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 당신을... /최송연

 

사랑해요, 당신을...

내 영혼 속에 생명을 심으신

주님이기에 온 맘 다해

당신을 사모합니다

 

사랑해요, 당신을...

내 마음속에

햇살 같은 은총으로

머물러 계신 당신이기에

가슴 짓누르던 슬픔이 변하여

희락의 찬송이 영혼을 적셔흐릅니다

 

나의 인생길에

고난이 狂風 같이 밀려들고

많은 환난이 빗물처럼 쏟아지나

늘 깨어 지키시는 당신이기에

두려움 대신 소망의 빛 반짝입니다

 

 

(시 121: 1-6잘 참조)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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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 에드윈 H. 파머

 


성령의 역사를 철저히 알고 있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그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될 때 아주 놀랄 것이다. 성령을 중생과 성화와 관련하여서만 생각하곤 했던 사람에게는 그가 창조의 완성자요 일반 은혜의 매개자(媒介者)요 특별계시의 주(主)요 그리스도 교회의 효과적인 건설자임을 깨닫고 나면 다소 놀라울 것이다. 이 장(章)에서 우리는 또한 성령의 또 다른 큰 역사, 곧 우리 하나님이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에 있어서의 그의 활동을 살피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제 이 위(第二位)요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나셨다. 그는 완전히 하나님이시다. 영원하시고, 알 수 없고, 전능하시며, 전지하시고, 편재(遍在)하시다. 때가 차매 그는 자진하여 땅에 와서 인성을 취하사 동시에 하나님이며 사람이라 칭함을 받게 되셨다. 그는 완전한 사람일 뿐 아니라 또한 완전한 하나님이신 점에서 일찍이 땅에 산 어느 누구와도 다르다.

이 커다란 진리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때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의 필요를 의문하였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자신이라면 그는 성령이 필요치 아니하리라고 어떤 이들은 거론하였다. 그는 당신이 하나님이신 사실 때문에 필요한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미미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에만 치우쳐 강조하였거나, 그의 인성을 과소평가함으로 일어나는 오류다. 예수의 신성에 관한 성령의 영향은 적다. 삼위일체의 제 이 위는 제 삼 위와 동등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한, 그는 성령의 끊임없는 임재가 필요하다.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시므로 그의 인성이 그의 신성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은 그의 인성이 변하여 신성과 융합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이에 대한 아름답고 짧은 규정을 보려면 451년에 주의 깊게 선택된 언어로 쓰여진 칼케돈 신조를 읽으라). 두 성질의 연합은 그의 신성이 인성에다 전능이나 전지 등의 신성을 부여하여 예수께서 참으로 사람되기를 그치고 오직 하나님만 되게 하신 것이 아니다. 또는 그리스도의 신성에서 인성에로의 전이(轉移)가 일어나 예수께서 한 신성과 한 인성인 대신 두 신성으로 끝나게 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이르기를, 예수는 여전히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완전히 사람이시어서 그는 아기에서 - 소년 - 성년으로 자랐고, 우리와 같이 모든 일에 시험을 받았으며(히 4:15), 자기의 재림의 날과 때를 알지 못하였고(막 13:32), 하나님께로부터 십자가 위에서 버림받음을 인하여 부르짖으셨다(마 27:46). 그의 두 구별된 성품은 상존(尙存)했다. 그는 동시에 완전히 하나님이었으며 영원하였으나 인간적인 유한성도 함께 가지셨다.

예수께서 완전히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전 생애에 성령의 역사를 위한 공간이 있었다. 성경이 이 사실을 충분히 나타낸다.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읽을 때 성령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 수육(受肉)에서부터 그의 최후 영화(榮化)까지 줄곧 역사하셨음을 발견할 것이다. 이제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지 살펴보자.

 


1. 그리스도의 수육(受肉)

 

령은 예수의 인간 생활의 맨 처음 출발인 그의 성육 시에 요구되었다. '수육(受肉)' 또는 '성육(成肉)'이라는 말은 삼위일체의 제 이 위께서 하나님으로 계시면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행위를 뜻한다(요 1:14). 이는 마태의 글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마 1:18)라고 한 것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눅 1:35)라고 한 마리아를 향한 천사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성령으로 된 행위다. 성령이 예수 잉태의 원인이었다. 생명의 씨를 마리아 태(胎)에(신비한 방법으로) 심은 분은 성부도 성자도 더구나 요셉도 아니요 성령이시었다.

 

이는 삼위일체의 다른 위(位)들은 이 성육에 아무런 몫을 하지 아니하였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창조의 문제에서 본 것같이 삼위가 모두 이 세상 만사에서 활동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적 토대에서 성 삼위의 두 위께서 다른 한 위를 통하여 일하신다고 말함은 타당하다. 예수의 잉태도 그렇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행위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향하여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 10:5)라고 하신 말씀이 증거하듯이 성부는 수육의 공역자(共役者)이시었다. 바꾸어 말하면 성부께서 그리스도의 인성(여기서는 몸이라 불리다.)을 예비하셨다. 아들도 자신의 수육의 공역자ㅏ였다(육신이 되사). 그는 우리처럼 수동적으로 나지 않으시고 농동적이었다. 그는 즐겨 자원하여 마리아의 태에 잉태되기를 택하셨다. 바울은 이를 드러내어 말하되 그리스도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빌 2:6, 7)라고 하였다. 요는 그리스도와 아버지는 성령과 같이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에 참여하셨다.

 

비록 수육이 하나님 삼위 모두의 일이지만 그것은 특별히 성령의 역사였다. 아버지도 아들도 아니요 그가 마리아가 잉태하게 된 실제적인 원인이었다. 누가가 말한 대로 그는 예수의 잉태를 일으킨 "지극히 높으신 자의 능력"이었다. 사도신경의 고백처럼 예수는 아버지나 아들로가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그러므로 이 특별한 의미에서 성령이 수육의 원조이며 실제적인 원인이었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므로(마 1:18) 따라서 "성령의 아이"라고 불릴 수 있을 듯도 하다. 그렇다고 성령이 예수의 아버지라는 말은 아니다. 아버지 됨은 존재하게 한 것 이상으로 된다(Fatherhood depends upon more than causing something to be). 그렇지 않으면 소년이 만든 모형 비행기를 소년의 아들이라, 또는 의복을 재봉사의 딸이라 칭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성령과 그리스도의 인성과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고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삼위일체의 제 삼 위가 아니요 제 일 위이시다.

 

이 성령에 의한 잉태는 그리스도의 무죄를 확보하기 위하여 꼭 필요하였고, 이것은 다시 그가 우리 구주가 되기 위하여 꼭 필요하였고, 이것은 다시 그가 우리 구주가 되기 위하여 꼭 필요하였다. 그것이 그리스도로 하여금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의 운명인 원죄와는 무관하게 하였다. 인간은 그 잉태와 탄생을 통하여 거룩하지 못하고, 간사하고 더러우며, 한가지로 죄인이 된다. 그리스도는 그 잉태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었다(히 7:26). 사람은 죄 중에 잉태하여 출생한다(시 51:5). 그러나 그리스도는 거룩한 중에 잉태하여 출생하였다.

 

이를 더 상론(詳論)하자면, 각인은 원죄의 두 요소 곧 에덴 동산에서 그 대표로 행한 아담으로부터 물려 받은 죄책과 모든 악에 기울어진 부패한 성품을 유전받았다. 이 원죄는 스스로 실제 범행(자범죄: 自犯罪)하기 전에 인류 각자가 출생시부터 공통적으로 유전받은 것이다. 그가 타고난 그 부패한 성품은 하나님께서 개입치 않으시면, 처음엔 무구(無垢)한 듯 보이나 결국 그 추한 모습을 모두 드러낸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에 이 이중적인(아담의 죄책과 부패한 성품) 원죄로부터 보전되었다. 마리아가 아니고, 그가 무구히 잉태되었다. 그는 참 사람이요 "모든 일에 우라와 똑같이 시험을 받은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고후 5:21),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벧전 2:22),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벧전 1:19) 같았으며,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히 7:26)라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명시하고 있다.

 

이는, 사람은 출생과 함께 적어도 두 가지로 죄인이 되는 데 반하여 그리스도는 그의 나심으로 인하여 이런 죄에서 무죄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는 다른 모든 인류가 받는 아담의 대표적인 죄책을 받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그의 인성은 흠 없고 도덕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리스도의 이 점 없는 순결성은 요셉의 참여 없이 무구히, 그리고 기적적으로 예수님을 잉태되게 하신 성령의 역사에 의한다.

 

이와 같이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애에 그 맨 시초부터 필요하였다. 그는 두 가지 이유로 필요하였다. 첫째는 그리스도가 탄생되기 위함이요, 둘째는 그의 인성이 아담의 죄의 유죄성과 오염에서 보전되어 그가 우리 구주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2.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심

 

성령께서는 예수를 모든 형태의 죄의 오염으로부터 보호하였을 뿐 아니라 예수의 인성에 거룩함의 시여자(施與者)이기도 하였다. 물론 이것은 예수께서 죄가 없으시다는 선언에 포함되었다. 왜냐면 사람이 죄가 없다면, 그는 완전히 거룩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영혼에는 진공 상태가 있을 수 없다. 악의 결여는 거룩함의 현존을 의미한다.

 

성령이 예수의 인성 안에 역사하신 거룩함의 시여자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본 것같이 성령이 자연적, 신령적 모든 생명의 주라는 사실의 의미도 포함되었다. 그는 지적, 미적, 도덕적 재능의 시여자다. 이는 일반 사람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인성에도 참되다.

 

더구나 요한은 예수께 관하여 말할 때 그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 3:34)고 특별히 기록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부분적으로 주시고 충만히 주시지 않았으나 그리스도에게는 한량없이 완전히 충만히 주신다. 이는 물론 하나님으로서가 아니고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만 관하여 말함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것은 성령께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셨음을 뜻한다. 성령이 그리스도인에게 내주하시는 이상으로 그리스도 안에 오사 거하셨다. 사실 예수꼐서 자기 몸을 유대인들이 헐면 사흘 동안에 일으키겠다고(요 2:19) 하심으로써 자신을 성전에 비하셨을 때 그가 이 내주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으로도 믿어진다.

 

 

3. 그리스도의 성장

 

성령이 인간 예수 안에 한량없이 거하신 것도 사실이나 그리스도의 영적 생명에 성장이 있었음도 사실이다. 이는 성경 중 가장 매력적인 기사의 하나이며, 또한 종종 특히 현대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모든 공격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수호하려는 사람들에 의하여 부인되는 것이기도 하다.

 

누가는 이 성장을 아주 예리하게 드러내어 말하기를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눅 2:40)고 하였다. 누가는 신체적으로 "아기가 자라며" 또 지적으로 "강하여"졌다고 하는 의미를 포함하여 말한 듯하다. 자라며 강하여짐이 동일한 일, 곧 신체적 생명에 관한 말이라면 중복체(重復體)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누가복음 1:80에서 동일한 말("아기가 자라며...강하여지며") 이 "강하여지며"란 구에 "성령이"가 덧붙여져서 세례 요한에게 사용되었다. 이 성장은 2:52에 의하여도 확증되는데 거기서 누가는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누가는 예수의 지적, 육적, 영적 생명에 성장이 있었음을 우리에게 말하여 준다. 그는 아담처럼 어른으로 태어나서 아기인 것처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고 참 아기로 났었다. 그는 보통 아이들처럼 영아기에서 포복기로, 걷고 말하는 유년기로, 자라며 배우는 소년기로 마침내 완전한 성인에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했다. 누가복음 2장 한 장에서 누가는 그리스도를 처음 12, 16절에선 "아기(baby)", 다음 17, 40절에선 아이(child), 그리고 43절엔 "아이 - 소년(boy) -", 마지막으로 52절엔 "예수"라 칭하고 있다. 이는 예수께서 참으로 사람이었고 따라서 그의 인성은, 신성과의 연합으로 인하여 전지, 전능, 무한 등의 신의 속성을 부여받지 아니하였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그는 성경이 명시하듯이 아기로 태어났으며, 위의 40, 52절이 명백히 선언하듯이 지혜가 자라갔다. 그는 영적으로도 자랐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그는 실제로 "자라 가며...하나님께 사랑스러워" 가시었다. 이 모든 성장이 오직 예수의 인성에만 적용됨을 기억한다면, 이 큰 신비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신성은 항상 완전하시기 때문에 어느 의미로나 조금도 자랄 필요가 없었다.

 

이 모든 성장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고 자동적인 성장이 아니었다. 또한 그 모든 온전한 성장은 인간 예수가 하나님의 신분과 불가분리하게 연결되었으므로 인간으로서의 그가 전지(全知)하였다는 사실 때문도 아니었다. 이는 예수의 참 인간성을 보전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성경은 그가 성인으로서 본격적인 사역 중에라도 자신의 재림의 정확한 날짜를 알지 못하였다고 말한다(막 13:32). 이 영적, 지적 성장은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에 의한다. 이사야는 이것을 예시하며 기록하기를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곧 예수)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11:1,2)라고 하였다. 요컨대 예수의 인성에 관한 한, 예수 위에 강림하여 그를 어린 아기와 소년으로서 자라며 강해지고 지혜와 키가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게 하신 분은 바로 성령이었다. 성장해 가는 소년 예수에게는 성령이 필요하였다.

 

혹시 누가 예수께서 한량없이 성령으로 충만하시면서(요 3:34) 영적으로 자란다는 사실에 의혹을 품는다면 그 해답은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은 완전한 무죄와 완전한 거룩함 간의 구별과 예수께서 아기로부터 성년으로 자라 갔다는 사실에 있다. 아기 예수는 성령의 충만함과 거룩함의 모든 성향과 의지를 가졌으나, 단지 그가 유아인 때문에 어른이 하듯이 인성의 지능과 의지를 가지고 행사할 수 없었다. 예를 들자면, 그가 아기였을 때 자신이 12세였을 때처럼 신학자들과 토론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의 인간적인 마음이 윤리적 문제를 이해할 만큼 발달되지 못하였기(발달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선악의 선택의 문제에 봉착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항상 그는 아기였을 때도 성령이 내주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기질은 비록 표현되지 아니하였을지라도 완전히 거룩하였다. 이 거룩한 성품은 잠재하여 있었고 그 행사(行使)는 그의 마음이 자라고 발달함에 따라서만이 따라올 것이었다. 예를 들면, 그는 순종을 배워야 했다(히 5:8). 이는 그가 한 번이라도 불순종하여 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 오직 그는 성령께서 그 안에 이미 심으셨으나 그가 아기인 동안 결실치 못하던 선천적인 거룩한 성향을 발달시켜야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예수의 잉태와 탄생을 위하여 필요했을 뿐 아니라 성령은 또한 아기와 성숙하여 가는 젊은이로서 전 성장기를 위하여 필요하였음을 본다.

 

 

4. 그리스도의 세례받으심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의 또 하나의 증거는 그가 중보자로서의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기 위하여 성령으로 성별되고 능력을 받은 수세(受洗) 시에 나타난다. 예수께서 지혜와 지식의 영으로 충만함을 입고 자라며 그의 사생활에서 하나님께 사랑스러워 가신 후에도 아직 그는 공생애를 위하여 새로운 면으로 성령이 필요하였다. 그의 거룩한 생활과는 별도로 그는 메시야 - 곧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으로서의 직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격을 갖추기 위하여 성령이 필요하였다.

 

이 성령의 은사는 수세 시에 임했다.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눅 3:21, 22)라고 쓰여 있다. 이 일 전에는 복음서 아무 곳에서도 예수의 사역은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그의 탄생과 소년 시절에 관하여 읽을 뿐이다. 그런 후로 우리는 그의 전도와 기사를 행하신 사역에 관하여 듣는다. 그리고 예수께서 세례받으심에 대한 누가의 기록 직후에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었다고 그는 명언(明言)한다(3:23).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서 수세 시에 성령이 강림하심은 그의 공생애를 위하여 공적으로 자격을 갖추게 할 목적에서였다는 결론을 짓게 된다.

 

예수께서는 이 성령의 기름 부음이 그의 공직을 위함인 줄 의식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위와 같이 세례를 받음과 동시 성령이 그의 위에 강림한 직후 그는 그의 첫 강설을 나사렛에서 하실 때에 본문으로 이사야 61:1 곧 그 선지자의 예언인 "주의 성령이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 19)는 말씀을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앉으신 후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은 그때 그로 그의 공적 사역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능력 주시려고 그 위에 오셨던 것이다.

 

성령께서 또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하여 기사를 행하도록 특별한 능력을 주신 것이, 예수께서 바리새인과의 갈등 중 한 장면에서 하신 말씀 -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에서 나타난다. 그리고서 그는 바리새인들에게, 성령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라 하므로 이는 사하심을 얻지 못하는 성령 훼방죄를 범하는 것임을 경고하셨다. 그 이적들이 예수를 통하여 이뤄졌지만 참으로 그 시행자는 성령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예수께서 여러 번 이적을 행하셨을 때 아버지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사람으로서의 그가 성 삼위의 제 이 위(신으로서의)로부터 초자연적 능력을 받은 때문도 아니요, 오직 성령이 그에게 그렇게 할 은사를 주셨기 때문이었음을 명백히 보여 준다. 사도행전 10:38의 베드로의 말 -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꼐하셨음이라." 함도 이 진리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세례받으심과 전도와 이적 행하심은 그가 자신의 힘으로써가 아니고 성령에 의하여 권능을 받고 자격을 구비하여 그의 공직에 들어갔음을 보여 준다.

 

 

5. 그리스도의 시험받으심

 

그리스도의 생애에 나타난 성령의 위대한 역사의 또 하나는 예수의 시험과 관련하여 니타난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인도와 지도 하에 일어났다.

수세(受洗) 직후 그가 시험받으려 하셨을 때 그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아마 세례받을 때의 성령 강림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또한 복음서들은 "성령에 이끌리어...광야로 가사" 시험받았다고 하였다. 마태와 마가는 광야"로(into)"라 말하는 데 반하여 누가는 특별히 광야"에서(in)"라 말하며 동사의 시상은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요 일정 기간을 표시하는 미완료형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분명히 성령이 그리스도를 광야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거기 머무신 동안 성령이 그와 함께하사 인도하고 시험에 승리하도록 도우신 것이다. 그리고 누가는 그것들이 다 끝나자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돌아가시니"(눅 4:14)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시험받는 시초부터 끝까지 온 기간이 성령의 지배 하에 있었고 예수의 인성이 자기 앞에 놓인 격심한 시험을 이길 힘을 받은 것은 성령의 힘으로 말미암았다. 이는 그의 신성이 그의 인성에 신의 성질을 흡입시켜 그가 사탄의 시험과 모든 악의 세력을 저항하도록 한 것은 아니었다. 만일 그러했다면 그는 그 이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악을 물리칠 수 있기 위하여 성령의 내주를 굳게 의지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시험 기간뿐 아니라 그의 전 사역의 모든 시험 전체에 성령이 필요하였다고 생각함이 완전할 것이다. 이 첫 시험이 있은 후 사단은 그를 다만 "얼마 동안"(눅 4:13)만 그를 떠났던 것이다.

 


6. 그리스도의 죽으심

이 놀라운 성령은 그리스도의 잉태 시로부터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줄곧 역사하셨다. 히브리 9:14은 이를 말하여,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공은 예수의 외적 죽음 곧 그가 숨을 거둔 표면의 행위에만 있지 않고 그가 죽으신 내적 태도에 있다. 하나님은 항상 마음과 표면성 행위 간의 정당한 관계를 요구하신다. 그의 뜻에 겉으로만 순종함을 기뻐하시지 않고 반드시 영혼 안에 상응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그는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거나 겉만 깨끗한 그릇을 돌아보시지 않고 진정한 사랑의 태도를 요구하신다. 만일 예수께서 마음에 없이 - 침울하게, 억지로, 극기심으로, 단순히 필요상 십자가에 나아가셨거나, 즐거이 온전하고 뜨거운 열심으로 아버지에 대한 신뢰심을 가지고 행하지 아니하셨던들 아무 속죄도 이뤄지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만일 예수께서 "나는 십자가를 지기 싫다. 원치 않으나 의무니까 해야겠다."고 하셨다면 구원의 사역을 성취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아무런 의도 효용을 발휘치 못하였을 것이다. 위와 같은 경우에는 구원에 필요한 수동적 및 능동적 순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로 예수께서는 온전한 희생을 드렸다. 그는 그 결과를 알면서, 그러나 기꺼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랑과 신뢰와 복종으로 죽음에 나아갔다. 그의 태도는 온전하였다. 그리고 히브리서 9:14에,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렸다 함과 같이, 이 모두는 성령에 의하여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께서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필요한 그 완전한 태도를 취할 수 있게 하신 분은 곧 성령이었다. 그분 없이는 예수께서 구속의 사역을 감당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에 의하여 완전한 태도로 십자가에 나아갔고 그로써 우리를 위한 구속을 이루셨다.

 

 

7. 그의 부활하심

 

성령의 역사는 예수의 죽음으로 그치지 않고 그의 부활에까지 줄곧 계속되었다. 때때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버지께 돌려지고(행 2:24), 때로는 아들에게 돌려지지만 성경은 특별한 의미로 성령께 돌린다. 바울은 로마서 8:11에, 그리스도를 살리신 이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신다고 기록하였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역사하셨다는 것은 그의 일반적인 생명을 주는 활동 곧 아담에게 생명을 주거나 오늘날 새 생명을 내거나 중생에서 신령한 생명을 허락하는 일들과 일치한다.

 

 

8. 그의 영화(榮化)

 

그리스도의 생에 있어서 성령의 마지막 행위는 어느 특정한 본문에서 증시(證示)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많은 곳에서 연역적(演繹的)으로 나타내고 있다. 신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거룩하게 되는(聖化) 것이다. 우리는 또한 그가 모든 순결한 종교적 생명-무죄 상태의 아담 같은 생명들의 근원임을 추론한다. 구원받은 자 안에 영원히, 하늘에서까지 거하실 분이 성령이시다. 이러하므로 그리스도의 신성 안에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의 부활에까지 계속하신 성령께서 그가 모든 성도 안에 거하시듯, 또한 영화롭게 되신(榮化) 그의 인성 안에 거하실 것은 확실하다.

 

 

결론

 

결론으로 강조할 것 셋이 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 생애의 모든 면에 있어서 그의 신성이 인성과 연합되었어도 인성으로서의 인간 되심을 그치고 사신 것이 아니다. 즉, 인성을 신성화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인성으로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의 참 인성을 부인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그리스도께서 육체(인성)로 오심을 부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닌 적그리스도의 영이다(요일 4:2, 3) - 편집자 주]. 오히려 예수께서는 항상 완전한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었고 지금도 하늘에서 그러하시다.

 

이것은 그 신성이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의 성령의 내주를 불필요하게 하지 아니하였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으로서가 아니요 사람으로서 예수는 우리가 여러 번 본 것같이 성령이 필요하였다. 사람으로서 그는 탄생 시에 죄에서 지켜지기 위하여 그가 필요하였고, 청년 시엔 거룩함과 순종과지혜를 주실 분으로, 또 수세 시에는 메시야적 직임을 위해 그로 구비하기 위하여, 시험 시에는 악을 대적할 힘을 위하여, 죽음에서는 온전한 희생을 드리기 위하여 필요하였다. 그때마다 성경은 성령이 그리스도를 도우셨다고 말해 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성령을 필요로 하셨음을 부인함은 곧 예수의 참 인간성에다 그 인성이 갖지도 아니한 신의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그 인성을 손상시킴이 된다.

 

둘째로, 무구(無垢)히 잉태되어 그 죄책이나 부패에 걸쳐 원죄의 흠이 전혀 없는 완전한 사람 예수께서도 성령을 의지하였으니 우리는 얼마나 더 성령이 필요하랴! 우리는 신성과 연합되지 아니하였고, 본질상 전적으로 타락하여 모든 악에 기울이고 있다. 예수의 행사와는 반대로 중생한 후에도 우리는 성령을 근심케 하며 이로써 우리 안에 그의 임재를 손감(損減)시킨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 내주의 충만을 위하여 한층 더 기도해야 되지 않겠는가? 만일 예수께서 소년 시에 그에게 개인적인 거룩함과 지혜를 주사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게 하실 성령이 필요하였다면 본질상 죄악적인 우리 어린 것들이 영적으로 아름답게 자라고 하나님께 더 사랑스러워 가려면 얼마나 성령이 필요하랴! 만일 하나님이시요 무죄하신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성인(成人)으로서 그의 전도를 위하여 성령의 세례를 요했다면 오늘날 죄 있는 복음의 전도자들이 그들의 전도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되기 위하여 그들의 생에 성령이 얼마나 더욱 필요하랴! 그리스도께서 그 시험 중에 이기고 승리하기 위하여 성령이 필요하였거늘, 우리가 우리 생명 안에 더 성령의 충만하심을 구하지 않고 어찌 죄에 대해 승리하기를 기대할 수 있으랴!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싫은 마음 없이 기꺼이 순종하기 위하여 성령이 필요하였으니, 우리가 무엇이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즐거이 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더욱 성령이 필요하겠는가! 그리스도의 독특성을 항상 조심하여 지키면서 또한 우리의 삶에서 그가 우리의 모범도 되심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그가 우리에게, 성령이 충만한 생애로써 거룩함과 죄에 대한 승리의 길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셋째로, 성령의 일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을 우리 생에 적용시킴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고 구속 그 자체의 성취에서부터 그가 활동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예수 그리스도는 홀로 우리의 구속을 성취할 수 없었다. 인성을 가진 분으로서 그는 그의 잉태와 출생 시에, 그가 자라날 때, 그의 공직 사역에 임하여 세례받을 때 성령이 필요하였다. 그의 수태로부터 영화롭게 되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성령이 필요하였다. 우리는 성령께 구속의 공로를 중생과 성화로써 우리 생명 안에 적용하심을 인하여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일 자체를 이루심을 인하여도 찬송을 드려야 마땅한 것이다!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 발췌(107-126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제 1장. 성령과 삼위일체(三位一體) / 에드윈 H. 파머


이 책에서는 주로 성령의 다각적인 역사(役事)를 생각하고자 한다. 그러러면 성령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이 첫 장은 성령과 삼위일체에 대하여 진술하되 성령에 관하여 네 가지 명제로 고찰한다.


1. 성령은 인격이시다

그리스도인이시라면 성령을 한 인격으로 믿는다. 교회의 초대로부터 오늘의 현대주의에 이르기까지 여러 모양으로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다한, 소위 기독교 설교자와 신학자들이 성령을 "그분"이라 하지 않고 "그것"이라 한다. 그들은 그분을 제 삼 위의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모시지 않고 비인격적인 영향력이나 세력으로 생각할 뿐이다. 그러한 견해는 우리에게서 몇 가지 구원의 큰 축복들을 빼앗는다. 더구나 그것은 비성경적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성령이 인격이심을 보여 준다.

첫째로, 성경은 인격만이 가질 수 있는 사고와 의지와 감정이 그에게 있음을 가르친다. 비인격적인 사물은 이런 성질들을 갖지 못하나 하나님의 영은 가지신다. 바울은 성렁께서 사고력을 가졌음을 전제한다(이하 모든 성경 인용은 '개역 개정판' 성경임).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0, 11) 여기서 바울은 비인격적인 영향력이나 세력이 가질 수 없고 인격만이 가지는 지식이 성령께 있음을 밝힌다. 성경도 또한 성령께서 의지의 인격적인 성질을 가진 것으로 묘사한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비두니아로 가려 했을 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고 했다(행 16:7). 또 성령께서 많은 선물들을 신자에게 주었다고 바울은 말한다. 곧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 또한 성령은 인격이시므로 감정을 가지셨다. 이를테면, 에베소서 4:30은 성령께서 슬픔을 가지실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본문은 명하기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또한 로마서 8:26에는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였다.

둘째로, 성경은 성령을 다른 인격들과 병치(竝置)시킴으로 그가 인격이심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아버지와 아들이 인격이심을 우리는 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 28:19)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을 때 성령께서도 아버지와 아들과 꼭 같이 인격이심을 지적하셨다. 야고보도 초대 교회에 어떤 지시를 내리면서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행 15:28)라고 썼다. 성령께서 자기나 사도들과 같은 생각을 하실 수 있는 인격이라고 생각한 것이 명백하다.

 

더욱이 성령께서 비인격적인 세력뿐이라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성령의 권능으로"(눅 4:14) 갈릴리에 돌아가셨다고 말함은 무의미한 말의 중복일 것이다.

 

성령께서 인격이심을 우리는 얼마나 감사해야 하랴! 오직 그가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며, 우리 안에 계셔서 죄를 이길 힘을 주시고, 성경을 영감(靈感)하시며, 우리로 깨닫도록 우리 마음을 비추시고,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인도하시며, 기도를 인도하시고, 우리 가운데 목사와 장로와 집사 등 교회의 직분을 맡기신다.

 

이처럼 성령께서 인격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에게 불손하게 대하거나, 그를 대적하거나, 멸시, 훼방 등으로 그를 불쾌하게, 또는 슬프게 한다면 우리 자신이 해(害)를 자취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아무쪼록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하지 말고 오히려 믿고 그 사실에서 오는 축복들을 누려야 할 것이다.

 

2.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한 인격으로는 믿되 그를 한 피조된 인격으로만 생각하고, 하나님 자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령이 비인격적인 "그것"이 아닌 것은 알면서도 성부보다 낮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께서 인격적인 특성뿐 아니라 신성도 겸비했음을 보여 준다. 이 신적 속성은 곧 성령께서 하나님이시라는 표(標)가 된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은 전능하사 창조(창 1:2)와 섭리(시 104:30)와 예수의 초자연적인 잉태(눅 1:35)와 부활과 각 그리스도인에게 영적 선물을 베푸는 일들을 감당하신다.

 

그는 또한 전지(全知)하시다.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질문함으로 그것을 암시하였다.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사 40:13,14) 사도 바울도 그것을 우리로 믿게 한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나아가 성령의 편재성(遍在性)을 말할 수 있다. 시편 기자(다윗)는 웅변적으로 이르기를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 하여 그가 하늘에 오르거나, 음부로 내려가거나, 바다로 피하거나, 밤의 흑암 중에 숨는다 해도 곳곳마다 성령(주의 영)이 거기 계셔 결코 그로부터 피할 수 없음을 그는 말한다. 성령은 어느 곳에나 계신다. 신약 성경에 보면 성령은 신도들 안에 거하며, 많은 신도들은 각자 안에 그의 임재를 제지하지 않는다고 했다.

 

히브리서 9:14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했다. 이것은 성자와 동역(同役)하신 성령께서 영원한 신성을 소유했음을 의미한다.

 

신구약 성경이, "성령이 말씀하시기를"과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어구를 섞바꾸어 쓰는 사실도 성령의 신성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이다.

 

끝으로, 대사명 위임 시(大使命委任時, 마 28:19)와 사도의 축도(고후 13:13)에서와 같이 성부, 성자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을 병기(竝記)한 사실은, 성령께서 다른 양위(兩位)와 동등한 자리에 위치하여 그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낸다. 피조물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을 그처럼 긴밀히 연합된 표현으로 한데 묶는다면 도무지 조리가 맞지 않을 것이다.

 

성령이 하나님이신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만일 그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의 창조의 아름다운 역사와 영감의 권위 있는 일과 그리고 각 사람 마음속을 조명하는 일들을 완수하지 못했을 것이며 또한 우리의 타락을 극복하여 중생시키고, 우리 안에 내주(內住)하시며 우리를 성화시키지 못하였으리라. 그가 유한자(有限者)가 아니고 하나님의 한 위(位)이신 사실을 고마워함이 마땅하다.

 

3. 성령은 성부, 성자와 구별된 하나님의 한 위(位)이시다

 

교회 역사상에는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믿으나 삼위일체의 일체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께 각이(各異)한 삼위가 있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3세기에는 삼위 하나님에 대하여 창조 때에는 성부로서, 그 후 역사상에는 성자로서, 마지막에는 성령으로서 나타나신 분으로 묘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 안에 삼위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처음엔 성부로, 다음엔 성자로, 세 번째로는 성령으로 불려지는 셈이다. 즉, 성부가 성자로 변하고, 다시 성령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 이론들은 다 성경의 계시에서 이탈된다. 어떤 성경 본문은 한 하나님의 단순한 변모가 아니라 각이한 삼위의 존재를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예수께서 세례받으시던 때를 예로 들면,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시고, 그와 동시에 성령께서 비둘기의 모습으로 내려와 예수님 머리 위에 앉았다고 했으니(마 3:16-17), 이들 삼위의 동시 현현(顯現)은 하나님을 단순히 단일(單一)하다고 해석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나타난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2:33도 하나님의 삼위 간에 분명한 구별을 짓는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그리스도)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한 위가 아니고 삼위이심은 확실히 우리에겐 축복된 일이다. 그것은 풍성한 삼위일체가 되시므로 우리에게는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시는 전능하신 아버지가 계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그리스도가 계시며,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 생명에 구원을 적용시키시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다.

 

4. 성령은 성부와 상자로부터 나오신다(發出, 發生)

 

삼위일체의 삼위 간에는 일정한 관계와 차서(次序)가 있다. 이 삼위가 똑같이 하나이시라고 해서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각기 다른 특성을 지녔고 서로 다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제 일 위와 제 이 위 간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영원 전에 아버지가 아들을 낳으셨다. 성령이 아들을 낳으신 것이 아니고 오직 아버지께서 아들을 낳으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과 다른 두 위 간에도 일정한 관계가 있으니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 하나님의 영의 나오심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성경에서 이 말을 설명해 주지 않으므로 여기에 성경 말씀을 되풀이할 뿐 그 이상 더 방법이 없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처럼 아버지가 성령을 낳으셨다거나 그리스도가 성령을 낳으셨다고 말하지 않은 것을 주목해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교부들이 암시하듯이, 성령은 그리스도의 형제이거나 성부의 손자가 되는 결과에 이른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에 관하여 조심성 있게 '낳다'라는 용어를 피하고 있다. 아타나시우스 신경(信經)은 이에 대해, 성령은 "만들어지지도, 창조되지도 않고 누가 그를 낳은 것도 아니고 다만 나오신다."고 표현하였다. 이 '나오신다'란 말은 예수께서 사용하셨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 15:26)

 

성령의 이름이 또한 이 삼위 간의 관계에 대한 또 하나의 암시를 준다. 아버지라는 이름이 아들에 대한 그의 관계를 보여 주며, 아들이라는 이름은 아버지에 대한 그의 관계를 의미 하듯이 성령이라는 이름도 다른 두 위(位)에 대한 성령의 관계를 표시하고 있으니 곧 영(靈)이라는 그 이름은 불어넣었다(spirited or breathed)는 의미이다.

 

그러나 성령이 비록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며 혹은 그로부터 불어넣어졌다 할지라도 그는 온전히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 해도 그 두 위보다 열등하다고 할 수 없음은 마치 성부께서 성자를 낳았다(시 2:7, 행 13:33)고 해서 아들이 아버지와 동등이 아니라 할 수 없음과 같다.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영원히 낳음을 입은 것같이 성령도 영원히 불어넣어졌다는 사실에 신비가 있다. 그는 영원히 성부와 성자와 함께 계셨다. 그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왔다', 또는 '불어넣어졌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보다 낮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가 삼위의 다른 두 위와 영원히 유지하는 관계를 표시할 따름이다.

 

또한 성령이 다만 성부께로부터만 나오지 않고, 성부, 성자 두 분께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성부께로부터 나오는 것은 요한복음 15:16에서 분명하거니와, 성자로부터도 나온다는 것은 그처럼 분명치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 성령을 세상에 보내사 제자들 위에 불어넣었다('숨을 내쉬며')고 하는 이런 구절들(요 15:26, 16:7, 20:22)로부터 추론할 수 있다. 한 번 불어넣는 것은 영원히 불어넣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아들이 삼위 내의 관계에서도 가지는 일정한 권위를 반영한다. 그 위에 성령은 "아버지의 영"으로 불려질 뿐 아니라 "아들의 영"(빌 1:19)으로도 불려진다. 이러한 성령의 다른 두 분과의 관계는 성령이 삼위일체의 제일, 제 이 위가 아니고 제 삼 위로 여겨지는 이유를 설명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았으니 맨 처음이요,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낳음을 입었으니 제 이 위이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니 제 삼 위이시다.

이 삼위일체의 차서는 역사 가운데 나타나서, 처음 두 위가 연속하여 전면에 나타난 후에야 비로소 성령께서 현저하게 되신 것은 주목할 만하다. 창세로부터 그리스도의 시대까지 세상에서 더 뚜렷하였던 분은 아버지시다. 창조에서 주된 영광을 받으신 분이나, 이스라엘이 구약에서 주로 관계한 분도 그분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자 아버지는 그처럼 현저히는 나타나시지 않으셨고, 성령은 아직 충만히 나타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만 더욱 뚜렷한 역할을 담당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성육하시고 승천하시자, 삼위일체의 제 삼 위께서 더 뚜렷이 등장하셨다. 이와 같이 삼위께서는 삼위일체 안에 일정한 차서가 있어서 그 차서는 역사 가운데 현시되어 각 위는 바로 삼위일체 내에 발견되는 차서대로 역사 가운데 나타난다.

 

삼위일체 안에서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 의하여 불려 나오기(breathed out) 때문에 오순절에 교회 위에 불려 나온(임재하신) 분도 아버지나 아들이 아니라 성령이었다는 것을 또한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삼위일체 중 제 이 위는 삼위일체 안에서 아들이기 때문에 그가 땅에서 성육하신 아들이어야 하는 사실과 상응한다. 같은 모양으로, 삼위일체의 제 일 위가 삼위일체 중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또한 믿는 자들의 아버지시다.

 

이상은 삼위일체의 다른 두 위에 대한 성령의 관계를 몇 가지 면에서 고찰한 것인데, 비록 우리가 이것을 다 알기는 어렵지만 성령께서 계시한 것을 무시하여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가 교회를 인도하사,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과 다른 두 위와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된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불어진다는 교리의 실제적인 결과는 광범위하다. 1054년 기독교 세계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로 나뉘었다. 비록 저변의 요소가 많았으나 서방 교회들이 톨레도(Toledo) 회의(589년)에서와 같이, 성령은 아버지 "와 아들(filioque)"=("and the sun") - 이는 논쟁의 소지가 있는 용어 - 로부터 나온다고 고백하는 반면에 동방 신자들은, 성령은 아버지에게서만 나온다고 믿었던 것은 실족케 하는 걸림돌이었다. 이 차이의 결과로 동방 교회는 서방 교회에서 분리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이 교리는 거대한 실제적 효과를 발휘하여 만약 1500년 전 교부들이 이것을 작성치 아니하였던들 오늘날 우리의 교회 생활에 영향을 미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이 문제에 대하여 주시는 지식을 감사해야 한다.

 

더욱이 아브라함 카이퍼가 예리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filioque(and the sun)"의 부정은 불건전한 신비주의에 이른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예수의 역사로부터 분리시키게 되며, 성령의 성화의 일만 내세우고, 예수의 구속은 뒷전으로 돌리게 되며 우리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만을 강조하는 나머지 그리스도와 교회와 성경으로부터 독립하는 데로 기울어진다. 성화가 칭의보다, 성령과의 주관적인 교통이 객관적 교회 생활보다, 그리고 성령의 조명이 성경보다 더 중요시될 우려가 있다. 카이퍼는 이것이 실제로 어느 정도 동방 교회에서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옴을 부인하는 결과로 생긴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교회 회의와 대회에서 행해지는 긴 신학적 토의가 때로는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았다. 비록 그 토론이 언어상의 문제라는 비난을 받을 위험이 있을지라도 그 결론들은 위로부터 아래 대열에까지 배어든다. 우리는 성령이 삼위일체의 한 분이라는 고마운 계시에 감사치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관념적인 지식만으로 만족하여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그 위에 성령과 그의 사역을, 체험을 통하여 알도록 힘써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하여 이 장(章)과 다음 장들이 씌어졌다.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 발췌(19-30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그 분과 1:1로 만나라!”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개인적으로 만나기를 원하신다.


어느 날 오후, 당신이 대문 옆의 우편함을 향해 걸어간다.

아름다운 초대장 하나가 있다. 정확히 당신 앞으로 발송된 개인적인 초대장이다. 왕이 보낸 초대장이다.

여느 왕이 아니라 모든 왕들의 왕이신 그분께서 직접 보내신 것이다. 봉투 자체가 지금까지 만져본 적이 없는 최고급지이다. 봉투는 왕의 위엄이 느껴지는 당당한 찰흙 인장으로 봉인되어 있다. 당신은 설렘에 압도되어 천천히 찰흙 인장을 떼어내고 안에 있는 카드를 꺼낸다.


“나를 만나라고 그대를 초대하노라!”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당신은 초대장을 보며 그것이 세상의 분주함을 떠나라는 초대임을 깨닫는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개인적으로 만나기를 원하신다.


문화의 소음, 절망의 목소리, 전문가의 으르렁거림, 환멸을 느낀 이들의 애처로운 낑낑거림, 신앙심 깊은 사람들이 헐떡거리면서 쏟아내는 말들, 야심 찬 사람들의 고함 등을 모두 떠나 만남의 당사자 두 사람, 당신과 당신의 왕만이 전적으로 중요한 그곳으로 돌아가라는 초대다.


당신의 왕이신 하나님을 직접 만나 친밀하게 교제하라. 교제할 뿐만 아니라 친밀한 상태를 유지하라.

과거에 나는 안내자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이끌려고 애쓰면서 많은 세월을 보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내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경청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려고 애쓰면서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실패자로 걸은 세월이었다.


그러다가 나의 구원자이신 그분과 개인적으로 만났고, 그 결과 지금은 어떤 사람이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면 영원히 변화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공적 예배나 대회나 집회에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시고 나는 그런 장면을 목격하는 것을 언제나 즐거워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과 일대일로 시간을 보내기를 바라신다. 사실 하나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기쁨으로 충만해진다고 약속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 16:11).


하나님께서 언제나 두 팔로 당신을 감싸줄 준비를 하고 계심을 알고 있는가? 사실 당신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창조되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창조된 모든 것, 존재하는 모든 것이 주님의 기쁨을 위해서입니다” (계 4:11,《NLT》, 역자 옮김).


영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라는 사실을 꼭 이해하기 바란다. 당신을 영적으로 살아 있게 하는 것은 구원자와의 개인적인 만남이다. 시편 기자가 이것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주목하기 바란다.


이리도 험악한 세상! 나는 하나님께 외쳤다. 도와달라고 부르짖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분의 왕궁에서 들으셨다. 내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나를 당신 앞에 불러주셨다. 나를 독대해주셨다! 시 18:6, 《메시지》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개인적으로 만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나는 사탄이 당신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지 못하는 경우에 당신을 단지 바쁘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탄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당신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서 정말로 많은 일들을 행하실 수 있지만, 당신이 바쁜 생활에 치어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사탄이 당신에게서 정말로 많은 것들을 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교제하는 사람을 내게 데려와라. 그러면 나는 그 사람이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당신에게 입증해 보일 수 있다.



당신 삶의 모든 국면에 평화와 만족이 깃들 때가 언제인가?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만날 때이다.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교제하는 것이 남은 자로서의 당신의 행보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 만족하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 너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모든 것의 당당한 주인이 된다. 마 5:5, 《메시지》


예수님이 당신을 확보하여 변화시키시는 때가 바로 이러한 일대일의 개인적 만남이 일어나는 동안이다.



출처: 갓피플 말씀테마 (http://gp.godpeople.com/archives/44320)

삼위일체 하나님

 

김영재교수 / 합동신학대학원(역사신학)?

 

세계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삼위로 계신 한 하나님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어서 제각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말하고 있으나, 창조주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며 유일하게 참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 즉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들이 상상하거나 만들어낸 신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뜻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유일신(唯一神)이시나 단일신(單一神)은 아니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유일신’이란 뜻을 ‘단일신’으로 이해하여 홀로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부인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성부), 아들 하나님(성자), 성령 하나님(성령) 세 분이시나 한 하나님이시며, 한 하나님이시나 세 분으로 계시며 일하십니다. ‘삼위일체’란 단어는 성경에는 없으나, 교회는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 위(persons)가 한 하나님이신 진리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제일 처음 삼위일체라는 말을 한 이는 터툴리안이었습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지를 물으면서, 아들이시면 아버지와 같이 동등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신지를 묻는 물음에 답하는 데서 성경의 가르침을 확인하게 된 교리입니다. 사도들을 계승한 속사도 교부들의 시대로부터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삼위일체 정통교리를 확정하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재확인하기까지 교부들이 많은 잘못된 가르침에 대항하여 성경의 진리를 변증하고 논의를 거듭한 끝에 교회가 교의로 받아들이게 된 교리입니다.

 

양자설과 가현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잘못 가르친 초기의 이단은 영지주의와 에비온주의였습니다. 영지주의는 헬라의 철학과 동방의 여러 종교의 혼합 사상이며, 에비온주의는 유대교적 배경에서 나온 사상이었습니다. 영지주의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났다는 뜻에서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가현설(假現說)이라고 합니다. 가현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고 역사적인 인물로 사신 것을 부인하거나 그런 역사성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에비온주의는 예수는 단지 인간일 뿐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양자(養子)로 삼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가현설과 양자설, 이 두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단설을 대변하는, 따라서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는 전형적인 이단설입니다.

 

사도들을 계승한 속사도 교부들이나 그 다음 세대의 변증가들은 나사렛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에게 나신 분으로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도들의 고백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진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다소 표현상 미흡한 점은 있었으나 그 진리를 부인하거나 왜곡하는 이단적인 가르침에 대항하여 정통적인 신앙을 변증하며 전수하였습니다. 미흡한 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아들 하나님을 헬레니즘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로고스’ 사상으로 설명하는 데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로고스’는 순수한 신과 물질 세계를 중계하는 존재로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아들을 ‘로고스’로 설명하자니까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본질에 있어서 동등하시며 한가지로 영원하신 하나님이심을 충분히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양태론의 생성과 파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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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에 이르러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삼위일체를 결과적으로 부인하는 단일신론(單一神論)이 대두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양자로 이해하는 소위 동적(動的) 단일신론과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양태론적 단일신론이었습니다. 동적 단일신론은 에비온적 양자론에 가깝고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영지주의적 가현설에 유사한 것입니다.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그냥 양태론(樣態論, Modalism)이라고도 하고, 그것을 사벨리우스가 처음 말했다고 해서 사벨리우스주의(Sabellianism)라고도 합니다.

 

3세기 중반에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 구약과 신약과 교회 시대의 세 시기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이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단자(單子, monad)로서 하나님의 존재 내에서 구별이 없으며, 세계와의 관계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구별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 가지 이름과 양식으로 구별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태양과 빛과 열을 비유로 사용하여 로고스를 통하여 세상이 창조되었다면 장차는 로고스가 다시금 흡수되고 하나님은 하나일 뿐이라고 합니다. 사벨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인성은 완전히 무시하였으므로 그에게서 성육(成肉)의 개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은 물론 이단설로 정죄를 받았으나, 교회 역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잘못된 삼위일체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경향은 합리주의적 사고를 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신자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19세기 이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본래 삼위일체 교리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그들이 그 교리를 논할 경우에는 양태론을 말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하는 신학자들은 역사적인 예수를 찾느라 예수전 연구에 헛되게 열을 올렸습니다. 유니테리안은 양태론적 단일신론을 따르는 것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표방하는 합리주의적인 신자들의 그룹입니다.

 

한국 기독교장로교회가 1972년에 내 놓은 신앙선언서 제 1장 1절에 보면 양태론적인 삼위일체 이해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그것을 작성한 신학자들이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거룩하신 아버지로 나타나셨고 계시의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아들로 나타나셨고, 또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에서 성령으로 나타나셨다. 우리는 한 하나님을 세 품격에서 만나며 그 하나의 품격에서 다른 두 품격과 만난다.”

 

자유주의적인 신학자들이 양태론을 말하는 것은 알 만한 일로 여기지만, 한국의 보수적인 신학자에게서도 양태론적 표현을 발견할 수 있어서 자못 긴장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느 보수적인 신학자의 글에서도 “이 세 위는 여러 사람의 여러 인격들처럼 전적으로 분리된 세 인격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세 위는 하나님의 본체(本體)가 존재하고 있는 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표현을 봅니다.

 

이러한 양태론적 이해는 부흥사들이나 일반 목회자의 설교에서도 흔히 듣는 것입니다. 일반 목사들의 경우는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해, 햇빛, 열, 혹은 물, 얼음, 수증기 등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로 설명합니다. 그러다 보면 불가피하게 양태론에 빠지게 됩니다. 신학자들의 경우는 하나님의 존재에 관하여 유신론적으로 논증을 하다가 그러한 논증의 잣대를 삼위일체론에까지 적용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양태론적 이해가 만연되고 있는데다가 그냥 주관적인 성경공부에만 열을 올리고 교리 교육에는 대체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국 교회이다 보니 신자들은 이단들의 가르침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잘못된 양태론을 가르치는 윗트니스 리도 많은 추종자를 얻고 있는가 봅니다.

 

1996년부터 98년의 기간에 월간지 <교회와신앙>의 발행인 최삼경 목사는 윗트니스 리측과 벌인 논쟁에서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을 변형된 양태론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최삼경 목사의 말에 동감합니다. 그러면서도 필자는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을 “양태론”이라고 말할 가치조차도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양태론은 합리주의적 이해에서 출발하는 삼위일체 이해로 나름대로의 전제와 논리성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윗트니스 리의 경우는 논리성을 결여한 채로 겁없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전혀 부적합하고 불경스런 비유를 들면서 조잡한 설명으로 일관하고 있어서 신학적으로 논쟁할 가치조차 없음을 발견합니다. 윗트니스 리는 너무 많은 비유와 설명으로 일관하고 있어서 일일이 들어 말할 수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일이 대꾸하고 논쟁을 한 최삼경 목사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삼위일체는 경외심을 가지고 신중히 논해야 합니다

 

교리사를 보면 교부들이나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설명하거나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할 때 어휘 선택을 하는 데도 얼마나 신중을 기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했음을 발견합니다. 예를 들면, 니케아 공의회의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 본질(homoousios)이신 한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동 본질이란 말이 사벨리우스가 쓴 말이므로 사용하기를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삼위가 한 하나님이심을 그런 대로 가장 적절하게 이해하게 하는 말이라고 하면서 사용하였습니다.

 

목회자가 성경에 충실하다가도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성경과 교리사적(敎理史的)인 지식을 동원하기보다는 자연의 비유로 설명하려고 시도합니다. 어거스틴을 포함한 많은 교부들도 그랬으나 그러나 그것은 양태론에 문을 여는 것이므로 바람직한 시도가 못됩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면서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실체를 비유로 설명하는 말씀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말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답하시는 말씀,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ehyeh asher ehyeh, 출 3:14)하는 말씀을 발견할 뿐이다. 그밖에, 예컨대, 이사야 9장 6절에 하나님께 적용되고 있는 이름이나 유추들은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이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간과 만물을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역할과 능력을 묘사하는 말일 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해 주시지 않으시면,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을 알 길이 없다는 것은 신학의 기본적인 전제입니다. 철학적인 막연한 신관이나 다신론적인 혹은 범신론적인 신관이나 다른 종교적인 신관으로 성경에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려고 하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물질 세계를 초월하시는 영이신 하나님을 당신이 지으신 자연계의 유추를 통한 설명으로는 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한 설명은 약간의 이해에 도움을 주는 것 같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금 의문을 일으키게 하거나 잘못 이해하게 만들 뿐이다. 즉, 양태론적 단일신론의 이해로 오도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삼각형을 그려 설명하려는 시도 역시 안 될 말입니다. 그런 설명은 불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불경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의 오묘한 것을 도식화함으로써 쉽게 이해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비신학적인 발상입니다. 셋이 어떻게 하나가 되느냐 하는 의문을 그대로 받아, 그 원리를 수적으로 혹은 기하학적으로 설명하려면 설명이 옳게 되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예정론을 이해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대치시키면서 해결하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모든 것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고백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예정을 바로 이해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속사도 시대 이후 로고스를 우주구조론(cosmogony)적으로 이해하려고 해오던 것을 이레니우스(∼202년)가 구속론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의 확립에 전기(轉機)를 마련한 사실을 기억합니다. 이레니우스는 당시까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로고스로써 설명하려는 것을 지양하여 그리스도로써 로고스를 설명하려고 하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로고스, 즉 그리스도의 이해가 철학이 말하는 로고스 개념보다 선행하며 더 명확함을 인식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고백하며 예배하는 교리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에 관한 지식은 무슨 사색으로나 비유를 사용하는 설명을 통하여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말씀을 따라 논구하고 이해하도록 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신학자들만이 관심을 가져야 하고 이해하기를 시도해야 하는 현학적인 논리의 희롱이 아닙니다. 목회 현장에서 평신도들에게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면서 난해한 교리라든지 신비 중의 신비라고 말함으로써 미리 겁을 주는 것은 그들이 교리를 배우는 일에 별로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비”는 초절적(超絶的)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께 속한 지식이지만,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되었으므로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신자이면 누구나 다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믿어야 하며, 이해할 수 있는 교리일 뿐 아니라, 또한 실제로 믿고 있는 교리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니케아 신조가 작성되면서부터 있게 된 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학자들이 교리 작성을 위하여 연구하고 논의하기 이전에 이미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이고, 교회가 세례식을 행할 때 예수의 명령을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에 연합하는 세례를 베풀었으며, 수세자로 하여금 사도신경을 따라 삼위 하나님을 고백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배에서 기도와 찬송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께 찬양하고 예배하는 자세로 고백해야 하는 교리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삼위일체 교리를 두고 논의할 때, 논의의 주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아버지와 같이 참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을 비록 만족할 만하게 설명은 못한다고 하더라도 누구든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고 하는 베드로의 고백을 따라, 혹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하는 도마의 고백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인하고 고백하면, 그는 실제로 삼위일체 교리를 믿고 있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기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합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교리를 먼저 이해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를 시인하고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모든 이단은 단일신론적 신학을 지지합니다.

 

초대 교회의 유대교적 에비온주의적 양자론(養子論)과 영지주의적 가현설(假現說)은 반 기독교적인 이단의 전형(典型)입니다. 영지주의는 희랍적 철학 사상과 동방의 신비주의적 종교 사상이 혼합된 사상이었습니다. 양태론은 인간의 육체를 옷 입듯 입으셔서 사람인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말하는 가현설과 통합니다. 합리주의적인 그리스도 이해나 신비주의적 그리스도 이해가 서로 통합니다. 많은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역사 안에 사람으로 나셨음을 믿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사람으로 나신 예수께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부인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냥 종교적인 체험을 위하여 모범으로 삼을 만한 이로 생각할 뿐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은 금식과 기도와 명상을 통하여 하나님과 접하여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함으로써 각자가 그리스도와 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에 양태론적 삼위일체 이해가 보수적인 교회에까지 일반화되어 있는 것은 시정되어야 합니다. 양태론적 이해는 신비주의 운동이 준동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합니다.

 

“그리스도 중심 신학”을 떠나서 “신 중심 신학”을 거점으로 한다는 종교다원주의자에게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완전히 폐기될 수밖에 없는 교리입니다. 기독교적 신앙과 신학의 핵심을 떠나 단일신론적인 신관을 견지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이제 기독교적 신학 세계를 벗어나 “우주론적 기독론”이란 말에 걸맞게 종교다원주의의 무중력 세계로 접어들어 표류합니다. “우주론적 기독론”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이 그들의 사상적 근거를 두려는 비역사적인 기독론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능력임은 일찍부터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인격이심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고백을 확정하고 난 이후에, 즉 4세기 중엽에 이르러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인격이시라는 교리만 해도 성경에는 분명히 기록되고 있습니다. 말씀을 깨닫고 보면, 그것이 진리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성령을 가리켜 보혜사(parakletos, 위로자)라고 하심으로써 성령께서 인격이심을 말씀하십니다(요 14:26, 15:27, 16:7, 17:13~14, 참조: 롬 8:26~27).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즉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에서 출발합니다. 구원을 약속하시고 이를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은 당신을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게 해 주십니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마 11:17). 즉,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다(요 14:6). 그리고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할 수 없다(롬 8:9, 요 3:5).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 전에 나셨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는 것이 기독교 서방 교회의 전통적인 고백입니다. 동방 교회는 성령은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서 나오신다고 고백하는 점에서 다소 다릅니다. 그러나 삼위 일체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십니다. 요한 1서에 보면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고 말씀합니다(요일 4:9, 16). 그 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증거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당신의 작품으로서 좋게 여기시면서 사랑하기 시작하셔서 비로소 사랑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 아니고 영원 전부터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영원 전부터 아들을 사랑하시며,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과 더불어 사랑으로 교제(communion)하고 계심을 말씀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나님이심을 함축합니다(요 15:9, 17:24).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므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섭리하십니다. 사람을 지으시되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며 서로 사랑하게 하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므로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성자 하나님께서는 순종하심으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당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났음을 믿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한 삶을 살아 구원을 이루게 하십니다.

 

맺는 말

 

유신론적(有神論的) 논증은 철학과 종교에서 성경의 계시의 말씀을 접어 둔 채 신의 존재를 논의하는 논증입니다. 즉, 자연 만물을 보아서 신(神)이 존재함이 틀림없다는 것을 설득하려는 논증이다. 유신론적 논증을 통하여서는 신의 존재를 막연히 추측할 수 있게 해 줄 뿐입니다. 이러한 지극히 제한된 일반적인 유신론적 논증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는 일에 더 연장하여 적용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아주 불합리한 논리의 비약을 감행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 안에서,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계시된 하나님의 본체에 대한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에 관한 부수적(附隨的)인 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논의할 경우와 같이 술어(述語)나 보어(補語)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변함이 없는 주어(主語)로서 의미를 가집니다. 즉, 우리의 신앙고백과 예배를 받으시는 주격이신 하나님 자신에 관한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논증할 수 있거나 논증을 감행할 수 있는 교리가 아니며, 필요 없이 많은 말로 설명해야 하는 교리가 아니고 신앙고백과 예배로 응답해야 하는 교리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거나 설명함에 있어서 유신론적 논증의 한계나 우리의 언어의 취약성과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면 쉽게 양태론이나 잘못된 삼위일체론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한국 교회는 양태론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유신론적 논증의 한계점을 충분히 인식하는 가운데 당치않은 논리의 비약을 피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면서 성경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관련하여 이해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의 구원 교리는, 아니 모든 교리는 온전히 그리고 철저히 삼위일체 교리에 근거하고 있음을 재삼 인식하게 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사람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심판하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에 관한 교리이기 때문이다(졸고: “한국교회의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과 성령론> 차영배외, 태백사, 1999. 235~253 참조).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며, 우주와 만물을 운행하시고, 당신이 지으신 땅 위의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시고 돌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대로”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땅 위의 모든 것을 돌보도록 하는 직임을 맡기시고 권위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죄를 범하여 타락하였습니다. 타락하여 죄와 죽음에 처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 주셔서 우리는 그 진리를 알게됩니다.

 

구원을 약속하시고 이를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은 당신을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게 해 주십니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마 11:17). 그러므로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요 14:6).

 

그래서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하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재확인한 신조는 이러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시며 천지와 가시적이며 불가시적인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신 한 분 하나님을 우리가 믿사오며,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이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빛에서 나오신 빛이시요, 참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참 하나님이시요, 나셨으며 창조되지 않으셨고 아버지와 동질이시며, 그를 통하여 만물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신이 되시고 인간이 되셔서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고난을 받으셨으며,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영광 중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을 믿습니다.

 

주님이시요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사오니 성령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오셨으니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예배와 찬송을 받으시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위한 세례를 고백하며,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의 생명을 믿습니다.”

 

요한 1서에 보면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고 한 마디로 말씀합니다(요일 4:9, 16). 그 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시고 만물을 당신의 작품으로서 좋게 여기시면서 비로소 사랑하기 시작하신 것은 아님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고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님과 더불어 사랑 안에 계심을, 교제(communion)하고 계심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님께서는 영원전부터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나님이심을 함축합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므로 영원전부터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아버지께서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시고, 아들은 자신을 희생으로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오래 참으시는 가운데서 우리 죄인을 회개케 하시며, 정하게 하시고 의롭게 하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양자로 삼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독생자가 누리는 영광에 참여하게 될 때까지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심으로 기도하시고 성화시키시며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성삼위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와 찬양이 세세 무궁토록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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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별빛 최송연 환란 풍파 휘몰아쳐 심히 고달픈 날이면 나는 바람 일렁이는 강가로 나가지 그곳에서 나는 듣는다네 위로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거짓과 위선이 난무하는 세상 외로움에 눈물 흐를 제면 나는 수심 깊은 강가로 나가지 그곳에서 나는 느낀다네 저 수심보다 더 깊은 그분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은 먼 하늘가에 걸린 달빛 아니고 허공에 부유하는 무지개의 찬란함도 아니지 그 사랑은 내 마음속의 별빛 나는 믿네 좌절의 벽 저 너머 소망의 나라가 있음을... 그곳에는 거짓과 위선은 결코 설 자리가 없다는 것도 주의 진리의 말씀은 내 마음속의 별빛이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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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 1장 8절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바울의 이 말에서 볼 때 거짓 사도들은 바울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반대하는 일에 매우 대담하고 뻔뻔스러웠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정열과 열성을 가지고 그의 소명을 전적으로 확신하는 중에 그들에게 저항한다. 그는 자신의 성직을 그들에 대항하여 놀랍도록 높인다. 그리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갈라디아서 1장8절)


여기서 바울은 불을 내 뿜는다. 그의 열정이 심히 뜨거워서 그는 거의 천사 자신들을 저주하기 시작한다. 그는 말한다. “만일 우리 자신들, 나의 형제 디모데와 디도, 그리고 나, 나와 함께 한 모든 자들, 그밖에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늘로부터 온 천사 등이 너희에게 설교한다 해도 나의 복음이 전복되기 보다는 나와 내 형제, 그렇다,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으라.” 대단한 열정이다. 자신 뿐 아니라 그의 형제들, 하늘에서 온 천사들까지도 저주할 용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희랍어의(아나세마), 히브리어의(헤겜)은 저주받은 것, 밉살스러운 것, 경멸스런 것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참여, 의사소통이 없는 것을 뜻한다. 여호수아는 말하기를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레위기 마지막 장에는 “아주 바친 [또는 아나세마] 그 물건은 사람이든지 생축이든지...반드시 죽일찌니라” (레위기 27:28-29) 고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선고는, 저주받은 아말렉과 다른 도시들은 완전히 멸절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말은 이런 뜻이다. 우리나 다른 사람이 설교한 것과는 다른 복음을 우리나 다른 사람들이 설교하기보다는 우리나 다른 사람들이, 그렇다,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저주받기를 나는 소원할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을 먼저 저주한다. 지혜로운 토론자는 보통 자신을 비판하는 일로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을 더 자유롭게 그리고 더 혹심하게 비난하기 위하여 그리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자신이 설교하던 것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고 결론짓는다. 자신이나 다른 어느 누구도,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설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 번 복음의 음성이 울린 다음에는 복음은 마지막 종말의 날까지 철회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갈라디아서강해"중에서/루터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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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같이 충성하던 북한 주민들이 굶어죽는 것을 보고도 모르겠는가?


북한 국민들이 겁이 많아서 반정부 투쟁을 못한다고 비웃는 남한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난다. 그들에게 반정부 데모가 못 일어나는 이유를 설명해줘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분들을 납득시킬 자신이 생겼다. 남한의 현실이 북한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무식한 백성들은 누가 나라의 수령이 되든 별 상관이 없다. 오직 배불리 먹여주고 잘 살게 해준다고 속이면 그만이다. 즉 우둔한 백성들이 민주화 투사가 되는가? 아니면 무능한 노예가 되는가 하는 것은 그 나라 정치가들에게 달렸다는 뜻이다.


솔직한 말로 북한 주민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겁이 많아서가 아니라 사실상 반정부 민주화 투쟁이란 것을 해야 할 필요성을 그리 느끼지 못하였다. 왜냐구? 우선 무식한 백성들이 배가 고파야 정부 욕을 하겠는데 일을 하든, 안하든 출근만 하면 공짜나 다름없이 강냉이 죽이라도 평등하게 먹여 주었다.


또 백성들은 일자리 없어서 백수가 되고 돈이 없어야 나라님 욕도 하겠는데 누구에게나 싫든 좋든 직업은 무조건 준다. 또 집이 없어서 한겨울에 노숙을 해봐야 제도를 잘못 만난 한탄이라도 하겠는데 닭장 같은 집이라도 공짜로 국가에서 해준다.


또 자식들 교육비 걱정을 해봐야 한숨이라도 나오겠는데 나라에서 공짜로 모두 공부시켜주고 교복도, 교과서도 주었다. 또 아픈데 돈이 없어서 병원에 못가고 누가 죽어나가야 원한이라도 서릴텐데 누구나 공짜로 치료를 해준다.


또 말도 안 되는 세금을 쪽쪽 빨아가야 못살겠다는 소리라도 나올텐데 일한 것보다 노임은 턱 없이 적게 주고 그 대신에 세금은 형식상 완전히 폐지해주고 ‘수령님’ 몸값만 올렸다.


또 누구는 자동차 타고 다니고 나만 힘들게 걸어 다녀야 불만이라도 생길텐데 큰 간부들만 사업용 승용차를 탔을 뿐, 백성들은 전체가 걸어 다니는 교통평등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생각이 트였다는 북한의 간부들은 어떠한가?

두말말고 한번 간부자리 꿰차고 아첨만 잘하면 일생동안 공짜 자동차에, 공짜 큰 집 쓰고 먹을 걱정 없고 자손들까지 공짜로 공부시켜서 공짜로 간부를 만들 수 있으니 누가 그 정부를 반대하자고 국민들을 선동하겠는가?


한마디로 북한 정부는 “물질적인 공짜”와 “정신적인 평등”이라는 얼림 수로 지혜롭고 정신력이 강한 북한 주민들의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묶어 놓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북한은 국민들이 굶어 죽어가면서도 노동당과 수령을 100% 지지하는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도 좋아 보이던 그 “공짜와 만민평등”이란 것이 국가창립 40여년 만에 남한보다 잘 살았다던 북한을 백성들이 굶어죽는 가난한 나라로 만들어 버렸다.


결국 “공짜”와 “만민평등”은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망하게 하는 독약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지금 싸워서 독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와 한강의 기적도 이루어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던 남한 땅에서, 지난날의 북한식 정치방식과 노예로 변해가는 국민들을 다시 체험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지금 무슨 정신인지 나랏돈을 마구 공짜로 뿌려서 국민의 입을 막고 현 정부의 몸값만 올린다. 북한의 선전선동 수단을 닮아가는 이 나라의 언론매체들은 말도 안 되는 대통령 우상화 선전과 억측선동으로 국민들의 정신을 마구 흐려놓는다.


그래서인지 벌써부터 무식한 백성들은 “공짜와 평등”이란 얼림수에 속아서 자기네 정부가 그 어떤 한심하고 위험한 정치를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래서 북한처럼 현 정부의 지지도는 날을 따라 점점 올라간다. 한참 사기들이 났다. 꼭 북한의 어제를 보는듯하다.


나라를 걱정해서 쓴 소리하고 욕을 하던 애국자들은 북한처럼 찍소리도 못하고 감방가고 벌금형에 처해진다. 대기업가들은 회사가 국유화 위기에 처하고 군 장성들은 정부와 병사들 눈치 보기에 정신들이 없다.


역사를 보면, 공짜를 좋아하고 만민평등에 유혹된 국민은 민주투사가 아니라 무능한 노예로 전락되며, 그런 나라는 반드시 북한과 같이 망하는 것이 진리였다.



출처: 김태산님 페이스북

 

이제는 정신 좀 차리고, 현실 분별 못하고 바들바들 떠는 짓들을 잠시라도 멈추고, 현실을 제대로 보자.


만약 미국이 북괴의 미사일 시설을 폭격했다고 치자.

북괴는 차마 미국에 보복은 하지 못하고 대신 한국에, 그것도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제발 대화 한번 해달라고 애걸복걸 하는 한국에다 고사포질과 미사일질을 해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 그것이 미국 탓인가? 미국이 자국에 가해지는 핵미사일 위협을 봉쇄하기 위해 온갖 외교적·경제적 수단을 다 시도해보다가 그 어떤 수단도 먹히지 않자 최종적 수단으로 군사작전을 벌이는 것이 미국을 비난해야 할 일일까?


왜 다른 핵보유국에는 안그러냐고? 세계 어느 누구도 미국 본토를 위협하지 않으니까. 중국이 미국을 ICBM으로 공격하겠다고 선언한 적 있는가? 심지어 소비에트연방과 미국도 서로 공격을 하진 못한 상태에서 냉전을 벌였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북핵은 '맞아도 안죽는 형제의 핵'이라는 안일한 망상에 빠져있다고 해서, 세계 모든 나라들도 다 똑같은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할거라고 보는가? 절대 아니다. 착각하지 마라.


북한 정권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모두 북한 정권의 탓이다. 미국의 탓이 아니다. 미국을 탓하는 것은 마치 방탄복만 안 입었어도 총맞을 일은 없었을 거라는 식의 앞뒤가 완벽히 바뀐 황당하기 짝이 없는 헛소리다. 총 쏜 범죄자의 탓이지, 범죄자 소굴을 덮친 경찰의 탓이 아니라는 얘기다. 망상에서 좀 벗어나라.


지금 전 세계에서 북괴 편을 드는 나라는 오직 단 하나 뿐이다. 대한민국. 심지어 중국조차도 북한이 도발을 감행하면, 말로라도 경고성 발언을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북한이 무슨 도발을 해도, 그져 "평화 평화"만 부르짖으며 대화에 목매며 애걸복걸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제외한 전세계가 이 사태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고 또 이해하는데...


정말 분별력 있고 현실감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미국 전역에서 을지 프리덤가디언 훈련을 위해 대한민국에 속속 도착하고 있는 미 본토의 예비군과 현역장병들이 도착하는 공항과 항구 거리로 달려가 그 젊은 군인들을 반갑게 맞아주고 안아주고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한다.


어떤 분들은, 매년 일년씩 적금을 넣은 사비를 털어서 감사의 메달을 제작하여 미국으로 날아가 미 전역의 6.25참전 용사들을 발로 뛰며 찾아가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분들도 계신다.


"대한민국은 그대들의 용기와 희생을 결코 잊지 않는다"고 새겨진 메달을 걸어주고 안아줄 때, 자신들이 지켜낸 그 가난했던 나라에서 온 감사의 메달을 전달받는 노병들과 그 가족들은 감격에 젖어 행사장은 항상 눈물바다를 이룬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자유 민주주의를 향한 고마움과 자부심, 그리고 이를 지켜낸 숭고한 동맹과 우정을 확인하는 감동의 자리일수 밖에 없다.


애국심은 이런 곳에서 싹트는 것이지 고급식당 안 싸구려 잡담에서 싹트는 게 아니다. 정말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들이라면, 솔선수범으로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인류의 숭고한 가치인 우정과 신뢰와 희생에 대해 가르쳐줘야 한다.



출처: 이재홍 & Grace Choe님 페이스북

제2장 성령과 창조 / 에드윈 H. 파머


성령에 관한 우리의 연구는 항상 실제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단순히 하나님의 깊은 것에 대한 우리의 지식욕을 만족시키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의 위대함을 인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하며 우리의 영적 성장을 증진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이루도록 하려면 오직 성령을 그 모든 행하심에 있어서 분명히 아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마음이 성령은 누구며, 무엇을 하는가에 대해 혼미(昏迷)할 때, 우리는 성령을 완전히 영화롭게 할 수 없으며, 우리 안에서의 그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성령의 역사에 대해 고찰하려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성령의 역사를 신도들의 중생(重生)과 성화(聖化)에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이는 흔히 우리의 좁은 생각에서, 구원을 이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일로 생각함으로 인해 인간의 죄, 영원한 정죄 및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필요성, 이렇게 인간에서 시작하여 인간에게 그칠 때, 그런 결과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주로 인간 중심이어서 거의 구원이나, 기도, 성경 읽기, 안식일과 기도회에 관한 일들에만 관심을 두게 된다. 만일 우리가 이 입장을 취한다면 자연히 인간과 자신의 신앙 체험의 관점에서 성령을 생각할 것이며 그래서 우리 마음에서 성령의 행하심도 그것에 국한시키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적인 태도가 아니다. 성경은 인간으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시적하였다.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다. 성경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영원에서 영원까지 또한 주일과 주일 사이 엿새에까지도 그를 등장시킨다. 그는 인생의 어느 한 영역에 한정되지 않고, 만물 위에, 절대적으로 만물 위에 곧 우주 안에서 절대적인 통치자이다. 이에 따라 성령의 역사도 유독 성화에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그는 세상의 창조와 섭리, 계시, 성육, 대속, 성화, 그리고 심판 날까지의 사건들에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참여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 우리는 성령의 중생과 성화에서의 역사에만 우리 생각을 국한시키지 않으려 한다. 왜냐면 그것은 성령의 성화의 사역만을 논구(論究)함이 아니요, 그의 전반적인 역사를 논구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1. 창조에 있어서의 삼위일체의 역사(役事)

 

이 세상에서 삼위일체의 각 위는 독자적인 기능과 역사를 수행하신다. 예를 들면, 창조에 관해서는 아들이나 성령이 아니고 주로 아버지를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아버지나 성령이 아니라 그리스도시다. 예수께서도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외치심으로 스스로를 아버지와 구별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성화나 우리 안에서의 구원의 사역에 관하여 생각할 때는 아버지나 아들이 아니라 주로 성령을 우리는 생각한다. 그는 신자 안에 거하시는 분이다. 사실상 이러한 구별을 소홀히 한 때문에 어떤 이는 근심 걱정을 가지고 위로받기 위하여 보혜사이신 성령께 갈 줄을 모르고 아버지나 아들을 찾아간다. 동시에 삼위를 분리해서 생각지 않아야 되는 데도 일리가 있다. 우리는 주로 아버지를 창조주로 생각하지만 삼위의 근본적, 필연적 일체성 때문에 역시 아들과 성령께서도 창조하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아들임은 자명하나 어느 의미로는 아버지도 거기 함께 계셨다고 할 수 있으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예수께서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마음 가운데 거하는 분이 성령이심을 주장함도 충분히 성경적이나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에게 관하여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요 14:23)고 말할 수 있었다. 바울도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갈 2:20)고 주장할 수 있었다. 이 사실들은 삼위께서 각기 구별되시면서 또한 셋이 하나인 근본적인 일체성이 삼위일체 안에 있는 단순한 이유로 참(to be true)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문제를 특히 창조에 관한 문제를 생각함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삼위 간의 근본적인 통일성의 균형을, 우리가 전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이 균형을 우리 눈앞에 항상 유지해 둬야 한다. 우리는 삼위께서 각기 온전히 홀로 행동할 수 있는 듯이 분리하여 생각해서는 안 되지만, 단지 성경대로 그 각각의 특성과 사역을 살펴볼 수는 있겠다. 대체로 성경은, 삼위일체의 역사가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아들에 의하여 성령에 이르름을 보여 준다. 아버지는 창안하시고, 아들은 집행하시고, 성령은 완수하신다. 예를 들면- 구속(救贖)의 경우, 세상을 그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요 3:16) 분은 하나님이시다. 에베소서 1:3-5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하였다. 성경은, 선택의 사랑은 아들이나 성령으로부터가 아니고 "아버지께로부터"임을 명시하였다. 그리고 때가 이르러 구속을 이루신 분은 아들이시다. 세상에 육신으로 오신 분은 아버지나 성령이 아니고 아들이었다. 이와 같이 구속은 "아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이 구속을 성도들의 생명에 적용하고 완수하는 분은 성령이시다. 구속은 "성령에 이르러" 완성된다. 그래서 구속의 사역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에 의하여, 성령에 이른다"고 말할 수 있다.

 

구속에서 보는 바와 같은 구별을 창조 역사에서도 볼 수 있다. 창조된 우주도 아버지로부터, 아들에 의하여, 성령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성경은 삼위일체의 각 위께서 창조의 역사에 동일한 기능을 발휘하지 않으셨음을 가리킨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고전 8:6)라 했다. 만물의 존재가 아버지 "에게서" 그리고 아들로 "말미암아"인 점에 주목할지니 아버지는 만물의 근원이요, 아들은 이 재료를 사용하여 세상을 구성하였음을 뜻한다. 로마서 11:36엔 비슷한 모양으로 세 개의 다른 전치사를 사용하여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고 하였고, 히브리서 1:1-2도 같은 조(調)로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고 말했다. 요한복음 1장과 골로새 1장에도 세상은 "아들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창조되었음을 말했다. 이 외에 성경은, 우리가 곧 보게 되겠지만,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의 일을 완성시키시는 분임을 언급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의 저서 [성령]에서, 우주 창조를 왕국 건축에 비유하여 왕은 궁전에 필요한 재료를 제공하고 청부인은 실지로 건물 짓는 일을 하는 것 같다고 설명하였다. 즉, 창조에서 아버지는 왕처럼 만물을 무(無)에서 창조해 내는 만물의 근원이며, 아들은 그 청부인같이 그 재료로써 구성하시고, 성령은 아들이 성취해 놓은 것에 더 손을 보아, 그 잠세력(潛勢力)을 끌어내고 제 성질에 따라 발전하도록 함으로 완성시키신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이상의 모든 것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삼위 간의 통일성이 그 저변에 있음을 기억하고 각각의 활동을 분리시키지 말아서 어떤 의미로는 삼위 모두가 동시에 구속과 창조에 활동하셨다고 해야 한다. 이것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것은 하나의 신비이다. 그러나 성경적 계시가 허락하는 한에서 우리는 삼위의 역사에 관한 이해와 기술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2. 창조에서의 성령의 역사

 

우리의 사고(思考)를 위한 배경으로서 이만큼 삼위 간의 구별을 가지고서, 우리는 이제 창조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에 관하여 성경이 더욱 직접적으로 말하는 바를 살피기로 하자. 적어도 이 역사의 다섯 가지 다른 면을 얘기할 수 있다.

 

(1)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

 

성령의 역사가 무(無)에서 세상 물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그의 역사는 그 후에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창세기 1:1,2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즉, 무로부터의 우주 창조가 있은 후에야 성령께서 활동하셨음을 말한다. 이는 아버지께서 삼위일체 안에서도 아들과 성령의 "근원과 원천"이시며, 또한 무에서 물질적 우주를 창조하시므로, 그 "근원과 원천"이심을, 그리고 그 후에 성령께서 수면에 운행하여 이미 만들어진 것에서 일정한 질서를 수립하셨음을 뜻한다. 그는 세상을 창조하지 않고, 곧 알게 되겠지만 다만 세상에 이미 있던 잠세력(潛勢力)을 끌어내었고, 생명의 씨와 유아(幼芽)를 심었다.

 

(2) 시편 33:6과 욥기 26:13

 

성령의 완성하시는 일을 이번에는 하늘의 단장(丹粧)에 있어서 달리 가리킨다. 시편 저자는 33:6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라고 말한다. 앞 장에서 본 것같이 영은 숨을 뜻하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 의하여 불리어져 나왔다(발생). 그러므로 이 시편의 입 기운은 성령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 곧 여호와께서 하늘을 지으시고 성령은 하늘의 만군(萬軍), 곧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지으셨음을 뜻한다. 욥기 26:13은 성령께서 만군을 창조하셨다고 꼭 지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입김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여기 '단장'은 개역 성경대로임-편집자 주)라고 했으니 '단장하다'는 '곱게 하다', '빛나게 하다', '아름답게 하다'는 뜻이므로 성령은 하나님께서 이미 만들어 놓으신 하늘을 가지고 지금 우리가 모는 바와 같은 성좌(星座), 은하(銀河), 햇빛을 반사하는 유성(遊星), 여러 가지 별빛, 달의 그 크고 그 빛의 불변함, 그리고 빛나는 햇빛을 아름답게 꾸미었음을 우리는 추론할 수가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창세기 1:2이 성령께서 이미 창조된 세상을 완성시켰음을 시사한 것같이 여기에서 성령께서 하늘에 마지막 가필(加筆)을 던져 천체군(天體群)에 가능했던 온 영광과 미(美)를 이끌어 냈음을 엿볼 수 있다.

 

(3) 시 104편[A]

 

이 시편에서는 성령의 창조 활동의 또 다른 면, 곧 새와 물고기와 짐승에게 생명을 주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노래한 이 아름다운 시는 자연의 모든 현상을 하나님께 돌리며 그가 만물을 통어(通御)하시고 만물은 그에게 의존한다고 선언한다. 들나귀는 하나님이 만드신 샘에서 목을 축이고, 가축은 하나님이 자라게 한 풀을 먹으며, 새들은 하나님이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에 깃들며, 포효하는 사자가 그에게 먹이를 구하며 심지어 바다의 악어까지도 하나님께서 먹여 주시기를 기다린다. 크고 작은 모든 짐승과 생물들이 그들의 생존을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 이 시인은 29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요, 더 구체적으로는 성령이시니 이 시인은 30절에 이렇게 계속한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모든 동물 곧 잣나무의 황새들, 산의 산양들, 대해의 악어들 및 수많은 어류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 성령임을 지시한다.

그래서 성령은 창세기 1장과 욥기 26:13에서 본 바와 일치하게 성령의 창조 활동을 무에서 무엇을 창조하는 방향에서가 아니고, 이미 창조된 것에 생명을 나눠 주는 데서 생각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4) 시 104편 [B]

초목까지도 그 생명을 성령에게서 얻음을 암시한다. 방금 인용하였던 30절을 다시 살펴보자.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그 끝마디에서 땅을 새롭게 하는 분이 성령이심을 분명히 말하지는 아니하였으나 "주의 영(성령)이라고 언급된 본 절의 첫마디와 이 끝마디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곧 알게 되겠지만, 그가 사람에게와 또 동물에게 생명을 주시며 또한 대체로 그의 역사가 창안자의 일이 아니라, 완성자로서의 일인 것들로 보아 땅을 새롭게 하는 분도 역시 성령이시라고 추론하여도 안전한 듯하다. 그러므로 본 절의 의미는, 비록 인간의 타락 후 모든 창조물에 죽음의 씨가 거기 깃들어 있어 초목이나 짐승이나 사람은 결국 다 죽는다는 것이지만 그러나 성령의 계속적인 창조 활동에 의하여 이 파멸과 죽음의 과정이 제지되고 대신 생명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그는 새와 물고기와 짐승에게 생명을 줄 뿐 아니라 풀과 나무를 자라게 함으로써 땅을 새롭게 하신다. 생명을 지닌 씨앗은 제철을 따라 자라게 만들어졌으니 겨울의 죽은 것 같음이 지나면 새 생명이 싹터서 땅은 새롭게 된다. 이로 보건대, 초목의 생명까지도 창세 때나 지금이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산출되고 있다.

(5) 성령의 창조 역사의 절정(絶頂)

예나 이제나 인간의 창조 역사가 성령의 창조 역사의 절정이다. 엘리후의 말은 아주 분명하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욥 33:4) 물론 기운은 성령의 다른 호칭이니, 이 절은 인간 창조에서 성령의 이름을 두 번 지명하고 있다. 성령의 독특한 창조적 기능은 생명을 주는 것인 듯하며, 그가 반드시 질료(質料)를 창조하시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흙을 취하여 그 속에 생명의 기식(氣息)을 불어넣으신 것을 가리킨다.

창세기 2:7의 인간 창조에 관한 기사를 주목하면 흥미롭다. 사람의 창조를 "하나님이...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라는 말로 묘사하여 생기를 불어넣다는 말들을 사용하였는데 전자(생기)는 성령의 이름이요, 후자(불어넣음)는 그를 포함하였다. 욥기 33:4이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분은 삼위일체의 제삼위임을 분명히 진술하는데 거기에서 우리는 창세기 2:7도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고 지금도 주시는 분은 아버지나 아들이 아니고 성령이라는 분명한 암시를 준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을 사람으로서 창조하는 책임을 진 분은 성령이시다. 사람은 단순히 동물이 된 것이 아니요, 산 영혼(생령)이 되었다. 성령은 사람에게 그의 이성적, 도덕적 존재됨을 허락하셨다. 사람이 마음과 의지와 정서를 가지도록 그를 만드신 분이 그분이다. 욥기 32:8은 이것을 일부분 확증한다.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그리고 인간을 선하고, 정직하고, 거룩하고, 의롭게 만드는 분이 또한 성령이시다.

 

이상으로써 우리는 성령의 창조 역사의 다섯 가지 현저한 특성들을 살펴보았다. 비록 우리가 삼위일체의 그 일체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되지만, 그러나 각 위(位)에게 성경이 돌리는 독특한 기능을 돌릴 수 있고 또 돌려야 한다. 추운 겨울 밤, 우리가 캄캄한 하늘에 항상 낯익은 북두칠성, 힘센 사냥꾼인 빛나는 오리온 성좌, 또 가냘픈 묘성, 빨간 방랑자 화성이나 북십자성, 허연 은하수를 볼 때는 하늘을 단장시킨 성령을 찬양하자! 봄이 와서 밀이 싹트고 오랑캐꽃 피고, 산딸기나무 꽃이 필 때에는 지면을 새롭게 하시는 이가 성령임을 기억하자. 농어를 잡고 들에 뛰노는 사슴을 볼 때, 또 빨간 대머리의 딱따구리를 지켜볼 때는 시 104:29, 30을 기억하라.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우리가 자랑스러운 엄마, 아빠로서 내 아기의 첫 울음소리를 흥분 속에 듣게 될 때 앞에 언급한 엘리후의 말을 상기하라.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영)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이런 것들은 성령의 활동의 결과이다. 그러니 이들을 인하여 우리는 그에게 영광을 돌림이 마땅하다.

 

 

3. 재창조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

 

여기 또한 빠뜨려서는 안 될 성령의 마지막 창조 활동이 있으니 그것은 중생(重生)과 성화(聖化)에 있어서의 그의 재창조의 역사이다. 이는 다음 장들에서 더 충분히 논하겠지만 창조에 관한 성령의 역사의 전반적 묘사를 위하여 여기에 말하지 않고 지나갈 수 없다. 성령께서 인간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고 또한 그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지식을 주셨으나 인간은 자유 의지의 남용(불순종)으로 그의 본래의 올바른 높은 신분에서 떨어졌다. 그는 영적으로 훼손되고, 흠이 나고, 상하고 찢기고, 필경 죽게 되었다. 그는 참 지식과 거룩한 성향을 상실했다. 성령께서 그를 지어 주신 원래의 형상은 이미 파괴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러한 비참한 상태에 버려두지 아니하셨다. 애당초 인간을 의롭고 거룩하게 만든 그분, 성령으로 하여금 사람을 재창조하셨다. 성령은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다(고후 5:17). 그가 사람을 새로 만드시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엡 2:10)로 지으셨다. 그가 인간 속에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시고 지식에까지 새롭게 함을 입은(엡 4:24, 골 3:10) 새 사람을 심음으로써 그를 새롭게 하셨다.

 

성령에 의한 인간의 처음 창조와 이 재창조 사이의 유사성(類似性)을 주목하라. 성령은 아담에게 흠 없는 의를 주셨다. 그와 같이 재창조에 있어서도 성령은 인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가질 수 있게 하셨다. 이것은 아담의 의보다 더 좋다. 아담의 것은 잃어버릴 수 있었고, 실제로 잃어버린 데 비하여, 이것은 잃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처음 창조에서 성령이 인간을 인격적으로 거룩하게 만든 것같이 두 번째 창조에서도 성령은 인간을 중생과 성화에 의하여 인격적으로 거룩하게 지으신다.

 

또 주목할 것은 세상의 창조에 있어서, 성령께서 무에서 창조해 내지 않고 혼돈하고, 공허하며, 생명이 없고 정체한 흑암의 땅에 "수면에 운행하심"으로 생명과 질서와 미를 부여하셨듯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창조에 있어서도, 죄 많은 인간을 멸하고서 무에서 새 사람을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전혀 새 영혼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 창조에서처럼, 이미 존재하는 허물과 죄로 죽은(엡 2:1) 것을 취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령한 생명을 나눠 줌으로, 사람의 그 영혼 안에 새 성향을 주어 그로 처음 창조 시와 같이 거룩하고 의롭고 진리로 충만되게 하신다.

 

마지막으로, 창조 시에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음으로 산 영(생령)이 된 것같이 또한 재창조에서도, 성령께서 그 생기를 그리스도의 교회 위에 불어넣음으로 사람이 영적으로 살게 된다.

 

그러고 보면, 성령의 창조의 역사는 영육(靈肉) 양 영역에 걸쳐 포괄적이다. 그것은 특별한 방법으로 창조 시에 시작해서 인간의 재창조까지 포함하여 오늘까지 계속된다. 이 책의 목적은 성령께서 처음으로, 또는 항상 우리 안에서 의와 거룩함을 새롭게 창조하여 주는 창조주이심을 우리 모두가 알게 되는 데 있다.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 발췌(33-46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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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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