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빙크, 벌코프 그리고 박형룡
이상웅 | 조회 76 | 05.12.31 16:45 http://cafe.daum.net/profchung/1brN/353
 
 

헤르만 바빙크(1854-1920),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레이든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잠시 목회를 하고 나서 깜뻔 신학교에서 교의학 교수로 20여년 ,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20여년 교의학을 가르치다. 그의 주저는 1906년-1911년 사이에 간행된 [개혁교의학 Gereformeerde Dogmatiek] 제2판, 전4권(Kampen:Kok)이 있다.

 

루이스 벌코프(1873-1957)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으로 이민가서 귀화하다. 그랜드 래피즈에 소재한 칼빈신학교에서 공부하고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하다. 그는 명예박사학위 조차도 받은 적이 없다. 목회를 하다가 모교에서 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한 벌코프는 초기에는 신약학을 가르쳤고, 후기는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그는 바빙크의 [개혁교의학]과 게할더스 보스의 신학에 많은 영향을 입었다. 1941년에 증보된 [조직신학]과 [신학서론]이 그의 주저이다.

 

박형룡(1897-1978)은 압록강변에서 대주가의 아들로 태어나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평양 숭실전문 졸업후 남경 금릉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마치고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 가서 신학사와 신학석사학위를 받았고, 루이빌에 있는 남침례신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귀국하여 평양신학교 변증학 교수가 되다. 평양에서 학위논문을 마쳤고 Ph.D.학위를 취득하였다. 만주에서 처음으로 조직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해서 1972년 총신대학교를 은퇴하기까지 30여년 동안 교의신학 7권을 비롯하여 조직신학의 제분야에 대해서 가르쳤고 저작전집 20권을 남겼다.

 

이상은 세 사람의 간략한 프로필 소개였습니다.

 

그러면 이 세 사람의 신학적인 관계가 무엇일까요? 벌코프는 프린스턴을 방문한 헤르만 바빙크를 직접 만난 적이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못읽어봤습니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는 1954년에 미국 방문시 만년의 벌코프 교수를 한 번 만나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세 사람은 한 자리에 만난 적이 없지만 주저를 통해서 바빙크는 벌코프에게 심원한 영향을 주었고, 벌코프는 또한 박형룡 박사의 신학적 틀을 만들고 살을 채우는 일에 크게 기여를 했습니다. 박형룡 박사는 후에 바빙크의 저술들 중 영역본으로 간행된 Our Reasonable Faith이나 The Doctrine of God 을 직접 읽었습니다.

 

그러나 벌코프는 바빙크를 단순히 요약하는 수준에서 그친 것이 아니고 미국의 구 프린스턴 신학자들(하지 부자와 워필드,보스)이나 남장로교 신학자들(쉐드, 댑니)의 글들을 소화하여 자기 나름의 조직신학서를 저술했습니다. 물론 벌코프는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이 화란어라는 아주 제한된 언어의 울타리 안에 갇혀있는 것을 안타까워해서 액면 그대로 영어권에 소개하고 싶은 소망을 품었습니다. 그의 소망은 후세대에 이르러서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은 영어로 번역은 끝난 상태로 있고, 출판은 1,2년 내에 완결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벌코프의 조직신학은 바빙크의 주저 보다는 읽기에 간편한 느낌을 줍니다. 아무래도 바빙크의 책은 유럽피언 스타일이다 보니 간편하다기 보다는 심원하다고 할 것입니다. 한 자리에 앉아서 장시간 읽고 고민해야 하는 책이지요.

 

박형룡 박사 역시도 벌코프의 조직신학을 근간으로 해서 교의신학 7권을 썼지만 벌코프를 무조건 수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박박사의 신앙과 신학의 기초는 구 프린스턴신학도 벌코프를 통한 화란 개혁주의 신학도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신학의 근본적 기초는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전하여준 선교사들의 신학, 자신의 용어로 하자면 청교도 개혁신학이었습니다. 이 기초 위에서 그는 구프린스턴신학도 읽었고, 어거스트 스트롱의 침례교 신학도 읽었으며, 벌코프의 조직신학서도 수용했던 것입니다.

 

바빙크나 벌코프는 자신의 주저를 대중들에게 읽기 쉽도록 대중화하는 일을 하였지만 박형룡 박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아마도 오늘날 바빙크와 벌코프의 책은 그럭저럭 인기를 잃지 아니하고 읽히는 반면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은 별로 인기가 없는 이유중 하나일 것입니다.

  - 헤르만 바빙크는 [개혁교의학]을 대중적인 필치로 간결하게 쓴 [하나님의 큰 일]을 1909년에 출판한 후에, 보다 더 간결한 형태의 개요서인 Handleiding bij het on derwijs in den Christelijken Godsdienst를 1913년에 출간했습니다.  

 - 벌코프는 자신의 주저 [조직신학]을 대학생들이 읽을 수 있도록 만든 Manual of Christian Doctrine (기독교신학개론)를 1933년에 출판하고, 이보다 더 쉽고 간결하게 줄여서 고등학생들이 읽을 수 있도록 Summary of Christian Doctrine를 1938년에 출판하였습니다. 1991년을 기준으로 할 때 이상의 벌코프의 저서들(원서들)은 총 25만권 팔렸다고 합니다.

 - 박형룡 박사의 경우 난해한 중국어 용어들이 많은데다가 방대하기 때문에 신학도들이나 목회자들이 읽기를 꺼려합니다. 만일 현대화시켜서 그의 신학을 쉽게 요약해서 소개하는 입문서를 출간해 주었더라면 그에 대한 거부감은 많이 줄였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 이상은 저물어가는 2005년 세모에 생각나는대로 술술술 써보았습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교회당에 모여 있는 가짜 예배자들!


루이 14세 때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주일이 되면 루이 14세가 가족들, 왕족들을 거느리고 늘 교회에 나오곤 했습니다. 절대 권력자가 교회에 나오니 그 앞에서 눈도장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 몰려들었는데 넓은 교회당이 모여든 사람들을 주체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당시의 대주교는 프넬론인데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상황을 보며 좋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러 오는 것이라고도 예수님을 만나러 오는 것이라고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예배가 목적이고 예수님이 목적이라면 바람직한 현상이지만, 다른 목적이 숨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넬론 대주교는 사람들의 본심을 시험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주일에 광고하면서 다음 주에는 왕께서 못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주일 루이 14세가 왕족들을 거느리고 교회에 갔을 때 교회당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썰렁한 상태였습니다. 깜짝 놀란 왕이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니 대주교는 사실대로 이야기하였습니다.


웃음이 나는 이야기이지만 웃을 수만은 없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예배가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이 목적이 아니라 왕을 보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던 사람들처럼 지금도 다른 목적으로 가지고 교회당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득한 교회당이라면 그것은 결코 부흥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로 가득한 것을 어찌 부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선거철이 되면 큰 교회마다 손님들이 찾아옵니다.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자들입니다. 어떤 후보자들은 방문만이 아니라 아예 교회에 등록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등록을 했다고 해서 꾸준히 예배를 드리지는 않습니다. 목적은 예배가 아니라 큰 교회 안에 모여 있는 교인들의 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후보자들이 찾아와 준 것에 감지덕지 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한심한 일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힘을 가졌다고 하나님의 교회에서도 높여주고 대접해준다면 그것은 비참한 일일 것이고요.


교인들의 표가 아니라 교인들의 돈 혹은 교회의 돈을 겨냥하고 교회를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 숫자가 많을 경우 교회에서 무언가를 제작하거나 구입하면 그 비용이 상당합니다. 그것을 노리고 큰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한 교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회 연감을 만드는데 교인 수가 워낙 많다보니 연감 만드는 액수도 막대하다고 합니다. 연감 제작에 따르는 이권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기반으로 노회나 지방회 정치에 끼어들고, 또 그것을 발판삼아 교단 정치에 뛰어들어 이익을 챙기는 정치장로들에 대한 이야기도 심심찮게 접합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도 아니고 예수님을 닮는 것도 아닙니다. 당연히 예배도 아니고요. 다만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간섭하고 그런 과정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런 정치장로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정치 목사들입니다. 목사로서의 긍지를 스스로 밟아버리는 것이지요. 그들 역시 교회당에 머물고 있지만 예배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긴 놀랄만한 일도 아닙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예배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제사장들을 향해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말 1장 10절)


우리는 말라기의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교회당 문을 닫기를 원한다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겠다고 하신다면 모든 것이 다 끝장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체면도, 돈도, 지위도, 습관도 아닌 오직 예수님 한 분 때문에 교회에 모여 하나님이 받으실 예배를 드릴 예배자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 예배자들이 가득할 때 교회가 비로소 교회다워질 것입니다.




- 안희환 목사님 / 한국 예수비젼성결교회

사람들의 불신앙(존 라일)

놀라운 이적을 보면 사람이 회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
게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착각속에서 살고 죽습니다....
무슨 이적적인 광경을 보든지, 아니면 무슨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
혜가 베풀어지는 것을 목격하면 사람들이 의심을 떨쳐버리고 즉시
분명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우리속에
새마음과 새본성을 심으셔야만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이적을 보아도 그저 일시적인 감동만 약간 일어나고
맙니다.
신기한 것이 지나가고 나면 유대인들처럼 냉랭하고 불신앙의 상태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불신앙과 무관심이 팽배해 있는 것을 보고 놀랄 필요는 없습
니다.
이는 인간의 전적부패와 전적타락이라는 저 강력한 기초교리를 입증
해주는 한가지 증거가 되니 말입니다. 우리가 그 교리를 잘 깨닫지 못
하고 약하게 붙잡고 있으니,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을 보고 그렇게 놀
라는 것입니다.마음의 간교함을 절반밖에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성
경을 좀 더 주의깊게 읽고 그 내용들을 좀 더 조심스럽게 살펴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이적을 행하시고 말씀을 전하시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전혀 변화가 없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러니 현대의 설교를 듣는 자들이 전혀 믿지 않는 상태 그대로
경우가 허다한 것에 대해 놀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믿지 않았다면, 하물며 그의 사역자들의 말씀을
듣는 자들 가운데는 얼마나 불신앙자가 더 많겠습니까? 진리를 말씀
하고 고백합시다. 사람의 완악한 불신앙이야말로 과연 성경이 참되
다는 간접적인 증거에 속하는 것입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사막은 은혜의 땅 31

사업체는 워낙 장사가 잘 되던 상황이라 쉽게 매매자들이 나섰고, 가지고 있던 조그마한 부동산도 적당한 가격에 구매자가 나타나서 빠른 시간 안에 처분할 수 있었다. 12년 전에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개척했던 뉴욕새벽교회는 내가 신학교와 교단 정치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이미 흐지부지 문을 닫은 상태였다. 주의 종으로 하나님 앞에 이보다 더 죄송한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교회 문을 닫게 된 것에 대해서 그리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고 언제든지 마음을 잡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교회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맨해튼에 있는 사업체의 재산들을 다 정리하고 난 후에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불과 3개월 뒤에 미국은 물론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9.11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 9.11사태의 여파는 대단했다. 뉴욕시 전체가 오랫동안 초상집 같은 분위기였고 모든 비즈니스가 문을 닫다시피 했다. 물론 손톱 미용 가게와 같은 사업체는 졸지에 매상이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 이런 일들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될지 아내와 나는 한동안 난감했다. 맨해튼 안에 있던 비즈니스를 3개월 전에 다 정리하고 그곳을 떠난 우리의 입장에서는 한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었지만 그곳에 사업체를 새로 구입해서 들어간 사람들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 속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 가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우리 가족은 애리조나 사막의 도시 피닉스로 제2의 이민을 떠났다. 애리조나로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 우리는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살지 아무것도 정한 것이 없었다. 그냥 길을 떠났다. 가지 고 있던 가재도구들은 대강 정리해서 이삿짐 센터에 맡기고 우리들은 필요한 옷가지만 챙겨서 뉴욕을 떠나 서쪽으로 서쪽으로 며칠을 달렸다. 그렇지만 놀라운 사실은 아무런 불안한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미지의 땅을 향해 온 가족이 떠나면서, 그리고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이 없는 상황에서 그저 운전을 하면서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으면서 마음에 평안함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함이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의 힘이었다. 피닉스로 이주를 결정한 데는 단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피닉스는 사막지대에 세워진 도시이기 때문에 일 년 내내 햇볕 이 많고 건조해서 관절염이나 뼈가 약한사람들이 살기에 가장 이상적인 도시라는 말 때문이었다. 그래서 피닉스는 동부지역이나 다른 곳에서 평생을 살다가 은퇴한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실버타운으로도 잘 알려진 도시였다. 피닉스는 애리조나 주의 수도로서 인구 6백만 명 정도가 살 고 있는 대도시다. 인구 규모로만 봤을 때 미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로 꼽힌다. 사막 위에 세워진 도시이기 때문에 도시 를 관통하는 물이 부족할 것 같지만 도시 곳곳이 푸른 잔디로 덮여 있는 거대한 오아시스다. 대도시들은 대부분 큰 강을 끼고 형성되기 마련이지만 피닉스에서 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웃하고 있는 콜로라도 주 로키 산맥의 눈 녹은 물을 공급받아 오히려 다른 지역이 가뭄에 시달릴 때도 물이 충분한 도시가 바로 피닉스다. 그렇기 때문에 피닉스는 그 자체가 기적의 땅이다. 물이 없는 곳에 세워진 도시가 물을 가장 충분히 쓰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철에 가장 더울 때 기온은 보통 화씨 110도를 넘는다. 한마디로 살인적인 더위라고 할 수 있지만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냉방 시설이 잘 되어 있는 건물 내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차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에어컨이 잘 나오는 차를 필수로 갖추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더위 때문에 못 살겠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피닉스에 도착해서 우리는 다운타운 인근의 조그마한 모텔에 투숙한 후 우리가 살 집을 찾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완전히 무모한 방식이었다. 아직 중학교에 재학 중인 아이들을 둘이나 데리고 살 집도 학교도 정해 놓지 않고 무작정 집을 찾아보려고 다니는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있을 수 없는 일이 었다. 그렇지만 아내와 나는 하나님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시며 인도해 주시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는데 소경이나 다름없는 우리들이 자기의 생각과 의견을 가지고 뭔가 해 보겠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뢰했다. 조그마한 물건을 구입하는 일조차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실 때 그 물건을 구입했다. 피닉스는 정말 덥고 건조했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건조 사우나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흑 하고 호흡이 막혔다. 7월 한여름 이곳의 날씨는 연일 화씨 110도(섭씨 45도) 정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뉴욕도 여름에는 많이 덥고 한국의 여름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덥지만 근본적으로 뉴욕이나 한국의 무더위와 피닉스의 더위는 질이 다른 더위였다. 아스팔트가 태양열에 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스팔트를 깔 때 특별화학물질을 추가해서 넣는다고 한다. 새 집이고 낡은 집이고 할 것 없이 냉방 시설은 가장 기본이다. 냉방 시설이 잠시라도 작동하지 않으면 완전 찜통에서 지내야 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피닉스에 도착한 이후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정에 큰 물질적인 복을 허락해 주셨다. 뉴욕 살림을 정리한 얼마간의 자본을 가지고 피닉스로 이주해 왔지만 나는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아무런 아이디어가 없었다.

하나님의 지헤를 간구하며 충분히 기도한 후에 나는 피닉스 인근에서 주거지역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고 있던 챈들러 지역에 건평 4,000스퀘어피트 규모의 큰 집을 아주 저렴한 가격에 구입했다. 집 주인이 마침 급하게 처분해야 하는 형편이 었기에 당시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내놓았던 것이 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집을 구입하고 난 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집값이 급상승 곡선을 그리며 천정부지로 뛰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집값이 매달 뛰어 오르기 시작했다. 또한 피닉스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상가 건물을 구입했는데 이 건물도 짧은 기간 안에 큰 수익을 가져왔다. 그러나 건물 관리에 많은 시간을 소모하는 것이 싫어서 투자 용도로 구입했던 건물을 일 년 만에 다시 시장에 내놓았다. 그런데 곧 팔릴 것 같았던 상가 건물이 시간이 지나도 적당한 매입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상가 건물이 일정 기간 안에 쉽게 팔릴 것을 예상하고 인근에 땅 120에이커 구매 계약을 체결하고 상가 건물이 팔리는 대로 잔액을 다 지불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상가 건물이 팔리지 않는 것이었다. 

 

출처: 김동욱 500/김태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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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선교'가 아닌 '해방'의 대상이다!




모래시계 같은 한미관계


북한을 잡고 있는 주체사상과 공산주의, 흑암과 어둠과 사탄의 진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무너질지어다.


모래시계를 보는 느낌이다. 70년 한반도 안전판 역할을 해 온 한미동맹이 서서히 균열(龜裂)을 향한다. 지난 10일에는 미(美) 2사단 창설 100주년 기념 콘서트가 파행됐다. 대부분의 초대가수가 공연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시민단체들이 미선이·효순이 15주기를 사흘 앞두고 콘서트 개최에 강하게 문제를 삼았고, 대다수 초대가수가 공연장에 오지도 못한 탓이다.


성주에 배치된 사드(THAAD) 포대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반대 시위로 기름 수송로가 막혀 발전기를 돌리지 못하고 레이더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는 이유다. 주한 미군은 발전기 가동용 유류 수송을 위해 지난 4월 30일과 5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유조차 2대를 사드 기지로 진입시키려 했으나 사드 반대 시위대에 막혀 무산됐다.


이후 주한 미군은 수송용 헬기로 유류를 공수한다. 하지만 헬기로 수송할 수 있는 유류의 양이 많지 않아 자주 유류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달 21일 북한이 북극성 2형 탄도미사일을 발사했을 당시엔 유류 공급이 일시적으로 끊겨 사드 레이더 작동이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는 7일 기존 사드 발사대 2기를 철거하지 않지만 나머지 발사대 4기 배치 작업을 환경영향평가 때까지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환경영향평가 완료 시점에 대해 “시간은 (검토를) 해봐야 알 수 있다”며 “미국 괌에서 사드 배치를 할 때 환경영향평가에 23개월이 걸린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23개월’ 후에는 사드 배치가 될 지도 알 수 없다.


반미(反美)는 이른바 진보적 시민운동의 이념적 좌표다. 제주 해군기지·평택 미군기지·광주 송정리 기지 앞에서 격렬한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인천에 세워진 맥아더 동상을 부숴야 한다며 죽창을 들었던 게 한국의 시민단체다. 자칫 환경영향평가 기간 내내 성주는 전세계 반미의 성지가 될지도 모른다.


미국은 한국의 입장과 다르다. 언제까지 첨단화될 북한의 핵무기·미사일 앞에 20만 명에 달하는 미군과 미국인, 자본을 한국에 내버려 둘 수 없다. 더빈 미 상원의원이 밝힌대로 미국은 한국의 태도에 의문을 품는다. 21세기 ‘애치슨라인’을 그어 한국에서 손을 털고 일본으로 빠지자는 목소리도 높아진다.


트럼프 역시 자신에 대한 탄핵 위기를 사드 철회로 돌파할 수 있다. 국익을 위해선 기존의 동맹과 협상을 우습게 여기는 그다. 자칫 미군은 떠나고 자본도 빠지고 북한과 그 뒤의 중국에 빨려갈 내일이 한반도 운명이 될지도 모른다. 남미식 쇠락과 음일(淫佚)한 기풍에 온 백성이 헤매게 될 수도 있다.


북한의 급변사태와 그로 인한 한국정치의 리셋을 기다리는 절박한 이유가 여기 있다. 북한을 잡고 있는 주체사상과 공산주의, 흑암과 어둠과 사탄의 진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무너질지어다. 북한 동족은 구원과 해방을 속히 누릴지어다.




북한은 '선교'가 아닌 '해방'의 대상이다.


2017년 오픈도어 박해순위(Open Doors World Watch List)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기독교 박해가 늘었다. 90년 대 이후 종교색을 띤 극단적 민족주의는 아시아 국가를 쓸었다. 인도는 극렬 힌두교가 맹위를 떨친다.


2014년 힌두 인도인민당(Bharatiya Janata Party)이 총선을 이겼다. 교회를 상대로 한 폭력과 압력은 4,000만 기독교인들을 위협한다. 방글라데시, 라오스, 부탄, 베트남도 유사하다. 그래도 아직은 기독교 멸절의 단계가 아니다. 인도 박해지수는 15위 수준이다.


1등은 북한이다. 16년 연속. 북한 주민의 기독교 접촉은 곧 죽음일 뿐이다. 오픈도어는 “평양의 독재정권의 종교에 대한 적대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신자들은 완전히 지하에 갇혀 있으며, 대부분 연결이 끊어져서, 그들의 가족들도 서로의 신앙을 숨겨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고 적는다.


‘중국 내에서의 한국행 기도나 기독교 접촉은 공개처형되거나 정치범 수용소에 수용되고 있는데 이는 생명권,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다(2016 북한인권백서)’. 5개 정치범수용소에는 최대 12만. 그 중 많은 수는 기독교인이다.


북한은 선교의 대상이 아닌 해방의 대상이다. 김씨왕조 우상숭배 체제가 끝나지 않으면 믿는 자의 죽음은 그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여유롭다. 미혹인가? 내 문제가 아니라는 지독한 이기심, 현실과 상황과 처지에 결박돼 주님이 주시는 마음을 받지 않는 탓이다. 사랑을 버리고 세상을 따르니 우리 안의 주님의 능력이 풀리지 않는다. 걱정, 근심, 낙심, 낙담, 두려움이다. 종교인이 되지 마시오. 신앙인이 되시오.




출처: 리버티헤럴드 / 김성욱 대표

한 서린 주검만 쌓인다 ...


자유가 없는 땅이다. 무슨 뜻인가? 사생활이 없다. 보호받지 못한다. 5호담당제·인민반제도·생활총화제도, 끊임없이 감시받고 단속되고, 가택수색도 무작위다. 정부 문서 표현처럼, ‘주민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다.


대체 무슨 죄인가? 북한에 태어난 죄 아닌 죄이다. 선거로 대표를 바꿀 수도 없다. 촛불시위는커녕 불만을 드러낼 수도 없다. 불평을 했다간 잡혀갈 뿐이다. 조지오웰의 동물농장 이상이다. 법도 원칙도 없다. 똑같은 재판에 서로 다른 재판과 처벌이 된다. 김정은의 욕지기가 율법이다.


죽음의 영이 법이다. 도망갈 수도 없다. 여행증과 구간별 단속, 강제추방과 접근금지, 짐승처럼 사육된다. 교화소·노동단련대·집결소·구류장, 맘대로 가두고 멋대로 때리고 억지로 노동케 만든다. 노동교화형·노동단련형·노동단련처벌·노동교양처벌·무보수노동처벌 온갖 고문과 형벌들. 그리고 함부로 죽인다. 한 서린 주검만 쌓인다.


수백만이 죽었을까 아니면 수천만인가. 남한의 작은 허물에 쉽게 화내는 우리는 어째서 북한의 절대 악엔 이토록 관대한 것인가? 그렇다. 금수저·은수저·동수저, 계층과 차별은 굵어지고 분노한다.


잊지 말라. 강도 맞은 이웃을 외면할 때 닫힌 사회 가난과 저주는 더욱 번져갈 것이다. 주님이 기뻐할 금식이 물댄 동산, 샘의 원천이다. 깨져야 할 것은 남한의 ‘수저론’ 이전에 북한의 3계층 56개로 분류다. 부모의 신분이 자식의 신분을 정하는 원시적인 폭력이다. 역사 속의 연좌제, 북한의 계급은 이렇다. 봉건시대도 이렇진 않았다. 봉건 시대, 노예제 사회다.


▪ 기본군중 : 1. 혁명가 2. 혁명가 가족 3. 혁명가 유가족 4. 영예군인 5. 영예전상자 6. 접견자 7. 영웅 8. 공로자 9. 제대군인 10. 전사자 가족 11. 피살자 가족 12. 사회주의 애국희생자 가족 13. 기타


▪ 복잡한 군중 : 1. 인민군대 입대 기피자 2. 인민군대 도주자 3. 귀환군인 4. 귀환시민 5. 반동단체 가담자 6. 일제기관 복무자 7. 해방전사 8. 건설대 제대자 9. 의거 입북자 10. 지대 관계자 11. 금강학원 관계자 12. 정치범 교화출소자 13. 종교인 14. 월남자 가족 15. 처단된 자 가족 16. 체포된 자 가족 17. 정치범 교화자 가족 18. 포로 되었다가 돌아오지 않은 자의 가족 19. 해외도주자 가족 20. 지주 가족 21. 부농 가족 22. 예속자본가 23. 친일파 가족 24. 친미파 가족 25. 악질종교인 26. 종파분자 가족 27. 종파연루자 가족 28. 간첩 가족 29. 농촌십장 가족 30. 기업가 가족 31. 상인 가족


▪ 적대 계급/잔여 분자 : 1. 지주 2. 부농 3. 예속자본가 4. 친일파 5. 친미파 6. 악질종교인 7. 종파분자 8. 종파연루자 9. 간첩 10. 농촌십장 11. 기업가 12. 상인성분



<4~5살 아이들이 중국 땅에 팔려간다>


중국 땅의 인신매매. 돼지처럼 팔려간다. 강제송환과 강제낙태와 영아살해. 나는 적지 않은 글들을 썼었다.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10대 중후반 미성년 여자아이들이 꽃제비로 지내다가 인신매매꾼에게 팔려간다. 4~5세 되는 아이들을 중국에 ‘양자’로 보내기 위해 인신매매를 통해 넘겨진다.


한국인은 우리 아들딸이 아니기에 외면한다. 자신의 소박한 행복만을 지키려 버둥댄다.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사명을 따르진 않는다. 겉 사람이 지배하는 종교인의 민낯이다. 속사람은 눌려있는 대다수의 얼굴이다.


▪ “함경북도 온성군 노동단련대에서 동료수용자 여성 1명(36세)이 중국인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보안원에게 구타당해 유산했음(2011년 10월).”


▪ “평안북도 도 집결소에서 동료수용자 여성 1명(26세)이 중국인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군의관이 보안서 병원 내에서 강제수술을 시켰음(2011년 10월).”


▪ “양강도 집결소에서 동료수용자 여성 1명이 중국인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계호원에게 구타당해 유산했음(2011년 11월)”


▪ “2012년 지역 미상의 집결소에서 동료수용자가 중국인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구타를 하여 유산을 유도하였음. 양강도 혜산시 미상의 구금시설에서 동료수용자가 중국인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병원에서 낙태 수술을 받았음(2012년 7월).”


▪ “양강도 혜산시 보안서 구류장에서 동료수용자 1명이 중국인 아이를 임신했다는 이유로 병원에서 낙태 수술을 받았음(2012년 11월).”


▪ “함경북도 길주군 노동단련대에서 동료수용자 1명이 임신 중이어서 노동이 힘들다고 했음에도 강제노동을 하다가 자연낙태하게 되었음(2013년 5월)”


동포여.. 희망을 버리지 마시오!


중국 땅의 인신매매. 돼지처럼 팔려간다. 강제송환과 강제낙태와 영아살해.

나는 지금껏 적지 않은 글들을 썼었다. 하지만 지금도 (전혀) 바뀌지 않았다.


북한 수용소 시설의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


“임신한 여성의 배를 걷어차는 일은 일상적”이라는 탈북여성들의 증언은 되풀이된다. “아이를 비닐에 싸서 살해한 뒤 화장실에 버리게 하였다” “온성 OOO에서 탈북여성 수감자의 출산한 아이를 비닐에 싸서 죽이는 것을 목격했다” “청진 OOO에서 ‘중국 놈의 아이를 뱄다’는 이유로 아이를 낳자마자 비닐에 싸서 질식사시키는 것을 목격했다(대한변호사협회 ‘북한인권백서(2007)’)”


90년대 중·후반 대량 아사 기간 중엔 더 잔인했다.

“박스에 아기 시체가 가득 차면 밖으로 버려졌다” “산모가 보는 앞에서 수건으로 질식시켰다” “아기를 박스 안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비닐에 싸인 채 창고에 죽을 때까지 방치됐다” “젖은 비닐봉지에 넣어 질식시켰다” 데이빗 호크의 ‘감춰진 수용소(Hidden Gulag)’에 나오는 증언들이다.


조사 및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고문 및 비인도적 처우를 받지 않을 권리, 비인도적인 취급을 받지 않을 권리와 신체의 자유와 안전에 대한 권리. 벌레보다 못한 신세이다. 주님은 무엇을 원할까? 침묵인가? 타협인가? 공존인가? 이른바 평화인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 조인 시 “차후도 당분간 공산압제에서 계속 고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될 우리들의 동포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고 성명을 냈었다.


“동포여 희망을 버리지 마시오. 우리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이며 모른 체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한국 민족의 기본 목표 즉 북쪽에 있는 우리의 강토와 동포를 다시 찾고 구해내자는 목표는 계속 남아 있으며 결국 성취되고야 말 것입니다. 유엔은 이 목표를 위하여 확약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국가적 목표, 국가 이성은 빛바랜 휴지가 되었다. 압제의 땅에서 탈출한 상당수 탈북자들마저도 김정은 정권을 유지·지원·강화할 이유를 말하고 다닌다. 햇볕정책을 지지한다. 북한의 맘몬을 피해 이제 남한의 맘몬에 절한다. 초라한 생존의 몸부림, 측은한 사람들.


그러나 예수의 영을 받은 이들은 미혹치 마소서. 가련한 동포를 잊지 마시오. 모른 체 하지도 마시오. 강토와 동포를 다시 찾기 위해 부르짖어 외치소서. 주님이 내리칠 심판의 칼날을 피하소서. 하늘의 명령에 순종하소서.




출처: 리버티헤럴드 / 김성욱 대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나뉘어져서는 안된다!"라고 말씀들을 하십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이 사시는 인생"이기에 그래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아래 "세가지"에 있어서 <한국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은 분명한 <한 목소리>를 내야만 합니다. 이해를 못하실 수도 있겠지만, 이 세가지는 정치적 이슈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슈로 그치는 것도 아니라) '영적인 이슈'로 나라와 후대 가운데 큰 재앙을 가져다줄 수 있는 요인들인 것입니다.


이에 <복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리더 되시는 교계 어른들은 이 세가지에 있어 더욱 분명한 견해를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민감하고 이해관계>가 얽히 섥힌 주제들이란 것을 알지만, "십자가 복음은 총체적 복음이다!"라고 분명한 진리를 외쳐 주셨기에 마치 자물쇠를 열 수 있는 열쇠와도 같은 세가지 중요 사안에 있어 분명한 소리를 내주심으로 듣고 따르는 성도들이 헷갈리지 않도록 해주셔야 합니다!


그것이, 그 위치에 계신 분으로써 맞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원하셨던 "진정 나는 죽고 예수로만 살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첫째, <북한정권>에 대한 분명한 자세를 취해 주셔야 합니다.

아래의 사진들만 봐도 북한 정권은 이해할 수도, 함께 해서도 안되는 집단입니다.



북한 전역에는 무려 3만 8천여 개의 김일성, 김정일 동상이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또한 김일성, 김정일 시체를 보관하기 위해 금수산기념 궁전이란 것을 지었는데, 무려 8억 9천만 달러라는 큰 돈을 썼다고 합니다.


1990년대 후반, 굶어죽은 북한 주민들이 3백만 명이 넘는다고 했는데 이 돈으로 북한 주민들을 먹여 살릴 식량을 샀었더라면 많은 북한의 주민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돈입니다.


둘째로 <동성애에 대한 입장>입니다.

동성애자들의 인권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동성애자들을 품자는 것입니다. 그 분들이 동성애에서 벗어나 치유될 수 있도록 돕자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동성애 확산을 막음으로 대한민국이 대한민국답게 나갈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복음을 말하는 분들이 서로 다른 소리들을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말하는데 어떻게 '동성애'에 있어 성경의 입장과 다른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나아가 한국교회의 후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는 기독 언론 일부는 지속적으로 친동성애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계획적 오보>는 성경의 진리를 거스르게 하는 것을 넘어 왜곡, 변질까지 시키는 것입니다.


13. 셋째로, WCC/종교통합에 있어 분명한 마음을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성경 그 어디에도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함께 섬기라는 말은 없습니다. 아니 "인정치도 말라!"라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의 진리가 이러한데도, 얽혀도 너무 얽혀진 것인지 적잖은 리더십들이 WCC를 옹호하며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많은 한국 교회와 성도들은 강건너 불 난 것 구경하듯 내 일이 아니듯 무심하게 바라보거나, 무슨 올림픽처럼 좋고 감동 있는 전 세계의 종교적 축제의 하나로 여기며 WCC 개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걸어야 한다!"라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 영역에 있어서는 침묵하며 가만히 있는 모습입니다.


"교회당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 복음을 외쳐라!"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십자가 복음>으로 다시 세워주셨기에 선 자들이 더 분명히 설 수 있도록 교회당 밖, 선교지가 아닌 한국 땅 한복판에서 분명히 외칠 수 있도록 높이 올린 깃발처럼 외쳐 주었으면 합니다.


자세히 설명하지는 못해도 어느덧 많은 사람들이 <북한 정권, 동성애, WCC>가 결국 "하나의 문제, 한 뿌리, 하나의 영" 때문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생명책>에 기록될 모든 이들이 따라야 할 <유일한 영>,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 <세가지 영역>에 있어 분명히 말씀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 마라나타!



출처: 김영표 목사님 페이스북

포도주와 떡의 약조

 

홍수가 나서 물이 밀려 내려오는데 강 아래에 대책 없이 앉아 있으면 쓸려 내려갈 것입니다. 산불이 나서 타들어오는데 가만히 앉아 있으면 타 죽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4장에서 주님께서는 누가 망대를 쌓으려면 먼저 앉아서 망대를 쌓는데 드는 돈과 자기가 가진 돈을 계산해 보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자기가 가진 군사는 일만인데 이만의 군사를 거느린 왕이 쳐들어온다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 승산이 없으면 빨리 사신을 보내어 화친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 대책 없이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린다면 미련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미련한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세상이라는 뜨뜻한 욕조에 느긋이 들어앉아 즐기고 있습니다. 세상은 어두워가고 멸망과 심판이 다가오는데도 빛을 찾고 진리를 찾고 자신의 생명길을 찾는 고민은 없습니다.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자신의 영혼을 위하여 고민하거나 두려움 가운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도 없습니다.

기브온 족속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면 그들은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의 칼날을 피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와 아이를 진멸한 것을 듣고 대책을 강구하고 머리를 짜내어 묘수를 찾아내었습니다. 사신의 모양을 꾸미고 낡은 옷을 입고 낡은 신발을 신고 해어지고 찢어진 가죽포도주 부대와 마르고 곰팡이 난 떡을 가지고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본진이 있는 길갈로 찾아와 화친조약을 맺자고 청합니다. 여호수아가 누구냐고 묻자 그들은 멀리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스라엘 무리는 하나님께 여쭈어보지도 않고 그들에게 속아 그들과 불가침 화친조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삼일 뒤에 그들이 바로 가까운 곳에 사는 진멸대상인 기브온 거민이라는 알게 되지만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맹세 때문에 그들을 어찌하지 못 하고 살려 주어야 하게 됩니다. 기브온 거민들은 종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물 긷는 자와 나무 패는 자들이 됩니다. 그리고 가나안 다섯 왕들이 이스라엘과 화친한 기브온을 치려고 쳐들어오자 여호수아는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가서 기브온 족속을 구해내는데 이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도우시고 우박을 적군에게 퍼부어 죽게 하시며 기브온 골짜기에서 온종일 해가 지지 않도록 하여 그들을 진멸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도망쳐 굴 속에 숨었던 가나안 족속의 다섯 왕을 쳐 죽여 나무에 매답니다.

설사 기브온 족속이 속임수를 써서 이스라엘과 맺은 약조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기브온 족속에게 손을 대지 못 하게 하셨고 그 약조를 깨뜨리지 못 하게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약속을 나타내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온 것은 포도주와 떡이었습니다. 그들의 포도주는 낡은 가죽주머니에 담기고 그들의 떡은 마르고 곰팡이가 났지만 주님의 보혈을 의미하는 포도주, 주님의 살을 의미하는 떡은 결코 변질되지 않으며, 주님의 언약은 영원히 변함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진멸당해야 할 기브온 족속이고 거짓말로 속임수를 쓴 교활하고 악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여호수아(“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 예수와 발음이 비슷함) 앞에 포도주와 떡의 언약을 들고 나아온 그들은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훗날 다윗왕 때에 혹심한 기근이 삼년이나 계속됩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간구하자 하나님께서는 사울왕 때 사울과 그 집안이 기브온 사람을 학살한 죄로 인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기브온 족속에게 학살과 학대를 자행한 일곱 사람을 끌어내어 기브온 족속에게 내어주어 목매어 달게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의 진노가 그치고 기근이 그쳤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결코 변하지 아니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 편에 속해야 삽니다. 어떻게 해서든 메시아의 계보에 속해야 생명을 얻습니다. 말세의 징조와 심판의 그림자가 가까울수록 말입니다. 거기엔 도덕과 체면이 아무 소용 없습니다.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고 시아버지 유다를 속여 메시아의 계보에 들어갔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을 숨겨주고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구했으며 메시아의 계보에 속하게 됩니다. 룻은 죽기 살기로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랐고 보아스를 만났습니다. 밧세바는 남편을 배신한 부정한 여자로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면, 체면을 생각하고 도덕을 지켰더라면 그들에게는 결코 구원이 주어지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모든 기준을 뛰어넘는 최고지선(最高至善)입니다. 우물쭈물 따질 일이 아닙니다. 무슨 짓을 해서든 살고 봐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나의 생명을 구원해야 합니다. 떡과 포도주,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최상의 선택

 

우리는 매일 매순간 선택을 해야할 일들을 만나게됩니다.

작게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일생을 결정하게 되는 직업, 결혼대상을 선택해야

하는 것, 어찌보면, 사람의 일생은 하루 하루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평생을 감옥 안에서 후회하며

지내야 하는 사람도 있고, 한 순간 잘 된 선택으로 일생이

별처럼 빛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선택이란 단어 자체는 간단하고 쉬운 말같지만, 실상에

있어서는 그리 쉽게 생각해 버릴 사안은 또 아닌 것같습니다.

 

소련의 스탈린 통치시절, 보리스 콘펠드라고 하는 한

젊은 유대인 의사가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로 끌려

갔습니다.

그 수용소에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만나 그의 열정적인

전도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의사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 영혼의 자유와 평안함을

얻고 두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준 그 그리스도인처럼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는

삶을 살겠다것과 복음을 열심히 전하면서 살겠다’ 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의사로 다시 일하게 되었는데

한 젊은이가 암으로 고생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불법인지 알면서도 수술을 해주었습니다. 그는 수용소 법을

어겼기 때문에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형 전날,

이 의사는 자기가 수술해 준 젊은이 곁에 앉아서 밤늦도록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진지하게

전하였습니다.

 

이튿날 아침, 의사는 처형 직전에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것에

후회가 없습니까? 이때 그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코 후회함이 없습니다. 그는

한 영혼을 사랑하여 복음을 전했고, 자기 목숨을 던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약속을 보여주는

최상의 선택으로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때 이 의사로 인해 살아난 젊은이가 바로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알렉산더 솔제니친입니다.


그렇습니다!
매순간의 모든 선택이 하나 하나 다 중요하겠지만,

특별히 내 주위에서 내가 만난 한 영혼을 구원시킬 것이냐,

아니면 방치해 둘 것이냐, 하는 선택은 가장 중요하며,

그것은 쉽게 생각하고 가볍게 넘겨 버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의 생명은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이라고…”

 

당신의 일생에 허락된 그 많은 선택의 시간들 중,

과연 “최상의 선택”에 사용되어진 시간은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지혜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다니엘12:3절 말씀)”

 

글/최송연

출처: http://lake123172.tistory.com/entry/최상의-선택 [목양연가(牧羊戀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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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생 중반까지 직장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신학공부를 할 때도 직장 생활을 하였고 전도사 시절에도 강도사 때도 목사 안수를 받고도 직장 생활을 하였다.

한마디로 직장과 교회를 겸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언젠가 부목사가 된 나에게 담임목사께서 수요예배 설교를 하라는 명이 떨어졌었다.

직장 퇴근시간이 6시이니까 7:30분에 드리는 수요예배에 설교하는 일은 시간상으로나 경험으로나 큰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목사 초년생에게는 멋진 설교를 해서 성도들에게 목사로써의 자격이 충분하다는 칭찬도 받고 싶었고 또 담임목사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심도 나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드디어 그날은 왔고 난 직장 근무 중에 틈틈이 시간을 만들어 준비한 설교 원고를 몇 번이고 들여다보면서 만만의 준비를 하였다. 

퇴근시간 30여분전!

사장실에 고위직 인사가 찾아온 것이다.

당시 비서실에서 근무하고 있던 나는 퇴근시간이 되었다고 훌쩍 자리를 떠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6시가 넘어 갔다. 도무지 두분의 면담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교회에 갈 시간은 다가오고 안절부절 못하는 내 모습이 내가 보기에도 역역했다.

이대로 퇴근하여 교회로 갈 것인가 아니면 교회가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예배시간이 임박해 왔다.  갈등은 계속되었다. 교회로 가야 하는가 아니면 포기해야 하는가

만일 퇴근해 버리면 사장이 노발대발 할 것이고 또 중대한 업무를 지시할 수도 있을 텐데 여비서 혼자 놔두고 퇴근한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한 것이다. 반대로 교회를 포기한다면 성도들과 담임목사는 뭐라 할까? 목사가 직장에 매여서 설교해야 할 자기 본분을 잃고 예배에도 참석하지 않는 목사가 진정한 목사인가 한마디식4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갈등 속에 나는 그날 교회 가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직장에서는 자기 직분에 사명감이 투철한 사원으로,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뒤엎어버린 파렴치한 목사로 남게 된 것이다.

 

오늘날 이민 사회에서 주일에 일을 하는 성도가 많아지고 있다. 어쩌면 그들 모두가 신앙심이 좋은 교회 직분자들도 있을 것이다. 주일이 되면 이들도 지금 갈등한다. 교회를 가야하느냐? 직장을 출근해야 되느냐?

직장에서는 주일에도 교회를 포기하고 일하러 나온 용감한 사원으로 박수를 보내는 반면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소홀히 한 믿음 없는 직분자로 인정해 버린다.

과연 직장을 포기하고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는 하나님의 축복권 안에 들어간 거룩한 성도이고, 반면 주일 예배를 포기한 성도는 하나님의 축복권 밖으로 밀려난 성도인가?

 

여기에 기독교 상황윤리가 적용된다.

현실적 상황에 따라 우리는 목숨을 걸고 주일을 지켜야 할 때가 있다.

직장도 가정도 포기하면서까지도 주일을 지켜야 할 상황이라면 우리의 마지막 선택은 두말할 필요 없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교회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이 내가족의 삶과 직결되어 있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에 직장을 선택했다고  믿음도 져버렸다고 할 수 있을까?

 

아직도 우리에게는 이원론적인 사상적 흐름이 현대사조를 만들어 가고 있다.

세상은 악하고 교회는 은혜받는 곳으로 이원화 시킨 영지주의 사상이 교회 안에 뿌리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누가 교회 안에만 은혜가 수여된다고 하였나,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직장을 통해서 이웃을 통해서 사건 사고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는 내려지고 있다는 것을....

 

신앙은 갈등에 연속이다.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가? 세상을 선택할 것인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당연히 하나님을 선택해야 한다.

그렇다면 주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세상을 선택하셨나요? 대답은 아니요이다. 비록 직장에 출근하는 것으로 인해 함께 교회 공동체와 예배를 못 드렸지만 그들의 심령 속에는 하나님에 대단 열망이 더 강했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더 하나님을 찾을 것이다. 

결단코 주일을 못 지켰는데도 당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늘 그들 마음에는 하나님! 주일에 교회 공동체와 함께 찬양하고 예배할 수 있는 여건도 만들어 주시고  믿음도 주옵소서라는 고백이 들어 있을 것이다.

 

반대로 교회 못나가는 것이 현실이 어쩔 수 없어서 못나갔다고 당연하게 여기는 성도들에게 묻는다. 어쩔 수 없어서 이젠 당연한 것이 되었다고 여긴다면,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 두자.생활에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21:34)

 

갈등!

이 육신이 벗어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모두 갈등 속에서 존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일께다.     

 출처: 김동욱 500/한동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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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믿음”은 “오직 행위를 일으키는 믿음”
이성호교수

종교개혁의 구호 중에서 “오직 믿음”만큼 오해된 말도 없을 것이다. 이 구호를 잘 못 오해하면, ‘믿음만 있으면 된다.’든지 혹은
‘믿음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은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사랑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따라서 “오직 믿음”은 다른 영적 덕목들을 무시하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믿음”의 “오직”은
그 성격 상 배타성을 지닌다. 즉 “오직... 믿음”은 행위를 배제한다. 그러나 이 배타성도 절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제한적인
영역에서 배타성을 가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핵심을 이야기하면, 신자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만을 통해서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 바꾸어 말하면, 칭의에 관한 한 믿음은 배타성을
가지며 인간의 행위는 어떠한 고려의 대상 혹은 원인도 되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고백서에 따르면, 칭의와 관련하여 우리는
두 가지 “오직”만 있을 뿐이다. 칭의의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고 칭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수단은 ‘오직’ 믿음이다.

‘오직 믿음’을 여기까지만 이해하면, 선행은 들어 설 자리가 없다.
칭의에 있어서 행위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행위를 믿음과 연결시켜서 생각해 보면, 이야기가 상당히
달라지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오직 믿음’에서
말하는 믿음이 어떤 종류의 믿음인가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믿음은 여러 방식으로 이해되었다. 어떤 경우에는 단지 어떤 교리에
대한 지식을 의미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지식이 전혀 없어도 하나님이나 교회가 전하는 말을 믿고 싶은 열망도 믿음이라고
하였다. 그 결과 로마교회는 형성된(formed) 믿음과 미형성된
(unformed) 믿음을 구분하고 지식없는 미형성된 믿음도 일종의 믿음으로 간주하였다.

로마교의 믿음관에 대항하여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믿음에 대한 그 유명한 자신의 정의를 내린다. 믿음은, 칼빈에 따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굳건하고 확실한 지식인데, 그
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약속의 진리에 근거하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었고 우리의 마음에 인쳐졌다.”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믿음은 단순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다. 그것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인쳐진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신뢰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신자에게 주어진 약속은 오직 이 참된 믿음만을 통해서 획득된다; 행위가 들어설 자리가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전혀 없다.

그렇다면, 이 참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수단의 일만 하고 다른 일은 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종교개혁가들이 믿음
이라고 이야기라고 할 때는 항상 행위를 일으키는 믿음을 말했기 때문이다. 만약 믿음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이 행위를 수반하지 않는다면, 전자는 헛된 믿음 혹은 죽은 믿음이라
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실제로 전혀 믿음이 아니다. 따라서 종교개혁이 말하는 ‘오직 믿음’은 다음 명제로 요약할 수 있다: 신자는
‘오직 행위를 일으키는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
‘오직 믿음’을 이렇게 온전한 의미에서 이해한다면 이신칭의가 선행을 소홀히 취급한다는 주장은 타당성이 전혀 없다.

이 점에서 우리는 칭의, 선행, 믿음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세밀하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칭의는 선행의 전제가 되고, 믿음은 칭의를 받아들이는 수단이며 그와 동시에 선행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그 결과, 칭의, 선행, 믿음이 아주 밀접하고도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어떤 학자들은 선행을 칭의와 어떤 인과론적인 관계에까지 ‘격상’시키려고 하였
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결론들을 칼빈에게서 직접 찾으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원종천 교수의 경우에는 칼빈이 선행을 칭의에
있어서 열등적 원인(inferior cause)이라고 말한 점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원교수는 칼빈이 그 용어를 사용한 문맥
에 대해서는 충분히 주목하지 않는다. 우선 우리는 칼빈이 열등적 원인뿐만이 아니라 그것과 대조되는 우월적 원인들도 언급하
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칼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용어를 빌려서 구원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우리 구원의 효과인(efficient cause)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다; 질료인(material cause)은 성부 하나님의 순종이다; 수단인(instrumental cause)는 성령님의 조명, 즉, 믿음이다; 최종인(final cause)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즉, 우리 구원에 있어서 선
행은 앞에서 언급된 4가지 주요 원인들 중에 하나라도 될 여지가 없다; 구원은 전적으로 성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리고 나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들은 [앞에서 말한 원인들] 주님으로 하여금 선행을 열등한 원인(inferior causes)으로 포용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주님께서 자비로 영생의 기업을 위해 정하신 자를, 당신의 일반적 경륜을 따라, 선행을 통하여 소유하도록 인도하신다. 경륜의 순서에 있어서 그는 앞에 나오는 것을 뒤에 나오는 것의 원인이라고 부른다. 이런 식으로 그분은 때로 영생을 선행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말한다.

칼빈에 따르면 왜 선행을 열등한 원인이라고 부르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경륜에 있어서 순서를 정하실
때 선행이 있고 나서 영생의 기업을 선물로 주시기 때문이다; 선행 때문에 영생의 기업을 선물로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어떤 사건이 다른 사건에 비해서 단지 순서상 먼저 발생하였다고 해서 반드시 둘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칼빈은 곧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함으로
자신이 한 말이 오해가 되지 않도록 덧붙인다. 그가 말하기를,
“그러나 참된 원인이 고려될 때에는,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행위에 피난처를 두지 말고 오직 그분의 자비만을 묵상하도록 명하신다.” 적어도 이 말에서 확실한 것은 칼빈이 언급한 “열등한 원인”은 “참된 원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칼빈은 자
신의 주장을 성경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 로마서 6장 23절을 인용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주님의 은혜는 영생이다.” 여기서
칼빈은 질문을 던진다. 사망의 원인이 인간의 죄라면, 영생의 원인은 인간의 의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영생의 원인은 의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이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 구원의 원인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이다. 따라서 칼빈이 선행을 열등한 원인으로 불렀을 때는 구원과 선행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원종천 교수는 또한 선행을 열등한 원인으로 보는 칼빈의 견해를
루터는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데, 이것도 사실에 그렇게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루터는 우리의 순종을 “부분적 원인”이라고까지 부른 적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그것이
쓰여진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루터와 칼빈의 견해가 크지 않다
는 것을 금방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우리의 순종이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것은 우리의 칭의에 있어서 부분적 원인이다. 필수적
인 것들이 많이 존재하지만 원인이거나 의롭게 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지구는 필수적이지만 의롭게 하지 않는다. 만약 죄인이 구원 받기를 원한다면, 그는 반드시 존재하여야 한다. . . . 어거스틴이 한 말은 진리이다: "당신 없이 당신을 창조하신 분은 당신 없이 당신을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행위는 구원에 필수적이
다, 그러나 구원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믿음만이 생명을 주기 때문이다. 위선자들 때문에 우리는 선행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말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칼빈과 마찬가지로 루터가 선행에 대해서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루터는 선행을 결코 과소평가
하지 않았다. 특히 선행의 필수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루터는 선행이 구원에 필수적인 원인이라는 생각을 거부한 것 뿐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선행이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고 말한다고
해서 선행이 부차적이거나 사소한 요소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반드시 선행과 함께 우리를 구원하시지만, 선행이 구원의 원인이 되도록 하시지는 않는다. 루터에게 있어서, 선행이 구원에 필수적이라는 말이 선행이 구원의 원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선행은
단지 구원에 필수적으로 수반될 뿐이다.

 

출처: 개혁주의 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가나안 성도가 교회를 떠나는 진짜 이유는…"

 

신앙이 있지만 교회에 가지 않는 '가나안 성도', 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흔히 교회에서 상처를 입었거나 제도에 대한 불신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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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선교연구원이 미국의 리서치 그룹 '바나 리서치'가 진행한 가나안 성도 관련 보고서를 공개했다.ⓒ데일리굿뉴스 

 

美 가나안 성도 증가 추세…전통적 신앙관은 유지

 

최근 문화선교연구원(원장 백광훈, 이하 문선연)은 바나 리서치의 보고서를 소개했다.

 

바나 리서치는 보고서에서 가나안 성도를 "예수는 사랑하지만 교회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 이들은 지난 6개월 동안 교회를 출석하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2004년에는 4%에 불과했던 가나안 성도가 최근에는 10%로 증가했다. 이런 현상은 남성보단 여성이, X세대와 베이비 붐 세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하지만 이들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전통적 신앙관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응답자 93%가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답했고, 응답자 94%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우주의 창조주이며, 전 세계를 다스리는 분"이라는 데 동의했다.

 

특이한 점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은 '종교는 궁극적으로 같은 가르침을 준다'는 데 동의하는 비중이 높았다.

 

"가나안 성도, 교회 사역 이해하는 중요 요소"

 

그렇다면 이들은 왜 예수님은 사랑하면서 교회는 사랑하지 않는 걸까. 문선연은 이 부분에 대해 "가나안 성도들은 교회에 대한 상처나 제도에 대한 불신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의 영적 성장에 교회의 행태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아서 떠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전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실체에 대한 이해를 위해 제도적인 교회를 찾았다면, 지금은 자신의 내면에서 그 진리를 탐색하고 외부에서 확인을 얻는 방식의 삶을 택한다는 것이다.

 

문선연은 "가나안 성도들의 이런 양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가나안 성도들과의 소통 문제, 충돌을 피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문선연은 "가나안 성도들에 대해 반드시 이해해야 할 부분은, 그들은 신학과 공동체, 제자도, 책임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다"면서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이런 개념들에 대한 명확하고 올바른 이해와 경험을 쌓는 효과적인 공간으로 더 이상 기존의 교회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바나 리서치 로세나 스톤 편집장은 "가나안 성도들은 오늘날 교회 사역을 이해하는 데 더 중요해지고 있고, 이들의 수가 점점 증가하면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며 "앞으로 교회가 이들에게 명확하게 전달해야 할 메시지는 교회가 존재하는 본질적 이유일 것이다. 사람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신앙의 영역이 무엇일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김주련 ⓒ 데일리굿뉴스

가져온 곳: USA 아멘넷

오늘 큐티시간에 <순종>에 대한 성령의 음성을 듣고 결코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 이렇게 블로그에 끄적여 본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순종을 어려워하며 나 또한 그러하다. 그 이유는 순종을 시작하면 끝까지 '내 힘으로' 순종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힘과 의지력을 총동원하여 힘들어도 이를 악물고 순종하고 또 순종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순종이라는 말을 처음 딱 들으면 '어렵다'는 고정관념이 고개를 쳐드는 것이다. 


그런데 순종은 그런게 아니었다.


죄를 짓는 과정도 유심히 살펴보면...

유혹이 내게 왔을 때에 그것에 대한 호기심과 이끌림에 의해 한번 첫발을 내딛으면 처음엔 어느 정도의 넘지말아야 할 선이 있다가도 그 선을 넘어버리면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서운 속도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순종의 과정도 이와 똑같다.


하나님의 말씀이 왔을 때에 처음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마음으로 첫발을 내딛을 수 있다. 그리고 내 마음과 생각 속에 자리잡고 있는 어느 정도의 상식선과 보편적 가치관이라는 합리적인 틀 안에서만 순종한다. 그런데 그 선을 넘어서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성령께 이끌린 바 되어 무서운 속도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를 경험하는 통로로 쓰임받게 되는 것 같다. 


순종은 그래서 참 가슴을 뛰게 하는 즐거운 일인 것 같다. 

작디작은 내 삶을 통하여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께서 과연 무슨 일들을 행하실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된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영적인 세계의 법칙을 발견하게 된다.


사탄마귀는 내 안에 죄의 유혹을 붙잡는 그 행위(불순종)를 합법적으로 붙잡고 내 속에 들어온다는 것이며, 성령께서도 내 안에 순종하고자 마음을 기울이는 그 선택의 행위(순종)를 합법적으로 붙잡고 내 영을 사로잡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하늘나라의 법칙이다.


따라서 불순종을 통해 사탄마귀에게 내 삶의 주도권을 합법적으로 내어주느냐, 아니면 순종을 통해 성령께 내 삶의 주도권을 합법적으로 내어주느냐의 싸움인 것이다. 나는 성령의 생명정부가 들어서서 마음천국이 이루어진 거듭난 사람이다. 죄는 불법이 되었고, 언제든지 거절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있다. 이미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당당히 순종을 선택하여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여전히 남은 죄의 찌꺼기와 잔재들에 마음을 기울이지 말자!


순종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힘으로 행하는 힘겨운 여정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순종은 첫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그 발걸음을 떼기까지가 힘겨운 갈등의 시간인 것이다. 일단 순종의 첫발걸음을 내딛으면 그 첫발걸음을 근거로 하여 성령께서 합법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신다는 놀라운 진리... 결코 첫발걸음을 떼기 전에는 성령께서 강제로 내 삶을 강권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의지를 주신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에)


순종은 어렵지 않다. 첫발걸음만 내딛으면 그 이후부터 성령께서 개입하시니까...


그렇다고 첫발걸음만 내딛고 그 이후엔 나몰라라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성령께서 개입하시는 흐름을 타고 끊임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갈망하며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동행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저 높은 하늘 보좌에까지 날아가는 것이다. 지속적인 사랑과 소망과 믿음의 엔진을 가동시켜 주시는 성령 안에서의 자유로운 고공비행을 누리면 되는 것이다. 


순종의 첫발걸음은,

성령께서 개입하시는 합법적 근거라는 것을 기억하며...

오늘도 큐티하며 순종의 첫발걸음을 내딛는다.

할렐루야!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 네 몸의 소생이 모래 알갱이 같아서 그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셨느니라 " (사 48:18-19)


<핵심정리>

- 순종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힘으로 해내야 하는 힘겨운 작업이 아니다.

- 내 할 일은 <순종의 첫발걸음>을 내딛음으로써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는 합법적 근거를 마련해 드리는 것이다.

- 그 이후부터는 거의 대부분 성령의 일이며, 순종의 첫발걸음을 내딛은 이후에 내가 할 일은 내 삶 속에 벌어지는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과 역사하심을 바라보며 마음껏 즐기는 것이다.



출처: 곰탱이의 하늘우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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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교회의 전도사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교회 헌금 다 모아봐야

목사님 사례비도 드리기 어려운 교회였지요.


어느 날 예배가 끝나고 목사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전도사님. 사례비에요" 하시면서 봉투를 건네시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 돈을 어떻게 받을 수 있겠는가.


목사님도 사례를 받지 못하시는 상황인데

"목사님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습니다."


단호하게 거절하고 서둘러 집으로 와버렸지요.


몇 시간 후, 딩동 소리가 나서 문을 였었더니,

장을 거하게 보셔서 집 앞에 두시고

목사님은 도망을 가버리신 것 아닌가.


대략난감...


그런데 묘한 승부욕이 발동이 되더군요.


찢어지게 가난한 영국 유학생 생활이었지만

"여보. 돈 꼬불쳐 놓은 것 다 주라"

그 돈을 들고 테스코로 달려가서

두배로 장을 봐서 목사님 댁 문 앞에 두고

도망을 쳐버렸지요.


"내가 이겼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얼마 후 다시

우리 집 초인종 소리가 울려서 나가보니,

이번에는 각종 과일이.....

목사님은 다시 도망을 가셨고요.


내 수중에는 더이상 돈은 없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고,

고민이 참 많이 되었습니다.


그 때 하늘의 지혜가....


목사님께서 사주신 과일과 장꾸러미를 들고

다시 목사님 댁으로 갔지요.


아뿔싸.

대문앞에 서 계시는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전도사님 마음 다 아니까... 이제 그만합시다."


가난했던 그 시절,

목사님과 부등켜 안고 집 앞에서 참 많이 울었지요.


가난한 처지의 두 사람이었지만

서로를 향한 신뢰와 사랑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게 느껴지니 더 눈물이 났습니다.


목사님 댁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그 길과

그 시간을 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도 저런 목사 되어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지요.


시간이 꽤 지났는데...

나는 과연 그런 목사로 살고 있는지...

부끄러운 날들이 쌓여만 갑니다.



출처: 김관성 목사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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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르트로부터 배우지 못한 것들[1]

 

저자: 리차드 멀러 (Richard Muller, 전 미국 칼빈 신학교 역사신학 교수)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고경태. 색을 첨삭함

 

지난 한 해 (1986년) 동안 칼 바르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고 20세기 신학에 기여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수많은 기념행사가 열렸고 찬사가 쏟아졌으며 기사가 쓰였다. 필자도 그와 같은 일을 하고 싶지만, 약간은 낮은 어조로 하고 싶다. 필자는 바르트가 그 시대의 가장 저명한 신학자들 중 한 명이라 인정하지만, 그를 루돌프 불트만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라거나 혹은 ? 만일 칸트 이후 신학을 전반적으로 고려할 경우 ?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말하기에는 망설여진다. 그리고 필자는 확실히 바르트의 더 소란스러운 추종자들 중 몇 명에 의해 우리에게 강요되는 판단, 즉 그 위대한 바젤 출신 교수가 아타나시우스 이후 가장 중요한 사상가라는 식의 평가는 삼가하고 싶다. 이 주장이 아마 에딘버그 시에서는, 혹은 그 시에 있는 성지인 T&T Clark 출판사의 도보거리 내에서는 수용될 수 있겠지만, 신학적으로든 지리적으로든 뭔가 다른 시각에서는 이 주장이 지나치다. 바르트는 아타나시우스와 매우 대조적인 입장에 서 있고, 이와 관련해서, 어거스틴, 아퀴나스, 루터, 그리고 칼빈과도 매우 대조적인 입장에 서 있다. 거의 이들과 견줄만큼 뛰어나지만, 극히 소수의 참으로 위대한 이 사상가들과는 대조적으로, 본질적으로 비규범적인 신학을 양산한 신학자로서의 바르트는 오리겐, 죤 스코투스 에리제나, 그리고 (필자가 추가하고 싶은) 슐라이어마허와의 조합에 위치한다. (멀러는 아타나시우스와 견줄 것이 아니라, 오리겐, 존 스코두스, 에리제나, 그리고 슐라이어마허로 조합시켰다. 좋은 의견이다.)

 

필자의 생각에는 바르트가 성공적으로 필자 세대의 많은 신학자들을 성경으로, 교회의 위대한 전통으로, 특히 종교개혁과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신학의 전통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바르트 자신의 사상의 유용하고 통찰력 있는 요소들 대부분은 확실히 종교개혁과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신학에서 유래한다. 필자 자신의 신학 훈련 초창기에, 필자의 교수들이 필자에게 불트만, 노트(독일의 구약학자), 슐라이어마허, 매퀴리, 화이트헤드, 그리고 당연히 바르트로 구성된 꽤 고정된 규정식을 먹였을 때, 필자는 바르트로부터 그 밖의 다른 곳에서 필자의 신학적 토대들을 찾는 법을 배웠다. 그렇다면 이제 필자가 바르트로부터 배우지 못한 것들에 대해 말해 보겠다.

 

첫째로, 필자는 바르트로부터 어떻게 ‘신학함’을 배우지 못했다. 그리고 필자는 그 누구도 바르트로부터 그것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라고 감히 추측해 본다.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을 정독하면서, 필자는 과도하게 많은 군말과 종결 짓기를 거부하는 관념들을 지속적으로 경험했다. 두뇌가 날카로운 지성이 개념들을 갖고 놀고 그 개념들을 모든 인식가능한 각도에서 혹독하게 검증받게 하는 것은 흥미롭고 때로는 심지어 유익하다. 하지만 인간의 말로 신적 진리를 주장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가정하고 따라서 지속적으로 그 주장 자체의 불가능한 공식화들을 부정하고 재진술하는, 바르트의 변증법적 방법은 신학적 주장의 두 극단 사이의 공식화가 갖는 문제점을 단지 쉽게 그리고 더 교훈적으로만 주장할 수 있었다 ? 그런 다음 다른 이슈로 옮겨 가서, 마침내 독자에게 서 너 권 분량으로 된 완성된 교의학을 내용의 손실없이 제공했다. 바르트가 그들의 작품들을 존경심을 가지고 읽었던 개신교 스콜라주의자들은, 그들의 명료함과 간결함에 관한 주목할 만한 관용 표현들로, 모든 인간의 신학은 틀림없이 모형적이고 오직 하나님의 선물인 계시의 은혜에 의해서만 신적 원형을 성공적으로 반영하는 하나님에 대한 불완전하고 유한한 진술이라는 점을 인정하였다. 바르트는 필자에게 신학적 공식화에 대한 그런 법칙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 지를 가르쳐 주었지만, 필자는 그 법칙 자체를 바르트로부터 배웠다고 말할 수 없다.(멀러는 바르트에 대해서 유익은 없었다고 제시하면서, 바르트의 신학이 계시, 신적 원형을 반영하는 것으로 인정했다. 멀러는 개혁신학의 계시와 바르트의 계시 이해의 차이에 대해서 제시하지 않았다. 고경태는 바르트의 계시와 개혁신학의 계시 이해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바르트의 계시는 발생되는 자연적(판단에 의해서 신적인 것이 됨)이고 연속적이고, 개혁신학의 계시는 신적이고 종결되었다)

 

둘째로, 필자는 바르트로부터 어떻게 성경해석을 하는지에 대해 배우지 못했다. 필자가 공부했던 바르트의 첫 소논문은 『로마서 주석』이었다. 신학교 시절을 회상할 때, 필자는 거기서 시작했는데 이는 필자가 바르트를 읽어야 한다고 믿었지만, 필자는 『교회 교의학』을 필자의 서재를 위한 도서 예산의 한도를 능가하는 완전한 통일체로서의 전집 작품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으로부터 그 당시 성경해석의 차갑고 역사비평적이며 본질적으로 비신학적인 내용에 대한 필자의 이제 막 시작된 반감들이 어느정도 타당한 반감들이었음을 배웠다. 그리고 바르트의 서문이 필자를 종교개혁자들의 주석적이고 해석학적인 접근 방법들로 안내했을 때, 필자는 오늘날 교회의 삶을 위한 성경본문의 신학적 의미로의 진입로를 발견했다. 하지만 필자가 바르트 자신의 주석을 더욱 읽어감에 따라, 그 주석의 급진적으로 실존주의적 접근법이 바르트의 사상에 바울의 영향보다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이 더 컸다는 것을 필자에게 가르쳐 주고 있음을 깨달았다. 로마서 본문과의 참된 접촉은 바르트의 논문에서 극미하다.

 

이와 유사하게, 필자가 마침내 『교회 교의학』을 공부하고 거기서 다양한 성경 본문들에서 유추한 바르트 신학의 기독론적 원리를 목격하기 시작했을 때, 필자는 빈번히 어떻게 그 본문 자체가 바르트에 의해 그 원리를 위해 선택된 방향으로 향하는지를 보느라 당황스러웠다. 가룟 유다의 이야기에 대한 바르트의 독해는 한 가지 좋은 예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본문들(마 27:1-10과 행 1:16-20)에서 돌이킬 수 없는 유죄판결을 본다: 사도행전에서 그 본문은 저주 시편의 예리한 인용으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바르트는, 그리스도가 유일하게 선택되고 유일하게 유기된 인간이라는 자신의 교리적 가정에 입각해서, 유다의 운명에 어떤 희망을 찾는다. 이 경우의 성경해석적 우둔함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그 자체로서는 분명한 관련성이 없는 본문들을 열기 위한 발견학습적(heuristic) 열쇠로서 그의 지배적인 기독론적 원리를 빈번히 사용한다. 그 결과는, 그런 해석이 “기독론적”이고 “신학적”이라는 모호한 주장에 의해서만 정당화되는, 신뢰할 수 없을 정도로 임의적이고 교리적인 성경해석이다. 필자는 바르트로부터 어떻게 성경해석을 하는지에 대해 배우지 못했다. (멀러는 로마서 주석에서 바울보다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을 더 받았다고 제시했다. 멀러는 바르트의 유기와 선택에 대해서 언급했고, 가룟 유다를 희망으로 말하는 것을 제시했다. 그러나 분명한 맹점은 제시하지 않았다. 바르트에게서 어떤 유익을 받지 않았다고 제시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바르트 신학의 맹점까지 지적해야 학생들이 평가하고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셋째로, 그리고 결론적으로, 필자는 바르트로부터 기독교 전통의 통찰들을 오늘날 사용하기 위해 어떻게 적합화시키는 지를 배우지 못했다. 『교회 교의학』은 의심의 여지없이 기독교 교리사에서 유래한 자료들의 금광이다 ? 하지만 바르트는 아주 빈번하게, 이 수집된 자료들의 토대위에서 실제적으로 건축한다기 보다는, 그 자신의 공식화를 위한 포장으로 그것들을 사용하고 그 자료들 자체의 의미나 방향을 전달하는 데는 실패한다. 이 문제의 한 예로서, 필자는 바르트의 가장 통찰력 있는 역사적 논점에 관한 해설들 중 실제적인 것 하나를 지적하고 싶은데, 그것은 예정(predestination)에 대한 논의이다 (『교회 교의학』(영문판), II/2권, 60-88, 106-115쪽). 그 체계 속에서는 모든 교리가 어쨌든 하나님의 작정으로부터 추론되는 예정론적 체계를 개혁주의 정통 신학자들이 결코 제시하지 않았음을 바르트도 인정하고 필자도 옳게 믿는다. 하지만, 바르트는 작정 교리에 대한 상당히 경직된 표현이 ‘완전히 부재(不在)하거나 숨겨진 하나님(Deus nudus absconditus)’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바르트는 아만두스 폴라누스 (Amandus Polanus)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자신의 해결책의 단서를 발견한다: 선택이 세 위격 모두에 해당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의 사역이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은 성부로서가 아닌 하나님으로서 선택하시고, 따라서 성자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선택에 있어서 선택하시면서도 성취하신다. 이 단서로부터, 바르트는 “선택하고 선택받은 예수 그리스도” 라는 그 자신의 교리를 통해 ‘완전히 부재하거나 숨겨진 하나님(Deus nudus absconditus)’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나아간다. 바르트가 주목하지 않은 점은 본질적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행위로서의 작정의 개념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하는 것으로서의 선택의 정의와 더불어, 16세기와 17세기의 개혁주의 신학의 전형적인 특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예전의 신학에서 우리는 어디서도 ‘완전히 부재하거나 숨겨진 하나님(Deus nudus absconditus)’의 문제를 만나지 않는다. 더욱이, 선택하고 선택받은 중보자는 또한 유일하게 택함받고 유일하게 버림받은 인간이라고 하기 위한, 그리스도에로의 선택 (election into Christ) 사상에서의 바르트의 (교리적) 붕괴는 그가 논평했고 자신이 제시했던 교리 문제에 대한 자신의 해결책의 단서를 그것으로부터 취하는 그 신학적 자료와는 어떠한 실제적 관계성도 가지지 않는다.

 

필자는 선택교리에 대한 예전 개혁신학의 개념들에 관한 바르트의 고찰 가운데서 어떤 일이 실제적으로 일어났는지에 대해 단지 역사적 가정을 제공할 수 있다. ‘완전히 부재하거나 숨겨진 하나님’의 문제는 그 예전의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바르트 자신의 사상의 칸트-철학적 배경에서 기인한 문제이다: 초월적이고 도달할 수 없는 물자체(noumenon)로서, 현상의 질서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은 현상의 질서에 그분의 위치가 어떻게든 정해질 수 없는 한,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혹은 인식할 수 없는 분이다. 그리스도는 바르트에게 이 위치를 제공하고, 따라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위들에 대한 지식의 유일한 초점을 제공한다. 그리스도의 선택에 바르트가 초점을 맞춤은, 슐라이어마허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완전한 의존성을 지속적으로 일관성있게 의식하는 단 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택 교리와 관련된 칸트-철학적 장애물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 하지만 그것은 개혁주의 전통에 관한 고찰에서부터 유래하지 않는다. 바르트는 역사적 자료들이 그것들 자체의 목소리를 발하도록 하기 보다, 오히려 그 자료들을 자신의 해설을 위한 포장으로 사용한다. 이러한 논거 방식은 『교회 교의학』의 다른 많은 곳에서도 증명될 수 있다 ? 예를 들어, 『교회 교의학』의 첫 두 권 반에 걸쳐 나오는, 개신교 정통주의 신학서론에 대한 바르트의 여러 해설들에서. (멀러는 바르트의 선택론이 개혁주의 전통에서 유래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개혁신학에 선택론이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있다. 고경태는 바르트는 개혁신학의 예정을 거부했다. 그리고 선택론으로 전향했다. 예정은 개혁신학(네델란드)에서 구속협약(pactum salutis)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 등을 예비적인 가치로 인정하고, 자기 신학을 바른 신학(Dogma)로 제시한다. 비록 선택론이 그리스도 중심(유기와 선택)으로 몰고가지만, 개혁신학의 그리스도 이해와 전혀 같지 않다. 개혁신학은 그리스도께서 유기와 선택의 중심이 아니라, 선택의 주체라고 한다. 멀러는 바르트의 선택에 대해서 거부하지만, 개혁신학과 명료하게 다름까지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의 방법론과 성경해석과 역사 사용에서, 바르트는 그의 독자들을 그 자신의 개인적인 신학적 씨름들을 넘어서는 곳으로 향하게 하는데 있어 일관성 있게 실패한다. 그의 주장들은 자주 눈부시다. 그것들은 바르트 자신이 나왔던 자유주의 신학의 많은 소중한 개념들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의 주장들은 또한, “종교학”의 상대화시키는 접근법이 자주 신학적 견해에 대한 학문적 토론을 지배하려고 으르대는 시대에, 기독교의 고유성에 대해 우리에게 강하게 상기시킨다. 바르트의 신학의 대단한 가치는 그것이 우리 자신들의 신학의 뿌리로 우리를 향하게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신학의 대단히 역설적인 점은 일단 한 번 그것이 우리를 성경과 전통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나면, 그것은 현재를 위해 성경과 전통을 해석함에 있어 매우 작은 도움만 우리에게 준다는 것이다. 어거스틴, 아퀴나스, 루터, 그리고 칼빈을 공부하면서, 필자는 이들 각 저자는 성경과 전통을 묵상할 의무뿐만 아니라 성경과 전통 둘 다를 그들 자신의 시대에 그리고 교회의 다음 세대에 전달할 의무를 의식하고 있었음을 지속적으로 깨닫는다. 이 저자들은 항상 그들 자신의 작품을 넘어 더 위대한 교회의 과업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들은, (1) 모방될 수 있는 방법들을 채택함으로, (2) 성경을 현재적으로 여는 성경해석적 논거들을 제시함으로, (3) 성경본문을 존중하고 그 본문을 어떤 지배적인 발견학습적 원리들에 부합되게 하려고 굴복시키지 않으므로, (4) 그들 자신의 견해들을 위한 포장으로서가 아니라 신학적 이슈의 의미를 분별하는데 있어 통로와 안내서로서 과거의 신학적 고찰의 전통을 다룸으로, 그렇게 한다. 필자는 칼 바르트로부터 이러한 접근법을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필자에게 그것을 배울 수 있는 곳을 가리켜준 것에 대해 필자는 항상 그에게 감사할 것이다.


(바르트를 비평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학문을 엉킨 실타래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계몽철학과 현대철학에 자유주의와 고대신학까지 묶었다. 자기 나름으로 묶어 타인이 볼 때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실타래를 만들었다. 그러나 대원리(Dogma)는 분명하다. "하나님은 사랑이고, 자유로운 선한 행동이다" 이다. 이 세 원리에서 모든 것을 묶었다. 개혁신학에서 하나님은 "거룩하고 공의로운 선한 존재이다"이다. 원리에 입각해서 들어가지 않으면 결코 바르트의 신학은 해부할 수 없다. 자기 신학 원리가 없는 학도는 결코 바르트의 미로에서 나올 수 없다. 바르트의 신학에 대해서 말하는 자.. 자기 신학 원리를 말해야 한다. 멀러가 바르트에게서 배우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이 유익이 있지만, 명료하게 잘못된 것을 지적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1] The Reformed Journal 37호(1987년)에 “What I Haven’t Learned from Barth”라는 제목으로 실린 내용으로 번역 및 게재의 허락을 받고 게재합니다. 저작권은 The Reformed Journal과 저자에게 있습니다.



Muller: What I Haven’t Learned From Karl Barth

By Richard A. Muller Reformed Journal 37 (1987): 16?18.

During the past year numerous celebrations were held, testimonials given, and articles written?all for the sake of celebrating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birth of Karl Barth and recognizing his contribution to theology in the 20th century. I would like to do the same thing, but in somewhat muted tones. While I recognize Barth as on e of the most eminent theologians of the age, I hesi­tate to proclaim him more important than Rudolf Butlmann or?if the whole sweep of post-Kantian theology is examined?than Friedrich Schleiermacher. And I cer­tainly would refrain from the judgment pressed upon us by some of Barth’s more vociferous followers that the great Basel professor is the most seminal thinker since Athanasius. That claim may be acceptable in Edin­burgh, within walking distance of the sacred precincts of T. & T. Clark, but from any other perspective either theological or geographical, it is excessive. Quite in con­trast to Athanasius and, for that matter, quite in contrast to Augustine, Aquinas, Luther, and Calvin, Barth stands in the company of Origen, John Scotus Erigena, and, I would add, Schleiermacher, as a theologian almost as brilliant as those of the first rank but who, in contrast to those few truly great thinkers, produced an essen­tially non-normative theology.

Barth did?and I think successfully?direct many theologians of my generation back toward the Scripture and toward the great tradition of the church, specifically toward the tradition of Reformation and post-Reforma­tion Protestant theology. Indeed, most of the useful and insightful elements of Barth’s own thought derive from Reformation and post-Reformation Protestantism. Dur­ing the formative years of my own theological training, when my professors fed me a rather steady diet of Bultmann, Noth, Schleiermacher, Macquarrie, Whitehead, and of course Barth, I learned from Barth himself to look elsewhere for the foundations of my theology. Let me comment, then, on what I haven’t learned from Karl Barth.

In the first place, I haven’t learned how to “do theology” from Karl Barth?and I would hazard the guess that no on e else has either. As I peruse the Church Dogmatics, I have the consistent experience of excessive verbiage and of ideas that refuse to achieve closure. It is inter­esting and sometimes even instructive to watch a bril­liant mind play with concepts and subject them to intense scrutiny from every conceivable angle But Barth’s dialectical method, which assumes the impos­sibility of stating divine truth in human words and therefore continually negates and restates its own im­possible formulations, could easily and more instruc­tively have simply stated the problem of formulation between two poles of theological statement?and then passed on to another issue, finally providing the reader with a finished dogmatics in no more than three or four volumes, with no loss of content. The Protestant scho­lastics, whose works Barth read with respect, recog­nized in formulae remarkable for their clarity and brevity that all human theology must be ectypal, an imperfect, finite statement about God that successfully reflects the divine archetype on ly by the grace of God’s gift of rev­elation. Barth taught me where to find that rule for theo­logical formulation, but I cannot say that I learned the rule itself from Barth.

In the second place, I haven’t learned how to do exegesis from Karl Barth. The first essay by Barth that I studied was the Epistle to the Romans. I began there, back in my seminary days, because I believed that I had to read Barth, but I viewed the Church Dogmatics as a monolith beyond the limits of my library acquisitions budget. I did learn from Barth’s Romans that my own inchoate objections to the cold, historical-critical and essentially non-theological content of contemporary ex­egesis were objections that had some validity. And when Barth’s preface pointed me toward the exegetical and hermeneutical approaches of the Reformers, I found a way of access to the theological meaning of the text for the present life of the church. But as I read further in Barth’s own commentary, I found that its radically ex­istential approach taught me more about the impact of Kierkegaard than the impact of Paul on Barth’s thought. Genuine contact with the text of Romans is minimal in Barth’s essay.

Similarly, when I eventually began to work on the Church Dogmatics and to see there the christological principles of Barth’s theology brought to bear on various texts of Scripture, I was frequently at a loss to see how the text itself pointed in the direction chosen for it by Barth. Barth’s reading of the story of Judas is a good example. Most commentators see in these texts (Matt. 27:1?10 and Acts 1:16?20) unremitting condemnation: in Acts, the text concludes with a pointed citation of an imprecatory Psalm. Barth, however, in view of his doc­trinal assumption that Christ is the on ly elect and on ly reprobate man, finds some hope in the fate of Judas. Nor is this moment of exegetical folly an exception: Barth frequently uses his overarching christological principle as a heuristic key to unlocking texts that have, m and of themselves, no clear relation to the person and work of Christ. The result is an incredibly arbitrary and dogmatic exegesis, justified on ly by the vague conten­tion that it is both “christological” and “theological.” I haven’t learned how to do exegesis from Karl Barth.

In the third place, and by way of conclusion, I haven’t learned from Karl Barth how to appropriate the insights of the Christian tradition for use m the present. The Church Dogmatics is doubtless a gold mine of ma­terials from the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but all too frequently, rather than actually building on the foun­dation of these gathered materials, Barth uses them as a foil for his own formulations and fails to convey either the meaning or the direction of the materials them­selves. As an example of this problem, I would point to what is actually on e of Barth’s most insightful histor­ical excursuses: the discussion of predestination (Church Dogmatics II/2, pp. 60?88, 106?115). Barth recognizes, and I believe correctly, that the Reformed orthodox theo­logians never proposed a predestinarian system in which all doctrine was deduced somehow from the divine de­crees. Barth notes, however, that the rather stark pre­sentation of the doctrine of the decrees poses the problem of a Deus nudus absconditus, an utterly absent or hidden God. Barth finds a clue to his solution in the argument of Amandus Polanus that God the Father elects not as Father but as God inasmuch as election is the common work of the Trinity in all three persons: thus God the Son both elects and effects our election. From this clue, Barth moves on to overcome the problem of the Deus nudus absconditus in his own doctrine of “Jesus Christ electing and elected.” What Barth does not note is that the concept of the decree as an essential and therefore trinitarian act of the Godhead, together with the defi­nition of election as occurring “in Christ,” is typical of Reformed theology in the 16th and 17th centuries. No­where in this older theology do we encounter the prob­lem of the Deus nudus absconditus?certainly not as Barth defines it. Nor, in addition, does Barth’s collapsing of election into Christ, so that the electing and elected Mediator is also the on ly elect and on ly reprobate man, stand in any real relation to the theological material on which he has commented and from which he takes the clue to his solution to the doctrinal problem that he has posed.

I can on ly provide a historical hypothesis as to what has actually occurred in Barth’s meditation on older Re­formed concepts of election. The problem of the utterly absent or hidden God is not a problem of the older theology but rather a problem caused for Barth by the Kantian background of his own thought: the God who stands behind the phenomenal order as a transcendent and unreachable noumenon is not accessible or knowable unless he can be located in some way in the phe­nomenal order. Christ provides Barth with this location and, therefore, with his sole focus of knowledge about God and God’s acts. Barth’s focusing of election on Christ, like Schleiermacher’s identification of Jesus as the on e man continuously and consistently conscious of his ut­ter dependence on God, deals with the Kantian barrier to a doctrine of divine election?but it does not arise out of a meditation on the Reformed tradition. Rather than let the materials of history speak for themselves, Barth used them as a foil for his own exposition. This pattern of argument can be documented in many other places in the Church Dogmatics?as, for example, in Barth’s several excursuses on the Protestant orthodox theological prolegomena in the first two half-volumes of the Dogmatics.

In his method, in his exegesis, and in his use of history Barth consistently fails to point his readers beyond his own individual theological wrestlings. His arguments are frequently brilliant. They succeed in undercutting many of the cherished notions of the liberal theology out of which Barth himself came. They also remind us strongly of the uniqueness of Christianity in an age when the relativizing approach of the “history-of-religions” school has often threatened to dominate scholarly discussion of theological ideas. The great value of Barth’s theology is that it points us toward our own theological roots. The great irony of Barth’s theology is that, on ce it has directed us back toward Scripture and the tradi­tion, it gives us very little help in interpreting them for the present. When I study Augustine, Aquinas, Luther, and Calvin, I am constantly aware that each of these writers was conscious of a duty not on ly to meditate on Scripture and tradition but to mediate both Scripture and tradition to their own time and to the next gener­ation of the church. These writers always point beyond their own work to a greater churchly task?and they do so by adopting methods that can be emulated, by pro­posing exegetical arguments that open Scripture to the present by respecting the text and not bending it to agreement with any overarching heuristic principles, and by dealing with the tradition of earlier theological meditation not as a foil for their own opinions but as a pathway and guide in discerning the meaning of a theological issue. I haven’t learned this approach from Karl Barth?but I will always be grateful to him for pointing me to the place where I could learn it.

Thanks to Traever Guingrich for the electronic 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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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방송의 김영보 피디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다른 피디 하나가 제게 도움을 청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 피디에게 부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광주 극동방송 지사장 대행을 하고 있는 장대진 피디였습니다.


올 1월에 극동방송 본사 부흥회를 인도한 후 제 설교 영상을 DVD로 제작해서 각 지사에 보냈고 그것으로 예배를 드리게 했었는데 그 영상으로 은혜를 많이 받고 전화 연락을 했었던 피디입니다.


사연을 알고 보니 참 안쓰러웠습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이 간암 말기인 것입니다. 게다가 암이 폐와 복강으로 전이가 되었고 상태가 많이 악화되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계속 제 생각이 나고 기도를 받게 하고 싶어서 연락을 한 것입니다.


저로서는 시간을 내는 게 여의치 않았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설교 일정이 있었고 주일에는 오전예배와 저녁예배로 인해 이동이 어렵고 다시 월요일부터는 부여중앙교회 부흥회라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토요일에 안양에 있는 병원에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토요일은 주일 준비를 해야 하는 날이기에 마음이 분주하지만 거라사의 한 영혼을 위해 바다를 건너가신 예수님처럼 저 역시 한 영혼을 위해 기꺼이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토요일 오전 내내 기도를 하고 오후에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병원에서 장 피디를 만나 보다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형이 기독교에 대해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으로 올라가면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장 피디의 형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성령님께서 운행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형이 계속 눈물을 닦습니다. 마음으로 계속 하나님을 부르라고 했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간절히 기도해주었는데 역시 눈물로 기도를 받습니다. 기도해주면서 구원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었는데 다음에 들르게 되면 제대로 복음 전도를 해서 예수님을 영접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은 직장에 취직하는 게 아닙니다. 사업에 성공하는 게 아닙니다. 좋은 학교에 진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는 것입니다. 자신의 형이 구원받기를 원해서 발버둥을 치는 장 피디를 보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저로서는 예수님의 재림이 너무 임박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을 생각하면 인생의 우선순위가 단순하게 정리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한 영혼이라도 더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게 됩니다. 어떻게든 더 많은 곳에 가서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안개와 같습니다. 세상에 가득한 것 같지만 해가 뜨면 다 사라지고 맙니다. 사람들이 움켜잡으려는 것은 다 바람과 같습니다. 움켜쥐지만 손을 펴고 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게 업습니다. 적어도 영원한 천국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렇게 사라질 것을 위해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 안희환 목사님



출처: 크리스찬 타임스 (http://www.kctusa.com/technote7/board.php?board=column&config=1&command=body&no=3330&#.WTzV88YlFPa)

나: 주님..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주님: 그래, 말해보거라.
나: 먼저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주님: 그래, 화내지 아니하마.
나: 왜 오늘 저에겐 힘든 일만 있었던 겁니까.. 도대체 저에게 왜 이러셨나요..?
주님: 더 말해보거라.
나: 평소에 늦게 일어난 적이 없던 제가, 중요한 약속이 있는 오늘 늦게 일어났습니다.
주님: 그래.
나: 그것은 시작의 불가합니다.. 차의 시동이 오랫동안 걸리지 않아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주님: 그랬구나.
나: 바쁜 와중에 점심식사로 센드위치를 주문했는데, 점원의 실수로 또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습니다..
주님: 그래..
나: 집으로 가는 길에 전화가 걸려와 받았더니 갑자기 핸드폰 안테나가 안잡혀 전화가 먹통이 되지 몹니까..
주님: 그랬구나..
나: 결국 지친 몸을 달래며 집에 도착한 저는 어제 막 구입한 마사지 의자로 피로를 풀까 했는데.. 이 새 의자도 고장이 났는지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하루 제대로 된 일이 하나도 없어요.. 왜 저에게 이러신 것입니까??

주님: 그래, 내 말을 들어보거라. 오늘 아침 죽음의 사자가 네 머리맡에 있더라, 너를 살리기 위하여 나의 천사를 보내 싸우게 하였다. 그리하여 너를 늦게까지 자게 한 것이니라..
나: 오..
주님: 네 차의 시동이 늦게 걸리게 한 이유는, 너의 집앞을 지나쳐 갔던 술에 취한 트럭 운전사 때문이니라.
나: ....
주님: 편안했어야 할 너의 점심 시간에 처음에 너의 센드위치를 만들던 점원은 병에 걸려있었단다. 나는 너에게 그 병이 옮겨지기를 바라지 않았단다.
나: 네...
주님: 너의 핸드폰에 문제가 생긴 이유는, 너에게 전화를 건 그 사람이, 너에게 잘못 된 정보를 주려했기 때문이니라. 나는 너를 보호하고 싶었단다.
나: (경건히) 주여...
주님: 그리고 너의 새 마사지 의자는.. 네 집에 정전을 일으키려 하였기에 내가 그리했노라. 나는 너가 어둠 속에서 헤매길 바라지 않았단다.

나: 주님.. 죄송합니다..
주님: 미안해 말거라,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안에서 나를 믿는 법을 배우거라.
나: 예 믿겠습니다. 주님!
주님: 그리고 의심하지 말거라, 너가 계획한 하루보다 내가 계획한 하루가 더 나으리라.
나: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저에게 일어난 모든 일, 감사드립니다 주님!
주님: 사랑하는 내 작은 영혼아, 오늘 뿐만이 아니라 나는 항상 너희 안에서 너희를 돌보고 있단다..

미국 사이트에 있는 글인데
은혜가 되어 함께 나누고자합니다.
사랑하는 님들,
주님과 매 순간 함께하시기를 바라며 지치기 쉬운 간절기에 힘과 위로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매사에 함께하시는 주님을 느끼시고 힘들 때도 용기잃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美 복음주의자들, '동성애 지지' 맥도날드 불매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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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성애 지지를 위한 프렌치 프라이 상자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거대 패스트푸드 기업인 맥도날드 ‘불매운동’에 나섰다.

 

맥도날드가 프렌치 프라이 상자에 동성애를 상징하는 무지개 이미지를 넣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美 <폭스뉴스>는 “맥도날드가 ‘동성애 프라이드 행진’ 주간을 맞아 6월 9일에서 11일(현지시간) 수도 워싱턴 DC에 위치한 맥도날드 3곳에서 동성애 지지를 표명하는 ‘게이 프라이드 박스’를 선보일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맥도날드는 프렌치 프라이 상자 뒷면을 무지개로 장식하고 ‘게이 프라이드 박스’라고 이름 지었다.

 

맥도날드의 이런 결정에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맥도날드는 동성애를 지지하기 위해 ‘혐오스러운’ 무지개 프렌치 프라이 상자를 선보였다”며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어 “거대 기업이 이런 식으로 미국 복음주의 가정에 영향을 끼치려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다.

 

복음주의자들의 이 같은 반응에도 맥도날드 측은 동성애 지지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맥도날드 워싱턴 지부 부사장 캐시 마틴은 “”게이 프라이드 박스’는 맥도날드를 상징하는 작은 상자를 통해 성 소수자 집단을 지지하는 좋은 방법”이라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동성애 프라이드’ 주간은 매해 6월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매해 성 소수자 집단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해 왔다. 하지만 현재까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아무런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백유현 ⓒ 데일리굿뉴스

가져온 곳: USA 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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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승우 집단의 교리와 예언 및 신유 사역의 문제점 ②
[ 긴급기고 ] 예장통합 총회장의 특별사면 선포에 대한 반론
2016년 09월 19일 (월) 10:27:24 허호익 교수 21benhur@hanmail.net

허호익 교수 / 대전신대 조직신학, 전 예장통합 이대위 전문위원, 전 한국조직신학회 회장


3. 무분별한 예언사역과 치유사역의 문제점

   
▲ 허호익 교수

1) 예언사역과 예언전도학교

변승우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요엘 선지자의 예언(요엘 2장 28~32)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단지 부분적으로만 이룬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만민에게’ 성령이 물 붓듯이 부어지는 날, 즉 오순절을 능가하는 더 큰 성령의 부어주심이 교회사의 마지막에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요엘의 예언은 이중적입니다. 요엘의 예언은 오순절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날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습니다. 그 증거로 요엘은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라고 했는데 그날에는 단지 15개국 사람들에게만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실제로 만민에게 성령이 부어질 날이 올 것입니다. 즉 오순절을 능가하는 더 큰 성령의 부어주심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날은 언제일까요? 그 날은 교회사의 중간이 아니라 마지막에 있게 될 것입니다.78)

나아가서 그는 “그날이 전 세계적으로 다가오고 있고, 우리 큰믿음교회에 다가오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증거로 ‘표적과 기사와 이적’이 큰 믿음교회를 통해 나타날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행하실 그 다음단계는 바로 표적과 기사와 이적입니다. 우리는 이미 치유의 기적이 점점 더 증가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로 주의 권능의 날이 우리 교회에 심히 가까이 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79)

서울큰믿음교회의 경우 전교인 중 50% 전후가 청년인 것에 대해 청년들을 불러 모으시는 까닭도 ‘주의 권능의 날’ 즉 ‘대 부흥과 대 추수의 때’가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다.80) 그리고 하나님께서 큰 새 일을 행하실 때가 도래했는데 낡은 가죽부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예언을 멸시하고 성령을 소멸하고 심지어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무서운 죄를 짓는 것이라고 경고한다.81)

이런 까닭으로 변승우는 요엘이 예언한 꿈, 환상, 예언, 입신 등 종말론적이고 성령론적인 은사로 여기고 이와 관련된 사역에 집중하는 목회를 과감하게 펼치고 있다.

현재 요엘이 예언한대로 꿈과 환상과 예언이 전 세계적으로 급증하고 있습니다(욜 2:28). 저는 입신 역시 이와 같은 추세로 급증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꿈과 환상과 예언의 증가와 더불어 반드시 입신의 증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밥 존스, 하이디 베이커, 릭 조이너, 타드 벤트리, 샨 볼츠의 사역에서 그것을 보고 있으며, 서울과 울산의 큰믿음교회에서도 그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82)

변승우는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책에서 꿈, 방언, 예언, 쓰러지는 현상, 입신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1) 꿈 역시 예언의 유형 중 하나이며, 하나님은 꿈을 통해 우리에게 영감을 불어 넣고, 꿈을 통해 개인뿐 아니라 나라 전체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꿈은 영혼 구원을 위한 강력한 도구라고 주장한다.83)

(2) 방언의 은사를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방언은 죄를 고백하는데 유익하고, 오랫동안 기도할 수 있고, 기도를 순결하게 하고, 영감을 받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데 유용하며, 개인의 덕을 세우고, 최상의 찬양의 도구이며, 영적 육적 활력소가 되고, 중보기도에 유용하며, 그리고 때로는 방언을 통해 우리를 극적으로 보호하며, 종종 영혼을 구원하는 극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에 유익하다고 한다.84)

(3) 예언은 끝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빈번해지며, 예언이 중요하니 멸시하지 말아야 하며, 예언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예언의 내용이 성경적인지, 예언하는 자가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 예언의 내용이 소망을 주는지, 예언을 들을 때 심령에 와 닿는 지를 잘 분별하라고 한다. 예언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이루어지게 하려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예언을 기도의 제목으로 삼고 기도하고, 예언을 무기로 삼아 믿음의 싸움을 싸워야 한다고 권고한다.85)

(4) 쓰러지는 현상은 성경적인 이유를 “사울이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더라”(삼상 19:23-24)는 구절과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었을 때 “땅에 엎드려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3-4)는 구절 등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86)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와 부흥사들의 견해를 제시하면 쓰러지는 현상의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 쓰러짐은 회심, 관심 유발, 질병의 치유, 귀신으로부터 해방, 하나님의 임재에 잠김, 성령의 계시, 그리고 입신에 이르게 하는 데에 유용하다고 주장한다.87)

(5) 변승우는 환상과 입신을 구별한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내 영이 몸을 떠나서 몸에서 빠져나오면 입신이고, 영이 몸 안에 있는 상태에서 무엇을 본다면 환상이라는 것이다. 영이 몸 안에 있으면서 천국과 지옥을 본다면 환상이고, 반면에 “영이 분명히 몸에서 빠져나왔다면 설사 천국이나 지옥을 보지 않았더라도 그것은 입신”이라고 한다.88)

따라서 입신을 통해 예수를 직접 만나 교제할 수 있으며, 앞서 간 성도들과 만나 교제할 수 있으며, 성경의 진리에 대한 큰 이해력을 얻을 수 있으며, 미래에 대한 놀라운 계시를 받을 수 있으며, 위에 것을 찾는 자로 변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89)

한 녹취록에 의하면 변승우는 꿈, 환상, 예언, 입신, 쓰러짐 외에도 “ ‘비명을 지르는 것’, ‘몸을 심하게 떠는 것’, ‘거룩한 웃음’, ‘기침’, ‘구역질’ 같은 현상들이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일어나게 하시는 일들”이라고 주장하였다고 한다.90)

그러나 우리말 성경(개역한글, 개역개정, 표준새번역)에는 입신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종교학적으로는 의식이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정지되고, 자아가 신적 존재에 의해 인도되며 지배받는 샤만의 엑스타시 현상이 접신(接神) 상태에 익숙한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를 기독교적인 개념으로 수용하여 성령에 사로잡힌 상태를 설명하는 용어로 ‘입신(入神)’이라는 말을 사용해 온 것으로 보인다.

큰믿음교회는 특이하게 예언전도학교와 예언사역자 훈련학교를 중심으로 예언사역을 집중적으로 시행하고 예언의 은사를 받을 사람들을 선발하여 이들에게 효과적으로 예언사역을 교육시키는 예외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이 예언을 할 수 있다”(고린도전서 14:3-5)는 믿음을 강조하는 큰 믿음교회에서는 300여명의 예언사역자들이 선지자학교에서 매주 화요일 2시와 주일 8시에 예언사역을 통해 성도들을 세우고, 위로하고, 권면한다고 한다. 예언 사역을 받기 원하시는 분들은 선착순으로 안내위원들로부터 번호표를 수령하여 사역을 받아야 한다.91)

실제로 2008년 1월 1일이 예언집회에서는 예언사역자 10여명이 회중들 사이를 오가다가 손가락으로 특정 사람을 가리키며 공개 예언하기를 “성도님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강한 열망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입니다”, “성도님께서 하나님의 성품들에 대해서 더 많이 깨닫게 되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등과 같은 내용의 예언을 하였다고 한다. 약 30분간 10여 명의 신도들에게 공개예언이 진행된 후, 드디어 3부 개인예언 시간이 됐다. 예언사역자 72명이 동원되어 2인 1조(36개 예언팀)를 이루어 약 3시간동안 참석한 900여명의 신도들에게 일대일로 1인당 약 3분에서 5분정도의 개인예언을 쏟아내었다고 한다. 참석한 기자에게는 “직장에서나 어디에서 주변에 있는 분들 때문에 마음이 힘들어하는 부분이 감지됩니다. 주님 앞에 온전히 다 내려놓을 때 주님께서 평강을 주시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고 개인 예언을 하였단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평범한 일에 대한 것을 무슨 하나님의 특별한 예언인 것처럼 전해 준 것이다. 그리고 홍보영상을 통해 선지자학교에서는 누구에게나 ‘예언훈련’을 통해 정확한 주님의 음성을 꿈과 환상으로 보고 해석하는 방법을 가르친다”“고 알렸다고 한다.92)

또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훈련하기 위해 예언사역훈련학교를 통해 매주 목요일 오후 2시와 8시에 예언 훈련을 시행하는 데, 예언에 대한 성경적 기초를 다지는 동시에 연습과 훈련을 통하여 예언 은사를 발전시켜나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한다. 현재는 예언사역팀원들에 한하여만 훈련 시간을 개방하고 있다.

이러한 변승우의 예언사역에 대하여 예장 통합 총회(2009)는‘신비주의적 사역’으로 규정하고 그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변승우는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등의 저서와 설교들 통하여 천국을 갔다 온 입신의 경험, 개인의 미래에 대한 예언, 방언, 쓰러지는 현상 등 신비주의 형태의 목회를 활발히 펼치고 있다. 그의 저서에는 천국을 갔다 온 사람들의 간증이 많이 실려 있다. (가령, <정통의 탈을 쓴 짝퉁 기독교>pp.223-289를 보라.). 그는 집회 시간에 방언을 훈련시키고 있으며, <큰믿음교회> 내에는 예언 사역 팀, 방언 통변 팀, 신유 축사 팀 등 신비주의를 조장하는 목회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가 지난 2009년 7월 23일 150명의 죽은 자를 살렸다는 조세프 과지마의 집회광고 게재 문제로 국민일보, CBS를 비난한 것도 한 예이다.
이러한 변 씨의 신비주의적인 사역은 우리 주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 16:4)고 하신 말씀과 배치된다. 또한 본 교단에서 엄히 경계하는 극단적인 신비주의 사역이라는 점에서 마땅히 배척되어야 한다.93)

큰믿음교회 변승우에 대한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의 연구보고서”(2011)에는 신비한 계시체험에 집중하는 사역은 교인들을 신비주의로 이끄는 그들의 세속적 감정에 영합하는 ‘영적 타락’의 경향이 있다고 규정하였다.

신비한 계시체험에 집중하여 성령사역의 목회를 하고 있다. 이른바 신사도개혁운동이라는 맥락에서 은사들을 훈련하는 과정을 두어 성도들을 신비체험으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이 목회의 본질에서 벗어난 일이요, 한편으로 극적인 체험을 열망하는 세속적이고 감정주의적인 신자들에게 영합하는 일로서 영적 타락을 심히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94)


2) 성형수술 및 신유사역과 중보기도학교

변승우는 <내가 원하는 교회>에서 “제가 꿈꾸어 온 교회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강력한 치유와 기적이 일어나는 교회”라고 밝히고 “성형외과가 대세인 요즘 주님이 성형의 기적들을 시작하셨다”고 주장한다.

교계신문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를 비롯한 여러 일간 지에 “큰믿음교회로 각종 중환자들을 데려오십시오! 지금 엄청난 치유의 기적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95)고도 광고하였다.

여러 치유의 기적과 함께 요즘 성형의 기적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콧대가 높아지고, 큰 코가 작아지고, 삐뚫어진 코가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튀어나온 광대뼈가 들어가고, 초자연적으로 즉각 쌍꺼풀이 생겨났습니다. 목이나 얼굴의 잔주름이 사라지고, V라인 턱 선이 되고, 흉터와 수술자국이 사라졌습니다. 턱살이 빠지고 뱃살들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팔자걸음이 고쳐지고, 오다리가 일자다리가 되고, 굽은 등들이 펴졌습니다. 흰머리가 검은 머리로 변하고…….96)

변 목사는 2011년 9월 23일에 410건이 넘는 성형 기적이 일어났고, 9월 21일에는 아주 짧은 30분간의 팀별 치유훈련시간에 206건의 성형 기적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이런 기적들은 소수에게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참석자의 70~90%에게 치유가 일어나고 있으며, 때로는 참석자 수보다 더 많은 건의 치유가 일어난다고도 한다.97)

큰믿음교회는 이러한 치유 사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중보기도학교를 운영한다. 중보기도학교는 매주 평일 아침(오전 10:30부터 오후 1시)에는 변승우의 즉흥설교로 진실된 회개로 이끌고 있으며, 집중적으로 신유사역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매주 수요일 오후 2시와 선지자학교 사역 시간 (화요일 오후 2시, 주일 오후 8시)에 신유사역을 받기 원하는 분들은 사전에 예약문의를 통해 가능한 시간에 사역을 받게 한다. 신유사역을 받기 원하는 분들은 역시 안내위원으로부터 번호표를 받아야 한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철야기도회(저녁 9시부터 새벽 5시)에는 1,000여명이 모여 중보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또한 매주 평일 아침(오전 10:30부터 오후 1시)에는 변승우가 특별히 원고 없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하는 전하는 즉흥설교와 중보 기도로 진실된 회개로 이끌고 있다고 한다.98) 중보기도학교에서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진정한 회개와 상한 심령으로부터 나오는 통곡과 자아의 죽음 그리고 주님의 진정한 신부로써 주님과 동행하기’라고 한다.


4. ‘사랑하는 교회’로 개명한 큰믿음교회의 이단성

앞서 언급한 것처럼 2015년 11월 6일 SBS 저녁 8시 뉴스에서 강남의 한 대형 마트에서 여성의 신체를 몰래 찍다가 경찰에 체포된 남자가 큰믿음교회의 부목사 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보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키자 이미지 실추에 부담을 느낀 것인지, 송파구 위례성길에 위치한 ‘큰믿음교회’라는 명칭을 2015년 12월 29일 현재 ‘사랑하는교회’로 전격 변경하였다는 것이 보도되었다. 교회 간판과 주보와 교회가 운영하던 카페 이름도 모두 ‘사랑하는교회’ 란 이름으로 바꿨다고 한다. 포털사이트 다음(Daum)에 있는 ‘큰믿음교회측 카페’도 사랑하는교회로 명칭을 교체했다. 그러나 명칭을 바꾼 이유에 대한 공지는 되지 않았다. “큰믿음교회 부목사라는 사람이 몰카 사건으로 이미지가 실추돼 이름을 바꾼 것 같다”는 지적과 “이름 세탁을 통해 이단성을 감추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이 있었다고 한다.99)

예장통합 총회(2009)는 ‘큰믿음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변승우씨는 기성교회를 심하게 비판하여 교인들을 자신의 교회로 인도하는 부도덕한 목회행위, 직통계시에 근거하여 성경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잘못된 성경관과 계시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정통 구원관과 다른 구원론, 입신, 예언, 방언 등 극단적인 신비주의 신앙 형태 등을 갖고 있는 비성경적 기독교 이단이다. 따라서 본 교단 교인들은 변 씨의 집회에 참석을 엄히 금하는 것은 물론 그가 운영하는 인터넷 동영상이나 카페에 참여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100)

이를 전후 하여 큰믿음교회(현 사랑하는 교회)는 약 8개 교단에서 이단 등으로 규정했다.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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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변승우, <대부흥이 오고 있다>, 240~241.
79) 변승우, <대부흥이 오고 있다>, 242-243.
80) 변승우, <대부흥이 오고 있다>, 253.
81) 변승우, <대부흥이 오고 있다>, 288.
82) 변승우,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97-298.
83) 변승우,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6-46.
84) 변승우,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84-102.
85) 변승우,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137-209.
86) 변승우,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24-225.
87) 변승우,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54-268.
88) 변승우,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301-302.; 전정희, “특별 은총 ‘입신’으로 천국·지옥 체험”, <교회와신앙> 2008. 11. 25.
89) 변승우,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309-328.
90) 전정희, “새로운 계시의 일부는 초성경적인 것”, <교회와신앙> 2008. 11. 13.
91) http://www.gfctv.org/ko/ministries.php (2016. 2. 3.)
92) 전정희, “주님 음성 해석법 가르친다는 ‘예언훈련’”, <교회와신앙> 2008. 1. 11.
93)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외 편, <종합 이단·사이비연구보고집>, 312.
94) 정윤석, “변승우 목사에 대한 기성측 연구 보고서”, <교회와신앙> 2011. 3. 8.
95) <조선일보> 2011. 10. 12.
96) 전정희, “큰믿음교회(변승우 목사)에 ‘성형’의 기름부음이?”, <교회와신앙> 2012. 5. 3.
97) 전정희, “큰믿음교회(변승우 목사)에 ‘성형’의 기름부음이?”
98) http://www.gfctv.org/ko/ministries2.php (2016. 2. 3.)
99) 정윤석, “큰믿음교회, 사랑하는교회로 명칭 변경”, <기독교포털뉴스> 2015. 12. 30.
100)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외 편, <종합 이단·사이비연구보고집>(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1), 313.
101) 상현, “이단 교회 ‘간판 바꿔달기’ 조심!… ‘큰믿음교회’ 최근 ‘사랑하는교회’로 명칭 변경”, <국민일보> 2016. 1. 5.
102) “한국교회 교단 결의 내용”, <현대종교> (www.hdjongkyo.co.kr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711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변승우 집단의 교리와 예언 및 신유 사역의 문제점 ①
[ 긴급기고 ] 예장통합 총회장의 특별사면 선포에 대한 반론
2016년 09월 18일 (일) 13:05:49 허호익 교수 21benhur@hanmail.net

허호익 교수 / 대전신대 조직신학, 전 예장통합 이대위 전문위원, 전 한국조직신학회 회장


1. 큰믿음교회(현 사랑하는 교회)의 연혁

   
▲ 허호익 교수

변승우에 대해서는 성결대학교 82학번으로 졸업한 것 외에는 자세한 인적 사항이 알려져 있지 않다. 1995년 울산큰믿음교회를 개척한 후 10년 넘게 목회하였으나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고 한다. 2005년 3월 서울로 옮겨와 또 다시 서울큰믿음교회를 개척한 후 예언사역과 신유사역 그리고 변승우의 여러 저서의 출판 사역을 집중하여 교세가 급성장하였다.

2004년 저술한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을 통해 기독교의 근간인 ‘이신칭의’를 통째로 부정하는 구원관을 설교하여 한국교계에 물의를 일으켜 오던 중, 2009년 합동정통 교단(현 예장백석)에서 제명 출교되는 등 5개 교단에서 이단 등으로 규정되었다. 이에 변승우는 2009년 12월 ‘대한예수교장로회 부흥’교단을 만들었다.1) 2010년에는 성령신학교를 세워 학장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2016년 2월 현재 서울큰믿음교회를 중심으로 전국 11개의 도시에 130여개의 지교회가 세워져 있으며, 미국의 LA, 일본의 도쿄와 오사카, 캐나다의 밴쿠버, 인도네시아의 버까시, 그리고 중국의 북경에 지교회가 있다고 한다.

 

2015년 11월 6일 SBS 저녁 8시 뉴스에서 강남의 한 대형 마트에서 여성의 신체를 몰래 찍다가 경찰에 체포된 남자가 큰믿음교회의 부목사 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보도하였다. 이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키자 이미지 실추에 부담을 느낀 것인지, 12월 말경에 큰믿음교회를 ‘사랑하는 교회’로 명칭 변경하였다.2)2016년 2월 4일 현재 큰믿음교회 인터넷TV 사이트 (www.gfctv.org)는 종전대로이나, ‘큰믿음교회’의 한국어 공식 사이트(www.greatfaithchurch.org)는 영어 등 외국어 사이트로 전용되었고, 한글 공식사이트는 ‘사랑하는 교회’(www.belovedc.com)로 대폭 개편 중에 있다. 이전의 공식 사이트에는 최신 설교를 시청하거나 음성파일로 다운받을 수 있는 서비스도 제공한다. 그리고 인터넷 생방송으로 매주 수요예배와 금요 영성집회(저녁 7시30분)를 방영하고 있다.

큰믿음교회는 ‘사도적 선지자적 교회’를 표방하면서 3대 사역으로 예언사역, 신유사역, 그리고 큰믿음츨판사 사역을 강조한다는 것을 공식 사이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3) 큰믿음출판사 사역은 변승우가 계시를 받아 저술한 저서 50권 이상을 출판 보급하고 있으며, 그리고 선지자학교와 예언사역학교의 예언사역과 중보기도학교의 신유 사역에 관해 자세히 안내하고 있다.

변승우의 여러 저서에 드러나는 교리의 문제와 큰믿음교회의 예언 및 신유 사역의 문제점들을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2. 변승우의 주요 교리

1) 사도적 선지자적 교회의 배타성

큰믿음교회의 성격에 대해 공식 사이트는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큰믿음교회’는 사도적 선지자적 교회입니다. 큰믿음교회는 대부흥과 대추수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부와 용사로 준비되고 그를 위해 참된 회개와 하나님의 진리로 나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교회입니다.4)

사도적 교회를 지향하는 변승우는 사도는 교회의 터를 닦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영적 지도자이다. 그러나 “사도적 사역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 중 하나는 영적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것”이므로 “사도는 아버지”라고 한다.5) 따라서 변승우는 1세기의 사도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될 오늘날의 사도이고, 큰 믿음교회는 오늘날의 사도적 선지자적 교회라는 것이다.

(1) 이런 의미에서 폴 키스 데이비스(Paul Kieth Davis) 목사가 큰믿음교회 집회에서 공개적으로 변승우가 ‘아버지 부재 시대’의 영적 아버지가 되어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한 것처럼 많은 축복을 영적 자녀들에게 물려 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변목사님께서 예언적인 영역의 성취를 위하여 많이 수고해 오셨지만 하나님께서 변목사님을 위해 예비하신 것은 훨씬 더 높은 부르심에 관한 것입니다. 변목사님에게 사도의 부르심이 임하였습니다. 사도바울에게 허락하신 것 같은 사도적 부르심이 있습니다. … 변목사님은 주님의 뜻을 아는 사람이며 의로운 분을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직접적인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고 나누실 수 있는 사람입니다.…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목사님은 단지 가르치는 스승이 아니라 아버지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 변목사님은 아버지로서 영적 자녀들에게 축복을 전이시켜주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변목사님은 많은 사람들의 ‘아버지’가 될 것입니다.6)

그리고 아르헨티나 대부흥의 주역인 에도 실보소 목사는 영적 지도자 변승우를 통해 큰믿음교회의 대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고 한다.

큰 믿음교회는 구원에 관한 대낮과 같은 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또 다시 주님은 큰 믿음교회를 중심으로 또 하나의 대부흥을 일으키실 것입니다.7)

큰믿음교회의 사이트에 ‘대부흥과 대추수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부와 용사로 준비하는 교회’라는 것을 명시한 까닭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사도들이 당시에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것처럼 이시대의 사도인 변승우를 통해 큰 부흥을 일으켜 세울 것이라는 예언을 이루는 것을 교회의 목표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변승우는 2004년 5월 출판한 저서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에서 전통적인 칭의론을 부정하고 믿음의 행함과 참된 회개가 없으면 지옥에 간다고 주장하여 비판을 받으면서 이단성 논란이 촉발되었다.8) 그는 <정통의 탈을 쓴 짝퉁기독교>, <가짜는 진짜를 핍박한다>는 도발적인 제목의 저서를 통해 “진짜는 진짜이기 때문에 핍박을 받고, 가짜는 가짜이기 때문에 진짜를 핍박한다”고 적극 항변하였다.9)

심지어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에 대하여 “이단 사냥꾼”, “정통의 탈을 쓴 짝퉁 기독교”, “바리새파 사람들” 심지어 “영적 기생충”이라고 공격한다.10)

예수님을 대적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정통의 탈을 쓰고 있었지만 참된 유대교가 아니었던 것처럼, 이들 역시 기독교의 정통의 탈을 쓰고 있지만 성경적인 참된 기독교가 아닙니다.11)

(3) 한편으로 큰믿음교회가 <그 시에 주시는 말을 하라>,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와 같은 저서와 그의 즉흥설교 및 예언 사역이 신사도 운동과 유사하게 직통계시를 주장하고 성경의 권위를 부정한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성경의 권위만 주장하는 이들은 “은사중단론에 미혹되어 ‘말씀 말씀’하면서 은사와 계시를 전면 부정하는 자들”이며, 이들은 ‘성경교 목사요 성경교 신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비판하였다.12)

신약시대에도 90%이상이 거짓 선지자들이듯이 오늘날의 목사들도 대부분 거짓 선지자라고 비난한다.

신약시대 때도 여러분! 90% 이상의 거짓선지자들은 목사들입니다. ··· 교회 밖의 사이비들, 이단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대부분의 거짓선지자들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목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목사라는 양의 옷을 입고, 목자로 위장하고 사람들을 어디로 이끌어요?(‘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 2006년 5월 26일 설교).13)

그리고 “성령시대인 지금 정통의 탈을 쓴 많은 교단과 교회와 목사와 신자들이 성령님이 오셨는데 그것이 성령이시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성령이 임하시므로 나타나게 되는 계시와 기적 그리고 영적인 현상을 보고 ‘광신자다’, ‘극단적인 신비주의다’, ‘사이비다’, ‘귀신의 역사다’, ‘직통계시 이단이다’라고 끊임없이 허튼소리”를 하는 것은 “역시 참된 기독교의 모습”이 아니라고 반박한다.14) 기성교회가 영의 세계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교리와 전통으로 생사람 잡는 것은 <위조 영분별>이라고 공격하였다.15)

(4)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를 비판하는 이들을 향해 ‘이단 사냥꾼, ‘성경교 신자’, ‘사탄교’, ‘마귀의 하수인’, ‘사탄의 충견’, ‘사탄의 사냥개’, ‘영적 기생충’ 등의 독설을 퍼부으며 성령을 무시하지 말라고 비난하였다.16)

교회 안에도 사탄교가 있습니다. 즉 정통의 탈을 쓰고 있지만 사탄을 따르고 사탄에게 복종하고 사탄을 위해 충성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 바로 이단 사냥꾼들입니다. 그들은 현대판 사탄의 회요, 교회 안에 존재하는 사탄교입니다.17)

심지어 큰믿음교회를 비난하고 대적하고 핍박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범죄라고 함으로써 기성교회의 신학적 비판을 하나님에 대한 적대행위로 규정한다.

큰믿음교회에 대한 음해와 핍박은 모두 이런 가짜들에게서 나옵니다. …큰믿음교회를 비난하고 대적함으로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습니다.18)

심지어 예수가 말씀한 그대로 가르친 “그것이 이단이라면 예수님도 이단”19)이라고 하였다.20)

(5) 예장 통합 총회(2009)는 이처럼 변승우씨가 기성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자신을 정당화시키려는 의도이며, 기성교회 교인들을 자신의 교회로 오게 하려고 “본인이 목회하는 교회만이 참된 교회라고 주장”하려는 의도라고 비판하였다.21)

한국교회의 많은 이단들 중에 기성교회에 대해 <정통의 탈을 쓴 짝퉁기독교>, <가짜는 진짜를 핍박한다>, <위조 영분별>과 같은 도발적인 제목을 저서를 통해 한국의 보편적 교회를 공격하고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대부분의 정통적인 한국의 공교회를 이단으로 매도하는 사례는 큰믿음교회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예외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배타적인 교회론은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부인하는 교회론적 이단의 전형적인 형태가 아닐 수 없다.

2) 직접 계시와 즉흥 설교

선지자의 교회를 지향하는 변승우는 교사와 선지자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그 차이에 대해서 교사는 성경 저자의 의도를 설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선지자는 자신이 성령으로부터 직접 들은 말씀을 성경에 을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변승우는 ‘말이나, 설명이나, 개념이 아닌 그런 계시 즉,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한 계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말이 아닌 계시가 필요합니다. 개념이 아닌 계시가 필요합니다. 설명이 아닌 계시가 필요합니다. … 주님의 계시가 필요합니다. 주님에 대한 계시와 우리 자신에 대한 계시가 필요합니다.22)

(1) 계시가 필요한 자신에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각각 변승우에게 직접 말씀하신 내용이 그의 저서 도처에 기록되어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모두 그에게 직접 계시를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당당하게 주장한다.

그 실례로 “주님, 저는 아무것도 아니고 너무나 부족한데 왜 저를 쓰시고 우리 교회에 부흥을 주십니까?”라고 질문한 것에 대하여 예수께서 변승우에게 직접 말씀하신 내용을 길게 적고 있다.23)

너[변승우]는 실제적으로 아무것도 아니지만 너가 성도들이 필요로 하는 전부이기 때문에 성도들이 만족을 얻을 것이고, 그로 인해 교회는 부흥할 것이고, 그것으로 대부흥이 일어날 것이고, 그것으로 세계를 진동시킬 것이고, 그것으로 도시와 나라를 변화시킬 것이고 열방을 만지게 될 것이다.24)

그가 성령께서 하신 말씀을 직통 계시로 받은 사례 중 일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25)

너[변승우]의 장점, 은사, 재능 때문에 너의 탁월한 능력 때문에 성공한 것이 아니다. 시기와 우연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네게 성공을 주실 것이다. … 하나님께서 너를 높혀 주시고, 너를 드러나게 하시고, 교회를 성장하게 하시고, 사역이 크게 하시고, 많은 영혼들을 살리게 하신 것이다.26)

이로서 변승우는 자신이 예수와 성령과 더불어 직접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특별한 사이라는 것을 과시하고 있다.

(2) 변승우는 “하나님께로부터 듣지 않으면 설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 설교의 좌우명입니다”27)라고 선언한다. 성서에 기록된 과거의 계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하시는 직통계시만을 설교한다는 것이다.

설교가 깊이가 있고 꼭 전해야할 가치가 있는 설교가 되려면 지식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계시가 필요합니다. ··· 성경적인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반드시 계시적이라야 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이 과거에 이렇게 말씀하셨다가 아니라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28)

그는 구약의 선지자나 초대교회 사도들처럼 “성령께서 저에게 설교하라고 레마로 주시는 말씀들을 설교합니다. 제가 설교의 주제나 내용을 자의로 선택하지 않습니다.”29)라고 하였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직통 계시를 통해 “주의 음성을 듣고 개인적으로 인도 받는 것은 성경에 반하는 것이 아니며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30)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말씀이 현재에 직접 계시되는 것을 수용하지 않는 한국교회의 ‘강해설교나 제자훈련은 희망이 없다’(“말씀 병에서 치유되지 않으면”, 2007년 7월 24일 설교)고 진단한다.31)그런데 “많은 개신교 및 개혁파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금지”하고 있다고 비판한다.32)

이런 까닭은 큰믿음교회는 스스로 ‘사도적 선지자적 교회’라고 주장함으로서 직통계시를 부정하는 정통적인 교회에 대해 배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3) 변승우는 실제로 설교 할 때 대부분 성경 본문도 설교 제목도 미리 준비하지 않은 채 강단에 올라가 계시를 받은 데로 시행하는 ‘즉흥설교’라고 한다.

중보기도 시간에는 ‘즉흥설교’를 합니다. 즉흥설교란 전혀 준비하지 않은 설교를 뜻합니다. 제 설교는 모두 즉흥설교에서 나옵니다.33)

그리고 “부흥회 때에는 거의 100% 영감으로 온 설교”만 하며, “이런 설교는 대개 새롭고 영적인 비밀”을 담고 있으므로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34)

큰믿음교회 홈페이지에는 변승우의 ‘즉흥설교’ 총 357편의 VOD가 수록되어 있다.35) 그리고 “즉흥설교 중 성령께서 설교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을 원고로 써서 주일날 설교”하고 그리고 “그 설교 중 성령께서 책으로 만들라고 지시하시는 것으로 책으로 만든다”고 하였다.36) 그래서 자신은 저술에 힘을 쏟고 있으며 50권 이상의 책을 저술하였다고 한다.37)

(4)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변승우가 설교와 저술을 하는동안 천사가 함께한다고 주장한다. 샨 볼츠 목사는 영동제일교회 집회에 참여하여 설교를 하는 변승우에 대해 “이 시간 기록을 담당하고 있는 천사 중 직위가 높고 강력한 한 천사가 변승우 목사님 곁에 와 있습니다. 바울이 서신서들을 저술할 때에 바울과 함께 있었던 바로 그 천사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변 목사님에게 나타난 그 천사는 지금까지 제가 천사의 나타남을 본 것 중 가장 강력한 것입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라고 공언하였다.38)

질 오스틴 목사 역시 천사들이 하늘나라에서 계시와 메시지를 가져와 변승우가 책을 쓰는 것을 도와주며, 그의 저서는 천국도서관에 따로 보관되어 있다고 하였다.

천사들이 목사님[변승우] 곁에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 천사들은 기록하는 천사들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계시와 메시지를 가져와 책을 쓰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기록하는 천사들이 목사님 곁에 있습니다.
천국의 도서관이 보이는데 거기에 목사님의 책들이 꽂혀 있고, 목사님의 책들을 꽂기 위한 섹션이 따로 있는 것이 보입니다.39)

실제로 예언사역과 신유사역과 더불어 큰믿음교회의 3대 사역 중에 하나인 큰믿음출판사 사역에 대한 공식 사이트의 소개 글에는 큰믿음출판사는 “정말 중요한 책들은 사도와 선지자들에 의해 쓰여진다는 견고한 믿음 때문”에 주로 검증된 사도와 선지자들의 책을 출판한다고 홍보한다. 변승우는 구내서점을 ‘천국의 도서관’이라고 명하였고, 출판사를 세우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으므로 큰믿음출판사를 세워 이윤추구가 목적이 아니라 진리를 보급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고 한다.40)

변승우는 자신의 저서가 천국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암시하지만,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그의 방대한 저서 ‘<교회교회학> 13권을 짊어지고 천국에 가면 천사들이 비웃을 것’이라고 한 적이 있다.

(5) 변승우는 자신이 새로운 계시를 직접 받을 뿐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다림줄’(암 7:7-8)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주의 은혜로 다림줄(성경의 바른 이해)을 손에 들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는 다람줄 사역의 열매인데, 자신이 바로 “12번째 책을 쓰고 있으며, 그리고 회원 14,500명이 넘는 대형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고 있으니 다림줄을 지닌 자의 사역에 합당한 열매를 맺은 증거라고 논증한다.41) 심지어는 성령께서 “그[변승우]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틀린 것이 없을 것이며, 내가 직접하는 말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고 주장한다.42)

그는 한국교회의 ‘거의 대부분의 주석과 강해집과 설교들이 사실상은 다림줄’이 아니며, 사실 눈대중에 불과’하므로 불완전한 과정에서 탄생 된 것이라고 한다.

충격적이지만 진실을 말씀드리자면 대부분의 주석과 신학서적, 대부분의 강해설교집과 성경공부 교재, 그리고 대부분의 설교자들의 설교와 심지어는 대형 교회 목사님들의 설교에 이르기까지 이런 불완전한 과정을 통해서 탄생되었습니다.43)

‘여호와께서 손에 잡고 있던’ 그 다림줄을 통해 변승우 자신만이 성경을 100% 정확하게 똑바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말씀의 다림줄에 따라 성경말씀을 100%로 완전하게 전해야만 한국교회의 회복과 부흥이 가능해 진다고 역설한다.

영적인 다림줄인 말씀이 성경 그대로의 의미대로 회복이 되어야 교회가 주님이 의도하신 대로 반듯하게 다시 건축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바로 회복과 부흥입니다. ···교회를 제대로 회복시키려면 다림줄인 말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손에 다림줄을 가지고 있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바로 그런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44)

(6) 변승우는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2009)의 수정증보판을 홍보하면서 “5년 전 책을 쓸 때 성령께서 ‘이 책은 너의 책이 아니다. 나의 책이다.’ 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다림줄>이라는 책에서는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성경 저자들이 성경을 쓸 때에 임했던 그런 영감을 준 사람은 이 종 하나뿐이다”45)고 하였다. 마치 자신의 저서가 성경과 동등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와 더불어 그가 예언사역과 신유사역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초자연적인 사역은 ‘초성경적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였다.46)

새로운 계시는 성경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며 이전에 교회에 알려지지 않았을지라도 교리와는 달리 단순히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정신에 있어서 철저하게 성경적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 있는 자는 그것을 들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는 비성경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초성경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47)

이러한 변승우의 주장들은 직통 계시를 받아 전하는 자신의 설교나 저서에 초월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계시를 받지 못한 기성교회의 목사들의 설교와 자신의 설교 사이의 영적 차별성을 강조하는 효과를 노리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경과 동등한 새로운 직통 계시를 주장하고, 자신의 성경 해석만이 다림줄처럼 완전하다는 배타적 성서해석을 고집하는 것 은 결과적으로 성서의 권위를 부정하는 성서관과 계시관의 현저한 왜곡이 아닐 수 없다.48)

그래서 예장 통합 총회(2009)는 변승우의 성경관과 계시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훼손시키는 비성경적 기독교 이단”이라고 규정하였다.49) 성경 이외의 새로운 계시나 직통 계시를 주장하는 경우 그 신학적 문제점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 중 신조 1조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유일무이한 법칙”이라고 고백한다. 따라서 다른 새로운 계시를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요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인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성경론적 이단에 해당한다.

②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제 1장 1조에는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자기 백성에게 계시해 주시던 이전 방법은 현재 중지되어 버렸다”(히 1:1­2)고 했으며, 6조에서는 “이 성경에 대하여 어느 때를 막론하고 성령의 새로운 계시로서나, 인간의 전통으로서도 더 첨가할 수 없다”(딤후 3:15­17, 갈 1:8­9, 살후 2:2)고 하였다. 따라서 변승우의 특별 계시 주장은 성경이 완결된 후에는 어떤 형태의 직통 계시나 새로운 계시가 불필요하다는 정통적인 교리에 위배된다.

③ 칼빈은 성경 66권에는 ‘구원에 관한 모든 부분의 모든 지식이 완전히 계시되어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성경 외에 다른 직통계시를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신적 권위와 성경의 완결성, 충족성, 최종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론적 계시론적 이단에 해당한다.

④ 직통 계시 받은 내용이 대부분 허위로 판명되었고 직통계시 받은 자의 신앙의 착각과 가식과 교만이 드러났다. 예를 들면 이장림(다미선교회)의 경우 1992년 10월 휴거설을 주장하기 위해, 어린 종’들을 중심으로 한 40여 명의 아이들이 ‘직통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였으나 결국 허위로 판명나자 다미선교회는 1992년 11월 2일자로 해체되고 만 것이다.

3) 믿음의 행위 및 참된 회개와 구원론의 문제점

변승우는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구원론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50) 행함으로 의롭게 되느냐 믿음으로 의롭게 되느냐는 ‘신앙과 행위’에 관한 나름대로 성찰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에 대해 챨스 피니의 <생명의 길>과 조나단 에드워드의 <기독교의 중심>을 읽고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한다.51)

(1) 그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고, 믿기만 하면 ‘행함이 없이 죄 가운데 산다 할지라도 적어도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거부한다.52) ‘부끄러운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따라서 구원파 박옥수처럼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을 깨달아 믿으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그 후로는 죄를 자백하거나 회개할 필요가 없으며, 어떻게 살든 천국에 간다고 가르치는 것은 “무율법주의로 명백한 이단사상”이라고 비판한다.53) 거듭남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상태이다. 비록 거듭난 시간을 모른다 해도 현재의 상태가 거듭난 자의 상태라면 그는 거듭난 것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다.54)

(2) 변승우는 이런 관점에서 ‘율법의 행위’과 ‘믿음의 행함’을 엄격히 구분한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할 육체가 없다”(롬 3:2)는 바울의 말은 ‘율법의 행위’를 부정해서 하는 말이고,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의 행함’을 긍정하는 것으로 구분한다.55)

전자는 구원 받기 전에 나타나는 행위이고 후자는 구원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행함이고, 전자는 실현불가능하고, 후자는 실현가능하며, 전자는 인간의 공로가 될 수 있으나 후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56)

전자는 자기 힘으로 구원 얻으려는 것이고, 후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단순히 부끄러운 상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예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다고 한다.57)

그러므로 믿음에는 반듯이 행함이 따르고 순종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 ‘구원은 단순히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칭의라면, 새사람이 되는 것이 중생이므로 “구원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한 면은 칭의이고 다른 면은 중생이다.”고 주장한다.58) 따라서 “칭의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속에서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중생은 내면에서 실제적으로 [행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한다.59)

이런 까닭에 칭의와 중생의 관계에 있어서 “중생이 먼저”이며, “중생 없는 칭의는 비성경적”이라고 한다. 구원을 얻으려면 궁국적으로 믿음으로 거듭나야 하기 때문이다.

(3) 그러나 믿고 “거듭난 자라도 때로 범죄”하는 것이 믿는 자들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거듭난 자라도 ‘죄가 그를 주관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습관적인 죄를 참으로 회개하지 않은 경우 죄가 남아 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도 천국가지 못하게 된다”고 단언한다.60)

여기서 변승우는 ‘회개와 자백’를 구분하고 양자는 전혀 다르다고 한다. “회개는 습관적인 죄를 대상으로 하고 자백은 우발적인 범죄를 대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회개는 불신자가 하는 것이고 자백은 신자가 하는 것”이라고 한다.61) “회개는 단순히 죄를 뉘우치거나 자백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끊는 것”이기 때문이다.62) 따라서 “회개해야 할 습관적인 죄가 있다면, 다시 말해서 아직도 끊어버리지 못한 죄가 있다면 그 사람은 회개치 않은 사람이요 지옥에 간다”는 주장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죄가 없어야 천국에 가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은 참된 회개에 달려 있는 것이 되고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단언한다.63)

그러므로 천국에 가려면 이 말씀 그대로 회개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단 한 가지라도 회개할 죄가 남아 있으면 안 됩니다. 모든 죄를 다 회개했어야만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참으로 회개한 사람이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64)

(4) 예수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습관적인 죄를 완전히 회개하여 죄를 없이 해야 천국에 가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변승우는 역으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의 칭의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부정에 이르게 된다. 예수께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으니 구원의 조건에서 ‘회개’를 배제하고 ‘칭의’만을 주장하는 것은 잘 못이라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대부분 이 질문에 ‘오직 믿음’이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온전한 대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구원의 조건으로 믿음뿐 아니라 회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65)

그리고 “회개한 사람이 죽을 때는 천사가 마중 나오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죽을 때는 귀신들이 그를 잡아가려고 온다”고 한다.66) 그러므로 ‘예수 믿고’ 지옥가지 말고 ‘제대로 예수 믿고’ 꼭 천국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67) 이런 까닭에 “거듭나지 않은 죄인은 천국에 가더라도 천국의 참된 즐거움을 기뻐할 줄 모른다. 그가 사악한 죄인인 경우 “천국 한 복판에서도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68)

따라서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의지하면 무조건 죄에서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며 잘못된 가르침”이며, “십자가를 믿고 의지한다고 무조건 죄 용서를 받지는 않는다”69)고 한다.

그러므로 마르틴 루터가 ‘오직 믿음’이라는 슬로건으로 종교를 개혁했는데, 공로도 있지만 이것은 ‘교회에 미혹’을 가져왔고, 칼빈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미혹’을 정착시켰다고 비난하며 칭의와 견인의 교리를 부인한다.70) 마침내 “예수를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본래 이단 사설이며”, 이러한 “이단사상이 이제는 교회 안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들어와 가지고 거짓선지자들의 입술을 통해서 번지고”(“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 2006년 5월 26일 설교)71)있으며, 주의 진리 대적하고 있다고 과감한 주장을 하였다.

‘오직 믿음’이니 ‘은혜로 받는 구원’이니 하면서 사실은 자기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의 의미조차 제대로 모르면서 주의 진리를 대적합니다.72)

(5) 그러므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는 말씀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는 말씀처럼 “우리 안에 의가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73)

마치 십자가를 신뢰하기만 하면 죄에서 돌아서는 회개나 행함이 따르는 참 믿음이나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로 지음 받는 거듭남이 없이도 죄 용서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는 양 가르치고, 자신들만이 정통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74)

이상에서 길게 분석한 변승우의 구원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일반교회가 말하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다.
②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자체가 잘못된 가르침이다.
③ 믿음과 회개를 분리시켜, 회개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④ 그가 말하는 “행함”이란 결국 회개와 율법의 지킴, 순종등 사람의 의지적인 것을 가르킨다.
⑤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라는 교리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큰믿음교회의 사이트에는 “참된 회개와 진리로 나가도록 부름을 받은 교회”라고 명시하고 있다. 주로 이 일을 중보기도학교 사역을 통해 진행된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행 26:20)는 말씀에 따라 ‘진정한 회개’를 위해 ‘상한 심령’(시 51:17)으로부터 나오는 ‘통곡 기도’를 하여 ‘자아의 죽이고'(마 10:23), ‘주님의 진정한 신부로써 주님과 동행’(고후 11:2)하도록 사역하는 것이라고 한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철야기도회(저녁 9시부터 새벽 5시)에는 1,000여명이 모여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가족과 나라와 민족 그리고 세계 열방을 위해 주님과 함께 울며 중보하는 시간을 가진다고 한다.

앞에서 살펴본 변승우의 주장과 큰믿음교회의 활동에 대해 예장 합동측은 이단사이비피해대책조사 연구위원회는 보고서(2009)를 통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변승우 목사는)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성경적인 신앙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믿음은 선행을 수반하지 않는다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논리를 펴 주장한다”며 “변승우 씨의 주장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성경적 구원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알미니안주의 혹은 신율법주의를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75)

예장 통합 총회(2009) 역시 변승우의 구원론적 주장에 대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구원론”으로서 구원론적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이렇게 변 씨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도 회개와 선한 일을 행해야 한다고 하며, 구원받은 사람도 헌신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 성령의 선물로 인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반대하고 행위와 공덕에 의한 구원을 강조한다. 이러한 구원관은 성경적 구원관이나 우리 개혁교회의 구원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본 교단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위험한 구원론이다.76)

온전한 구원은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의지하고 본 받으며, 성령의 감화로 거룩하게 하심과 영원한 영광을 믿는 것이다.(예장 통합 신조 9) 따라서 예수의 가르침을 개념적으로 요약하면 “나를 믿으라”(칭의), “나를 따르라”(성화), “나를 기다려라”(영화)는 것이다. 따라서 온전한 구원은 과거에 이미 ‘마음으로 믿어 얻은’(롬 10:9) 구원(칭의), 현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루어야 할’(빌 2:12) 구원(성화), 그리고 “현재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롬 8:18)을 ‘소망 중에 기다라는’(롬 13:11) 영원한 구원(영화)이라는 세 차원으로 되어 있다.

구원의 세 요소인 칭의(稱義), 성화(聖化), 영화(榮化) 중 어느 하나를 극단적으로 주장하고 다른 것을 배제하는 것도 구원론의 왜곡이며 구원론적 이단이다.77)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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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윤석, “변승우 목사, 어쩌다 출교당한 이단 됐는가”, <교회와신앙> 2009. 10. 9.
2) 정윤석, “큰믿음교회, 사랑하는교회로 명칭 변경”, <기독교포털뉴스> 2015. 12. 30.
3) http://www.gfctv.org/ko/index.htm (2016. 2. 3.)
4) http://www.gfctv.org/ko/index.htm (2016. 2. 3.)
5) 변승우, <1세기의 사도와 오늘날의 사도>(서울: 큰믿음출판사, 2010), 127.
6) 변승우, <1세기의 사도와 오늘날의 사도>, 125-126.
7) 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서울: 큰믿음출판사, 2004), 131.
8) 정윤석, “변승우 목사의 이상한 구원론-‘참 구원받은 사람도 진짜 버림받을 수 있다’”, <교회와신앙> 2004. 12. 8.
9) 변승우, <가짜는 진짜를 핍박한다>(서울: 큰믿음출판사, 2008), 목차 참고
10)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외 편, <종합 이단·사이비연구보고집>(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1), 308.
11) 변승우, <정통의 탈을 쓴 짝퉁기독교>(서울: 큰믿음출판사, 2009), 88.
12) 변승우, <정통의 탈을 쓴 짝퉁기독교>, 91.
13)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외 편, <종합 이단·사이비연구보고집>, 311.
14) 변승우, <정통의 탈을 쓴 짝퉁기독교>, 87.
15) 변승우, <사도와 선지자들을 잡는 위조 영분별>(서울: 큰믿음출판사, 2008), 109-113.
16)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외 편, <종합 이단·사이비연구보고집>(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1), 308.
17) 변승우, <정통의 탈을 쓴 짝퉁기독교>, 160.
18) 변승우, <정통의 탈을 쓴 짝퉁기독교>, 25-26.
19) 변승우, <정통의 탈을 쓴 짝퉁기독교>, 74.
20) 전정희, “바리새주의 정통교회가 가장 사악한 이단”, <교회와신앙> 2008. 10. 28.
21)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외 편, <종합 이단·사이비연구보고집>, 309.
22) 변승우, <그 시에 주시는 그 말을 하라>(서울: 큰믿음출판사, 2009), 255-256.
23) 변승우, <그 시에 주시는 그 말을 하라>, 187-192.
24) 변승우, <그 시에 주시는 그 말을 하라>, 188-189.
25) 변승우, <그 시에 주시는 그 말을 하라>, 292-299.
26) 변승우, <그 시에 주시는 그 말을 하라>, 294.
27) 변승우, <계시와 지혜의 영>(서울: 큰믿음출판사, 2007), 9.
28) 변승우, <지혜와 계시의 영>, 9~11.
29) 변승우, <명목상의 교인인가? 미성숙한 신자인가?>(서울: 큰믿음출판사, 2009), 11.
30) 변승우,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서울: 큰믿음출판사, 2008), 10.
31) 전정희, “[이단성 핵심체크] 변승우(큰믿음교회)”, <교회와신앙> 2010. 2. 26.
32) 변승우,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서울: 큰믿음출판사, 2008), 10.
33) 변승우, <그 시에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머리말.
34) 변승우, <대부흥이 오고 있다>(서울: 큰믿음출판사, 2006), 237-238,
35) http://www.gfctv.org/category.php?cateId=100010007 (2016. 2. 3.)
36) 변승우, <그 시에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머리말.
37) <교회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수정증보판)>, <구원에 이르는 지혜>, <명목상의 교인인가? 미성숙한 신자인가?>, <다림줄>, <정통의 탈을 쓴 짝퉁 기독교>, <말씀 말씀 하지만 성경에서 벗어난 제자 훈련>, <진짜 구원받은 사람도 진짜 버림받을 수 있다!>,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예수빵>,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 <그 시에 주시는 그 말을 하라!(1, 2, 3권)>, <실전 영분별>, <주의 음성을 네가 들으니!> 등 50여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38) 변승우, <다림줄>((서울: 큰믿음출판사, 2013), 25-26.
39) 변승우,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서울: 큰믿음출판사, 2008), 10-11.
40) http://www.gfctv.org/ko/ministries4.php (2016. 2. 3.)
41) 변승우, <다림줄>, 27.
42) 변승우, <다림줄>, 26.
43) 변승우, <다림줄>, 60.
44) 변승우, <다림줄>, 103-104.
45) 변승우, <다림줄>, 25.
46) 전정희, “새로운 계시의 일부는 초성경적인 것” <교회와신앙> 2008. 11. 13.
47) 변승우,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75.
48)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외 편, <종합 이단·사이비연구보고집>, 309. “외국의 사역자들의 추천사를 책 앞에 배치시키는데, 그 추천사에는 거의 예외 없이 변승우 씨가 받은 계시가 성령의 계시라고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49)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외 편, <종합 이단·사이비연구보고집>, 310, 313.
50) 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 99.
51) 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 105-123.
52) 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 185.
53) 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 186.
54) 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 187.
55) 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 104.
56) 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 104.
57) 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 104.
58) 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 164.
59) 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 115.
60) 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 161.
61) 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 28.
62) 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 25.
63) 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 24, 43.
64) 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 28.
65) 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 36.
66) 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 35.
67) 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 머리말.
68) 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 177.
69) 변승우, <주 달려 죽은 십자가>(서울: 큰믿음출판사, 2007), 65.
70) 전정희, “큰믿음교회(변승우 목사)에 ‘성형’의 기름부음이?” <교회와신앙> 2012. 5. 3.
71) 전정희, “바리새주의 정통교회가 가장 사악한 이단”, <교회와신앙> 2008. 10. 28.
72) 변승우,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서울: 큰믿음출판사, 2005), 87-88.
73) 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챤들>, 166.
74) 변승우, <주 달려 죽은 십자가>, 59.
75) “합동측 “변승우 목사 주장은 신율법주의”···참석금지 규정”, <교회와신앙> 2009. 9. 25.
76)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외 편, <종합 이단·사이비연구보고집>, 312.
77) 허호익, “구원론의 통전적 이해”, <현대 조직신학의 이해>(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347-348.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707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이 글은 동성애를 용인하고 묵인하는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쓴 글이다.

동성애 합법화의 저지선은 대개 관습적, 생물의학적, 심리학적, 법학적, 신학적 단계로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했던 심리학적 저지선이 무너짐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각종 친동성애 법안 개정과 발효에(동성애 결혼법, 차별금지법 등) 가속도가 붙은 상태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저지선은 교회와 신학일텐데, 도리어 일부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마치 영혼이라도 팔아먹은 듯 상황주의적 윤리로써 동성애 옹호에 나서고 있어 그 저지선마저도 붕괴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리하여 이 글을 마련하였다. 이 글의 원안은 본래 10여 년 전에 작성했던 것인데, 지난 2014 퀴어문화축제 당시 하도 해괴하여 다시 꺼내 손을 봐서 게시했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도리어 친동성애 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더욱 위중한 시기임을 직시하고 내용을 좀 더 보강해 배포하는 바이다.

동성애 옹호자들이 성서 해석을 어떻게 그릇되게 하는지, 그리고 세속법의 상황주의적 변화와는 별개로 우리의 불변한 기준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였다. 공유할 만할 것이다.


이영진 기호와 해석
▲이영진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동성애자 축제인 '퀴어문화축제' 행렬 앞에 가서 드러눕다시피 하는 기독교인의 열정을 지지한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오늘날의 친동성애자들은 성경을 적극 인용해 가면서 변증을 펼친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신학적 마지노선이란 사실상 성서적 저지선을 말한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이 성서의 해석이다. 그들 역시 성서를 해석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행위의 근거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릇된 해석을 압도하는 주석이어야 기준(canon)을 빼앗기지 않을 것 아닌가?

그럼에도 반(反) 동성애 입장의 전통적 기독교인은 단지, '동성애자는 무조건 죽이라고 (성경에서) 말했다'는 식의 주석 수준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우선 동성애 옹호 신학에서 단골로 끌어다 쓰는 성서 인용과 해석을 우선 나열하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박과 교정을 담되, 최소한 성경으로는 더 이상의 논박이 없도록 당대 사회적 배경과 함께 입체적 주석으로 정리해 놓을 것이다.


1. 동성애 옹호자들의 그듯된 성서 해석에 대한 교정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전통적 기독교인은 대부분 레위기 18장 22절,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혹은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창 19장) 또는 그와 유사한 한 레위인의 첩 이야기(삿 19장) 등을 토대로 해서 동성애를 다룰 것이다. 과거에는 "봐라! '죽이라!'고 했다!" 하면 사회에 먹혀 들어갔다. 아니 그렇게 선언하고 덮으면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구절들에 대한 동성애 옹호 입장의 변증은 이미 오래 전에 다 고안된 상태이다. 기독교 윤리학 대가인 퍼니쉬(V.P. Furnish)는 이 같은 금지법이 '동성애 금지법'이 아닌 '성결법'으로 보아야 한다면서 동성애의 보호막이 돼 주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이 들으면 눈 가리고 아웅하는 해석으로 들리겠지만, 법의 프레임을 넓게 변화를 주거나 각도를 옮겨줌으로써 동성애 관련 기독교 윤리의 시대적 변화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그들이 '남자'를 끌어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천사'에 대한 음욕이었다는 식으로, 한 레위인의 첩 이야기(삿 19) 역시 특별히 동성애를 겨냥한 심판이 아니라 기브아인의 비열함이나 잔인함에 대한 심판이었다는 식으로 그 동성애 경계를 무력화시켰다. 벌써 30여 년 전에 이런 신학적 타진은 끝낸 상태이고, 지금은 일반적 이해가 돼 버렸다.

이와 같은 그릇된 성서 해석들을 모아보면 아래와 같다.

동성결혼
▲ⓒ이영진 교수 제공


※ 위 목록들에 대한 반박이다.

1) 소돔이 범했던 죄는 명백히 동성애의 죄였다

'알다(ידע)'는 모든 경우에 성관계 은유를 표현하는 단어는 아니지만, 창세기에서만 무려 120여 회 사용된 중에 거의가 성관계를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특히 롯이 자기 두 딸을 손님 대신 내어주면서 남자를 '안' 적이 없다는 용례는 결정적으로 '성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창 19:8).

게다가 '알다'는 '사악한 일'과 동등선상에 놓여 있다(7절). 소돔 사람의 관심이 성적인 게 아니었다면 왜 소돔인을 달래기 위해 처녀인 두 딸을 제공해야 했겠는가? 자기 딸을 내어주는 문화도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이 대목은 본질적으로 손님 접대(Hospitality) 라는 고대의 전통을 강조하는 대목임을 유의해서 읽어야 한다.

소돔으로 오기 직전 이 손님들에게 접대의 전통(Hospitality)이 아브라함에 의해 극진하게 베풀어진 것과의 비교 맥락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전통은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는 말씀의 기원이 된 맥락이다

2) 소돔의 죄인 이기심은 동성애와 연결되어 있다

동성애자들의 퀴어축제 행렬을 따라 다니며 성찬을 베풀어주는 '무지개 목사'들의 경우, 다음 구절을 인용한 피켓을 드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겔 16:49)".

이 본문을 통해 소돔과 고모라는 동성애 범죄가 아니라,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돕지 않은 죄'였다는 주장이다. 그것은 아마도 저기서 지적하는 소돔의 범죄는 '동성애'가 아닌 '교만'인데다, 소수(의 약)자라 일컫는 동성애자를 배격하는 반 동성애 기독교인들이 마치 소돔 자신이라는 모션인 것 같다.

에스겔이 소돔뿐 아니라 사마리아와 심지어 예루살렘까지 연대된 죄로 놓고 있기에(겔 16:46, 49) 유다도 피할 수 없던 이 죄는(50절), 동성애가 아닌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은 죄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창세기 19장의 전통적인 동성애 죄 견해에 대한 균열을 공략하려는 것 같다. 실제로 이런 주장을 한 학자는 대표적으로 월터 짐멀리(Walther Zimmerli) 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만 에스겔의 소돔에 대한 일련의 언급들은 가난한 자를 돕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동성애 죄를 같이 갖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정설이다(Norman Geisler). 비틀어 풀 하등의 이유가 없다. 동성애란 가난한 자들에게 발생하는 죄가 아니라, 주로 가난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발생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존하는 동성애자 중에는 가난한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트렌드로 창궐한 뒤의 일반화이고 문제는 진원지인데, 에이즈(AIDS)가 동성애에서 다발로 발생하는 것처럼 동성애의 시원 지점은 절대 부유함이다. 가난한 자는 먹고 사는 생계 문제 때문에 성에 탐닉할 겨를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부자가 되려는 꿈에 대한 기대를 안고 살아가기 때문에, 행여 그 꿈이 깨질까봐 고도의 쾌락 같은 것은 들여놓지 않으려는 다소의 면역체계를 구축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하라고 했던 것이다. 니체는 이것을 '노예의 도덕'이라고 불렀다.

이제 아래에서 보면 알겠지만 역사적으로 노예들에게도 동성애가 있었는데, 그것 역시 대부분 부자, 즉 주인의 유린과 착취의 형태를 띠고 일어났다. (동성애로 성적 결정권이 유린당한 것이다. 오늘날은 거꾸로 동성애가 자기 결정권이라고 한다. 스스로 노예이면서.) 따라서 '동성애'와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은 죄'를 동일선상에서 보지 않는 이 자들은 참으로 옹색한 주석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소돔이 범했던 죄는 접대 전통의 소홀함·불친절만이 아니었다. 이기심의 죄도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위의 피켓에 적힌 구절 바로 다음 절인 50절에 나오는("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가증함'은 앞서 동성애 죄를 적시했던 레위기 18장 22절("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에 나오는 '가증함'과 동의어이다. 소돔의 죄인 이기심은 동성애와 연결돼 있다.

3) 레위기 율법은 현대에도 적용될 수 있는 법이다

고대의 제사법이 개정되거나 철폐된 사례를 들어 동성애에 대한 조항의 현대적 개정 가능성을 타진하지만, 제사 및 의식법을 그렇게 동성애와 묶어서는 안된다. 구약에 정해신 식사 의례는 변경됐지만(마 7:18; 행 10:12) 동성애를 하지 말라는 도덕 명령은 신약에서도 거듭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롬 1:26-27; 고전 6:9; 딤전 1:10; 유 7).

4) 불임에 관한 유대 정서와 동성애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불임은 동성애가 나쁘다는 이유가 당초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독신자를 죄인이라고 해야 할텐데 그렇지 않다(cf. 마 19:11-12; 고전 7:8).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마 19:11-12)"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전 7:8)"

5) 이성간 사랑이 동성애자에게 비정상적이라는 주장은 궤변이다.

로마서 1장 26절에 나오는 '역리'는 범죄 용어가 아니라, 단지 '비정상'이라는 상대적 개념어라는 논리인데, 그렇지 않다. 동성애자들은 동성애가 순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잘 안다. 그래서 떳떳하지 못해 숨어지내는 것이다.

오히려 친 동성애 신학에서조차 어찌 하지 못하는 가장 강력한 반동성애 코드가(레위기 법전이나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아닌) 바로 바울의 이 로마서 1장 18-32절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챕터와 결론에 가서 자세히 정리할 것이다.

6) 다윗과 요나단은 동성애가 아니라 친구애였다

요나단이 다윗 앞에서 옷을 벗었다는 것는 갑옷과 예복을 벗었다는 의미이며(삼상 18:4), 특히 그것은 세습 왕권의 포기와 권력 이양을 상징한다. 아울러 당대 남성들의 인사법은 입맞춤이었고, 과연 "다윗이 곧 바위의 남쪽 편에서 일어나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피차 입맞추고 같이 울되(삼상 20:41)"라는 문맥이 성적 뉘앙스인지 의아하며, 게다가 다윗은 밧세바를 향한 강력한 이성애 욕에 휩싸인 바도 있다. 다윗과 요나단에 관한 구체적 변증은 다음 글을 참조할 것.

다윗과 요나단은 동성애가 아니야  

바울
▲사도 바울 동상. Statue of Saint Paul by Giuseppe De Fabris 1840 in front of St. Peters Basilica, Rome. ⓒ이영진 교수 제공


자, 다음은 동성애의 죄상에 관한 사회적 배경이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로마서 1장 18-32절과 맞물려 있다. 바울이 구약성경의 '동성애자는 죽이라'는 강력한 율법이 있음에도, 도리어 그런 율법 조문은 사용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유념할 것이다. 당시 이런 배경 때문이다.


2. 로마의 동성애

로마에 동성애가 만연했지만, 공식적으로 드러내 놓고 수용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공화정 당시에는 노예와의 관계 안에서만 성행하였고 연장자가 소년을 성추행하면 처벌을 받는 등 공식적으로는 다소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과도기까지 이어진 동성애는 제정 말기에 이르러 부부애가 강조됨에 따라 점차적으로 동성애가 위축 되었고, 스토아주의(금욕주의)에 의한 성윤리가 확산된 이후로는 출산 목적의 성관계만 허용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당시 많은 이교도들로 구성된 기독교 공동체에 있어 개종자들의 성 정체성은 복음 윤리와의 접목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고 보고된다(W. Neil).

죄의식 없이 문란한 이 같은 성 정체성은 천민계급뿐 아니라 거의 모든 계급에 퍼져 있었는데, 초기 15대에 이르는 로마 황제 가운데 14명이 동성연애자였다고 전한다(W. Barclay). 심지어 동성애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만 독점한 게 아니라 셈족에게도 흔한 일이었다는 보고도 있다.

다음은 몇 가지 구체적 사료들이다.

1) 세네카

네로 황제의 가정교사이자 AD 49년경 집정관을 지낸 세네카(Seneca, 4 BC-AD 65)의 「Moral Epistles」에는 당시의 사치하고 방탕한 사람들의 노예 착취에 대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개탄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술 시중을 드는 노예는 여장을 해야 하고 나이가 든 남자도 소년처럼 행동해야 하는 괴로움이 있다.... 그는 마치 여자처럼 수염을 기르지 못하고 머리를 이쁘게 빗어 묶어야 한다. 그는 밤을 새워가면서 주인이 술이 취해 골아 떨어질 때가지 술시중을 들면서 그의 주인의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성의 놀이개가 되어야만 한다."

또 네로는 동성애뿐 아니라 생모 소 아그리피나와의 불륜 의혹에 이어 결국 그녀를 참살하고 처 옥타비아와 이혼한 다음, 포파이아와 결혼하기 위해 옥타비아를 간통죄로 살해하는 등 성적으로 가정 부도덕한 황제로 알려져 있다.

2) 플루타크

아테네의 사정을 잘 알 뿐 아니라 이집트 여행을 한 적도 있고 로마에서 강연도 하였다고 알려진 전기 작가 플루타크(Plutarch, AD 46-120)는 그의 「Dialogue on Love」라는 저서에 등장하는 한 화자의 대사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포함시키고 있다.

"...만일 남성들과의 연합이 애인의 부드러움을 파괴하지 않는다면 남녀간의 사랑은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합리적인 것이고 또 사랑에서 우정이 발전할 수 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남성들과의 결합은...(사랑과 생식을 관장하는 헬라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총애를 잃고 미움을 받을 것이다. ..."

3) 크리소스톰(Dio Chrysostom, AD 40-112)

도미티안 황제 통치 초기에 로마로 추방당했던 Dio는 그의 저서에서 "비록 여성들이 많지만 이 남성들은 음탕함과 불법을 통하여 남성들로부터 만들어진 여성들을 갖기 원하여 남성들을 거세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불행한 종(Breed)의 인간은 여성 보다도 더 연약하고 더 여성다웠다"라고 전한다.

다른 곳에서는 좀 더 구체적이고 유명한 사례로서 AD 67년에 네로는 그의 두 번째 아내 포파이아(Poppaea Sabina)가 죽은 후 그의 남자 애인 Sporus를 거세시켜 그의 이름을 Sabina라고 고치고 그와 정식 결혼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앞서 구약성서의 동성애 관련 구절들을 '성결법'이나 '학대금지'로 시계를 흐렸던 퍼니쉬(V.P. Furnish)는 세네카나 플루타크의 이 같은 동성애에 관한 평가를 단지 '착취'나 '자연스럽지 않은 것'에 대한 전형적인 금욕주의적(스토익) 반감이라고 표명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런 문구를 남기고 있다.

"그래서 이런 남성들은 좀처럼 정복하기 어려운 남성들을 자기 성욕을 충족시킬 대상으로 삼고 싶어한다. 이런 남성들은 젊은 남자들과 좀처럼 접근하기 어려운 남성들과의 성적 유희를 즐기려고 한다. ..."

이상과 같이 로마의 보편적 문화였던 동성애는 말 그대로 보편적이었지만, 그것은 억제된 정당성 속에 성행했다는 점에서 우리 시대와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시대의 선진국 로마에 그같은 성 풍속과 성 관념은 왜 유행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그리스의 문화를 그대로 받았던 로마로서는 자연스런 문화유입이었다.

▲Liberal MP calls for referendum on same-sex marriage after Ireland vote. ⓒ이영진 교수 제공

그렇다면 그리스의 동성애는 어떤 것이었나?


3. 그리스의 동성애

그리스 시대의 동성애는 사회 일반적으로 보편화되어 있었다. 그들이 동성애에 관한 보편성을 갖기까지는 신화적 관념 속에 깊이 탑재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일찍이 플라톤은 아프로디테를 천상과 지상에 각각 존재하는 둘로 규정하고, 어머니 없이 우라노스에게서 나온 천상의 아프로디테는 오직 남성적 요소만 갖고 있는데 그것이 소년에 대한 사랑이며, 지상의 아프로디테는 여성과 남성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순수하지 못한 사랑으로 여긴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철학적 사상 구조의 측면도 있었다.

단편적이긴 하지만 이들의 철학적 이해에 따르면 여자와의 사랑은 '아기를 낳는다'는 불순한 목적이 있는 사랑이지만, 소년애는 순수한 사랑, 그야말로 사랑을 위한 사랑(l'amour pour l'amour)이기 때문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관조적 개념은 자웅양성으로 불리던 혼합적 존재가 반으로 나뉘어 남자 혹은 여자가 되어 간통과 같은 천한 죄를 범하는 부류가 된다는 사상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자웅양성의 혼합적 존재가 아닌) 순전한 성을 가진 사람들만이 동성애를 하게 되는 것이라면서 소년애를 특별한 남성다움으로 제시하였다.

결국 이러한 개념은 "여자들을 좋아하고 아기를 낳고 싶으면 아내에게로 가라. 여자와 자고 싶으면 노예나 창녀에게로 가라. 진정한 사랑을 하고 싶다면 미소년에게로 가라"는 철학적 멋스러움으로 작용했고 이것이 곧 그리스인들의 성관념이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들의 사회적 구조가 그와 같은 하류의 신화와 철학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지위가 낮고 천했던 가사 여성은 한낱 생산의 도구였던 까닭에, 그리스의 어머니들에게는 자기의 자식을 가르칠 만한 지식이 없었다.

따라서 그리스 성인 남성들은 폴리스의 유지를 위해 어린 소년들을 훈련시켜야 하는 교육 과제를 안고 있었고, 이러한 관계 속에서 소년들은 필요한 그들의 지혜와 경험과 노하우를 성인 남성들로부터 전수받고 자신들이 장차 자라나 폴리스의 공직을 맡는 데 지장이 없도록 보호받는 대가로 자신들의 몸을 허락하던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의 동성애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뿌리를 지닌 사회에 유대교의 율법을 던진다 한들, 누가 귀담아 들었겠는가?


4. 바울과 동성애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바로 이 명문이 선포된 것이다.

"19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ㅡ로마서 1:18-32"

이 같은 상황에서 바울은 동성애를 윤리로 다룰 때 우리처럼 레위기 법전 같은 고강도 텍스트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난데없이 '양심'이라는 일반적인 도덕률을 끄집어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에는 그 양심을 통해 율법까지 포섭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의 테크닉, 아니 주석 능력을 이 시대 기독교인은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양심이라는 술어는 신약성서에서 일종의 파라클레토스이다. cf. https://www.facebook.com/pentalogia/posts/776004379098650] 그것은 위와 같은 사회 배경에서 살폈듯 이방인에게 제 아무리 "레위기에서 (동성애자를) 죽이라"고 했다며 성경책을 펼쳐보였다 한들 무위에 지나지 않았던, 이 시대의 경우와 결코 다르지 않았던 상황에 적확한 대응이었던 것이다. 특히 저기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이 마음(ἐπιγνώσει)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νοῦν)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8절)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가지 마음이 있다. 하나는 에피그노시스(ἐπιγνώσις), 지식소. 지식이 들어가는 마음이다.
다른 하나는 누스(νους), 인식소. 인식이 들어차는 마음이다.

지식소인 전자의 마음에는 '안 된다' 혹은 '된다'는 기준으로서의 지식을 집어 넣는 것인데, 넣기가 싫은 것이다. 그냥 싫은 마음이다.

후자의 마음은 말 그대로 상실된 마음, 버려진 마음이다. 그 교정/개정의 여지를 거부하니깐 자신의 인식이 그만 버림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인식 구조의 원리를 토대로 우리에게는 마비가 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러움과(v.24) 부끄러움과(v.26) 상실한 마음대로(v.28) "내어버려 둠(v. 24, 26, 28)"을 당하게 되고 그 내어버려둠의 결국에 맞이하게 되는 것이 바로 순리를 역리로 바꿔 쓰는 여성 동성애(v.26)와 남성 동성애(v.27)라는 최종 귀결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이해하고 있는, 또한 우리가 이해해야 할 동성애이다. 동성애는 심판의 요인이 아니라 심판의 결국인 셈이다.

그렇지만 역으로 이 인식의 구조 덕택에 우리 모두는 진정한 심판의 국면에 섰을 때, "핑계치 못하게"ㅡ도 되는 것이다. 인식이 모른 척 했을 뿐이기에.

다시 말하거니와, 동성애 하면 벌 받는 게 아니라 동성애가 곧 형벌이다.


에필로그

따라서 우선 그리스도인들은 동성애는 생물의학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임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아울러 바울의 논거처럼 아닌 것을 아니지 않다고 하는 세상, 그리고 또 그렇게 그대로 되는 세상에서는 양심이 그 율법을 대신한다는 사실도 재확인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구약 보다는 바울 텍스트가 더 적절하다.

그럼에도 긍휼히 여김의 끈은 놓지 않기를.


이영진 교수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 전공 주임교수이다. 그는 다양한 인문학 지평 간의 융합 속에서 각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매우 보수적인 성서 테제들을 유지해 혼합주의에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신학자로, 일반적인 융·복합이나 통섭과는 차별화된 연구를 지향하고 있다. <자본적 교회(대장간)>,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등의 저서를 갖고 있다.


원문 출처: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00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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