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첸-속죄의 필요성을 부인하면 진정한 도덕적 질서의 존재도 부인하게 된다

개혁주의 자료 2015. 3. 3. 10:08

기독교의 십자가 교리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소외된모습으로 그려지고, 값이 지불되기를 냉정하게 기다렸다가 사람에게 구원을 제공하는 것으로 그려진다면, 이 얼마나 저급한 신관인가, 하고 현대 자유의자들을 외친다.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원하는 것보다 더 기꺼이 우리의 죄를 용서한다고 그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화해는 순전히 우리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렸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택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우리를 받아들일 것이다.

 

이 반론은 물론 죄에 대한 자유주의의 견해에 근거해 있다. 만약 자유주의 교회가 가정하는 것처럼 죄가 사소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율법의 저주도 가볍게 간주될 것이며, 하나님은 지난 일은 지난 일로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지난 일은 지난 일이라고 처리하는 것은 듣기에는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는 세상에서 가장 무정한 일이다. 같은 인간에게 범해진 죄의 경우에도 이런 식으로 처리되지는 않는다.

 

모든 죄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죄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나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의 부르짖음이다. 낭비되어 버린 삶의 돌이킬 수 없는 죄책을 누가 측량할 수 있는가? 하지만 그런 죄책을 위해서까지,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는 샘을 제공했다. 하나님은 마치 옷을 입히듯이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입혔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심판의 보좌 앞에 흠 없이 선다.

 

속죄의 필요성을 부인한다면 진정한 도덕적 질서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이런 사실을 감히 부인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예수의 제자로 간주할 수 있는지 이상하다. 예수의 생애에 대해 기록한 분명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예수가 하나님의 공의를 그분의 사랑과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지만 오직 사랑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예수는 무서운 말로, 이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 말했다. 그는 보응적 정의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 분명하다. 예수가 오늘날처럼 죄에 대한 가벼운 견해를 받아들였으리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현대 자유주의 교사들은 소외된혹은 분노한하나님이라는 교리는 끔찍하다고 말한다. 이 반론에 대해서는 신약성경을 지적하면서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진노와 예수 자신의 분노에 대해 분명히 말한다. 또한 예수의 모든 교훈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전제한다. 그렇다면 예수의 교훈과 모범에서 이렇게도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자신들을 예수의 참된 제자로 간주할 수 있는가? 진상은 이렇다. 하나님의 진노라는 교훈을 거부하는 현대인들의 태도는 죄를 가볍게 생각하는 견해에서 나왔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전체 신약성경의 교훈, 그리고 예수 자신의 교훈과 완전히 어긋난다. 사람이 일단 죄에 대한 유죄 선고를 진정으로 받았다면, 그는 십자가 교리를 받아들이는 데 별로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실상을 말하자면, 속죄 교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이 속죄 교리를 반대하는 것은, 교리 그 자체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오해 때문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대해 말할 때에는, 언제나 그것이 마치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드린 제물인 것처럼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죄값이 지불될 때까지 냉정하게 기다리다가 지불된 후에야 죄를 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자유주의자들의 반대는 기독교의 십자가 교리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근본적 요소를 무시하는 것이다. 바로 죄를 위한 희생제물을 드린 이는 하나님 자신이지,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본성을 취하고 십자가에서 죽은 아들의 위격 속에서 하나님 자신이, 그리고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 준 아버지의 위격 속에서 하나님 자신이 그 제물을 드린 것이다. 구원은 우리가 숨을 쉬는 공기처럼 아무 값없이 우리를 위하여 주어진다. 엄청난 값은 하나님이 지불하고 그 유익은 우리가 얻는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런 사랑은 현대의 설교 속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느긋함과는 매우 다르다. 이 사랑은 값을 따지지 않는 사랑이다. 이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다

 

이 사랑, 오직 이 사랑만이 사람에게 참된 기쁨을 가져다준다. 실로 오늘날 자유주의 교회도 기쁨을 찾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된 방법으로 찾고 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어떻게 하면 기쁨이 될 수 있는가? 당연히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하나님의 속성, 곧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함으로써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하나님을 우울한 독재자나 엄격하고 의로운 재판관으로 간주하지 말고, 오직 사랑이 많은 아버지로만 간주하자고 권한다. 옛 신학의 공포여, 사라져라!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신을 경배하자! 이것이 그들의 이야기다.

 

종교가 기쁨을 위한 길이라는 이 제안에 대해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첫째, 그것이 효과가 있는가? 둘째, 그것은 참된가? 그것이 효과가 있을까? 당연히 효과가 있어야 할 것이다. 자기 자녀에게 영원한 고통을 가는 일이 결코 없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자 사랑의 아버지가 우주의 통치자인데 누가 행복하지 않겠는가? 만약 모든 죄가 반드시 사해질 것이라면 후회의 아픔이 있겠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감사하지 않는다. 현대의 설교자가 자기의 역할을 아주 열심히 행한 후에도- 즉 하나님에 대한 관념에서 불쾌한 모든 요소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대해 그에 어울리는 유창한 언어로 경축한 후에도- 회중은 어쩐지 옛날의 그 기쁨의 열광 속으로 들어가기를 지속적으로 거부한다. 진상을 말하자면, 현재 설교 속의 하나님은 매우 선할지는 모르지만,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 신이다. 누구에게나 듣기 좋은 유머만큼 무미건조한 것도 없다. 그렇게 희생을 치르지 않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만약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든지 하나님이 필연적으로 용서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신경 쓸 것이 무엇인가? 그런 하나님은 우리를 지옥의 두려움에서 건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천국은, 만약 그런 천국이 존재한다면, 죄로 가득할 것이다.

 

사람을 격려하기 위한 오늘날의 신의 개념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또 다른 반대는, 그것이 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오직 사랑과 친절 뿐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자연을 통해? 인간의 통해?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도 분명 아니다. 당신이 우울하다고 거부하려는 그 신의 개념을 이전 신학자들은 성경으로부터 이끌어 내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주 너의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예수가 당신의 근거인가? 이것은 더 좋지 않은 주장이다. 저 바깥 어두운 곳과 영원히 타는 불,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말한 분이 바로 예수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당신의 위로를 주는 신의 개념을 위해 오늘날 당신에게 직접 내려진 계시에 호소하겠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 이외의 다른 누구도 설득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밝은 면만을 보는 방식으로는 종교가 기쁨이 되지 못한다. 한편으로 치우친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며, 우리 영혼의 갈망을 채워 줄 수 있는 분은 진짜 하나님뿐이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기쁨을 찾으려는 노력은 재앙으로 끝나고 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불가침의 신비 속에 둘러싸여, 두려운 공의 속에 존재한다. 사람은 세상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로 자신의 형편을 최대로 활용하며 감옥을 싸구려 금장식으로 치장하려고 노력한다. 하나님은 죄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기쁨의 여지는 없고 오직 심판과 불같은 분노를 두려운 마음으로 예상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하나님은 현대 설교에 등장하는 위로하는 하나님보다 적어도 한 가지는 나은 점이 있다. 그는 살아 계시고, 통치하시며, 자신의 창조나 자신의 피조물에게 얽매이지 않으며, 기이한 일들을 행할 수 있다. 그 하나님은 원하기만 하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우리를 구원하셨다. 복음은 이 메시지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던 것이었다. 구원의 방법이 그러하리라는 것은 더욱 아무도 몰랐다. 그 탄생, 그 생애, 그 죽음, 왜 그것이 그런 방법으로 그때 거기서 이루어졌는가? 그것은 너무나 지역적이고, 너무나 특정적이며, 너무나 비철학적이고, 기대할 수 있었던 것과 너무나 달랐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 자신의 구원 방법이 더 낫지 않은가?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왕하5:12)

 

그러나 만약 그것이 참되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래서, 가장 크신 자가 가장 사랑이 많기도 하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 준 바 되었고, 모든 시대의 철학자들이 추구하던 세상으로부터의 해방이 이제 모든 사람에게 거저 주어졌고, 현자와 지자에게 감춰졌던 것이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났으며, 오랫동안 갈망했지만 성취될 수 없었던 죄의 정복이 신비한 은혜에 의해 이루어졌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곧 거룩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마침내 이루어졌다!

 

참으로 이것, 오직 이것만이 기쁨이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움에 가까이 있는 기쁨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우리 자신이 만든 하나님, 오직 사랑뿐이고, 오직 아버지 외에 다른 분이 아니며, 우리 자신의 공로를 가지고 두려움 없이 그 앞에 설 수 있는 하나님과 함께 있다면 우리는 더 안전하지 않을까? 이런 하나님과 함께 있고자 하는 사람은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죄가 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여호와를 보고자 한다. 절망하고, 소망하고, 떨며, 반신반의하고, 모든 것을 예수에게 의탁하면서,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감히 나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임재 앞에서 산다.

 

- 그레샴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185-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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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청 교 도 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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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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