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한창덕 목사(예장 개혁 이대위 위원장)의 월경 잉태설 논쟁에 관한 투고 글입니다. 아멘넷의 편집방향과 무관없습니다.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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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덕 목사(예장 개혁 이대위 위원장)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사도신경은 대부분의 개혁교회들이 믿고 고백하는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사도신경과 같이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중요한 골격을 제시하고 있는 신조들이 몇 가지 더 있다. 예를 들면,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나 벨직 신앙고백서, 그리고 하이델베르그 신조 등이다. 그래서 장로교에서는 세례를 줄 때나 직분자를 세울 때 아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믿고 고백하느냐고 질문을 꼭 한다. 그런데 누군가 이런 고백을 하는 자들은 ‘이단이다’라고 한다면 그런 고백을 하는 자들을 이단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강압적으로 그런 고백을 하지 못하도록 한다고 해서 그런 고백을 하지 말아야 할까?

최근에 한국교회가 월경 잉태설 문제로 시끄럽다. 어떤 사람들은 월경 잉태설을 ‘마리아가 예수님을 월경으로 낳았다’라는 것이라 정의 하고, 그것은 심각한 신성모독이며, 기독교의 근간을 헤치는 것으로 이단적 사상이라고 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주장을 문헌을 통해 맨 처음 한 단체는 합동 측 서북노회로 보이며, 개인으로는 그 노회에 소속되어 있던 구생수 목사로 보인다. 그래서 합동 측 서북노회에서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이단연구가라 할 수 있는 최삼경 목사에 대해 총회에  “최삼경 목사 이단성 여부 조사청원서”를 냈으며, 구생수 목사는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했는가. 월경으로 잉태했는가.」라는 책과 「실상은 사단의 회라」라는 책을 통하여 성령 잉태를 주장한 박윤식 목사가 월경 잉태를 주장한 최삼경 목사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 되었다고 하면서 통합 측과 한기총을 ‘실상은 사단의 회라’라는 식으로 공격을 하였고, 그 후 통합 측 북노회, 이정환, 예영수, 이광호, 황규학, 원성현, 이형기 교수 등도 같이 합세하여 공격하였다.

이 논쟁은 본래 최삼경 목사가 합동 측 서북노회에서 이미 이단으로 정죄된 박윤식 목사를 영입하자 “박윤식씨 이단 사이비 핵심 이단 옹호자에게 공청회를 제안한다”라는 제목으로 최삼경 목사가 그의 이단성을 2005년 6월 30일자 교회와신앙과 현대종교 8월호에 기고함으로 시작되었고, 거기에 대해 반발한 서북노회가 총회에 청원서를 냈으며, 합동 측 교수들은 “최삼경 목사가 “월경 없이 태어나면 인성이 부인 된다”고 말한 것은 정확하지 못한 말이요 불필요한 사색이지만 인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한 말인 동시에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말이 아니므로 최 목사의 진술은 이단성이 없는 것으로 사료된다.” 라고 하면서 이단성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합동 측 교회들은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교회가 들고 일어났으며, 총신대 신대원 학생들은 조기를 달고 수업하였고, 서북노회를 아예 없애버려야 한다는 헌의도 빗발쳤다. 그래서 결국 2006년도 9월 총회에서는 서북노회 노회장인 박충규 목사가 공개사과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논쟁해야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서북노회가 공개사과 하였다는 것은 사실상 그 논쟁의 종결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그 논쟁은 계속되어야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 논쟁은 ‘월경 잉태설’ 혹은 ‘난자 잉태설’이란 이름으로 계속 되었으며, 한기총에서도 최삼경 목사를 공격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주장을 하면서 최삼경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하였고, 심지어 돌고 돌아 합동 측에서조차 불과 5~6년 전의 결의와는 정반대로 최삼경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하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면 이 논쟁의 원인은 무엇이고, 주된 쟁점은 무엇이며, 그리고 누가 과연 옳은 것일까?


1. 문장 조작

최삼경 목사가 월경 잉태설을 주장했다는 것은 사실 심각한 문장 조작이다. 그는 박윤식 목사가 사람을 월경으로 낳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두 종류로 나누면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월경으로 낳은 자이지만 성경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세 사람 있다고 하며, 그 사람들이 이삭과 세례요한과 예수님이라고 하자 그것을 문제 삼으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 했었다.

월경이란 인간의 피를 말하는 것이다. 월경이 있다는 말은 아이를 생산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피로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임신을 하면 월경이 없어지는데 그 피가 아이에게 가는 것이다. 그 피로 아이를 기르는 것이다. 이들에게 혹 눈에 보이는 월경이 없었다고 하여도 월경 없이 태어났다는 말은 결국 이삭과 요한은 사라나 엘리사벳의 피를 받지 않고 태어났다는 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박씨의 성적 모티브가 없이는 이런 말이 나올 수가 없다. 역시 통일교 출신의 변찬린씨의 영향 때문에 나온 말이다.

예수님도 월경 없이 태어났다는 말이 기독론적으로 맞는가? 이 말도 아주 이단적인 말이다. 예수님이 월경 없이 태어났다는 말 속에는 예수님의 인성이 부정되고 만다. 우선 마리아는 요셉의 정액에 의하여 임신하지 않았다는 말은 성경이 주장하는 사상이다.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의미가 그렇다. 그러나 월경 없이 태어났다는 말은 마리아의 육체를 빌리지 않고 태어났다는 말과도 같이 된다. 굳이 마리아의 몸에 들어가 10달이나 있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리아에게 월경이 없었어야 예수님의 무죄를 증명한다고 한다면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천사처럼 마리아의 몸을 빌리지 않고 그냥 오셨어야 한다.

앞의 이삭과 요한 두 사람은 어머니의 경도가 끊어졌을 때(엘리사벳에게는 그런 말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임신하게 하였기 때문에 그런 말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마리아의 경우는 다르다. 마리아가 월경이 없었다는 말은 마리아의 피 없이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에서 자랐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인성이 부정되는 결과를 가져오고도 남는다.

최삼경 목사는 박윤식 목사가 사람들을 ‘월경으로 낳은 자’와 그렇지 않은자로 나누면서 예수님을 ‘월경 없이 낳은 자’라고 하자 그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그의 주장을 그대로 이용하여 마리아가 예수님을 월경 없이 낳았다면, 즉 예수님의 인성이 마리아의 피와 관련이 없다면 그것은 그분의 인성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라고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최삼경 목사는 그가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월경으로 낳았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문장을 조작하여 최삼경 목사를 월경 잉태설을 주장하는 자라고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와 비슷한 공격은 필자도 당하였다. 필자는 합동 측 서북노회에서 최삼경 목사에게 이단성이 있다며 11가지 항목으로 조목조목 지적히면서 총회에 올린 글을 보고 오히려 거기에 이단성이 있다며 지적하면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 최삼경 목사를 공격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람인 이정환 목사는 “박윤식의 이단정죄는 사실이 왜곡돼 최삼경, 자신의 월경잉태론 벗고자 박윤식옹호론자로 이단정죄요구”라는 제목으로 글을 이단 옹호언론으로 규정된 에클레시안(로엔처치)에 올리면서 필자에 대해서도 신성과 인성이란 말을 다 빼버리고 심각한 문장 왜곡을 통하여 “예수는 성령이 마리아의 난자를 이용해서 낳은 피조물”이라 했다고 하면서 통합 측의 총회에 이단성 조사 헌의를 했다고까지 하였다.


2. 혈통 유전설과 예수님의 인성

이 논쟁에서 문제시 되는 것은 신성모독과 심각한 기독론적 오류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중요한 쟁점은 통일교식 혈통 유전설과 예수님의 인성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문장조작을 통하여 예수님을 월경으로 낳았다는 것은 신성모독이요, 마리아의 피를 받았다는 것은 죄로 오염된 인간의 피를 받았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고, 따라서 그분을 구속주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 하며 심각한 이단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주장은 피 속에 죄가 있고 피를 통해 죄가 유전된다는 통일교식 혈통 유전설을 배경으로 한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변질시켜 신성모독이라고 한 것이다.

성육신은 삼위일체 중 제 2위의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당신의 인격으로 하나님 되심의 중단됨이 없이 예수님의 법적 아버지인 요셉과 상관없이 마리아의 살과 피를 취하여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신· 인으로 탄생하신 사건이다. 그래서 그분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인류의 일원이 되셨으며, 신성과 인성을 지니셔서 신성으로는 하나님과 동일본질이시고, 인성으로는 우리 인간과 동일본질이셔서 완전한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완전한 사람이기도 하신 분이다. 그래서 그분의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차이가 있다면 그분은 다만 죄가 없으시다는 것이다.

그분은 신인 양성을 지니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하거나 두분(두 인격)이라거나 신성이 변하여 인성이 되거나 인성이 변하여 신성으로 화하지도 않고, 두 성품이 합쳐져서 제 3의 성품이 되지도 않는다.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성을 입으셨다 하더라도 성자의 인격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되는 분이시다.

기독론에 있어서는 대표적인 네 가지 이단이 있다. 하나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가 있고, 또 하나는 그분의 인성을 부인하는 아폴리나리우스주의(예수님의 영혼의 자리에는 로고스인 하나님이 있고 껍데기만 사람이라고 함)가 있으며, 또 하나는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하여 이중인격이 되게 하는 네스토리우스 주의가 있고, 나머지 하나는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어 제 3의 성품이 되었다고 하는 유티케스주의가 있다.

그런데 최삼경 목사를 공격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인성은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거나 천적실질을 주장하고, 예수님의 두 성품 중 신성만 있는 것처럼 그분이 마리아의 살과 피를 취하여 성육신 하셨다는 것을 신성모독이라 하며, 죄가 마치 물질이나 되는 것처럼 죄가 피 속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성육신에 대해 신성모독이라 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분이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혜라 하며, 죄는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이 있는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을 용납할 수가 없다. 죄를 만약 피 속에 들어 있는 어떤 물질이라 한다면 우리는 코피만 흘려도 죄가 없어지고, 수혈만 받아도 죄가 많아지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말이나 되는 것이겠는가?


3. 이정환 목사의 문제점

이정환 목사가 소속되어 있는 통합 측 북노회에서는 합동 측 서북노회와 거의 같은 논리로 최삼경 목사의 이단성을 조사해달라고 질의서를 총회에 제출하였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 통합 측 총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최종 보고서에는 올라있지 않지만 이단대책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내 놓았다.


4. 최삼경목사의 글에 대한 신학적 판단

a.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최삼경목사가 자극적이고 불경스럽게 보이는 “월경”이란 단어를 예수님과 관련하여 사용한 것은 박윤식 이단 집단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불가피한 면이 있다. 물론 최삼경 목사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한 인성을 긍정하면서 그분의 신성 또한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월경으로 태어났느냐’는 공격은 최삼경 목사 이전에 칼빈도 받았다. 당시 재세례파와 논쟁하는 과정에서 칼빈은 이와 같은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칼빈은 당연히 재세례파의 이러한 공격을 논박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기독교 강요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그들 무리 중 몇몇은 부끄러움을 옆으로 던져 버리고 너무나도 터무니없이 우리가 그리스도는 처녀의 월경의 씨에서 잉태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지 질문한다. 이에 대하여 나는 도리어 그들에게 예수님이 그의 어머니의 피와 연결되지 않았는지 반문할 것이다 - 그들은 이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칼빈, 『기독교강요』, 2. 13.3)

Some of their tribe, however, casting shame aside, too wantonly ask whether we mean that Christ was engendered of the virgin's menstrual seed. In return I shall ask them whether he did not unite with his mother's blood - which they will have to admit.(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I. 13. 3)

b.

예수님이 마리아에게서 피와 살을 받지 않았다는 주장은 당시 재세례파의 대표자들인 멘노 시문스(Mennon Simmons), 덕 필립스(Dirk Philips) 등이 주장한 사상이었다. 이에 대해 칼빈을 비롯한 개혁파 진영에서는 예수님의 몸은 마리아와 실체적인 연결(substantial unity)을 갖는다는 주장으로 이 견해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그 후 우리 교단의 전통인 개혁파 진영에서 만든 몇몇 신조에서도 칼빈의 이러한 사상은 확인되고 있다. 이 부분에 해당되는 신조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벨직 신앙 고백서(Belgic Confession, 1561년)

18항: 성육신(Article 18: Incarnation: )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어머니로부터 인간의 살을 취하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재세례파 이단들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그리스도는 자녀들의 살과 피를 공유하며, 육체에 따른 다윗의 허리의 열매이며, 육체를 따라 다윗의 씨에서 나셨으며, 동정녀 마리아의 자궁의 열매이며, 여인에게서 나셨으며, 다윗의 씨요, 이새의 뿌리의 가지이며, 유다지파에서 나셨고, 육체를 따라 유대인들에서 나셨으며, 아브라함의 씨에서부터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다. 그리하여 모든 면에서 그의 형제들과 다름이 없으시나 죄는 없으시다. (Therefore we confess, against the heresy of the Anabaptists who deny that Christ assumed human flesh from his mother, that he "shared the very flesh and blood of children"; that he is "fruit of the loins of David" according to the flesh; "born of the seed of David" according to the flesh; "fruit of the womb of the virgin Mary"; "born of a woman"; "the seed of David"; "a shoot from the root of Jesse"; "the offspring of Judah," having descended from the Jews according to the flesh; "from the seed of Abraham"-- for he "assumed Abraham's seed" and was "made like his brothers except for sin."(http://www.reformed.org/documents)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The Heidelberg Catechism (1563년)

질문 35,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뜻은 무엇입니까?*What is the meaning of: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born of the Virgin Mary?")
대답: 그것은 현재나 장래나 참되며 영원한 하나님이신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로부터 참된 사람의 본질을 취하셨으며, 따라서 다윗의 참된 씨가 되었으며, 죄가 없으신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다는 뜻입니다.(That the eternal Son of God, who is and remains true and eternal God, took upon himself our true manhood from the flesh and blood of the Virgin Mary through the action of the Holy Spirit, so that he might also be the true seed of David, like his fellow men in all things, except for sin.(The Constitution: Part I, The Book of Confessions, P.C.U.S.A))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년)

18장 2항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격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한 참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와 한 본질이시며 동등하신 분이시다. 때가 찼을 때 삶의 본질적인 속성과 공통된 연약함을 가진 사람의 본성을 입으셨으나 죄는 없으셨다. 성령의 능력에 의해 동정녀 마리아의 자궁 안에서 그녀의 본질을 취하셔서 잉태되셨다. 그리하여 완전하면서도 완벽한 그리고 전적으로 구분된 두 본성인 신성과 인성이 분리됨이 없이 한 인격에 연합되셨는데 변화나 혼합이나 혼동이 없으시다. 이 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며 하나님과 사람의 단 하나의 중보자이신 한 분 그리스도이시다.( The Son of God the second Person in the Trinity, being very and eternal God, of one substance, and equal with the Father, did, when the fullness of time was come, take upon him man's nature, with all the essential properties and common infirmities thereof, yet without sin; being conceived by the power of the Holy Ghost, in the womb of the Virgin Mary, of her substance. So that two whole, perfect, and distinct natures, the Godhead and the manhood, were inseparably joined together in one person, without conversion, composition, or confusion. Which person is very God and very man, yet one Christ, the only Mediator between God and man.(The Constitution: Part I, The Book of Confessions, P.C.U.S.A))

본 교단의 헌법의 요리문답 (2007년)

문 22.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어떻게 사람이 되셨습니까?
답.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참 육신과 영혼을 취하심으로써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는 성력의 능력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그에게서 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

c.

따라서 예수님이 마리아의 살과 피를 취하셨음에도 어떻게 죄가 없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 장로교회의 전통은 성령의 능력이라고 대답한다. 그리하여 본 교단은 예수님이 사람의 살과 피를 취하여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인성을 가지셨으나 성령의 능력으로 죄는 없으시며 따라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이심을 고백한다.

그런데 이정환 목사는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대위 연구보고서가 문제가 되는 것은 최목사의 월경잉태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예수님이 마리아에게서 피와 살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오도하고 이같은 비판을 이단자들의 주장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마리아를 통해서 성육신하심과 실체적 인성을 취하신 것을 부정한 사실이 없다. 그럼에도 해 연구보고서는 월경잉태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이단자로 몰아가는 최삼경 목사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이정환, 최삼경목사의 마리아 월경잉태설, 무엇이 문제인가? p. 9)

이정환 목사는 최삼경 목사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마리아의 살과 피를 받지 않았다는 주장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최삼경 목사를 공격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말 할 것도 없고, 당장 자신도 「최삼경 목사의 마리아 월경잉태설,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책을 쓴 이유에 대해서도 “필자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최삼경 목사의 월경잉태 주장의 실체와 문제점을 지적하고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그릇된 주장을 바로 잡고자 함과, 동시에 “예수님은 마리아의 월경과 무관하게 성령으로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예수님은 마리아의피를 단 한 방울 받지 않으셨다”는 내용으로 신문에 기고하자 최삼경 목사가 이단성이 있다며 연구, 조사하여 줄 것을 제 95회 총회에 헌의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필자의 주장을 밝히는 것이 마땅하다는 판단하에 이 글을 써서 알리는 또 한 가지 이유이다.”(이정환, 최삼경목사의 마리아 월경잉태설, 무엇이 문제인가? p. 10)라고 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정환 목사는 자신이 예수님은 마리아의 피를 단 한 방울도 받지 않았다고 해 놓았으면서도 자신을 포함하여 최삼경 목사를 공격한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기도 한다.

“태아의 성품은 산모의 피를 받아 먹음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부모의 전인적인 유전형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즉 부모로부터 (생식세포를 통해) 물려받은 유전자와 임산부의 행동양식과 그가 처한 환경적 요인에 의해 아기의 신체적 특성과 성품이 형성되는 것이다.”(이정환, 최삼경목사의 마리아 월경잉태설, 무엇이 문제인가? p. 25)

이정환 목사는 최삼경 목사와 필자를 난자 잉태설이라 공격한다. 난자란 피조물인 마리아의 것이기 때문에 그 난자로 예수님의 인성이 형성되어졌다면 그것은 그분을 피조물이 되게 하는 것이라는 논리이다.

이것은 신· 인 양성을 지닌 예수님을 신성의 잣대로만 가지고 그분을 피조물이라고 했다는 그릇된 주장이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공격해놓고는 정작 그 또한 예수님의 인성이 마리아의 생식세포, 즉 그의 난자로 말미암아 형성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을 보면 생식세포에 대해 “생식을 통해 유전정보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세포”라고 요약한 다음 “다세포생물이 유전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세포이다. 생물의 종류에 따라서 형태나 생성방법에 매우 다양한 차이가 있으며 특히 무성생식에서는 포자가 생식세포다. 유성생식에서 생식세포는 배우자가 되며 이는 일반적으로 정자와 난자를 의미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참, 이런 어처구니 없는 주장들에 대해 놀아나는 한국교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성경의 오류를 찾았다"… 해외언론 보도 '논란

 

최근 일부 해외언론들이 "유전학 연구로 구약성서의 오류를 발견했다"고 보도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이에 대해 기독인들이 정정 보도를 요청했으나 한 곳만 받아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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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들은 지난 2008년 8월 5일 레바논 시돈시에서 3700년된 가나안 시대의 인간해골을 발굴했다. 학자들은 영국 대영박물관과 함께 10년간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연구해왔다.ⓒ데일리굿뉴스 

 

"고대 가나안인 멸종… 사실과 달라" 주장 

 

과학 웹사이트 펄스헤드라인은 "성경은 틀렸다. 고대 가나안 사람들은 살아남았고, 현재 그들의 DNA는 레바논에 산다"고 보도했다. 영국 데일리 메일도 "청동기 시대 DNA는 가나안 사람들이 멸망했다는 성경의 주장을 반증한다"고 보도했다.

 

영국 텔레그라프도 국제적인 유전학 학술지 에 발표 된 연구가 성경을 반증했다고 보도했으나 이후 몇 가지 사항을 검토한 후 정정 보도를 하고 기사를 수정 한 것으로 나타났다.

 

텔레그라프는 "성경에서 가나안인은 멸종됐다고 기록되었으나, 성경의 다른 부분에선 완전히 멸종되지 않은 것으로 기록됐다"고 보도한 바 있다.  

 

여러 언론의 보도로 관심이 집중되자 유전학자와 고고학자들은 동부 지중해 연안에서 발견된 3700년 전 시돈시 다섯 사람의 화석과 레바논 사람 99 명의 유전자 전체를 해독하고 이들 사이의 유전적 관계를 분석했다.

 

연구팀은 미국유전학학회지에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오늘날 레바논 혈통의 90% 이상이 가나안인에게서 왔으며 나머지는 다른 유라시아 인들에게서 유래했다. 하지만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 중 언제쯤 가나안 도시가 사라졌는지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언론기사, 오히려 성경의 사실 입증했다"

 

이에 대해 신학박사 마이클 브라운은 성경에 이미 해답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명기 20 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나안 사람들을 완전히 멸망 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사명을 완수하지 않았다. 따라서 레바논 사람들은 멸종되지 않았고 이번 DNA발견은 오히려 성경의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이번 언론보도는 'DNA 발견으로 성경의 주장을 입증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기독교 변증가인 그레그 쿠글도 가나안 사람들에 대한 기사를 지적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정복을 완료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가나안 사람과 살았다"며 사사기 3장의 말씀을 인용했다. 

 

최에녹 ⓒ 데일리굿뉴스

가져온 곳: USA 아멘넷

바울의 증언

 

     바울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1세기 유대인 이었기 때문에 동성애 행위에 대한 그 당시 유대인 사회의 만장일치적 비난에 의해 비슷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또한 성적인 문제에 관해 사도 바울은 일반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다. 예를 들어, 그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라”고 명한다 (살전 4:3-5). 바울은 한 남자와 그 계모와의 성적관계를 묵인하고 (고전 5:1-11) 매춘 여성들과 성행위에 빠진 회원들을 용인한 (고린도 전서 6:12-20) 고린도 교회를 강하게 책망한다. 성적인 문제에 관한 사도의 입장은 무척 보수적이어서 에베소 성도들에게 너희 중에는 성적 부도덕함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쓰고 있다 (엡 5:3). 바울의 유대인으로서의 배경과 성행위에 관한 그의 진술에 비추어 볼 때, 사도가 동성 간의 성행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대략 예상할 수 있다. 이것은 사실 동성애 행위에 대해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세 본문 - 로마서 1:24-27; 고린도전서 6:9; 디모데전서 1:10 - 에서 드러나는 바울의 분명한 입장이다.

     고린도전서 6:9절과 디모데전서 1:10절을 먼저 살펴보자. 이 두 본문은 말라코이 (malakoi) 와 아르세노코이타이 (arsenokoitai) 라는 단 두 개의 헬라어 단어로 동성애 행위를 다룬다. 다음은 두 단어가 함께 등장하는 문맥이다: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 (men who have sex with men; malakoi and arsenokoitai) 나 (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린도전서 6:9-10)

(8)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9)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10)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 (those practicing homosexuality; arsenokoitai) 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디모데전서 1:8-11)

 

     문제의 핵심은 어떻게 이 두 가지 헬라어 단어 각각을 정확히 번역할 것인가에 놓여 있다. 수정주의자들 (Revisionists) 은 이 단어들이 학대적인 형태의 동성애 행위, 즉 성인 남성과 소년 간의 성행위 (pederasty) 와 매춘에 한정해서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바울은 당시에 일반적이었던 이런 특정한 종류의 동성 간 성행위의 착취적 성격을 거부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고린도전서 6:9와 디모데전서 1:10은 우리 시대의 특징인 합의된, 일부일처제적인 동성애 관계를 비난하는 데 사용될 수 없다.

     이 해석은 최소한 세 가지 중요한 문제들에 시달린다.

     첫째, 바울이 소년대상성행위 (pederasty) 와 같은 착취적인 동성애 관계만을 보여 주었다면, 그는 정확히 똑같은 성행위를 언급하는 몇 개의 헬라어 단어들 - 바울 동시대의 저서들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사용되던 - 중 하나를 사용하여 쉽게 이것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영어 단어 pederast [소년과의 남색] 를 파생시킨 헬라어 단어 paiderast?s).

     둘째, 고린도전서 6:9절과 디모데전서 1:10절에서 바울이 독특한 단어 arsenokoitai 를 사용함에는 레위기 18:22절, 20:13절과 관련된 구약적 암시가 있다. 이 단어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 복합어이다: ars?n 은 "남성"을 의미하고, koit? 는 문자 그대로는 "침대"를 의미하지만 침상에서 일어나는 성행위를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다. 헬라어를 모르는 사람조차도 arsenokoitai 라는 복합어의 두 부분이 레위기 18:22절과 20:13절의 헬라어 번역에서 나온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레위기 18:22절: kai meta arsenos ou koim?th?s? koit?n gynaikeian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레위기 20:13절: kai hos an koim?th? meta arsenos koit?n gynaikos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동성애 행위를 다루는 두 가지 핵심 본문에서 바울이 사용하는 독특한 단어가 레위기 18:22절과 20:13절에서 유래한다는 것은 왜 중요할까? 이 구약의 본문은 소년대상성행위 (pederasty) 나 매춘과 같은 착취적인 성행위가 아니라 모든 형태의 동성 간의 성행위를 다루기 때문에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가 아마 두 남자 사이의 어떠한 종류의 성행위도 금지된 모세의 율법을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가능성은 디모데전서 1:8-9절에서 구약 율법에 대한 언급인 "율법"이라는 단어가 두 번 사용됨에 의해 확증 된 것 같다. 바로 다음 구절에서 바울의 arsenokoitai 라는 단어의 선택은 그가 착취적 동성애 행위 뿐만 아니라 남성이 남성과 더불어 동침하는 것에 대한 구약의 포괄적인 금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셋째로, 고린도전서 6:9절에서 두 단어, 말라코이 (malakoi) 와 아르세노코이타이 (arsenokoitai) 가 짝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부드러운" 또는 "여성스러운" 것을 의미하는 첫 번째 용어는 성관계에서 여성의 역할을 하면서 다른 남성이 자신에게 삽입하도록 허락하는 남성을 일컫고, 두 번째 용어는 다른 남성에게 삽입하는 남성을 의미한다는 것에 대해 문법학자들 사이에 광범위한 의견일치가 있다. 이 의견의 일치는 NIV 2011 과 ESV 번역성경에 반영되어 있고, 둘 다 이 구절에는 정확히 동일한 텍스트 노트가 있다: "남성과 성관계를 갖는 남성을 의미하는 이 단어들은 동성애 행위에 수동적 혹은 능동적 참여자들을 나타내는 두 개의 헬라어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바울은 이 두 단어를 짝 지음으로써 좁게 소년대상성행위 (pederasty) 나 성매매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동성애 관계이든 수동적이거나 능동적인 파트너 모두를 포괄적으로 일컫고 있다.

     로마서 1:24-27절로부터의 마지막 본문은 가장 중요한데, 이는 그 길이, 게이 (gay) 및 레즈비언 (lesbian) 행위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 그리고 그 논법 (argumentation) 때문이다: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큰 문맥 (롬 1:18-32) 은 이 구절들에서의 바울의 주된 목표가 동성애 행위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동성애 행위가 - 우상숭배에 덧붙여 (1:21-23, 25) ? 인간의 죄의 정도에 대한 또 다른 예가 되는 지와 그러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왜 정당화되는지를 논증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사도의 말씀은 날카롭고 분명하다: 여성이 다른 여성과 성관계를 갖는 것과 남성이 다른 남성과 성관계를 갖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한 죄된 행위이다.

 

 


[1]<!--[endif]--> 미국 칼빈 신학교 Forum 2015년 가을 호에 “Same-Sex Activity: What Does the New Testament Say?” 라는 제목으로 실린 내용으로 번역 및 게재의 허락을 받고 게재합니다. 저작권은 Forum과 저자에게 있습니다.



http://reformedjr.com/board05_02/5799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기복 신앙 그리고 기복 설교 무엇이 문제인가?

 

LA기윤실, 건강교회 교실 ‘건전한 설교’ 세미나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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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기윤실 주최 건강교회 교실 세미나에서 조주현 목사가 강의하고 있다.

 

LA기윤실(대표 박문규)은 6회에 걸쳐 건강교회교실 세미나를 개최할 예정인 가운데 그 첫 번째로 ‘건전한 설교’란 주제의 세미나가 지난 7월 29일 캘리포니아 인터내셔널 유니버시티(CIU)에서 개최되었다. 오는 8월 5일에는 ‘교회 정치’ ‘교회 정책 결정 구조와 운영’이라는 제목으로 박문규 기윤실 대표가 강의할 예정이다. 다음은 이날 조주현 목사(LA 기윤실 간사)의 강연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편집자]

 

기복(祈福)이란 무엇인가? 

 

과연 성경에서는 복을 구하는 것을 잘못이라 하는가? 기복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신에게 복을 비는 종교적 행위이다. 신에게 복을 구하는 행위가 과연 잘못된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답을 할 필요가 있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이 신에게 복을 비는 행위를 아주 자연스러운 인간의 행위라고 보고 있다. 또한 복을 비는 행위를 위한 여러 형태의 예배(굿)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인이다. 기독교에서도 하나님께 복을 비는 행위가 정당한 것인지, 혹은 잘못된 것인지 우리는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기독교의 가장 큰 권위인 성경에서 우리는 그 정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많은 설교자들이 성경의 많은 구절 중에 기복 행위에 정당한 근거를 주는 구절이 있다고 주장하는 가장 핵심적인 구절을 살펴보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

 

과연 이 구절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성경적 의미일까? 그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마태복음에는 “좋은 것(마7:11)”을 주신다는 것으로 답을 주시고 있다. 악한 자라도 자녀에게 악한 자가 생각할 때 “좋은 것”으로 주는데, 하늘의 하나님께서 자녀의 구함에 진정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누가복음 11장 13절에는 그 “좋은 것”을 구체적으로 “성령”으로 가르치신다.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기복의 행위를 금지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성경의 뜻은 기복을 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복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성경에서 알 필요가 있다. 이때 우리는 건강한 기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건강한 기복신앙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럼 복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복과 성경 밖의 복은 무엇일까? 건강한 기복신앙이라는 말이 좀 어색하다. 그 이유는 현대의 기복신앙이 병들어있기 때문이다. 아니 기복 신앙을 우리 인간들은 자신의 욕심으로 인하여 늘 왜곡된 “복”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진정한 복을 “하나님”이라고 선포한다. 창세기 15장 1절에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상급이 무엇인지 말씀하신다. 바로 복과 상급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의 복은 무엇인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원하며, 창조주 하나님과 동행하며, 창조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신앙이 아니다. 태초의 인간은 하나님보다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선택하게 된다. 즉 창조주보다 피조물이 더 보암직도하고, 먹음직도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 이것이 타락이요 이것이 죄악이다.

 

즉 인간의 욕심은 죄를 낳고, 그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인간의 욕심과 결함(혼인, 동거-성경에서는 이렇게 비유하고 있다.)하는 존재인 사탄과 함께 낳은 그 죄가 바로 병든 기복신앙이다.

 

우리는 우리의 건강한 신랑이신 예수님(창조주)과 동거하여 의의 나라를 이루어야 진정한 복임을 늘 망각한다. 그리고 마치 피조물을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께 구하며, 하나님을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시키는 그릇된 신앙이 현대의 기복신앙이다.

 

병든 기복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정한 복인 임마누엘 하신 하나님과의 동행이 건강한 기복신앙이다. 성경이 원하는 복을 구하는 신앙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하는 그 신앙을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설교는 성경적 복을 설명하고, 가르치며, 선포하는 예배의 핵심이다. 

 

성경적 복과 관련이 없는 목사의 설교는 무속(shamanism)의 굿보다 위험하다. 설교는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 것이다. 설교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라 사기인 것이다. 설교에서 복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정확히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을 말해야 한다.

 

요즘 주보를 보면, 목차에서 설교라는 단어 대신 “말씀”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말씀”이라는 말은 “성경”이라는 말과 동의적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기독교의 전통이었는데, 이제 주보의 목차에서 “성경봉독”과 “설교”를 “성경 구절”과 “말씀”으로 목사의 설교의 권위를 마치 하나님의 말씀의 위치로 격상하는 시대에 있다. 그렇다면 진정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나는 그런 예배의 목차에 대한 단어 선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중요한 설교에서 “복”이 마치 사업의 성공, 건강, 명예, 재물, 자녀의 대학합격, 등으로 설명되는 것이 문제이다. 또한 그 “욕심의 죄악”이 “복”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욕심과 죄를 도와주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더 문제일 수 있다.

 

현재의 기복주의 신앙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거짓 선지자의 거짓 기복신앙에 성전이 무너졌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복”을 알았다. 건강한 기독교인의 “복”은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과 동행하며, 꼭 물질적 성공의 길이 아니어도, 그 길이 고난과 핍박, 환란과 고통, 그리고 십자가의 길이어도 주님께서 계신 그 길이 복인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기복주의는 늘 “복이신 하나님”을 “다른 복을 주시는 복의 도구”로 만드는 것이다. 이때 우리의 신앙은 병들게 되고,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도 감사가 아닌 불평만을 하는 것이다. 분명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서 주장하시는데, 늘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한 감사가 아닌 불평만을 기도하며, 피조물의 기쁨(쾌락)만을 추구하는 기도를 하게 된다.

 

우리의 기도를 살펴보자. 첫 몇 마디만이 감사이다. 그 후에는 하나님을 피조물의 기쁨 즉 쾌락을 주는 도구로 사용하여 많은 세상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를 한다. 그러나 건강한 성도는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할 수 있다. 아니 진정 건강한 성도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찾아오실 때, 이런 고백을 한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베드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이사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년에 고백을 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사실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건강하고 성경적인 기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구하며,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고백은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구할 자격이 있는 존재인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위치의 존재인지, 우리가 과연 하나님과 동행할 능력이 있는 존재가 아님을 고백한다. 즉 복이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인 것이다.

 

병든 기복주의는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피조물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창조주를 무시하는 신앙이다. 그래서 건강한 기복신앙을 소개하였다.

 

우리가 건강한 기복신앙으로 감당할 수 없는 큰 복이신 하나님을 구할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존재를 깨달으며 더 겸손함과 회개, 그리고 한없는 감사의 삶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건강한 신앙인이 될 것이다.

 

ⓒ 크리스천위클리

가져온 곳: USA 아멘넷

유투브

저자: 제프리 와이마 (Jeffrey Weima, 미국 칼빈 신학교 신약학 교수)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신약성경은 동성 간의 성행위에 대해 무엇이라 말할까? 이 질문에 관한 답은 종종 이야기되는 것보다 더 분명하다. 그 답은 또한 논란이 되는 이 주제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어떠한 경험이나 감정보다 더 중요하다. 동성애자인 친구나 가족 구성원과 함께 했던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이들 중 동성애자가 있다면 당신의 경험 및 감각 또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동성 간의 성행위 문제와 관련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궁극적으로 중요한 유일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인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바이다.

 

 

예비적 관찰

 

   신약성경의 관련본문들을 살펴보기 전 선행되어야 할 몇 가지 예비적 관찰들이 있다.

   첫째, 성향행위 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우리가 살펴볼 신약의 본문들은 성적 행위를 가리키며 동성애 성향을 다루지는 않는다. 성경은 분명히 동성 간의 성행위를 비난하지만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선천적으로 죄가 있다고 하는 말씀은 없다.

   둘째, 동성 간의 성행위는 비록 잘못이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의 일부가 아니지만 다른 죄보다 더 나쁜 것으로 평가되어서는 안된다. 신약의 본문들은 동성 간의 성행위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동등하게 금지되어 있는 많은 다른 것들과 함께 열거한다. 예를 들어, 고린도 전서 6장 9절이 “탐욕스러운 사람들”을 “다른 남성들과 성관계를 가진 남성들” 바로 뒤에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이들로 열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401(k) ? 미국 퇴직연금제도의 한 종류 ? 퇴직연금으로 그들이 필요한 이상으로 더 많은 돈을 쌓아 놓고도 자신들의 풍요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교회가 동성 간에 성행위에 빠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려해야 함을 말해준다.

   셋째, 교회는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더 연민하고 지원할 필요가 있다. 우리 북미개혁교단(CRC)을 포함한 기독교 공동체 전체가 동성애 형제 자매들에 대한 공감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데 실패한 것과 그들이, 이성애자들 ? 이들의 성향 또한 타락의 부정적 영향을 받는다 ? 과 함께, 거룩한 삶을 누릴 준비가 되도록 도와주는 환경을 제공하는 데 실패한 것은 슬픈 사실이다.

 

 

예수님의 증언

 

   수정론자들 (Revisionists) ? 성경이 동성 간의 성행위를 비난한다는 전통적 입장에 반대론을 펴는 이들 ? 은 동성 간의 성행위에 대한 예수님의 침묵을 지적하기 쉽다: “만일 동성 간의 성행위가 그렇게 나쁜 것이라면, 왜 예수님은 그것에 대해 어떠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는가?” 하지만 이 논점의 약점은 여러 관측에서 분명해진다.

   첫째, 예수님 시대의 유대교는 동성 간의 성행위를 규탄하는 데 완전히 일치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명시적으로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 한, 예수님은 그 견해와 다를 것이라고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은 동성 간의 성행위에 관한 그 시대 동료 유대인들의 비난에 자신이 대조적 주장을 드러낼 것이라는 그 행위에 대한 어떠한 긍정적 암시도 전혀 하지 않으신다.

   둘째,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들만 붉은 색으로 표기해 놓은 “붉은 글씨 (red-letter)” 성경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성경의 다른 부분의 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다루지 않아야 한다. 바울 사도가 동성 간의 성행위에 대해 말씀한 것은 예수님이 말씀한, 혹은 이 경우에는, 말씀하지 않으신, 것만큼이나 "하나님의 말씀" (살전 2:13) 이다.

   셋째, 예수님께서 성매매, 근친상간, 소년대상성행위, 혹은 수간과 같은 다른 성적인 죄들을 대적하여 말씀하신 적도 전혀 없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의 침묵으로부터 그가 그러한 행동에 관대하다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넷째,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마가복음 7:21-23절에서 열거하시는 데, 그 목록의 맨 위에는 “성적 부도덕 (sexual immorality, NIV 2011)” 이 있다. 이 특별한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이는 헬라어 porneiai가 단수로 번역되었지만 원래는 복수형이기 때문이다: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위들 (sexual immoralities).” 이것은 율법을 잘 알고 계신 랍비 (a rabbi) 예수께서 레위기 18장과 20장 같은 본문들 ? 동성 상대와의 성관계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불법적인 성관계를 꾸짖는 본문들 ? 에서 금지된 여러가지 성적인 죄들 (복수형) 을 염두에 두셨음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동성 간의 성행위의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침묵에 호소하는 것과 그 성행위의 특정 형태에 개방적인 사람으로 예수님을 묘사하는 것은 중대한 약점을 갖게 된다. 그 증거 [예수님의 침묵] 는 오히려 동성 간의 성행위는 죄가 있으며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이 그것을 행해서는 안된다는 것에 예수님이 당시의 유대인들과 보편적인 동의를 하고 계셨음을 보여준다.

 

 

미국 칼빈 신학교 Forum 2015년 가을 호에 “Same-Sex Activity: What Does the New Testament Say?” 라는 제목으로 실린 내용으로 번역 및 게재의 허락을 받고 게재합니다. 저작권은 Forum과 저자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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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reformedjr.com/board05_02/5791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미국서 이탈, 북한으로 쏠리는 한국!

“한미정상, 강력한 대북제재 약속했었다” 비판


한국이 미·일(美·日)에서 북·중(北·中)으로 경도되는 속도가 빨라진다. 국무부 관리는 문재인 정부의 지속적인 대북 대화 제의를 두고, ‘트럼프-文대통령이 강력한 대북제재에 합의했었다’며 ‘북한에 분명한 신호를 보내야 할 때’라고 밝혔다. 한국 정부가 한미 간 합의를 깨고 북한에 쏠리는 행태를 비판한 말이다.


국방부는 7월17일 북한에 ‘오는 7월21일 남북 군사회담을 갖자’고 제안했다. 북한이 이에 무응답으로 일관하자 국방부는 회담 일을 7월27일까지로 연장했다. 7월24일에는 文대통령이 직접 나서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에 대한) 북한의 결단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현재 북한은 정부의 대화 제안을 사실상 묵살한 상태다. 곧 추가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에 나설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아래는 VOA 보도 내용이다.

<미국 국무부는 한국 정부의 거듭된 남북 군사회담 제안과 관련해, 대북 압박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강력한 대북 제재를 가하자는 게 미·한 정상 간 약속이었다며, 북한에 분명한 신호를 보내야 할 때라고 밝혔습니다. 백성원 기자가 보도합니다.


미국 국무부는 미-한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대북 압박 공조를 상기시켰습니다. 캐티나 애덤스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대변인은 24일, 한국 정부의 거듭된 남북 군사 당국 회담 제안이 미국 정부의 대북 접근법에 부합하느냐는 ‘VOA’의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과 문재인 한국 대통령이 지난 6월 강력한 대북 제재를 약속했었다고 답했습니다.


당시 두 정상은 현행 대북 제재의 완전한 이행은 물론, 북한에 최대 압박을 가하고, 북한이 도발적 행동을 중지한 뒤 진지하고 건설적 대화로 복귀하도록 만들기 위해 새로운 대북 조치를 시행하자는 약속을 확인했다는 설명입니다.


앞서 한국 정부는 지난 17일 군사분계선(MDL) 일대의 적대 행위 중단을 위한 남북 당국 간 군사회담과 추석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회담을 북한에 공식 제의했지만 북한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해 정전협정 체결일인 27일까지 군사 당국 간 대화 제의가 유효하다며 북한의 호응을 거듭 촉구했습니다.


애덤스 대변인은 이에 대해 국제사회는 북한 정권에 안전하고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미래로 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핵과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것뿐이라는 분명한 신호를 보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한반도 비핵화를 평화적으로 이루겠다는 목표를 향해 북한에 외교적, 경제적 압박을 가하는데 한국 정부와 긴밀히 공조해 왔다고 말했습니다.


애덤스 대변인은 한국 정부의 대북 회담 제안에 대해선 한국 정부에 문의하라고 덧붙였습니다. 국무부의 이같은 입장은 문재인 정부의 남북대화 제의에 대해 미국 정부가 보여온 냉랭한 반응과 맥을 같이합니다.


숀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은 지난 17일 관련 질문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과거 (북한과 대화를 위해) 충족돼야 할 모든 형태의 조건들이 우리가 현재 있는 곳에서 명백히 멀리 떨어져 있음을 분명히 했다”고 답했습니다.>



출처: 리버티헤럴드 (http://libertyherald.co.kr/article/view.php?&ss[fc]=1&bbs_id=libertyherald_news&doc_num=10858)




미국은 대화를 위한 시간이 끝났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북한 정권이 마침내 미사일 도발을 감행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평화'라는 명목하에

대화를 촉구하는 문재인 정부.




그리고 '이런 시국에' 대통령은...

무려 6박 7일 동안...

여름휴가를 떠났다고 한다...

대통령이든 장관이든 누구든 휴가는 제때 가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야 아래 직원들도 더 사기가 함양되고 조직이 원활하게 운영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시점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휴가를 떠나기에 적절한 시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좀 쉬더라도, 대외적으로는 휴가를 취소했다는 메시지가 필요한 때다. 아무리 바빠도 휴가는 가는 '쿨한 대통령', '여유있는 대통령' 이미지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다른 문제도 아닌 심각한 안보상의 위기다. 북한의 ICBM 개발 성공이 맞다면, 휴가를 갈게 아니라 비상근무체제를 돌려야 할 때다. 일을 위한 일을 매우 싫어하는 내가 봐도 그렇다.


만약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박근혜 전 대통령이 비슷한 상황에서 예정된 휴가를 갔다고 했더라면, 정치권과 언론들이 얼마나 사정없이 물어 뜯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지금 언론들 대부분은, 이번 문재인 대통령의 휴가에 대해서는 무색무취한 반응이다. 견제와 감시라는 언론 본연의 기능을 포기한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다.



글 출처: 윤주진님 페이스북

배도의 계절 가운데 생명줄처럼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배입니다. 이 시대 많은 예배들이 오염되고 변질되었음에도 "예배하고 있는데 무슨 예배가 더 필요하냐?"라고 말씀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예배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두터워지고 계십니까? 더 깊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더 나은 순종함이 내게서 일어나고 있습니까? 나의 예배는 <혼>에 머물러 있습니까? 아니면 <영의 예배>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단순히 보이는 하늘만 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도 다녀왔다는 3층천까지 볼 수 있기를 소망하듯 더 깊은 아버지의 품으로 들어가는 <지성소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바로 이러한 진짜 예배, 예배의 원형을 사모하는 자들이 신부요 용사로, 그러한 예배로 인해 신랑되신 주님을 향한 <사랑>과 왕되신 주님을 향한 <충성>을 지켜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의 불이 꺼지고 예배의 자리를 지켜내지 못하면,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닌 혼의 예배가 일어나기에 자기 감정이 하나님이 앉으실 보좌에 앉으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 여기는 <죄>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기에 결국 사랑도 충성도 지켜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배도할 것이고, 배도 당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배도하게 만들 것입니다.


지금 <나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각을 떠서 타오르는 불에 전부를 태워 향으로 올려 드리듯이 완전하신 주님 앞에 완전히 행하는 예배를 영의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까?


그리고... 다가올 <배도의 쓰나미>를 생각할 때 목회자들은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한 교회와 인간들을 위한 교회" 중 하나만을 결정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처럼 성도들 또한 "하나님만을 위한 교회와 인간을 위한 교회 중 어떤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할 것인지"에 대해 결정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런 결정의 과정 가운데 특히 이단들을 주의하십시오. 주차장과 프로그램 등 각종 편리시설과 보이는 것들에게도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사례비에 대한 염려와 세상의 평가로 두려움이 엄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두려워함으로 목회자들도 성도들도 바른 결정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배도의 거친 물결>이 곧 다가오고 있습니다. 마라나타!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눅 12:4-5)



출처: 김영표 목사님 페이스북

서울시청사: 뉴스파워 범영수

서울시청에 무슬림을 위한 전용 기도실을 만들어달라는 외국인 주민의 요구가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서울시외국인주민대표자회의는 지난 26일 서울시청 대회의실에서 ‘서울시 외국인 주민대표자 상반기 전체 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에서 스위스 국적의 타카리 마리 씨는 “서울시청에 무슬림을 위한 전용 기도실을 만들어 준다면 마음 편히 시청을 방문할 수 있을 것”이라며 서울시청사에 무슬림 전용 기도실 설치를 요구했다.

 

한국 생활이 7년 째라는 마리 씨는 “기도실이 없어서 지하철 역사 구석이나 건물 비상계단에서 기도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한국에 거주하는 무슬림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우리도 한국사회 일원으로 배려받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기도실이 늘면 한국을 찾는 무슬림 관광객에게도 친근한 이미지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무슬림은 하루에 5번 정해진 시간에 맞춰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성지인 메카를 향해 기도해야 한다.

 

무슬림전용기도서 설치 실현가능성에 대해 서울시는 이제 막 회의가 끝난 상태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입장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대표자 회의에서 정책제안 하는 토론의 장을 연 것이고, 어느 부서로 보내야 할지 검토해 제안을 보내면 부서에서 검토에서 진행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외국인주민대표자회의는 출범이후 총 33건의 정책제안 안건을 발굴해 이중 17건이 서울시 정책으로 반영됐다.

 

정책 반영된 주 사례로는 결혼이민자 자녀를 위한 모국어 교육실시, 외국인여성들을 위한 ‘여성 안심귀가 스카우트’ 제도 등이다.

 

서울시 청사 내 무슬림 전용 기도소 설치에 대해 많은 국민들은 반대의 뜻을 피력하고 있다.

주로 타종교와의 형평성 문제와 테러 확산 우려, 무슬림화에 따른 부작용 등을 지적하며 “서울시청에 기독교 불교 천주교 등등의 기도실이 설치된 선례가 있냐? 진짜 이게 종교 이기주의지”라는 반응이다.

 

반면 “무슬림 인구가 늘어나고 시청에 출입하는 무슬림 시민들과 공무원들이 늘어나면 기도실을 마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며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의견도 나왔다.

 

출처: 크리스챤투데이

북한의 김정일은 극심한 식량난으로 주민들이 굶어죽고 나라가 경제난에 빠져 통치가 어려워지자, 공개처형을 선언했고 장마당에서도 공개처형을 감행해 북한 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애비에 그아들이라고 김정은은 인류 역사상 유래없는 3대 세습으로 권력을 물려받았지만, 왕조정권이 불안정하고 자신의 정상적인 통치가 어렵기 때문에 수시로 공개처형을 감행했고, 심지어 자신의 고모부까지도 공개처형으로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공포정치는 공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통치수법입니다. 아주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국민을 통치해야 하기에 그들은 최대한 잔인한 방법을 동원하여 국민들을 협박하고 위협해서 공포에 떨게 하는 수법을 사용하지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판을 생중계로 열겠다는 것은, 현정부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잔인한 탄압을 통해 국민들을 공포정치로 다스리겠다는 아주 야만적인 발상입니다.


현정부가 왜 이처럼 야만적인 공산주의자들의 수법들을 따라 하려고 하는지 걱정입니다. 제가 겪었던 공산주의자들은 야만이자 결과를 위해 그 어떤 짓도 서슴치 않는 악마들이었습니다.


오토 웜비어 미국청년이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 어떻게 살해당했는지, 그리고 생중계를 통해 전세계에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를 보시고도 모르시겠습니까?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판을 생중계하겠다는 발상은 공산주의자들이나 할 수 있는 야만적인 발상이자 살인자의 인권까지 운운하는 민주화 진영의 발상치고는 너무도 잔인하고 속심이 보이는 행위라고 보여집니다.


대한민국도 북한처럼 공포정치 시대가 열린 것입니까? 갑자기 겁이 납니다. 재판도 없이 사형장에 끌고 나와 준비된 몇몇 충성분자의 성토 몇마디로 교수형에 처하고 사형을 집행하는 북한이 생각나서요...



출처: 탈북자 출신 이애란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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