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백교[白白敎] (1923~1937)
이단경계 2014. 6. 11. 04:13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Die Religion ist das Opium des Volkes."
칼 마르크스가 남긴 말이다.
실제로 사람은 온갖 동물들 가운데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물이지만
생존이 고되고 어려워지는 극한의 상황에 몰리게 되는 순간에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의지하고자하는 본능적인 욕구가 내재하고 있다.
사이비 종교는 바로 그러한 인간의 감정적 틈을 비집고
숙주의 고뇌와 의지를 양분으로 삼아 기생하는 악질범죄다.
특히 우리 민중의 삶에의 고통이 극한에 다다랐던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의 가혹한 횡포 아래에서 집단 범죄의 싹이 트이기 시작했다.
<백백교가 실제 기도를 했던 제단>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역사의 흐름을 크게 뒤바꾸어버린 동학의 교세는
전봉준이 체포되고 난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전국팔도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먼 친척이었던 전정운(전정예라고도 한다)은 평안남도 영변군 근산면 화현동에 거주하던
가난한 농사꾼이었으나 동학의 영향으로 1900년, 교세 확장을 목적으로 한 사교집단을 구성하는데
이것이 백도교(白道敎)로서 백백교의 전신이다.
전정운은 1904년 6월, 천재지변이 일어나 전 인류가 멸망하지만
'백백교를 믿으면 동해바다에 새로 생길 신선의 땅으로 피난하여 불로장생하게 된다'는 말로
신도를 끌어모아 부를 축적했다.
또한 60 여명의 첩을 신도들로부터 빼앗아 문란한 생활을 즐겼는데,
이 와중에 기도의 명목으로 4명의 첩과 신도 최씨일가 8명등
많은 신도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이는 순전히 전정운 본인의 기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사람을 예사로 죽이고는 '천지의 뜻이다' 라는 말로 넘겨버리기 일쑤였다.
1919년, 전정운은 51세의 나이로 가평군 화악산 기슭에서 병사하였고
이 백도교의 교리를 기반으로 하여 전정운의 수제자 우광현(禹光鉉)과 아들인 전용해(全龍海)는
1923년, 백백교를 창시한다.
<영화 '백백교'에서 묘사된 전용해>
백백교의 교리는 다음과 같았다.
"백백백의의의적적적감응감감응하시옵숭성(白白白衣衣衣赤赤赤感應感感應하시옵崇誠)"
위의 주문만 외우면 무병장수 하고, 곧 머지않아 종말의 날이 와서
서양과 동양은 각각 불과 물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되며,
이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백백교가 마련한 본소에서 생활하다
물의 심판 날에 금강산의 피수궁(避水宮)으로 옮겨가 교주인 전용해가 하여금
신도들을 각자가 원하는 천국으로 인도하여준다는 것이었다.
시대가 시대였던 까닭에 백백교의 교세는 급격하게 확산되었고
백백교는 홍보를 위해 폐광이 된 금광에 금을 숨긴 다음에
전용해의 힘으로 금광이 다시 터졌다는 식으로 사람을 모았다. (이는 '홍경래의 난' 때에도 사용되었던 수법이다)
교주 전용해는 본래 학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으나
타고난 용안으로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었고
전용해는 교세를 이용하여 총참모격인 이경득과 문봉조 등 간부들을 각도에 보내
예쁜 딸을 가진 부모들을 골라서 백백교에 입교시킨 뒤 딸을 시녀로 바치게하여 강간했다.
이러한 경로로 얻게된 첩들은 전용해가 일러 판단하기에 많다 싶으면
곧 살해당하였고 암매장 되었다.
이러한 과정으로 전용해에게 누이동생 유전정이 강간당한 것에 분노한 약사 유곤용은
1937년, 백백교를 무너뜨릴 작정으로 입교하여 교주 전용해를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우여곡절끝에 전용해를 직접 조우하게 된 유곤용은 전용해와 다툼을 벌인다.
조부와 부친처럼 속히 재산을 바치라는 말이었다. 유곤용은 긴장한 어조로 완곡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그것도 대단히 좋은 말씀이나 사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지금 당장 올라오기는 어렵습니다.”
‘신의 아들’ 대원님의 말씀을 감히 거부하는 것은 백백교 교단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용해는 격분한 어조로 다그쳤다.
“그럼, 내 명령을 복종하지 않겠다는 말이지?”
그리고 옆에 앉은 유정전을 보고 또 한 번 소리쳤다.
“네 오라비 잘났다.”
일격을 당한 유곤용은 그제서야 본심을 드러냈다.
지난 일주일간 그가 보인 행동은 교주 전용해를 만나 백백교의 악행을 따지기 위한 연극일 뿐이었다.
유곤용은 “백백교의 교리가 도대체 무엇이냐? 그런 얼치기 종교가 어디 있느냐”며 욕질을 했다.
세상에 나서 그런 욕설을 처음 듣는 전용해는 흥분한 나머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나이프’를 빼어들고 유곤용을 찌르려고 덤벼들었다.
이 순간이 그에게는 천려(千慮)의 일실(一失)이었으니 흉악무도한 그들의 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단서가 될 줄이야
악의 천재인 그도 예상치는 못하였을 것이다.
안방에서 소란이 일어나자 대청마루에서 추위에 떨며 기다리고 있던 전용해의 수하들이 교주의 신변 보호를 위해 방문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유곤용의 힘은 의외로 강했다. 쇄도하는 수하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전용해의 멱살을 잡아 넘어뜨렸다.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음을 직감한 전용해는 죽을 힘을 다해 그의 손을 벗어나 도망쳤다. 수하들도 각자 살길을 찾아 도주했다.
유곤용은 위험을 직감했다. 백백교 교도들이 떼지어 몰려올 것이 분명했다.
그는 동대문서 왕십리주재소에 달려가 사정을 말하고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백백교 사건의 정체', ‘조광’ 1937년 6월호 中>
전용해는 도주하였고 유곤용은 그 즉시 경찰을 불러 서울 중구 위치에 있던 전용해의 집을 수색했다.
교주 전용해 본인은 도주하고 이미 없었으나, 백백교의 참모인 이경득 등을 체포하는데 성공하였고
이것이 백백교의 악랄한 범죄가 수면으로 드러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백백교는 신도들의 땅과 재산을 기부 명목으로 빼앗고
여성들을 무차별 강간하였으며 교단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이용한 뒤에는 살해하여
아무도 모르게 야산에 매장하여 왔었다.
때문에 범죄의 질이 너무 흉악하다고 판단했던 당시 경찰은 보도를 전면 금지하였고
수사를 시작하였는데 그 경위는 너무나 참혹하였다.
당시 백백교의 아지트는 전국에 걸쳐 퍼져있었고
경찰은 양평, 연천, 사리원, 세포, 유곡, 평강 등 전국 20여곳의 비밀아지트를 중심으로
조사한결과 도합 346구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이는 당대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충격을 가져왔고
일본은 물론 중국과 미국을 거쳐 전세계에 이 사이비 종교의 횡포가 알려졌다.
그러나 일제는 2차 대전으로 인해 계속 수사를 진행할 수 없었고
백백교 사건에 대한 조사는 중단되었다가 수년후 재개되어
1941년, 백백교 간부의 선거공판에서 어느정도 마무리되었다.
김서진 (170명 살해) - 사형
이경득 (167명 살해) - 사형
문봉조 (127명 살해) - 사형
가장 문제가 되었던 교주 전용해는 유곤용과의 사건으로부터 몇 달후
솔밭에서 목에 칼이 찔린채 사체로 발견되었는데,
얼굴 부분을 산짐승에게 뜯어먹힌 탓에 그것이 진짜 '전용해'인가 하는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전용해의 아들이 사체를 보고 울부짖었던 것과 나머지 진술을 토대로
경찰은 전용해가 자살한 것으로 판정지었다.
더불어 이사건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던 일제는
전용해의 시체를 수습하여 두개골을 추출, '범죄형 두개골'의 표본으로 보존하였는데 (골상학은 19세기에 이미 허구로 판정났다)
이는 2011년 10월 25일 까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보존되어 있다가
이내 논란에 휩싸인 탓에 폐기, 화장한 후 봉선사에서 위령제를 지내주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백백교는 지하에서 유지되어 교단을 이루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극단적 사이비종교의 시작은 이 백백교 부터라고 할 수 있으며
훗날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을 주도한 사이비종교 '오대양' 또한 백백교의 수법을 일부 차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현재 전 백백교의 아지트 터에는 사람들이 접근조차 하지않는 교회가 세워져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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