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5대교리 네번째 / 불가항력 은혜(Irresistible Grace)
좐 칼빈 2014. 11. 18. 01:54칼빈의 5대교리 네번째 / 불가항력 은혜(Irresistible Grace)
개혁주의 성경공부 제 4 강 칼빈주의 5대 교리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1.도입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택은 죄로부터의 구원을 전제하는 바 죄를 없이해 주시는 속죄교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살펴봤습니다. 아울러 선택이 다수 중에 일부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택정하시는 주권적 사역으로 인해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 또한 전 인류가 아닌 바로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제한적(制限的)으로 적용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공효의 능력은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무한한 것이지만 공효의 범위와 대상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해서 예정하신 자들에게만 차별적이고 선별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사역의 효력이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어떤 방식을 통해 미치는지에 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를 일컬어 종교개혁자들은 불가항력적 은혜 또는 유효적 소명(effectual calling)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택자들을 구원에로 부르실 때 사람 편에서 의지적으로 거부하거나 저항하면 성령의 사역은 훼방을 받아 목적이 좌절될 수도 있다는 교리에 대한 반동으로 나와진 내용이며 동시에 철저히 성경에 기초를 둔 교리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자들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으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를 구원에로 인도하시며 이 과정에서 선택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어떤 방식을 통해서도 결코 거부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가항력적’이란 용어를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를 강제로 납치하거나 유괴하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억지로 강요해서 인간의 뜻을 거스려 역사 하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불가항력적 은혜에서 말하는 ‘불가항력적’이란 단어의 올바른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가항력적이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셔서 택자들의 심령 속에서 역사하게 하시면 그들의 영혼이 거듭나게 되며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복음을 받아들여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백성에 편입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성령님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택하신 자와 그리스도께서 대신해 죽어주신 모든 자들로 틀림없이 예수님을 구주와 하나님으로 믿게 하신다는 사실을 내포합니다. 오늘 강의에서는 유효한 부르심으로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의 도리에 대해서 보다 면밀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의 효력을 구체적으로 적용시켜 실제적 구원에로 부르시는 직접적이고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하나님의 구원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이 사역을 주도적으로 수행하신다고 기록합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구원은 실로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의 공동의 사역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2.전개 불가항력적 은혜와 유효적 부르심이란 같은 내용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택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사역 안에서 효과적으로 불러내셔서 구원에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가리킵니다. 이때 성령께서 이 사역을 주도적으로 수행하십니다. 이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외적 부르심(outward calling) 외적소명을 일명 외소(外召)라고 부릅니다. 이는 먼저 구원받은 성도들이나 전도자들에 의해 십자가의 복음이 불특정 다수나 개인을 향해 전해지는 것을 가리켜 부르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누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권고합니다(딤후4:2).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십니다(막16:15). 이 뿐만이 아닙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하십니다(마28:19).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라고 촉구하십니다(행1:8). 이는 전파하는 자가 없이는 복음을 들을 수 없으며 듣지 못하면 믿을 수도 없는(롬10:14) 구원의 기본도리에 근거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속죄사역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한결같은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누구도 이 직무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알지도 못하는 고로 전도의 미련한 방식을 통해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셨습니다.(고전1:21). 주님께서 친히 제자들을 통해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는 과정에서도 전도의 미련한 방식을 사용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열 두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눅9:1). 이들은 각 촌에 두루 다니며 처처(處處)에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 후에 따로 칠십인을 세우셔서 둘씩 앞서 보내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전파하라고 이르셨습니다(눅10:1). 이들은 각 동네를 찾아다니며 천국복음을 전했습니다. 병든자를 고쳤습니다. 제자들의 복음을 들은 자들에게는 항상 크게 두 가지의 반응이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즉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과 거절하는 자들이 발견됩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어느 동네를 무론하고 불특정 다수를 향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가리켜 외적 부르심(소명)이라고 일컫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방식은 변하지 않고 사용됩니다. 이 시간에도 세계 도처에서는 여러 가지 방식과 방법을 통해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선교사를 통해 오지(奧地)의 땅에서 그리고 복음이 아직 들어가지 않은 불모지에서 복음은 끊임없이 증거됩니다. 공개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아직은 허락되지 않은 지역에서조차 생명을 불사하고 전도자들의 활약은 중단 없이 진행됩니다. 주님 안에서 먼저 된 자로 복음의 빚진 자로서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심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영적 충동이 우리를 자극해 지속적으로 주님의 보혈의 능력과 효과를 전파하게 됩니다. 이 일은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이런 복음 증거를 신학적으로 외적 부르심이라고 일컫습니다. 따라서 외적 부르심에는 다수의 청중을 향해 대중전도를 하는 경우와 그룹 내지는 개인을 향해 전파하는 개인전도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증거에서 외적 부르심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6:13-14의 말씀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바울의 이차 전도 여행 시 빌립보에서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나 복음을 전파하는 광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바울 일행은 안식일에 기도처를 찾아 이곳 저곳을 배회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마침 강가에 앉아 있는 일단의 여인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접근해서 얘기를 나누던 중에 복음을 전파하게 됩니다. 누가는 이때의 광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두아디라 성의 자주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본절에서 우리가 주의해 봐야 할 부분이 자주장사 루디아라 하는 여인이 바울의 복음을 ‘들었다’는 지적입니다. 이 말은 루디아라는 여자만 홀로 바울의 복음을 들었다는 지적이 아닙니다. 13절에서 보면 강가에는 얼마간의 여인들이 함께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를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라고 기록함으로써 이런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바울은 일행과 함께 기도처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때 강가에 한 무리의 여자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접근합니다. 기도처를 찾고 있었기에 기도처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함이 일차적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내친 김에 복음을 전하려는 강한 내적 충동을 느꼈습니다. 물론 이런 사실이 공개적으로 기록돼 있지는 않지만 바울의 입장과 상황으로 보건대 얼마든지 가능한 추리입니다. 아니 상황의 전개상 이들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기도처의 위치를 묻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는 분위기로 전환된 사실을 문맥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바울과 그의 일행은 이방인을 향한 복음 전파의 사명을 띠고 이곳까지 온 것이기에 말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루디아라는 여인 뿐 아니라 그곳에 함께 모여 있었던 일단의 여자들이 동시에 들었다는 지적입니다. 이렇게 불특정 다수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저들이 들은 사실을 일컬어 외적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오늘날도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도처에서는 앞서 주님을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있을 것입니다. 개인 전도를 통해서, 교회 차원의 전도집회를 통해서, 또는 의도된 대중전도집회를 통해서 말입니다. 이런 사건들을 일컬어 한결같이 외적 부르심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적 부르심 그 자체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외적으로 전해지면 여기에는 크게 두 부류의 서로 다른 반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즉 믿는 자와 거부하는 자의 반응이 그것입니다(막16:15-16, 눅9:4-5, 10:5-11). 때문에 외적 부르심은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기계적으로 구원에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외적 부르심은 내적 부르심을 요구하는 바 내적 부르심을 통해서만이 복음에 반응하여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외적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내적 부르심에 접촉되지 못하면 결코 자의적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아울러 내적 부르심에 접촉이 되면 자의적으로 구원을 기피하거나 거절할 수도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을 위한 예정을 기뻐하시는 뜻 안에서 창세 전부터 이미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은 효과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유효한 부르심으로 작용하게 되는 법입니다. 내적 부르심(inward calling) 내적 부르심을 내적 소명 또는 내소(內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외적 부르심에 대해 상대적인 개념으로 호칭되고 있습니다. 외적 부르심이 사람을 도구로 해서 주님의 복음을 불특정 다수나 소수 또는 개인에게 전하는 것이라면 내적 부르심이란 외적 부르심을 입은 자들 중에 일부를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로 인해 복음에 긍정적으로 반응케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속죄와 구속사역을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다수 중의 일부가 복음에 반응한다는 말의 의미는 이들이 바로 창세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서 선택함을 받은 자들이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적으로 저들의 죄를 속량해 주신 자들을 가리킵니다. 한편 당신의 백성을 부르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일에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활동하십니다. 행16:14에서 다시 보겠습니다.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본문은 세 가지 사건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루디아라는 한 여자가 ‘들었다’는 사실과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었다는 사건과 ?루디아로 하여금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셨다’라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을 루디아가 듣게 된 사건이 곧 ‘외적 부르심’이라는 사실에 대해 이미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우리의 생활 현장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를 소위 전도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먼저 복음을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에 빚진 자들로서 평생 복음을 전하는 일(전도)에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 자들입니다(딤후4:2).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적 부르심인 전도자의 복음을 듣는다고 해서 한결같이 복음에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만이 반응합니다. 이들만이 복음을 긍정적으로 받습니다. 믿음으로 수납합니다. 여기서 루디아가 바울의 복음을 듣고 ‘청종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내적 부르심’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분명히 바울의 복음을 전해들은 여인들은 루디아 한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여럿이었습니다. 문맥을 통해 이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루디아만이 여럿 중에서 유독 홀로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현실적으로 뭐가 특별한 면이 있어서일까요? 본문은 루디아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인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참된 성경적 믿음에서 나와진 신앙이란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성경적 믿음은 한 사람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거듭나는 것을 통해서만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루디아의 하나님을 향한 공경은 그녀가 하나님에 대한 보편적인 지식과 그에 따른 일반적인 믿음을 갖고 있기는 했으나 아직 구원에 이르는 신앙에는 접촉되지 못하고 있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특히 누가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란 표현을 유대교에 접촉된 경건한 이방인들을 향해 사용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행10:1-2).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런 루디아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청종할 수 있게 된 것은 주께서 그녀의 마음을 열어주신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보아 그녀가 이미 하나님의 택자로 존재해 나오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요6:65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따라서 그녀의 하나님 공경은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선행적으로 그녀에게 작용해 오다가 때가 차매 바울을 통해 복음을 전해 듣게 하시고 이런 사건을 계기로 그녀를 구원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손길이 간섭하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선(先) 선택의 역사가 선행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특정인에게 선별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와 성령님의 내적 조명을 통한 구원에로의 부르심은 하나의 연장선상에서 일관성을 띤 채 동일한 사람에게 유효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본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수 중에 일부를 부르셔서 구원에 접촉시키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일컬어 내적 부르심이라고 부릅니다. 이때 다수 중 일부가 반응하게 되는 경위를 다른 말로 유효적 부르심이라고 말합니다. 택자들을 향한 유효한 부르심 우리는 여기서 내적(유효적) 부르심의 범위와 대상에 대한 성경의 증언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내적 부르심의 주체는 성령님이란 사실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고전12:3입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행16:14에서는 루디아로 하여금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청종하게 하신 당사자가 주님이심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영으로서의 성령님을 가리키는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롬8:9). 에베소서 기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계획을 설명하면서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사역적 측면에서 구원사역을 분담하고 계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엡1:4-14). 이때 성령님의 사역은 구원의 보증의 영으로서의 인치심의 역할을 담당하십니다.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예수님의 대속적 구속사역을 유효하게 적용시킴으로 하나님의 자녀와 기업의 후사로 삼으시는 역사를 수행하고 계심을 확연히 보여주고 있습니다(엡1:13-14, 고후1:22). 그렇습니다. 성령하나님께서 내적 부르심의 주체가 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제한적이지만 유효적으로 적용시키는 작업을 수행하십니다. 여기서 유효적이라 함은 하나님의 택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사역 안에서 성령님으로 하여금 구원에로 부르실 때 분명하고 확실하게 성령의 내적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는 것을 통해 창세전에 선택한 자들을 남김 없이 불러모으신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내적 부르심은 어떤 경우에도 실패하실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때에 택자들의 응답은 죽은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하나님의 신적 감동과 감화의 역사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영혼에게 그의 인격을 통해 유기적으로 역사하심으로 외부적 절대 타자에 의해 섭리적으로 간섭되고 있음을 본인도 자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고 당연스럽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절대로 타의에 의해 강제적이고 강압적인 요구를 받고 있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불가항력적 은혜의 실제적 배경이 이렇습니다. 요6:37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본 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예정자들을 가리킵니다(엡1:4, 요15:16). 그런데 이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믿음으로 주님께 나오게 된다는 지적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구원은 절대 안전이 보장된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로서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그 장중에 붙들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계1:18). 만유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요10:28-29). 요10:4과 27절에서는 목자와 양의 비유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부르시는 내용이 소개됩니다. 여기서 보면 목자는 자기의 양을 알고 양은 그들의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부르면 따라오게 돼 있음을 우리에 들지 않은 일단의 다른 양들(26절)과의 비교를 통해 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당신의 백성을 찾아 죄로부터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눅19:10, 마1:21)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 가운데 구주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성령님을 통해 복음의 말씀으로 당신의 양무리를 부르십니다. 찾으십니다. 오늘도 여전히 말입니다. 이때 주님의 양들은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들어 알고 기꺼이 따르게 된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증거합니다. 때문에 이때의 부르심은 강요에 의한 억지가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음성을 듣고 본능적으로 알아서 기쁨으로 찾아가듯이 그렇게 동일한 원리와 방식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복음에 반응하는 택자들의 모습이 이렇다는 얘깁니다. 이런 일련의 사실을 일컬어 신학적으로 유효적 부르심 또는 불가향력적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성령의 유효적인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을 통해 주님의 생명에 신비적으로 연합되어 한 몸 곧 보편의 우주적 교회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고전12:12-13).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종말론적 가정공동체 말입니다(엡2:14-16, 19). 이 보편의 교회가 지상에 가시적으로 그 자태를 드러낸 것이 지역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지상의 지역교회는 늘 천상의 보편의 교회로서 주님의 몸을 이루어 가는 일에서 교회적 존재이유와 본질적 가치를 부단히 창출해 내야 하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존재양식으로서 말입니다. 이를 현실적으로 가능케 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말씀에 대한 풍성한 이해와 이에 따른 순종력의 발휘입니다. 지식을 좇아 행하는 신앙적 삶 말입니다(롬10:2-3).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왕적 권세가 충만히 발휘될 뿐 아니라 그 통치를 원활하게 받고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현존성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형편은 교회의 천상적 본질을 추구하는 일에서 너무나도 동떨어지고 부족할 뿐임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교회가 무엇인지 조차 성경적으로 바르게 해명해 내지 못함으로 해서 말씀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임의대로 적용시키는 나머지 인간의 종교심만을 한껏 부추기는 가운데 급기야 우상숭배의 이교도적 집단으로 변질돼 가고 있는 실정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부르짖기는 하는데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닌 철저히 자신의 일신상의 일락(逸樂)과 세속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말입니다. 이런 신앙적 성격을 성경은 우상숭배 내지는 자의적 숭배신앙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골2:23, 3:5). 하나님께서는 이런 신앙을 혐오하실 뿐 아니라 결코 방관치 않으신다고 경고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만홀(漫忽)이 여기는 처사이며 동시에 망령된 행실이 되기 때문입니다(출20:3-7). 이와 관련해서 계시록의 일 곱 교회를 통해 주께서 책망하시고 권고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시는 교회적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봐야 할 줄 압니다(계2-3장). 그렇지 않으면 촛대가 옮겨지고 심지어 이미 사망선고가 내려진 교회와 사단의 교회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는 타락하고 변질된 교회로 전락될 수 있다는 경고에 귀기울여야 될 줄 압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는 오늘도 여전히 현존하는 모든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준엄하신 경고와 경계의 말씀입니다. 3.결론 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전적타락과 부패는 스스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릴 수 있는 지각과 감정과 능력을 근원적으로 상실했기에 자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기회란 전무한 것이 인간의 비참한 영적 실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태를 일컬어 전인적(全人的) 타락과 무능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실은 자연히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주권적인 선택에 호소하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대속적 속죄사역의 공효는 하나님의 택자들에게만 선별적이고 제한적으로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당위와 필연을 유발하게 됩니다. 불가항력적 은혜와 유효적 부르심의 교리는 이상의 사실들을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적용시키는 성령하나님의 신비스런 사역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복음을 들은 다수 중 얼마를 복음에 반응케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사죄의 은총을 선물의 의미로 수납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런 대가(代價)없이 말입니다. 이때 이 사역을 성령님께서 주도적으로 담당하시는 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택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십자가의 복음의 내용을 저항 없이 본능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지적입니다(행13:48). 이런 사실은 단순히 교리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택자들의 인격 안에서 구체적으로 경험되는 현실적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기독교 신앙이 관념이 아닌 실질인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성령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의 결과가 이런 신비한 구원사역을 현실로 절감하게 만듭니다. 이 크신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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