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답이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며칠 전,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의 아픈 개인사에 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가 풀러 신학교에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글이었습니다. 그는 이 시대의 뛰어난 신학자이며 제게도 책을 통하여 탁월한 신학적 통찰들을 제공해준 분이기도 합니다. 그의 아내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런 아내와 살면서 미칠듯한 고독을 감내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결국 결혼 24년 만에 분노하며 떠나겠다는 아내를 그는 놓아 보내야 했습니다. 수년이 흘러, 아내는 외로이 심장마비로 죽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아들이 어렸을 때 엄마 때문에 불평을 하면 정신질환을 겪는 엄마와 사는 많은 아이들이 더 힘든 상황을 견디며 살아간다고 지적을 했었다고 합니다. 어른이 된 아들이 “아빠는 그때 30대 중반이셨잖아요. 난 겨우 7살이었다고요”라고 말해주었을 때 그는 자신이 아들에게 지나친 부담을 안겨준 것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그의 긴 이야기(그의 삶은 아무리 길게 말한다고 해도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긴 세월이었겠지만)를 읽으면서 저는 이런 고난이 그의 신학을 깊이 있게 만든 요소였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사의 몇 분이 생각났습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인 윌리암 캐리(1761~1834)의 아내 도리시 캐리도 인도에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아들이 죽은 후에 정신질환을 앓기 시작해서 하나님께서 품으로 데려가시기까지 마지막 12년을 심각한 정신질환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스코틀랜드 교회사에 탁월한 신학자요 목사였던 토마스 보스톤(1676~1732)의 아내도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마지막 10년을 보내고서야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개혁신학의 거성인 벤저민 워필드(1851~1921)는 신혼여행에서 아내가 번개를 맞고 불구가 된 이래 평생 아내를 간호하기 위해서 두 시간 이상 집을 비운 적이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설명할 수 없는 인생의 아픔들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신실하고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고 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깊이는 그들이 겪은, 답 없는 고난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정답을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욥의 세 친구들이 우리와 똑같이 나눠가진 성향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답에서는 깊이가 나오지를 않는 것 같습니다. 깊이 따위는 필요 없으니 편하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천박하고 얄팍한 인생들로 만들고 싶어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마지막 말이 제 가슴에 울립니다. “나는 기독교 신자다. 사람들은 내가 이런 질문에 답변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난 이런 질문에 뭐라 답변해야 좋을지 전혀 모른다. 내가 기독교 신학자로 살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우리가 이런 질문에 답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 정도가 될 것이다......정답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기독교를 설명으로 폄하시킬 뿐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답이 없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답이 없이 사는 방법을 배우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정말 훌륭한 일이 될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답을 모른 채 계속 살아간다는 것이다. 너무 쉽게 말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나의 주장이 최소한 내가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내 인생이 왜 무진장 흥미로운지를 설명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이 답 없는 인생을 오늘도 힘겹게 살아가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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