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대표적으로 두 곳에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애끓는 통곡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악한 짐승에게 먹힌 것이라고 생각하고 염소 피 묻은 아들의 채색 옷을 부둥켜안고 머리를 풀고 굵은 베옷을 입고 애곡하였습니다. "내가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그 울음과 그 모습이 너무 처절하게 광야를 적십니다.

다윗왕은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머리가 걸려 요압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목 놓아 울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아비인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악한 아들 압살롬이 죽었는데도 다윗은 이토록 애절하게 아들을 부르며 통곡합니다. 그 통곡이 사람들의 가슴을 찢는 듯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그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 주시면서 그 아픔과 슬픔을 나타내신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던 그 시간 하늘에 캄캄해지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성전휘장이 찢어졌습니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아픔의 나타남이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로마서 8장 32절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가슴을 찢고 아들을 내어주셨으나 아끼지도 아니하셨고, 망설이지도 아니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어쩌면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 보다 우리를 더 귀하게 여기셨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우리를 더욱 사랑하셨다는 말씀일 수 있습니다. 만일 아들이 더 귀하고 우리가 덜 귀했다면 하나님은 아들을 아까워하셨을 것이고 혹 내어주시면서도 아파하고 슬퍼하셨을 것입니다. 최소한 생색이라도 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셨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귀하신 독생자를 벌레 같은 우리 죄인들을 위해 서슴없이 아낌없이 내어주실 수 있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완전하시며 실수가 없으시고 후회도 없으신 분입니다. 잘못된 결정이나 손해를 보는 판단을 하실 분이 아닙니다. 노름판에서 상대가 무슨 패를 가졌는지도 모르고, 주식시장에서 상장주식이 우량기업의 주식인지 부실한 회사의 주식인지, 뭔지도 모르면서 귀중한 전 재산을 거는 바보는 없을 것입니다. 틀림없고 확실해야 모든 것을 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서슴없이 아낌없이 그 아들을 내어주시는 올인(All-In)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창세전에 이미 먼 훗날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보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미 창세전에 저와 여러분을 택하시고 예정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창세전에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아들들로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며 찬양하며 영광과 찬송이 될 것이 확정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서슴없이 주저없이, 망설임 없이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렇습니다. 도대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그리 하실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어떤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 선뜻 가슴을 찢어 아들을 내어주시며, 그 아픔과 슬픔과 참혹한 십자가의 고통을 넘으실 수 있으며, 그 아픔과 슬픔을 성경 전체를 통하여 내색조차 하지 않으실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그 날, 구원 받은 후사들이 온 우주를 찬송으로 가득 채울 하나님의 영광이 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 받을 후사들, 하나님의 자녀들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보기만 해도 자지러질만큼 기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귀하고, 안절부절 못 할 정도로 사랑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귀한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시고 그 고통을 내색조차 아니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대학 신학부 교수이며, 그 대학 성 교회 주임신부였던 마틴 루터가 로마교황 레오10세를 향한 질의서를 그 성당 출입구에 붙임으로 촉발된 개혁의 시작이 어느덧 498주년을 맞이했다.

개혁자들이 외친 핵심은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들이 외친 구호는 ‘Sola Scriptura’(오직 성령으로), ‘Sola Gratia’(오직 은혜로), ‘Sola Fide’(오직 믿음으로),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였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신전의식)의 삶을 살기를 원했다. 이는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왜곡된 교리와 제도에 대한 성경적 회귀를 외치는 부르짖음이었다.

어떤 면에서 로마교회 안에 존재해있던 사제제도 중심의 계급주의도 하나의 개혁 대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교회의 다양한 직분이 계급이 아니라 섬김의 방법과 수단이며, 역할임을 보여주는 측면도 있었다.

최근 한국교회는 이런 개혁주의 정신이 왜곡된 채 오히려 교회직분이 계급화 되는 현상들을 초래해 어떤 직분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그 직분을 얻기 위해 열심히 섬기는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그 직분을 얻기 위해 교회 안에서도 세상 선거 때나 있을 법한 부도덕한 일들이 그대로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는 어떤 의미에서 직분을 교회성장의 도구로 이용해 직분자들을 세움으로 교회의 세를 확장시키려 의도한 면도 적지 않다. 초대교회는 교회가 성장하므로 교회의 다양한 섬김을 위해 그 일을 섬길 사람들을 택하기 위해 직분자를 세웠다.

지금처럼 직분자를 세워 교회 성장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한국교회는 직분자를 많이 세우는 것이 마치 교회의 자랑인 것처럼 되어 버렸으며, 그것이 교회의 교세처럼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아직 직분을 맡을 자격이 없음에도 너도나도 모두가 직분을 가지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교회에 등록한 후 세례를 받고 몇 년 동안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 당연히 서리집사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때 창피하게 생각하며, 또 서리집사가 되어 몇 년 섬기고 나서 당연히 안수집사가 되거나 권사가 되지 않으면 불만스러워한다. 그 다음에는 시무집사로 얼마간 섬기면 당연히 장로가 되어야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시험에 들거나 불평하며 교회를 떠나는 현상들도 일어난다.

교회 직분은 위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이기 때문에 내가 지금 어떤 역할을 맡았던지 그 역할에 충실하면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이다.

교회 직분은 그 다음 직분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가 결코 아니다. 교회 직분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 하나하나가 소중하며 가치 있으며 주님을 섬기기 위한 도구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직분에 대한 바른의식이 회복되지 않으면 교회직분은 계속 계급화 될 것이며 이로 인해 직분 간에 갈등이 생기며, 교회의 하나됨을 깨뜨릴 우려가 있다.

실제적으로 교회안에서 직분간의 갈등이 생겨 어려움에 처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다. 그러다보니 교회안에서 직분을 얻기 위해 인간적이며, 세상적인 수단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일은 직분은 역할의 차이라는 것이다. 달란트의 비유는 성경이 말하는 참된 직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달란트의 비유는 어떤 역할을 맡느냐 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맡겨진 역할에 얼마나 최선을 다하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주어진 역할에 얼마나 최선을 다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직분을 맡았느냐에 관심을 기울일 때가 많다. 맡겨진 역할이 자신의 욕구에 만족스럽지 못할 때 스스로 시험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직분에 대한 바른 인식이 회복되어야 한다.
 
첫째, 직분에 대한 바른 영적 자세가 회복되어야 한다.
달란트의 비유는 직분에 대한 바른 영적 자세를 보여준다. 직분이란 그 사람의 신분이 아닌 역할이라는 것이다.

교회안에서의 직분은 신분상승의 수단이 아니라 역할의 차이임을 바로 인식하며, 계급의 차이가 아닌 섬기며 봉사하는 수단이며, 영역의 차이임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벧전4:10에서 “각각 받은 은사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대로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했듯이 각자가 맡은 역할대로 섬기면 된다. 직분이 결코 그 사람의 신분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위적으로 직분의 변화를 시도하려고 해선 않된다. 그 이유는 직분은 맡겨지는 것이지 내가 맡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전12:11에서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직분이란 하나님께로부터 맡겨지는 것임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 내가 맡으려고 시도해선 안된다.

내가 억지로 맡으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며 부작용이 생기며 영적 공동체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달란트가 주인으로부터 맡겨진 것이지 종들이 자신들이 얼마씩을 원해서 맡겨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직분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 자신에 의해 맡겨지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아울러 우리는 직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
약1:17에서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고 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고전7:7에서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자기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달란트의 주인이 종이 아니고 주인인 것처럼 직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직분을 탐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이 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행8:18이하에서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자신도 돈으로 이 권능을 사려고 한 사건이 나온다.

이런 일들이 교회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현실임을 감안할 때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깊이 인식해야 한다. 인위적으로 직분을 맡기 위해 내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그 행위가 크든 적든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행위임을 깊이 인식하며, 직분이 맡겨질 때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맡겨지지 않으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며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직분자는 하나님과 바른 영적 관계를 가져야 한다.
열처녀의 비유는 직분을 맡은 자가 하나님과 어떤 영적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등을 준비하는 영적 관계가 필요하다.

등은 보여지는 외적인 행위로 직분자가 어떤 신앙적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먼저 진실한 예배자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며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기 때문이다. 직분자가 바른 예배자로 나아가지 않으면 하나님과 바른 영적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지금 바른 예배가 무너지는 현상들이 곳곳에서 나타나며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사람 중심의 예배,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예배 형태로 변질되어 있는 경우를 많이 본다. 예배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 감정적인 만족을 얻으려고 할 때가 많이 있다.

언젠가부터 한국교회의 예배 형태가 열린 예배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예배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직분자는 신앙의 연륜을 가진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바른 영적 관계를 이루기 위해 바른 예배자로 하나님께 나가야 한다. 바른 예배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예배다.

동시에 직분자는 주일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직분자들이 주일을 성수해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무너진지 오래됐다. 과거에는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큰일나는 것으로 알고 믿음 생활을 해왔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저 교회 가는 날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러므로 직분자에게 주일성수에 대한 바른 인식이 회복되어야 한다. 주일을 바로 지키지 못하는 직분자는 등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자와 같은 모습일 것이다. 주일에 대한 바른 인식을 회복함으로 직분자 스스로가 주일에 철저하도록 자신을 회복시켜야 한다. 주일을 바로 성수하지 못하는 자는 직분자의 자격이 없다. 다른 날도 하나님의 날이지만, 주일은 더더욱 하나님의 날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아울러 바른 섬김의 자세가 필요하다.

바른 섬김은 자신의 분수를 넘지 않는 것이다. 롬 12:6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라고 했다. 지신의 분수를 지킬 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분수를 넘어서기에 혼란이 생기며 어려움이 생긴다. 분수를 넘을 때 남을 비판하게 되며 자기 기준에서 판단하며 불화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영적인 분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그럴 때 질서가 바르게 세워지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수 있다.

하나님과의 바른 영적 관계를 위한 또다른 하나는 기름을 준비하는 자세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이루는 삶을 사는 것이다.

직분자의 진정한 영적 자세는 외적인 행위 내면에 숨겨진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이며 교제이다.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관계가 바로서지 못할 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다. 이 관계는 말씀과 기도로 이루어지므로 직분자에게는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말씀을 삶에 적용시키고자 하는 수고가 필요하며, 기도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과의 내적인 깊은 영적 교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기도는 내 요구를 나열하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이루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과 바른 영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
 
셋째, 직분자는 자신에 대한 바른 영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
주님은 눅 9:23에서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직분자는 자신에 대한 바른 영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 자신에 대한 바른 영적 자세는 십자가를 지는 자세이다.

많은 직분자들이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자신의 직분을 즐기며 누리려는 현상들이 있다. 그래서 ‘내가 누군데’하는 생각들이 은연 중 밑바닥에 깔려 있다. 정말 십자가를 지려하지 않으면 직분자의 자격이 없다. 십자가를 지는 자세의 시작은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주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 주님의 명령에 복종한 후 자신의 무익함을 고백할 줄 아는 것이다.

눅17:10에서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고 했다. 때로 직분자가 자신을 드러내며 나타내려는 유혹을 받을 때가 있다. 어떤 일의 성과가 좋을 때 더더욱 그러하다. 그럴 때 과감하게 ‘나는 무익한 종’일 뿐이라는 분명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

이런 고백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한 일을 자랑하려 해서는 않된다. 그럼에도 자랑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가 있다. 고전3:21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고 했으며, 고전5:6에선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다”고 했다. 성경은 인간의 자랑은 허탄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약4:16에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런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직분자는 자신이 하는 일들을 통해 예수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한다. 바울이 갈6:14에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직분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않는다. 마지막 날에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책망을 듣지 않도록 올바른 직분자의 영적 자세가 회복되어야 한다.

개혁주의 신앙의 바른 직분 의식은 일의 결과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무익한 종임을 분명히 고백하며, 오직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돌려지도록 사는 것이다. Sola Gratia(오직 은혜로),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일 뿐이다.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4402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 당신은 무엇을 가지고 다니십니까 ★

사랑을 가지고 가는 자는
가는 곳곳마다 친구가 있고

선을 가지고 가는 자는
가는 곳곳마다 외롭지 않고

정의를 가지고 가는 자는
가는 곳곳마다 함께 하는 자가 있고

진리를 가지고 가는 자는
가는 곳곳마다 듣는 사람이 있으며

자비를 가지고 가는 자는
가는 곳곳마다 화평이 있으며

진실함을 가지고 가는 자는
가는 곳곳마다 기쁨이 있고

성실함을 가지고 가는 자는
가는 곳곳마다 믿음이 있고

부지런함을 가지고 가는 자는
가는 곳곳마다 즐거움이 있으며

겸손함을 가지고 가는 자는
가는 곳곳마다 화목이 있으며

거짓 속임을 가지고 가는 자는
가는 곳곳마다 불신이 있고

게으름과 태만을 가지고 가는 자는
가는 곳곳마다 멸시 천대가 있고

사리 사욕을 가지고 가는 자는
가는 곳곳마다 원망 불평이 있고

차별과 편견을 가지고 가는 자는
가는 곳곳마다 불화가 있다

당신은 무엇을 가지고 다니십니까?

- 좋은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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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과 교만 겸손은 내가 늘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여기고 교만은 내가 늘 미흡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겸손 미안한 마음이고 교만은 서운한 마음입니다 사람이 선물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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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의 사랑받는 아들 이삭을 위해, 가나안 땅에서, 주인의 고향 ‘메소포타미아’를 향해 가야만 하는 그 광야 길은 멀고도 험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메마른 광야, 불 붙듯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사막의 햇볕은 모래를 핥으며 그 열기를 더해 마치 찜통처럼 후끈거린다. 쏟아져 내리는 햇볕을 가려 줄 것 하나 없는데, 낙타 등에 뎅그러니 올라앉은 늙은 종의 얼굴은 쏟아지는 불볕에 벌겋게 타들어가고 덴 자국은 화끈거리다 못해 쓰리고 따겁다. (그 옛날 무슨 썬스크린이나 챙 달린모자가  있었으랴.)

집을 나설 때 가지고 온 몇 통의 물마저도 그 많은 날을 광야에서 지나는 동안 약대 열 필과 함께 모두 마셔버리고 바닥이 난지 이미 오래다.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야 말겠다는 듯 이글거리는 햇볕에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건만, 물을 구할 수 있는 동네를 언제쯤이면 만나게 될지 아득하기만 하다. 늙은 종은 흐르는 땀을 닦을 겨를도 없이 터벅거리는 낙타 등에 올라앉아 꾸벅거리는데, 어느 듯, 광야의 붉은 바위산이 더욱 붉어진다 싶더니, 휘몰아치는 모랫바람이 해를 서산으로 폴작 밀어붙인 듯, 갑자기 주위가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털석 잠겨버린다.

광야의 밤기온은 낮과는 달리 무섭도록 춥다. 들판에 돌을 베개 삼고 누워 반짝이는 별들을 멀건히 바라보고 있자니 신세가 처량하기 그지없다. 주머니에는 주인의 집 재산 중, 제일 좋은 것들, 금 은보화가 그득하다. 이것만 가지면 어디에 가서도 한평생 잘 먹고 잘 지낼 수가 있을 것이다. 차라리 이 보석을 가지고 어디론가 달아나 버린다면 하는 유혹도 들었지만, 주인의 그 신임을 생각하면 차마 그럴 수는 없다.

천신만고 끝에 주인님의 고향인 나홀 성에 닿았다. 나홀 성에 도착하긴 했는데, 이제 어딜 가야 주인님의 친척을 만난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기막히다. 성 밖 우물 곁에 낙타를 꿇어 앉혀놓고 맥없이 앉았자니 주인님이 다급할 때면 언제나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던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그리고 여차여차히 해주십사 빌었다.

기도가 끝나자 그 기도대로 한 소녀가 물을 길으려 동이를 들고 나오는데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따웠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소녀가 그의 기도 한 그대로 행하는 것이었다! 주인의 동생,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딸이란 것이다. 그 소녀에게 건넨, 금고리와 금손목고리를 증표로 보게 된 소녀의 가족은 자신의 아름다운 딸을 그 늙은 종을 믿고 맡긴다. 늙은 종은, 엄청나게 많은 보석과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낙타 열 필과 함께 광야 길을 지나 주인에게 되돌아오게 된다. 아무도 보지 않는 광야 길, 천하절색(天下絶色) 아름다운 소녀와 함께 모든 금은보화를 훔쳐서 달아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그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충성했고, 수많은 날들과 밤을 광야에서 그토록 아릿따운 소녀와 함께 지내야 했지만, 그는 그녀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를 눈동자처럼 잘 지키고 보호하여 끝내 주인 집 아들 이삭에게 정결한 신부로서 무사히 넘겨주었다. 이 극적이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는 다름 아닌  창 24장, 아브라함의 늙은 종, 엘리에셀의 이야기이다.

이쯤해서, 우리에게 그 어떤 느낌이 오지 않는가? 이 정도에서 우리는 그 어떤 느낌이 와야만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 내가 선 자리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비록 천한 신분이었지만, 그 주인을 대신하여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것, 자신의 설 자리가 어디인가?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이것이 그가 종으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그는 분명히 수많은 유혹을 이겨내고 주인의 진실한 종으로서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 성공의 비결이 무엇인가? 자기가 서야 할 자리를 바로 아는 사람이라면,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손을 대거나, 자기 눈에 보기 좋다 하여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취하려고 하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오늘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과연 어떤 자리인가? 우리가 선 이 자리는 바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서 있는 영광의 자리이다! 주인 아들의 신부감을 데리고 와야하는 사명이 종에게 주어졌다는 뜻에서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영적으로 현대 우리들, 성도들의 모형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이 행하여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

세상이 시끄러운 것은 모두 자기가 설 자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결코 과장된 표현은 아니리라. 자기가 설 자리를 모르는 사람은 사명을 망각한 사람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다. "높은 신분에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이 따른다는 뜻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욱 도덕적이고 정직해야 하고 헌신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말이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이, 공인으로서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시기에 물러나지 않고 그 자리를 무리하게 지키고 있다가 그 시기를 놓치고 자기 의사와 반하여 쫓겨나게 되는 일도 허다하고,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쫓겨나 후세의 지탄을 받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반대로 깨끗이 물러나야 할 자리를 내어놓지 못하고 그 자리를 연연하여 더 있겠다 고집하다가 강제로 쫓겨나는 어리석은 폐단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뿐이랴, 맡겨진 양떼를 잘 목양하고 기르는 대신, 학대하고 발로 차서 쫓아 내기도 하고, 그 양떼 중에서 토실토실 살찌고 마음에 드는 양이 있으면 염치도 없이 잡아먹어버리기도 한다. 자신이 주인이요, 자기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비록 종이긴 하나 우리가 선 자리는 종으로서만이 아닌, 주인을 대신하는 자리란 점, 이런 우리들에게는 자율성과 타율성이 동시에 함께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실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율성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타(창조주)에 의해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어진 자율성을 너무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율성은 언젠가는 거두어지게 될 것이고, 결국은 주인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일부 몰지각한 목자들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원수들로부터 심하게 훼방을 받고 있다. 현대 기독교가 x독 교라고까지 손가락질 받고, 모든 교회, 그 자체가 잘못된 듯 거세게 항의하는 소리가 드높고, 교회의 존속 그 자체마저 위협을 받고 있다. 그것도 다른 이들로부터가 아닌, 우리들 내부에서 거세게 항의하는 소리가 크고, 자중지란 (自中之亂),  좌충우돌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자신의 설 자리를 알지 못하거나 알았다고 해도 그 선 자리의 귀중 성을 망각하고 주어진 자율성을 남용하는 악한 종들에 의해서 비롯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금 우리 아멘넷에도 한 젊은 목사님이 자신이 당한 불이익과 불의에 맞서기 위해서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것을 보는 많은 독자들의 의견이 설왕설래이다.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모습을 보는 필자는 가슴이 아프다 못해 쓰리다. 누가 저토록 순수한 한 젊은 목사님을 저렇게까지 몰아갔다는 말인가? 그 원인제공자가 미워지려고 한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된데는 그 원인이 있을 것이고, 그 원인 제공자들끼리 믿음으로, 기도로, 사랑으로, 대화로, 서로 아름다운 해결을 보아야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닐까 하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 “너희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 12:17절 말씀)."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절 말씀).”말씀하고 계신다.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실천실행해야 할 때이다. 선(善)은 무엇을 상대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빛이 어두움을 상대해서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다. 빛은 빛의 선 자리를 굳게 지키기만 하면, 어둠은 그 빛 앞에서 맥없이 물러나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상대해서 싸우지 않는다. 사랑은 싸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힘이 없어서 잠잠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돌이켜 회개하기 원하셔서 오래도록 참아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벧후 3:10절 하 참조)

그대가 선 자리는 만왕의 왕을 대신하는 자리다. 왕의 이름에 합당한 예절과 품위로 그 이름을 명예롭게 빛내야 하리라. 내가 행하고 있는 이 일이,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왕의 이름을 더럽히거나 실추시키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왕께 부끄러움을 끼칠 자리에 내가 서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하고, 내가 지금 비록, 조금 어렵고 힘들긴 하지만, 그럼에도, 나를 신임하여 내게 직분을 맡기신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자리에 굳게 서 있는 것인지…되돌아 보아야 한다.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지금 그대 선 자리는 왕을 대신한 거룩한 자리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리라…

"아무 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 17-21절 말씀)."

 
아멘넷, 별똥별/최송연 칼럼 글

제9장 : 성경을 떠나 직접 계시로 비약하는 광신자들은 경건의 모든 원리를 파괴한다.

1. 광신자들의 성령에 대한 잘못된 관심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떠나서도 하나님께 돌아 갈 수 있다고 하는데, 이들은 오도되었다기 보다는 광란에 사로잡혔다고 해야 한다. 아주 교만해지고 오만해진 사람들이 마치 성령의 가르침을 직접 받아서 성경 읽은 것을 전적으로 멸시하고, 그들의 표현대로 라면 죽이는 문자를 아직도 따르는 사람들의 그 단순성을 비웃고 있다. 그렇게 성경의 교리를 감히 유치하고 천박하다고 할만큼 그들을 높은 자리에 까지 오르게 한 그 영이 도대체 어떤 영인가를 묻고 싶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그들이 대답을 한다면, 그 확신은 참으로 조소 거리가 될 것이다. 그들도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다른 영으로 조명되지 않았다고 그들도 생각할 것이다. 이들 중 한 사람도 그 영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도록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의 저작에서 훌륭하게 증명된 대로 보다 더 높은 존경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미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되었다.

그는 "내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내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내 입에서와 내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사 59:21). 이 말씀에서 이사야는 구약 시대의 사람들을 마치 글을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들처럼 외부적인 교리에만 묶여 두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의 통치하에서 새 교회가 이 참되고 완전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말한다. 곧 성령에 의해서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도 지배 받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잇는 것은 예언자들이 침범할 수 없도록 결속시켜 놓은 것들을 이 악한 자들은 가증하고 참람되게 분리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삼층천 이끌려 다녀온 후에도 계속하여 율법과 선지자들의 교리를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후 12:2). 또한 그는 훌륭한 교사 디모데에게도 읽은 것이 착념하라고 권했다(딤전 4:13).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성경에 대한 찬사를 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딤후 3:16-17). 성경의 효용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궁극적인 목적지에 인도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순간적인 거시라거나 일시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은 관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한 영과는 전혀 다른 영을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들이 완전히 정신 착란증에 걸려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로 광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떤 영을 약속하신다고 하셨는가?


성령으로 그 영은 "자의로 말하지 않는"영으로서 예수 님께서 친히 과거에 말씀하신 것들을 저들의 마음속에 넣어 주시며암시해 주시는 영인 것이다(요 16:13).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약속된 성령의 임ㅂ무는 아직 들어 보지도 못한 새로운 계시를 만들어 내거나 어떤 새로운 교리 자체를 날조하여 용인된 복음의 교리에서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다만 복음이 말하는 바로 그 교리를 우리 마음에 인처 주는 데 있는 것이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요약에서 /바요나

 

THE POWER SOURCE - BAPTISM IN THE HOLY SPIRIT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He who is coming after me is mightier that I, and I am not fit to remove His sandals;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fire" (Matthew 3:11).

What is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is a second encounter with God (the first is conversion) in which the believer begins to receive the supernatural power of the Holy Spirit into his life. Jesus promised this power to his disciples when He said, "You shall receive power when the Holy Spirit has come upon you; and you shall be My witnesses both in Jerusalem, and in all Judea and Samaria, and even to the remotest part of the earth" (Acts 1:8).

This promise was fulfilled at Pentecost when the Holy Spirit fell on the one hundred and twenty gathered in the upper room. "They were all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with other tongues., as the Spirit was giving them utterance" (Acts 2:4).

When do I have the Holy Spirit? Someone will say "don’t we have the Holy Spirit when we become Christians?" The answer is yes. The moment you accept Christ as your Savior, the Holy Spirit takes up His residence in your heart (Romans 8:9; 1 Corinthians 6:19). We are born-again of the Spirit, transformed by the Spirit, led by the Spirit, strengthened by the Spirit, and we can be filled with the Spirit.

While the Holy Spirits indwells all believers, it does not follow that all believers are Spirit-filled. Peter’s sermon at Pentecost speaks of two separate events: (1) "Repent and be baptized..." (2) "ye shall receive the gift of the Holy Spirit" (Acts 2:38). The converts at Samaria had believed and been baptized, but received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later (Acts 8:12,17). The same was true at Ephesus (Acts 19).

Three statements bring the matter of the Holy Spirit and the believer into focus.

First, the Holy Spirit is in every believer. Through the initial operation of the Spirit, the mysterious change, the new birth, takes place (John 3:5-7).

Second, the fullness of the Spirit is not experienced by every believer (Acts 8:12-17; 19:1-7).

Third, the fullness of the Spirit may be experienced by every believer (John 7:4=37-39), Jesus said, "If any man..." Obviously, He meant all when He said, "He that believeth on Me."

Is the baptism for me? If you are a Christian you are a candidate. And Christ’s promise is very personal; it is to you. "He that believeth...out of his belly shall flow rivers of living water" (John 7:37-39). "The Father...shall give you another comforter...He dwelleth with you, and shall be in you" (John 14:16,17). "It is expedient for you...I will send him unto you...He will guide you...and show you" (John 16:7,13).

"I will send the promise of my Father upon you, but tarry ye..until you be endued with power from on high" (Luke 24:49). "For the promise is unto you and your children" (Acts 2:39).

Is the baptism necessary? For salvation? No, for we are justified by faith. For life and service? Yes! If you will search the Bible, you will find that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is God’s plan for a normal Christian experience from the day of Pentecost until Jesus comes again.

Jesus commanded the Disciples to stay in Jerusalem until they had been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cts 1:4,5). The Ephesians were told, "...be filled with the Spirit" (Ephesians 5:18). This is not an invitation; it was a clear directive, a command.

Jesus promised that I would receive power to witness for Him when the Holy Spirit comes (Acts 1:8). To fulfill God’s will in my life to the fullest, I must have the enabling power of the Holy Spirit.

How do I receive? The experience is not earned or merited. As do all other gifts from God, the baptism comes by grace and faith.

But one thing is essential. Known sin must be confessed. At Pentecost, Peter exhorted his questioners to "repent". God gives the Holy Spirit to "Them that obey Him" (Acts 5:32). Associated with repentance is faith. Faith is the condition on which God bestows all His gifts.

Jesus promised to fill those who hunger and thirst after Him (Matthew 5:6) and "to them that ask Him" (Luke 11:13). The word translated "take" here is the same word translated "received" in the passages relating to receiving the Holy Spirit.

Scriptural prerequisites to receiving the Spirit may be covered by four words: saved, obey, ask, and believe.

First, one must be saved. "He shall give you another Comforter...whom the world cannot receive" (John 14:16,17).

Obedience is essential. "And we are his witnesses of these things; and so also is the Holy Spirit, whom God hath given to them that obey Him" (Acts 5:32).

The believer must ask the Father or the Holy Spirit according to Luke 11:13.

As in all spiritual matters, faith is required in receiving the gift of the Holy Spirit (Hebrews 11:6).

How do I know I have received? There must be some evidence of the promised gift or else how ill you know that you have received this Baptism? For an answer let’s settle on some basic assumptions. First, the evidence must be a Bible sign. Second, the sign must be recognizable by both the receiver and others nearby.

For the Bible record of people being baptized in the Spirit we go to the Book of Acts. The fulfillment of John the Baptist’s statement and of Jesus’ promise took place on the Day of Pentecost (Acts 2). The same thing happened on four other occasions in the Acts (chapters 8,9,10,19), at four different places and four different times.

Speaking in tongues was a distinctly Pentecost and post-Pentecost experience. Speaking in tongues was prophesied by Isaiah some 700 years before the Day of Pentecost (Isaiah 28:11,12). Paul links this prophecy directly with the New Testament experience (1 Corinthians 14:21). Jesus Himself foretold "They shall speak with new tongues" (Mark 16:17).

The initial physical evidence of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is "speaking in tongues."

We believe that it is the privilege of every believer to receive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to endue them with power for living the Christian life.

😎 임종석 청와대비서실장 검찰고발 😎

지만원 박사 외 수 만명의 애국국민,

청와대 임종석 비서실장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검찰에 고발 및 기자회견 열어

기사승인 2018.05.26  11:15:13

- 5월 31일(목) 오후 2시,
대검찰청 정문 앞
지만원 박사를 비롯 본지 뉴스타운과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위한 변호사모임(국변),
수많은 애국국민이 청와대 임종석
비서실장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검찰에 고발한다고 밝혔다.

지만원 박사는
"국제 놀림감이 된 문재인, 그가 이끄는 무식한 집단을 하루라도 빨리 몰아내야 합니다.

미국CIA가 빨갱이 리스트를 만들어 미국 땅을
밟지 못하게 하고 있다 합니다.

어떤 때는 80명의 빨갱이들이 집단으로
공항에서 입국이 거부돼 되돌아왔다 합니다.

미국에 계신
애국 교포님들, 이 소식에 신났다 합니다.

골수 주사파
임종석은 미국에 절대 못갈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어 "5월 31일 오후 2시,
대검찰청에 그 임종석을 고발합니다.

고발에 동참해 주신 분들이 엄청 많아 아직도
통계를 끝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하철 2호선 서초역 6번 출구 대검찰청 정문
앞에서 대대적인 기자회견을 하고 고발장을 대검찰청에 제출합니다."라고 밝혔다.

지만원 박사는
임종석이 저지른 국가보안법 제4조, 제5조,
제7조, 제8조 위반혐의를 들며, 임종석의
1항 행위에 대해 공동한 정부 관련자들을
처벌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고발 취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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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임종석 고발에는
본지 뉴스타운(대표 손상윤)을 비롯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위한 변호사모임(국변)과
수 만명(집계 중)의 애국 국민들이
동참하고 있다.

5월 31일(목) 오후 2시, 대검찰청 정문 앞에서
열리는 임종석 고발 기자회견에 많은
애국 국민들의 참여를 바란다.



다음은 고발장 전문이다.

고 발 장

고소인 : 지만원

서울 서초구 방배로

(주)뉴스타운 (대표 손상윤)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위한 변호사모임(국변)

고발 동참자: 별지 파일

피고소인: 임종석(청와대 비서실장)

03048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 대통령 비서실장실

위 고소인들은
위 임종석을 다음과 같이 고발합니다.

고발 취지

1. 임종석에 대하여
국가보안법 제4조, 제5조, 제7조, 제8조
위반혐의로 처벌하여주시기 바랍니다.

2. 임종석의 1항 행위에 대해 공동한 정부 관련자들을 처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관계 법령(국가보안법)

제4조(목적수행)①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가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때에는 다음의 구별에 따라
처벌한다.
<개정 1991·5·31> 1. 형법 제92조 내지 제97조·제99조·제250조제2항·제338조 또는 제340조제3항에 규정된 행위를 한 때에는 그
각조에 정한 형에 처한다.

제5조(자진지원ㆍ금품수수)①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를 지원할
자진하여 제4조제1항 각호에 규정된 행위를
한 자는 제4조제1항의 예에 의하여 처벌한다.

제7조(찬양ㆍ고무등)①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고발 내용

1. 피고빌인 임종석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임명되기 직전까지, 북한 당국과 통신 또는
회합하여 북한당국으로부터 저작권료
집행을 위임을 받아 북한당국계좌로
23억원에 가까운 금원을 송금했고,
나머지 금원은 훗날 여건이 풀리는
대로 북한당국에 송금하겠다며
법원에 공탁해 놓고 있습니다.

이는 현행범에 속할 것입니다 이 하나의 사실로 임종석은 국가보안법 제4조, 제5조, 제8조를 위반하였습니다.

증1은 2017.7.19. 중앙일보 기사입니다.
임종석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들어가기 직전까지 그가 설립한 ‘경문협’(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 이사장직을 맡았습니다.
경문협이 하는 일은 오로지 방송국에서 돈을
걷어 북한당국계좌로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방송국들에 다니면서 두 가지 말을 했습니다.
1) “나는 북한조선중앙방송위원회로부터      저작권료를 걷는 대행권한을 받았다”
2) “귀 방송에서 사용한 북한관련 사진들에 대한   저작권료를 내라”

기사가 전하는 통일부 집계에 의하면 임종석이 2005년부터 13년 동안 북한당국계좌에 보낸
돈은 187만6,700달러(22억 5,200만원),
천안함 폭침으로 인해 5.24 조치가 취해진
이후에도 돈을 걷었는데 그 돈은 5.24 조치가
곧 풀리는 대로 북한당국에 보내려고 법원에
공탁해 놓았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의혹이 발견됩니다.

그는 조선중앙방송위원회의 신임을 받고
있습니다.
북한당국과 접촉을 하였고, 그 접촉을 계속
유지해 왔습니다.

북한방송으로부터는
남한 영상 사용에 대한 저작권료를 받지 않는 상태에서 그는 오로지 북한에 달러를 제공해
주기 위해 방송국들로부터 돈을 뜯어내 “북한당국계좌” 로 보냈습니다.
이는 국가보안법 제 4조, 5조, 8조를 위반한 것입니다.

2. 증2에 의하면, 임종석은 2010년 9월 3일, “해방연대”(노동해방실천연대)에 “동지사랑의 정치”라는 제목으로 김정일과 선군정치에 대한 사랑의 서사시를 썼습니다. 아래는 그 글의 일부입니다. 이는 국보법 제7조의 위반입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선군혁명영도를 개시한 때로부터 어느덧 반세기가 지나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군정치가 승승장구하며 승리에 승리를 거둡하며 전진하고 있는 것은
바로 김 위원장의 선군정치가 사랑의 정치,
동지애의 정치이기 때문이다. . .

일꾼들에 대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랑도 각별하다. . .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병상에 누운 허담을
구원하기 위하여 온 세상을 다 뒤져 명의라는
명의는 다 찾아보고 명약이라는 명약을 모두 써보면서 요양 중인 그의 건강도 매일 손수 살피었다고 한다. . .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 당시에도 비전향장기수의 송환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었고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이
분단의 장벽을 넘는 전대미문의 감동의
서사시를 연출하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뜨거운 사랑의 품에 안긴 비전향장기수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세심한 배려와 관심 속에서 잃어버린 청춘을 다시 되찾고 조국을 위해 마지막 생을 불태우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동지사랑의 정치는 동서고금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같은 동지사랑으로 북한의 민중은
김 국방위원장님의 선군정치를 절대적으로
받들고 있다고 보아진다.”

결 론

1. 임종석에 대하여 국가보안법 제4조, 제5조,
제7조, 제8조 위반혐의로 처벌하여주시기
바랍니다.

2. 임종석의 1항 행위에 대해 공동한 정부 관련자들을 처벌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증거자료

증1. [평양 오디세이] “북 선전영상 돈 주고 봐야 하나” … 대북 저작권료 지불 논란

증2. “동지사랑의 정치‘ (해방연대 홈페이지)

2018.5.31.

고소인: 지만원

(주)뉴스타운 (대표 손상윤)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위한 변호사모임'(국변) 등 고소인 명단

대한민국 대검찰청 귀중

심광석 기자 neonewst@naver.com

놀라운 것은 크리스찬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

<더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크리스찬들이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는 것> 
 
"미국의 핵무기가 얼마나 거대하고 강력한지, 신께 사용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과연 트럼프 대통령이 “신”께 기도했을까? 트럼프의 신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체의 총칭이 아니다. 하나님, 그분의 이름은 여호와이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구하기 원하신 그 하나님, 성령으로 지금도 함께 하시는 삼위일체의 그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신이라는 번역어는 오해를 불러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고 펜스 부통령이 성직자급의 크리스찬이며 트럼프 대통령이 허커비 목사의 딸 새라를 대변인으로 두어 허커비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지금의 미국을 대하다가는 말 그대로 큰 코 다친다. 
 
미국의 북한 다루기의 목표는 비핵화가 아니다. 궁극적인 비핵화는 자유가 있는 북한에서 가능하다고 본다. 미국 수정헌법 권리장전 제 1조 신앙의 자유는 1791년에 새겨졌다. 사실은 유일사상이 폐지되고 북한에 신앙의 자유가 있어야 비핵화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일본이 1945년 8월에 항복하고 이듬해 1월 천황 인간선언(1946년)을 통해 현대국가가 본격화된 것과 비슷하다.  
 
아직도 김정은 원수가 판문점에서 위대한 일을 이룬다는 식의 신화를 만들어 퍼뜨리는 정신이상의 북한을 정상국가로 보고 다루는 이상 한국에는 미래가 없다. 한미동맹 해체를 주장하는 문정인을 특보로 두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이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것같지 않다. 문재인 정권의 위기는 결국 가치의 위기다.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는 데 있어 미국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눈치조차 못 채는 사람들이 청와대를 채운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 놀라운 것은 대다수의 크리스찬들이 아무 것도 눈치 못 채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속사에 대한 이해가 없는 크리스찬이 개인의 구원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을 수 있을까 궁금하다. 
 
김정은의 유일사상 체제는 곧 무너질 것이다. 물론 북한이 무너진다는 말과 같은 말은 아니다. 일본 천황이 항복을 하고 “나는 신이 아니고 인간입니다”를 고백하는 수준의 항복이 곧 있을 것이다. 비극은 인간이 된 천황은 살아남았지만 김정은은 못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제 손으로 직접 너무 많은 피를 묻혔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엄청난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고 있다. 이 중대한 순간에 누구든 영혼을 상실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출처: 김미영 전환기정의연구원 대표 페이스북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819512474808876&id=100002504232290
🍒 마음을 여는 행복편지 🍒

세상을 살다 보면 미운 사람도 많습니다.
사랑하고푼, 좋아하고푼,
친해보고푼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다 보면 괴로움이 따릅니다.

때로는 사랑해선 안 되는 사람이어서,
때로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어서
아픔도 따르고 괴로움도 따릅니다.
그렇다고 사랑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괴로움, 슬픔, 아픔이 따른다고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삶이란 것 자체도 괴로움의
연속이니 살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파도 괴로워도 우리는 살아야 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좋아하고, 그래서 사랑하다 보면
때로는 실망하고, 때로는 배신의
아픔으로 미움을 갖게 됩니다.

배신의 아픔은 우리가 그에게
반대급부를 바라고 있었음을 반증합니다.

조건 없이, 바람 없이 주고, 사랑했다면
돌아서 가는 사람은 그것으로 그만 입니다.
미움도 아픔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은 기쁨이지만 괴로움이 동반되듯,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것은 더욱
자신을 아프게 합니다.

미워하는 마음은 ,희망 없는 아픔이요,
희망 없는 괴로움입니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으려니,
사람이니까 변하고 배신할 수 있으려니 하고
그냥 내 마음에서 그들을 놓아줍니다.

마음에 간직해서 괴로운 미움을 마음에서
지우고 그 사람의 기억도 지워버리는 겁니다.
내 인생의 장부에서 지워서
보내고 놓아주는 겁니다.

살아가면서,
인생을 기록하면서
그 기록이 쌓이는 것으로

짐을 만들기보다는
적절히 기억을,
기록을 지우고 삭제할 줄 아는
지혜로움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좋은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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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없는 현재는 없다. 현재는 과거의 아들이다.■소련이 2차세계대전 승전국가로 미국에게 지중해 진출권을 요구 했으나 거절 당하자 동해의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북한을 식민지화 했다. 그 위장술로 서른살 앳된 김일성을 이용했다. 김일성이야 말로 민족을 소련에 팔아 넘긴 매국노중 매국노이다.

미국 역시 소련과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련과의 적당한 타협으로 한국을 미국의 영향권아래 두고 서둘러 철수 하려 했다. 그래서 미국이 먼저 신탁통치안을 제안 했었다.

이에 한국인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치자 소련은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국내좌익도 하루만에 반대에서 찬성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오히려 이에 굴복 하지 않고 이승만은 오히려 더 강력하게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 했다. 미국의 정책에 정면으로 도전 한것이다.

미국은  이승만을 자택연금을 시키며 모든 자금줄을 봉쇄했다.
그리고 좌우합작파인 김구와 김규식을 지지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단20년만에 세계경제 10위와 무역규모 6위의 기적을 달성 한것은 이와같은 이승만의 선구자적인 국제안목과 공산주의를 꽤뚫어 보는 혜안을 갖고 초강대국 미국과 소련을 상대로 한 목숨을 건 사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 한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17살때 부터 집을 나와 조폭인 마적단을 따라 다니면 살인 강도짓을 하다 쫓기다 20살에 중국인으로 귀화하여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국을 위해 일본과 싸우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상관과 동료들을 놔두고 소련으로 탈출하여 거시서 또 소련인으로 귀화하고 소련국적을 받아 소련군대 입대해서 북한을 송두리채 소련에게 갖다 바치는 매국노짓을 했다.

이것은 해방전에 극동군 정치 사령관으로 북한 정치장군 로마넨코를 직접지휘 했고 해방후 북한대사를 지닌 스티코프의 일기에 적힌 내용이다. 이것이 소련의 비밀문서가 해제 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 팩트이다.

북한은 친일청산을 다 했고 남한은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 이다. 남한은 친일반민족 재판을 열다가 북한이 해방 직후부터 게릴라와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극렬 해지자 어쩔수 없이 이들을 색출 수사하기 위해 일제시대때 공산주의자들을 체포하는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쓸수 밖에 없었다.

북한은 당시 북한의 실권자인 소련의 공식문서 어디를 찾아봐도 친일파를 처벌 했다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는 일본군에 근무 했으며, 북한공군 사령관 이활은 일본군 공군 조종사였고, 북한 서기장을 지낸 강양옥은 일제시대 도지사를 지낸자 이고 일제시대 검사출인자 한낙규는 북한의 북한의 장관급의 고위 공직자를 지냈다.

그런데 국내 좌익은 김일성을 위대한 민족의 태양이라 하며 이승만과 박정희를 민족을 팔아 먹은 친미 친일 역적 이라 한다.

이러한 역사교육을 전교조에서 반대를 하고 오히려 친북교육을 하고 있으니 젊은이들의 정신세계가 어떻겠는가?

글펌■■

사랑하는 정이철 목사님께

박용규 교수/총신대학교

   

▲ 박용규 교수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작성합니다. 지난 3월 말 우연히 목사님께서 저에 대해 쓰인 글이 목사님이 운영하시는 <바른믿음>이란 사이트에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그 글은 제가 한 강의에 대해 정 목사님께서 평하신 내용이었습니다. 그 때는 사람마다 견해차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 그냥 넘어갔습니다.

얼마 지난 후, 어느 목사님이 “정이철 목사님께서 저에 대해 쓰신 글을 살펴보라.”고 조언하셔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살펴보니 저에 대해 목사님께서 3번에 걸쳐 글을 게재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들을 보았습니다.
 

누구나 견해차가 있고 나아가 비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책을 출간하거나 논문을 기고할 때 저의 석사박사과정의 학생들이나 동료들에게 읽고 비평적 조언을 비교적 구하고 있습니다. 비판에 대해 상당히 열려 있는 사람이라고 자처합니다.
 

그런데 정 목사님의 저에 대한 비판의 글 중에 사실이 아닌 내용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건강한 토론 문화와 논의를 위해서 저는 먼저 이 부분을 분명히 확인하고 진행하려고 합니다. 제가 목사님에게 이렇게 요청하는 것은 단순히 저에 대한 비판이나 평가를 넘어 총신공동체 전체, 예장합동교단 전체를 연결하셔서 글을 쓰셨기 때문에 장고 끝에 이렇게 공개적 글을 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제 개인의 문제만 취급하였다면 그냥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저의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정 목사님은 저 개인의 문제를 떠나 총신과 교단과 더 나아가 한국교회와 연관하여 질문을 하셨고, 그리고 저를 사랑하는 총신의 졸업생들과 전국의 동료 교수들의 명예와도 직간접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판단이 들어 부득이 이렇게 목사님에게 공개적인 질문을 드립니다. 우선 저와 직접 관련이 있는 2가지 문제에 대하여 묻게 되오니, 정 목사님께서 먼저 답변해주시기 바랍니다.
 

1. 과연 제가(박용규) 정이철 목사님의 비판이 두려워, 어느 사이트에 연락을 취해 어떤 영상을 내리라고 했다는 말인지 밝혀주기 바랍니다.
 

정 목사님께서 주장하기를 ‘제가 정 목사님의 저에 대한 비판의 글을 보고서 겁이 나서 관련 영상을 게재한 사이트에 연락하여 영상을 내리라고 해서 내렸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총신의 신학은 개혁신학이 아니고 성경을 겉으로 대충 따르는 현대 복음주의이다. 그것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가 총신신대원에서 오래 동안 교회사를 가르친 박용규 교수이다. 나는 우연히 박용규 교수의 아주사 부흥에 대한 인터넷 강의를 들었다. ‘이것이 총신의 실상이구나!’하면서 한탄했다. 그래서 시간을 내어 박용규 교수의 강의 앞 부분을 녹취하여 간단히 기사 하나를 작성하여 <바른믿음>에 올렸다. 나중에 보니 그 글의 근거가 되는 강의 영상이 인터넷에서 사라졌다. 박용규 교수 본인이 손을 써서 없앤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신학에 대한 시비가 일어나면 정직하게 사과하고 해명하던지, 아니면 반박하던지 해야 할 것이다. 명망있는 교수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내 컴퓨터에 이미 그 강의 영상이 다운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미리 준비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이 글을 쓸 수 있었다.(정이철, “박용규 교수의 아주사 부흥 강의는 총신 죽이는 산당신학,” 바른믿음, 2018년 3월 29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126/(2018년 4월 17일 접속)).
 

누구에게나 의견 차이는 있기 마련이고 또 비판할 수 있다고 하여도, 문제는 그것은 진실과 사실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단정하거나,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진실처럼 왜곡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할 것입니다. 정 목사님의 주장처럼 제가 어느 사이트에 연락해서 무슨 내용을 내리라고 했는지 밝혀 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어떤 사이트에 무엇이 게재되었는지 전혀 몰랐고, 정 목사님께서 최근 제 강의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는 사실도 몰랐으며, 그러므로 당연히 그 사이트에 연락해 그것을 내리라고 요청할 수도 없고 그런 일을 한 일이 결코 없습니다.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진실을 호도하여 마치 제가 정직하지 않은 학자, 교수답지 않게 행동하는 학자로 단죄까지 하는 것은 가뜩이나 윤리적으로 비판을 받고 있는 교계 풍토에서 있어서는 안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확인해 본 결과, 정목사님이 언급한 “박용규 교수의 아주사 부흥에 대한 인터넷 강의”는 2006년부터 2007년까지 CGNTV에서 방영한 ‘박용규 교수의 예루살렘에서 평양까지(총 28편)’ 중 제25편 ‘1906년 아주사 오순절 부흥운동’을 말한 것으로, 이 동영상은 현재 CGNTV 홈페이지에서 언제든지 다시보기가 가능합니다. 박용규, “25편 1906년 아주사 오순절 부흥운동,” 박용규 교수의 예루살렘에서 평양까지, CGNTV 홈페이지, 2007년 3월 13일. <http://www.cgntv.net/player/home.cgn?vid=50886&pid=422> (2018년 4월 17일 접속).) 제가 어느 사이트에 연락하여 무슨 내용의 글을 내리라고 요청했는지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정 목사님이 운영하는 <바른믿음>도 언론일 터인데 언론의 기본은 당사자에게 어떤 형태로든 묻는 것이 기본이고, 묻지 않을 정도로 확신이 있다면 그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기본일 터인데, 정 목사님은 지금 그 기본조차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과연 정이철 목사님의 주장처럼 제가(박용규) “오직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등에 대해서만 이단”이라고 했던가요?
 

정 목사님께서 제가 단지 몇몇 이단만 이단으로 삼고 다른 이단에 대해서는 이단으로 생각하지도 않고 별 관심도 없는 것처럼 아래와 같이 글을 썼습니다.
 

괜히 개혁신학만이 교회를 교회되게 만드는 유일한 신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 이유가 있다. 박용규 교수 같은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오직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등에 대해서만 이단이라고 하고 있다. 자신들의 현대 복음주의 신학의 구도에서는 절대로 그 이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정이철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정이철, “박용규 교수, 20세기에 방언이 나타나고 더 중요해진다,” 바른믿음, 2018년 4월 8일.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141> (2018년 4월 17일 접속).)

 

아무리 비판의 자유가 있다고 하여도 허위 사실에 의하여 비판할 자유는 없다고 봅니다. 그것도 상대의 인격과 진실을 호도하고 정죄하는 글을 쓸 때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정 목사님은 어떤 근거로 위의 주장을 하게 되었는지 밝혀주시길 바랍니다. 정 목사님께서는 박용규 교수는 “오직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등에 대해서만 이단이라고 하고 있다”고 용감하게도 단정하는 글을 썼습니다.

 

저는 그동안 이단에 맞서 총신과 교단과 한국교회를 지키는 일에 교수 사역의 생명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정 목사님께서는 제가 몇몇 이단 외에는 이단에 대해서도 관심도 없는 신학자로 매도하고 이렇게 단죄까지 하였습니다. “오직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등에 대해서만 이단이라고 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어떤 근거로 그렇게 단정하셨는지 그 근거를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게다가 더 기가 찬 정 목사의 부언은 “자신들의 현대 복음주의 신학의 구도에서는 절대로 그 이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날카로운(?) 평가까지 덧붙였습니다.
 

저는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등에 대해서만 이단이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것은 사실을 왜곡해도 보통 심각한 왜곡이 아닙니다. 정 목사님이 제가 쓴 책들과 활동을 기초적으로 조금만 살폈다고 하여도 이런 허위 사실에 의한 글을 이렇게 용감하게 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를 간단히 증명하겠습니다. 제가 저술한 <한국기독교회사 1-3권>까지 보면 한국교회 안에 교회를 어지럽히는 수많은 이단들에 대해서 얼마나 혹독하게 비판을 했는지 간단하게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한국기독교회사 2권>4장 변천하는 사회, 갈등하는 교회의 ‘3. 교회 내부로부터의 도전: 이단의 전성시대’(205-239쪽) 전체가 이단에 대한 기록이며 여기에는 당시 이단들이 대거 수록되어 있습니다.

1) 김장호의 조선기독교회 설립

2) 최중진의 자유교

3) 이만집의 자치교

4) 성결교에서 파생된 하나님의 교회

5) 최태용의 복음교회
 

또한 <한국기독교회사 2권>14장 6.25전쟁과 종교 사회적 혼란의 ‘3. 이단의 발흥: 용문산기도원, 통일교, 전도관’은 한국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3개의 이단을 집중 조명하였습니다.
 

1) 나운몽의 용문산 기도원

2) 문선명의 통일교

3) 박태선의 전도관
 

이단에 대해서는 참으로 많은 연구를 진행했고 다양한 이단들을 조명했습니다. 최근 출간한 <한국기독교회사 3권>의 ‘제19장 급부상한 한국교회 이단세력’ 855-915쪽은 전체가 이단에 대한 것입니다.

1. 1960-1980년대 이단들의 급부상: 안식교, 여호와의증인, 몰몬교 외 18개

2. 1980년대 통일교의 기성교회 침투

3. 박태선의 전도관

4. 김기동의 귀신론과 베뢰아 아카데미

5. 깨달음의 종교, 구원파/ 권신찬-유병언계열, 박옥수 계열, 이요한 계열

6. 이장림과 1992년 10월 28일 재림론

7. 류광수의 다락방 전도운동

8. 평강제일교회(구 대성교회) 박윤식

9.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

10. 급부상한 신흥이단: 안상홍증인회와 만민중앙교회, 레마선교회, 예수중심교회, 지방교회
 

저는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외에도 통일교, 전도관, 김기동 귀신론, 구원파, 이장림, 시한부재림론, 류광수 다락방, 만민중앙교회, 지방교회, 레마선교회, 이초석 등 수많은 이단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저는 2005년 평강제일교회 문제만 아니라 1996년에 류광수 다락방 문제가 나왔을 때도 총신교수로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었고, 여러 이단들에 대해서 이단보고서를 작성해서 이단에 맞섰습니다. 제가 그동안 수많은 이단들의 문제점을 지적해 온 것이 사실이고, 이는 널리 알려진 일입니다.
 

저는 류광수 다락방 외에도 구원파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1992년 10월 28일 재림론의 문제점을 <신학지남>에 게재하고, <한국기독교회사>나 <신학지남> <총회 100년사> 등에 한국교회의 많은 이단들을 상술하였습니다. 제가 “오직 신천지, 안상홍, 박윤식 등에 대해서만 이단이라고 하고 있다.”고 정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정확히 그 근거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사실 관계도 확인하지 않은 불성실 문제만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남을 비판하기 위하여 거짓된 환경을 설정하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비판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목사님, 위 2가지 질문에 대해 정확히 답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비판과 비평에 대해 열려 있습니다. 견해가 다를 수 있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허위사실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위 2가지에 대해 앞으로 5일 안에 정 목사님이 운영하는 <바른믿음>에 답변해주시기 바랍니다.
 

최근 정 목사님의 글 가운데 한 가지 더 발견한 문제는 “총회에 7명의 교수들의 이름으로 올린 보고서를 제가 작성하고 다른 6명의 교수가 그저 공동서명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또한 거짓입니다. 이것도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공동의 글이란 어디에서나 누군가가 초안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위의 글은 그 초안도 복수의 교수가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교수들이 자세히 다 읽고 의견과 추가 사항까지 조언해 주어 완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는 정직하게 밝히는 바입니다. 앞으로는 제가 작성해서 다른 교수들의 그저 동의만 받은 보고서처럼 주장하는 것은 진실의 왜곡이요 다른 교수들에 대한 명예훼손입니다. “총신신대원 교수 7명의 정이철의 신학사상 문제점 분석과 평가”라고 분명히 표기해주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 더 짚고 싶은 점이 있는데, 조금 전 어떤 분이 정 목사님이 운영하는 <바른믿음> 사이트의 분류 항목 명이 수정된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문제인물’이란 항이 ‘깊은토론’이란 항목 명으로 바뀌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 목사님은 왜 이렇게 수정했는지도 말씀해주셔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문제인물’이라는 항목 안에 유명인사들을 나열하여 강하게 성토하다가 왜 은근히 분류 항목을 수정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문제인물’과 ‘깊은토론’은 전혀 의미도 주는 이미지도 다릅니다.

혹시 총회 실행위원회와 이단대책위원회에서 논의가 되고 있다는 점이 부담이 가셨나요? 정 목사님께서 이들 인물들을 문제의 인물이 아니라 깊은 토론이 필요하다는 입장 수정을 하셨다는 의미인가요? 며칠 사이에 그런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도 놀랄 일입니다. 왜 수정했는지 그 이유도 궁금합니다. 얼마 전에 정 목사님께서 감리교 웨슬리의 구원관을 행위구원이라고 주장하였다가 사과한 것을 보았는데 이번에도 그럴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정 목사님의 답변 태도에 따라 제 자신의 문제만 아니라 존경받는 분들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도 앞으로 하나씩 하나씩 밝힐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것은 제 개인의 명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장합동과 총신의 명예가 같이 걸려 있고, 이 같은 무차별적인 인신공격적인 폭로는 정 목사님이 그렇게 강조하시는 개혁주의 신앙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지속적으로 제 문제만 아니라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분명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중간에 사이트의 글을 바꾸지 마십시오. 은근히 입장을 아무 말도 없이 수정하지 마십시오. 수정할 때는 사과를 하고 수정하든지, 아니면 수정한 이유를 밝히고 수정해야 정론의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개혁주의 목회자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또 글을 올릴 때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 목사님께서 제 자신과 총신과 예장합동과 관련하여 신학적 문제를 제기하셨기 때문에 제 질문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답변해주시기를 정중히 요청합니다.
 

공개적으로 총신문제와 관련하여 저에 대한 글을 정 목사님께서 운영하는 사이트에 올리셨으니 저의 질문에 대한 답신과 근거를 공개적으로 정 목사님이 운영하는 <바른믿음> 사이트에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토론은 중립적이어야 하고 투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점을 고려하셔서 <뉴스파워>와 <교회와신앙>에 실리는 저의 공개질문에 대하여 정 목사님은 자신의 <바른믿음>에 밝혀 토론을 진행하기 바랍니다. 답신은 5월 2일부터 7일까지 5일간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5월 7일까지 답신해 주시길 바라고 기다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정 목사님, 이렇게 불가불 공개적으로 질문을 드리는 것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정 목사님의 사역 위에 주님의 크신 은혜가 넘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2018년 5월 2일

부족한 사람, 박용규 드림 

 
백년에 딱 한번 핀다는 "소나무꽃"입니다.
백년에한번피는 소나무꽃 이귀중한 꽃을 보신분은 행운이 늘 따른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음 보는 꽃






















































































































































우리벗님들~!
感想 잘 하셨는지요
健康조심하시고
親舊들 만나
茶 한잔 (커피 한잔)나누시는
餘裕롭고 幸福한
나날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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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서정이라는 것에 대한 반성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한 행위이시므로 과거 현재 미래가 우리처럼 분명한 것이 아니다. 구원의 서정이 많은 이들에게 오해되고 있는 것이 또 있다.

 

구원의 서정이라는 것을 조직신학에서 반드시 배운다. 물론 구원의 서정 서론에서 “그 궁극적 실현에는 긴 과정을 요하는 구원 과정의 순서를 논한 것이다.”라고는 했지만 막상 서정의 모든 것을 나열해놓고 보면 이미 이루어진 것도 있고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도 있으며 심지어는 살아생전에는 완성될 수 없다는 것조차도 있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며 신자가 받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시는 구원과 신자가 그것을 수용하는 분야에서의 일은 결코 같은 것일 수 없다. 그러므로 구원을 논하자면 구원의 근원이시고 주체자이신 하나님의 일을 논하는 것이 우선일 테고 그것을 받아 수용하고 혜택을 누리는 신자의 일을 나누어서 따로 논해야 마땅하다.

우선 가장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전통 장로교의 구원의 서정을 간단히 나열해보자.

1. 소명

2. 중생

3. 회심

4. 칭의

5. 양자

6. 성화

7. 견인

8. 영화

이것은 원래 서양의 학자들이 7가지로 했던 것을 박형룡 박사가 견인을 추가한 것이다. 이 중에서 중생, 회심, 성화 3가지는 명확히 신자의 몫이고 나머지 소명, 칭의, 양자, 영화 등, 4가지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에 전적으로 소속된다.

그러면 나머지 1인 견인은 신자에게 해당되더라도 신자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다고 볼 수도 있으며 특징 설명에서는 명확히 하나님의 의지에 근거를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서나 신자의 일에서나 다 같은 것은 모두 성령의 활약이 전제된다. 이러한 여러 가지 다른 양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주권은 어디까지이고 신자의 자의적 결정이 어디가지 요구되는 것인지를 다루지 않고 있다.

또 문제가 되는 것은 특히 성화가 현세에서는 완성되지 않으며 영혼의 성화는 성도의 죽음에서, 육체의 성화는 육체의 부활 시에 완성된다고 한다. 그러면 바울의 주장을 되새겨보자.

[빌3:10~12]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 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이 성경에서 바울이 부활에 이르려 한다는 말이 자기가 빨리 죽어서 부활에 이르겠다는 말이 아니지 않는가? 살아생전에 성화를 이룩하려는 노력이 불가능한 일을 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 다. 위 성경 15절에서 바울을 포함하는 몇 사람들이 온전히 이루었다고 말했다.

[빌3:15]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신자가 하나님의 요구처럼 거룩할 수 있는지, 또는 완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확대하고 이유를 붙여서 이 성경을 본문의 이야기에서 제외시키려는 것은 불성실한 태도이다. 온전히 이룬 사람들은 구원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할 더 이상 다음단계가 없다.

16절에 말하기를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하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온전히 이룬 자들이 확실히 존재하며 어떤 상태인지와 그들이 할 일이 무엇인지까지 설명되고 있으니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 가지 문제를 더 짚어보자

[롬8:29, 30]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 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아심, 미리 정하심, 부르심, 의롭다 하심, 영화롭게 하심, 등 구원에 관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 5가지를 빠짐없이 나열하고 있다. 특별히 관심 가져야 할 부분은 30절의 마지막 부분인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이다.

구원의 서정에서는 영화롭게 되는 것이 죽거나 재림 시에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어째서 성경과 신학이 이리도 다르단 말인가? 구원의 서정에서 말하는 영화는 위의 성경 로마서 8장 30절의 영화와는 서로 다른 어떤 무엇인가? 분명히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하여 완료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위 성경을 보면 마치 바울이 탕자의 비유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 같아 보인다.

아버지는 날마다 동구 밖에 나가서 집나간 아들이 이제 오나 저제 오나 기다렸다. 멀리서 아들이 오는 모습을 알아보고 달려가서 포응을 하고 데려다가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 마을사람들을 초청하여 떡 벌어지게 잔치를 벌였다.

패륜아를 위하여 얼마나 영화롭게 대하여 주었든지 그토록 얌전하던 큰 아들이 시기가 나서 투정을 부리기까지 하였다. 부르신 자를 곧바로 영화롭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조직신학은 그 영화로운 대접이 먼 훗날로 지정되었다니.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한 행위이시므로 과거 현재 미래가 우리처럼 분명한 것이 아니다. 구원의 서정이 많은 이들에게 오해되고 있는 것이 또 있다.

칭의에서, 사실은 의롭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의롭다고 말씀하셨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성화를 통하여 언젠가는 의인의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의’라는 것은 행위이다. 상태의 어떠함이 아니다.

행위는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판단에 의하여 의롭다는 결정이 났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미흡한 부분이 있어서 장차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는 것은 착오일 뿐이다. 하나님은 나중에 다시 더 온전한 의를 선포해주시지 않으신다. 그럴 기회는, 오류가 있는, 이 구원의 서정에서조차도 발견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칭의는 우리의 어떤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전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보시고 의롭다 하시는 것이다. 단지 신자는 그리스도의 의를 거저 넘겨받은 것일 뿐이다. 그러니 어느 훗날 정말로 의롭게 되는 날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칭의에 대한 성경을 읽으면서 이 글을 마치자.

[롬5:14, 15, 18, 19]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 예수의 의가 신자 모두에게 전가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 아담의 불순종이 모든 인류에게 전가됨. / 예수의 순종이 신자 모두에게 전가

2018. 5/10 17:36 정 정조

기독교이단사이비 연구가 원로목사 정정조

 

김문제  munjettl@naver.com

<저작권자 © 목회와진리수호

💥"대 충격"💥
💥숨겨진 전모💥

이스라엘 모사드 정보국과 미국의 CIA가 연합첩보작전으로 최근 입수한 중국의 음흉한 동북아 공산연방제 극비전략.

중국 시진핑이 최근 김정은과 남한의 좌파집단과의 연쇄비밀회담에서 남북 고려 연방제후 미군을 철수시켜 한미동맹을 깨고 북한과 남한과 중국 간의 군사동맹조약까지 맺은 후 중국 북한 남한이 함께 연합하는 동북아 공산연방제 체결까지 맺으려하는 음모가 비밀리에 진행 중에 있다고 밝혔다.

100% 사실이다.

지난해부터 중국이 원흉이고 북핵은 중국것이라고 누차 말해온 것을 기억할 것이다. 박근혜 탄핵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일 따름이다.

제주. 평택. 인천. 평창. 성주 소성리에도 막대한 중국자본이 들어와 토지를 매입하고 사드를 비롯해 각종 미군관련 집회시위. 정치적 시위에 끼어들어 분열책동을 조장하고 그들에게 뒷돈을 대주어 시위를 책동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원흉이라고 말한 이유를 알기 바란다. 이제 뉴스에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의 소리 긴급 뉴스

드디어 미국이 중국 고립작전에 돌입했다. 미국이 북핵을 비밀리에 지원하는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한 고도의 외교전술을 펼치고 있다고 미국의 부루킹스 전략연구소가 밝혔다.

FOX NEWS도 이스라엘 정보당국이 최신 입수한 중국의 아시아 패권강화전략에 관한 기밀정보를 미국 정보당국에 알려줌으로서 최근 밝혀졌다고 한다.

이스라엘이 입수한 기밀정보에 의하면 중국의 집요한 동북공정 전략의 일환으로 치밀하고도 음흉한 그 속내가 여실히 들여다보이고 있다.

중국 시진핑이 최근 김정은과의 연쇄비밀 회담에서 남북 고려 연방제 후 미군을 철수시켜 한미동맹을 깨고 북한과 남한과 중국 간의 군사동맹조약까지 맺은 후 중국 북한 남한이 함께 연합하는 동북아 공산연방제 체결까지 맺으려하는 음모가 비밀리에 진행 중에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 모사드 정보국과 미국의 CIA가 연합첩보작전으로 최근 입수한 중국의 음흉한 동북아 공산연방제 극비전략은 결국 미국의 아시아 패권 전략에 치명상을 주게 되며 잘못하면

일본과 대만,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핵무장까지 허락해야 하는 최악의 핵 도미노 상황까지 도래할 수 있다는 것이 미국이 가장 민감하게 우려하는 상황인 것이다.

이와 때를 맞추어 미국의 존 볼턴 백악관 특별 안보 보좌관이 6월초 중국의 최대 아킬레스건 대만을 공식 방문하여 미국이 하나의 중국원칙을 전격적으로 깨고 미국이 대만정부에 독립국가 인정을 카드로 제시하고

미국의 오끼나와 주둔 공군의 전략자산 일부를 대만으로 이전 배치한다는 상호 국익차원의 군사동맹 체결까지 맺으려는 결과가 기대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이 실제로 중국 시진핑 겁주기가 아닌 미국이 아시아 패권입지를 더욱 강화하고 남중국해해상 패권을 강력히 유지하면서 중국의 한반도 점령시도를 적극 방어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로

대만과의 전략적 군사보호협정을 적극적으로 체결하려는 미국의 아시아 패권 유지를 위한 중대한 전략이라고 밝히고 있다.

핵전쟁 시나리오뿐만이 아니라 만일에 하나 북폭시 혼란을 틈타 북한으로 기습 침공해 들어오는 중국군 특수군단과 러시아 군대까지도 격퇴시킬 모의 핵전쟁 시뮬레이션 훈련도 현재 미국 육군 해군 공군 합동으로 시험 중이라고 한다.

가증스러운 중국이 미국과의 밀약을 통한 전략적 연대를 통하여 미국의 북 핵시설 파괴 및 김정은 참수를 묵인해 줄 것처럼 약속했으나 최근에 보여준 시진핑, 김정은 극비회담을 통해 확인된바 종국에는 미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시진핑이 동북공정의 완성을 위해 중국, 북한, 남한 주사파집단이 연합한 중국주도의 동북아 공산연방제의 계략이 깊숙이 숨어 있음을 이스라엘과 미국 정보당국이 최근 밝혀냈다고 한다.

결국 남한의 주사파집단이 최근에 김정은과 야합하여 전개하고 있는 일련의 남북 평화 쇼는 이들이 결국 중국과 평양에서 극비리 회동을 통해 만들어낸 동북아 공산연방제 음모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음모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을 5월에 만난다는 것은 일종의 해상봉쇄작전과 북한 선제폭격을 위한 유리 한 여론조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트럼프의 고도로 계산된 일종의 명분 쌓기용이라고 밝히고 있다 .

드디어 남한의 주사파집단이 꾸미는 일련의 깜짝 평화쇼는 북한이 주도하는 것이며
이에 남한의 주사파집단이 북한 김정은과 야합하여 중국주도의 동북공정 최후전략인 동북아 중국 공산연방제를 획책하기 위한 대국민 사기극임이 이스라엘 정보당국에
의해 여실히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이것도 모르고 주사파정권의 깜짝 평화 쇼에 현혹되어 열광하며 부화뇌동하는 남한의 주사파 레밍 개돼지 백성들은 중국의 동북아 공산 연방제에 기생하는 식민지 노예백성으로 영구히 살아갈 날만이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정 우리는 영원히 구제받지 못할 민족인가?

D K. R L. IN. USA
안녕하십니까?
5월24일 목요일입니다. 출근하면서 느낀 것이 이제 5월의 이 좋은 풍경도 끝나는구나. 개인적으로 1년 중에 가장 좋아하는 달이 5월입니다.

5월은 말로서, 글로서 그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풍경이 있습니다. 우선 기온이 적당하고 주위에 보이는 것들도 선명하고 따뜻하게 보이는… 이제 이 5월을 보내면 1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작년 이 맘 때에도 저는 이런 느낌을 글을 썼을 것입니다^^

지금 이 땅의 언론들이 우리 민초들을 얼마나 농락하고 얼마나 바보로 보고 있는지 그런 대우를 받고 있는 데에서 분노하고 화가 납니다. 진실을 담아서 사실적으로 보도를 해야 할 것인데 마치 우리 동포 강제 점령하고 있는 불법 군사 단체 북한괴뢰군처럼 세뇌를 시키고 있습니다.

역대 대통령 중 방문한 국가 원수가 우리 대통령에게 이렇게 한 적이 있었던가? 트럼프는 답이 섰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땅의 언론들은 분위기 좋았다고만 찬양만 합니다. 우리 민초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여기에 분노한 민초들은 심지어 백악관 스크랩터를 올리고 진실을 알리고 우리 스스로 찾고자 노력을 합니다. 일베를 비롯해서 카톡,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에서 말입니다.

어느 분 말씀처럼 “우리가 이렇게 손품 발품 받아서 정확한 정보를 찾는 고생을 하는데 티브 시청료 주면서 보는 저 방송은 이러한 것은 없고 오로지 이니 찬양과 주사파 세력들의 세뇌만 있다”고 말입니다.

역대급 개망신은 이렇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태도 변화에 대한 생각을 묻는 말에 문재인의 답변이 끝나고 나서는 “통역이 필요 없겠다. 왜냐하면 좋은 말일 것이기 때문”이라는 농담(?)으로 즉석 기자회견을 마무리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 땅의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이 “통역 필요없다. 왜냐면 좋은 말일거니까?” 이렇게 보도를 내면서 심지어 훈훈하게 끝났다고 합니다.

이게 훈훈한 것이며, 바로 앞에(차마 지난 정권은 못 쓰겠습니다. 박근혜대통령은 절대 파면 당한 것이 아니라, 불손 세력들에게 제압을 당한 것이기에 그분의 임기도 잠시 멈추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박근혜대통령때는 열광이겠습니다.

이 땅에서 사는 민초들을 그야말로 개돼지로 보는 행정, 입법, 사법 그리고 언론들까지 거기에 북괴까지 그러니 우리 민초들은 매일매일 자존심이 상하고 우리가 왜? 이런 대우와 대접을 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 밖에 안 듭니다.

태영호 공사께서 국정원 연구소를 사직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불안 했을 것입니다. 온천지가 주사파 세력들이기에 북괴가 어느 틈에 자신을 테러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어느 탈북자분께서 이 땅의 아픔을 보다 못해 목소리를 내다가 위법(?)을 하게 되었나 봅니다. 그래서 검찰까지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분들은 어릴 때부터 본 것이 있기에 검사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저를 총살 시키는 것은 아니죠?” 그랬더니 검사가 “총살이라니요! 그런 끔찍한 말을…” 이렇게 하더랍니다. 우리는 웃을 일이지만 그 분들은 그렇게 느낄 수 있기에 절대 웃을 수만은 없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태공사께서도 이러한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래서 더 안타깝습니다.

오늘도 태공사님이 쓰신 책을 올려 보겠습니다. 오늘은 p48~50 요약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김정일이 <노동신문>을 통해 “전쟁에 지면 지구를 깨버리겠다”는 발언을 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소련이 공식적인 해체가 선언된 1991년 그것도 예수님이 탄생하신 12월25일날 『김일성은 인민군 간부와 항일혁명투사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소련까지 붕괴되고 중국도 남조선에 달라붙게 되었다. 앞으로 조국통일은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겠는가. 남조선과 미국이 조선(북조선)을 공격해 오면 우리의 힘만으로 싸워 이길 수 있겠는가. 한번 솔직히들 말해 보라.”

군 간부들과 항일혁명투사들이 “수령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수 십년 동안 조국통일을 준비해 왔는데 우리가 무조건 이깁니다.”라고 답변하자 김일성의 질문이 재차 이어졌다. “조국해방전쟁(6.25전쟁)을 해 보지 않았는가. 전쟁은 생각했던 것처럼 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진다면 어떻게 하겠는지 답변 해 보라”

모두가 답변을 주저하고 있는 사이 김정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목청을 높였다. “수령님, 우리가 전쟁에서 지면 지구를 깨버리겠습니다.”

그제서야 김일성은 책상을 탁 치면서 “내가 듣고 싶었던 답변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지면 이 지구를 깨버려야 한다. 우리가 없는 지구는 필요없다”고 만족해 했다.

조선 노동당은 이듬해(1992년) 초부터 이와 같은 내용의 강연사업을 내부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한다. 그 목적은 북한이 핵무기 개발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전당적으로 각인시키는 데 있었다. 당시 나 또한 ‘북한이 없는 지구는 필요 없으며 그러자면 핵무기를 가지는 방법밖에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고 합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저런 대화를 했고 거기서 나온 말들 때문에 이 땅의 주사파들은 그때부터 북이 핵이 가지면 통일 후 우리가 핵 가지는 것이다는 이런 괴변을 내 놓으면서 북이 핵을 가지는 것을 찬동했는 것 같습니다.

태공사께서 “북괴는 절대 핵을 포기 하지 않는다”고 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김정은과 문재인은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거나 아님 둘이 짜고서 이 땅의 민초들을 농락하고 있고 전쟁(북폭)을 몰고 가는 것입니다.

자유반공애국시민진영에서 아니 대한민국이 정신 차리면 안 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매주 토요일은 자유반공애국시민을 똘똘 뭉치게 하는 것도 있겠지만 이 땅의 어리석은 백성들을 깨우는데 더 중점을 두고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제 말을 안 해도 자유와 보편적 가치관을 수호하는 사람들이고 집회는 다르지만 매주 혹은 주중에 집회가 있다고 하면 그렇게 모이고 뭉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좀 더 잘 뭉쳤으면 하는 바램도 있지만 차차 그것도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민초들이 올바른 사고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저는 꼭 그렇게 예전처럼 뭉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제 우리가 누구의 말과 지시를 받고 광장에 나왔습니까? 우리 스스로 나왔기에 각 개인이 바르고 슬기롭고 지혜로운 생활을 한다면 꼭 뭉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 지금 급선무는 잠자고 있는 민초들을 깨우는 것입니다. 이승만대통령은 그 무지한 시대에 더군다나 봉건시대에 ‘자유’라는 말과 ‘자유민주주의’라는 말 조차 들어 보지 못한 그 백성들을 깨우시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낮은 문맹률에 높은 학구역을 가졌고 또 ‘한강의 기적’을 한번 해 본 민초들이니 못할 것이 뭐가 있고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태극기 선배동지들께서는 이 땅의 잠자고 있는 민초들을 분명히 깨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이 바로 선 날 역사는 좋은 평가를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럼 우리의 소임은 다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나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변함없이 부드러운 파이팅을 보냅니다(coffee)(note)


벽천 박광석<2>

헬라어 [파라클레-토스]의 역어로서, 이것은 동사 [파라칼레오-(parakaleo, 부른다. 초청한다. 위로한다. 격려한다)에서 온 형용사이다.

종종 명사로사 [변호자], [탄원자], [중보자]를 가리킨다. 랍비 문학에서는 [페라 클레타 (pera qleta')]의 형(形)으로 인용되고, 피고인의 성격에 대하여변호하고, 특히 유리한 증거를 말하기 위해 출정하는 친구를 가리켜 씌어져 있다.

1. 제4복음서의 저자가, 신자들을 강하게 하고 그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한 이름을 말한다.
2. 영어 paraclete는 희랍어 parakletos를 음역한 것이다(보혜사라는 용어 이 한글로서의 의미는 신자를 보호하여 돕는다는 뜻이다).

기본적으로 '~의 옆으로 불림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 이 단어는 이러한 수동적인 의미('~를 도와 구원해 주기 위해 옆에 서 있는 자'란 뜻)가 그것의 능동적인 외연적 의미와 결합되어서 어떤 사람을 위해 그의 '대언자'(요일 2:1)로서 탄원해 주며,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죄를 깨닫게 해주고 그 죄의 잘못을 인식시켜 주는 자를 가리키는가 하면, 또한 '상담자'(한글개역, 보혜사; KJV, comforter; RSV, counselor;요 14:16,26, 15:26, 16:7)로서 다른 사람을 권고하고 강건케 하며 위로해 주는 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용어는 요일 2:1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이 단어는 자기 백성의 대표자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백성을 중재하는 그리스도의 직분을 가리키고 있다. '의로운 자'(참조. 사 53:11에 나타난 여호와의 종에 대한 묘사)로서 그리스도는 스스로 인간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심으로써 하나님과 자신의 백성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세우셨다. 죄로 말미암아 생겨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장벽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거되었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가 비로소 시작된다.

이와같이 그리스도는 인간을 위해 탄원해 주며 하나님을 향해 그들을 대리하는 '대언자'이다. '보혜사'로서 그리스도의 직분은 히브리서에서 주창된 대제사장의 직분과 일치한다(참조. 특히 히 7:25-28) 제4 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이 분은 성령이며 그 직분은 의미상 그리스도의 직분과 일치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성령은 그리스도와는 구별된다. 요한복음에서 보혜사를 가리켜 남성대명사들과 형용사들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요 14:16, 또 다른; 14:26, 그가; 16:13, 그가)은 성령이 완전히 인격적인 존재로 간주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상 제4 복음서에 나타난 '보혜사'에 관한 구절들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인격성에 관한 가장 고도로 발전된 사상을 보여 주고 있다. 보혜사는 무엇보다도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해 주는 자이며 여러가지 모양으로 제자들과 세상에 대해 그리스도를 증거해 주는 자이다.

보혜사는 진리의 영으로서(요 14:16-17) 그는 믿는 자들을 진리 그 자체(6절)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는 안내자이다.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계시자로서 보혜사는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제자들 옆에 임재해 있는 '또 다른 보혜사'(16절)이다. 성령은 내재하는 인격적 현존으로서 제자들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제자된 모든 사람들과 그리스도의 명령을 준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속할 것이다(17,20-24절). 바로 이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알려지게 되며 드러나실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성령이란 매개를 통하여 임재하신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후에 나타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돌아온 사실과 매우 밀접히 관련되고 있다(14:18, 16:16; 참조. 20:22). 보혜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계시를 연결짓는 이러한 사상은 요한 신학의 밑바닥을 흐르는 기본적인 것이며 또 신약성경 전체를 통하여 명시적으로 또는 암시적으로 단언되고 있다.

내재하시는 성령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도래할 것인지의 여부는 그리스도의 들리우심을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구원사업이 성취되는가의 여부에 달려있고 이것이 성취되면 보혜사도 오실 것이다(참조. 7:39). 따라서 보혜사의 도래와 활동은 철저히 미래시제로 언급되며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겠다는 약속은 죽으시고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창조행위로써 제자들 속에 내재하는 성령을 불어넣어 주실 때에만 성취된다(20:22). 그러므로 보혜사의 도래는 예수의 떠남의 전제조건이며, 예수의 육체적 현존이 사라지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의 제자들은 주의 지상적 사역의 기간에는 현존하고 있지 않았던 성령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을 수 있을 것이다(7:39). 바울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제4 복음서에 있어서도 성령의 내재하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의 기본원리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의 합일은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신자들에게까지 확장될 것이다. 그런데 이 죽음에 의하여 부활 후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사실들과 성령이란 매체를 통한 계속적인 임재가 동시에 암시되고 있다.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것은, 즉 그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그리스도의 행동과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내재하시는 보혜사의 활동이다.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14:26).

제4 복음서가 기록된 것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이다. 말하자면, 복음서 기자는 교회 내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활동을 통해 단지 그리스도의 지상적 삶의 시절에 그를 보았던 사람들이 알 수 있었던 것보다도 더 완전하고 더 적절하게 그리스도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보혜사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사실상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에 대한 보혜사의 계시가 지닌 전체 내용이다. 따라서 보혜사의 직무는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계시해 주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복음서의 사건들 속에서 단번에 이루신 일의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다.

보혜사는 기독교인들을 모든 진리에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가 새로운 이해력을 제공해 주지만 진리 자체는 이미 계시되었다. 왜냐하면 진리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참조. 16:13-15). 그리스도에 대한 보혜사의 증거는 보혜사의 참된 의미를 드러낸다. 즉 보혜사는 자신의 증거를 통하여 세상을 심판함으로써 세상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거부한 죄를 깨닫게 하며,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의롭다 하심을 입증해 주며 악마에 대한 그리스도의 최종적 정죄를 선언한다(16:8-11). 이증거는 사도적 증언의 내용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설교에 영감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할 수 있는 분이 바로 보혜사이다. 보혜사 자신의 증언이기도 한 사도들의 증언은 박해 아래서 행한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순교에 직결된다(15:26-16:4).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이러한 측면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제4 복음서는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즐겨 사용한 주제를 반향하고 있다(참조. 막 13:11, 눅 12:8-12). 3. 요한에게 있어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 용어 '파라클레토스'는 칠십인 역 성경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신약성경과 동시대에 저작된 다른 유대교 저작들에서 발견된다. 신약성경 이외에서 이 용어는 가장 일반적으로 '변호자','매개자', '중재자' 즉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타나는 자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는 랍비 자료에 의해서 입증되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변호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을 뚜렷이 의미하고 있는 요일 2:1(한글개역, 대언자)에서 적절히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 이 용어를 그 추리된 역사적 배경을 근거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어 왔다.

만다야교의 '조력자'와 쿰란 사본에서 기술된 대천사 미가엘은 각기 이 보혜사의 모델들로서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가장 안전한 길은 복음서 자체를 근거로 보혜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길이다. 분명히 보혜사, 즉 진리의 영(요14:17, 15:26), 또는 성령(14:26)은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에(요 16:7) 영원토록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있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파견된다(14:16,15:26). 그는 세상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은 채 있다(14:17). 그러나 그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를 그들에게 회상시켜줌으로써 예수를 영광스럽게 한다(14:26, 16:14). 그는 제자들이 예수의 지상적 사역의 기간 동안 깨닫지 못한 예수로부터 나온 진리들을 알려주며, 다가올 일들을 선포한다(16:12-15). 그는 애초부터 예수와 함께 있어왔던 제자들이 예수에 대한 증거를 지니고 있듯이(15:27) 예수에 관한 증거를 지니고 있다(15:26). 그는 죄의 심판에 관하여 세상을 논박하고 폭로한다(16:8-11). 사실상 보혜사는 예수의 육체적 현존이 더나고 없는 중에도 예수의 지도력과 권능을 그의 제자들 사이에서 실현되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몇가지 이유로 보혜사는 예수를 계승한(요일 2:1) '또 다른 보혜사'라고 불린다(14:16). 보혜사의 역할에 대한 복음서의 상세한 묘사는 그 생생하고 구체적인 현실적 의미를 전달한다. 보혜사는 단순한 희망의 대상이나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공동체 내의 생생한 경험과 분리된 기능이 낳은 문학적 추출물로 여겨진다. 복음서 기자는 보혜사의 공동체에 대한 접근을 가능케 해준 기독교 교회 내에서 행사된 예언자적인 직책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련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예언자에게 교회들에게 써 보낼 바를(계 1:11) 가르치고 있는(계 1:3,10, 22:6-7,9-10,18-19) 계 2-3장의 일곱 편지들이 요한 신학의 보혜사에 대한 몇가지 평행구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각 서신은 살아 있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말씀이다(1:17-19; 각 서신의 서두에 여러가지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는 2:1,8,12,18, 3:7,14). 그러나 이것은 성령의 말씀이기도 하다(2:7 등). 따라서 그리스도와 성령은 요한의 보혜사 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 비록 계시록과 제4 복음서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들이 있다 하더라도 성령(보혜사)에 대한 그들의 묘사는 몇가지 점들에서 상호보완적이다.


<출처: 한국컴퓨터선교회-KCM사전>/잠긴동산

지금은 마지막 때인 증거

지금은 마지막 때 : 지금이 마지막 때인 증거!

- 어빈 백스터 목사님 (Brad TV) -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마지막 때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지금이 왜 마지막 때인지 

제대로 깨닫고 있는 사람은 적습니다.

왜 지금이 마지막 때인지 

많은 사람들을 깨울 명쾌한 어빈 백스터의 설명을 들어보시죠

 

 

** 이 거대한 자해劇을
           언제까지 계속할 건가? **

                  - 朝鮮日報 -

우리 현대사에서 최악의 자살골로 기록될 것이 대북 지원이다.
좌파 정부 10년간 8조원을 북한에 주었다. 현물 빼고 달러 현금 보낸 것만 3조원이 넘는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에 쓴 돈도 그쯤 될 것이라 한다.
돈에 꼬리표가 안 달렸으니 추적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북한 정권엔 그 주머니가 그 주머니다. 우리가 준 달러가 핵 개발에 안 쓰였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다.

좌파는 이상(理想)을 좇는다고 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북한 변화의 꿈을 담아 지원했을 것이다.
기대와 달리 북한은 한순간도 핵 개발을 멈춘 일이 없다.
남북 정상이 만나고 금강산이 열렸을 때도 중단되지 않았다.
핵이 완성되자 북한은 이제 거리낌 없이 공갈 협박을 해대고 있다.
국민 세금까지 퍼주며 북한의 위협을 키워준 꼴이 됐다.

그렇게 안보 자살골을 넣은 주역들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어느 누구도 과거 실수를 인정하는 사람이 없다. 반성은커녕 여전히 북한을 못 도와줘 안달인 듯 보인다.
대북 관계만 그런 것이 아니다.
문제를 풀어야 할 정부가 일을 더 키우고 있다.
안 써도 될 돈을 쓰고
안 생겨도 될 갈등을 만든다.
올해 대한민국을 특징짓는 키워드는 '자해(自害)'였다.
좁은 이상론에 빠져 큰 국익을 해치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졌다.

지난 주 정부가 새 에너지 정책을 발표했다.
신재생 에너지 비중을 세 배 늘린다고 한다.
대신 원전 건설을 중단키로 했다.
이렇게 '탈 원전'에 드는 돈이 최소 100조원이다. 원래대로 원전을 짓는다면 25조원으로 충분하다.
25조원이면 될 일에 100조원을 쓰겠다는 것이다.
어떤 계산으로도 나올 수 없는 자해의 셈법이다.

탈 원전은 세금 더 쓰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폴란드의 차세대 원자로 사업을 일본이 따내게 됐다.
한국도 뛰어들었지만 밀리고 말았다.
우리의 탈 원전 정책이 결과를 갈랐다고 한다. 폴란드가 한국 정부의 정책 리스크를 우려했다는 것이다. 원전은 달러를 긁어모을 미래 전략 산업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돕기는커녕 원전 수출의 발목을 잡고 있다.
누구를 위한 정부인가.

삼성전자가 회삿돈 60조 원을 주주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주주 친화'를 명분으로 걸었지만 실상은 다르다.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이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 일가 지분은 약 20%다.
이 정도로는 경영권을 공격받을 때 확실한 방어가 힘들다.
최순실 스캔들 이후 국민연금의 '백기사' 역할도 기대하기 힘들어졌다.

정부 역시 우호적이지 않다.
청와대까지 나서 이재용 부회장을 감옥에 보내려 했다.
기댈 곳 없어진 이 부회장은 외국인 주주의 환심을 사는 전략을 택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주주 환원 정책이다.
주주에게 60조원을 돌려주면 절반 이상이 외국인에게 간다.
이 돈을 미래 투자에 쓴다면 국가 경제에도 큰 이익일 것이다.
그것을 사실상 막은 것이 정부다.
정부의 반(反)기업 행보가 외국인 주주들 배만 부르게 했다.

최저임금 인상을 앞두고 일자리가 줄기 시작했다. 부담을 못 견딘 고용주들이 인원 삭감에 나선 탓이다. 근로시간까지 단축되면 고용 충격은 더 심각해진다.
근로자를 위한다는 정책이 도리어 근로자에게 해가 되고 있다.
한계 기업들은 해외 탈출을 검토하고 있다. 법인세 역주행은 대기업까지 그 행렬에 동참시킬지 모른다.

온갖 규제가 신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
드론이 못 뜨고 바이오와 빅데이터 산업이 막혔다. 날개를 달아줘도 모자랄 판에 손발을 묶어 놓았다. 경쟁국은 훨훨 나는데 우리는 스스로 족쇄를 채웠다.
이래 놓고 말로는 4차 산업혁명을 꽃피우겠다 한다.
이런 바보 같은 자해 짓이 어디 있나.

정부가 결국 위안부 합의의 '판도라 상자'를 열었다.
한·일 간에 비공개하기로 한 사항을 공개했다. 미흡한 합의문에 도장 찍어준 전임 정권 잘못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국가 간에 오간 얘기를 다 까발린다면 외교가 성립할 수 없다. 어떤 나라도 우리와 속 깊은 대화를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국가 신용도 떨어진다. 믿을 수 없는 나라란 이미지가 생긴다.
적폐 청산하려다 외교가 망하게 생겼다.

이 모든 것이 쇠락과 축소로 가는 길이다. 일시적으로는 박수 받을지 모른다.
일부 이익 보는 계층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 전체로는 손해다.
우리가 싸울 경쟁자는 밖에 있는데 정부의 시선은 안으로만 향해 있다.
국익의 각축전이 숨 가쁘게 펼쳐지는 바깥세상을 보려하지 않는다.
탈 원전이며 반 기업,
노동 편향 정책들이
다 그 결과다.
우물 안 좁은 세계에 빠져 큰 국익을 그르치고 있다.

우리 실력이 모자라 뒤처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나 잘 할 수 있는데도 스스로 쇠락의 길을 걷는다면 분통터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어처구니없는 마이너스의 자해극을 언제까지 계속할 셈인가.

     - 박 정 훈 / 조선일보 논설위원 -

상황이 이러함에도 문재인 정부 1년을 돌아보는 현재의 지지도가 83%에 이른다고 보도가 나온다.
정말 그런 것일까?
극민들은  속고있다.
언론과 방송은 거짓말로 기만하고 사기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과 방송은 민주노총이 장악해서 꼼짝없이 그들 통제를 받아야만 하는 세상이다.
세상에 이게 정상적인 나라인가?

남북정상회담으로 북핵이 폐기되고 평화의
시대가 열릴꺼라고 요란법석이다.
북핵 폐기가 조건없이 폐기될줄 알았는가!
들리는 말로는 핵  1기당
10조원을 달란다고 한다.
북핵이 약 50기 이상될꺼라고 하는데
그 돈은  천문학적이다.
일본도 과거사 문제로 200억불 갖다바쳐야할 판국이란다.
김정은은 이쯤되면 핵장사로 엄청남는 장사를 한셈이다.

금번 판문점회담의 수혜자는 단연 김정은이였다.
막가파의 상징이며, 인생말종 취급받던
똥돼지가 괜 찮은 사람으로 둔갑된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중국 시진핑이나 미국 트럼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제적 거물 정치인으로 키워놓았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도대체 누가 만들어 주고 있는가?
문재인과 김일성을 숭배하는 족속  주사파 무리들이다.
대한민국이 이토록 일그러진 나라가 되고 말았다는게 너무너무 기가막히고 한심한 노릇이다.
문재인은 당장 그 알량한
가짓 평화론 당장 걷어치우고 자해극을 멈추라!!
그 자해극이 너의 목숨도
노리고 있다는걸 명심하고 깨닫길 바란다.

북, 이젠 아예 남한 전체주의 혁명 요구
이거 대한민국 맞나?
대한민국은 결국 접수되고 말았거나 접수되고 있는가?

류근일 칼럼 | 최종편집 2018.05.19


북한 조평통의 리선권이란 자는 남측이 한-미 맥스 선더 연합훈련을 하고,
태영호 같은 사람을 국회의사당에 불러들여 연설을 하게 하는 등,
판문점 선언에 위배되는 행위를 계속하는 한 남측과 마주앉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건 무엇을 뜻하는가?

저들은 판문점 선언을 대한민국 헌법과 기타 규범보다 훨씬 상위에 있는
그 어떤 최고의 무상명법(無上命法)처럼 설정하고서, 자기들의 기준에서 그것에 위배된다고
간주되는 일체의 언동을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건 다시 말해 대한민국을 자기들의 구미에 맞는 전체주의
독재국가로 ‘혁명’ 하라는 소리다.
그런 ‘혁명’을 하라고 문재인 정부에 윽박지르고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그 동안 무엇이 어떻게 됐기에 저들이 문재인 정부 앞에서
저렇듯 오만방자하고 무례하고 고자세로 나오게끔 되었단 말인가?

저들의 입장에선 판문점 선언은 결국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허물라는 것이었나?

이러다간 저들이 맥스 선더 훈련이나 태영호 사례뿐만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우리 헌법에 따라 행하는 일체의 자유주의적-보수주의적-우파적-안보적
의사표현과 실천 활동을 모조리 가벌적(可罰的) 행위로 규정하려 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대한민국과 그 헌법은 자유의 나라요 자유의 헌법이다.
그 자유에 따라 우리 국민은 정부도 비판할 수 있고 북한의 세습 폭정도 당연히 비판할 수 있다.
종편 TV에 출연한 어떤 자칭 평론가는 태영호 공사의 언행에 대해 “자제 해야죠” 어쩌고 지껄였지만,
천만에, 그 반대다. 태영호 공사도 다른 모든 사람들도 얼마든지 자기 양심에 따라 “김정은 나쁘다“고
목청껏 말할 수 있고, 그 누구도 그걸 막을 수 없으며 막아서도 안 된다.

이럼에도 근래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유경식당 종업원들을 북송 운운 하는가 하면, 목숨을 걸고 김정은 폭정을 비판하는
태영호 공사에 대해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욕설들을 해대는 언동이
백주 대낮에 버젓이 횡행하고 있다. 이거 대한민국 맞나?
대한민국은 결국 접수되고 말았거나 접수되고 있는가?

유경식당 종업원들의 귀순과정 초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종업원 여성들의 자유의사 특히 현재 시점의 자유의사다.
그들이 탈출 초기든 지금이든 언제 북송해달라고 했는가? 국정원의 기획 운운도 그렇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생지옥을 탈출하려는 사람들을 안내해 들이는 것은 정보기관 고유의 업무다.
이 본연의 활동을 했다고 그 기관을 나무란다는 것은 대한민국적 기준일 수 없다.

리선권 망언으로 북한의 의도는 명백해졌다.
저들은 지금 문재인 정부와 우리 사회를 길들이고 주눅들이고 버릇 가르치고 하면서
‘남조선의 혁명화’를 직접 선도하고 있다.

이에 대해 문재인 정부는 국민에게 분명하게 보여줘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의 저런 의도에 대해 예스(yes)인가 노(no)인가?
설마하니 예스일라고.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노라고 말하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한 번 확인하고 싶다.
그렇지? 노지?

류근일 / 전 조선일보 주필 /2018/5/18

* 어느 교회에 출석해야 하는가?

 

- 김명도 박사

오늘 우리 신앙인들의 가장 큰 고민은 “어느 교회에 출석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른 교회를 거의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신학교이건 교회이건 할 것 坪� 대개가 마치 무슨 회사를 운영하듯, 비지니스 형태로 운영되고 있어서 교회를 권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미국 San Francisco 근방 Oakland 에 본부를 두고 세계를 상대로 방송하는 Family Radio 라는 전도기관에서는 “교회에 나가지 말고 집에서 별도로 예배를 드리라” 고 종용 하는데 이는 무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는 분명 잘못된 권고이고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 끝날까지 이 세상에 존속하며 성도는 “성도들이 서로 교통하는 것과(communicatio sanctorum)" 이라고 한 사도신경의 가르침처럼 그날이 가까울수록 모이기에 더욱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히 10:25).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리지요. 어느 교회에 출석해야 하는가는 누구와 결혼 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유는 그릇된 교회에 출석하면 영혼이 파괴되기 때문이며, 바르지 못한 신앙은 우리 영혼을 파멸과 멸망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알아야 할것은 Westminster 신앙고백서에서 말하듯이 (21장) 이 세상에는 완전한 교회가 없습니다. "참다운 교회"와 "거짓교회" 가 존재하지만 그 구별은 “거듭난 성도만 모였다” 고 해서 참 교회가 아닙니다. 지상의 교회 (유형교회, 혹은 가시적 교회 church visible) 에는 구원 받은 사람도 있고 구원을 받기는 고사하고 교회를 파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엇으로 “참 교회(true church)와 거짓 교회 (false church)를 식별합니까?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반드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큰 교회라고 해서 진리의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큰 교회를 찾아 예배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치고 참다운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큰 교회는 하나님보다 사람 위주로 목회하기 쉽기 때문에 말씀 선포가 약하다는 것입니다.

“참 교회” 즉 우리가 출석할 교회라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이 구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1. 말씀을 바로 선포해야 합니다.

설교가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마다 목사님들이 소리 높여 설교하지만 문제는 “성경적”인 설교인가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신앙고백서에 입각한 성경적인 교리를 전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여호와의 증인도 모르몬교도 모두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른 교훈을 전하지 않으니 거짓 교회 혹은 이단입니다. “교회”라는 간판을 내 걸고 온갖 비성경적인 말을 하는 교회가 너무도 많습니다. 오늘의 교계는 대개가 그런 곳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요즘 성도가 주의할 것은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옛날 Scotland나 Holland 의 개혁주의 교회들은 한결 같이 말씀 중심, 교리 중심의 설교로 이름 나 있는데 오늘에는 어디서도 그런 <참 교회>를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귀가 가려워서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좋아 하며 따라서 천당 지옥 이야기는 “기분 나빠서” 듣기를 싫어하니 복음이 제대로 전파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그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 보십시오. 개혁주의 설교를 하는 목사는 요즘에 인기가 없지만 그런 교회가 참 교회 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이며 인본주의적 번영신학, 신비주의 세속주의를 전하는 교회는 거짓 교회입니다. 따라서 그런 교회는 출석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작은 교회 중에 말씀을 바로 전하는 교회가 간혹 존재합니다.

2. 성례식을 바로 행하는 교회가 참교회입니다. 이런 교회에 출석해야 합니다.

성례식을 행하는 교회는 복음주의 교회라면 모두 해당됩니다. 그러나 세례를 베풀 때 아직 믿음의 도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행한다든지 성찬식의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나 회개하지 아니한 자에게 성찬식에 참여함을 허락한다든지 하는 일은 명백한 죄입니다. 또 성례식이 없는 교회도 출석해서는 안 됩니다. <참 교회>가 아닙니다. 성례식에는 아무나 참예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을 읽으면 준비없이 성찬식에 참여하면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에서는 성찬의 중요성, 세례의 중요성 등을 강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세례는 구원의 필수 조건이 아니지만 구원 얻은 성도는 세례를 지체할 이유가 없습니다.

3. 권징이 바른 교회가 <참 교회> 이며 이런 교회에 출석해야 합니다.

요즘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권징, discipline"입니다. 대개 교회마다 권징이 약하거나 전혀 없습니다. 징계가 없는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하나의 사교적인 모임에 불과합니다.

바로 권징하는 교회가 과연 몇 개나 됩니까? 미국의 OPC(Orthodox Presbyterian Church, 미국정통장로교단), RCUS(Reformed Church in the United States, 미국개혁교단), RPCNA(Reformed Presbyterian Church in North America, 북미주 개혁장로교단), PRc(Presbyterian Reformed church 장료교 개혁교단) 를 빼놓고는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복음주의>라고 떠드는 미합중국 장로교단PC(USA) 교단도 제217차 총회(2006년 6월20일 Birmingham, Alabama) 에서는 “동성연애자” 에게 “목사 장로 안수”를 허락하는 결의를 하여 많은 지교회가 교단을 탈퇴하는 소동이 벌이지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 앞에 큰 죄입니다. 이런 발의를 한 사람이나 찬성한 사람은 모두 성경을 위반했으니 징계를 받아 마땅하지만 오히려 비호하고 있으니 이런 교회는 권징이 없는 교회이므로 (마태 18장) <참 교회>가 아닙니다. 목사가 이혼하고 목회를 계속해도 권징이 없는 교회나 교단 또 목사가 사기를 범하고, 교인들을 우롱해도 전혀 권징이 없는 교회나 교단은 이미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아니므로 모두 출석해서는 안 될 교회들입니다.

이런 교회들을 계시록에서는 <사탄의 회, Synagogue of Satan>이라고 책망합니다. 성경에 충실하지 않는 교회를 말합니다. 성경에 충실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충실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pure integrity) 입니다. 이것이 <hagios 하기오스>와 <ecclesia 에클라시아>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표준을 갖고 여기 저기 교회를 방문해 보십시오. 등록하지 말고 우선 몇 주를 다녀보면서 목사님의 신학, 인격, 행정을 지켜보신 후 계속 출석 여부를 결정하십시오.

오늘의 현실은 교회가 모두 진리에서 떠난다는 것입니다 신학자들도, 신학교 교수들도, 목회자들도, 교인도 모두 성경적인 진리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사람들의 “귓맛 좋은 말”만 전하기를 원하며 “사람들을 많이 끌어 모으기 위한” 목적으로 여러 가지 비성경적인 일들을 서슴없이 자행합니다. 그러므로 속지 말아야 합니다. 바른 교회를 선택해야 합니다.

(중략)

교회를 선택하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내 영혼을 맡길수 있는 교회, 내 영혼을 책임져 줄 목회자를 만나야 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돌리는 좋은 참다운 교회를 속히 발견하여 만족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분명 있을 것입니다. 엘리야 시대도(왕상 19장) 모두 타락하여 바알에게 팔려간 사람들 같았지만 그래도 신앙을 지킨 7,000 명의 선지자가 있었지요? 지금도 그런 교회가 찾기는 어려워도 분명히 몇 군데 있을 것입니다.

(중략)

- 상담역 김명도 교수 (튤립 교육 선교회, 튤립 신학 연구원)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
글쓴이 : 전상범| 원글보기

출처: 생명나무 쉼터

 

 

 

🌱 건강 10훈 🌱

1. 소육 다채 : 고기는 적게➖ 채소는많이➕

2. 소염 다초 : 소금은 적게➖ 식초는 많이➕

3. 소당 다과 : 설탕은 적게➖ 과일은 많이➕

4. 소식 다작 : 식사는 적게➖ 씹는것은 많이➕

5. 소번 다면 : 번민은 적게➖ 수면은 많이➕

6. 소노 다소 : 성냄은 적게➖ 웃음은 많이➕

7. 소의 다욕 : 옷은 얇게➖ 목욕은 자주➕

8. 소언 다행 : 말은 적게➖ 선행은 많이➕

9. 소욕 다시 : 욕심은 적게➖ 나눔은 많이

10. 소차 다보 : 차 타는 것은 적게➖ 걷는 것은 많이➕

🌱 오늘도 기쁜일 즐거운 일들로만 가득하길
소망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다' 같은 형용사적(adjective), 서술적(descriptive) 정의(definition)를 하지 않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며 '하나님'과 '사랑'을 치환(置換, substitution) 혹은 동일시(identification) 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고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과 존재 방식이시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 개념을 훨씬 뛰어 넘습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녀로 택하신 것도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고(엡 1:4),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도(창 1:27) 그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천지만물을 창조해 주신 것도 독생자(골 1:16)와 택자들을 위해서였습니다(고전 3:21).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므로 저주 아래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보내사,그들을 구속하셨으며, 이 구속이 하나님 사랑의 핵심입니다(요일 4:10, 롬 5:8).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구속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불과(?) 2천 년 전이었고, 각 사람이 구속의 사랑을 입기 위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개인의 생애에서 찰나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기원은 영원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개인의 믿음은 물론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까지도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에 뿌리내려져 있고, 영원 속에 함께 연루돼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 2:13)",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엡 1:4)".


이 영원에서 발원된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은 역사 속의 유한된 사건이나, 피조물들에 의해 훼방을 받지 않습니다. 이는 유한된 것들이 '영원의 영역(territory of eternity)'을 침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영원에서 발원된 하나님 사랑의 기원자는 당연히 하나님이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에 의해 작정되고 경륜됩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오직 부르시는 이(하나님)로 말미암아 되는(롬 9:11)" 구원 경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기원적 사랑은 선악간의 인간 행위에 영향을 받지 않고, 선제적 어떤 것을 용납하지 않는 '무조건성'을 특정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딛 3:5)".


이렇게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이 영원하신 하나님에 기원하고 있음을 아는 지식은, 유한된 피조물에 의해 구원이 훼방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하므로, 사람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북돋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하나님 사랑' 타령은, 대부분 위에 열거한 정의들과 합치되는 경우가 드뭅니다. 사람들이 가진 '하나님 사랑' 개념은 대개 이런 내용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족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지만, 앞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들면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그 반대로 "비록 지금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언젠가 내가 잘못하면 지금 받고 있는 이 사랑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자기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기원을, 영원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아닌 하나님 사랑을 받을만한 선행이 자기에게 있게 된 시점에 둡니다. 이렇게 하나님 사랑을 자신의 행위에 세울 때, 사랑의 영원성은 소멸되고, 제 하기 나름인 조건적인 것으로 전락됩니다.  


나를 사랑해 다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를 사랑하라(마 22:37)"고 요구하신 것은,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했으니 너도 받은 만큼 내게 사랑을 되돌려 달라'는 반대급부적 요구가 아닙니다. 혹은 '피조물인 너는 창조주인 나를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는 절대자의 전횡적 요구도 아닙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갈망'의 표출입니다.


사랑에 대해 오해하기 쉬운 구절 중 하나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잠 8:17)"는 말씀인데, 이는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나님도 나를 사랑한다"는 조건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성경이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에서 그 시작이 하나님이라고 못 박기 때문입니다(요일 4:10). 사실 이 말씀은 서로 주고받는 사랑의 순환 원리를 말한 것입니다. 풀이하자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나를 사랑해 주려므나. 내게도 너의 사랑이 필요하단다"는 뜻입니다. 비유컨대 엄마가 어린 자식에게 "엄마에게 과자 하나 주면, 나중에 엄마가 장난감 하나 사주지!"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엄마가 아이로부터 과자 하나를 받아야만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엄마는 아이가 그에게 과자를 주든 안 주든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 줄 것입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기대하는 것은, 과자가 아니라 과자를 건네주는 사랑스러운 아이의 손길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도 이런 의미입니다.


혹자는 당신 자신이 사랑이시고 스스로 자족하시는 하나님께서 무슨 피조물 인간들을 향해 사랑 타령이실까 싶지만, 사랑이신 하나님이기에 더욱 사랑에 목마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향해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 5:42)"고 하신 말씀에서도, 하나님이 인간의 사랑을 갈구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희귀하여 주님은 사랑을 구걸(?)하십니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아 5:2)" 고 읍소하시는 예수님은, 세상에 마음을 뺏긴 채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놓은 교회(성도)들을 향한 예수님의 세레나데입니다.


독점적인 전부의 사랑을 다오


"마음, 성품,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신 30:6-8)"는 성경 말씀은 일견 현실성 없는 무리한 요구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사랑을 명분으로 우리를 그에게 종속시키려는, 사랑을 가장한 매정한 율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랑이신 하나님이 '오직 나만 사랑해 달라'는 독점적 사랑(exclusive love)의 요청이고, 남겨지거나 유예된 것 없는 전부의 사랑(whole love)을 받고 싶다는 요청입니다.


또한 이는 사랑의 속성을 말한 것이기도 합니다. 참사랑이란 결코 부분적이거나 나눠질 수 없는 독점적 속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다면 "사랑은 나누는 것이니 다른 여성도 사랑하고 나도 사랑하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남편이 다른 여성을 사랑하면 마땅히 질투를 느껴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상을 용납지 않으시고(요일 5:21) 우리에 대해 질투하시는 것도(신 4:24, 아 8:6, 약 4:5), 우리에 대한 사랑의 독점욕 때문이었습니다.


독점적 사랑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이전에, 먼저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그렇게 독점적이고 완전한 전부의 사랑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실 만큼 우리에게 '전부의 사랑(whole love)'을 하셨고, 열방 가운데서 오직 우리만 알 정도로(암 3:2) '독점적 사랑(exclusive love)'을 하셨습니다.


한 순간도 우리를 망각하지 않고(사 49:15), 우리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손바닥에 새겼습니다(사 49:16). 마지막에는 아예 우리와 떨어지지 않으시려고 우리 안에 성령으로 거하십니다(고전 3:16).


이렇게 우리를 향해 독점적이고 완전한 사랑을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그런 사랑을 요청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자신이 우리에게 전부의 사랑, 독점적인 사랑을 주셨기에, 우리에게도 그런 사랑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옛날 우상에게 마음을 뺏겨 하나님께 무관심한 이스라엘을 향해 종일 손을 내밀며 사랑을 구걸하셨던 그 하나님은(롬 10:21), 오늘도 간음하는 여자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성도들을(약 4:4) 향해 나만을 사랑해 달라고 구걸(?)하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1836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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