패커의 '성령을 아는 지식'에서 발췌(93-101p)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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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휴거의 시점 & 곧 일어날 일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전 15:51-53)


이 천년 전에는 이 비밀이 풀려지지 않았고,

지금 현재도 다 풀려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성경은 정말 최고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적은 사람들에게만 읽혀지고 있습니다.


조사에 의하면 교회의 80%가

성도들의 ‘자가양육’ 프로그램이 없다고 합니다.


또 아쉬운 부분은

오직 3%의 성도들만 성경통독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비밀이 비밀인 것 입니다.


여기서 ‘잠’은 죽음을 돌려서 애기한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 나팔’ 이 부분은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여기에서 마지막 나팔(Trump)이라고 해서

도널트 트럼프를 얘기한 게 아니고,

저는 트럼프 당선 전에 그가 당선될 것이라 말했습니다.


방송에서는 트럼프의 당선이 놀라움이라고 얘기하지만,

그들이 잘못된 곳에 있어서 놀라움이였고,

저희는 그전에 그의 당선을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아는 저희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당선에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휴거가 그 마지막 나팔(Trump)에,

도널드 트럼프의 때에 일어나는 부분도

그리 놀라운 소식이 아닐 것입니다.


트럼프의 때에

반드시 휴거가 일어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일어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럼 휴거가 내년에 일어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트럼프의 공직시기는 몇 년이 더 있고,

그의 딸이 다음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슨 얘기를 들으면

그대로 해석하는데, 그렇게 하시면 안됩니다.


얘기를 듣고, 말씀을 보고,

상황적인 이해가 100% 갖쳐져야

올바른 해석이 가능합니다.

말씀의 예언 그 자체가 이루어질 것 입니다. 아멘!


그리고 여러분이 탈모가 있거나,

수술을 해서 무릎연골이나 치아가 없다면,

변화될 때 그 부분도 변화되고 회복될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말세에 대한 걱정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안경 쓰시는 분들은 아마 시력이 다른 행성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양쪽 다 변화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저희 기독교의 독특성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이 전부가 아니고,

그냥 죽고 나서 천국에 가는 영혼만의 삶이 아니고,

우리의 삶은 실제 실질적, 육체적인 현실일 것 입니다.

(변화된 몸)


그리고 이 부분은 기독교 밖에는 없습니다.

다른 종교는 막연한 죽음 이후 삶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혼 불멸성 정도만 믿고 있지만, 기독교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영혼 구원 뿐만 아니라,

우리 몸을 포함한 잘못된 모든 것을 다 고치실 것입니다.


좋은 소식은 모두가 몸과 함께 변화된다는 것이고,

안 좋은 소식도 모두가 몸과 함께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그 뜻은 주님과 천국에서 다스리지 못하고,

지옥의 불에서 영원히 슬퍼하며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도

몸과 함께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슬프죠?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 스스로의 선택입니다.


휴거는 무엇입니까?

죽음을 보지 않고 몸과 함께 변화되는 것입니다.


만약 죽은 사람이면,

성경말씀에 따라 새로운 몸과 함께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살아있는 상태에서의 휴거된다면,

현재의 몸과 함께 하늘로 승천하여 주님을 만날 것이고,

그 일이 눈 깜짝할 사이, 순식간에 일어날 것입니다.


히브리어 표현상으로는

해가 짐과(여전히 약한 빛은 있음),

어둠의 경계같은 형태의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성경에 근거하고,

성경에 나와있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 4:16~18)


여기서도 트럼프가 나옵니다.

휴거로 서로 위로하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휴거는 서로 위로를 줄 수 있는 역할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주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무조건 고난을 통과해야 한다고 합니다.


네 맞습니다.

주님과 함께있는 모든 사람들은 고난을 통과합니다.

불신자들을 보는 모든 신자들은 고난을 경험합니다.


그렇다고 고난을 기대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그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과 위로가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환란이 올 때,

적그리스도에 의한 환란시에,

우리에게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모든 사람을 말하는게 아니고,

일부의 사람들에게 그렇습니다.


휴거입니다!

그리고 오늘 중요하게 다룰 사항은

'누구인가'하는 문제입니다.

즉 누가 휴거를 얻을 것인가 입니다.


관련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만,

그 '누구'를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봐야 합니다.


그래서 휴거의 순서 및 구조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등장(his appearing) 입니다.

하늘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시고,

그 다음에는 바울 사도가 얘기한대로,

우리가 다 모입니다.


순서는 주님을 믿었고, 휴거 전에 죽었다면

그 분들이 먼저 모입니다.


어떤 분들은 질문을 합니다.

몸이 산산히 부서졌거나,

상어에게 먹힌 분들은 어떡합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몸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단 번에 우리 몸의 세포들을 모으실꺼고,

단숨에 영화로운 육체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살아있는 우리가 올라갈 것 입니다.


휴거의 기간 동안

이땅에는 말세의 징조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하늘에서의 징조가 있을 것입니다.

천국과 천상의 징조들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분노가 임할 것입니다.


환난 중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임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최소 1회(아마 다수)의 핵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그 환란 중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고,

평화와 안전을 약속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정치인들이 많이 하는 얘기를 할 것입니다.

‘평화, 안전’을 약속합니다.


저는 미국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올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성경에 근거하면 적그리스도는 중동에서 나올 것으로 보이고,

범중동 리더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 적그리스도에게 사람들은 속을 것이고,

그에게 죽임당해, 지옥에 갈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백마 탄 자가 나올 것입니다. (계 19장)



- 디스커버 미니스트리 ‘스티브’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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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섭리의 은혜를 기억하여 주를 영화롭게 하라


- 존 플라벨 -



"시간이 흐를수록 이전에 경험했던 축복이나 은혜는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과거의 경험을 올바로 기억하고 평가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면, 참으로 큰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겸손한 태도로 섭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크고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섭리의 경험을 신앙일지에 기록하는 것도 그러한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모든 신자가 시간을 내어 신앙일지를 기록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다. 신앙일지는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많은 유익을 끼친다.


신자들이 서로 성경을 읽는 가운데 앞으로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는 섭리의 말씀들을 모아서 기록해두고, 또 직접 경험한 섭리까지 더해둔다면 참으로 보물과 같은 귀한 자산이 될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섭리는 매순간 우리의 삶과 자유와 관심사에 영향을 미친다. 일용할 양식도, 필요한 물질도, 안전한 삶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섭리를 통해 받은 은혜를 기록하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의무가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수없이 경험해왔다. 이러한 경험은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우리의 형편없는 기억력을 의지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은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경험이 찾아오면 이전의 경험은 쉽게 파묻히는 것이 보통이다.


문자화된 기억력은 이런 위험에서우리를 보호할 뿐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에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영향을 끼친다. 세상에 사는 동안 경험했던 하나님의 섭리의 추억을 잃는 것에 비하면, 금은이나 토지나 가재도구를 잃는 것은 그다지 큰 손실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 귀한 보물을 신앙일지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잘 간수하라. 그리고 새로운 문제나 두려움이나 어려움이나 시련이 닥칠 때마다 “전에도 이런 고통을 겪어본 적이 있나? 이것이 처음 있는 시련인가? 아삽이 그랬던 것처럼(시77:5) 옛날 일들을 떠올려보자”라고 생각하며 다시 신앙일지를 들춰보라.


현재의 시련과 위험만 크게 보고, 과거의 시련과 위험을 경시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항상 다음에 닥치는 시련이 가장 크게 보이는 법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전에 경험했던 축복이나 은혜는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마치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에게 육지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오래된 경험일수록 그런 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과거의 위험이나 두려움도 현재의 그것들만큼 심각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과거의 경험을 올바로 기억하고 평가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 참으로 큰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 존 플라벨, 『하나님의 섭리』, pp 372-375

출처: 안산회복 교회/안상범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연약한 인간, 연약한 교회

 

황대우 교수

(고신대 개혁주의학술원)

인간은 연약한 존재다. 피조물이므로 창조주 없이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다. 마지막 피조물이므로 이전의 피조물 없이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다. 타락한 죄인이므로 죄 짓지 않고 사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연약한 존재다.  

이처럼 연약한 인간은 분수를 모르고 강함과 위대함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연약한 인간이 자신의 연약함을 잊어버리는 순간 타락하고 만다. 하와가 그랬고, 아담이 뒤를 따랐다. 그리고 지금 이 땅에서 온갖 종류의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이 그러하다.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무엇인가 욕망한다.  

그 욕망으로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고 싶어 한다. 그 욕망은 황금만능주의와 외모지상주의와 성공제일주의를 조장한다. 또한 그 욕망은 어느새 가장 중요한 삶의 이유와 원동력이 되고 만다. 그래서 욕망의 추악한 본성은 사라지고 실리적인 당위성만 남게 된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인간 삶의 일상이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이 이 세상을 죄인답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이처럼 타락한 세상과 타락한 인간에게 연약함이란 수치요 악이다. 타락한 인간들의 타락한 세상에서는 강함과 위대함만이 최고최상이다. 강한 자, 위대한 자는 박수갈채를 받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반면, 연약한 자는 무시되고 소외되며 부끄러움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래서 타락한 세상 속의 타락한 군상들은 강함과 위대함을 욕망한다. 아니, 세상뿐만 아니라, 세상 속의 교회도 강함과 위대함을 추구한다. 마치 그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 양! 이런 교회에는 세상과의 공간적 구분만 존재할 뿐,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영적 구별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교회의 세속화이다.

 교회는 연약한 존재다. 하나님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머리이신 그리스도 없이도 존재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연약한 인간의 태생적 연약함뿐만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영적 연약함까지도 공유하는 공동체다. 자신의 연약함을 모르는 자,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않는 자, 자신이 흉악한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는 자는 결코 구성원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는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오는 자다. 강한 자가 되어 당당하게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태생적이든 영적이든 연약한 모습 그대로, 부족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겸손히 열망하면서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의원이신 우리 주님께서는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를 부르신다.  

하나님 없이도, 구원자 없이도 살아 갈 수 있는 자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구세주를 필요로 하는 자를 찾으시고 부르신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자에게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가 될 자격이 주어진다.

 주님만을 간절히 찾고 주님을 주인과 머리로 모시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연약한 자와 연약한 교회만을 우리 주님께서는 찾고 부르신다. 연약함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통로다. 연약함은 빈 손 들고 하나님께 나아와 도움을 요청하는 영혼의 가난함이다. 연약함은 가장 큰 영적 선물이다.

 

이런 영적 연약함과 가난함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의 영혼은 속절없이 세상의 강함과 부요함에 매몰되어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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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말 시리즈 ① 판단하는 말을 하지 말자

지난 해 10월, 이철호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성회가 "입술의 열매로 복과 행복을 누리고 삽시다(잠언 18:20-21)"라는 주제로 뉴욕과 뉴저지에서 열렸다. 10월 2일부터 3일간은 뉴저지 필그림교회에서, 16일부터 3일간은 뉴욕만나교회에 열렸다. 강사 이철호 목사는 예장 합신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강성장로교회 담임목사로 33년동안 목회를 하고 있다.

이철호 목사는 성회를 통해 저주 받는 말, 축복을 받는 말, 행복을 주는 말, 불행을 주는 말에 대해 설교하며, 신앙생활을 할때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선포해 나갔다. 이 목사는 성경적인 근거와 함께 자신의 경험을 숨김없이 나누어 큰 도전을 주었다. 이 목사는 우리들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하는데 ①판단하는 말 ②비방(비판)하는 말 ③대적하는(거스리는) 말 ④원망(불평)하는 말 등이 있다고 전했다. 신년에 사용하리라고 저장해 놓은 파일을 이제야 풀며, 4번에 걸쳐 신년 시리즈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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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교회 성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이철호 목사

복받는 대신 저주를 받게하고, 행복대신 불행하게 만들고, 사명자가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만들기위해 마귀가 우리를 공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말이다. 모세의 예를 들면 40년을 충성하고도 무엇때문에 가나안의 축복을 못받았는가. 시편 106편에는 재난이 모세에게 임했는데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모세가 홧김에 한마디를 한 것으로 인해서 40년을 충성하고도 재난이 모세에게 임했다고 했다. 말 한마디가 평생 신앙생활을 하는데 구원은 받지만 상이 없는 인생을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 악한 말이 무엇인가? 인생의 바퀴를 불태워 하루아침에 인생을 곤두박질하게 만드는 말이 무엇인가. 마귀가 우리 인생을 저주받게 하는 말을 하게 한다. 대표적으로 모세도 그렇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원망하다가 결국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다. 그리고 민수기 14:28-29에 나오는대로 입술의 열매가 맺혀지는, 말하면 그대로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말을 듣고 그대로 만드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렇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하면 저주가 그냥 들어온다.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든다.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하나님를 대적하라고 한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말을 듣지 말고 네가 인생의 주인이 되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면 저주가 그냥 오는 것을 마귀가 알기에 우리를 속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라고 아담을 속였던 것 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을 대적하라고 우리를 속인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생각을 꿈에도 안한다. 말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다가 제가 깨진 사람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 ①판단하는 말

저주를 받게 하는 말중에 가장 먼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중 첫번째는 판단하는 말이다.

유다서 1:8-10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도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을 보면 하나님이 천사장 미가엘이 사탄에게 조차 판결의 말을 하지 못하고, 다만 하나님이 너를 꾸짖지기를 원하신다 정도만 말했다. 판결의 말은 왜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는 것인가. 뭔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니 망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를 알아야 한다. 배드로후서 2:10-11도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판결의 말이 무엇인가? 야고보서 4:11-12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을 보면 형제를 비방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하는 자는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라 재판관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 누군가를 비판하고 판단하면 내가 지금 재판장 노릇을 하는 것인데 재판장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네가 무엇인데 판단하느냐는 것이다. 누구를 판결하는 말은 스스로 재판장이라는 것이다. 마귀는 우리를 교만하게 만든다. 선악과 사건은 하나님 자리에 서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서라는 것이다. 사탄은 아담에게도 시켰고 오늘도 우리에게 하나님 자리에 서라고 시킨다.

로마서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우리들은 누가 어떻고, 어느 교회가 어떻고 너무 쉽게 판단을 한다. 그리고 판결을 내가 내린다. 저는 이것이 죄인줄 몰랐다. 성경을 읽다가 이 부분이 너무 회개가 되었다.

고린도 전서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는 주님이 오실때 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는 심판하러 오신다. 재판장으로 오시는 것이다. 주님이 오셔서 하시니 우리가 심판장과 재판장 노릇을 하지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권위를 업신여기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는 것이고 죄가 되기에 하나님이 너를 형벌하실 수밖에 없기에 겁없이 판단하다가 망한다는 것이다.

칼춤이 특기인 목사가 새벽에 만난 하나님

84년에 교회개척을 했다. 개척해서 2-3년지나고 김창인 목사가 퇴계로에 있던 충현교회를 강남에 옮기면서 백 억을 들여 예배당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100억은 지금 1,500억보다 큰 돈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교인들에게 "유럽을 보라. 200년 걸려 수많은 돈을 들여 예배당을 지어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관광지로 레스트랑으로 공연장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무슨 예배당을 짓는데 그렇게 돈을 많이 들이는가. 그런 돈이 있으면 선교나 하시지"라고 말했다.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그때만해도 천막을 치고 개척하는 교회가 가끔 있었다. 저는 상가에서 개척을 했는데, 천막을 치고 교회를 개척한 사람이 우리 동네에 있었다. 천막앞에 교회간판을 달았는데 옆에 신학교 간판도 같이 붙어있었다. 우리동네 천막 개척교회가 신학교까지 하는 것이다. 알아보니 신학박사라는데 6개월만에 목사가 되어 무인가 신학교를 세워 놓은 것이다. 무자격 목사가 무인가 신학교를 만들어 무자격 목사를 양산해 내면 한국교회 어떻게 되겠는가. 큰일나겠다고 생각했다.

1998년 새벽에 하나님이 내가 그동안 판단했던 말들을 하나씩 생각나게 하셨다. 당시 저는 30대 목사로서 주특기가 칼춤이었다. 성경본문을 가지고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찾았다. 한국교회는 이것이 문제이고, 선배목사들은 이것이 문제이고, 장로들은 이것이 문제라고 비판하는 주특기가 칼춤이었다. 4대째 믿는 집안의 장로 아들로 태어나서 자라면서 부모님에게서 날마다 교회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썩어 냄새를 피우는지, 왜 거친 돌을 만들어 놓아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지를 비판했다. 그런데 새벽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환상은 아닌데 선명히 보여주셨다. 어떤분들이 산 하나를 깍아내는 것이다. 힘들어 하면서 혹은 죽어가면서 꼭갱이질과 삽질을 하며 큰 산 하나를 깍았다. 그런데 웅덩이에는 물이 섞어 냄새가 나고, 남겨진 돌멩이에 걸려 사람이 넘어진다. 그런데 옆에서 팔짱을 끼고 '이게 무엇이야, 한국교회가 왜 이 모양이야' 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보았다.

한국교회가 문제있다고 생각하고 총신을 다니다가 합신에 간 사람이다. 한국교회를 개혁하자고 간 사람이다. 선배 목사들이 교권주의, 세속화되어 있고, 돈 밖에 모른다고 비판했다. 당시 합신 출신이 대부분 다 그랬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판단쟁이 목사가 본 자신의 모습

그런데 기도하는데 내가 팔짱끼고 '왜 그래' 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잘 보였다. 그런데 성령께서 내 안에서 "철호야, 5천년 무속사상에 찌든 이 민족에게 불교와 유교사상이 찌든 이 민족에게 복음이 들어왔고, 그 복음의 힘으로 산 하나를 깍아낸 사람들이 다 너희 선배목사들 장로들 성도들이다. 그들은 순교하면서 그것을 다 깍아냈다. 그런데 웅덩이와 돌맹이 남아있고, 웅덩이에 물이 섞어서 냄새나고 돌맹이때문에 넘어지는 사람이 나오지. 그런데 네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순교했겠냐. 처자식 다 포기하고 희생시키면서 순교를 했겠냐"고 말씀했다. 제가 그 아침에 통곡을 안할 수 없었다. "네가 그 시대에 있었으면 순교했겠느냐. 처자식 다 희생하면서 산하나 없앴겠는가. 선배들이 그렇게 했다. 남은 것은 이제 네 몫이다. 네가 이제 웅덩이 메꾸고 돌맹이를 치우고 기초하나 잘 파놓고 너는 끝내고, 이후에는 후배들이 건강하게 세우는 것이 내 뜻이 아니겠니!"

비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책임을 지고 사는 것은 절대 쉽지 않다. 박윤선 박사는 신학교에서 우리들을 가르칠때 날마다 말씀하신 것이 있다. 박윤선 박사는 "개혁은 다른 사람을 개혁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개혁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앞에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같이 날마다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 개혁"이라고 했다. 비판은 쉽다. 그런데 비판이 무서운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새벽에 하나님이 하나하나 생각나게 하시는데, 충현교회 김충인 목사님을 비판한 것이 생각났다. 상가에서 개척한 젊은 목사도 교회가 조금식 성장하니 나도 예배당을 지었다. 나도 두 번 지었다. 규모의 차이이지 나도 1만명 모이면 천억짜리 예배당을 지을 것이다. 문제는 내가 목회해 보니 나도 예배당 지었다. 내가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를 비판했던 것이 떠 오르자 마자 잘못했다고 회개했다.

그런데 무인가 신학교 세웠던 그 목사가 생각나는데 성령께서 "네가 무엇인데 그 사람이 자격없다고 하니"라고 물으시자 "그래도 주님 좀 문제가 있잖아요. 그것은 문제가 있잖아요. 그것은 아니잖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기준이 무엇이냐"라고 성령님이 물으셔서 "어떻게 6개월만에 목사가 되요"라고 하니 "그런데 기준이 무엇인가. 무슨 기준으로 네가 자격없다고 이야기 하니"라고 물으셨다. 그래서 "그래도 그것은 아니잖아요"라고 말하니 "그러면 기준을 말해 봐. 그 기준이 너희나라 정부가 기준이냐, 아니면 총회법이 기준이냐. 무슨 기준으로 너는 자격있고 그는 자격없다고 하는가"라고 물으셨다. 그래도 그것만은 쉽게 항복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래도 주님, 그것은 아닌 것 같아요"라고 하며 나도 버텼다. 이번에는 주님게서 내 안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바울처럼 그 시대에 가장 학벌을 가진 사람도 사용했고, 베드로 처럼 평생 고기를 잡던 사람도 불러 제자로 사용했다." 찬스였다. 그래서 "주님, 그때는 초대교회 시대이잖아요.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6개월만에 목사가 되요"라고 나도 버틸만큼 버텼다. 그랬더니 성령님이 "그래, 근대사에도 있다. 요한 웨슬리처럼 영국 최고 명문대 출신도 사용했고, 무디처럼 초등학교 중퇴한 사람도 사용했다"고 말씀했다. 그래도 나는 항복이 안되었다. 그래서 "그래도 주님, 그것은 아닌데요"라고 했는데, 마지막 주님의 한마디에 항복을 하고 주님앞에서 울었다.

"그래... 그러면 너는 자격이 있니?"

이 한마디에 그날 새벽에 더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님 저도 죄인입니다"라고 회개했다.

교회다운 교회가 없다고요?

어떤 분이 강남 유명교회를 다니다가 부평으로 이사와서 우리교회에 등록하고 면담을 하는데 이 동네에 이사온지 1년되었고, 지난 1년동안 동네 교회들을 다녀보아도 교회다운 교회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교회에 등록하는 것은 우리교회는 그나마 동네에서 교회다운 교회라는 것이다. 듣는 목사는 기분이 좋을 수도 있지만, 나는 하나님께 배운 것이 있다. 그래서 "집사님, 기준이 무엇이예요. 교회다운 교회의 기준의 뭐예요"라고 물었다.

이것은 다 다르다. 기준이 다르다. 성경을 해석하고 보는 관점이 다 다르다. 그래서 신학도 다르고 교단도 다르다. 합동신학교대학원만 제대로 된 신대원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시고 신묘막측하다고 하셨다. 세계 70억 인구중 같은 사람이 없다. 이것은 창조의 다양성이다. 하나님은 기가 막히게 창조하셨다. 그러면 이렇게 다양하게 만든 인생들을 불러 모으신 교회들중에 똑같은 교회가 있겠는가. 없다.

사람은 크게 나누면 지적인 사람, 정적인 사람, 의지적인 사람으로 나눈다. 기질에 따라 세밀하게 46가지로 나누기도 한다. 지적인 사람은 언제 은혜가 되는가. 지적인 분은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면 은혜가 되고 받아들인다. 정적인 분은 논리적으로 접근하면 머리가 아프다고 하고, 정적인 분들은 필이 꽃혀야 한다. 가슴이 뭔가 찡하고 감동이 되면 은혜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의지적인 사람은 필이 꽃혀도 소용이 없다. 의지적인 행동을 강조한다. 사회가 이렇게 썩어가는데 앉아서 성경공부하고 설교듣고 은혜받았고만 하고 구경만 하는 것이 무슨 신앙이냐며 행동을 해야 한다고 한다. 의지적인 사람은 행위를 강조한다. 지적인 사람은 장로교, 정적인 사람은 순복음교단, 의지적인 사람은 감리교나 기장을 좋아한다. 그런데 어느 교단이 제대로 된 교단인가?

어떤 분이 옷을 입었는데 너무 멋있다. 그래서 다른 분이 그 옷을 사 입었는데 정말 아니다. 그러면 사람이 문제가 있는 것인가 옷이 문제인가. 나하고 안어울리는 옷을 입었다고 내가 문제있는 사람인가. 그것은 아니다. 문제있는 것이 아니고 안어울리는 것이고 안맞는 것이다.

당회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가?

우리교회에는 장로가 21분이 있는데 당회에서 어떤 안건을 내놓으면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당회는 어떤 안건을 놓고 내 생각을 말하는 데가 아니다. 그러면 분리가 된다. 생각은 누구나 다 다르다. 21분의 장로가 각자 다르다. 그렇다고 다수결로 하면 소수는 불만이 생긴다. 우리교회 당회는 다수결로 해 본 적이 없다. 그런것은 일반회사나 사회에서 하는 것이지 교회는 그런데가 아니다.

당회는 어떤 안건이 나오면, 이 안건에 대해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실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성경적인 원리가 무엇인가 질문하고 우리끼리 답을 찾는 곳이다. 어떤 안건이 생기면 그것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우리가 먼저 고민하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찾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면 가부논쟁을 중단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이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생각대로 가면 교회는 타락이다. 그러니 항상 교회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들의 최대 관심사는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물어야 한다.

한국교회 상당수가 주식회사로 바뀌고 있는 이유

저는 한국교회 상당수가 주식회사로 바뀌고 있다고 표현한다. 교인들이 헌금한 것이 자기의도대로 사용되지 않으면 난리가 난다. 그렇다면 이미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시다. 예를 들면 예산을 세우는데 금년 예산이 10억이라고 하자. 다음해 예산은 교인 증가율을 따져 5%, 인플레율 5% 해서 금년 예산에서 10%가 늘어난 11억을 내년 예산으로 세운다. 그리고 11억의 범위에서 이런 일 저런 일을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일반회사에서나 하는 일이다. 교회는 아니다.

교회는 당회부터 제직회가 "하나님, 내년에는 우리교회를 통해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까"를 기도하고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을 하려고 하니 예산이 20억이 든다. 그런데 한계를 넘어간다. 12억이면 해보겠는데 20억은 안된다고 하면 그 교회는 하나님이 존재의미가 없는 집단이 되어 버린다. 교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데 20억이 든다면 20억을 예산으로 세워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20억을 여러분을 축복하시든지 누구를 통해 그일을 하신다. 그것이 교회이다. 주식회사를 만들지 말라. 우리가 헌금한 돈 우리가 마음대로 쓴다가 절대 아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생각할 것은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틀리다고 말하면 안된다. 그 집사님에게 교회다운 교회가 없다고 하는 기준을 물으니 대답을 못한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교회가 문제있다고 하면 안된다. 생각은 다 다르다. 부부지간에도 생각이 다르고, 내 배에서 난 자식도 다르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다른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라. 그것이 겸손이고 사랑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세계적인화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라는 유명한 희곡을 쓴 
테네시 윌리암스는 아래와 같은 명언을 남겼습니다.
"돈 없이 젊은 시절을 보낼 수는 있지만 돈 없이 노후를 
보낼 수는 없다." 


늙어서 돈은 신분입니다. 지위이고 계급장입니다. 
돈이 없으면 모두에게 냉대와 무시를 당합니다. 
그러나 돈이 전부는 아닙니다.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습니다.



97살 까지 산 "첼로의 성자" 파블로 카잘스는
"선생님께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첼로리스트로 손꼽히시는데 
아직도 하루에 여섯 시간씩 
연습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라는 기자의 질문에 의욕이 가득 찬 
즐거운 나날을 보냅시다.



"나는 지금도 연습을 통하여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96세에 세상을 떠난 유명한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타계 직전까지 집필을 계속했는데 



"아직도 공부하시냐?"는 질문에 
"인간은 호기심을 잃는 순간 늙는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청춘은 인생의 어느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에 있다.>
라는 사무엘 울만의 詩와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라는 팝송은 
우리의 心琴을 울리는 名詩이며 노래입니다. 



돈은 넘쳐 나는데 그것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아니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온갖 고생과 근면 절약을 하여 
어렵사리 돈을 벌었기 때문에 돈 버는 것 외에는
아무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 취미 생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이지요.
옛 양반들은 鄕里에 전답이 있어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으니까 적당한 시기가 되면 벼슬을 
고사하고 아무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文, 史, 哲 즉 文學과 
歷史와 哲學을 論하고 서로 지은 詩, 
書, 畵를 품평하고 樂, 歌, 舞를 즐기며 
인생의 완성을 추구하였다 합니다.



여기에 射(요즘 말하면 골프?)와 御(말을 
다루는 것이니 요즘은 車)도 즐겼습니다. 




은퇴하고 나면 30년, Golden Age를 
열정과 취미 생활을 즐기면 늙지 않습니다. 
열정을 가지면 마음이 늙지 않고 마음이 늙지 
않으면 육체도 건강해 집니다.



<居室 男>, <파자마 맨>, <停年 미아>, 
<三食 이>, 이 되면 
순식간에 늙어버리고 맙니다. 
만나보면 금방 얼굴에 쓰여 있습니다.
분명히 은퇴 후 제2의 인생은 있습니다. 



흔히 "앙코르 인생"이라고도 하고 
은퇴 후 생을 마감할 때 까지는
8만 시간이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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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은 은혜의 땅 12

김태훈 0 01.17 03:24
누님과 함께 고향에 내려와서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 없이 결핵 투병생활을 시작한 지 어느덧 2년째가 됐다. 나는 마음 한가운데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니,내가 왜 이렇게 젊은 나이에 병으로 고생을 하면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산송장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나. 아니 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반드시 회복해서 남들이 부러워 할 정도로 한번 잘 살아보자." 
  
꼭 병에서 낫겠다는 마음이 들면서 나는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잠시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들여다보았던 성경책을 찾아서 다시 읽으며 그저 막연하게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시고 나의 질병을 반드시 치유해 줄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었을까? 그렇게 어렵고 고통스런 가운데 하나님을 기억하고 창조자를 의지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다. 병에서 나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면서 몸도 마음도 조금씩 가벼워지고 치유가 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는 데 무엇엔가 이끌려 잠에서 깨어난 후 아무리 다시 잠을 자려고 해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한 시간 가량을 이불 속에서 이리 저리 뒤척이다가 나는 한순간 이불을 박차고 마당으로 나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새벽 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고, 먼 동녘 하늘에서는 동이 틀 준비를 하는지 아주 희미한 빛이 밝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주위의 모든 것이 참으로 신선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상쾌한 기분을 느끼면서 깊은 심호흡을 했다. 바로 그때였다. 나는 깊은 심호흡을 하는 순간, 공기와 함께 어떤 액체 같은 것이 내 코로 들어와 폐부 깊은 곳까지 퍼지는 듯한 느낌을 받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그 느낌이 드는 순간 마음이 얼마나 기쁘고 황홀하던지…. 그렇게 오랫동안 새벽 공기를 즐기며 서성이다가 동이 환하게 틀 무렵 다시 방으로 들어와서 잠을 청했다. 잠깐 아침잠을 자고 눈을 떴는데 몸이 예전과 같지 않았다. 
  
"어, 이거 웬일이지, 역시 새벽 공기가 좋기는 좋은가 보다." 
  
나는 누님에게 새벽에 있던 일들을 잠깐 이야기하고 아침 식사를 하는데 식욕이 엄청나게 생기는 것이었다. 어제까지만해도 특히 아침에는 밥을 한 숟가락도 떠먹기 힘들었는데 그날 아침에는 벌써 두 공기째 밥그릇을 비우고도 더 먹고 싶을 정도로 입맛이 돌기 시작했다. 
  
"태훈아! 이제 네 병이 다 나았나 보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입맛이 다시 돌기 시작하는 것이 병이 나은 증거라고 하더라. 그동안 고생 많았다." 
  
나는 지난 2년 동안 지겹도록 싸웠던 폐병이 그렇게 감기 떨어져 나가듯이 떨어져 나갈 수 있을까에 대해서 반신반의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내 몸의 확실한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몸이 그렇게 가벼울 수 없었고 그날 이후 누님이 밥을 해대기 힘들 정도로 밥을 많이 먹게 된 것이다. 새벽에 깊은 심호흡을 할 때 성령님의 치유 손길이 내 폐부 깊은 곳까지 어루만지시고 치유해 주셨다는 사실은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치유의 손길이었다. 아직 신앙이 자라기도 전이었고, 믿음이 마음 한 구석에 조그만 새싹처럼 싹트기 시작한 때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의 믿음과 마음의 기도를 들으시고 2년 동안 지겹게 나를 괴롭혔던 폐병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주셨던 것이었다. 할렐루야! 치유의 경험을 한 이후부터 하나님은 내 삶에 있어서 가장 실존적인 존재였으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삶의 주인이 되었다. 그렇지만 내 일상생활이 하나님을 향해서 성화되는 방향으로 변화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내 마음의 중심에 자리잡고 계셨지만 나는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당시에는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도 않았고 성화 과정에 대해서 배울 방법도 없었으며 특별히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가면서 자연히 나의 삶은 다시 옛날의 습관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 후 서른 살이 넘어 강한 성령 체험을 한 후에야 비로소 성령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아 하는지 깨닫고 그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나의 폐병이 치유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치유의 기적으로 일어난 내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를 돌이켜 볼 때 누님의 희생이 없었으면 나는 이미 죽은 송장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누님은 자신을 철저히 희생하면서 남동생이 병에서 회복되기를 빌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우 리 둘째 누님에게 그런 마음을 불어넣어 주셔서 자신도 병으로 아픈 상황 가운데 동생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둘째 누님은 내가 완전히 치유되는 것을 본 얼마 후에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오! 하나님!" 
  
둘째 누님이 세상을 떠나던 날 나의 마음은 수백만 개로 산산조각이 났다. 그동안 유일하게 내게 사랑을 주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왜 하필이면 우리 둘째 누님을 먼저 데려가신 것일까. 하나님은 왜 내 병만 치유해 주시고 우리 둘째 누님은 치유해 주시지 않았을까? 아! 그토록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고왔던 둘째 누님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다니…. 싸늘하게 식은 누님의 시신이 바로 옆에 있었지만 나는 누님이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고 믿고 싶지 않았다. 길고 긴 통곡의 시간을 보냈다. 세월이 흐른 후 내가 주의 종이 되고 난 후, 기도할 때마다 내 마음 속에 가장 큰 부담으로 다가온 것은 둘째 누님의 구원 문제였다. 누님은 남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살다가 병에서 치유되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도 갖지 못하고 죽었다. 우리 누님이 지옥에 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하나님! 어떻게 우리 누님 같은 사람들을 위한 당신의 구원 계획은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 우리 둘째 누님도 당신의 자비와 은혜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그런 확신을 좀 주실 수 없을까요. 누님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던 것은 예수님에 대해서 들어 볼 기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불쌍한 영혼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억울한 일이 아닙니까."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제 22 장 몸의 부활


부활의 성경적 증거


1. 구약에 나타난 부활의 증거

구원에 대한 전체 교리가 구약에는 신약처럼 분명하게 나오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구약 성경에도 부활에 대한 분명한 믿음에 증거가 나와 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욥19:25-27)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여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라”(시16:9-10)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17:150)

2. 신약에 나타난 부활의 증거

마태복음에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한 여인과 결혼한 일곱 형제의 사례를 제시하며 질문을 한다.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 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마22:23-32)라고 말씀하신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눅14:12-14)


요한복음에는 주님께서 영적 부활과 몸의 부활을 구분하고 계신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 25절은 첫째 부활 즉 중생을 말하며, 28절은 육체적이며 물리적인 부활을 말한다. 계속해서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또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복음서에는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에 대한 강력한 증거들이 나와 있고 제자들은 모두 “예수와 부활”을 전파했다.

바울은 행24:15, 행17:31, 빌3:20-21, 살전4:13-16 고전15:에서 위대하고도 강력한 문장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느끼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싶도록 만든다.

3. 부활의 본질

부활의 교리는 인간의 영뿐만 아니라 육체 역시 지속된다는 교리이다. 누가복음 24장에는 우리 주님의 부활하신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부활 후 첫 번째 주일 저녁 주님이 다락방에 있는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제자들은 자신들이 영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님은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의심하는 도마의 이야기도 마찬가지 논증이다.

몸의 물리적 부활을 왜 강력하게 주장해야 하는가?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지독한 이단이며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몸의 부활 없이는 구원이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도가 고린도전서 15장을 기록한 이유이다. 기독교는 몸의 부활을 전제한다. 죄는 육체적인 것이어서 오직 몸에만 적용되기 때문에 구원이란 몸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르치는 이단이 있다. 이것이 힌두교와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들은 중요한 것은 몸을 벗어나 육신을 제거하는 것이며 그 순간 죄는 뒤에 남겨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몸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구속을 가르치는 기독교의 구원과는 정반대이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을 때, 죄의 결과 그들의 영과 혼과 몸, 전인이 영향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해지려면 구원은 영과 혼뿐 아니라 몸 역시 포함한 것이어야 한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주님 자신이 부활하신 것처럼 주님은 우리를 부활시키실 것이다. 그것이 완전한 구원이다.

4. 부활체의 본질

이 부활체의 본질은 무엇인가?

첫째, 성경이 우리의 정체성은 보존될 것이라고 매우 분명하게 말한다. 내 몸은 언제나 나의 몸으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눅24:39)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땅에 묻힌 몸과 부활한 몸 사이에 유기적인 연관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땅에 뿌려진 씨와 거둬들인 곡식 사이에는 유기적인 연관이 있다. 우리는 몸의 세포들이 끊임없이 파괴되고 분해된다는 것을 안다. 이십년 전에 가지고 있었던 입자는 이제 내 몸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나는 똑같은 몸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그것을 “혈과 육”이라고 표현했다. 부활체의 실제 구조에 대해서는 성경에 말해 주지 않아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불신자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들이 멸망의 못에 던져지게 되리라는 사실뿐이다. 하지만 신자들의 부활체에 대해서는 대단히 많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둘째, 부활체가 썩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고전15:42) 부활체를 받게 되었을 때, 나는 더 이상 병에 걸리지 않고 나이도 먹지 않으며, 죽지 않을 것이다.

셋째, 부활체가 영광스러운 것이 되리라는 것이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43) 그분의 영화된 몸과 같이 놀라운 영광스러운 몸을 갖게 될 것이다.

넷째, 부활체는 대단히 강력한 몸이 될 것이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43) 권능으로 가득하고 연약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몸이 될 것이다.

다섯째, 부활체가 영적인 몸이 되리라는 것이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니 육의 몸이 있는 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44) 육의 몸은 동물적 본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우리 주님께서 사두개인들에게 동물적인 것과 신령한 것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셨다. 하늘에서는 우리는 신령한 영역에 살며 당연히 동물적 본성은 필요하지 않다.

여섯째, 부활체는 하늘에 속한 몸이 되리라는 것이다.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48-49) 우리는 주님과 같이 될 것이다. 놀라운 기적에 의해 여러분은 완전히 변화될 것이지만, 여러분의 정체성은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 자신이 부활체가 되어 구원이 완성될 것이다. 여러분의 영혼은 이미 구원받았다. 그 때에는 몸도 완전하게 구속받을 것이다.


출처: 청교도 아카데미/강대식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눈을 들어/최송연

외로울 때
고요히 눈을 듭니다
당신의 은총을 바라며

슬플 때
조용히 눈을 듭니다
당신의 위로를 구하며

두려울 때도
잠잠히 눈을 들게 하소서
당신의 신실하심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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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올라와서 함께 지내며 형님들의 자취생활을 거들어 주고 있었지만 방안은 내가 쪼그리고 앉아 있을 공간도 없었다. 그래서 매일 형님들은 "너 어쩌자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을 한 거냐.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고함을 치곤 했다. 
  
나는 기술을 배워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각종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만 해도 나처럼 무작정 상경해서 서울에 뿌리를 내리고 한 번 성공해 보겠다는 꿈에 잠겨 있던 농촌 출신 청년들이 발에 밟힐 정도로 많았던 시절이 었다. 그래서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장소를 찾는 것조차 힘들었다. 빵 공장에 들어가서 잠시 기술을 배울 때는 기술자가 얼마나 구타를 하는지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뛰쳐나오고 말았다. 자동차 정비 기술을 배우고 싶어서 정비공장 인근을 얼마 동안 배회하곤 했지만 역시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조금 기술다운 기술이라고 배운 것이 양복 수선 기술이었는데 조금 배워서 미싱을 돌리고 재단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성과였다. 
  
상경한 이후 몇 달 동안 나는 한 끼도 제대로 밥을 먹어 본 기억이 없었다. 또한 잠은 방의 가장 구석자리에서 두 다리를 쪼그리고 벽에 등을 기대 새우잠을 자는 것이 전부였다. 겨울이 다가왔지만 방안에 온기는 전혀 없었고 잠을 잔다기보다는 그냥 밤새도록 덜덜 떨다가 볼 일 다 보는 그런 상황이 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화장실에서 기침을 하다가 피를 한 사발 토해냈다. 가슴에 바늘을 꽂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순간순간 찾아왔고 기침을 할 때마다 목에서 피가 올라왔다. 어머님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빨리 보건소에 가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 어보라고 하셨다. 하루 종일 보건소 복도에서 기다리다가 간신히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는데 그 다음 날 폐병 3기까지 진행이 돼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나는 그 당시 폐병 3기가 뭔지, 얼마만큼 심각한 질병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단지 기침할 때마다 피를 토하면서 문득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곤 했다. 폐병 3기라는 진단을 받고 난 후 형님들은 더 이상 나와 함께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빨리 대전으로 내려가서 요양을 좀 하도록 해라." 
  
형님들은 거의 반 강제로 나를 기차에 태워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보건소에서 폐병 진단을 받은 후 항생제를 먹기 시작했지만 목을 끓고 올라오는 각혈은 계속되었다. 먹을 음식도 없었지만 식욕까지 떨어져서 며칠 동안 아무런 음식도 먹지 않고 그냥 집에 누워만 있었다. 그렇게 누워 있으면서 나는 '내가 바로 산송장 신세가 되었구나'라는 한탄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는데….  
  
가족들 가운데 특별히 나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나는 그렇게 방안 한구석에서 서서히 죽음을 기다리며 말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서울에서 내려온 후 며칠이 지났을까. 부잣집에 서 식모살이를 하고 있던 둘째 누님도 아픈 몸을 이끌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둘째 누님은 식모 일을 하다가 허리를 다치고 폐결핵 증세까지 있어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동병 상련이라고 둘째 누님과 나는 그날부터 서로 간병을 하면서 결핵 투병 생활을 했다. 둘째 누님은 얼굴도 몸매도 전형적인 미인이었다. 거기에 마음 씀씀이도 얼굴처럼 고와서 제대로 사랑을 받아 본 기억이 없던 나에게 처음으로 따스한 사랑을 느끼게 해주었던 분이었다. 누님과 함께 한 투병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그 과정은 힘든 고난의 시간이었다.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여 몸은 마를대로 말라서 오랜만에 나를 본 이웃들은 놀라기까지 했다. 누님과 나는 보건소에서 결핵 항생제 약과 주사를 받아오긴 했지만 늘 약이 부족했다. 그래서 항생제 주사약이 부족할 때면 누님은 항상 내게 먼저 주사를 놓아 주고 자기는 나중에 약을 받아와서 맞겠노라며 양보해주곤 했다. 말은 쉽지만 그 당시에 항생제 주사를 양보하는 것은 마치 생명을 양보해주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누님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동생은 꼭 치유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언제부턴가 누님의 다친 허리에 고름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누님의 허리에 주사바늘을 꽂아 고름을 뽑아주곤 했는데, 그때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던지 한번은 누님이 완전히 정신을 잃었던 적까지 있었다. 그날 누님이 정신을 다시 차리고 난 후 우리 둘은 같이 손잡고 방바닥에 퍼지고 앉아 한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통곡을 하며 울었다. 가슴속 깊이 사무쳐 있던 형언할 수 없는 서러움이 한꺼번에 복받쳐 올랐다. 
  
"정말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사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죽으면 이런 고통도 다 끝나고 혹시 더 좋은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자살에 대한 강한 충동이 그때처럼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았던 적이 없었다. 결핵에 개고기가 좋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한 번이라도 누님과 개고기를 먹어볼 수 없을까 궁리하고 있었다. 마침 옆집에서 개를 한 마리 잡아서 잔치를 한다는 말이 들렸다. 용기를 내서 누님과 함께 고기 한 점이라도 얻어 먹어보려고 옆집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그들은 결핵균이 옮겨질지도 모른다면서 집 안에 들어서지도 못하게 했다. 누님과 함께 못내 발걸음을 돌이키면서 마음 가운데 '아,저 개고기 한 점만 먹으면 근력을 회복할 것 같은데'라는 서러움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그날 저녁 누님은 아픈 몸을 이끌고 어딘가를 황급하게 다녀왔다. 그날 저녁 따라 나는 몸이 너무도 아파서 사람이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혼미한 정신으로 아무런 기억도 없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누님이 아침 밥상에 고깃국을 올려주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고깃국이야?" 
  
"응,그냥 아무 말 하지 말고 먹어둬. 몸보신에 좋다고 하더라." 
  
"그래도 뭔지 알고나 먹자. 이게 뭔 고깃국이고?" 
  
누님은 한사코 대답을 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내가 고깃국을 다 먹고 난 후에야 고양이를 삶은 고깃국이었다고 말했다. 고양이 고기! 나를 생각해주는 누님의 사랑이 처절하게 가슴에 사무쳐 왔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C. 성령의 지속적 사역: 다락방 강화에서의 그리스도의 맹세를 성취하는 일(요14-16장) / 마이클 호튼

 

 

성부는 세상을 창조하시기 위해 성자 안에서 말씀하셨지만, 안에서 균일한 우주를 생겨나게 하시고 그래서 삼위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질서 있는 영역을 창조하신 분은 바로 성령이다. 심지어 일반 은총 안에서도 칼빈이 말하는 대로 이 타락한 세상에서 선함, 진리, 아름다움이 꽃피는 곳마다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은 성령께서 우리가 누릴 자격이 없는 지혜와 건강과 그 밖의 유익을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옛 창조 속에서도 성령은 역사하시며 하늘의 예루살렘을 이 시대 속으로 가져오시는 한편 지상의 도성의 기둥들을 떠받치신다.

 

새 창조에 있어서 성령은 내적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깨닫게 하시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 깨닫게 하신다. 요한복음 14~16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다락방 강화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제사장적, 왕적 다스림을 매개하실(그리고 지금 매개하시는) 방식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지금 높아지신 은혜와 영광 가운데 우리를 다스리시며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다스리시면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끄셔서 삼위일체 창조주께 "내가 여기 있사오니"라고 대답하게 하신다.

우선 먼저,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은 사법적이다.
성령은 다가올 심판을 알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불신을 책망의 초점으로 삼아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기 위해 보냄 받으셨다(요16:8). 우리는 사도행전 전체에 걸쳐 복음의 확산을 특징짓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서 청중이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나머지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물을 때(행2:37) 이 약속의 경험적 효과를 본다. 성령은 또 다른 말씀을 하시지는 않지만 내적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며 우리의 죄책과 그리스도의 의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설득하실 것이다.

둘째, 성자가 모든 진리의 유일한 화신이므로 성령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위해 보냄 받으실 것이다(요16:13).
성부는 말씀하시고 성자는 위격적으로나(영원한 낳음) 사역적으로나(복음) 성부가 말씀하시는 내용(말씀)이다. 피조물 안에서 그 말씀의 발화 효과를 일으키시는 일은 언제나 성령의 역할임을 우리는 살펴보았다. 성령은 그 내용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낳는 원천이다. 성자는 지상 사역 기간에 자신의 권위를 근거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을 전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실 것이라고 설명하셨다(요16:13). 성령은 예수님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천상의 머리에 우리를 연합시키신다. 성령은 우리의 일상적인 역사를 혼란하게 하시면서 우리를 새 창조 속에 끼워 넣으신다.

따라서 성령은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 아니라 성부, 성자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자신의 소유로 주장하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이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성령이 우리의 경건한 체험을 확증하기 위해서나 우리가 윤리적 왕국을 인식하도록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을 책망하기 위해 오실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물론 성령의 오심은 우리의 경험과 윤리적 행동에 심오한 영향을 끼치지만 성령의 사역의 초점은 우리에게 우리의 죄와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에 대해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자신보다 그리스도를 전파하시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역사는 우리를 지금도 그리스도가 지상에 있는 자신의 증인들을 위해 간구하시고 그들을 위한 처소를 예비하시는 법정으로 우리를 안내하시는 성령의 사역 외에는 우리에게 멀고 사라져 가는 기억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정복이 아닌 갈등을 의미한다. 신약 성경에서 '증인'이란 말은 헬라어 단어 마르튀스의 번역어이며 이 단어에서 순교자라는 뜻의 영어 단어(nartyr)가 나왔다. 전투하는 교회는 성령에 사로잡혀 자유롭게 그리스도께 현재 이 시대의 권력이 말하는 '아니요'와 반대되게 '아멘'으로 대답하는 세상의 일부분이다. 패배하지도 않았고 아직 완전히 승리하지도 않은 전투하는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실 그대로의 진리에 대한 고난받는 증인이다. 이 둘 사이의 공간은 교회에 있어서는 불확실할 곳이며 교회가 종종 자신을 그 승천하신 머리와 같이 영광 가운데 다스리는 존재로 상상하기를 더 좋아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다락방으로 가서 성령 세례를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까"(행1:4~6).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교회는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처럼 모여서 말씀과 떡을 떼는 일에서 예수님을 인식하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복음을 땅 끝까지 선포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 오순절과 재림 사이에서 성령은 죄인들을 말씀을 듣는 자들로 만드심으로써 죄책과 용서에 대한 내적인 깨달음을 주신다. 실제로 성령 자신이 말씀을 들으시는 분이다. 성령은 삼위 하나님의 선교사로서 "오직 들은 것을" 말씀하실 것이다(요16:13). 교회는 성령의 내주와 능력 주심으로 선자자들과 사도들의 외적인 말씀뿐만 아니라 성부 및 성자와 본질이 같으신 분을 통한 그 증언에 대한 내적 확증도 갖는다. 말씀 하나님을 육신으로 잉태되게 하신 성령은 성자에 관한 말씀의 원천이자 해석자다. 그리고 성령은 과거에 대한 진리(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진리(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실' 일)도 말씀하실 것이다.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성령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지만 우리를 우리 자신에서 벗어나 이 은혜의 경륜에 집중하도록 이끄시려는 의도를 가지고 역사하신다. 성령은 언제나 말씀과 더불어 사명을 띠고 나아가시며 최소한 위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밖으로는 사랑과 증언과 봉사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외향적인 공동체를 창조하시는 외향적인 분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요한복음 16장에서 가르치시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십자가를 통해 부활까지 그리스도 자신의 숙명으로 이끄신 바로 그 성령이 또한 우리를 그리스도의 발자취로 이끄신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첫 번째 증거가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선포한 것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 강론에서 성령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은 소위 말하는 "개인적인 종교적 의식 속에 들어오는"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성령의 영감"에 대한 모호한 정서가 아니라 "그것 나름으로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봉사하는 성령의 선물로 이해해야 하는 구체적인 교회 관습의 형태를 띤" 인도하심이라는 점을 라인하르트 휘터는 지혜롭게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성령은 예수님이 누가복음 24장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말씀 선포와 성찬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이자 주님으로 인식하게 하신다. 또한 성령은 세례, 가르침, 성찬, 장로들과 집사들의 영적이고 물질적인 돌봄 등의 피조물적인 수단을 통해 교회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의 약속은 사도들에게 주어졌고 사도들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영감받은 진리를 새로운 언약 공동체에 전달하고자 했다.

 

셋째, 예수님은 성령에 대해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라고 말씀하신다(요16:14). 14절과 15절이 구속 언약에서 성령과 성자가 공통의 보화, 즉 그 두 분이 성부와 함께 우리와도 함께 나누시고자 하는 보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성자와 성령 사이의 이 상호성(페리코레시스)을 강조하는 것과 같이 이 말씀은 분명 성령의 증언의 핵심을 가리킨다. 이 점은 아마도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가장 충분히 표현될 것이다. 예수님은 성부를 영화롭게 하셨고 이제 성부와 성령은 성자를 영화롭게 하신다. 성자는 내용(발화 수반 행위)이지만 성령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발생하게 하며 그 말씀들을 열매 맺게 하신다(발화 매개적 효과).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로하시며 그들에게 자신이 실제로 그들(그리고 우리)을 떠나 계시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자신의 삼중 직분이 (이제는 다만 하늘에서) 지속되는 것임을 확신시키신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2-3). 그러나 예수님의 떠나심은 역사 속에 갈라진 틈을 내고 그곳으로 성령이 그리스도를 위한 언약적인 몸을 창조하시기 위해 들어오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요14:16-18).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들과 교회 안에 거하시지만 직접 육체로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거하신다(고후1:22. 참조, 롬8:17,26; 고전3:16; 갈4:6; 엡5:18). 이 직접적인 임재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돌아오심과 다름없는 것이 요구된다. 승천으로 인해 지상의 교회는 승리한 교회가 아니며 장차 만물의 갱신을 위해 그 머리의 육체적인 재림을 기다려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육체로 보았겠지만 우리는 성령 안에서 제자들이 그리스도께 승인받고 성령이 우리에게 전달하도록 주신 복음의 선포를 통해 그리스도를 본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걷고 함께 먹었지만 성령이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시기 전까지는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주로 인식하지 못했다(마16:17). 지금 이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스승의 경력은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다가올 시대의 첫 열매로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로 하여금 역사상의 예수님을 믿음의 그리스도로 인식하게 하는 분은 바로 성령이다(고후5:16-17). 몸인 교회는 불가분적으로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구속사 안에서 교회에 영화롭게 된 머리와는 다른 곳에서 존재한다. 자신과 더불어 우리의 궁극적인 영화를 확보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우리의 개인적인 역사를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역사 속으로 끌고 가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엡2:6). 성부는 은혜의 예전을 말씀하시는 반면 성자는 스스로 그 예전의 화신이시며 다음으로 성령은 영화롭게 된 앞서 가신 분 뒤에서 적절한 "아멘"으로 화답하며(고후1:19-22) 답가를 부르는 찬양대를 창조하기 위해 "불순종의 아들들" 안에서 역사하신다. "곧 이것(불멸)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5:5).

 

성령 강림과 더불어 우리는 이제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다. 시계는 현재의 이 악한 시대 위로 재깍재깍 흘러가고 있다. 지옥의 문들은 교회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성령의 부어짐은 "이 마지막 날"에 한 믿음의 공동체,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영화롭게 된 머리의 언약적인 역사(그리고 종말론) 속으로 삽입된 공동체를 보증할 것이다. 실제로 바울이 가르치는 대로 성령은 신자들 가운데로 보내심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최종적 구속의 보증(아라본)으로서 그들 안에 거하시기 위해 그들 속으로 보내심을 받았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기 때문이다(롬8:23. 참조, 갈4:6). 성령은 우리의 최종적 구속의 아라본(첫 불입금)으로서 우리가 새 피조물로서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는 일의 '이미' 이루어진 부분을 우리에게 주시며,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도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다(롬8:18-28. 참조, 고후1:22, 5:5; 엡1:14). 성령의 임재는 우리를 절망에서 지켜 주지만 승리주의로 인도하지는 않는다. 사실 우리가 성령에게서 다가올 시대의 실재를 더 많이 받을수록 더 들뜨게 되는 것은 역설이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움에서 난 동요가 아니라 이미 미래를 미리 맛본 데서 오는 동요다.

 

요한복음 14-16장에서 우리는 또한 성령이 이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삼중 직분의 발화 매개 효과를 일으키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령은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소송을 제기하시고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주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선지자 사역을 매개하신다. 따라서 삼위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자 선포된 말씀일 뿐만 아니라 성령의 사역 안에서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시는 분이기도 하다. 바르트의 명언과 같이 "말씀의 주는 또한 우리의 들음의 주다."

 

성령은 또한 "또 다른 보혜사"(변호사)로서 그리스도를 대체함으로써가 아니라 내적으로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주시며 용서에 대해 확신하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사역 매개하신다. 이 강론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성령의 가르치시는 사역의 내용임을 강조하신다(요15:26b). 성령은 또 다른 말씀을 가져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 대해 '아멘'을 불러일으키신다.

 

성령은 불신과 죄의 폭정을 굴복시키시고 죄인들에게 그들을 그리스도께 연합시키는 믿음을 주셔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모든 신령한 은사를 받을 수 있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왕적 사역을 매개하신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목사들과 장로들을 주시고 성령은 그들을 그리스도께 속한 목자들로 준비되게 하신다(엡4:11-16). 성령의 이 사역을 통해 민수기 11장 29절에 나오는 모세의 요청("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은 모세의 가장 무모한 꿈 이상으로 성취될 것이다. 70인의 장로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온 진영이 성령 충만한 증인들의 공동체가 된다. 성령은 임명된 직분 담당자들의 사역을 통해 온몸에 주어진 많은 은사들을 주시고 조율하시며 직분을 맡은 자들은 성령의 은혜(존재적 상태)에 있어서가 아니라 은사들(소명)에 있어서만 서로 다르다. 따라서 누가복음 9장 1-6절에서의 열두 제자의 사명은 누가복음 10장에서 70명에게로 확대된다. 그러나 이는 오순절의 사명 위임 의식의 서곡일 뿐이다. 성령의 사역을 통해 우리 또한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 즉 우주적 법정에서의 참되고 신실한 증인, 우리의 구속주를 찬양하며 화답하는 성가대로서, 그리스도를 닮도록 재창조된다.

 

 

마이클 호튼의 개혁주의 조직신학_17장 '성도로 부르심 받음'에서 발췌(555-560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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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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