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주의 (2)
이단경계 2010. 8. 3. 13:26영지주의(Gnosticism)는 고대에 존재하였던 혼합주의적인 종교 운동 중 하나이다. 그리스어로 '신비주의적이고 계시적인 지식, 깨달음'을 가리키는 그노시스(γνῶσις)로부터 따와 그노시스파, 또는 그노시즘이라고도 하며, 이러한 낱말은 주로 이 운동의 반대 세력에 의해서 붙여졌다. 이 종교 운동의 분파들 중 기독교 계통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단순히 기독교인이라 불렀다. 영지주의 운동은 특정한 한 형태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영지주의는 다양한 신앙 체계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우주는 데미우르고스라고 불리는 불완전한 신이 창조했으며, 이 때 데미우르고스는 최고신의 프뉴마를 일부 사용하였다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분파와 무관하게 대체로 일치하는 견해를 보였다. 이 교리에서, 데미우르고스는 종종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의 신과 동일한 신으로 생각되며, 플레로마(Pleroma)나 신성과 같은 상위의 세계 또는 존재와 대비된다.
데미우르고스에 대한 견해는 분파들 사이에 큰 차이를 보였다. 어떤 분파는 데미우르고스가 악의 물질적 화신이라고 주장한 반면, 다른 어떤 분파는 최고신에 비해 불완전한 선한 신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영지주의 운동은 헬레니즘 철학, 유대교, 기독교와 영향을 주고받았다. 영지주의는 이원론적인 종교 운동이었으나, 발렌티누스주의와 같은 후대의 영지주의 운동은 일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졌다. 데미우르고스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함께 이러한 세계관의 다양성은 영지주의 운동에 여러가지 다양한 입장들이 서로 공존하였다는 것을 나타내는 지표로 간주되기도 한다.
영지주의 운동가들은 그노시스를 통해 인간의 참된 기원이 지고한 신성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 깨달음을 통해 인간의 성품 중 영적 요소는 물질계를 벗어나서 자유롭게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영지주의 운동에서는 그노시스를 인간이 물질계로부터 해방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필수적인 요인이자 구원의 수단으로 여겼다.
영지주의 운동가들은 인간을 영적인 인간, 정신적인 인간, 물질적인 인간의 세 부류로 구분하였으며, 이들 세 부류의 사람들 중 영적인 인간과 정신적인 인간만이 그노시스를 가질 수 있으며, 물질적인 인간들은 그노시스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이들은 물질적인 인간들이 물질에 너무 몰입해 있으며, 따라서 더 수준 높은 실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일부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를 지상의 인류를 구원할 수단인 그노시스를 인류에게 가져다주기 위하여, 지복(至福)의 플레로마를 떠나 고통이 가득 찬 물질계에 탄생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는 희생을 한 존재로, 지고한 존재의 물질적 화신이라 여겼다. 노쯔림과 만다야교 등의 다른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를 "거짓 메시아"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예수가 세례자 요한이 위탁하여 맡긴 가르침들을 타락시켰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가르침에서는 예수가 아니라 마니와, 아담과 하와의 셋째 아들인 셋을 구세주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많은 학자들이 영지주의 운동은 기독교의 한 분파로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 탄생 이전, 즉 서력기원의 몇 세기 전에도 영지주의 체계의 자취가 남아 있다는 다른 학설이 제기되었다. 영지주의 운동은 3세기에 이르기까지 로마 제국과 고트족의 점령지, 또 사산 조 페르시아의 영토 등, 지중해 세계와 중동으로 전파되고 발전하였다. 그러나 니케아 공의회와 여타 다른 칙령들을 통해 로마 가톨릭교회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파괴되는 등의 일이 있었던 4세기에는 가톨릭교회의 탄압으로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 시기에 영지주의 문헌들의 거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사라졌으며, 영지주의 반대자들이 영지주의를 논박하기 위한 문헌의 근거 자료로 소수의 단편들만이 살아남았다.
나그함마디 문서가 발견된 1945년까지 영지주의 연구자들은 이러한 자료들을 토대로 추론에 근거한 연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4세기 이후에는 많은 수의 영지주의자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였으며, 남아 있는 유럽의 영지주의자들도 알비 십자군의 활동으로 인해 그 수가 크게 감소하였다. 그러나 소수의 만다야교 공동체들이 현대에도 남아 있다. 영지주의 사상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있었던 많은 신비주의적 운동의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 중 일부는 자신들을 이전에 있었던 영지주의 운동의 부활 또는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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