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존 칼빈의 <기독교 강요(상)>(완결판, 크리스챤다이제스트)를 풀어서 요약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경건의 관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경건의 토대가 됩니다. 반대로, 신앙이나 경건이 없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식’이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구속주로 이해하는 지식이 아니라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을 경우 자연 질서를 통해 깨닫게 될 지식을 의미합니다. [주: 그러므로 여기서는 구속주 그리스도가 아닌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경건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타락 이후 인류는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구원의 주인으로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창조주이자 선하신 분으로 아는 것과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주로 아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자연 속에서나 성경 속에서 하나님은 먼저 자신을 창조주로 보여주신 후에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주로 나타나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먼저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히 어렴풋하게 어떤 신적 절대자가 존재한다고 아는 것과는 다른 지식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모든 선의 유일한 근원이시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진리, 의, 선 등의 모든 것이 근원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만 이런 것들을 구하고 그분께만 감사를 드리게 하는 지식입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이 베푸시는 온갖 유익들을 아는 데서 생겨나는 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그를 향한 사랑이 하나로 결합된 상태”(46쪽)를 말합니다. [주: 즉 칼빈에게 ‘경건’은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두려움과 사랑이라는 정서가 함께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모든 선의 궁극적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기꺼이 하나님께 복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만 완전한 행복을 구할 수 있다는 지식이 경건과 복종, 헌신의 기초가 됩니다.


(2)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은 신뢰와 경외로 이어짐

에피쿠로스(Epicurus)와 같은 철학자들은 우리 자신과는 무관한 존재로서의 신에 대해 질문하고 사색합니다. 하지만 그 신이 우리와 무관하다면 그런 신을 알고 고백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반드시 우리 자신과 깊이 관계가 있는 지식이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경외가 생겨나게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를 안내하고 가르쳐서 하나님께만 선을 구하고 받은 모든 선에 대한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게 합니다. 셋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지배하는 법이 되게 하여 우리 삶을 하나님께 드리게 합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은 자기 뜻대로 하나님을 만들어 내지 않고 하나님 자신 그대로를 붙잡으려 하며 그분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자신을 모두 맡기며 그로 인해 평안을 누립니다. 하나님을 의로우신 재판장으로 보며 두려워하지만, 구속의 길이 전혀 없는 것처럼 지나치게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악인을 벌하는 분으로 보는 동시에 또한 경건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으로 바라보는 것”(48쪽)입니다. 경건한 자가 죄를 범하지 않으려 하는 동기는 단순히 지옥에 대한 형벌을 피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높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지옥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거스른다는 것만으로도 끔찍스러워 견딜 수 없는 심정일 것”(48쪽)입니다.

하지만 예식이 화려한 곳일수록 하나님을 진정으로 공경하는 사람을 찾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출처 : 크리에티브커먼즈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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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보혈의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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