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와 성찬(제46강 막 14장22-24절)
기독론 2015. 7. 4. 03:56제46강 막14장22-24절 세례와 성찬 / 박영선 목사
제46강 막14장22-24절 세례와 성찬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성례는 그 자체가 구원의 방편은 아니지만 믿는 자들의 유익을 위하여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은혜의 방편이다. 우리는 성례를 행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확인하고 그분의 백성 됨과 우리가 그에게 속한 자임을 확인한다. 교회는 성례와 이 예식의 내용을 충실히 가르쳐야 한다.
Q 시각교정을 위한 화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최후의 만찬’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신 궁극적인 의도는 종말에 하나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죄로 말미암아 고난과 형벌의 상태에 있습니다. 이 형벌의 자리로부터 그들을 구해내는 것, 즉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일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죄 문제가 해결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님의 대속 죽음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곧 피흘리신 죄 씻음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귀에 들리며 그의 요구가 우리 영혼을 뒤흔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요구와 명령에 반대되는 길을 가면 마음이 거북해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원을 얻은 표요 성경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있는 백성이기 때문에 얻게 된 감각인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실제적으로 실현 가능하게 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특별히 십자가와 부활로 요약되는 대속적 죽음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에서 돌이켜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행 8:12) 하나님나라에 관한 일은 늘 예수를 믿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음으로써 죄 씻음을 통과해야만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담대히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행 28:31) 또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간의 밀접한 관계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 선포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죄사함을 위한 대속적 죽음으로서 실제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창조’라는 공통분모로, 하나님나라의 선포와 예수님의 죽음은 직결되며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예수님의 죽음에 의하여 실제로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 즉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하신다는 이 구원의 약속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실제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사도들의 선포는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선포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공관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중심 메시지가 하나님나라인데,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들의 설교를 보면 하나님나라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대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중심 메시지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설교의 주제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기점으로 하여 하나님나라의 선포에서 예수님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으로 달라지고 있는 사실을 통해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 16:21, 참조:막 8:31, 9:31, 10:33). 즉,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던 그 예수님이 이제는 사도들에 의하여 하나님나라 선포의 대상과 내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유익을 위한 성례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구체적인 열매로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으며, 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선포와 죽음을 신앙고백하는 것으로 그 존재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고백의 표현으로 교회는 규칙적으로 세례와 성찬 예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와 성찬 예식이 없는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가 아니며, 비록 성례 의식이 행해지고 있더라도 참여하는 자들이 그 예식의 내용과 의미를 모른 채 형식적으로만 참여한다면 바른 교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례는 그 자체가 구원의 방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신앙의 유익을 주기 위하여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하나의 도구입니다. 로마 교회는 일곱 가지 성례를 갖고 있었으나 개혁주의 교회는 세례와 성찬, 이 두 가지만을 가리켜 성례라고 합니다.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교회에서 지키라고 명하신 항구적인 제도입니다. 신자들은 성례를 시행함으로써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확인하고 성례를 통하여 그의 백성됨과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성례는 교회의 공적 모임에서 시행되며 그 의식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결속되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죽음과 부활에의 동참, 세례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죄를 씻는 의식이며, 실제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의미하는 의식입니다. 세례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베풀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복종하겠다는 진실한 고백을 하는 자들에 한해서 비로소 베풀게 되며 신자의 어린 자녀들에게도 베풀게 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2:12을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함으로써 세례를 ‘함께’라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물세례 아래로 들어가심으로 죄인인 우리와 동일시된 것 같이,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과 우리가 동질화됨으로써, 이제 우리 역시 죽음을 이기고, 사망이 우리를 붙잡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동일시되고 동질화되면 그와 함께 죽음에도 가지만 그의 죽음은 곧 부활로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아 그와 함께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는 자리에 동참하고 그와 ‘함께’ 세례를 받아 그와 함께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는 자리에 동참하고 그와 ‘함께’ 하나님 안에서 새로 부활하는 자리에까지 동참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골로새서 2:12의 “‘함께’ 장사한 바 되고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일시’ 되어 물 세례를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그와 ‘동일시’ 되어 그 안에 들어감으로써, 그가 사망을 통과한 일에 내가 동참한 자가 되고 싶다는 신앙고백의 행위가 바로 ‘세례’입니다. 연합되기 위해서는 동질화되고 동일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례를 ‘연합’이라는 말로 많이 일컫기도 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 6:3-8).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죽는 자리에 동참하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 부활하는 자리에까지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자로 다시 살기 위해,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죽음의 자리로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내 이름만으로의 죽음이라면 죄값으로 죽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끝이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이 아니며, 사망이 그를 붙들 수 없는 분이며,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분이므로 이제 내가 그분의 죽음에 동참하면 그 죽음이 끝이 아니고 부활로까지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가 갖는 뜻입니다. 이 세례의 효능은 시행하는 순간에만 나타나는 것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은혜의 내적 역사는 세례집행 전이나, 그 순간이나, 그 후에도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에 상관없이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또한 이 세례는 오직 한 번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의식이 집행될 때마다 그 의미를 우리 마음에 다시금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 죽음의 의미, 성찬
그러면 성찬은 무엇입니까? 주의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대로 그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나누는 예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잘 설명하신 부분은 최후의 성만찬 석상에서였습니다. 이 성만찬에서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떡을 떼는 일과 포도주를 붓는 행위이며, 둘째는 그 행위에 이어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눅 22:19)과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 (막 14:24)라는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특별히 잔의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구약에서 가르치고 기다려왔던 구원의 내용이 이제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성취되고 있음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이라는 표현은 이사야 53:10-12을 인용한 것으로, 예수님께서 자기의 죽음을 백성들을 위해서 고난받는 종의 역할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난받는 주의 종이란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신 매를 맞고 자기 목숨을 대속의 제물로 주어서 많은 죄인들을 의롭게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잔의 말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언약의 피’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드린 언약의 제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는 장면이 묘사된 출애굽기 24:8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세가 했던 것처럼 이제 그 다음날 이뤄질 자신의 피흘림으로써 제자들을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레미야 31:33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의 언약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하고 남은 자들과 새로운 언약을 세울 것임을 예언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바로 이 새 언약의 제사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언약을 세우리라“ (렘 31:31).
이상에서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보았고 자신의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창조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것이 성찬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이 행해질 때는 반드시 그 행위와 함께 그 행위를 설명하는 말씀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성찬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추억하는 기념행사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이 예식이 행해지는 곳에서 그리스도 죽음심의 공효(功效)가 실제로 적용되도록 성령님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성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성령의 역사를 기대함이 없이 아무렇게나 참여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본문 되짚어보기
1. 하나님나라 백성의 창조는 어떻게 성취됩니까?
2. 신자들이 성례를 시행함으로 확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3. 성찬을 이루는 두 가지 요소인 행위와 말씀은 각각 무엇인지 본문에서 찾아 적어 보십시오.
행위:
말씀:
깨달음에 깊이 더하기
세례받았던 때의 감격과 느낌을 서로 이야기 해봅시다.
출처: 개혁주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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