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시절 학생회와 함께

1. 들어가는 말


불교(佛敎)에서는 인생의 삶을 <일체개고(苦)>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일체개고의 원인이 욕망(慾望:번뇌)이라고 생각하고, <욕망(慾望)을 버릴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욕망과 번뇌 망상에서 존재의 일체개고가 근원이 되므로 그것을 버릴 때, 끊을 때, 불교의 구원이며 해탈 세계인 열반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가 부단히 추구해 온 해탈은 자기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밝혀내는 일(자각)입니다.

미혹(迷惑:욕망)의 세계에 있는 윤회에서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 구원의 지향점입니다. 인도에서 윤회사상을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은 초기 우파니샤드문헌이 최초입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 달세계로 들어가 이 세상의 선업(善業)의 과보를 누린 뒤에 비가 되어 지상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음식물로 인간에게 섭취되어 정자가 되었다가 여성의 태내로 들어가 새로운 신체로서 재생(再生)한다는 것입니다. 윤회의 근본은 욕망이므로 욕망이 없어지면 윤회의 세계에서 해탈되어 불교의 구원에 이릅니다.

그러나 기독교 구원은 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할 인간을 죄에서부터 구해준다는 의미입니다. 즉 죄로 인하여 죽은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죄 사함으로 다시 살리신다는 것을 기독교의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는 불교가 말하는 욕망(慾望)에서의 구원과 기독교가 말하는 죄(罪)에서의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2. 불교의 욕망(慾望)이란 무엇인가?

불교의 세계관(世界觀) 또는 인생관(人生觀)의 기본은 <윤회>입니다. 윤회(輪廻)는 생사윤회 또는 생사윤전(生死輪轉)이라고도 하며 태어나고, 병들고, 늙고, 죽는 것의 반복을 말합니다. 불교는 생사윤회로부터 해탈(解脫)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는 윤회로부터 해탈하기 위해서는 모든 욕망이나 집착(執着)을 끊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을 세상과 연결시키고 또는 세상에 태어나도록 원인을 제공하는 욕망과 집착을 끊는다면 더 이상 생사윤회 세계에 태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1) 불교의 욕망(慾望)의 종류
불교는 생사윤회의 근본을 욕망으로 봅니다. “욕망이 있기 때문에 존재가 있고”, “존재가 있기 때문에 욕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불교의 존재의 근본인 욕망의 종류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업보(業報)입니다.

업(業)이란 산스크리트어로는 카르마(karman)인데 그 뜻은 조작, 행위, 소작, 의지에 의한 심신의 활동과 일상생활을 의미합니다. 고대 인도에서는 현세에 좋은 행위를 하면 내세에 좋은 과보(果報)가 있고, 나쁜 짓을 하면 나쁜 과보가 있다고 믿어졌었습니다. 그리고 현세에서의 행복이나 불행은 전생(前生)의 선업이나 악업의 결과라고 여겼습니다. 이런 선악의 행위는 어떤 잠재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겼고 이런 업의 힘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서 존속하여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업(嶪)에 기인하는 윤회사상이 생겨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업(業)은 윤회하는 세력의 힘이 되고, 이 업(業)은 신체가 짓는 신업(身業), 입에서 출발하는 구업(口業),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업(意業)의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사바의 모든 중생들이 자기가 몸으로, 마음으로, 언어로 지은 업력에 의해서 과거, 현재, 미래의 삼계(三界)에 걸쳐 무한히 계속되는 생사(生死)윤회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때는 축생, 인간, 천계 등으로 태어난다고도 합니다. 물론 천계(天界)의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좋은 과보도 있지만, 그렇다고 천계가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윤회의 관념(觀念)은 불교 특유의 것은 아니며,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 이미 인도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 또는 인생관(人生觀)이었습니다.

불교(佛敎)에서는 윤회의 주체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실체가 아니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적 존재로 봅니다. 전생의 업(業)에 의하여 현재의 과보를 규정하고, 현세의 업(業)에 따라 미래의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 윤회사상입니다. 그렇다면 윤회의 주체가 무엇일까 궁금해집니다. 그것이 영혼이라고 하면 이해가 갈 것이나, 그들은 원래 기독교적인 영혼을 인정치 않습니다.

어느 날 아난이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유(有:존재)라는 것은 어떤 범위로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스승 석가모니는 “아난이여! 만일 미래의 과보를 받을 업(業)이 없다면 미래라는 존재가 나타날까요?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난이여! 그러므로 업(業)은 인(因)이고, 식(識)은 종자이며, 갈애(渴愛)는 물이며, 무명(無明)에 덮이고 갈애에 결박되어 중생들의 미래의 재생과 전생이 있는 것입니다.”라고 가르쳤습니다. 불교는 이 업(業)을 도와 고통[존재]의 과보를 낳게 하는 것으로 다름 아닌 미혹(迷惑)이라고 합니다. 또 이것을 다른 말로 번뇌(煩惱)라고도 말합니다.

(2) 번뇌(煩惱)입니다.

번뇌(煩惱)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크레샤(k1esa), 곧 <마음을 더럽히는 것>, <상처주는 것>, <괴롭히는 것>등 미혹하게 하는 정신작용의 총칭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범죄행위를 하게 된다면 그 원동력이란 선악을 가리지 못하는 마음의 미혹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번뇌에 의해 업(業)을 짓게 되며, 업의 힘으로 말미암아 과보를 받는데, 이러한 과정을 쉬지 않고 되풀이하게 하여 미혹의 세계에서 헤매게 하는 근본번뇌(根本煩惱)를 탐, 진, 치로 설명 할 수 있습니다.

① 탐(貪)-<탐욕(貪慾)>이라고도 번역됩니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집착, 탐심, 욕망입니다. 혹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활동 내지 그 바탕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② 진(嗔)-<진애>라고도 번역되고, <탐>과는 반대로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혐오, 기피이며, 분노이기도 합니다. 혹은 “싫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활동 내지 그 바탕이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③ 치(癡)-십이연기의 처음에 놓입니다. <무명>과 동의어이며, 제행무상 등의 진실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데 <근본적 무지>라고도 할 만한 것입니다. 앞의 탐과 진도 사실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상의 세 가지 번뇌는 가장 기본적인 번뇌라고 합니다. 불교는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성취하여 삼계와 육도의 윤회 궤도에서 탈출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3) 무명(無明)입니다.

무명(無明)이란 범어로 avida로서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불여실지견을 말합니다. 즉 진리에 눈뜨지 못하고 사물에 통달하지 못해서 사물과 현상의 도리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없는 정신 상태를 말합니다. 불교에서 인간의 마음을 상술한 욕망(갈애)은 형편에 따라 세 가지 기능을 발휘하는 것으로서 언제나 올바른 동작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12연기설을 보면 인간의 존재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명성에 의하여 일어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역으로 무명이 멸하여지면 곧 노사(老死)의 세계가 없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원시불교에서는 이 무명을 과거의 지은 업력이 무지 즉, 맹목적인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진여자성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근본불각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의하면 “하나인 진리를 잘 알지 못함으로 마음이 상응하지 못하며 홀연히 생각이 일어남으로 무명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무명은 하나의 충동력 또는 생사의 발동력 즉 맹목적 욕망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지혜의 결핍으로 온다고 하여 불교에서는 무명(無明)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무명은 불(佛)을 덮는 번뇌(煩惱)를 일으켜, 인간의 존재인 12연기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3. 불교의 욕망(慾望)으로부터 구원자는 누구인가?

기독교가 죄에서 구원받는 종교라면 불교는 욕망으로부터 구원받는 종교입니다, 즉 생사윤회로부터 해탈되는 무생(無生)무사(無死)인 생사환멸연기에 이루는 것입니다. 불교는 욕망으로부터 해탈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욕망에서 해탈하려면 그것의 원인을 제거하면 된다는 이론이 성립됩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서 욕망에서 해탈할 수 있는가를 고찰하고자 합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은 무한한 행복을 욕망하면서 다른 한편 사욕의 만족을 욕구한다고 봅니다. 완전한 생의 만족을 이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감관(感官)의 욕망이 크면 클수록 내적 모순도 커진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내적 모순을 완화하기 위해서 감관의 욕망이 완전히 제거 되었다고 하여도 이성의 욕구가 만족하지 못 한한 완전히 해탈(解脫)되었다고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망에서 해탈 하고자면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을 동시에 가지고 욕망을 형성하는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욕망으로부터 구원의 세계인 해탈하기 위해서는 십계명과 팔정도를 실천을 강조합니다. 십계명은 욕망을 제거를 위한 소극적인 면으로써 감관(感官)의 욕망(욕구)를 제거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계명이고, 욕망의 제거에 적극적인 면을 보이는 욕망의 소멸과 동시에 이성의 충족을 목적으로 이여 요구 되는 것이 팔정도입니다. 석가 출가 원인이 바로 “인생의 생존가운데서 겪는 생,노,병,사의 존재을 절실히 느껴 이것을 벗어나고자 함에 있었던” 것입니다. 석가는 인생의 존재의 그 원인을 자아(自我)를 위한 욕망이라는 것을 발견하였고, 그것을 제거 방법으로 팔정도를 제시하였습니다.

1) 욕망에서 구원자는 자신 본인이 구원자가 됩니다.

석가모니는 인간(人間)의 본질을 생명에다 두면서 이것이 생각하고 분별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마음(心)과 사랑(意) 식별(識別)이라 불렀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맹목적 갈애>를 본질로 욕망으로 가득 차있고. 이 무명 때문에 탐욕으로부터 백팔번뇌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108번뇌의 근원은 무명 즉 무지인데, 이 무명의 한 생각이 홀연 일어나 신구의(身口意)의 삼업(三業)을 움직이고 다음으로 이 업(業)으로 말미암아 일체고(一體苦)를 받게 되나니 이렇듯 인생은 삼업(三業)의 무한한 순환으로 마치 다람쥐가 채 바퀴 돌리듯 삼계육도를 윤회전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이상(理想)세계는 윤회전생의 근원인 번뇌[미혹], 업[욕망]을 끊고, 고통의 존재가 멸하는 곳, 깨달음의 세계, 즉 열반을 이루는 것입니다. 열반(涅槃)이란 일반적으로 불교가 신앙하고 소망하는 최고의 경지, 구원받은 상태를 말합니다. 불교는 욕망(慾望)으로부터 구원받아 ‘해탈’, ‘열반’에 이르는 방법론에서는 어떤 실체적인 하나님이나 신들에 의해 구원(救援)을 받는 것이 아니고, 심리학적 자기수양이라는 엄격한 통제에 의해서 얻어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엄격한 의미에서 인간은 그 자신(自身)의 구원(救援)자입니다. 인간은 그 자신의 힘과 자신으로부터 욕망을 제거하는 것을 향한 지속적인 노력에 의해서 자신을 구원한다는 것이 불교의 구원론입니다.

결론적으로 불교의 구원의 완성은 욕망의 근원인 생명의 소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은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완성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佛敎)가 욕망(慾望)의 소멸을 구하는 반면에, 기독교(基督敎)는 더 높은 차원에 있는 욕망(慾望)의 만족을 계획합니다. “다스리라”, “정복하라”,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거룩한 욕망(慾望)을 완성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온 것은 그들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4. 기독교의 죄(罪)란 무엇인가?

불교(佛敎)에서 인간을 <일체고>라고 규정하고 고통의 세계에서의 탈출인 해탈사상, 열반사상을 가르친다면 기독교(基督敎)는 인간을 죄(罪)인으로 규정합니다. 성경은 인간을 죄(罪)인으로 규정하기보다는 죄인(罪人)으로서 선언합니다. 이런 선언의 목적은 어떻게 하면 인간이 그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죄(罪)로부터 자유와 해방, 여기에 죄를 묻는 근본적인 목적과 의의가 있습니다. 죄를 묻는 본뜻은 죄 그 자체를 밝히는 데만 있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인간을 구원시키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이 죄인(罪人)이라는 규정은 인간의 구원(救援)의 전제조건입니다. 기독교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죄에서 구원을 지향합니다. 기독교가 구원(救援)의 종교(宗敎)라면, 인간의 죄(罪)를 묻는 것은 극히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인간의 구원을 묻기 전에, 먼저 죄(罪)의 문제를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罪)라고 하면, 여러 가지를 생각합니다. 법률적인 쪽, 윤리․도덕적인 쪽, 사회․경제적인 쪽, 그리고 종교적인 쪽이 그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지금부터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罪)의 개념을 검토해 보기로 합니다.

(1) 기독교의 죄(罪)의 정의

기독교(基督敎)에서는 죄(罪)의 본뜻을 <불신앙>이라 합니다. 죄의 물음을 반도덕적인 행위에 국한시키지 않는 것이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불신앙이란 <신에 대한> 불신앙입니다. 신에 대한 불신앙이란 단순히 교회에서 말하는, 신에 관한 교리 따위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신에게서 전인적으로 떠나 있는 상태나, 신의 뜻을 어긴 행위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불신앙이란 신에 대한 지식, 이를테면 신은 하늘․땅을 지은 창조주라든가 신은 전지전능한 절대자라든가 하는 것과 같은 신지식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신에게 사로잡히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罪)란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 곧 성경에서 죄(罪)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죄(罪)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되는 것입니다. 성경소요리문답 14에 “죄(罪)가 무엇이뇨?”란 대답에 “하나님의 법(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혹 어기는 것이다.”라고 정의(正意)하고 있습니다.

롬4:15은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고 했으며, 또 요일3:4에서는 “죄(罪)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죄 없는 상태로 창조(創造)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축복된 상태를 계속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아담에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고 말씀 하셨습니다. 바울은 롬5:17절에서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은즉”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아담 한 사람이 지은 죄(罪)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사망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基督敎)의 구원(久遠)이란 “죄(罪)로 인하여 죽은 영혼(靈魂)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다시 살리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1:21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말하되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했습니다.

(2) 기독교의 죄(罪)의 종류

성경에서는 세상의 많은 죄(罪)를 크게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와 “사망에 이르는 죄(罪)”의 두 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요일5:16]. 여기서 사망에 이르는 죄(罪)라고 말한 근본적인 죄는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죄(罪)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9]라고 말씀하신 대로 마음 중심의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의 죄(罪)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는 인간관계에서의 윤리적인 죄를 말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윤리적으로 바르게 살려고 회개하고 죄의 가지를 잘라도 근본적인 죄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정상적으로 회복되면 죄의 뿌리가 뽑아져 가지의 죄들은 저절로 말라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는 원죄(原罪)와 자범죄(自犯罪)가 있습니다.

①원죄(原罪)란 무엇인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김으로써 죄악에 떨어진 사실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의 모든 인류는 필연적으로 조상이 저지른 죄의 값을 짊어지고 살아야하는 운명에 처했으며, 이것을 원죄(原罪)라고 합니다, 원죄를 지니고 태어난 인간은 그 원죄로 말미암아 아무리 죄를 짓지 않고 올바로 살아보려 해도 죄의 인자가 있기에 사는 것 자체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고 했습니다.

요일 1:8에 보면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왜 성도가 죄인(罪人)인가 하면 성도는 죄인(罪人)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김씨의 자손이 김씨이듯 죄인(罪人)의 후손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罪人)입니다. 성경은 죄(罪)의 근원을 우리 조상 아담이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 명하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죄(罪)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죄악 가운데 출생하는 원죄를 지닌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인간은 죄악에 오염된 죄인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시51:5에서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나를 죄 중에 잉태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는 다윗이 잉태되는 과정에서부터 원죄로 인하여 오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갓난아이라도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죄가 없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이며 그 이유는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요한1서 1:8)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②자범죄(自犯罪)란 무엇인가?
죄(罪)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도덕에 반대되는 악한 행위” 또는 “형벌 받을 불법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사람은 양심의 법을 어기고 규율을 파괴하는 등 법을 범하면 죄의식을 느끼곤 합니다. 자범죄[실제적 죄]란 몸을 통하여 행해진 외적 행위들 뿐 아니라, 원죄에서 유래하는 모든 의식적인 사유와 의지를 가리킵니다. 결국 원죄(原罪)는 하나지만 자범죄는 다양합니다. 자범죄(自犯罪)는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의식적인 의심이나 악한 계획 또는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특별한 의식적인 욕망과 탐욕 같은 내적인 자질을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속임, 도둑질, 간음, 살인 등과 같이 외적인 행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러한 행위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짓는 범죄를 자범죄라고 합니다.

③죄(罪)의 결과 죽음
기독교의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잘못된 수직적 관계의 결과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을 말합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고통, 질병, 죽음이 모두 인간이 타락한 상태인 죄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엡2:1절에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고, 롬 3:23에는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죄의 결과로 죽게 된 죄인(罪人)을 구원(救援)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5. 기독교의 죄(罪)로부터 구원자는 누구인가?

성도가 신앙고백에서 죄(罪)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告白)하는데 그러면 누가 죄(罪)를 사하여 주시는가? 죄(罪)는 성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하여 주십니다. 불교(佛敎)의 석가모니는 윤회(輪廻)로부터 해탈(열반)하기 위해서는 모든 욕망(慾望)이나 집착(執着)을 불자 스스로 끊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자신을 세상과 연결시키고 또 세상에 태어나도록 원인을 제공하는 욕망과 집착을 끊는다면 더 이상 윤회의 세계에 태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 불교의 교리입니다.

그러나 기독교(基督敎)는 죄(罪)로 인해 죽었던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막2:5에 침상에 누운 채로 들려온 중풍병자에게 예수님께서 “소자야 네 죄(罪)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서기관들이 참담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罪)를 사하여 주겠는가?”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속으로 하는 말을 아시고. 막2:10절에 “인자가 땅에서 죄(罪)를 사하여 주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셨습니다. 곧 죄(罪)는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님만이 사하여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罪)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성경은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전15:3 ),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으니”(갈1:4 ),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4) 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우리의 죄 사함의 근거인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실 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 구원론입니다. 롬10:9~10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는 그 신앙고백이 바로 죄 문제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갈2:16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라고 하면서, 예수 외에는 죄(罪) 사함을 받을 길이 없음을 말합니다. 예수 외에는 그 어디를 가서 죄(罪)를 뉘우치고 공덕을 쌓고 선을 행한다고 해도 구원(救援)의 길은 없습니다.

여기에는 불교와 같은 인간의 노력이 0.1%도 첨가될 수 없습니다. 전적인 주님의 대속의 은혜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피의 공로의 능력이 효력이 나에게 미치고 적용 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내 죄(罪)를 사하여 주시는 분인 줄 알게 되면 그 앞에 나가 그에게 죄(罪)를 자복하고 회개해야합니다. 요일1:9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며 회개를 강조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러한 죄를 범 하지 않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세인들이 교회에서 밤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하며 우는 소리를 듣고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밤마다 저렇게 우나?’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지 못하기에 울지 않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罪人)인지를 알기에 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6. 나오는 말

기독교(基督敎)는 죄(罪)를 가지고는 천국(天國)에 들어갈 수가 없고, 불교(佛敎)는 욕망(慾望)을 가지고는 해탈(解脫)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세상에 죄를 짓지 않는 인생은 하나도 없으며, 죄가 없는 인생은 역시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피로 죄(罪)사함을 받아야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죄(罪)사함을 받아야 성령을 내주하심을 받을 수 있고, 성령이 내주해야 믿음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은 욕망(慾望)의 불이 활활 타고 있다고 합니다. 이 욕망(慾望)의 불이 꺼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생사(生死)윤회(輪廻)가 계속 되고, 윤회가 계속 되는 한, 일체(一體)고통에서 해방을 가져 올 수 없고, 오직 자기 스스로 욕망[번뇌]을 제거함으로써 존재(存在)의 고통(苦痛)의 세계에서 해탈(解脫)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현실에서의 고통을 현실에서 해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땅 위에 사는 존재이기에 고통을 속에 담으면서 욕망에 눈이 먼 인간이지만, 그 고통을 소멸하고 욕심의 초극을 현실 세계에서 실현한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이상의 경지인 니르바나 열반(涅槃)세계는 기독교와 같이 실상 있는 세계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획득하려는 것입니다. 욕망을 제거하기 위해서 신비한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전능자(全能者)나 절대자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현실의 고통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는 마지막 유훈(遺訓) 가운데 “모든 것은 변한다, 너희 마음을 스승삼아 부처가 되라”는 말씀에는 불교의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즉 석가모니는 불교에서 고통의 문제가 되는 욕망(번뇌)에서 해탈은 각자의 인간의 능력에 있지 다른 유영(有靈) 무영(無靈)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4~7)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15:9~1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죄(罪)사함을 불교와 같이 인간의 노력으로 사함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죄사함 받아 구원받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욕망의 세계에 해탈하기 위해서는 “너 스스로가 노력해야만 한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두 종교의 구원받는 방법의 다른 점입니다.

서재생 목사 / 서울대현교회,/ 승려에서 목사로 개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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