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재판의 역사(2)
개혁주의 자료 2014. 12. 23. 00:59
종교 재판(2) |
요람에서 무덤까지 카톨릭교회에 충성을 해야하고, 그들의 말만 들어야하고 그들이 지시하는대로 따라야함을 근본정신으로 하는
"살아있는 그리스도(교황)"를 모시는 종교권력은 AD1962~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공식적인 종교재판을 끝낼때 까지
(비공식적으로는 아직 지속되고 있음) 그 피의 향연을 계속했다.
■ 중세의 로마 카톨릭 교황의 종교 재판
ㅇ 완전한 사람들 (카타리파)
13세기 즈음이 되면서 성지회복에 의한 영원한 십자군 왕국의 꿈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피를 갈구하는 기독교란 종교는 또다른 전쟁을 시작한다.
교황 이노센트 3세는 십자군 전쟁에 대한 열의를 동료 카톨릭 그리스도인에게 돌린것이다.
AD1209년 이노센트 3세는 프랑스 남부 카타리파에 대해 십자군을 보낸다.
역사기록에 "알비장스 십자군"으로 알려진 이 동료 카톨릭 그리스도인에게 행해진 유혈원정은 제 1차 종교 재판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알비장스 십자군은 1209~1229년까지 20년간 지속 되었으며, 같은 카톨릭이지만 이단이라 명명된 카타리파는 이교도
전쟁에서 "적"과 같은 취급을 받았으며, 간혹 더욱 무자비하게 학살되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1209년 7월 22일 베제가 약탈 당했을 때인데, 20,000명이 훨씬 넘는 남녀 및 심지어 젖먹이 어린이까지
주님의 군대(십자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교황의 특사 아르노는 역사에 길이남을 명언을 남기는데, 공격 중에 카톨릭 교인은 살려 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모두 죽여라, 진짜 기독교인지 아닌지는 하나님이 아실것이다" 라고 한다.
그리고, 충분한 시간이 있을때면, 화형이라는 이밴트를 했는데, 1211년 라보르에서 400명이 화형되었고,
카세에서 94명이 화형되었다.
완전한 사람들이라 불리던 카타리파의 모든 도시는 황폐화 되었고, 주님의 칼날을 피해 도망갔던 카타리파 사람들은 철저한
추적을 당하며 결국에서 피에 굶주린 카톨릭의 사냥감이 될수 밖에 없었다.
1239년 몽비메르에서 183명이 잡혀서 산채로 불태워 졌고, 1244년 몽세귀르 산성에서 215명이 그들 뒤를 따랐다.
그후로도 지속된 카타리파에 대한 종교재판으로 카타리파인들이 최후의 만찬시 사용된 "성배"를 가지고 있다라는 거짓 소문에
현혹된 주님의 군대에 의해 "완전한 사람들"이라 불리던 카톨릭 신자들은 영원히 지상에서 소멸되었다.
"정결하다"라는 말인 카타리가 최초의 종교 재판에서는 "이단"이란 말과 동의어로 사용될 정도로 처음 목적은 카타리파 였지만,
그후 확대된 종교재판은 훨씬 광범위하게 "왈도파" "프라티젤리파", "성전기사단"그리고 후대에 "프로테스탄트"까지 확대 되었다.
ㅇ 왈도파(The Waldensians) 그리스도인들
왈도파는 리용의 부유한 상인 삐에르 왈도 (혹은 발데르)에 의해 창설되었다고 한다.
1173년경에 왈도는 그의 전 재산을 팔고 거지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이와 같은 행동의 신학적 근거는 마가복음 10:21인 것처럼 보인다.
(마가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느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때가 되자 다른 사람들도 삐에르 왈도의 금욕적이며 영적인 생활 방식에 이끌리게 되어, "리용의 빈자들"이 결성되었다.
삐에르 왈도가 몇 가지 방언 (프랑스의 프로방스어)으로 성서를 번역하도록 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처음에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은 상당히 정통적인 신학 이론을 유지했지만, 리용의 대주교에 의해 복음 전파 허락이 거절되었을 때
카톨릭 교회로부터 탈퇴했다.
1184년에 교황 루시우스 3세는 "리용의 빈자들"을 파문했다.
때가 되어 왈도의 추종자들은 로마 카톨릭의 교리들 중 다수를 배척했는데, 그 중에는 사제직, 면상(免償), 연옥, 성변화,
그리고 성인에 대한 기도가 포함되었다.
다수의 왈도파 그리스도인들은 보헤미아의 개혁자 존 허스 (John Hus) (1415년에 화형되었다)의 추종자가 되었다.
1532년에 왈도파는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죤 칼빈(John Calvin)의 친구인 윌리엄 파렐 (William Farel)이 그 교류의 도구가 되었다.
수백 년 동안 종교 재판과 세속 당국에 의해 색출되어 살육을 당한 왈도파 만큼 오랫동안 그리고 끔찍하게 박해를 당한
그리스도인들은 없다.
왈도파에 대한 가장 악명 높은 박해는 "피드먼트 이스터 (Piedmont Easter)"로서 프랑스 군인들이 1,712명의 왈도파
그리스도인들 남녀와 어린이를 학살했다.
이런류의 학살이 36차례나 지속?으며 완벽히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클라크의 "순교자 열전"은 13세기 초반에 단지 프랑스에서만 살해된 왈도파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를 2백만명이라고 계산한다.
AD1570년까지 지속된 왈도파에대한 종교재판의 희생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는것으로 비공개적으로 살육된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거의 3백만명을 웃돌고 있다.
ㅇ 신전 기사단(The Knights Templar) 카톨릭 십자군 후예들<그리스도인들이 아닌 정치조직>
신전 기사단은 아마 교황의 종교 재판의 가장 잘 알려진 희생자이며, 종교 재판이 사적 정치적 이득을 위해
어떻게 조종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신전 기사단은 기원 1190년에 성지 순례 여행 길을 보호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여러 번 이와 같은 전사 수도승들은 십자군의 주요 인물 (한 자료는 20,000명 이상의 신전 기사단이 십자군에서 살해되었다고
추산한다)이 되었다.
신전 기사단이 교황에게만 책임을 지고 지방 교회 당국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았던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때가 되자 신전 기사단은 지역 사무소 (신전이라고 부름)를 서구 그리스도교국 전체에 걸쳐 설치했다.
언제나 혁신적인 신전 기사단은 최초의 유럽 은행 체계라고 생각되는 것을 발족시켰는데, 그들의 몰락을 가져 온 것도
은행가로서의 그들의 관련성 때문이었다.
1300년대 초에 프랑스 왕 필립 4세는 파리 신전 조직에 큰 빚을 지게 되었다.
1307년에 그는 그 기사단에 이단 혐의를 씌웠다. 신전 기사단에 불리하게 작용한 혐의에는 신전 기사단 지원자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침을 뱉는 것을 요구한다는 것, 신전 기사단이 바호멧(Baphomet)이라는 이름의 신비에 싸인
우두머리를 숭배한다는 것이 포함되었다. 이와 같은 혐의는 종교 재판이라는 도구를 통해 고문을 가하여 얻어낸 자백이다.
프랑스의 종교 재판은 신전 기사단에게 공식적으로 혐의를 씌웠다.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앞에서 기술했듯이 신전 기사단이 지역 카톨릭 교회 당국의 관할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1312년의 비엔느 (Vienne) 종교 회의는 공식적으로 기사단을 해체하고 그들의 재산의 대부분을 유사 단체인 호스피털 기사단에에
주었다. 중세의 신전 기사단 역사의 마지막 사건은 1314년에 발생했는데, 그 때 기사단의 우두머리 쟈크 드 모레이
(Jacques de Molay)가 그의 이전의 자백을 철회한 후 산체로 화형되었다.
중세의 신전 기사단이 해체된 후 프랑스 왕은 기사단에게 진 모든 빚을 탕감 받고 아울러 그들의 금전적 부의 상당 부분도
취하게 되었다.(오늘날 유럽을 비롯 미국의 중요정치인들은 신전기사단이란 비밀 결사 회원으로 바티칸을 위해 일하고 있다 )
ㅇ 프라티첼리파 (The Fraticelli)
청빈한 사람들로도 알려진 프라티첼리파는 카톨릭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분리 집단이다.
그들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 완전성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재산이 없었다는 그들의 주장 때문에 이단으로 고발되었다.
프라티첼리파에 대한 첫 번째 종교 재판은 1318년 마르세이유에서 4명이 화형됨으로써 일어났다.
그들은 1426년에 종교 재판 당국이 세속 당국의 지원을 받아 그들에게 동정적이라고 알려진 31개 마을(약15만명)을 황폐시키고
전멸시킴으로써 완전히 일소되었다.
■ 재개된 교황의 종교 재판(제수이트 예수회에의해)
15세기 말엽에 원래의 교황의 종교 재판 (카타리파를 박멸하기 위해 만들어졌음을 기억하라)은 상당히 진척되었다
화형시킬 더 이상의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종교 재판의 불길은 16세기 중엽에 새로운 연료를 얻게 되었는데, 로마 카톨릭 교회의 새로운 적으로 인식된
프로테스탄트와 싸우기 위해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설립한 예수회에 의하여 재개되었다.
1540년대까지 로마 카톨릭 교회는 유럽 전체에 걸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영향 때문에 동요하고 있었다.
한 때는 교황이 전체 서구 유럽제국을 지배했으나, 1540년까지는 전체 나라들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가들 즉 카톨릭이 말하는
프로테스탄트 찬탈자들에게 빼앗겼으며, 여기에는 영국 (헨리 8세), 독일 (루터) 그리고 스위스 (칼빈)가 포함되었다.
프랑스 역시 증가하는 칼빈개혁주의 사회가 그들의 권리를 주장함에 따라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것은) 프로테스탄트 개혁 주의는 심지어 이탈리아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파손의 물결을 저지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게 하기 위해 채택된 일련의 방법은 전체적으로 반종교 개혁으로 알려져 있다.
반종교 개혁은 로마 카톨릭 교회를 구하기 위한 시도에서 몇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그 중 하나는 전체 종교 회의를 소집하는 것이었는데,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가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열려서
여러 가지 개혁을 시행하고 카톨릭 신앙을 고쳤다.
다른 방법으로는 호전적인 새로운 종교 집단 (예수회-The Jesuits)을 설립한 것과 프로테스탄트 요새와의 전쟁 (독일의 30년 전쟁)을 개시한 것이 포함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도구인 종교 재판이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예수회는 트렌트 공의회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계 정부를 추진하고 있다 )
1542년 6월 21일 교황 바오로 3세는 "종교 재판 의회" 혹은 "성성(聖省)" (상크툼 오피시움)으로서 교황의 종교 재판을
(리세트 아브 이니티오 칙서로) 재개했다. 교황은 종교 재판을 시행하도록 위원회를 임명하고 추기경 지오반니
카라파 (Giovanni Caraffa)를 최고 재판장으로 삼았다.
카라파는 다음과 같은 그의 성명으로서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드러냈다.
"아무도 칼빈주의는 물론 어떤 종류의 이단에 대해서도 관용을 보임으로써 스스로를 더렵혀서는 안 된다."
―추기경 카라파 (후에 바오로 4세), 1542년
1555년에 그 종교 재판의 최고 재판장은 교황 바오로 4세가 되었다.
바오로 4세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종교 재판의 힘을 증가시켰다.
1559년에 그는 금서 색인 (인덱스 아우크토레움 ? 리브로룸 프로히비토룸)을 처음으로 출판했다.
마침내 칼뱅, 쯔빙글리 (Zwingli), 루터 등 모든 주요 개혁자의 저술이 그 목록에 등장하게 되었다.
바오로 4세는 다음과 같은 어리둥절하게 하는 정서를 지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심지어 내 아버지가 이단이더라도, 나는 그를 화형시킬 나무를 모을 것이다.>
가톨릭 역사가인 베르제리우스(Vergerius)는
교황 바오로 4세의 임기 중에(1555~1559) "고문과 아사와 화형에 의한 종교 재판으로만 15만명 이상의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을 죽였다."고 희색이 만연하였다.
이것은 종교재판 기간중에 로마가톨릭교회가 "의견을 달리하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쏟아부은 만행의 보잘 것 없는
사례에 불과하다. 1559년에 바오로 4세가 죽은 후 유럽은 몇 년간 종교 재판이 잠시 멈추게 되었다.
재판장 미셀 기슬리에리 (Michele Ghislieri) (바오로 4세에 의해 임명됨)는
교황 비오 5세 (1566∼1572)―종교 재판의 최고 재판장이 교황이 된지 10여년 후에 두 번째로 (1585년에, 이전의 종교 재판관이 다시 교황 식스투스 5세가 되었다)―교황이 되었다. 비오 5세 하에 고문이 다시 종교 재판의 일상 무기가 되었다.
1566년 6월 23일 비오 5세는 대중의 아우토 다 페스 ("믿음의 행위")가 된 여러 개 중 첫 번째 것을 로마 내에서 조직하였는데
참수와 화형이 일상사가 되었다.
재개된 교황의 종교 재판은 특히 이탈리아에서 성공적이 되어 거의 모든 초기 프로텐스탄트 주의의 자취가 16세 말까지는
일소되었다.(이기간에 공식적으로 200만명이 살해됨.)
<다음편에 계속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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