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다섯 솔라-(Five Solas)와 그 의미
개혁주의 자료 2014. 11. 22. 01:57
1. 다섯 솔라(Five Solas)
다섯 솔라(Five Solas)는 종교 개혁 기간 동안 나타난 다섯가지 라틴어 표어이며,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과는 대조되는, 개혁주의자들의 기본적인 믿음을 나타낸다. 라틴어 솔라(sola)는 한국어로 "오직, "홀로"로 번역된다.
-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 있고 권위 있는 말씀일뿐 아니라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원천이며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으므로, 문체가 명료하며 자기 해석이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성경 밖에서는 해석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성경이 거룩한 전승에 의해서만 권위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동방 정교회, 오리엔탈 정교회, 콥트교회, 앵글로 가톨릭,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Prima Scriptura)과는 반대된다. Sola Scriptura가 교회의 전통을 무시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교회의 전통도 성경의 권위 아래 있으며, 성경적 근거가 없는 전통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와는 달리 교회의 전통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보는 사상을 "Sola Verbum Dei"라고 한다.
-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 자연인의 상태에 대한 개혁주의적 입장은,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참된 생명력을 잃은("죽어 있는") 절대적인 절망의 상태로서 죄의 종 노릇을 하고 있으며 현세에서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만 사후의 심판에서 죄에 대한 대가로 영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인간은 스스로 벗어날 능력이 없고,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억조창생의 죄값을 다 받고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이룬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는 것뿐이라는 것이 Solus Christus에 담긴 내용이다.
- Sola Gratia (오직 은혜) :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혀 주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이 인간 쪽에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며, "믿음"은 구원의 은혜를 받는 '통로' 역할을 할 뿐이며 그것의 '대가'로 구원을 받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 Sola Fide (오직 믿음) : 하나님이 내리시는 구속의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 : 사제들과 교황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와 동일시 되던 중세 카톨릭에 반하여 모든 영광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만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이며 거기에 인간이 참여하는 부분은 없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내용이다.
출처 위키백과 - http://ko.wikipedia.org/wiki/%EB%8B%A4%EC%84%AF_%EC%86%94%EB%9D%BC
2. 5 Sola(다섯 가지 오직)의 의미
종교개혁은 중세의 먹구름을 헤치고 그동안 가려졌던 태양을 인류에게 다시금 비취게 하였다. 이로써 그동안 가려졌던 구원의 복음이 명확하게 드러났고, 성경의 가르침은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신앙의 원리를 다섯 가지 솔라로 요약했다. 이것은 대부분 루터와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에서 루터로 부터 나온 것이다. 이로써 루터는 당시의 가톨릭과 인본주의를 넘어서서 복음의 가르침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는 다시 중세의 암흑시대로 돌아갔다는 비난이 높다. 이것은 교회가 성경의 근본이 되는 원리를 잊었으므로 인간의 세계관, 욕심, 무지, 우상숭배, 열광주의 등이 교회를 지배하는 하나의 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수십년 다녀도 기본적인 신앙의 원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교회는 요즈음 사방에서 지탄을 받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 이유를 분석해서 개선하려는 의지는 적다고 본다. 다시 복음의 원리가 가려져서 유사복음이 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에 필자는 종교개혁의 원리이자 기독교의 원리인 다섯 솔라를 설명하면서 우리가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점검하고자 한다. 먼저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핵심 논쟁점을 보고 그다음에 5솔라의 가르침을 살펴본다.
에라스무스의 입장
자유의지는 nonnihil(약간)이며, 하나님의 은혜는 plurimum (대부분)이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지만, 그래도 인간의 의지가 작용할 여지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을 상주시고 벌하시겠는가? 그래야지만 인간은 선행을 위해 힘쓰지 않겠는가? 만약,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벌을 주시는 하나님은 불공정한 잔인한 하나님이 아니겠는가?
루터의 입장
루터의 대답에서 신교 칭의론(인간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 즉 구원을 받는가?)의 본질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개혁교회의 4가지 솔라는 이곳에서 나왔으며, 이것은 루터의 칭의론의 근간을 이룬다.
I.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에라스무스는 인본주의자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살리려고 했다. 즉 인간은 비록 일그러지고 병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선한 면이 조금은 있으므로, 이것을 잘 고양하면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람은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여러 의사 중에) 가장 좋은 의사이다. 성경도 여러 가지 좋은 약 중에서 가장 좋은 약이다.
루터: 인간이 병이 든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 세포 하나라도 살릴 수가 없다. 그에게는 부활만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그를 살리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다.
해설:
에라스무스는 세미펠라기우스 주의이다. 세미펠라기우스 주의는 인간이 완전히 타락한 것이 아니므로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아서 본성을 잘 살려나가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오늘날 이 이론이 발전되어 많은 교회에서도 그리스도 외에 타 종교를 믿어도 좀 어렵기는 하지만 구원의 길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인간은 철저하게 타락했으므로,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출발할 수 없다. 아무리 본성을 잘 개선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에 도달할 수 없다. 타락한 인간을 살리시는 분은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
적용:
1) 인문주의는 일차적으로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ad fontes). 학자들은 고전(성경 포함)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했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이 가장 좋고, 그리스도도 꼭 필요한 것이지만, 다른 책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즉, 오직 그리스도, 오직 성경이 아니었다. 이것은 오늘날 복음주의가 그리스도와 성경 외에 심리학, 사회학, 상담학을 받아들이는 것과 유사하다. 그렇게 되면 차차로 그리스도의 유일성이 사라지고, 다른 것들이 그리스도를 대신하게 된다.
2) 요즘 교회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이 기승을 부리는 이 때에 „오직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원래 교회 일치 운동으로 시작했으나, 지금은 종교일치 운동으로 발전했다. 이들은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II. sola gratia(오직 은혜)
에라스무스: 인간의 내부에는 아직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다. 이것이 자유의지다. 인간은 성(城)에 비유하자면, 성의 대부분이 적에 의해 점령을 당했지만, 가장 깊은 곳에는 아직 자유가 있다. 외부에서 강력한 지원군이 온다면, 이는 해방될 수 있다. 이 지원군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루터: 무슨 소리! 바로 가장 깊은 곳(마음, 양심)이 이미 옛날에 적에게 강점되어 있소. 인간의 중심이 바로 사단의 노예가 되어 있소.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간의 의지는 속박되어 있소.
에라스무스: 인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facere quod in se est).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한 것을 채워서 완성시킨다(당시 가톨릭의 가르침).
루터: 이러한 가르침은 „사단의 가르침“이다. 인간이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하게 되면, 그는 대죄(죽을 죄)만 지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내리게 하시기 위해 무엇을 준비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하게 자신을 만든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더이상 은혜가 아니다. 은혜와 공적은 물과 불이라서 결코 섞일 수 없다. 진실로 인간은 암흑, 토후와보후(창1:2: 혼돈하고 공허하며)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은혜 외에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III. sola fide(오직 믿음)
우리는 이 구원의 은혜를 무료로, 선물로 받기 때문에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해설: 죄인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를 얻는 길은, 공적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믿음으로써 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을 때 그분이 이루신 의가 나에게로 전가된다. 죄인이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길 뿐이다(전가된 의). 그리스도가 주시는 의를 받아들이고 심판받은 자로서, 그리고 부활한 자로서 사는 것이 믿음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60문: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습니까?
답: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을 통해서만(오직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비록 내 양심이,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범하였고 그 계명 중 어느 하나도 (완전하게) 지키지 못했으며 아직도 모든 종류의 죄를 짓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고소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나의 공로와 관계없이 순전한 은혜로 나에게 완전한 속죄와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함을 선물로 주십니다…
제61문 : 왜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있다고 말합니까?
답: 하나님께서 나를 기쁘게 받으시는 것은 내 믿음이 공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와 의와 성결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의로운 자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으로 삼을 방법은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것 자체도 성령님의 사역이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믿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님을 받아 그 결과로 믿음을 가지게 된다. 오직 은혜로라는 말은 구원을 하나님 편에서 표현한 것이고, 오직 믿음이라는 말은 인간의 편에서 표현한 말이다.
그동안 한국 교회에서 가장 강조해왔던 것이 믿음 같다. 믿기만 하면 된다!!! 믿음으로 해라!!! 그러나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가르치는 믿음과는 전혀 반대이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이 한국 교회를 망친 주원인 중의 하나이다. 개혁자들이 가르친 믿음이란, 우리의 행위와는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순전히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많은 목사들은, 믿음을 무엇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가르쳤다: 믿음으로 불가능한 것을 이루어라(긍정적 사고 방식)! 믿기만 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완전히 뒤집었다. 이들은 믿음을 자신의 조직을 키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교회는 부흥하고 성장하되, 정작 기독교는 무너졌다.
그 결과 교인들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거룩함과 사랑의 정서는 뒷전으로 밀렸다. 그 대신 이방종교에서 성행하는 치료, 그들이 방언이라고 주장하는 이상한 소리, 거짓 예언, 뒤로 넘어지는 것, 금 이빨로 변하기, 부자가 되고 성공하여 행복해지기 위한 기도 등이 많은 교회에서 성행하게 되었다.
IV. sola scriptura(오직 성경)
에라스무스: 성경에는 어둡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부분도 있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없고, 단지 주장이나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경과 교부들의 해석, 성경과 전통, 성경과 교황의 가르침, 성경과 철학, 성경과 건전한 이성, 이 양자가 모두 필요하다.
루터: 성경은 명료하다! 단지 우리의 어두워진 눈이 이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면,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멸망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에 하나님의 구원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하게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 성령님께서는 회의하는 이성과 같은 회의론자가 아니므로 그리스도인도 확신의 사람이다. 이 모든 것은 활짝 열린 성경이 선사한다.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이다.
루터는 이곳에서 성경은 다른 권위에 의존해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성경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성경해석학적 원칙을 내세웠다. 좀 어두운(어려운) 부분은 밝은 부분으로부터 해석이 가능하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교황이나 전통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알리시기 위해 성경을 주셨다. 비록 인간이 성경을 썼으나,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서 썼으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성경의 다음의 네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다:
1) 성경의 권위성: 성경의 권위는 성경 자체에 의해 권위가 증명된다.
2) 필수성: 성경은 인간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방편으로서 필요불가결하다.
3) 명료성: 성경에는 구원에 필요한 지식이 “명료”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교회나 사람의 해석에 의존하지 않고도 구원의 도를 알 수 있다.
4) 충분성(충족성): 하나님의 구원의 뜻은 성경에 충분히 계시하셨다. 그리고 성경은 개인과 교회의 영적, 도덕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V.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주권을 재발견했다. 하나님의 주권은 구원에서 뿐만 아니라 신자의 모든 삶에 침투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을 자신의 영광과 죄인의 구원을 위해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전 생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답: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칼빈 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 사람은 드믈다. 루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드러냈고, 칼빈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로 살았다. 그의 다소 엄격한 태도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의 유언대로, 묘지도 초라하게 하고 비석도 세우지 않아, 장사된지 몇 달만에 그의 무덤은 아무도 찾지 못했다. 그는 법학도 시절에 교수 대신 학생을 가르칠 정도로 수재였고,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 분명하지만, 자신은 이것을 한번도 밝힌 적이 없어서 아무도 정확하게 그가 박사였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이라는 구호를 삶으로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기독교강요는 이러한 킬빈의 신앙을 잘 반영한다.
참다운 신자라면, 신자로서의 분명한 정서를 갖추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과 정서에서 몇 구절을 인용한다.
성도들의 기쁨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데서 나온다.
기쁨은, 신적인 것들이 자기들과의 이해 관계나 어떤 연관이 있어서 나온 것이 아니다. 신적인 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거룩한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묵상할 때 자기의 마음이 즐겁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위선자와 참된 성도의 기쁨을 구분하는 차이이다. 즉, 위선자는 자아가 그 기쁨의 첫째 기초이며 참 성도는 하나님을 즐거워한다. 위선자는 자기가 도달했거나 도달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행복을 생각하면서(예: 주일헌금 일억원, 1000명 선교사 파송) 마음에 기쁨을 찾는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먼저 하나님께 속한 일들의 영광스럽고도 호감 어린 본질들을 아름답게 생각함으로써 말로 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운 마음을 가진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기쁨의 샘이요, 그들의 모든 유쾌함의 진수이다.
그러나 위선자의 정서는 정반대의 순서를 따른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것들이 많이 조성된 것을 즐거워하고(목표 달성), 그로 말미암아 마음이 고양된다. 그런 다음에 그런 것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을 사랑스럽게 보는 것이다. 참된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기쁨의 가장 큰 기초는 그리스도의 완전성과 아름다움이다.
복음의 거룩한 교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높아지고 사람은 낮아지며, 거룩은 영예롭게 되며 촉진되고, 죄는 수치를 당하고 기가 꺾이게 된다. 그리고 은혜롭고도 값없이 주어지는 주권적인 사랑이 드러난다. 바로 그 거룩한 복음의 교리들이 성도의 눈에 영광스럽게 보이며, 그의 취향에 아름답게 보인다. 이것들은 이러한 일들이 자기와 어떤 이해관계를 가지는지 생각하기 이전의 일이다. 실로 성도들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을 즐거워하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주이심을 즐거워한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자신이 선한 상태에 있다는 착각으로 그러한 교리 아래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위해서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하시는가를 듣고 대단할 정도로 즐거움을 나타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기쁨은 그들 자신 속에 있는 기쁨이다. 즉 그들이 기뻐하고 마음을 스스로 부풀릴 때, 자기들의 시선을 늘 자기에게 두기 마련이다(나는 …했다). 그래서 자기들이 소위 영적인 발견이나 체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받은 후에 그들의 마음이 그것들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체험을 크게 찬탄한다.
그들은 계속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 ‘이 체험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이 발견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내가 얼마나 놀라운 일을 만났는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아름다움과 온전하심의 자리에 자기의 체험을 가져다 놓는다.
이들은 자신이 체험하고 성취한 것의 위대한 것을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의 일에 관한 한 대단한 수다꾼들이 된다(선교보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욕망을 크게 채워준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들의 복종심과 맹렬한 열성은 보통이 아니다. 자기에게 꼭 맞는 하나님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를 높이고 복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정서는 자신이 대단한 성도라는 상상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영광 그 자체에 대하여 진정으로 발견한 것들을 기뻐한다. 그들의 정서는 자기 밖에 계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출처 : | 개혁주의 마을 | 글쓴이 : 송다니엘 원글보기 |
출처: Return Bible / 개혁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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