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NASA가 외계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SNS로 접수받는다고 하고

일반인들조차 기독교의 휴거를 외계인이 역이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영화계에서는 1902년 이후로,

태양계 밖의 진보적 외계 문명의 가능성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영화 산업을 통제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시도해 왔다.

다윈의 무신론에 기반을 둔 진화는

"우리는 유일한 것"에서 "우리는 혼자만이 아니다"로

대적의 아젠다를 대대적으로 구축해 나갔다.


하나님의 아젠다를 깨닫는 중요성과 함께 대적의 아젠다도 알고 있어야 한다.


영화 프로메테우스가 2012년에 개봉되었을 때,

그것은 성경의 창세기 개념에 대한 진화의 직접적인 공격이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류의 기원을 외계 생명체에서 찾는 탐사 영화다.





창세기 1장의 인류는 유전적 실험이 아니라 오리지널 창조다.


반면 창세기 6장은 외부 요인에 의해 더럽혀져 나타난 네피림은

땅이 더럽혀진 증거로 하나님은 땅의 모든 생명체를 쓸어 버리셔야 했다.


부패와 왜곡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희대의 고대 에일리언(Alien)을 만들어냈다.


불행하게도 아담의 실패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을 가져왔는데

유일신에 대한 지식은 불완전한 기억이 되어 다음 세대로 전수되었다. 


그 결과로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첫번째는 오리지널 기억이 고대 국가들의 신앙으로 이어졌다.


둘째는 이런 신앙들이

오리지널 기억에서 왜곡되어 국가간에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고대 수메르나 이집트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발견되는

신들의 개념이 성경과 유사성을 가지면서도 변질된 모습을 보이는 이유다.


신앙체계를 타락시키고 오리지널 창조주 하나님은 모독하기 시작하였다.


세계 각국의 정부들과 단체들이

UFO와 외계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외계 생명체인 에일리언을 포함하는 영화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ET, 스타워즈, 어벤져스, 베틀십, MIB, 존 카터, 트랜스포머,

인디펜던스데이, 프리메테우스, 에일리언, 그린랜턴, 발레리안...)


처음에는 공상이었지만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NASA는 천문학적인 증거라며 지원해왔고

외계인의 존재는 기독교의 토대를 무너뜨릴 수 있는 증거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수천 종의 외계종족이 평화롭게 살고 있는 28세기의 우주 영화>


더 나쁜 것은 외계인에 의한 납치 주장의 증가다.


미국의 UFO 전문가 버드 홉킨스가 지난 30여년간

외게인에 의해 납치되었었다고 주장한 사람들을 연구를 발표한 이래 납치 주장이 증가해왔다.


이러한 현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이 외계인의 존재를 믿게 되거나

성경의 메시지를 훼손하거나 최소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사라지는

휴거사건에 대해 외계인에 의한 납치를 주장할 근거를 만들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가서 외계인의 납치에 대응할 세계적인 지도자를 원할 가능성도 있다.

현재는 이런 불확실한 가능성을 믿고 싶은 그리스도인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특정한 때, 세계와 언론이 한 뜻으로 일치된

시대정신을 추구할 때 그에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다.


대중속에 한 개인이 남다른 의견으로

홀로 선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현실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출처: 카이로스 / ars (acoloje)

    청포도 향기 최송연 자고 하지 말거라 아직은 설익어 샛파란 너 찜통 불볕더위 후끈거리는 여름, 모진 시간 지나는 동안 한없이 흘린 땀방울이, 고달픔이 알알이 영글어 그윽한 향기 흩날릴 제면 그제야 참 진가(眞價) 드러나리니


        청포도 향기
                        최송연

            자고 하지 말거라
            아직은 설익어
            샛파란 너

            찜통 불볕더위
            후끈거리는 여름,
            모진 시간 지나는 동안

             한없이 흘린
             땀방울이,
             고달픔이

             알알이 영글어
             그윽한 향기 흩날릴 제면
             그제야 참 진가(眞價) 드러나리니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해요, 당신을...  (2) 2017.08.30
내 마음의 별빛  (2) 2017.08.26
때로는...  (0) 2017.03.15
봄이 오려나 봐요  (0) 2017.03.05
눈을 들어  (0) 2017.03.02

헌법에 '동성애 옹호' 조항이 포함되는 날...


이러한 개헌은 ‘동성결혼 합법화’ 뿐 아니라, ‘일부다처제·일처다부제·다부다처제’ 등도 허용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제공할 것이다.


1.

개정될 헌법에 동성애 조항이 포함될 것인가. 이것이 현실화 된다면, 동성애 차별금지법 제정 이상의 치명적 효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동성애·동성혼 개헌 반대 전국교수연합’ 소속 교수들은 8월10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동성애와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헌법 개정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갖기도 했다. 이날 회견에는 223개 대학 2,204명의 교수들이 이름을 올렸다.


2.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는 지난 1월부터 헌법 개정안 쟁점을 검토 중이며, 국가인권위원회는 6월26일 자체적으로 만든 개헌안을 발표했다.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에서 합의된 내용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시한 개헌안 중 가장 큰 논란은 현행 헌법 제36조 ‘혼인과 결혼 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兩性)의 평등을 기초’하고 있다는 내용 중 ‘양성(兩性)’을 삭제하고 ‘성 평등’ 또는 ‘평등’으로 바꾸려 하는 점이다.


양성평등의 양성은 남성과 여성으로, 생물학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성 평등에서의 성, 이른바 ‘젠더(gender)’는 생물학적 성이 아닌 사회적, 주관적 성으로서, 자신이 결정하는 개념이다.


예컨대 미국 페이스북에서는 가입자가 50개까지 자신의 성을 맞춤형으로 정할 수 있다. 혼인과 결혼 생활이 ‘양성의 평등’이 아닌 ‘성 평등’ 또는 ‘평등’을 기초할 때, 결과적으로 동성애자·양성애자·성 전환자 등의 결합 형태까지 법적인 혼인과 가족으로 인정된다.


이러한 개헌은 ‘동성결혼 합법화’ 뿐 아니라, ‘일부다처제·일처다부제·다부다처제’ 등도 허용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제공할 것이다.


3.

또 다른 쟁점은 현행 헌법 11조 1항에 있는 차별금지 조항에 ‘성적 지향’을 포함시키려는 시도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만든 개정안에는 ‘성적 지향’이 명시적으로 들어가 있다. 헌법개정특별위원회의 회의록에는 ‘성적 지향’을 명시적으로 넣거나 차별금지 사유를 나열한 마지막에 ‘등’을 넣어, ‘성적 지향’이 포함되는 것으로 보자는 의견에 합의한 것으로 나온다.


‘성적 지향’은 ‘동성애’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성적 지향’이 차별금지 사유로 포함되면, 동성간 성행위에 대한 반대 표현과 일체의 논의, 토론 자체가 금지된다. 동성애 비판은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된다.


초·중·고교에서 동성애 성교육이 의무화돼 청소년 동성애는 큰 폭으로 확산될 수밖에 없다. 개헌을 통해 국가인권위원회를 헌법기관화하려는 시도도 행해진다. 국가인권위원회는 동성애를 옹호하고 북한 인권 문제는 외면해 끝없는 논란을 빚어 왔다.


전 세계 220여개 국가 중 국가인권위원회가 있는 곳은 110여개국이며, 그 중 국가인권위원회를 헌법에 규정하는 나라는 총 42개국에 불과하며, 대부분 아프리카·중남미 후진국들이다.



출처: 리버티헤럴드 / 김성욱 대표

“크리스천들이 속고 있다”

(이 시대 크리스천들이 꼭 봐야 할 영상)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막 3:35)


인간의 영혼은 육체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인간의 영혼은 육체와 분리된 상태에서도 보고듣고생각하고기억할 수 있습니다그렇다면이 주장에 대한 과학적인 증거가 있을까요그렇습니다인간의 영혼이 육체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존재 할 수 있다는 과학적이고 경험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그 증거는 임사경험(Near-Death Experience)입니다죽음을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의술이 발달되기 전에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경우가 드물었지만요즘은 심폐소생술이 매우 발달되어 있습니다그래서 사람들 중에는 임사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임사경험이란 심장마비 또는 뇌가 완전히 죽은 상태에서 다시 의식이 돌아온 경험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장이 멈춰서 숨을 쉬지 못하고뇌파가 전혀 뛰지 않는 상태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러시아 과학자 네고브스키
(Negovskii)에 의하면사람의 심장이 멈춘 후 5분에서 6분이 지나면다시 소생하지 못한다고 합니다그래서 그것을 의학적으로 죽었다고 판정합니다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심장이 멈춘 후 6, 10, 30심지어 3시간 만에 의식이 돌아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몇 명이나 이런 임사경험을 했을까요약 30년 전미국의 한 갤럽이 조사한 통계자료에 의하면약 23백만 명의 사람들이 임사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이 숫자는 그 당시 한국 인구의 절반에 해당합니다
. 30년이 지난 지금은 거의 한국 전체 인구와 맞먹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임사경험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러니까사람의 심장이 멈추고 뇌파가 완전히 멈춘 상태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이처럼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수 몇 명만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대중화된 경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흥미로운 사실은 임사 경험을 한 사람들 중에서 약 40%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동안 뭔가를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장이 멈추고 뇌파가 멈춰서 의학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다시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 일어난 주변 상황들을 모두 다 보고 기억해서그 사건들에 대해 정확하게 보고하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어떤 사람이 심장마비로 죽어서 약 30분 후에 다시 살아났다면,그 사람은 누가 자기를 구했고어떻게 병원에 실려 갔으며병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해서 모두 다 말할 수 있습니다심장이 멈추었고 뇌파가 완전히 죽은 상태에서 그 모든 정황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철학자 게리 하버마스 박사가 쓴, ‘죽음 이후’(Beyond Death)라는 책에 보면다음과 같이 실제 케이스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심박정지(cardiac arrest)로 고통 받은 11살 소년이 있었다그가 병원에 있을 때적어도 20분 동안 심장 박동이 멈추었다그 시간 동안 소년은 병실 천장에서 자기의 몸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대화 내용과 행동을 다 듣고 관찰할 수 있었다그 소년이 회복된 후에 그는 정확하게 응급처치의 과정을 설명할 수 있었고응급실에 있는 장비의 위치와 색깔들을 말할 수 있었다또한 병원 직원들의 성별과 심지어 그들의 대화마저도 그대로 다 보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학적 통계자료는 더 많이 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뇌가 죽었고 심장이 멈춰서 죽었는데 어떻게 주변상황을 모두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요그것은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 분리된 상태에서 도 영혼은 계속적으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증거 해 주는 것입니다.

나의 영혼이 육체와 분리된 후에도 계속해서 살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기억할 수 있다는 과학적 통계자료는인간의 영혼은 인간의 뇌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또한 육체가 죽은 후에도 영혼은 계속해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이러한 증거는 모든 것이 물질로만 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의 뇌가 죽으면 영혼도 죽는다고 주장하는 물리주의자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육체 덩어리와 신경조직체로만 이루어진 물질이 아닙니다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인간의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계속해서 살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면,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예수께서도 요한복음 6장 27절에서너희는 썩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우리에게는 이 세상뿐만 아니라죽은 후에도 삶이 있습니다우리가 이 세상의 삶에 최선을 다 하면서 살아야 하겠지만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섰을 때부끄럽지 않는 올바른 삶영원한 삶의 목적을 위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오늘 우리는 우리 삶의 목적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마치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 큰나무교회 박명룡 목사 - 

출처: 갓톡

제 목 : 어느 기도원의 희얀한 역사....입신 ,꿀단지, 영서 ,방언 ,치료
번호 : 217     /     조회 : 63     /    작성일 : 2011-05-30 [20:24]
작성자 : 개혁이   


어느 기도원의 희얀한 역사




기도원안에는 0시 예배를 위해
20여명 정도 성도들이 둘러 앉아
박수를 치며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
잠자야 할시간에 직장 마치고
왔으니 오죽 피곤 하겠는가 ?
표정들이 밝지가 못하고 지친 모습이 역력 하다 .
나와 집사가 들어 서니 일제히 시선을
내게로 돌린다 .
여자목사가 반가워라며,
앉아 있는 성도들에게 이런 애기를 한다 .
"오늘 귀하신 분이 한분 기도원을 방문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큰 은혜를 주실겁니다 "
할렐루야! 아멘 !!

언제 봤다고? 내가 귀하신 분이란다 .
부억에서 차를 내오는데 "국화차"를 내온다 .
"전도사님
이차는 아무나 드리는게 아니라
전도사님 처럼 귀하신 분만 드리는 겁니다 "
귀하다고 하니 싫지는 않았다 .
하기사! 하나님의 자녀는 모두 귀한 존재 아닌가?

그리고 집회가 시작된다 .
입신 ,꿀단지, 영서 ,방언 ,치료
여러 애기를 거집어 낸다 .
자기가 능력자라는 것을 과시 하는것이다 .
그러니 앉아 있는 너희는 까불지 마라
난 이런 소리로 들었다 .

여자 목사가 대뜸 이런 애기 한다 .
"성도님들 !
제가 보니 김00 집사가 요새 0시 기도회도
참석안하고 순종하지 않는데 김집사
속에 마귀가 들어 갔읍니다 .
우리 하나님께 김00 집사속 마귀를
뻬달라고 기도 합시다 .
" 전도사님도 같이 기도 해주세요
넹! 그 집사속에 들어간 마귀를 빼달라고 기도 .."
황당한 시츄에이션이 벌어진다 .
여성의 입에서 마귀 ,귀신 애기가 거침없이
나온다 .
그러잖아도 영적으로 약한 성도들이
마치 여자목사가 마귀와 귀신을 보듯이
도통하니 애기를 하니
얼마나 두렵고 떨리 겠는가 ?
주눅 들어 낛시바늘에 코꿰인 물 고기처럼
끌려 다니겠구나 생각을 한다 .
내가 느끼기에 그여성은 그들에게
는 교주나 다름이 없었다 .
귀신아 나가 !
방언이 이어 지며 통성기도 가 이어진다 .

기도원에는 방이 여럿 있었다 .
한 방은 민족재단이라 하여 24시간
나라와 민족을 위해 돌아가며 기도 하는
기도굴 이라 한다 .
방언 소리가 문 틈을 넘어 내귀에
들린다 . 좀후에 문이 열리더니 ,
한 여성이 종이에 지렁이 기어가는 글씨를
써가지고 나온다 영서를 썼단다 .

그종이를 목사에게 가지고 가니
그목사가그글을 방언으로 읽는다 .
"와쌈바 와르르 씨우랑 부루랑 와카카
와칸나세 ..."
방언을 해대더니 통변을 해준다 .
" 하나님이 말씀 하시기를 집사님 더열심히
기도 하랍니다 응답 하셨습니다 "
아멘 !
난 아무리 봐도 유치원생 아이들의
디나 마나 쓴 지렁이 처럼 된 글인데
도통한 그녀는 하나님의 글 이라고 풀이를 한다
와칸나세 !통변의 애기를 듣고 그여성은
연신 허리를 굽이며 감사를 한다 .
여자목사가 자랑을 한다 .
성도들 천국으로 입신을 시켜 주고
천국 서 꿀 단지를 받아 먹인단다 .
천국서 꿀단지를 받아 먹은 성도가
많다고 자랑 한다 .

한여성이 실신해 누워있으니
천국 보이냐 !꿀단지 받아 먹으라 "
소리를 해댄다 .
자기가 모 여고아이들 4명을 천국 구경을 시켜
주었고 꿀단지를 먹였주었다고
황당한 애기도 한다 .
또 한여성이 방언을 하면 목사가 통변을
해준다 .예언 기도를 해준다 .
대한민국의 은혜는 그곳에서
다 이뤄 지는것 같다 .

둘러앉아 있는 남자던 여자들에게
자기눈을 보라 한다 그리고
"귀신아 나가 ! " 하면 하면 자빠진다 .
여자의 무서운 세치혀에 나약한 성도들은
노예가 되어 있었고 나랑 같이간
집사도 서서히 여자의 딸랑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
그렇니 여자가 두렵지 않겠는가?
능력의 여종 불의 여종이라 소문이 났다 .

집회가 끝난후,
나를 보고 내능력이 어떠냐고
으쓱하며 씩 웃는 여성을 성도들
앞에서 불렀다 .

난 ,성경을 꺼내 들었다 .
여성의 표정이 벌레 씹은은 표정으로 떨드럼하다
영서가 어디 있는냐 .
영서가 어디 있는냐 ?
성경66권외에 하나님 다른 서신을 준것이 있냐?
새로운 계시가 어디 있느냐?
난 ,영서의 창시자 이00 씨를 잘안다 .
남한산성에 기도원 차려놓고 교주노릇
하다가 어느 여름날 ,기도원을 오르다 .
계곡에 물담그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는것을
제자들이 우리 목사님 3일만에 부활 한다고
기도원 본당에 눞혀 놓고 기도 했는데 3일이
지나도 부활은 커녕 송장 썩는 냄세 가
고약해 장사치 룬 사건을 안다 .
조직신학의 대부 이원석목사님 께 들어서
잘안다 .
다니엘5 장14절 "메네메네 대바 우바르신"
하나님의 손이 나와서 쓴 글이 영서라고 한다 .
하나님의 손이 나온 사건은 우리가 너무잘안다
우린 그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 된다 .

지금도 하나님의 직접 계시가 있나요?
성경이 필요없겠네요
하나님은 성경66권 이외에 다른 말씀을 주시지
않았어요
그리고 당신 계단 내려 오는데 목사안수받
을때 구름기둥이 비사진에 찍히고
이슬이 내리던데 이거 사기 치지 마세요 .
사실 그렇다 사진을 찍을때 조작하기는 너무 쉽다 .
난 그여성의 그밤에 잘못된 부분 10가지를
거론하며 조목조목 따져 들어 갔다
방언 에서부터 ,통변, 천국 입신, 꿀단지 사건 ..
마지막엔 당신이 행하는 행위는 잘못된것이다 .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
성도들 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게 한다 .
이러다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신 이상이
올것이요
누가 책임질것인가 ? 당신 책임이다 .
그랬더니 인상을 퍽쓰면서 문을 쾅닫고
자기방으로 들어 가는것이다 .
귀하신 분에게 댄통 당한것이다 .
난 같이간 집사에게 이런애기를 했다
집사님 정신 차리시오 이런 신비적인 곳에
자꾸 끌려다니면 집사님 힘이드니
가지 마시오
얼 마후였다 .
그여성에게 안수 받고 천국까지 다녀 왔다는
고등학교 여학생 하나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
그아이는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다 .
전도사님 제동기 애들 3명이 그기도원서
안수 받고 정신이상이 되었어요 어쩜 좋아요 ?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충격을 받으면
정신 이상이 오게 된다 .
아이를 몇일 만나 위로해 준다 .

몇년후 동역자 교회를 방문하여 뉴스를
듣는데 그기도원이 뉴스에 나오는 거다 .
여자목사가 안찰 이라는것을 해주다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 결국 그여성은 감옥에
들어 가게 된다 .
극단적 감정적 ,신비주의가 한국교회에
끼친 해악이 정말크다 .
로망스를 몰고 삼양동길을 지나는데
20대 초반 정도 되는 처녀가 산발을 하고
멈춰 중얼 이며 기도를 한다 .
하나님 아버지 ! 뭐시라 뭐시라 두팔 내들고
가도 하다가 갑자기 웃어 제낀다 .

누가 저렇게 만들었나 ?
난 가르치는 자들이 잘못이 크다고
생각이든다
감당 하지 못하면 저지경 되는거다
지난날 , 그기도원 그여성이 생각나며
한국교회 성도돌의 마음을 훔치는
잘못된 가르침은 없어져야 한다 생각이 든다.
모기도에 목사들이 몰려간다고 한다
웃음을 웃게 하고 대굴대굴 구르며 얍! 해서
자빠트리는데,
그걸 배우러 다닌다고 한다 .
예수님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
최고의 기쁨 ,행복 ,평안을 주러 오신 것이다 .
신앙생활은 두려움이 아니다 평안이다 .


목사닷컴... 개혁이

 

[자료 출처] : 추수군대

간만에 데이비드 오워의 홈피를 방문 하였다. http://www.repentandpreparetheway.org/


 

 반지 밑의 링크 들을 눌러보니 전부 불통이었다...

허허 왠일일까?

그러려니 하면서.....넘어가고...밑부분에 보니

3일전에 11월 11일에 올라온 따끈한 유튜브 동영상이 링크에 올려져 있길래 한번 클릭해 보았다.

"휴전선 총격예언 성취된 예언" 오워의 예언이 이루어 졌다는 글에

눈이 번쩍 뜨였다.




바로 빨갛게 내가 네모를 친 부분이다

그래서 유튜브로 들어갔다.

아래가 그 영상으로 복사해 올렸으며 원본은 http://www.youtube.com/watch?v=ivdIhvvCJmw 이다

아래가 캡쳐한 사진이다.

 이태희 목사님께서 앉아 계시고

그 옆에는 좀 색?다른 분이 앉아 있는데 오워 박사다.아마도 한국에 있을때 식사중 담화 장면 같다.



본론부터 들어가면 위 사진에서 밑에 빨간줄로 한정한 부분을 번역해 보기로 한다.

2010년 11월 11일 에 chitywa라는 등록자가 올렸으며, 내용은

오워 선지자가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 엄청난 예언이 주어졌는데

2010년 10월 9일 한국 방문시 받은 그 예언이 Fulfilled,즉 성취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언은 바로 10월 29일의 총격사건 이라는 것이다.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위의 장면은 10월 9일 한국을 방문했을때의 다시 예전과 같은 예언을

말하는 장면으로 전혀 2발의 소총사건과는 상관없는 전쟁 그자체 예언이다.

그럼 여기서 과연 그가 봤다는 예전 한국을 방문한 환상을 통한 한국에서의 예언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아래는 검색을 통해 대충 어느 모 블로그가 눈에 띄길래 가져온 글이다.

--------------------------------------------------------------------------------------------

""

저는 항공모함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미사일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미사일이 군함을 격추시켰습니다. 그 미사일 모두가 항공모함에 떨어진 것인지 몇 개만 떨어지고 바다에 떨어진 것인지는 모릅니다. 항공모함의 관제탑에 불이 붙었습니다. 이 항공모함은 완벽하게 파괴되고 바다에 가라 앉았습니다.

 

이 일 후 다음 날 밤에 예수님께서 저에게 찾아오셔서 무엇이 남한 땅에 닥칠 것인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군용 트럭을 보았습니다. 미사일을 장착한 트럭이였습니다. 그리고 미사일을 발사되었습니다. 환상 가운데 제가 현장에 참여하여 그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장소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제가 똑같이 느낍니다. 그래서 제가 이 트럭에서 미사일이 발사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미사일이 발사된 후 미사일이 남한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미사일은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추었습니다. 그 목표물은 전기를 전국적으로 배부하는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그 미사일이 이 시설물에 떨어졌습니다. 시설물이 폭파되었을때 제가 보기에는 이 나라 안에 여러 군데의 변압기 같은 것이 보였습니다. 그것이 마치 전기의 전압을 바꿔주는 변압기 같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엔 이 상황은 역사적으로 아주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이 나라의 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도망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 일이 있은 다음에 나라의 전문가들이 변압기를 살피고 열고 고치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날 밤에 주님이 저를 찾아오셨습다. 예수님께서 저를 차에 태우시고 제가 남한의 도로에서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운전을 하면서 제가 탱크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길에 탱크들이 많이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여쭤보았습니다. "주님 왜 이렇게 길 위에 탱크가 많습니까?"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기를 "이것은 전쟁이다. 전쟁이 일어났다. 이 백성들에게 가서 회개하라고 전하라."

 

<2010년 6월 28, 29일 설교에서 전한 예언>

 

 "한국 교회에 너무 많은 거짓 선지자의 거짓 메시지가 있습니다. 음란과 동성애, 낙태, 거짓말, 자위행위, 음란한 옷차림이 있습니다. 돈을 너무나 사랑하는 것과 예수 믿으면 형통한다는 번영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닌 돈과 축복에만 집중시키는 변질된 복음) 이 같은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트럭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한국에 있는 전기 시설물을 폭발시키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국가 전체에 전기 전력에 문제가 생겨서 전문가들이 변압기들을 점검하는 것을 보았고, 길 위를 달리는 탱크들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공포 가운데 있었고, 모두가 그들 자신의 생명을 구하려고 뛰어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한국인들에게 회개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첫째로 들수 있는 것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미사일 이다.

둘째

미사일로 인한 군함 격침,

다음은 지상의 상황에 대한 예언

셋째

미사일을 장착한 군용트럭(즉 다련장 로켓포를 장착한 군용트럭을 말함), 거기에서 셀수 없이 발사된 미사일이

한국에 떨어지고 전기시설물이 폭파된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이다는 주님의? 말씀과 함께 전쟁이나서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피난),

탱크가 길위를 달리는 모습등.......

 

이외에도 있을 것이나 일일히 찾기가 그러니 대충 정리 합니다.

다음은 동영상을 살펴가면서 그들이 무엇으로 인해 이러한 그가 한국에서 본 무시무시한 전쟁환상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유튜브에 떡허니 올려놓고 과장광고를 하고 있는지 본다.

 

 


위의 사진에서 보면 휴전선에서 10월 9일 한국, 서울의 장면 같다,상암집회차 왔을때 영상일것임.

총격이 올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다는 자막이 나왔다,

그런데 이것은 그 사건과 전혀 상관 없는 새빨간 거짓말임이 드러난다

오워는 가끔 있어온 휴전선 총격을 예언한것이 전혀 아니다.

그는 지금 그가 전에 방문해서 쏟아낸 그러한  똑같은 전쟁예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영상을 들어보면 - 50초 부분 부터다...오워는 어떤 설명을 하고 있냐면

그의 말이다...

two days ago I was sleeping here, the Lord took me to the dream ...and then hellfire fired from.....hellfire~hellfire~

in the dream ......because of hellfire...there's nowhere to hide myself.......which means very danger......

대충 위와 같이 편집이 되어 오워는 말한다...이것도 교묘하게 편집된 부분이다.


여기서 의문점을 지적해 보고자 한다....

우선 오워측이 올린 영상의 자막에 관한 것으로

영상에서 지적하는 휴전선 총격사건은 10월 29일 발생한 것이다.

http://imnews.imbc.com/replay/nwtoday/article/2729135_5782.html

문화방송 뉴스다.

그것도 달랑 두발만 발사 한 것이고 우리는 교전규칙상 3발의 응전을 했고

나중에 이것은 도발이 아닌 우발로 잠정 결론 내려진 사건이다.

http://stoo.asiae.co.kr/news/stview.htm?idxno=2010110508522549209

그리고 천안함관련 사진과 영화속사진 삽입.

그러면 여기서 그가 말하는 내용을 번역해 봅니다...

 

이틀전 나는 여기서 자고 있었다, 주님은 꿈에 나에게 오셨다.... (중간에 편집이 됩니다)..

그리고 나서 헬파이어(HellFire) 헬 파이어...꿈에서...

이 헬 파이어 때문에 나는 숨을 곳이 없어 도망다녔다...이것은 아주 위험한걸 말합니다.....


보셨듯이 이 헬 파이어 라는 용어는 불처럼 쏟아지는 포탄..집중포화를 말하는 용어다....오워가 영상에서 분명 헬 파이어라고 한다...

그런데 10월 29일에 일어난 사건은 무언가 shoot out..즉 소총사격이다...

헬파이어와는 차원이 다른 용어인 것이다.....

숨을 곳이 없어 도망다닐정도로의 집중포화가 어찌 소총사격과 비교될수 있으랴..그것도 겨우 달랑 따쿵 따쿵 2발?

이러한 거짓말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어져서 다음과 같은 화면이 떡허니 뜬다.....

 


 

남북한 DMZ 사이의 휴전선 총격전 예언 ..뚜둥...WAS FULFILLED

정말 실소를 금할길 없는 사기다 이건 ...그렇지 않은가?

포탄이 쏟아져 피할곳이 없어 자신도 꿈에서 도망갔다는 장면과 어찌

우발적으로 ...가끔 이전부터 있어온 단 2발의 총격사건을 거기에 대입시켜 허위 영상을 편집한건지..

정말 웃기지 않은가?....군함이 침몰하고 미사일의 집중포화속에 발전소같은 게 불타고

탱크가 길을 가고 사람들은 피난가고, 전쟁이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시고 .....

이런 예언들은 어떻게 하고 ..그리 궁색했단 말인가?

우발적 사건으로 결론난 단 두발의 총격으로 , 한국에 와서 마구 쏟아낸 그 무시무시한 예언을

싹 입닦으려는 시도인가?......

그리고 더 가관인 화면이 이어진다...

각종 외신들의 화면을 캡쳐해서 비무장지대 총격 뉴스를 보여준다.







또 거기에 11월 3일의 북한 어선에 대한 경고 사격기사를 띄운다

http://news.mk.co.kr/v3/view.php?year=2010&no=597342

아래 화면

 


그리고 더 황당하게도

영화속 전쟁장면을 화면에 넣고 있다.

 


또한 천안함 사건을 떠올리는 사진이 영상속에서 나온다.

그러나 정상적인 해군 훈련장면 같다....아래....




그리고 결정판으로 천안함 장례식 사진인지 , 아니면 영화속 장면인지...화면 상태로 봐선 영화장면 같기도 하고..

불분명한 장례식 사진을 올리고 있다....오워가 다녀간후 남북한 총격으로 죽은사람이 있던가?

한명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이런 장면을 영상에 넣었을까?...대단히 불쾌하며...사기성이 농후하지 않은가?




그리고 위의 사진을 마지막으로 장엄한 음악과 함께 영상이 끝난다......


--------------------------------------------------------------------------------------------------------------------


결론

이것은 그가 10월 9일 방문 했을때 위의 영상에서 , 예전 환상과 똑같은 것을 말하는 장면으로

전혀 10월 29일의 우발적 소총사건과는 말이 맞지 않는 과대포장,허위 광고이다.

참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어 웃음 밖에는 안나오는 일이다....

대한민국 기독교인들을 흔들었던 데이비드 오워의 정체가 이 영상 하나로 이미 판명이 난것이라고 본다...

그간 데이빗 오워측이 올린 영상의 진실성을 의심해 왔던 바, 이것으로 그 거짓성이 드러난것이라고 본다....

전쟁이 날것이며 군함에 미사일이 쏟아져 침몰하고 ,,다련장 로켓포 트럭들이 불을 쏟고

(자신도 영상에서 분명 HELLFIRE 라고 하지 않는가? 그가 와서 쏟아낸 예언들은 이미 이너넷상에 쫙 퍼져 있다.)

비록 편집이 되었더라도 숨길수가 없지 않은가?

소총 두발 따쿵 거렸고 아무런 인명 피해도 없었으며, 결국 우발적인 총격으로 결론 내려졌고,

현재까지 한국은 오워가 와서 쏟아낸 그어떤 예언의 징후도 결과도 없다.

그런데 3일전 데이빗 오워측은 갑자기 이 영상을 유튜브에 올려서 과장허위광고를 하고 있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이란 말인가?

스스로 거짓선지자요, 자신의 예언의 비실현됨에 대하여, 예언에 대한 짜맞추기식 편집과 거짓 사진까지 곁들여

자신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하는 것을 드러내야만 할정도로 오워는 지금

궁색함을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과연 하늘선지자요...초청측에서...선지자를 선지자의 이름으로 영접하면..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떠받들던 그 선지자가 이런 유치한 거짓말하는 선지자란 말인가?


신명기 13장 1-5절 입니다.

 

1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2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찌라도
3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4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
5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여 취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케 하려 하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찌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무어라 말씀하는가를 보십시오...

그런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이같이 하여 너희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라고 분명 말합니다....물론 죽일수는 없지요...

하지만 거짓선지자에 흔들리고 따랐던 사람들, 분명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특별계시하신 성경의 단순명료한 진리로

출처: 아멘넷, 정리: 쿵쿵님

하나님이 영적으로 귀머거리 된 자의 귀를 여시는 방법


유다의 깊은 죄악은 자신의 누림과 성공이 스스로 잘 나서 된 것인양 착각하며 살아간 것입니다. 그들은 잘 될수록 더욱 하나님을 멀리하며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이 알아들을만큼 징계를 주셔도 인간의 고집은 절대 꺽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유다를 보존하기 위해 택하신 방법은 거의 진멸 직전까지 멸하시고, 소수의 남은 자만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


20대까지 목사아들인 저에게 예배는 형식적인 것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가서 축도 마치기 전에 나오는 것이 목표였고, 설교 30분은 2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내 꿈을 이루는데 솔직히 하나님은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러다, 다리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후 하루하루를 골방에 갇혀 울며 지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울고 있는 저에게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너무나도 큰 울림으로 내면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것 밖에 되지 않는 줄 아느냐? 나는 너를 위해 아들을 주었다. 나는 천지를 지었다."


바로 내 안에 무언가 달라져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귀가 열렸습니다. 그 지겨운 설교가 나를 향한 사랑의 멧세지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 같은 것을 위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음을 알았습니다. 그 십자가가 내 인생의 연료가 되었고, 내 심장이 뛰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누구나 다 고난을 겪는다고 이 선물을 받지는 못합니다. 영벌이 임하기 전에 육신이 망한 것으로 인해 저는 영원을 얻었습니다. 이제는 우는 이유가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이루지 못해 울었는데, 이제는 죄인을 향한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웁니다. 무엇이 복인가요? 예수를 믿음이,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입니다.



이번엔 제 연약함에 대한 고백을 좀 나누고 싶습니다.

저희 교회는 사정상 금요철야는 공식일정에는 없고, 거의 저 혼자 아니면, 이 기도회를 알게 된 극소수가 함께한지 만 5년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저 혼자 했구요. 그런데 참 이상하게 공식적인 예배모임이나 집회보다 유독 금요일밤 기름부음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금요일은 정말 제게 특별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혼자 열심히 찬양하며 기도하고 있는데, 술에 은근히 취한 청년 자매 2명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예전에 주일학교에 다닌 적이 있는데, 향수가 떠올라 이 새벽에 들어와봤다는 것입니다.


이 기회를 어떻게 하면 놓치지 않고 저들의 변화의 기회로 삼을 수 있을까 내심 많이 긴장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중 한 자매가 ‘왠지 떠는 것 같다. 두렵냐?’라고 했습니다. 사실 별로 그렇지 않았는데 상대방에게 뭔가 그런 모습이 보였던 것 같습니다.


기회를 놓칠까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그들이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왠지 조롱당한 것 같아 영 기분이 찜찜했습니다. 약점을 들켜 버린 것 같은...


그런데 눈에 보이는 모습이 저의 모습의 전부는 아닙니다. 탄력 받으면 엄청 담대해지거든요. 평소 어쩔 땐 생각보다 사람 앞에서 긴장을 많이 합니다. 다리 수술을 여러번 거치며 꿈을 잃고 우울증이 찾아왔을 때부터 시작된 것인데.. 이젠 치유 받았음에도 잔재가 조금 남아 있는 듯합니다.


가끔 페이스북에서 제 글을 보고 관심을 가지고 만나고 싶어하시는 동역자분들이 계신데, 제가 맞장구를 잘 쳐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인관계에서의 제 약점이 있기 때문이지요.


회중 앞에선 강한데, 개인적으로는 왠지 약함이 있는 듯합니다. 그걸 모르시는 분들은 잘난척하고 튕기는 거 아닌가 오해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저, 생각보다 겸손합니다.^^


이렇게 약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종이 될 수 있었을까? 늘 질문합니다. 더 담대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런 연약한 질그릇에 정금보다 보배로운 말씀을 담아 전하게 하시니.. 정말 하나님의 은혜는 크고 놀랍다고 고백할 뿐입니다.


스스로의 약점이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약한 그릇을 그리스도께 드리십시오. 그는 어떤 그릇으로도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출처: 이환희 목사님 페이스북

전략군 지도에 'MDL-울진-포항-부산 앞바다' 타격권 표시

전문가 "괌 타격 미사일 발사 예상지점은 무수단리"

베일 벗은 전략군사령부…전경에 지하벙커도 공개

원본보기

북한 전략군, 남한 전역 4등분해 미사일 타격권 설정(서울=연합뉴스) 북한은 15일 조선중앙TV와 노동신문 등 관영 매체를 통해 미사일 전력을 총괄 운용하는 전략군이 우리나라 전역을 4등분해 미사일 타격권을 설정해놓은 사진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남조선 작전지대'(붉은 원)라고 쓰여있는 지도에는 우리나라 전역을 4개로 구분한 라인이 그어져 있고, 그 라인 끝마다 미사일 기종으로 추정되는 글씨가 적혀 있다. 2017.8.15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No Redistribution]
nkphoto@yna.co.kr


(서울=연합뉴스) 김귀근 홍국기 기자 = 북한의 미사일 전력을 총괄 운용하는 전략군사령부가 우리나라 전역을 4등분해 미사일 타격권을 설정해놓은 사실이 처음 포착됐다.

전략군에 배치한 스커드와 노동미사일 등 주로 단거리 미사일을 이용해 유사시 남한 곳곳을 타격할 수 있는 유효사거리를 기준으로 타격 범위를 설정해놓은 것으로 분석된다.

15일 노동신문과 조선중앙TV를 통해 공개된 전략군사령부 지휘소 내부 모습을 보면 김락겸 전략군사령관으로부터 괌 포위사격 방안을 보고받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뒤로 3개의 지도가 벽면에 걸려 있다.

이들 지도에는 '남조선 작전지대' '일본 작전지대' '태평양지역 미제 침략군 배치'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쓰여있다.

이 가운데 '남조선 작전지대'에는 우리나라 전역을 4개로 구분한 라인이 그어져 있고, 그 라인 끝마다 미사일 기종으로 추정되는 글씨가 적혀 있다. 이 글씨는 블라인드 처리를 해 식별되지 않는다.

4개의 라인이 그어진 곳은 군사분계선(MDL) 축선-울진권역-포항권역-부산 앞바다 등이다. 그리고 4개의 도표가 지도에 그려져 있는데 각 라인 안에 있는 주요 부대와 국가전략 핵심시설 등을 표기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군사 전문가들은 이 4개 라인이 미사일 타격권역을 표시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신종우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선임분석관은 "북한이 우리나라 전역을 4등분 해 미사일 타격권역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스커드와 노동미사일의 타격권역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일본 작전지대'라고 적힌 지도에는 일본 남쪽 태평양 해상까지 라인이 그어져 일본 전역이 북한 미사일 타격 범위에 있다는 것을 표시한 것으로 분석된다.

원본보기



또 전략군 지휘소 내부에는 태평양 괌의 앤더슨 미 공군기지로 추정되는 위성사진도 걸려 있다. 앤더슨 공군기지에서는 북한이 벌벌 떠는 B-1B 랜서, B-52 폭격기 등이 한반도로 출격하는 장소다. 북한이 괌을 타격할 수 있다는 위협을 최대한 부풀리고자 이 위성사진까지 지휘소에 걸어놓고 공개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김정은 앞에 놓인 '전략군 타격계획' 지도에는 북한에서 괌까지 길게 라인을 그려놨다. 미사일이 날아가는 경로를 표시한 것이다.

발사지점을 확대해보면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리 인근으로 나온다. 기존 함경남도 신포에서 발사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분석과는 다른 것이다.

신 선임분석관은 "무수단리에 넓은 발사장이 있어 여러 발을 사격하기에 적합하다"면서 "전문가들이 말해 왔던 신포에서 쏠 경우 시뮬레이션을 해보면 괌을 직접 타격할 수 있는 사거리가 나온다"고 말했다.

특이한 것은 북한에서 괌까지 그어진 라인의 한 중간지점에 알 수 없는 표시를 해놓았다는 점이다.

신 선임분석관은 "라인 중간에 끊어지는 지점을 표시했는데 발사지점에서 거리상 단 분리나 재진입 지점은 아닌 것 같다"면서 "그 지점의 태평양 해상에서 뭔가 관측할 수 있는 시설을 띄워 놓겠다는 것을 표시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북한 발사 장소에서 괌까지의 중간지점의 태평양 해상에 관측 선박을 띄워 놓고 이 선박에서 미사일의 비행 거리와 속도, 각도, 자세 등을 측정할 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미사일이 괌을 직접 타격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이 선박에서 미사일을 자폭시키도록 하는 역할도 하지 않겠느냐는 추정도 나온다.

아울러 북한은 관영 매체를 통해 전략군사령부 지휘소를 비롯해 사령부 전경과 지하벙커에 이르기까지 사령부의 내·외부 사진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전략군의 모체는 미사일지도국이다. 북한은 김정일 집권 시기 군단급으로 출범한 미사일지도국을 김정은 체제 들어 전략로켓군으로 확대 개편한 뒤 2014년 초 육·해·공군과 동격의 제4군종으로 전략군을 창설했다. 북한은 지난해 전략로켓군을 창설한 7월3일(1999년)을 '전략군절'로 제정하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을 발표했다.

threek@yna.co.kr

최에녹(enoch@goodtv.co.kr) l 등록일:2017-08-02 16:41:22


  ▲스웨덴 문화·민주주의 장관 앨리스 바 쿠른케(Alice Bah Kuhnke)는 "ISIS에 참여한 스웨덴 사람은 환영받으며 고국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데일리굿뉴스 


스웨덴이 이란 기독교인은 본국으로 추방하는 반면,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활동한 ISIS 테러리스트에겐 새로운 신분을 부여하고 있단 소식이 전해졌다.   
 
현지 언론 엑스프레센은 "현재 150명의 ISIS 테러리스트들을 스웨덴 정부가 보호하고 있으며 주민들은 이들이 지하드임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스웨덴 정부의 이 같은 조치는 과거에 ISIS에서 활동한 사람들이 조국에 돌아와 일자리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어 도움을 주는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 2004년까지 ISIS에서 활동한 27세 왈라드 알라이 유세프는 "옛날에 ISIS에 사람을 불러모으기 위해 살상 무기를 들고 홍보용 사진과 비디오를 찍었는데 여전히 인터넷상에서 떠돌고 있어 스웨덴 정부가 새로운 신분을 부여해줬다"고 익스프레센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유세프는 이어 "계속 구직활동을 하는데 문제의 사진들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39세 바할린 데킬라 길도도 2012년 시리아 육군 병사들의 시체를 배경으로 자축하는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다. 스웨덴정부는 그에게도 새로운 신분을 부여해 문제없이 살아 갈 수 있도록 조치했다.
 
현재 대략 100명의 스웨덴 사람들이 여전히 중동에서 이슬람 국가를 위해 싸우고 있다.
 
스웨덴 문화·민주주의 장관 앨리스 바 쿠른케(Alice Bah Kuhnke)는 "중동에서 급진적 이슬람 단체(ISIS)를 도우며 함께 싸우는 스웨덴 사람들은 환영받으며 사회로 복귀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한편, CBN 뉴스는 "스웨덴에 8,000명의 기독교인 망명자가 강제 추방을 피해 숨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아래 이미지는 탈북자 출신 웹툰작가 최성국씨의 글입니다.

아래글에 대한 리액션을 담고 있습니다.



최근까지도 나는, 통일은 무조건 '평화적'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대중, 노무현이 대통령이었을 때, (그땐 어리고 관심도 없어서 잘 몰랐지만...) 북한에 가서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것을 보며 저렇게 악수하고 웃으면 곧 통일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북한의 현실에 대해 알게 될수록,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북한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였다. 북한 정권에게 ‘평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평화와 달랐다. 북한에서 ‘평화'는 모든 인민이 오직 수령님만을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북한에게 평화적으로 손을 내미는 건 마치 팔이 없는 사람에게 악수를 하자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한국이 망설이는 지난 70년 동안 북녘에서는 전쟁보다 더 끔찍한 일로 수많은 생명들이 고통받고 죽어갔다. 지금 통일을 한다 해도 이미 죽은 천만명의 생명들을 다시 살릴 수가 없는데, 이게 과연 평화통일일 수가 있는 걸까?


나는 그동안 전쟁이 날까봐 두려웠고, 북한에 대한 진짜 진실을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져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지금이 평화라고만 생각했다. 한국의 삶, 시골은 조용하고, 도시에 사람들이 가득히 웃고 떠드는, 이게 평화라고 생각했다.


가끔 북한 사람들이 굶어죽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건 영화 속 이야기만큼이나 낯선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게 진짜일거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걸 믿으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되니까. 또 한국도 이렇게 힘든데 북한까지 신경 쓸 수 없다고 합리화하기도 했다. 나는 한끼만 굶어도 짜증내면서, 굶어 죽는 사람들은 철저히 외면했다. 지금부터라도 그 죄값을 용서받고 싶다.


한국 정부의 입장은 아마도,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으니 무작정 공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할 수는 없으니 ‘때를 기다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북한이 정말 핵을 쏠까? 그것은 너 죽고 나 죽고, 다 죽자는 최후의 발악일텐데, 그렇게나 공들여 유지한 70년의 독재체제를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을까? 핵은 그들의 독재체제를 지키는 협박용 무기이다. 포악한 사람들은 큰소리치고 화를 내며 협박을 한다. 하지만 당당하게 맞서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비굴해진다.


한국이 포악한 북한에 오히려 당당하게 맞섰더라면 어땠을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협상카드가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에게는 전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최고의 과학기술과, 국제사회의 지지와, 탈북자들이라는 엄청난 정보통이 있었으니말이다.


북한땅은 위로는 중국, 아래로는 한국과 연결되어 있다. 중국정부는 자신들의 이익만 생각하느라 북한 인민들을 돕지 않는다. (지금도, 앞으로도, 아마 영원히) 오히려 탈북자들을 강제북송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한국이 어려운 상황인건 맞지만, 전 세계에서 북한을 도울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그들이 굶어죽는다는 사실 외에도, 같은 민족으로서, 같은 국가로서, 아니 바로 옆에 있는 이웃으로서라도 우리가 앞장서야 한다.


우리나라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그들을 구하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데 왜 오지 않는 평화를 기다리고, 멀리 있는 남에게 도움받기를 기다려야 하는걸까? 추운 북한땅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왜 한국의 결정에 영향을 주지 못했는가. 그들은 단지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인데.


'평화적 방법' 그것은 남북의 모든 주민을 놓고 봐야 한다. 북한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할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는 그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고 나눠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외면했다. 우리가 직접 재앙을 겪게 하진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그들의 절실한 도움의 손길을 뿌리쳤다. 수많은 북한 주민들의 고통과 죽음으로 한국의 평화를 유지했다.


'평화'도 상대적인게 아닐까? 전체 생명을 놓고 무엇이 가장 평화로운 방법인지 찾아야 한다. 우리의 생명보다 북한 사람들의 생명이 하찮아서 우리만 잘사는게 ‘평화’가 아니다.


한국이 북한을 위해 기꺼이 고통을 받아들였다면, 북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죽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 재앙을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태평하게 그들의 고통과 죽음은 외면한 채 '평화적(?) 통일'만을 기다리고 있다.


북한 사람들은 태어나자마자 자유를 빼앗기고 고통을 겪고 살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가 오로지 '북한에서 태어난 죄'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이 원하는 평화적인 통일은 동화책에 나오는 해피엔딩일 뿐이다.


그런 일이 현실적으로 일어날 확률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런 1%의 ‘평화통일’에 국가의 안보를 거는 한국. 그것이 한국의 99%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이라 믿는다. 한국 정부와 많은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믿는다. 우리가 굳이 북한 주민들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평화를 깰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를 보면, 문제 있는 아이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거의 대부분 부모에게 있다. 북한도 중국과 한국이 그렇게 내버려둠으로써 이렇게 고삐풀린 개망나니 독재집단이 됐고, 또 국제사회 고립이라는 단호한 정책을 씀으로써 억울한 북한 주민들만 죽어나갔다.


놀랍게도 북한 독재자의 욕심은 단 하나도 줄어들지 않았다. 마치 깡패같은 양아치를 반 죽을만큼 때리고 패고 굶겼는데, 어찌된게 얘는 더 포악해지고 자기보다 힘없는 애들을 괴롭혀 잘먹고 잘 살았다는 그런 이야기이다. 


우리가 아무리 평화를 외쳐도 북한 사람들이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면, 그것은 진짜 평화가 아니다. 지금 당장 그들을 구해야 한다. 그게 공개적이지 않아도 좋다. 비공개적으로 해야 할 일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북한의 끔찍한 범죄를 알게된 남한 사람들이 벌써 비밀작전을 준비하고 실행하고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하지만 여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동안 탈북자들이 한국 정부에게 북한에 대한 관심과 대응방법 등을 건의했지만, 그들의 의견은 30년이 지나도록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들은 지쳤고, 한국 정부에 대한 미련을 거의 포기해버렸다.


그럼에도 헐벗은 북한 주민들과 눈앞에서 굶어죽은 생명들을 잊을 수가 없어서 지금도 북한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곧 허공에서 사라진다. 지금 매일매일 뉴스에서는 '한반도 위기설'이라며 떠들어대고 있지만, 정작 남한 사람들은 여전히 나 자신을 위해 잘 먹고 잘자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의 2천만 주민들은 처절하게 고통받고 억압당하며 죽어가고 있다. 아주 많이 늦었지만, 그럼에도 가장 좋은 때는 망설일 것 없이 '바로 지금'이다.



출처: 조아영님 페이스북

제 7장 그리스도의 몸(3) / 루이스 B. 스미디즈

 

 

2. 그리스도의 몸이 계신 곳은 어디인가?

 

그렇다면 그 몸은 어디에 있는가? 그 몸이 어떤 특정한 곳에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 몸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대해서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곳이 어디인지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특정한 조직인가? 그것이 서울의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는가? 그것은 어떤 특정한 교단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몸은 제도적인 교회에 의해 감추어진 보이지 않는 공동체인가?

 

바울은 다음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첫째, 그리스도의 몸은 예배와 섬김의 행위로 나타나는 친교라는 것이다. 둘째, 그 몸은 지역적(local)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부르짖는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부분이다"(고전12:27). 바울이 고린도의 한 가정의 거실에 모인 어떤 무리의 그리스도인들을 지적하고 있는 것같은 생각이 든다. 그 무리ㅡ그 이름, 직분들, 예배의식, 그리고 가시적인 활동들과 더불어 그 무리ㅡ는 그리스도의 몸이었다. 그리스도의 몸은 이렇게 사진처럼 묘사될 수 있다.

 

이것은 조직이나 구조의 어떤 구성 요소들이 발견되는 곳은 어디나 그리스도의 몸이 존재함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그 구성 요소들이 부재한 경우는 그 몸이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은 그렇다고 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아주 단순하다. 그 필수불가결한 구성 요소들은 하나의 기관에 달려 있으며, 그 가장 주된 구성 요소는 그 기관의 대주교인 베드로의 권위 하에 살고 예배를 드리는 곳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성령의 삶을 나타내는 개신교도들이 등장함으로써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그러한 공식을 계속 유지하는 데 상당히 어렵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몸을 밝히 증거하는 북음주의적인 교회들의 성장과 진정한 기독교적 능력으로 말미암아 로마 가톨릭의 주장은 계속해서 도전을 받고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 문제를 정확히 규명하는 일종의 교리적인 승인을 만들어 내려고 고심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회때 출간된 교회에 관한 법은 그리스도의 몸이 가톨릭 교회에 내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법은 몸과 가시적인 교회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하나의 복합적인 실재의 두 차원 혹은 국면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신비적인 국면인 몸은 그 가시적인 구조를 초월하여 확장된다. 이런 식으로 교회와 유사한 차원이 비 로마 가톨릭의 영역들과 중첩된다.

 

반면,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은 그 몸의 위상을 그리스도인들의 비가시적인 친교에 두는 경향이 있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기관(제도-역자주)은 기껏해야 그 몸을 양육하기 위한 것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그것을 모호하게 하거나 방해하기도 한다. 그 의미에서 감지할 수 있듯이 만질 수 있고 구체적인 '몸'이라는 단어는 믿음과 감정에 있어서 무정형이며, 막연하고 조직화되지 않은 관계를 언급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이같은 견해는 복음주의자들에게 교회의 분리에 무관심할 수 있는 사치를 제공해 주고 있으며, 때로는 분리를 일으키는 데 대한 허가증을 부여하기도 한다.

 

가톨릭 성례주의자들과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 성령이 내주하심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믿는다. 성례주의자들에게 있어 성령은 교회에게 은혜와 생명의 저장소를 제공해 주며, 각 개인들은 성례를 통해 그것들을 받는다. 반면,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 성령은 개인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며, 각 개인은 다른 개인들 안에서 동일한 실재[성령]를 인식한다. 성례주의자들에게 있어 성령은 몸 안에 계시며 사람들은 성령이 그들 없이 창조하신 몸 안으로 인도된다. 복음주의자들에게 있어 성령은 서로간의 사귐에 의해서 새롭게 된 몸을 구성하는 사람들 안에 계신다.

 

만일, 우리가, 바울이 주장한 대로 그리스도이 몸이 가시적이며 지역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환영과 같은 몸에서 위안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반면,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이 역동적인 실재인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 특정한 기관이 그리스도의 몸 신분의 영원한 보장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몸은 성령 안에서 주의 역동적인 활동에 반응하는 경우에만 존재한다.

 

환언하자면, 가시적이며 지역적인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그것은 오직 몸으로서 활동할 때에만 진정한 몸이다. 그 공동체는 지금 여기서 역사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므로 그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위해 활동할 때에만 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3. 얼마나 많은 몸이 존재하는가?

 

오직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에게는 지상에서 자신의 사역을 수행하는 몸이 하나밖에 없는가? 아니면 우리는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많이 만들어 왔는가? 바울은 "그리스도가 나뉘어졌느냐"고 도저히 못믿겠다는 어조로 질문하였다. 교회의 정체성을 고려해 볼 때, 그를 놀라게 만들었던 교회의 분열은 믿을 수 없고, 생각조차 할 수 없으며, 이상한 것이었다.

 

몸의 분열은 새창조와는 기괴한 모순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있는 일이다. 몸이 나뉘인다는 것은 이상하고, 모순되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너무나도 실제적인 현상이다.

 

몸은 나누어질 수 없으며, 사람들은 오직 그 몸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킬 수 있을 뿐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로마 가툴릭의 견해가 되어 왔다. 몸은 세상에 흩어져 있는 "진정한 신자들" 간의 비가시적인 친교의 끈이며, 따라서 제도가 해체되고 늘어난다 하더라도 그 몸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앞 단락에서 내렸던 결론이 옳다면, 이러한 신학적 해답들은 그 문제의 정곡을 찌른 답은 아니다. 그렇다면 더 나은 해답은 어떤 것인가?

 

바울의 직접적인 관심사는 지역 공동체의 연합[통일성]에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세례를 받고 성찬 예식을 통하여 정규적으로 그의 즉으심을 선포하는, 남.녀.노.소로 구성된 매우 구체적인 공동체를 지적하는 것이다. 교회 성찬 시에 가난한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함으로 인해 파괴된 그 연합은 한 지역 회중의 연합이었다. 사람들간의 사소한 마찰이 구체적인 실예에서 몸을 분리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몸이 통일되어야 한다고 했을 때 그의 우선적인 관심은 한 구체적인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공동체인 것이다.

 

예수께서 그의 몸의 하나됨을 위해 하셨던 기도 가운데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는 말씀이 생각난다. 그 몸의 하나됨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에 대한 가시적인 선포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세상은 어디에서 새 사람의 연합 혹은 분리를 볼 수 있는가? 실제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최소한 무엇보다 먼저 지역 교회 안에서 그 몸의 하나됨을 보지 않겠는가? 세상이, 인종과, 사회적 배경, 직업상의 신분과 세상적인 성취 등이 각기 다른 개개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아가페적인 사랑 안에서 섬기고 예배하는 하나의 몸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곳은 구체적인 지역 교회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었다고 주장하더라도 실제적인 상황에서는 하나된 것과 얼마나 거리가 멀게 나타나는 것도 지역교회가 아닌가? 분열의 첫째 되고 최우선 되는 비극은 지역교회에 개인주의와 분파주의가 존재한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세상에 가장 걸림돌이기도 하며 따라서 가장 해로운 곳이 바로 지역 교회가 아닌가?

 

고린도나 근교의 다른 곳에 있는 한 공동체 안에 서로 분리된 혹은 서로 분쟁을 벌이는 몇 개의 몸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도저히 못할 짓을 행한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누어진 것이다. 가장 긴급하고도 힘든 치유의 사역이 이루어지고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분열의 문제이다.

 

연합에 대한 관심은 물론 지역 공동체에 국한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몸은 보다 커다란 의미에서 존재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인 전체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을 주장한다(엡1:22, 23; 골1:18). 지역 공동체들은 단지 커다란 몸의 지체들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지역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종으로 활동하고 있는 곳은 어디나 전체적인 몸이 존재한다. 그러나 몇몇 지역에 흩어진 몸들, 그리고 몇몇 지역에 흩어진 교파들은 모두 함께 지상에서 화목케 하는 사역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실재이다. 거리상으로는 떨어져 있으나, 각자는 상대방을 인식히고, 상대방에게 문호를 개방하며, 서로를 섬기며,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

 

바울 당시 각 지역에 흩어진 몸은 한 몸의 완전한 표현으로 간주되었었다. 예를 들어, 안디옥에 있는 몸은 그 지역에서 예배를 드리고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며, 그들을 위하여 희생하고 기도하며 고난을 받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의 새로운 실재, 즉 한 성령, 한 주, 한 믿음, 한 세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이 나타나는 현상에 대하여 우리는 유감스럽게 생각하여야 하며, 마음 아파해야 한다. 서로 다투고, 배척하고 적개심을 품고, 분열하는 공동체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우쭐대며 주장하는 것은 지상교회에서는 있을 수밖에 없는 참으로 참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러나 지역적인 면에서 분명히 사실인 것은 대륙의 국경을 초월한 교회 일치 운동이 점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각 교파가 상대방의 사역을 배척하고, 서로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경쟁을 일삼으며, 다른 교파의 성례전에 대해 배타적이며, 공개적으로 상대방이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곳에서, 우리는 바울이 말한바 불가능한 가능성들을 보게 된다.

 

세계 교회 협의회(ecumenicity)에 대한 거부는 대개가 교리적인 이유 때문이다. 나쁘게 말해 그 거부는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신학적인 껄끄러움, 진실성 없는 고백에 기인한다. 좋게 말해 그것은 주 그리스도와 그가 행하신 구속에 신실한 몸을 유지하려는 바람에 기인한다. 복음주의적인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성령의 실재, 그리고 그의 구원의 역사성을 믿는 그들의 신앙을 위협하는 동맹들에 가입하기를 매우 주저하고 있다.

 

하지만, 그처럼 동맹을 꺼리는 교회들은 주님께서 한 몸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이 역사하여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일이 일어나는 것에 그리스도의 몸-비록 그것은 항상 병약하고 죄로 가득찼지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이 있는 곳은 어떤 이름 그리고 어떤 신조를 지니고 있던 간에 그것은 하나의 몸이며 동일한 실재인 것이다.

 

복음주의적 배타주의자들과 세계 교회 협의회에 속한 일치주의자들은 칼빈이 가톨릭 교도인 사돌레토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사돌레토여, 주님께서 당신과 당신의 일행에게 교회적인 연합의 유일한 참된 띠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케 하셨으며, 현재 흩어져 있는 우리를 불러 그의 몸의 친교 안으로 모으시는 주 그리스도께 있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닫게 하셔서, 우리가 주 그리스도의 하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한 마음과 한 영혼으로 결합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칼빈이 언급한 바, 그리스도 중심적인 마음과 소망을 좀더 새겨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세계 교회 협의회에 속한 사람들은 주께서 그 일을 행하셔야 하며, 말씀과 성령으로써 그 사역을 수행하신다는 확신을 새겨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출처: 루이스 B. 스미디즈의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 중에서 발췌(251-259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제 7장 그리스도의 몸(2) / 루이스 B. 스미디즈

 

 

(3)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공동체의 기원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으로서 행하신 바에 의해서 생겨나게 되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혼란과 공동체, 아담 안의 옛 인류와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공동체 사이를 나누는 분할선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그 공동체에 관해 언급된 모든 것은 여기에 그 지향점이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뜻하신 그 공동체의 전환점은 역사의 전환점, 즉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와 부활과 동일하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십자가로 인하여 옛 분열을 대체하기 위하여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옛 언약을 파괴하지 않았다. 율법에 기록된 "우리를 거스리는 의문의 법령들"은 폐지되었으나 아브라함과 더불어 시작된 언약공동체는 폐지되지 않았다. 십자가는 아브라함과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며"(갈3:8), 그 복음은 율법이 폐할 수 없었던 북음이었다(갈3:17).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은 처음부터 만민을 위한 복으로 약속된 아브라함의 '씨"였으며, 그가 죽으셨을 때 그는 "아브라함의 복"을 이방인들에게 가져다 주셨다(갈3:14). 그리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갈3:7). 십자가는 새 공동체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더불어 맺으신 언약 관계로부터 분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십자가로 인하여 아담에 의해서 이룩된 혼란의 와중에서 새로운 공동체가 창조되었던 것이다.

 

몸 안에 계신 성령 

 

교회 안에 성령의 임재하심으로 몸에 영혼이 제공되었다는 오랜 전통이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보내주시며,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을 가진 살아 있는 몸이 된다. 그러나 가장 바울의 관심을 끈 것은 성령이 그 공동체를 위하여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가라는 것이었다.

 

바울은 교회의 통일성을 성령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고전12장). 그러나 초점은 활동하시는 성령에 맞춰져 있다. 성령은 공동의 유익을 위하여 교회의 각 지체들에게 은사를 주신다(12:7). 이 은사들은 그 공동체의 사역을 위해서 부여된 여러 직책들과 대략적으로 대비가 된다. 어떤 때에는 보기드문 믿음을 행사하는 능력의 은사들로 나타난다. 그 공동체 안팎에는 수행해야 할 사역, 즉 사랑의 사역이 있다.

 

우리가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드는, 공동체 안에 계시는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다시금 성령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이심을 상기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그분의 자유롭고도 주권적인 능력을 강조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 성령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주권을 그 몸 안에서 효과적이 되게 하는 것, 즉 공동체로 하여금 화목케 하도록 인도하는 것임을 말해 준다.

 

성령은 그의 주권의 능력과 목적 안에서 역사하시는 지상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성령은 각 개인들을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대망하는 몸 안으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행위로 수립된 공동체 안으로, 세례를 베푸신다(고전12:11). 그는 말씀 선포와 성례로 구원 사건들을 상기시킴으로써 그 공동체로 하여금 그리스를 재삼 기억케 하신다. 성령은 미래의 보증(첫 분할금)이시며 현재의 촉매가 되신다.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 가운데 실현된 새로운 것을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지상의 공동체 안에서 역사하신다. 그리고 그는 그 공동체가 가시적인 행동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으로 나타나도록 인도하신다.

 

필자는 성령이 교회의 독점적인 소유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언제나 자유로우시다. 또한 그는 그 지체들 안에 생명이라고 불리우는 물질을 집어 넣으시는 일괄 작업 배치를 묵묵히 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가 무시되고 거부되며, 무례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한편, 그의 임재는 단독적인 보장을 제공하지 않는다. 성령이 일하시니 지체들도 일해야 한다. 성령이 활동하고 계시니 지체들은 그의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 그리고 그 역학 관계의 인간적인 측면이 결여될 때, 그 몸은 좋게 말해서 동면 중이며, 나쁘게 말해서 죽어 있는 것이다.

 

몸의 머리

 

바울이 사용하는 상(像)들은 계속되며, 매우 다양한 모습을 취하기 때문에 그것을 좇아가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전체-즉 머리와 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와 동시에 그 몸의 머리가 되신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골1:18)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엡5:23)

 

 

머리 상(像)은 두 가지 개념을 암시해 준다. 그 중 하나는 주인, 통치자 혹은 인도자의 개념이다. 이것은 가장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비유이다. 우리는 우두머리 혹은 지배자를 의미할 때 어떤 단체들의 머리, 혹은 정부의 수뇌부를 지칭한다. 그러나 바울이 몸의 머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그와 동시에 몸과 머리의 긴밀함과 몸의 머리에의 의존성을 강조하고 있을 수도 있다. 첫 번째 상은 몸에 대한 머리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두 번째 상은 그들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한다. 바울은 그 상이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 두 가지 모두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1] 우월하신 그리스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부를 때, 그것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가 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주의 머리이기도 하다(골2:10). 그러나 이것과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에베소서 1:21, 22에서 그리스도는 한 때 세상의 주인들처럼 보였던 정사와 권세들의 주로서 찬양을 받고 계신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 그리스도가 우주의 주가 되신다는 것은 교회를 향한 그분의 관심에 부수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양자의 머리이다. 그는 승리하심으로써 모든 곳에서 주권을 행사하신다. 그 새로운 상황은 범세계적이다. 그것은 모든 차원을 포함한다. 각처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주와 머리로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것의 머리이다. 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온 세상을 그 관심과 사역의 대상으로 삼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교회가 자신만이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한다고 추측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들 주변의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낙관론은 기독교적인 가능성이다.

 

그리스도께서 머리라는 사실은 분명 그분께서 통치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그분의 신분의 우월성을 지적해 준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인 것처럼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머리가 되신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다(엡5:23). 그것은 일반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신분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11:3). 남성의 우월한 신분은 직분과 관계가 있다. 이 말은 남성의 신분이 우월한 특성 혹은 자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남성의 신분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역할을 예증한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근본'이시며 '먼저 나신 자'라고 말함으로써 몸의 머리가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다. '근본'(biginning)이라는 말은 짐작컨대 희랍어 "아르케"를 가장 훌륭하게 번역한 것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주뿐 아니라 교회를 유지하시는, 다른 모든 힘 배후에 있는 창조적인 능력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머리로서 당장에라도 창조하실 수 있는 능력(imminent creative power)이시다. 그러나 자유로운 인격체이신 그분은 권위에 있어서 뿐 아니라 능력에 있어서도 몸보다 우월하시다. 따라서 '근본'이라는 말은 내재성(immanence) 혹은 긴밀성(closeness)에 있어서의 우월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나신 자'라는 말은 히브리적인 어조를 담고 있다. 먼저 난자는 지명된 상속자, 종족의 권위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그는 그와 동시에 그 이후에 태어난 형제들 중에서 첫째였으나, 중요한 것은 그의 우월한 신분이었다. 바울은 우리에게 예수께서 역사상 죽음에서 부활한 사람들 가운데 첫 번째가 되신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생명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유명하며 권위 있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먼저 나신 자이다. 그리스도는 "으뜸이 되려"하시기 위해 "먼저 나신자"가 되신다(골1:18). 이 모든 사실들은 교회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상과 조화된다. 그는 머리로서 우월한 존재이다.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몸의 머리인 그리스도에 담겨 있는 무엇보다도 첫째되고 분명한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신분과 통치하는 기능에 있어서 우월하시다는 것이다.

 

[2]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몸의 머리이기 때문에 그 몸과 긴밀하게 그리고 활력있게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예컨대, 바울은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5)고 권고한다. 그가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은 생소한 생물학적 개념을 도출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바울이 생리학적인 상(像)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 그 다음에 계속되는 내용으로 보아 분명하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6). 그는 성장과 생명을 공급받기 위하여 몸이 머리에 의존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상을 교회와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의존성에 적용하고 싶어하는가? 에베소서 4장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단언함으로써 시작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주로서 교회의 섬김의 수단인 은사들과 직분들을 부여하신다(4:11, 12). 우리 모두는 각자의 소명에로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서로 사랑 안에서 섬기며 그렇게 할 때 성령의 하나됨이 유지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는 것이다(4:13, 14). 이러한 묘사는 매우 역동적인 묘사이다. 우리는 순종과 사랑의 실천, 믿음과 지식의 습득, 교회의 특수한 직분들을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섬김을 명받는다. 이것들은 "머리에 이르기까지 자라는" 비유의 의미를 파악하는 배경이 된다.

 

몸의 "머리" 비유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암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공동체가 얼마나 불가분리적 관계에 있으며 얼마나 총체적으로 하나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머리로서의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없다. 공동체 내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성령의 임재에 대한 바울의 말 또한 동일한 사실을 가르친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비유를 몸과 머리 간의 구별로 확대 적용함에 있어 바울이 마음에 두고 있는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비유가 그리스도와 그 공동체의 하나됨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에, 머리로서의 그리스도 비유는 그 둘 사이의 구별을 다시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 왔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물론 나와 내 몸이 그러하듯이 통일된 두 개체 간의 구별은 있다.

 

이 단락을 마치기 전에 바울이 머리와 몸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바울은 몸에 관하여 말하기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3). 바울은 교회가 그 자체 안에 그리스도의 전체를 붙들고 있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유의 구절은 통상적으로, 단어들에 대한 주석이 아니라 바울의 메시지의 전반적인 대의에 의하여 해석되곤 한다. 성례주의자들은 그 구절을 인간의 신성화를 위해 성육하신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반적인 견해에 의해서 해석한다. 따라서 그들은 교회에 흘러넘치는 그리스도의 신인으로서의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성례주의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교회는 일종의 생명이라는 물질의 저장소이며, 성례를 통하여 그것을 나누어줄 수 있다. 성례주의자들은 머리ㅡ몸의 비유를 최대한 활용하여, 몸은 생명을 공동체 안으로 부으시는 머리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생명을 공급하신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교회 내에 존재하는 창조적이며 능력 있는, 살리는[생명을 공급하는] 영이다. 성령은 머리로부터 나와 몸을 채우신다. 그러나 이번에는 몸이 그리스도를 채우는 방식들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완수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고난의 사역을 수행해야 한다(골1:24).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새 사람"이 드러나고 실현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로 채워지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온전케하여야 한다. 화해가 이루어지며, 인간과 하나님이 그리고 인간들이 화평케 될 때, 그리고 새 인류가 전체적으로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할 때, 그리스도는 온전케 될 것이다.

 

전술한 것을 요약하자면, 몸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 상은 그가 교회에 대해서 그 신분과 권위에 있어서 우월하신 존재이심을 지적해 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교회의 생명의 살아 계신 샘이라는 사실을 전해준다. 교회에 대한 그의 우월한 신분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긴밀한 관계와 대비된다. 두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몸의 머리이다.

 

몸의 사역

 

예수님의 몸은 세상에 대한 자신의 희생적 사역을 성취하시는, 활동하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 몸은 세상에서 떠나 여기 계시지 않는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다. 하지만 그의 사역은 지속되며 그의 고난은 반드시 채워져야 한다(골1:24). 그의 화목케 하는 직분을 이제 그 공동체가 맡았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통해서 아직도 활동하고 계신 것이다.

 

성령은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시다. 그러나 성령은 홀로 활동하지 않으신다. 그는 그 공동체 배후에서, 안에서, 그리고 그 공동체를 수단으로 활동한다. 그는 공동체를 세우시고 실현하여 활동하는 그리스도의 몸 이 되도록 구비하신다. 성령은 공동체를 통하여 십자가의 도를 선포하심으로써 그리고 공동체를 세상을 위한 희생적인 활동으로 인도하심으로써, 공동체를 화목케 하는 사역자로 만드신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 행위로 세우신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그가 계속 수행하는 활동을 언급한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동일하다. 그러한 동일성은 바울이 언제나 매우 관심을 지녔던 것이다. 이것은 본질에 있어서가 아니라 기능에 있어서의 동일성이다. 바울은 그 기능에 있어서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보고 있듯이, 몸을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보고 있다. 예수께서 갈보리에서 자신의 몸과 더불어 시작하신 사역은 역사에서 자신의 몸을 통하여 화목케 하는 그 사역으로써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영으로 활동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시대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과 서로에게 화목케 하시는 사역을 계속하시기 위하여 형성하시고 실현하시는 공동체이다.

 

교회를 몸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은 몇 가지 보충적인 의미 혹은 뉘앙스를 띠고 있다. 그 근본적인 의미는 활동이다. 즉 몸은 활동으로써 외부로 나타나는 인격체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를 때, 우리가 마음 속에서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내용은 그 몸의 기능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그리스도의 실재에 대한 배경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전 구속 사건이다. 새 사람이 갈보리에서 존재하게 되었을 때 몸으로서의 그 공동체가 창조되었다. 그 몸의 활동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1] 십자가에서 수립된 새 사람을 실현시키며, [2] 세상에 대한 화목케 하는 사역을 계속하는 일 등.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몸인 교회 간에 진정한 동일성이 존재한다. 그 동일성은 기능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께서 자기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새 사람을 창조하셨듯이, 그는 그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화목케 하는 사역 혹은 섬김을 계속하신다.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신분, 권위, 그리고 능력에 있어서 우월하시다.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자유롭고 은혜롭게 교회를 화목케 하는 사역에 그의 동반자로 부르시는 주님이다. 교회의 머리되신 분은 교회에게,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사람들 사이에 있는 원수의 담을 허무심으로써 창조하신 생명의 보편성을 반영하라고 명하신다. 그는 교회에게 자신과 함께 사역하여 그 몸에 속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하라고 명하신다. 교회가 그리스도처럼 밖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어 있거나 잠자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몸은 몸이 아니라 시체에 불과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몸 간의 연합은 서로 맞지 않는 당사자들간의 연합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언제나 주이시다. 몸인 교회는 언제나 종이다. 그리고 순종이 없는 곳, 세상을 위한 화목케 하는 행동이 없는 곳에는 몸이 존재하지 않는다. 몸은 활동하는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은 그의 새창조가 활동을 개시한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것이다.

 

 

출처: 루이스 B. 스미디즈의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 중에서 발췌(240-251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사랑을 위하여 40년이 되었다 교회에 첫 발을 들여놓은 것이... 교회를 다니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강산이 변해도 4번이나 변했다 요즘 강산은 하루아침에도 변하지만... 40년 내 신앙의 발걸음을 돌아본다 변한 것이 없다 첫 사랑에 빠져 몇 년을 뭐 몰라라 하고 다닌 거 말고는... 내 마음도 옛날 그대로이고 내 행동도 옛날 그대로이다 그러니, 나에게 어떤 열매를 기대할 수 있을까 변한 것이 있다면 사람이 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지난 10여 년을 아내 없이 덩그라니 방 한구석에서도 견뎌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 채 10년은 안되었지만 아내가 쓰러져서 요양원에 가 있는 시간이 9년 하고도 5개월이다. 홀로 남으면서 하나님과의 더 깊은 관계를 기대했다. 아직 때가 이른 봄철인가 그 깊은 관계는 이루어지지 않고 외로움만 더하고 있다 이젠 나를 잊어버릴만한 때도 되었건만 오히려 나를 나되게만 하는 익숙함에 젖어 있다.

이제 내가 바위 앞에 서리라 그곳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바위처럼 완고한 나 거기 하나님의 지팡이가 닿으니 나는 쪼개지고 물이 솟아 나왔다 가슴이 쪼개지니 생명수가 흐르고 생명수가 흘러 넘치니 죽었던 심령이 살아난다 죽음에서 살아나니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찬란한 태양처럼 떠오르신다 그 찬란한 태양빛으로 만물이 살아난다 꽃은 잎을 피우고 새들도 노래하고 삶이 꿈틀거리는 것을 본다. 새롭다 신비하다 모든 것이 사랑스럽다. 신비, 죽었던 내가 살아나는 이것이 어찌 신비로움이 아닌가. 사랑, 주어야지 내 한 몸 부서지더라도 남은 피 한방울 다 쏟을 때까지 주고 또 주고... 사랑하리라...



-해처럼달처럼



 



'은혜의 단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님은 기도문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0) 2017.09.04
크리스천들이 속고 있다  (0) 2017.08.17
믿음의 문을 선택하라  (0) 2017.08.12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0) 2017.07.18
십자가 그 사랑  (0) 2017.07.09

종북에 오염된 통일전문가들은 늘 럭셔리하게 평화를 부르짖었다.

대화를 해야 하고, 남북한 교류를 늘려야 하고, 북한이 핵을 개발하는 것은 경제가 어렵기 때문이고, 그리고 핵은 남한에도 팔요한 것이니 북한에 경제적 지원을 늘리고 경제협력을 활성화시켜서 북한 경제를 발전시킨 후에 정치제도를 바꾸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전쟁을 막을 수 있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으며, 북한에서 주민들이 떼거지로 내려와서 남한 주민들의 생활을 어렵게 하거나 북한 사람들 때문에 세금을 많이 내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북한의 풍부한 자원을 마음대로 팔아서 이익을 챙기고, 싸구려 북한노동력을 이용하면 인건비가 높은 남한 사람들 일시킬 때보다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할 수 있어서 통일편익이 많다고 했다.


북한 전문가들과 통일전문가(?)들의 입에서 북한이 공산왕조 독재국가이기에 북한 주민들을 해방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김정은 공산왕조를 제거하고 북한 주민들을 노예상태에서 해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극우꼴통'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평화, 대화, 교류협력, 경제협력을 통한 이윤극대화, 그리고 연방제통일을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지금, 더 많은 스피치와 방송출연과 연구발표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억대의 연구비를 주무르며 럭셔리한 저녁과 점심식사를 즐길 수 있었고, 통장에는 더 많은 수입이 쌓이게 되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통일과 북한과 북한 핵과 김정은은 하나의 JOB으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정치인들의 정치적 목적에 적당하게 잘 추임새를 넣어주고 박자를 맞춰주어 정치인들이 국민을 속이도록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써 권력과 이윤을 창출해내었다.


그 결과...

오늘의 대한민국은 북한 핵의 인질이 되었고, 당장 머리위에 포탄이 날아오는 전쟁발발 상황까지 되었으나, 이미 사고력과 상황파악 능력이 마비된 주류언론들은 대통령의 강아지 자랑과 감성놀이에만 빠져있고, 정치인들과 통일전문가들과 북한전문가들은 대화와 교류협력, 그리고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염불처럼 떠들어대며, 전쟁만은 안된다고 주절대고 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전쟁은 우리가 원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간뎅이 부은 김정은과 간뎅이 부은 김정은에게 화가난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국민들의 자기 방어 및 생명권 수호를 위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문대가 나서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이제 이 문제는 한반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동안 간뎅이 부은 녀석에게 아무말도 못하고 끌려다니며 돈 퍼다주고 쌀 갖다 바치면서 아부했던 정치인들 때문에 지금과 같은 전쟁 직전의 상황까지 오게 되었는데,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국민들만 피를 보게 된 것이다.


국립현충원에 계시는 책임있는 분들과, 김씨일가에게 돈 퍼다주고 대화하자고 아부하고 핵 만드는데 기여한 자들의 명단을 만들고,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들에게 전쟁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탈북자들도 이들의 명단을 만드는데 적극 참여하여 북한 주민들의 고통을 장기화시키고 김씨공산왕조를 강화시켜 기쁘게 해준 자들에 대해 통일 이후에 북한 주민들에 알려주어야 한다.


진짜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대한민국 정부 관리들과 국민들 대부분은 지금 망각하고 있고, '평화몽유병'에 걸려서 헤매이고 있다.



- 이애란 / 자유통일문화원 원장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 영국 속담 -


'적화통일'로 가는 길은 '평화'로 포장되어 있다!

- 대한민국 현실 -


만약 미국이 북폭을 하지 않는다면.. (김성욱 대표)


/

어리석은 자랑 좀 하겠습니다.

캠퍼스 성막교회를 개척한지 5년이 넘었습니다. 오늘 교회 홈페이지 개설을 위해, 업체와 계약을 맺는데 교회 고유번호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막혔습니다. 왜냐면, 아직 노회 가입 인원도 채우지 못해 교회가 노회에 등록이 되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위에서 가족들 명단 끌어다가 노회 가입하면 된다고 했지만 그럴 바에 뭐하러 교회 세우나 싶어, 사람 찰 때까지 기다리다가 여지껏 가입도 못했습니다. 교회 사이즈 이제 어림 아시겠죠?


이곳에 와서 약 서너 달 동안 사택이 없어 아내가 만삭일 때, 지하 교회 강단에서 보냈습니다. 물러날 길이 없어 차라리 죽이시든지 아니면 사용해 달라고 기도원에 올라가지도 않고 교회에서 새벽기도와 주중집회와 주일예배를 인도하며 40일 동안 전일 금식을 했습니다.


40일 금식이 끝나니, 교회가 부흥한 것이 아니라 함께 했던 청년 2명이 떠나갔습니다. 아내가 출산하러 간 사이 장모님과 단 둘이 주일 예배를 드렸는데 그나마 장모님 믿음이 약하셔서 설교가 들어가질 않았어요.


장모님 주무시면 쳐다볼 곳이 없어, 카메라 한 대 사서 카메라 보며 설교했습니다. 아내와 장모님 저, 세 사람이 거의 2년을 넘게 예배드린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쥐 새끼라도 보내달라고 기도했더니, 농담이 아니라 그 이후로 쥐 3마리 잡았습니다.


그런데 있자나요...

저의 모든 계획이 실패하고, 제가 비젼이라고 품었던 모든 것이 사치처럼 느껴져 포기하고 넘어졌을 때, 제가 완전히 포기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내가 넘어지고, 내가 포기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니 오히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첫째, 내 인생에 가장 진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주기적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비로소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공급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계좌번호가 든 후원요청 카드를 돌렸습니다. 그런데 해 줄 거라 믿었던 사람 중에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이후로 절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매 달 알지 못하는 곳에서 채우시는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셋째, 나의 계획과 상관없이 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혼자 카메라에 대고 설교하고 나서 무력감에 빠져, ‘하나님 이제 정말 이 열매 없는 사역 접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린 그날.. 가감없이.. 어디선가 영상설교를 보고 회복되었다는 메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가끔 말합니다. 몇 년 동안 그 인원이면 이제 문 닫아야 한다고요... 그러나 믿어지지 않겠지만, 인원수와 관계없이 매순간 하나님이 저와 이 작은 교회를 얼마나 알차게 사용하시는지.. 우리만 아는 비밀스런 추억들이 계속쌓여가고 있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장황하게 고생한 이야기를 늘어 놓는가 하면,

삶이 너무 힘들다고만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안타깝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깨닫고 주님께 안기면 좋은데, 그럼에도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고 주님을 외면한 채 발버둥 치는 사람들이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저와 아내가 진심으로 고백하는 말이 있습니다. 겪어보니 십자가 확실히 지고 주님 따르는 길이 인생에서 제일 쉽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주신 십자가를 확고히 질수록 십자가의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태풍 속에서 초자연적인 평안을 누리고, 내 고집이 아닌, 하나님의 스텝에 발맞추어 가면 가장 행복함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저는 ‘요셉이 형통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았습니다. 속된 사람들 때문에 ‘형통’이란 단어가 교회 안에서 외면 받게 되었지만, 저는 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형통이란 단어가 얼마나 복음에 부합한 단어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외면할수록 인생은 버거워집니다. 확실히 매면, 주님이 그 멍에를 함께 져 주십니다.


이 글을 읽고 저를 섣불리 위로하려고 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저는 지금 비참함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달콤함을 어리석도록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왜 인생이 고달프기만 하고 삶에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까?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주님께 올인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께 과감히 삶을 드리면 주님이 당신을 안고 걸어가십니다. 어정쩡하게 서 있으면 삶의 무게를 당신 스스로 감당해야 합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출처: 이환희 목사님 페이스북

지금 한국교회가 필요로 하는 ‘기도의 사람’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는, 설교를 매끈하고 유창하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 죄를 무서워하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교회마다 목사님들을 청빙하면, 마치 기업체에서 간부사원을 뽑듯이 뽑는 것을 봅니다. 영의 눈이 감겼습니다. 귀가 닫혔습니다. 무엇이 교회를 교회답게 하고, 주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신앙의 본질인지도 모른 채, 교회가 다 세속화의 늪에 빠져버렸습니다.


세상이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덥석덥석 받아먹어버리는, 그야말로 영적인 암에 걸린 그런 상태에 지금 한국교회가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교회만 생각하면 늘 눈물이 흐릅니다. 해마다 기도원에 올라가면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시키시고 한국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우리 민족을 살려주십시오. 한국교회의 강단이 회복되게 해 주십시오. 복음이 살아나게 해 주십시오, 정결해 지게 해 주십시오!’라고...


이렇게 끊임없이 조국 교회를 향한 기도를 성령께서 제 마음에 주셨고 제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드릴 때마다, 제 눈에서는 한없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조국의 운명을 짊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만 조국의 운명을 짊어질 수 있습니다. '교인'이 짊어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 하늘의 문을 여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사람이 조국의 운명을 짊어질 수 있습니다.


그져 몸만 교회를 왔다갔다 하며, 적당히 종교생활을 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어쩌면 유일하게 인해전술이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사용하지 않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 하나님의 심장을 담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 시대의 역사를 바꾸어 가시고 계십니다. 요셉이 이민자였고, 아무 것도 배경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에스더가 그러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요셉을 중심으로 애굽 제국의 역사를 움직이셨고, 에스더를 통해서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여 나가셨습니다.


왜 여러분은 간절히 기도하지 않으십니까?

새벽에도 기도하고, 저녁에도 교회에 나와서, 또는 가정에서 기도하고, 온 민족교회가 여호와께, 기도가 불길이 되어서 타올라가고, 계 5:8절처럼 금대접에 기도가 가득차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한국이 위기를 맞이해서, 온 성도들이 뜨겁게 기도해서 한국 전체가 기도의 불도가니처럼 벌겋게 달아야 되는데, 안타까운 것은 지금 조국 교회가 기도를 뜨겁게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냥 기도도 프로그램처럼 되어서, 그 시간, 그 순서에 따라 대표기도 한 번 하는 것으로 기도를 끝내고 있습니다.


기도 안 해도 교회가 별 탈 없이 잘 굴러가는 것 같고, 목사님들도 적당히 설교해서, 강대상에서 간간히 인기 얻는 우스갯소리나 하고.. 정작 기도에 목숨을 거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목회자가 기도에 목숨을 걸어야, 성도들이 기도의 불을 받고, 성도들이 결사적으로 기도할 터인데, 모든 성도들이 기도의 불을 받아야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지금은 ‘영적 추수의 계절’입니다. 지금은 주님의 재림을 목전에 둔 'end of ends' 시기입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이, 거의 다 성취되어 가고 있는 시점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한 사건은 ‘종말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21세기는 ‘종말의 끝’의 고통(birth pain)의 시기입니다. (시작과 끝을 유의하세요.)


깨어 기도하는 사람은 그것을 느낄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인도 미전도 종족에 선교하러 갔다가, 이튿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소스라치며 놀라서 일어나보니 꿈이었습니다. 꿈에 주님이 제게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이 당신의 손을 모으셔서 (귓속말 하듯이) 제 귀에 대시고,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음성이 아주 또렷이 제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아들아, 내가 곧 간다!”


저는 그 음성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서 일어나보니 꿈이었습니다. 여러분, 저는 신비주의자가 아닙니다. 제가 원해서 꾼 꿈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꿈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성령이 오시면 장래 일을 너희에게 말하시리라." (요 16:13)


하나님의 사람들이 날마다 기도하며 기도의 인공위성을 띄워놓고, 말씀 앞으로 나아가 기도하고, 마음을 담아 기도하고 영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들이 들려오게 됩니다.


세상 기업들도 10년 앞을 내다보고 준비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을 받은 교회가, 이 시대를 향해서 좌표를 정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언’이라는 것을 요즘 사람들은.. 개인의 사업을 어떻게 해야 되냐.. 집 이사를 어디로 가야 되냐.. 이런 것을 두고 ‘예언’을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고, 교회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고, 세상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결국 종말로 향해 갑니다.) 이런 사안에 대해 아버지의 마음을 풀어놓는 것이 예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은 이런 예언적 메시지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교회는 성공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는데, 지금은 성공 이야기를 논할 때가 아니라고 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언을 회복해야 합니다.



- 박원철 목사님의 녹취록 중 일부 발췌 -

“유럽 다문화주의는 실패했다” 무너지는 기독교의 중심
대거 유입된 무슬림으로 다양한 문화적 충돌 불가피, 사회 갈등도 급증
유럽인 떠난 자리 채우며 제1의 종교로 성장



▲ 유해석 선교사(총회이슬람대책위원회 전문위원)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이슬람은 서쪽에 찬란하게 빛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오늘날 그 예언이 실현되듯이 이슬람은 유럽에서 떠오르는 태양처럼 빛나고 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유럽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에 기독교 역사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마르틴 루터, 칼빈 등이 종교개혁을 일으켰고 개혁교회가 시작된 곳도 바로 이곳이다. 1세기 당시 중동이 기독교의 중심이였다면 그 이후 기독교의 중심은 유럽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아일랜드부터 러시아까지 이르는 유럽 전체의 무슬림 인구는 1970년1800만명이었던 것이 2000년에 들어서 3200만명이 되었다. 러시아는 오늘날 1500만명에서 2000만명의 무슬림이 살고 있다. 이는 러시아 전체의 10~14%에 달하는 인구이다. 서유럽에는 1600만명의 무슬림이 살고 있다.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출생율 차이를 보면 이슬람 인구가 더 많아질 것을 예상할 수 있다. 따라서 무슬림의 영향력은 유럽에서 더욱 커질 것이다. 중동역사학자인 버나드 루이스(Bernard Lewis)는 2004년 독일신문 벨트(Die Welt)와의 인터뷰에서 “늦어도 21세기 말에는 유럽의 인구는 무슬림이 다수가 될 것이다. 유럽은 서부아랍의 일부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유럽은 이슬람화 되어가고 있다.



유럽 다문화주의 시작의 배경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대규모 이민이 발생하였다. 인종차별주의자들로부터 시작된 전쟁의 피해를 알고 있던 유럽인들은 다문화 사회를 건설함으로서 그러한 일이 재발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로 인하여 다문화주의(多文化主義, multi-culturalism)가 시작되었다. 더불어 값싼 노동력과 함께 이민자들이 유럽에 들어왔다. 서유럽은 국가를 재건하기 위하여 노동력이 필요하였는데 프랑스는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에서 노동이민자들이 들어왔다. 1961년에 독일에서 터키인은 단지 수천명에 불과했었지만, 1976년 약 100만명으로 성장하였고, 1990년 중반에는 약 200만명으로 늘었다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터키 이슬람 인구 중에 3분의 2를 차지한다. 모로코인과 터키인은 네덜란드와 벨기에 이슬람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무슬림은 1960년 네덜란드 경제성장의 중심이었던 노트르담 인구의 반은 무슬림이다. 유럽연합의 수도인 브뤼셀의 인구 중 20%가 무슬림이다. 프랑크푸르트의 인구의 40%가 외국 여권을 가지고 다니는 이민자이며, 비엔나 인구의 20%가 무슬림이다. 1990년 이후에 두 배로 성장한 것이다.


유럽의 다문화주의 실패선언의 배경


동질문화권의 이동은 사회적 문제를 안겨다 주지 않았다. 유럽 안에서 유럽인 이주는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른 문화와 만남은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특히 이슬람과 만남은 더욱 그렇다. 유럽 정치지도자들은 다문화는 실패했다고 공언하였다.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독일 총리는 2010년 10월에 “다문화 사회를 건설해 공존하자는 접근법은 완전히 실패했다”고 선언하였다. 프랑스 사르코지(Nicolas Sarkozy) 대통령은 2011년 2월 10일에 ‘프랑스식 이슬람’이 아닌 ‘프랑스 안에서의 이슬람’은 반대한다고 선포하였다.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 총리는 2011년 2월 5일 독일 뮌헨의 국제안보회의 연설에서 “실패한 정책(다문화주의)을 접을 시간이 됐다”고 선언하였다. 스위스 베른대의 크리스티앙 요프케(Christian Joppke) 교수는 “적어도 유럽에서는 이슬람교도들 때문에 다문화주의가 후퇴했다”고 발표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다문화 실패를 선언하자 2월 7일 영국의 신문 데일리 익스프레스(Daily Express)의 칼럼니스트 레오 미킨스트리(Leo McKinstry)는 유럽에서의 다문화 실패 원인을 4가지로 꼽았다. 첫째는 이슬람 테러리즘, 둘째 무슬림에 의한 성폭력, 셋째 폭력적인 범죄, 넷째 마약이다.


1. 테러리즘. 수니파 무장단체IS(Islam State, 이슬람 국가)를 지원하기 위하여 약 2만 명의 외국인 참여하고 있는데, 뉴욕타임지에 의하면 유럽인들은 프랑스무슬림이 1200명, 독일무슬림이 500~600명, 벨기에무슬림이 440명 러시아무슬림 800~1500명이 있으며 그 외에 네덜란드, 스웨덴, 덴마크, 스페인, 이탈리아, 핀란드 등에서 참전하고 있다. 테러는 이슬람의 구원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꾸란 4:74).


2. 무슬림에 의한 성폭력. 유럽으로 오는 무슬림들은 남성들에게 여성들이 종속되는 문화를 가지고 있는 이슬람국가에서 오는 사람들이다. 이로 인하여 성폭력이 늘어났다. 영국국회 청소년 위원회(Children’s Commissioner) 부대표인 수(Sue Berelowitz)의 연구에 의하면 2010년부터 2011년까지 14개월 동안 영국에서 2409명의 소녀들이 무슬림 조직폭력배들에 의하여 성폭력을 당했다고 보고하였다.


3. 폭력적인 범죄. 프랑스 감옥의 반 이상이 무슬림이며, 어떤 감옥은 수감자의 80%가 무슬림인 감옥도 있다. 이탈리아 인구 중 무슬림은 2% 정도에 불과하지만 이탈리아 감옥의 평균 30%가 무슬림이다. 1991년부터 1995년 사이에 영국 감옥에서 이슬람 인구가 40%가 증가하였다. 특히 무슬림들은 감옥에서 서로의 동질성으로 인한 형제애와 이슬람 신앙을 굳게 다지며 매주 금요일마다 이슬람 예배에 참석하여 꾸란을 배우고 설교를 들으며 이슬람 원리주의에 심취하고 있다.


4. 마약. 젊은 무슬림들은 학교의 무단결석, 반달리즘(vandalism), 마약밀매, 범죄 및 조직폭력배들이 성장하였다. 브레드포드, 버밍햄, 런던의 빈민가에는 실업율, 도시부패 및 공동체의 부패를 경험한 젊은 무슬림들이 가족을 벗어나 폭력적으로 변하거나 마약을 모아 팔고 있다. 1990년대 영국 감옥에는 무슬림 수감자들의 숫자가 급증했으며 그 중의 4분의 1이 마약관련혐의로 잡혀온 사람들이였다. 이 외에 일어나는 문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5. 근친결혼. 2010년 BBC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영국에 있는 모든 파키스탄 이민자들 중 절반 이상이(55%) 사촌과 결혼했다. 이러한 근친결혼으로 인하여 영국에 사는 파키스탄 가족이 다른 가족에 비하여 13배 이상 유전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다. 이는 영국 NHS (Nation Health Service, 국가의료서비스)의 지출을 높이게 된다.


6. 샤리아 법의 도입. 유럽에 사는 무슬림 공동체 밖에는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고 있지만 무슬림 공동체 안에서는 이맘과 연장자들의 지배를 받으며 신본주의적 이슬람규범 안에서 살아간다. 이슬람 인구가 많아지면서 샤리아 법의 도입되었다. 샤리아(Sharia)는 이슬람 율법을 의미하는데 샤리아 법이 현재 영국 사법제도의 일부로 공식 편입되었다. 2008년에 영국 전역에서 85개의 샤리아 법정이 세워졌다.


7. 모스크의 급격한 성장. 유럽전체에는 약 9000개의 모스크(Mosque)와 기도처소(Musalla)가 있고, 약 7000개의 모스크가 서유럽에 있다. 1980년부터 이슬람의 각 종파들은 유럽을 종교의 상징이었던 거대한 성당과 교회건물과 경쟁하면서 그들의 건재를 과시하였다.


8. 여성할례. 무슬림 여성들에게 순결은 중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서양여성들은 성적인 자치권이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둘은 양립할 수가 없다. 이슬람에서 여성할례가 유럽에 살고 있는 많은 무슬림들이 시행되고 있다. 암스텔담 자유대학교(Free University)의 연구에 따르면 여성할례는 유럽의 이슬람사회에서 당연시 되고 있다. 이 일은 은밀하게 가족들과 친척들이 모여서 진행되고 있다.


9. 유럽사회에 동화되지 않는다. 만일 프랑스에서 무슬림들에게 당신의 국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무슬림’이라고 답변할 것이다. 영국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2007년 싱크탱크인 폴리스 익스체인지(Police Exchange)는 영국 무슬림의 3분의 1(31%)이 영국 사람들보다 다른 나라 무슬림들과 더욱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라마단 기간 동안에 유럽 무슬림의 70%가 금식을 한다.


10. 종교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 18세기 기독교를 공격한 계몽주의의 주무기는 ‘조롱’이였다. 하지만 이슬람에서는 이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2004년 네덜란드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화가 고흐의 5대 손자인 데오 반 고흐가 이슬람 여성에 대한 다큐멘타리를 제작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하였다. 종교와 표현의 자유가 공존한다는 사실은 무슬림이 유럽에 이주한 순간 과거의 일이 되어 버렸다.


11. 명예살인. 명예살인은 전 세계 이슬람 국가들과 유럽에 사는 이슬람 가정에서 행해지고 있다. 명예살인이란 가족 혹은 공동체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가족 혹은 조직 내 구성원을 살인하는 행위를 말하며 유럽에 살고 있는 무슬림들 사이에 만연되어 있다. 유엔인구활동기금(UNFPA)에 의하면 오늘날 전 세계에서 무려 1년에 5000명 정도로 하루에 평균 14명의 여성들이 명예살인에 의하여 희생되고 있다고 밝혔다.


12. 일부다처제실행. 꾸란 4장 3절에 의하면 이슬람은 일부다처제를 합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꾸란에서 한 남자에게 4명의 부인을 허용하고 있다. 전 세계 이슬람 인구 가운데 5~10%는 일부다처제를 시행하고 있다. 영국에 이슬람 인구가 많아짐에 따라서 한 남편에게 부인이 추가로 있는 경우에 혜택을 주는 법안을 마련했다. 일부다처는 프랑스에 몇 만 가구의 가족이 존재하며 그들은 대부분 무슬림이다.


13. 자국인들이 떠나간다. 이스라엘의 유대인협회(Jewish Agency for Israel)에 의하면 프랑스에서 2002년 무슬림들이 유대인을 공격하자 3000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캐나다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2004년에 네덜란드의 영화감독인 데오 반 고흐(Theo van Gogh)가 살해당하자 일주일 후에 네덜란드에서 이민을 담당하는 회사에 1만 3000건의 이민 관련 문의가 쏟아져 들어왔다. 유럽인들이 유럽을 떠나면서 그 자리를 무슬림들이 채워가고 있다.


이슬람에 대한 유럽의 실패원인


첫째, 이슬람에 대한 무지였다. 유럽인들은 이슬람을 쇠퇴해가는 종교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슬람은 성장하는 종교였다. 이를 예견한 사람은 프랑스의 작가인 힐러리 벨렉(Hilaire Belloc, 1870-1953)이었다. 그는 1938년에 “유럽인들은 이슬람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었다. 이슬람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쇠퇴해가는 종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슬람은 유럽문명을 상대했던 어마어마하고 집요한 적이며, 과거에 유럽을 위협했듯이 미래에서 위협으로 성장할 것이다.”


이제 이슬람은 유럽의 제1의 종교이다. 몇몇 서유럽 국가에서 교회와 모스크에 다니는 사람들의 숫자는 비슷하다. 그러나 전체 유럽의 상황을 보면 모스크에 참석하는 무슬림 비율이 훨씬 높다.


둘째, 유럽인들은 타문화에 대한 관대함을 보였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똘레랑스(Tolerence)는 관용을 의미한다. 유럽인의 이슬람에 대한 관대함은 유럽이 일으켰던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1799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제국주의는 그 후 2세기동안 이슬람권 전체에서 유럽의 각축장이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아랍세계를 나누어서 통치하였다. 이제 제국주의를 했던 그 후손들은 그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하여 무슬림들에 대한 관대함이 유럽의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셋째, 무슬림들은 계약된 노동기간이 끝나면 본국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유럽인구의 5~10%가 무슬림인구가 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유럽인은 없었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1983년부터 84년까지 독일의 경제공항 시기에 터키노동자들이 자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재정적인 지원을 했다. 이로 인하여 25만명이 실제로 터키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잠시뿐이었다. 이슬람권에서 억압과 차별을 피하여 유럽으로 오는 난민들이 많아지면서 이민자와 난민자들이 장기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한국은 서유럽과 같은 복지국가가 되기를 위하여 힘써 왔다. 다문화주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유럽은 이슬람 인구의 증가로 인하여 다문화주의는 실패했다고 선언하였다. 한국에도 이슬람 인구가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이민인구에 대한 정책은 권력을 지닌 정부의 영역이므로, 이를 정부가 미래지향적으로 감당해 주지 않으면 지금 유럽에서 보듯이 이슬람 인구 증가가 한국정세의 변화를 가지고 올 것이다. 한국기독교인들도 이슬람에 대한 지식과 대안을 가지고 다음세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여야 한다.



기독신문  ekd@kidok.com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104047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동성 간의 성행위: 신약성경은 무엇이라 말하나? (3) 

 

 

 

 

 

 

저자: 제프리 와이마 (Jeffrey Weima, 미국 칼빈 신학교 신약학 교수)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수정주의자들 (Revisionists)은 바울이 모든 형태의 동성애 행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남성에 대한 이성애적 지향을 지닌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성과 성관계를 가짐으로써 "비정상적인 (unnatural)" 방식으로 (헬라어 문자 그대로 표현하자면, "본성을 거슬러", para physin) 행하는; 유사하게, 여성에 대한 이성애적 지향을 지닌 남성이지만 ("같은 방식으로") 다른 남성과 성관계를 가짐으로써 비정상적으로 행하는, 특정한 형태의 동성애 행위만을 언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해석에 따르면 바울은 비정상적인 성관계 - 이성애에 대한 "자연스런" 욕망을 무시하고 동성인 사람들을 향한 "정욕으로 불붙은" 이성애자들 - 를 한정하여 비난하고있다. 이 견해는 물론 다른 더 고상한 형태의 동성애 관계 - 게이와 레즈비언이 자신들의 "자연스러운" 동성애적 지향성을 따르는 - 에 대해 사도가 승인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열어 둔다.

 

     그러나 이 미묘하고도 새로운 해석은 바울이 이 구절들에서 말한 핵심 주장과 모순된다: 동성 간의 성행위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위반하기 때문에 옳지 못하다. "부자연스럽다 (unnatural)"는 단어는 이성애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에 반해 행동하는 이성애자들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 이미 창조 때부터 수립된 계획 - 을 위반하는 동성애 행위를 의미한다. 바울이 사실 창세기의 창조 기록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은 그의 다양한 암시들에서 명백해 진다: 로마서 1:18-32절의 더 큰 문맥은 세상의 창조에 대한 언급이 있는 1:20절에서 열린다; 1:23절에 나오는 "새와 동물과 파충류"의 삼중 조합은 창세기 1:30절을 반영한다; 그리고 1:25절에는 "창조주"에 대한 언급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1:26절과 1:27절에서 각각 "여자들 (women)"과 "남자들 (men)"로 번역된 단어는 실제로는 "여성들 (females; th?lesai)" 과 "남성들 (males; arsenes)" 이며, 따라서 “하나님이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셨다” 라고 기록된 창세기 1:27절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주장은 분명하다: 여성과 다른 여성, 혹은 남성과 다른 남성 사이의 성행위는 “부자연스럽고 (unnatural)” 잘못된 것인데, 이는 그런 행위가 창조질서에 반하고 남성과 여성이 “자연스럽게” 다른 한 쪽과 짝을 지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각 성별 창조에 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로마서에서 바울이 주장한 또 하나의 요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사도는 동성애 행위에 빠진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런 게이와 레즈비언 관계를 인정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해 있다는 진지한 경고로 자신의 논의를 맺는다: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1:32). 동성애 행위는 그리스도인들이 단순히 무시하거나 용인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수정주의의 추가적 주장들

 

     필자의 이 간략한 글에서는 바울이 쓴 그 본문들에 대한 수정주의자들의 두 가지 추가적 주장을 제기하고 그에 대한 답변을 하는 약간의 여지만이 남아있다.

     첫째, 바울은 합의적이고, 일부일처제적이며, 장기적인 동성 관계를 포함하는 더 "고상한 (noble)" 형태의 동성애 사례들을 다루지 않았고 소년대상성행위나 매춘과 같은 착취적 관계들 만을 알고 있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이 일반적인 주장은 단지 거짓일 뿐이다. 여러 유형의 동성애 관계의 존재 ? 합의에 의해 성립된 그리고 심지어 일부일처제적인 동성 관계를 포함해서 ? 는 그 시대의 문헌에 잘 기록되 있다 (예를 들어, T. K. Hubbard가 편집한 그리스와 로마의 동성애: 기초 문서 자료집』 (Berkley, 2003); L. Crompton이 쓴 『동성애와 문명』 (Harvard, 2003)). 교육을 잘 받았고 다양한 지역을 여행한 사람인 바울은 그와 같은 소위 "고상한" 형태의 동성 관계에 대해 알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둘째, 바울은 [성적 취향으로서의] 동성애 지향 (same-sex orientation) 에 대한 어떠한 이해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그러한 무지가 동성 간의 행위에 대한 그의 비난을 상대화 시킨다는 주장이 자주 제기된다. 그러나 바울과 같은 고대의 작가들이 동성애 지향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하진 않았지만, 사실상 그들이 동성애 욕망은 생물학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는 풍부한 역사적 증거가 있다. 다른 남성들을 향한 성적 욕망을 지니고 태어난 남성들에 대해 바울 또한 알고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확실히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성적] 지향 (orientation) 은 아무런 차이를 만들지 못한다: 동성애 행위는 창조 시 하나님에 의해 수립된 남성-여성 관계를 침해하며 (롬 1:24-27), 하나님의 율법에 위배된다 (고전 6:9; 딤전 1:10).

 

 

오직 경험 (Sola Experientia) or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관련 신약 본문에 대한 이 짧은 개관은 성경의 후반부가 상반부와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성경은 어떤 종류의 동성애 행위도 죄가 되며 언약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음을 분명하고 일관성 있게 가르친다. 그렇다면 북미 기독개혁교회 (CRC) 가 직면한 진정한 문제는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의 문제다.  

     동성애 행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오직 우리의 경험 (sola experientia) ? 게이와 레즈비언과의 개인적 혹은 대중 매체를 통한 만남들 ? 에 의해 지배될 것인가? 세속적인 문화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것과 우리가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을 성경이 마침내 말하게 할 때까지, 우리는 모든 종류의 영리한 주장을 반항적으로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의 분명한 가르침에 복종 할 것인가?

     동성애 유혹에 빠져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시된 의도 밖에서 행하려는 성향들에 직면한 이성애자들과 궁극적으로 같은 위치에 있다. 개인적인 감정과 경험들이 동성애 관계에 대한 현재의 논의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반면에,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은혜는?

 

     동성애 행위 주제에 관한 마지막 단어는 법률과 판단이 아니라 은혜와 변화된 삶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나라의 회원 자격을 금지하는 다양한 종류의 그릇된 행위 ? 다른 남성들과 성관계를 가진 남성들을 포함한 ? 에 대해 경고 한 후, 그러한 죄악된 행위는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으로 그들의 지나간 삶의 일부가 되었음을 상기시킨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고전 6:11).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한 죄인도 성도로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이 복음의 기쁜 소식이다.

 

 
 

 

[1]<!--[endif]--> 미국 칼빈 신학교 Forum 2015년 가을 호에 “Same-Sex Activity: What Does the New Testament Say?” 라는 제목으로 실린 내용으로 번역 및 게재의 허락을 받고 게재합니다. 저작권은 Forum과 저자에게 있습니다.

 

 

http://reformedjr.com/board05_02/5958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동성애의 또 다른 이면을 조명해 논란이 된 화제작 시네마 다큐멘터리 "나는 더 이상 게이가 아닙니다"의 미주 시사회가 동부지역에서 열린다. 한국교회 동성애대책위원회와 “나는 더 이상 게이가 아닙니다"(제작 RT Media)의 배급을 총괄하고 있는 '호산나 넷 미디어'는 12월 8일 부터 남가주에 시작된 제1차 미주 시사회에 이어 제 2차 시사회를 미국 동부지역 뉴욕/뉴저지에서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번 동부 순회 시사회는 12월 13일(주일) 오후 4시 뉴욕 프라미스교회 (김남수 목사), 12월 15일(화) 저녁 8시 뉴저지 사랑과진리교회 (벤자민 오 목사)에서 차례로 열린다. 또한 이번 시사회는 한국어가 불편한 영어권 세대들을 위하여 영어자막이 제공되어 보다 다양한 연령층의 관람이 가능하다. (미주 동부 상영 문의, 최정은 간사 201-543-3553)

“나는 더이상 게이가 아닙니다”를 상영했던 남가주 선한목자 교회의 고태형 목사는 이번 영화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설명이 어려웠던 동성애의 모든 실체를 알게되는 놀라운 시간이였다고 말했다. 동성애를 반대하여 700만 달러의 교회재산을 포기하고 교단(PCUSA)을 탈퇴한 후 새롭게 교회를 개척한 고 목사는 이 영화가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는 이 시대에 그 어느 메세지보다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주 시사회 이후에는 2016년 1월 부터 한국에서의 전국 순회 시사회가 예정돼 있다. 2월초부터는 영국, 일본, 중국 등지에서도 상영을 계획중이다.

이 영화는 '탈동성애' 라는, 세상이 말해주지 않는 동성애의 숨겨진 진실을 보여주는 한국 최초의 동성애 관련 다큐영화다. 2분짜리 예고편이 유트뷰에 공개된 후 2주 만에 조회수 13만명을 넘어서며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뉴욕 출신 프로듀서이자 영화감독인 김광진 씨가 연출한 이 영화는 1년10개월에 걸친 사전조사와 탈동성애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 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비밀스러웠던 동성애자들의 삶을 조명한다. 각 시사회 후 한국에서 에이즈 환자치료에 헌신하고 있는 수동연세요양병원의 염안섭 병원장이 구체적인 통계와 자료로 에이즈의 실체에 대한 충격적인 강의도 이어진다.



“나는 더 이상 게이가 아닙니다” 시놉시스(구성내용)

2015년 6월 시청에서 벌어진 동성애 퀴어축제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힌다. 이 영화는 동성애는 그렇게 게이로 태어나는 것인가? 동성애를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으로 시작한다.

김유복씨는 이태원 언덕의 싸구려 쪽방에서 생활한다. 한국 트랜스젠더 제1호, 과거 이태원의 게이클럽에서 화려한 가수 생활을 했던 그는 기저귀를 차고 움직일 수 조차 없이 병든 몸으로 빨리 죽기만을 바라고 있다. 70평생을 동성애자로 살았던 그의 마지막 절규는 무엇을 의미 하는것일까?

카메라는 동성애를 탈출한 5명의 탈동성애자들 깊은 곳을 들여다 본다. 그동안 이 사회에 존재하는지 조차 몰랐던 탈동성애자들의 삶과 그림자. 그들은 다시 동성애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유혹과의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카메라는 또한 동성애의 가장 기피하는 어두움까지 들춘다. 동성애자가 버린 동성애자 그들은 바로 에이즈 환자들이다. 이 영화는 동성애의 모든 것, 그 시작과 결말까지 전부를 보여준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야 하고 또한 그 팩트를 대했을때 우리는 눈에 보여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탈동성애자들은 동성애는 절대 선천적인 것이 아닌 분명 치유될 수 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 영화는 자신의 성정체성 때문에 혼란스러운 영혼에게는 무엇이 진실이고 올바른 선택인지 명확하게 그 길을 안내할 것이고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 교회들은 어떠한 인식변화가 필요한지 또 어떻게 이들을 품고 구원할 수 있을지 분명한 답을 얻을 수 있을것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