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회에는 전통적인 연대기에 반하는 수정 연대기를 지지하는 학자들의 글을 올린다. 그들이 주장하는 수정 연대기의 근거는 무엇인가?



표준 이집트 연대기는 BC 3000년을 넘어서 확장되어 있다. 이것은 노아의 전 세계적인 홍수가 고왕국(Old Kingdom) 시대 동안 일어났다는 것이 되어진다. 또한, 요셉은 제2 중간기(Second Intermediate Period) 동안 애굽에 놓여지게 된다. 그러나 그 당시에 그에 대한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모세는 신왕국(New Kingdom) 시대에 이집트에 놓여지게 되지만, 번성했던 왕국에서 애굽 전역을 황폐화시켰던 질병들, 홍해에서 바로와 그의 군대의 괴멸 등과 같은 사건들의 영향을 찾아볼 수 없다.

왕조들이 동시대에 존재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서, 개정된 연대기는 극적으로 시간 척도를 무너뜨리고, 성경적인 연대기와 조화되어진다. 제1 중간기(First Intermediate Period)는 제2 중간기와 같은 것이 되며, 여호수아와 사사기의 시기와 부합한다. 제3 중간기(Third Intermediate Period) 또한 사라지게 되고, 그 왕들은 신왕국(New Kingdom)과 후기 페르시아 시기(Late and Persian Periods)들의 왕들과 일치하게 된다.

따라서 이집트는 대홍수 이후, 그리고 바벨에서의 분산 이후 미스라임(Mizraim, 노아의 손자이며 함의 아들)의 후손들에 의해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창세기 10:6) (현재의 이집트(Egypt) 라는 이름은 미스르(Misr)에서 나왔다. 참조; 창50:11)

또한 전번글에서 기술되었던 여리고성을 6년동안 발굴하였던 케슬린 케년( Kathleen Kenyon ) 의 주장은 이러하다. '제반 자료들을 현대의 지식에 비추어 분석하여 보면, BC 1580년과 BC 1400년 사이에는 무덤 양식과 고대 건축물에 있어서 양쪽 다 완전한 간격이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실제로 그녀는 성경의 출애굽기에 해당되는 BC 1400년 경에는 여리고 현지에 주민이 살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또 다른 증거가 있다.

애굽에 내려진 10대 재앙 (The Ten Plagues on Egypt)

바로는 이집트 땅에 내려진 10 가지 파괴적인 재앙과 악질로 인해서, 모세의 요구대로 그의 노예들을 놓아주었다.(출애굽기 7―12). 성스러운 나일강물은 피물로 변하였고, 모든 생축은 악질로 죽었으며, 번갯불은 가연성 물질들을 모두 태웠고, 우박이 내려 밭에 있는 모든 채소를 치고, 과일 나무를 꺾었으며, 메뚜기가 지면을 덮어 남아있던 지상의 모든 식물을 먹어치웠다. 이집트의 경제가 그토록 피폐했었다면, 어디엔가 그와 같은 국가적 대재난에 관한 기록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그런 기록이 있다.

네덜란드의 라이덴(Leiden) 박물관에는 한참 나중에 기록했을 파피루스 기록이 보관되어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파피루스 기록은 어떤 초기 왕조 때의 파피루스 기록을 복사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대재앙이 휩쓸고 간 이후에 풍미했을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그 기록은 제 13대 왕조 때의 것일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 기록은 이렇다. 즉, '아니, 그 보다는 심정이 광포하다. 재앙이 땅을 휩쓸었고 방방곡곡은 유혈이 낭자하다…. 아니, 그 뿐이랴. 강은 핏물이 범람한다. 사람이 그걸 마실까? 인간으로서는 못 마시리라.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다 …. 아니, 그 뿐이랴. 지체 높은 집 아들도 알아보는 이가 없다 …. 외지에서 낯선 사람들이 애굽으로 들어왔으니…. 아니, 그 뿐이랴. 알곡은 곳곳에서 말라죽는다. 사람들은 옷조차 걸치지 못한 알몸이고 향수나 기름은 어림도 없다. 사람들은 입을 떼면, '더는 못 참겠네.” 다들 한숨이다. 곡간마다 텅텅 비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곤궁한 백성들은 마침내 왕을 끌어내렸다.' 20



이집트의 연대기에 대한 수정 제안
(A Proposed Revision of Egyptian Chronology)


‘그 당시에’ 모세의 흔적이나, 이집트에 내려진 10대 재앙, 또는 출애굽의 증거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수많은 학자들은 이집트 역사의 연대기 계산에 심각한 오류가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수 세기를 삭감하여 계산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와 같은 수정된 연대기 계산은 제 12대 왕조를 모세의 시기로 끌어내려서 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왕조 기간에는 성경 기록을 지지하는 상황 증거들이 풍부하다.

제 12대 왕조의 말기에 재위하였던 왕들 중에 세소스트리스(Sesostris) 3세가 포함된다. 그의 석상에 묘사된 인상으로 보아, 그는 능히 백성들에게 냉엄한 노예제도를 시행하고도 남았을 잔악한 독재자로 생각된다. 그의 아들 아메넴헷(Amenemhet) 3세도 못지않게 잔악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그의 통치는 46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모세는 그의 통치 초기 어느 때에 탄생했을 것이다.

아메넴헷 3세한테는 아메넴헷 4세로 불려졌던 아들이 하나 있었던 것 같다. 이 왕자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서 부왕을 추종하였든지, 아니면 부왕과 공동섭정을 하였던 것 같다.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아메넴헷 4세는 모세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메넴헷 4세는 아메넴헷 3세의 서거 이전에 신비롭게도 종적이 묘연해졌다.

아메넴헷 3세한테는 소벡네페루(Sobekneferu) 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이 공주는 아이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6 만약에 그녀가 목욕하려 강가로 내려갔다던 바로(Pharaoh)의 딸이었다면, 강가로 갔던 이유는 쉽게 이해된다. 그것은 공주의 방에 목욕시설이 없어서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정(洗淨) 의식을 거행하고, 다산(多産)의 하신(河神) 하피(Hapi) 에게 기도를 드리려고 그 곳에 내려왔을 것이다. 아기를 못 가졌던 그녀로서는 그와 같은 신이 필요했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아기 모세를 그 곳에서 발견하였을 때에 그녀는 이 아기가 그녀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쉽게 믿었을 것이다 (출애굽기 2:5―6).

그러나 나이 들어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스라엘 사람으로 인식한 모세는 이집트를 도망쳐야만 했다. 이 일로해서 왕위에 공백이 생겨 아메넴헷 3세가 서거하였을 때에는 대를 이을 왕자가 없었다. 공주 소벡네페루가 바로로 즉위하여 8년 동안 통치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과 더불어 왕조도 끝나고, 뒤이어 제 13대 왕조가 대두하였다.

이스라엘 노예들 (The Israelite Slaves)


▲플린더 페트리(Flinders F. Petrie) 경이 발굴한 페이윰에 있는 도시 카훈(Kahum) ,

플린더 페트리(Flinders F. Petrie) 경은 페이윰에 있는 도시 카훈(Kahum)을 발굴하였다. 그리고 로잘리 데이비드(Rosalie David) 박사는 그의 발굴 내용을 책으로 펴냈다. 그 책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즉, '이 도시에는 상당수의 아시아인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집트의 다른 곳에서도 이 사실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시리아나 또는 팔레스타인 지방에 있었을 그들의 고국은 정확하게 확인할 길이 없다… . 그들이 이집트에 와서 살게 된 정확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15

로잘리 데이비드나 플린더 페트리도 이 셈족 노예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는 걸 확일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성경의 사건을 제 12대 왕조보다 수 세기 이후로 산정하는 전통적인 연대기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트리는 또 다른 한 가지 흥미진진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아마도 원래는 옷가지나 다른 소유물들을 보관하는 데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대형 나무 상자들이 카훈(Kahun)에 있던 많은 가옥들의 방바닥 밑에서 발견되었다. 이 상자들은 아기들의 유골들이 담겨 있었는데, 때로는 한 상자 안에 2명 또는 3명의 유해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죽을 당시 아기들의 나이는 몇 개월을 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16

이에 대한 설명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로는 히브리인 조산원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를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출애굽기 1:16). 조산원들은 이 명령을 무시하였던 결과, '그러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여든 살리라 하였더라” (출애굽기 1:22). 수많은 산모들은 품속에서 빼앗긴 아기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비탄의 눈물을 삼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죽은 아기들을 상자에 넣어 살던 집 방바닥 밑에 묻었던 것 같다.17

페트리가 발견한 것 중에 또 하나 놀라운 것은, 노예들이 돌연히 현장에서 그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실이다. 로잘리 데이비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즉, '제왕의 피라미드 건설의 완공이 카훈 주민들이 연장과 가재도구를 일터나 집에 내버려둔 채 끝내 그 도시를 떠나야했던 이유가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18

'이 최초의 카훈 거주가 어떻게 막을 내리게 되었는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가옥들 안에 내버려진 일상용품들의 수량, 그리고 그 용도의 범위나 형태들의 다양성은 능히 그들의 이탈이 돌발적이며, 사전에 계획된 바 없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19

그들의 이탈은 사전에 계획되지 않은 돌발적인 것이었다! 이보다 더 성경의 기록과 부합하는 기사는 없을 것이다. '사백 삼십 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출애굽기 12:41).


출처: 아멘넷, 글: 누지문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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