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 통변 찬양과 기도 2.>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 주님을 더욱 의지 합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할 것 뿐일세 무슨 일을 당해도 예수 의지합니다. 여러분, 세월 지나갈수록 우리가 의지할 분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무슨 일을 당해도 예수님만 의지 합니다. 아멘.

성령께서 내 마음 밝히 보여주시니 인도하심 따라서 주님만 의지합니다. 밝을 때에 노래와 어둘 때에 기도와 위태할 때 도움을 주님께 간구합니다.

오 주님, 부족한 종이 올려드리는 이 찬양의 공간에  예수님의 이름만 가득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온전히 영광받게 하옵소서. 무슨 일을 만나도 예수님만 의지합니다.

생명 있을 동안에 나는 나는 예수님만 의지합니다.  천국 올라가도록 의지할 것 뿐일세. 할렐루야 !

내 영혼이 주만 앙망합니다. 주님, 나의 메마른 심령에 성령의 단비를 부으소서.
주님, 내 영혼이 예수님의 얼굴을 갈망합니다. 저는 예수님만 의지합니다.
우리 기도의 군사님들은 예수님만 의지하고 바라봅니다. 성령님, 어서 오시옵소서. 우리 가운데, 기도의 처소에 오셔서 우리가, 우리의 영혼이 온전히 예수님만을 갈망하며 주의 얼굴을 온전히 구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 아버지시여,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부여,
사랑하는 나의 주님. 내가 영원토록 나의 주 예수님을 노래하리라.
내 영혼이 영원, 영원히 예수. 예수, 예수 찬양과 존귀와 경배를 드리나이다. 어린양 예수, 보좌에 앉으신 나의 주님, 나를 다스리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종일토록, 영원, 영원히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니, 내 영혼아, 주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아멘 아멘. 예수는 나의 주, 예수는 나의 구원자. 주께서 내길 인도 하시네. 주께서 내길 인도 하시네. 오, 나의 주님. 나의 하루 하루를 주를 위해 살리라 주께서 내길 인도 하시네. 나 이제 주를 찬양하리라. 나 이제 주를 찬양하리라. 나 이제 주를 노래하리라. 나의 하루 하루를 주를 노래하리라. 나 이제 주님 찬양하리라.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주님, 경배합니다. 주님, 예배합니다. 주님, 찬양합니다. 존귀 영광 권세. 오, 주님께, 주님께 할렐루야!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예수, 할렐루야! 할렐루야!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예수. 

주님,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상한 심령을 만져 주옵소서. 오, 상한, 우리의 깨어진, 상한 마음을 주님 만져 주옵소서. 사람울 보고, 사람을 보고 왔다가 사람의 말에 상처받고 깨어진 상한 심령이 있습니다. 아버지여,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주님, 주님, 만져 주옵소서. 터치(touch)하여 주옵소서. 주님,  만져 주옵소서. 세월 지나갈수록, 주님, 내가 의지할 것은 주님 한 분 밖에 없어요. 의지할 것 뿐일세. 무슨 일을 만나도 예수 의지합니다. 아멘.

아멘, 주님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 계시니 무슨 일을 당해도, 무슨 일을 만나도 오, 내 영혼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진정 기뻐하고 안식을 누립니다. 주님 한 분이면 됩니다. 주님, 감사하고, 주님, 찬양드립니다. 오 주님,  감사드리고 찬양드립니다. 예수 의지합니다. 

오 내 영혼아, 기뻐할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뻐할지어다. 주님, 우리의 군사들, 주의 기쁨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예수님 한 분만으로 인하여 그 기쁨을 온전히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할렐루야!


By: 테힐라, 편저: 루디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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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자여 내게 오라 괴로운 자여 내게 오라 병든 자여 내게 오라 가난한 자여 내게 오라.
삶에 지친 많은 사람들아 모두
다 내게 오라." 아멘 아멘!

나름 신앙생활을 오래 해 오고 있지만 난생 처음 들어보는 찬송가인데 어렵고 힘든 환우님들을 생각하면서 강도사님이 기도 중에 선택하신 곡인 듯 가사 한 절 한 절이 어찌나 애틋한지...

이 찬송은 아마도
성령님께서 오늘 내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특별 위로의 말씀인 듯, 큰 감동으로 가슴이 먹먹해 옵니다.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슬픈 마음, 외로운 환경과 질병을 부등켜 안고 살아가는 가난한 순례자들, 저 천성을 향해 가는 동안에 사랑하는 가족, 어떤 이는 남편과 아내를, 아들과 딸을, 부모와 자식을, 또 어떤 이는 함께 일하던 든든한 동역자를 잃고 혼자 남아 터벅터벅 걸어가는 이 아픔, 이 슬픔, 이 고독...

가는 길이 너무 힘들고 지쳐서 때로는 이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싶고 때로는 모든 것을 다 내어 던져버리고 싶은 때가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내게로 오라." 나를 향해 손짖하며 부르시는 그분의 피묻은 손을 바라보면 결코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생각에 다시금 힘없는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앞으로 전진, 전진하려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아프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하신 그 십자가 고통만큼 아프겠나요. 그분이 당하신 그 아픔의 만분지 일도 안 되는 이 작은 고통으로 여기서 주저 앉거나 뒤돌아 설 수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정말 끔찍한 질병과 슬프고 고통 속에 빠진 지체들이 그럼에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각자가 자기 몫에 태인 십자가를 걸머지고 한 마디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고 굳건하게 서서 잘 버텨나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바라볼 때, 나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회개합니다. 이전에는 내 슬픔, 내 고통, 내 삶의 무게가 가장 크다고 생각했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기도 군사님들 한 분 한 분 모두 대개는 극심한 환난과 시련을 당하고 있는 분들이 많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을 바라볼 때,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 너무 없어 미안하고 굳건히 버텨나가시는 모습이 너무 장하고 너무나도 고마워서 내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계시니까요. 그분께서 슬프고 괴로운 자, 삶에 지치고 힘든 자 모두 다 내게로 오라 하시니...

그래요, 그렇게 믿음 위에 굳건하게 서서
그분께로 나아 가야지요. 이 땅 위에서 받는 경한 환난은 잠시 잠간이기에 저 영원한 나라에서 받을 중한 상급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오늘 비록 내 몸이 병들고 아플지라도 나를 대신 해서 채찍 맞으신 그분의 이름이, 나를 치료할 것이며 비록 치료가 급속히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분은 선하시기에 그분 안에 있는 우리는 반드시 승리의 개가를 부를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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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의 의미

갈 5:2-4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뜨거운 한 여름 낮, 한 할머니가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신작로를 걷고 계셨습니다. 지나가던 트럭 운전기사가 그 할머니가 측은하여 짐칸에 태워드렸습니다. 한참을 가다가 운전기사가 뒤를 돌아보니 그 할머니 여전히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계신 겁니다. “할머니, 그 짐 내려놓으세요.” 그 할머니가 대답하셨습니다. “아이구, 제가 탄 것만도 미안한데 짐까지 실을 수는 없지요.” 트럭 운전기사는 무거운 짐을 이고 가는 할머니가 안쓰러워 태워드렸는데 그 할머니는 그 무거운 짐을 이고 흔들리는 트럭 위에서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우습습니까? 무지해서 저지르는 실수가 실수로 끝난다면 이해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무지해서였다 해서 모든 것이 용서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것이 죄요, 속는 것이 죄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나를 모르는 것이 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무거운 율법을 내려놓지 못 하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아니,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심각한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반복하여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율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렇게 무지하냐고 꾸짖고 있습니다. 그 할머니는 트럭에서 내린 다음 그 짐을 옮긴 것은 트럭이 아니라 자신이었다고 주장할 판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었다고 주장할 판입니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자가 이와 같습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 줄 아느냐고 묻습니다. 할례를 받는 자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진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버리고 도로 멍에를 메고 율법의 종이 되겠다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버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겠다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려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는 것입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원래 할례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약속의 표입니다. 잊지 말라고 주신 표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밤하늘의 별을 가리키며 후손을 약속하신 다음 아브람이 ‘제가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고 증표를 요구하자 아브람으로 하여금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여 그것들을 쪼개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쪼개는 것, 곧 ‘브릿트’로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히브리어에서 ‘쪼개다’와 ‘약속’의 발음이 비슷합니다.) 아브라함은 자빠져 자고 있었고 하나님 혼자서 그 약속의 표시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람과 사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 하고 여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 때가 아브라함이 86세 되던 해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 하여 그 엄청난 실수를 하였지만 하나님은 하신 약속을 고치거나 거두지 아니하셨습니다. 다시 세월이 흘러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열국의 아비’ 아브라함과 ‘열국의 어미’ 사라로 고쳐 주시고 모든 남자들로 하여금 할례를 하도록 하셨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약속의 표시였습니다. 남자의 거시기에 할례로 표를 하게 하신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내어주시겠다는, 구원하실 독생자를 보내 주시겠다는 약속의 표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인 할례는 율법과 함께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의 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버리고 떠나도록 만드는,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구약시대로 거꾸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올무가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약속인 할례가 그리스도를 버리고 대적하는 도구로 악용되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일찍이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신 것도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하면서 할례와 율법을 가지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를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고 격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입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하나님의 전부인 아들을 내어주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전부입니다. 아무것도 더 할 것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전부인 아들을 내어주시고도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지 못 하시고 사망에서 구해내지 못 하신다는 게 말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일부 교회에 새로운 율법들이 은근히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믿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만 믿는 것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값싼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이 나오는 것은 믿는 자들의 여전히 변화되지 못 한 인격과 행실 때문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고, 인격이 변화되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만 구원에 이룰 수 있다고 새로운 율법을 가르치는 것은 트럭 위에서 보따리를 내려놓지 말고 이고 고생하라는 어리석은 가르침일 것입니다. 이 잘못 된 가르침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 하고 “하나님이 과연 나를 용서하신 것일까? 나는 정말로 구원 받은 것일까?” 하고 일평생 두려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하여 그 참혹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것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주님의 피는 결코 헛될 수 없고 취소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믿을 때, 우리가 우리 입술로 주님을 구원자로 영접할 때 우리가 거듭 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피를 통하여 우리를 자녀로 낳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취소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죄도 음부의 권세도 우리를 다시 끌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두려움과 의심으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마음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며 찬양하며 주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하여가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

.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뜻>

여러분,  화면에 띄운 요한 3서 1장 2절 말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지요, 거의 외우는 말씀이지요? 네, 말씀을 아는 데서, 외우는 데서 그치지 마시고 이 말씀이 우리 삶 속에 그대로 적용되어서 정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건강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말씀이 우리 삶에 그대로 투영 되어서 살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하고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 우리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혼이 먼저 잘 되어야 합니다. 우리 육신이 먼저 잘 되고 강건하고 그것이 아니라, 영혼이 먼저 잘 되고 그 다음에 우리 육신이 잘 되고, 우리의 하는 모든 범사가 잘 되는 것, 이것이 영적 비결이고 축복의 비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되 우리의 영혼이 먼저 잘 되기를 하나님은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에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의 영혼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때때로 연단과 다루심 안으로 우리를 다루시고 때로는 고난 가운데,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게 하시는 것이 사랑하는 아버지의 섭리와 그 깊은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고난이 얼마나 우리에게 유익한지는 고난을 겪고, 고난을 패스(pass)하고 그 고난의 긴 터널을 믿음으로 통과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목청껏 고백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간중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이유없는, 까닭없는 고난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 저에게 왜 이런? 하나님, 저에게 이런 것을, 이런 어려움을, 아픔을 주시나이까?" 네, 지금은 모르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난 뒤에, 인생의  뒤안길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그 크신, 우리를 향하신 히나님의 선하심과 시랑하심과 깊은, 큰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을 사십년 광야 생활을 왜 뺑뺑이를 돌렸을까요? 그냥 가나안 땅으로 바로 끌어들이면 되는데, 모세가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그 하나님 앞에 신발을 벗고 서서 하나님께 사명을 받았을 때," 내가 너를 이스라엘  내 백성에게 보내서 애굽땅에서 출애굽 시키게 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너에게 능력과 기적을 베풀 것이다."

모세는 늦게 부름받고 하나님께 소명을 받고 하나님의 사명을 가지고 이스라앨 민족을 애굽, 출애굽시킬 때 사명을 받고 떠납니다. 그럴때만 하여도 모세는 아마도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내가 애굽 바로 왕을 만나서 내 백성을 애굽을 떠나게 하라. 가난한 땅에 가게 하라. 그러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이 순탄하게, 그렇게 잘 풀려질 것이다.

왜?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그렇게 안전하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지요. 모세가 그 사명을 받았지만 많은 고난과 고초와 모함과 조롱을 받으면서 때때로 원망과 불평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출애굽시키셔서 바로 가나안 땅에 들이지 않지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합당한, 거기서 죄를 버리고 우상을 섬기지 않고 이방민족, 이방종교와 혼합되지 않도록 하나님은 광야 사십년 동안을 뺑뺑이 돌리면서 육의 사람을 영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광야같은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본향은 저 천국, 가나안 땅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입성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광야같은 순례자의 여정 길에 우리가 원치 않는,  우리가 아파하는, 괴로워 하는 그런 고난의 터널을 군데군데 놔두고 그것을 통과하게 합니다. 이것 없이 다 평탄히게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뜻은 그것이 아니지요.  고난을 통해서,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러한 믿음의 영적인 성장을 가져올 수 있도록, 그런 성숙한 사람으로 우리를 업그레이드(upgrade)시키고 자라게 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기독교작 용어로 성화(sanctification)시키기 위하여, 성화되는 과정 속에서 다루심을 입고 고난을 통과하기도 하면서 이 인생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물질이 되고 재정의 어려움이 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악화와 어려움이 되고 눌려있는 그 모든 것들을 다 통틀어서 이것들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잘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말씀: 테힐라: 글 정리: 루디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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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예수 님, 예수님, 나의 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아멘 아멘.


자손 대대로 애굽 땅에서 종살이 하며 짐승처럼 구박받던 그들을 건져내어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배고프면 만나를 주셨고 고기 먹고싶다 소리치면 메추라기를 배가 부르도록 먹이셨던 주님,

뒤에서 맹렬하게 쫓아오는 애굽군대의 추격을 막으시고
앞에서 넘실거리는 홍해는 힘있는 주의 손으로 쫘악! 갈라 육지같이 건너게 도와주셨던 하나님,

유대민족은 그 하나님이신 당신께
등을 돌려 존귀하신 얼굴에 침을 뱉고 채찍질하도록 로마군병들에게 넘겼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라! 죽여라!"
소리치며 내어주었습니다.

배신의 아픔, 주께서 당하신 그 아픔, 비웃음, 조롱, 온갖 고통을 묵묵히 참으시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이 되신 그리스도 나의 왕 나의 하나님,

그 모진 십자가를 지심은 모두 나를 사랑하사 나를 살리기 위함이라 하십니다.

오 주님,
어찌하여 나를 그토록 사랑하셨나요. 어찌하여 그 크신 사랑을 내게 베푸셨나요. 그 사랑을 내가 다 헤아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 모진 고통을 내가 다 느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강도사님이 예수님을 목놓아 절규하듯 부르실 때, 망치 소리가 내 귀를 아프게 때리고 당신의 찢겨진 그 살을 타고 흘러내리는 선혈이 내 마음을 적셔흐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소원은 오직 하나뿐, 죄에서 죽어가고 있는 나의 영혼을 지옥불에서 건져 내어 당신의 자녀로 삼는 것,

저 찬란한 천국 백성으로 삼아 영원히 당신과 함께 사는 것이라 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
그 십자가의 고통이 나를 살리셨습니다. 이제 나는
죄의 형벌에서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당신께서 베푸신 그 사랑, 구원의 은총을 나는 노래할 것입니다, 영원토록... 할렐루야!

글: 루디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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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통변 찬양 시>

주님을 노래하라
저 하늘의 뭇별들아
주님을 찬송하라

저 천군과 천사들아
주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라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영원, 영원히 찬양하라!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멘!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멘!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멘!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께, 주님께 영원히

경배해 영원히
주님을 찬양해 영원히
주님을 찬양해 경배해
할렐루야! 아멘 아멘

오, 너희 천하만민들아
주님 앞에 굴복하고
주의 이름을 높이 송축할지어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께 올려드리나이다
주님을 경배해
내 영혼이 영원토록
주를 찬송해

할렐루야! 아멘 아멘!할렐루야! 아멘 아멘!

<성령의 예언의 말씀>

오, 사랑하는 나의 종, 나의 아들들, 나의 딸들아, 내가 곧 가리라.

깨어 있어라.
깨어 있어 기름을
준비하는 자가 복될지어다.

내가 곧 문 앞에 이르렀노라.
언제 올까 더디 올까
나를 그렇게
방심하지 말고 깨어 있어라. 근신하라.

주의 날이 곧 임박하리라.
나의 팔, 곧 오른 팔로
붙들고, 이 마지막 시대에 복음의 나팔수로 너희들을 내가 사용하기를 기뻐하노라.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항상 너와 함께 하리라.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동행하며

너의 눈이 되고
너의 발이 되고
너의 귀가 되고
너의 입이 되리라.

내가 전하는 말을
너의 입술에 두리라.
성령으로 충만하여
나의 말을 대언하고
하늘의 축복과
비밀을 복음의
나팔을 부는
나팔수로 강건할지어다. 강건할지어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너의 기도를 내가 들었고
내가 곧 응답하리라.

좌절하고 실망하지 말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서로 사랑할지어다.
나의 사랑하는 종들아
나의 딸들아, 나의 아들들아, 서로 사랑할지어다.

사랑을 심고 나의 평안을 나누어 주고 공급하며 평안의 통로로, 사랑의 통로가 될지어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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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힐라 강도사님의 능력방언 중에서
옮긴 이: 루디아/최송연



갈라디아서 7. 캄보디아 독사의 독




갈 4:22-24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킬링필드로 알려진, 참혹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캄보디아에는 그 때 매설된 수백 만 개의 지뢰가 곳곳에 남아있어 지뢰로 인한 부상자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캄보디아에는 지뢰 말고 다른 이유로 팔다리가 잘려나간 사람도 많습니다. 독사 때문입니다. 한 번 물리면 치명적인 극소량의 독이 모든 것을 녹이고 소화시켜버린다고 합니다. 치사율이 매우 높은데 다행히 목숨을 건진다 해도 피가 끝없이 흘러나오고 살이 썩기 때문에 물린 팔이나 다리를 잘라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소량의 독이 그렇게 강한 소화력을 발휘하는 것은 전 세계에서 이 뱀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서도 수많은 화학물질이 분비됩니다. 바로 호르몬입니다. 인슐린, 성장호르몬, 아드레날린, 멜라토닌, 도파민, 세로토닌, 에피네프린, 옥시토신, 페로몬 등 인체에서 생성되는 많은 종류의 호르몬도 엄청나게 강력한 화학물질들입니다. 아주 적은 양으로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독과 호르몬의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습니다만, 복음의 능력은 더욱 강력합니다. 독사의 독이나 호르몬 따위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 복음은 죽었던 생명을 살리고 슬픔과 절망을 기쁨과 희락으로 바꿉니다. 사람을 완전히 바꾸어 놓고 세상을 뒤집어 놓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베드로와 또 제자들은 성령의 말하게 하심에 따라 사람들에게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고 베드로의 전하는 복음에 수천 명이 한꺼번에 주께로 돌아옵니다. 사람들마다 기쁨으로 주를 찬미하고 모든 소유를 팔아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복음이 불길처럼 퍼져나갔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사도바울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사도바울도 모든 것을 버리고 목숨을 바쳐 복음 전하는 일에 자신을 던졌습니다. 사도바울에게서 복음을 전해 받은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사도바울의 육신에는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바울의 추한 외모, 간질로 인한 발작증세 같은 것일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시험거리를 갖고 있는 사도바울을 기쁨으로 영접하였습니다. 할 수 있다면 눈이라도 빼어줄 만큼 사도바울을 사랑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복음의 능력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랬지 않습니까? 죽어있던 내 영혼에 복음이 빛이, 주님의 생명이 비취었을 때 우리는 세상이 뒤바뀐 것 같은 환희와 사랑을 느끼지 아니하였던가요? 아, 지금은 세상근심 가시덤불 밑에서 식어버린 가슴으로 헐떡이고 있지만 그 감격, 기 기쁨이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냉각과 차분함에 대하여 우리는 이해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냉각은 당연한 일입니다. 감격과 기쁨으로 언제까지나 처음처럼 뜨겁게 방방 뛴다면 사람이 어떻게 정상적으로 살겠습니까? 차분하게 가라앉고 정돈되어 큰 강물 같고 큰 바위 같이 자리잡은 믿음은 우리에게 더욱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처음의 그 뜨거움과 사랑이 식자 그것을 믿음이 사그라진 것으로 생각하여 불안해하였고, 그래서 열심을 추구하였고, 이것을 노리고 거짓형제들이 다른 복음, 곧 율법으로 그들에게 접근하였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불안해하는 성도들을 율법의 올가미로 엮어서 끊임없이 열심을 내도록 만드는 것, 그리하여 그 열심을 믿음의 진보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율법이 우리를 종으로 삼는 또 한 가지 속임수가 아닐까 합니다.

계속하여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외칩니다. “너희는 종의 자녀가 아니다. 너희는 자유자의 자녀다.” 사도바울은 육신적 방법으로 이스마엘을 낳은 계집종 하갈을 율법으로, 약속으로 이삭을 낳은 자유인 사라를 복음으로 비유하면서 어리석게 율법의 멍에를 멘 종이 되지 말고 우리를 자유케 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자유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능력이 주었던 처음 그 감격과 기쁨이 식어지면 불안해하고 그 감격과 기쁨을 다시 찾아 이리저리 헤매 다니고, 그러다가 다른 엉뚱한 독사의 독을 받는 것과 같지 아니한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신앙이 식었다고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결코 자유가 아닙니다. 복음의 능력을 가슴속에 큰 바위처럼 담고 흔들리지 마십시오. 평안을 누리십시오. 뜨거우면 뜨거운 대로, 차가우면 차가운 대로 자신의 영혼을 자유케 하십시오.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아갈 자 없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으로 자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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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주님, 풀의 이슬같은 인생,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인생, 천국의 순례자 된 내가 이 땅 위에 사는 동안 진정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는 무엇인지요. 그것은 날마다 주님의 뜻을 구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 주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드리는 삶이 되어야 하건만...지금의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나는 나의 남은 생이 얼마인지 전혀 모릅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니 그동안 내가 왕노릇 하고 내가 주인이 되어 육신의 정욕을 따라 구하고 찾던 삶을 산 것을 성령님께서 조명하여 비추어 주시니 가슴에 회한이 넘칩니다. 주여, 이런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의 옛 성품, 고집과 아집, 옛사람은 모두 성령의 방망이로 두들겨 부셔주시고 깨부셔 주셔서 나를 성령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도구, 정금같이 깨끗하고 귀한 그릇으로 새롭게 빚어주세요. 이제부터는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주님 한 분만으로 즐거워할 수 있는 아름다은 성도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주님, 이 시간 주님의 기름부음을 간절히 사모합니다. 위로 부터 오는 기름부음, 내 안에 내제하시는

성령님의 기름부음이 날마다 증가 되고 차고 넘치게 하소서.

 

주님을 사랑하려고 하여도 영적인 소경이 되어 입으로는 주님을 노래하면서도 마음은 냉랭하고 바싹 메마른 나의 영혼을 만져주세요. 주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할 때 이 기도가 마지막, 이 땅에서 내가 숨쉬고 호흡하는 이 순간이 단 십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하소서. 주님께 온전히 집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기 원하오니 주여, 나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하신 주님과 함께 단 한 시간도 깨어서 기도 하지 못하던 제자들처럼 나의 생각이, 나의 초점이 다른데 있지나 않습니까. 군인이 사격할 때 제로에다 초점을 맞추고 사격하듯, 돋보기로 종이에 불을 붙이려면 돋보기를 종이 위에 정조준해야 하듯이 영적인 세계에서도 영적인 일에, 초점을
온전히 주님께 맞추어야 하는데 나의 초점은 지금 어디에 두고 있는지
지금 나는 어떤 기도를 하고 있고, 또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하셨는지요.


예수님께서는 땀방울이 피가 되듯이 기도 하셨습니다. 이것은 과장법이 아니며 꾸며낸 말도 아닌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검증된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기도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십자가를 앞에 두고 성자 하나님이신 그 분께서 성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으면 모세 혈관이 터져 땀방울이 피가 되어 흘렀는데 나는 어찌하여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데 집중하지 못하고 타성에 젖어 기도하는 모양새만 만들어 내고 있는지요.


주님의 그 절절한 기도를 본받아 나도 아버지의 뜻을 알기 원하는 기도, 목숨을 내어건 눈물의 기도를 단 한 번이라도 드릴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 주옵소서. 그리하여 남은 생은 아버지가 원하시는 뜻을 조금이나마 이루어드리다가 아버지 앞에 돌아갈 수 있도록 주님이여 나를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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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아들이기 때문에

 

 

갈 4:6-7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사도바울은 지금 자신이 복음을 전하였던 갈라디아의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 유대주의자들,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자유를 누리는 성도들에게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속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거짓형제들에게 속지 말라, 율법을 지켜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장에서도 사도바울은 논리적인 설명을 해나갑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셨지만 참으로 사도바울은 논리의 대가이십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사도바울은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먼저 주신 것이다.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그리스도)을 떠나지 않게 하려고 우리를 가둔 울타리요 몽학선생이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4장에 들어와서 사도바울은 아들과 후사의 이야기로 이어갑니다.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후사이지만 어렸을 때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듯이 우리가 후사이지만 율법이라는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우리를 속량하여 아들의 명분(아들 됨, NIV 영어성경에서는 ‘온전한 아들의 권리’로 번역)을 얻게 하려 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사도바울은 놀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래, 창세전부터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율법 보다 크고 강하신 그 아들이 여자의 몸을 통하여 율법 아래로 내려오셨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율법, 곧 죄의 권세를 깨뜨리고 우리를 율법의 종으로부터 건져내어 하나님의 후사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먹게 하시고 그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셔서 우리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율법의 종이 아니요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후사라는 것입니다. 아,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우리는 전에 로마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후사라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를 나눈 적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이방인들인 갈라디아의 교회들에게 이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도 아니고 율법을 배운 적도 없는데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인데 율법 아래에 두셨다고 하니 이상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바울이 하나님과 복음에 관하여 얼마나 깊은 이해와 계시를 받은 사도인지 경이롭습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들, 율법 아래 있는 자들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해당됩니다. 우리도 아들들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창세전에 이미 우리를 아들들로 택정하여 유대인들은 율법 아래 두시고, 우리는 양심 아래 두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들을 구원하여 후사로 삼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대표로, 도구로, 통로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그 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끌려 나가 쳐다본 밤하늘별은 모래알보다 많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었고, 그 후손들 가운데 오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였고, 십자가에서 찢기고 흘린 살과 피가 온 세상 흩뿌려진 것이었고, 그 살과 피로 새 생명을 얻어 온 세상 가득한 하나님의 자녀들이었고, 마침내 후사들로 가득한 영광과 찬양이 울려 퍼지는 끝없는 우주, 광활한 하나님의 세계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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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며 산다는 것
        루디아 / 최송연
 
이 세상에
사랑이 없노라
말하지 말게 하소서 
사랑은 내 안에 
있는 것
 
그대를
사랑하노라
입으로 말하지 
않게 하소서
사랑은 희생이 
따르는 것
 
사랑은
말이 아닙니다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병든 이를 
찾아가는 발걸음
소외된 자를 
다독이는 손길
 
내게 
악을 행한 사람마저
용서로 끌어안는
넓고 큰 가슴
 
원수된 나를
품으시고 안아주신 
그분을 닮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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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오늘도 크신 은혜로 함께 해주신 나의 주님, 감사드립니다!
주께서 테힐라TV를 통해 기도군사를 소집하지 않으셨다면 지금쯤 내 삶이 얼마나 더 고달플까요. 바싹 메마른 광야같은 내 영혼을 성령으로 갈아엎으시고 이른비 늦은비 같은 은혜를 쏟아부어 주시니 내 영혼이 기뻐 찬양합니다. 
 
 기도를 시작하려고 동영상을 틀면 그때부터 마음이 뜨거워 눈물이 흐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지난 삼 사일 동안 기도할 때면 뜨거워서 티셔츠를 벗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려고 그랬나 봅니다. 지금부터 댓글로 올리기는 좀 길지만
원인을 알아야 결과도 공감할 수 있을테니까요. 끝까지 들어주시는 분들은 축복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제가  젊은날 러시아에 선교 떠났을 때는 사회주의가 패망해서 문을 닫고 자본주의로 돌아서던 때여서 시장에는 먹을 것을 찾을 수가 없었지요 .
 선교본부에서는 그 나라 언어를 먼저 배울 수 있도록 우리네 미국 선교사들은 학교에서 언어연수를 받아야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극동대학에 언어연수생으로 등록하고 공부하려면 집에서 늦어도 새벽 다섯 시에는 출발해야 뜨람바이(전차의 일종)를 타고 수업시간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에 아침식사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고 커피 한 잔에 말라 비틀어진 빵 한조각 먹는 것이 전부였지요.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면 오후 두 세시.. 
그때까지 돈은 있어도 물건이 없어 아무것도 사먹을 게 없으니...
뜨람바이를 타고 집에 돌오면 저녁 때가 됩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지만 집을 살펴보아도 그 당시는 쌀도 파는 곳이 없으니 밀가루 한 포대와 감자 몇개가 부엌 한쪽에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어릴 때 만들어 주시던 생각을 떠올려 감자를 깍고 밀가루 수제비를 뜯어서 물에다 넣고 소금 한꼬집 넣는게 전부였어요. 그래도 시장이 반찬이란 우리나라 속담처럼 허기진 배를 채우는 데는 안성맞춤이었지요. 문제는 나의 위가 다른 분들처럼 튼튼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밀가루 죽을 계속 먹고 나니 위가 견디지 못하고 늘어나서 1년 만에 위하수증이란 병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식사를 할 때 남들의 먹는 반도 먹지 못했는데 그것도 너무 오래 돼서 그런지 일년 전서부터 위가 너무 고통스러워졌습니다
 병원에 가서 진찰했더니 이번에는 또 역류성식도염으로 발전(?)했다는 군요.
누우면 기침도 나고  힘들어서 밥을 반의반 공기도 먹지 못하고 한 숟가락만 먹어도 속이 괴롭고 더부륵  늘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던 중 테힐라 TV를 알게 되었고 마침 성령님께서 기도군사 소집을 하라고 테힐라 형제님께 사명을 주셨다고 하시기에...저는 갈급한 심령이 되어 모든 시간 스케쥴을 뒤로하고 첫날부터 조인을 했습니다. 
 
첫날부터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를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지난번에 간증했으니 줄일께요.
 
이상한 것은 최근 삼 사일 동안 방언으로 기도하는데 몸이 너무 뜨거워서... 불을 쏟아붓는 듯...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밥맛이 좋아지고 소화가 되네요. 예전처럼 조금 먹고 나면 배가 고파서 따끈한 우유를 한잔 마셔보기도 하고... 오늘은 밥을 먹은 후에 그토록 먹고싶어도 먹지 못하던 찹쌀 떡을 한개  눈 딱 감고 먹었는데도 속이 편하고 데모를 하지 않네요. 할렐루야!
 
기도 중에 주님께서 치료해 주신것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 간증을 듣는 모든 형제 자매님들에게도 같은 은혜로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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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4.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갈 3: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앞서 우리는 그 유명한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좀 죄송하지만 다시금 되풀이하여 말씀드립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내(사도바울)가 예수를 믿고 보니 내가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못 박혀 죽어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산 것은, 이제 가진 생명은 나의 옛 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 새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믿는 자는 이미 율법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살았다는 것,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아직 안 죽었다고, 덜 죽었다고 생각하면서 매일매일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죽으려고, 더 죽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 믿고서도 여전히 부족하고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 때문에, 또 내가 무엇인가 노력을 해야 조금이라도 구원을 받을 자격이 더 해지고 주님의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겹침으로써 애절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정경을 만들어 가슴속에 간직하려는 일종의 감상주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더 죽어야 한다고, 매일 매일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옛 생명이 아직 덜 죽었다고, 더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실수입니다. 내가 거듭났다면, 내가 주 안에서 살아났다면, 또 죽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사도 바울은 그런 생각들과 요구들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행해지는 행위들과 율법들이 엉뚱한 꾐이라고 말합니다. 3장에 들어가면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더욱 신랄한 어조로 말씀합니다. “너희 눈앞에 뻔히 보이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서 엉뚱한 꾐을 따라가니 너희가 눈이 멀었느냐, 너희가 그렇게 어리석으냐, 너희가 율법 지켜서 성령을 받았느냐, 믿고서 성령을 받았느냐,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헛되이 마치려느냐......”, 다시 말씀드리자면 사도바울이 외치는 것은 나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 새 생명을 얻었으니 구원을 위하여 내가 더 해야 하는 일도, 더 할 수 있는 일도, 어떠한 행위도, 어떠한 율법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정경이 아름답고 애절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완전한 구원에 나의 어쭙잖은 오물을 더 하는 것일 뿐입니다. 구원에 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는 것, 다만 믿음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어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도 행위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믿음으로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고 계획하신 것을 나타내는 것이지 율법과 규례로 구원에 이르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셨지 ‘의인은 율법 지켜 살리라.’ 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율법을 온전히 지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저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 말고 다른 구원의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예수 ‘예’자도 몰랐던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 받습니까? 그들도 예수 믿어 구원 받았습니다. 예수 이름조차 몰랐지만 아담과 하와는 뱀의 머리를 밟고 구원하실 여자의 후손이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수많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세주,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밤하늘 별, 곧 후손 가운데 오실 구원자를 믿어서 의로 여기심을 받았습니다(창 15장).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오실 예수’를 믿었고 우리는 ‘오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을 압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하나님의 구원도 완전합니다. 인간의 어떠한 더함도 어떠한 도움도 필요 없습니다. 아무도 자랑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신앙의 기초이며 핵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많은 설교와 신앙생활을 통하여 율법을 지켜서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그 똑같은 진부한 소리를 또 들어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잘 알면서 어째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가지고 애절하게, 아름답게, ‘내가’ 또 죽으려고 애쓰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으냐 말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법도와 규례, 이치와 법칙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지켜야 할 그 중에 가장 큰 것은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主)라는 사실입니다. 우주만유 중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티끌 하나, 먼지 하나조차도 하나님의 지으신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는 거룩합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은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완성될 때는 하나님의 것이 아닌 어떠한 것도 허용될 수 없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에 하나님의 소유만 허락하시고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은 영원한 불에 소멸시키는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옛 생명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 하나님으로부터의 새 생명이 내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나는 이미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율법의 행위는 죽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만 남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만 내게 남아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우리는 어떻게 끌어안고 살아야 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이미 죽었다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 즉 우리의 구원은 그렇게 이루어져서 돌이킬 수도, 고칠 수도, 취소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는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과거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이미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확신하고 자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이 믿음으로 살 뿐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이 다 하도록 주님을 찬양할 뿐입니다.

 

 

이 글을 쓰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사도바울이 말씀한 바를 제대로 표현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이 글을 써놓고서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문구만 보면 또다시 ‘울컥’ 눈물이 나고 그 참혹한 정경에 자신을 합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만 한다고 생각되는 것은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나 자신의 모습 때문일 것입니다. 어쩌면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앞 뒤 19절과 21절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감상에 빠져 거치는 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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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가족을 잃은 슬픔 너무나 크죠. 사랑하는 자녀를 먼저 떠나 보낸 슬픔도 너무나 괴롭고 큽니다. 그러나 그 슬픔이 우리 예수님하고 바꿀 수는 없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그 빈자리에 그리움, 그 사무치도록 그리운 그 그리움, 가슴이 그냥 콱! 막히는 것처럼, 호흡할 수 없는 정도로 그렇게 고통스러운 그리움의 아픔이 있지요? 

여러분, 그 그리움, 그 떠나 보낸,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낸 그 그리움을 붙들고 그 그리움 때문에 고통하며 이 그리움을 어떻게 해야 하나, 너무나 보고싶은 그리움이 슬픔으로 왔는데 그것을 털어버리고 그것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붙들고 있으면 그 그리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 슬픔에서 온전히 자유를 누리지 못해요.
그 슬픔의 무게, 그 슬픔의 아픔, 그것 때문에 일상의 삶이 무너지고 그것 때문에 헤어나지 못하고 그러면 우리의 신앙생활, 영적인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낸 슬픔이 크다고 할지라도 그 슬픔과 우리 예수님 하고는 결코 바꿀 수 없습니다. 그 슬픔을 예수님 보다 더 애착을 가지고 그 슬픔을 예수님 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저 처럼 하십시오. 제가 방금 1시간 전에 겪었던 체험을 말씀드립니다. 저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특별합니다. 제가 장남이고 아버님은 너무나 사랑이 많고 정이 많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아버님 자신, 당신도 상처가 컸던 분이기 때문에 그 아버지가 장남인 저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버지에 대한 어떤 원망보다는 아버님이 제게 그런 상처를 줄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상처에 대해서 더 많이 불쌍하고, 애처럽고 그러 거예요.
저는 아버지를 다 이해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아버지의 모습을 추억으로 떠올리지 않으려 하고 잊어버리려고 일부러 이렇게 저렇게,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이 쑥쑥 들어오면 저는 일부러 피하고 도망다녔는데 오늘은 제가 그것을 방어할 틈도 없이, 아버님 사진을 딱 보는 순간에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나 사무치게 훅! 들어와 버린 거얘요. 그 순간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핑 돌아서 괭장히 힘들었습니다. 
그때 제가 "주님, 제가 어떻게 합니까? 지금까지 아버지의 기억을 잘 막고 왔는데 이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같은데 이 슬픔이 또 저를 힘들게 할텐데 어떻게 합니까?" 하는데 제 안에서 성령께서 "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을 선포를 하라!"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아버님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한 슬픔을 가져다 주는 어둠의 영들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묶임을 받고 떠나가라!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당장  떠나갈찌어다! 이 사악하고 악한 어둠의 영들아, 천국 가신 아버님의 그리움으로 인해서 내가 내 주님을 보는 눈을 흐리게 하고 가리게 하는 이 악한 어둠의 영들아, 이 미혹의 영들아!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당장 내 앞에서 떠나가라!" 이렇게 단호하게 제가 선포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여러분, 이 가슴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확 무너져 내렸던 그 순간에 봄눈 녹듯이 그냥 사라져 버린 거예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예, 주님 보다 더 사랑하는 그 어떤 사람, 그 사람이 살아 있던, 이 세상에 함께 존재하던 간에, 우리 예수님 보다, 우리 주님 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여러분, 단호하게 배격하십시오.
가족이라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그 허울 좋은 이름 앞에, 예, 악한 원수 마귀가 그 사람의 혼과 영과 정신을 사로잡아 슬픔에 계속 빠지게 하고, 우울에 계속 빠지게 하고 하나님의 안겨 있는, 떠나간 내 사랑하는 가족들, 또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 슬픔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도록 오늘 이 시간까지 그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내었고, 떠나 보낸지도 수 일이 지났고 수 개월이 되고 수 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떠난 사람에 대한 그 슬픔에서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그걸 붙들고 있고 그것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신앙생활을 똑바로 하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기도의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전심을 더해서 주님을 찬양하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제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 드립니다. 
그것은 사랑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 가까운 사랑하는 지체들, 지인들, 가족들을 향한 그 그리움을 통해서 미혹의 영이 역사하는 거에요, 여러분. 거기에 속으면 안됩니다. 그럴 때는 단호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치십시오. 어떤 때는 꿈에서 그 그리운 사람이 나타납니다. 눈을 뜨면 눈가에 눈물이 적셔저 있어요. 꿈에서 봤기 때문에, 꿈에서건, 현실세계, 정신 차리고 있는 일상 가운데서도 어떤 떠난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알상을 제대로 살어가지 못합니까?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합니까? 너무나 그립고 슬퍼서 기도할 때마다 그 사람이 생각나고, 떠난 남편이, 떠난 아내가, 떠난 사랑하는 딸이, 아들이 생각나서 주님께로 더 깊이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  분명히 명심하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원수 마귀 더러운 귀신이 우리를 미혹하는 것입니다. 속지 마십시오,여러분. 아멘. 
 
 

설교: 정리, 루디아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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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기도
        루디아/최송연 
 
내 사랑이여
밤이 늦도록 
당신 곁에서 
하늘 노래를 
들을 순 없겠나요
 
힘들고 지친 내 영혼
찾아갈 곳 없을 때면
당신 발 앞에 엎드립니다
 
세상의 무거운 짐
모두 짊어지신 어깨
우주보다 넓고 깊고 
큰 사랑의 품을 지니신 분
 
삶의 한숨
사랑
아픔
기쁨조차도
모두 당신께 내려 놓습니다
 
때때로 
솟아나는 의심의 안개
올올이 거두어 내시고
 
당신 품에서
온전한 쉼을 누릴 수 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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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갇힌 자들을 위하여서 기도합니다. 갇힌 자들이 갇힌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의 장소가 되게 하시고 축복의 시간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저들이 세상 가운데 살다가 잠깐 실수로 감옥에 갇혀 있지만 그 갇힌 곳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그 장소가 참으로 복된 장소가 되고 그 시간이 복된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저들의 삶을 주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저들에게 만남의 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오 주님, 이 땅의 소년 소녀 가장들과 고아들을 주님 손에 올려드리고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와 나라의 지자제가 이 땅의 고아들과 소년 소녀 가장들을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저들을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정부나 지자제가 실천하게 하시고 정치적으로나 법이 도움을 줄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이 땅의 교회가 고아들과 소년 소녀 가장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줄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주시고 교회가 발벗고 나서서 저들을 지킬 수 있도록 하옵소서. 그리고 보호받아야 할 연로하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어려운 노인 분들도 교회가 섬길 수 있도록, 우리 이웃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우리의 실상을 볼 수 있도록 성령님 가르쳐 주세요. 
주님께서 내가 갇혔을 때에 돌아보았고 너희 나를 찾았느냐? 나를 돌보았느냐. 내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느냐? 그렇게 책망하시고 주님께서 그렇게 판단하시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너무나 잘 배웠습니다. 하나님, 이웃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시고 한국교회가 나서서 섬길 수 있도록 가난한 우리 이웃을 섬길 수 있도록 하나님 아버지,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이 땅의 젊은이들이, 젊은 청년들이 너무나 많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한국만 아니라 전 세계가 마찬가지, 교회에 젊은이들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저 서부는 교회서 예배드릴 때 노인들 밖에 없다고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 한국교회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이 땅의 젊은이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부모세대들이 젊은 세대를 위하여 기도하게 하시고 우리 후세대를 위하여 우리 부모들이 거룩한 두 팔을 들고 주님을 향하여 우리가 도고의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이 땅의 어버지, 어머니들을 기도군대로 불러 세워주시옵소서.
젊은 세대, 자녀 세대를 위하여 이 땅의 어른들, 기성세대들이 눈물로 기도하고 가슴에 품고 기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전부 기도의 군사로 불러주시옵소서. 아버지여, 젊은이들이 돌아올 수 있게 교회가 세상의 빛이되고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 교회를 각성시켜 주시고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우리 자신이 먼저 변화되기 원합니다. 내가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오 주님, 나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주님, 이 죄인을 변화시켜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나의 허물과 죄를 씻어 주옵소서. 내 안에 모든 악한 죄악의 쓴뿌리들을 성령의 불로 태워주시고 거룩한 성령의 생수로 씻어 주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으로 새롭게 빚어주시옵소서.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더 많이 기도하고 더 간절히 기도, 더 깊은 기도의 자리, 임재의 자리, 지성소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어서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서 성령으로 기도하게 하여 주옵소서. 혼으로, 내 욕심으로, 욕망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좇아서 간구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우리의 구할 바를 알지 못합니다. 내 안에서 내주하신 성령님께서 탄식하시면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성령의 그 간구함이 우리의 영이 성령에 순종하며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기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영혼을 살리는 기도를 하게 하시고 내 자신을 바라보고 내 자신을 바로 세우는 기도를 하게 하시고 내 자신을 주님 앞에 바로 세우게 하옵소서. 아멘.
 

설교: 테힐라 : 정리:루디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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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3. 나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갈 2:19-21>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앞 뒤, 19절 22절을 함께 적었습니다. 20절만 쏙 뽑아서 읽지 마시라고......)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라고 합니다. “내려놓음”, “더 내려놓음”으로 유명한 이용규 선교사도 자신의 가장 좋아하는 성구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애창하는 복음성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도 이 성경구절로 만든 노래입니다.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널리 암송되고 묵상되고 사랑 받는 성구 갈라디아서 2장 20절, 왜 그럴까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그리고 거기에 함께 못 박힌 나의 모습......., 처절하면서도 아름답고, 슬프면서도 위로되고, 고통스러우면서도 치유가 되는, 주님의 지고한 사랑과 나의 부족하고 추악한 모습이 겹쳐져서 함께 투영됨으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성구입니다. 참혹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 그리고 주님과 함께 못 박혀 죽은 나, 그 비통하고 애절하고 처참하며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정경은 우리의 마음에 그려진 한 폭의 그림이요 멜로디요 시(詩)이기도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 말씀에 비추어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서 죽지 아니한 자신의 죄성, 예수를 믿고서도 아직도 변화되지 못 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십자가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자신의 정욕과 욕망을 버리고,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며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성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는 그래서 더욱 은혜가 되고 사랑받는가 봅니다. 그런데 이 복음성가 가사는 살짝 고쳐져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앞은 같은데 뒷부분이 약간 다릅니다. 끝부분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가 “예수 위해 사는 것이라”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하긴 그렇습니다. 믿음 안에서 사는 것 보다야 주를 위해 사는 것이 더 바람직하고 보람 있고 멋지겠지요. 그러나 이 약간의 차이가 우리의 믿음의 차이를 만든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묵상하거나 해석할 때, 그 구절을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뒤 문맥과 전체를 함께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 구절의 참뜻과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지난 시간에 읽었던 갈라디아서 1, 2장을 전체적으로 다시 봅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다른 복음은 없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율법을 지켜라, 할례를 받으라 하는 자들은 거짓형제들이라, 너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라.”, “예루살렘 회의의 결과 구원은 율법이 아닌 믿음이라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 일어난 사건을 인하여 내가 게바의 적절치 못 한 행동을 꾸중하노라...”, 사도바울이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율법이 아니라 “오직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를 관통하는 핵심입니다.

 

 

사도바울은 15절에서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죄인이 아닌 우리라 할지라도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를 믿나니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이어서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예수 안에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의 죽으심을 헛된 일로 만드는 것이요 예수를 죄인 만드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기껏 구원해 놓았더니 너를 죽이는 율법을 다시 세운단 말이냐?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 여리고성을 무너뜨려 주었더니 다시 세운단 말이냐?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내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으니 율법과 관계없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살았으니 나는 오직 이 믿음으로 사노라.” 하는 고백이요 선언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읽으며 크리스천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자신의 의지로’ 또 죽으려 하는 것입니다. “내가” 또다시 죽고, “내가”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려 하는 것입니다.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래야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 신앙인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지로 죽고 못 박힐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려면 죽어야 하고 죽은 다음이라야 다시 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인간은, 죄인들은 죽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다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대로 심판과 멸망일 뿐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분은 오직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들을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죽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우리 안에 영접하였고 주님은 우리를 품으셨으며 주님이 죽으실 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죽었고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았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발견한 것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보니, 주와 연합하여 주 안에서 보니, 바울이,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 다시 살아나서, 거듭나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 있더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지금 있는 생명은 예수 믿는 믿음으로 얻은 새 생명이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어졌다는 것입니다(요 5:24). 바람이 부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람이 부는 것처럼 내가 죽고 다시 태어나는 그 엄청난 영적사건이 성령님의 역사로 일어난 것입니다(요한복음 3장 3-8절). 그러므로 “내가” 또다시 죽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어리석은 새로운 율법입니다. 당신은 이미 물과 성령으로 죽었고 다시 태어났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다시금 19절과 20절, 그리고 21절을 함께 읽어 보십시오. 그 뜻이 명확하니 그것은 우리는 이제 율법과 상관이 없다, 아니라면 그리스도께서 헛 죽으신 것이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복음성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의 가사는 사도바울의 고백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를 “예수 위해 사는 것이라”로 고친 것입니다. “주를 위해 살리라,”는 다짐과 결단, 새로운 삶의 목표, 좋습니다. “이제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요 오직 주님 위해 살리라,”는 각오, 좋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새 생명을 얻었다는 사도바울의 벅찬 감동과 환희의 문구를 주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결심의 문구로 바꾸어야 되겠습니까? 그 놀라운 구원의 감격이 무거운 짐, 율법으로 도로 바뀔까 두렵습니다.

 

 

 

(참고: NIV영어성경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제가 ATS 신대원에서 희랍어를 공부할 때 보니 원어를 가장 충실하게, 가장 원문에 가깝게 번역한 번역본이 구약은 NSBA, 신약은 NIV영어성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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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애가 (哀歌, Lamentation)
         루디아/최송연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며(시148:4)
빛과 소금은 자신을 태우고 녹여(마5:13)
십자가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고 

다윗은 노래 속에 주님의 사랑을, 

바울은 지혜의 신으로 구원의 주님을 선포하네

모든 문학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노래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모든 지식 속에,
모든 학문 속에, 그리스도와 

그의 사랑이 녹아있지 아니하면

그 모든 아름다움과 영광은 썩어질
배설물과 같다고 경고하셨네.

주께서 말씀하셨죠,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으리(사48:11)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라 (요9: 24)

말 못하는 미물들도
시시각각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려
애쓰고 있건만

하물며 죄악 가운데서 불러냄을 입은 성도,

너는 나의 종이라 기름 부어 주시고

주인의 양떼를 먹이라고 세워주신
목자들이 세상과 타협하고 주인의 영광과

그 사랑 전하기를 잊은지 오래네

여기 오직 한 사람,
참 목자의
통곡과 절규,
눈물의 기도 소리가 들리지 아니 하는가?

목장이 존폐의 위기에
처했건만 여전히 자기
배만 생각하는 못된 목자들이여,

좋은 꼴 대신 독초를
먹이는 자들이여,
나팔 불기를 잊은채
잠자는  나팔수들이여,

이제 곧 석양은 넘어가고
서까래는 무너져 내리고
집터는 마구 흔들리리니
살륙의 칼이 네 문 앞에 이르렀도다.

오호라!
어그러진 길에서
비틀거리는 자들이여,
너무 늦기 전

어서 속히
돌이켜 구원의 주를 부르라. 그리하면 그가 일어나 너희를 도우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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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참 걱정입니다. 

선관위가 장악하여 주물럭거리는 정치판, 조작하고 표 쑤셔넣은 부정선거판.......

이런 식이라면 이번 4.10 총선도 결국 이재명당, 조국당이 국회, 아니 나라를 쥐고 흔들게 되고

윤석열 정부는 그대로 식물인간 상태가 되는 결과로 이어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나라가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김한길 목사님이 그렇게 철저한 좌파일 줄은.....

페이스북에서 이승만 박정희 비난, 김대중 찬양, 윤석열 비난, 5.18 광주 유공자 주장, 지만원 비난......

저와 극과 극..... 간격이 넓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반대편이었습니다. 

페이스북에서 조금씩 의견충돌이 일어나다가 그렇게 점점 다투다가 결국 결별하였습니다. 

저더러 5.18 광주사태를 제대로 이해한 다음 연락하라는군요.

 

마음이 아프네요.

그래도 주 안에서 믿음으로 연결된 인연이었는데......

 

"어느 사모의 기도" 낭송.... 

다윗의 시편 축소판 같네요. 

핸드폰으로는 댓글이 올라가지 않아 랩탑 컴퓨터로 다시 찾았습니다. 

Ung Lee, 저의 유튜브 채널은 5년 동안 하모니카 몇 곡 밖에 없네요. ㅎㅎ 

 

체력이 딸려 한 주일에 겨우 두어 번 지금까지 주로 밤시간에 운전을 했는데...

다행히 아직 눈도 괜찮고 야간시력도 별 문제가 없어서요.
그래도 밤시간은 아무래도 좀 위험하지요. 갑자기 보행자가 나타나기도 하고 사슴이 나타나기도 하고.....

특히 비오는 밤에는 시야가 좋지 않으니까 비오는 밤에는 아예 안 나갑니다.

그러다가 꽃피는 봄날이 되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 아름다운 낮시간을 두고 왜 굳이 밤운전을 하지? 

벌이가 좀 못 하더라도 이젠 낮시간에 운전을 해야겠다,...... 

내일부터는 아침에 나가기로 마음먹고 있습니다. ㅎㅎ

 

아, 갑자기 뜬금없이 갈라디아서를 다시 든 것은.....

사실은 얼마전부터 나이 좀 든(저 보다는 몇 살 아래지만) 부부 세 쌍으로부터 성경공부 인도요청을 받아서 

한 주일에 한 번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아내들이 빤질빤질한(?) 남편들을 좀 신앙교육시켜 달라고 해서........

 

그런데 성경공부 외에도 한 주일에 한 두 번 이메일로 말씀을 보내주고 있는데....

욥기도 보내고, 에스더서도 보내고.....

그러다가 문득 아, 옛날에 내가 빈교회당에서 집사람과 딸래미 앉혀놓고 설교했던 내용들을 다시 들춰보게 되었네요.

제가 아멘넷에 투고하고 사모님의 목양연가에 올라간 글들은 대부분 2011년 이후에 쓴 글들인데
사실 그 전에도 썼던 글들, 비교적 짧게 작성한 설교요약문들이 있거든요.

그걸 다시 끄집어내어 보는데 갈라디아서, 로마서, 열왕기 등이 있네요. 

그래서 한 편 한 편 다시 정리하면서 그 분들에게 이메일로 보내고 있습니다. 

우선 갈라디아서 강해를 11편 보낼 생각입니다. 

 

한 주일에 한 번 저녁시간에 그 분들 집을 찾아가 성경공부를 인도하는데....

돈 생기는 일도 아니고 체력 아꼈다가 우버운전하는 시간도 빼앗기고.....

그 분들이 우리 성도도 아니고, 내가 다시 목회할 것도 아니고........ 

이 분들이 다니는 교회도 있고 목사님도 있고 사역자도 있고 교회성경공부반도 있는데 내가 왜 이래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이 일도 하나님이 맡기신 것이라 생각하고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몇 년씩 할 것은 아니고

한 일년 정도라고 생각하고 이 남편들의 신앙을 세워주는 일에 순종하자 하고 하고 있습니다. 

이 남편들이 나이는 든데다 나름대로 듣고 배운 건 많아서 목들이 곧기도 해서 쉽지 않네요. ㅎ 

그런데 이 성경공부를 계기로 제가 과거에 썼던 글들을 다시 끄집어내고 있으니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으신 건지....

 

그리고 그 시절을 돌아보니 그 세월동안 성도도 별로 없고 빈 교회당 같은 곳에서 예배 드리고 말씀을 전했지만......

비록 교회개척도 목회도 성공하지 못 했지만

단 한 번도 설교준비를 허투루 한 적이 없었고, 

지금 다시 읽어보아도 제나름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 했다 싶으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에구, 모처럼 쓰다보니 무슨 넋두리를 한 것 같네요. 

 

사모님, 오늘도 좋은 날 되시기 바랍니다. 

 

대장쟁이 이 목사 

< 첫 열매, 주님의 신부>   
계시록: 14장 중에서


들어가면서:
어제도 평소대로 요한계시록을 읽기 위해 의자에 앉아

순차대로 14장을 읽는 순간 갑자기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나를 터치하셨다.

주신 말씀은 "사랑하는 나의 딸아, 내가 너에게 산을 넘게 하여도

너는 그 산을 넘었고 강을 건너게 하여도 그 강물 속에 뛰어드는구나. 그런
순종이 바로 첫 열매들이 가져야 하는 자세임을 전하여라."아멘.

이 말씀에서 내게 깨달음을 주신 것은
1. 휴거의 날이 임박하다.(날짜와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2. 신부가 되려면 신부수업을 받아야 한다

3. 첫 열매란 어떤 사람을 말씀하는가

내가 댓글로 올리기에는
좀 무거운 주제이나 주님께서 전하라 하시니 나는 순종할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들은 다 휴거 받기를 원하며,

모두 휴거된다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 믿고 있으나 실상 휴거될 사람은 첫 열매들,
그리스도의 신부들만 휴거 될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등에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처녀들처럼 남게 될 것이다.

1.번은 우리 모두 익히 알고 있기에 재론하지 않겠다.

2. 신부수업이란 주님의 보혈로 정결케 된 성도들 중에서

특별히 골라 뽑아 강한 훈련을 시키시고 그 훈련(고난, 질병, 환란과 역경)

이런 것을 너끈히 통과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부수업 받는 자의 자세와 마음가짐 그리고 목적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풀무불에,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같은

그런 어려운 때, 곧 시험이 다가 왔을 때 원망과 불평이 없었던 그들의 자세,

바로 그런 자세를 가지도록

주님께서는 원하시며 강하게 훈련시키시고
이런 환난을 잘 이기고 너끈히 통과케 하는 것이 신부수업의 목적이다.

3. 첫열매들이 휴거 된다. 교회시대가 점점 막을 내리기 시작하는 것은

접붙임 받은 이방인 교회가 끝나가고 원가지인 유대인들을 구

원하실 때가 가까워 오고 있다는 증거다.

인생의 여정 길은 늘 평탄한 곳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때로 험준한 굴곡의 길, 눈물의 길, 가시밭 길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다.

가는 길에, 바싹 메마른 광야를 만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철통같은 여리고 성이 앞을 가로막는 것 같이 답답할 때도 있고,

때로는 넘실거리는 홍해가 앞을 가로 막는 것같은 위기의식을 느낄 때도 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편안하다 안전하다 가르치는 자들은

모두 거짓 교사들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복 받고 잘 살자고

꼬드기는 번영신학에 물든 거짓 교사들을 삼가해야 한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 앞서 간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다

불 시험, 물 시험, 사자 굴같은 어려움을 만났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믿음으로 이기고 승리한 사람들이다.

성도라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달게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수 많은 순교자들의 흘린 피로 다져진 터 위에서

신앙생활의 바톤을 이어 받아 뛰고 있는 마지막 세대, 마지막 주자들이다.

우리는 아직 안전한 포구에 이른 것이 아니다.

여전히 거듭되는 난제에 난제를 만나서 끙끙거리기도 하고,

심한 태풍을 거스르며 나아가야 한다. 자신의 눈동자처럼 사랑하며 아끼시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것을 통과 잘 하는 자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첫 열매, 주님의 신부가 될 것이다.

글: 루디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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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아멘 아멘.

시편 1편은 성경 이전에

나에게 무척 아름다운 추억이 담겨있는 시이자
작은 소녀에게 별처럼 반짝이는 꿈을 심어준 시였지요.

눈이 동그랗고
유난히 가녀린 소녀가
이 시를 사랑한 것은
복이란 매력적인 단어
때문일 수도...

복이란 세상 복,
뭔가 많이 가질 수 있는 오색찬란한

무지개 같은 것...

하여 달달 외워서
그해 성탄절 이브에
주일 학교 성경암송대회에 출전,

특등상을 획득(?)하여
친구들과 언니 오빠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었죠.

그러나 자라서 다시 읽어보니

세상 복과 정반대인 하늘나라
복인 것을...

복, 히브리어 "바라크" 그 뜻은 무릎을 꿇는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그 모습이 참된 의미의 "바라크"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자가 곧 교만의 극치 오만한 자...
이런 자와 함께하는
자는 참 성도, "바라크"가 될 수 없다는 진리...

그런 세상적인 복을 추구하는 자들은
생명 시냇가에 심기워진 나무 생명의 과실(영혼)을
결코 맺을 수 없다는...

이런 영적 의미가 담긴 시 중의
시를 세상 유명 작가가 작곡할
수도 없고

또 작곡한다고 하여도
그 노래가
어찌 사람의 영혼을 깊이 터치(touch)할 수 있을까
여기 성령님께서 친히 테힐라 강도사님에게 기름부어 주셔서
큰 울림이 있는 찬양, 호소력이 있는 영혼의 노래로

봄 햇살처럼 부드럽고 따스한 성령의 바람이
우리 영혼을 휘감으면서 깊이 파고 드는 힘

메말랐던 나의
영혼이 촉촉해지는 단비
주님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는 은혜의 찬양으로 탄생시키신

우리들의 작곡가 테힐라 강도사님, 감사해요.

주님께서 영광받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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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없는 화사한 꽃

         루디아/최송연

 

화사한 꽃은 있으나
그 속에 향기가 없고

잎사귀는 무성하고
푸르른데
열매가 한 톨도 없다면

그 꽃이
그 나무가 어찌 심은 자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겠는가

꽃의 사명은
피곤한 영혼에게
사랑의 향기를 전하는 것

열매의 가치는
땀흘려 수고한 농부에게
기쁨을 안겨 주는 것

죄많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 예수님을
믿어 구원함을 받은 성도의 사명은

그분의 원하시는 뜻을
깨달아 아는 것

그분의 뜻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그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 또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 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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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1:6-9)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갈라디아서는 영어로 Galatians, 곧 ‘갈라디아인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갈라디아는 에베소나 고린도, 빌립보처럼 도시 이름이 아니고 지금의 터키 수도 앙카라 동쪽의 넓은 나타톨리아 고원지역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고니온, 비시디아, 루스드라 등이 갈라디아 남부지역에의 속하는 도시들입니다. 

 

종이가 없던 그 시대에 편지들은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기록되었고 수신자들은 돌려가면서 읽고 또 편지를 여럿 베껴 써서 여러 사람이 읽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복음서나 서신서들은 사본이 많지 않은 구약성경과 달리 많은 사본들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당시 서신서들은 일종의 형식이 있어서 서두에 발신자와 수신자를 명시하여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보내는 것인지를 적고 인사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단히 쓴다면 “바울과 형제들이 갈라디아의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축복하노라.”인데, ‘사람이 세우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세우신 사도’라고 발신자 바울이 누구인가를 설명하고 또 ‘자신을 드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은 축복을 하노라’고 인사말을 적고 있습니다. 이렇게 길게 적은 서두를 통하여 사도바울은 이미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드리신 것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 곧 복음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들어가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원문을 보면 “나는 경악했다.”라는 강한 표현입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빨리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 곧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복음을 좇아가느냐고 기겁하여서 질책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 그것은 다른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혼란시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려는 것이다. 설사 우리라 할지라도,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니라.” 복음을 듣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그리스도를 영접했던 사람들이 어째서 그렇게 빨리 복음을 버리고 엉뚱한 이단, 사이비로 기울어지고 따라가는 것인지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힌다고 강렬한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온갖 이단과 사이비가 들끓는 것은 오늘날 뿐 아니라 복음이 막 전해진 그 당시에도 그랬던 것입니다.사람들은 왜 그렇게도 쉽게 복음을 버리고 다른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좇아가는 것일까요? 인간이란 그토록 어리석고 악한 존재입니다. 원수들은 복음 위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가라지는 인간의 악한 심성의 바탕에 뿌리를 내리고 창궐합니다. 주님께서도 씨 뿌리는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가라지 비유를 통하여 가라지들이 추수(심판) 때까지 함께 자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바탕이 악한 인간들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싫어하였고 날마다 내리는 만나를 ‘박한 식물’이라고 싫어했습니다. 애굽의 가마 곁에서 먹던 마늘과 부추, 수박과 외, 생선과 고기를 그리워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루하고 단조롭게 여기고 자기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쾌락을 추구하고 자극적인 것을 좇아가고 색다른 것을 찾는 악한 인간심성이 가라지, 이단을 자라게 하는 토양이 되는 것입니다.오늘날 교회들도 그렇습니다. 예배마저 인간을 즐겁게 만들기 위한 것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A. W. Tozer 목사님(1897-1963)은 일찍이 그의 저서 ‘예배인가, 쇼인가.’를 통하여 교회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자신들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하고 마음을 즐겁게 하는 쇼 같은 예배를 하고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듣기에 달콤하고 즐거운 말, 보기에 멋있고 화려한 것, 무엇인가 더욱 색다르고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들을 찾아 유행을 찾듯 찾아 헤매는 악한 세대의 악한 취향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라지로 뒤덮이게 하는지도 모릅니다.우리는 사도바울이 로마의 차디찬 감옥에서 쇠사슬에 매인 채 죽음을 앞두고 쓴 디모데후서에서 토해낸 경고의 말씀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3-8).” 이 싸움은 믿는 자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싸움일 것입니다.믿음의 싸움에서 승리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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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테힐라 에클레시아
290 회를 축하합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우리의 군주,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곳을 눈동자로 보살피시고
지켜 주셨음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곳에서
당신의 사랑을 노래하고

당신의 그 아픔,
모든 죄인을 위해
고통당하신 십자가를 전하고

그 나라에 가는 길,
생명의 길,
바른 길을 전하게
하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주께서
이곳을 주님의 눈동자로 보살피심은 여기 모인
군사들은 말세를 살아가는 수많은 성도들 중에 골라 뽑아서

앞으로 다가올 대재앙, 영적전투장에서
주님 편에 서서 영적싸움을 싸울 수 있는 강한 군사들,
용맹있는 정예군으로 훈련시켜 다가오는 주님의 나라에서
큰 상급을 주기 위하심인 것을 믿습니다.
 
하오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소욕을 위해 주님께 나아와
구하고 그 뜻이, 자신의 뜻대로,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이루어지지 않자 낙심하고 떠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테힐라 강도사님은
사람을 바라보거나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믿음
위에, 말씀 위에
굳건히 서서 앞으로 앞으로,
진군에 진군을 거듭하도록 종용하며
우리를 주님의 길로 잘 이끌어 나가시니...

주님,
영광을 받으시고 그가 피곤치 않도록
힘을 주시고  외롭지 않도록
위로해 주시옵소서.

아니,  이미 힘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 아들아  너는 아느냐..."
성령의 음성을 들려주셨기에

오늘까지
단 한 번의 펑크를 내지 않고 잘 달려오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아버지여,
우리의 남은 생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생명의 불꽃이 다 타서 사그러지는 그날까지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을 있는 자리에서 잘 감당하다가

우리 모두 주 앞에 서는 그날 "잘 했다. 작은 일에 충성했으매
내가 큰 것으로 네게 맡기리라." 하시는
주님의 칭찬과 함께 빛나는 면류관을 받아 쓸 수 있도록

저와 우리 군사님들을 끝까지 지켜 보호하시고
함께 해주실 줄 믿으며 그리하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글: 루디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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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오늘은 화면에 띄워놓은 중보기도를 순서에 따라서 함께 간절하게 주님 앞에 기도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특별히 이 나라와 민족, 대한민국을 위해서 좀 심각하게 생각하시고 간절하게 기도를 올려드리기 원합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너무나 이념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남과 북으로, 동서가 갈라져 있는 이런 어려운 때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우리나라가 이념으로 인해서 갈등이 심합니다. 역사 이래로 지금 대한민국이 이념의 갈등으로 인해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이 분명히 알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는 그러한 자유민주의 그 토양 위에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린 대한민국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념을 우리 아버지 하나님 위에 올려놓고 하나님 아버지 보다도 더 이념에 치우쳐서 우리가 살아간다면 그것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생각이나 철학이 아닙니다. 이념 위에 올라계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이념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그러한 세력들과 연합하고 그 세력을 묵인하고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성경적인 사고관이 아닙니다. 

공산당과 하나님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사회주의와 하나님과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고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 나라의 리더쉽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서 그 나라가 얼마나 축복되고 아니면 멸망의 길로 가느냐, 그 주변국가까지도 힘들게 하는 것이, 지도자 한 사람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지 않습니까? 히틀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도 무수한 인명이 살상이 되고 얼마나 큰 끔찍한 고통 가운데 인구가 전쟁으로 인한 고통가운데 있는 것을 지금 우리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만큼 지도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지도자들을 위해서, 정치인들, 국회의원들을 위해서 정말 간절하게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가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가 영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하여서 영적인 지각을 가지고 주님 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지금 우리나라가 얼마나 이념으로 병들어 있고 사회 전반적으로 곳곳에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자들이 사법부를,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지 방송언론을 보십시오. 얼마나 좌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까? 여러분, 이것을 정말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이 한 시간 정말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간절히 이 테힐라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말쑴: 테힐라 강도사님
정리: 루디아/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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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로마서 8:32 =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이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면 도대체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란 말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시려고 하나님의 후사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셨다면 도대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후사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찢어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 살을, 그 피를, 그 생명을, 그 후사됨을 모두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우주만유의 창조주요 주관자의 후사가 그 후사됨도 찢어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믿는 우리 속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 생명이, 그 후사됨이 우리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믿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후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질없는 이 세상 부귀영화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우리가 이 세상 떠날 때 하나도 가져갈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떠날 때, 관 두껑이 닫힐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마음에 들어와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살과 피 한 방울, 겨자씨보다 작은 믿음 하나뿐입니다. 그 믿음 하나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게 될 것입니다. 그 작은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후사됨입니다.

 

그 작은 믿음, 그 작은 후사됨 한 조각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아십니까? 구원 받은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우주만유를 다스리는 후사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우리가 나타나기를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8:18-22)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예수 믿어서 그저 죽어서 좋은 곳에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만 우리의 영혼을 좋은 곳으로 데려 가시는 영적세계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적세계 뿐 아니라 동시에 우주만유를 지으신 물적세계의 하나님이십니다. 저 하늘을 보십시오, 끝 간 데 없이 광활한 우주를 보십시오. 은하계 안에만 태양과 같은 항성들이 천억 개가 넘습니다. 우주에는 은하계 같은 성운들이 2천억 개가 넘습니다. 수백억 광년 우주공간에 끝없이 펼쳐진 별들의 수는 지구상의 모든 해변, 모든 사막의 모래 알갱이 보다 훨씬 많다고 합니다. 능력 무한하신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의 끝없는 세계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 후사들에게 얼마나 놀라운 선물을, 상속을 준비하고 계신지, 하나님의 후사가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상상이나 해보셨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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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 밤
          루디아/최송연 
 
별들이 빛을 잃고
달도 그 얼굴을
가리워야만 했었네 
 
독생하신 하나님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그분의 마지막 밤
 
새들마저 모두 
캄캄한 어둠 속으로
숨어버린 밤
 
고귀하신 얼굴
피가 땀방울 되어
흘러내리며 아버지의
낯을 구하신 밤
 
아버지의 심장은
더 붉은 피로 얼룩져
가고 

 

차라리 
내가 대신 마신다면 
내 마음이 이토록 
아리지 않으리라
 
 
구속 주
그 분께서는
불쌍한 영혼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셨나
 
어찌하여
그 흉폭한 자들에게
존귀하신 몸을 내어
주셔서 그토록
갈기갈기 찣기셨나
 
그날 그 밤의 기도
피땀으로 지새운 눈물이 없었더라면
 
나 대신 
그 모진 십자가의 형벌을 
받지 않아도 되셨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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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속죄제사>

 

오랜 세월 드려오던 짐승제사는 예수님의 단 한 번의 제사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 단 한 번의 제사는 당시 세계최대, 최강의 로마제국이 통치하던 세계의 중심 예루살렘에서 백주에 벌어진 참혹한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는 순 엉터리로 드려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었을 때는 소나 양을 사서, 가난한 백성인 경우는 비둘기라도 구해서, 제사장에게 가지고 와 속죄 제사를 드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이 희생제물을 끌고 오면 먼저 제물을 검사합니다. 병이 들었거나 눈이 멀었거나 비루먹었거나 다리를 절거나 흠이 있는 짐승은 불합격입니다. 짐승이 검사에서 통과하면 제사장은 그 백성에게 죄를 자백하게 하고 짐승에게 안수하여 그 백성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한 다음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립니다. 죄를 범한 백성대신 애꿎은 짐승이 죽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가룟유다에게 은 삼십을 주고 예수 희생양을 샀습니다.

가야바 대제사장 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가야바 대제사장은 예수가 합당한 제물인가 검사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하자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너희가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하고는 안수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데 이 보다 더 훌륭한 제물이 어디 있고 무슨 검사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안수를 아주 고약스럽게 합니다.

손을 머리에 얹고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는 대신 주먹과 손바닥으로 뺨을 치고 침을 뱉고 온갖 거짓고소와 욕설과 모욕을 퍼붓습니다. 참으로 못돼 먹은 안수입니다.

밤새도록 그렇게 예수님에게 악독하게 안수를 한 다음 빌라도에게로 끌고 옵니다.

 

이번에는 로마총독 빌라도가 온 인류를 대표해서 제사장 역할을 합니다.

온 인류를 속죄할 제물에 흠과 티가 있나 없나 검사합니다. 이것저것 물어봅니다.

유대인의 왕이냐 물어보고 네 나라가 어디 있느냐 물어보고 진리가 뭐냐고 물어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사람은 죽일 죄가 없다.”고 예수 제물에 합격판정을 내립니다.

아무 흠도 점도 없고 죄도 없는 완벽한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바라바와 예수를 세워놓고 묻습니다. “누구를 놓아줄까?”

유대인들은 소리칩니다. “바라바를 놓아주시오.”

“그럼 예수는 어떻게 하랴?”

“십자가에 달아 죽이시오.”

제물이 될 염소 두 마리 중 하나는 아사셀 속죄염소로 광야로 보내고 하나는 희생제물로 잡는데 여기에서는 바라바가 아사셀 염소가 되고 예수님은 희생제물이 됩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줄 요량으로 옷을 벗기고 잔혹한 채찍질을 하게 하는데 그 채찍은 끝에 작은 금속 갈고리를 달아 단 한 번의 채찍질에도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이 잔혹한 채찍질은 제사장이 희생제물을 잡아 가죽을 벗기고 칼질을 해 각을 뜨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대야에 물을 담아오게 하여 손을 씻습니다.

성막과 성소에는 번제단이 있고 그 다음에 물을 담아놓은 물두멍이 있지요.

제사장이 거기에다 손을 씻는 것과 똑 같습니다.

빌라도가 멋모르고 하는 짓이 완전히 제사장 짓입니다.

 

 

그런 다음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은 끌고 가서 홍포를 입히고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갈대를 오른손에 쥐어주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조롱을 하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는 엉터리 대관식을 치러줍니다.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때리며 못 된 축하연까지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승리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만물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보좌 우편에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세우실 것인데 로마군병들이 멋도 모르고 대관식을 하고 축하연을 하는 셈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워 골고다 언덕 제단으로 끌고 갑니다.

이삭이 번제에 쓸 나뭇짐을 지고 모리아산을 오른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그 언덕을 오릅니다.

아브라함은 나무를 쌓고 그 위에 이삭을 올렸는데 그들은 십자가를 세우고 예수님을 못으로 박아 매달았습니다.

불을 피우는 대신 뜨거운 태양 아래 놔두었습니다.

그렇게 속죄제사를 드립니다. 아주 못되고 악독한 제사입니다.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경건은커녕 조롱하고 조소하면서 구경하였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고 욕을 했습니다.

십자가 나무 위에서 예수님은 고통으로 불태워졌고 그 연기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처절한 부르짖음으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숨을 거두자 로마군병은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제물은 미리 죽인 다음 태워야 하는데 태운 다음 죽인 것입니다.

그 참혹한 고통을 다 당하도록 말입니다.

 

 

참으로 못돼 먹고 참으로 악한 제사였습니다. 참으로 못돼 먹은 백성들, 참으로 악한 군사들이었습니다. 제사장도 엉터리요 아사셀 염소도 엉터리요 제사의 순서나 방법도 엉터리, 모조리 엉터리였습니다. 도대체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개판 제사였습니다. 참으로 악하고 참혹한 엉터리 속죄제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엉터리 제사를 받으시고 모든 죄인들,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제사는 순 엉터리였지만 그 제물이 완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흠 없고 완전한 제물을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을 수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 엎드리십시오. 그 제사를 받으신 이상 누구든지 엎드려 그 속죄제사에 참여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용서해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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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방언 통변 은사

                  루디아/최송연

 

 

여호와를 찬양하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라

모든 만물아 다 일어나라
손뼉을 치며 그분을 찬양하라

그는 구원자이시며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사랑이 아니냐

내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입었음을
찬양하라

하늘의 천군아 천사들아
모두 일어나
그분의 거룩함을 경배하라

그분은 다시 오실 왕
온 세상을 다스리실
임금이시라

이제 네 눈에서 눈물을 
제하리라 슬픔도 이별도
죽음도 모두 너를 괴롭게 할 수 없으리라 

찬양하라 내 영혼아
그분의 아름다움을
영원 영원히


*
저는 방언통변의 은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방언통변인지 저는 모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테힐라 강도사님의
이 방언찬양을 듣는데

갑자기
눈물이 비오듯...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내 영혼에
떠오르는 대로 받아서
적어본 것입니다.

주님께서 영광받으시기를...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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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닮기를
         루디아/최송연
 
 
"예수님 닮기를, 예수님 보기를,
내 평생 소원 예수님 닮기를...
완전하신 나의 예수님."
아멘 아멘!

가녀린 빗줄기 속에
살포시 돋아난 푸른 새싹이 생명의 젖줄,
화사한 햇살을 바라고
소망하듯...

동구밖 바위에 걸터 앉아 장에 가신 엄마 돌아오길
눈이 빠져라 먼 곳을 바라보는
소녀의 그렁그렁 눈물맺힌 눈망울인 듯...

그리운 임을 기다리는 마음이 너무 절절하게
담겨진 가사

그렇죠.
사랑하면 닮고 싶고
사랑하면 보고 싶고
사랑하면 그리웁고

우리 예수님을 향한
테힐라 강도사님의
그 애절한 사랑노래

하늘향기 되어
예수님의 보좌 앞에
즉각 상달될 것같군요

저 또한 예수님을 닮고
싶고, 보고 싶고, 그리워
그리워 먼 하늘을 바라보게 만드는
영감으로 가득찬 곡

그리운 임이시여
언제나 뵈올 수 있을까요.

한 해 두 해
세월은 흘러가지만 주님 향한
우리 마음은 날로날로
더 뜨거워지고 있음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찬송시가 강도사님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성령님이 걸맞은 곡을 허락하셨네요.

it's so sweet.
달콤하기 그지없습니다.
할렐루야!
주님 영광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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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양식 아래

루디아/최송연

할렐루야!
오늘 강도사님의 입술을 통해 성령님께서 주신 말씀은
꿀송이처럼 달고 내 영혼에 비수처럼 깊이 박히고...

그래요.
나 자신부터 먼저 점검해야 하는데
늘 남의 부족함을 바라보고

알량한 지식으로
선생이 되어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다른 이를 가르치려고
하는 교만...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내가 의로운 자 되어 남의
부족함을 판단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정죄마저도 서슴치 않는
이 악한 생각은 어디로부터일까요?

망각증 때문일까요. 아니면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나의 자아 때문일까요.

내 이웃
내 형제. 자매들이 짓는 죄보다 더 흉악한
나의 모든 죄가 용서함 받았음을 잊어버리는 것

우리 주 예수님을 그 모진 형틀
십자가에 대못을 박은 자는 다른 이가 아닌
바로 나라는 것도...

오 주님,
당신의 십자가 그 참혹한 고통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나의 감추어진 죄
영원한 형벌을 면치 못할
나의 수많은 죄 때문이었음을...

다시금 깨닫는 귀한
말씀을 살리는 방망이로
사용하여 주셔서

뼛속 깊이 파고 들고 관절을
찔러쪼개는 능력이 나타나게
하신 성령님의
은총을 감사드리고
회개합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을
구하오니 다른 이가 아닌, 나,
이 교만한 죄인을 당신의 마음을 닮은
순결한 영혼으로 빚어 새롭게 새롭게 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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