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북폭이 이뤄지려면

미국입장에서는 당연한 얘기지만,

자국에 손해가 최대한 가지 않는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손해를 최소화 해야하는

필수적인 전제조건이 필요합니다.


그 조건이,

1. 주한 미국인들이 빠져나가야 함.

2. 미국의 자본들도 빠져나가야 함.

3. 미군 또한 최대한 안전한 곳에서 전투를 해야 함.


즉, 전시상황으로 이어질 남한에서 싸우면

군인들의 피해도 막심할 것입니다.


미국은 이미 남한내에 RO같은 간첩세력이나

북한군의 땅굴침투에 의한 공격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미국입장에서는 자국에게 위협이 되는

북한의 핵시설만 파괴만 하면 됨으로

미군의 불필요한 희생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게 포인트입니다.


만약, 이상의 조건이 이뤄지지 않아,

미국의 재산과 인명의 피해가 상당 수 발생한다면,

미국의 국민여론에 의해 트럼프가 탄핵될 위기에 몰릴 것입니다.


어쨋든,

미국이라는 세계최강국가가  북한이 핵완성이 된 이후

미국본토까지 날릴 정도의 장거리기술력(ICBM)이 확보되면,

미국이 북한의 핵위협에 끌려다닐 수도 있는 상황이 전개되기 때문에,

미국은 절대로 그런 상황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북한이 100발의 핵을 날려 99개가 막힌다 치더라도

단 1개의 핵이 미국에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재 북한의 핵은 완성된 상태고,

미국 본토 (LA)까지 날릴 수 있는

장거리미사일능력은 완성단계 수준에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정부의 승락 없이도

자국의 안전을 위해서 무!조!건!

북한의 핵시설을 파괴해야 할 의무가 주어진 상태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심각한 이유는,

중국의 입장은, 미군과 한국군이 북한의 핵시설은 부셔도 좋다...

하지만 미군과 한국군이 3.8선 위로 군사를 동원해 북한을 수복하려하면

중국도 가만 있지 않고 군사행동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중국은

과거 6.25때처럼 한반도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말은 다시 말해, 중국이 북한을 먹고 싶어한단 얘기입니다.


며칠 전 뉴스에 나왔듯이...

시진핑이 트럼프에게 원래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였다는 얘기를 함으로써 

전쟁나면 중국이  한반도는 원래 우리의 속국이니

우리가 도로 가져 가겠다라는 충분한 명분이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트럼프는

원래 이런 말들은 양국간에 비밀리에 얘기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정부고 뭐고 죄다 좌빨간첩들이 곳곳에 득실대는 상황이니,

메인 뉴스로 그냥 날려버리고 알아서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저도 첨엔 몰랐다가...

홍준표 후보가 싸드 얘기하는 것을 보고

또 지금 정리하면서 그것이 맞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엇습니다.


문제는...

한국 국민들의 통일의지가 있냐는 것인데,

현재 하루종일 좌경화된 언론들의 편파보도만  보고

이미 우물안 개구리가 되다시피한 국민들은...

이런 상황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 우리가 왜 전쟁을 해야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매우  한심한 수준의 안보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국민들 다수가 영적으로 어둠의 세력에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에

현재 본인들이 이 중요한 시기에 바른 선택을 해야한다는 것은 커녕,

선택을 해야한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바보들이 되어 있습니다.


그나마

주한미국인들과 자본들이 빠지기 시작하면

그 때는 눈치 챌 것이라 생각합니다.


생각해보면, 선하신 하나님께서도

이미 6.25때 전쟁나기 전 뿐만 아니라 전쟁 중에도...

다시금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소위 지식인이라며 

배우고 잘난 척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월북을 감행해서 스스로 빨갱이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럼으로,

전쟁중에도 살 수 있는 선택의 기회는 주어진다 생각합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전쟁이 날 것이라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 때는,

미국인과 미국자본이 빠지는 때,

그 때가 거의 맞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웃블로그 / 나사렛선포완전무장

인간과 침팬지의 DNA는 1%만 다르다?


실제로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체는 얼마나 비슷할까?


주로 인용되는 숫자인 염기서열의 99%가 유사하고

나머지 1%만 다르다고 알려졌다.


이것을 근거로 공통조상이 있었다는 주장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정확한 데이터가 아니다.

전체를 비교대상으로 하지 않고

원하는 결과를 위해 편향적이고 부분적인 데이터를 뽑아낸 것이다.


우선 침팬지의 유전체(genome)

사람의 것보다 12%가 더 크기 때문에 12% 차이가 난다.


침팬지는 48개의 염색체(chromosomes),

그리고 사람은 46개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다.


인간 유전체를 모형(template)으로 사용하여 남는 부분이나

비정렬 DNA나 결손(DNA GAP), 크기들은 삭제하고 일부분만 비교한 것이다.  


유전체의 많은 영역에서 주된 DNA 서열의 재배열이 있으며

이것은 10-20%의 불일치성을 가져온다.


전체를 고려하면 유사성은 비교 기준에 따라

81%, 88% 다양한 결과가 나온다.


실제는 12%에서 19%까지 다르다는 결과이며

이는 30억 염기서열 중 3.6억개에서 5.7억개까지 다른 것이다.


이런 차이는 인간과 침팬지의 DNA가 유사하다 하거나 

공통조상을 가졌다거나 사촌지간이라 주장하는 사람을 부끄럽게 만든다.


유사성 비율에 관계없이 아래 비교표를 보면

인간과 침팬지는 너무 다른 생물체다.


구분 

 인간

침팬지 

 유사성

 DNA의 유사성

염색체 46개

염색체 48개

81~88%

 보행

직립보행 

네발 보행 

×

 인두의 구조

음식과 공기의 통로가 한 개

 음식의 통로와 공기의 통로가 분리

×

 IQ

120 

70 

△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여 문장으로 된 말을 할 수 있다

말을 하지 못함 

×

 후두의 구조

후두 하강으로 다양한 소리 가능

해부학적으로 말을 할 수 없는 구조 

×

 팔과 다리의 길이 비율

손과 발의 길이가 균형적임

 짧은 다리와 긴 팔

×

 골반의 크기

좌우로 넓고 위아래로 짧은 구조

 좌우로 좁고 위아래로 긴 구조

×

 대퇴골

(고관절~무릎관절)

안쪽으로 각이 형성

(뒤뚱뒤뚱 걷지 않게 해준다)

 바깥쪽으로 각이 형성

× 

 척추중립, 요추전만

척추가 휘어진 상태

 네발동물에서는 불필요

×

 보행의 효율성

발목관절

고관절

사람보다 3/4 효율성이 떨어짐

×

 도덕성

도덕성이 내재되어 있다 

동물에게는 도덕성이 없다 

×

 피부

털이 없다 

털이 있다 

×

 문명

생물중 유일하게 문명을 만들었다 

없다 

×



인간의 염색체는 합성되었나?


인간의 염색체는 23쌍이고 침팬지의 염색체는 24쌍이다.

혹자는 인간의 2번 염색체와 침팬지의 12번,13번 염색체가 비슷한 것을 발견하고

공통조상의 12,13번 염색체가 2번으로 합쳐졌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합쳐진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염색체 끝에 있는 텔로미어가 결합을 했다는 증거라는데

오히려 텔로미어의 역할은 마치 골무처럼 결합을 방지하는 것이다.


모든 염색체에는 한개의 센트로미어를 가지고 있는데

두 개의 염색체가 결합되었다면 텔로미어가 2개이고  센트로미어도 2개가 있다.


문제는 2개의 텔로미어와 2개의 센트로미어는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들은 퇴화되었다고 주장하며

비활성화된 것을 찾아보지만 이것도 발견하기 어렵다.


하나의 거짓말을 위해 두번째 거짓말도 해야 한다.


실상이 이렇지만,

아직도 인간과 침팬지의 DNA 유사성이 99%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독일의 유대인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다윈의 진화론에 평생 회의론자였다.


그는 생물의 다양성에 감탄하며 말했다.

"나는 항상 다윈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왔다.

그의 진화이론은 이 모든 다양한 종들을 설명할 수 없으며

독립적인 종으로 생물의 다양성을 진화할 수 없다 

마침내 그들은 진화가 출산 과정을 통해

갑자기 다양한 종들이 튀어 나왔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http://blog.naver.com/acoloje/220789207449



출처: 카이로스 / ars (acoloje)

8개교단 “목사의 동성애 옹호, 이단문제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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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개교단 이대위가 임보라 목사의 이단성 조사에 공조하기로 했다.     © 뉴스파워 범영수 

 

8개교단 이대위가 섬돌향린교회 임보라 목사의 동성애 옹호 활동 관련 이단성 조사에 협력하기로 했다.

 

한국교회 8개교단 이단대책위원장 연석회의(기감, 기성, 기침, 대신, 통합, 합동, 합신, 고신)는 27일 대신총회회관 회의실에서 모임을 갖고 임보라 목사의 동성애 옹호 활동에 대해 자료를 공유하고 이단성 연구에 공조하기로 했다.

 

최근 임보라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 이단대책위원회(위원장 진용식 목사)로부터 이단성 조사 공문을 받은 바 있다.

 

임보라 목사는 퀴어축제에 참가하는 등 동성애 옹호 활동을 펼친 바 있으며, 최근에는 퀴어성서 주석 번역본 발간에 동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8개교단 이대위 측은 “어디 소속이든 우리 교단의 성도, 목회자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이단성 연구를 하는 것”이라며 “목사가 교리적으로 동성애 문제를 진행해 나가는 상황이기에 퀴어성서 주석 번역본 발간은 이단문제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예장합동 이대위원장 진용식 목사는 “퀴어성서 주석 번역본 발간 뿐 아니라 임보라 목사가 그동안 동성애 옹호 활동을 해온 것 자체가 개신교 목사로서 이단문제에 해당된다”고 말했다.

 

진 목사는 “임보라 목사가 조사에 응하지 않더라도 그의 동성애 옹호 활동에 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다”며 이단성 조사에는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한편 8개교단 이대위는 단사상대책위원회 위원장 허태선 목사가 단월드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해 오는 7월 3일 수원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것에 대해 공동으로 대처하기로 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다음 회의에서 결정하기로 했다.

 

다음 8개 교단 이대위 회의는 7월 중 열릴 예정이다.

 

범영수  ⓒ 뉴스파워

 

가져온 곳: USA아멘넷

사막은 은혜의 땅 36

"형님, 올해 칠순을 넘기시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꼭 영접하셨으면 합니다. 성경 말씀에 보면 모든 사람이 태어났다가 반드시 죽게 되는데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형님이 천국에 들어가게 되시길 바랍니다."

 

전화기 저편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화기를 내려놓지도 않았다.

 

"형님, 마음 가운데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하시고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교회에 출석하시면서 신앙생활을 시 작하시면 좋은 일들이 있을 겁니다."

 

또다시 긴 정적감이 전화기를 통해서 전해졌다.

 

"너 목사된 지 얼마나 됐냐?"

 

"1995년도에 안수 받았으니까 어느덧 10년 된 것 같습니다."

 

"그래, 목사로 일하면서 나를 위해서도 기도했던 적이 있었냐."

 

"물론이죠, 형님."

 

"정말이냐?"

 

"예."

 

"알았다. 한번 교회에 나가보도록 하지."

 

그리고는 늘 하던 것처럼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나는 조금 전에 형님이 자신의 입으로 했던 말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 한번 교회에 나가 보도록 하지."

 

보통 때 같았으면 또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고함부터 지르고 전화를 끊었을 형님인데 생전 처음으로 내 말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다. 나는 울먹이며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둘째 형님이 교회에 나가 보시겠다고 했어. 우리 계속 형님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자고."

마음 속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끓어올랐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주의 종으로 부르셨다. 내가 주의 종이 되기로 결정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나를 주의 종으로 부르신 이는 분명히 하나님이셨다. 그리고 그 분은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당신이 세우신 사람들을 통해 일을 이뤄 나가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이다. 삼청교육대의 지옥훈련 경험을 하게 하셨던 것도 이제는 왜 그런 끔찍한 일을 겪게 하셨는지 이해가 된다. 삼청교육대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면서 하나님께서는 내게 갇힌 자들을 돌보고 위로하라는 감동을 주셨다. 그동안 관심 없이 그냥 지나쳐 버렸던 부분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안개에 가려져 있던 거대한 산이 바람이 불어 안개가 걷히며 그 위용을 서서히 드러내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성령의 바람은 나의 영혼을 감싸고 있던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안개를   한순간에 몰아내 주었다. 이제는 내가 가야 할 길, 내가 생명을 바쳐 해야 될 장래의 사역들이 환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갇힌 자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이 제대로 떨어지기만 하면 그보다 더 좋은 토양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이 땅 위에서 사역을 하시던 동안에도 특별히 옥에 갇히고 억압받는 계층을 위해 많은 관심을 보이셨고 그들을 위한 사역을 많이 하셨다. 예수님의 관심은 세상의 지식을 많이 쌓고 부를 누리고 있는 기득권층에 있지 않았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애통해 하는 자, 갇힌자, 심령이 가난한 자, 지식이 없는 자들에게 사역의 초점을 맞추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 4:18).

 

그런데 교회들은 어떠한가. 가난하고 실력이 없고, 사회적 지위도 낮은 사람들은 철저히 무시당하고 오히려 사회적 지위 가 높고 재력도 단단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도 행세를 하고 있다. 또한 그들이 담임목사의 총애를 받으면서 교회 생활을 즐기는 것이 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모습은 아닐까. 우리는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예수님의 원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갇힌 자, 병든 자, 연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져야 한다. 갇힌 자들에 대한 사역은 기독교인들에게 항상 중요한 사역 중의 하나였다. 4세기 기독교 사학자로서 지금까지 당시 기독교 문화와 관련된 가장 많은 사학적 자료들을 남기고 있는 기독교 역사학자 유세비우스는 당시 기독교인들의 삶에 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교회 내 형제자매들 중에 갇힌 자가 있을 때 주일에 남녀 모든 회중이 이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드리며 찬송을 부르면서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성찬식을 먼저 거행했다. 그리고 옥에 있는 형제를 위한 합심기도를 하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왜냐하면 옥에 갇힌 자들은 옷도 제대로 못 입고, 음식도 공급받지 못했다. 그래서 오로지 외부에서 그들을 방문하는 가족, 친척들에 의해 먹을 것을 공급받고 근근이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그 형제, 자매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크고 작은 것들, 귀한 음식들을 아낌 없이 나누었다."

 

예수의 가르침대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열심히 나누는 그런 거룩한 마음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런 아름다운 행동들이 있었기에 초대교회 시대 때 사자 굴에 던져지고 산 채로 나무에 매달려 화형을 당하는 감당하기 힘든 환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교회가 나날이 늘어나고 믿는 자들의 수가 갑절로 계속 늘어나는 강한 생명력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이었다. 오네시모는 무익한 자에서 하나님의 사역에 쓰임받는 유익한 자로 변신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오네시모는 노예로 있던 집에서 물건을 홈쳐 도망했다가 로마의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사도 사울을 만났다. 그 후 오네시모는 예수의 복음을 통해 새롭게 중생하는 경험을 하고, 바울의 도움으로 옛 주인을 찾아가 용서를 받았다. 그 후에는 바울의 충실한 제자로서 그의 이름대로 유익한 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오네시모라는 이름은 유익 또는 이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저희가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 게 하리라"(골 4:9).

 

나는 성령의 조명을 새롭게 받으면서 이 시대의 오네시모가 되리라는 결단을 했다. 나는 오네시모와 같이 무익하고 주인의 집에 있는 물건들을 도적질했던 사람이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 종교다원론자 변선환에 대하여 ◈◈◈ 대 전 신 학 대 학 교 선교학개론 김주덕 교수님

3학년 200812027 서성범. 4학년 200711015 송찬섭

 

 

◆변선환의 신학적 노선=============================================

변선환을 이야기 할 때 자유주의 신학자이며, 종교다원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온지 한 세기가 지났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그동안 이 땅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동안 불교, 유교, 전통종교 등과 자주 갈등을 빚어 왔습니다. 한국에서는 그간 이 갈등의 와중에서 특히 1980년대에 신학자들 간에 보수와 진보 혹은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로 갈라져 신학적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그 중 변선환은 자유주의 신학을 추구 했던 인물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의 범주 속에 종교다원주의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란?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으며, 구원은 교회 밖에서도 가능하다." 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 이론이 왜 나오게 되었는지, 설명을 쉽게 하고자 천주교 원로인 정양모 신부의 말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 '오직 예수' 라는 것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선 너무 존경스러워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옆을 잠깐만 돌아보면 공자님도, 부처님도, 마호메트도 있다. 하느님의 신비나, 불교의 공이나 진여는 걷잡을 수 없는 세계 아니겠는가. 정상에 이르는 길은 많다. 부처님 코스, 공자님 코스, 무하마드 코스가 있다. 나는 예수 코스를 따르고 있다. 다른 코스를 모르다 보니 예수 코스만 너무너무 좋다. 각자 자기 코스 밖에 안보이니까 오직 예수라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선 그렇게 하기가 아주 좋다. 그러나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불자들도 만나고, 유생들도 만나야 하니 생각이 넓어져야 하지 않겠느냐.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참삶, 하느님이고 진여이고, 공이다. 참삶에 이르는 길은 예수다. 그게 예수 코스다."

종교다원주의는 상생과 공존을 주장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논리에 입각하여 변선환은 1980년대에 "종교의 우주는 기독교가 아닌 신 중심",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대담한 선언을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교리를 부인한 것으로 당시 감신대 학장으로 재직 중인 신학자인 그에 주장은 기독교 뿐 아니라 종교계에 충격이 아닐 수 없었던 사건이었습니다.

 

 

◆변선환의 이 같은 주장으로 기독교계의 반응=============================

"기독교만이 유일한 구원이라는 교리는 신학적인 천동설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해 기독교의 본질을 부인 했다."며 당시 감신대 학장에게 감리교회법상 최고형인 '출교'형을 내렸습니다. 이는 중세의 '파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교인의 자격을 빼앗고 당사자를 감리교단 밖으로 내보내는 형벌이었습니다.

보수주의 목사들이 주도한, 감리교단의 '한국형 종교 재판'은 한국개신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것으로 큰 주목을 받았으며, 재판 결과에 반발하는 학생들과 상당수 목사들로 감신대는 장기간 분규에 휩싸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당시 변선환 학장은 최후진술에서 "흑백논리만이 횡행하는 감리교의 현실이 안타깝다"며 "기독교는 더 이상 정복자의 종교가 아니며 전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종교간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 종교적 다원주의는 감리교의 세계적 추세"라고 역설을 하였습니다. 또한 "타종교를 무조건적으로 악마의 소산이라고 생각하는 개종 중심의 선교 신학은 제국주의적인 발상이다. 지구촌에서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현실과 그 진리성을 인정하되 종교간 대화를 통해 상대방의 종교를 배워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새로운 신학이 정립돼야 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이러한 신학적 논리를 한국 감리교는 그를 '사탄의 종'이라며 파면을 시키게 된 것입니다.

 

 

◆변선환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주장====================================

변선환 사후 10년이 지나서 그에 제자들은 추모 논문집[변선환 신학 새로 보기]-대한기독교서회-에서 그를 복원시키려 애를 씁니다. 그 제자들은 스승을 이렇게 옹호 합니다. "한국 교회의 근본주의는 '적'이 필요했다." 라고 말입니다.

'다름이 곧 틀림이 되는 차이'를 통해 자아 정체성을 확보하는 모든 근본주의와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의 근본주의 또한 '적'이 필요했다. 또한 '우리'와 '저들'간의 차이를 모호하게 만드는자 역시 '사탄'이 되어야 했다. 변선환은 그렇게 '사탄'이 되고 말았다.

당시 금란 교회 김홍도 목사는 매주 발행하는 (불기둥)이라는 팸플릿에서 "한때 수천 명씩 모이던 구라파 교회들이 관광 장소로 전락한 것은 수십 년 전부터 있었던 종교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는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사탄 때문" 이라며 합리주의, 사회복음 운동, 실존주의 철학, 행동주의 신학, 과학적 방법 등을 주장하는 자유주의 사상가들을 공산주의자와 비교하기도 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으로 가면 좋으련만 가지 않고 국가를 혼란하게 하는 것이나 기독교의 탈을 쓴 무신론자들이 교회 안에 존재하면서 파괴하려고 드는 것은 사탄의 간계"라며 이들이 교회 밖으로 나간다면 학문의 자유를 가지고 무슨 소리를 하든 개의치 않는다"라고 했다. 그의 논리 안에서 교인의 숫자는 사탄의 득세와 반비례하며, 교회 밖의 '적'은 오히려 교회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교회 안의 이질적 목소리는 용납 못한다는 폐쇄성과 극단적인 이분법이 가득했다. 그러나 변선환의 제자들은 "복종보다 합리적 사고를, 개인 구원보다는 사회복음을, 내면적 초월성보다 사회참여를 중시한다면 보수교회들은 이를 여지없이 교회를 파괴시키고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신학으로 딱지붙이며 대중을 훈련시켰다"며 "변선환을 정확히 대립점에서 자아와 타자의 차이를 해소하려고 했다"라고 설명하며 옹호합니다. 또한 "다른 종교에도 진리는 있다"는 종교다원주의는 2000년간 배타적 선교 정책을 고수해 온 대다수 기독교인들에게는 여전히 당혹스러운 과제였을 것이며, 더욱이 "교회 안에서만 들리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대한 독점중계권을 쥐고 있었던 근본주의 목사들에게는 실질적인 '위협'이었던 것이라고 변선환의 신학적 논리를 옹호합니다.

 

 

◆변선환이 신학을 하게 된 동기와 누구의 영향으로 신학적 논리를 정립하였는가? 그는 1928년 진남포에서 태어났습니다. 진사인 할아버지 밑에서 서당식 공부를 하였으며, 그 배움을 통하여 동양적 심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중학교 시절에 동서 4대 성인의 인물전을 보고 인간 삶의 생애의 의미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찾아오신 것은 18세 때 신석구 목사님을 만나서 부터라고 합니다. 신석구 목사는 보수적 신앙인으로 불교인들과의 대화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분으로 이후 변선환에게는 토착화 신학에로의 여정, 종교해방신학에 대한 관심, 그리고 학문적 자유를 지켜 내려는 일관된 삶의 태도 등의 논리를 갖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1948년 평양성화신학교에 입학하고, 후에 6.25발발로 단신으로 남하하여 1951년 부산 감리교회를 다시 입학하게 됩니다. 그곳을 졸업한 뒤 한국신학대학 대학원을 입학하여 바르트 신학을 전공한 박봉랑교수와 틸리히를 강의하는 서남동 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로부터 변선환은 "계시신학이 간과하고 있는 종교와 문화로부터의 계시신학 그 자체가 도전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변선환의 문제의식은 실존주의 신학사조를 만나게 되면서 더욱 깊이가 있게 되고 후일 웨슬리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단초가 되게 됩니다.

그 후 그는 미국 뜨루대학 유학길에 오르며, 바르트 신학과 결별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볼트만으로 이어지는 실존론적 신학을 칼 마이켈슨 교수로부터 배우게

되고, 신의 초월성을 신학의 절대지평으로 삼았던 바르트의 계시 신학과는 달리 그리고 또한 존재자체에 큰 비중을 둔 틸리히의 상징론이 그리스도 계시를 불필요하게 만든다고 비판하면서 역사라는 개념을 가지고 신학의 재구성을 시도하는 마이켈슨의 작업에 매료되어 빠지게 됩니다.

 

◆변선환의 신학 사상==============================================

?[실존적 기독론] 변선환에 신학은 토착화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에 토착화 신학에서는 신학적 관점이 서구적 틀 속에 갇혀 있는 것을 거부합니다. 즉, 동양의 세계를 존재 신비주의 차원에서 인식하고 인간의 자아개념이 함몰된 역사망각의 실체로 규정하고 그것에게 구원을 베풀려고 하는 자신의 신학적 주장 속에 서구적 신학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다른 종교보다 낫지 않으며, 하나님의 계시는 구원이 다른 종교들 속에도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나타나 있다는 신중심주의 신학 내지는 종교다원주의에로의 획기적인 전환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는 기독교의 배타성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한국적 신학의 과제를 제시 합니다. 첫째, 한국적 신학은 종교에 대한 서구적 편견으로부터 벗어야 한다. 둘째, 한국적 신학이 타파해야 할 우상을 교회중심주의라고 보았다. 셋째, 난공불락으로 알았던 기독교의 절대성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불교학자 이기영 교수, 유학자 유승국 교수, 민중신학자 안병무 교수, 강원용. 김홍도 목사, 카톨릭 토착화 신학자 심상태 신부 등과 대화를 나눌 때도. 그는 아시아인들의 종교성과 민중성(가난)을 놓치면 아시아의 신학일 수 없다면서 아시아인의 현실에 눈을 감지 않는 신학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즉, 토착화 신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변선환의 웨슬리 이해]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는 우선적으로 그의 사랑과 자비에 조화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라고 변선환은 웨슬리 신학을 이해합니다. 또한 그는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 이전에 살던 사람들조차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 밖으로 내 버려진 사람이 없다는 웨슬리의 선행은총론에 주목을 합니다. 선행은총론이란 인간 모두에게 주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새롭고도 현실적인 가능성을 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 양심, 이성 등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재적 은총의 선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 인간이란 무엇인지 선행은총으로 인하여 하나님에게로 행할 수 있습니다. 유한이 무한을 품을 수 있다는 웨슬리의 보편적 인간론은 그로 하여금 세상의 휴머니스트들, 오늘의 선한 사마리아인들과의 열려진 대화를 가능케 하였습니다.

?[변선환의 기독론, 구원론] 변선환은 기독론과 구원론을 현실에서 다루려 합니다. 종교의 다양성 속에 존재하는 선교의 이상은 철저하게 각 개인의 인간화를 지향하는 실존적 자각과 연관되어 있으며, 그가 바라보는 전통적인 선교의 미래는 암울하다 못해 가치가 없는 것으로 봅니다. 즉, 선교가 개종으로 일어나서는 안되며 사실 개종을 통해서 인류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뭉치게 된다는 이상은 불가능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변선환은 기독론을 상징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의 기독론의 전개 방법은 기존의 서구의 전통적인 기독론을 그 시대와 역사의 한계로 '상황화'시키고 정통 기독론을 상대화 시키는 것을 통하여 한국 고유의 기독론이 나올 수 있는 것이라 설명합니다. 즉, 지금까지의 서구 기독론이 형성되어 왔을 때 가졌던 문화의 숨어있는 해석학적 기능과 같은 동양적 기능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변선환은 기독론의 특성은 현재 역사적 기독교의 중심인 전통 기독론을 해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동양적 기독론을 문학작품으로 여기려는 그의 미학적 태도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변선환의 신학적 뿌리인 종교다원주의] 역사적이며 현실적인 예수를 주장하기보다는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로고스로서의 그리스도를 강조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상징적인 관점에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힌두교의 신학화를 꾀한 파니카는 힌두교의 이쉬바라를 절대자 브라만의 계시자로 보는 동시에 이를 힌두교안의 감추어진 무명의 그리스도로 봅니다. 힌두교의 이쉬바라가 보편적 로고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동일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변선환은 이러한 종교신학을 넘어서서 나아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파니카가 힌두교가 기독교의 예비적 단계로 보고 힌두교가 기독교에서 완성에 이른다고 하는 생각을 비판하였습니다. 변선환은 기독교 신학 내에 부정 신학적 전통이 존재하듯이 힌두교 자체에도 부정적 전통이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변선환을 보는 나의 견해==========================================

변선환의 자유주의 신학, 종교다원주의, 토착화 신학은 이단 사상이라고 하여 종교 재판에서 기소를 받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는 이 같은 결과를 반박하며, 자신의 신학이 지닌 필요성과 정당성을 주장하였습니다. "헬라 철학이나 독일 철학을 사용하여 만든 서구 신학은 혼합주의가 아니고, 동양 철학의 범주를 가지고 복음을 재해석한 모든 아시아 신학은 아시아적 혼합주의라고 이유를 본인은 전혀 알 길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복음을 아시아의 심성에 울림 하는 아시아 종교나 아시아 혁명의 새 언어를 가지고 설명하는 우리 아시아 신학을 개발할 때, 아시아 교회는 독립 신학의 바벨론 포수에서 벗어나서 비서구화 된 아시아 기독교인의 주체성을 찾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초기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변선환은 서구 신학의 영향 아래에 있다가 점차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하면서 자신의 신학을 정립해 갔습니다. 국내 신학교에서 서구 신학을 소개받은 그는 미국, 스위스 등으로 유학하면서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고, 그 결과 아시아의 종교에 관심을 갖고, 불교와의 대화에 주력하다가 1980년대 이르러 다른 종교와의 개방과 대화를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를 제창하게 된 것입니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어떤 이들은 자신의 구원은 뒤로한 채 마지막 한사람까지 지옥에 내보낸 뒤 가장 마지막에 지옥문을 나서겠다는 불교의 지장보살의 서원을 들어 자신과 타자, 기독교와 타 종교, 선과 악 등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나눠 다른 쪽을 지옥으로 내쳐버리는 기독교의 한계에 절망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변선환은 당시의 기독교의 모난 부분의 현실을 보고, 잘못 된 부분을 종교다원주의와 토속화 신학으로 해결 방법으로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변선환에 문제를 바로 보고 시정하여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 것은 높이 평가 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론적인 면에서 잘못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변선환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구원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인데, 그것은 요한복음 14장 6절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인한 주장으로 18살 때부터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학 공부를 하였으며, 유명한 미국의 신학교를 유학한 사람으로 말씀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이 없던 나라에 복음이 전파될 때는 많은 어려움이 분명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복음에 근본을 잃어버리고 포교를 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어리석은 행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확신합니다.

현재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기독교인들 또한 이 같은 과제를 앉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고 하였습니다. 보통 지혜롭지 않고서는 우리가 복음에 근본을 잃어버리고 사탄에 밥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완벽하게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근본을 버리는 그런 신학과 전도, 예배, 기도 등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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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신선| 원글보기

"동성커플엔 안팔아" 美웨딩케이크 사건 파장 일파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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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동성커플 웨딩케이크 제작을 거부한 제과점 주인이 차별금지법 위반 혐의로 고소당해 미국 대법원이 이 사건을 심리하기로 했다.ⓒ연합뉴스 

 

종교적 신념 때문에 동성애에 반대하는 미국의 한 제과점 주인이 웨딩케이크 주문을 거절한 사건이 미국 연방대법원으로 넘겨질 전망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국 대법원은 제과점 주인 잭 필립스가 콜로라도주에서 차별금지법 위반 혐의로 고소당한 사건을 심리하기로 했다.

 

이른바 '잭 필립스'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의 시작은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찰리 크레이그와 데이비드 멀린스 커플은 매사추세츠 주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콜라라도에서 축하파티를 열기 위해 필립스가 운영하는 '마스터피스 케이크숍'에 케이크를 주문했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인 필립스는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동성 부부를 위한 케이크는 만들 없다고 거부했다.

 

이에 크레이그 커플은 그가 콜로라도주의 차별금지법을 위반했다면서 시민활동가들과 함께 소송을 제기했다.

 

필립스는 "동성 커플에게 웨딩케이크를 만들어주는 것은 자신의 종교의 자유와 '예술가'로서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콜로라도주 1심 법원은 종교의 자유가 차별금지법 아래서 동성 부부에 대한 보호에 우선할 수 없다며 크레이그 커플의 손을 들어줬다. 필립스가 항소했지만, 항소법원은 2015년에도 유죄판결을 내렸다.

 

항소법원은 필립스에게 동성결혼 반대를 포함, 종교적 신념을 지킬 자유는 있지만 누군가에게 법을 지키라는 요구가 동의하지 않는 것에 대해 억지로 공개지지 의사를 꼭 밝히라는 것은 아니라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또 대중을 상대로 하는 사업에서 성적 취향을 근거로 고객을 임의로 골라 대응하는 것은 안된다고 명시했다.  

 

대법원 판결은 내년께 나올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는 대법원 판결이 이른바 '문화 전쟁'에서 뜨거운 논쟁을 재현할 것으로 예측했다.

 

멀린스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 소송은 케이크 그 이상의 것"이라며 "업체는 동성애자의 존재와 동성애를 이유로 차별하거나 법률을 위반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최근 몇 년간 동성 부부에게 서비스를 거부한 업체를 둘러싼 유사한 소송이 잇따르고 있다. 

 

김주련 ⓒ 데일리굿뉴스

가져온 곳: USA 아멘넷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해설

6장 인간의 타락과 죄의 형벌

 

고든 H.클라크

 

[1항] 우리의 시조들은 사탄의 간계와 시험에 유혹을 받아 금지된 실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범한 이 죄를 그의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을 따라 기쁘게 허용하셨는데 이는 그것을 명령하시어 그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로 이미 계획하셨기 때문이다. 3;13 고후11:3 롬11:32

 

[2항] 이 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본래의 의를 잃게 되고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죄로 죽게 되었고 영과 육의 모든 기능들과 기관들이 전적으로 더럽혀지고 말았다. 3:6~8 전12:29 롬3:23 창2:17 롬5:12 엡2:1 창6:5 렘17:9 롬3:10~18 딛1:15

 

6장[1]~[2]의 요점

 

1. 인류의 시조는 금단의 실과를 먹음으로 범죄(불순종)하였다. 이 최초는 죄는 예정되어 있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2. 그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시조들은 ①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게 되고 ②그의 진노와 저주를 받게 되었으며 ③전적 부패하게 되었다. 

3. 창세기 3장의 기록은 그 성격에 있어서 상징적이거나 신화적이 아니며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요즘 종교적인 간행물들을 보면 정치적인 기사들은 가득 차 있으나 성경 해석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너무나도 엄청나게 무식하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모든 교리들을 힘차게 선포할 필요가 있다.

 

6장에서 죄의 교리를 읽어 볼 때 다른 교리들에 비해서 더욱 힘차게 이 교리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다. 이러한 생각은 좀 가장된 것일지 모르겠으나 본 장이 오늘의 무감각한 세대에 대한 적절한 내용을 많이 포함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1항]에 보면 우리의 시조는 금지된 과실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범한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브를 살해하지 말라고 금하시는 대신 어떤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금하심으로써 그를 시험하셨는가? 어떤 경건한 사람들은 그러한 질문은 천박하고 경건치 못한 것이라고 혹평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아주 중대한 질문이다. 또한 실제적으로 교육적인 것이라 믿는다. 아담은 본능적인 애정으로 말미암아 이브를 살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의 순종은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하여 된 것이라고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아담이 금지된 실과를 먹기를 거절했다고 하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 그 유일한 동기 이었을 수 있다. 하나님은 쓸데없는 문제들로 복잡하게 하지 않고서 단순한 순종을 시험하셨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는 정상을 참작해 줄 만한 것도 없는 불순종인 것이다.

 

‘죄’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중요하다. 개별적인 죄들을 알기 위해서는 이 지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죄들을 피하려는 노력을 전혀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또한 제시된 치유책(治癒策)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죄의 본질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가 죄의 결과들을 소멸시킬 수가 있는가? 아니면 불교가 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그러한 종교들은 그들이 싸우려고 하는 그 대상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면, 그들은 성공할 것 같지가 않다. 거듭 말하거니와, 죄에 대한 지식은 그것이 얼마나 위해(危害)한 것인가를 정확하게 평가하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 하다. 여러 종교들과 심지어 기독교인들이라고 자처하는 여러 단체들은 죄의 위해성에 대해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어떤 종교나 단체의 경우는 죄를 대수롭지 않는 것으로 보고 다른 종교나 단체는 죄를 약간 나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죄를 치명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칼비주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성경이 죄를 하나님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소교리(요리)문답』에 보면 죄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혹 어기는 것으로 되어 있다. 율법이 없이는 아무 죄도 있을 수 없다.

요한1서에 보면 죄란 불법이라고 말씀되어 있다.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죄를 모세의 율법에만 관련시켜 가지고는 이해될 수가 없다. 성경에는 율법 시대 이전에는 양심 시대가 있고 율법시대 이후에는 은혜시대가 있다는 말이 전혀 없다. 롬5:13~14에 보면 죄에 대한 형벌인 사망이 아담으로부터 모세 때까지 왕 노릇 하였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이 모세의 율법에 앞서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그것은 그렇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몇 가지 계명을 주셨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는 오늘의 세대는 1500년간의 율법 시대에 뒤이은 은혜의 시대가 아니다. 이 시대는 은혜 시대이면서 또한 율법 시대이다. 만일 율법시대가 아니라고 하면 죄가 결코 있지 않을 것이다. 몇몇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모든 죄수들까지도 무죄 상태의 완전에 이르렀을 것이다.

 

1세기 말엽과 종교 개혁시대에 십계명이 폐기되었으므로 이제는 “율법에서 자유 하기” 때문에 자기네들이 원하는 모든 악을 자유롭게 탐닉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이 유독한 형태의 반 율법주의는 오늘날 유형 교회에 크게 득세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것에 탈선된 일부 교리가 남아 있어서 복음을 가리우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롬7:6) 라는 문구는 “율법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로 번역했어야 좋았을 것이다. 그 문구의 의미는, 구속 받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율법의 형벌을 면하게 된다는 것이지, 하나님의 명령들을 무시하고서 죄악 된 생활을 살아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요점은 반 율법주의 자들이 암암리에 죄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무죄 상태의 안전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론에 의하면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죄란 전혀 있지 않기 때문에 죄가 전혀 있을 수가 없다. 존재하지 않는 율법을 아무도 범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이 같은 극단적인 형태로 반 율법주의로 인하여 지금 교회가 혼란을 당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죄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역시 필요하다. 이 같은 필요성은 복음 전도 활동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기꺼이 영접하기 전에 그는 자기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금세기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대소 전쟁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부도덕, 십대청소년의 비행, 대학생들의 성범죄, 강력범과 유혈범 그리고 폭도들에도 불구하고 구세주를 필요로 한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극소수 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자기가 비록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하늘나라에 가기에는 충분히 선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충성스런 전도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해야 한다. 좌가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말해줘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이 더 이상 이 세대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복음 전도의 골자를 빼버리는 것이 된다. 죄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함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다. 본 장(本 章)의 첫 조항에 대해 앞에서 자세하게 설명된 대로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시조 아담과 이브가 그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을 기쁘게 허용하신 것으로 말씀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용이라는 단어가 작정이라는 단어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표현이라고 말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허용은 하나님께서 죄를 반(半)만 주관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제6장이 제3장, 4장과 모순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 무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점에서는 약간의 모순을 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에서나 신적 작정교리를 부인했다고는 거의 볼 수가 없다. 허용이라는 단어를 단순히 편리한 언어상의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참으로 인간의 일들에서 사용되고 있는 대로의 허용 개념은 하나님이 전능과 주권에는 부적합하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죄를 범하도록 허용 하셨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의 죄를 미리 작정 하셨다는 것을 부인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장차 되어질 일은 무엇이 나를 미리 다 작정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인하여 요한 칼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여기서 그들(신적 작정들을 반대하는 자들)은 의지와 허용을 다시 구분하여 주장하기를 하나님께서는 불 경건한 자들의 멸망을 허용하시나 그것을 바라지는 않으신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신 것에 대해 그것이 그의 뜻이라고 하는 이유 외에 무슨 다른 이유가 또 있을 수 있겠는가?” (기독교 강요, 3권 23장8 - “하나님의 뜻과 허용의 구별이 없음 참조 2권 4장3 – “사람의 일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 이것으로 충분한 대답이 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제4장에는 인간이 의롭게 창도되었다고 말씀되어 있었으나 본 장에는 우리의 첫 조상들이 범죄 했다고 덧붙여져 있다. 또한 이 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그들의 본래의 의(義)를 잃게 되고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죄로 죽게 되었고 영과 육의 모든 기능과 기관들이 전적으로 이제 더럽혀지고 말았다고 말씀되어 있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주장하기를 인간은 적극적 의의 상태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립상태로 창조되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에게 의(義)의 특별한 은사를 주셨는데 아담이 범죄 했을 때 그는 그 특별한 은사를 잃고서 그가 창조된 때의 중립상태로 되돌아 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로마교회에 따르면 인간의 현재 상태는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과 신앙 고백서에는 인간은 그가 창조된 때의 상태 이하로 전락 되었고 지금은 그의 모든 기능과 기관들이 전적으로 더럽혀져 있다고 말씀되어 있다.

 

현재 주의자들은 로마교회들 보다는 더욱 나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인류가 타락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상향(上向)의 진화론적 타락(upward’ evolutionary fall)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후 줄곧 급격한 진보를 해 왔었다는 것이다.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는 지성에 남아 있는 적은 악은 얼마 안 가서 없어질 것이라고 예언하여 현재주의 적인 설교의 표준을 정해 놓았다. 많은 책들이 저술되었으나 그것들은 유토피아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라는 약을 필요로 하는 부도덕한 사회에 사는 도덕적인 인간을 주제로 한 것들이었다. 목회자들은 인간의 완전성에 관하여 상세히 부연했다. 그리고 1914년 여름에는 어떤 대학 총장이 장로교회 장로인 사람이 이제는 더 이상 있지 않을 것이라는 증명하는 책을 거의 마무리 지어 출판하려고 한 일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을 잊고 있었다.

 

이제 40여 년이 지난 오늘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전체주의 국가들의 잔학상을 인하여 이런 형태의 어리석은 신념은 뿌리째 뒤 흔들리고 말았다. 이제 신정통주의 신학이 인간에게 그릇된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어떤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그들의 견해는 성경과 일치하는가? 그들이 애매모호하게 뒤섞어 사용하고 있는 몇 개 안 되는 성경 구절들과 많은 난해한 술어는 인간이 죄로 죽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즉 “인간이 전혀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없고, 행할 능력도 없고, 선한 것이 그 속에 없으며 전적으로 악을 행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신정통주의 신학은 아담의 죄의 죄책이 그의 후손에게 전가 되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담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재판 받을 때 우리의 대표자가 아니었고 다만 아담은 비역사적인 신화적 인물(unhistorical myth)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신정통주의 자들은 뻔뻔스럽게도 주장하기를 우리보다는 자기네들이 종교 개혁자들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읽어 보아야 할 줄로 안다.

 

우리 또한『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힘차게 전해야 한다. 로마 교회와 현대주의자들과 신정통주의자들이 성경의 교훈들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성경을 신봉한다고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진리에서 크게 탈선한 사람들도 있다.

어떤 기독교 대학에서 인간은 죄인이요 악한 길에 있으며 죄로 병들어 있다고 가르친 성경 교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 교수는 구원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구원은 약국에 있는 약과 같다고 했다. 그래서 병든 자는 친히 병든 몸을 이끌고 약국으로 가서 약을 복용하면 낫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기독교 대학의 교수단 중에는 확실한 장로교인도 있었다. 그는『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준하여 가르쳤다. 결국 학생들은 이 두 신학이 뚜렷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학교 총장은 그 장로교인 교수를 해직시켰다.

성경과『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인간이 죄로 다만 병들어 있다고 하지 않고 죄로 죽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구원은 약으로 비교되기 보다는 부활과 비교된다는 것도 가르치고 있다.

 

[3항] 그들은 온 인류의 시조이기 때문에 그들이 범한 이 같은 죄책이 그들의 모든 후손들에게 전가되었고, 또한 그 죄로 인하여 같은 죽음과 부패한 성품이 전달되었는데 보통의 출생법에 의하여 태어나는 그들의 모든 후손들에게 유전되었다.

1:27,28 창2:16,17 창3:16,17 행17:26 롬5:12 롬5:15~19 고전15:21,22,45,49 시5:15 창5:3 욥14:4 욥15:14

 

[4항] 이 원부패로 말미암아 우리는 전혀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없고 행할 능력도 없고 선한 것이 그 속에 없으며 전적으로 악을 행하는 성향이 있으므로 이 원부패로부터 모든 실제적인 범죄들이 나온다.

5:6, 7장 롬8:7 골1:21 창6:5 창8:21 롬3:10~12 약1:14,15 엡2:2,3 마15:19

 

6장 [3]~[4]의 요점

 

1. 인간은 죄와 부패성의 원인은 인류의 대표성을 가진 그 시조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죄와 부패성이 전가 되었기 때문이다.  

2. 그 죄와 부패 상태의 결과로 모든 실제적인 범죄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3항]에는 두 가지의 중심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아담의 처음 지은 죄의 책임을 그의 모든 후손에게 전가시키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만은 예외이다. 둘째는 아담의 부패한 성품이 바로 그 개인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먼저 아담은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 했을 때 한 개인의 신분으로 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의 후손들의 대표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롬12:12~21을 주의 깊게 연구해야 할 것이다. 유의할 것은 한 사람의 한 가지 행동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점이다. 당신과 나는 우리가 죄들을 범한 것 때문에 죄인들인 것이 아니다. 적어도 처음 죄를 범한 경우에는 더욱 죄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대표가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범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죄책이 있는 것이다. 특별히 유의할 것은 로마서 5장에 한 사람의 한 가지 행동이 얼마나 강조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죄책을 우리에게 전가시키신다. 이 전가(傳家)는 롬5:13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고 그 부분(롬5:12~21) 전체를 통해 함축되어 있으며 특별히 19절에는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라고 말씀되어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 로마서 5장에만 일일 하게 죄의 전가 사상이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다. 로마서 4장에도 전가사상이 가득차 있다. 6,8,11,23,24절 등은 영어로 ‘전가(imputation)’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고, 3,4,5,10절 등은 헬라어로 같은 단어를 포함하고 있다. 성구사전을 보면 그와 같은 단어와 그와 같은 사상이 딤후4:16, 고후5:19, 몬18과 그 밖의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이 성구들 중에는 어떤 것은 죄의 전가를 어떤 것은 의의 전가를 말하고 있고 어떤 것은 인간적인 의무와 관련하여 그 사상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전가의 사상을 예시하고 있다. 비평가들은 불평하기를『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작성자들이 17세기의 지적(知的) 분위기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한 과장된 개념들을 미리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모든 것이 정확한 법률 용어로 표현되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 작성자들은 그 같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의 입장을 명확하게 깨닫지 못했으며 그래서 이같이 난삽한 어휘를 사용하여 왜곡시켰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17세기가 많은 혹은 모든 다른 세기들보다 더욱 법 정신이 강했던 것으로 볼 수도 없을뿐더러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신앙 고백서의 작성자들이 율법과 전가 사상 전체를 통해서 발견해냈다는 점이다. 정직한 주석가라면 그것을 아마 놓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어떤 신학자들의 경우 그들은 전가를 참 종교에는 아무 필요가 없는 일종의 부기(簿記 = book- keeping)로 본다. 또 다른 어떤 신학자들의 경우 죄책이 전가 된다고 하는 대표 원리의 개념은 전적으로 부도덕한 것처럼 생각되고 있다. 핸드리 박사는 주장하기를 “’을’이라는 사람이 먼 곳에서 오래 전에 지은 범죄 행위를 인하여 ‘갑’이라는 개인이 그 ‘을’의 죄책을 뒤집어 쓴다고 하는 것은 명백히 불합리하다.” (George S. Hendry, The Westminster Confession for Today, p.81)고 하였다. 그러나 정직한 부기가 종교에 아무 필요 없다고 불평하던 사람들이 어찌하여 정직하지 못한 부기를 옹호하는가?

전가가 지나치게 법적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어찌하여 불법적인 어떤 것을 더 좋아하는가? 그리고 만일 저가 교리가 부도덕한 것이라고 비난할 것 같으면, 대표원리에 관해서 무엇이 부도덕한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무엇을 두고 부도덕하다는 것인지 물어보자. 금단의 과실을 따먹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금했다고 하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부도덕하고 죄악 된 것이었다. 살인이나 간음이 그릇된 것이라는 것에 대한 다른 이유가 있는가? 그 이유란 옳고 그른 것을 구분 지어 놓은 하나님의 계명들 때문이 아닌가? 인간의 마음속에는 순종과 불순종의 경우 양자 모두 상반되거나 이질적인 동기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해 주는 데는 하나님의 명령 외에 다른 무엇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만일 하나님께서 주권적이시고 그가 대표의 원리를 인정하셨다고 하면 대표 원리와 전가 개념에는 아무 부도덕한 것이 없는 것이다.

 

전가 개념에 대하여 [3항]에 보면 자신의 죄의 결과로 아담에게 임한 부패(腐敗)와 악화(惡化)가 유전에 의하여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으로 말씀되어 있다. 여기서 아담과 우리 자신 사이의 차이점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담은 먼저 자의(恣意)로 죄를 범하였고 그것의 결과와 형벌로 그의 성품이 부패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부패가 자의적인 범죄보다 앞선다. 우리는 의롭게 창조되지 않았다. 우리는 태어날 때 부패한 성품을 타고났으며 그 성품으로부터 우리의 자의적인 범죄들이 자연히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앞서의 전가의 개념에 대한 더한층 빛을 던져준다. 부패한 성품은 일종의 형벌이다.

 

아담이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벌하여 그이 성품을 부패케 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태어날 때 이미 부패해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부패한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이 형벌은 무엇에 대한 형벌인가? 그것은 우리의 자의적인 범죄에 대한 형벌일 리가 없다. 태어날 때에는 우리 자신의 악한 행위를 우리가 범한 일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껏 선악 간에 아무것도 전혀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벌을 받게 되는 그 죄는 아담의 죄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아담의 죄의 책임이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다. 핸들 박사와 같은 신학자들은 “전가 개념 없이는 우리가 태어날 때 왜 이미 부패해 있는가를 설명할 수가 없다. 왜 우리가 죄악 된 상태로 출생하는가를 설명해 주는 것은 전가 개념이다”라고 했다.

 

어떤 신학자들과 어떤 철학자들은 주장하기를 우리가 중립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르치기를 우리는 태어날 때 아무 도덕적 성품을 가진 것이 없다고 했다. 우리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또한 영국의 철학자 로크(Locke)도 주장하기를 우리의 도덕률을 포함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이 경험에서 나온다고 했다. 철학과 쟁론하는 것은 복잡하고 여기에서는 적합하지도 않다. 그러나 사람이 태어날 때 이미 형성된 성품을 가지고 나온다는 것이 결코 터무니 없는 주장이 아님은 개와 고양이는 만나기만 하면 원래부터 갖고 있는 반감을 인하여 서로 싸운다는 사실로 곧 알 수가 있다. 그것들은 그러한 반감을 경험을 통해서 배우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다. 아무튼 생리학과 철학에서 그 문제가 어떠하든지 간에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우리는 나면서부터 죄인들이라고 한다.

 

[4항]에는 이 부패가 우리의 전 성품에 퍼져 있다고 진술되어 있다. 죄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지 않는 기능이나 기관은 아무것도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인간의 지성은 죄악 되나 그의 감정은 순전하다고 하면 그것은 틀린 말이다. 그 말을 바꾸어서 말해도 역시 틀린 말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해져 있는 것이다. 한두 가지 실례를 보면 이 점이 분명해질 것이다. 주제가 죄와 부패에 관한 것이니만큼 거기에 부합되는 실례가 좋을 것이다. 몇 명의 소년들이 주사위 던지기 노름을 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한 녀석이 주사위를 굴리니 7이 나왔다. 운이 좋은 것이다. 그는 다시 주워 가지고 두 번째로 굴렸다. 7이 나왔다. 놀랄만한 것이다. 그는 다시 주워 가지고 세 번째로 구렸다. 또 7이 나왔다. 그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철학자들의 형안(炯眼)을 가진 소년들이 어떤 원인으로 해서 그 같은 일치된 결과가 나올 수 있게 되었을까를 설명코자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천재적인 솜씨를 발휘하여 그들은 결론짓기를 그 원인이 주사위 내부에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성품도 그와 마찬가지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죄가 빈민굴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부잣집 자식들이 야만적인 행동을 탐닉하는가? 그리고 어찌하여 부유층 사람들이 공금을 횡령하는가? 또는 만일 죄가 열대 지방의 질병이라고 하면 어찌하여 캐나다 사람들과 시베리아 사람들은 완전하지 않는가? 죄에는 지리적, 사회적, 또는 지식적인 경계가 전혀 없다.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릇 행한다면 우리에게 주사위 놀이를 하는 꼬마 녀석들의 철학적 통찰력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그 원인이 사람들 내부에 있다고 우리는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본래적으로 죄악 된 상태로 태어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대답하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번했다고 할지라도 몇 차례 범한 것을 가지고 인간을 본래부터 죄악 되고 전적으로 부패해 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할지 모른다. 

 

심지어 흉악범들일지라도 매일 살인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토요일 밤에만 그랬다. 그리고 존경할 만한 사람들의 경우는 악한 행실보다는 선한 행실을 더 많이 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몇 안 되는 악한 행실이 악한 성품의 증거가 된다고 하면, 많은 선한 행실은 훨씬 더 선한 성품에 대한 더 좋은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대답은 핵심을 놓친 것이다. 인간의 선행과 악행의 비율이 문제가 되는 것 아니다. 잠깐 그 비율에 대해서 말해 보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문제되는 것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간단히 말해서 이렇다. 즉 인간의 본성은 그 자체가 저절로 무죄성의 경향이 있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만한가, 아니면 그렇지 않는가? 문제는 더욱 분명하게 해서 말하자면 사람은 저절로 무죄성의 경향이 있으며,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만한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무죄성은 단 몇 가지의 선행을 필요로 하거나, 심지어 많은 선행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무죄성에는 악한 행실들이 단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율은 문제의 핵심을 놓친 것이다. 무죄성은 완전을 요구한다. 그래도 인간의 성품이 악한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죄악의 원인은 내부에 있다. 인간은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실례를 들어보자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유럽 여행을 간다고 생각하자. 제트 여객기로 여섯 시간 만에 갈 수도 있었으나 물 구경을 하고 싶은 나머지 느린 화물선을 탔다고 하자. 매일 매일 태양이 빛난 까닭에 갑판 의자에 앉아 시원한 바닷바람을 즐겼다. 그런데 열 하루 째 날에 폭풍이 일어났다. 광풍이었다. 배가 깨어져 가라앉아 내렸다. 우리는 구명선을 타고 파도를 따라 요동하면서 우리가 탔던 그 배가 마지막으로 침몰되는 순간을 보았다고 하자. 그때 바닷물을 한입 마신 채 슬프게 말하길 얼마나 좋은 배였던가 할 것이다. 그 배는 유쾌하게 열흘 동안은 잘 항해했었는데 어쩌다가 단 한 번 가라앉고 말았다. 그것의 좋은 점은 그것의 나쁜 점에 비해 열 배나 더했다.

 

이렇듯 비율에 관한 실례를 볼 때 인간의 본성을 비율로 평가하려는 것은 핵심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인즉 사람들이 누리는 좋은 날들은 악한 날들에 비해 수적으로 열 배가 되지 않는다. 그 비율은 훨씬 낮다. 불신자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을 하나님의 계명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할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불신자는 우상 섬기는 죄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불신자일지라도 그가 완고하지만 않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을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할 것으로 본다. 그런데 자문자답해 보자 우리가 그 계명을 얼마나 많이 순종하였는가? 열흘 가운데 하루라도 순종하는가? 솔직히 말해서 한 날도 제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있다고 우리는 고백해야만 될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도 잡념에 사로잡힌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비율은 우리에게 불리하다. 죄는 항상 전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났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이처럼 큰 구원이 필요한 것이다.

 

[5항] 이러한 본성의 부패는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중생한 사람들 안에도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부패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용서되며 억제되고 있다 할지라도 그 자체와 그것에서 비롯되는 모든 행동들을 참으로 그리고 완전히 죄이다.

요일1:8,10 롬7:14,17,18,23 약3:2 잠20:9 전7:20 롬7:5,7,8,25 갈5:17

 

[6항] 원죄와 본죄 등 모든 죄는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에 대한 위반이요, 그것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그것 자체의 성질 때문에 죄인에게 죄책을 가져다 준다. 그 죄책으로 말미암은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를 받게 되며 그리하여 사망을 당하되 동시에 영적 육체적 그리고 영원한 모든 불행들을 아울러 당하게 되었다.

요일3:4 롬2:15 롬3:9,19 엡2:3 갈3:10 롬6:23 엡4:18 롬8:22 애3:39 마25:41 살후1:9

 

6장 [5]~[6]의 요점

 

1. 죄와 부패성의 중생한 신자들 안에도 남아 있다. 그러므로 그 죄와 부패성의 산물은 신자의 경우일지라도 죄이다.  

2. 원죄와 본죄(자범죄) 등 모든 죄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위반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다음 장인 제7장에서 구원의 대계획을 서술하기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죄의 교리를 막음하기 전에 [5항]에는 중생한 사람의 죄악성에 관한 진술이 있다. [5항]의 요점은 중생하더라도 곧 죄가 근절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경건하다고 할지라도, 그는 결코 이 세상에서 죄 없는 완전을 이룰 수 없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죄 없는 완전히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어떤 이들은 심지어 거기에 이르렀다고까지 주장한다. 당신은 지금까지 성결교회 단체들과 접촉해 본 일이 있는가? 승리 생활 운동(victorious life movement)에 대해서 들어 본 일이 있는가? “완성되고 즉각적인 완전” 이라는 어구가 생각나는가? 4판(版)에 걸쳐서 널리 읽혀진 한 권의 책(Chester Wilkivs , A Handbook for Personal Soul-Winning : Light and Hope Publication, 1950)이 있는데 거기 보면 다음과 같이 가르쳐져 있다.

 

은혜 가운데서 성장하는 것은 씻는 것도 아니요 깨끗하게 하는 과정도 아니다. 은혜 가운데서 성장하는 것은 자연적인 과정도 아니다. 성화는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사역이다. 완전한 성화는 체험하여 얻어지는 어떤 것이다. 죄에서 떠나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일은 결코 없다. 정도의 차이라든지 점진적인 단계란 전혀 없다. 오직 성령의 사역은 시작할 때 완성되어 있고, 시간적으로는 즉각적인 것이다. (p212~214)

 

그런데 완전 무죄하다고 주장한 사람이면 누구이든 극단적인 위선적인 버림받은 자임에 틀림없을 것으로 처음에는 생각할 수도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기독교 대학 교수는 그가 26년 동안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 사람은 흉악한 위선자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경건한 노신사이었고, 다른 교회 회원들과 비교해 보면 그는 참으로 아주 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 사람이나 그 밖의 다른 사람을 성경의 표준과 비교해 보게 되면, 이와는 다르게 말할 것임에 틀림없다.

 

성결교회 단체들(holiness groups)을 크게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들의 불충분한 견해 때문이다. 그들은 죄의 본질과 정의에 대해서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죄를 정의할 때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 하지 않고 대신 일반적으로 지방 풍속에 의하여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거나 아니면 경건한 육감(肉感)(pious hunches)을 따르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 딸이 프랑스에 있는 어떤 성경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여학생들이 머리를 어떻게 손질해야 하는가에 대한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성결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사회 또는 교회의 관례들과 대치할 뿐만 아니라, 자범죄와 전혀 죄가 아닌 어떤 것을 비 성경적으로 구분하기까지 한다. 윌킨스(Wilkins)씨는 “하나님과 그의 율법에 대한 고의성 있는 죄와 죄과(罪過)와 사람이 어쩌다가 범할 수 있는 실수 간에는 차이가 있다. 후자의 실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마음의 동기를 보시기 때문에 우리가 실수를 범할 때 우리를 결코 죄 있다고 하지 않으신다.”(p.214)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선 성경에는 어느 곳에도 마음과 머리가 대조되어 있지 않다. 또한 성경에는 죄와 실수가 대조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끝으로 윌킨스씨의 말에는 완전히 순결한 동기들을 사람이 가질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반대로 마음의 내면적 순결보다는 율법을 형식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울 듯싶다.

 

즉각적인 완전을 주장하는 것에 반대하여 자범죄가 죄의 유일한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주장해야 한다. 죄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데 있어서 부족한 것이다. 이 말은 곧 우리의 타고난 부패 그 자체가 죄라는 뜻이다. 죄란 행위일 뿐만 아니라 상태 또는 성품인 것이다. 성결교회 교인들은 자범죄의 이 근원을 간과해 버린 듯하다. 성결교회 단체들의 오류는 죄의 극악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로마 교회와 현재주의자들의 오류와 비슷하다. 그들에게는 죄가 오히려 표면적인 것 같다. 그래서 죄가 이 세상에서 근절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때때로 죄를 “알려진 죄(known sin)에 국한시킨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목표가 단지 알려진 죄를 피하는 데에만 있다면 우리가 율법을 모르면 모를수록 우리는 더욱더 의로워질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죄 없는 완전을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의 구원을 상실하며 그 다음에는 중생치 못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처럼 불완전한 완전이 도대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로 보건대 신앙 고백서에 정확하게 요약되어 있는 성경의 죄관이 얼마나 깊은 뜻을 지니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죄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 하는 점은 구원의 본질, 성도의 견인, 각종 자유 의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그리고 실은 교리전체를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우리는 일부분만을 아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완전한 신앙 고백서가 필요하다. 즉 신앙 고백서를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런데 성결교회 단체들이 사용하는 많은 구절들은 성경에서 인용된 것들이다. 예를 들면 요일3:6,9 (하나님께로 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 6절도 표현은 다르나 같은 뜻 – 역자 주) 은 이 세상에서 죄 없는 완전이 가능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그가 방금 앞서 요일1:8과 2:1에서 언급한 것을 이 구절들에 와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라면 무슨 뜻이 거기에 내포되어 있을 것인가? 그 구절들에는 하나님께로 서 난 자마다 아무 죄도 범치 않는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 경우에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완전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그 대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죄 없게 되지 않겠는가? 바꾸어 말하자면 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성결교회 단체들마저도 이러한 의미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 죄 없는 완전(sinless perfection)에 이를 수가 있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알고자 하면 워필드(B.B Warfield)의『완전주의(perfectionism)』를 읽기를 바란다. 본 자의 마지막 조항에는 죄에 대한 형벌은 육체적, 영원적 사망이다. 요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후계자들은 오늘날 거의 없다. “성난 하나님의 장중에 있는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은 흔히 있는 설교 제목이 아니다. 보편 구원론이 환영 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옥은 욕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신약에서 지옥에 대하여 가장 많이 말한 사람은 누구였는가? 베드로였는가? 바울이었는가? 요한이었는가? 아니다 이들 중에 아무도 아니다. 성구사전을 조사해 보라. 지옥을 가장 많이 말씀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죄의 유독성을 가장 강력하게 강조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구원을 제공하신 이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고든 H. 클라크 / 나용화 역

 

출처: ReturnBible/개혁신앙/returnbibl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하나님이 당신의 이야기를 쓰고 계신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랑’이 된다!

나서지 말고 그분이 쓰시는 대로 다 맡기고 기다려라!


주님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간증하고 싶어하신다.


하나님의 간증이 되는 삶, 얼마나 멋진 삶인가!

목소리를 거의 잃어버린 불굴의 예배자,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줄곧 당신과 함께 해오셨다.

심지어 당신이 메마른 시기를 지나는 동안에도,

당신의 인생이라는 연대표를 이용해

매력적인 이야기를 쓰시면서 늘 함께 해오셨다.

 

 

 

 

...하나님의 편지...


너는 나를 잘 모를지 모르지만 
나는 너를 너무도 잘 안다.  너의 앉고 일어섬을 알고 (시 139 : 2)
너의 모든 행위를 알며 (시 139 : 3)
너의 머리털을 다 셀 정도지 (마 10 : 29 - 31)
이는 내 형상대로 너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창 1 : 27)
너는 항상 내 안에서 살며 기동하여 있느니라 (행 17 : 28)
복중에 짓기 전에 내가 너를 알았고 (렘 1 : 4, 5)
창세 전에 너를 택하였도다 (엡 1 : 11, 12)
너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너를 위해 정한 날이 내 책에 다 기록되어 있었고 (시 139 : 15, 16)
너의 태어날 때와 살 곳을 정하였으며 (행 17 : 26)
너를 신묘막측하게 만들어 (시 139 : 14)
어미의 모태에서 지었고 (시 139 : 13)
내 너를 취하여 태어나게 하였다 (시 71 : 6)
나를 모르는 자들이 나를 잘못 알렸다만 (요 8 : 41, 44)
나는 너와 함께 있는 사랑이니라 (요일 4 : 16)
이 사랑을 너에게 아낌없이 주련다 (요일 3 : 1)
너는 나의 자녀이고 나는 너의 아비니라 (요일 3 : 1)
육신의 아비가 줄 수 없는 것을 주리니 (마 7 : 11)
나는 온전한 아비니라 (마 5 : 48)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내게로부터 오나니 (약 1 : 7)
네게 있어야 할 것을 내가 아니라 (마 6 : 31, 33)
너를 향한 나의 생각은 평안이요,너의 장래에 소망을 누리는 것은
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렘 31 : 3)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조차 없구나 (시 139 : 17, 18)
나는 너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노래부르며 (습 3 : 17)
너에게 복 주기를 멈추지 아니하리니 (렘 32 : 40)
너는 나의 소유니라 (출 19 : 5)
내가 기쁨으로 너에게 복을 주며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해 너를
이땅에 심으리라(렘 32 : 41)
보아라!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구하면 나를 만나리니 (신 4 : 29)
나를 기뻐하라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리라 (시 37 : 4)
네가 소원을 두고 행하기를 원하노라 (빌 2 : 13)
네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넘치게 주리니 (엡 3 : 20)
나는 너의 위로자니라 (살후 2 : 16, 17)
모든 환란중에도 너를 위로할지니 (고후 1 : 3, 4)
너의 마음이 상할 때 내가 너를 더욱 가까이 하리라 (시 34 : 18)
양을 안은 목자같이 내가 너를 품 속에 안으리라 (사 40 : 11)
언젠가 너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고 (계 21 : 3, 4)
내가 예수를 사랑한 것 같이 너를 사랑함이라 (요 17 : 23)
예수를 통해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을 보였나니 (요 17 : 26)
예수는 나의 형상이라 (히 1 : 3)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을 보이고 (롬 8 : 31)
너의 죄를 묻지 않으며 (고후 5 : 18, 19)
너와 화목하게 하려고 그가 죽었나니 그의 죽음은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이라 (요일 4 : 10)
너의 사랑을 얻기 위해 나의 소중한 아들을 아끼지 아니했다 (롬 8 : 31, 32)
아들의 사랑을 받는 자는 나를 받는 것이요 (요일 2 : 23)
나의 사랑에서 너를 끊을 것이 없느니라 (롬 8 : 38, 39)
네가 돌아오는 날 하늘에서는 기쁨의 잔치를 열리라 (눅 15 : 7)
나는 언제나 너의 아비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나 (엡 3 : 14, 15)
너는 나의 자녀가 되기를 바라느냐? (요 1 : 12 - 13)

  -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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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은 은혜의 땅 35

"김 목사님, 아들이 마약에 빠져있는데 며칠 동안 집을 나가서 소식이 없습니다. 아들을위해서기도해주십시오."

 

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아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지금 이 시간에 로버트의 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 그의 아들이 지금 이 시간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저희들은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 간구하건대 천군 천사를 동원하시사 그 아들을 사단의 공격에서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마약의 중독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아직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데 그 아들이 하루빨리 학교로 돌아가서 학업을 무사히 마치고 대학까지 잘 진학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길을 열어 주시옵소서. 또한 이 시간에 부모를 위해 기도하오니 저들의 마음을 위로하시사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게 하시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평안을 회복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한국말로 기도했다. 물론 그가 알아들을 리 없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실 기도니까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내가 기도하는 동안 그 매니저의 어깨가 들썩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의 언어는 유한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어는 인간의 말과 사상과 문화적인 차이를 모두 초월한다. 얼마 후 로버트의 아들은 집으로 돌아와 다시 학교에 출석했다. 그는 늘 나를 볼 때마다 감사의 뜻을 전하며 계속적으로 기도해 줄 것을 당부했다. 나는 피닉스 다운타운에서 노방 전도를 시작했다. 성경책 한 권을 들고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외쳤다.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구원의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부끄러운 것도,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염려도 없었다. 내 평생에 지금처럼 구원의 확신이 이렇게 강하게 내 마음과 영혼을 사로잡았으면 죄를 범하며 낭비했던 시간을 훨씬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내는 나의 갑작스런 변화를 그저 주시하고만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며칠 동안 저러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겠지'라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아내의 마음을 알 수 있었지만 구태여 미주알 고주알 설명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누구보다도 아내의 마음을 먼저 움직여 주실 것을 나는 믿고 있었다. 그러던 아내가 서서히 내 행적에 대한 질문을 해오기 시작했다.

 

"오늘은 낮에 어디 다녀왔어요?"

 

"응, 다운타운에 잠깐 나가서 전도하고 왔지."

 

"날이 무척 더웠는데…"

 

"그래도 그늘 밑에는 괜찮더라고."

 

"전도지 같은 것은 좀 구했어왔어요?"

 

"아니, 아직…. 근데 그냥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만 해도 성령님께서 나중에 그 사람들의 영혼을 움직여 주실 거라는 확 신이 들어. 그래서 그냥 계속하고 있지."

 

"근데, 당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으니까 이렇게 하루아침에 사람이 표정부터 변한 거 아니겠어요."

 

"좋은 일,놀라운 일이 있었지. 얼마 전 새벽에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이 나를 다시 만져주시고 회복시켜주는 영적인 체험을 아주 구체적으로 했어."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하나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는 그날 아내에게 결혼생활 18년 만에 처음으로 삼청교육대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마음속 깊은 곳의 상처를 아내에게 털어놓았을 때 아내는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한동안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아니,당신이 그런 끔찍한 삼청교육대에 끌려갔었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곳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는 이야기 가 정말 사실이에요?"

 

"그래, 모두 사실이야. 하지만 그동안 삼청교육대에 대해서 말을 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었어. 오히려 나를 더 이상한 사람 으로 보는 주위의 눈초리 때문에 내 생각 가운데 아예 없었던 일로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었지. 그렇지만 그 상처는 말을 안 한다고 없어지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나봐. 지금이라도 당신에게 당시의 일을 말하고 나니까 얼마나 속이 시원하고 좋은지 모르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속에 있던 아픔과 상처들을 다 털어놓을 걸 그랬다."

 

나는 그날 이후 삼청교육대의 관련자들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했던 마음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제는 내가 그 사람들을 직접 다시 대면하게 되더라도 예수의 사랑을 가지고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의 확신이 섰다. 세상이 확 달라 보였다. 20여 년 동안 막혀 있던 체증이 한 순간에 뚫리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성령의 뜨거운 조명이 있은 후 이번에는 삼청교육대에서 받았던 과거의 상처를 대기 중으로 드러냄으로써 과거의 악몽으로부터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변하자 세상이 덩달아 변했다. 아내가 변했고, 아이들 이 변했다. 사업장에서 고정적으로 만나던 사람들이 변했고, 길 가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표정도 변했다. 결국 내가 변할 때 세상의 모든 환경이 더불어 변화된다는 간단한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이다. 전도의 열정을 되찾으면서 마음에 가장 부담으로 다가온 것은 내 가족, 친지들에 대한 전도였다. 8남매 가운데 먼저 세상을 하직한 둘째 누님을 제외한 7남매가 모두 생존하고 있는데, 그들 가운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형제는 아무도 없었다. 먼저 둘째 형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미국에 가장 먼저 이민 와서 미국 식당을 운영하며 탄탄한 재력까지 갖춘 둘째 형님은 아직까지도 내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전도를 하려면 가슴부터 떨려왔다. 물론 둘째 형님 덕분에 미국에 이민 올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어렸을 때 그렇게 천대를 당했기 때문에 둘째 형님은 가까이 가기에는 너무도 힘든 존재였다. 나이 차이도 열일곱 살이나 되고 나보다 모든 면에서 경험도 많고 배운 것도 많은 형님에게 감히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참으로 부담스러웠다. 인간적인 나약함 때문이 었지만 그런 마음의 부담을 극복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음을 강하게 먹고  충분히 기도한 후에 둘째 형님에게 전화를 했다.

 

"형님, 평안하시지요?"

 

"그래, 너는 좀 어떠냐. 애리조나는 많이 덥다고 하던데."

 

"지낼 만합니다. 형님, 그런데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그럭저럭 괜찮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동성애자 퍼레이드와 교회, 그리고 예수님






신촌거리에서 동성애자들이 퍼레이드를 했다.


그분들을 반대하는 보수기독교인들에 맞서

그분들이 내건 구호를 보았다.


"예수님은 누구나 사랑하신다.

동성애를 싫어하는 자들마저 사랑하신다."

(Jesus loves everyone, even homophobes.)


"사랑은 미움을 정복한다."

(love conquers hate)


정말, 예수님은 동성애자들도 사랑하시는가?


물론이다.

예수님은 동성애자들도 사랑하신다.


살인자였던 바울도 사랑하셨고,

거짓말쟁이였던 베드로도 사랑하셨고,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인도,

그리고 나 같은 썩은 죄인도 사랑하신다.


동성애자인 당신도 사랑하신다.

그렇다.

주님은 동성애자들을 사랑하신다.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


하지만, 그것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

거리로 나올 필요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예수님이 살인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살인 축제를 하는 경우를 보았는가?


거짓말 하는 자, 간음한 자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거짓말 잘하기 대회나,

간음 축제를 벌이는 경우를 보았는가?


그것은 괴악한 일이다.


"사랑은 미움을 정복한다."


그래서 그 어떤 사랑도,

그 어떤 미움도 정복하는가?


그렇지 않다.


동성애자이든, 동성애자가 아니든,

똑같이 깨달아야 한다.

무엇에 대한 사랑인지,

무엇에 대한 미움인지를 알아야 한다.


사랑해서는 안 될 것이 있고,

또 반드시 미워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폐암에 걸린 사람이, 술 담배를 사랑하고,

그런 사랑이 암을 미워하는 그의 미움을 정복한다면,

그것은 곧 그에게 죽음을 의미한다.


무조건

'어떤 사랑이든 어떤 미움도 정복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러므로 자신과 남을 속이는 말이다.


내가 암을 고칠 수 없다고 해서,

암이 정상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동성애를 왜곡된 사랑, 뒤바뀐 사랑으로 정의한다.


그것은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당신이 의사이신 하나님을 앎으로,

그분에게 고침받기를 그분이 간절히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주님은 동성애자들을 사랑하신다.

그래서 동성애를 치유하시기 원하신다.


그렇다.

그분의 사랑은,

옳은 것을 싫어하는 당신의 미움을 정복한다.


그러므로 그분의 사랑을 받아 치유되기를,

의를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교회는 이제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할 때이다.


교회는 과연 주님처럼, 동성애자들을 사랑하고,

동성애를 치유하도록 도울 수 있을까?


주님의 사랑으로 '잘못된 미움'을 정복할 수 있을까?


죄인들의 죄 없는 친구인 예수님...


이제 이 땅의 교회는

얼마나 이런 예수님을 얼마나 닮을 수 있을지

커다란 도전에 직면했다.



출처: 채영삼 목사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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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은 은혜의 땅 34

심령의 변화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한순간에 온다. 이러한 변화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 외엔 표현할 방법이 없다. 사도행전 9장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회심사건이 그랬고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신학자였던 성 어거스틴의 회심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인해 한순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4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 성 어거스틴은 성직자가 되기에는 너무도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육신의 쾌락에 빠져 향락을 즐기고 있는 동안 16세의 나이에 이미 사생아 아들을 낳았고, 한동안 마니교에 심취해서 우상숭배를 열심히 했고, 점성술에 심취했던 사람이었다.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와 권고로 완전히 세상에 빠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온전한 신앙생활도 하지 못한 채 간간히 육체적인 쾌락에 온몸을 불사르곤 했던 어거스틴은 그의 나이 32세가 되던 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어느 날 정원을 산책하고 있던 중에 그는 옆집 아이들이 장난하며 떠드는 소음 가운데 "집어서 읽어라"라는 말을 들었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고 무시하고 계속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몇 번 또 같은 음성을 들은 후 집으로 뛰어 들어가서 서재에 놓여 있는 성경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때 어거스틴이 읽은 성경 말씀이 바로 로마서 13장 13절이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어거스틴은 이 말씀을 읽은 후 육신의 죄악 가운데 사로잡혀 있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철저한 회개를 거쳐 심령의 변화가 경험한 후 당대에 가장 영성이 뛰어난, 그리고 16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심령의 변화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에 의해 한순간에 일어 난다. 심령의 변화는 어거스틴에게도 그렇게 역사했고 수세기가 지난 오늘날 나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했다. 그래서 악한 영에 눌려서 물질 중심의 생각에 사로잡힌 채 황량하게 메말라 가고 있던 나의 심령을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변화시켜 버린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자녀들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영혼을 위한 지속적인 중보기도가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영혼을 향해 역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장모님의 지속적인 기도가 가장 큰 힘의 근원이었다. 올해 96세가 되신 장모님은 기도의 사람이다. 우리가 결혼한 이후 지난 18년 동안 장모님은 단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 가정을 위해서, 그리고 부족하지만 주의 종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나를 위해서 불철주야로 기도해 주셨다. 어거스틴에게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중보기도가 있었다면 내게는 장모님의 중보 기도가 있었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장모님은 내가 목사 안수를 받은 이후 단 한 번도 내게 말을 내린 적이 없다. 전화통화를 할 때도 늘 존댓말을 사용하셨고 또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말씀을 잊지 않았다. 처음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장모님이 나를 위해 늘 기도해 주시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마음의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심지어 장모님은 자신의 친딸인 내 아내에게도 주의 종의 아내가 된 이후, 즉 사모가 된 이후에는 반말을 하지 않으신다. 주의 종에 대한 철저한 존경과 신뢰, 그리고 영적 섬김의 원리를 확실하게 일상 생활 가운데 실천하시는 분이 었다. 그래서 피닉스 사막은 내게 은혜의 땅이다. 우리 가족이 피닉스로 떠날 때 다른 사람들은 그 덥고 건조한 사막 땅에 뭐 하러 이사 가느냐며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하 나님이 왜 우리 가족을 피닉스로 보내셨는지 그 뜻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사막은 생명이 살지 못하는 황량한 땅으로 인식되어 있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 사막은 죽었던 생명이 다시 활력을 얻고 소생하는 기적의 땅, 은혜의 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극적으로 심령의 변화를 경험하고 난 후에 나는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덩달아 변화되는 것을 목격했다. 가장 확실한 변화는 내 마음을 괴롭히고 사로잡았던 걱정과 근심, 조바심과 같은 것들이 모두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내 몸 안에 있던 더러운 요소들이 장맛비에 쓰레기 쓸려 내려가듯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끔하게 청소되었다. 지속적인 두통도 그쳤고, 이런 저런 생각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불면의 고통도 사라졌다. 대인 기피증으로 여겨질 정도로 주변의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웃집에서 그만 좀 찾아오라고 할 정도로 사람들과의 만남을 즐기게 되었다. 기도할 때 방언도 다시 회복되었다. 방언 기도를 다시 시작함으로써 우선 기도 시간이 늘었고 기도의 질이 달라졌다. 나를 위한, 나의 가족을 중심으로 했던 이기적인 기도의 방향이 이제는 남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이타적인 방향으로 바뀌었다. 전도의 열정이 다시 불붙기 시작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변화였다. 미국에 와서 이민 초창기에 전도하다가 뺨을 맞을 정도로 집요하게 전도했던 그 전도의 영이 다시 회복되었다. 주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달아왔다. 그렇지만 주변에 한국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대부분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 나의 영어 실력은 단어 몇 마디 뱉어놓고 나면 모든 밑천이 다 드러나는 상황이라 내심 망설임도 있었지만 일단 전도의 발을 내딛었다. 아내가 운영하고 있는 가게 옆에 큰 마켓이 있는데 매일 아침 그곳에 찾아가서 우선 종업원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Are you happy, today? Believe in Jesus. He will give you a real happiness. I will pray for you"

 

처음에는 조금 맛이 간 이상한 동양 사람으로 생각했던 종업원들이 시간이 지나가면서 반응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마켓을 찾아와서 예수를 증거하며 자신들을 축복해 주는 것을 보면서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모두 호의적으로 태도가 변했다. 지금은 내가 마켓 안으로 들어가면 몇몇 종업원들은 먼저 내게 말한다.

 

"Pastor Kim, I'm happy today, and you?"

 

자신은 오늘 참 행복한데 김 목사는 어떠냐고 먼저 응수를 하는 것이다. 마켓 매니저가 하루는 나를 찾아와서 기도를 부탁하기도 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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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 교수 뉴욕세미나 “부흥을 위해 ‘비상한 기도’가 필요”

뉴욕을 장기간 방문중인 박용규 교수(총신대, 한국기독교사연구소 소장)가 6월 19일(월) 오전 뉴욕영락교회(최호섭 목사)에서 부흥 특별세미나를 인도했다. 박용규 교수는 <세계부흥운동사>를 교재로 매주 월요일 8주 연속세미나를 앞두고 19일과 25일 공개적인 부흥세미나를 인도한다. “거룩한 부흥, 성령의 부으심”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세미나에서 박용규 교수는 사도행전 2:33의 말씀과 “성령의 부으심을 부흥”이라고 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정의를 중심으로 세미나를 인도해 나갔다. 두 차례에 걸쳐 강의내용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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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유산은 부흥이다. 그런데 최근 40년이 넘도록 부흥이 임한 적이 없다. 그러니 1907년, 1920년, 1932년, 1950-53년, 1973-84년 부흥이후에는 부흥이 없었다. 평양대부흥 100주년이 되는 2007년에 우리가 기대를 많이 했다. 그런데 부흥을 외치던 사람들이 이명박 장로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올인 하는 바람에 영적인 분위기가 사라졌다. 

 

부흥을 위해 성령 부으심을 놓고 기도해야 하는데, 부흥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의문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동력을 잃어버린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은혜를 받고 부흥을 놓고 기도하자고 하는데 부흥이 임하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교인들이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교인들의 생각에 답변을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개별적로 개인들과 무관하지 않다. 사도행전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에 보면 성령충만을 다 받았다. 부흥이 임하면 공동체에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성령이 은혜가 임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기에 성경에 있는 성령의 약속들이 더 깊이 있게 내 삶에 체험되는 것이다. 그중에 하나가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이다. 성령은 공동체적으로 부흥을 주시기도 하지만 개별적으로 당신들의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섭리하시는 역할을 성령께서는 동시에 하신다. 두 개가 따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성령이 부으시면 개별적으로 성령충만을 받게 되고 성령충만을 받아서 성령의 역동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가게 되는 것이다. 이 두 개가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이 끓임 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을 영위하라고 촉구한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 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 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성령의 충만을 받아 성령 하나님과 동행해서 성령을 위해서 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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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는 1734-36년과 1740-42년 두 번의 부흥의 파장을  경험했다. 어느 날 보니 부흥이 썰물처럼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언약서명서를 받아냈다.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살아서 부흥이 떠나지 않고 오래지속하기를 원해서 그랬다. 평양대부흥운동이 1907년 1월부터 6월까지 한반도 전역에 엄청나게 일어났는데 7월부터는 어떻게 하면 부흥에 대한 조짐이 이렇게 사라질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거의 없는 것이 저는 궁금했다. 성령의 역사가 활발했다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마치 하나님이 우리가운데 부흥을 거두어 가신 것처럼 부흥이 사라졌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라고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나 부흥을 원한다고 해서 부흥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부흥이 가장 지속적으로 임했던 때는 1901-1910년으로 부흥의 계절이었다. 1903년 원산 부흥운동, 1904년 웨일즈 부흥운동, 1905년 인도 카스 부흥운동, 1906년 아주사 부흥운동,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1908년 중국 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 등 이때만큼이나 부흥의 시즌이 지속적으로 전세계적으로 연속된 적이 없다.

 

혹시 이런 부흥들이 조직적으로 연결된 것은 아닐까? 당시 공통적으로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부흥을 사모하는 목마름의 기도를 하는 무리들이 그때만큼 일어난 적이 없었다. 성령께서 네트워크를 가지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부흥이 일어나는 곳이 전세계적으로 있다. 그런데 부흥이 일어나는 곳 마다 공동적인 것이 기도이다. 목마른 부흥을 사모하는 기도이다. 목마른 기도의 사모함이 없는 곳에서 부흥이 일어난 곳은 한 곳도 없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1747년에 쓴 <겸손한 시도>에서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라는 유명한 말을 한다. 부흥이 아무 곳에서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모하는 곳에 임한다는 말을 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비상한 기도’, ‘특별한 기도’라고 표현했다. 부흥을 놓고 그런 기도를 해야 한다. 그런 기도는 정기적인 집회에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부흥만을 놓고 특별하게 시간을 정해서 하는 기도이다. 부흥을 위해 그런 기도가 있어야 한다. 

 

카이스트의 부흥이라고 들어보았는가. 2005년에 생전에 처음 경험한 것이다. 대전 카이스트 집회를 인도하고 함께 기도하자고 9시 반에 기도를 시작했는데 회개기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새벽 1시까지 진행됐다. 개입하지 않으면 밤새도록 진행될 기도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내일 집회가 계속 남아있고 수업도 있는데 여기서 끝내자고 했다. 참된 부흥은 이런 진정한 회개가 가십거리가 아닌 오히려 거룩한 결실을 맺는 것이다. 담당자에게서 나중에 연락이 왔는데 “사례비를 못 드려 죄송하지만 드리는 것이 결례인 것 같아서 드리지 않았다. 오늘 집회가 교수님에게 선물이었으면 좋겠다”라고 했는데 너무 멋진 말이다. 생전에 이렇게 멋진 사례비를 받아본 적이 없다. 누군가가 집회를 놓고 기도한 사람이 있었다며 알아보라고 했다. 그러자 지난 6개월간 집회를 위해 저녁 9시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기도했다고 했다. 이후에 카이스트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부흥을 사모하는 기도가 없는 부흥은 없었다. 때문에 우리는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지만 부흥을 놓고 기도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부흥은 하나님이 주권적 선물이지만 아무 곳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사모하는 곳에 임한다고 했다.

 

지금도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1995년 휘튼대학 내에 일어났으며, 2006년 2월에는 에즈베리에서 10월에는 인도 카시에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2005년 12월에 카이스트에서 일어났던 것도 작은 부흥이라고 여긴다. 부흥을 옛날이야기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제가 직접 부흥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예상하지 않게 은혜를 경험했다. 인도에서 에즈베리에서 부흥의 현장을 직접 보았다. 부흥이 힘차게 일어나고 있을 때 부흥운동을 보는 것이 저로서는 큰 축복이다. 지금도 부흥이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주로 아프리카 지역에서 성령의 역사가 많이 일어난다.

 

오늘날의 부흥을 이야기할 때 조심스럽지만 북한을 이야기하고 싶다. 북한에 지금 예수 믿는 사람이 3년 전에 14만이라고 한다. 적으면 9만 많으면 18만, 평균 14만이라고 한다. 그런데 14만이라는 숫자가 북한에 있다는 것은 굉장한 숫자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AD 30년에 일어났다. 그리고 50년 후에 로마제국 전체에 예수 믿는 사람숫자가 14만이었다. 그리고 평양대부흥운동이 1907년 일어나고 1910년 한반도 전역에 전체 장로교인의 숫자가 14만이다. 그렇다면 북한에 예수 믿는 14만 명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이것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마치 카타쿰에 성령께서 함께 하신 것처럼 어둠의 땅 북한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지 않는다면 어떻게 14만 명이 예수를 믿을 수 있겠는가.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북한은 이미 통일될 준비가 되었는데 남한이 준비가 안되었다고 생각한다. 통일이 되면 북한에 있는 14만 명이 북한 전체를 복음화시킬 수 있는 정예요원들이 다 되는 것이다. 오히려 남한이 준비가 안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하시는 부흥운동의 목표는 ‘선교’이다. 부흥이 일어날 때 마다 늘 선교가 일어났다. 오순절 부흥이 일어난 다음에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서 선교가 일어났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제주선교가 시작됐다. 1차 대각성운동이 끝나고 북미원주민 선교가, 2차 대각성운동이 끝나고 해외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됐다. 부흥이 늘 일어날 때마다 결과는 선교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박용규 교수 뉴욕세미나 “거룩한 부흥, 성령의 부으심”

뉴욕을 장기간 방문중인 박용규 교수(총신대, 한국기독교사연구소 소장)가 6월 19일(월) 오전 뉴욕영락교회(최호섭 목사)에서 부흥 특별세미나를 인도했다. 박용규 교수는 <세계부흥운동사>를 교재로 매주 월요일 8주 연속세미나를 앞두고 19일과 25일 공개적인 부흥세미나를 인도한다(오전 10시). “거룩한 부흥, 성령의 부으심”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세미나에서 박용규 교수는 사도행전 2:33의 말씀과 “성령의 부으심을 부흥”이라고 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정의를 중심으로 세미나를 인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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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규 교수는 평양대부흥 연구이후 세계부흥운동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 세계 32군데 부흥현장을 다니며 <세계부흥운동사>를 출간하고 석박사 과정을 위한 강의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보통 교수들은 5년마다 강의 주제를 바꾸는데 박용규 교수의 가슴에는 부흥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부흥운동을 연구하며 깨닫아지는 은혜와 부흥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싶어 목회자들과의 세미나를 통해 이를 전하고 있다. “부흥을 위해 특별한 기도가 필요하다”고 하는 박용규 교수는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 2003년부터 매달 17개 신학교 교수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도 기도회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동안 조용히 개교회 목회를 하고 있던 뉴욕영락교회 최호섭 목사도 뉴욕과 미주교계의 부흥을 위해 적극 나서며 세미나의 자리를 주선했으며, 박용규 교수와의 8주 연속 부흥에 대한 나눔과 기도모임을 통해 총체적인 난국에 있는 한인이민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며 나아가자고 부탁했다.

 

거룩한 부흥, 성령의 부으심

 

총신하면 칼빈 신학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기에 성령에 대해 그렇게 역동적이지 못하다. 그런데 제가 개혁주의 관점에 있으면서 성령론에 대해 정말 칼빈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을까, 개혁주의 전통이 무엇일까에 관심을 가지고 보면서 한 가지 발견한 것이 있다. 3대 칼빈주의자중 한 명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성령론이 총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 영향을 미친 신학이 오늘날 한국의 총신의 신학이라고 알려졌는데 제가 연구해 본 결과는 그렇지 않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성령론이 평양대부흥 운동을 일으키는데 너무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다른 하나는 실제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말하는 성령론을 보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 부터 영원히 나온다"라고 되어 있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령론이 제대로 개혁주의 성령론의 핵심을 잘 집어주고 있는데 이 부분들이 개혁주의 영역 속에서는 잘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세계부흥운동사를 연구하고 다음에 성경에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 부흥을 그렇게 살펴보면서 왜 한국교회 안에 성령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이해가 부족할까 하는 생각을 최근에 많이 가지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나누는 것이 제 부흥에 대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Exalted to the right hand of God, he has received from the Father the promised Holy Spirit and has poured out what you now see and hear.)” - 사도행전 2:33

 

사도행전 2:33이 사도행전과 부흥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을 주목한다. 물론 행 1:8이 사도행전을 이해하는 중요한 성결구절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행 2:33 구절이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은 오순절의 성령강림의 사건을 베드로가 해석한 것이다. 베드로가 해석하면서 부어주셨다는 것은 오순절 사건을 가르치는 부분이다. 베드로가 오순절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오순절에 모인 사람이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사도행전 2:17-18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에서 “부어 주리니”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다.

 

사도행전 2:33 말씀에서 오순절의 사건을 가르쳐 ‘부어 주셨다’는 표현을 주목해야 한다. 2:33절 ‘부어 주셨다’는 표현은 사도행전 2:17-18 베드로가 한 이야기이고, 베드로는 요엘서 2:28-29의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한 것이다. 사도행전 2:33 말씀을 깊이 살펴보면서 성경이 말하는 참된 부흥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약속하신 성령"

 

중요한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 사도행전 1: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을 보면 오순절의 성령을 가르쳐 아버지의 약속으로 표현한다. 그러니 오순절의 성령이 아버지의 약속이고, 동시에 아들의 약속이고 구약의 요엘 선지자의 약속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한복음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엘서 2:28-32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사도행전 2:33에는 성령을 가르쳐서 약속하신 성령이라고 했는데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약속이다. 우리 주님은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을 반복적으로 약속하셨다. 성령은 주님이 하신 약속이기도 하지만 이미 하나님 아버지께서 요엘 선지자를 통해 하신 약속이다.

 

2.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님을 높이셨다는 말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는 표현이다. 본문은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기 전에 반드시 먼저 있어야 할 한 사건이 십자가 사건과 부활후 예수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이다.

 

예수님이 이미 자기가 영광을 받으실 것은 예언하셨다. 높아지심은 주님이 하신 예언의 약속이다. 누가복음 22: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을 보면 성령을 보내주시기 전에 반드시 있어야 될 것이 있는데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둘로 나눈다.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이다. 낮아지심은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 죽으심이다. 높아지심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주시기 전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예수님이 높아지심이다. 이것을 사도행전 2:33절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의 높아지심의 사건이 있어야 오순절 성령감림의 사건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이 높아지신 이후에 일어나야 할 사건이다. F F 브루스는 사도행전 주석을 통해 “부활후 예수는 지극히 높임을 받아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아버지께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 그 성령을 땅위에 있는 그의 제자들에게 부어주신다. 그리고 베드로의 모든 청중들이 바로 이러한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인하여 나타난 외적인 표적들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했다. 

 

예수님도 영광을 받아야 성령의 강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7:37-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그러니 오순절의 성령감림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의 영광을 받으신 이후에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2:33에 이 표현이 성령에 대한 이해를 하는데 너무 중요하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이 왜 예수님의 부활이후에 있어야 하는지 말씀해 주고 있다. 

 

성령은 영원 전부터 계셨고 "이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거룩한 조상들에게 주어졌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왕자에 앉히시기 전까지는 훨씬 더 풍부한 이 은혜를 주시는 것을 연기하신 것"이다.

 

세대주의자와 개혁주의의 차이는 세대주의자들은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보다는 불연속성을 주장한다. 십계명은 구약에 따르는 것이고 신약에는 은혜의 복음이라고 둘을 구분한다. 그런데 개혁주의는 언약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신약과 구약의 연속성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도 구약의 성도들이나 신약의 성도들이 다 구원을 받지만 견해차이가 있다.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은 믿음으로 구원으로 받았다. 저는 신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구약의 성도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 몰랐다.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누구도 그것에 대해 가르쳐 준 것이 없다. 유학시절에 공부하면서 투쟁을 했다. 책을 보니 구약의 성도들이나 신약의 성도들도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구원의 통일성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행함으로 구원을 받고 신약의 성도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복음이 아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신약의 성도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이것은 세대주의자들도 동의한다.

 

세대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이 다른 것이 무엇인가 했을 때 중생이 없이 구원이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도 구원을 받으려면 중생의 은혜를 경험해야 하는데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구약의 성도들도 구원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약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세대주의자들은 다윗과 사울의 예를 들어 구약에는 성령이 들어갔다 나왔다고 한다고 말한다. 세대주의와 개혁주의는 구원의 통일성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성령의 역사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신약에 있어서는 성령이 영원토록 내주하시는 것이지, 구약에는 성령은 들어갔다나왔다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비 비 워필드의 책을 보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 구약도 성령의 역사 없이 구약의 성도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신약에도 성령의 역사없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과의 성령의 역사가 구원에 있어서 같다면, 오순절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성령이 역사하셨다고 하면 오순절 사건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3-1.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부어 주셨다’는 것은 구약에는 없었다. 부으심의 사건은 구약에 없었던 사건이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도 없었다. 부으심의 사건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처음으로 성취된 것이다. 부으심의 사건을 요엘서는 'will'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성령이 부으실 것을 미래적으로 일어날 것으로 예견해준다. 사도행전 2:17-18절에도 ‘will’ 즉 미래로 표현한다.

 

그런데 사도행전 2:33을 보면 "부어 주셨느니라(has poured out)"라고 표현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현재완료이다. 구약에 예언되었던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 오순절에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현재완료형이다.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연속적으로 일어날 때 현재완료형을 사용한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 오순절 마가의 다박방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일어날 사건이라는 것을 이미 시제가 보여주고 있다.

 

사도행전 2:33에 ‘받았다(has received)’도 현재완료형으로 나온다. 한 번만 받은 것이 아니라 계속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아버지께 성령을 계속 받으셔서 계속 부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을 이해하는데 너무 중요한 것이다. 이 부분을 발견하고 나서 사도행전을 보면서 개혁주의 성령론에 대한 바른 정리가 정말 필요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베드로가 부어주셨다고 증언한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두고 한 표현이다. 이 성령의 부으심은 요엘 선지자의 약속의 성취(사도행전 2:17-18)라고 베드로가 증언한다. 이 성령의 부으심은 구약에 약속되어 있지만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이 부으심은 구약에도 없었고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도 심지어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실 때도 성령의 부으심이 없었다.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후에야 이 놀라운 성령의 부으심이 일어난 것이다. 이 부으심은 오순절에 처음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존 칼빈은 "성령은 그 당시에 처음으로 주어지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성령은 이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거룩한 조상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왕좌에 앉히시기까지는 훨씬 더 풍부한 이 은혜를 주시는 일을 연기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조금 전에 본 바와 같이 '부어 주리라'는 말로 잘 표시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 부어주시는 사건은 예수님이 높아지신 다음에 일어날 사건이며, 처음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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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 계속되는 증거

 

세미나의 키는 여기서 부터 시작된다. ‘부어 주신다’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부어 주시는 것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120명에게만 일어난 사건인가 하는 것이다. 성령은 구약에도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역사 하셨지만, 신약에 와서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게 역사 하셨다.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 계속된다는 것은 다음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사도행전 2:17-18을 보면 요엘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남종과 여종, 만민에게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120문도에게만 그 같은 성령의 부으심을 체험했다면 요엘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만민에게 부어 주시겠다는 약속, 그것도 말세에 부어주시겠다는 약속 말씀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120명으로 끝나면 예언의 완전한 성취가 아니다.

 

F F 브루스가 사도행전 주석에서 말대로 "분명히 120명의 유대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은 그 자체만 놓고 볼 때는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 주리라는 예언을 다 성취시켰다고 불 수 없으며 오직 성취의 시작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시작이라는 것은 성취가 연속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요하다. 그 이유는 성령에 대한 이해가 어떠냐에 따라 성령을 사모하고 간절히 간구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그와 같은 성령의 부으심이 임해야 한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서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성령의 역사가 연속적이라는 사실은 오늘 분문의 "받아서"라는 말과 "부어주리라"는 말의 시제를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여기 ‘받아서(receive)’라는 말은 현재 완료형(has received)으로 쓰였다. 쭉 일어난 사건을 말할 때 현재 완료형을 사용한다. 과거 한번 일어난 것이라면 시제를 과거로 사용해야 한다. '부어 주셨느니라'(has poured out)도 현재완료이다. 현재완료형으로 사용된 것은 성령의 부으심이 과거에 일어난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현재도 진행되는 연속적인 것을 의미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원히 나오시기 때문에 현재완료형을 사용한 것이다.

 

셋째, 누가복음 11장 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주님의 약속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정립된 사람이 구하면 성령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미 관계가 정립되었다면 구원받은 사람이다. 구원받은 사람이 성령을 구하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굉장한 약속이다.

 

넷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에도 나타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the Holy Ghost eter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을 보면 ‘proceeding’이 진행형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로 부터 계속 나온다는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계속 나오는 것이다. 성령을 구하면 구하는 자에게 임하신다는 것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지원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고 큰 도전을 받았다.

 

다섯째, 성령의 부으심이 연속적이라는 사실은 오순절 날 일어난 성령의 부어주심의 역사가 사도행전에 다시 나타난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도행전 10:44-45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고넬료 가정에도 마가와 다락방 같은 동일한 성령이 부으신 사건이 있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교회에 가서 보고하면서 행 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라고 한다.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은 사도행전의 2장에 나오는 마가의 다락방 사건이다. 고넬료 가정에도 마가와 다락방과 같은 동일한 성령이 부으신 사건이 있었다고 베드로가 증언해 준 것이다. 사도행전 11: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을 보면 베드로가 마가 다박방과 고넬료 가정에서 일어난 두 번의 성령의 부으심 사건을 보고 생각났다는 것이다.  

 

존 칼빈은 “고넬료 가정에 성령이 부으신 사건은 이방선교의 장이 열린 것을 의미한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성취이고, 요엘 선지자의 약속의 성취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날까지 이방인들을 국외자로서 자기 백성으로 부터 구별하셨지만 이제 그들을 동일한 사랑 가운데 포옹해주시며 그들을 동일한 영예의 자리에 높여 주셨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에게 성령의 부으심으로 구원에 이른 것처럼 이방인에게 성령의 부으심으로 이방선교가 공식적으로 인준해주시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8의 주님의 약속의 성취이다.

 

사도행전 11:17-18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예루살렘 사람들이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성령이 부어주시는 사건을 증언하니 더 이상 할 말을 잊어버렸다. 이방선교를 예루살렘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준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이방인에게 부어주신 심벌이다. 앞으로 이 땅에 계속해서 이방인에게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성령의 부어주심을 예견하는 것이다.

 

여섯째, 지난 2천년여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성령의 부으심을 부흥이라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정의했다.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과 2차 대각성 운동, 평양 대부흥운동, 웨일즈 대부흥운동 등 성령의 부으심이 계속되었다. 

 

사도행전 2:33은 사도행전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이다. 이 부분을 분명히 이해하면 사도행전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령의 부으심을 부흥이라고 했다. 그래서 부흥을 놓고 기도한다는 것은 곧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기도한다는 의미이다. 이 부분을 다르게 이해한다면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기도안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구원의 역사가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구원의 역사를 사모한다면 목양의 현장에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기도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목양의 현장에 성령께서 구원의 역사를 하신 것을 간증할 수 있을 것이다.   

 

4. '성령의 부으심'에 대한 간절한 열망

 

조나단 에드워즈는 <겸손한 시도(An Humble Attempt,1747)>에서 ‘성령은 모든 축복중의 최고의 축복’이라고 했다. ‘성령은 축복의 총화’라고 표현했다. 또 "성경은 전반적으로 그 밖의 모든 것들보다 성령을 위해 기도할 것을 지시하고 격려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교회가 말세에 이루어질 영광스러운 성령의 부으심과 그것에 의해서 성취될 것을 위해 대단히 열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라고 말씀한다"고 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개인과 교회는 이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기도해야 하며,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라고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지만 아브라함 카이퍼는 성령을 놓고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령을 놓고 기도하라고 말했다. 이것은 굉장한 도전이다. 성령을 놓고 기도하라는 말은 성령의 부으심이 기도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말세’라는 말은 굉장히 중요하다. 사도행전 2:17에도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라고 나온다. 성령의 부으심은 말세에 일어난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세는 초림하시고 재림할 때까지 말세라고 한다. 초림하시고 재림하실 때까지 성령의 부으심의 역사가 이 땅에 많아 질 것이라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를 위하여 매우 위대한 무엇을 성취하시려면 에스겔 36장 37절에서 명백하게 나타나듯이 그 일보다 자기 백성들의 기도를 선행시키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이한 기도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는 먼저 은총과 간구의 영 (슥 12:10)을 놀랍게 부어주시기 시작하실 것이다"라고 말한다. 

 

백성들의 기도를 선행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 백성들의 특이한 기도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먼저 은총과 간구의 영을 놀랍게 부어주시기 시작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부으시기 전에 간절한 사모하는 기도의 영을 우리 가운데 부어주신다는 말이다. 그리고 성령의 부으심을 놓고 기도하는 무리들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달라고 함께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저는 조나단 에드워즈에게서 길을 찾았다. 칼빈이 저에게 위대한 도전을 주었다면 칼빈과 현대를 연결해주는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마지막 청교도’라고 한다.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가. 신학적인 깊이가 얼마나 대단한가. 성령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는 연구를 했겠는가. 그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발견한 것이다.

 

또 성령을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으로 누가복음 11:13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을 말씀했다. 

 

성령은 부흥을 주시는 영이시지만 동시에 성령은 우리를 중생케하시고, 죄를 미워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영이시다. 로마서 8:26에는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악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삶을 영위하라고 촉구한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 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 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신다.

 

맺는 말

 

오순절 성령 강림은 성령의 부으심의 사건이며, 이것은 구약과 신약을 구분해 주는 사건이다. 성령의 부으심은 구약은 물론이고 예수님 당시에도 없었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사건이다. 신약교회가 태동된 사건이다. 교회는 성령이 이끄는 교회여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 것이다.

 

이 성령의 부으심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120문도에 임했고, 이후에도 성령의 부으심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F. F. 브루스의 표현대로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 주리라는 예언의 "오직 성취의 시작일 뿐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증언은 '성령의 부으심'이 바로 부흥이다. 또 이 성령의 부으심, 참된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지만 아무 곳에나 임하지 않고 사모하는 곳에 임한다고 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청교도 설교에 나타나는 전도의 기본은 왕성한 성경적 유신론이었다.

철두철미한 신론이었다. 현대 전도의 경우,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요한복음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다.

그러나 청교도 전도자들의 경우 성경의 가장 중요한 구절은

창세기 1:1(”태초에 하나님이--“)이었다.

창조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계획하신 목적들을 이루어 가시는 일들이 펼쳐지는 결과였다.

 

의롭다 하시고 화목을 이루시며 죄인들을 자신에게 이끄시는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이는 절대로 속죄, 화목, 죄 용서, 칭의 등의 개념들이

성경적 의미를 지닐 수가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조셉 얼라인은 하나님의 본성 하나 하나가 전부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죄인을

대적한다는 사실을 아주 생생하게 전한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진리를 심으사

죄인으로 하여금 돌아서게 하시기까지,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의 공의, 그의 신실하심,

그의 순결하심이 모두 그 죄인을 대적한다고 한다.

 

토마스 라이, “하나님을 그렇게 신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청교도 설교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주제가 너무나도 뚜렷한 특징으로 드러난다.

 

존 플라벨, “성경이 주로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을 믿어야 하느냐

하는 것과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떠한 의무를 요구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쇼요리문답 3)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람의 책임을 함께 묶어 놓는 것이 바로 청교도들의 메시지였다.

청교도 목사들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바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책임이 있다고 가르쳤다. 청교도들은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닫는 만큼

죄에 대하여 반응한다고 보았다. 매튜 헨리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그의 거룩하심보다

죄인들에게 더 끔찍스러운 것은 없다고 진술하였다.

 

토마스 브룩스는 사단의 궤계를 대적하는 첫째 방책은,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과 위엄과 영광에 강력하게 영향을 받도록 만드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의 앞에 서 있고, 예배로 여러분의 영혼이 그와 교제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초라하고 낮고 가볍고 경박할 때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려 해도 마귀가 온통 흔들어 놓는다.

하나님을 전지하신 하나님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으로,

모든 영광스러운 완전이 충만하신 하나님으로, 위엄과 순결과 영광 가운데 계시사

악을 조금이라도 그냥 보아넘기지 않으시는 하나님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마음에 일어나는 헛된 생각들을 막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그렇게 능력적으로 선포한 청교도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품성을

인간의 책임의 기초로 제시하였다. 브룩스는 사단의 궤계를 대적하는 다섯 째 방책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더욱 가득 차도록, 모든 영적 실체들과 하늘의 것들로

더욱 풍성해지도록 힘쓰는 것이다. 잔이 포도주로 채워질수록 그 잔에 물을 담을 여유가

그만큼 적어지는 법이다. 여러분, 하나님으로 더욱 가득 채워야 한다.”


하나님의 손을 정말로 권능의 손으로 바라보기 전에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아래 잠잠히 있게 되는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벧전5:6).

하나님의 손을 약한 손으로, 가냘픈 손으로, 낮은 손으로, 천한 손으로 바라보게 되면,

사람의 마음이 그 하나님의 손을 대적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성경적 유신론에 대한 거듭되는 강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이야말로 그들의 설교의

대명사가 되었다. 토마스 브룩스, “하나님의 주권이야말로 그의 손안에 있는 황금 홀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나, 그의 역사하심으로나, 그의 긍휼하심으로나, 그의 심판으로나

그것을 사용하셔서 모든 사람을 자기 앞으로 이끄셔서 고개 숙여 절하도록 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러한 시각에 따라서 구원 과정에 대한 시각도 결정되었다.

청교도들은 그 어떠한 죄인도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서 구원받은 적이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죄인에게 주셨기 때문에 죄인이 구원받은 것이라고

믿었고 또한 그렇게 설교하였다. 구원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의 위엄 있는 표현이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역사이기 때문이었다.

토마스 후커, “죄인이 회심하도록 역사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야말로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서 가장 신비로운 것이다.” 죄인들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이끄시는 일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효력 있는 부르심혹은 유효적 소명이라고

지칭하였다. 청교도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부르심을 효력 있게 만드실 수 있으며

또한 그가 자신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렇게 효력 있게 만드셨다고 설교하였다.

청교도들은 효력 있는 부르심에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이 나타난다는

성경적인 사상을 열열히 증거하였다.

 

토마스 굿윈,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부르심이 아주 갑작스런 선택의 회심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말하자면 택하심이 사람을 완전히 휘어잡고, 강력한 힘으로

그 사람을 끌어내며, 그 사람에게 신적인 본성을 각인시키고, 부패한 본성과

이기적인 사랑을 뿌리째 뽑아 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원리를 심어 놓으며,

첫날부터 그 사람을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출발하도록 하는 것이다.

바울의 경우가 그러하며, 바울 이후의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런 예들이 없지 않다.

오직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신적인 능력으로만

그런 갑작스런 놀라운 변화가 사람의 영혼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주권을 모든 피조물들을 자기 자신의 기쁘심에 따라

처리하실 수 있는 그 분의 절대적인 권한으로 정의하였다. 에드워즈는 그의 교회를

휩쓸었던 부흥을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하고 있다. “생각해 보건대, 죄인을 구원하는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교리를 강조하고, 기도 응답의 문제와 자연인의

고통들이 계속되는 문제 등에 대해서 하나님의 공의하신 자유를 강조하는 설교보다

더 놀라운 축복이 되었던 설교가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청교도들의 전도의 메시지의 기본은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에 있었다.

그들의 복음은 하나님으로 시작하였고, 사람의 마음을 찔렀다.

그러나 현대의 전도는 이러한 강조점과 비교할 때에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

최근 십 수년 동안 <사영리>라는 전도 책자가 널리 사용되어 오고 있다.

국제 대학생 선교회가 제작하여 배포하는 이 책자가 전도에 관한 현대적 사고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영리: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여러분의 삶을 위하여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신다.” 여기의 초점은 바로 하나님께서 무언가 여러분에게 주실

것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베풀어주시는 역사가 아니라 사람이 받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로 나타난다. 현대의 복음의 경우 그 핵심적 주제가 하나님의

영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천국을 받는 것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제임스 케네디의 전도폭발도 하나님의 위엄과 그의 성품, 그리고 그의 본성을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그의 요구보다는 오히려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는 문제가 중심이

되어 있다. 죄가 하나님의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다루셔야

했다는 식의 그의 진술에 대해서 청교도 목회자는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차녹,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전 계획은

바로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은 상태로 우리를 회복시키는 데 있으며,

그리하여 그가 자기의 본성의 이러한 탁월하심에 대해 얼마나 애착을 갖고 계시며

또한 악을 얼마나 혐오하시는지를 보여 주시고자 함이다.”

 

구속의 계획은 청교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깊으신 뜻의 경륜 가운데서

행하기로 정하신 바의 결과였지, 결코 죄악된 인간에게 혜택을 주시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행하시도록 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모든 역사 하나 하나를 하나님의 영광의 표현으로 보았다.

차녹, “피조 세계가 그의 영광을 위하여 그로 말미암아 지으신 바 되었듯이,

그의 경영하시는 모든 역사들도 그와 똑같은 목적을 위한 것이다.”

청교도들은 강력한 성경적 신론을 전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피조물이 서로 함께 하기 위해서는,

피조물이 그 불의를 벗어버리든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의 순결하심을 벗어버리시든가

둘 중의 하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복음의 원 주제였던 것이다.

 

- 브루스 비클, 복음과 청교도설교, pp 127-141에서


가져온 곳 : 
카페 >청교도 아카데미
/강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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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조이' 기독교 소멸이 목표?



아직까지도 뉴스앤조이를 위시한 교회파괴 야합세력이 진짜 교회개혁세력이라고 철저히 미혹 당해 계십니까? 스스로 찾아보고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고민해 보십시오.
    

1. 관세음보살 성령님? 동성애와 종교다원주의 설파


뉴스앤조이는 지금까지 동성애 관련 기사들을 다루면서 동성애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내보인 경우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동성애에 호의적인 토론회가 열릴 경우 현장의 소식들을 생중계하듯이 빠짐없이 전했고, 기사 중에는 제목 자체도 “동성애든 이성애든 사랑은 축복할 일”이라고 노골적으로 동성애를 찬성하는 기사를 내보내면서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시각전환을 꾀했다.
    
특히 동성애와 관련한 기사 중에는 대표적인 동성애 반대 성경구절인 창세기 19장(소돔과 고모라), 로마서 1:27(바울의 권면) 등에 대해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볼 때 ‘동성애’에 대해 반대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들을 일방적으로 다루면서, 결국 “동성애를 죄라고 표현한 구절은 성경에 없다”는 주장을 대부분 기사의 결론부에 내놓고 있다.
    
    

- [인터뷰] 진정한 소수자로 살고 싶다. 최초 레즈비언 후보의 소수자 향한 외침
 
- "동성애든 이성애든 사랑은 무조건 축복할 일"
 
- 소돔이 멸망한 진짜 이유
 
정죄 일변도의 동성애 논의는 소돔의 죄를 그대로 닮아가고 있어
 
- 현경 교수 '기독교 안의 동성애' 공개강연
 
'강요된 침묵, 기독교 안의 동성애...입을 떼다'

    
    
뉴스앤조이의 기사 중에는 종교다원주의에 대해서도 매우 관용적인 입장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종교의 구원을 주장하는 신학자들 인터뷰나 그들의 위기를 적극 변호하고 나서는 보도들에서 이러한 자세들을 볼 수 있다.
    
<‘창조적 신학자’와 ‘마녀’ 사이에서>라는 기사에서는 유니온 신학대 현경 교수와의 인터뷰를 길게 보도하면서 기독교의 경계를 오가는 그의 말을 일방적으로 싣기도 했다.
    
그는 아시아 여성이 보는 성령의 얼굴로 ‘관세음보살’을 그리기도 했고, 한번은 한국 무속의 모티브를 빌려 무당처럼 십자군 전쟁에서 죽은 무슬림, 정신대에 끌려가 죽은 할머니, 베트남 전쟁에서 죽은 군인 등 인류 역사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영을 부른 다음 해원을 시켜주는 ‘초혼제’를 지내기도 했다.
    
또 뉴스앤조이는 불상에 절하고, 종교다원주의 교육을 해서 강남대에서 해직됐던 이찬수 교수 사건과 관련, ‘부당해직’이라고 강조하면서 연일 이찬수 교수를 우호하는 기사를 작성했다.
    
뉴스앤조이는 이밖에도 타종교에 대해 다루는 기사에서 타종교에 대한 관용적 자세를 넘어 종교다원주의적 시각을 보인 사례들이 여러 차례 있었다.
    
다음은 뉴스앤조이의 동성애와 종교다원주의 옹호기사 목록의 일부.


- 기독교와 주체사상의 대화(1)
 
- 기독교와 주체사상의 대화(2)
 
- 북한의 주체사상과 붉은기 사상(3)
 
- 마르크스의 '자본'에 살아있는 '복음'
 
- 종교화한 주체사상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 핵을 가진 북한이 두려우십니까?
 
- 북한을 대할 땐 연애하듯
 
- 김병로 교수, "북한인권 주장은 현 정권 비판 위한 것"
 
- 북한 봉수교회는 가짜교회 아닌 '이질적인' 교회
 
- 북한인권, 인권 운동인가 정치적 도구인가
 
- 북한 교회도 여중생 죽인 미국 규탄
 
- 김정일 위원장을 위해 기도해야 할 때
 
- "우리가 아무렴 동족한테 핵 쏘갔어"
 
- 평양에서 한반도기 함께 흔들며
 
- 기독교 최대의 적은 공산주의?
 
- "우리 민족끼리 통일합시다"
 
- "대집단 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에 대한 신학적 이해
 
- 북한교회 진위 논쟁 '우리 몫 아니다'
 
- <극동방송> '극우 시국토론회' 파문(3)

    

2. 공산주의와 맥을 같이 하는 반기독교 성향


뉴스앤조이는 소위 진보임을 자처하며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허무는 기사들을 무수히 쏟아냈던 곳이다.
    
주목되는 점은 평소 ‘개혁’을 부르짖는 동시에 교회파괴적인 기사들도 많이 작성했다는 것이다.
    
이를 놓고 볼 때 뉴스앤조이가 친북NGO로 안착하는 것은 친북미디어로서의 교회공격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계산이 나온다.
    
유물론적 사관의 가장 큰 적은 유신론적 사관이며 이에 공산주의 국가에서 종교를 핍박하는데 가장 신앙심이 투철한 교회를 핍박한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공산주의와 안티기독교는 ‘반교회’라는 코드가 서로 통한다.
    
뉴스앤조이는 공교롭게도 교회의 치부들이 드러날 때마다 선정적인 비판으로 문제를 확대하고, 자연스레 안티기독교들이 활동할 명분과 기본소스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교회 안의 분쟁 소식은 뉴스앤조이를 통해 매우 신속하게 보도된다.
    
지금까지 뉴스앤조이에 보도된 교회분쟁 소식은 수백여 건에 달할 정도다. 이런 분쟁소식은 안티기독교들에게 매우 요긴한 정보와 활동의 근간이 된다.
    
반공설교 비판과 중계에 가까운 교회분쟁 기사들은 하나의 지향점으로 통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들이 있었다.
    

3. 목표는 기독교 소멸

뉴스앤조이 사장 방인성 목사는, 창립자가 ‘기독교 소멸’ 소신을 갖고 만든 것으로 알려진 시민단체 종교법인법제정추진시민연대(공동대표 홍세화 등, 이하 종추련)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방인성 목사와 김동호 목사가 교회세습반대운동연대(이하 세반연)의 출간 기념 북토크에 참여하고 있다.

 
종추련 창립멤버인 이드 씨는 “제 자신의 신념은 기독교 교리와 바이블 그리고 예수의 소멸”이라며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써, 종교비판의 자유가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할 시민운동을 하겠다”고 밝힌 안티기독교계의 대표적 인사다.
   

▶종추련(종교법인법제정추진시민연대) 창립멤버이자 사무처장 이드:


결국 방인성 목사는 기독교소멸론자가 그 소멸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종교비판에 오히려 힘을 보탠 모양새가 됐다.
    
어떻게 이러한 대표적인 안티기독교인과도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는지에 대한 비판을 피해가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또한 뉴스앤조이는 종추련이란 단체에 대한 비판은 일체 하지 않은 채 이들의 활동을 오히려 홍보해주는 보도행태도 보여 왔다.
    

4. 기독학생 홍위병 양성소 뉴스앤조이, 복음과상황, 기독청년아카데미

    
뉴스앤조이, 복음과상황, 기독청년아카데미 3각 구도의 연합은 한국의 미래와 한국 교회의 미래를 생각할 때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뉴스앤조이가 과연 스스로 밝혔듯이 ‘하나누리’라는 우산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목적사업에 부합하는 기관지 역할을 하겠다는 것인지 그 의중이 주목된다.
    
동시에 친북, 종북적인 편향된 사고로 한국교회의 기독청년들을 교육하고 양산해, 한국교회가 주체사상을 또 다른 신앙으로 받아들여 섬기게 하고 통일을 이루어 보겠다는 의중은 아닌지 관심을 모으고 있는 시점에서 뉴스앤조이를 하나누리로 안착시키겠다는 이승균 편집장의 선언은 매우 큰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
    

5. 기독교와 주체사상의 공존?!

    
▲본지가 입수한 기독청년아카데미 ‘한국근대사 강의’ 자료에는 해방 후 미군정에 대해 “식민지 해방보다는 전후 처리라는 비즈니스”라며 “미군은 환영식에 참가한 군중에 총격을 가했으며 남한이 좌익과 중도좌파에 의해 장악돼 있어 미국의 의도대로 남한을 장악할 수 없게 되자 파괴공작을 벌였다”고 공산주의 이념과의 투쟁 역사를 ‘장악’이란 개념으로 폄훼하고 있다.
    
반면 북한에 대해서는 “인민공화국은 80%이상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고 소련은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정치위원회 등 민중의 자치조직을 통합해 좌우익을 망라한 조직을 구성하고 행정권을 줬다”고 설명했다.
    
또 이 교육자료는 전통적 관점에서는 소련의 세력확대 정책과 김일성의 적화통일 정책이 전쟁의 원인이지만 수정주의 입장에서는 미국에 의한 한국의 단독정부수립 자체가 민족국가 수립을 방해한 것이라고 부연하면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 자체를 북한과 하나된 민족국가 수립의 방해물로 규정하고 있다.
    
이 교육자료는 전시에 발행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도 “국군과 미군에 의해 1백만, 인민군과 빨치산에 의해 13만이 학살됐다”면서 “88.5%의 절대 다수가 국군과 미군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대립 가운데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지켜왔던 거시적인 역사 안목은 전혀 도외시한 채 정확한 집계가 어려운 왜곡된 자료로 이념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북한의 이해’ 강의 자료는 북한의 선군정치에 대해 “일사불란한 체계를 갖추고 위기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능력을 보여줬다”면서 “이것은 군부독재와는 다른 것”이라고 추켜세우는 부분까지 발견된다.
    
그러나 북한 전문가들은 선군정치에 대해 “김정일이 1991년 인민군 최고사령관직을 차지한 이후부터는 당의 독재로부터 군사독재로 이행됨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그 태동배경에 대해서는 “혹심한 경제 위기로 인해 아사자가 속출하자 인민들의 동요가 일기 시작했고 무장한 군인들을 배치해 질서를 유지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기독청년아카데미 강의와 소감들을 종합해 볼 때 기독청년아카데미는 공존이 불가능한 기독교와 주체사상의 공존을 말하고, 북한에 대해 장밋빛 환상만을 심어주는 교육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직 가치관이 올바르게 정립되지 못한 한국교회 청년들에게 북한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을 가능성이 높다.
    
최소한의 기독교인으로서의 주장해야할 ‘인권의 문제’와 ‘신앙의 자유’를 도외시한 채 북한에 대한 환상을 갖고 바라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 함께 보면 좋은 기사
http://blog.naver.com/dreamteller/220977249510





사막은 은혜의 땅 33

이런 일들이 왜 생겼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물질적인 복을 잘못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물질적으로 상상하지도 못한 복을 받게 된 이후 나는 영적으로 메마른 '영적 사막의 시기'를 경험했다. 피닉스로 이주한 후 얼마 동안은 아마도 내가 주의 종이라는 사실조차도 잊고 살았던 것 같이 부동산 거래에 온 신경이 쏠 려 있었다. 그 결과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넓은 땅도 소유하게 되었고 집도 사고 조그마한 비즈니스도 하게 되었다. 그 무렵 나는 많은 영적인 것들을 이미 잃어가고 있었다. 물질적인 풍요와 안락함이 나의 모든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벤츠 최고급 SUV 승용차를 구입했다. 최고급 옷과 신발 그리고 가구들을 구입해서 집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제 16세가 되어서 임시 운전면허증을 받은 둘째 아들 성수에게는 분에 넘치는 고급승용차를 사주었다. 아들을 위한 것이기 보다는 나의만족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집안에서 대중 방송 TV만 보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성경 말씀은 형식적으로 읽었다. 기도에도 힘이 없었고 간절한 마음이 실리지 않았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간구하면서 기도할 기도 제목도 없었다. 피닉스로 이사 온 후 아내와의 사이가 얼마간은 좋게 회복되는 것 같더니 다시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사사건건 판단의 눈을 가지고 내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아내가 못마땅했다. 지난 18년 동안 계속해온 부부싸움이지만 이제는 그 강도와 횟수가 더 늘어갔다. 이틀에 한 번씩은 아이들이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언성을 높이면서 부부싸움을 했다. 아내는 늘 습관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막내 성구가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나는 한국으로 나가서 전도만 하면서 살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요. 당신과 같은 사 람하고는 이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몇 번이나 똑같은 말을 들어서 이제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거꾸로 그런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아내를 마음 속으로 정죄했다.

 

'아니, 저 여자가 성령 받은 사람이 맞아? 성령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남편에게 별거하자는 말을 밥 먹듯이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저 사람도 어찌 보면 가짜인지도 모르지.'

 

아내와의 갈등은 심적, 영적 갈등으로 확산되면서 그 폭이 날마다 깊어지고 넓어져 갔다. 풍요 속의 빈곤이었다. 마음 속에 공허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주변의 사막처럼 모든 것이 메마르고 황량하기만 했다. 우울증과 불면의 밤에 시달렸다.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도 싫었다. 삼청교육대 지옥훈련을 받고 난 후 나를 사로잡았던 대인 기피 증세가 다시 살아났다. 극도의 무력감에 빠졌다. 그래도 간간히 위로가 되었던 것은 "그냥 다른 생각하지 말고 이제 재산도 많이 생겼으니까 세계 여행이나 하면서 남은 여생을 그냥 풍족하게 살고 나름대로 신앙생활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마음 편하게 먹고 그렇게 살자"라는 음성이 들릴 때였다. 그것은 분명히 사단의 음성이었다. 잠시 그런 생각이 들면서 위안이 되기도 했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내 마음은 계속 절망과 좌절 가운데 뒤범벅이 되곤 했다. 갖고자 했던 모든 것을 소유하고 보니 정작 내 손 안에 잡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영적 공황의 시기는 오래갔다. 삶의 의미가 없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짜증났다. 간간히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기쁨을 회복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아이들에게나 아내에게 화를 내며 조그만 일에도 언성을 높이는 일이 더 많았다. 지옥과 같은 생활이었다. 차라리 가난할 때가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할 때는 그래도 먹고 살기에 바빠서 딴 데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간절하다 보니까 자연히 기도도 마음을 내려놓는 절실한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답답한 심정으로 기도를 하려고 무릎을 꿇으면 시꺼먼 거미와 복잡하게 엉켜 있는 거미줄이 눈앞에 선하게 보이곤 했다. 그 거미줄이 바로 나의 영적인 상태였다. 나는 하나님께 나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거미줄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다. 기도하다 보면 너무도 갑갑한 생각이 들어 혹시 이러다가 호흡이 막혀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들었다. 영적인 공격이었다. 그래도 오기를 가지고 기도했다. 악한 세력의 영적인 결박을 완전히 뚫고 나가 하나님과 긴밀한 교제의 줄을 다시 한 번 회복하고 싶은 열망이 간절했다.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새벽에 습관처럼 일어나 말씀을 보고 기도하기 위해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기도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 새벽도 그저 묵묵히 무릎을 꿇고 멍한 느낌으로 그렇게 앉아 있었다.

 

'네가 나를 믿느냐 그리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니라 너의 속에 있는 것을 다 내어 놓아라.'

 

어느 순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의 모든 것을 감싸기 시작했다. 하얀 세마포 같은 천이 뒤에서부터 무릎 꿇고 있는 나를 덮어씌우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성령님이 나를 감싸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수십 년 전 폐병 3기로 고생하고 있을 때 새벽 공기와 함께 나의 폐부 깊은 곳으로 밀려들어왔던 그 손길…. 미국에 도착해서 40일 동안을 열병으로 앓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인근 한인교회를 찾아갔을 때 전신에 감전되듯이 짜릿하게 나를 자극해 왔던 그 감격을 그날 새벽에 기도하는 가운데 다시 한 번 느끼고 있던 것이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이 행음하였으므로 거룩한 제육이 그에게서 떠났거늘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는고 그가 악을 행하며 기뻐하도다"(렘 11:15).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통곡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 영적인 간음을 행하다가 하나님의 임재를 다시 한 번 느끼고는 재를 뒤집어 쓴 채로 회개 기도했던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나는 그 날 새벽 하나님의 임재를 확실하게 체험했다. 하나님께서는 내 영혼을 사로잡고 있었던 악의 거미줄을 제거해 주신 것은 물론이고 기도할 때면 보이곤 했던 시꺼먼 거미까지 완전히 없애 주셨다. 문제의 현상은 물론 그 근원까지 제거해주신 것이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 너희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 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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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교하면 행복은 멀어집니다 가난해도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을 소유하는 사람입니다. 남이 보기 부러워할 정도의 여유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이 행복해 보일듯하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추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려움을 아는 사람은 행복의 조건을 알지만 모든 것이 갖추어진 사람은 만족을 모를 터이니 마음은 추운 겨울일지도 모릅니다. 몸이 추운 것은 옷으로 감쌀 수 있지만 마음이 추운 것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사는 기준이 다 같을 수는 없는 것처럼 행복의 조건이 하나일 수는 없답니다. 생긴 모양새가 다르면 성격도 다른 법 가진 것이 작지만 행복을 아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행복의 조건이기 때문이지요. 남과 비교할 때 행복은 멀어집니다. 그저 감사한 마음 하나만으로도 당신은 행복의 주인공이 되실 것입니다 - 좋은생각 中에서 - Just Loving You (그저 당신만 사랑해요) / Mary Du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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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의 특징 10가지

美뉴욕 레저렉션 교회의 담임목사인 조셉 마테라(Joshep Mattera) 목사의 말이다. 그는 미국 보수교회의 대표적인 인물로, 최근 "세속화된 기독교인의 10가지 징후"(10 Signs You Are a Secular Believer)라는 칼럼을 통해 이와 같이 주장했다.

조셉 마테라 목사는 이 칼럼에서 "1981년부터 목회 사역을 해왔고,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의 삶을 지켜볼 수 있었다"고 먼저 말하고, "교회 안에서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러면서도 이들 중 상당수가 세속적인 가치 체계를 지지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면서 다음과 같은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의 특징 10가지를 소개했다.

 

1.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하지 않고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은 신앙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다(이를 무신론적 유신론이라 함 - 편집자주). 왜냐하면 이들은 결혼이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가는 것, 직업을 바꾸는 것, 교회를 바꾸는 것 등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거나 성경 말씀을 찾아보지 않으며, 영적 지도자의 조언도 듣지 않는다.

 

2.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시선을 더 의식한다.

세속적인 셀피 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지혜의 시작인 여호와를 두려워하기보다 친구들에게 보여지는 겉모습(외양), 지위, 인기를 더 추구한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시선을 더 의식할 때, 우리는 세속화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다.

 

3. 성령이 아니라 돈에 이끌린다.

당신이 하나님의 뜻보다 돈을 우선순위에 둔다면, 당신은 세속화된 기독교인이다. 이것이 많은 소위 기독교인이라 하는 이들이 일을 하는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사용하면서도 신앙의 공동체와 교제하는데는 거의 시간을 쓰지 않는 이유다. 예수께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다른 모든 것들을 더하신다고 하셨다(마 6:33).

 

4.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주 목적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관계를 위해서다(사람들을 사귀려고).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이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주목적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성경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교회 예배에 참석한 주 목적은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께서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듣고, 성도와 교제하기 위해서다.

 

5. 대중문화가 추구하는 가치를 모방한다.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은 연애(데이트), 혼전성관계, 옷, 대중음악 등에 있어서 세속적인 가치들을 신봉한다. 이것은 나에게 '오리처럼 보이고 오리처럼 꽥꽥거리면 오리일 것이다(If it looks like a duck and quacks like a duck, then it's a duck!)'는 속담을 상기시켜 준다. 당신이 내적으로 세상의 가치 시스템을 찬양하고 있다면, 당신은 영의 생각(spiritually-minded)이 아니라 육의 생각(worldly-minded)을 하는 것이며 세속적인 것이다.

 

6. 하나님은 당신의 인생에 일부일 뿐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인생의 일부로 만들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삶의 전부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1-4).

 

7.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은 이곳 저곳에서 잽싼 기도를 하면서 자신들의 세속적인 삶의 방식을 축복해달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 가운데 계속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으며, 성경을 따라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8. 당신의 삶이 다른 이들에게 복음의 영향력을 미치지 않고 전도도 하지 않는다.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은 다른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한다는 부담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대부분은 지난 5년이나 10년 사이에 단 한 명의 영혼도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 포섭되어 있어서 영원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많은 경우에 구원 받지 않은 가족들이나 친구들, 그리고 직장 동료 등 함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당신에게서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의 차이를 전혀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9. 제자를 삼지 않는다.

구원 받은 이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한 명의 영혼을 제자로 삼는 일을 위해 조금도 투자하지 않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당신이 현재 누군가를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하도록 멘토링을 해주거나 도움을 주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마태복음 28장 19절의 대위임령을 의도적으로 불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목회자나 장로 등의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당신이 다른 이를 제자로 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0. 재정에 있어서 성경적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돈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이 편할 때만 헌금을 한다. 이들은 자신이 자신들의 생명이나 돈이나 부에 대한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십일조를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소유의 10%가 아니라 그들의 소유의 100%의 주인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당신이 돈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당신은 성경적 청기지가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기독교인의 모습이 아니라 세속화된 기독교인의 모습이다.

 

천헌옥 choug2@hanmail.net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http://m.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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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100주년 맞아 50개국 전·현직 기독 의원 참석… 한인 선교사 제안으로 시작


세계 각국 인사들이 지난 7일 이스라엘 예루살렘 국회에서 열린

‘제1회 예루살렘 기도회’에 참석하고 있다. 정홍기 선교사 제공


“저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믿습니다. 크리스천인 여러분은 그의 재림을 믿고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그가 오시길 원하고 있는 거군요.”


이스라엘 국회 산하 기독교동맹위원회의 조슈 라인슈타인 이사가 지난 7일 ‘제1회 예루살렘 기도회’ 행사에서 전한 인사말이다. 행사는 이스라엘이 ‘국제 예루살렘의 날’로 지정해 기념하는 이날 예루살렘 크네세트(국회의사당)의 한 회의장에서 열렸다.


라인슈타인 이사의 축사는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언젠가는 올 것이라고 믿는 유대인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 크리스천들이 함께 모인 자리임을 적절히 감안한 내용이었다.


지난 6일부터 8일까지 이스라엘 국회와 예루살렘 일대에서 열린 기도회는 여러모로 기념비적이다. 이스라엘이 1917년 무슬림 치하에서 독립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자 1967년 6일 전쟁(3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지 50주년이 되는 올해,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개신교 형식의 기도회였기 때문이다.


미주와 유럽, 아시아 등 50여개국에서 전·현직 크리스천 의원과 목회자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 기도회와 더불어 음악회 등 다양한 부대 행사도 함께 진행됐다. 레우벤 리블린 이스라엘 대통령은 현지를 방문한 세계 각국의 크리스천 지도자들을 공관에 초청했다.


이번 행사의 또 다른 특징은, 기도회 개최가 한국인 선교사의 아이디어에서 구체화됐다는 점이다. 수년 전, 이스라엘 출신의 기독교계 인사 A씨가 정홍기(63) 루마니아 선교사를 만난 게 계기가 됐다.


1992년부터 루마니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정 선교사는 현지 국회의원과 관료 등을 중심으로 한 조찬기도회 등을 섬겨왔다. 틈틈이 인근 국가나 타국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조찬기도회 선교’ 노하우도 전수했다.


예루살렘 기도회 개최와 관련, 행사 준비와 운영 방식 등에 있어서 A씨는 정 선교사로부터 크고 작은 도움을 받았다. 지난 3월에는 한국의 국가·국회 조찬기도회를 견학하기 위해 방한했다.


정 선교사는 13일 “많은 분들의 기도로 행사를 은혜 가운데 마쳤다”면서 “첫 번째 예루살렘 기도회를 통해 역사적, 영적 의미를 동시에 느끼는 감격을 맛봤다”고 전했다. 예루살렘 기도회에는 황우여 전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과 김영진 전 농림부 장관, 채의숭 국가조찬기도회 회장,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 등이 한국 대표로 초청 받아 참석했다.



출처: 국민일보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764786&code=23111117&sid1=chr)


사막은 은혜의 땅 32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기도를 많이 해왔는데 나는 기도 시간부터 더 늘리고 하나님 앞에 더욱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혹시 잘못한 것이 있나요?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시고 철저히 회개하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상가 건물을 조속히 처분할 수 있도록 사람을 보내 주시옵소서."

 

내 기도만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뉴욕에서 잘 알고 지내던 목사님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서 중보 기도를 부탁했다. 나는 주의 종들의 중보기도의 힘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 주의 종들이 설사 자신의 행실에 문제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종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 권위가 있기 때문에 저들의 기도는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영적인 힘이 실려 있는 것이다. 여러 목사님들에게 현재 상황을 전하고 기도 부탁을 했다.

 

"목사님, 우리 식구들이 애리조나에 와서 잘 지내고 있는데, 지금 상가 건물이 제때 팔리지 않으면 좀 어려운 상황이 될 처지에 있습니다. 꼭 기억하고 기도해 주세요."

 

그렇게 말씀드리면 어떤 목사님은 물질에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권면의 말을 해주시는 분도 있었고, 어떤 목사님은 두말하지 않고 전화를 통해서 그 자리에서 중보의 기도를 해주시는 분도 있었다. 나는 기도만이 이런 어려움을 이겨나갈 통로라는 확신이 있었다. 한번은 시카고에서 사역하고 있던 목사님께 전화를 걸어서 중보기도를 부탁하려고 했는데, 그 목사님은 더 이상 교회에서 사역하지 않으셨고 다른 목사님이 전화를 받으셨다. 사실 얼굴도 모르고 그 목사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점도 없었지만 주의 종이라는 한 가지 사실만 확인하고 전화로 중보기도를 부탁했던 기억이 있다. 나에게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주의 종들의 중보기도가 필요했다. 나는 물질에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던 적은 없다. 지금도 물질에 특별한 욕심을 부리지는 않는다. 옛날에 가난하게 살았던 것이 지긋지긋하게 기억나는 때는 있지만, 그렇다고 물질을 갖기 위해서 게걸스럽게 욕심을 부린 적은 없었다. 나는 부동산 거래에 대해서, 기술에 대해서 배워 본 적은 없지만 몇 번 거래 를 직접 성사시키면서 부동사 거래 절차에 있어서 중요한 점들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물질에 욕심을 부리는 것과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물질적인 복을 내 것으로 잘 받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상가 건물 거래가 이제 일주일 안에 성사되지 않으면 땅을 구입하기로 하고 걸었던 계약금을 그냥 날리게 될 형편이었다.

 

땅 주인은 불과 몇 달 사이었지만 땅값이 또 뛰어오르자 은근히 계약이 깨졌으면 했다. 그렇지만 나와 아내의 마음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이 거래도 반드시 성사시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단지 그 방법은 아직까지 알 수 없었고 그 길도 보이 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아는 분들에게 중보기도만 열심히 부탁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의 해결이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방법으로 다가왔다. 당시 우리 상가 건물 거래를 맡고 있던 부동산 에이전트 가 우리의 상황을 알고 일정 이자만 받고 30만 달러를 빌려주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이 사람이 부동산 에이전트인데 우리에게 뭘 믿고 빌려주겠다는 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에이전트가 계산에 귀신처럼 밝은 유대인이라는 점에서 믿어지지 않았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영어가 좀 짧아서 그러는데 다시 한 번 말해 주겠습니까?"

 

"그냥 내 마음에 당신들을 도와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내 친척들 중에 은행 CD 어카운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CD를 취소하고 현금으로 한 30만 달러 정도를 당분간 유통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산을 해보니까 이자는 한 5천 달러 정도 될 것 같고 원금 환수는 상가 건물 거래가 성사되면 돌려 주는 조건으로 돈을 빌려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도 놀라서 대답도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간신히 그렇게 하자고 이야기해 놓고 집에 돌아와서 나와 아내는 기도하면서 펑펑 울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 유대인 에이전트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으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 현실로 일어나게 된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에이전트가 친척들을 통해 급전한 30만 달러를 가지고 땅 구입 계약을 완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상가 건물 구입자가 타주에서 나타나서 좋은 조건에 건물 매매를 마칠 수 있었다. 거래를 다 마치고 난 후 알게 되었지만 우리를 도와주었던 유대인 에이전트는 유대교에서 개신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인해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 두고 계셨다가 급박한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되었을 때 그들을 통해 도움의 손길을 마련해 주셨다.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의 생각과 지혜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신묘막측한 것이다.

 

물질적인 복은 영적 메마름의 지름길이다.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 보면 물질적인 복과 영적 풍요함은 많은 경우에 반비례 곡선을 긋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물질적으로 받은 복을 잘못 활용하거나, 물질의 풍요함에 안주하기 시작하면 영적으로 메말라가기 때문이다. 오히려 물질적인 가난함이 영적으로는 풍요함을 경험케 하는 좋은 토양이다. 그래서 중세시대 때 많은 수도사들은 풍요와 육신적인 안락함을 떠나 의도적으로 극도의 가난함과 육체적인 고행의 길을 걸음으로써 영적인 풍요함을 누리고, 하나님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

 

한국의 예를 봐도 그렇다. 한국이 잘살기 시작한 것은 불과 십수 년 전의 일이다. 1960-1970년대 한국의 형편을 돌이켜 보면 전국 곳곳이 빈민촌이었고, 끼니를 제때 찾아 먹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 오죽하면 "식사하셨습니까?"라고 물어보는 것이 일종의 안부 인사가 되었겠는가. 한국은 현재 영적으로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다. 물질적으로 엄청난 풍요를 누리게 된 반면, 영적으로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것이다. 목회자들의 윤리의식에 큰 구멍이 뚫렸고, 성도들도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이중인격이라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가식과 위선으로 살아가면서 심신이 피곤하다. 사회적으론 반기독교 세력이 판치고 있다. 안티 기독교 운동으로 불리고 있는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익명의 공간인 사이버 세계, 인터넷을 통해서 바이러스처럼 확산되고 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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