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도, 엘리트 의식?
이단경계 2010. 8. 15. 11:25돕는은혜님이 계시판(영성보다 경건..) 댓글에 링크한 이정석 교수(풀러신학교 조직신학)가 쓴 <영성이란 무엇인가>를 여기 올립니다.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MO8M&articleno=7003437#ajax_history_home
<영성이란 무엇인가>란 제목으로 같은 저자가 쓴 글이 두개 더 있습니다. 신사도운동-뉴에이지를 포함하여 소위 "영성"이란 말로 대변되는 현대 기독교의 유행병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데 참으로 귀한 글입니다.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2) http://kr.blog.yahoo.com/jabiryang/5190
(3) http://kr.blog.yahoo.com/kjyoo3239/7089
아래 "인터내셔널갈보리교회 이성자 목사"라는 분이 쓴 칼럼을 보면
http://dc.christianitydaily.com/view.htm?code=oc&id=185720
이 양반도 IHOP에 단단히 홀려 마이크 비클 교주의 교시를 직통으로 받고있습니다. 신사도-뉴에이지등이 이미 기존교회에 깊이 뿌리밖고 있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목만 보아도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이라는 이장림(다미선교회)를 연상케하는 이들의 나른함을 경계하고 깨어서 경성함이 어느 때보다 요청되는군요!
이정석 교수에 의하면,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종교개혁의 대상이 되어 수세에 몰린 "카톨릭적인" 유사 종교집단이 개혁신앙에 대한 거친 반격이라고 합니다.
여기 조금 발췌합니다.
<신비적 영성>
그릇된 영성의 두 번째 유형은 신비적 영성이다. 이것은 초자연적이고 초능력적인 신통력을 흠모하고 추구하는 영성이다.
여기서는 자기의 영적 성숙이나 수평적 차원은 무시된 채 신적 존재와의 수직적 교통을 통하여 신비한 능력을 수행하고 엑스타시적 종교체험을 추구한다.
카톨릭의 신비적 영성이 하나님과의 약혼과 결혼으로 나아가는 영성의 7단계를 제시한 아빌라의 테레사와 같이 신비적 체험을 추구하였다면, 오순절운동으로 야기된 개신교의 신비적 영성은 초자연적 능력을 추구한다.
한국교회 영성의 독특한 현상들을 열거하면서 “결국 현상적으로 보자면 한국 기독교의 영성은 불교, 유교, 도교와 마찬가지의 길을 걷고 있는 듯하다”는 김정훈의 진단이나, 샤마니즘을 비롯한 전통종교의 영성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포장한 한국교회의 영성운동이 결국 이교화를 결과한다는 김성태의 지적은 주로 신비적 영성을 우려한 것이다.
마술적 신유를 위해 이교의 방법을 도입하여 성령수술이라는 이름으로 신비적 치유를 현혹하는 할렐루야 기도원이나 비성경적 예언들까지도 용납하여 결국 시한부 종말론의 수치를 초래한 신비주의적 신앙행태는 참된 복음보다 신비현상 자체를 추구하는 다른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실로, 윌리암 제임스는 무신론적 사고를 가지고도 동시에 신비현상을 긍정하였으며, 세계의 수많은 종교들의 신비현상들을 수집하여 심리학과 신경의학으로 설명하였고, 신과학이라고 주장하는 심령과학도 단순한 테크닉으로서 신비적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신비적 영성은 세계의 모든 신과 모든 영과 모든 신비 현상을 이용하여 신비체험과 초능력을 소유하려는 뉴 에이지 영성과 본질상 크게 다르지 않다.
<낭만적 영성>
그릇된 영성의 세 번째 유형은 낭만적 영성이다. 이것은 영성을 경건한 감정의 고양으로 이해하는 감상적 영성이다.
영성가들의 영적 편력을 탐독하며 문학적 영성을 형성하고 영적 무드를 즐기며, 큐티를 통하여 경건한 감정을 향유하지만, 만일 그것이 거룩한 감정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거기서 그치고 실천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가롭고 낭만적인 감상일 뿐 고난이나 십자가의 길은 외면하는 현대의 지성적이며 사치스러운 영성이 아닐 수 없다.
경건주의와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은 슐라이에르막허는 기독교의 본질을 종교적 감정이라고 규정하고 감성적 종교를 추구하다가 자유주의신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로버트 로버츠는 [영성과 인간의 감정]에서 “기독교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감정들의 세트(a set of emotions)”라고 정의하며 영성을 감정 중심으로 이해하였지만, 기독교 신앙은 단순한 감정 이상의 것이다.
물론, 그가 말한 대로, 기독교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중심적 명령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의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을 흠모하는 하나의 종교적 감상으로 끝날 것이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당에 가서 느끼는 거룩한 감정이나 위대한 종교시를 읽으며 일어나는 숭고한 열정이 참된 영성의 본질이 아니며, 기독교의 영성은 느낌 이상의 실재적 삶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실로, 참된 경건생활이란 문학적인 경건서적을 즐기고 분위기 좋은 찬송을 부르며 고요한 명상과 시적인 기도에 도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다.”(약 1:27)
출처: 아멘넷, 정리: Thomas 님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MO8M&articleno=7003437#ajax_history_home
<영성이란 무엇인가>란 제목으로 같은 저자가 쓴 글이 두개 더 있습니다. 신사도운동-뉴에이지를 포함하여 소위 "영성"이란 말로 대변되는 현대 기독교의 유행병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데 참으로 귀한 글입니다.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2) http://kr.blog.yahoo.com/jabiryang/5190
(3) http://kr.blog.yahoo.com/kjyoo3239/7089
아래 "인터내셔널갈보리교회 이성자 목사"라는 분이 쓴 칼럼을 보면
http://dc.christianitydaily.com/view.htm?code=oc&id=185720
이 양반도 IHOP에 단단히 홀려 마이크 비클 교주의 교시를 직통으로 받고있습니다. 신사도-뉴에이지등이 이미 기존교회에 깊이 뿌리밖고 있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목만 보아도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이라는 이장림(다미선교회)를 연상케하는 이들의 나른함을 경계하고 깨어서 경성함이 어느 때보다 요청되는군요!
이정석 교수에 의하면,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종교개혁의 대상이 되어 수세에 몰린 "카톨릭적인" 유사 종교집단이 개혁신앙에 대한 거친 반격이라고 합니다.
여기 조금 발췌합니다.
<신비적 영성>
그릇된 영성의 두 번째 유형은 신비적 영성이다. 이것은 초자연적이고 초능력적인 신통력을 흠모하고 추구하는 영성이다.
여기서는 자기의 영적 성숙이나 수평적 차원은 무시된 채 신적 존재와의 수직적 교통을 통하여 신비한 능력을 수행하고 엑스타시적 종교체험을 추구한다.
카톨릭의 신비적 영성이 하나님과의 약혼과 결혼으로 나아가는 영성의 7단계를 제시한 아빌라의 테레사와 같이 신비적 체험을 추구하였다면, 오순절운동으로 야기된 개신교의 신비적 영성은 초자연적 능력을 추구한다.
한국교회 영성의 독특한 현상들을 열거하면서 “결국 현상적으로 보자면 한국 기독교의 영성은 불교, 유교, 도교와 마찬가지의 길을 걷고 있는 듯하다”는 김정훈의 진단이나, 샤마니즘을 비롯한 전통종교의 영성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포장한 한국교회의 영성운동이 결국 이교화를 결과한다는 김성태의 지적은 주로 신비적 영성을 우려한 것이다.
마술적 신유를 위해 이교의 방법을 도입하여 성령수술이라는 이름으로 신비적 치유를 현혹하는 할렐루야 기도원이나 비성경적 예언들까지도 용납하여 결국 시한부 종말론의 수치를 초래한 신비주의적 신앙행태는 참된 복음보다 신비현상 자체를 추구하는 다른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실로, 윌리암 제임스는 무신론적 사고를 가지고도 동시에 신비현상을 긍정하였으며, 세계의 수많은 종교들의 신비현상들을 수집하여 심리학과 신경의학으로 설명하였고, 신과학이라고 주장하는 심령과학도 단순한 테크닉으로서 신비적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신비적 영성은 세계의 모든 신과 모든 영과 모든 신비 현상을 이용하여 신비체험과 초능력을 소유하려는 뉴 에이지 영성과 본질상 크게 다르지 않다.
<낭만적 영성>
그릇된 영성의 세 번째 유형은 낭만적 영성이다. 이것은 영성을 경건한 감정의 고양으로 이해하는 감상적 영성이다.
영성가들의 영적 편력을 탐독하며 문학적 영성을 형성하고 영적 무드를 즐기며, 큐티를 통하여 경건한 감정을 향유하지만, 만일 그것이 거룩한 감정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거기서 그치고 실천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가롭고 낭만적인 감상일 뿐 고난이나 십자가의 길은 외면하는 현대의 지성적이며 사치스러운 영성이 아닐 수 없다.
경건주의와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은 슐라이에르막허는 기독교의 본질을 종교적 감정이라고 규정하고 감성적 종교를 추구하다가 자유주의신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로버트 로버츠는 [영성과 인간의 감정]에서 “기독교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감정들의 세트(a set of emotions)”라고 정의하며 영성을 감정 중심으로 이해하였지만, 기독교 신앙은 단순한 감정 이상의 것이다.
물론, 그가 말한 대로, 기독교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중심적 명령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의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을 흠모하는 하나의 종교적 감상으로 끝날 것이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당에 가서 느끼는 거룩한 감정이나 위대한 종교시를 읽으며 일어나는 숭고한 열정이 참된 영성의 본질이 아니며, 기독교의 영성은 느낌 이상의 실재적 삶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실로, 참된 경건생활이란 문학적인 경건서적을 즐기고 분위기 좋은 찬송을 부르며 고요한 명상과 시적인 기도에 도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다.”(약 1:27)
출처: 아멘넷, 정리: Thomas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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