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박일민 교수
기독론 2015. 7. 16. 20:55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1) / 박일민 교수
하나님은 졸거나 주무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늘 깨어서 일하고 계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하시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셨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계시는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계획을 하시는 일과, 계획을 실행에 옮기시는 일과, 계획이 차질없이 진행되도록 간섭을 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이것을 각각 작정, 창조, 섭리라고 부른다. 이 중 작정과 창조에 대해서 다루되 본호에서는 작정, 다음호에서는 창조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작정의 대상과 목적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하시는 대로 역사"하는 분이시다(엡 1: 11).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작정의 대상이나 범위, 그리고 그 성질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을 그 대상으로 한다. 하찮게 보이는 풀 한 포기, 새 한 마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사람이나 국가나 온 인류에 이르기까지와 바다와 바람과 햇빛과 비 등 무생물까지도 하나님의 작정에 포함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작정의 범위는 우연하게 보여지는 사소한 일에서부터 생사화복이나 인류의 흥망성쇠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구체적인 일들까지를 포함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기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며(마 6:26), 참새 한 마리라도 허락없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는 이(마 10:29)가 하나님이시다고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까지 헤아리시면서(마 10:30) 그 하나라도 상치 않게 하신다고 하셨다(눅 21:18).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게"(행 17:26) 하신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자신 이외의 어떠한 것에게서도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오직 자기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만 작정을 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선하고, 변함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작정도 항상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향으로 진행되며(롬 8:28), 불변한다. 출애굽 40년을 보자. 40년 세월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기간이었다. 그러나 그 기간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철저한 훈련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가나안 원주민들에게는 땅을 내주고 쫓겨가야 할 정도로 죄악이 성해질 때를 기다리는 기간이었다. 40년 세월은 모든 일이 합력하여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의 과정이었다. 바벨론 포로생활도 마찬가지이다. 타국에서의 70년은 슬픔과 탄식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이 70년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다시는 여호와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가지도록 하는 기간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작정은 합력하여 선이 되어지게 한다.
하나님의 작정이 합력하여 결과적으로 선이 되어지고, 특히 그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어떠한 고통과 역경 속에 놓일 때에라도 큰 위로와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2. 작정과 예정
사도 바울께서는 하나님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라고 했다. 이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작정 중에서도 사람을 향한 작정에 특별한 강조를 두고 있다. 그리고 사람의 모든 것들 중에서도 영혼의 구원, 즉 사람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작정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의 특별한 관심사인 사람의 구원에 관한 작정을 흔히 예정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작정은 만사, 만물(萬事, 萬物)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가리키는 넓은 의미를 가진 말로 사용되어지고, 반면에 예정은 이성적인 존재의 영원한 운명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를 가진 말로 사용되어진다. 사람의 영원한 운명에는 영생과 영벌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에도 영생을 위한 예정이 있고, 영벌을 위한 예정이 있다. 영생을 위한 예정은 선택이라고 부르고, 영벌을 위한 예정은 유기(遺棄)라고 부른다.
(1) 유기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하고 의롭게 지음을 받았지만, 먹지 말라는 열매를 먹음으로 인해서 죄를 범했다. 사람은 그 죄의 댓가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육체적인 사망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을 향해 살아날 수도 없고, 살아나기를 바랄 수도 없는 영원한 형벌의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말하기를 "허물과 죄로 죽은 나를 살리셨다"(엡 2:1)고 했다. 그리하여 사람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다 악해졌다. 그리고 죽은 시체가 시간이 지나면 점점 더 썩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것처럼, 사람의 죄는 점점 더 관영해지고 악해졌다.
사람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되, 사람에게 자유로운 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사람이 그 의지의 남용으로 죄를 범하거나, 죄 가운데서 점점 더 악해지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그것을 막지 않으시기로 예정을 하신 것 때문이었다.
이 사실은 요셉이나 바로의 예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요셉의 형들에게는 요셉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는 마음을 막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 방법을 통해서 요셉을 미리 애굽에 보내심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기근에서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대비를 하시기 위한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이었다(창 45:5). 또 애굽 왕 바로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을 계속해서 붙잡아 두고 종으로 부리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이 점점 더 강퍅해지는 것을 막지 않으셨다. 그것은 점점 더 강해지는 재앙들로 말미암아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애굽을 위한 결심을 촉진하게 하기 위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와 애굽에게는 그 완악한 죄를 인한 형벌을 내리시기 위한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출 10:27 등)는 적극적인 표현까지 등장한다. 이러한 예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나 추수 때까지 알곡 속에 섞여 자라는 가라지 등을 비롯한 많은 말씀들에서 발견된다.
(2) 선택
한편, 하나님께서는 죄의 삯으로 사망한 사람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영생에 이르도록 예정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죽은 생명을 살리고, 굳어진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갈아 엎고, 소경된 눈을 떠서 보게 하고, 귀머거리 된 귀를 열어 듣게 하시기로 하신 것이다. 빌립보 강가에 있던 루디아가 사도 바울께서 전하는 말씀을 듣고 믿게 된 것은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었다(행 16:14).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성경을 깨닫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내 눈을 열어 주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신다"(시 119:18)고 노래했다.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계획에는 전혀 조건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도록 하는 계획, 즉 은혜의 계획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경우와 같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민족들보다 내놓을 만한 장점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마른 포도나무의 가지나 타다 남은 그루터기와 같이 쓸모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여 계시를 전달하시기로 작정하셨다. 다윗이 임금으로 선택된 것도 그러했다.
그는 다른 형제들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다. 아버지 이새는 사무엘 선지자가 기름을 부으러 왔음에도 들에 있던 다윗을 집으로 불러 들이지도 않고 형들만을 내세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없이 그를 왕으로 세우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토기장이에 비유하여, 하나님께서는 같은 흙으로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였다(사 45:9; 롬 9:21). 사도 바울은 이 계획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온 것임을 가리켜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19)고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따로 있었다(행 13:48). 그래서 선택이라는 말로 사용되어진다. 죄인에게는 영생으로의 선택이 무한한 복이 아닐 수 없다. 선택은 "모든 신령한 복으로 주어지는 복"(엡 1:3)이다. 만일 선택 때문에 감사가 아닌 비방이나 불평이 생겨난다고 하면, 이는 선택을 오해함에서 나온 것이다.
(3) 작정과 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작정하셨다고 할 때에 흔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몇 가지 궁금한 문제가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작정하셨다면, 죄도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일까. 하나님이 죄를 작정하시지 않았다면 이 땅에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시지 않은 일도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서 모든 일이 일어나진다면, 사람은 단지 로봇에 불과하지 아니한가 하는 것 등이다. 그 중에 가장 우선되는 것이 죄의 문제이다.
역사에는 하나님이 죄를 생겨나게 만드신 원인자이다는 주장을 한 사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을 만휼히 여기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불의나 죄와 상관이 없으시기 때문이다(롬 9:14). 하나님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요일 1:5). 하나님의 생각과 활동은 항상 선하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선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선 그 자체이시다. 하나님은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악한 수단을 동원하시지 않는다. 선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반드시 선한 방법을 사용하시고 악에 대해서는 호리라도 남김없이 그 책임을 물으신다. 목적이 선하면 방법도 선해야 한다. 선한 방법으로 이루어진 선이라야 참된 선이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에게서 나왔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자유의지를 가진 피조물이 그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 바로 죄이었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우주 안에 온갖 악이 뒤따랐다. 그러면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이 잘못인가.
본래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그것으로 하나님께 최대의 영광을 돌려 드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필연적이고 기계적인 찬양보다는 자발적인 찬양이 훨씬 더 영광스럽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에게는 오직 선한 의도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는 다르게 사용되어졌다. 이것이 죄이다. 그러므로 죄의 원인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나 완전하심과 관계없이 피조물에게 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제자로 부르셨다. 예수님은 그를 특별히 신임하여 훈련시키셨고 금전관리까지 맡기셨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신임을 저버리고 오히려 예수님을 원수들에게 팔아넘겼다.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으면 좋을 뻔하였던 그의 결과는 예수님의 부르심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그의 악한 행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자유의지가 악용되는 것을 막지 않으셨을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전능하시다고 하여 죄도 범하실 수가 있다거나 스스로의 모순을 범하실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의지의 자유로운 사용을 강제로 막는 것은 자유의지를 주신 의도와 모순이 된다. 자유의지는 그것의 자유로운 사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예 자유의지를 주시지 않았더라면 죄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다. 자유의지는 피조물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를 주신 이유에 앞서서 피조물의 창조가 먼저 고려될 필요가 있다. 왜 하나님은 창조를 계획하셨는가. 이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그들은 나의 심은 가지요 나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사 60:21)이라고 말씀했다. 이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창조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목적의 가장 효과적인 달성을 위한 수단은 바로 자유로운 의지로 자원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려고 작정하신 이상, 그 창조 목적에 적합하도록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에게 허용하신 죄를 통해서도 선을 이루시는 방법으로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나 죄악된 피조물은 그러하신 하나님의 선하심마저도 악용하여 죄를 범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4) 작정과 인간의 책임
우리에게는 때때로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해도 하나님의 작정이 다른 곳에 있으면, 내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내가 수고하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작정이라면 당연히 얻어질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서 게으름을 피우거나 자기 도취에 빠지거나 책임전가에 급급할 우려가 없지 않다. 하나님의 작정이 세밀한 모든 부분까지를 포함한다는 사실이 과연 인간의 나태함과 책임회피의 구실로 이용될 수 있는가.
모든 일은 궁극적인 원인, 즉 제1 원인이신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의하여 일어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은 제2 원인들의 활용을 포함한다. 여기서 제2 원인이란 주로 자연법칙이나 자유의지를 가진 피조물의 노력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연법칙이나 인간의 노력을 수단으로 사용하여서 자신의 계획이 달성되어지도록 작정을 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그냥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역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연법칙이나 인간의 노력을 초월하거나 거스려서 일하시도록 작정하신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는 우리 편에서 볼 때,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하다. 그래서 작정은 체념적인 자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숙명과는 전혀 다르다.
사람의 생사는 하나님의 작정에 달려 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은 음식과 영양을 섭취하는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음식은 수고하여 일하는 자에게 보상으로 주어진다. 독을 마시면 죽는다. 여기서 음식이나 음식을 위한 수고나 독을 마시는 것은 제2 원인에 해당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2 원인이 되는 땀흘려 일하기를 게을리 하는 자에게는 먹지도 말라고 하셨다(살후 3:10).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쓸 것을 미리 알고 계신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 그것을 적절하게 공급해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찾는 자에게 얻게 하시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도록 하신다(마 7:7). 제2 원인을 활용하시는 것이다. 구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주시려고 작정하신 자들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로 믿음과 천국을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선물을 제공하심에서, 힘써 침노하는 자(마 11:12), 그리고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자가 천국을 차지하도록 제2 원인을 활용하신다(딤후 4:7). 또 그 선물의 전달과정에 있어서도 강제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힘써 외치는 전도자의 수고와 그 복음에 대한 진지한 들음이라는 제2 원인의 활용을 통해서 믿음이 생겨나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에게 최선의 노력을 요구한다.
로마로 향하던 사도 바울의 예를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폭풍으로 파선을 당한 276명 모두를 구하시기로 작정하셨음을 사도에게 보이셨다(행 27:24). 그러나 그 목적은 배불리 먹고, 안심을 하고, 밀을 버려 배를 가볍게 하고, 선원들의 경험을 동원하여 의논을 하고, 닻을 끊고, 키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해안까지 헤엄을 치는 등의 온갖 제2 원인으로서의 수단들이 동원됨으로써 이루어졌다(행 27:36~44). 또 민족의 위기를 앞에 두었던 모르드개의 경우를 보자.
모르드개는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리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그는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는 말로 에스더의 역할을 촉구했다. 그리고 에스더는 밤낮 삼일의 금식과 죽음을 각오하고 왕 앞에 나아감과 지혜로 왕을 접대하는 등 제2 원인의 효과적인 사용으로 민족을 위기에서 구출했다.
우리는 대부분 매사에 주도면밀하게 작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작정을 별 어려움이 없이 인정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게 된다.
때로는 자기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작정을 확인하고 더욱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
그러나 죄나 사람의 책임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거나 오해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하나님되시게 해야 한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소망 중에 전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겸손함으로 힘써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출처: 행복충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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