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는 목사다

자료실 2011. 2. 4. 12:03
목사는 목사(牧師)여야 한다. 목사란 말 그대로 맡긴 양을 치는(牧-칠 목, 혹은 돌볼 목) '양돌봄이'이다. 양치기라 하면 격이 낮은 듯 해서 잘 안 쓰는데, 그러면 목자 혹은 목동이라 부르면 격이 맞을까. 예수님 당시에 목자들은 사회적 약자였다. 단순히 약자이기 이전에 비천한 직업이 목자였다. 예루살렘에 분뇨 처리하는 직업보다 조금도 나은 게 없었던 직업군이었다. 오히려 주인의 양새끼를 도둑질 한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양새끼를 슬쩍한다는 오해를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오해와 사회적 편견 속에서 목자들은 밤에 잠도 못 자고 양떼를 지켰다. 혹, 양을 잃거나 이리에 찢기기라도 한다면 물어주어야 했기에 가난한 목자들은 온 힘을 다해 양들을 돌봐야 했던, 실로 고달픈 직업이었다. (세리가 소문난 도둑놈이었듯이 일설에는 목자도 도둑놈 취급 받았다고 한다) 목사는 벼슬이 아니다. 사(師)자 붙어서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놈(者)" 이상이 아니다. 놈이란 단어가 "사람"을 바하해서 부르는 것이긴 하지만 아무튼 존경을 한 몸에 받아야 할 직업은 아닌 것이다. 이 땅에서는 '들판에 목자처럼' 밤낮 수고해야 하는 직업 아닌 직업이 목사다. 바울이 그렇게 살지 않았던가. 존경을 받고 높임을 받고 명예를 얻고 돈과 인기와 명성을 얻고 싶다면 목사직을 내려놓는 것이 어떨까. 목사란 그런 직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다가 죽어야 할 이름이 목사'란 사실을 한국교회가 진작에 알았더라면 지금처럼 무임목사 전성시대를 구가하지는 않았으리라. 주인이 맡긴 양들을 목숨바쳐(죽도록 충성하며) 잘 섬긴 목자들은 비록 이땅에서는 고난을 겪고 아픔을 당하고 애통의 눈물을 삼킬지라도 훗날, 주님이 친히 눈물을 닦아주시고 품에 안아주시며 '착하고 충성 된 종이라' 칭찬하실 것이란 믿음으로 사명을 바르게 잘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목사라 불리워도 좋다고 본다. 두 번째로는 목사는 목사(目四)라야 한다. 다시 말해 눈이 네 개라야 한다는 말이다. 눈이 멀지 않아야 한다. 눈이 멀면 사물을 잘 구별하지 못 한다. 육신적으로도 건강한 눈을 가져야 한다. 눈이 침침해서 김집사인지 이집사인지도 알아보지 못 하면 교인들이 시험에 든다. 목사는 사역하는 동안에 건강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상식의 눈을 가져야 한다. 이성적 판단은 나쁜 것이 아니다. 상식이 풍부해야 바른 이성적 안목을 가질 수 있다. 요즘 상식이 부족한 목사들이 많은 것같아 안타깝다. 세상사람들은 영적인 눈으로 교회와 목사를 바라보지 않는다. 상식의 잣대로 판단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목사를 사회가 인정하겠는가. 사례비도, 사는 모습도 상식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억대 연봉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근로자 평균임금 이하로 사례비를 정하고 그것으로 족하게 여겨야 한다. 그리고, 성경을 바르게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한다. 목사가 성경도 제대로 보지 못 하고서야 어찌 말씀을 잘 가르칠 수 있겠는가. 말씀을 말씀답게 볼 줄 아는 목사가 바르게 목양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말씀을 공부해서 지력(知力)을 키워야 한다. 말씀으로 말미암는 혜안(智慧의 눈)이 있어야 양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다. 말씀의 푸른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양들을 인도하는 목사가 되려면 말씀의 눈을 부단히 길러야 한다. 그래야 목사다운 목사가 된다. 끝으로 주님의 눈을 가져야 한다. 아무리 육신의 눈이 밝고 상식의 눈이 있고 말씀의 눈이 있다고 해도 주님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목사로서는 말짱 도룩묵이다. 주님의 눈으로 양들을 보게 될 때 양들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목사는 온 양떼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선도양(先導羊)으로서 양무리를 주께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실을 늘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이 깨끗하여 늘 주님을 볼 수 있어야 바른 목양을 할 수 있다. 주님의 눈으로 양떼를 돌보고 주님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 주님의 눈빛만 봐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목사라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목자일 것이다. 세 째로 목사는 목사(木死)해야 한다. 무슨 말인가. 십자가(十字架)는 형상화 된 글이다. 한자문화권에 사는 우리로서는 의미를 잘 알기에 그대로 사용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성경에는 나무기둥(스타우로스)으로 기록하고 있다. 페니키아인들의 사형법을 로마인들이 가져다가 사용했다고 한다. 형장에 세워놓은 나무기둥을 우리는 십자가로 번역해 쓰고 있다. 가로목을 지고가게 해서 손에 못을 박고 나무기둥에 매단다. 윗 부분에는 죄목을 적은 판대기를 붙인다. 형상이 열 십자를 닮았다. 우리 주님이 이 나무기둥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런데 신약을 눈여겨 보면 나무기둥(스타우로스)이라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냥 나무(크실론)라 하고 있다. '행전'과 '베드로서'가 그렇게 말한다. 예수님이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리셨다는 것을 강조코자 함이다. 율법에, 저주를 받은 자는 나무에 매달았기 때문이다. 죄인들을 위해 대신 저주를 받으신 우리 주님이시다. 그런데 그 나무는 단순한 나무기둥이 아니라 실로 생명나무이다. 자신의 피와 살을 죄인들을 위해 내어주신 것이다. 과일이 과육과 과즙으로 되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시말해 나무에 달려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생명나무 과일 같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떡이요, 생명의 음료로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무는 생명나무 이전에 선악의 지식나무였다. 모든 사람은 선악의 지식나무의 실과를 먹어 범죄한 아담의 후손이다. 마지막 아담 예수님이 그 나무(크실론)에 달리셨다. 자기와 및 자기를 믿는 모든 자가 선악의 지식나무(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나무요, 그것을 기록한 말씀이 십자가의 복음 곧 나무의 복음이다. 그리스도인은 선악의 지식나무에 대해(향해)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선악의 지식나무도 예수님과 그리스도인에 대해 죽었다. 믿는 자에게 더 이상 선악의 지식나무는 없다. 영적으로 보자면,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은 죄악된 세상의 중앙, 에굽 혹은 소돔이였다. 세상 중앙에 우뚝 선 그 나무에 달리신 그리스도이신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온 세상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이것이 예수님이 나무를 지신(달리신) 이유요, 의미인 것이다. 그 나무가 생명나무가 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역설적 신비다. (바울의 복음도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죽은 자 살리는 생명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셨다. 일반 성도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목사는 특별히 나무에 달려 죽으신 주님의 그 죽음을 온전히 내 것으로 삼아 날마다 죽어야 하는 직분을 맡은 자이다. 그래서 나무에 달려죽었다는 의미로 목사(木死)라 이름해 보는 것이다. 죽지 않고 시퍼렇게 살아서 목회하는 자가 누군가. 목사도 안 죽는데 누가 누구보고 죽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제발 좀 죽자! 주님 죽으신 그 나무에 함께 달려죽은 우리가 아니던가. 그러데 어찌하여 산 냄새 풀풀 풍기는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날마다 죽자. 그래야 부활 할 것이 아닌가. 출처:아멘넷, 지혜자님의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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