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더 핑크(1886~1952) 목사님은 회개와 회심(回心)을 강조하는 청교도 스타일로 복음을 제시했기 때문에 부담을 느낀 그 당시 회중들로부터 심한 배척을 받았다. 그리하여 시무할 교회조차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더 핑크 목사님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열심과 하나님 말씀 연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더 핑크 목사님은 세상을 떠난 이후에야 제대로 평가를 받게 되었는데, 타협하지 않는 회심과 거듭남의 촉구, 심오한 신관(神觀), 명확한 하나님 절대주권 사상 등이 깊이 있고 적용성 있는 성경 해석과 더불어 제시된 그의 글들은 경박한 미국식 복음주의와 현대의 자유주의 신앙에 지친 사람들에게 청량제(淸凉劑)로 다가오고 있다.

 

- 조계광의 번역서에서 요약하여 옮김. 

 

 

 

아래는 아더 핑크 목사님이 로웰 그린이라는 형제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아더 핑크 목사님께서 지적한 당시 교회의 타락해가는 모습은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에도 아주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들이다.

 

교회들이 성경적인 바른교회의 모습을 잃어가고,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에 잠식당해 가는 모습을 바로보노라면 마음이 너무나 아프다.

 

조국의 교회들이 속히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며, 거룩을 회복하고, 경건을 회복하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바란다.

 

 

 

 

 

 

 

 

 

 

교회의 상태

로웰 그린에게 보내는 아더핑크의 편지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랑을 받는 이에게

주님의 거룩하고 복되신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그 앞에는 높이 있는 천사들도 머리를 숙이고, 그의 거룩한 임재앞에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6:3)고 외칩니다. 그분은 우리가 겸손함과 경외함으로 나아가야 할 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소위 공적 예배에서 거룩한 경외심을 찾기가 어찌나 힘든지요! 이방인들조차 그들의 우상에게 절을 할 때에는 고상함과 단장으로 처신하고 있는데, 교회에서는 어찌된 일입니까?

 

그리고 이 패역한 세대에서 회칠한 종교인들과 관계를 맺을수록, 우리는 그들의 천박함과 방종함에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썩은 사과 속에 있는 잘 익은 사과는 썩은 사과를 온전케 할 수 없고 오히려 모두 썩게 됩니다.

 

 

형제의 12일자 편지가 제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623일자 저의 편지를 통해 형제의 마음에 말씀하심으로 인해 그를 찬양합니다.

저에게는 사본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온유함은 하나님 앞에서 큰 가치가 있는 은사입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3:4)

 

그것은 성령의 열매의 한부분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22,23)

 

우리는 온유함을 구하도록 명령을 받습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2:3)

 

성구사전을 찾아보면 온유한 자에게 귀한 것들이 많이 약속되어 있음을 볼 것입니다. 온유함은 그리스도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1:29)

 

형제께서는 알려진 죄를 극복하는 삶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써보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형제께서는 제가 그 문제에 대해 쓴 것이 많지 않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리는 것은 지난 20년간 성공적인 삶에 대해 가르쳐진 내용에 대해 저로서는 찾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를 앞장서서 변론하고 주장했던 사람들은 유능한 판단자의 눈으로 볼 때에는 별로 신용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근본적인 교리에 있어 상당히 불건전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선택된 사람들을 영원히 구별하심을 부정하고, 또한 그리스도가 그들의 죄를 담당하심을 부정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전적타락을 부인하고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어 그 자신의 결정에 의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참조:1:13)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6:44)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8:3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9:16)

 

어떤 설교자나 교사가 이러한 기본적인 진리에 불건전하게 되면, 어떤 주제에 관해서도 그들을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기초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 위에 구성하는 것도 잘못되게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참된 종들, 건전한 교사들은 이 땅에서 거의 사라져 버렸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딤후4:3)이 지금 우리 눈앞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소위 복음이라고 불리는 것을 관용하고 시대의 표적들에 대한 말을 진지하게 듣고자 합니다. 내용인 즉 성경의 내용과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 흥미위주의 기사를 신문에서 오려 모아 놓은 것입니다 .

 

그들은 선교사의 연설을 듣고자 하나 건전한 교리 즉, 바른 가르침은 용납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결코 오류가 없는 판단의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가련한 자녀들은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행해지고 있는 언어의 혼란 속에서 사물들을 판별할 수 없게 됩니다.

 

 

그 판단 기준이란 이것입니다.

, 오늘날 종교적인 세계에서 지속되고 있는 것은 바른 가르침이 될 수 없습니다. 대중적으로 인정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출석하는 가르침은 바른 가르침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곳에서는 항상 그의 말씀으로 더불어 역사하십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세우시고 무장을 시키시고 그의 종을 보낼 때 그의 종은 반드시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을 거역하는 모든 것을 정죄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메시지는 인기가 없기 마련입니다. 사실은 중생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른 가르침을 지니고 있었습니까?

주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사도들이 말씀을 전할 때는 어떠했습니까?

루터와 칼빈의 시대에 그들은 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까?

비천하고 타락한 인간 품성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여, 이것을 생각하십시오. 구약의 선지자들과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쳤던 사람들은 종교심이 없는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종교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종교를 갖고자 했으며, 그들에게 어울리는 종교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정죄하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정통기독교 국가도 그 자신의 종교를 갖고 있습니다. 사실 그 안에는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조금은 있습니다. 마치 바리새인과 로마 카톨릭교에도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비성경적이고 반성경적인 것이 많이 있으며,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그 가운데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말씀하시기를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 그리고 나서 성령께서 간증과 기도회를 갖게 해서 여인들이 남자 앞에서 말하도록 격려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함은 신성모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주님께 매우 헌신적이고, 매우 영적이고, 매우 건전하고, 죄인들의 구원에 관심이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의 분별된 삶에 관심을 가지면서, 간증과 기도회를 갖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잘못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을 시험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기를, 그들을 시험해 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자 세상에 나왔음이니라"(141)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회에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시험해 보라고 어떻게 명령했는지 살펴보십시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2:2)

 

그러나 어떻게 그들을 시험할 수 있습니까?

그들이 바른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디모데 후서 43"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의 원리를 적용해 보십시오.

 

바른 가르침의 한 부분은 교회 안에서 여자들의 침묵입니다.

 

디모데 전서 212,13"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을 비교하고,

그들에게 고린도 전서 1434"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을 읽어주고 그들이 그 말씀을 감당하는지 보십시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굴복한다면 그들은 잘 감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밝혀준데 대해 감사할 것이고 그들의 실수를 자백하고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주께 복종하지 않는다면, 겉으로의 거룩함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 자신의 종교를 갖고자 하며, 형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들에게 전해주는 빛을 거절하고 오히려 논쟁하려고 할 것입니다.

 

한번 시험해보고 스스로 살펴보십시오. 그들에게 고린도 전서 1434절은 너무나 명백한 것이라 오해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십시오. 그 말씀은 우리가 순종해야 할 거룩한 명령인 것입니다. 그 말씀에 대한 형제의 입장을 분명히 하십시오. 그러면 그 바른 가르침그들에 의해 용납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이 형제조차도 원치 않음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말씀으로부터 더 많은 빛이 형제에게 허락 될수록 말씀의 교훈과 명령에 지배 받을수록 말씀의 빛에 의하여 사람들과 종교적인 운동을 시험할수록 이는 그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 바른 가르침을 따라 그들을 헤아려 보는 것입니다.

 

지식이 많으면 근심이 많다.(1:18)는 말씀의 진리를 더욱 더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근심은 육신이 원치 않는 어떤 것으로, 가련한 기독교계가 빠져들어간 비극적인 상태에 대한 근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이집트나 그리스를 위해서가 아니라 예루살렘을 위해 우셨던 것처럼, 이 근심을 통해 그의 고난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3:10 )

 

이 때문에 형제는 멸시를 받는 자 가운데 처하게 되나 에스겔 914절의 은총을 받는 무리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형제는 하나님께 부르짖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3:2)

 

다른 사람들은 우의(友誼)있는 젊은 사람들과의 교제로 멋있는 시간을 보내면서 이 모임에서 저 모임으로 다니고 있을 때에, 또한 다른 사람들은 애굽의 고기 가마를 탐하면서 그 배를 신으로 삼고, 음악을 듣는다든지, 타락한 성도들과 웃고 농담하며 방종에 빠져 있을 때에, 형제는 은밀히 하나님께 얼굴을 향하고, 이사야 5919(서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편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의 약속을 간구하고 있을 것입니다.

 

 

형제가 은밀하지만 효과적인 중보자가 되어, 모든 은총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면! 그 고통과 눈물이 하나님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이것이 다른 사람을 향한 저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일에 쓰디쓰게 실망하고 돌아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육체를 멸하고 그 대가를 치루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나의 커다란 슬픔은 이곳저곳을 수없이 다니면서 또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능력 있는 중보자가 되겠다고 진정으로 다짐하는 사람을(제 아내를 제외하고) 한사람도 알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되리라고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희망은 땅에 내던져졌고, 이 때문에 제 자신을 어디 적막한 곳에 격리시켜버리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거기서는 다른 그리스도인을 다시는 만나지 않게 되겠지요.

 

그들은 모두 에스겔3331-33절에 언급된 사람들과 같습니다.

백성이 모이는 것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서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하고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거니와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 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그들은 어떤 사람의 발 앞에 앉아 엄숙한 가르침에 놀라며, 이를 전하는 자의 용기와 신실함에 감탄하고 심지어는 그런 목회자와 함께 있음을 큰 특권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켜 보려고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상세한 적용에 이르러 곧 그들의 생활 속에서의 특별한 실패와 죄를 바로잡는 문제에 있어서는(신발이 발을 위축시킬 때에는),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거절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을 등 뒤에서 비난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함몰시킵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들 자신이 좋아하는 우상에 매어 달립니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그들이 중보의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련하게 속고 있는 몽매한 영혼들이여! 그들은 한 시간 동안이나 라디오를 듣고, 다른 사람들과 농담 섞인 대화를 하고 나서 그들의 방으로 물러가서 기도를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주목하는 것은 빈말이 아니고 마음의 고통과 눈물입니다.

 

어떤 마음도 세상적인 즐거움과 공허할 이야기로부터, 삼중으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인 통곡으로 옮아 갈 수 없습니다. 그는 진실함을 요구하시는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 속에 역사하는 성령만이 진실함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형제여, 제가 돌보고자 하는 대부부의 사람들 가운데 진실함의 결여를 바라보게 될 때, 나의 영혼은 쳐지고 거의 눌리게 됩니다. 이것이 제가 미국을 떠나고자 했던 주요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거의 틀림없이 그리고 은혜스러운 방법으로 저의 서신사역에 함께 하여왔고,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 접촉을 통한 개인적인 사역은 거의 완전한 실패입니다.

 

그러나 에스겔 33장의 마지막 구절이 엄숙하게 선포하는 것처럼 이런 일이 일어날 때에 한 선지자가 그들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나는 개인적인 연약함과 실패 중에서도 제가 간절하게 찾았던 바, 충실하게 봉사할 사람의 손에 그것을 남겨 둡니다.

 

저는 이 편지가 형제에게 약간 실망을 안겨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 방에 홀로 앉아 지난 수년을 돌아보고, 제가 이렇게 일찍 미국을 아주 떠나게 됨을 알고 나서, 공식적인 편지를 쓸 기분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형제가 그렇게 자주 그 마음을 제게 열어주었던 것처럼 저의 마음을 형제에게 열어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 외에 아무도 저와 제 아내가, 저의 가장 훌륭하고 친절하고 가까웠던 친구들로 인해 겪었던 슬픔과 고민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때때로 여러 방법으로 관대하고 이기심 없이 우리를 도왔고, 우리는 그들에게 영적으로 참되고 부유한 축복이 될 수 있기를 바라왔습니다. 이는 평범하고 일반적인 뜻에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정하신 최선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우리가 보기를 원했습니다. 아마 그들을 향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고, 우리의 바람들이 실현될 것입니다. 제가 너무 거리낌 없이 쓰는 것을 용납하시기 바랍니다.

 

어떻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종의 내적 경험들에 대한 통찰을 갖게 해줄 것입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한 달이 지나기 전에 형제에게 다시편지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때는 형제의 편지 안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로마서 7장에 대한 저의 소책자를 동봉해 드립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범사에 축복을 기원하며 형제드림.

   

* 출처 :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RkzJ/11819

* 이미지 출처 : http://etc.usf.edu/clipart/54900/54920/54920_church.htm

 

출처: 좁은 길을 걸으며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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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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