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입술의 고백

올 삼월에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는 자매를 일전에 방문하였다. 유월쯤에는 일터에 돌아가 일할것으로 예상했었는데 지금 팔월 말이 되었건만 일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약해 있다. 좋은 의사를 만나 수술이 성공적이고 많은 위로객으로 그분의 병실은 꽃속에 뭍혀 있었었다. 그런데 오(5)개월이 지난 지금은 병색이 완연하고 본인도 투병생활이 힘드는지 눈물을 뚝뚝 흘린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아도, 앞으로의 생을 놓고도 뚜렷이 무엇하나 잡을것이 없는 그 허무함이 그녀를 더욱 서글프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땅에 던져진 날은 확실하지만 언제 갈지 모르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지금 은 그런대로 산다고 하지만 내일 일을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생명과 건강이 있을 때 우리가 확실하게 해 두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내가 죽어서 가야할 곳이다. 내가 가야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 있는자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화평할 수있다.

그러나 그 좋은 구원에 대한 확신은 단순하고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애써 이루어야할 과제이다. 침례받는 일은 시작일 뿐이다. 우리는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다고 시인하므로 구원의 여정을 시작한다.(롬10:9) 그런 엄청난 고백을 한 우리는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은 쉽지가 않고 하루 아침에 저절로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안의 죄성은 우리가 모르는 새에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언짢게 하고 있다. 그래서 그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새벽기도도 하고 성경도 공부하는 것이다.

한 자매는 성경공부 시간에 자신은 의지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기쁨으로 예배나 성경공부를 하기보다는 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애를 쓰며 한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를 작동하여 그에게 가까이 오시기를 원하신다. 지성과 감성을 다 동원하여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원하신다.

눈먼 자 거지 바디메오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신다. 그때 바디메오는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담한다. 소경이 보기를 원하는 것은 만인이 다 아는 사실이지만 주님은 나의 의지와 소원을 나의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원하신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는 죽음이라는 운명을 맞이한다. 그런데 그 이후에 가야할 천국에 대한 확신은 내가 생명이 있을 동안에 해결해 놓아야할 과제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아들이니이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베드로와 도마와 같이 우리도 고백해야 한다.

오늘도 나의 입술은 무엇을 고백하며 살고 있는가!

글쓴이:  어느 자매
펌 글


선한목자와 거짓목자의 차이



11절 보십시요.  “나는 선한 목자라.”
이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은 양의 문도 되시고, 양을 돌보는 목자가 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양들의 주인이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의 양 떼를 잘 돌보라는 목자의 사명을 받은 목자이십니다. 목자의 사명을 감당하신 부활의 주님은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장이십니다. 목자장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양떼를 돌보라는 목자의 사명과 직분을 위임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냐?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 그렇다면 내 양을 치라”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 선한목자 예수님, 목자장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목동이요, 작은 목자입니다. 예수님의 양떼를 돌보고 지키라는 사명을 부여 받은 목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목자와 거짓목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말씀을 볼 때 여덟(8) 가지입니다.

1.  첫째, 2절입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게 하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돕습니다. 그런 사람이 좋은 목자입니다.
반대로 거짓목자, 나쁜 목자는 양들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엉뚱한 곳으로 인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인기를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양떼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자기를 따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양들을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2. 둘째, 1절 입니다. “양의 우리”는 “양들이 편히 쉬는 곳”으로서 “하나님의 목장”이면서도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선한 목자는 자기가 돌보는 양떼를 언제나 자기가 소속된 교회로 인도합니다. 자기가 감당하는 목장의 양들이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고, 교회에 대한 소속감을 가지도록 돕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쁜 목자는 교회보다는 자기 목장을 더 강조하고, 교회와는 별개로 자기가 감당하는 목장에 철옹성을 쌓는 것입니다.

저기 어느 여자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목장의 식구들을 데리고 나가버렸습니다. 나가서 따로 교회를 차렸습니다. 이런 분은 아주 나쁜 목자, 거짓목자에 속합니다. 그런 분은 교회의 양 떼를 훔치는 절도요, 강도인 것입니다. 나가고 싶으면 혼자 나가야지, 하나님의 양떼들을 데리고 나가선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목자가 아니라 절도며 강도인 것입니다.

3. 셋째, 11절에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양떼를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 희생하셨습니다. 목숨을 내주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목자의 직분과 교회 리더의 직분이란 높임 받고, 섬김 받고, 군림하는 위치가 아닙니다. 오히려 양들을 위해 섬기며, 봉사하며, 양들을 위해 희생하는 위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고, 양들을 위해 희생할 수 있고 헌신 할수 있어야 합니다. 이 희생과 버림과 헌신이 있어야만 양들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거짓목자는 절대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않습니다. 조금도 양들을 위해 희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양들을 잡아먹고, 이용하려 듭니다. 자신만의 유익을 챙깁니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목장과 양들을 이용합니다. 유사시엔 도망갈 궁리를 합니다. 별로 유익이 없으면 언제든지 목장을 내동이 칩니다. 위기시엔 양들이 어찌되든 말든 내 팽개치고 자기 갈 길로 갑니다. 그래서 12절에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양들을 위해 희생해 보았을까요? 목숨을 내놓아 보았을까요? 네. 그렇게 했습니다.
어느 자매가 저에게 전화하기를 “목사님이 재정보증을 서 주어야만 제 아들이 감옥에 가질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순간적으로 고민했습니다. 그 자매의 변호사는 저에게 신중히 생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집을 담보해야 하는 것이기에 잘못 하다간 뺐길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찌할 것인가?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 놓으셨고 희생했는데 난 뭔가?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는 주님의 음성이 저의 마음을 때렸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셨는데… 그래서 주님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보증을 서 주었습니다.

그러면 양들을 위해 희생을 해야하고 맨날 손해만 보는 나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17절 입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생각해주시는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증거로 양들을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은 하늘보좌 위에 높이 올리우심 받았고, 세상 만민의 주가 되셨습니다.
여러분이 양들을 위해 손해를 보고, 피해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희생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이 아닐지라도 반드시 여러분의 후손들에게라도 주실 것입니다. 저는 그 걸 체험했습니다.

4. 넷째, 선한 목자와 거짓 목자의 차이는 10절입니다.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니.”
선한목자는 양들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자유롭고, 은혜스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 잘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거짓 목자는 그 반대입니다. 양들을 구속하고, 구박하고, 이용하고, 억압합니다. 은혜스런 삶을 살지 못하도록 괴롭힙니다.

5. 다섯째, 12절을 보십시요.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선한 목자는 자기 목장에 속한 양만 돌봅니다. 자기 교회에 속한 양만 돌봅니다. 다른 교회에 속한 양은 절대로 손대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짓목자는 다른 교회에 속한 양을 데려다가 칩니다. 다니고 있는 교회가 분명할 때는 절대로 데려와선 안됩니다. 소속이 있음을 알면서도 데려다가 양을 삼으면 그것은 절도요, 강도입니다.
참된 목자는 다른 교회에 잘 있는 양을 절대로 꼬시지 않습니다. 꼬셔 데려가면 그것은 절도요, 강도입니다. “우리 교회로 오라고 하여 꼬득여 데려가는 것”, 이것 때문에 오늘날 교회 목사들 사이가 많이 파손되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교회가 하나로 되는데 장애를 겪고 있습니다. 내 양을 데려갔기에 거기서 오는 불신과 미움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6. 여섯째, 3절 입니다.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14-15절을 보십시요.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중동 지방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은 양과 친하다고 합니다. 양들에게 각자의 이름을 붙여줄 정도입니다. 양들 하나 하나의 특징을 모두 파악하고 있습니다. 양들의 장점과 단점도 다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양들이 어디가 아픈지도 알고, 아프면 치료해줍니다. 이동할 때 그들의 이름을 불러 모이게 합니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선 우리의 이름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우리 각자의 이름을 당신의 손바닥에 새겨 놓고 계십니다. 우리가 울 때 함께 우시고, 우리의 모든 사정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양들과 친해야 합니다. 1:1 인격적인 관계성을 가지며 친밀해야 합니다. 양들의 아픔과 생각까지도 모두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양들이 울면 함께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양들의 형편과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양들과의 대화이며,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대화가 없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 양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수요예배, 성경공부시간, 기도회 시간에 반드시 참여할 수 있길 바랍니다. 일주일에 딱^ 한번 주일예배만 참석하고 가면, 저는 절대로 여러분의 형편과 시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과 친할수도 없고, 여러분의 기도제목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최소한 주중에 갖는 성경공부시간에 참여한다면, 성경공부를 하면서 서로간의 대화를 나누기에 친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일예배만 참석하고, 성경공부시간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저를 나쁜 목자로 만들고, 거짓목자로 만들고, 삯군 목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공부 시간은 성경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여러분을 알고 여러분이 저를 알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 누누이 성경공부에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딱 한번 주일예배에 저를 보고만 간다면 저는 여러분을 절대로 모릅니다.

이렇게 볼 때, 숫자 많은 교회에 다니며, 주일날 교회에 나가 하나님의 눈도장이나 찍고, 담임목사와 일대일 관계성이 전혀 없다면, 그런 교회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는 교회생활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바람직한 목자와 양의 관계가 아닌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숫자 적은 우리 교회가 아주 좋은 것입니다.

7. 일곱째, 요한복음 21장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양을 먹이라, 양을 치라” 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돌보면서도, 양을 칠 줄 아는 것입니다. 양을 친다는 것은 양이 양을 낳게 하여 목장을 번성케 하는 것입니다. 목장에 양들이 많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양들이 양을 낳지 못하면 전도하여 양을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나쁜 목자는 그 반대입니다. 안일무사하고, 양을 돌보려고 하지도 않고, 양을 키우지도 않고, 양들을 전도도 안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장이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도 않고, 내버려둡니다. 그렇다면 그런 목자는 아주 나쁜 목자인 것입니다.

8. 여덟째, 추가로 히 13: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각 구역의 목장의 목자들은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고, 교회의 질서를 존중히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목자인 목사에게 순종합니다. 나쁜 목자는 그 반대입니다. 목사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고, 목사를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유익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한번은 000 도시에 있는 어느 교회의 집사를 초빙하여 간증집회를 가지려 했습니다. 오시라고 했더니 그 집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 목사님의 승락이 있어야 합니다. 저의 교회 목사님이 허락하시기 전에는 제가 “Yes , No” 가부를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목사님께서 직접 저희 교회 목사님께 허락을 받으십시요. 저희 교회 목사님의 승낙이 있어야만 제가 움직일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 집사님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담임목사의 승락을 받기도 전에 아마 Yes 했을 것입니다. “상관 없어요 목사님이 허락 말든 전 갈 수 있어요.” 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그 집사님의 말에 감탄했습니다. 그토록 교회의 권위와 질서를 지키는 집사님이라면, 진짜 선한 목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도 그 집사님 처럼 그러할 수 있길 바랍니다. 담임목사의 허락이 없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무슨 일을 결정하기 전에 담임목사의 의견을 먼저 묻고 결정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담임목사가 가라 하면 가고. 가지 말라고 하면 안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진짜 교회생활이고, 교회 간에 반드시 지켜야 할 질서요, 목시와 성도간에 지켜야 할 예의요, 의무인 것입니다.

( 이 글은 저의 교회의 형편에 맞게 쓴 것 입니다. 졸작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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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망의 하나님 미국 대도시 학교에서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학생 환자가 학습을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어느 날 이 프로그램을 맡은 한 선생님이
    한 학생을 소개받았습니다.
    그녀는 그 학생의 이름과 병실 번호를 받았고,
    그 학생의 담임선생님과 간단하게
    학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현재 그의 학교 교실에서
    명사와 부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 담임선생님은 말했다.
    “그 학생이 너무 뒤떨어지지 않게 명사와 부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면 참 감사하겠습니다.”
     그 병원 프로그램 담당교사는 그날 오후
    그 학생을 만나기 위해 병원으로 갔습니다.
    아무도 그 학생이 완전 심하게 화상을 당해서
    중증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병원에 들어선 순간 그 소년의 모습을 보고
    그 선생님은 너무나 당황이 되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겨우 그녀는 말했습니다.
     “난 학교에서 너에게 명사와 부사를 가르치라고
    부탁을 받고 여기 온 거야.” 그렇게 하고 그녀는 수업을 했다.
    그녀가 떠나려고 했을 때, 많은 것을 이룬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다음날 병원에 갔을 때 그
     병원 간호사가 그녀에게 물었다. “어제 그 소년에게 무엇을 하셨어요?”
    그 선생님은 자기가 틀림없이 뭔가 잘못했다고 생각해서
    사과하기 시작했다. “아뇨. 그러실 필요 없으세요.”
    간호사가 말했다. “우리 말을 이해하지 못하셨군요.
    우리들은 그 어린 소년이 늘 걱정이 되었거든요.
    그런데 어제부터 그 아이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진 거예요.
    이제 그가 우리의 치료에 반응을 하게 되었고,
    자기의 병과 맞서 싸우려는 자세가 보인 거예요.
     살려고 결심한 것처럼 말이지요.”
     2주 후에 그 소년이 다음과 같이 사실을 고백했다.
    “그 선생님이 올 때까지는 제가 살려는 희망을 완전히 포기했어요.
    그러나 아주 단순한 사실을 깨닫고서야 모든 것이 바뀌었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그 소년은 다음의 놀랄만한 고백을 덧 붙였다.
    “그 분들은 죽어가는 아이에게 명사와 부사를 가르치도록
     선생님을 보내진 않았겠죠? 그렇지 않아요?”
     (1991년 7월 Bits and Pieces에서 발췌)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로마서 15장 13절)
    -펀글


아르만드의 아빠의 이야기

     
  1989년 아르메니아에 8.2도의 지진이 일어나 불과 4분 만에 3만 명이 죽고 아르메니아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비극 속에서 인간의 가장 선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혼란과 파괴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아버지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학교 건물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고, 잔해의 무더기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 때 그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는 아들의 교실이 있었던 건물 모퉁이로 달려가서 그 잔해 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어떤 현실적인 소망을 가졌던 것인가요? 그 잔해 더미 속에서 아들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인가요?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잔해 더미를 헤치며 아들을 찾은 것은 아들에게 항상 아빠는 항상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했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막 잔해 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했을 때, 다른 부모들은 그를 끌어내면서 위로의 말을 했습니다. “아버님, 너무 늦었어요. 그들은 이미 죽었어요. 당신이 도울 수 없어요. 이제 집으로 가요!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 후에 소방관 부장이 그를 잔해 더미에서 끌어내면서 말했습니다. “곳곳에서 불과 폭발이 일어나고 있어요. 당신이 위험해요. 집으로 가세요!” 결국은 경찰이 와서 말했습니다. “다 끝났어요. 당신은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어요. 집으로 가세요. 우리가 처리할게요.”

 그러나 이 아버지는 8시간, 12시간, 24시간, 36시간이나 계속 잔해를 파내었습니다. 그리고 38시간이 지나서 그는 돌을 끌어 당겼고, 그의 아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즉시 그가 소리쳤습니다. “아르만드!” 그때 아들의 말이 들렸다. “아빠?! 오셨군요. 나는 그들에게 말했어요. 다른 아이들에게 ‘아빠가 살아 있다면, 아빠가 나를 구해 줄 거야’라고 말했어요. 아빠가 약속을 하셨죠. ‘아빠가 나를 위해 항상 나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아빠가 이제 약속을 지키신 거예요!  (Max Lucado의 책 “He Still Moves Stones”에서 발췌함)

 아르만드의 아빠의 이 이야기는 하나님 사랑의 놀라운 모형입니다.  당신은 이 이야기에서 고린도전서 13장에 언급되는 사랑의 많은 속성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모든 것이 다 사라졌을 때, 들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상황이 아주 절망적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할 때, 해결책을 찾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모든 것이 흔들려 다 파괴되었을 때 잠잠히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펀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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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자석 님
이 글 역시 타 교단의 글이지만 이단 대처에 좋은 글이라 퍼 왔습니다.
이 점 양해 바라오며, 함께 공유하여 한국교회를 힘들게 하는 "이단 대처"에 큰 효과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출처:  교회와신앙, 전정희 기자가 정리, 구춘서 교수의 글)


"목회자들은 이단 문제는 파하는게 상책이라고 한다, 그러나 피하는 게 상책이 아니다.
그러면 이단세력에 대처하는 방안은 무엇인가? "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이단에 대해 반응하면 이들이 와서 집회를 통해 예배를 방해할 것이라고 겁을 먹는다.
또 이단들이 자신들을 법적으로 고소하면 어떡하나 하고 겁을 먹고 있다.
심지어 자신이나 교인들이 이단들과 성경에 대해 논쟁이 벌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겁을 먹고 있다. 결국 이단에 대해서는 멀리하고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자세를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는 한 이단들은 한국교회를 만만하게 보고 기성교회를 대상으로 약탈적 포교활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생략)...... ‘이단에 대처해야 하는 한국교회’를 주제로 이날 강의를 진행한 구춘서 교수는 한국교회를 향해 초교파적이고 강도 높은 ‘이단대응’을 주문했다.

구 교수는 먼저 “한국교회를 어렵게 하고 위기로 몰아가는 여러 가지 요인들 가운데 이단문제는 직접적으로 교회의 약화를 가져 온다는 점에서 시급히 대응해야 할 문제”라고 전제하고, 그동안 한국교회는 이단 세력들이 원하는 대로 미온적인 대처로 일관해 왔다고 지적했다.

실제 이단으로 인한 피해를 보지 않은 교회의 목회자는 전혀 관심이 없다가 자기가 피해를 보게 되면 잠깐 관심을 갖지만 이도 전교회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구 교수가 볼 때 이는 목회자들이 이단에 대해 겁을 먹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이단세력들은 가정, 교회 나아가 사회에 대해 무차별적인 피해를 입히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 헌법에 보장된 대로 종교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다.
이들은 공권력을 이용하여 교회를 괴롭히기도 하고, 사회법에 호소하여 자신들의 활동에 참여하는 추종자들에 대해 가족들이나 부모의 간섭을 배제시킨다. 교회의 예배를 방해하기도 하고, 교회 앞에서 집회를 통해 세력을 과시하기도 하고, 목회자나 교인들을 무차별 고소 고발하여 겁박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정치가들이나 행정당국에 봉사와 청소로 이미지를 교묘하게 위장한다.”

구 교수는 “이단문제는 한국교회가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되는 매우 심각한 현안문제가 되었다”며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개교회 목회자만의 노력으로는 안 되고 교회와 노회, 그리고 총회가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또 필요하다면 다른 교단과 연합활동을 통해서라도 이단을 막아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이들 이단 세력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여야 할까? 구 교수는 구체적으로 4 가지를 제안했다.

첫째, 이단과의 싸움은 공정한 게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단들을 대처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귀찮다고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목회의 한 부분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교리나 활동 방법이나 그들의 미혹전략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단들이 이렇게 세력을 키워올 수 있었던 것은 실상 기성교회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 이단들을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
이단에 동조하고 참여하는 교인들은 치리의 대상임을 알려야 한다.
이는 이단들이 단순히 가정을 파괴하고 반사회적인 집단임을 알려 거리를 두려는 방식보다 더 강도 높은 대응방식이다. 현재 교단에는 당회, 노회, 총회가 치리기관이다.
그런데 이단 문제로 치리당하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이는 우리 교회가 이단 문제에 대해서 권위를 세우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셋째, 이단에 대처하는 길은 이단보다 목회를 더 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단들은 엄청난 물량 공세를 통해 자신들의 이미지를 좋게 하도록 위장한다.
추종자들을 동원하여 대중 집회를 열어 힘을 과시한다. 신분을 속이고 각종 사회단체에 침투하여 신자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미혹해 간다. 정통교회는 교단적으로 일치된 모습으로 이단들에 대처해야 한다. 전국교회가 한 번에 이단경계주일을 지키는 것도 이런 의도에서 기획되고 실시하고 있는 것을 알아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또한, 이단세력이 정통교회를 공격하는 것 이상으로 교회도 이단들을 공격해야 한다.
이들의 부도덕하고 반사회적인 모습을 널리 알리고, 이들의 허약한 교리체계를 통쾌하게 비판해야 한다.
이들의 추악한 이면을 교인들은 물론 적극적으로 알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

넷째, 이단들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예방활동을 평소에 강화해야 한다.
이단들이 싫어하는 교회로는 이단에 대해 경계하고 정기적으로 교육활동을 하며, 목회자가 이단에 대해 강경한 모습을 보이는 교회이다. 이런 교회에는 들어 왔다가도 철수해 버린다.
따라서 평소에 이런 예방적인 작업을 해야 하며, 교인들에게도 적극적인 경계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교인들이 불만을 갖지 않도록 부지런히 돌아보아 적극적으로 목양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구 교수는 “이단과의 싸움은 불공정 게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 이단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도 이단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들의 비리와 잘못을 널리 알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국의 교회가 한 목소리로 이단 세력의 부도덕함과 이들이 하는 집회에 대해 경계하면서 대응하는 것으로 이들도 고통을 당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 교수는 “지금까지는 이런 활동을 이단으로 인해 피해를 당한 부모나 가족들의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 왔지만 이제 교회가 조직적으로 이런 일에 대해 고려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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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엔 영광 땅에선 평화로다...


밤 하늘의 별을 보며/ 기자석

밤 하늘의 별을 보며 주의 은혜 생각하며
하나 둘 별을 세며 도우심을 세어 봤네
지나온 고비마다 나를 도운 주의 손길
셀 수 없는 그 사랑에 나는 어찌 감사할까
앞에서 이끄시며 뒤에선 호위하며
나의 길 도우시는 주 예수님 찬양하네

행여나 넘어질까 행여나 잘못 갈까
하늘문 여시고 살피시는 주 예수님
지나온 고비마다 나를 도운 주의 손 길
셀 수 없는 그 사랑에 나는 어찌 감사할까
사막에 길 내시고 바다에 길 내어
나의 길 도우시는 주 예수님 찬양하네




 

 예수 믿고 바보 됐네" (마태복음 5:38-42)

바보됐네 바보됐네 예수 믿고 바보됐네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까지 가주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벗어주고
오른뺨 때리면 왼뺨까지 돌려대니
나는 바보 나는 바보 예수 믿고 바보됐네

바보됐네 바보됐네 예수 믿고 바보됐네
빌려달라 하면 이자없이 빌려주고
천군 천사 불러모아 응징할 수 있어도
미워하는 원수를 끝까지 사랑하니
나는 바보 나는 바보 예수 믿고 바보됐네

천재됐네 천재됐네 예수 믿고 천재됐네
악한 일엔 둔감해도 선한 일엔 민감하고
세상 일엔 미련하나 하늘 일엔 영리하니
세상에선 바보래도 하늘에선 나는 천재
예수님은 나를 보고 천재라고 하지요.


글/기자석

 벚꽃 소곡 
벚꽃이 봄바람에 휘날리던 어느 날 난 괴로워하며 떨었지 그 때 주께서 주신 말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울지 말그라 힘을 내그라 봄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말그라" - 기자석의 즉흥 자작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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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란타 한인교계, 이미 ‘신천지’ 침투
“한인교계 이미 ‘신천지’ 침투”
http://craaha.com/web/gboard/main.php?act=view&group_no=&board_no=193&main_no=2153&rtn_page=/&tn=2022&cn=2020

내용:
"미주이단대책연구회 한선희 목사 “구체적 명단 확보”
애틀랜타 한인교계에도 대표적 이단세력인 신천지 회원들이 이미 활동하고 있다고 미주기독교 이단대책 연구회 한선희 목사가 밝혔다.

한 목사는 지난 주 2일과 3일 이단대책 특별성회를 마친 뒤 5일 기자회견을 갖고 “현재 애틀랜타에서 활동하고 있는 신천지 회원 3명의 명단을 확보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한 목사는 “그러나 이 명단은 4년 전 것”이라면서 “이들 외에도 애틀랜타 한인교계에 침투해 활동하고 있는 신천지 회원들이 더 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들이 최근에는 가명을 이용하고 있어 정확한 규모는 파악하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한 목사는 개신교에서 공개적으로 이단으로 분류한 세력들 외에도 한국의 TV방송에서 보도된 후 최근 애틀랜타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 모 목사에 대해 곧 이단 명단에 이름을 올릴 것이라고 밝혔다.

또 미주기독교 이단대책 연구회는 개신교에서 공개적으로 이단으로 분류된 세력 외에도 현재 애틀랜타에서 비정상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는 일부 교회에 대해서도 조사를 통해 이단여부를 파악할 예정이다.

이와 관련 한 목사 설명에 따르면 이단으로 공개적으로 선언하기 위해서는 제보자에 의한 구체적인 정보를 근거로 1차 조사를 한 뒤 대상 교회에 공개질의서를 보낸 다음 답변서를 근거로 조사가 다시 한 번 진행된다.

이후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신문 등에 공개성명서를 개재한 뒤 해당 교단에 통보해 공식적인 이단 결정 및 통보절차를 밟게 된다.

한편 미주기독교 이단대책 연구회와 애틀랜타 한인교회협의회(회장 류도형 목사)는 조지아에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회장 박형택 목사, 이하 세이연) 지부를 설치하기로 했다.

류도형 목사는 “현재 교협 산하 이단대책위원회와는 별도로 세이연 산하 지부를 설치해 활동하면 소송 등 만일의 사태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처가 가능하다”며 지부 설치 배경을 설명했다.

이외에도 한 목사는 이날 기자회견서 한국 내 대표적인 이단세력인 신천지와 신사도의 미주 한인사회 내 피해사례를 언급하면서 신천지는 주로 LA등 서부지역 그리고 신사도는 뉴욕을 중심으로 동부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5일 기자회견서 애틀랜타에서의 이단세력 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한선희 목사

@ 한국일보 이주한 기자/USA 아멘넷 게시판/기자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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