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44) 요셉의 은잔
 
20년이 더 지난 다음 한 상(床)이 아니고 요셉 따로 열 한 형제 따로 차린 상이었지만 열 두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서 그렇게 다 모였습니다. 요셉의 정체를 까맣게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열 두 형제가 다 모인 줄도 모른 채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습니다. 요셉은 베냐민에게 다른 형제의 다섯 배나 주면서 애틋한 사랑을 나타내었지만 형제들이나 베냐민은 요셉이 왜 그러는지 그 마음을 알 턱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해후 아닌 해후, 만찬 아닌 만찬, 잔치 아닌 잔치를 마치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서로의 마음도 모르는 채 말입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그렇게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마음도 모르는 채 주님을 떠나 세상 가운데로 돌아가는지요.

요셉은 그 청지기에게 명하여 양식을 각 사람의 자루에 가득 채우고 그들이 가지고 온 돈도 도로 그 자루에 넣고 베냐민의 자루에는 자신의 은잔을 몰래 넣게 합니다. 그리고 이른 아침에 그들을 떠나보냅니다. 그리고 사람을 뒤따라 보내어 왜 은잔을 도적질하여 가느냐고 누명을 씌워 다그치고 자루를 뒤져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을 찾아낸 다음 그들을 도로 끌고 옵니다. 그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도적질한 죄를 뒤집어쓰고 요셉의 집으로 되끌려 온 것입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그토록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은잔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이기도 하며 자신의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집어넣어 보낸 것입니다.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마시지 않을래? 네가 떠나가면 나는 누구와 마시겠느냐? 내가 이제 누구와 즐거워하며 잔을 나누겠느냐? 네가 떠나가면 나는 이 은잔이 필요 없다. 그러니 이 은잔을 가지고 가라.” 그런 마음이었을까요?

복음서(마26, 막14, 눅 22장)에는 주님이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과 나눈 마지막 성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떡을 떼어 나누어주시며 ‘이것이 내 살,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라’ 하셨고, 잔을 나누시면서 ‘이 잔은 내 피, 새 언약’이라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가룟 유다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3장에는 유다가 떡 조각을 받고 그 자리에서 나갔다고 기록되어 있어 유다는 그 자리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다음 주님은 남은 제자들에게 여러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26:29)

보십시오, 요셉의 앞에 앉아 함께 마신 형제들이 몇 명입니까? 주님과 함께 피의 언약의 잔을 나눈 제자의 수가 몇입니까? 똑같이 열 한 명입니다. 이런 것까지 일치하는 것이 어찌 놀랍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요셉이 자신의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넣은 것은 자신의 마음, 자신의 사랑, 자신의 기쁨을 넣은 것입니다. 다시 만나기 전에는 다시 즐겁게 마실 일이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두고 떠나시면서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신 것은 주님의 마음, 주님의 사랑, 주님의 심장, 주님의 생명을 우리의 자루에 넣으신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베냐민은 요셉이 그의 가장 아끼는 은잔을 자기의 자루 속에 넣은 것을 모르는 채 떠나가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은잔을 훔친 도적이 되어 도로 끌려 왔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모르는 채 세상으로 돌아간다면 주님의 잔을 훔친 도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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