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승우 목사 기독교신앙기초론비평(1)-회개편
자료실 2011. 2. 3. 13:20<
1. 현대교회는 ‘회개’에 대해 다시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히
<홀리죠이>
‘회개’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주장이다. 현대교회에 뿐만 아니라, 만고에 오고가는 모든 교회에서 요청되는 기분적인 직무가 바로 회개에의 요청이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설교하는 것이다. 현대교회에 이런 회개의 설교가 결핍되어가고 있는 것은 참으로 탄식해야 할 현상임에 분명하다. 이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문제는
<
회개는 신앙의 제 일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 중에서도 제일 먼저 나옵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제일 먼저 회개를 외쳤습니다. 회개는 신앙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믿음이 구원에 필요한 전부가 아니며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설교자나 기독교인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현재 교회 안에 구원론에 대한 혼돈이 아주 심각한 상태입니다. 구원론에 대한 오류는 진리의 순서들을 뒤바꾸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예지와 예정의 경우 성경에서는 항상 예지가 먼저 나옵니다.
롬
벧전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바꾸어 예정 다음에 예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사랑이신 하나님의 이미지를 절대주권자로 바꾸어 놓았으며 예정론을 심각하게 왜곡시켜 놓았습니다.
<홀리죠이>
변목사는 회개와 신앙 중에서 회개가 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중요도에 있어서의 순서가 뒤바뀌었다고 하면서, 그 몇가지를 예로 든다. 그 첫번째가 예정과 예지의 순서가 뒤바뀌어서 주장되는 것이 현대교회의 문제점이라고 한다. 그리고 드는 예가 롬8:29과 벧전1:2이다. 과연 이 구절들이 예정보다 예지가 앞서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가? 예지라는 “글자”가 예정이라는 “글자”보다 앞서 있다는 면에서 그렇게 주장한다면, 에베소서1장5절은 어떤가? 그곳에서 바울사도는 이렇게 주장한다.
(엡1장5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헬라어원어로는 예정하셨다….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이라는 글자가 “기쁘신 뜻”이라는 글자보다 먼저 나온다. 하지만 질문하게 될 것이다. “기쁘신 뜻”보다는 “예정”이 앞서 나올지는 몰라도 “예지”보다는 늦게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반문에는, “예지”가 제일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예정”이 나오고 그 다음에 “기쁘신 뜻”이 나온다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런 주장에서 의미하는 “예지”라는 말, 곧 “미리 안다”는 말의 뜻은, 아무 감정도 의지도 느낌도 전혀 없는 어떤 무감각, 무채색의 그 어떤 “미리 앎”이다. 말 그대로 “단순한 앎”이다. 이런 견해는 “안다’는 것 그 자체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주장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안다’는 말은, 단순한 지식, 단순한 산술계산적인 앎, 아무런 감정과 의지, 느낌도 없는 그런 ‘앎’을 말하지 않는다. 특별히 하나님의 앎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미리 안다”는 것도 그렇다. 성경에서 ‘미리 안다’는 것은, 산술계산적으로 어떤 정보가 컴퓨터에 입력되어서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렇게 출력되어지는 그런 종류의 앎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슈퍼컴퓨터가 아니다!
하나님의 앎, 하나님의 미리 아심이란, 바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앎을 말한다. 곧 하나님의 미리 아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두뇌 속에 어떤 데이터가 무감각적으로 입력되어서 출력되어지는 그런 단순산술적인 계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능동적인 기쁨과 즐거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참고, 개혁주의신학자, H.Barvinck, The Doctrine of God, Grand Rapids, 1951, Vol.II, p.343). 곧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엡1:5에서는 말하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그 기뻐하시는 대로”라는 말은, 곧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그 미리 아시는 대로”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로마서8:29과 벧전1:2에서 “예지”라는 말이 “예정”이라는 말보다 앞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예정”이라는 개념보다 “예지”라는 개념이 앞서 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실상, “예정”과 “예지”는 무엇이 더 앞서고 뒷선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예정과 예지가 동시적인 것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시간적인 선후의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의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 분은 동시에 지금 모든 우주와 만물을 통찰하신다. 또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섭리하신다. 그 분에게는 ‘과거’가 ‘미래’에 앞선다고 할 수 없다. 그 분에게는 ‘과거’와 ‘미래’가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이런 저의 설명은, 물론, 우리 피조물된 인간들에게 있어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시공간 속에 제한되어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공간속에 제한되어 있는 인간의 지각으로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에 대하여 함부로 주장하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이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예지”가 “예정”보다 앞서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변목사가 인용한 롬8:29와 벧전1:2같은 구절이 그렇다. 하지만, “예정”이 “예지” 보다 앞서 있음을 언급하고 있는 구절들도 있다. 엡1:5과 엡1:11이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정”과 “예지”가 서로 앞서고 뒤서는 관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예정”이 “예지”보다 앞선다고만도 할 수 없고, “예지”가 “예정”보다 앞선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예정”과 “예지”는 동시적인 것이지, 앞서고 뒷서는 것이 아닌 것이다.
변목사는 하나님 말씀의 한측면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으로 다른 이들의 견해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다음의 것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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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임금과 구주의 경우 언제나 임금이 먼저입니다.
행
행
그런데 사람들은 구주와 임금으로 순서를 뒤바꿉니다. 그래서 먼저 구주로만 영접해도 구원을 받고 그 다음 점진적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면 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의 경우가 보여주는 것처럼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마음에 영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계
<홀리죠이>
롬6장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 구절에서는 “그리스도”가 “주”보다 먼저 나온다. “주 예수 우리 그리스도”라고 하지 않는다. 사도행전5장30-31을 인용하면서 “임금”이 항상 “구주”라는 말보다 먼저 나온다고 하는 변목사의 주장은 어떤가? 과연 “임금”㈜가 “구주”라는 말보다 먼저 나오는가? 그가 바로 ‘중생’과 ‘칭의’의 선후문제를 설명하는 허무맹랑(!! 왜 그런지 계속 저의 글을 읽어주십시오!)한 주장에 인용하고 있는 디도서3:4-7에서 나오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또한 어떻게 해석할 지 궁금하다.
예수님의 “구주되심”과 “주되심”은 불가분리의 것이다. “구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은 곧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일각에서 “구주되심”만을 먼저 인정하고 그 다음에 성화와 성숙에 따라서 “주되심”을 인정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되심”이 언제나 반드시 “구주되심”보다 앞서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사실의 한 면만을 너무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이고 그래서 복음이 왜곡되게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나누시지 않은 것을 나누는 것 자체가 왜곡인 것이다. 예수님의 주되심과 구주되심을 “동시”에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이 나누지 않는 것을 나누는 것은 변목사의 특기인 모양이다. 다음의 글을 계속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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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중생과 칭의의 경우 중생이 먼저입니다.
딛
히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칭의가 먼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죄용서=구원이라는 잘못된 등식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자가 많습니다.
<홀리죠이>
변목사는 주장하기를 죄인이 구원받는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중생’이 ‘칭의’보다 앞선다고 한다. 이 ‘구원의 서정’에 대한 논의는 참으로 오랫동안 계속되어온 주장인데, 변목사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성경구절 몇 개를 인용하면서 이 논의를 종결된 것인양 주장한다. 디도서3:4-7, 히8:10,12를 그가 인용하는데, 바울이 로마서3장에서 ‘칭의’를 먼저 다루고 나서, 6장에 가서 ‘중생’을 다루는지를 어떻게 설명하려고 하는가? 바울사도가 갈라디아사람들에게 힐문한 질문(갈3:2-3), 곧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는 책망섞인 질문을 어떻게 면할 수 있다고 여기는지 궁금하다. 갈라디아서에서의 바울의 논지가 무엇인가? 다음의 바울사도의 말에 주목해 보자.
(갈3장23-26)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이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지금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아들됨”을 “의롭다 함”의 앞에 두고 있는가? 붉은 색으로 표시된 부분의 순서에 주목하면서 답변해 보기를 바란다.
중생과 칭의의 관계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그리하여 많은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 관계가 마치 쌍둥이관계라고 표현한다. 이 중생과 칭의도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어느 것이 다른 것보다 언제나 앞서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는 체험을 할 때에 다시 태어남에 대한 체험을 우선적으로 강하게 인상받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의롭다 하심에 대한 인상을 강하게 받을 수 있다. 문제는, 그런 자신의 체험으로 성경구절을 읽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는 그 방식과 그 스타일은 얼마나 다양한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자신의 신학으로 재단하여 왜곡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변목사가 그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의 용맹무쌍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제 그의 회개론의 본론이 시작된다. 지금까지는 예를 든 것인데, 그 예증들이 얼마나 피상적인 성경읽기와 그것에 기초한 편파적인 신학적 결론에 이른 것을 지적하였다. 이제 본격적인 그의 회개론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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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이와 같이, 회개와 믿음 역시 그 순서가 오래동안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믿음이 있으니까 회개도 하는 것 아니냐?” 라고 말장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회개와 믿음의 순서가 항상 일정합니다.
막
행
히
<홀리죠이>
변목사는 ‘믿음과 회개를 동시에 강조’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말장난’이라고 폄하한다. 참으로 “말장난”이 심한 양반이다. 바울사도가 빌립보감옥의 간수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질문하였을 때 바울사도가 그에게 말하기를 “회개하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던가? 변목사는 자문해 보기를 바란다. 바울사도는 분명히 말하기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하였다. “회개하라”는 말도 없고, 그 뒤의 문맥을 보면 그 간수와 그 간수의 가족들이 “회개하였다”는 표현조차 없다. 하지만, 그들이 전혀 회개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들이 전혀 회개하지 않고 그냥 ‘믿기만 하였다’고 보아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게 본다면, 참으로 ‘믿음’으로 구원얻는 복음의 도리를 오해하는 것이다. 바로 변목사의 설명이 그런 오해를 초래한다. ‘믿음이 있으니까 회개도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견해를 ‘말장난’이라고 변목사는 치부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 오히려 ‘말장난’이라고 하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빌립보간수에게 바울사도가 말한 그 ‘예수를 믿으라’는 말 속에 이미 ‘회개하라”는 권면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말하는 ‘믿음’은 ‘회개’가 동반되는 ‘믿음’이다. 그것이 구원얻는 믿음(saving faith)의 본질이다. 회개가 동반되거나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된 믿음이고, 귀신들도 가지고 있는 믿음이다. 변목사가 반대하고 있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지금 그런 가짜 믿음을 고려하면서 ‘믿음이 있으니까 회개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변목사가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큰 오해이고, 변목사야말로 진짜로 말장난하는 자이다. 그를 궤변가로 생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울사도의 또 다른 선언에 귀기울여보자.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바울이 “마음으로 회개하여 의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는가? 아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믿음’에 ‘회개’가 포함되어 있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바울사도를 오해하고 성경을 오해하고 하나님을 오해한 것이다. 바울사도가 마치 ‘회개’도 없이 의에 이르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오해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사도도, 하나님께서도 결코 그렇게 구원을 소개하지 않는다. 구원은 믿음으로 또한 회개로 얻게 된다. 회개없는 믿음으로도 불가능하고 믿음없는 회개로도 불가능하다. 거짓된 것을 통찰하시는 불꽃 같은 눈을 가지신 주님께서 죄인들 속에 있는 모든 거짓들을 통찰하신다. 거짓된 회개도 통찰하시고, 거짓된 믿음도 통찰하신다. 믿음없는 회개, 회개없는 믿음…이 모든 것들이 거짓된 것이다.
이 믿음, 이 회개는 또한 어느 것이 다른 것보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것들도 또한 쌍둥이관계이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이런 논리에 주목하기 바란다. 거짓된 주장을 간파하는 너무나 간단한 도식이 여기에 있다. 성경에 대한 너무나도 피상적인 관찰, 그리고 진리의 한켠을 전체인양 강조하는 것….우리가 그런 주장을 대할 때에 뵈뢰아사람같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신사적”이어서 과연 그런가 하고 말씀을 신중하게 살폈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모두 ‘신사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야만인’들이 주의 교회에 활개를 치니, 탄식할 일이다. 가슴을 칠 일이다.
계속되는 변목사의 주장을 들어보자.
<
이처럼 성경은 항상 회개 다음에 믿음을 말합니다. 회개와 믿음의 순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중요성에 대해 로이드 존즈는 “로마서 강해 8권”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복음 설교에 있어서 회개의 문제는 언제나 가장 먼저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규칙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복음은 우리더러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이 순서의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분명히 말해서 그 문제는 복음 전도의 문제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점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잊기 쉬운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실 줄 믿습니다. 설교의 임무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면 그들이 회개할 것이라는 식의 개념이 들어온 것 같습니다. 성경 자체가 그 순서를 뒤바꾸는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과를 위해서만 이 분명한 성경의 순서를 뒤바꿔 놓는다면 매우 위태로운 일입니다. 부흥과 각성의 매우 위대한 시대마다 교회의 설교를 특징짓는 것이 바로 그 성경적인 순서였습니다. 오늘날 죄의식의 증거가 현격히 적은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자기 죄를 깨닫고 우는 사람을 보는 것이 드물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자기 자신의 죄인됨을 의식하고 영혼의 고뇌로 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드문데,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회개에 대해 설교하지 않으면 그러한 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돌아가서 부흥과 각성의 시대마다 기독교회가 어떠했는지 그 이야기를 읽어보면, 회개의 문제가 언제나 중심 위치에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나 우선적으로 다루어진 문제였습니다.”
<홀리죠이>
변목사는 자신의 지론, 곧 회개가 믿음보다 앞서서 강조되어야 한다는 지론을 강조하기 위해서 로이드 존스목사를 인용한다. 우리는 이러한 변목사의 로이드 존스목사의 인용을 대하면서 그가 성경구절을 편파적으로 인용하는 것처럼 또한 로이드 존스목사의 글도 편파적으로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해야 한다. 그의 글을 읽으면 그가 인용하는 청교도의 글이나 개혁주의계통의 신학자들의 글을 그렇게 편파적으로, 혹은 아전인수격으로 인용하는 것들을 많이 보게 된다.
먼저, 위의 로이드 존스목사가 말하는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존스목사가 회개를 믿음보다 앞세우고 있는 것처럼 해석될 수도 있다. 그 인용된 부분만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목사는 거짓된 믿음에 대한 강조보다 회개를 통해서 그 거짓된 믿음의 거짓됨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 복음전도설교의 중요한 역할임을 강조하고 있다. 로이드 존스목사의 참된 믿음에 대한 정의를 고려한다면, 위의 인용은 오히려
로이드 존스목사의 글을 직접 인용해보자. 그의 로마서강해서1권에서이다(8권을 제가 소장하고 있다면 그 8권에서 직접 인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아쉽다. 혹시 8권을 소장하고 계시는 분은, 저의 글과 더불어서 변목사가 인용하고 있는 부분의 앞뒤 문맥을 꼭 참고해 보기 바란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바라보지 않으며 자신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른 더 이상 전에 자기의 것이었던 어떤 것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는 현재의 자기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그 분의 행하신 일만 바라보는 것입니다….만일 그가 ‘나! 내가 내 안에 무서운 흑암이 자리잡고 있소. 그리고 나는 내 자신 안에서 여전히 죄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한다면 그는 아직 잘못된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이다….믿음은 완전히 그와 다르게 말하며 믿는 자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합니다. ‘내가 말할 수 없는 죄를 지은 것만은 사실이다. 나는 죄의 생활을 살아왔다. 나는 신성모독자였다. 그리고 해악자였고 비열한 사람이었다. 내가 범하지 않는 죄란 거의 없었다. 나는 아직도 내 안에 있는 죄를 알고 있다….’ 그는 전혀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는 전혀 오직,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금 로이드 존스목사는,
“여러분은 이 점의 중요성을 아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것은 위대한 영성의 표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느 의미에선 그 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압니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보면 그것은 믿음에 대한 부정입니다.”
바로 이 로이드 존스목사의 말은 바로
(
로이드 존즈가 잘 지적한 대로 교회사를 보면 회개에 대한 강력하고 우선적인 강조가 있을 때마다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 부흥과 대 추수가 아주 임박한 시기입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방문’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회개를 외치므로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했습니다. 회개는 주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고 부흥을 위한 길을 예비합니다. 진정한 부흥은 회개를 외치는 곳에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나팔이 되어 회개하라고 외쳐야 합니다.
(홀리죠이)
회개에 대한 강조가 부흥의 시기에 있었다는 그의 지적은 틀린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언급이 믿음과 회개의 순서를 설명하는 상황 속에서 나온 것임을 고려할 때, 쓸데없는 red herring 곧 연막술임을 간파해야 한다.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서,상황에 걸맞지 않는 언급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가 궤변가라는 것이 이런 글에서도 드러난다. 부흥의 시기에 회개만을 강조했었던가? 과연 부흥의 시기에는 ‘믿음’을 강조하지 않았단 말인가? 과연 부흥의 시기에는 ‘믿음’에 대한 설명을 전혀 하지 않은 채로 ‘회개’만을 우선적으로 강조하였고, 그렇게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강조하였던가?
변목사의 부흥에 대한 관점이 과연 옳바른지 아닌지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위의 질문들을 진지하게 음미해 보기만 해도,
<
그런데 이토록 중요한 회개에 대해 현대교회는 심각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현대교회가 회개에 대하여 어떻게 무지한 지를 설명드리겠습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회개는 죄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죄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설교자와 모든 크리스천이 여기에 동의합니다.
<홀리죠이>
회개가 “죄에서 돌이키는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면서 그는 현대교회가 이 회개에 대해서 심각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과연 그가 현대교회가 모르는 회개에 대한 것을 설명하고 있는 지 궁금해 진다. 계속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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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막
그런데 설교 중 “누구든 한 가지라도 습관적인 죄가 있으면 지옥에 간다”고 말하면 여기 저기서 난리입니다. 그러나 왜들 난리입니까? 다들 회개는 단순히 죄를 자백하는 것이 아니고 죄를 끊어버리는 것이라는데 동의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소란이 일어나는 것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회개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홀리죠이>
변목사의 설명을 듣자면, 회개는 죄를 끊어버리는 것인데, 습관적인 죄를 끊어버리지 않으면 회개하지 않은 것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습관적인 죄를 끊어버리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식으로 자신이 주장하는데, 여기 저기서 난리를 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게 난리를 치는 사람들은 회개가 무엇인지 진짜 모르는 것이라고 하는 뜻이다.
과연 이런 변목사의 주장이 성경적인가? 일단, 그가 죄의 습관성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 높이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그가 ‘습관적인 죄를 끊어버리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그가 ‘죄’가 무엇인지, ‘회개’가 무엇인지를 오해하고 있고, 왜곡시키고, 심지어는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이면서도 여전히 연약한 자들을 오히려 무거운 굴레에 씌워두고 있다.
왜 그런가?
따져보자. ‘죄’가 무엇인가? ‘죄’가 과연 한 번 ‘회개’한다고 해서, 완전히 그렇게 ‘회개’한 자에게 무관해져 버리는 것인가? 우리는 여기서 수많은 오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당연히 우리가 참된 회개를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신 채로 용서해 주신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크게 기독교회에서는 두 가지 견해로 대별해서 구별되는 그룹들이 존재해 왔다. 하나는, 우리가 다시는 죄를 전혀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상태에 이를 수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그룹이다. 웨슬리신학에 영향을 입은 완전성화론자들이다. 이것에 반대해서, 죄의 용서를 완전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도들은 죄에 넘어질 위험성이 있고, 육신을 가지고 살아있는 한에 있어서는 죄없는 무흠한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고 그 무흠한 상태는 죽은 뒤의 영화된 상태에서나 이룰 수 있다고하는 그룹이 있다. 소위 칼빈주의자들 혹은 개혁주의신앙을 가진 자들이 그들이다. 문제는, 웨슬리신학에 경도된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죄를 용서함 받은 후에라도 죄를 지을 수 있는 그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를 용서함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들은 죄를 반복해서 지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반복해서 죄를 다시 지을 때마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이 두 그룹의 공통된 주장이다.
“죄”란 그런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여 죄용서함을 받았다고 하나 그 죄의 대가는 용서함 받고, 죄의 저주에서 해방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그 유혹과 힘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 죄의 실체이다. 이것을 구원받은 자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죄’(Dwelling Sin)라고 표현되어 왔다(이 남은 죄의 실체와 죄용서함의 관계에 대해서는 좀 더 심층적인 분석과 설명이 필요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회개’한다고 하는 것은, ‘죄를 끊어버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만 설명하게 되면 회개의 본질이 왜곡된다. 그 왜곡된 견해가 바로
습관적인 죄만 아니라 어느 죄라도 그렇다. 그런데,
죄인이었던 자가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옛습관을 제어하는 새습관이 형성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원리상 새로운 습관이 신자들 안에서 지배하기 때문에 생명이 왕노릇한다는 바울사도의 표현처럼,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로운 피조세계에서 호흡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그렇다면, 옛습관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겻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개혁주의신학계에서 심도있는 토론들이 개진되어 왔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된 자들에게 있어서 옛습관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남아있는 죄를 짓고 있는 그 어떤 존재를 ‘옛사람”이라고 표현해야 하는가?(존 오웬 같은 청교도들이 이렇게 주장해 왔다) 아니면 “옛습관”이라고만 표현하되, “옛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존 머레이나 훅크마 같은 개혁주의신학자들이 개진해 온 견해)고 해야 하지 않는가? 좀 더 전진된 견해들이 이 문제를 둘러싸고 개진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그들 어느 누구도, 어떤 견해를 취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한 가지 습관이라도 남겨두고 있다면 지옥간다”는 식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과연
그가 ‘회개’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죄를 너무 피상적이고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있고, 또한 ‘회개’에 대해서도 그렇게 피상적이고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의 잘못된 회개관은 그의 회개의 필요성에 대한 잘못된 강조에서도 분명해 진다. 다음을 읽어보자.
<
더 심각한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회개의 절대적인 필요성에 대해서 눈 멀어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인용하는 말씀들을 주의를 집중해서 들어보십시오. 그러면 회개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아주 명확하게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겔
시
고후
벧후
여러분 모두
“지옥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이다. 세상에서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은 100% 지옥에 온다. 또 하나는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인데 회개하지 않고 죽은 사람은 모두 지옥에 온다.”
<홀리죠이>
회개의 절대적인 필요성 – 참으로 옳은 말이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것을 비평하고자 하는 것d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인용하고 있는 성경구절들을 비평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문제는, 윗글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
바로 그런 사람을 인용하는 바로
회개는 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끊어버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나의 의지로 그것이 가능한가? 아니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것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렇게 죄를 끊어버리는 첫역사부터 시작해서, 죽을때까지 계속 되어지는 것이 바로 ‘회개’이다. 이것은, 죄의 습관이 죄인들이 죽을때까지 죽는 순간까지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죄인된 인생들이 교만치 않고 겸비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평생을 살아야 할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은, 우리의 남아있는 마지막 습관까지 “끊어버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런 능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기 안에 역사하시는 은혜에 힘입어 끊임없이 죄의 습관을 벗어버리려고 하는 그 노력을 가능케 하는 십자가의 보혈,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해서 가는 것이다. 오직 이것 외에 다른 것을 가르치면 그것은 “다른 복음’이다. 천사가 와서 이 다른 것을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저주가 있을 진저! 그 천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는 이들에게도 저주가 있을 진저! (갈1:8).
이런 저주 가운데
<
그러니 세상을 향해서 뿐만 아니라 교회를 향해 회개의 나팔을 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나 오늘날 담대하게 회개하라고 외치는 종이 얼마나 됩니까? 많은 주의 종들이 마치 구원의 조건이 믿음 하나인양 믿음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찰스 스펄전은 “사람 낚는 어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죄인을 구원하는 일에 아무리 열심을 낸다 하더라도, 나는 그가 교리들을 그릇되게 전파할 때에는 사람들을 구원할 만한 권한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의 어느 부분에서라도 물러서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일이며 또한 영혼을 구하는 참 방법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같은 책에서 그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때때로 우리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며, 그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듣기 좋은 것만을 설교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사람들이 처해 있는 진정한 위험을 그들 앞에 제시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우려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처해 있는 진정한 위험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사역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함으로 그들이 멸망에 이르게 될 경우, 우리는 그들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만 할 것입니다.”
<홀리죠이>
이제
하지만,
위의 스펄존의 글을 살펴보자. 첫번째 글에서 스펄존은 잘못된 교리를 전하면서 영혼을 구원하는 열심을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언급한다. 바로
둘째글의 인용을 보자. 스펄존은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을 하는 목사들을 비판한다. 진정한 위험을 간파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스펄존 목사의 그 말은 천만번이라도 합당한 말이다. 문제는, 그 말을
그가 과연 “진정한 위험”이라고 보는 것이 무엇인가? 과연 죄악 가운데서 사망선고를 당한 영혼들을 향한 죄인들이 당면하고 있는 영혼의 저주의 상태를 알고 있는가?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
그의 글을 계속 읽어가면서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스스로 점검해 볼 일이다.
출처: 양무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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