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자들의 부활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 / 머레이 J. 해리스
성령론 2017. 11. 28. 11:272. 신자들의 부활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 / 머레이 J. 해리스
부활에 대한 성령의 관계에 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은 사실상 바울 서신에 국한하며, 바울 서신에서도 오직 고린도후서에서 그리고 그 후에야 이 관계가 특별한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 관련 있는 문절들을 연구하면 우리는 신자들의 부활에 관하여 성령의 네 가지 기능을 인지할 수 있다.
(1) 성령은 미래의 부활 변화에 대한 보증이시다.
세 개의 바울 문절에서(고후 1:22; 5:5; 엡 1:14) 성령은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주신 아라본(arrabon)이라 불리운다. 이 전문 술어는 그리스 상업 용법에서 두가지 기본적인 의미를 가졌다. 이 말은 더 지불해야 할 필요가 있으나 문제의 물품에 대하여 법적인 권리를 주는, 구입의 첫 불입금 곧 첫 지불액(a down payment) 또는 보증금(deposit)이었다. 때때로 이 부분적인 지불은 전체의 상당히 큰 부분을 지불하는 것이었으나, 다른 경우들에는 단지 명목상의 보증금에 지나지 않았다. 이 말의 다른 의미에 있어서, 아라본은 실제의 지불과는 종류가 다르나 실제의 지불을 의무적인 것이 되게끔 만드는 서약 또는 보증을 표시했다. 바울이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아파르케)"에 관해서 이야기 하는 로마서 8:23에 나타나는 상사한 사상을 지적하면서, 많은 주석가들이 전자의 의미를 선호한다. 그러나 이 어구는 단순히 성령이 맺게 하신 처음 익은 열매"(즉 양자됨에서 완성되도록 되어 있는 아들됨의 영, 롬 8:14-16, 23)를 가리킬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라본에 대하여 "첫 지불액"이라는 의미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의미심장하게도, 현대 그리스말에서 "약혼 반지"에 대한 한 가지 말이 아라본 곧 평생의 사랑과 정절에 대한 서약이다. 비록 몇 가지 현대 번역이 두 가지 의미를 다 유지하기를 선호하기는 하지만(예를 들면 MOFFAT. "서약과 불입금"; NIV, "장차 올 것을 보증하는, 보증금"), 우리는 이 술어를 "서약"(pledge) 또는 "보증"(guarantee)으로 번역하는 역본들(WEYMOUTH, GOODSPEED, TCNT, RSV, NASB, NEB)을 따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분명히 이 말의 모든 상업적 뉘앙스들을 다 강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원은 계약상으로 구속력이 있는 계약에 의해 비준을 받는 상호 흥정의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인데, 하나님은 자발적인 선물로 그의 성령을 신자들에게 수여하신다. 우리는 또한 바울이 성령을 반환해야 할 담보물(창 38:17-20 참조) 또는 단순한 사전 견본으로 간주하고 따라서 기독교인이 받는 유업의 열등한 부분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해도 좋을 것이다.
고린도후서 1:22과 5:5을 비교하면 바울에게는 "인치심"이 하나님께서 서약으로 성령을 주시는 것을 나타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중대한 질문이 남는다. 무엇에 대한 서약으로 주셨단 말인가? 바울은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 5:5)고 진술한다. 여기서 언급한 "(이것을) 이루게 하시고"는 1-4절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묘사된 신령한 몸을 받고 소유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을 얻는 것(1절).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는 것(2절) 그리고 죽을 몸이 삼킨바 되는 것(4절). 이렇게 말하는 것에 대한 확증은 "약속의 성령"을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는 분"으로 묘사하는 에베소서 1:13-14에서 온다. 하나님의 성령 선물은 그러므로 약속의 성취일 뿐 아니라(갈 3:14; 엡 1:13) 또한 성취의 약속이기도 하다(고후 5:5; 엡 1:14). 기독교인이 받을 기업의 보증이신 성령께서 또한 그 기업을 간절히 사모하게 하신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롬 8:23; 고후 5:2, 4-5).
(2) 성령은 하나님이 미래의 부활 변화를 가져오려고 사용하시게 될 수단이시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고 신약성경이 어느 곳에서도 분명히 진술하지 않는다는 것은 좀 놀라운 일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하나님의 능력(고전 6:14; 참조. 고후 13:4) 또는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엡 1:19-20)으로 돌릴 때와 같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를 다시 살리셨다는 것에 대한 강한 암시들이 있다. 그러나 정말 로마서 8:10-11은 신자들의 부활의 출처를 내주하시는 성령의 작용에서 분명히 찾아낸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죽게 되는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살려주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shall impart life to)." 이 "살리시는 것"(impartation of life)이라는 말을 성령이 가져다 주시는 신자들의 매일 매일의 영적 갱신 또는 강림 때에 살아 있는 기독교인들의 변화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10절과 11절이 다 생명을 육체적 사망(physical death) 또는 필멸(mortality)과 대조하기 때문에, 산 자의 변화뿐만 아니라 죽은 자의 변화도 포함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우리가 10절에서 11절로 지나갈 때 그 생각의 움직임은 현재의 몸의 필멸에서 변화된 몸의 불멸로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 장차 이렇게 활기를 돋우실 역할은 갈라디아서 6:8에도 언급이 되어 있다. 만일 사람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만일 마치 느낄 수 있는 세계와 그들 자신의 자연적 욕구가 우주에 있는 유일한 실제들인 것처럼 살아간다면, 그들의 심은 것과 일치하여 그 동일한 "육체"(flesh)에서 썩음과 죽음이라는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 특히 신령한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고 신령한 선생들을 부양함으로써(갈 6:6), 하나님의 영이 활동하시는 영역인(롬 8:16) 인간의 영을 보강하는 일에 시간과 정력을 바치는 자들은 때가되면(갈 6:9) 그 동일한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이라는 최종적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주시는 일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활(갈 6:8)과 부활 변화를 가져오시는 일에 나타나는 그의 역활(롬 8:11)을 구별하는 것은 자의적인 것이리라.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성령은 죽은 자들 또는 죽기로 작정되어 있는 자들에게 작용하시는 "생명을 주시는" 영이시다(롬 8:2, 10; 고후 3:6).
(3) 성령은 부활 생명을 유지하신다
바울이 성령은 "살리신다"(고후 3:6)는 것을 말하거나 그를 "생명"(롬 8:10) 또는 "생명"의 성령(롬 8:2)으로 묘사할 때, 요점은 단 하나이다. 성령의 한 가지 특질, 아마도 주요한 특질은 그가 육체적 생명과 영적인 생명의 원천이시며 영구히 육체적 생명과 영적인 생명을 나누어 주신다는 것이다. 사실이 이렇다면, 그는 중생 때에 신자가 얻은 영적인 생명과 부활로 말미암아 신자가 얻은 새로운 몸의 생명을 끊임없이 유지하심에 틀림없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의 결과는 그의 다시 사신 생명을 공유하는 것임을 우리가 살펴 보았다. 이 생명은 성령이 중재하신다(롬 7:6, "영의 새로운 것으로," 영이 가져 오신 새 생명<the new life brought by the Spirit>).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고"(갈 5:24),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며, 결과적으로 "성령으로 산다"(갈 5:25). 디도서 3:5에서 두 가지 별개의 활동을 구원의 수단으로 묘사한다: 중생을 가져오는 씻음, "중생의 물"(NEB); 성령이 가져오시는 새롭게 하심(아나카이노시스). 중생은 단 한번 일어나며 순간적인 것이다. 새롭게 하심은 연속적이며 점진적인 것이다(롬 12:2, 신약성경에서 아나카이노시스를 사용하는 유일한 다른 곳; 고후 4:16 하반절). 오직 성령께서 신자 안에 영적인 생명을 끊임없이 넣어주심으로만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중생" 때에 받은 새로운 부활 생명이 유지된다. 성령으로 마음을 이렇게 새롭게 하는 것(롬 12:2; 엡 4:23)은 성령으로 "속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 또는 새롭게 하는 것(고후 4:16; 엡 3:16)에 상응한다.
성령께서 신자의 몸의 부활 생명을 유지하신다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우리에게 어떤 직접적인 진술도 없으나, 그러나 성령께서 신자의 몸의 부활 생명을 유지하신다는 이 결론은 여러 조각의 증거에서 이끌어낸 그럴듯한 추론으로 보인다. 첫째, 바울이 부활 몸에 관하여 신령한이라는 형용 어구를 사용할 때 그는 부활 몸의 물질적 구성이 아니라 부활체의 조직 원리 또는 규정 원리를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신령한 부활체는 하나님의 영에 의존하고 하나님의 영의 통제를 받는 몸,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그 초자연적인 생명을 받고 하나님의 영에 완전히 복종하거나 응하는 몸이다. 둘째, 아마도 요한게시록에 나오는 "생명수"(living water) 샘 또는 생명수 강이(7:17; 21:6; 22:1, 17)라는 상징은, 제4복음서에서 물은 성령을 상징하므로(요 4:14; 7:38-39),신령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서 성령의 영구적인 역할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이 가능성은 별문제로 하고도,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서의 성령의 기능이 장차 올 시대가 완전히 이를 때 갑자기 끝나게 될 것이라고 믿을 이유가 없다. 현 시대에서 하나님의 영을 떠나서는 생명이 없는 것과 같이 내세에서도 하나님의 영을 떠나서는 생명이 없게 될 것이다. 세째, 그리스도의 부활체는 일반적으로 신자들의 부활체에 대한 범례라고 바울이 믿었으므로(빌 3:21),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상태에 해당되었던 것이 기독교인의 부활 상태에 해당되리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보복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연약하심"으로 인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그는 지금 "하나님의 능력으로"(고후 13:4) 유지되는 부활 생명 가운데 사신다는 것을 바울은 주목한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는 "능력"이 때때로 사실상 성령(the Spirit)과 동의어이다(예를 들면 고전 2:4-5; 롬 8:11과 비교한 고전 6:14을 보라). 만일 성령께서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유지하신다면, 그는 또한 신자의 미래의 부활 생명도 유지하실 것이다.
(4) 성령은 신자의 부활 이전 상태와 이후 상태 사이를 연결하는 분이시다
전신약성경에서, 영적인 생명의 초기 단계는 영적인 생명이 장차 얻게 될 완전함과 결코 혼동되거나 동일시되지 않는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은 "영생을 거두는 것"과 아주 구별된다(갈 6:8). 지금(Now)과 다른 그때(Then)가 있는 것이다. 장차 올 세대(the Age to Come)는 여명이 밝았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이 악한 세대"에서 산다(갈 1:4). 기독교인들에게 지금(the Now)과 그때(the Then)의 연결은 인간론적인(anthropological) 것이 아니라 성령론적인(pneumatological) 것이다.즉 지금과 그때의 연결은 자연적으로 불멸한 영혼의 영속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소유하심과 활동하심에 있는 것이다.
현 세대에서 또는 두 세대의 겹쳐진 부분에서, 신자들은 주의 영광을 응시하고 또 그다음에 반사함에 따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점진적으로 변화되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전과정은 성령의 사역(일)이다(고후 3:18; 차조. 엡 3:16). 그 다음에 또 다시 성령의 작인을 통하여(롬 8:11). 하나님이 장차 올 세대에서 신자들 안에 일으키시는 부활 변화에서,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하는 "좋은 일"이 완성된다(롬 8:29; 갈 4:19; 빌 1:6; 3:21). 그 다음에 이 하늘에 속한 몸은 성령의 생명으로 고동치게 될 것이니.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다"(롬 8:10)라고 더 이상 말하지 않게 될 것이다. 성령의 사역의 목표 곧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드는 일을 성취하시자마자 성령께서 갑자기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원을 갖고 살도록 그들을 버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성령이 지금과 그때 사이의 연속성을 이루는 요소라는 것이 놀라움을 야기해서는 안된다.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영"으로 특징지어지므로(롬 8:2, 10; 고후 3:6). 우리는 죽음이 성령의 사역(일)을 종식시키거나 뒤엎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죽음이 성령의 활동을 더 이상 가릴 수 없고 기독교인을 그의 자선심이 많은 영향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은 죽음이 기독교인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과 같다(롬 8:38-39).
두 세대(현 세대와 장차 올 세대)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활이 하나의 문절 안에서 넌지시 언급되는 경우가 두 번 있다. 우리가 "하나님이 친히 우리에게 바로 이 운명(즉 부활 변화에 대한 경험)을 분비시키셨다"(God himself has prepared us for this very destiny: 한글 개역 성경은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시게 하시고"라고 되어 있다-역자 주)라는 말을 읽을 때(고후 5:4 하반절. 5 상반절), "준비시키심"(preparation)은 보증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주시는 것일 수가 있고(고후 5:5 하반절) 또는 성령께서 가져다 주시는 매일 매일의 내적인 갱신(새롭게 하심)일 수가 있다(고후 3:18; 4:16). 어느 쪽이든, 성령이 기독교인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고(엡 3:16) 그래서 신령한 몸의 핵을 형성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사실상 기독교인에게, 새롭게 하심의 과정의 끝을 표시하게 될, 절정적 변화를 준비시키고 계시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5을 풀어서 말하면: "그런데 그의 성령을 통하여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부활 변화를 준비시키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신데, 그는 부활의 행위자인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이 최종적인 변화를 가져오시기로 맹세하신 것이다." 그 다음 로마서 8:23이 있다. 창조된 온 우주가 이제까지 해산의 고통으로 신음해 오고 있다는 것을 말한 후에, 바울은 계속하여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아바'라 부르짖게 하는 아들됨의 영(롬 8:14-16)-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성령으로 말미암은, 롬 8:11)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라고 말한다. 현재 아들됨(sonship)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하는 그 동일한 성령께서 종말(the End)에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을 다시 살리심으로 인하여 저 아들됨(sonship)을 인치시게 될 것이다.
머레이 J. 해리스의 '신약에 나타난 부활'에서 발췌(252-259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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