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교회 / 김명도 목사

 서론:
죽은 교회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3장에서 죽은 교회가 있다고 말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신데 주님이 살아계시는데 죽은 교회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죽은 교회란 무엇을 말하는지 왜 교회를 죽었다고 주님이 책망하시는지,  죽은 교회를 책망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 책망은 비단 사데교회만 아니라 죽은 것과 같은 오늘의 우리를 책망하는 것이 아닌지 자신을 살피며 회개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라며 오늘 본문 계시록 3:1-6 말씀을 통해서 죽은 교회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I.  죽은 교회의 특징
II  죽은 교회를 향한 책망
III  교회가 살려면

I. 죽은 교회의 특징
  계시록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장차 하늘에서 일어날 놀라운 일들을 강조하지만 주님이 재림하기 전에 이 땅에서 일어날 일을 더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요한계시록 전체의 요절은 17:14절인데 “저희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이것이 계시록의 중심 요절입니다. 이 요절 한 절을 가지고 전개해 나간 것이 계시록입니다.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가 부단히 싸우는데 많은 성도들이 사탄의 공격을 받고 핍박을 받지만 반드시 나중에는 참 성도,즉 거듭한 성도는 승리하여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영광의 날이 있으므로 인내하며 죄와 타협하지 말고 마귀를 대적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싸우라는 내용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도란 진정 거듭난 성도들을 말하며 사이비 신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이비 신자는 핍박을 받을 이유도 없고 받을 수도 없습니다. 상황윤리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미움을 살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참다운 성도는 진리를 수호하려다 보니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 즉 사이비 신자들과 반드시 충돌하게 되므로 핍박과 고난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을 디모데후서 4장에서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라고 명령합니다. 참 성도나 참 목회자에 대한 핍박은 점점 더 해가는데 이유는 점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떠나고 따라서 복음을 떠나서 형식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성경대로 믿는 참 성도들을 시기하거나 조롱하게 되며 따라서 대적하게 됩니다. 오늘의 복음을 방해하는 자들은 외부에 불신자의 세력도 있지만 교회 안에 더욱 그런 세력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7에 “심판이 교회안에서 시작되었다” 고 경고의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바로 전하는 사역자들이 받은 고통과 핍박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상상도 못합니다. 과거 초대교회나 중세 종교개혁시기에 얼마나 많은 정통신학자들과 진정한 성도들이 대적하는 손에 죽어갔는가를 보십시오.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Ulrich Zwingli 는 양편에 날센 도끼를 들고 다른 종교개혁가들과 힘을 합하여 천주교 군사와 싸우다가 스위스  Zurich 근처 Kappa 평야에서 순교했습니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말고 몸과 영혼을 아울러 지옥에 던지는 자를 두려워하라“ 라고 하며 눈을 감았고 천주교의 지도자들은 죽은 그를 유품이라도 거두지 못하도록 유해를 불질렀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천주교 군사가 물러간 다음 쯔빙글리의 제자들이 스승의 시체를 거두려 갔을 때 놀랍게도 그의 심장만큼은 불에 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는 말도 있지만 이것은 전설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다운 주의 종들은 복음을 왜곡하는 사이비 종교지도자들에게 많은 핍박과 순교를 당하며 기독교가 오늘까지 이어져 왔는데 21세기에 들어와서는 그 속임수가 극에 달하여 상상할 수 없는 영적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

소아세아 교회에 있는 일곱 교회 중에는 믿음을 잘 지킨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교회 같은 좋은 교회도 있었지만 반면에 라오디아 교회처럼 뜨겁지도 차지도 아니한 중립노선을 걸어가는 기회주의적 교회도 있었고 오늘 본문에서 읽어보는 사데 교회처럼 주님으로부터 “죽은 교회” 라고 꾸중을 듣는 교회도 있었습니다. 자식이 부모로부터 꾸중을 들으면 분명 부모님은 아무 이유 없이 나에게 어려움을 주기 위해서 꾸중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내가 무엇을 잘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압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꾸중을 들으면 무언가 신앙생활을 잘못했기 때문에 그런 책망을 받으므로 돌아서서 회개해야 하는데 사데교회 성도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럼 과연 사데교회 사람들은 어떤 잘못을 했길래 “죽은 교회” 라는 말을 들었을까요? 교회란 건물을 말함이 아닙니다. 성도들을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주의 말을 듣고 순종치 않았습니다. 본문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라고 했으니 라고 우리 속까지 모두 알고 계시는 주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살아있다고 떠들어도 하는 행위 즉 신앙생활 양상을 보니 그것이 살아 있는 성도가 할 일이 아니고 죽은 사람 즉 영적으로 아직도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그런 일들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데교회 성도들도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고 설교 듣고 헌금도 하고 성례식도 하고 성도의 교제도 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주를 봉사한다고 했지만 주님은 바른 신앙생활이 아니라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본문 2절에,’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라고 말합니다.

지금의 터키에 기원 1 세기에 존재하던 사데교회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경로로 사데교회를 죽었다고 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말은 단지 해위가 가증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몇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 복음을 전해도 건성으로 듣고 복음의 내용을 알지 못하면서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만은 남에게 자랑하고 열매가 없는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교리도 모르고 감격이 없고 기쁨이 없고 봉사와 전도의 열이 없는 그런 생활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저들은 나름대로 저들의 믿음이 옳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옳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주님에게 신앙을 인정받는 길은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살아가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보다 사람의 이성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인간의 이성으로 성경을 풀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합니다. 동정녀 탄생을 이성으로 어떻게 해석합니까? 죽은 사람의 부활을 이성적으로 어떻게 입증합니까?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말씀인 성경은 피조물인 인간의 이성을 초월합니다. 인간은 아무리 지혜 있다고 해도 피조물에 불과하며 피조물은 조물주를 따라가지 못하며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어서 지혜가 극히 제한되어있습니다. 종이 한 장이 앞에 가리어있어도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지혜입니다. 5분 이후에 일어날 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지혜입니다. 그런 인간이 자기의 이성으로 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미련한 인간은 자기의 이성으로 성경을 판단하고 하나님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피조물은 조물주에게 순종할 것 뿐입니다.

사데교회가 <죽었다>고 하는 주님의 책망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살아 있다고 하나 실은 죽었는데 그 첫 이유가 “행하는 것을 보니 죽은 것” 이라고 했습니다. “행한 것을 본다” 는 말은 신앙생활이 온전하지 못함을 말합니다. 주님에게 숨겨질 일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말은 저들의 믿는 도리를 모르거나 아니면 알아도 머리로만 알고 실천생활이 없기 때문인데 어느 편이건  모두 주님의 책망꺼리입니다. 믿음의 도리를 모르면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없고 따라서 신앙생활을 바로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자녀라고 하면 그는 분명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의 책망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도 아들이 아버지의 뜻과 상관없이 나가서 마음대로 악행을 행하면서 “나는 아무 집 아들이라” 고 하면 이는 분명 가문을 더럽히는 결과로 아버지의 혹독한 책벌을 받을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그러하거늘 영의 아버지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기에 교회마다 투철한 교리 공부가 필요합니다. 믿는 도리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한국에서는 30년 교회를 다닌 성도도 아는 것이라고는 “예수는 우리 구주인데 우리의 죄를 인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이고 예수 믿고 죽으면 천당에 가서 영원토록 산다“ 고작 이런 정도의 신앙이라면 자세한 기독교의 심오한 교리들을 알 턱이 없습니다. 설교가 너무 현세 중심적이고 도덕중심이고 바른 요리 문답 공부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왜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죄를 용서하게 되는지? 그분이 어떻게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는지?  성령은 어떻게 역사하는 것인지, 성례식의 참 의미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불신자에게 전도할 때도 아무것도 기독교의 교리를 전할 수가 없는데도 남에게 그가 교리를 다 아는 것처럼 자처합니다. 이런 사람을 오늘 주님은 죽은 교회라고 책망합니다.

이런 점을 감안한 1563년의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Zacharius Ursinus 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만들면서 주일마다 반드시 몇 문제씩 매주 교리를 공부하도록 작성했습니다. 전문 129문으로 되어 있는 이 요리문답은 가장 개혁주의적인 신조이지만 일년에 쉰 두번 다가오는 주일, 매 주일마다 예배하기 전에 기독교의 교리 두 문제 혹은 세 문제씩 공부하도록 했습니다.

1월 첫 주일에는 제1문 “살거나 죽거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이뇨?” 이렇게 물으면, 대답은 “죽거나 살거나 나의 유일한 위로는 몸과 영혼이 살거나 죽거나 내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나의 미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피로서 나의 모든 죄의 값을 다 갚아주시고 마귀의 지배에서 나를 완전히 해방시켜 주셨다. 그는 나를 잘 지켜 주시기 때문에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뜻이 없이는 머리털 하나라도 나의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모든 것이 나의 구원을 위한 그의 목적에 부합됨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성령에 의하여 그는 영생을 나에게 보장해 주시고 나로 하여금 이제부터는 뜻을 다하여 그를 위해 살도록 준비해 주신 것이다.” 라고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제2문에는 “당신이 이 위로의 축복 가운데서 기꺼이 살고 죽기위해서는 몇 가지를 알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Heidelberg Catechism 은 답하기를  “세 가지인데, 첫째 나의 죄가 커서 비참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요, 둘째는 내가 어떻게 나의 모든 죄와 그 비참한 결과에서 해방되었는가를 아는 것이요, 셋째는 그러한 구속에 대하여 내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감사가 무엇인가를 아는 일이다“ 라고 하니 이 얼마나 명확한 교리인가요? 이런 교리들을 교인들에게 매주일 체계 있게 가르쳐주면 이단이나 <사이비 사역자나 부흥사> 를 그냥 둘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교리를 모르니 교회마다 분규가 시끄럽고 교계가 어지러운 것입니다.

물론 다른 신앙고백서도 요리문답이 붙어 있지요. 가령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대요리문답 196문과 소요리문답 107문이 붙어 있습니다. 소요리문답은 원래 만든 사람들이 무식한 사람들이나 초등학교 학생들을 위하여 제정한 것이고 비교적 작아서 “소요리문답” 이라고 부르고 “대요리문답” 은 교회론까지 포함하여 포괄적으로 기독교의 믿는 교리를 총망라하여 체계화하여 “대요리문답” 이라고 하고 성도들에게 믿는 도리를 가르쳐 주는 것인데 매주 몇 문제씩 가르치도록 구성된 것이 아니지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16세기 종교개혁기에 나온 가장 정확한 개혁주의 교리를 아는데 도움을 주는 좋은 신조중 하나입니다.

오늘의 문제는 교리 공부가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단상에서 비성경적인 내용을 선포해도 그냥 묵과 합니다. 미국의 정통장로교단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할 수도 없지만 그런 일이 생기면 그 목사는 당장 파면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정통장로교단은 문자 그대로 정통을 지켜오는 교단입니다. 한국 교회 중에 말씀을 바로 전하고 권징을 바로 하고 성레식을 바로 행하는 교회는 보기 드뭅니다.

또한 사데교회가 "죽은 교회“ 라고 책망 받은 이유는 믿는 도리를 알되 머리로만 알고 그런 교리를 믿지도 않고, 따라서 그런 교리대로 실천하며 살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학에서 말하는 소위 <역사적 신앙>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은 책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기독교 교계에는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기에 무르익은 가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살아 있는 교인, 일을 많이 하는 교인, 모범적 헌신적인 교인”이라고 자부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은 교인입니다. 죽은 교인은 영적생명력이 없습니다.

죽은 교회의 특징은 그리스도의 교리의 착념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말하면서 교리에 착념하여 저들을 바로 인도하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본문에 보니 “옷을 더렵혔다” 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룩한 의의 옷을 버리고 자기 자신의 옷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의로서는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를 못합니다. 주님의 의를 저버렸고 말씀을 떠났다는 말이니 그 행실이 온전할 리가  없으며 따라서 주님의 책망을 받게 마련입니다.  

이사야 64:6에 “우리의 의는 모두 더러운 옷 같다"고 합니다. 우리의 옷을 입고 어찌 하나님에게 칭찬받기를 기대하겠습니까?  또한 이사야 4:1에는 “그날에 일곱여자가 한 남자를 붙들고 우리가 우리의 떡을 먹으며 우리의 옷을 입으리니 당신의 이름으로 일컫게 해달라” 고 애원하는 모습을 읽어보는데 마치 사데 교인처럼 위선적인 교인들, 혹은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나와서 참 성도인척 위장한다는 말입니다.

2절에는 ‘일깨워“ 라고 했는데 영적 수면에 취한 자들입니다. 신앙생활에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잠을 자면 반드시 사탄이 침노합니다. 실수하여 실족하는 이들은 모두 신앙생활을 하다가 잠을 자던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에 잠을 자도록 자장가를 불러주는 목회자들이 수두룩 합니다. 어떤 목사는 ”교회에서 죄 이야기를 말하지 말라“ 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죄 이야기를 하면 교인들이 기분을 상하여 다음 주일에 교회에 출석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 교회가 어떻게 성장하겠는가?“ 혹은 ”피곤하면 하루쯤 교회에 빠진다고 하나님이 벌을 주시겠습니까? 하나님도 우리 피곤한 사정을 잘 아시는데...“  ”기도하면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니 성경을 볼 필요가 어디 있는가? 기도만 하면 된다“ 라고 하는 요즘 소위 Contemplative Meditation 을 주장하는 영성훈련가들의 말, “찬송가는 너무 진부하고 장송곡 같으니 세상에서 부르는 템포가 빠르고 신나는 음악으로 찬송가를 대체하자“는 퇴폐한 사이비 목사들, 이 모든 일들이 교회를 영적 수면으로 빠져 들게 합니다.

교회는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 생활이 침체해서는 온갖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요즘은 목회자의 말이라고 비판없이 믿으면 큰 낭패를 당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너무도 성경을 왜곡하는 분들이 많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도 않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면 거짓말을 가끔하게 되고 이들은 주께서 피로 사신 성도들에게 독약을 먹이는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신앙생활하기가 어럽다는 것입니다. 어떤 여 성도님의 말대로 목사마다 다른 소리를 하니 누구의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성경을 체계있게 공부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통달하면 누구의 말이 진리인지 자연히 분간하게 됩니다. 문제는 성경공부나 요리문답을 등한히 하는 타성에 젖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타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II. 죽은 교회를 향한 책망
   죽은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은 대단합니다.  “만일 회개하고 일깨지 아니하면 주님이 도적 같이 임하신다” 고 했습니다. “도적같이 임” 하는 것은 칭찬하기 위함이 아니라 심판 하시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믿는 자에게는 도적같이 임하지 못한다” 고 살전 5:4에 말합니다. 그러나 벧후 3:10에는 “도적같이 임한다” 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성경구절을 놓고 서로 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 해결은 간단합니다. 잘 믿는 자에게는 도적같이 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깨어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고 있으니 도적같이 임할 수 없습니다.  방심하고 세상의 연락에 취해 있는 자에게는 도적같이 임합니다.  

여기 본문에서 사데교회를 향하여 책망하는 말씀 중에 “도적같이 임한다” 는 말은 심판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요즘 교회에는 “심판” 이란 말이나 “지옥” 이란 말을 강대상에서 들어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청교도의 신학에서는 지옥과 천당의 개념이 뚜렷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절대 거룩한 분이고 그래서 죄를 참지를 못하는 분임을 설교하는 목사도 드물고 그런 설교를 듣는다고 해도 예배를 마치고 나면 모두 잊어버리고 맙니다. 세상에 동화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가르치기를,  “본질적인 것은 간직하고 지엽적인 것은 문화에 동화한다” 고 말하지만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지엽적입니까?  하나님의 법가운데는 casuistic law (사례법) 이 있고 apodictic law (기본법) 이 있습니다. 사례법은 어떤 사건 중심으로 그 사건에만 해당되는 법입니다. 가령 남의 양을 도적질하면 4배가 갚아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양을 도적질 한 경우에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또 민사법이니 각 나라마다 헌법에 참조는 하겠지만 지금도 그대로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신정국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신 민사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란 말이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 라는 말은 시대를 초월하여 어느 때 이건 모든 사람,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모든 인류가 지켜야할 기본 법입니다.

또한 성경을 해석할 때 관습 (Custom) 이 있고 원칙(Principle)이 있습니다. 원칙과 관습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가령 집집마다 외부 손님을 맞으면 발을 씻어주는 것은 당시 Palestine 에 국한된 관습이지 그것이 시대나 문화를 초월해서 항상 남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라“(요 4:24) 는 말은 그런 관습법이 아닙니다. 원칙 (Principle) 입니다.  원칙의 문제는 타협이 있을 수 없고 어떤 이유로든지 그 원칙은 변개될 수 없습니다.

그러하다면 예배의 어느 부분이 ”진수“ 이고 어느 부분이 ”지엽“ 적입니까?  대부분 교회가 음악에 대해서는 자유하다고 생각하지만 예배시의 음악은 예배의 일부가 아닙니까?  예배란 설교만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예배 전체 요소를 모두 내포합니다. 기원, 묵도, 설교, 창양, 찬송, 헌금, 성례식, 축도 어느 하나 지엽적인 것이 없습니다. 모두 진수이며 필수입니다. 지엽적인 것을 말하려면 예배 장소와 예배 시간 같은 것일 것입니다. 이것들은 우리들 마음대로 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당회에서 결정하는 대로 시행하면 될 것입니다만 개혁주의신학은 예배를 성경적으로 드리는 것을 가장 중요시 합니다.  

요즘 기독교 교계가 타락하고 성직자가 타락하여 남의 웃음꺼리가 되어 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예배를 가볍게 생각하고 사람의 생각대로 드리기 때문입니다. 교회마다 극장으로 변해 갑니다. 이유는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예배는 수은자 중심이 아닙니다. 예배는 항상 시은자이신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대상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법은 신령과 진정으로 거룩하게 예배하는 길이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영적 예배로 성경대로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데 교회는 나름대로 그들도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렸고 또 설교도 했을 것이고 성례식도, 시편을 노래하며 찬미도 불렀을 줄 압니다. 그러나 주님은 책망했는데 그 책망은 가장 가혹한 책망으로 “도적같이 임하겠다” 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도적 같이 임하여 무엇을 하신다는 말인가요? 심판하신다는 말입니다.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III  교회가  살려면
    죽은 사데 교회가 살 길은 없을까요?  사는 길은 회개하는 길입니다. 본문은 회개하라고 가르칩니다. 흰 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유혹을 이기는 자 신앙을 지키는 자는 흰옷을 입을 것이며 생명책에서 흐리지 않으시겠다고 신실하게 약속하십니다. 회개 운동입니다. 오늘의 교계에는 회개 운동은 거의 없고 대개 무슨 부흥운동이니 영성운동뿐입니다. Rick Warren 목사의 책에는 “회개” 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 뿐 만 아닙니다. 요새 나오는 모든 best seller 기독교 서적은 하나같이 현세 중심이고 현세의 성공중심입니다. 중고생들이 많이 보고 있는 “Secret ” 이라는 책도 모두 예수를 이용하여 인생에 성공하는 법을 가르쳐주려는 내용일색 입니다.  이런 책들이 청소년들의 영혼을 병들게 해도 교회의 목회자들은 오히려 이런 서적을 장려합니다. 이것이 퇴폐한 현대의 교회의 현주소입니다.

교회가 살려면 몇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깨어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말은 성경 교리에 밝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단이나 사이비 기독교가 침투할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개혁주의 신앙이 철저하게 전파되어야 합니다. 성경과 함께 개혁주의 신조들을 읽어야 합니다.  체계적인 성경공부는 필수입니다. 혼자서 공부하는 것보다는 믿을만한 개혁주의 전도자들과 같이 공부하면 좋을 것입니다.

둘째, 성경대로 살아야 합니다. 성경대로 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율법주의” 라고 매도합니다. 어느 나라의 국민이건 헌법을 지킵니다. 천국 시민은 하나님의 법인 성경말씀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은혜를 아는 것은 율법을 아는데서 출발합니다. 율법을 모르고 은혜를 알 수 없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그것들을 문자 그대로 지켜서 구원을 얻도록 제정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목적이 여럿 있지만 가장 중요한 골자는 첫째, 율법을 통해서 내가 죄인된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니 율법은 내가 죄인된 것을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둘째로, 율법의 목적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합니다. 내가 다 지키지 못할 율법을 내 대신 완전하게 십자가상에서 그의 능동적 순종으로 모두 지켜주신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율법의 목적은 우리 생활의 지침입니다. 우리가 천국 시민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표준과 규범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율법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14장에 15, 21, 23, 24 절 등에서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따르는 자요 내 제자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폐기론자” (antinomian) 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구원을 얻었으니 이제는 율법이 필요 없다고 가르치는데 이는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혼동한 것입니다.

셋 째로,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달나라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즉 세상 사람들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자칫 성도는 세상의 물결 따라 흘러가기 쉽습니다. 실제에 있어서 오늘 교회가 얼마나 세상에 물들어 있는가를 보십시오. 교회에 다방을 차려 놓는 교회도 있습니다. 예배는 세상의 풍속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열린 예배” 라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뉴스에는 시카고에 있는 Willow Creek 교회에서는 그간 열린 예배를 실험해 보았는데 이제는 별로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Christianity Today” 잡지가 보도합니다.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질이 문제인데 바로 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벗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의 일을 해야 하며 절대로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넷째로. “흰옷을 입으라” 고 본문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옷“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세 가지 직분을 가지고 계십니다. 제사장직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제사장 직입니다. 그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 그리스도는 선지자 직분과 왕의 직분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직분을 제대로 가르치는 교회도 드뭅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는 주님의 세 가지 직분을 모두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등한히 하면 주님의 선지자 직분을 믿지 않는 것이요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주님의 왕권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덧입고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을 입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죄의 가리움을 받았습니다. 기독교는 구약부터 모두 “가리움, cover" 의 종교입니다. 아담이 범죄하니 짐승의 가죽으로 몸을 가리었습니다. 속죄소도 백성의 죄를 가리는 목적입니다. 속죄일의 희생양도 백성의 죄를 그에게 짊어지게 하여 죄를 가리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흰 옷을 입을 때 주님의 책망을 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덧입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살아 있는 교회”라는 말을 들게 될 것입니다.


결론
오늘 계시록 3:1-6 말씀을 통해서 왜 사데 교회를 주님이 “죽은 교회” 라고 하셨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사대 교회는 형식만 있고 진액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실속이 없는 형식적인 교회여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도 된 줄로 착각했던 교회여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교리가 없고 신앙생활에 열매가 없는 교회라서 주님으로부터 “당장 심판하시게다”는 혹독한 책망을 들었던 교회입니다. 이것이 어찌 2000년 전 소아세아의 적은 교회 였던 사데교회에만 국한된 말씀이겠습니까?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잘못된 신앙노선을 걷고 있는 현대교회를 향한 우리 주님의 책망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떠합니까? 주님에게 책망 받을 자리에 있지나 않은지요? 주일마다 교회에 출석한다고 “그리스챤” 이라고 자부하지 마십시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대요리문답서 제61문에 보면,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가면 모두 구원을 얻는가?” 라고 질문하는데 그에 대한 대답은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가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무형교회에 속한 사람만 구원을 얻는다” 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주님의 책망의 대상입니다. 바른 개혁신앙을 지켜 나갑시다. 사데 교회를 향한 책망이 우리에게 임하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합시다.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아 가십시다. -죽은 교회, 끝-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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