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의 '산상수훈 강해' 머리말 중에서
개혁주의 자료 2014. 3. 4. 00:20
....이처럼 산상수훈에 대한 사회복음적 접근 방법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교회의 선언이 갖는 소위 "정통적" 측면들만의 중시하는 세 가지 잘못된 접근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오류들도 결국은 예수께서 율법적 체계가 아닌 새로운 삶을 촉구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첫 번째 오류는 산상수훈을 율법주의와 동일시하는 복음 설교의 형태에서 발견됩니다. 이 같은 사고 유형에서는 산상수훈이란 단지 구약 율법의 재판으로서 그것을 조금 더 잘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과 갈보리에서 있은 대속의 역사에 배치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산상수훈에 대한 이 같은 오해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크나큰 무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제 2의 율법 부여자 -모세와 같은 - 로 묘사된 것은 사실이지만 비교의 요체는 대부분 대조의 영역에 있습니다. 5장 안에서만 예수께서는 여섯 번씩이나 "...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21,27,,31,33,38,48절)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더 크고 독자적인 권위를 암시하며, 5장의 마지막 자체가 구원의 수단으로서 인간의 의를 내세우려는 모든 노력을 부정하는 가장 반(反) 모세적인 진술, 즉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8)는 말씀으로 종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주의나 구약 율법의 재판이 아닙니다. 이것은 율법주의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어떤 노력도 정죄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 안의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다가가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새 생명을 받기 위한 길을 열기 위해서 입니다. 산상수훈을 율법주의와 동일시한다면 이는 주님이 하신 말씀의 심오한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윤리는 모세의 율법을 넘어서는데 이는 우리를 복음 앞에 무릎 꿇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산상수훈에 대한 또 하나의 거부하는 태도는 거기에 제시된 기준들이 달성 불가능하고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도 없다는 느낌에서 기인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최소한 산상수훈에서 발견되는 엄청나게 높은 기준들을 인식하고는 있으나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불가능한 기준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 또는 그들이 그 같은 기준을 달성하도록 도우시기 위해 그들에게 성령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산상수훈을 이런 식으로 거부해 버린다면 이는 성경을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는 교만한 태도로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자유주의의 오류로서, 자유주의란 자의적으로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은 취하고 어느 한 부분은 버리는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 대한 이 같은 견해나 자유주의는 성경에 자신을 전적으로 복종시키지 않습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자유주의는 윤리(또는 그것의 한 부분)를 중시하고 복음은 거부하는데 반해 이 같은 형태의 보수주의는 복음만을 중시하고 윤리는 거부한다는 점입니다.
성경에 "모든 성경은 ...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라고 하였는 바 이는 산상수훈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중략)
아마도 산상수훈에 대한 모든 다양한 이견들을 해결하는 길은 성경을 근거로 하는 이 뉴 스코필드 성경의 이야기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 시대에 산상수훈을 연구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적어도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산상수훈은 우리에게 거듭남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산상수훈의 기준에 따라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코 산상수훈을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거나 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떠나서 의로워질 것을 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인간을 정죄하고 그런 다음 그를 십자가 앞으로 맹렬히 몰고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로워질 수 있도록 우리를 그리스도께 데려가는 몽학선생이 바로 율법이라고 말합니다(갈 3:24). 대체로 외형적인 구약의 율법이 몽학선생이라고 한다면, 이 산상수훈의 경우는 더 당연히 몽학선생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산상수훈은 거듭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순수한 의를 요구합니다.
둘째, 산상수훈은 다른 모든 성경 말씀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주기 때문에 오늘날도 연구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문학연구나 역사 연구에도 해당하는 사실입니다. 어떤 문서든지 그것을 집필한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충실한 연구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상수훈이 상당한 정도까지 우리를 주 예수와 그의 본성에 깊이 접촉하게 해 준다는 것을 깨달음이 없이 본문에 대한 깊은 이해에 다다르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될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주시는 주 예수는 산상수훈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단히 주님과 친밀한 접촉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을 받는 길을 알려 주기 때문에 우리가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이 산상수훈의 원칙을 따라서 행복을 찾는 것입니다. 복된 사람으로 불리고 있는 사람들은 가난한 자(오만하지 않은 자), 온유한 자(교만하지 않은 자), 긍휼히 여기는 자(잔인하지 않은 자), 화평하게 하는 자(선동하지 않는 자)등 입니다.
마지막으로, 산상수훈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길을 알려주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인 우리가 그것을 연구해야 합니다. 우선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지 않는 한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 그것은 거듭남으로 인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그의 가족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은 특권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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