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뉴스는 콩글리쉬의 지뢰밭
일상/건강 2008. 10. 9. 01:49어느날 한 방송뉴스를 보니 "매니페스토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화면에는 '매니페스토 지지단체장 네트워크'라 쓴 현수막 앞에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서있었다. 현수막에 쓰인 14자 가운데 9자가 영어다.
네트워크는 대충 '전국망'이란 뜻으로 잘 알려진 영어라 치더라도 매니페스토는 처음 듣는 소리다. '매니페스토 지지단체장 네트워크'가 무슨 뜻인지 아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나도 '매니페스토운동'이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무슨 운동인지 몰랐다. 신문에도 똑같은 제목이 붙어있는데, 기사를 읽기 전에는 무슨 내용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매니페스토] 영국영어에서만 '공약'... '공약실천 확인운동'이 낫다
나중에 알고보니 정당들과 선거 후보자의 공약이 나중에 정말로 실천되는가 확인해보자는 것이 매니페스토 운동이라고 한다. 그런 내용이라면 '공약실천 확인운동'이라고 해도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데, 왜 굳이 영어를 섞어'매니페스토운동'이라고 하는지 알 수 없다.
사실 '매니페스토(manifesto)'는 '정치적 선언'이란 뜻이다. 예를 들어 19세기 공산주의 이론가 맑스와 엥겔스의 합작품인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에서의 '선언'이 메니페스토다. 영국에서는 '선거공약'이란 뜻으로도 쓰이지만, 미국영어에서는 그렇게 쓰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선거공약을 '플랫폼(platform)'이라 한다.
영국에서만 통하는 단어의 의미를 가져와 '매니페스토 운동'이라고 한 것도 그렇지만,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무슨 뜻인지 알수가 없는 명칭을 굳이 왜 쓰는지 묻고 싶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모든 사람이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공약실천 확인운동'이라고 고치도록 권한다. 꼭 영어가 들어가야만 품위와 권위가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이른바 한국 지식사회에 너무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좀 심하게 말하면 이런 건 언어적 사대주의다.
[DTI] 정확히는 'DTIR'... '소득대비부채비율'이 쉽고 정확
또 다른 예를 보자.
한 방송뉴스에서 "앞으로의 주택 대출은 기존의 집 가치 대신 대출자의 소득수준, 즉 DTI 기준으로 완전히 바뀌게 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 뉴스에서 "대출자의 소득수준 즉 DTI 기준으로"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DTI는 '소득수준'을 가리키는 영어 약자인 것 같다. 그렇다면 굳이 DTI란 영어를 쓸 필요가 없을 터인데, 계속 DTI를 네번이나 더 썼다. 그러면서도 DTI가 무엇인지 한번도 설명하지 않았다. DTI의 뜻을 아는 사람만 이 뉴스를 듣고 모르는 사람은 듣지말라는 투다.
DTI는 정확히 'DTI비율'이라고 하든지 'DTIR'이라고 써야 맞다. 'DTIR'은 주택담보대출 신청자의 소득대비 부채비율(Debt To Income Ratio'의 약자다. 여기서 부채란 대출자가 연간 상환해야하는 원리금 합계를 가리킨다.
DTIR을 한국에서는 '총부채상환비율'이라고 하는 모양이지만 '소득대비부채비율'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번역이 될뿐만 아니라 누구나 금방 알아들을 수 있다.
미국에서는 DTIR이 대개 30%정도다. 예컨대, 연간 소득이 10만불인 사람이 집을 사려고 은행에서 돈을 빌린다고 할 때 그가 1년간 모든 금융기관에 갚아야할 돈이 3만불이상이 되면 대출을 해주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웰빙] 먹어도 살 안 찌면서 영양가도 있어야 '웰빙'?
방송언어에 있어서의 외국어 특히 영어 남용의 예는 '웰빙'과 '리베이트'에서도 나타난다.
'웰빙(well-being)'은 못 사는 것의 반대인 잘 사는 것, 아픈 것의 반대인 건강, 그리고 안전하지 못한 것의 반대인 안전이란 뜻일 뿐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웰빙이 '먹어도 살 안 찌고 영양가 있는'이나 '잘 먹고 잘 사는'이란 뜻으로 쓴다.
언제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바라지 않은 것처럼 새삼스럽게 '웰빙'을 아무데나 갖다붙이는 이유를 알수가 없다. 정확한 뜻도 모르면서 그저 영어가 들어가야 그럴듯해서 웰빙을 쓰는 것 같다.
[리베이트] 합법적인 돈이 왜 '리베이트'지?
또 '리베이트(rebate)'는 정당하게 합법적으로 돈을 되돌려주는 것인데도 한국에서는 '불법적으로 은밀히 건네주는 돈'의 뜻으로 쓰고 있다. 예를 들면 공무원이 업자에게 높은 가격으로 수의계약을 해주고, 업자로부터 사례금조로 몰래 받는 돈을 리베이트라고 쓰고 있다. 이런 검은 돈은 리베이트가 아니라 '킥백(kickback)'이라 한다.
우리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을 외국어로 대신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그 뜻을 제대로 알고 쓰자는 얘기다.
[로드맵] '청사진' '지침' '길잡이'가 더 좋다
방송은 물론 신문도 '로드맵(roadmap)'이란 단어를 많이 쓰는데, 청사진이나 지침, 길잡이같은 말 놔두고 굳이 일반 대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로드맵을 써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최근에 한 TV 기자는 "통일장관의 이번 발언이 핵문제 해결에 레버리지로 사용하려는 의도인지 불분명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지렛대'란 좋은 우리말 놔두고 왜 꼭 '을레버리쥐(leverage)'란 영어를 발음을 틀리게 하면서까지 쓰는지 모르겠다.
[AI] 한국만 쓰는 정체불명의 약자
얼마 전 조류독감이 국내에서 발생했을 때 한 방송사는 보도 중 계속 'AI'란 영어만 사용했다.
'AI'는 '에이비언 인훌루엔자(Avian Influenza)' 즉 조류독감의 약자인데, 미국 방송 아나운서들도 이를 줄여서 쓰지 않고 있다. 토플성적 세계 최하위권의 한국에서만 'AI'라고 줄여 쓰고 있다.
[네가티브 선거운동] '인신공격성 선거운동'이 훨씬 정확해
요즘 언론은 또 "야당 대선 주자들이 '서로 네가티브 선거운동을 한다'고 비난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네가티브 선거운동이란 용어는 미국의 '네가티브 캠페인(negative campaign)'에서 잘라온 것 같은데, 이것도 '인신공격성 선거운동'이라고 하면 모두가 다 알아들을수 있는데 굳이 영어를 쓰는 이유를 모르겠다.
사실 영어 네가티브 캠페인 자체도 정확한 용어가 아니다. 네가티브(negative, 부정적)의 반대는 포지티브(positive, 긍정적)이다. 경쟁자의 결점이나 부족한 점을 부각시켜야 자기가 이기는 상황에서 선거운동을 어떻게 긍정적으로만 할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네가티브 선거운동'이란 용어보다는 우리말 '인신공격성 선거운동'이 훨씬 더 정확한 용어라고 생각한다.
[골 세러모니] 미국에서도 영국에서도 없는 말
베이징에서 개최된 동계 아시안게임 시상대에서 한국 선수들이 "백두산은 우리땅"이라고 쓴 카드를 들고 '깜짝쑈'를 벌였을 때 한국 언론은 '백두산 세리모니'라고 보도했다. 또 축구선수들이 골을 넣고 그 기쁨을 표현하는 것을 '골 세리머니'라고 보도하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세러모니(ceremony)'란 기념식 같은 '의식'을 가리킨다. 미국에서 30년 이상 살았어도 나는 세러모니가 '골 세리머니'에서와 같이 쓰이는 예를 본 일이 없다. 축구의 본고장 영국에서 쓰는 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영국인에게 물어보니 자기도 '골 세러모니'는 들어본 일이 없다 한다.
'세러모니' 대신 '셀러브레이션(celebration, 축하)'을 쓰면 또 모르겠는데, 세리머니라니 적당한 단어 같지 않다. 차라리 '깜짝쑈'란 말로 대신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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