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의 은사에 마음 열기

이것은 오늘날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늘날 교회마다 말씀과 성령 사이에 조용한 이혼이 진행되고 있다. 이혼을 하면 그 부모 슬하 자녀 가운데 어떤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살고, 어떤 아이들은 아빠와 산다. 이 이혼에서 말씀 사역의 편에 서는 이들은 성경 강해와 복음, 건전한 신학(이신칭의와 하나님의 주권 등)을 마땅히 강조한다. 그들은 “우리는 견고한 교리가 필요하다”고 말하곤 한다. 성령 사역의 편에 서는 이들은 사도행전과 이적과 기사, 기적, 살아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사들을 강조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나는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둘이 연합할 때 폭발적인 결과를 거둘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 말씀 사역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를 강조한다. 성령 사역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2장 8-10절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를 강조한다. 우리에게는 그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말씀 편에 선 사람들이 흔히 부딪치는 문제가 있다. 바로 방언으로 말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방언의 은사가 아니었더라면 은사 중지론자들의 가르침도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쓸 때가 있다. 은사 중지론은 사도들의 시대 이후로 기적이 ‘중지되었다’고 주장하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말씀이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고집스럽게도 그 주장을 고수하며 그들의 편견을 신조로 바꾸어서 하나님이 오래전에 직접 은사 중지를 결정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아무도 지혜나, 예언, 기적의 은사는 부인하지 않는다. 바울이 “방언”의 은사를 목록에 집어넣으면서 모두가 불편해진 것이다.

말씀 편에 선 사람들은 “그러나 바울은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셨는데, 더 큰 은사란 사랑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재빨리 “방언은 은사의 목록 중에 가장 저급한 것으로,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라고 덧붙이곤 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싶다면 바닥부터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방언의 은사보다 더 큰 오명을 안겨 주는 문제는 없다. 만약 사람들에게서 비난받고 오명을 얻더라도 그래서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는가?

슬프지만 어떤 사람들은 방언의 은사를 끝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결국 끝까지 저항할 것이다. 말씀 편에 선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방언을 하지 않는 것을 합리화시켜 줄 수 있는 성경 주석이나 교리를 찾아서 그 뒤에 숨으려 한다. 여기 해결점이 있다. ☆방언의 은사는 당신의 교만한 마음에 유일하게 도전하는 성령의 은사다. 여기서 진정한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당신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으면 한다.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물론 아니다; 고전 12:30)라는 말씀에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먼저 방언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자신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다고 말하며 너무 서둘러 도망가지 말고, 먼저 그분 앞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기 바란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는 데에 가장 큰 방해가 되었을 수도 있다. 브루스 메츠거 박사 밑에서 공부했던 한 친구가 그에게 이렇게 질문했다고 한다(메츠거는 아마도 21세기가 낳은 가장 탁월한 헬라어 학자일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 8장 26-27절에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한다’고 쓴 것은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뜻이었습니까?“ 그러자 메츠거는 ”물론이지, 바울이 그런 뜻으로 한 말이 맞다“라고 했다. 메츠거는 장로교인이고 아마도 은사 중지론자였을 테지만, 이 사실을 내 친구에게 인정할 정도로 학자적 양심과 객관성을 갖춘 사람이었다.

R.T. 켄달의 '하나님을 열망하다'에서.. 출처: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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