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을 조심하라/존 맥아더 목사
주경신학 2013. 2. 28. 03:34외식을 조심하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마 6:1)
마태복음 6장은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놀라운 진리들을 담고 있다. 그 진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를 우리는 6장 1절에서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달리 말해,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간단한 말씀 한 마디가 놀라운 진리의 파노라마를 시작하는데,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외식에 대한 원리를 소개해 주고 있다.
외식의 개념
1) 거룩에 대한 재정리
동양의 금욕주의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한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이 우뚝 솟은 성 모퉁이에 먼지와 재를 둘러쓰고 늘 앉아 있었다. 지나가던 어느 여행자가 사진 한 장만 찍자고 부탁을 하자 그 사람은 ”잠깐만요, 내게 쌓인 재를 다시 잘 꾸미고요”라고 말했다.
기독교계 안에는 재를 다시 보기 좋게 꾸미는 일이 많다. 우리는 더 낫게 보이기 위하여 우리들의 경건의 모습을 바꾼다. 우리 모두의 삶에는 적지만 이와 같은 꾸밈들이 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한다. 거룩하고 경건하게 보이려는 종교적인 속임수는 우리에게 아주 흔한 일이다. 특별히, 주위에 진실로 거룩한 사람이 있을 때에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외식의 속임수를 쓰지만, 사실은 엉터리, 가짜인 것이다.
2) 거룩의 실체
성경을 읽어보면 주님께서는 진실되고 참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헌신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당신의 외형적인 꾸밈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시다. 그분은 당신이 겸손하게 보이든 아니면 거룩하고 경건하게 보이든, 그러한 것에는 관심이 없으시다. 예수께서 계시던 당시, 바리새인들은 항상 외형적인 꾸밈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들은 외형적으로 경건하고 거룩하게 나타내려고 애썼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마태복음 6장 1-18절에서 다루시는 문제이다.
외식에 대한 심판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외식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어떻게 보시는가를 우리는 먼저 알아야 한다. 외식은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이다. 외식은 창세기에도 있고 요한계시록에도 있다. 세상이 창조될 때 그곳에 외식이 있었고 세상의 끝에도 외식은 있다. 이 외식은 모든 종교계 안에 있으며 진정한 기독교계 안에도 있다. 12명의 주님의 제자들 안에도 외식자가 있었으며 초대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도 이 외식자가 있었다. 이 외식은 항상 우리 주위에 있다. 이것은 악한 인간이 종교인 행세를 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1) 구약에서
아모스 5장 21:24절 하나님께서 선지자 아모스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있는 이 외식의 문제를 다루셨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며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찐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제시하고 명령한 이 모든 것들을 보라. 이제 내가 이것들을 기뻐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이는 너희가 이 모든 나의 명한 것들을 뒤틀고 굽게 했으며 그 목적을 완전히 변조시켰기 때문이다. 너희는 외적인 것에 전념했고 내부는 썩었으며 텅비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적으로는 아무 것도 없으면서 겉으로만 꾸미는 외식이며 위선이다.
2절과 5절 그리고 16절에 나와 있는 ”외식”이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휘포크테스」(hupokrites)이다. 고대 헬라어에서 이 말은 무대 위에서 어떤 인물의 역할을 하는 배우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배우는 그의 삶에서의사실이 아닌 것을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것이다. 진실로 그의 삶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다만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마태복음 6장 1상반절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한 것에 주의하라. ”보이려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데아오마이」(theao-mai)이다. 이 단어의 처음 네 글자는 영어의 극장(theater)의 처음 네 글자와 같은데, 달리 말하자면 마치 당신이 극장에 놓인 어떤 전시물인 것마냥 관객들 앞에서 배우노릇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당신의 의로운 행실을 극적으로 과장하거나 꾸며서 하지 말라. 당신을 바라보는 주변시선 때문에 당신의 경건이나 신앙심을 꾸미지 말며, 거룩한 체하려고 하는 그 마음을 버리라. 그러한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사실 영적인 사기꾼이다.
이 외식의 문제는 선지자가 탄핵할 정도로 대단히 큰 종교적인 죄악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통하여 이를 지적하셨다. 나는 이스라엘 패망(북왕국의 포로됨)의 주요 원인이 진실한 신앙심 대신 거짓 신앙이 그들을 지배하도록 허용한 데 있다고 본다.
이러한 일이 남왕국에도 일어났는데 이사야가 그 문제를 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찐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사 1:11-18)
여기에서 다시 하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명하고 세운 모든 제물과 월삭과 제사와 분향들을 내가 싫어하노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그들의 행하는 것들이 속임수였기 때문이다. ”너희의 마음이 눈처럼 희고 양털처럼 깨끗하기 전에는 내 앞에 나오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주님도 그 당시 많은 죄인들을 대하셨다. 하지만, 어떠한 죄인도 마태복음 23장 13-36절에서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신 것처럼 꾸짖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가장 통렬한 말을 영적 위선자들, 영적 가면을 쓰고 있는 자들, 악한 마음에 경건의 탈을 쓰고 있는 자들에게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외식하는 자들을 미워하신다.
이사야 9장 17 상반절 ”이 백성이 각기 설만하며 악을 행하며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 장정을 기뻐 아니하시며 그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이사야 10장 5-6 상반절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외식한 나라)를 치게 하며...”
이사야 65장 5절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
달리 말하면, ”나는 거룩하니 내게 가까이 오지 말라 내가 부정할까 염려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에 대하여 ”내 코의 연기요...”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코로 연기를 마셔 본 적이 있는가? 코로 연기를 마시는 것은 굉장히 신경을 자극하게 한다. 하나님은 외식하는 자들로 인하여 굉장히 진노하셨다.
욥기 15장 34 상반절 ”사곡한(외식) 무리는 결실이 없고 ...”
욥기 8장 13 하반절 ”... 사곡한 자의 소망은 없어지리니...”
욥기 27장 8절 ”사곡한 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 영혼을 취하실 때에는 무슨 소망이 있으랴.”
욥기 36장 13 상반절 ”마음이 사곡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외식자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2) 신약에서
주님이 사셨던 시대
주님이 계시던 당시의 유대교는 외식의 종교로 규정지을 수 있다. 마가복음 7장 6-7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지적하셨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들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달리 말해서, 그들은 외식자들이었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했으나 그 마음은 멀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들을 인간의 전통으로 대신하여 불합리한 외식의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것들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과 유다에 외식이 있었고, 예수님 당시에도 외식이 있었다.
교회 안에서
교회 안에 맨처음 나타난 외식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였는데 이에 대한 이야기가 사도행전 5장 1-11절에 나와 있다. 그들은 판 것 중에서 사실 얼마를 감춰 두고 주님께 모두 드렸다고 속임수를 썼다. 하나님께서는 전 교회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들을죽이셨다. 당신은 ”그것으로 문제는 해결되고 그 이상의 외식자는 없었지 않습니까?”라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장래에
디모데전서 4장 1-2절에서 바울은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니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말하였다. 초대 교회의 외식자들이 있었고 교회 시대의 끝에도 외식자들이 있게 될 것이다.
버림받은 외식
우리는 성경에서 추한 외식자들의 이름을 볼 수 있다. 그 몇몇 사례를 살펴보자.
1) 가인
그는 분명 농부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고 과시하는 가운데 하나님에 위선에 찬 예배를 드렸다. 그는 많은 대가를 치르며 이 일을 했다. 그의 외식은 그의 의로운 동생을 죽여 놓고도 심히 화를 내는 것에서 나타나고 있다(창 4:3-16).
2) 압살롬
사무엘하 14장 33절-15장 12절에 보면 압살롬은 그의 아버지를 죽일 모략을 꾸미면서 그의 아버지를 껴안고 입맞추는 것을 볼 수 있다.
3) 요압
요압은 아마사의 입을 맞추면서 칼로 아마사를 찔러 죽였다(삼하 20:9-10).
4) 유다
유다는 이미 군병들과 자기가 입맞추는 자가 예수이니 잡으라고 계획을 다 짜놓고서 예수께로 나와 입을 맞추었고, 결국 그분을 십자가에서 죽게 만들었다(마 26:48-49).
5) 마술사 시몬
사도행전 8장 9-24절에서 시몬은 거짓으로 성령님의 능력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그가 원하는 것은 마력이었다. 그는 그 마력으로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그러나, 베드로가 시몬의 외식을 드러냈다. 이와 같이 성경은 가인, 요압, 압살롬, 유다, 시몬 등 추한 외식자들의 외식과 그 방법들을 폭로하고 있다.
6) 바리새인과 헤롯당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기회를 찾으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외식을 했다.
외식에 대한 비유
외식은 성경에 한 번도 좋은 것으로 나타나 있지 않다. 성경은 외식을 다음과 같은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1) 누룩(눅 12:1)
이것은 온 덩어리에 퍼지게 하는 파급 효과가 큰 것이다.
2) 회칠한 무덤(마 23:27-31)
이 무덤은 더러운 썩은 것들과 뼈들이 들어 있지만 그 위를 하얗게 회칠을 해서 아름답게 단장을 한 것이다.
3) 회칠한 담(행 23:3)
이 담은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쌓은 것이어서 보기 흉한 색깔인데, 그 위에 하얗게 회칠을 한 것이다.
4) 평토장한 무덤(눅 11:44)
이 무덤은 평평한 데다가 풀이 많이 나 있어서 더이상 무덤으로 분별할 수 없는 무덤이다. 누구든지 그 위를 밟는 자는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5) 은을 입힌 토기(잠 26:23)
이것은 금이 간 것을 덮어 가리우기 위하여 은으로 입힌 것이다.
6) 가라지(마 13:38)
가라지들은 곡식들 가운데서 자란다.
7) 양무리 가운데 양의 탈을 쓴 이리(마 7:15)
8) 물 없는 샘(벧후 2:17)
모든 것이 정상같고 좋은 샘같이 보이지만 두레박이 내려갈 때 부딪혀 소리만 나고 물이 없는 빈 샘이다.
9) 죄를 덮는 탈(살전 2:5)
10) 직업적인 애도자(마 9:23)
유대인들의 풍습 중의 하나를 보면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의 뜻으로 자기의 옷을 찢는 것이 있다. 역사가들은 유대인들이 애도하는 뜻에서 옷을 찢는 일이 아주 형식적이고 외식적이어서 그들은 옷을 찢을 때 서로 이은 곳들을 찢어서 다음날 쉽게 다시 꿰맬 수 있도록 했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외식이다. 속으로는 슬퍼하지 않으면서 겉으로 슬퍼하는 체하는 것, 내적으로는 의롭지 않으면서 겉으로 의로운 체하는 것, 겉을 잘 꾸며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려 하는 것이 외식이다.
외식의 부패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다루신 것이다. 주님은 ”조심하라”(Beware)고 말씀하셨다. ”조심하라”고 번역한 것이 ”주의하라”(Take heed)는 번역보다는 더 나은 번역이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신 말씀의 심각성에 대해서 알도록 강하게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의로운 행동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사람들 앞에서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요점은, 당신의 신앙이 진실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조심하라는 것이다. ”조심하라”는 말은 어떤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고 심각하고 엄한 불같은 경고이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하다. 왜냐하면 조심하지 않을 때 그에 대한 결과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외식에 관한 말씀의 전후 관계
이 외식에 대하여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산상 수훈(마 5-7장)의 전후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이 말씀은 당시의 유대인들과 그 후의 모든 세대들에게 의의 진실한 표준으로서 주신 것이다.
1) 의의 표준을 세움
의의 기초
복에 대해 말씀하시면서(마 5:1-12) 주님은 ”의의 특성”으로부터 시작하셨다. 그리고는 ”의의 영향”으로 옮겨 가셨으며(세상의 소금과 빛 / 마 5:13-16) 그런 다음 ”그 의의 본질적인 요소들”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특성
여기에서 의의 특성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의를 초월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애통해하지 않았으며, 마음이 청결하지도 온유하지도 않았고, 심령이 가난한 자도, 화평케 하는 자들도 아니었으며, 의에 주리지도 긍휼히 여기지도 않았다.
영향
의의 영향은 빛과 소금과도 같다. 이것은 부패하지 않게 보존하는 것이며 세상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상을 부패하게 하고 어둡게 만드는 부분들이었다.
표준
마태복음 5장 21절에서 주님은 의의 표준들에 대한 목록을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표준들 어느 것 하나도 맞게 생활하지 못했다. 그들의 특성, 그들의 영향, 그들의 의의 표준은 전적으로 하늘 나라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의의 균형
바리새인들에 의해 오용됨
마태복음 6장에서도 주님은 여전히 의의 표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에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의에 대한 가르침보다는 바리새인들이 행하고 있는 의에 대해서 더 강조하고 계시는 것이다.
5장에서 주님은 ”이것이 너희가 가르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가르침은 이렇다”고 말씀하시며, 6장에서 주님은 ”너희는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표준은 그보다 우월하다”고 하셨다. 첫째로, 주님은 그들의 도덕을 다루셨고 다음에는 그들의 신앙을 다루셨다. 주님은 그들의 삶에서 그 도덕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보여 주셨다. 그들의 신학이 가짜였기에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예배도 거짓이었다.
참다운 종교는 도덕적인 표준과 그에 대한 합당한 가르침이 있어야 하고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삶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구제와 기도와 금식(마 6:2, 5, 16)이 표준 이하인 것을 말씀하셨다. 그들의 신학과 종교적인 실행이 적합하지 못했다.
기독교계에 의해 오용됨
믿는 자들로서 우리는 신학과 그에 따르는 실행이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안에는 오직 실행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에 가서 헌금을 조금하고 예배의 절차를 마치고 매일 성경을 읽으면 그것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올바른 도덕적 표준을 가져야 한다.
또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도덕적인 표준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것을 종교성 없는 기독교라고 부른다. 이들은 반 교회주의자들이며 반조직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무(無)에서 사회적 방법으로 도덕을 도모하는 가운데 경건하게 되기를 바란다.
이 두 가지에는 서로 균형이 있어야 한다. 주님은 적절한 가르침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믿는 자들의 교제가운데 기도하고 금식하고 기도할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고도 말씀하셨다. 이것들은 서로 적절하게 실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2) 우월한 신앙의 표준
예수께서는 하나님 외에 인간사에 있어 아무도 세울 수 없는 신앙의 표준을 세우셨다. 이 표준은 인간이 세운 모든 표준들을 능가하는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도덕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이러한 말씀으로 시작해서 이스라엘 선생들(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도덕적인 표준보다 우월한 표준을 말씀하셨다.
실행
마태복음 6장 5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2절에서는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16절에서는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고 하셨다.
”외식하는 자들”이라는 말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종교의 실행에 있어서도 그들 것보다는 우월해야만 했다. 그래서 주님은 듣는 자들에게 당시 그들 가운데 있던 표준과, 실행과, 의보다 우월한 그분의 표준과 실행과 의를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들의 전 조직에 대한 엄청난 고발이다.
예수께서는 이제 그 대화를 도덕과 연관된 의에서 종교의 실질적인 행실과 연관된 의로 옮기셨으며, 이 종교적인 실행의 의에서 당시 사회적인 의로 옮기셨다.
현세적인 것들
마태복음 6장 19-34절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들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또한 당신이 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삶에 있어서 신학과 신앙과 매일의 접근 방법이 부적당하다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6장 19절에서 예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25절에서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왜 주님께서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말씀하셨는가? 이는 바로 그것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특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땅에 재물을 쌓는 일에 몰두해 있었고 그들의 생활을 염려하였다.
내가 이것에 대해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신학이나 신앙이나 예배는 인간들이 만든 그 어떤 조직이나 신앙이나 신학보다 우월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방인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그 기준이 그렇게 어렵고 복잡하다면 나는 이방인이 되겠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방인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자.
도덕
마태복음 5장 47-48절에서 예수께서는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다. 달리 말해서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표준보다 더 우월한 표준을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이방인들의 표준보다 우월한 것을 말씀하셨다.
실행
마태복음 6장 7절에서 주님은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다.
현세적인 것들
마태복음 6장 32절에서 예수께서는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달리 말해서 주님은 ”나는 너희에게 그 내용이나 예배나 매일의 삶에 있어 세상의 종교나 비종교적인 어떤 체제가 전혀 보지도 못한 우월한 표준을 준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외식에 대한 선고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왜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자신들만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까?”라고 물어 오면 당신은 그에게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은 의심할 것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살았던 사람들 중에 가장 편협한 분이셨다. 그분이 말한 모든 것은 진리였으며 다른 것들은 거짓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이 모든 것을 자신은 그와 같이 말할 수 있다는 것으로 뒷받침하셨다.
이 설교에서 그분은 ”너희 사람들은 이 표준에 이를 수 없다. 너희는 내 나라의 표준에는 비참하고 형편없이 미달된다. 나는 왕이며 왕으로서 나의 왕국을 제시한다. 하지만 너희가 내게 주는 것들로서는 그곳에 들어갈 수가 없다. 너희가 한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너희들의 노력으로는 그 곳에 갈 수 없다는 점이다. 너희들의 선택과 종교 그리고 매일의 삶은 충분하지 않다. 너희는 너희들의 죄를 씻고, 깨끗하게 하고 너희에게 나의 나라에 맞는 새로운 성품을 줄 내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일반적인 면에서 산상 수훈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지금 산상 수훈에서 특별히 종교적인 실행에 대해서살펴보고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의를 행할 때(종교적인 활동)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마 6:1). 주님은 그에 대한 세 가지 예를 들어 말씀하셨는데, 곧 구제(2-4절)와 기도(5-15절)와 금식(16-18절)이 그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세 가지 예배의 요소를 지적하셨다. 구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야 할 행동으로서 우리 신앙과 더불어 행해져야 하며,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행동으로서 신앙을 갖고 해야 하는 것이며, 금식은 우리 자신에 관련한 것으로서 신앙으로 행해야 한다. 금식은 자기 부인, 훈련, 자신을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위탁하는 우리 자신의 육체에 대한 하나의 고행 또는 금욕을 다루고,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루며, 구제는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다루고 있다.
이 세 가지가 아주 적절하게 우리들의 영적인 삶인 예배의 요소들을 요약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것들을 상징적인 순서로 말씀하신다. 우리는 먼저 올바른 마음과 올바른 심령, 그리고 자신을 깨끗케 함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러므로, 금식은 자기 부인의 한 부분으로 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인하여 우리의 기도도 올바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로부터 구제가 나온다. 그러므로 주님은 구제로부터 기도, 기도로부터 금식으로 거슬러 올라가 말씀하신다.
2, 5, 16절에서 ”너희가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할 때에”라고 되어 있는 것에 주의하라. 주님은 ”만일 너희가”라고 말씀하지 않고 ”너희가 ...할 때에 ...”라고 말씀하셨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 이는 그것들을 하나의 예배와 영적인 섬김으로 보시기 때문이다.
처음 1-4절 안에 세 가지 중요한 요점이 있다. 곧, 의의 실행, 종교의 위험성, 보상에 대한 약속이다.
의의 실행(1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의로운 행위)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성경에서의 묘사
성경은 의를 행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수도승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자신을 망각하고 고난당하며 어떤 우리 안에 갇혀서 그 안에서 의를 행하는 금욕주의는 성경적이지 못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어떠한 의로운 행동도 하지 말고 안보이는 데 가서 행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의미는 그런 뜻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람들 앞에서 의를 행하라고 가르친다.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06:3)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사 58:2)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
달리 말해서, 우리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 의를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들이 그 의로운 행실을 보고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줄을 알 것이다.
마음 속에 있는 소원
당신은 ”그러나 여기에서는 분명히 사람들 앞에서 의를 행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할지 모른다. 물론 사람들 앞에서 의를 행치 말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사람에게 보이려고”라는 말을 전제로 하고 있다. 여기에 ”사람에게 보이려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목적 또는 의도를 말한다. 달리 말해서, 당신은 의를 행해야 하지만 사람들에게 보여서 당신을 좋게 봐 주도록 의도적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1) 확실한 동기의 업적
마태복음 5장 16절과 6장 1절 사이에는 상당한 대조점이 있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의로운 행실)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당신은 ”말씀이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동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장 16절의 긍정적인 면은 사람들이 선행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들리게 하기 위해서 해야 하며, 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하지 말아야 한다.
2)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유혹
외식의 삶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에 대한 이 경고에 관하여 죤 칼빈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이것은 필요한 경고이다. 모든 선행에 외식의 침입을 막아야 할 것이다. 이 외식이 침범해서 더럽혀지고 부패하지 않을 선행은 하나도 없다.” 나도 내 삶에 이러한 시험을 받고 있다. 우리 주님께서도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히 4:15)이시기 때문에 이러한 시험을 받으셨을 것으로 믿는다.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마음에서보다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 가르친 때도 있다.
당신은 당신의 헌신에 대해 의심하는 자들 때문에, 구제하는 행위를 통해서 그들로 당신의 헌신이 진실인 것을 보이려고 구제한 때도 있었을 것이다. 당신은 때로 미사여구로 가득찬 긴 기도를 드리고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흉하게 한 때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가끔 신령한 것들과 혼돈이 된다. 우리 모두는 이 외식의 시험을 받으며 때로 위선 가운데 행한다.
존경받기를 좋아함
어거스틴은 ”존경받기를 좋아하는 것은 진정한 경건을 죽이는 독약이다. 악덕은 다른 악한 행실을 가져오는데, 이 악덕이란(외식) 선한 행실을 악하게 사용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외식을, 악덕을 덕으로 색칠한 경건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주님은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바리새인들은 구제할 때 알리기 위해서 나팔을 불었다. 기도할 때 그들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공공 장소에 서서 크게 기도함으로 그들이 얼마나 신령한 자들인가를 알게 했으며, 금식할 때에는 얼굴을 거의 반쯤 죽은 사람의 모습처럼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 얼마나 거룩한 사람이냐”는 말을 하게 했다. 우리는 우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춰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 앞에서 의를 행해야 한다.
3) 의를 나타내 보이고자 하는 욕망
두가지 죄
마태복음 5장 16절과 6장 1절은 서로 다른 죄들을 다루고 있다. 5장에서 예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세상에 영향을 주는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겁내는 죄(겁장이)가 우리로 그와같은 영향을 주지 못하게 한다. 달리 말해서, 당신은 소금과 빛이니 겁내지 말고 당신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주님은 외식에 관한 죄를 다루고 계신다. 나는 부루스(A. B. Bruce)가 이 두 가지를 알기 쉽게 하나로 말하였다고 본다. ”우리를 나타내고자 하는 시험이 오면 숨겨야 하고 숨기고 싶은 시험이 닥치면 나타내야 한다.” 의를 나타내 보이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의 충동을 막을 수 있는 길은 그러한 시험이 올 때에 그 시험을 의로운 방법으로 대하는 것이다.
두 제사
문제의 중심은 바로 마음의 문제이다. 당신의 동기는 어떠한가? 두 사람이 똑같이 기도하고 금식하며 둘 다 똑같이 종교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 겉으로 보면 이 두사람의 차이점에 대하여 알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한 사람은 기쁨이 되고 향기로운 냄새의 제사가 되며 다른 사람은 그분의 코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화가 될 수 있다.
삶에서 드러남
1) 말씀에 의해 조명됨
당신이 그리스도인임이 드러나는 것은 나쁠 게 하나도 없다.
갈라디아서 1장 23-24절 바울은 자기의 거듭남에 대한 소식을 유대에 있는 교회들이 들었다고 말하였다.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24절). 바울은 영광을 자기가 취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렸다.
로마서 10장 9-10, 14절 우리는 우리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해야 한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다. ”전파하는 이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14절). 우리는 공적으로 의를 행하는 것을 배격하고 수도승이 되어 무용한 망각 가운데 빠져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의를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엡 2:10). 다만 우리의 동기가 순수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한다.
2) 그리스도에 의해 조명됨
주님은 이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듣는 가운데 공적으로 하셨다. 그분은 자기를 주시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하루하루를 흠없고 위엄있고, 죄없는 삶을 사셨다. 그분은 모든 사람들이 보도록 이적과 표적과 기사들을 행하셨다. 그 모든 가운데서도 그분은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라고 말씀하셨다(요 5:30).
당신이 만일 그리스도인이라면 의를 행하여 당신의 빛이 비취게 하라.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라. 그러나 순수한 동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 드러내어 그들에게 인정받고 더 거룩하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에서 한다면 조심하라.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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