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옥타비우스 윈슬로우)
개혁주의 자료 2014. 3. 29. 04:37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옥타비우스 윈슬로우)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도에 들어갈 담력을 얻습니다.
이 피는 예수님께서 신성의 모든 위엄과 능력을 소유하신 채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흘리셨던 피입니다. 이 피를 힘입어 우리는 성소에 나아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정확하게 무슨 뜻입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의 기도는 과연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까?
첫째로, '예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줌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없는 사람으로
서도록 만들어줍니다.
잘 아시는 대로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으면
우리는 결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죄로 가득 찬 우리가 어떻게 감히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마치 나방이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거니와 죄를 씻지 않고서는 절대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29)
죄를 씻지도 않고 거룩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가는 일은
끔찍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모든 죄를 씻고 우리의 모든 허물을 도말함으로써
가로막혔던 모든 담을 허물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끗하게 씻긴 상태로 지성소에 나아가게 됩니다.
겸손히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드리신 희생 제사에
모든 소망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여러분의 발목을 잡던 모든 어려움들이, 여러분의 길을
가로막아놓던 높은 담들이 다 제거되고 허물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이 모든 일을 성취하였습니다.
이제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 많은 여러분 사이에는 막힌 담이나 장애물이 없으며
걸리는 것도 없습니다.
용서받는 죄인으로써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여러분을 가로막아 설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가장 친밀하고도 달콤하며 거룩한 교제를 나누려는 여러분을
가로막고 방해할 것은 더 이상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었고 여러분의 죄책을 제거하였으며,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를 갈라놓는 유일한 장벽인 죄를 제거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예수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케 씻어 줌으로써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성소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거 되지 않은 죄에 대한 죄책이 양심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도 양심에 죄를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고
씻음 받지도 않은 죄를 가지고 잇으면, 지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이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죽음을 새롭게 인식하고 붙잡게 되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로 자신의 양심을 가지고
나와 정결하게 하는 샘에 자신을 씻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면,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그를 막고 방해했던 것들은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보혈에 적셔진 마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보이지 않는
거룩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게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거룩한 교제를 나누는 일의 가장 위대한 비밀입니다.
바로 우리의 양심을 그리스도의 보혈의 샘물에 씻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에서 상함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피에 우리의 양심을 적시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자신이 너무나 무가치한 죄인이라는 생각에 휩싸여
하나님께 나아갈 용기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이 영적으로 너무나 멀리까지 나아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러분을
받아 주지 않을까 봐 걱정이십니까?
두려워하지도 걱정하지도 말고 그리스도의 삽자가 아래로 나아오십시오.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인하여 이제 여러분은
얼마든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을 경험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의 기도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하여
한 가지 견해가 더 있습니다.
'예수의 피'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과 담력을 주는 공로를 우리에게 제공해 줍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만한 공로가 전혀 없습니다.
오직 속죄하신 구세주로부터 제공되는 공로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피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피의 공로로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 앞에 용납을 받고 우리의 기도가 들으심을 얻으며,
우리의 간구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우리의 유일한 공로는
우리자신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제공해 주는 신적인 공로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공로가 전혀 없으며 하나님의 진노 외에는 달리 무엇을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피에 우리를 의탁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는
모든 공로를 그리스도로부터 얻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피'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사용할 수 있는 탄원과
논증도 제공해 줍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면, 수천가지의 생각들이 들고 일어나서
우리의 의지를 꺽어 놓고, 수천 가지의 어려움이 합세하여 우리의 길을 가로막습니다.
헤아리 수 없이 많은 우리의 죄와 단점, 결점과 부족이 갑자기 한꺼번에 몰려들어,
마치 집요하게 나타나는 유령들 처럼, 우리를 정면으로 노려보면서,
우리 같은 사람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자격도 없다고 공격을 퍼붓습니다.
이 때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치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히 여자를 예수님 앞으로 끌고 나와 정죄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아무말 못하고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듯이,
우리를 방해하던 모든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오직 우리와 주님만 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로써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우리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물리치고
제거하셨습니다. 오직 한 가지로써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한 가지는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흠없는 어린양의 피! 우리의 모든 죄를 씻는 피! 은혜의 보좌를 적시는 피!
휘장 안쪽에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는 피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이렇게 우리를 위하여 일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아무리 많고
악하다고 할지라도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요!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 가운데 다른 모든 복보다 뛰어난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예수님의 피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자신의 많은 죄와 허물 때문에
지성소로 감히 들어가거나 눈을 들어 바라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저 밖에서 서성이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피가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니오.
예수님의 피는 여러분의 모든 죄를 씻고도 남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면, 그 피는 여러분을 하나님의 임재로 인도하고
여러분의 모든 죄를 확실하게 사해 주며, 죄로 말미암아 혼란스럽던 여러분의 마음에
평강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화목하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을 활짝 열어 줄 것입니다.
십자가 곁에 서 있는 여인들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 19:25)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경건한 구경꾼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모여 있는 장소는 슬픔의 장소이면서도 말할 수 없이 소중하고
바람직한 장소였습니다. 전에도 예수님이 피곤하고 궁핍할 때 여러 번 일꾼으로 섬기면서
예수님을 가까이 모셨던 적이 있었던 이들은, 여성에게만 있는 매우 섬세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조용하고도 온유하게, 약간의 거리를 두고, 예수님으로부터
복을 얻거나 예수님을 섬기기 위하여 예수님을 가까이하였습니다.
이들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이들의 섬김은 쓸데없이 참견하거나 다른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섬김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온화하면서도 아침 이슬처럼 촉촉한 사랑과 섬김으로, 조용하면서도
밝은 햇빛처럼 원기를 북돋아 주는 사랑과 섬김으로 예수님의 외롭고도 참혹한
공생애 길을 하면서 거룩한 동정심으로 그 길에 광채를 더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극도로 궁핍해지고 기진맥진하실 때마다 '자기 소유로'(눅 8:3)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는 암울한 시간이 되자, 죽는 한이 있어도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따르겠노라고 맹세하고 다짐하던 제자들이 하나 둘씩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이 경건한 여인들은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서 십자가를 지키는
파수군처럼 십자가 아래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고통과 어둠과 출혈 속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동안 예수님의 생명이 서산의 지는 해처럼
서서히 꺼져 가는 것을 지켜 보았습니다.
이들이 십자가 아래 이렇게 모이게 된 것은 거듭나지 앟은 사람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깊은 사랑과 고차원의 생명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이 여인들에게 은혜의 기적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본래 이 여인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길을 잃고 영원한 지옥으로 달려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인이었던 그들을 찾아주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 여인들이 둘러 있는 바로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감당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예수님이 하나도 남김없이 감당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받아야 할 모든 고통과 형벌을 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대신 받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모든 고통은 바로 이 여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영혼에 깊은 슬픔을 겪으신 것도, 십자가 상에서 피를 흘리신 것도,
그리고 마침내 죽으신 것도 모두 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받고 사람들로부터 고문을 당하며 친구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원수들로부터 모욕을 당하는 동안, 그것도 칠흑 같은 어둠과 지진 속에서,
모욕과 저주 속에서 그 모든 고난을 담당하시는 동안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광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 19:25).
아, 이 여인들은 참으로 명예로운 여인들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이 모여 있는 장소는 참으로 모든 성도가 부러워할 만한 장소입니다!
그곳은 얼마나 풍성한 영적인 교훈을 내포하고 있는지요!
이제부터 전심을 다하여 그 곳에 내포되어있는 풍성한 교훈을 배우도록 합시다.
십자가 아래서의 죄 사함
인생에서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한 가지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나는 죄 사함을 받았는가? 내 죄는 용서받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남과 사람 사이에서 가장 큰 문제가 다름 아닌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죄를 용서받는다면,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손상시키지 않는 정당한 방법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가장 큰 문제가 종결되고, 하나님과 죄인이 완벽한 화목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게에서는 얼마나 놀랍고
기이한 사랑과 긍휼과 얼마나 거대한 능력이 함께 만나는지요!
십자가에서 만나는 이 모든 것들은 무한히 부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줍니다.
또한 죄인들의 죄를 사해 주시는 하나님의 뛰어난 위대하심도 함께 보여줍니다.
1. 죄사함의 은혜를 받는 자들
예수님이 피를 흘리며 매달려 계시던 십자가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속성을 가진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 있었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타락한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우리를 대표하는 것이며, 그러하기에 실상 우리가
거기에 서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철저한 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적의를 가지고 십자가 아래 모여든 사람들 중에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죄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그 입에는 저주하는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얼마나 끔찍한 설명입니까! 우리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의 위로와 소망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는 죄인이지만, 그것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은 죄인을 위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는 도덕적으로 흠이 많고 추하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에서
제외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비참한 죄인들을 위한 긍휼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죄인이지만, 그것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 받을 수 없는 영역으로 밀려나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가 하나도 없는 죄인들을 위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기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대적하는
원수들이었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생명과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죽인 잔인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 사람들보다 죄가 덜한 사람들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의 삶을 계속 살아간다면, 결국 우리는
영광의 주님을 죽인 이 살인자들의 범죄를 인정하는 셈이며, 사실상 우리 자신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면 이런 사실이 우리의 마음에 얼마나 강력하고도
엄숙하게 뼛속 깊이 느껴지게 되는지요! 또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살인자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얼마나 처절하게 느끼게 되는지요!
은혜로 그 마음이 새로워진 사람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살인자라는 사실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중에서도 자신이 가장 우두머리 범죄자였다고 느끼게 됩니다.
자신의 모든 죄가 예수님에게 전가된 것과 자신이 죄 사함을 받게 된 것은
구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사실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엄숙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은혜를 받은 사람은 누구나 다음과 같이 절규하게 됩니다.
" 내 죄가 생명과 영광의 주님을 죽였구나. 예수님의 머리를 가시 면류관으로 찌르고
예수님의 손과 발에 대못을 박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것도 결국 나였구나."
아! 우리는 죄 사함을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지요! 우리는 철저한 죄인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죄 사함의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여러분의 범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사해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빌라도 법정 밖에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막 15:13)라고
목청 돋우어 외쳤던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2. 우리의 대언자가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
두 번째로 숙고할 것은 죄인들을 위하여 죄 사함의 은총을 간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게 무지막지한 죄인들을 위하여 성부하나님께 죄 사함의 은총을 간구하신 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험한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으시는 구주, 고통 속에 죽어 가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저 무지막지한 죄인들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고통을 가하고 있었던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 무지막지한 죄인들이 조롱 섞인 말들로 쉼 없이
괴롭히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여러 말들로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
"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막 15:31)
그런데 이렇게 비열한 조롱을 들으신 바로 그분이 무지막지한 죄인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간구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이 자기 백성을 위하여 행하시는
공식적인 직무가 얼마나 놀랍고도 소중한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대언자'의 직무를 늘 감당하십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 2:1)
십자가의 모진 고통 속에서도 성자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 사이에는 여전히
상호 신뢰감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주목하십시오.
비록 성부하나님이 자신의 얼굴빛을 가리시고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지 않으셨으며,
마치 전쟁에 사옹되는 개들처럼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덤벼드는 원수들의 능력에
자신의 아들을 내어 주셨지만,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굉장히 감동적이고도 귀중한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징계와 고난 중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여러분의 손에 있는 고난의 잔을
입에 대기가 두려울 때, 고통스러운 일들이 연이어 생기는데도 하나님게서
얼굴빛을 가리고 여러분을 홀로 그 음산한 길을 걷도록 내버려 두실 때,
그 순간에도 여전히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또한 아무리 짙은 먹구름이 여러분을 덥고 아무리 혹독한 징계가 여러분에게 임하더라도,
하나님을 여러분의 아버지로 굳게 신뢰하며, 사랑과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따뜻한 품에 여러분의 지치고 상한 영혼을 쉬게 하는 것이 여러분의 특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제는 대언자이신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우리를 위하여 변론하셨는지를 주목해 보십시오.
옛님께서 죄사함의 은총을 간구하셨던 제단, 우리를 위하여 죄 사함의 은총을
호소하셨던 변론의 장소는, 자기 자신도 피를 흘리며 고통 속에 죽어 가고 있던
십자가 위였던 것입니다.
아, 십자가! 그곳은 위대한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철저히 부패하고
타락한 죄인들을 위하여 죄 사함의 은총을 간구하시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였습니다.
갈보리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바로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보배 피를 흘리고 계셨기에
얼마든지 그런 기도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갈보리 십자기 위의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법정에 서 있었던 것이기에 우리를 위하여 그런 기도를 올릴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 사함의 은총을 간구할 수 있었던 근거는
바로 주님 자신이 짊어지셨던 십자가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간구사하시는 귀한 은혜들은 한결같이 주님의 속죄 제사에
근거하고 있으며, 또 주님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받으신 고난과 죽음에 근거하고
응답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몸에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으며 그 심령에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주님은 사람의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사랑으로 자신의 원수들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기이한 광경을 바라보면서도 여러분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분명하고 또 얼마나 광대한지를 아직도 의심하고 염려하십니까?
이제는 그 모든 의심과 염려를 다 내려놓으십시오.
십자가에서 나타난 주님의 한량없는 사랑의 깊은 바다에 푹 빠지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외치십시오.
" 아, 주님의 사랑은 넓고도 깊어서 내 모든 죄를 덮고도 남는다.
주님의 그 사랑이 내 모든 죄를 도말한다. 다시는 그 어느 한 가지라도 보이지 않도록 하신다. "
주님은 자신을 죽이는 원수들을 향해서도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친구들을 향해서는 얼마나 더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천국에서도 여러분을 마음에 품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영광 중에서도 여러분을 위해 중보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시고,
여러분의 원수들이 이기지 못하도록 기도하시며,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복들이
여러분의 것이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을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십자가 아래서 (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저)
'개혁주의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칼빈 VS 아르미니우스주의 (0) | 2014.04.03 |
---|---|
최후의 상급 (에우세비우스) (0) | 2014.04.01 |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마이클 호튼 저 (김성웅 역) (0) | 2014.03.23 |
참 이스라엘 사람 (0) | 2014.03.18 |
빛 안에 있는 사람 VS 어둠에 있는 사람 (0) | 2014.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