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3장) 누구인지 모른다면

젊은 시절 주님을 몰랐을 때 성경은 고리타분한 책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호기심에서 창세기 1장 첫머리를 읽어보았을 때 느낀 것은 무슨 종잡을 수 없는 황당하고 괴기스러운 이야기라는 것이었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고? 무슨 마술이야?" 그런데 나중에 어떤 분이 성경보다 더 재미있는 책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제가 예수 믿고 나서 다시 처음부터 읽어나간 성경은 제가 읽은 제일 재미있는 소설책 보다 더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쓰신 대하소설을 넘는 장대한 초대하소설이요 우주처럼 장엄한 희곡이며 어떤 사랑의 편지보다도 더 강렬한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요셉이 미워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세겜과 도단까지 먼 길을 찾아온 그를 죽이려다가 애굽의 노예로 팔아버린 형제들, 그 형제들로 인하여 타국에 끌려가 종이 되고 감옥에 갇히는 갖은 고생과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는 천하제일의 권세의 자리에 오른 요셉의 드라마틱한 삶, 그리고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닥친 극심한 가뭄과 기근, 그 형제들이 애굽총리가 된 요셉 앞에 나타나고, 그가 요셉인 줄은 꿈에도 모르는 형제들과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동생 베냐민을 데리고 오도록 만드는 미움과 사랑의 줄다리기, 이러한 소설 아닌 소설의 줄거리와 구성은 어떤 소설가나 극작가도 흉내 내지 못 할 것입니다.
 
야곱이 기근 속에서도 죽어도 못 보내겠다던 베냐민을 결국 포기하고 형제들에게 딸려 보냄으로 드디어 요셉은 베냐민을 만나보게 됩니다. 요셉은 베냐민이 온 것을 보고 그들을 모두 자신의 집에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정체를 숨긴 요셉의 의도를 알지 못 하는 형제들은 지난 번 곡식자루에 넣어져 있던 돈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며 그 자리에 나온 요셉 앞에 예물을 드리고 엎드려 절합니다.
 
요셉은 여전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너희 아버지 노인이 평안하시냐, 생존하셨느냐.’고 안부를 확인합니다. 베냐민을 가리켜 ‘이 아이가 너희의 작은 동생이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베냐민에게 ‘소자여, 하나님이 너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고는 아우 베냐민을 인하여 마음이 타는 것을 누르지 못 하고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나옵니다. 그리고 그렇게 형제들의 연회, 식사자리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요셉 따로, 형제 따로, 아직 연합되지 못 하고 하나 되지 못 한 잔치의 모습으로 말입니다. 만나기는 했으나 아직 참으로 만나지는 못 한 채 말입니다.
 
그들은 식사자리에서 요셉의 앞에 나이 순서대로 앉혀집니다. 그들을 모두 알지 못 하고서야 어찌 열 한 형제들을 모두 나이 순서대로 틀림없이 앉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애굽 총리의 정체를 알지 못 하는 그들은 이 일을 다만 이상하게 여길 뿐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그들에게 식물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의 다섯 배나 주었습니다. 이 역시 베냐민에게만 왜 특별히 그러는지 그들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요셉의 앞에 앉아서 함께 즐거워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즐거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아시는데 내가 주님을 모른다면 즐거워하는 것도 참 즐거워하는 것이 아닐 터이요 주님과의 만남도 참 만남이 아닐 것입니다. 요셉이 타는 듯 하는 마음으로 급히 안방을 찾아 울고 나왔어도 그 형제들이 몰랐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모른다면 주님의 마음이 어떠신지,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며 애태우며 울고 계신지도 까맣게 모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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