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5대교리 첫번째/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
좐 칼빈 2014. 11. 15. 01:32칼빈의 5대교리 첫번째 /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
칼빈주의란?
물론 역사적 개혁주의의 전통적인 신앙이 칼빈 개인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칼빈 이전에 이미 다른 종교개혁자들(위클리프, 후스, 쯔빙글리등)에 의해 전통적인 신학이 산발적으로 제시됐는데 칼빈이 이를 종합적이고 보다 체계적으로 수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란 칼빈이 처음으로 종합적인 신학체계를 세웠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라 부르는 것이지 칼빈이 새롭게 무엇인가를 만들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를 들면 만유인력의 이론을 뉴톤이 처음 발견했기에 그의 이름을 따서 ‘뉴톤의 만유인력’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본래는 창조 때부터 존재해 왔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칼빈주의는 성경에서 시작이 되었고, 사도 바울에 의해 신학적 기초가 수립됐으며, 어거스틴에 의해 발전이 되었고, 칼빈에 의해 종합적으로 체계가 세워졌을 뿐 아니라, 칼빈을 추종하는 신학자들(벤자민 워필드, 챨스 핫지,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등등)에 의해 꽃이 피었으며, 현재 역사적 개혁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보수 신학자들에 의해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주의는 인간의 사색된 철학이나 종교가 아닌 성경적 참 복음과 하나님의 법도를 성경에 있는 그대로 곧 성경 신학적으로 가르치는 사상 체계라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칼빈주의란 성경에서 시작하여 칼빈이 체계를 세운 것을 후에 신학자들이 집을 지은 것으로 우리는 칼빈주의가 성경을 기초로 한 전통신학이요 보수신학의 기초라고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칼빈주의 신학의 기본원리는 ?하나님 중심사상(God Centered) 성경중심사상(Scripture Centered)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God's Absolute Sovereignty)으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칼빈주의 5대 교리의 기원
칼빈주의 5대 교리를 형성하게 된 것은 1610년 화란신학교 교수였던 제임스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 1560-1609)가 죽은 뒤, 소위 알미니우스주의자들(Arminians)이라고 알려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그의 가르침을 기초로 다섯까지 주요 요점으로 공식화해서 내어놓은 것이 시발점이 됩니다. 그때까지 화란 교회들은 유럽의 다른 주요 개혁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벨직 신앙고백과 하이델비르크의 신앙고백에 찬동하고 있었으며, 이 고백들은 둘 다 종교개혁의 가르침에 철저히 기초한 교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알미니안들은 이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체계화된 성경의 교리적 가르침에 항의(抗議)해 자신들 나름대로의 교리적 입장을 다섯 가지로 요약해 표명했던 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유의지 혹은 인간의 능력(free will or human ability) : 이는 인간이 비록 타락으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았지만 영적 선을 택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무능해진 것은 아니며 따라서 자력(自力)으로 구원을 소유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조건적 선택(conditional election) : 소위 예지(豫知)에 의한 예정(豫定)교리로서 구원을 받고 싶어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그들을 선택하시기로 예정하셨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복음에 반응해 믿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예정에 선행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보편적 구속 혹은 일반적 속죄(universal redemption or general atonement) : 이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을 결국은 구원하시기 위해 대속적으로 돌아가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비록 죄 값으로 지옥에 떨어지는 영혼이 있을지언정 종래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인류를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견해입니다. 중생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지에 제한을 받음(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regeneration limited by the human will) : 이는 성령께서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해 역사(役事) 하실 때 인간의지에 의해 거부를 당할 수 있으며 그 결과 성령의 뜻이 좌절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죄인인 인간이 자진해서 영생의 생명을 받고 싶어하지 않는 한 성령은 생명을 줄 수 없다는 요지입니다. …은혜에서 떨어 짐(falling from grace) : 이 주장은 구원받은 사람도 종국에 가서는 구원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 조항은 각각의 내용이 담고 있는 교리적 성격상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실 성경의 원저자는 성령하나님으로서 일체의 성경적 교리는 상호 의존적이고 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따라서 어느 한편에서의 교리는 다른 한편에서의 교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이 성경의 자증입니다. 성경은 결코 상호 모순되지 않습니다. 유기적(有機的)으로 연합돼 있습니다.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학적인 논쟁이 일어나자 화란 정부는 1618년 11월에 화란의 남부지역인 도르트에서 세계 각국의 대표 129명이 모여 이 문제를 갖고 회의를 시작합니다. 이 회의는 이듬해인 1619년 5월까지 약 7개월간에 걸쳐 무려 154회에 이르는 마라톤회의를 거듭한 끝에 알미니안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조항들이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다는 사실에 의견을 모으게 됩니다. 동시에 종교개혁에서 매우 명백히 제시됐고, 프랑스 신학자인 죤 칼빈에 의해 체계적으로 형성된 개혁주의 교리적 입장을 재확인 한 도르트 대회는 알미니안들의 체계에 대결하기 위한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요점(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을 공식화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소위 칼빈주의의 5대 교리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적타락(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인간의 전적타락 교리는 전적부패 또는 전적무능이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런 표현 속에는 한결같이 몇 가지 동일하게 시사하는 신학적 명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주제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지적입니다. 이는 상대적 명제가 아닙니다. 절대적 명제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인인데 이는 사람과의 상대적 관계 속에서 평가된 것이 아닌 하나님과의 본질적이고 근본적이며 나아가 영적인 절대적 관계에 근거해서 진단된 결과라는 말입니다. 이를 다시 요약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신분의 고하와 출신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죄인으로 간주되고 따라서 정죄 된다는 사실입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은 처음 무죄자로 창조됩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무죄자가 곧 완전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완전자는 무죄할 뿐 아니라 죄를 지을 수도 짓지도 않는 절대자를 일컫는 다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죄자이지만 불완전한 아담은 하나님께서 내신 선악과 시험을 통과하는 것을 통해 보다 완전하고 온전한 선의 상태로 발전해 나가야 할 시험적(?)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 시험에서 실패합니다.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 선악과 금령법을 어기게 됩니다. 이것이 에덴에서의 아담의 범죄사건입니다. 원죄의 기원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원죄의 성립은 인간의 내적 욕심의 발로로 야기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정의됩니다. 다시 말해 원죄의 본질적 성격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믿지 못하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요16:9). 이후 아담의 범죄의 죄성(罪性)은 그의 후손들의 본성에 유전적으로 전가(轉嫁)돼 온 인류를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선고하는 근본원인을 제공합니다(창2:17, 3:5-6). 롬3:23와 5:12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는데 이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다고 하는 지적이 바로 인류의 시조인 아담의 범죄행위와 이로 인한 후손에게로의 죄의 생득적 전가를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이후부터 온 인류는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서게 됩니다. 의인은 한 사람도 없게 됩니다(롬3:10). 인류의 비극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죄인으로 정죄 당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일체의 영적 교제에서 단절돼 영원히 결별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영적 이산가족이 돼 버린 셈입니다. 바로 죄로 말미암아서 말입니다. 사59:2입니다.“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요8:1-11을 보겠습니다. 여기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의 얘기가 소개됩니다. 한 무리의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과 다수의 시민들이 이 얘기에 등장합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고소할 목적으로 이 여인을 잡아 의도적으로 주님께 이끌어옵니다.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얘기합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일 것을 명했다고 하면서 주님의 판결을 요구합니다. 사도 요한은 저들의 요구가 ‘예수님을 시험해서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함’이라고 이 사건의 내막에 담긴 실상을 독자들에게 폭로합니다. 어찌했든 예수님은 저들의 요구에 어떤 식으로라도 답변하시지 않으면 아니 되는 긴박한 상황에 처해 계십니다. 만약에 모세의 법대로 죽이라고 하신다면 죄인을 사랑하셔서 구원을 베푸시는 사랑의 법을 위반해 스스로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셈이 됩니다. 그렇다고 죄를 용서하셔서 구원하시는 사랑의 법에 근거해 살려 주라고 하시면 이는 주님 또한 아브라함의 육신적 혈통을 통해 오신 분으로 이스라엘의 신앙적 규범인 모세의 율법을 정면으로 거부하시는 셈이 됩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입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잠시 시간을 가지신 후에 살기등등(殺氣騰騰)하고 의기양양한 회중을 향해 일성(一聲)을 발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7절). 다시 잠시의 침묵이 흐릅니다. 얼마 후 그 자리에는 아무도 남아있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이때의 상황을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9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회중은 간음한 여인과 비교해서 분명히 현행범은 아니었습니다. 상대적 의의 입장에 처해 있었습니다. ‘드러난 죄인’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을 돌로 치라는 주님의 질문 섞인 답변에 어느 누구 한사람도 선뜻 나서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내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회중의 본성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일말의 양심이 저들을 여인과 동일한 범죄자로 고발하고 있음을 증거함에 다름 아닙니다. ‘감춰진 죄인‘으로 말입니다. 요한은 이 상황을 해석하면서‘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떠나게 됐다고 기록합니다. 비록 저들이 현행범은 아닐지라도 스스로 자기 양심에 찔려 감히 자신들을 무죄자라고 주장하지 못한 사실을 저자는 본문을 통해 적나라하게 시사합니다. 여기서 양심은 바로 주님의 질문 곧 하나님의 질문에 대한 인간 본성의 실질이 어떠함을 사실적으로 직고(直告)하는 고발자로서의 기능을 담당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지금 인류를 향해 저들의 실상이 하나님 앞에서 ‘이 여인이나 다를 바 없는 죄인’인 사실을 고발하고 계십니다. 드러난 죄인이나 감추어진 죄인이나를 막론하고 마음의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시선 앞에서는 모두가 한결같은 죄인들로 존재할 뿐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인간 심성의 실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여기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라는 명제 속에는 몇 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에덴에서의 아담의 범죄의 영향은 인간의 지(知)정(情)의(意)의 전(全) 영역에 걸쳐 ‘전인적(全人的) 부패’를 초래한 나머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도, 찾을 수도, 믿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구원을 스스로 취할 수도 없는 영적 사망자(死亡者)라고 정의한다는 지적입니다(롬3:10-12, 엡2:1). 다시 말해 인간의 지정의가 그 본래적이고 궁극적인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와 교통의 기능을 철저히 상실한 나머지 어떤 자의적 방식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유지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됐다는 지적입니다(롬1:21-23). 이는 처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도의 영적 수준에서 자력으로는 회복불가능의 저급하고 타락한 상태로 전락돼 버렸음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창2:17을 보십시오. 선악과 금과법에는 문맥상 조건부적으로 영생과 사망이 대가로 주어졌습니다. 비록 아담과 하와가 이를 범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하셔서 죽음이 즉각적으로 저들에게 임하는 것을 지연시킴으로 구속의 기회를 허락하셨지만 하나님과의 종전 같은 막힘 없는 전인적 교제와 교통은 한 순간에 단절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여느 때와 같이 찾아 오셨지만 자신들의 죄가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음으로서 인격적 교제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됨을 봅니다(창3:8-10). 도리어 하나님을 피합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영적 죽음 곧 ‘전인적 관계의 단절’이라고 부릅니다.
이후로 아담의 범죄는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하나님과의 일체의 정상적인 교제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원죄(原罪)로 기능하게 됩니다(사59:1-2). 롬3:23과 5:12을 보십시오.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동일하게 죄인인 사실을 증거합니다. 나아가 이런 사실은 현실 속에서 구체적 행위로 나타나는 일체의 인간의 자범죄(自犯罪)의 근본 원인이 바로 인간의 본성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원죄의 죄성으로부터 기인됨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합니다.
엡2:1을 보십시오. 우리의 옛사람의 형편과 처지는 죄와 허물로 이미 죽은 자들로 판정 받은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원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실상 죽은 자나 방불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과의 마땅한 영적 교제(전12:13)의 단절이 성경적 죽음의 일차적 판정임을 알게 됩니다. 마8:22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부친의 장사(葬事)문제로 주님을 즉각적으로 좇기를 주저하는 한 제자를 향해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권고하십니다(마8:22, 눅9:60). 여기서 실제로 죽은 자는 두 번째 죽은 자를 가리키며, 첫 번째 죽은 자들이란 비록 현재적으로 살아있기는 하지만 주님을 따르지 않는 것을 통해 주님과 관계도 분깃도 없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불신자들로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으로 인해 여전히 하나님과 무관한 상태에 있는 원수 된 자들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 하나님과 무관한 자들은 여전히 전적부패한 자들로서 결국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들로 간주됨이 성경의 관점입니다.
그렇다면 갓난아이들이나 태아들은 어떨까요? 성경은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사악(邪惡)한 존재라고 정죄합니다. 원죄로 인해 처음부터 죄인으로 잉태되고 출생하기 때문입니다. 시51:5을 보십시오. 시편 기자는 이르기를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실토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인간의 심성을 고발하면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렘17:9)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과 그 모든 계획들이 항상 악함으로 당시의 세상이 죄악으로 관영 했음을 창세기 저자는 고발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한 결과가 되었음을 기록합니다(창6:5). 로마서 기자는 이런 인간의 죄악 된 상태를 힐난하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포합니다(롬3:10). 지금 저자는 인간 상호간의 존재할 수 있는 상대적 선의 기준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절대적 선의 기준을 갖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행이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 91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기초해서(원천)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규범)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목적)하는 것’을 동기유발로 삼아 행할 때 비로소 선행으로 성립된다고 가르칩니다.
전적타락의 두 번째 명제는 사망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류에게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죽음의 근원이 원죄의 결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심판의 일환임을 증거합니다(롬6:23).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서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히9:27). 왜냐하면 죄는 법정적(法定的) 측면에서 이에 상응하는 형벌을 요구하는 바 죽음은 죄 값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며 동시에 형벌이기에 말입니다. 따라서 노령으로 죽는 자연사(自然死)나 각종 병사(病死) 그리고 사고사(事故死)는 엄밀한 의미에서 죽음의 방식(方式)일 뿐 죽음의 근본 원인(原因)이 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의 원인은 죄입니다. 죄의 값으로 사망이 인류에게 불청객으로 찾아온 것입니다(롬6:23). 역사이래 한 번 태어난 인간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원리와 원칙은 지속적으로 유효해서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여전히 오고 오는 세대를 통해 인류를 죽음의 포로로 사로잡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필연적 죽음을 통해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선고하는 성경의 증언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정당한 판결이며 선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인간의 전적타락이 안고 있는 명제는 죄와 사망의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한 번 태어나 죽는 것으로 모든 지상의 삶이 마감되는 줄 압니다. 더 이상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 줄 압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서 침묵하지 않습니다. 죽음 후에는 최종적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선포합니다. 요5:28-29입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렇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종착역이 아닙니다. 끝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죽음을 영생(하나님 나라)과 영벌(불못 곧 지옥)의 실질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때 인류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심판대를 경유해야 할 것임을 경계시킵니다. 따라서 죽음 후에는 온 인류 앞에 최종적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히9:27). 이는 한 번 태어난 생명의 가치는 영생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은사로 하사된(창2:7) 탁월한 성격상 영원불멸하는 특징을 갖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생명의 법칙이며 원리입니다.
아울러 종말론적 생명의 최후적 거처는 영생과 영벌의 장소로 나뉘어 질 것임을 성경은 지적합니다(계20:15, 21:1, 4). 본문(요5:28-29)은 하나님의 최후적 심판대에 서기 위해 죽은 자들의 부활을 언급합니다. 사실 부활의 개념은 인간의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는 그 신비하고 초자연적이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실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사실을 여러 사건의 경우를 통해 분명한 실제적 사건으로 소개합니다(롬8:11, 고전15:20-24). 사실상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의 존립자체가 불가능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고전15:19).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에게 속한 모든 성도들의 종말론적 부활의 첫 열매로서의 보증이 되신 사건입니다. 그분의 부활에 속해져서 성도들은 그 분이 다시 오시는 날 영생하는 신령한 몸으로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고전15:42-44, 살전4:16-17)). 이미 부활해서 승천하신 예수님과 동일한 부활체의 영광을 입고서 말입니다. 이토록 부활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교리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이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남김없이 만족시킨 객관적이고 공식적인 증거로 작용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의 양면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로 설명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고전15:3-4).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 된 성도들은 이 부활 후 심판(계20:11-14)에서 제외됨으로 지옥의 다른 설명인 불못의 종말론적 형벌에서 이미 현재적으로 사면(赦免)됐음을 성경은 증언합니다(요5:24). 이 말은 역(逆)으로 현재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불신자들은 아직 죽음과 그 후의 부활과 심판을 현실로 경험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선취적으로 종말론적 심판에 처해진 것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요3:18). 복음이 인류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사역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입는 것을 통해 필연적 심판(영벌)에서 제외되며 동시에 영생하는 생명에로 옮겨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요5:24).
이런 복음의 내용이 이미 우리 안에서 현재적으로 성취된 사건으로 신기하게도(?)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예. 믿는 것이 아닌 믿어지는 것입니다. ‘절대적 타자’에 의해 우리의 영혼이 그렇게 이끌림을 받아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옛 자아는 위에서 본대로 이미 허물과 죄로 인해 죽은 자로 존재하기에 자력으로는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는 능력을 전적으로 상실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절대적 타자(他者)로서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다른 보혜사가 되시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사역이 우리를 위한 대속적 사역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우리의 이미 죽어버린 영혼을 거듭나게 하셔서 이를 수납하게 하신다는 얘깁니다. 죽은 영혼을 거듭나게 하심으로 새사람의 본성이 하나님을 향한 정상적인 영적 인식작용을 가능케 하는 것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 불가사의한 사역의 주체가 바로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예수님의 지상적 사역의 계승자로 오셨습니다. 다시 말해 승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지상에서 당신의 종말론적 구속사역을 성령님을 통해 진행해 가십니다. 성령님을 다른 보혜사 또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부르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에 대해 원보혜사가 되시며 동시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통해 성령님을 자신의 대리적 파송자로 세상 가운데 보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사역의 성격은 오직 예수님의 구속적 사역을 증거하며 그 분의 가르침을 성도들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을 통해 부단히 성화의 삶을 살아가도록 촉구하시며 이를 가능케 하는 일에 집중돼 있습니다(요14:16, 26). 가시적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까지도 성령님은 성도들의 심령에 관계하셔서 여전히 영생하는 생명력의 근원으로 활동하게 됩니다(요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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