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의 교리는 '스토아'철학의 운명론과 전연 다르다
좐 칼빈 2014. 1. 9. 04:53하나님의 섭리의 교리를 혐오하는 자들은 이것이 스토아 철학자들의 운명론이라고 악의에 찬 비방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도 한때 이런 비방을 받은 적이 있다. 우리는 “운명”(fate)이란 단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바울이 피하라고 가르치는 망령되고 허탄한 단어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딤전6:20), 의도가 하나님의 진리를 억압하려 하기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연에 나타나 있는 끊임없는 연관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는 인과 관계의 필연성을 상정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물의 통치자요 주관자이심을 믿는다. 하나님이야말로 그의 지혜로 머나먼 영원 전부터 그가 행하실 바를 작정하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그 작정하신 바를 시행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이를 근거로 우리는 하늘과 땅, 그리고 생명이 없는 피조물들은 물론 사람들의 계획과 의도들까지도 하나님의 섭리의 다스림을 받아 그 정해진 목적을 곧바로 이루게 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연에 의해서나 운명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이 전혀 없다는 뜻인가?고 그들은 물을 것이다. 대 바실리우스는 말하기를, “운명”이나 “우연”이란 이교도들이 쓰는 용어로서 경건한 사람들이 마음에 그 뜻을 새겨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만일 모든 성공이 다 하나님의 축복이고, 모든 재난과 역경이 하나님의 징벌이라면, 인간사에 운명이나 우연이 끼어들 여지가 조금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도 우리는 감동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아카데미 학파에 대한 반론」에서 내가 ‘fortuna'(운명)란 단어를 너무 자주 거론했다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다만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일어나는 일들에서 겉으로 보기에 운명적인 것처럼 보이는 결과들이 일어나곤 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 것 뿐이었다. 보통 ’운명‘이라고들 부르는 것은 어떤 은밀한 질서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우연히 일어났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 이유나 원인이 비밀에 싸여 있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해야 옳을 일에 대해서 ’이것은 운명이다‘라고 이야기하는 매우 악한 관습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한 마디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늘 가르치기를, 만일 무엇이든 운명에 맡겨진다면, 세상은 목표를 잃고 소용돌이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모든 일이 일부는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일부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나, 조금 뒤에 가서 사람들이 섭리 아래 있고 섭리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을 충분하게 입증해 보이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심이 없이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것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자신의 원칙으로 취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일들이 제멋대로 일어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또한 사람들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는 우연도 일체 용납하지 않았고, 조금 뒤에 가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침으로써 이를 더 분명하게 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허락”도, 하나님의 명령이나 허락이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뜻이 모든 일의 첫째가는 최고의 원인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크리스챤다이제스트사) 상권, pp 25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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