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nch not the Spirit. (quench = σβέννυμι (헬)스벤누미 = extinguish 불을 끄다, quench (갈증을) 풀다 2. (타는 불을) 끄다, snuff out 완전히 끝내다[파괴하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라. 그러기 위해서는,
DESPISE NOT PROPHESYINGS. 예언을 무시하지 마라 (1 Thessalonians 5:19-20)
살전 5:19-20 • 성령을 소멸치 말며 • 예언을 멸시치 말고
Different Translations:(다른 번역본들)
(AMP) Do not spurn the gifts and utterances of the prophets [do not depreciate prophetic revelations nor despise inspired instruction or exhortation or warning]. 선지자의 은사들과 발언들을 퇴짜놓거나 일축해 버리지 마라. [예언적인 계시들을 평가절하. 경시하지 말고, 영감을 받아 전하는 지도.지시, 간곡한 권고.장려. 훈계들, 혹은 경고들을 무시하지 마라]
(ERV) Don’t treat prophecy like something that is not important.
(NCV) Do not treat prophecy as if it were unimportant.
예언을 마치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다루지 마라.
(NIVUK) Do not treat prophecies with contempt.
예언들을 경멸하듯 취급하지 마라.
(VOICE) Don’t downplay prophecies.
예언들을 경시하거나 대단치 않게 생각하지 마라.
(TLB) Do not scoff at those who prophesy.
예언하는 자들을 비웃거나 조롱하지 마라.
(DARBY) do not lightly esteem prophecies;
예언들을 가볍게 여기지 마라.
(CEB) Don’t brush off Spirit-inspired messages.
성령의 영감을 받은 메세지들을 가볍게 털어버리지 마라.
The English word “despise” was translated from the Greek word ἐξουθενέω EXOUTHENEO (헬) 엑수떼네오, which means “to make utterly nothing of 완전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다, i.e. despise 경멸하다 ridicule 조롱하다 Ignore 무시하다” (Strong). It was translated “set at naught 무시[경시, 경멸]하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다” three times in the New Testament.
이 단어는 신약에서 세번 “set at naught 무시[경시, 경멸]하다”으로 번역되었다.
Lk. 23:11 And Herod with his men of war set him at nought, and mocked him, and arrayed him in a gorgeous robe, and sent him again to Pilate.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무시.경시.경멸하며) 희롱하고(비웃고 조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Acts 4:11 This is the stone which was set at nought of you builders, which is become the head of the corner.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무시.경시.경멸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던)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Rom. 14:10 But why dost thou judge thy brother? or why dost thou set at nought thy brother? for we shall all stand before the judgment seat of Christ.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무시.경시.경멸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http://www.sfkorean.com
살전 5:20 예언을 멸시치 말고
예언을 멸시치 말고’라는 구절은 바로 이런 서구 신학의 이중성을 드러냅니다. 워어스비의 The Bible exposition commentary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계시를 가지고 있어서 예언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주석을 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예언을 멸시치 말고’는 없어져도 무방한 말씀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하였는데, 예언은 멸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예언의 은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선지자 사명을 받은 사람이 있음을 말합니다. 목사와 구분되는 역할로 사도 바울은 보았습니다.
예언은 앞을 내다본다는 점에서 신기한 은사입니다. 이것은 마치 점쟁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앞을 내다보는 점쟁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사해보이지만 유사하지 않습니다. 이런 차이를 경험하지 못한 신학자들에 의해 예언은 필요치 않다는 서글픈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마치 이것은 거룩한 성경을 손상하는 위험한 도구로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잘못된 예언은 성경을 무시하고, 성경보다 예언을 더 중하게 여깁니다. 이들은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미혹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위험성으로 인해 예언이 필요 없다는 신학자들의 말은 구더기가 무서워서 장을 못 담구는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물은 고이면 썩습니다. 하지만 썩은 물은 자신들이 썩었다는 것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범죄를 변명하고, 인간의 욕망을 위하여 쓰이고 있는 시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도 위험한 것이기에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언은 이렇게 부패한 교회에 소금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교회를 새롭게 거듭나게 한다는 점에서 예언은 필요한 것입니다. 구약에 선지자들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예언하고, 이스라엘의 타락을 질책했습니다. 바로 교회의 올바른 예언이 바로 이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백성이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기 위해서 세웠습니다. 바로 신약에서도 선지자의 사명은 타락한 교회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하는 것입니다.
밧모섬에 유배된 요한은 7교회에 편지를 하였습니다. 그는 다른 교회의 사정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칭찬받을만한 것과 비난 받아 마땅할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어떻게 요한은 밧모섬에서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 없이 불가능합니다. 예언은 이렇게 교회에 유익을 위해 주시는 은사입니다. 개인적으로 성도에게 유익을 주고, 교회를 바로 세우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예언이 사라진다면 교회는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부패의 수렁에서 나오지 못합니다. 썩은 물이 자신을 썩었다고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분란을 일으키는 예언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의 예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배치되는 예언은 마귀의 역사입니다. 예언으로 돈을 벌거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구하는 것은 장사꾼입니다. 이런 잘못된 형태의 예언으로 인해 예언의 은사가 멸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 중에 이런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사도 바울은 선지자는 다른 직책과 구분을 했습니다. 목회자들이 다 선지자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성경의 생각이 아닙니다.
예언은 교회의 진정성을 밝힙니다. 사람의 숨겨진 의도를 밝혀냅니다. 그래서 교회의 부패를 고발하고, 성도의 죄를 드러내도록 합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 교회의 부패를 막고, 성도 간에 분란과 싸움을 막습니다. 교회가 올바른 말씀을 통하여 반석위에 서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전에도 한국교회의 부패에는 이런 선지자 사명을 받은 목회자가 적기 때문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 현대 한국 교회는 ‘예언을 멸시치’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부패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새롭게 하시기 위해 주시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초대 그리스도교회)
오늘날의 예언 운동의 문제
오늘날의 예언 운동들은 성경적이라고 하면서 성경의 권위를 가지고 말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그리고 주관주의적으로 인용하여 무속주의적 점쟁이들이 하는 것들과 혼합시키고 있다. 진정한 성경의 권위와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
선지자와 예언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성령에 의해서 교회에게 주신 은사의 하나인 선지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며, 그러한 은사가 성경 후에도 있다고 한다면, 어거스틴이나, 루터나, 웨슬레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선지자는 앞일을 예언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개인적인 것이기보다는 교회와 복음에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은사의 하나인 예언은 반드시 선지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있는 기능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개인의 앞날의 운명을 미리 말하기보다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완성된 계시를 들어냄으로 그것을 듣는 믿지 않는 자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있다.
선지자나 예언은 하나님의 은사임으로 결코 훈련을 통해서 또는 세미나를 통해서 전수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온갖 자랑과 개인의 권위를 높임과 광란과 무질서와 비이성적인 그리고 물질의 착취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않고 교회를 어지럽히고 신앙인의 이성을 파괴시키고 정욕적이라면 베드로가 경고한 거짓 선생들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 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 .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벧후 2:1-19). -홍성국:교회와 신앙 2000-9 中-
*현대에도 한국 개신교 교계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언을 한다고 하는 가운데, 예언이 범람하고 있는 실정인데 예언은 앞날을 예견하여 말하는 기능도 있지만 예언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예언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선포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성경적인 예언은 예언하는 사람이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작은 신학교에 다니는 한 집사가 모기도원에서 예언을 받았는데 자신의 지난일들을 알아맞추는 등 '쪽집게' 라는 말을 하는데 나는 '쪽집게'라는 말에 "그건 가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웬만한 사람들의 예언을 믿지 않는다. 한마디로 대부분 (뻥)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예언을 멸시하고 있는 것인가? -Ezra-
그러나 예언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인데, 덕을 세우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합니다.(고전 1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