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존 칼빈


자연인의 의지는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다. 사람은 필연에 의하여 죄를 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자발적으로 죄를 범한다. 그러나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상태에 매여 있는 동안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의지보다는 마귀의 의지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 같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의 의지를 마부의 명령을 기다리는 말에 비유하며, 하나님과 마귀를 그 마부에 비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 말에 올라타시면, 그는 온유하시고 숙련된 마부이시니, 말을 적절히 인도하시고, 너무 천천히 가지 않도록 박차를 가하시고, 너무 빠르지 않도록 고삐를 당기시며, 너무 거칠게 달리지 않도록 제어하시고, 갑자기 멈추어 서면 재촉하셔서 달리게 하시고, 그리하여 올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마귀가 안장 위에 오르면, 어리석고 방자한 기수처럼 바른 길에서 멀리 벗어나도록 난폭하게 마구 달리게 하고, 도랑에 빠뜨리기도 하고, 벼랑에서 뒹굴게 하고, 때리고 괴롭혀 고집을 부리게 하고 난폭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멸망에 이르게 될 불신자들의 마음을 “이 세상의 신이 --- 혼미하게 하여”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도록 한다고 말하며(고후4:4), 그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한다고도 말한다(엡2:2). “사탄의 역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람의 일에 하나님은 역사하심으로 개입하신다. 하나님의 예지나 허용을 피난처로 삼게 되면, 이런 활동의 본질에 대해서 결코 설명할 수가 없다.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난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하나님의 빛이 사라지면, 어둠과 눈먼 상태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게 된다. 하나님의 영이 사라지면, 우리 마음은 돌처럼 굳어진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사라지면, 마음이 뒤틀려 악에 빠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 방식은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그의 진노의 사역자로 삼으셔서 심판을 수행하게 하시기 위하여, 사람들이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목적을 갖도록 하시며, 그들의 의지를 불러일으키시고, 그들의 노력을 강화시키신다는 것이다.

 

버림받은 자들에 대해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그들의 마음이 변했고, 완강하게 되었다면,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들의 마음의 상태를 그렇게 바꾸어 놓으셨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서, 자기 백성의 범죄에 대해서 벌하고자 하실 때마다 주께서는 버림받은 자들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일을 진행시키셨는가? 그 사람들은 그저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고, 실제로 그 일을 진행하는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누구라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그렇게 일을 진행시키신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활동한다.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삼상16:14). 그 영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권능에 복종하여 그의 도구로 행동함을 의미한다. 모든 오류와 미혹의 역사는 진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거짓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것이라고 사도는 가르친다(살후2:10-12).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다스리신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실 때마다 언제라도 그의 섭리로 역사하셔서 심지어 외부적인 일에서조차 사람들의 의지를 이리저리 기울게 하시며, 그들이 자유로이 선택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의 다스리심을 받는다. 싫든 좋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유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인도함을 받는 것을 매일매일의 경험이 확증해 주는 것이다.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께서 지으신 것이니라”(잠20:12). 이는 귀와 눈에게 부여된 특수한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으로 인도하시느니라”(잠21:1)라고 말하면서, 솔로몬은 사실상 모든 사람의 경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성경을 부지런히 살피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 악한 것을 선하게 만드시고, 그렇게 만드신 다음 선한 행동으로 이끄시고, 또한 영생에 이르기까지 이끄시는 바 사람의 의지가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있으며, 또한 세상의 피조물을 보존하는 의지들도 역시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가 원하실 때에 원하시는 방향으로 그것들을 움직이시며, 그리하여 은혜를 주시거나, 아니면 지극히 은밀하면서도 지극히 의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벌을 내리거나 하신다는 것이다.”

 

자유 의지는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내적인 자유를 의미한다. 사람이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일의 결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 능력을 외형적인 성공 여부로 판가름해서는 안 되고, 사람의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자유 의지를 논할 때에, 우리는 과연 사람이 외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행하기로 결심한 바를 실행에 옮겨서 완수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어떠한 일에서든 판단의 선택과 의지의 끌림(형향)이 과연 자유로우냐를 묻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이 두 가지 점에서 자유롭다면, 못이 박힌 포도주 통 속에 갇힌 아틸리우스 레굴루스도, 세계의 광대한 지역을 자기 땅으로 만들고 그곳을 통치한 ‘가이사 아구스도’에 못지않게 자유 의지를 지녔다 할 것이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377-387

 



-청교도 아카데미(P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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